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
Ⅱ.기독교계 신문·잡지 및 일본기독교사 관계 출판물의 서술
1. 1945년 이전
2. 1945년 이후
Ⅲ. 개교회사의 서술
1. 1945년 이전의 서술
2. 1945년 이후의 서술
Ⅳ. 기독교계 학교 학교사에 드러나는 서술
1.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2. 메이지학원[明治學院]
3. 페리스여학원[フェリス女学院]
4. 도요에이와여학원[東洋英和女学院]
5. 그밖의 학교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923년 9월 1일에 일본 간토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은특히도 쿄[東京]와 가나가와[神奈川]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지진재해로 인한 혼란 가운데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발생했고, 도쿄와 가나가와뿐 아니라 지바[千葉], 사이타마[埼玉], 군마[群馬] 등에서도 조선인 학살이 일어났다.
학살의 주체는 군대와 경찰, 그리고 일본인 민중으로 구성된 자경단이었는데, 계엄령이 시행되는가운데 자행되었다.
전쟁 또는 내란 때에만 발령될 수 있는계엄령이 지진 때 내려진 것에 대하여 강덕상(姜徳相)은 그명분이‘조선인 폭동 진압’이었다고 주장하였다.1)
본 연구의 목적은 간토대지진 발생 이후 일본 개신교계가조선인 학살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기록해 왔는지를 밝히는데있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기독교계 신문·잡지 및 일본 기독교사관계 등의 출판물 외에도, 다수의 조선인이 학살된 현장이었던도쿄와 가나가와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개교회사(個敎會史) 및기독교계 학교2)의 학교사(學校史)도 고찰 대상으로 삼는다.
고찰에서는 특히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1) 학살에 대해 어떤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가(학살, 박해, 살해등),
2) 학살의 주체를 누구로 보고 있는가(자경단 혹은 군대·경찰·자경단),
3) 계엄령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지진 직후 기독교계 신문·잡지에 게재된 서술을 다룬연구는몇 편 존재하는데,3) 본 연구의 주된 대상은 지진 직후의서술이아니라 1945년 이후의 서술(1945년 이전의 서술 가운데 조선인학살을 언급한 것은 거의 없다)이다.4)
1) 姜徳相, 関東大震災·虐殺の記憶(青丘文化社, 2003), 35-36; 姜徳相, “虐殺 再考, 戒厳令なかりせば,” 震災·戒厳令·虐殺(三一書房, 2008), 44-46; 姜徳相, “日韓関係史からみた関東大震災-一国史を超えて,” 姜徳相 外 編, 関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論創社, 2016), 51-52.
2) 일본에서는 선교부가 세운 학교 및 일본 기독교인이 세운학교를통칭하여 ‘기독교주의학교’라고 부른다. 본고에서는 ‘기독교계학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3) 예를 들면, 飯島信, “関東大震災と日本人キリスト者 1-朝鮮人虐殺への対応を中心として,” 「福音と世界」(1973년 10월호); 飯島信, “関東 大震災と日本人キリスト者 2-吉野作造の対応を中心として,” 「福音と世界」(1973년 11월호).
4) 본고에서는 시기구분에서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그이전시기를 ‘1945년 이전’으로, 그 이후 시기를 ‘1945년 이후’로부르도록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고스기가쓰지[小杉剋次]가 그의 논고, “조선인 학살과 현대: ‘간토대지진’과일본 기독교”5)에서 살짝 언급한 것 정도가 있을 뿐이다.
5) 小杉剋次, “朝鮮人虐殺と現代-「関東大震災」と日本キリスト教,” 「福音と世界」(1973년 7월호).
또한본논문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개교회사 및 학교사는 조선인학살에 관한 서술을 고찰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사용된 바 없다. 학살후 100주년이 지난 오늘날, 개교회사 및 학교사를 포함한일본기독교계의 출판물 속에 기재된 조선인 학살 관련 서술을조망하면서, 그 가운데 어떤 경향성이 엿보이는지 살펴보는것이전혀 의미 없는 작업은 아닐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간토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이일본사회에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를 개관하면서 기독교계신문·잡지, 일본기독교사 관계 등의 출판물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기술되어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 뒤 도쿄 및 가나가와에있는교회의 개교회사 가운데 포함된 관련 서술을 고찰한 뒤, 마지막으로 기독교계 학교의 학교사 속 서술을 검토한다.
Ⅱ. 기독교계 신문·잡지 및 일본기독교사관계 출판물의 서술
1. 1945년 이전
간토대지진 발생 후 보도가 통제됨에 따라 군대에 의한조선인 학살은 보도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학살 지역민들 외에그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6)
보도 통제는 10월 20일에 풀렸으나자경단에 의한 학살에 관한 보도에 대해서만 해금되었을뿐이후로도 군대와 경찰에 의한 학살은 은폐되었고, 관헌이편찬한역사책에서도 국가의 관여는 철저히 은폐되었다.7)
일본 기독교계 신문·잡지에게도 보도 통제가 이루어지고있는가운데에서, 예를 들어 일본기독교회 목사였던 사바 와타루[佐波亘]는 조선인이 방화했다는 유언비어와 그 후 일어난 일에대해암암리에 비판한 내용을 포함한 글을 1923년 10월 11일자「福音新報」에 실었다.8)
보도 통제가 풀린 직후에도 많지는 않지만기독교계 잡지 등에는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 글이 게재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조합 혼고교회[本郷教会]가 발행하던 잡지 「新人」에는 야마시타 젠스케[山下善助, 1923년 12월호]와 아소 히사시[麻生久, 1924년 1월호]가 각각 조선인 학살을 비판한 글이 실렸다.9)
6)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創史社, 2003), 203-204.
7)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創史社, 2011), 80, 116-121;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 75-76, 93.
8) 佐波亘, “大震災にあひて,” 「福音新報」(1923.10.11), 2.
9) 이 두 사람의 글은 福音と世界 1973년 8월호에도 수록되어있다.
간토대지진 이듬해인 9월 6일에는 ‘조선인 및 중국인학살참회 기도회’가 도쿄YMCA에서 개최되었다.
이것은 가가와도요히코[賀川豊彦] 및 고자키 히로미치[小崎弘道] 등이 발기인이되어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과 중국인을 추모하기 위해 개최된것이었다.10)
이 가운데 고자키는 간토대지진 발생 4년 후인1927년에 회고록을 간행하였는데, 거기서 “이 지진·화재 이후일어난비참한 일은 이른바 조선인 소동이었다.
누군가가 퍼뜨렸는지조선인 봉기가 일어나 무리를 지어 습격해 온다는 유언비어가성행하여, 시민 일동이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라 각자 광태를부린것은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는데, 평소의 수양이부족하여 생긴 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11)라고 적었다.
10)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教文館, 1988), 349. 관헌 측자료에는이 기도회의 명칭이 ‘震災一周年惨死支鮮人祈祷会’로 표기되어있다. 姜徳相·琴秉洞編, 現代史資料6「関東大震災と朝鮮人」(みすず書房, 1963), 606.
11) 小崎弘道, 七十年の回顧(警醒社, 1927), 341.
