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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발해사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서/이성시.와세다大

1. 머리말

해방 후 발해사 연구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있어 신기원을 연 연구는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 를 위하여」(1962)일 것이다.

발해사를 조선사라는 테두리 속으로 확실하게 포섭하고자 설계된 박시 형의 발해사에 대한 시각은 남북한 학계에서 전 개되는 발해사 연구의 방향성을 결정짓기에 이르 렀다.

한국 학계에서는 1970년대 후반에야 남북 국시대론의 담론에서 발해사 연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사학사적으로 볼 때 박시형이 설계한 시각 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1

1 이성시, 2000,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 족」, 『만들어진 고대』, 삼인출판사.

동북공정(東北工程)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첨예 화한 발해사 논쟁은 발해사가 전개된 지역이 지금의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반도 북부에 걸친 지역을 포 괄하는 데에 기인한다.

물론 발해국의 영역과 근대 국제법적 국경이 일치 하지는 않는다.

이는 지구 역사에서 특별한 사례가 아니며 도리어 전근대 왕조의 영역과 국민국가의 영역이 일치하는 사례는 결코 많지 않다.2

2 パトリック・J·ギアリ 저, 鈴木道成 외 역, 2008, 『ネイションという神話―ヨー ロッパ諸国家の中世的起源』, 白水社(원서는 Patrick J. Geary, The Myth of Nations: The Medieval Origins of Europe)는 발해사를 둘러싼 비슷한 논쟁 이 유럽 국가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데 유익하다. 기어리(Geary)는 그러 한 문헌학과 고고학을 원용한 부정적 유산을 ‘유독 폐기물’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사가 전개된 지역을 거시적으로 보면 이 지역에서 전개된 왕조는 비단 발해만이 아니다.

발해 이전에는 거의 같은 영역에서 고구려 가 탄생했다 사라졌으며, 발해 멸망 이후에는 요, 금, 후금(청)과 같은 왕 조가 거의 겹치는 영역에서 등장하였다.

이 왕조들은 단순히 지정학적· 문화적·지리적 영역만 공유하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 왕조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공히 자국의 존망을 건 전쟁을 되풀이했을 뿐만 아니라, 같 은 시기 한반도를 지배하던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의 왕조들과도 치열 한 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요컨대 지정학적·전략적 위치에서 큰 차이가 없을뿐더러 “지리적·역사적 깊이의 차원”(Ahmet Davutoğlu)에 서도 공통점이 적지 않다.3

 

3 アフメト・ダウトオール 저, 中田考監 역, 2020, 『文明の交差点の地政学―トル コ革新外交のグランドプラン』(원서는 Ahmet Davutoğlu, Stratejik Derinlik: Türkiye’nin Uluslararası Konumu).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이 일찍이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가 주창했던 바와 같이 만주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만주사’에 포섭하려는 것은 아니다.

발해사가 전개된 지역의 고유성에 주목하여 “지리적·역사적 깊이의 차원”이라는 시각에서 검토하는 작업은 문헌사료, 고고학자료 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발해사에 새로운 발견을 더할 가능성이 있다.

또 지금의 지배적인 테두리를 초월해 발해사를 풍부하게 포착할 수 있을 거 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또한 이 지역(동북아시아)에 대한 현재의 지견(知見)을 발전시킬 거라 확신한다.

다음에서는 필자가 현재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발해사에 대 한 몇 가지 제언을 하겠다.

2. 발해 국가의 민족 구성

주지하다시피 발해국은 어떤 특정 단일 민족집단으로 구성된 국가가 아닌 여러 에스노스(ethnos: 민족집단)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해가 존속했 던 지역은 중국(수) 측이 ‘말갈 7부(靺鞨七部)’라 칭하던 속말(粟末), 백돌 (伯咄), 안거골(安車骨), 불열(拂涅), 호실(號室), 흑수(黑水), 백산(白山)이라 는 여러 부가 할거했으며, 그 후 철리(鐵利), 월희(越喜), 우루(虞婁) 등과 같은 부락 이름도 전한다.

‘말갈’은 중국 왕조에서 붙인 통칭이며, 말갈 여러 부의 명칭은 각 부의 자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들 여러 부에서는 각각 고유한 문화적 성격이 확인된다.

