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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 연구-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중심으로-/정종원.한양대

Ⅰ. 머리말

Ⅱ.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그 수용

Ⅲ.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입각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

Ⅳ. 독립신문 국제정치관의 현 실주의적 요소와 그 의미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독립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개항기 의 가장 중요한 정치운동 중 하나인 독립협회 운동의 기관지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독립신문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졌지만, 특히 핵심적인 부분은 독립신문의 국제정세 인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독립신문을 주도했던 세력의 운동인 독립협회 운동이 열강의 침략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하였는지를 밝히기 위한 것 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독립협회 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평가하기 위 한 시금석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항기는 외세의 압력에 의해 국가의 존속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제정치를 어떻 게 인식하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국가전체의 개혁 구상 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것이었다.

즉, 국제정세 인식은 독립신문, 더 나아가 독립협회 운동의 개혁론을 규정할 수 있는 방향타의 역할 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의 국제정세 인식에 대한 연 구는 상당히 축적되어왔다.

기존의 연구들은 독립신문의 국제정세 인식을 놓고 상당한 이 견을 노출했다.

신용하는 독립신문이 자주독립사상을 가지고 있어 서 열강의 이권침탈에 반대하였으며, 모든 나라에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중립외교론을 펼쳤다고 주장했다.1)

그러나 이러한 신용하 의 주장은 연구자들의 잇따른 반론을 맞이했다. 김용섭은 독립신문 이 특정 국가에 대하여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판했고,2) 최 덕수는 독립신문이 표면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표방했지만, 열강에 대한 인식이 매우 편파적이고 불철저하였다고 평가하였다.3)

1) 신용하, 2006, 신판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84~203쪽

2) 김용섭, 1976, 「서평 독립협회연구」 한국사연구 12, 154쪽

3) 최덕수, 1978, 「독립협회의 정체론 및 외교론 연구」 민족문화연구 13, 228~229쪽

특히, 주진오는 ‘독립협회의 대외인식의 구조와 전개’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독립신문의 국제정세 인식을 국제정치관과 결부시켜 입체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주진오는 독립신문의 대외인 식의 구조는 세력균형에 의한 중립론, 만국공법 준수론, 통상확대론, 외자유치론 등이라 보았다.

주진오는 독립신문의 중립론은 세력균 형에만 의지하고 군사력 확충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한국 이 힘이 없으니 조약과 만국공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했으며, 외자유 치론을 통해 사실상 열강의 이권침탈을 긍정했다고 보았다.

그리하 여 독립신문의 전체적인 지향성은 한국의 자생적 근대화를 위한제어장치 없이 한국을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빨리 편입시키려는 것이 었으며, 이는 종속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4)

이처럼 독립신문의 국제정세 인식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으나, 국제정세 인식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틀인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쟁은 없었다.

연구자들은 독립신 문이 국제사회를 권력정치로 인식했다고 보았으며, 독립신문의 중립외교론은 세력균형의 관점에서만 주로 검토되었다.

특히, 사회 진화론의 관점에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보는 연구들이 진행 되어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이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국제질 서를 권력정치로 인식했다고 보는 연구들이 많았다.5)

19세기 서구의 국제정치사상은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경향은 국제정치를 권력정치와 국가간 생존경쟁으로 보 면서, 세력균형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현실주의를 중심으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분석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독립신문에는 한국의 독립을 만국공법, 곧 오늘날의 국 제법에 의존하려는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6)

국제정치에서 만국공법 을 신뢰하고, 의존하는 이러한 주장은 국제정치를 힘의 질서로 보는 시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7)

4) 주진오, 1986, 「독립협회의 대외인식의 구조와 전개」 학림 8, 77~89, 104~105쪽.

5)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사회진화론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로는 주진오, 1986, 앞 논문 ; 주진오, 1988, 「독립협회의 사회사상과 사회진화론」 손보기 선생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 정낙근, 1993, 「개화지식인의 대 외관의 이론적 기초」 한국정치학회보 27 ; 전복희, 1996, 사회진화론과 국 가사상, 한울아카데미 등이 있다.

6) 「유 지각 ​​사​​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0. 1면 ; 「현금 텬하의 학슐이」 獨立新聞 1899. 10. 05. 1면

7) 예컨대 국제정치를 힘의 질서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황성신문은 만 국공법을 외교에서 활용하기는 해야 하지만, 만국공법을 신뢰하거나 의존해 서는 안 된다는 ‘불신활용론’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종원, 2022, 개화기 언론의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46~251쪽) 국제 정치를 힘의 질서로 본다면 만국공법을 이용하자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만국 공법을 신뢰하고 의존하자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독립신문은 만국공법을 신뢰하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국제정치를 힘의 질서로 보는 관점과 모순된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들에서도 이러한 모순을 발견하였고, 독립신문이 만국공법의 효력을 중시하였던 것은 그들 의 사회진화론과 모순되었다고 평가했다.8)

혹은 독립신문은 힘이 없 기에 만국공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인식했다고 하는 등 권력정치를 중 심으로 독립신문을 이해했다.

그래서 독립신문이 힘이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군사력 확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하였다.9)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는 왜 이러한 ‘모순’이 발생한 것인지에 대 해 정밀한 검토를 진행하지 못했다.

독립신문이 정말로 국제정치 를 힘의 질서로 인식했다면, 아무런 대책없이 군사력 확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이 정말 로 그런 모순된 이야기를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혹은 독립신 문이 정합적으로 구성하고 있던 사상을 현대의 연구자들이 오해하 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기존의 시각이었던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19세기 영 미권의 주류적인 국제정치사상이었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검토 하고, 이를 통해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분석하고자 한다.10)

8) 전복희, 1996, 앞 책, 122~123쪽

9) 주진오, 1986, 앞 논문, 100~105쪽

10) 한국학계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에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부상하여 국제연맹을 창설한 이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윤상현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한 근대 국민국가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이상인 국제기구가 동시에 등장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분석했다(윤상현, 2016, 「주권, 세계 구상,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계보」 개념과 소통 17). 박은재는 1차 대전과 2차 대 전 사이의 전간기에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영제국에 대한 담론과 어떻게 결 합했는지, 그리고 국가와 세계에 대한 전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분석했다. (박은재, 2019, 「국제연맹 연합(League of Nations Union)’과 전간기의 국제주 의적 제국관」 영국연구 41 ; 박은재, 2021, 「영국 ‘국제연맹연합(LNU)’의 난 민 보호 활동, 1935-1939 -전간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의 인도주의 활동 과 그 역사적 맥락-」 영국연구 45) 이처럼 한국학계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 의에 대해 일정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대체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연구가 집중되었으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한국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모순’으로 해석되어온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정합적으 로 해석하고, 미국의 사상적 영향력이 개항기 한국에 상당히 깊숙이 침투해있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독립신문이 현실주의만 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통해 개 항기 한국의 사상이 기존 연구에서 밝힌 것보다 더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음을 밝힐 것이다.11)

11)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독립신문이 국제정치와 외교에 대해 어떠한 주장을 펼쳤는지가 연구대상이기 때문에, 국문판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Ⅱ.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그 수용

1.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19세기 주요 국제정치사상 중 하나인 자유주의적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는 무정부상태에서 전쟁이 횡행하던 국제사회를 진 보를 통해 개혁하여, 국제사회에 질서를 세우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이데올로기이었다.12)

12) Casper Sylvest, 2009, British liberal internationalism, 1880-1930,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pp.3~16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기원은 18세기 국제법 사상과 계몽주의에 서 시작되었다. 국제정치는 통일된 권력이 없기에 무정부상태와 그 에 따른 끊임없는 전쟁위험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을 바 꾸기 위해 16~17세기 서양에서는 신이 만든 자연법을 국제법으로 만들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흐름을 이어받아 18세기 후반에는 임마누엘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국제연맹을 조직하여 국가간의 전쟁을 영구히 종식시킬 것을 제안했으며, 제레미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에서 성문화된 국제법과 국가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할 수 있는 국제법원의 필요성을 주장했다.13)

이러한 주장들은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자 국제주의 운 동으로 이어졌다.

국가간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전쟁을 억제하려는 19세기의 국제주의 운동에는 종교인 중심의 평화운동이나, 마르크스 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 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의 국제주의는 대 체로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성장한 것이었고, 국제주의와 자유주 의는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14)

따라서 19세기의 국제주의의 주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였다.15)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또 다른 기원은 자유주의 정치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정치사상의 주류는 자유주의였 다.

영국에서는 1830년대 중반부터 1914년까지 자유주의가 영국의 지배적인 정치사상이었다.16)

한편, 미국에서는 1776년의 미국혁명 이후 19세기 미국사회에서 자유주의는 사회의 기반이 되는 정치사상 으로 기능했다.17)

13) Mark Mazower, 2013, Governing the world, The Penguin Press, pp. 24~31 ; 임 마누엘 칸트 지음, 이한구 옮김, 2008, 영구평화론, 서광사, 32~38쪽

14) Casper Sylvest, 2009, op. cit., p.9

15) Duncan Bell, 2007, “Victorian Visions of Global Order: an introduction”, Victorian Visions of Global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9~10

16) CASPER SYLVEST, 2009, op. cit., pp.25~28 17) 루이스 하츠 지음, 백창재・정하용 번역, 2012,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 나남

국내의 정치사상인 자유주의는 국제정치에 대한 사상인 자유주의 적 국제주의로 확장되었다.

