문제의 소재
1. 관계 초기의 인식: 고려=고구려
2. 관방의 ‘교정된’ 인식: 고구려 대신 기자조선
3. 재야의 여전한 인식: 고려=고구려
4. 절반의 성공: 고구려에 앞서 기자조선
맺음말
문제의 소재
1259년 겨울, 30년 항쟁 끝에 자신을 찾아온 고려의 태자, 즉 훗날의 원 종(元宗)을 만난 자리에서 쿠빌라이는 고려를 일컬어 “당(唐) 태종(太宗)이 친정(親征)하고서도 복속시키지 못한” 나라라고 하였다.1)
1) 고려사 권25, 元宗 원년(1260) 3월. “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즉 고려의 역사 에 관해 고구려를 언급했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이 발언을 두고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쿠빌라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이 해했다.”
실제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와 918년에 건국한 고려가 서로 다른 나라라는 ‘사실’과, 그리고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는 ‘통념’ 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보기에 가장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 디까지나 현대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명제는 어떠한가.
“쿠빌라이는 고려와 고구려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설마’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쿠빌라이가 ‘야만적이고’ 덜 교육받은 몽골인이라고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이어질 수도 있 다.
그러나 ‘설마’가 아니다.
그보다 약 200년 앞서 1082년, 송나라의 증공 (曾鞏)도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 바 있다.
“주몽(朱蒙)에서 장(藏, 즉 보장 왕)까지 헤아릴 수 있는 것으로, 하나의 성씨로서 900년 동안 21명의 군주 를 전하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그 후 다시 국가를 세웠는데 이름과 세차 (世次), 흥망의 본말, 그리고 왕건(王建)이 흥기한 사정에 대해서는 모두 고 찰할 수 없습니다.”2)
고구려가 한 번 망했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나타났으 니,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의문이다.
증공은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 家)’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자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가운데 한 명이 었으며, 물론 한족(漢族)이었다.
제국 경영에 바쁜 대칸이라서,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몽골족이라서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중국’에 제 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
2) 續資治通鑑長編 권323, 元豐 5년(1082) 2월 丁卯. “蓋自朱蒙至藏可考者, 一姓 九百年, 傳二十一君而失國. 其後復自爲國, 而名及世次・興廢之本末, 與夫王建之 所以始, 皆不可考.”
3) 송의 史書에서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한 정치체로 이해하고 서술 했던 점에 대해서는 정동훈, 2021(a) 「고려는 어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인식됐을까」 역사와 현실 121, 한국역사연구회 참조.
그렇다면 고려인들은 이러한 ‘오해’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
고려의 항복 사절을 맞이한 쿠빌라이가, 자신이 당 태종보다 낫다며 우월감 을 만끽하는 데다 대고, 원종이 “우리는 고구려가 아닙니다.”라고 굳이 초 를 칠 필요까지야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지나 몽골 측에서, 그렇게 강력한 나라가 일본 하나 정벌하지 못하느냐고,4) 혹은 카단[哈丹]과 같은 작은 적의 침입 하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느냐고 되묻는다면 어떨까? 5)
혹은 고려는 대대로 중국과 맞서 싸워온 강성한 나라라며 견제구를 던진다 면 어떨까? 6)
4) 고려사 권101, 李藏用
5) 고려사 권30, 충렬왕 17년 2월 丁亥. “世子令將軍吳仁永, 奏帝曰, ‘哈丹陷北界 諸城.’ 帝曰, ‘爾國, 唐太宗親征, 尙不克, 又於我朝初, 未歸附, 我朝征之, 亦未易 捷. 今此小寇, 何畏之甚耶.’”
6) 예컨대 몽골제국은 고려 측에 무기나 말을 판매하는 일을 금지하기도 했다. 고려 사 권27, 원종 12년(1271) 3월 丁丑
군사 강국 이미지가 고려에 마냥 도움이 되었을 리 만무하다.
그때야말로 “우리는 고구려와 다른 나라입니다.”라고 손사래를 쳐야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러했다.
몽골 측의 인사들은 오랫동안 고려를 과거 고구려와 동일한 국가라고 인식하였다.
고구려가 중국인들에게 각인시킨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 탓인지, 한 번 자리잡은 고정관념이 고쳐지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은 고려의 군사력을 동원하려 하거나 혹은 고려를 군사적으로 견제하 려 할 때에 고구려의 기억을 소환하였다. 여기에 부담을 느낀 고려 측은 기 회가 닿을 때마다 자신과 고구려의 관계를 부정하였다.
고려의 꾸준한 어필, ‘역사 수업’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덕분이었는지, 적어도 몽골제국 중앙 정부를 운영하는 이들은 ‘오해’를 풀었다.
그러나 고려에서 개설한 역사 수업의 수강생들은 어디까지나 고려 지식인들과 접촉 한 인물들, 대도(大都)에서 활동한 관료들과 그 주변에만 한정되었다.
고려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해설을 듣지 못한, 그래서 ‘최신 지식’을 입수하지 못한 야인, 즉 재야의 학인(學人)들, 특히 강남(江南)의 문인들은 여전히 고려와 고구려를 분간하지 못했다.
몽골제국 내에서도 화북(華北)의 역사 이해와 강남의 그것, 관방(官方)의 역사학과 재야의 역사학 사이에 차이가 생 겨난 것이다.
뜻밖에도 최종 승자는 후자였다.
명이 ‘북벌(北伐)’에 성공하여 대도의 몽골 황실을 몰아내자, 제국의 중심은 남경(南京)으로 바뀌었다.
자연히 학 계의 중심 역시 강남으로 옮겨졌다.
여기서 ‘중심’이란 얼마나 많은, 얼마 나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식 해설을 내릴 권위를 누가 가지는지가 관건이었다.
강남의 학인들, 100년 간 소외되었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정사(正史), 즉 원사(元史)를 편찬하 면서 그들이 가진 정보가 공식 해설로 굳어져버렸다.
따라서 원사의 고 려전(高麗傳)도 고려와 고구려를 등치시켰다.
이 글에서는 이상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당시 몽골제국 인사들의 고려 역사에 관한 발언, 거기서 엿볼 수 있는 고려의 역사에 관한 그들의 이해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일반적인 연구 경향에서라면 ‘몽골 지식인의 고려 인식’이랄까, ‘몽골제국의 고려 역사 인식’ 등과 같은 제목으로 다루어질 내용일 것이며, 실제로 관련된 연구가 여럿 제시된 바 있다.7)
이 글에서는 약간만 언급할 예정이지만, 이러한 몽골 측의 인식에 대응한 고려의 역사 편찬,8) 더 넓게는 고려 후기의 역사 인식에 대한 연구9)는 일찍부터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쌓아왔다.
7) 김인호, 2003 「元의 高麗認識과 高麗人의 對應 - 法典과 文集내용을 중심으로 -」 韓國思想史學 21, 한국사상사학회 ; 박진석, 2005 「중국 국내외 고서에 기재된 고구려의 역사적 지위에 관한 시론」, 厲聲・朴文一 主編, 고구려 역사문제 연구 논문집, 고구려역사재단 ; 박인호, 2007 「전통시대 중국 지리서에 나타난 고구려 인식」 韓國史學史學報 15, 한국사학사학회 ; 이정란, 2009 「13세기 몽골제국의 고려관」 한국중세사연구 27, 한국중세사학회
8) 金泰永, 1981 「歷史學」, 국사편원회 편, 한국사 8, 고려후기의 사회와 문화, 국 사편찬위원회 ; 許興植, 1988 「閔漬의 詩文과 史學」 敎育硏究誌 30, 경북대학 교 역사교육과 ; 邊東明, 1991 「鄭可臣과 閔漬의 史書編纂活動과 그 傾向」 歷史學報 130, 역사학회 ; 한영우, 1994 「고려시대의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한국 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 창작과 비평사 ; 閔賢九, 1996 「閔漬」 한국사시민강좌 19, 一潮閣 ; 김상현・탁봉심・채상식・유경아, 1996 「역사학」,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1,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 채웅석, 2003 「원 간섭 기 성리학자들의 화이관과 국가관」 역사와 현실 49, 한국역사연구회 ; 박종기, 2011 「원 간섭기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 한국중세사연구 31, 한국중세사학회 ; 박종기, 2012 「원 간섭기 김취려상의 형성과 當代史 연구」 韓國思想史學 41, 한국사상사학회
9) 金哲埈, 1975 「益齋 李齊賢의 史學에 對하여」 東方學志 8, 연세대학교 국학연 구원 ; 金哲埈, 1976 「蒙古壓制下의 高麗史學의 動向」 考古美術 129・130, 한 국미술사학회 ; 金相鉉, 1985 「高麗後期의 歷史認識」, 韓國史硏究會 編, 韓國 史學史의 硏究, 乙酉文化社 ; 정구복, 2014 (개정증보) 韓國中世史學史(Ⅰ), 경인문화사 ; 최봉준, 2008 「이제현의 성리학적 역사관과 전통문화 인식」 韓國 思想史學 31, 한국사상사학회 ; 최봉준, 2013(a) 14세기 고려 성리학자의 역사 인식과 문명론,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 최봉준, 2013(b) 「李穀의 箕子 중심의 국사관과 고려・원 典章調和論」 한국중세사연구 36, 한국중세사학회 ; 도 현철, 2021 「역사관과 경 중시의 성리학」 이곡의 개혁론과 유교 문명론, 지식산 업사
선행 연구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나, 이 글의 접근법은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고려 지식 인들의 몽골 인식 문제도 마땅히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매우 충실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을뿐더러,10) 실제 고려 측이 상대를 어떻게 인식했는지와 상대에게 어떻게 자신의 역사 를 이해시키고자 했는지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 직접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10) 대표적으로 채웅석, 2003 앞의 논문 및 이익주, 2003 「14세기 유학자의 현실인식 과 성리학 수용과정의 연구」 역사와 현실 49, 한국역사연구회 등을 참조.
먼저 제1장에서는 13세기 후반, 양국이 본격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어가 던 시점에서 몽골제국의 당국자들이 고려와 고구려를 동일한 역사공동체로이해하고 있었던 흔적을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다.
제2장에서는 고 려가 여기에 적극 대응하여 고구려 대신 기자(箕子)를 자신의 시원(始原)으 로 위치시키고자 했던 노력, 그리고 그것이 반영되어 몽골 측 관방의 인식 이 어느 정도 ‘교정’된 모습을 살펴보겠다.
제3장에서는 고려인들과의 접촉 면이 넓지 않았던 당시 재야, 특히 강남의 문인들이 여전히 고려와 고구려 를 동일시하였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자료를 검토해보겠다.
마지막으로 제 4장에서는 고려의 ‘역사 공정’이 절반의 성공을 거두어, 원 대 후기에 편찬 된 주요 사서에서 고려의 연혁을 서술하면서 기자와 고구려를 동시에 언급 하는 것으로 귀결된 과정을 확인해보겠다.
1. 관계 초기의 인식: 고려=고구려
1230년대 말, 그러니까 몽골이 본격적으로 고려 침공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당시 우구데이의 정권에서 활약하던 야율초재(耶律楚 材)는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지어준 시에서 고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 했다.