여기에는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로 인해 ‘시민’들이 당황했다고적고있는데, “광태를 부린 것”에 학살이 포함된 것으로 보고있었는지여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1945년 이전 일본 기독교계에서는지진 직후의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 글이거의발견되지 않는다.
2. 1945년 이후
간토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삼은 1945년이후일본 최초의 연구는 1958년에 발표된 사이토 히데오[斎藤秀夫]의논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소동”이었다.12)
12) 斎藤秀夫, “関東大震災と朝鮮人さわぎ,” 「歴史評論」99호(1958.11).
조선인 학살에관한연구는 이후 1960년대 들어서 진전되어 갔다.
학살의 주체에 관해서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군대·경찰·자경단이 그 주체였음이 밝혀졌는데, 군대나 경찰이 학살에 가담하고 특히 군대가학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에 관하여서는 간토대지진40주년이 되는 1963년 당시에 이미 강덕상 및 마쓰오 타카요시[松尾尊兊] 등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13)
또한 이 무렵부터사이타마현이나 지바현 등 학살이 일어났던 현지에 대한 조사가이루어져, 시민도 참여하여 실시된 조사 결과가 차례차례 간행되었다.14)
일본 학교의 역사교과서에는 어떻게 적혀 있을까? 다나카마사타카[田中正敬]에 따르면, 전후 일본 고등학교의 일본사교과서가운데 조선인 학살과 관련된 서술이 등장한 것은 1956년짓쿄출판[実教出版]이 간행한 고교일본사가 처음이었다.15)
이후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인 학살에 관한 연구와 조사가진전됨에 따라 다른 교과서에서도 학살에 관한 글이 실리고그내용도 심화되어, 1990년대에는 학살의 주체가 군대·경찰·자경단이었음을 명기하는 교과서도 나왔다.16)
13) 姜徳相, “関東大震災に於ける朝鮮人虐殺の実態,” 「歴史学研究会」278(1963.7), 8-11; 姜徳相, “つくりだされた流言-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について,” 「歴史評論」157(1963.9), 19-21; 姜徳相·琴秉洞編, 現代史資料6「関東大震災と朝鮮人」, xiv-xv; 松尾尊兊, “関東大震災下の朝鮮人虐殺事件(上),” 「思想」471호(1963.9), 50-52.
14)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 244-245.
15) 田中正敬, “戦後日本の歴史教科書と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事件,” 姜徳相 外 編, 関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 110, 119.
16) 田中正敬, “戦後日本の歴史教科書と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事件,” 110, 122; 徐鍾珍, “日本教科書の関東大震災と虐殺事件記述の内容分析,” 姜徳相 外 編, 関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도 참조.
일본 학계와 역사교과서가 이러한 동향을 보이는 가운데, 기독교계 신문·잡지 및 일본기독교사 관련 출판물은 조선인학살을 어떻게 다루어 왔을까?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바로는1945년이후 출판된 기독교계 출판물 가운데 간토대지진 당시벌어진조선인 학살을 최초로 언급한 서술은 1956년 출판된 구야마야스시[久山康]가 편집한 근대일본기독교(다이쇼·쇼와 편) 가운데“간토대지진 와중 다른 한편에서는 무고한 조선인 학살과사회주의자 박해도 일어났고”라는 기술이다.17)
그 다음으로는 1957년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제자인 야마모토 타이지로[山本泰次郎]가 우치무라와의 관련 속에서조선인학살을 언급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조선인 사건이라는 것은 지진 후 민심의 동요와 치안의 혼란속에서, 조선인이 독립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그때문에 민중이 다수의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물론사실무근의 헛소문으로서 참으로 불행하고 슬프기 짝이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중략] 그 사건에 대해 후지이 다케시[藤井武]라는 사람은, 예전에는우치무라의 제자였던 사람입니다만, 선언문을 발표하여 이번에일본인이한 일은 하늘과 사람 모두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짓이었다는 뜻을전하였습니다. 그건 확실히 그렇지요.18)
17) 久山康編, 近代日本とキリスト教(大正·昭和編)(創文社, 1956), 16.
18) 山本泰次郎, 内村鑑三(角川新書, 1957), 166-167. 여기에 나오는후지이 다케시의 선언문이란, “이번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많은자경단이 동정해야 마땅한 조선인에 대해, 또한 군대가 무력한사회주의자에 대해 취한 태도는 용서할 수 없는 인도적 죄악이다. 누가뭐래도 나는 그렇게 확신함을 여기에 선언해 놓는다.”라는 내용의선언문을 일컫는다. 塚本虎二·矢内原忠雄編, 藤井武全集第12巻(藤井武全集刊行会, 1932), 385. 또한 동일한 글을 야마모토는 다음의책에도게재하였다. 山本泰次郎, 内村鑑三の根本問題(教文館, 1968), 173.
여기서 조선인 학살의 주체로는 자경단이 거론될 뿐, 군대나경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후 1960년대 후반에 들어,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잡지인 「福音と世界」 1968년 10월호에 오윤태(呉允台)가 간토대지진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다룬 논고를 발표하였고, 같은달동논고를 수록한 日韓キリスト教交流史(일한기독교교류사)를간행하였다.19)
해당 논고에서 오윤태는 학살의 주체가 군대·경찰·자경단이었다고 논하고 있다.20)
또한 “일본의 크리스챤들은이문제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서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와 우치무라간조를 들며 비판적으로 논하였다.21)
19) 呉允台, “日韓キリスト教交流史 13,” 「福音と世界」(1968년 10월호); 呉允台, 日韓キリスト教交流史(新教出版社, 1968). 후자의한국어역으로서 吳允台, 韓日基督敎交流史(惠宣文化社, 1980)가 있다.
20) 吳允台, 韓日基督敎交流史, 225. 이 책에서 오윤태는 姜徳相·琴秉洞編의 상기 책과 松尾尊兊의 상기 논문 등을 전거로 들고있다.
21) 吳允台, 韓日基督敎交流史, 231-234. 야마모토 야스지로[山本泰次郞]는 앞의 인용문 직후에 조선인 학살에 대해 우치무라가침묵을지킨 것에 대하여 “아아 선생님은 정말 굉장한 선생님이라고절실히 감탄했습니다.”라고 적고 있는데, 오윤태는 우치무라를논하는가운데 이에 대해서도 함께 비판하고 있다. 덧붙여, 우치무라의침묵을 옹호한 논고로서는, 佐藤全弘, “朝鮮問題と內村鑑三,” 內村鑑三硏究(1975.12)와 鈴木範久, “関東大震災と日本のキリスト教と内村鑑三,” 「福音と世界」(2011년 11월호) 등이 있다.
이는 조선인 학살과의관련속에서 일본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최초의 시도였다고말할 수 있다.
「福音と世界」는 간토대지진 50주년이 되는 1973년 7월호에‘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라는 주제로 특집을 구성한 뒤, 같은해 8·10·1 월호에서도 각각 조선인 학살에 대한 논고를 게재하였다.