자유주의는 자유, 개인과 국가의 발전(진 보), 법치에 기반한 정부와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실 현하기 위해 국내개혁의 경험을 국제정치로 유추하였다.

또한, 전쟁 의 위협이 계속되면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생존할 수 있도록 국제질서를 개편할 필요성도 이러한 확장의 이유 중 하나였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목표는 국제정치에 질서를 수립하여 평화 를 확보하고, 국제법을 중심으로 정의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국제정치가 무정부상태를 피할 수 없다고 보는 현실주의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이렇게 현실주의와 다른 구 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류의 도덕적, 정치적 진보가 가능하다 는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자유주 의적 국제주의는 국제정치에서 진보, 질서, 정의라는 세 가지 핵심목 표를 추구하는 사상이었다.18)

이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지식인들의 주류적인 국제정치사상이었다.19)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국제정치에 질서와 정의를 확립하기 위해 내세운 핵심적인 동력은 자유무역(국제상업)과 국제법이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가지 고 있던 사상가들은 대체로 이 두 가지를 결합하였지만, 사상가마다 강조하는 바는 서로 차이가 났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었다.20)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자유무역이 국가 간 상호의존도를 높여서 전쟁의 가능성을 낮춘다고 보았다.

예컨대 존 스튜어트 밀은 도덕적 영향력만으로는 인류에게 형제애를 심어줄 수 없고, 이해관계에 기 반하여 공동체 의식을 확립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취지에서 밀 은 상업이 자연스럽게 전쟁에 반대되는 개인의 이익을 강화하게 된 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밀은 국제무역의 증가는 세계평화를 보장하 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1)

18) Casper Sylvest, 2009, op. cit., pp.3~16, pp.48~50

19) Duncan Bell, op. cit., pp. 9~10 ; Frank Ninkovich, 2009, Global Dawn -the cultural foundation of american internationalism, 1865-1890-,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pp.1~14

20) Duncan Bell, op. cit., pp. 9~10

21) Casper Sylvest, 2009, op. cit., pp.37~38 ; Anthony Howe, 2007, “Free trade and global order: the rise and fall of a Victorian vision”, Victorian Visions of Global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26

이러한 자유무역론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에서 공유되는 사상이었다.

다음으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법을 매우 강조했다. 자유 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법을 성문화하고, 국가들의 분쟁을 전쟁이 아닌 국제법원에서 국제법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힘에 의한 질서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질서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이때 국 제법이 적용되는 국제법체제의 일원이 되는 기준은 법치와 문명이었 다.22)

국제법, 그리고 국제법을 실행해줄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정치 에 질서와 정의를 세우자는 주장은 영미권 모두에서 강하게 나타났 지만, 특히 미국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19세기 미국의 평론가 고드킨 (E.L.Godkin)은 법이 국제관계의 유일하면서 진정한 통제자가 될 것이라 예측했으며, 그랜트 대통령(Ulysses S. Grant)은 모든 국가가 인정하는 법원이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공개적 으로 언급했다.23)

그러나 19세기에는 아직 국제법원과 같은 국제기구가 출현하지 않 았다.

그러므로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법의 집행력을 국제여론에 의존하려고 했다.

국가간 교류와 통신의 발달 및 이성의 발전에 의해 국제여론이 국제법을 지키게 만들거라는 주장이었다.

국제여론이 국가의 이익을 떠나 문명과 국제법이라는 기준에 따라 형성될 것이고, 이렇게 형성된 국제여론의 힘을 개별 국가가 무시하 기 어려울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이에 울시(Theodore Dwight Woolsey) 가 저술하여 미국에서 널리 사용된 국제법 개설서(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에서는 국제여론이 국제법 준수를 촉진하 는 힘으로써 작동하며, 그 중요성이 계속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24)

또한, 국제법의 집행력을 위한 국제행정부를 따로 세우지 말고, 국제 여론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19세기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다.25)

22) Mark Mazower, op. cit., pp.82~88

23) Frank Ninkovich, op. cit., pp.303~305 ; Mark Weston Janis, 2004, The American Tradition of International Law,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136~138

24) Frank Ninkovich, op. cit., pp.303~305

25) Mark Weston Janis, op. cit., pp.103~105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법의 집행력을 국제여론에 의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국제법을 통해 국제정치에 질서와 정의를 세우려고 했다는 점은 19세기 국제법에 대한 기존 한국학계 의 이해와는 거리가 있는 부분이다.

기존의 19세기 국제법에 대한 이 해는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의 국제법에서 윤리와 보편주의를 강조하 던 자연법적인 성격이 쇠퇴하고, 국제법을 관습법 혹은 사례집으로 보는 법실증주의가 강화되었다고 본다.

이에 따라 19세기 국제법은 같은 관습을 공유하는 유럽국가에게만 적용되는 법이 되었고, 비유 럽국가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유럽국가의 비유럽국가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26)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 면 사례집에 불과한 19세기 국제법이 어떻게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말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영미권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국제법의 발전과정은 이러한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면이 있다.

1830년대에 국 제법은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주권이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도덕규칙에 불과하다는 공격을 받았다.

이는 19세기 내내 국제법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국제법학자들을 괴롭히는 문제가 되었다.

국제 법학자들은 국제법은 법이 아니라는 도전에 맞서기 위해 법실증주의 를 도입하여, 국제법의 기반을 자연법이 아니라 국가간의 관습법에 두었다. 이는 기존 연구가 밝힌 부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 세기 영미권의 국제법학자들은 19세기 지식계의 도덕주의적 지향을 공유했고, 국제법의 윤리적 힘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19세기 국제법학자들은 순수한 자연법주의 혹은 순수한 법실증주의만 가진 경우는 소수였고, 주류는 이 두 가지 정당성을 결합하는 경우가 많 았다.

19세기 국제법에서 법실증주의가 자연법주의를 압도했다는 서 술은 너무 단순한 서술인 것이다.27)

26) 김용구, 2008, 만국공법, 소화, 41~54쪽

27) Casper Sylvest, 2007, “The foundations of Victorian international law”, Victorian Visions of Global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52~57

19세기 국제법학계에서 자연법주의와 법실증주의를 결합하기 위 해 동원한 것은 진화론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진화론은 지식인들 사 이에 인기가 있었고, 과학적 확실성을 부여해주는 것으로 인식되었 다. 이에 국제법학자들은 법의 진화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19세 기 당시의 국제법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여 관습법에 머물고 있지만, 문명이 발전해가듯이 국제법도 진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 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법이 성문화, 제도화를 통해 점진적으 로 진화하여 결국에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보편적인 법으로 만드는 토대이자 보호자 역할을 했던 자 연법의 역할을 법의 진화라는 개념이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국제법학계의 주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를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28)

28) Casper Sylvest, 2007, op. cit., pp.56~60

즉, 국제사회에서 질서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수립하겠다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목표를 국제법 이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 19세기 영미권 국제법학계의 주류였던 것이다.

19세기 국제법이 유럽국가들에게만 적용되는 법이 되었다는 기존 의 설명도 19세기 국제법의 양상을 전부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 법이 법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보편주의적 성격을 가진 자연법이라 는 토대를 벗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럽 중심의 국제법 공동체 에서 만들어진 관습법을 토대로 삼게되면서 국제법의 유럽중심주의 가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국제법학자들은 이전의 보 편주의적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이들은 보편주의의 기반을 이 전의 신과 자연법에서 문명과 진보로 교체했다.

그 결과 국제법의 보편성이라는 이상은 적용과정에서 문명과 진보라는 프리즘으로 굴 절되었다.

즉, 비유럽사회는 아직 문명에 이를정도로 진보하지 못했 기 때문에 국제법 적용을 유예시킨다는 식이었다.

이를 통해 19세기 국제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평등을 존중하고, 보편주의를 추구 한다고 하면서도 차등 대우를 정당화했다.

19세기 국제법학계는 국 제법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문명과 진보라는 담론을 통해 국제법 을 문명화된 유럽에만 적용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였다.29)

즉, 기존의 설명대로 19세기 국제법이 비유럽국가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던 점은 맞지만, 그 논리는 국제법의 보편성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므로 19세기 국제법학계는 여전히 보편주의적인 성격을 가지 고 있었으며, 국가들의 행위를 추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 회에 질서를 수립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국제법은 자 유주의적 국제주의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추구한 평화로운 국제질서는 자유무역을 통해 상호의존도를 높여 전쟁의 가능성을 낮추는 경제체 제와 국제법과 국제여론에 의해 국가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국제법체 제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 제정치를 힘이 아닌 법에 의해 통제하는 질서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 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기준을 법치와 문명으로 설정했다.