“백제(百濟)가 번(藩)을 칭하며 새로 내부(內附)하여, 수레를 달려 해 문(海門)의 동쪽에서 왔구나. (중략) 귀밑머리 희끗희끗 티끌이 눈에 가득한 데, 동쪽 사람들은 염공(髯公)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 같구나.”11)
11) 耶律楚材, 湛然居士文集 권7, <和高麗使 三首>. “百濟稱藩新內附, 馳軺來自海 門東. (중략) 兩鬢蒼蒼塵滿眼, 東人猶未識髯公.” 張東翼, 1997 元代麗史資料集 錄, 서울대학교 출판부, 238쪽에서 재인용. 이하 이 글에서 활용할 원 대의 중국 자료는 거의 대부분 張東翼, 위의 책 및 이근명 외 엮음, 2010 송원시대의 고려 사 자료 2, 신서원에서 확인하였다. 다만 원문을 직접 찾아볼 때 검토한 판본이 다른 경우가 있어, 자료의 卷數나 字句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張東翼, 이근명 외 선생님들의 지난했을 작업이 토대가 되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작은 지면이나마 빌려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하 본문에서 일일이 전거를 밝히지 못한 점은 미리 양해를 구한다.
파괴적인 몽골제국의 핵심부에서 중화 문명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던, 한자(漢字)를 사 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중서령(中書令)’이라는 전례가 드문 최고위직이 자, 우구데이의 최고위 조언자임을 자칭했던 야율초재는12) 고려에서 온 사 신이 자신(髯公)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쿠빌라이의 한인(漢人) 조언자로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학경(郝經) 역시 고려에 대한 지식을 뽐낸 적 있다.13)
1259년에 고려의 태 자가 쿠빌라이를 찾아와 만나는 장면을 그린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 였다.
“고려는 나라를 세운 지 1천여 년, 高麗立國千餘年,
산을 넘고 바다로 이어져 동북쪽 구석에 있네. 跨山連海東北偏.
문물과 제도는 한나라와 당나라를 숭모하여, 文物制度慕漢唐,
의관과 예악이 중원과 같네. 衣冠禮樂如中原.
일찍이 양제를 넘어뜨리고 태종을 곤궁에 빠뜨렸으며, 曾蹶煬帝困太宗,
험한 데 기대고 요충지를 지키며 더더욱 정예롭고 용맹하네. 拒險守要尤精雄.
요동과 갈석을 굽어보고 압록수를 마시며 瞰臨遼碣飲鴨綠,
큰바람 불어 동해의 동쪽으로 나가는구나. 風颿轉出東海東. (중략)
몇 번이나 송을 섬기고 요・금을 섬겼으나, 幾回事宋事遼金,
이번 같지 않으니 원통함과 괴로움이 깊겠구나. 不似今畨寃苦深.14)
12) 우구데이 정권에서 耶律楚材의 역할에 대해서는 杉山正明, 1996 耶律楚材とそ の時代, 東京: 白帝社 참조.
13) 郝經은 潛邸 시절부터 쿠빌라이를 보좌하다가 그의 즉위 직후 南宋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15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元史 권157, 郝經
14) 郝經, 陵川集 10, 歌詩, <高麗歎>
학경은 고려를 가리켜 나라를 세운 지 1천여 년에, 수 양제와 당 태종을 물리친 나라, 즉 고구려와 같은 나라라고 인식하였다.
원종을 만났을 때 쿠 빌라이가 고려를 “당 태종이 친정하고서도 복속시키지 못한” 나라라고 했 던 것은 학경과 같은 한인 조력자들이 알려준 정보에 입각한 것이었을 것 이다.15)
위 시에 나타난 학경의 고려 역사 인식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인 1261년에 이장용(李藏用) 등을 만난 자리에서 내놓은 사천 택(史天澤)의 발언은, 그 사이 그가 고려에 대해 조금 더 공부했음을 잘 보 여준다.
승상(丞相) 사공(史公)이 먼저 묻기를,
“(중략) 군사를 관장하는 자는 누구이며, 관호(官號)는 무엇인가.” 하니 참정(參政) 이장용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관장하는 자는 김씨(金氏)입니다.” 하였다. 사공이 말하기를, “어째서 막리지(莫 離支)라고 이름하지 않았는가.” 하니, 말하기를, “이 이름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 습니다.” 하였다.16)
위 기록은 1261년에 고려의 세자, 즉 훗날의 충렬왕이 이장용 등과 함께 연경행성(燕京行省)을 방문했을 때 몽골 측의 고위 관료들과 만나 나눈 문 답의 한 구절이다.17)
15) 김인호, 2003 앞의 논문, 127쪽
16) 王惲, 中堂事記 下, “丞相史公首問曰, ‘(중략) 掌兵者何人, 官號何名.’ 參政李 藏用對曰, ‘掌兵者金氏.’ 史曰, ‘豈復猶以莫離支爲名乎.’ 曰, ‘此名廢去已久.’”
17) 中堂事記에 언급된 이때의 만남 장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고명수, 2016 「고 려 원종대 이장용의 대몽 외교활동」 한국인물사연구 25, 한국인물사연구회, 105~107쪽 참조.
‘승상 사공’이란 쿠빌라이 휘하의 한인 관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사천택을 말한다.
그가 고려에서 군사를 관장하는 직 책의 이름이 막리지가 아니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막리지는 지금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고구려 말기에 군사권을 포함한 국사 전반을 통칭한 관직의 이름이다.18)
즉 사천택은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역사공동체로 이해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천택, 혹은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이름 모를 참모는 막리 지라는 관직명을 어디에서 보았을까?
그들이 읽었을 법한 자료 가운데 막 리지라는 명칭이 언급된 대표적인 책은 통전(通典)이다.
통전에서는
“동부대인(東部大人) 개소문(蓋蘇文)이 그 왕 고무(高武)를 시해하고 그의 조카 장(藏)을 세워 군주로 삼고서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이 관직은 선 (選)과 병(兵)을 총괄하는 자리로 이부상서(吏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다.”라고 하였다.19)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보자.
고려가 귀부한 직후, 쿠빌라이와 그의 조력 자들은 고려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했다.
과거 30년의 전쟁 동안에 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혹은 그러지 못했던 업무를 새로 떠맡게 된 것이 다.20)
18) 노태돈, 1999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 通典 권182, 邊防 2, 東夷 下, 高句麗. “東部大人蓋蘇文弑其王高武, 立其姪藏 爲主, 自爲莫離支. 此官總選・兵, 猶吏部・兵部尙書也.”
20) 정동훈, 2020 「동방왕가의 사업에서 쿠빌라이의 사업으로」 韓國史硏究 191, 韓 國史硏究會
그들은 당초 고려와 고구려를 구별하지 못했다.
단지 수・당을 괴롭 혔던 동방의 군사 강국이라는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거기 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으로 고려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그들은 일단 손에 닿는 책을 꺼내 읽었다.
당시에 두루 활용되던 유서(類書), 게다가 목 차에 ‘고구려(高句麗)’가 등장하여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통전이 첫 번 째 참고문헌이 되었다.
마침 그때 고려는 무신 정권 시대로, 무신이 군사는 물론 국정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들이 통전을 읽 고 알게 된, 연개소문 정권 하의 고구려의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
실제 전투를 통해 고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확인한 점21) 역시 고려가 곧 고구려라 고 인식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경과 사천택의 언급 속에서 고구려는 그다지 ‘좋은’ 나라가 아 니었다.
학경의 시에서는 먼 옛날 고구려가 수와 당을 괴롭혔듯이 현재의 고려 또한 지난 50년 동안 “신하를 칭하고 인질을 보냈으나 군대를 물리지 않”다가 “고려가 모조리 도륙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제야 마지못해 항복 한 나라였다.22)
사천택의 위 질문은 “너희 나라의 바다에 신복(臣服)한 곳 은 모두 몇 군데인가? 군사들은 정벌되었는가?”라는 물음 뒤에 나온 것이 었다.23)
출륙환도를 미루고 있는 고려에 여전히 항복하지 않은 군대가 남 아 있음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고려의 항복을 아직 완전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 가운데 나온 발언인데,24) 고구려의 기억, 고구려의 이미지는 고려에 대한 불신을 한층 강화시켜주는 소재였다.
21) 이정란, 2009 앞의 논문, 103쪽
22) 郝經, 陵川集 10, 歌詩, <高麗歎>. “稱臣納質兵不退” “要把高麗都殺盡”
23) 王惲, 中堂事記 下, “丞相史公首問曰, ‘汝國海中所臣者凡幾處. 軍旅有無見征 戍者.’”
24) 이정란, 2009 앞의 논문, 104쪽
학경이나 사천택 모두 쿠빌라이의 등극 이전부터 그를 돕던 관료들이었 다.
그러나 아직 고려의 지식인들과 접촉하거나 고려에 대해 깊이 알아보 지 못한 상태에서 내놓은 언급들만 자료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러한 몽골 측의 오해, 즉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시하는 시각에 대해 고려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일단 위의 대화를 다시 살펴보면 이장용은 막리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답하였다.
과연 이장용이 막리지라는 이름을 들어봤을지 자체가 의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지(職官志)에는 고 구려의 관직에 대해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여 명칭만을 나열했을 뿐으로, 막리지라는 이름은 신당서(新唐書)를 인용하여 언급만 하고 자세히 설명 하지 않았다.25)
이 명칭은 <고구려본기>에는 자주 등장하지만 사천택의 물음과 같이 그것이 군사를 관장[掌兵]하는 직책임은 명시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막리지를 해설하여 “당에서 병부상서로서 중서령의 직을 겸한 것 과 같다.”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 열전에 짤막하게 등장할 뿐이니,26) 삼국 사기를 여간 꼼꼼히 읽지 않은 다음에야 익숙한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 자세한 대화 내용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장용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답 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고려는 옛날의 고구려와는 다른 나라라고. 따라서 과거의 고구려가 수・당을 곤란하게 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고려는 몽골 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자면 현재의 고려를 고구려와는 다른 역사공동체, 다른 과거를 가진 정치체라고 선전해야 했다.
이때 소환된 것이 기자였다.
몽골과의 관계에서 고려와 기자를 연결지은 사례로 가장 먼저 자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1269 년의 일이다.
고려 국내에서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하고, 이 사실을 원종 이 몽골 측에 알리며 구원을 요청하는 등 급박한 사태가 벌어졌다.
안 그래도 고려의 귀부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몽골 조정에서는 대고려 정책의 방향을 두고 강경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때의 발언을 들어보자.
추밀원(樞密院)에서 고려를 정벌하는 일에 대해 상주하였다.