그 중 본고의 논의와 관련된 것을 몇 가지 거론해 보면, 7월호에 실린 논고 “조선인 학살과 현대”에서 고스기 가쓰지[小杉剋次]는 강덕상 등의 연구를 인용하는 형태로 관헌이 유언비어를의도적으로 확산시킨 것과 계엄령은 조선인 폭동을 이유로발령되었던 것, 학살의 주체가 군대·경찰·자경단이었던 것등을지적하였다.
또한 구마노 요시타카[熊野義孝]의 日本キリスト教神学思想史(일본기독교신학사상사)(1968년)나 오우치 사부로[大内三郎]·에비사와 아리미치[海老沢有道]의 日本キリスト教史(일본기독교사)(1970년)를 거론하며,
“‘대지진’을 자연재해로 보고, 그와중에자민족이 타민족을 살육한 사실에 대해 그것을 당시 일본기독교회의 본연의 자세와 관련하여 이야기한 것은 일절 없었다.”며,
대지진 전후의 기독교 출판물에 게재된 기술도 전체적으로는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논고 등을 제외하고는 학살과같은인재(人災)의 측면이 아닌 자연재해로서만 대지진을 파악하는경향이강했다고 논하였다.22)
10월호에 실린 이지마 마코토[飯島信]의 논고에서도 조선인폭동이라는 유언비어가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계엄령이발령되었던 것과 학살의 주체가 군대·경찰·자경단이었던 것, 그리고우에무라 마사히사·고자키 히로미치·우치무라 간조 등 당시기독교계의 대표적 지도자들이 조선인 학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하지않았던 점을 비판적으로 논하였다.23)
22) 小杉剋次, “朝鮮人虐殺と現代-「関東大震災」と日本キリスト教,” 18-19, 24-26. 여기 7월호에는 그 외에도, 동년 9월 2일에 개최 예정이었던“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五〇年 九·二集会”를 호소하는 글도실려있는데, 그 주최 단체로서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재일외국인인권원회와 일본기독교단 사회위원회가 이름을 올렸다.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五〇年 九·二集会へのよびかけ,” 「福音と世界」(1973년7월호), 57-58;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50年,” 「教団新報」(1973.8.4), 3. 해당집회에 대해서는, “再び震災で朝鮮人が殺されない保障は?,” 「教団新報」(1973.9.15)도 참고할 수 있다.
23) 飯島信, “関東大震災と日本人キリスト者 1,” 84-85; 87-88.
이처럼 앞서 언급한 오윤태의 논고나 「福音と世界」에수록된여러 논고에서는 계엄령의 명분이 조선인 폭동이었던 것, 그리고 그 계엄령 하에서 벌어진 학살의 주체가 군대·경찰·자경단이었던것 등이 지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980년에 일본 개신교의 대표적인 통사 가운데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도히 아키오[土肥昭夫]의 日本プロテスタント· キリスト教史(일본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사)가 출판되는데, 학살에관하여서는 “간토대지진(1923년 9월) 때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등이 군대에 의해 살해되고 수천 명의 조선인이 일본인에게학살당했다.”고 하여, 학살 주체를 ‘일본인’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제시했다.24)
1988년 2월에는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일본기독교역사대사전)이 간행되는데 그 가운데 ‘간토대지진’ 항목에서,
“…유언비어로 쫓기고 있는 조선인 학생을 자택에 숨겨 보호해 준나카야마 마사키[中山昌樹] … 의 활동을 들 수 있다. 덧붙여 24년9월5일에는 이시다 도모지[石田友治],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우자키 고우고로[鵜崎庚午郎], 마스토미 마사스케[益富政助], 고자키히로미치[小崎弘道] 등이 발기인이 되어 ‘조선인 및 중국인학살참회 기도회’가 도쿄기독교청년회에서 개최되었다.”라는기술을찾아볼 수 있다.25)
24) 土肥昭夫, 日本プロテスタント·キリスト教史(新教出版社, 1980), 248. 이 책의 각주 4(308쪽)에서 도히[土肥]는 우치무라 간조가조선인에 관한 유언을 듣고 ‘호위의 일’에 종사한 것에 대하여, “조선문제에 대하여 확고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 사토 마사히로[佐藤全弘]의 주장(앞에게시된 사토의 논문을 참조할 것)을 의문시하고 있다.
25)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教文館, 1988), 349.
이러한 기술은 ‘유언비어’라는 단어나기도회의 명칭 가운데 명기된 ‘학살’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지진당시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도같긴하지만, 분명한 형태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한편, 여기에등장하는 ‘나카야마 마사키’는 메이지학원[明治学院] 관계자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후술하도록 한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4월, 일본기독교역사대사전 편집위원회편 日本キリスト教史年表(일본기독교사연표)가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9.2 게이힌[京浜] 지구에 계엄령 시행, 조선인폭동유언비어 확산하여, 시민이 자경단 조직, 조선인 학살 시작됨”이라는기술이 게재되었다.26)
이러한 짧은 글이 이후 이어질서술(특히연표 속의 서술)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에 관해서는 후에다시확인하겠지만, 여기에서는 계엄령의 명분이 언급되고 있지않은점과 학살의 주체로 자경단만 거론되고 있는 점에 유의하고넘어가도록 하겠다.
이후에도 일본 기독교사를 다룬 책 가운데, 많지는 않지만조선인 학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1995년 간행된 시오노가즈오[塩野和夫]의 日本組合基督教会史研究序説(일본조합기독교회사연구 서설)의 연표에는, “9.2 게이힌 지구에 계엄령이 적용되어,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남”이라고 되어 있는데, 앞의일본기독교사연표와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고할수 있다.27)
26)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編集委員会編, 日本キリスト教史年表(教文館, 1988), 59. 이 기술은 역사학회 편, 日本史年表(일본사연표)증보판(岩波書店, 1984), 294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에 근거하였던것으로 추정된다. “게이힌 지역에 계엄령, 조선인 폭동유언비어확산하여, 시민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시작됨.”
27) 塩野和夫, 日本組合基督教会史研究序説(新教出版社, 1995), 82-83.
2000년에 간행된 나카무라 사토시[中村敏]의日本における福音派の歴史(일본복음파의 역사) 본문에 “혼란에의한유언비어의 결과,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학살당했다.”라고, 또한 연표에는 “9월 간토대지진. 조선인, 중국인 학살 일어남”이라고 각각 기술되어 있는데, 학살의 주체에 대해서는 적혀있지않다.28)
그 이듬해에 출판된 스즈키 노리히사[鈴木範久]의日本基督教史物語(일본기독교사 이야기)에는 3·1독립운동을 언급하는가운데, “당시의 신문을 읽으면, 유독 조선인에 대한 차별표현이지면에 두드러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간토대지진때헛소문에 의해 벌어진 조선인 학살은 그러한 언론의 논조에도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라고 하면서, 언론의 차별적 논조가조선인 학살의 원인 중 하나였음을 지적하였다.29)
「福音と世界」는 2011년 11월호부터 2012년 2월호까지4개호에 걸쳐 다시 한 번 간토대지진과 관련된 논고를 게재하였다.
이것은 2011년 7월 9일에 개최된 일본 크리스챤 아카데미주최심포지엄 ‘간토대지진과 기독교’의 내용을 실은 것이었다.