그리 고 이 질서를 해치고, 국제법을 어기는 경우에는 국제여론을 통해 위반행위를 통제하려고 했다.

이때 국제여론은 문명과 국제법이라는 기준에 따라 이성적으로 형성될 것이므로 특정국가에 편중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자유무역과 국제법 그리고 국제여론의 힘으로 국제정치에 질서와 정의를 확립할 수 있 다고 주장하고 있었다.30)

29) Jennifer Pitts, 2007, “Boundaries of Victorian international law”, Victorian Visions of Global Order, pp.62~82

30)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20세기에도 그 전통이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관계학이 처음 만들어질 때 학계의 흐름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주도했다. 다만, 1차 세계대전의 개전 과정에서 국제여론이 전쟁을 막을 수 있 다는 환상은 무너지고, 대신 국제기구를 통해 제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고, 이는 국제연맹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 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힘이 약화되고, 현실주의가 주 도권을 잡았다. 1950년대 말 이후 부터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자유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 주도권이 변동되고는 했다. 현대의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여러 이론들의 영향과 논쟁 속에서 만들 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은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계승한 것으로서 변화된 점과 연속되는 점이 함께 있다고 볼 수 있다(David Long, 1995, “Inter-war Idealism, Liberal Internationalism, and Contemporary International Theory”, Thinkers of the Twenty Years Crisis, Oxford : Clarendon Press; E.H.카아, 김태현 번역, 2000, 20년의 위기, 녹문 당, 23~29, 45~64, 89~116쪽 ; 이삼성, 1997, 「전후 국제정치이론의 전개와 국 제환경」 국제정치논총 36-3 ; 정진영, 2000, 「국제정치 이론논쟁의 현황과 전망」 국제정치논총 40-3).

2. 한국으로의 유입과 독립신문의 수용 원인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주목한 적이 거 의 없기 때문에, 한국에 어떻게 유입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당시 독립신문 집필진이 접했던 서양의 언론과 서 적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서는 자유주의적 국 제주의가 한국에 유입된 명확한 정황은 태서신사에서 찾을 수 있다.

태서신사의 원저(原著)는 로버트 맥켄지(Robert Mackenzie)가 1880년에 영국에서 저술한 19세기: 역사 (The 19th Century: A History)이다.

이 책을 1895년에 중국에서 상해 광학회의 티모시 리 처드(Timothy Richard, 李提摩太)가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 로 번역했으며, 대한제국 학부에서 1897년에 태서신사(泰西新史) 로 번역하면서 한문과 한글로 각각 간행하였다.31)

독립신문은 광 학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티모시 리처드가 쓴 저서들 중에 대한제국 에서 많이 팔린 책으로 태서신사를 거론한 바가 있을 정도로 태 서신사는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32)

태서신사는 전쟁이 인간의 생명을 무고하게 희생시키고,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도덕적 관점과 재물을 허비한다는 경제적 관점에 기초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33)

31) 유수진, 2011, 「대한제국기 태서신사 편찬 과정과 영향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2쪽

32) 노관범, 2000, 「1875~1904년 박은식의 주자학 이해와 교육자강론」 한국사론 43, 127쪽

33) 허재영 주해, 2015, 태서신사 언역본 주해, 경진출판, 205~211쪽

태서신사는 이러한 반전평화론적 입장에서 전쟁을 없애자고 주장했고, 이를 위해 국 가간의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태서신사는 국가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각국을 청하여 곡직(曲直)을 평론하 고, 만약 강하다고 하여 전쟁을 일삼는 나라가 있으면 모든 나라들 이 함께 그 죄를 성토하면 영원히 전쟁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34)

태 서신사는 세계 각국이 ‘약장’을 정하여 국가 간의 ‘시비’를 ‘공론’에 따라 결정해야 하며, 기계(=무기)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 였다.35)

34) 위 책, 23쪽

35) 위 책, 227~228쪽

이는 곧 국제법이라는 규칙을 정해 놓고, 구체적인 국가간의 갈등은 국제여론에 따라 시비를 가리자는 주장이었다.

태서신사는 국제사회를 국제법이라는 규칙과 국제여론의 힘에 의해 규율되게 하 여, 전쟁을 막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을 한국사회에 전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서신사와 같은 서양서적은 한국사회에 자 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을 전파하고 있었으며, 이는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수용하는 배경이 되었다.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수용한 배경은 독립신문 의 집필진이 영향을 받았던 미국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주류사 상이었기 때문이며, 이것이 앞서의 예와 같이 한국사회에 유입되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독립신문의 집필진에 게 알려진 것은 수용의 배경이지,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독립 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수용한 원인은 독립신문에게 자 유주의적 국제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필요했을까?

그 근본적 인 이유는 독립신문이 한국사회 내에서 ‘국제법체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한국을 둘러싼 국 제질서는 중화체제에서 국제법체제로 전환되고 있었는데, 19세기 국 제법체제는 주권국과 반(半)주권국이 혼합된 상태였다.

이에 국제질서의 전환 과정을 지나가야했던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는 매우 불안 정하였다.36)

문명개화파인 독립신문은 한국이 근대 서양문명을 따라서 물질 과 정신을 모두 바꿔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양문명이 만들어냈다는 국제질서인 국제법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한국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문명 개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제법체제는 무엇이며, 한국이 왜 위기를 겪고 있는지,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 인지를 설명해야만 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중심 사상이었던 유교는 도덕을 중심에 둔 정 치를 추구했고, 권력의 정당성은 도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체계에서 도덕은 권력보다 우 위에 있었다.

그래서 유교중심성이 강했던 개항기에는 여전히 근대 적 권력개념이 유교 도덕의 구속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37)

이에 문명개화파조차 도덕중심적인 유교적 사고체계 위에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문명개화파였던 윤치호가 도덕중심 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38)

36) 유바다, 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77~386쪽

37) 장인성, 2006, 근대한국의 국제관념에 나타난 도덕과 권력, 서울대학교출판 부, 24~37쪽

38) 채수은, 2023, 「식민지 시기 윤치호의 사상과 현실인식에 나타난 유교의 영향」 사림 84, 84~87쪽

그러므로 문명 개화파는 개항기 한국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 의 이념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위해 서양문명이 만들어낸 국제질서 를 도덕중심적 관점에서 설명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점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독립신문 입장에서는 매우 설 득력 있는 답을 내놓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바라 본 국제법체제는 질서가 잡히고 정의가 실현되는 국제질서였 다.

즉,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서양이 만든 국제질서 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식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중심 적인 한국사회를 설득해야하는 독립신문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은 여전히 또 다른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왜 도덕이 실현된 국제질서에서 한국은 위기에 처했는가라는 질문이 남 아있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의 대답은 한국이 국제법체제가 요구하 는 조건을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위기를 극복하 기 위한 방안은 바로 국제법체제가 요구하는 조건을 실현시키는 데 에 있게 되고, 독립신문은 그 요구조건을 실현시키는 방안이 곧 자신들이 주장한 문명개화적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국 내정치에서 문명개화파의 정치적 입장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국제정치에서 국제여론-공론의 힘을 강조하 는 주장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독립신문의 문명개화론은 서양의 시선, 곧 ‘문명’의 시선에서 한국사회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한국 인의 생활, 풍속, 가치관을 모두 서구화해야한다고 주장했다.39)

이러 한 주장은 많은 반발을 초래하기 쉬웠고, 당시 한국인들은 왜 서양 인들의 시선에 맞춰 자신들의 삶을 바꿔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독립신문의 대답은 바로 국제여론이었다.

후 술하겠지만, 독립신문은 서양국가들의 전반적인 여론, 곧 국제여 론이 국제정치에서 매우 힘이 크며,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 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은 한국이 외국의 침략을 막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국제여론에서 요구하는 개혁을 해 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에 독립신문은 문명개화노선에 대 한 반대는 한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정치적 반대 파들을 제압하기도 했다.40)

39) 「새것을 좃다」 獨立新聞 1899. 06. 02. 1면 ; 「학부 대신이 갈니고」 獨立 新聞 1896. 10. 10. 1면

40) 독립신문이 게재된 독립협회의 서한에서 독립협회는 갑오개혁 이전의 형벌로 돌아가는 것은 한국의 독립권을 약화시키는 일이라면서 강하게 비난하였 다(「독립회와 즁츄원 왕복」 獨立新聞 1898. 09. 28. 1면).

즉, 독립신문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에서 강조한 국제여론의 힘을 한국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활 과 가치관을 모두 바꾸는 문명개화를 해야 하는 명분으로 활용하였 던 것이다.

독립신문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통해 자신들이 한국사회에 서 대답해야 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 적 국제주의의 설명을 도입함으로써 서양이 주도하는 국제법체제는 질서와 정의가 살아있는 도덕적인 국제질서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국제법체제에서 한국이 위기를 겪는 이유는 국제법체제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위기의 극복방안은 국제여론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수 있도록 문 명개화적 개혁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런 논리구조에 서는 독립신문이 주장하는 문명개화적 개혁에 반대하는 일체의 움 직임은 모두 한국의 독립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 되었다.