“처음 5월에 마형 (馬亨)이 보고하기를, ‘신 마형이 삼가 황제 폐하께 상주합니다. 고려는 본래 기 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과 진(晉)이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비록 내조(來朝)하였으나 그 마음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중략) 전 추밀원 경 력(經歷) 마희기(馬希驥) 또한 말하기를, 지금의 고려는 옛날 신라・백제・고구 려 3국을 병합하여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27)
25) 三國史記 권40, 職官 下
26) 三國史記 권49, 蓋蘇文. “自爲莫離攴.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27) 元高麗紀事 至元 6년(1269), 11월 2일, “樞密院奏議征高麗事, “初, 五月間, 馬亨呈, ‘臣亨謹奏皇帝陛下. 高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晉皆爲郡縣, 今雖來朝, 其心 難測. (중략) 前樞密院經歷馬希驥亦言, 今之高麗, 乃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併 而爲一也.’”
원고려기사에 실린 위 기사에 따르면 1269년 당시 추밀원의 관원이었 던 마형은 고려의 역사를 두고 “기자가 책봉 받은 땅”이라고 했고, 마희기 는 “옛날 신라・백제・고구려 3국을 병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라고 했다.
고려를 기자와 연결시키는 언설은 일찍이 후당(後唐)에서 고려 태조(太 祖)를 책봉한 문서에서도 확인되며,28) 고려 스스로 중국 왕조와의 관계에 서 때때로 기자와의 관련성을 언급한 일도 있었다.29)
또한 숙종(肅宗) 때에 는 우리나라 교화(敎化)와 예의(禮義)의 시작으로서 기자를 거론하며 그를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30)
또한 당시 중국인들이 널리 참고했을 법한 자료 가운데서라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 첫머 리에서 “고려의 선조는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 서여(胥餘)를 조선 (朝鮮)에 봉한 것이다.”라고 한 일이 있다.31) 그러나 고려도경의 해당 부 분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한 거론 이후 곧바로 고구려를 언급하였으며, 당에 의해 고씨(高氏)의 고구려가 한 번 멸망했으나 당 말에 이르러 회복하였고 현재의 고려로 이어진다는, 당시에 송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고구려와 고려가 같은 역사공동체라는 인식을 그대로 담았다.32)
28) 고려사 권1, 태조 16년(935) 3월 辛巳.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 蕃之跡, 宣乃惠和.” 29) 예컨대 文宗 9년(1055) 고려의 都兵馬使가 契丹의 東京留守에게 보낸 서한에서 는 “우리나라는 기자의 나라를 계승하여 鴨江으로 경계를 삼아왔습니다(當國襲箕 子之國, 以鴨江爲疆.).”라고 한 바 있다. 고려사 권7, 문종 9년 7월 丁巳
30) 고려사 권63, 禮志 5, 雜祀. “我國敎化禮義, 自箕子始, 而不載祀典, 乞求其墳 塋, 立祠以祭.” 고려 시대의 기자 인식에 대한 최근의 종합적인 연구로는 조원진, 2015 「고려시대의 기자 인식」 韓國史學史學報 32, 2015 한국사학사학회 참조.
31) 宣和奉使高麗圖經 권1, 建國, 始封. “高麗之先, 蓋周武王封箕子胥餘於朝鮮.”
32) 정동훈, 2021(a) 앞의 논문, 241~244쪽
한편 마희기가 말한, 삼국을 병합한 것이 현재의 고려라는 언급은 무엇 에 근거한 것일까.
지금이야 당연한 상식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당시에 그 가 손쉽게 입수할 수 있었던 중국 측의 유서나 정서(政書) 어디에도 서술되 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 발언은 책에서 읽은 데 근거한 것이 아니다.
고려 측의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이 아닐 수 없 다. 마희기에게 이 정보를 전달한 사람은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나라가 아 니라,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을 병합한 나라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요컨대 1259년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을 시작으로, 몽골 측에서 고려를 상대한 이들은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라고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은 현실의 고려에 대해 불신을 강화시키는 소재가 되었다.
고려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 인식을 교정하려 하였다.
첫째, 고려는 고구려와 다른 국 가라는 것,
둘째, 고구려에 앞서 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
즉 고려는 고구 려를 대신해서 기자를 내세우며 자신에게 씌워진 군사 강국 이미지에서 탈 피하고자 하였다.
기자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고려는 고구려가 가진 호전적인 인상을, 기자를 통해 연상되는 중국과의 친연성, 문명 교화 등의 이미지로 대체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노력은 일회적일 뿐이었으 며, 고려의 선전을 접할 수 있었던 인물들 역시 몽골 측의 핵심 관료들 일 부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 지식인들의 인식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더 확실 한 근거, 그리고 더 넓은 접촉이 필요했다.
이 과제는 이어지는 충렬왕 대 로 넘어갔다.
2. 관방의 ‘교정된’ 인식: 고구려 대신 기자조선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시하는 몽골인들의 인식을 교정하기 위해 고려 측 이 벌인 노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 즉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많은 이들을 만나 이를 알리는 것, 즉 몽골 지식인들과 널리 접촉하는 일이 었다.
첫 번째 작업은 요컨대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294 년 무렵에 정가신(鄭可臣)이 편찬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이를 증보한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그리고 이어진 본국통감강목 (本國通鑑綱目) 등이 그것이다.33)
기존 연구에서 당대사(當代史) 연구라고 종합했던 활동이 그것이다.34)
그리고 고려는 이들 사서를 곧바로 몽골 측 에 보내 널리 뿌렸다. 설정된 독자 가운데 큰 부분이 몽골 측 지식인들이었 던 것이다.
여기에는 일단 몽골 측의 요구가 있었다.
불과 반세기 남짓 만에 유라시 아의 수많은 부족, 민족, 정치체, 국가들을 복속시킨 몽골제국은 그들 각각 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몽골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왔는지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몽골제국 초기의 역사학이란 이를 정리해가는 과정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는 남송(南宋)을 병합한 직후인 1276년에 평 금록(平金錄), 평송록(平宋錄)과 함께 제국신복전기(諸國臣服傳記)라는 책을 편찬할 것을 지시하였다.35)
얼마 후인 1278년, 마침 충렬왕이 친조(親 朝)하여 대도에 머물고 있던 시점에 중서성(中書省)은 고려 측에 역대 사적 (史籍), 신복(臣服)한 날짜 등을 기록해서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36)
33) 이들 사서의 편찬 배경과 그 의의에 대해서는 邊東明, 1991 앞의 논문 및 閔賢九, 1996 앞의 논문 등을 참조.
34) 閔賢九, 1996 앞의 논문 ; 박종기, 2011 앞의 논문 등
35) 元史 권9, 世祖 至元 13년 6월 戊寅, “詔作平金・平宋錄及諸國臣服傳記, 仍命 平章軍國重事耶律鑄監修國史.”
36) 고려사 권28, 충렬왕 4년 7월 丁亥. “中書省, 令具錄本國累朝事跡, 及臣服日月, 與帝登極已來, 使介名目, 國王親朝年月, 以呈, 因國史院報也.”
고려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고려가 몽골 측에 솔선귀부(率先歸附)했다는 내러티브 를 구성해서 제출하였다.
아마도 고려의 주장이 반영되었던지, 제국신복 전기,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성된 경세대전(經世大典)의 고려 항목, 훗날 이를 대거 참조하여 집필한 원사 고려전에까지 고려가 몽골제국에 솔선귀부한 것으로 서술되었다.37)
이렇게 편찬된 사서들의 특징 가운데 기존 연구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 았던 점을 한 가지만 짚어두고 싶다.
천추금경록, 세대편년절요 등 13 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편찬한 고려의 역사서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 공 통점은 이들이 모두 고려 당대의 역사에 관한 책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정 가신의 천추금경록은 아마도 태조부터 서술했을 것으로 보이고,38) 민지 의 세대편년절요는 태조의 조부인 호경대왕(虎景大王)부터, 본조편년강 목은 문덕대왕(文德大王), 즉 태조의 증조부인 보육(寶育)부터 시작했다고 한다.39)
모두 고려 중기 이래 전해진 전승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40) 이 는 어디까지나 고려 국내에서만 유통되던 지식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공식 역사서로 정리하고, 게다가 이를 몽골 측에 제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고구려와는 구별되는, 현재 고려의 독자적인 역사상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때까지 중국 측의 역사 기록에서 반복되어 왔던, 오대 (五代) 때에 고씨(高氏)의 고려에서 왕씨(王氏)의 고려로 바뀌었다는 설명은 사실과 다르며, 현재의 고려는 독자적인 건국 시조(始祖)를 가진, 고구려와 는 다른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서는 편찬되는 족족 대도에 보내졌다고 한다.41)
37) 정동훈, 2021(b) 「元史 高麗傳의 史源」 東方學志 19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97~99쪽
38) 고려사 권105, 鄭可臣 ; 閔賢九, 1996 앞의 논문, 168쪽
39) 고려사 권107, 閔漬. “忠烈嘗命漬增修鄭可臣所撰千秋金鏡錄, 國家多故, 未暇 及焉. 後與權溥同校撰成, 名曰世代編年節要. 上自虎景大王, 迄于元王, 分爲七卷, 幷世係圖以進. 又撰本國編年綱目, 上起國祖文德大王, 下訖高宗, 書凡四十二卷.”
40) 閔賢九, 1996 앞의 논문, 168~169쪽
이와 관련해서는 고려사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눈에 띈다.
또 세상에 전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원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가운데 왕을 따르며 교유하던 어떤 이가 왕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왕의 선조 는 당 숙종(肅宗)에게서 났다고 하는데 무엇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숙종은 어 려서부터 궐문 밖을 나간 적이 없었고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에 영무(靈武)에서 즉위했으니, 어느 때 동쪽으로 유람하여 아들까지 두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민지가 곁에 있다가 대답하기를, “이 는 우리나라 사서가 잘못 쓴 것일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라 선종(宣宗)입니다.” 하였다.
학사가 말하기를,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을 했으니 혹 그 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였다.42)
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충선왕이 원에 머물던 당시 한림학사와 같은 지식인들과 고려의 역사를 논했다는 사 실이다.
둘째, 여기서 말한 고려의 역사에서 쟁점이랄까, 토의의 대상이 된 것은 고려의 시조에 관한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대화가 이루어진 정 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민지가 충선왕을 수행하여 원에 머물렀다면 충 선왕이 세자 신분이었을 때였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때는 그가 아직 세대 편년절요나 본국편년강목을 편찬하기 이전이다.43)
41) 고려사 권33, 충선왕 복위년(1308) 12월 戊午. “遣評理趙璉如元, 賀正, 以王命, 賚世代編年節要, 幷金鏡錄, 以進.” 邊東明, 1991 앞의 논문, 21~24쪽 참조.
42) 고려사 高麗世係. “又世傳, 忠宣王在元, 有翰林學士從王遊者. 謂王曰, ‘嘗聞, 王之先, 出於唐肅宗, 何所據耶. 肅宗自幼未嘗出閤, 祿山之亂, 卽位靈武, 何時東 遊, 至有子乎.’ 王大慚不能對, 閔漬從旁對曰, ‘此我國史誤書耳. 非肅宗, 乃宣宗 也.’ 學士曰, ‘若宣宗, 久勞于外, 庶或然也.’”