이러 한 여러 민족집단으로 구성된 발해의 국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필자는 그 분석 관점으로 에스니시티(ethnicity)론 도입을 제창한 바 있다.4

4 이성시, 2019, 「발해사를 둘러싼 민족과 국가」,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삼인; 이성시, 2024, 「한국 고대사 연구를 통해 본 동아시아사의 전망」, 『관악사론』 4.

돌이켜보면 19세기 이후의 기존 정치학에서는 국민국가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민족(국민)이 형성된다는 민족 형성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 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그러한 통설은 비판에 직면했고 이 후 에스니시티론이 제기되었다.

정치학에서 에스니시티론이 출현한 것 은 실제 세계 각지에서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의 자기 주장이 분출하 면서 기존 국민국가론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nation’, ‘folk’와 같은 근대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 것이 에스니시 티론인 셈이다.

필자가 일찍이 발해사에 에스니시티론을 작업가설로 끌어온 것은 동 아시아 국가에서 ‘족속(族屬) 문제’라는 과제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기 하는 민족론이 대세를 이루면서 전근대 민족 형성사에 관한 학술적 논쟁 을 헛되게 하는 양상을 목도했기 때문이다.5

기쿠치 도시히코(菊池俊彦)가 밝혔듯이 고고학적으로는 물론 문헌적으 로도 발해가 문화를 달리하는 말갈 여러 부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부 정할 수 없다.6

5 이성시, 2019, 「발해사를 둘러싼 민족과 국가」, 『투쟁의 장으로서의 고대사』, 삼인.

6 菊池俊彦, 1995, 『北東アジア古代文化の研究』, 北海道大学出版会.

앞서 언급했듯이 발해를 구성했던 말갈은 단지 중국 측 에서 붙인 통칭일 뿐 스스로 붙인 자칭이 아니었다.

수대부터 중국 측에 7부의 부족 이름이 전해지기는 했으나 여러 부족이 그 후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러한 말갈 여러 부족의 존재 양상을 분절 화할 필요성에서 196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립된 에스닉 아이덴티 티(ethnic identity)에 착안하여 발해사를 구성했던 말갈 여러 부족에 에스 니시티론을 원용한 것이다.

에스니시티 연구에 따르면, 에스니시티(에스노스)는 민족적 속성(객관적지표)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의 자기 주장(주관성)이 중요한 요 소로 작용한다.

말갈 여러 부족의 에스닉 아이덴티티 사례를 볼 때 발해 의 건국기와 멸망기에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은 에스니시티의 특징 을 여실히 보여준다.

요컨대 에스닉 아이덴티티는 실체화할 수 없으며 그 때그때의 정세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일정한 민족적 속성이나 에스닉 아이덴티티가 불변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령 당에 납 치된 백제인의 묘지(墓誌)에서 보듯이 그들의 에스닉 아이덴티티는 세대 를 거듭할수록 변화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의 지배자 집단에 편입 되어 가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한반도의 백제보다 중국의 고전적 교양에 의거해 그들 시조의 기원을 중국 고대 세계로 소급하는 경향을 명확하게 드러낸다.7

그를 통해 당 왕조와의 친밀성을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정치적 위상 제고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에스닉 아이덴티티가 자신의 전략이나 현실 정세에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에스닉 그룹의 정체성은 실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관계성 속에서 변화한다.

즉 가변적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과거에는 발해의 사신이 일본에 왔을 때 고구려국의 계승 자임을 자처한 것을 들어 고구려 계승의식을 실체화하려는 연구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일본 정세나 그것에 얽매인 지배층의 역사 인식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한 관점이 필수 불가결하다.

에스니시티론을 발해사에 적용할 수 있는 또 다른 구체적인 사례로 는 말갈의 여러 집단이 발해 건국 전후(8세기 중반까지)로 독자적인 에스 닉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당과 빈번하게 교역하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779년 일본에 도착한 발해 사신단은 일본과의 교섭 도 중 갑자기 철리부(鐵利府)임을 표명하고 사신단 내부적으로는 누가 상석 에 앉을지를 다투어 에스닉 아이덴티티를 과시하였다.

즉 발해 건국 초 기 말갈의 여러 부족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었으나, 발해국의 통치가 강화되자 그 정체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발 해 왕조의 권력이 약화하자 9세기 말부터 10세기 초에 걸쳐 말갈의 여러 부족은 자립하여 국호를 붙여 칭하는 등 정체성을 겉으로 드러내기 시작 한다.