독립신문 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이용하여 문명개화론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41)

41)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수용된 또 다른 이유로는 독립신문의 사상이 자유주 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자유주의 사상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로 확장되었 던 19세기 영미권의 상황을 고려하면, 독립신문의 자유주의 사상이 자유주의 적 국제주의를 쉽게 수용하는 이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신문의 자 유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이나미, 2000, 독립 신문에 나타난 자유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Ⅲ.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입각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중심으로 형 성되어 있었다.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형성한 국제정치관의 주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국제 사회의 규율인 법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관,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힘이자 국제법을 실현시키는 힘인 공론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관, 이렇게 두 가지가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받아 만든 국제정치관이었다.42)

42)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서 국제법과 더불어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자유무역 (=국제상업)이다. 독립신문은 자유무역이 인민에게 편리하고, 국가에 부유 함을 가져올 것이라는 논리로 찬성하였다(「어느 나라 ​긔를」 독립신문 1898. 6. 9. 1면). 그러나 자유무역을 국제평화와 연결하는 논리를 제시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는 독립신문의 국제법과 국제여론에 대 한 사상을 중심으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검토하고자 한다.

1. 법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정치를 기존의 힘에 의한 질서인 권 력정치가 아니라, 국제법이라는 규칙에 따르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국제법을 성문화시키고, 국가들이 국제법을 지키게하여 국가간의 분 쟁을 권력과 전쟁이 아닌 법과 평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자유 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국제법체제는 단순히 국가들의 침략과 전쟁을 법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의 전쟁을 법으로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본 국제정치 는 힘에 의한 질서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질서였다.43)

43) 이러한 성향은 특히 미국에서 강하게 나타났고, 19세기 후반 미국의 대통령 및 지식인들은 국제관계를 법이 통제할 것이고, 모든 국가가 인정하는 국제법원이 국제분쟁을 해결하게 될 것이라 보고 있었다(Frank Ninkovich, op. cit., pp.303~305 ; Mark Weston Janis, 2004, The American Tradition of International Law,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136~138).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이처럼 국제정치를 법에 의한 질서로 바 꾸려고 했지만, 법에 의한 질서에서도 여전히 차별이 내포되어 있었 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주장한 법에 의한 질서가 유지되려면 국 가간에 서로 법을 지킨다는 원리, 곧 호혜성이 보장되어야 했다.

국제법을 서로 지켜서 호혜성이 성립하지 못할 경우에는 국제법의 적 용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국제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라 는 관점에서 법치와 문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는 국제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규정되었다.44)

이 때문에 자유주의적 국제 주의는 보편주의를 내세우고 침략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법치와 문 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 대한 개입과 식민지화를 용인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은 사회진화론과는 구분되는 점이 있다.

사회진화론은 약육강식을 기본적인 원리로 하기 때문에, 강자의 약자에 대한 침략과 정복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

이와 달리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서의 식민지화는 문명화를 위한 잠정적 도구 로서만 정당화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성향이 강했던 미국인들은 사회진화론에 따른 식민지화는 문명화라는 목적이 없는 권력이자, 군사적이고 일방적인 이익을 위한 행위라고 비판 했다.

이러한 논리구조에 따르면 비문명국이 문명국의 지위를 획득 하면 양자간의 불평등은 해체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지식인 들은 일본이 문명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 1880년대부터 치외법권폐 지를 내용으로 하는 미일조약개정을 주장했다.45)

44) Mark Mazower, op. cit., pp.82 ; Jennifer Pitts, “Boundaries of Victorian international law”, Victorian Visions of Global Order, pp.62~82 ; 최정수, 2020, 대한제국을 위 한 ‘변론’, 아연, 193쪽

45) Frank Ninkovich, op. cit., pp.271~287

즉, 사회진화론과 달리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법치와 문명을 이루게되면 불평등과 개 입은 철회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생각한 국제정치는 국제관계 가 힘이 아닌 법에 의해 통제되며, 이때 적용되는 국제법은 보편적 인 것으로서 법치와 문명을 갖춘 국가에는 힘의 강약에 상관없이 적 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법치와 문명을 갖추지 않은 국가는 문명국 에 의한 개입, 치외법권과 같은 불평등조약, 식민지화까지도 당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이는 법치와 문명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면 해제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은 법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 관이라는 형태로 실제 독립신문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가장 우선적으로 살펴봐야할 부분은 독립신문이 국제정치를 힘에 의한 질서로 보았는가, 법에 의한 질서로 보았는가하는 부분이다.

독립신 문은 당시 한국이 국제법체제 안에 들어가 있다고 보았다.

독립신 문은 한국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 각국 약조한 나라 틈에 이름을 걸어놓고”라고 하여, 한국이 서양국가와의 조약 체결을 통해 만국공법46)을 중심으로 한 국제법체제에 들어갔음을 분명히 했다.47)

또한, 한국이 그나마 유지되는 이유는 각국과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 라고 하여,48)

한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국제법체제에 들어 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46) ‘만국공법’과 ‘국제법’은 모두 ‘International Law’를 뜻하는 용어인데, 19세기 당 시에는 만국공법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독립신문에서는 ‘만국공 법’ 혹은 ‘공법’이라고 표기하였다. 반면, ‘국제법체제’는 근대 이후 현재까지도 어느정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국제질서이다. 이에 ‘국제법체제’의 경우에는 현재의 주된 용어인 ‘국제법’을 사용하되, 사료에 나타난 맥락을 살리기 위해 독립신문에 대한 분석과정에서는 ‘만국공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47) 「죠션 젼국 ​셰」 獨立新聞 1897. 02. 27. 1면

48) 「셰계에 쳔​​사​​은」 獨立新聞 1896. 12. 19. 1면

이와 같은 언급들은 독립신문이 국제법체제 덕분에 한국이 독 립을 유지하고 있다고 인식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것만으로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국제법체제를 바라보 고 있었는지를 확실히 알기 어렵다. 한국이 국제법체제에 편입된 것 자체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국제법체제를 인식하였는지를 판단하려면, 국 제정치에서 국제법이 권력정치를 넘어서 실제로 국제관계를 규정한 다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인식이 드러나야 한다. 독립신문은 국제정치에서 힘의 강약이라는 권력관계를 넘어서법이 작동한다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독립신문은 1897년 10월 26일자 논설에서 일본의 한 영자신문이 한국은 외국의 지휘를 받으니 독립국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박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독립신문은 한국이 약해서 강한 나 라의 지휘에 상지(相持)할만한 힘이 없는 것이지, 상지할 권리가 없 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외국과 동등한 조약을 하였으므로 한국은 열강과 같은 권리가 있으며, 다만 열강만큼의 힘 이 없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라에 힘이 없다고 하여 그 나 라의 정당한 권리까지 없다는 것은 법률상에 마땅하지 않으며, 한국 을 독립국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만국공법에 어긋난다는 것이 독 립신문의 주장이었다.49)

이러한 독립신문의 논리는 법을 중심으로 국제사회를 보고 있 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었다.

독립신문은 한국이 힘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독립의 침해를 받더라도, 조약에 의거하여 만국 공법상 열강과 동등한 권리가 있으며, 이것이 독립국이라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규정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적 힘이 아닌 법과 권리를 중심으로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는 국제사회를 경제력,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는 약육강식의 세 계가 아니라, 법을 중심으로 규율되는 질서잡힌 사회로 바라보고 있 었음을 보여준다.50)

49) 「일본에 잇​​영국 사​​이」 獨立新聞 1897. 10. 26. 1면

50) 독립신문이 법을 중심으로 국제사회를 인식한 또 다른 논설도 있다. 독립 신문은 외국이 자주독립의 ‘권리’를 침범하면 그 나라에 대해 도리와 경계를 가지고 시비해야하며, 나보다 강하다고 해도 굽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새 로 한 외부 대신 리도재씨​​」 獨立新聞 1898. 02. 05. 2면). 여기에서는 ‘권리’ 를 침범한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지고 시비할 수 있으며, 이는 힘의 강약을 넘어서 대응이 가능하다는 시각이 드러난다. 국제사회가 법으로 규율된다는 전제가 없으면 하기 어려운 서술이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국제정치를 힘이 아닌 법이 통제하는 질서 로 인식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므로독립신문의 입장에서는 힘이 약한 한국에게 권리를 부여한 만국공 법은 한국의 독립 유지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에 독립신문은 만국공법 무용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독립신문은 만국공법이 대포보다 못하다는 주장은 지각없는 자의 말이라면서, 만국과 맹약 을 할 때 빈국과 부국이 섞여 사는데, 빈국이 어찌 병비(兵備)만으 로 외국과 겨루겠는가라고 하였다.51)

독립신문은 만국공법이 강대 국과 약소국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약소국의 독립을 지키는 데 유용 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만국공법의 무용론에 대해 ‘지각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주장한 법 중심의 국제정치관을 받아들인 독립신문은 19세기 말의 국제정세에 대해 낙관적으로 인식했다.