43) 고려사 권107, 閔漬
위의 대화에서 한림 학사가 물었던 것처럼 아직 확실한 근거, 바꿔 말하면 ‘정리된’ 역사서가 없을 때였다는 것이다. 이때에도 이미 충선왕을 비롯한 고려 지식인들은 독자적인 고려 왕조의 건국 서사를 몽골 측 인사들에게 선전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당연히 중국 측에서 편찬된 사서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 목적은 고려와 고구려를 분리시켜 이해시키려는 데 있었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44)
더 나아가서 당나라와 맞서 싸웠다는 호전적인, 그래 서 불안한 인상을 풍기는 고구려와 달리, 고려의 시조는 당나라 황제와도 연결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과 친연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고려의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 몽골 지식인들과 교유하 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달성되었다.
잘알려져 있듯이 이제현(李齊賢)・권 한공(權漢功) 등을 비롯한 고려의 문인들은 충선왕을 따라 대도에 머물면서 화북의 문인들과, 또 충선왕이 1319년에 강남 일대를 순력하는 데 수행하 면서 그 지역 문인들과 두루 교유하였다.45)
그밖에도 최해(崔瀣)・안축(安 軸)・이곡(李穀), 그리고 한 세대 뒤의 이색(李穡) 등 역시 몽골 측의 문인들 과 자주 만나 역사와 문학을 논하였다.46)
44) 閔漬는 몽골제국이 일본 원정을 재차 추진하던 무렵 충렬왕을 수행하여 대도에 갔 을 때 通典을 열람하다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대해 魏徵이 간언한 부분을 읽고, “大元에 있어서 倭는 어찌 당에 있어서 고려와 같은 정도일 뿐이겠 는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고려사 권107, 閔漬). 몽골을 당에, 그리고 정 벌의 대상이 되는 일본을 고구려에 대응시킨 비유 역시, 고구려를 자신의 선조로 이해하려 했다면 나오기 쉽지 않은 구상일 것이다.
45) 金庠基, 1974 「李益齋의 在元生涯에 對하여」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出版部 ; 鄭玉子, 1981 「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 - 李齊賢을 中心으로 -」 震 檀學報 51, 진단학회 ; 朴現圭, 1991 「李齊賢과 元 文士들과의 交遊考 - 《益齋 亂藁》와 元代 文集을 위주로 -」 嶠南漢文學 3, 嶠南漢文學會 ; 張東翼, 1992 「麗・元 文人의 交遊 - 性理學 導入期 高麗文人의 學問的 基盤 檢討를 위해 -」 國史館論叢 31, 국사편찬위원회 등을 참조.
46) 張東翼, 1992 위의 논문
물론 고려 지식인들이 원의 문인 들과 교유했던 가장 중요한 목적이 고려 역사상을 수정하려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인들이 만나 문학과 역사를 논하는 과정 에서 이 목적은 자연스럽게 달성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요수(姚燧)를 들 수 있다.
그는 1310년에 제국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에게 시호(諡號)를 하사하는 제서(制書)를 지으면서 “삼 한이 나라를 세워 오계(五季, 즉 오대) 때 이미 왕이 되었으니, 비록 동해의 물가에 자리하였으나 실로 남면(南面)의 숭상을 누려왔다.”라고 하였다.47)
심상하게 넘길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과거 비슷한 성격의 글에서 고려의 역사를 고구려까지 연결된 것으로 서술했던 것과 비교하면,48) 분명한 변화 이다.
47) 姚燧, <高麗國王封曾祖父母父母制>, 蘇天爵 編, 國朝文類 11, 制. “三韓爲國, 五季已王, 雖居東海之濱, 實享南面之奉.” 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1310) 7월 乙未와 권89, 忠烈王 后妃, 齊國大長公主에도 위 구절이 보인다.
48) 예컨대 거란에서 文宗을 책봉한 冊에서는 그를 가리켜 “朱蒙의 작위를 잇고 玄菟 의 강역을 넓혔다”고 하였다(고려사 권8, 문종 19년(1065) 4월 癸巳). 금에서 康 宗을 책봉한 문서에서는 고려의 강역을 가리켜 ‘山海五部’라고 하였는데(고려사 권21, 강종 원년(1212) 7월 壬申), 여기서 ‘五部’란 옛 고구려의 5部를 가리킨다.
즉 고려 왕조가 오대 때에 시작되었다는 위 구절은, 고구려와 고려를 완전히 분리시킨 것이다.
같은 해에 요수가 쓴 <고려심왕시서(高麗瀋王詩 序)>는 고려와 고구려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서술하였다.
천하의 일이란 옛날의 일로 지금의 일을 견주어 볼 때,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고 같거나, 옛날에는 달랐지만 지금은 같거나, 지금은 같지만 옛날에는 달랐 거나, (예나 지금이나) 내내 달라서 같은 것이 없기도 하다. 고려씨(高麗氏)가 옛날과 지금 서로 다른 것을, 잠시 지난 일을 통해 살펴보자 면, 진(晉)나라 혜제(惠帝) 영흥(永興) 연간(304~306)에 시작했다가 송(宋)나라 문제(文帝)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다할 때까지 외진 곳에서 나라를 세웠 던 것들로, 성(成)의 이웅(李雄), 대(代)의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 양(凉)의 장식 (張寔)과 여광(呂光), 남량(南凉)의 독발오고(禿髮烏孤), 서량(西凉)의 단업(段業) 과 이고(李暠), 북량(北凉)의 저거몽손(沮渠蒙遜), 하(夏)의 혁련발발(赫連勃勃), 후진(後秦)의 요장(姚萇), 서진(西秦)의 걸복국인(乞伏國仁), 연(燕)의 모용황(慕容 皝)과 모용수(慕容垂), 남연(南燕)의 모용덕(慕容德), 서연(西燕)의 모용충(慕容冲) 등, 이 여러 나라들의 연대는 그 양쪽 끝을 취하여도, 모용충은 짧아서 10년을 넘기지 못하였고 저거몽손도 40년에 미치지 못했으니, 어찌 이처럼 짧아서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대저 고려씨는 왕건이 당(唐, 즉 후당) 명종(明宗) 장흥(長興) 임진년(932)에 나 라를 세우고서 진(晉)・한(漢)・주(周)・금(金)・송(宋)을 거쳐 지대(至大) 경술년 (1310)까지 28대를 전하며 379년을 지내고 있다. 왕통이 이어온 지 오래된 것, 차례를 이어온 지 오래된 것이 뚜렷하다. 하물며 성세(聖世)에 힘입었으니 억만 년 동안 유지될 것이다. 그 이어온 바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어찌 유독 잘 닦아서 여기에 이른 것이겠는가. 바닷가 구석에 굳건히 기대 버틴다고 어찌 중토(中土)의 군사가 이르지 못했겠는가. 아니면 사대(事大)를 잘 하고 그 직공 (職貢) 닦기에 실수함이 없었기 때문이겠는가. 그도 아니면 교화를 닦고 법령 을 갖추며,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을 잘 지켜온 효과이겠는가. 아, 기자의 은 택이 백세토록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내가 옛날과 다르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49)
49) 姚燧, <高麗瀋王詩序>, 牧庵集 권3, 序. “天下之事, 以古方今, 不異則同, 異乎 古則同乎今, 異乎今則同乎古, 異必一居無有. 若高麗氏之古今兩異者, 姑卽已事而 觀之, 始晉惠之永興, 盡宋文之元嘉, 偏方立國, 若成李雄, 代什翼犍, 凉張寔吕光, 南凉禿髮烏孤, 西凉段業・李暠, 北凉沮渠蒙遜, 夏赫連勃勃, 後秦姚萇, 西秦乞伏 國仁, 燕慕容皝・垂, 南燕慕容德, 西燕慕容冲, 合是數國之年, 取其兩端, 冲少不能 踰紀, 沮渠不及四十年, 一何促促若是耶, 庸以較. 夫高麗氏, 王建立國于唐明宗長 興壬辰, 歷晉・漢・周・金・宋, 以及至大庚戌, 傳二十八, 歷三百七十九年. 垂統之遙, 繼序之遙昭昭. 况頼聖世, 億萬維年. 其來猶未艾者, 獨何修而臻此哉. 豈負固海隅, 中土之兵, 不能以至歟. 將善于事大, 不失其貢職歟. 將修明治具, 禮樂・刑政維持 之效歟. 抑箕子之澤, 百世而不斬也. 吾所謂異古者此焉耳.”
그는 옛날과 지금이 다른 사례의 대표로서 고려를 들고 있다. 고려를 설 명하기에 앞서서는 예컨대 전량・후량・남량・서량, 전연・후연・남연・서연 등 이른바 5호 16국의 여러 나라의 사례를 들고 있다. 이들은 ‘양(凉)’이나 ‘연 (燕)’처럼 같은 이름을 쓰지만 실체는 다른 역대 왕조들이다.
뒤의 설명을 미루어 보자면 이들이 단명한 것은 그들에게는 ‘기자의 은택’이 없었기 때 문이다.
반면에 고려는 옛날에는 고구려, 즉 중국에 대항하는 국가였으나, 지금의 고려는 379년을 이어왔으며 ‘성세(聖世)’를 맞이하였으며 앞으로 더 길게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원동력으로, 단지 먼 곳에 위치해서 외침을 받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며, 대외적으로는 사대와 직공 을 충실히 닦고, 대내적으로는 예악과 형정을 잘 지켜왔기 때문이기도 하 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고려에게는 ‘백세토록 끊어지지 않은’ 기자의 은 택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요수의 글은 두 가지 점에서 반세기 전 선배들의 ‘오해’와는 분명히 달 랐다.
첫째, 고려와 고구려를 정확하게 구분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분명 하게 고구려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요수는 국호는 같으나 그 실체는 옛날 과 지금이 다른 대표적인 사례로 고려를 들었다.
비록 고려가 후당 명종 장 흥 임진년(932)에 건국하였다는 설명은 책부원구(冊府元龜)나50) 신당서 에서51) 왕씨 왕실이 처음 등장한 해로 지목한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52)
하지만 고려와 고구려를 다른 나라라고 분리한 것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 든
50) 冊府元龜 권966, 繼襲, 高句驪, “後唐同光・天成中, 其王姓高. 長興三年, 其王 曰王建.”
51) 新五代史 권74, 四夷附錄 3, 高麗, “同光元年, 遣使廣評侍郞韓申一・副使春部 少卿朴巖, 而其國王姓名, 史失不紀. 至長興三年, 權知國事王建遣使者來, 明宗 乃拜建玄菟州都督, 充大義軍使, 封高麗國王.”
52) 정동훈, 2021(a) 앞의 논문, 232~236쪽.