이심포지엄이 조선인 학살을 주제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 논고는조선인 학살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가이노 노부오[戒能信生] 와 스즈키 노리히사의 논고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해 논한 가이노 노부오의 논고에서는, 가가와가 1923년 10월 13일에 쓴 “폭력의 무능”이라는 글이언급되고 있다.30)
28) 中村敏, 日本における福音派の歴史(いのちのことば社, 2000), 68.
29) 鈴木範久, 日本基督教史物語(教文館, 2001), 173.
30) 戒能信生, “関東大震災と賀川豊彦,” 「福音と世界」(2012년 2월호), 58-59.
가이노는 “언론 통제 때문인지 ‘조선인’이라는단어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가가와가 군대·경찰·자경단을공공연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가가와의해당글가운데, ‘ 병대’, ‘헌병대’, ‘자경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 병대’는 ‘가메이도사건[亀戸事件]’(가메이도 경찰서 내에서기병대에 의해 일본인 사회주의자 10명이 살해된 사건)을, 그리고‘헌병대’ 는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등 3명을 살해했던 아마카스마사히코[甘粕正彦] 헌병대위(‘아마카스 사건’)를 가리킨다며, “자경단에의해 다수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심리와 중첩시켜 비판적으로논하고 있는 가가와의 시점은 오늘날에도 괄목할 만한것”이라고말하고 있다.
요컨대, 조선인 학살의 주체를 가가와는자경단으로 보고 있었다고 가이노는 바라본 것이다.31) 우치무라 간조에 관한 스즈키 노리히사의 논고에서는, 간토대지진 당시 ‘야경(夜警)’으로 참가하면서 동시에 계엄령으로출동한 군대에게 성서강당(聖書講堂)을 주둔지로 제공했던 우치무라의행동을 옹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즈키는 “계엄령의목적중하나는 조선인 학살을 꾀하는 악질적인 자경단을 단속하는것이었고, 자경단에 의한 검문이나 무기 휴대를 금하였던 것도하나의 사실입니다. 군대 철수 후, 우치무라가 참여한 야경은이를대체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32)
스즈키는 학살의 주체가 자경단이었고, 그 자경단의 학살 행위를막기 위해서 계엄령이 발령되었다는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수있다.33) 31) 가가와는 고베에서 대지진에 대한 소식을 들은 뒤 재해현장으로건너가 도쿄의 혼조[本所]에서 활동을 전개했는데, 혼조는가메이도 경찰서와 그다지 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었다. 가메이도경찰서에서는 일본인 사회주의자 10명뿐 아니라 다수의 조선인이기병대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가가와는그사실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가가와의 글 가운데에 등장하는 ‘ 병대’가 조선인 학살도 의미하고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메이도에서 벌어진 기병대의 조선인학살에대해서는, 姜徳相, 関東大震災·虐殺の記憶, 121-124;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 189-192를 참조할 수 있다. 32) 鈴木範久, “関東大震災と日本のキリスト教と内村鑑三,” 56. 또한스즈키는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자경단의 손에 적지 않은조선인학살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관헌의 명령에 따라 결성된 자경단이 조선인 학살을 자행한 사례도확인된다. 예를 들면,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 129-133을 참고할 수 있다. 18 「한국기독교와 역사」제60호(2024년 3월 25일) 여기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걸쳐서는 계엄령의 명분이 “조선인 폭동의 진압”에 있었으며, 그계엄령 하에서 조선인을 학살한 것은 군대·경찰·자경단이었다고쓴논고가 기독교계 출판물 가운데에도 존재했었지만, 1980년대이후에는 학살의 주체가 자경단뿐이었다고 파악하는 서술이정착되어 갔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학계나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흐름에 역행하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34)
어째서 이렇게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다음 장에서 살펴보게되듯이1988년 간행된 일본기독교사연표의 서술이 끼친 영향도적지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인 학살에 관한 용어로는 1950년대후반 이후부터 줄곧 ‘학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오고있다는점도 유의해야 한다.
Ⅲ. 개교회사의 서술
본 연구에서는 1945년 이전과 이후에 간행된 113개 교회204권의 개교회사를 수집하여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각교회의개교회사를 보면 그 대다수가 본문이나 연표에서 간토대지진을언급하고 있지만, 조선인 학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많지않다. 33)
스즈키는 또 다른 저서의 연표에서, “9.2 게이힌 지구에 계엄령시행, 조선인 폭동 유언비어가 확산하여, 시민이 자경단을 조직, 조선인학살 시작됨”이라고 하면서, 전술한 日本キリスト教史年表의기술을사용하고 있다. 鈴木範久, 日本キリスト教史(教文館, 2017), 61. 34) 단 재일조선인사의 연구자이자 재일코리안 3세이기도 한 김경호(金耿昊)가 군대·경찰·자경단이 학살의 주체였던 것을 짧게 언급하고있다. 金耿昊, “地域から考える在日朝鮮人史と教会史-関東大震災から100年をおぼえて (2) 在日朝鮮人社会のはじまり,” 「福音と世界」(2023년5월호), 64. 이상훈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일본기독교계 역사서술에 대한고찰19본문에서 조선인 학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4개 교회, 연표에서언급하고 있는 것이 15개 교회인데 그 중 3개 교회는본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교회였다. 조선인 학살을 나타내는 용어로서는‘학살’ 외에도, ‘대학살’, ‘(다수)살해’, ‘모살’, ‘박해’, ‘조선인사냥’ 등이 사용되었다. 여기에서는 우선 1945년 이전의기술에대해 고찰한다.
1. 1945년 이전의 서술
1945년 이전에 간행된 개교회사 가운데 직접적으로조선인학살을 언급한 것은 없었지만,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을언급한서술은 두 개 존재하였다. 하나는 横須賀日本基督教会五十年史(요코스카 일본기독교회 50년사)(1935년)이다. 이 책 76쪽에는, “지진 당시 우리가 가장 기뻐했던 것은, 그 땅에서 조선인문제가떠들썩했을 때 해군 당국이 일찌감치 시내의 조선인 전부를이리야마즈[不入斗] 연병장에 수용하여 한 사람의 부상자도내지않았던 것이었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리야마즈연병장’이란, 요코스카 중포병연대의 연병장으로서, 간토대지진후‘보호감독’을 목적으로 200명 이상의 조선인을 수용시킨바있다.35)
35) 横須賀市震災誌刊行会編, 横須賀市震災誌 附 復興誌(1932), 239-241.
이 서술은 ‘조선인 문제’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암암리에 다른 지역에서는 유언비어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났으나요코스카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있다고도 말할 수 있으나, 학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서술은나오지않는다.
1945년 이전에 발견되는 또 다른 서술은 日本メソヂスト下谷教会六拾年史(일본메소디스트 시타야교회 60년사)(1939년)에게재된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2일 계엄령이 발령된 데 이어 비상징병령, 지급연기령, 폭리단속령등이 잇따라 발포되었지만, 극도의 참상에 인심이 흉흉하고 [조]선인36)이습격하여 온다는 유언비어가 성행해 민심이 동요하여, 불안한 마음에쫓겨 지식인 사이에서조차 천도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형국이어서, 5일[조]선인 폭거 풍설 단속의 훈시를 발하고, 7일은 유언비어 단속령을내리는 등, 인심 안정에 힘썼는데 ….37)
36) ‘선인(鮮人)’이란 ‘조선인’을 멸시하기 위해 일본인이 사용한용어이다.