독립신문은 논설에서 나라의 강토를 지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금 같이 좋은 시대가 없었다고 하면서, 만국공법이 서로 보호해주 는 규칙을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강국이 약국을 소멸하기를 누워서 먹듯이 했을 것이라 보았다.52)

독립신문은 국제법체제의 만국공법 이 실제로 작동하여 약소국을 강대국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인식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내세웠던 만국공법의 적용기준 인 법치와 문명에 대해 독립신문의 관점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에 대한 독립신문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 ‘만국공회론’이라는 기 사이다. 독립신문은 ‘만국공회론’이라는 기사가 대단히 유리하기에 번역하여 게재한다고 설명하였으므로, 이 기사가 독립신문의 주장 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 논설은 일본이 1899년 7월부터 ‘만국공 회(萬國公會)’에 들어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53)

51) 「유 지각 ​​사​​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0. 1면

52) 「현금 텬하의 학슐이」 獨立新聞 1899. 10. 05. 1면

53) 「만국 공회 론이」 獨立新聞 1899. 09. 19. 1면

이때의 ‘만국공 회’는 1899년에 개최된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아니었다.

해당 기사는 일본이 청일전쟁 때에 만국공회에 들기를 청하여 영국이 5년후에 참여를 허락하였다고 서술했다.54) 이는 일본은 1894년 7월에 영국과의 조약개정에 성공하여 5년 후인 1899년 7월부터 치외법권을 철폐하여 서양의 국가들과 동등한 법치국가임을 인정받은 것을 가리 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논설에서 지칭한 ‘만국공회’는 서양국가 들과 동등한 법치국가임을 인정받아 치외법권을 폐지한 국가들의 모 임을 의미한다.

즉, 독립신문은 치외법권을 폐지한 문명국가들의 모임(만국공회)이 있으며, 치외법권 폐지는 곧 국제법체제의 진정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인식했다.

독립신문은 법치국가가 되어 치외법권을 폐지시키는 것을 국가의 국제적 지위의 문제에서 매우 중요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이는 국제법체제의 기준을 법치와 문명으로 설정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을 독립신문이 받 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상술한대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법치와 문명을 기준으로 국제 법의 적용여부를 차별하지만, 이는 보편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법치 와 문명을 갖추면 불평등을 해제해야 한다.

그래서 1880년대 미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이 이런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미일조약을 개정하 여 치외법권을 철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55)

이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은 역시 독립신문에서 그대 로 나타났다.

독립신문은 일본이 치외법권을 폐지하여 국제법체제 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게 된 계기를 사법개혁과 의회설치였다고 주장 했다.56)

54) 「만국 공회 론이」 獨立新聞 1899. 09. 19. 1면

55) Frank Ninkovich, op. cit., pp.271~287

56) 「만국 공회 론이」 獨立新聞 1899. 09. 19. 1면

즉, 법치와 문명이라는 기준을 맞추기 위한 사법개혁과 입헌 체제 수립을 통해 일본은 국제법체제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고, 그 결 과 치외법권이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독립신문은 일본이 국제사회 에서 인정을 받은 이유는 군사력이 아니라 법치와 문명이라는 기준 을 충족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관점은 일 본의 군비확장을 비판한 논설에서도 확인된다. 해당 논설에서 독립 신문은 일본이 치외법권을 폐지하여 세계 각국과 동등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군비확장 때문이 아니라 일본 법률이 유럽의 법률 보다 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57)

독립신문은 일본이 서양국가들과의 불평등조약문제를 해결하고, 동등해질 수 있었던 이 유를 군사력이 아닌 법치와 문명이라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 에서 보았던 것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립신문에 형성된 법 중 심의 국제정치관은 독립신문의 문명개화론적 개혁론, 득히 사법개 혁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치외법권 폐지에 대한 독립신 문의 관점이 보여주듯이, 법 중심의 국제정치관에서는 ‘사법개혁 -> 치외법권 폐지(법치국가로 인정) -> 국제법체제에서 동등한 일원으 로 인정’이라는 논리구조가 성립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의 법 중심의 국제정치관에서 사법개혁의 문 제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독립신문은 한국이 문명개화한 법률과 풍속을 배워서 외국과 같이 진보하여 세계 각국 과 동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58)

지금 한국의 제일 급선무는 법률과 풍속을 개명하여 세계에서 실상 대접을 받게 하는 것에 있다 고 주장했다.59)

사법개혁의 문제는 한국이 국제법체제에서 동등한 일원으로 인정받는 관건으로 여겨져 매우 중시되었다.60)

57) 「일본 졍부 금년 예산도를」 獨立新聞 1897. 01. 14. 1면

58) 「셰계에 쳔​​사​​은」 獨立新聞 1896. 12. 19. 1면

59) 「근일에 죠션 관인들이」 獨立新聞 1897. 10. 02. 1면

60) 독립신문은 외국의 영장제도, 구치소제도, 보석제도를 제시하면서 이러한 제도가 있어야 외국과 동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나라히 화 되고 안 된거슬」 獨立新聞 1896. 09. 29. 1면).

또한, 독립신문의 이러한 인식은 독립신문의 주변 세력에게도 공유되었다.

이는 관립 및 사립학교 학생들이 독립협회에 보낸 편지 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편지에서는 법률이 밝으면 상등문명국이고, 밝지 못하면 하등야만국이며, 한국은 각국과의 교섭에 치외(治外)의 법률이 있으니 이는 법률이 같지 못하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 법관들이 옥사를 밝게 다스리지 않아서 각국 공사들이 책망 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가 대단히 방해’받고 있다면서, ‘문명 한 법률’을 확정하여 각국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자고 주장했다.61)

61) 「학교 편지」 獨立新聞 1898. 10. 12. 2면

여기에서는 문명과 법치를 중심으로 국제적 지위가 ‘상등’과 ‘하등’ 으로 나뉘어진다는 관점이 등장하며,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하등국 가로 취급받아 치외법권을 폐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의 법률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한국이 국제정세 속에서 위기를 겪 는 이유가 힘이 아니라 법치와 문명이라는 조건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문명과 법치가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사법문제는 단순히 국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 국의 자주독립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이제 한국이 법 치국가가 되는가의 문제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 곧 독립의 여부를 결정하는 문제가 되며, 그 해결방법은 문명과 법치를 들여오는 것에 있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받아 수립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은 독립신문이 주장하는 개혁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주 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2. 공론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힘이 아닌 법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 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법은 규칙일 뿐이고, 국제법에 실행력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국제법을 입법하는 국가대표들의 의 회와 국제법의 사법부인 국제법원을 만들려는 운동이 있었다.

그러 나 이러한 기구들은 19세기에는 아직 만들어지지 못했다. 국제기구 를 통해 국제법에 실행력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은 1899년의 1차 헤이 그 만국평화회의에서 국제중재재판소가 설립되면서 본격화되었고,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과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으 로 이어졌다.

19세기에는 아직 국제법을 실행할 국제기구가 만들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대체로 국제법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국제여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는 전신의 발 달이 보여지듯이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정보의 속도와 양이 비약적으 로 증가하고, 이성의 힘에 대한 믿음이 강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국 가를 넘어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형성된 국제여론이 큰 힘을 가지게 되어 침략과 전쟁 같은 국제법 위반을 통제할 것이라 생각했 다.

즉, 국제여론이 보편주의적으로 판단할 것이며, 이때의 기준은 국제법과 문명이라는 기준이 적용될 것이라 보았다.62)

62) Casper Sylvest, 2007, op. cit., pp.51~59 ; Casper Sylvest, 2009, op. cit., pp.11~33 ; Frank Ninkovich, op. cit., pp.15~46, pp.299~304 342

한편,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자들 중에 일부는 이처럼 국제여론 자 체의 힘으로 평화적으로 국제법위반을 제재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좀 더 현실적인 일부는 국제사회의 국가들이 침략국가를 단체로 응 징하는 집단안보를 통해 국제경찰력을 확보함으로써 국제법위반을 억제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국제여론에 대한 주장을 요약한다 면, 국제법위반을 국제여론을 통해 통제하며, 만약 국제여론만으로 통제가 안되면 국제여론에 의해 만들어지는 집단안보의 힘을 통해 국제법위반을 억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국제여론은 문명과 국제법에 의해 사안을 판단할 것이라 기대되었다.

독립신문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주장하는 국제여론, 곧 ‘공 론’에 대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국제사회를 국제여론인 ‘공론’이 작동하는 하나의 마을로 보는 논설들이었다.

