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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삼도, 포트 해밀턴, 그리고 거문도/한승훈.부산대

여수에서 쾌속선으로 2시간 20분 정도 가면 거 문도에 도착한다.

거문도는 세 개의 섬(동도, 서도, 고도)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거문도의 옛 이름은 삼도였다.

클 거(巨), 문자 문(文)이 합쳐진 ‘거문’ 이라는 이름은 1885년 이후부터 쓰였다.

인터넷 에서 거문도를 검색하면 함께 나오는 단어는 바 로 포트 해밀턴이다.

삼도(三島), 거문도(巨文島), 포트 해밀턴(Port Hamiton),

이 모든 이름은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관련이 깊다.

청의 정여창(丁汝昌) 제독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확인하기 위해서 거문도에 갔다가, 그곳 주민의 학식에 감탄한 나머지 ‘거문’ 이란 이름을 남겼다고 한다.

섬 사람들도 조정에 서도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섬 이름을 거문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삼도 는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영국이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다.

1845년 영국 군함 사마랑호(H. M. H. Samarang)는 한반도 남해안을 탐사하다가 거문도를 발견했으며, 그날 이후 영국은 해군 차관 해밀턴(William Baillie-Hamilton)의 이름을 따서 거문도를 포트 해밀턴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공식적인 섬의 이름은 거문도이지만, 포트 헤밀턴은 거문도의 다른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1. 침략과 우호가 공존하는 거문도

거문도는 1885~1887년 영국이 점령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조선 조 정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 아문의 독판(지금의 외교부장관) 김윤식은 “모든 계층과 백성들, 그리고 관 리들”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매우 걱정하기에, 조선 조정은 “조용히 기다릴 수는 없다”면서 영국에 항의했다.

오늘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에서도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서술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제국의 침략을 몸소 느낀 곳이 거문도였다. 거문도에는 아 직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던 흔적이 있다.

거문도와 상하이를 연결한 해저전신 케이블의 잔해도 그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후대 사람들은 ‘침 략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기억의 공간으로 점령의 흔적을 복원 한다.

그런데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의 침략만을 복원하지 않는다.

거문도에 는 영국 해군이 한국 최초로 테니스 코트를 만들고 경기를 한 사실을 기억 하기 위해서 ‘해밀턴 테니스 코트’를 운영하고 있다.

거문도의 고도(古島, 孤島)에는 영국 군인 세 명이 잠들어 있다.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군 묘지 일대를 ‘거문도역사공원’으로 만들었으며, 머나먼 타지에서 생을 마감한 영국군을 위해 조형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자 2005년부터 주한영국 대사관에서는 거문도 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장학금을 수여함으로써 고 마움을 표하고 있다.

왜 거문도는 영국의 침략을 상징하는 공간과 이름에 우호적인 감성을 입혔을까?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을 당시부터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 해 군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거문도 사람들은 영국 군인들을 좋 아했을까?

그 기원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문도 사람들과 영국 해군의 만남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2. 영국 해군을 손님으로 맞이한 거문도 주민

1884년 12월 20일 영국 군함 멀린(Merlin)호가 거문도에 도착했다.

영 국 해군이 거문도에 군함을 파견한 이유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 었다.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했다.

갑신정변은 조선 의 개화정책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되었지만, 청 군대와 일본 군대가 무 력으로 충돌하면서 갑신정변은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 문제에 개입할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거문도 점령을 고려 하였으며, 점령을 위한 예비조치로 멀린호를 거문도로 파견했던 것이다.

거문도 주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영국 해군 을 배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 덕 분에 영국 해군은 주민들과 한자로 필담을 나눌 수 있었다.

영국 해군들 은 거문도 주민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많은 양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 실에 놀라기도 했다.

5일 남짓 영국 해군은 거문도에 머물면서 주민들과 교류했다.