37) 日本メソヂスト下谷教会六拾年史(1939), 164.
위의 서술은 ‘민심 동요’와 그 원인으로서 조선인에 관한유언비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학살 자체에 대해서는 일절언급하지 않고 있다.
2. 1945년 이후의 서술
1945년 이후 간행된 개교회사 가운데에서도 학살을 직접적으로는 논하지 않은 채 ‘조선인 문제’를 언급하거나 지진당시일본인 민중이 겪은 동요·불안·고난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몇몇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마쿠라유키노시타교회[鎌倉雪ノ下教会]의 主に仕えて五十年(주를 섬긴 50년)(1973년)에는 지진당시동 교회의 목사였던 마쓰오 미키조[松尾造酒蔵]의 다음과같은회상문이 실려 있다.
“나의 경우, 요코하마에서 내가 살던곳이반파되었고 또 요코하마-가마쿠라 간 왕복이 도보밖에 남지않아, 그것도 조선인 문제도 있어 어수선한 길이었기 때문에, 나는미스 홀의 사택이 안전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곳을연락복구사무소로 삼았다.”38)
여기서 ‘조선인 문제’란 길이 ‘어수선’하게된 원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에 간행된 어느 성읍의 교회: 오다와라교회 75년의발걸음(ある城下町の教会-小田原教会七十五年の歩み)에서는 足柄下郡史(아시가라시모군사)(1929년)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하고있다.
“…이어서 덮친 여진의 격동, 소름끼치는 유언비어, 게다가게이힌 지방에서 벌어진 극심한 참해에 대한 소식에, 군민(郡民)은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지옥의 모진 시련을 당하는 듯한날이이어졌던 것이다.”39)
여기서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는사람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 준 원인의 한 가지로 등장하고있지만, 학살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日本基督教団中渋谷教会五十年史(일본기독교단 나카시부야교회 50년사)(1967년)에는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그 가운데 엉뚱한 유언비어가 날아와 인심을 한층 더 공포의구렁텅이로 떨어뜨렸다. 급기야 경시청은 “있지도 않은 소리를 퍼뜨리면처벌받습니다 운운” 고시 전단지를 동네에 붙였다. 9월 2일 정부는도쿄도에 계엄령을 내렸고, 3일에는 그 범위가 넓어져 가나가와, 사이타마, 지바 등의 현에까지 이르렀다.40)
38) 主に仕えて五十年(1973), 28-29.
39) ある城下町の教会-小田原教会七十五年の歩み(1962), 39.
40) 日本基督教団 中渋谷教会五十年史(1967), 164. 간토대지진이후일본인이 느낀 ‘불안’에 대해 언급한 책으로는 大森聖アグネス教会 1920-2020(2019)도 있는데, 이 책의 22쪽에는 “1923년(다이쇼12) 에 간토대지진이 발생해 폭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 불안이확산됩니다.”라는 형태로 민중의 동요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폭동이일어나는 등’에 나오는 ‘폭동’이 ‘조선인폭동’을 가리키는것인지,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치않다.
이 글에서도 민심의 동요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다. 또한경시청의 고시 전단지 살포는 9월 5일 이후 경찰의 움직임을언급한 것으로 보이지만, 경찰이 유언비어 유포에 가담했던것에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 글을 쓴 필자의 의도는 알수없지만, 경찰의 고시 전단지 살포 행위 뒤에 9월 2일의 계엄령발령을 위치시킴으로써, 경찰이 처음부터 유언비어 저지에나선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는 그 반대였음에도말이다.
계엄령에 대해서는 무엇을 목적으로 했었는지 언급하고있지 않다.
이와 같은 두 교회의 개교회사는 1960년대에 출판된것인데, 이후에도 두 교회는 다시 개교회사를 간행한다.
그 가운데연표에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 서술이 등장하기도 한다
. 오다와라교회의 創立百周年記念誌(창립백주년기념지)(1989년) 가운데수록된연표에는, “조선인폭동에 관한 유언비어로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中渋谷教会80年史 資料編(나카시부야교회 80주년사 자료편)(1997년)과 中渋谷教会百年史(나카시부야교회백년사)(2018년)의 연표에는 “9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이라는 기술이 나온다.41)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개교회사차원에서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교회사 가운데 직접적으로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첫번째책은 1979년에 간행된 霊南坂教会一〇〇年史(레이난자카교회100년사)의 연표로서, “조선인 폭동 유언비어, 조선인 박해”라고적혀 있다.42)
여기서 ‘학살’보다는 뉘앙스가 약한 ‘박해’43)라는용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1980년대 들어 ‘살해’, ‘학살’ 등의용어가개교회사에서도 사용되었다.44)
41) 創立百周年記念誌(1989), 61; 中渋谷教会80年史 資料編(1997), 223; 中渋谷教会百年史(2018), 204.
42) 霊南坂教会一〇〇年史(1979), 726. 이 책 외에 ‘박해’라는 용어가사용되고 있는 것으로서는 東中野教会90年の歩み(2002), 216가있다.
43) 일본어에서 ‘박해’란 학살을 수반하지 않는 경우에도 사용되는용어이므로, ‘박해’를 사용함으로써 학살이 있었던 사실이 모호해져 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44) 그 중에서도 ‘조선인 사냥[朝鮮人狩り]’이라는 용어를 사용한主の御名によりて-横浜聖アンデレ教会百年史(1985), 43과 같은경우도있다.
1980년대 초에 ‘살해’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로서는, 일본기독교단 가메이도교회[亀戸教会]의 개교회사를 들 수 있다.
지진당시 ‘가메이도 사건[亀戸事件]’이 벌어졌던 가메이도 경찰서인근에 위치한 동 교회의 개교회사는, 본문에서 조선인 학살과관련된 내용을 처음으로 언급한 개교회사이다.
가메이도교회는亀戸教会 [献堂]三十年史(가메이도교회 [헌당] 30년사)(1982년)와亀戸教会八十年史(가메이도교회 80년사)(2000년)를 출간해 놓고있는데, 그 가운데 가메이도교회 30년사의 본문에는 다음과같은서술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간토대지진 당시 일어난이른바‘가메이도 사건’과 가메이도 교회와의 관계이다. 이 사건은 지진의대혼란을 틈타 당시 특고경찰과 헌병대가 책동하여 민중을 맹동시키고사회주의자 및 조선인을 피비린내 나게 탄압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고문현장의 하나가 가메이도 경찰서였고, 그 옆에 위치한 가메이도교회건물 내에서는 위와 같은 이재민 구호 같은 사랑의 사업이 전개되고있었는데, 교인들이 가메이도 경찰서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전혀감지하지못하였을까? 교회 측 자료가 그 사건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는것이신경 쓰이는 대목이다.45)
45) 亀戸教会三十年史(1982), 14. 가메이도교회 자체는 1919년에설립된 교회인데, 여기에서의 30년사란 예배당 헌당으로부터의30년을 의미한다. 가메이도교회의 현재 목사인 호리카와 이쓰키[堀川樹] 씨에게 동 교회의 역사자료에 대해 문의한 결과, 1945년 이전자료는 도쿄대공습 때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24 「한국기독교와 역사」제60호(2024년 3월 25일)
위의 서술에서 가메이도 사건에 대해서 “사회주의자및조선인을 피비린내 나게 탄압한 사건”, “그 고문현장의 하나가가메이도 경찰서”라고 쓰고 있지만, 보다 직접적인 표현으로서학살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한편, 이 책의 연표에는 “간토대지진에서 말미암아 조선인 다수가 살해당하다”라고 적혀 있다.46)
학살의 주체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특고경찰과 헌병대에게맹동당한 민중이라고 되어 있는데, 관헌이 깊이 관여했던 것을지적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음으로 가메이도교회 80년사의본문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자.