예컨대 1896년 4월 20일자 독립신문의 논설에서는 세계는 여러 나라들이 있는 것이 마치 한 마을에 여러 집들이 모여 사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집안의 규모를 세우고, 이웃과 신을 잃지않고 지내면 그 마을에서 인심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반대 로 집안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남에게 신의가 없다면, 마을사람들 이 공론하여 그 집을 훼파하든지 내어 쫓을 것이니 그리되면 패가망 신 할 것이라 하였다.63)

독립신문은 국제사회를 하나의 마을처럼 인식하고, 이 마을이 공론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공론의 힘으로 국제사회라는 마을에서 특정 국가를 쫓아낼 수 있으며, 그러면 그 국가는 ‘패가망신’한다고 했는데, 이는 곧 국제적 공론의 힘이 국가 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다고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해당 기 사에서 ‘신’ 혹은 ‘신의’를 잃으면 국제사회에서 쫓겨난다고 주장했는 데, 이는 조약위반과 같이 국제법을 위반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경우 라 생각된다.

즉, 국제사회에서 국제여론의 힘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 국제여론의 힘을 통해 국제법위반이 통제된다고 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이 독립신문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독립신문에 일회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독립신문은 다른 논설에서도 국제사회를 마을로 비유했다. 해당 기 사에서는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면 근동(近洞) 사람들이 훼가출동하 자고 ‘공론’할 것이며, 한 집의 잔약한 형세로 어찌 여러 사람의 ‘공의’ 에 대적하겠는가라고 하였다.64)

63) 「여러 집이 사​​동리」 獨立新聞 1899. 04. 20. 1면

64) 「일심에 잇​​것」 獨立新聞 1899. 05. 09. 1면

이 글에서도 국제사회는 공론과 공의 에 의해 움직이며, 공론의 힘은 하나의 국가를 국제사회라는 마을에 서 ‘훼가출동’시킬 수 있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국제사회를 국가들의 마을로 자주 비유했다. 이는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데, 국제사회가 마을이라는 인식은 세계 가 약육강식과 같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국제여론, 즉 ‘공론’에 의해 움직이는 공간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립신문은 국제정치에서 공론이 실제로 강제력이 있으며, 이를 통해 국제법위반이 통제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상술하였듯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여론의 힘만으로 국제법위반을 막기 어렵다면, 국제사회가 단결하여 침략국가를 응징 하는 집단안보를 통해 평화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집단안보의 개념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시작되었고, 19세기에도 자유주의 적 국제주의 운동에서 계속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계속 이 어져서 20세기 초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도 집단안보를 주장한 바 있다.65)

이는 이후 미 국외교의 원칙으로 작동하여 미국은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도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연합을 창설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제연합 군이 참전하여 집단안보의 개념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독립신문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주장했던 집단안보의 개 념이 등장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은 해외 언론에 실린 ‘만국평화회 의의 론’을 번역하여 게재했는데, 해당 기사에서는 평화에 해를 끼치 는 나라가 있으면 만국이 그 교의를 함께 끊어서 조치를 취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66)

이는 국제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침략국가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국가들이 집단으로 대처한다는 주장인데, 실제 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연맹은 침략국가에 대해 먼저 통 상관계를 끊어 국제시장에서 고립시키고, 그럼에도 그치지 않으면 군사력으로 대응한다는 규칙을 세운 바 있었다.67)

65)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국제경찰을 창설하여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는 국가를 무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최정수, 2003, 「미국 현대 외교의 기원 -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세계 연방-」 미국사연구 17, 50, 64~65쪽).

66) 「평화론」 獨立新聞 1899. 07. 22. 1면

67) 1919년에 채택된 국제연맹규약 제16조 1항에서는 국제연맹의 분쟁조정과정을 무시하고 전쟁을 한 국가에 대해서는 모든 연맹국이 즉시 통상 및 재정적 관 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어서 16조 2항은 연맹이사회가 사용할 병력의 규모를 연맹국들에게 제안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즉, 16조 1항은 침 략국을 국제경제에서 고립시키는 내용이고, 16조 2항은 실질적인 집단안보의 무력대응을 규정하고 있다(아시아국제법연구회, 2005, 현대국제조약집, 아시 아사회과학연구원, 26~29쪽).

즉, 독립신문에 게재된 침략국가에 대해 만국이 ‘교의’를 끊는다는 주장은 집단안보 의 한 부분이었다.

독립신문이 국제공론이 특정 국가를 국제사회 라는 마을에서 ‘훼파’ 혹은 ‘훼가출동’할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은 이러 한 집단안보 개념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이런 언급 들이 있는 기사에서는 여러 국가들의 공동 논의와 행동에 의해 국제 사회의 문제국가에 대한 ‘훼파’ 혹은 ‘훼가출동’이 실현되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68)

국제사회가 국제공론에 의해 집단안보를 발동하여 국제법위반을 통제하고, 침략과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면, 핵심은 이처럼 큰 힘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있었다.

즉, 공론의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법과 문명을 그 주 된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독립신문은 이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과 같이 국제법 과 문명을 국제공론의 기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독립신문 은 국제사회의 공론을 언급하면서 ‘경계와 조리’를 그 기준으로 제시 했다.

예컨대 독립신문은 논설에서 한국이 강국들 사이에서 ‘경계 와 조리’를 가지고 살면 강국들이 트집이 없어서 해치지 못하며, 동 리(=국제사회)에서 인심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69)

또한, 약국 이 ‘경계와 조리’를 지키면 약국이라도 강국 사이에서 대접을 받고 살아갈 수 있으며, 강국도 공론이 무서워 약국을 빼앗지 못한다고 주장했다.70)

68) 「여러 집이 사​​동리」 獨立新聞 1899. 04. 20. 1면 ; 「일심에 잇​​것」 獨立 新聞 1899. 05. 09. 1면

69) 「사​​이 무​​일을 당하거드면」 獨立新聞 1897. 08. 10. 1면

70) 「약​​사​​이 강​​사​​」 獨立新聞 1898. 03. 05. 1면

이때 ‘경계와 조리’는 한문이 병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글의 문맥을 보면 경계는 ‘경계(經 界)’로서, 시비나 선악을 분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리는 ‘조리(條 理)’로 보이며, 이는 직역하면 ‘법률의 이치’로서, 조선시대에 법률을 실제로 적용할 때 ‘법 제정의 취지’ 혹은 ‘법질서의 이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앞서 상술하였듯이 독립신문은 만국공법이 국제사회 를 규율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독립신문이 ‘경계와 조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곧 국제법체제 내에서 국제법의 법원리 를 벗어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은 공론이 움직이는 또 다른 기준을 문명으로도 보았 다.

예컨대 독립신문은 한국이 공론을 지키면 강국도 공론이 무서 워 약국을 뺏지 못한다고 주장한 논설에서 예시로서 스위스를 제시 했는데, 스위스가 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외교와 내치가 공변되고 ‘문 명’하기 때문이라 하였다.71)

즉, 국제사회의 공론은 문명의 여부에 따라 움직인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국제사회에는 공론이 형성되어 있어서 국제 법위반을 통제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공론에 의해 집단안보가 작동 하고, 이러한 공론의 판단기준은 문명과 국제법이라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주장에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이는 독립신문이 한국 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인식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립신문은 공론 중심의 국제정치관에 입각하여 한국을 둘러싼 외세의 군사력이 주는 위협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다.

예컨대 독 립신문은 한국이 내 도리를 하여 세상 ‘공론’을 지키면 아무리 강국 이라도 공론이 무서워 약국을 빼앗지 못한다고 주장했다.72)

또한, 특 정국가가 한국을 침범하려고 해도, 한국 정부가 세상에 ‘행세’만 잘 하면 한국을 남의 속국이 되도록 가만 둘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73)

러시아가 절영도를 조차해 줄 것을 요구하자 독립신문은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면서, 러시아가 경계없이 토지를 요구하기 위 해 한국에 전쟁을 걸면 그때는 한국 정부가 세계에 ‘대접’을 받을 것 이라 주장했다.74)

71) 「약​​사​​이 강​​사​​」 獨立新聞 1898. 03. 05. 1면

72) 「약​​사​​이 강​​사​​」 獨立新聞 1898. 03. 05. 1면

73) 「사​​이 셰샹에 행셰를」 獨立新聞 1897. 05. 25. 1면

74) 「부산 졀영도에다가 졍부에셔」 獨立新聞 1898. 02. 19. 1면

이러한 독립신문의 주장이 보여주듯이, 독립신문은 국제사회가 공론에 의해 움직이며, 공론이 실제 국가들에 대 해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공론 중심적 국제정치관에 의해 외세 가 명분 없이 한국의 독립을 침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한국 주변의 외세의 군사력은 한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 아니었다.

독립신문은 외국신문에서 한국 정부가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독립을 할 수 없는 나라이니, 타국이 관 할하여 잔학한 정부를 없애고 백성을 건지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말 이 한번 나면 ‘천하 공론’이 무섭기 때문에 한국이 매우 큰 위기상황 이라고 주장했다.75)

독립신문은 국제공론에 한국이 잘못 인식되면 한국의 식민지화가 결정될 수 있고, 이는 한국의 독립을 위협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독립신문의 입장에서는 국제공론이야말로 국제사 회를 이끄는 중심적인 힘이었고, 한국의 독립을 빼앗을 수도, 지켜줄 수도 있는 힘이었다.