이처럼 발해의 대내외 상황에 따라 에스닉 아이덴티티가 겉으로 표 면화되거나 미약해지는 것은 에스니시티 연구로 포착할 수 있는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국제적인 발해사 연구 현황을 보면, 방법론적으로 말 갈 여러 집단 간의 문화적 차이를 의식하고 있는지는 불명료하다.

박시형 은 지배민족이 고구려라는 점을 들어 지배층인 고구려족과 피지배층인 말갈족의 이중 구조로 환원하여 단순화시켰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말갈 여러 부족의 동향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엇보다 피지배민족은 결코 단단하게 결속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발해의 지배 에 말갈족이 통합되고 융합되었다고 단순화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에스 니시티론의 도입은 이러한 문제를 보완할 수 있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기존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의 복잡한 민족 구성을 경시하는 등 각국의 민족정책이나 민족관에 단단하게 얽매인 탓에 방법론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 머리말에서 지적했듯이 발해의 복잡한 민족 구성은 발해 특유의 성 격이 아니며 고구려에서도 그 후의 요, 금, 후금(청)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러한 민족 구성의 다양성을 이 지역의 “지리적·역사 적 깊이의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발해의 언어와 리터러시

발해국이 여러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었다는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지역에 거주했던 여러 민족의 언어와 리터러시(literacy: 문해력) 문제이다.

특히 발해의 언어 문제에서는 일본과의 외교 교섭에서 등장하는 ‘통역[通 事]’ 연구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구체적으로는 일본 측의 발해 통역 이 당에 다녀온 경험자였다는 것을 근거로, 발해 사신과 일본 측 통역이 사용한 언어가 한어(漢語)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8

주목되는 것은 9세기 초엽의 사례로 발해 사신단 무리에서 이탈해 에 치젠국(越前國: 후쿠이현)으로 도주한 발해 사신단의 수령(首領) 고다불(高多佛)을 엣추국(越中國: 도야마현)으로 보내어 그곳의 사생(史生)과 습어생 (習語生)에게 ‘발해어’(한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말갈 부족의 언 어를 ‘발해어’라고 단순하게 한데 묶기도 어렵다)를 가르치게 했다는 기사[『일 본기략(日本紀略)』 고닌(弘仁) 원년(810) 5월 병인(丙寅)조]이다.9

9 酒寄雅志, 2024, 『渤海と日本』, 吉川弘文館.

이를 볼 때 일 본 측도 발해에 외교 공용어(한어)와는 별개로 고유한 언어가 있다는 것 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요컨대 발해국에서는 대외적으로 한어 를 썼으나 내부적으로는 말갈 부족의 언어를 인정했고 그러한 언어 상황 이 발해국 외부에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한편, 당시 엣추국의 사생과 습어생에게 발해어를 가르쳤다고 전하는 수령 고다불은 그 성(姓)을 보건대 고구려계 인물로 추정된다.

사료를 보 면 발해 사신단에는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특히 통역 중에 도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확인된다.

앞서 언급한 779년 데와국(出羽國)에 도착한 발해 사신은 다수의 철리부 사람을 이끌고 왔는데, 대사(大使)에 해당하는 압령(押領) 고양죽(高洋粥) 산하에 소속된 통역은 고설창(高說昌) 이라는 인물이었다.

기존 연구에서는 발해인이 고씨 성을 띠면 무조건 발해의 지배층이 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거란국지(契丹國志)』 권26 「발해전」에는

“그 왕은 원래 대(大)를 성으로 삼았다. 유력한 성씨 [右姓]는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부곡(部曲)과 노비 등 성씨가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씨)을 따른다” 라고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고씨 성은 유력한 성씨, 즉 귀족의 성씨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설명을 보자면 국성(國姓)인 대씨(大氏)와는 명확히 구 별되며, 오히려 고씨 성은 장·양·두·오·이 등 대귀족[大族]의 하나일 뿐 이었다.

그러므로 고씨 성을 가진 자가 발해국의 유력한 일족이기는 해도 반드시 대씨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고씨 성을 가진 자가 통역으로 일본과의 외교 교섭에 종사했다 는 점은 주목된다.

한어를 사용하는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한편 발해어 를 구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자가 통역이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 서 수령 고다불의 사례는 특별하다.