간토대지진 때, 이른바 ‘가메이도 사건’이라는 꺼림칙한 일이벌어졌다. 그것은 난무하는 무책임한 유언비어 속에 악질적으로 “조선인이우물에 독을 던져 넣고 있다”고 하는 헛소문이 퍼져, 동요한 민중이마을마다 야경단을 결성해 행인 누구에게든지 말을 하게 해 조선인으로보이는 발음을 한 자는 유무를 불문하고 붙잡아 경찰에 끌고 가거나린치를가해 모살하거나 급기야 조선인뿐 아니라 당국을 아주 불편하게만들고있다고 보였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과격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경찰에 구금해 고문한 끝에 학살했던 사건으로서, 그 중심 무대가되었던곳이 당시의 가메이도 경찰서였다. 그러한 악질적인 헛소문은 당시의특고경찰과 헌병대가 탄압을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었음이전후(戰後) 판명되었다. / 그 가메이도 경찰서 인근(일설에 의하면 바로옆) 우리 일본 메소지스트 가메이도교회가 있었으므로, 경찰서의 어떤이상한 움직임이나 풍설이 교인 중 누군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리없었다고 생각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47)
46) 亀戸教会三十年史(1982), 161.
47) 亀戸教会八十年史(2000), 120.
위의 서술에서는 관헌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사실도 언급되고있다.
학살의 주체에 관해서는 민중이 조직한 야경단, 즉자경단이었다고 하고 있으며, 학살에 대한 용어로서 조선인에 대해서는‘모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개교회사 가운데 조선인 학살에 대해 가장 상세히기술하고있는 것은 日本基督教団 東駒形教会七〇年史(일본기독교단히가시코마가타교회 70년사)(1993년)이다.
간토대지진 당시 상경한가가와 도요히코의 구호활동 가운데 탄생한 동 교회의 70년사에는우선 유언비어의 발생과 그 사회적·심리적·역사적 배경에대해상술한 뒤,48) 조선인 학살 및 희생자 수에 대해 다음과같이적고 있다.
이러한 유언비어로 인해 청년단, 재향군인회 등 일반 민중에의해자발적으로 조직된 자경단이라 불린 무장집단이 각지에서 결성되었다. 그들은 일본도, 장창, 창, 죽창, 곤봉, 목검 등의 무기를 들고 모여, 조선인으로 보이면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덮쳐 학살했다. / 학살당한조선인은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231명이었지만, 당시 동국인 모 씨가 신변의위험을 무릅쓰고 조사한 수로는 6,420명이었으며,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조사에 따르면 2,613명이었는데, 실태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또한조선인으로 오인되거나 사회주의자로서 살해된 일본인이 58명. 중국인도450명이 참살됐다. 중국인 노동자가 다수 학살된 것은, 가메이도에서가까운 오지마쵸[大島町]에서였던 사실에서 오지마사건이라고도 불리고있다. 이것은 중일전쟁 시 벌어진 난징참살사건과 더불어 일본이세계에부끄러워해야 할 이른바 숨겨진 역사-조선인학살사건이다.49)
여기에서는 학살의 주체로서 자경단만을 꼽고 있다.
다만희생자 수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본문에 중국인 학살에 관한서술이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개교회사 가운데 이책이유일하다.50)
48) 日本基督教団 東駒形教会七〇年史(1993), 11-12.
49) 日本基督教団 東駒形教会七〇年史, 12.
50) 연표에서 중국인 학살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는 日本基督教団八王子教会100年史(2007)의 연표에서, “게이힌 지구에 계엄령적용, 유언비어에 의한 조선인·중국인 대량 학살 시작됨”이라는기술이 유일하다.
위의 일본기독교단 히가시코마가타교회 70년사에서는‘학살’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개교회사에서 처음으로‘학살’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白金教会七十年史(시로가네교회70년사)(1988년)로서, 그 ‘연표’에 “게이힌 지구에 계엄령 시행/ 조선인 대학살 시작됨”이라고 기술되어 있다.51)
이것은 “게이힌[京浜] 지구에 계엄령 시행, 조선인 폭동 유언비어 확산하여, 시민이자경단 조직, 조선인 학살 시작됨”이라고 한 일본기독교사연표서술의 처음과 끝 부분을 답습한 형태로서, 그 영향을 받았음을짐작케 한다. 일본기독교사연표의 서술은 실제로 그 뒤로출판된 몇몇 개교회사의 연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52)
51) 白金教会七十年史(1988), 147.
52) 그러한 경우로서 東中野教会90年の歩み(2002), 216; 続·雲のような証人たち-東駒形教会90年史(2013), L-5 등을 들 수 있다.
예를들어, 続·雲のような証人たち-東駒形教会90年史((속) 구름과 같은증인들: 히가시코마가타교회 90년사)(2013년)에는 “게이힌 지구에 계엄령시행, 조선인 폭동 유언비어가 확산하여,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학살이 각지에서 발생”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예에서도볼수있듯이, 일본기독교사연표의 서술을 답습한 것으로 생각되는글은 모두 학살의 주체를 자경단으로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기독교단 히로오교회[広尾教会]의 개교회사를살펴보고자 한다.
広尾教会百年史(히로오교회 100년사)(2002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쓰가와[津川] 목사는 진구가이엔[神宮外苑] 구호소에서 이재민구호를하고 있었다. “조선인이 약탈, 방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이요코하마, 도쿄로 퍼지면서 6,000명이 넘는 조선인에 대한 살해, 습격사건이 다발했다. 그러나 쓰가와 목사는 조선인들을 교회에 숨기거나또는교회를 구호소로 삼아 식량을 조달하고 배식하기도 하였던 것으로보인 다.53)
여기에는 ‘조선인 살해’라고 쓰여 있지만 연표에는 ‘조선인학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54)
지진 당시 조선인을교회에숨겨준 것에 관해서는, 당시의 일을 알고 있던 교인 시마자키하쓰히[嶋崎初日]의 증언도 같은 책에 게재되어 있다.55)
또한동교회가 1971년에 간행한 豊分教会七十年史(도요와케교회 70년사)에도 쓰가와 목사의 부인 쓰가와 미치코[津川道子] 및 교인오카야스 아이[岡安愛] 등 두 사람이 각각 교회로 도망 온 조선인을교회에 숨겼던 것을 회상하고 있다.56)
53) 広尾教会百年史(2002), 60.