멀린호 함장 브렌톤(Reginald Carey-Brenton) 중위는 거문도 주민을 다음과 같이 평 가했다.1

1  “Report of Port Hamilton,” December 26, 1884, Confidential, ADM 116/70, PartⅠ[영국국립공문서관(The National Archives United Kingdom, TNA) 소장, 해군부 문서]

전반적으로 이 원주민들은 인내심, 도덕성, 근면함을 바탕으로 고분고분하고 청렴 해 보이며, 그들의 조건과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거문도 주민들이 온순한 기질의 유럽 국민과 접 촉하게 된다면, 그들을 다루는데 주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섬 주민들이 갖는 배타 적인 성향은 아마도 점차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영국 해군은 유럽인들이 거문도 주민들에게 온순하게 대하면, 거문도 주민들 역시 고분고분하게 따른 것으로 보았다.

영국 해군이 보기에 굳이 강압적으로 거문도 주민을 대할 필요가 없었으며, 더 나아가 주민들이 영 국의 통치에 순응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왜 거문도 주민들은 1884년 12월에 나타난 영국인에게 적대적이지 않 았을까?

영국 해군이 무력을 동원해서 거문도 주민을 강압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또 하나 생각해 볼 사실이 있다.

사실 거문도 주 민들에게 영국인들이 그리 낯설지 않았을 수 있다.

바로 9년 전인 1875년 8월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의 해군과 외교관의 방문을 받았던 경험이 있 었다.

그때 영국이 군함을 거문도에 파견한 이유는 조선과 일본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그해 일본이 군함을 부산에 파견해서 무력시위를 전개하자, 주일영국공사 파크스(Harry Smith Parkes)는 일본이 러시아와 함께 조선을 침략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에 파크스는 본국 외무부에 러시아의 조선 남하를 막기 위해서 거문도를 점령해야 한다고 제안하였고, 거문도 점령 을 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주일영국공사관의 서기관 플런켓(F. R. Plunkett) 을 거문도로 파견했던 것이다 1875년 8월 4일 11시 영국 군함 플로릭(Frolic)호가 거문도에 도착하자, 약 300여 명의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 군함 주변으로 모였다.

거문도 주민 들은 영국 해군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는 ‘거칠고 불 친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인들에 게 친절했다.

그러자 영국 해군도 거문도 주민들을 군함에 태우기도 했으 며, 군함에 동승했던 영국인 의사는 거문도 주민의 눈병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1875년 거문도 주민 앞에 나타난 영국은 점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거문도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플런켓은 영국이 거문도를 점 령해도 ‘통제’가 어렵지 않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은 거 문도 주민들에게 점령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거문도 주민 역시 영 국인들을 손님으로 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영국 해군의 호의에 감춰진 거문도 ‘약탈’ 계획

1885년 4월 영국 해군은 점령군으로 거문도 주민에게 나타났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 주민이 살지 않는 고도에 자리를 잡았다.

고도는 영국 해 군의 주둔을 위한 기지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막사가 건설되었고, 군함의 정박을 위해서 항만시설이 조성되었다.

거문도 주민에게 영국 해군은 더 이상 1875년 7월과 1884년 12월에 잠깐 머물렀던 존재가 아니라,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어찌 보면 매일 봐야 할 대상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거문도 주민들에게는 영국 해군의 점령 이전부터 해결하지 못한 삶의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굶주림이었다.

거문도 주민들은 최악의 기근과 싸 우고 있었다.

고기잡이로 계속된 흉년을 극복하면 좋으련만, 거문도 인근 해안은 이미 일본인 어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직후, 조정에서 파견 나온 엄세영은 잇따른 흉년과 일본인의 어업활동으 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거문도 주민들을 목격했다.

이에 그는 조선 조정 이 직접 거문도 주민들의 구휼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문도 주민들의 굶주림은 엉뚱한 곳에서 해결되었다.

영국 해 군은 거문도 주민으로부터 막사 부지를 임대했다.

막사를 짓기 위해서 거 문도 주민들을 고용했다.

막사 이외에 주둔을 위한 시설공사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 주민들로부터 군사시설이 들어서는 토지 를 임대했다.

거문도 주민들은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으며, 영국 해군은 곡식으로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급했다.

그러면서 거문도 주민들은 점 차로 기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거문도 내 곡식이 남아돌게 되자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 측과 협상을 전 개했다.

협상의 요지는 임금을 곡식이 아닌 현금으로 대신하는 것이었다.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 군함의 주둔으로 어업 활동이 어렵다는 사실을 거 론하면서, 임금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했다.