53) 한편 요수는 이에 앞서 國統離合表라는 史書를 집필할 정도로 역사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牧庵集 권3의 <國統離合表序>와 부록 <姚燧年表>에 따르면 그는 1301년에 잠정 은퇴한 시점에서 通鑑綱目을 읽으며 國統이 흩어져 있어 한눈 에 볼 수 없음을 아쉬워한 나머지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위의 <高麗瀋王詩序> 에서 오호십육국의 여러 왕조, 군주들을 열거한 것 역시 이러한 작업의 결과 얻게 된 지식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둘째, 기자, 그리고 기자의 은택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기 자의 유업(遺業)이야말로 현재의 고려가, 중국과 다퉈왔던 과거의 고구려와 달리 믿을 만한 제후가 된 이유였다. 이 역시 고려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면 서 얻게 된 지식에 근거한 것임이 확실하다.54)
고려의 지식인들은 고려와 고구려를 분리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고구려 의 부정적 이미지를 전환시킬 소재로서 기자를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즉 현재의 고려를 거슬러 올라가면 먼 옛날 기자로부터 비롯된다는 서사를 강 력히 내세운 것이다. 기자가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고대의 현인(賢人)으 로서,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주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하고서 그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그에 따라 중국 문명의 은택을 받아 현재까지도 강력한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다는 이미지이다.55)
54) 고려사 이제현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이제현을 대도로 소환하였으며, 이때 이제현이 萬卷堂에서 요수 등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요수는 1311년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대도에 머물지 않았다고 하므로, 그가 이제 현과 직접 교유했다는 위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朱瑞平, 1996 「益齋 李齊賢의 中國에서의 行蹟과 元代 人士들과의 交遊에 대한 硏究」 南冥學硏究 6, 경상대 학교 남명학연구소, 153~155쪽 참조. 55) 고려의 지식인들이 몽골 측에 자신과 기자의 연관성을 강조했던 여러 사례에 대해 서는 최봉준, 2013(a) 앞의 학위논문, 36~40쪽 참조.
실제로 요수의 글에서 단초가 등장하더니, 그의 후배들이 쓴 글에서는 고려를 기자와 엮어서 묘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역시 고려 지식인 들의 설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이다.
몽골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들이 남긴 몇몇 인상적인 언급을 살펴보자.
(가) 옛날 기자는 홍범을 무왕에게 고하였으니, 그 구주 가운데 정(政)이 그 한 가지이며, 정(政)에서 팔목(八目)을 행하는 가운데 사구(司寇)는 그 한 가지 이다. (중략) 동방의 나라는 기자의 유교(遺敎)가 있는 곳이며 장악명(張樂 明) 또한 그 사구의 일을 맡았으니, 이에 내가 이를 소재로 삼아 서문(序文)을 짓는다.56)
(나) 맑디맑은 요해(遼海)의 동쪽, 넓디넓은 만여 리, 산은 높고 물은 맑으니, 정수를 모아 훤칠하게 나왔네. 풍속이 본래 순박한데, 하물며 기자의 교화를 다시 펼친다면야.57)
(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산수(山水)의 나라를 떠나와, 번(藩)임을 칭하며 솔선하여 봉황(鳳凰)의 도읍에 들어왔네. 평소 듣건대 기자가 황극(皇極)을 밝혔다던데, 주가(周家)가 지도를 펼칠 일을 다시 떠올리네.58)
(라) 조선(朝鮮)이라는 동쪽은 기자가 책봉을 받은 곳, 유교(遺敎)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화풍(華風)이 융성하도다. 옛날부터 그 나라는 풍속이 유학(儒學)을 좋아하니, 과거를 치러 선비를 뽑았고 시를 외고 글을 읽는도다.59) (마) 옛날 은(殷)나라의 태사(太師)가 홍범을 무왕에게 주었는데 그러고서 태사 는 조선에 책봉을 받았으니, 조선의 백성은 그 교화를 입어 드디어 예의 (禮義)의 대국을 이루었다. (중략) 대저 동방의 풍속은 어떠한가. 수 양제가 사치스런 마음을 부려 고려를 관대(冠帶)의 나라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정벌했으나 끝내 큰 화를 당하고 말았다. 당 태종은 그가 지휘하면 곧 중 원이 깨끗해졌고 눈길을 돌리면 곧 사이(四夷)가 복종하였다. 그러나 고려 를 정벌함에는 헤아린 바가 그 나라 대로(對盧)의 말과 겨우 딱 들어맞았 다. 이로써 보건대 고려의 나라됨이나 그 사람들의 근본됨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60)
56) 虞集, 道園學古錄 권5, <送憲部張樂明木天使還海東彗序>. “昔箕子之以洪範, 告武王也, 其疇九而政居其一焉, 政之爲目八, 而司寇居其一焉. (중략) 東方之國, 有箕子之遺敎在焉, 而樂明, 又任其司寇之事, 故予得以爲說以序之.”
57) 程端學, 積齋集 권1, 五言古詩, <贈張御史歸高麗>. “皛皛遼海東, 旁礴萬餘里. 山高水明麗, 儲精産瑰偉. 風俗本淳樸, 矧復化箕子.”
58) 宋禧, 庸菴集 권5, 七言律詩, <送人還高麗>. “奉使遠離山水國, 稱藩先入鳯凰 都, 素聞箕子明皇極, 更憶周家展地圖.”
59) 蘇天爵, 滋溪文稿 권17, 碑志, <元故亞中大夫河南府路總管韓公神道碑銘幷 序>. “朝鮮之東, 箕子所封, 遺敎猶存, 蔚有華風. 自昔其國, 風俗好儒, 設科取士, 誦詩讀書.”
60) 鄭元祐, 僑吳集 권8, 序, <贈李僉事序>. “昔殷太師, 以洪範授武王, 已而太師受 封朝鮮, 朝鮮之民被其化, 遂成禮義之大國. (중략) 夫東方之俗歟. 隋煬帝逞侈心, 以爲高麗冠帶之國也, 舉兵征之, 遄致大禍. 唐太宗指麾則中原淸, 顧盻則四夷服. 其征高麗也, 所料與其國對盧之言, 僅脗合. 由此觀之, 則高麗之爲國, 其人本, 未 易量也.”
(가)는 우집(虞集)이 지은 글로, 고려인 장악명이 헌부(憲部), 즉 사헌대부 (司憲大夫) 관직을 띠고 고려에 부임할 때 그를 전송하며쓸 글의 내용이다.
우집은 기자가 홍범구주를 주 무왕에게 고했다는 고사를 인용하며, 그 가 운데 하나인 사구의 역할을 장악명이 맡은 것을 축하하였다. 그러면서 고 려를 가리켜 “기자의 유교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기자의 홍범이 주나 라와 ‘동방’을 연결한 것처럼, 장악명이 맡은 헌부가 몽골제국과 고려를 매 개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기자가 교화의 상징, 중국과 ‘동방’ 의 문화적 동질성을 상징하는 소재로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61)
61) 원 대의 楊玄은 夏・商 이래 宋까지 역사 속의 저명한 충신들 800여 명의 전기를 엮어 忠史라는 책을 지었다. 虞集은 그 序文을 썼는데, 거기서는 論語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殷나라 말의 微子・箕子・比干 3인을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기도 하였다. 虞集, <忠史序>, 道園學古錄 권5.
(나) 역시 (가)와 같은 시점에 같은 인물에게 지어준 시이다. 필자 정단학(程端學)은 고려를 일컬어 풍속이 본래 순박한 곳, 기자의 교화를 다시 펼칠 곳이라고 칭하였다.
역시 고려를 매우 긍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기자를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다)에서 송희(宋禧) 역시 고려에서 왔던 사신을 환송하며 지은 시에서 고려를 기자와 연결하였다.
그러면서 고려가 ‘칭번(稱藩)’하며 솔선해서 귀부했다는 서사를 들며, 과거 기자가 황극을 밝혔던 것처럼 고 려와 몽골이 문화적으로 일체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펼쳤다.
(라)는 1347년에 소천작(蘇天爵)이 지은, 고려 출신 관인 한영(韓永)의 묘비명 가운 데 명(銘) 부분이다.62)
역시 기자를 소재로 고려는 그의 유교가 남아 화풍 이 융성하고 유학을 좋아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라)가 모두 기자를 소재로 고려의 풍속을 칭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 다면 (마)는 조금 독특하고 복잡하다.
(마)는 정원우(鄭元祐)가 지은 글로, 1352년에 고려 출신의 절강도염방첨사(浙江道廉訪僉事) 이중선(李仲善)이 홍건적의 침입을 막은 공적을 기록한 글이다.63)
은 태사, 즉 기자가 조선에 책봉을 받아 조선이 예의의 대국이 되었다는 앞부분의 서술은 다른 글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 뒤로는 기자와 고구려를 연결하는 인식을 보여주며, 수・당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곤경을 겪었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인용문 가운데 “그 나라 대로(對盧)의 말과 딱 들어맞았다”는 것은 구당서(舊唐書) 고려전에 실린 이야기로, 당 태종이 고구려 친정에 나섰을 때 고구려의 연 로한 대로가 지구전을 펼치며 당군의 보급로를 끊으면 승리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64)
62) 고려 출신으로 몽골제국에서 관료로 활동했던 한영의 경력 및 위 글에 대해서는 권용철, 2021 「원 제국의 고려인 관료 한영(韓永)의 행적에 대한 검토」 인문논총 56,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참조.
63) 이상 인용문의 배경에 대한 설명은 모두 張東翼, 1997 앞의 책 참조.
64) 舊唐書 권199下, 高麗. “賊中有對盧, 年老習事, 謂延壽曰, ‘吾聞中國大亂, 英 雄並起. 秦王神武, 所向無敵, 遂平天下, 南面爲帝, 北夷請服, 西戎獻款. 今者傾國 而至, 猛將銳卒, 悉萃於此, 其鋒不可當也. 今爲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 遣驍雄, 斷其饋運, 不過旬日, 軍糧必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此不戰而取勝也.’”
그러면서 “그 나라됨과 사 람들의 근본됨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고 했으나, 이는 일방적으로 고구 려를 비난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치와 만용 을 부려 무모한 침공을 강행한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잘못을 논하는 내용이주가 된다.
위의 (가)~(마)를 검토한 결과를 요약하건대, 14세기에 들어서면 몽골 측 지식인들이 고려를 기자와 연계하는 언설이 크게 늘어났음이 확인된다.
당 연히 기자는 홍범, 유교 등 교화의 상징, 중국과 고려의 문화적 동질성을 대표하는 키워드였고, 그 가운데 고려를 고구려와 연결짓는 이해 방식, 언 설은 점차 사라졌던 것이다.
주목할 것은 위의 글을 남긴 인물들의 공통점이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몽골제국 조정에서 문한(文翰)을 담당하였으며, 국가적 편찬 사업에서도 중 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이다.
우집은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의 총재 관이었으며, 소천작은 국조문류(國朝文類)의 편집을 맡았던 몽골제국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정단학은 국자조교(國子助敎), 한림수찬(翰林修撰) 등을, 정원우(鄭元祐)는 강절행성(江浙行省)의 유학제거(儒學提擧)를 역임하였다.
송희는 더욱 주목할 만한데,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으나 그는 훗날 원사 편찬에 참여하여 고려전 이하 외국 열전의 집필을 맡았다고 한다.65)
65) 宋禧, 庸菴集, <提要>. “洪武初, 召修元史, 所撰外國傳, 自高麗以下, 悉出其手.”