54) 広尾教会百年史, 278.
55) 広尾教会百年史, 133.
56) 豊分教会七十年史(1971). 이 책은 広尾教会百年史 속에재수록되어 있다. 동 교회는 1996년에 ‘도요와케교회’에서 ‘히로오교회’로명칭을 바꿨다.
교회에 조선인을 숨겨주었던것을 개교회사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는 바로는히로오교회뿐이다.
히로오교회의 교회사 서술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하고싶은것은, 도요와케교회 70년사에는 조선인 학살 자체에 대한언급이없었다는 점이다.
1971년의 시점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조선인학살이 이후 2002년에 간행된 개교회사에는 등장하게 된것인데, 이것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1980년대 전후부터 조선인학살이언급되기 시작한 개교회사들의 전반적인 경향성에 부합하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각 교회의 개교회사에서 조선인학살에 대한 서술이 본문 혹은 연표에 포함된 것은 다소 늦은감이있는 1980년 전후부터였으며 ‘학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시작한 것도 1988년 이후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학살의 주체를기록하고 있는 것은 전부 자경단으로 적고 있으며, ‘군대·경찰·자경단’을 학살의 주체로 명기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점은 앞서 살펴본 기독교 출판물 일반의 1980년대 이후의경향과궤를 같이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계엄령에 대해서도살펴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것을 포함하여 개교회사 가운데 간토대지진당시 이루어진 계엄령 발령에 대해 다룬 것이 몇 권 있었지만,57) 계엄령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언급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57) 그밖의 것으로는, 聖ケ丘教会十五年(1964), 83; 下町の教会-下谷教会九十年(1969), 87; 日本キリスト教団下谷教会百年史(1979), 209; 弓町本郷教会百年史(1986), 828; 鎌倉雪ノ下教会伝道開始70年記念誌-神の力に生かされて(1988), 585; 小田原十字町教会百年史(1998), 554; 近代日本の戦争と教会-日本基督教団四谷教会史(2011), 140 등이 있다.
Ⅳ. 기독교계 학교 학교사에 드러나는 서술
기독교계 학교의 학교사에 대해서는, 지진 당시 도쿄및가나가와에 존재했던 기독교계 학교 가운데 현존하는 학교의학교사를 수집하여 고찰하였다.
구체적으로는 20개교 92권의 학교사를고찰 대상으로 삼았고,58) 그 가운데 7개교의 학교사에 조선인학살과 관련된 서술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아래는그에대한 고찰이다.
58) 青山学院, 明治学院, 立教学院, 立教女学院, 香蘭女学校, 聖公会神学院, 普連土学園, 聖学院, 女子聖学院, 共立女子学園, 横浜共立学園, 東京女子大学, 頌栄女子学院, フェリス女学院, 東洋英和女学院, 横浜英和学院, 女子学院, 捜真女学校, 関東学院, 津田塾의 20개교.
1.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아오야마학원은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지 9년째 되는해인1932년에 青山学院五十年史(아오야마학원 50년사)를 간행했다. 이책에는 지진 당시의 조선인과 관련하여, “신학부 기숙사가조선인의 피난소가 되어, 120여 명을 보호했습니다. 당시 조선인이반역적 파괴 행동을 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조선인의 생명이급박한 경우였기 때문입니다.”라는 기술을 찾을 수 있다.59)
여기서는 유언비어로 인해 조선인의 생명에 위험이 닥쳤다고언급하고있으나, 학살의 사실 자체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45년 이후에 출판된 青山学院八十五年史(아오야마학원85년사)(1959년)에서는 조선인을 보호했던 일이 다시 언급되고있으나, 유언비어에 대한 언급이 없어져 내용적으로는 후퇴한모습을보인다.60)
59) 三上豊, “青山学院寄宿舎史,” 比屋根安定編, 青山学院五十年史(青山学院, 1932), 292.
60) 古坂嵓城編, 青山学院八十五年史(1959), 70.
하지만 1964년에 간행된 青山学院九十年の歩み(아오야마학원 90년의 발걸음)에서는 서술이 완전히 바뀌어 지진당시의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더욱이 여기에 덧붙여 두어야 하는 것은 아오야마학원이 했던조선인의 수용 및 보호이다. 여진이 계속되고 대화재로 타 들어가 세상의종말을 연상케 하는 혼란 상황에서, 대지진의 다음날부터 조선인과사회주의자가 폭동을 기도하며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극도의 불안감에 전율하던 시민 중 일부가 그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않고‘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이 보이면 체포·폭행 또는 살육하기에이르렀다.
그렇게 희생된 조선인이 3천 명에 달하였다고 하는데, 아오야마학원은 신학부를 중심으로 그러한 사실무근 헛소문에 의한 희생으로부터 조선인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신학부 기숙사는 파괴되지않았기 때문에 당시 기숙하던 학생들은 즉시 활동을 시작하여 우선24명의조선인을 수용하였고, 밤에는 함께 야경을 돌아 조선인 50명을 수용하였다. 4일에는 아오야마학원 구제부가 조직되어 다시 40명을 수용하였는데, 후에는 이들 조선인들이 지바[千葉]의 수용소로 옮겨져 …61)
여기서는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 뿐 아니라 아오야마학원을통한 조선인 보호활동에 대해서도 그 자세한 경위가 소개되고있다. 다만 학살의 주체를 자경단으로 보고 있다. 한편, 용어로서‘학살’이 아니라 ‘살육’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용어는 일본어에서 ‘학살’과 동등한 정도의 잔학성을 의미하는 어감을 가진단어라고 할 수 있다.62)
그 뒤에 간행된 아오야마학원 90년사(1965년)에서는 9월 4일 이후에 대한 서술이 보다 상세해졌으나, 2023년에 간행된 青山學院一五〇年史 通史編1(아오야마학원 150년사통사편1)에서는 기본적으로 이전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으며학살에 대해서도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을 발견하면 폭행·살육등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희생자 수에대한언급이 없어지면서 학살에 대한 서술은 조금 후퇴한 모습을보이고 있다.63)
아오야마학원 90년의 발걸음(1964년) 이후, 아오야마학원의 학교사에서는 용어로서 ‘학살’이 아닌 ‘살육’이계속사용되었으며, 학살의 주체를 자경단으로 적었다.64)
61) 青山学院九十年の歩み(1964), 128.
62) 이 青山学院九十年の歩み의 집필진에는 역사학자가 포함되어있었는데, 이 책에서 조선인 학살을 언급하게 된 것은 조선인학살을둘러싼 당시의 연구성과를 집필진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있었기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63) 青山学院九十年史(1965), 407; 青山學院一五〇年史 通史編1(2023), 296.
64) 특히 青山學院一五〇年史 通史編1, 296에는, 유언비어를단속하겠다는 경시청의 전단지 내용이 언급되어 있기도 하여, 학살주체 로서 자경단의 행위가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2. 메이지학원[明治學院]
대지진 후 4년이 지난 1927년에 간행된 明治学院五十年史(메이지학원 50년사)에는 지진 당시의 조선인과 관련하여, 부상자를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병원은 통로를 제외한 그밖의 모든장소에 ‘[조]선인 부상자’나 여타 화상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차있어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음을 전하는 서술이 있을뿐이다.65)
병원에 있던 조선인들이 왜 부상당하였는지에 대해서는쓰고있지 않지만, 지진 때 많은 조선인 부상자들이 병원에 있었다는점을 전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서술이다.