결국 거문도 주민과 영국은 일당 75전, 즉 7.5냥에 합의를 보았다.

오늘날 1냥의 가치 를 10만 원 이내로 파악한다면, 거문도 주민들은 결코 나쁜 대우를 받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영국 해군이 2년 남짓 거문도에 주둔하는 동안 거문도 주민과의 사이 에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은 듯하다. 영국은 자신들이 거문도 주 민들의 풍습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거문도뿐만 아니라 조선, 심 지어 북중국에서 영국에 대한 평판이 올라갔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 지만 영국 해군은 런던에 보내는 내부 보고서에서 거문도 주민들이 청결 하지 않다면서 험담을 늘어 놓았다.

거문도에서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존재로 여성을 부각시키는 반면에 거문도 남성들을 “단순한 쟁기질”만 하 는 게으른 존재로 비난하였다.

심지어 영국 해군은 거문도 주민들을 섬에서 쫓아내고 섬 전체를 차지 할 궁리를 했다.

영국은 거문도를 영구적인 해군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마치 지중해의 몰타(Malta)처럼 말이다.

그런데 영국이 거문도를 동아시아 의 해군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조선으로 부터 거문도를 조차함으로써, 영국의 ‘합법적인 지배력’이 관철되는 공간 으로 거문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영국이 ‘합법적인 지배력’으 로 거문도 주민을 추방함으로써, 동도와 서도를 포함한 거문도 전체를 해 군기지로 만들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거문도 전체를 자국의 영구적인 해군기지로 만들려는 영국 해군의 계 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이 영국의 거문 도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철수를 요구했다.

둘째, 청과 일 본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셋째, 러시아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빌미로 조선의 한 지역을 점령한다는 소문도 제기되었다.

결국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러시아의 라디젠스키(Ladygensky)로부터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내자, 1887년 2월 영국 은 거문도에서 군함과 병력을 철수시켰다.

4. 거문도 주민에게 친구이자 침략자로 남은 영국 해군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 해군의 장기 점령 계획을 몰랐다.

만약 영국 해 군이 자신들을 섬에서 쫓아내려고 했다면, 거문도 주민들은 더 이상 인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구 었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 해군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하지 만 영국 해군은 끝내 영구적인 점령을 실현하지 않았다.

거문도 주민들 의 터전을 빼앗지도 않았다.

테니스를 치면서 여가를 즐기는 친절한 이방 인으로 거문도에 있었다.

거문도 주민 중에는 영국 소통을 위해서 영어를 익힌 사람도 등장했다.

남성에게 국한되었지만,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인들과 어울렸다.

1929년 영국인들이 거문도에서 떠난 지 거의 50년이 되었지만 거문도 주민들은 한결같이 영국인을 친구로 여겼다.

거문도에 들어선 영국 사람과 도민 간의 우의는 퍽이나 두터웠던 듯하다.

지금에도 영국 사람의 말을 한 사람도 나쁘게 말하는 이가 없다.

자기네 친구같이 말한다.

첫 번 웅거(雄據)하는 바람에 섬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회유의 책을 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총을 들고 칼을 찬 군대같이 굴지 아니했다 한다. 『동아일보』, 1928년 7월 22일 ‘도서순례 26–거문도 방면 6’

오늘날 거문도 주민들은 여전히 영국에 우호적이다.

특히 거문도 주민들은 침략의 공간에 우호의 감성을 덧붙임으로써, 거문도는 한국과 영국 의 우호를 상징하는 장소로 재탄생하였다.

그 덕분에 테니스 동호인들은 한국 테니스의 ‘성지’ 거문도를 방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영구히 기지로 만들려고 했던 ‘음모’ 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국 해군이 영구 점령을 목적으로 거문도 주민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려는 계략을 문서로 남겼고, 영국 정부는 그 문서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후대 역사가들은 거 문도 주민의 따뜻한 마음을 ‘추방’으로 되갚으려 한 영국 해군의 시도를 세상에 전할 수 있었다.

동북아역사포커스 9호(2024.5.31)

2024년 여름 동북아포커스 9ȣ.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