이들 은 조정에서 활동하면서 고려의 지식인, 관인들과 교류하였으며, 그 관계가 위의 글을 짓는 동기가 되었다.
즉 고려의 주장, 고려의 역사 수업에 많이 노출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이 살던 시대에 널리 읽혔던 책들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고려를 기자와 연결하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위에 열거한 소수의 문한관들, 대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고려인과 접촉이 넓었던 인사들에 한정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대 중적으로 널리 퍼지고, 굳건한 ‘지식’으로 확정되기 위해서는 국가적 편찬 사업, 혹은 시대를 대표하는 정서나 유서에 정형화된 문장으로 실리는 것 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온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3. 재야의 여전한 인식: 고려=고구려
몽골제국이 추진한 국가적 편찬 사업의 가장 대표적인 산물은 경세대 전(經世大典)일 것이다.
1327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331년에 완성된 이 책은 육전(六典) 체제에 따라 국가가 관장하는 모든 업무에 관해 그 연혁과 중요 결정 사항들을 정리해놓은 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6)
현전하는 원 사의 각 지(志) 부분이 경세대전의 해당 부분들을 참조했으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67)
그렇다면 고려에 관한 서술은 어땠을까?
필자는 다른 글을 통해 원사 고려전이 기본적으로는 경세대전 정전 (政典) 정벌(征伐)의 고려 부분을 바탕으로 쓰였을 것임을 논증한 바 있다.
주목할 것은 고려 항목이 실린 위치이다.
정전, 즉 우리에게 익숙한 육전 체제의 용어로는 병전(兵典)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정벌’이라 는 제목의 하위 항목에 들어가 있다.
바꿔 말하면 경세대전의 고려 항목 은 애초에 고려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몽골제국이 고려를 ‘정벌’한 경위를 밝히는 내용으로 서술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당 부분은 1276년에 세조 쿠빌라이가 편찬을 명령한 제국신복전기의 고려 부분을 기본 자료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68)
따라서 거기서는 고려의 역 사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 대에 편찬된, 제일 유명하고 또 널리 읽혀 후대에 가장 큰 영 향을 끼친 자료를 꼽자면 1307년에 완성된69)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들지 않을 수 없다.70)
66) 經世大典의 편찬 경위에 대해서는 趙阮, 2017 「元 후기 經世大典의 편찬과 六典體制」 東洋史學硏究 141, 동양사학회 및 權容徹, 2020 「元代 政書 經世 大典의 활용을 위한 신간 소개」 中國史硏究 128, 중국사학회 등을 참조.
67) 市村瓚次郞, 1943 「元朝の實錄及び經世大典に就きて」 支那史硏究, 東京: 春 秋社 ; 王愼榮・葉幼泉・王斌, 1991 元史探源, 長春: 吉林文化出版社
68) 정동훈, 2021(b) 앞의 논문
69) 文獻通考의 완성 시점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대체로 1307년에 완성되어 1317년에 조정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다. 楊翼驤 編著, 2013 增訂中國 史學史資料編年 元明卷, 北京: 商務印書館, 31~35쪽 참조.
그리고 문헌통고는 목차만 보아도 쉽게 찾아갈 수 있도 록 사예고(四裔考)에 ‘고구려(高句麗)’라는 항목을 설정해두고 있었다.71)
그 런데 문헌통고는 ‘고구려’라는 제목 아래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와 14세 기 당시의 고려를 시간 순으로 이어 붙여서 서술하였다.
668년부터 918년 사이의 간격은
1) 고구려는 당에 의해 일단 멸망했는데,
2) 당 말에 중원이 어지러워지자 다시 자립하였으며,
3) 후당 장흥 연간(930~934)에 왕건이 고 씨를 대신해서 왕이 되었다는 서사로 정리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신오 대사(新五代史)에서 고안된 고구려와 고려를 연결짓는 논리를 그대로 반 복한 ‘오류’이다.72)
그러나 그것이 ‘오류’라는 것은 현대의 판단일 뿐이다.
14세기 당시 우세한 것은 이쪽 설명이었다.
또한 문헌통고 고구려의 첫 구절은 “고구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高句麗, 其先出夫餘.]”로 시작 하여 주몽의 탄생 신화를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은 삼국지(三國志) 위서 (魏書) 권100의 고구려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앞에 고구려를 기 자와 연결시키는 서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문헌통고 고구려 항목이 후한서(後漢 書)・삼국지부터 신오대사까지 역대 정사의 고려전을 그대로 옮겨 놓 았기 때문이다.73)
70) 물론 至元 연간(1274~1294)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事林廣記 역시 널리 활 용된 類書였으나, 이 책에는 고려에 대한 내용이 여기저기 흩어져 실려 있고 그나 마 매우 단편적인 언급들에 그치고 있을 뿐, ‘고려’라는 항목이 설정되어 있지 않 았다.
71) 文獻通考 권325, 四裔考 2, 高句麗
72) 정동훈, 2021(a) 앞의 논문, 244~247쪽
73) 단 저자 마단림이 역대 정사의 고려전을 직접 참고해서 옮긴 것이라기보다는, 같 은 자료를 바탕으로 당・송대에 편찬된 通典, 太平寰宇記 등을 바탕으로 작성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정동훈, 2021(a) 앞의 논문, 246~247쪽의 주 58) 참조.
다만 만약 집필 당시에 저자가, 그 무렵 고려의 지식인들이 밀고 있었던 기자 내러티브를 접했더라면, 최소한 맨 앞의 한두 줄 정도 에는 고구려에 앞서 기자가 있었다는 언급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렇지 않았다. 문헌통고의 저자 마단림(馬端臨, 1254~1323)은 원 대 내내 야인으로 지냈다.
그는 남송의 마지막 순간에, 승상을 역임한 아버지의 음직(蔭職)으 로 관로에 올랐으나 불과 2년 만에 남송이 멸망하면서 몽골제국 조정에는 출사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고향인 강서성(江西省) 요주(饒州)에 은거한 채 아버지 대부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문헌통고를 집필했다고 한 다.74)
고려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그가 고려의 문인, 지식인들과 교유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대도를 중심으로, 현직 관인들을 대상으로 펼쳐 졌던 고려의 역사 공정이 강남 재야의 문인 마단림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했 던 것이다.
그 결과 문헌통고는 아무런 의심 없이 현재의 고려를 고구려 와 동일한 국가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문헌통고의 고구려 항 목은 원 대에 편찬된 그 어떤 자료보다도 후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널리 읽히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밖에도 몽골제국 문인들이 남긴 단편적인 언급 속에서 고려는 여전히 ‘고구려’로 지칭되기도 했다.
예컨대 송경(宋褧)은 고려의 승려 식무외(式無 外)를 전송하는 시에서 그를 가리켜 ‘고구려승(高句麗僧)’이라고 하였으 며,75) 원각(袁桷)은 고려인 최내경(崔耐卿)에게 지어준 글에서 “고구려 최 군내경(高句麗崔君耐卿)”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76)
74) 新元史 권234, 馬端臨
75) 宋褧, 燕石集 권5, 絶句五言, <送高句驪僧式上人東歸二首號無外>
76) 袁桷, 淸容居士集 권23, 序, <贈崔兵部序>
송경은 뒤에서 더 살 펴보겠으나 요사・금사・송사 편찬에도 참여한 문인이었으며, 원각은 인종실록(仁宗實錄)의 찬수자 가운데 한 명으로, 모두 고려 문인들과 교 유한 바 있는 이들이었다.77)
77) 이들 인물의 경력에 대해서는 張東翼, 앞의 책 참조.
따라서 재야의 학인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들 역시 여전히 관습적으로 고려를 고구려라고 칭하고 있었음이 엿보인다.
4. 절반의 성공: 고구려에 앞서 기자조선
몽골제국 관방의 역사학에서 고려의 연혁을 정리하는 작업은 요사・금 사・송사 삼사(三史)를 편찬하는 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각 사서는 역대 정사의 전통에 따라 열전의 맨 마지막에 각 왕 조가 상대했던 외국에 관한 정보를 실었고, 당연하게도 고려는 그 첫머리 에 기재되었다.
1344년에 완성된 요사의 고려전에서는 “고려가 국가를 세운 이래로 왕위를 전수한 것과 재위의 길고 짧음, 인민과 토전(土田)에 대해서는 역대 (사적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라고 하고,78) 같은 해 완성된 금사 고려전 역시 “요 때부터 세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는데, 그 일은 요사에 실려 있다.”라고 하여,79) 구체적인 고려의 연혁에 대한 언급은 송사 고려전으로 미루었다.
78) 遼史 권115, 二國外記, 高麗. “高麗自有國以來, 傳次久近, 人民・土田, 歷代各 有其志.”
79) 金史 권135, 外國 下, 高麗. “自遼時, 歲時遣使修貢, 事具遼史.”
그렇다면 1345년에 완성된 송사 고 려전은 뭐라고 했을까?
송사 고려전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하였다. 우(禹)가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었을 때 기주(冀州)의 땅에 속했고, 주(周)는 기자의 나라로 삼았으며, 한의 현토군(玄菟 郡)이다. 요동에 있으며,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으로 평양성(平壤城)을 국읍(國 邑)으로 삼았다. 한・위 이래 항상 직공을 닦으면서도 또한 누차 변방을 침략하 였다. 수 양제가 두 차례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이 친히 거가(車駕)를 움직여 정벌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고종(高宗)이 이적(李勣)에게 정벌을 명하 여 결국 그 성을 함락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군현으로 삼았다.80)
역시 고려를 고구려와 구분하지 않은 것은 송 대에 편찬된 각종 자료, 그 리고 문헌통고의 서술과 완전히 일치한다.81)
그러나 그 앞의 딱 한 줄, 기자와 관련된 언급은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특이한 서술이다. 송사 고려전은 기본적으로 송 조정에서 편찬한 역대 국사(國史)의 고려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82)
이는 문헌통고 고구려 항목의 송 대 부분 서술과 송사 고려전의 서술이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83)
문헌통고 고구려 항목과 비교해보면, 송에서 첫 번째로 편찬 한 국사, 즉 태조(太祖)・태종(太宗)・진종(眞宗)의 역사를 다룬 이른바 삼 조국사(三朝國史)를 인용한 부분은 건륭(建隆) 3년(962)의 일에 대한 언급 부터인 것으로 보인다.84)
80) 宋史 권487, 外國 3, 高麗. “高麗, 本曰高句驪. 禹別九州, 屬冀州之地, 周爲箕 子之國, 漢之玄菟郡也. 在遼東, 蓋扶餘之別種, 以平壤城爲國邑. 漢・魏以來, 常通 職貢, 亦屢爲邊寇. 隋煬帝再舉兵, 唐太宗親駕伐之, 皆不克. 高宗命李勣征之, 遂 拔其城, 分其地爲郡縣.”
81) 특히 직접적으로는 新五代史 高麗傳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정동훈, 2021(a) 앞의 논문, 247쪽 참조.