말하자면 고씨 성을 가진 자가 언어 를 통해 발해국의 외부와 말갈 부족 간의 내부를 잇는 매개자 역할을 담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훗날의 일이나, 금과 북송이 교전을 펼치던 최전선에서 북송 선화(宣 和) 7년[금 천회(天會) 3년, 1121] 경원부(慶源府)를 함락한 후의 강화 협상 에 북송과의 통역으로 등장한 인물은 금의 동경유수(東京留守) 자리에 있 던 발해인 고씨(高楨)였다.

고정은 금 태조 아골타(阿骨打)를 섬길 때는 여 진어를, 북송과의 강화회담에서는 유창한 한어를 구사하며 통역을 맡 았다고 알려졌다.10

10 王一嘯, 2022, 「7-12世紀の東北アジア政権における高句麗系渤海人」(国際 学術大会 ‘アジア史上の転換期における社会変動と文化接触’ 2022.12, 早稲田 大学).

왕일소(王一嘯)는 고씨 성을 가진 발해인이 여진어뿐 만 아니라 거란어에도 능통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고구려 이래 계보를 가 진 그들이 토착어(통속어)와 한어를 잇는 매개자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밖에도 거의 동시대(1162) 사례로 남송에서 금을 찾은 사신 홍매(洪邁)가 금의 접대를 맡은 거란인 왕보(王甫)에게 들은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거란의 아이들이 처음 한문을 배울 때는 먼저 통속어의 어법에 따 라 원문을 뒤집어서(순서를 반대로) 읽는데, 이 경우 한자(漢字)의 한 글 자가 통속어로는 두 글자, 세 글자가 되기도 한다고 귀국 후 보고하고 있다.11

이른바 한문(漢文)의 훈독(訓讀)이 행해졌다는 것을 전한 기사로, 고씨 성을 가진 발해인이 한어 구어뿐만 아니라 리터러시(문해력)에서도 높은 한어 실력을 전제로 한문에도 능통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는 발해 사신단이 일본에서 열린 연회 석상에서 교양 높은 고위 관료들 과 시문(詩文)을 주고받은 대목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12

발해의 리터러시와 관련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마치 유럽의 라틴 어 성경처럼 한역(漢譯) 경전이 보편어(hieroglossia)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이미 필자는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는 시기에 범어–한 어–신라어(고려어)라는 세 언어 간의 번역 가능성을 논한 바 있다.13

이 경우 한역 불교 경전의 한자 한 글자 한 글자를 본래의 뜻에 충실하게 번 역한 후 토착 문법에 맞게 재배열하는 과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남송의 사신 홍매가 목격한 거란의 사례는 바로 신라·고 려의 상황과 같다.

발해의 여건도 같았다는 것은 범어 불교 경전이 발해 에서 일본으로 전해진14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1 김문경, 2023, 『한문과 동아시아』, 성균관대학출판부.

12 일본의 국문학계에서는 발해 사신의 한시(漢詩) 연구에 관심이 높고 그 수도 많 으나 한국 학계에서 다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13 이성시, 2023, 「한국 목간 연구의 지평–聖語制(hieroglossia)로 본 한국 목간」, 『목간과 문자』 30.

14 酒寄雅志, 2024, 『渤海と日本』, 吉川弘文館.

발해의 고씨 성을 가진 고구려계 사람들은 고구려시대의 한어 회화 능력과 문해력을 갖 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로서의 지위를 점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

그것은 동아시아 세계의 문화적 위상에서 볼 때 고구려가 신라의 리터러시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신라의 석 비(石碑)나 목간(木簡)에서 보이는 변체한문(變體漢文)의 유래를 고구려에 서 충분히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 있다.15

나아가 이 지역의 민족집단이 중국 대륙과 한반도 양쪽에 미친 상호작 용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어 고전에서 유래한 고대 문헌이 아바스(Abbās)왕조의 아랍어 번역이 없었다면 근대 서구 문명이 존 재할 수 없듯이,16 문명의 경계에 있는 매개자의 역할은 인류사적 관점에 서도 결코 경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5 이성시, 2000,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 『만들어진 고대』, 삼인출판사; 이성시, 2006, 「漢字受容と文字文化からみた楽浪地域文化」, 早稲田大学アジア 地域文化エンハンシング研究センター 편, 『アジア地域文化学の構築』, 雄山閣.