이러한 공론 중심의 국제정치관에서 본다면, 한 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외세의 군사력이 아니라 국제여론이 한국을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달린 것이었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한국이 국제여론에서 좋게 평가받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이는 한국의 여러 개혁 과제들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독립신문은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대접받기 위해서는 관민이 행신(行身)을 잘하고, 교제를 친밀히 해서 약하고 가난해도 점잖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고 주장 했다.76)

여기에서 독립신문은 한국의 당면한 목표를 부국강병하여 약함과 가난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가난해도 ‘점잖은 사 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즉, 독립신문은 한 국이 국제여론에서 국제사회의 ‘점잖은’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이 중 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77)

75) 「대한 졍셰」 獨立新聞 1898. 12. 16. 1면

76) 「외국과 통샹​​후에​​」 獨立新聞 1896. 05. 21. 1면

77) 한국이 점잖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행신’을 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취지에서, 한국이 ‘행세’를 잘하면 국제사회가 한국이 타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 주장한 논설도 있다(「사​​이 셰샹에 행셰를」 독립 신문 1897. 05. 25. 1면). 獨立新聞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행세’를 잘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번 하고 있는데 이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공론 을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관에 근거한 주장이었다.

기존의 연구에서 독립신문이 한국의 독립을 전적으로 열강과의 외교에 의존한 것으로 해석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한 다음과 같은 구 절은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해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조선이 지탱할 획책은 무엇인고 하니 아무쪼록 외국들과 교제 를 잘 하여 그 나라들이 조선을 두려워서 못 뺏을 것이 아니라 사랑 하 여서 아니 빼앗게 방책을 하는 것이 조선 정치상에는 제일 긴요한 조 목이라.78)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 인용문을 해석하면서 독립신문이 열강과 의 외교에 지나치게 의존하였으며, 때문에 국방력 강화와 같은 외교 적 힘을 키우는 데 무관심했다고 비판했다.79)

78) 「죠션이 외국들과 교졔​기」 獨立新聞 1896. 08. 22. 1면

79) 최덕수, 1978, 앞 논문, 228쪽

이는 타당한 비판이기 는 하나 독립신문이 군사력 없이도 한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 고 판단한 근거를 분석하지 않은 것이었다.

독립신문은 무턱대고 열강의 사랑을 받으면 한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상술하였듯이 독립신문은 국제사회는 공론을 중심으로 움 직이고 있으며, 공론의 힘은 개별국가의 힘보다 강력하여 한국을 외 세로부터 보호할 힘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 인용 문의 ‘사랑’은 한국이 국제여론에서 독립을 보호받을 만한 가치있는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독립신문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받아 국제여론을 중 심으로 한 국제정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독립신문의 국제 정세 인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Ⅳ. 독립신문 국제정치관의 현실주의적 요소와 그 의미

그렇다면 기존의 연구들이 독립신문에서 현실주의적인 요소를 발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독립신문에는 국제 사회를 힘에 의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보는 기사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김신재의 논문에서 독립신문이 국제사회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으로 바라보았다는 근거로 활용한 논설을 살펴보 면,80) 독립신문은 만국이 겉으로는 동양국이니, 통상국이니 하지 만 실제로는 눈이 없으면 코를 베어먹을 판국이라고 하였다.81)

독 립신문에는 국제사회를 힘에 의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바라보는 현 실주의적 관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이 국제정치를 권력정치로 보는 현실주 의에 근거한다면, 한국의 독립을 세력균형에 의존시키는 방법도 선 택가능한 방법이었다.

독립신문은 한국이 각국의 서로 제어하는 세를 얽어서 ‘보호 중립’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중립은 독립에 이르는 용이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82)

주진오는 이러한 독립신문 의 주장에 대해 세력균형에 근거한 중립론이라고 해석했는데,83) 해 당 기사에서 독립신문은 세력균형에 의한 중립을 주장한 것은 분 명하다.

80) 김신재, 1998, 「독립협회의 대외인식과 자주국권론」 경주사학 17, 111쪽

81) 「유 지각 한​​ 사람​​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2. 1면

82) 「유 지각 한​​사람​​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0. 1면

83) 주진오, 1986, 앞 논문, 77~79쪽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독립신문에는 자유주의적 국제 주의가 강하게 투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상반되는 두 국제정치 사상은 독립신문이 서로 다른 시기에 정세변화에 따라 내어놓는 두 가지 얼굴이 아니었다.

두 국제정치사상은 때로는 하나의 기사에 서 함께 등장하고 있었다.

주진오와 김신재가 현실주의가 투영된 기사로서 주요하게 활용한 두 기사는 실은 4편의 연속된 논설이었다.

주진오가 활용한 기사는 1898년 1월 20일자 논설이었고, 김신재가 활용한 기사는 1898년 1월 22일자 논설이었다.

그런데 주진오가 활용한 1898년 1월 20일자 독 립신문 논설의 앞부분을 보면, 만국공법이 대포보다 못하다는 주장 은 ‘지각없는’ 주장이라면서, 만국공법이 존재하기에 약소국도 국제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러므로 약소국은 강대국과 달리 만국공법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84)

이렇듯 해당 논설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강하게 투영하고 있기에 앞에서 활용 한 바 있다.

김신재가 활용한 1898년 1월 22일자의 독립신문 논설 역시 자유 주의적 국제주의가 함께 들어가 있었다. 해당 논설에서는 빈약한 나 라의 큰 보배는 신의이므로, 한국은 외교에서 신용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해당 주장의 근거에 대해, 지금은 과거와 달리 각국 사이에 조약이 행해지고 있으므로 신용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85)

여기에는 당시 세계가 조약에 기반한 국제사회, 즉 국제법 체제이므로 약소국은 신의와 신용으로서 국제여론의 인정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담겨져 있다.

그렇다면 독립신문은 왜 이처럼 상반된 국제정치사상을 함께 가지고 있었을까.

이는 19세기 국제정치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만으 로 해석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강했던 19 세기의 미국인들조차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내세우는 기준인 ‘문 명’과 현실주의적 기준인 ‘세력균형’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를 분석했다.

19세기의 미국인들은 법이 아닌 힘을 중심으 로 움직이는 권력정치(Power Politics)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면서도, 현실에서 작동하는 유럽의 국제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권력정치와 세 력균형을 사용하여 국제정치를 분석했던 것이다.86)

84) 「유 지각 ​한 사람​​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0. 1면

85) 「유 지각 한​​ 사람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2. 1면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보편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문명을 중심으로 국가들을 차별하는 19세기 서양의 사상적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이른바 ‘문명국가’들 사 이에서는 만국공법을 적용하고, ‘문명국가’가 아닌 국가와 지역에 대 해서는 만국공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문명을 기준으로 문명국과 비문명국을 차별했지만, 논리자체는 보편주의와 평등주의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87)

그래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비문명국이 문명국이 되면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실제로 1880년대부터 미국에서 미일간의 치외법권 폐지론이 등장하 는 현상으로 나타났다.88)

86) Frank Ninkovich, op. cit., pp.263~270

87) Jennifer Pitts, op. cit., pp.67~82

88) Frank Ninkovich, op. cit., pp.271~287

그렇지만 결론적으로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적 국제주의 역시 보편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문명국과 비문명국 사이 의 차별을 승인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은 국제법체제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국제 주의에 경도되었으나, 19세기 상황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제시 한 국제사회의 모습은 완전한 평등사회가 아니었다.

약육강식 대신 문명을 강조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조차 문명국가와 비문명국가 를 나누는 이중사회로 국제정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신 문은 19세기의 국제정치를 분석하면서 동시대 미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함께 권력정치, 즉 현실주의적 요소 를 고려해야만 했다.

독립신문이 현실주의적 요소를 국제정치관에 가지고 있었던 이 유는 동시대 미국인들과 연동된 점도 있지만, 집필진의 경험도 영향 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 정치적 격변을 모두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국제정치의 비정한 일면을 경험했다. 게다가 그들은 실제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바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말과 책에서 나오지 않는 현실정치의 부분들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에 자유주의 적 국제주의로 완전히 쏠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두 국제정치사상이 병존하면 외교론에서 서로 차 이가 생겨 내적 논리가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외교론인 중립외교론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현실주의 모두에 의 해 지지되고 있었다.

기존 연구에서 밝혔듯이 독립신문에 나타난 권력정치 중심의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는 세력균형을 통한 독립유지 를 위해 중립외교론을 지지할 수 있었다.89)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에서는 국제사회가 법과 공론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은 특정 열강과의 동맹이나 부국강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여론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따 라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한국은 열강과의 동맹 이 불필요하며, 오히려 특정 국가와의 동맹은 괜한 적을 만들어서 국제여론 전체의 우호적 시선을 받아야하는 한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중립외교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90)

89) 주진오, 1986, 앞 논문, 78쪽

90)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독립신문의 중립외교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정종원, 2022, 개화기 언론의 세계관과 국제정세 인식, 한양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130~131쪽)

그러므로 두 국제정치사상 은 중립외교론 안에서 별다른 모순 없이 병존할 수 있었다.