82) 송은 太祖・太宗・眞宗의 三朝國史, 仁宗・英宗의 兩朝國史, 神宗・哲宗・徽宗・ 欽宗의 四朝國史, 高宗・孝宗・光宗・寧宗의 中興四朝國史 등 총 4차례 國史 를 편찬하였다. 이들 國史는 紀傳體 사서로 외국 列傳을 포함하고 있었다. 송 대의 國史 편찬에 대해서는 周藤吉之, 1969 「宋朝國史の編纂と國史列傳 - 「宋史」との 關聯に於いて -」 宋代史硏究, 東京: 東洋文庫 ; 葛兆光, 「宋官修國史考」 史學史 硏究 1982年 第1期 및 蔡崇榜, 1991 宋代修史制度硏究, 臺北: 文津出版社, 117~148쪽 등을 참조.
83) 顧宏義, 2007 「《宋史・高麗傳》史源考」 中國邊疆史地研究 17-4. 송사 고려전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서술되었는지는 다른 논문을 통해 상세히 분석하도록 하겠다.
84) 宋史 권487, 外國 3, 高麗. “建隆三年十月, 昭遣其廣評侍郎李興祐, 副使李勵 希, 判官李彬等來朝貢.” 文獻通考의 해당 부분은 “及宋太祖建隆三年, 昭遣其 廣評侍郎李興祐等來朝貢.”라고 하여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문헌통고에서 이 바로 앞의 기사는 後周의 廣順 9년(959)에 고려에서 여러 서적을 진헌했다는 내 용인데, 이는 五代會要 권30, 高麗의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그 바로 앞, 그러니까 오대 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은 오대회요(五代會要)의 고려 항목과 내용이 일치한다. 즉 송 사 고려전 집필자의 독창적인 서술은 위의 인용문이 전부라는 것이다.
위 서술에서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한 국가라고 한 것은 기존의 인식과 다르지 않다.
다만 “고구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하였다”라는 첫 문장 다음 에 기자를 언급한 것은 몽골제국 때에 새롭게 정착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 다.
앞서 서술했듯이 이전 왕조, 즉 후당・거란・금에서도 고려를 기자와 연 결하는 언설은 있었지만, 관찬 사서에서 이를 명기한 것은 몽골제국에서 편찬한 송사 고려전이 최초이다.
송사 편찬의 최고 책임자는 톡토[脫脫]였다.
그러나 실제 집필은 구양 현(歐陽玄)・게해사(揭奚斯)・송경(宋褧)・왕사성(王思誠) 등이 담당했다고 한 다.85)
정확하게 누가 고려전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집필에 관여했던 인 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려의 문인들과 교유한 경험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예컨대 구양현, 게해사와 송경은 이곡(李穀)이 1334년에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을 때 전별하며 써준 시가 가정집(稼亭集)에 실려 있다.86)
85) Charles Hartman, 2020, Making of Song Dynasty History: Sources and Narratives, 960-1279 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175~184
86) 李穀, 稼亭集 雜錄, <送李中父使征東行省序> 이하의 送詩
또 구 양현은 온선사(昷禪師)・심선사(心禪師) 등과, 송경은 안축(安軸)과 동년이며, 이인복(李仁復), 승려 식무외(式無外) 등과 교유한 바 있다.
왕사성은 최해 와 동년이며, 고시관으로서 이색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게해사는 옥전선사 (玉田禪師)・홍참군(洪參軍) 등과 접촉한 바 있으며, 특히 그의 동생 게이충 (揭以忠)은 충숙왕 때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의 이문(理問)으로 고려에 파견된 적도 있었다.87)
87) 張東翼, 1992 앞의 논문 ; 張東翼, 1997 앞의 책 ; 高惠玲, 2001 高麗後期 士大 夫와 性理學 受容, 一潮閣, 176~195쪽 ; 도현철, 2021 앞의 책, 136~160쪽 등을 참조
이곡은 고려 역사의 기원을 기자로 내세우고, 자신이 살던 시대를 기자 전통의 연장으로 파악하며 그와 관련된 글을 많이 남겼다.88)
이곡을 비롯한 인물들의 이러한 설명, 주장을 들은 몽골 측 의 지식인들이 그에 어느 정도 동조하면서 결과적으로 송사 고려전의 첫 머리에 고려의 역사가 기자로부터 이어진다는 위와 같은 설명이 포함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골제국의 마지막 순간에 편찬된 이역지(異域志)는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옛날의 조선(朝仙)으로, 고려라고도 한다. 동북 해안가에 있다. 주가 기자를 봉 한 나라로, 상(商)나라 사람 5천 명이 그를 따라갔다. 그 의무복서(醫巫卜筮), 백 공기예(百工技藝), 예악시서(禮樂詩書)는 모두 중국을 따랐다. 의관은 중국 각 왕 조의 제도를 따랐으며, 중국의 정삭(正朔)을 썼다. 왕자는 중국의 태학에 입학하 여 독서를 하였다. 풍속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인성은 순박하고 인정이 많다.89)
이역지는 원 말 명 초의 문인 주치중(周治中)이 지은 일종의 지리서로, 실존하는 국가와 상상 속의 국가를 합쳐서 200곳에 달하는 ‘이역(異域)’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90)
88) 최봉준, 2013(b) 앞의 논문 ; 도현철, 2021 앞의 책, 326~329쪽 참조.
89) 周治中, 異域志 卷上, 朝鮮國. “古朝仙, 一曰高麗. 在東北海濱. 周封箕子之國, 以商人五千從之. 其醫巫卜筮, 百工技藝, 禮樂詩書, 皆從中國. 衣冠隨中國各朝制 度, 用中國正朔. 王子入中國太學讀書. 風俗華美, 人性淳厚.”
90) 송정화, 2018 「상상과 경험의 착종 공간 - 《異域志》의 지리관념을 중심으로 -」 中 國語文學志 63, 중국어문학회 참조.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나충록(裸蟲錄)이라 는 이름이 붙었으나 그 뒤에 일실되었다가 명 대에 다시 이역지라는 이 름으로 출판되어 유행했다고 한다. 정확한 간행 연대는 확인되지 않으나,
호유용(胡惟庸)이 지은 서문에서 오(吳) 원년, 그러니까 주원장(朱元璋) 세력 이 명을 건국하고 홍무(洪武) 연호를 세우기 1년 전인 1367년에 그가 강릉 (江陵)에서 이 책을 입수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91) 원 말에 이미 세상에 나 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표제어의 ‘조선’은 조선 건국(1392) 후 그 국명이 명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다음에 이 책을 재간행하면서 붙인 것 으로 보인다. 위의 짧은 기록에는 ‘고려’에 관한 서로 다른 계통의 여러 정보가 착종 되어 있다.92)
예컨대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분의 개성부(開城府)에 관 한 설명이나 동경(東京)・서경(西京), 180개의 군(郡) 등에 대한 정보는 기본 적으로는 문헌통고 고구려의 내용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이나, 일부 정보는 잘못 싣기도 하였다.93)
또한 주나라 때 기자가 봉건을 받은 땅이라 는 서술과, 그에 이어지는 상나라 사람들의 이주, 그리고 “의무복서, 백공 기예, 예악시서는 모두 중국을 따랐다”는 서술은 동국통감(東國通鑑) 기 자조선(箕子朝鮮)에서, 함허자(涵虛子)를 인용한 부분과 일치한다.94)
91) 四庫全書總目提要 권78, 史部 34, 異域志.
92) 이 책에 열거된 다양한 국가에 대한 정보는 山海經을 비롯한 고대 이래의 신화 와 전승을 담은 지리서, 그리고 각종 史書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송정화, 2018 앞의 논문 참조.
93) 예컨대 고려의 왕궁을 ‘神窩’라고 한 것은 문헌통고에서 ‘神高’라고 한 것을 잘 못 옮긴 것으로 보인다. 문헌통고에서는 百濟=金州金馬郡=南京, 南平壤=鎭州= 西京이라고 하였으나, 이역지에서는 百濟=金州=西京이라고 하였다.
94) 東國通鑑 箕子朝鮮. “箕子率五千人入朝鮮, 其詩書禮樂・醫藥蔔筮, 皆從而往.” 이 구절은 동국통감 이전의 다른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韓永愚, 1978 「<東 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下) 韓國學報 16, 一志社, 44쪽 ; 韓永愚, 1982 「高麗-朝鮮前期의 箕子認識」 韓國文化 3,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참조.
어쨌든 고려를 소개하는 첫머리에 기자가 위치하게 된 것은 원 대 내내 계속된 고 려의 역사 인식 교정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해석할 만하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에 대한 이미지도 많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개소문(蓋蘇文) 이후에 무사(武事)를 줄이더니, 蓋蘇文後少武事,
지구루(漬溝樓) 아래 책 읽는 소리가 있네. 漬溝樓下有書聲.95)
이곡에게 지어준 시에서 송경은 고려를 설명하며 ‘개소문(蓋蘇文)’, 즉 연개소문과 ‘지구루(漬溝樓)’, 즉 책구루를 소재로 삼았다.
“연개소문 이후 무사를 줄였다”는 말은 당 태종을 곤경에 빠뜨렸던 강인했던 고구려였으 나, 그 이후에는 중국과의 대립한 일이 없었음을 뜻한다.
‘지구루(漬溝樓)’ 는 ‘책구루(幘溝漊)’의 오기일 것인데, 책구루란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에 처음 등장하는 단어로, 한나라 때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하사하면 고구 려 사람들이 책구루에 와서 그것을 가져갔다는 설명 속에 거론된다.96)
삼 국지의 위 기사는 그대로 문헌통고에도 실렸으며,97) 그에 앞서 고려 도경에도 소개된 바 있어,98) 송경이 들어봤음직한 단어이다.
또한 오대 회요와 그를 인용한 문헌통고에서도 고려를 소개하여,
“그 풍속에 문자 를 알고 독서를 잘 하였다. 서민(庶民)・천인(賤人)의 집에서는 각각 길거리 에 큰 건물을 지어두고 그를 일컬어 ‘국당(局堂)’이라고 하였는데, 자손들이 밤낮으로 책을 외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한 바 있다.99)
95) 宋褧, 燕石集 권7, 律詩, <高麗人李穀字中甫 元統元年登乙科 爲翰林檢閱官 明年被命使本國宣諭勉厲學校制書 其行也 贈之以詩>
96) 三國志 魏書 권30, 東夷, 高句麗. “漢時, 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 受朝服・衣 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復詣郡,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 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97) 文獻通考 권325, 四裔考 2, 高句麗. “自武帝・昭帝賜其人以衣幘・朝服・鼓吹, 常 從元菟郡受之. 後稍驕, 不復詣郡, 但於東界築小城受之, 名此城以爲幘溝婁. 溝婁 者, 高麗名城也.”
98) 고려도경 권1, 建國, 始封. “於東界築小城, 歲時受之. 因名幘溝漊, 溝漊者, 高 麗名城也.”