16 W. モントゴメリ・ウォット 저, 三木亘 역, 2008, 『地中海世界のイスラム』, 筑 摩書房(원서는 W. Montgomery Watt, THE INFLUENCE ON MEDIEVAL EUROPE).

중요한 것은 매개자란 모름지기 두 세계에 몸을 두려는 성향이 있으며,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해 있어야 한다 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적·문명적 관점에서 볼 때 발해의 지리적 위치를 축으로 하는 공간적 파악과 자기 역사적 경험을 축으로 하는 시간적 파악은 이 지역 특유의 하부구조로서 중시해도 좋지 않을까.

중국 여러 왕조의 문명 에 인접한 이 지역 특유의 ‘경향성’(Ahmet Davutoğlu)이라고 표현해도 좋 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경향성을 이 지역의 하부구조 혹은 아흐메트 다우 토을루(Ahmet Davutoğlu)를 따라 잠정적으로 상수로 설정하겠다.

4. 발해와 일본의 교류

발해와 일본의 장기간에 걸친 빈번한 교류는 발해 이전 고구려에서도 찾을 수 있는 반면, 발해 이후 요·금·후금(청)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징 이다.

따라서 이는 발해사의 특징을 탐구할 때 이 지역의 상수에서는 볼 수 없는 중요한 변수로 설정할 수 있다.

발해와 일본의 장기간에 걸친 교류에 대해서는 멸망기에 이르기까 지 사신단의 구성원 수가 105명으로 거의 일정했고 다수의 수령이 합류 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17

17 이성시, 1999,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청년사.

일본 측이 발해 국왕을 비롯한 사신단 구 성원에게 신분에 대응하여 견(絹)제품을 회사(回賜)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발해 사신과 일본 측 고위 관료들 사이에 교 역이 실재했다는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는 882년 11월 일본 가가국(加賀國)에 도착한 발해 사신 배정(裵頲) 등과 919년 11월 와카사국(若狹國)을 찾은 발해 사신 배구 (裵璆) 등의 사례에서 발해 사신이 일본 측 고위 관료와 교역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미 기요히로(石見淸裕)는 당의 사례를 꼼꼼하게 분석하여 홍려관(鴻臚館)에서 교관(交關: 교역, 거래)을 하거나 외국 사신이 상대국 공 관과 면담・교유하는 등 외국 사신이 상대국과 교역했다는 것을 규명한 후, 일본 도착 후 이루어진 발해 사신의 교역이 당나라 때 행해진 ‘사적 (私覿)’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사적의 원래 뜻은 ‘나를 만나다’인데, 즉 개인적으로 만나고 면회한다는 것으로, 사신으로 타국에 나갈 때 자국 군주의 대리인으로서 공적 의례를 수행하는 것 외에 사적 또는 비공식적 으로 상대국 군주나 신하와 만나 교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품을 증여 하는 행위라고 한다.18

18 石見清裕, 2012, 「唐朝外交における私覿について」, 鈴木靖民 편, 『日本古代の王 権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일본 측이 810년에 고다불에게 엣추국의 사생과 습 어생에게 발해어를 가르치게 한 목적으로는 발해에서 들어오는 표류민 대책도 추측해볼 수 있으나, 사적과 관련된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발해 사신 일행이 왕경 외에도 방문한 지역에서 사적을 행할 목적이 있었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발해 사신이 일본에 오면 ‘사적’을 했다는 사실이 구체적인 사료로 입 증된 셈이다.

발해 사신 구성원의 과반을 차지했던 수령은 발해국을 구성 했던 말갈 부족의 재지 수장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당연히 고다불의 사례처럼 고구려계 수령도 있었다.

발해 사신이 멸망기에도 일본과 이러한 ‘사적’을 포함한 교역을 전개했다는 사실에서 발해 사신이 일본을 찾은 의의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또 교역의 규모도 상상 이상으로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말갈 여러 부족이나 이후 여진족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집단에 대해 중국이나 일본 등과의 교역 편의성과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지배와 통합을 도모하는 발해의 국가 전략을 다카이 야스유키(高井康典行)는 ‘발 해적 질서’라 명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나라는 본래 발해의 옛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발해적 질서’를 계승했으나 950년대에 오대십국과의 교 섭이 난항을 거듭하면서 결국 여진족의 반란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 후 요는 우여곡절 끝에 ‘발해적 질서’의 부활 없이 여진족을 재정복하여 자 국을 중심으로 한 새 질서 아래 종속시켰다.