독립신문은 이처럼 국제사회가 이중적으로 구성된다고 판단했 기에 한국이 ‘반(半)개화국’이나 ‘야만국’에서 벗어나 ‘문명개화국’ 혹은 ‘상등국’이 되기를 열망했다.

즉, 독립신문은 한국이 문명국가 로 인정받아 만국공법의 보호를 받는 국가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되면 한국은 식민지화의 위기에서 벗어나 독립을 유지할 수 있 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에서 나타난 두 국제정치사상은 병존하면서 도 우열이 정해져 있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현실주의보다 더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두 국제정치사상이 함께 보이는 논설의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위에서 분석한 1898 년 1월 20일자 논설에서 독립신문은 한국이 외국과 동등행세, 동 등법률을 가져야만 자주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91)

이는 한 국이 독립국이 되려면 문명국들과 같은 법체계를 가지고, 국제사회 에서 문명국들과 비슷하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1898년 1 월 22일자 논설에서는 국제사회를 약육강식의 사회로 묘사하면서도, 한국의 대응방법에 대해서는 정대한 의리로 항거하면 열강이 바른 것에 굴복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외교에 있어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92)

두 국제정치사상이 병존하고 있었지 만, 실제 대응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입각한 대응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93)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경도된 대응론을 주장했음 은 이미 기존 연구에서도 밝힌 바가 있다. 주진오는 독립신문의 중립론을 분석하면서, 세력균형의 파괴에 대비하여 군사력 확보가 시급할 텐데도 독립신문이 군사력을 충분히 기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을 지적했다.94)

최덕수 역시 독립신문이 국방력 강화를 소홀히 취급했음을 문제로 지적한 바 있다.95)

91) 「유 지각 ​​사​​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0. 1면

92) 「유 지각 ​​사​​의 말」 獨立新聞 1898. 01. 22. 1면

93)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현실주의가 병존하는 또 다른 사례로는 1899년 10월 5 일자 논설을 들 수 있다. 해당 논설에서는 세계가 만국공법으로 약소국을 보 호해주고 있다면서도,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의 힘이 아니었다면 청일전 쟁 당시에 일본이 청을 멸망시켰을 것이라 주장한다. 두 국제정치사상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으로는 공정한 법률을 시 행하여, ‘개명한 지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사법개혁과 전면 적 문명개화를 해법으로 제시한 것인데, 이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기반한 대응론이었다(「현금 텬하의 학슐이」 獨立新聞 1899. 10. 05. 1면).

94) 주진오, 1986, 앞 논문, 79쪽

95) 최덕수, 1978, 앞 논문, 224쪽

독립신문의 외교론 은 독립신문이 세계를 약육강식으로 바라보는 현실주의에 기반한 국제정치관이었다고 보면 모순되는 것이었다.

독립신문의 외교론 은 주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기반을 둔 국제정치관에 의해 성립 되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의 외교론이 현실주의와 모순된다는 기 존 연구의 지적들은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에서 자유주의적 국제 주의가 현실주의보다 더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 안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현실주의가 병존하고 있 었지만, 전자가 후자보다 더 우위에 있었고, 독립신문의 중심적인 국제정치사상으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Ⅴ. 맺음말

독립신문은 지금껏 국제사회를 약육강식의 질서로 보면서도 정 작 국방력 강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모순된 주장을 한 신문으 로 여겨져 왔다.

독립신문에서 자주 제기하였던 만국공법에 대한 관심과 믿음은 독립신문의 모순점을 하나 더 늘렸을 뿐이었다.

그 러나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다시 살펴보면 독립신문의 주장 은 상당히 정합적인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사회가 힘이 아닌 법에 의해 통제되 며, 국제법이 적용되는 기준은 법치와 문명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러므로 법치와 문명이 없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 지만, 이 조건을 충족시키면 불평등은 해제되고 국제법의 적용을 받 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보편주의와 차별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자 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국제법에 대한 사상은 독립신문의 법 중심의 국제정치관에서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

또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국제법을 실행할 국제기구가 없는 상황에서 국제여론을 통해 국제법위반을 통제하고, 만약 부족하면 국제여론에 의해 소집된 집단안보의 힘으로 침략과 전쟁을 억제하려고 했다.

이때 공론이 움직이는 기준은 문명과 국제법으로 규정되었 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국제여론에 대한 사상은 독립신문의 공론 중심의 국제정치관에서 유사하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 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으며, 이러한 국제정치관은 집필진의 변화 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96년부터 1899년까지 독립신문의 발행 기간 전체에 걸쳐 나타났다.

독립신문이 이처럼 자유주의적 국제 주의를 수용했던 이유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통해 독립신문이 주장하는 문명개화론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독립신문이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 향을 받아 수립한 국제정치관은 19세기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 의적 국제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국제여론에 대한 환상이 1차 세계대 전을 통해 깨지게 되며, 이후에도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가진 국제 법과 국제기구에 대한 사상이 어느정도 유지되다가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나서야 크게 위축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가진 오류는 1차 및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 대한 전쟁을 겪고 나서야 명확해졌다. 그러므로 19세기 상황에서 독립신문이 가졌던 국제법체제에 대한 순진함과 환상은 역사라 는 거인의 어깨위에 있는 현대의 연구자들에게는 명확한 것이지만, 당대인들에게는 아직 역사의 안개가 걷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독립 신문의 국제정치관은 정합적이었지만, 19세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중심으로 독립신문의 국 제정치관에 대해 다룬 이 논문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 논문에서는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을 재해석 함으로써 독립신문이 주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근거하여 국제정치를 인 식했음을 드러내었다.

물론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19세기 말의 국 제정치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보았기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과 외교론을 모순적 인 것으로 보았던 것을 수정하여,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이 이론 상으로는 상당히 정합적인 것임을 증명했다.

둘째, 개항기 미국의 사상적 영향력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밝 혔다.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의 기반이 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주류적인 국제정치사상이었다.

1차 세계대 전 이후 이것이 실현된 외교체제를 ‘신외교’라고 불렀는데, 이는 다 른 말로 ‘미국식 외교방식(American diplomacy)’이라고 불렀다.96)

96) 김홍철, 1994, 외교제도사, 민음사, 212쪽.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미국이 강조하던 것 이었고,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국제사회에 실제 적용되었다.

즉, 독립신문에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독립신문 의 국제정치관 형성에 미국의 영향력이 깊이 침투하고 있었음을 의 미한다.

독립신문은 단순히 미국을 긍정적으로 인식한 것을 넘어 서,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미국과 일치해가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므로 개항기 한국에 끼친 미국의 사상적 영향력을 재평가 할 측면이 있다.

셋째, 개항기 한국의 사상이 기존의 인식보다 더 다양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독립신문에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 현실주의가 모두 나 타난다는 것은 개항기 한국이 세계의 여러 사상조류와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개항기 한국의 사상은 기존의 연구보다 더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세계적 사상의 흐름에 기민하게 접속하고 있었을 가 능성이 높다.

따라서 개항기 한국의 사상적 다양성을 재탐색해야할 필요가 있다.

주제어 : 독립신문,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국제법, 국제여론, 국제정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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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International Political Perspectives of The Independent

Jung, Jong Won

The Independent (Tongnip Sinmun) is very important in modern Korean history. Therefore, previous studies have accumulated research results on The Independent’s perceptions of the international situation and their views on international politics. In the previous studies, The Independent was considered to have made contradictory claims that they viewe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s in the order of the law of the jungle, but did not rely on international law or pay attention to strengthening the national defence. However, this phenomenon is due to the fact that The Independent embraced liberal internationalism, which was popular in the Anglo-American world in the 19th century. Liberal internationalism holds tha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should be governed by law, not force. In the 19th century, there were no institutions yet to judge and enforce international law, so liberal internationalism sought to rely on the power of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to enforce international law. The idea was that if an aggressor state appeared,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would trigger collective security and control the aggressor state. The Independent's view of international politics was almost identical to this liberal internationalism. The independent believed that the international society was controlled by international law and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Therefore, from The Independent's point of view, the threat to Korea's independence did not depend on the military power of foreign powers, but on whether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would support Korea's independence. Therefore, The Independent believed it was important to improve civilization to win the favour of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rather than strengthen military power. The Independent's view of international politics was logically consistent and provided legitimacy to The Independent's domestic reform theory, the civilization theory.

Key Words: The Independent, Liberal internationalism, International law,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International politics

韓國史硏究(202)

투고일 : 2023. 07. 31 심사완료일 : 2023. 09. 01 게재확정일 : 2023. 09. 02

 

『독립신문』의 국제정치관 연구 - 19세기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영향을 중심으로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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