99) 文獻通考 권325, 四裔考 2, 高句麗. “其俗知文字, 善讀書. 庶賤之家各於衢路 造大屋, 謂之局堂, 子孫晝夜誦書, 習射.” 이는 五代會要 권30, 高麗의 “俗好 經書, 至于庶賤之家, 各于衢路造大屋, 謂之扃堂, 子孫晝夜讀書習射.”를 옮긴 것 이다. 또한 新五代史에도 “高麗俗知文字, 喜讀書.”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오 대회요의 위 기사를 인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고려’라는 국호를 매개로 거의 1천 년의 시차를 둔 책구루 이야기와 오 대 시기의 독서 풍속에 대한 언급을 엮어낸 것이다.
고구려에 관한 수많은 기억, 고구려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단어들 가운데 굳이 책구루를 거론한 의도는 명확하다.
한(漢)으로 대표되는 중국과 고구려-고려의 문화적 일체 감, 혹은 중국에 의해 교화되는 고구려의 모습을 상징하는 시어(詩語)로서 이를 선택한 것이다.
과거의 고구려가 연개소문으로 상징되는 무(武)의 이 미지였다면, 현재의 고려는 책구루를 통해 중국의 교화를 받드는 문(文)의 이미지로 형상화된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시를 받은 이곡의 문집에서는 이 구절을 아래와 같이 고쳤다는 것이다.
기자가 끼친 풍교(風敎) 어언 이천 년, 箕子餘風二千載,
책구루 아래에 책 읽는 소리가 있네. 幘溝漊下有書聲.100)
100) 李穀, 稼亭集 雜錄, <送李中父使征東行省序> 이하의 送詩
송경의 원래 시에서
“개소문 이후에 무사를 줄이더니[蓋蘇文後少武事]”
라 고 했던 부분을
“기자가 끼친 풍교 어언 이천 년[箕子餘風二千載]”이라고 바꾼 것이다.
해당 부분을 이곡 본인이 고친 것인지, 아니면 가정집을 편 집한 그의 아들 이색이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곡 – 이색 부자 는 국내에서 읽힐 것으로 기대된 글에서조차 연개소문을 들먹이는 것, 고 구려와 얽히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음을, 그 대신 기자의 내러티브를 끼워 넣고 싶어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맺음말
몽골제국은 처음에는 고려가 당연히 고구려와 동일한 정치체인 줄 알았 다. 송 대 내내 편찬된 사서・유서・정서, 심지어 고려에 관한 가장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어 널리 읽혔던 고려도경에서까지 모두 그렇게 서술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의 인식 속에 고구려는 여러 번 중국의 변 경을 어지럽힌 나라, 수 양제와 당 태종을 무찌른 나라라는 부정적인 인상 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자연히 강화를 맺은 초기의 고려에 대 한 불신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고려는 이러한 몽골 측 인사들의 인상을 뒤바꾸고 싶어 했다. 고려는 자 신이 고구려와는 다른 나라임을,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는 나라임을 강조 하는 역사서를 편찬하여 몽골 조정에 전달하였다. 또 고려의 관료, 문인들 은 몽골 측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유하며 역사를 논하면서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고구려를 대신해서 기자를 내세우며, 고려가 중 국과 태생적으로 동질성을 가질 수 있는 국가라고 어필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노력은 반만 성공했다. 고려의 주장을 들을 수 있었던 정 부 관료들, 대도를 중심으로 하는 화북의 문인들은 고구려와 고려가 다른 국가임을 인식하고, 대신 기자를 소재로 우호적인 시각으로 고려를 묘사하 였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없었던 재야의 인사들, 특히 강남의 문인들은 여 전히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국가라고 인식하였다.
후자의 편에서 작성한 문헌통고가 원 대 편찬된 유서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짐으로써 고려 와 고구려가 같은 국가라는 인식은 오히려 더욱 확산, 고정되었다.
다만 고려와 교유했던 인물들이 송사 편찬에서 참여하면서, 적어도 송사 고려전에는 불완전하게나마 고려의 입김이 반영되었다. 고구려 앞에 기자를 끼워 넣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명 건 국 직후에 편찬된 원사 고려전에도 반영되었다. 고구려인가 기자조선인가 : 몽골제국에서 고려 역사상의 경합 185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해진 땅으로, 또한 부여 별종이 일찍이 그곳에 살았다. (중략) 후에 땅을 더욱 넓히고 옛 신라・백제・고구려 3국을 병합하여 하나로 하 였다. 그 군주의 성은 고씨로, 처음 나라를 세웠다가 당 건봉(乾封) 초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였다. 수공(垂拱) 이래로 자손이 다시 그 땅에 봉해졌다가 후에 서 서히 자립할 수 있었다. 오대 때에 이르러 대신 그 나라의 군주가 되어 송악(松 岳)으로 천도한 이는 성이 왕씨이고 이름이 건(建)이다.101)
아주 기묘하게 여러 정보가 뒤섞여버린 형태가 되었다.
고려를 설명함에 부여 별종을 언급한 것은 후한서 고구려전 이래의 고정된 지식이다. 인 용문의 뒷부분에 수공 연간(685~688) 이래 다시 책봉을 받았다가 점차 자 립하였다는 서술은, 즉 한 번 망했던 고려가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 연유 에 대한 설명은 구오대사에서 처음 고안된 이래 송 대 내내 반복된 설명 을 답습한 것이다.102)
그러나 그에 앞서 “본래 기자가 봉해진 땅[本箕子所 封之地]”이라는 서술은 송사 고려전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살아남은 것이다. 원사 고려전을 직접 집필한 인물은 송희(宋禧)라고 알려지는 데103) 그 역시 고려의 문인, 지식인, 관료들과 교유하면서 이러한 지식을 얻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101) 元史 권208, 高麗. “高麗本箕子所封之地, 又扶餘別種嘗居之. (중략) 後闢地益 廣, 并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爲一. 其主姓高氏, 自初立國至唐乾封初而國 亡. 垂拱以來, 子孫復封其地, 後稍能自立. 至五代時, 代主其國遷都松岳者, 姓王 氏, 名建.”
102) 정동훈, 2021(a) 앞의 논문, 230~231쪽 및 248쪽
103) 주 65) 및 정동훈, 2021(b) 앞의 논문, 79쪽
다만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고려의 역사 수업은 절반, 혹은 그 이 하만 성공하였다.
송사와 원사 고려전에 기자를 끼워 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고구려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도, 그렇다고 고구려의 인상을 좋 은 것으로 깔끔하게 뒤바꿔놓지도 못했다.
고려가 공을 들였던 역사 공작이 하루아침에 도루묵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려가 신경을 써서 관리했던 화북의 지식인들은 1368년 천명(天命)이 남쪽으로 돌아간 이후 힘을 쓰지 못했다.
새로 정권을 잡게 된, 그래서 새 로 붓을 쥐게 된 인물들은 원 대 내내 찬밥 신세였던 강남의 지식인들이었 다.104) 그들은 고려 사람들과 접촉면이 없었다.
그들은 고려 사람들의 말이 아닌 선배들의 글을 통해서만 고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글에는 한결같이 고려가 고구려와 동일한 국가라고 적혀 있었다.
강남 출신 조언 자들이 정리해준 지식을 전수받은 명 태조 주원장은 고려를 고구려의 후예 라고 일컫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105)
104) 원사 편찬을 맡았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王愼榮・葉幼泉・王斌, 1991 앞의 책, 7~16쪽 ; 錢茂偉, 2003 明代史學的歷程,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64~66쪽 참조.
105) 예컨대 그는 홍무 21년(1388) 고려 사신 朴宜中을 만난 자리에서 역대 중국 왕조 들이 고구려, 그리고 고려를 침략한 사례를 줄줄 읊으며, 고려를 反覆無常, 叛服 無常한 국가라고 칭하였다. 고려사 권137, 창왕 즉위년 6월 참조. 그는 고려의 성품과 습속이 漢・唐・宋의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언급한 바도 있다. 大明 太祖皇帝御製集 권3, <諭遼東都指揮使潘敬葉旺敕>(中華書局 編, 2015 稀見 明史硏究資料五種 1, 北京: 中華書局, 385쪽)
안 그래도 그는 의심스러운 눈 으로 고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고려에 덧씌워진 고구려의 이미지는 그의 부정 편향과 결합하여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켰다.
명 초 홍무제(洪武帝)와 강남 지식인들의 고려 역사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통해 논하 고자 한다.
주 제 어 : 고구려, 기자, 역사인식, 관방 역사학, 계승의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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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as it from Goguryeo(高句麗) or Gija Joseon(箕子朝鮮)? – Goryeo’s Own Historical Origin, Contended over in the Mongol Yuan Empire
Jung Dong-hun
Just as the intellectuals of the Chinese Song(宋) dynasty did, Mongol Imperial officials in the early days of contacting Goryeo believed that Goryeo was the same dynasty with Goguryeo(高句麗) from the Korean peninsula’s ancient past. This misconception also let them to suspect that Goryeo could become a threat at any point, with an image of Goryeo being a ‘country with a strong military force’ embedded in their minds. Feeling uneasy and not to mention pressure from such misled preconception, the Goryeo government and intellectuals continuously denied the existence of any sort of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the late Goguryeo. They also tried to promote the ancient sage Gija(箕子) as the Goryeo dynasty’s symbolic originator of its civilization, in an attempt to replace Goryeo’s overall image as a ‘belligerent, aggressive race since the old Goguryeo days’ with the image of “Gija” which in fact signified the Korean peninsula’s long, amicable relationship with China while also symbolizing the peninsula’s advanced civil culture. The Goryeo officials’ efforts, including the authoring and spreading of several history books, and exchanging conversations with the Mongol intellectuals, eventually generated a desired effect and resulted in the Mongol Empire’s new official historical perception (mainly prevailing in the Daidu/大都 region), which no longer considered Goryeo as an entity whose origin was rooted in the Goguryeo legacy. Whenever they were to describe the history of Goryeo, they would not only mention Goguryeo but always Gija as well, as can be seen in the “Goryeo” chapter(高麗傳) inside the Songshi(Official Song History, 宋史) -compiled by the intellectuals in the Huáběi(華北) region in 1345-, which serves as a definite example of this sort of change in historical perception. But the literary figures in the Jiangnan(江南) region, who had no affiliation with the Mongol Imperial government and did not have the opportunity to actually meet their Goryeo counterparts, still believed that Goryeo was ‘of the late Goguryeo.’ Such belief can be seen from Wénxiàn Tōngkǎo(文獻通考), one of the most renowned encyclopedic texts of the time. And quite ironically, after the Ming(明) dynasty, a newborn one based on factions from the Jiangnan 192 역사와 현실 125 region, was able to drive the Mongol Empire out of China (which had its own basis in the Huáběi region), the “Goryeo” chapter(高麗傳) in Yuanshi(Official Yuan History, 元史) compiled by the Jiangnan region scholars in 1370 displayed the official historical perception reverted back to how it had earlier been, which was to identify Goryeo with the legacy of Goguryeo
Key words : Goguryeo, Gija, historical perception, official historiography, sense of succession
투고일자 : 2022.07.31. 심사일자 : 2022.08.20. 게재확정일자 : 2022.08.31.
역사와 현실 125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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