이를 볼 때 발해와 일본의 통 교가 발해의 국가 통합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경시할 수 없다.19

19 高井康典行, 2016, 「11世紀における女真の動向」, 『渤海と藩鎮』, 汲古書院; 簑 島栄紀, 2019, 「『刀伊襲来』事件と東アジア」, 『金・女真の歴史とユーラシア東方』, 勉誠出版.

 

한편, 발해의 외교 및 교역과 관련해 한국 학계에는 발해와 신라 간에 비록 『삼국사기』 등에서는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어도 문헌에 전하지 않는 상시적인 교류가 있었다고 보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8세기 말 스스로를 흑수국(黑水國), 보로국(寶露國)이라 칭했던 말갈 부족이 직 접적인 접촉을 기피한 교역을 신라에 제안한 것처럼, 발해와 신라의 교 역 가능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최근 연구에서도 신라가 발해의 침입을 막 기 위해 신라 북변에 축조했다고 『신당서(新唐書)』 신라전에 기술한 철관 성(鐵關城), 철합관문(鐵闔關門)과 같은 군사시설이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 이 〈조선총독부 국유림 조사지도〉(함경남도 덕원군 부내면·북성면 국유림 경계도)와 GIS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20

20 박성현, 2019, 「6~8세기 신라 동북 경계의 변천과 구조」, 『한국학논집』 77; 이 성시, 2024, 「新羅・渤海接境地域の交渉実態をめぐって:歴史地理研究における GISの活用」, WASEDA RILAS JOURNAL No.11.

발해의 국가 존립에서 일본과의 통교와 그에 수반한 교역이 필수 불가 결한 요소였다는 사실은, 발해가 자리 잡은 지역의 “지리적·역사적 깊이 의 차원”에서 분석할 때 중요한 변수로 계속 심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발해사 연구의 애로점은 발해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특수한 근대적 테두리에서 발해사를 포착하려는 관찰 주체의 자기 중심적 관점에 기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머나먼 과거에 존재했던 발해 국의 역사를 현재 한 특정 국가에 어떻게 귀속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의 식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러한 역사적 대상을 맞지 않는 테두리에 억지로 밀어 넣어 이해하려다 보니 일종의 ‘시야 협착’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적 갈등과 인접한 국가 간의 국경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지금의 국제적 과제에 뿌리를 둔 발상은 전환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발해사를 광역에서 포착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후루하타 도루(古畑徹)는 서론에서 자신의 발해사 연구를 어 떤 지역에 위치시킬 것인가를 질문으로 설정한 다음, 발해사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위해 그 가능성으로 일본 학계의 논의 대상인 ‘동아시아 세계 론’, ‘동부 유라시아론’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을 재검토한 후 발 해사의 특성을 파악하는 틀로 ‘동아시아 세계론’이 효과적이라고 강조 했다.21 또한 이 글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비추 어 볼 때 유라시아 규모 면에서도 해당 지역의 중요성이 현대적·근미래 적 과제에서 커지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일본 학계에서 는 ‘동부 유라시아’ 관점에서 전근대의 역사상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활 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업에서는 현대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 고, 유라시아 규모로 지역을 확대하여 세계사를 파악하려는 논의는 거 의 찾아볼 수 없어 이론이라고 할 만한 내실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 나 2010년 이후 유라시아 규모의 격변을 시야에 넣는다면 유라시아(유 럽+아시아)로부터 그 동부를 세계사 차원에서 포착하려는 시각은 그 설정 의의가 커지리라 기대된다.22

21 古畑徹, 2022, 『渤海国と東アジア』, 汲古書院.

22 이성시, 2023, 「東アジア世界論からユーラシア論を望見する」, 『新しい歴史学の ために』 303.

한국사(일국사)의 테두리를 넘어 고구려, 발해, 요, 금, 후금(청)에 이르기까지 ‘동북아시아’ 특히 한반도 북부,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서 발흥한 발해가 이루어낸 지정학적·문명적 위상을 검토하 려는 시각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이 지역의 변동과 긴장을 직시할 때 ‘발 해사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의의’ 도출로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동북아역사포커스 8호(2024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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