1945년 이후인 1957년에 나온 明治学院八十年史(메이지학원80년사)에는 2명의 조선인 학생을 숨겨준 교원에 대한 일화가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또한 지진 와중에 불안 동요로 인해 의심을 품게 된 일본인은유감스럽게도 하나의 커다란 과실을 저질렀다. 쓰루 센지[都留仙次] 씨는위험에 노출된 2명의 [조]선인 학생을 모처에 숨겼는데, 이를 탐지한학원관계의 군인 한 명이 쓰루 씨를 찾아와 군도를 뽑아들고 그를 위협하며두학생의 소재를 추궁하였다. 쓰루 씨는 결사의 각오를 얼굴에드러내며“나는 하나님의 뜻에 합하다고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당신의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라며 완강히 거절하여 끝끝내두학생을 지켜낸 것이었다.66)
65) 鷲山第三郎, 明治学院五十年史(1927), 466.
66) 渡辺勇助, 明治学院八十年史(1957), 89.
위의 서술에는 “일본인은 유감스럽게도 하나의 커다란과실을저질렀다.”라는 학살을 암시하는 문장이 하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메이지학원의 학교사에서 학살에 대한 서술이 추가된것은1967년에 간행된 明治学院九十年史(메이지학원 90년사)부터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등장한다.
대지진과 함께 통신과 보도의 기능이 마비되어 시내에는 유언비어가난무했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이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여든다”느니 “우물에 독을 풀었다”느니 하는 근거없는 유언비어에 민심이 동요했다. / “그 때의 소동으로 피살된 조선인의수는 분명치 않다. 내무성 경보국이 조사한 형사사건 관계 즉 범인을알고 있는 피해자는 조선인이 231명, 중국인 3명, 일본인 59명이었는데, 실제로 살해된 사람은 이보다 십여 배는 될 것이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가 조선 이재 동맹 위문반이 10월 말까지 조사했던 숫자라며 전한바에 따르면, 피살된 조선인이 2,613명에 이른다.”(중앙공론사, 일본의역사제23권) / 학원에는 당시 신학부, 고등학부, 중학부에 모두 조선및타이완에서 온 유학생이 많았다. 학원의 교사나 학생 중에도 그러한유언비어를 믿는 사람이 있었기에 조선 학생들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67)
여기에 이어서는 상술한 메이지학원 80년사의 서술을인용한 뒤, “나카야마[中山] 교수도 학원 구내의 사택에 조선학생을숨겨뒀다”는 기술이 나온다.68)
67) 明治学院九十年史(1967), 177.
68) 明治学院九十年史, 178.
여기 등장하는 ‘나카야마교수’가바로 위의 2장에서 언급된 ‘나카야마 마사키’[中山昌樹]를일컫는다.
여기서는 나카야마가 숨긴 조선인 학생과 쓰루가 보호한두조선인 학생을 다른 사람들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明治学院百年史(메이지학원 백년사)(1977년)를 보면 신변의 위험을느낀두 조선인 학생이 쓰루에게 도움을 청하여 쓰루가 나카야마의사택에 그들을 맡긴 경위가 적혀 있다.
이 책에서는 그두조선인 학생의 이름이 ‘김학우(金学祐), 김종치(金宗治)’였던 것도밝히고 있다.69)
메이지학원 백년사에서는 조선인 학살과관련된서술에서 ‘학살’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살해’ 또는‘살해살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학살의 주체로서자경단을들고 있다. 또한 계엄령도 언급하면서, 계엄령 발령이결과적으로 일반 시민의 불안감을 부추기게 되었고 그것이 자경단의결성과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2013년에 간행된 메이지학원 150년사에서는 조선인학살에대한 기술이 상당히 축소되어, “조선인에 관한 유언비어를믿은사람들에 의해 수천 명의 조선인이 살해되었다.”고서술되었다.70)
69) 明治学院百年史(1977), 310-311.
70) 明治学院百五十年史(2013), 206-207.
여기에서도 학살의 주체는 자경단이었음이 시사되고있다. 나아가 메이지학원의 학교사에서는 ‘학살’이라는 용어가단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3. 페리스여학원[フェリス女学院]
2010년에 간행된 フェリス女学院150年史資料集 第1集関東大震災 女学生の記録 大震火災遭難実記(페리스여학원 150년사자료집 제1집 간토대지진 여학생의 기록 대지진화재 조난실기)(이하여학생의 기록)는, 지진 후 3개월이 지난 11월 말경부터 1924년1월초에 걸쳐 쓰인 학생들의 글을 모은 작문집이다.
원래작문집은「大正拾貮年九月一日大震火災遭難実記(다이쇼12년 9월 1일대지진화재 조난실기)」라는 제목 아래 상·중·하 세 권으로 나뉘어1932년 9월에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번각하여 간행한 것이이책이다.
본과 5학년, 6학년과 영어전수과의 총 151명의 학생(16~18세) 의 작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151편 가운데 29편이 지진 당시의 조선인과 관련된 언급을 담고 있다.71)
그것을 읽으면 많은 학생들이 실제로 유언비어를 들었던 것과, 유언이 광범위하게펼쳐져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들도있다.
… ‘저기, 조선인이 산에 숨었다’고 하니, 사나운 젊은이들이 손에손에 갈고랑이나 굵은 몽둥이를 들고 산으로 쫓아 왔다. 마침내 두사람만이 잡혀버려 소나무에 묶여 모두에게 머리며 얼굴이며 할 것 없이맞았다. 성난 사람들은 그래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아 피투성이가 된[조]선인을 산으로 끌고 다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죽이자고 말하고 있었다.72)
이야기 가운데 조선인이 와서 폭탄을 던진다거나 우물에 독을뿌려겨우 살아남은 사람까지 죽인다는 것을 들었다. 사람이 힘들 때에그것을 기회로 원수를 갚다니 비겁하다고, 이를 갈면서 듣고 있었다.73)
이 책에 담긴 작문 가운데 조선인 학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쓴 것, 혹은 조선인에게 '동정적'인 것은 하나도 보이지않는다.
여학생의 기록에 포함된 ‘해설’에서는, 조선인 학살에대해“민족 차별적 감정 및 편견에 근거한 악성 루머가 발생했고, 이로인해 선동된 사람들이 조선인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또한조선인이외에도 중국인, 사회주의자 등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고적고 있다.74)
71) 작문에는 1부터 151까지의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조선인과관련된언급을 담고 있는 작문의 번호는 다음과 같다: 5, 8, 20, 21, 23, 30, 45, 47, 51, 61, 66, 73, 81, 82, 85, 92, 108, 110, 111, 119, 127, 128, 129, 132, 133, 144, 145, 148, 150.
72) フェリス女学院150年史資料集 第1集 関東大震災 女学生の記録大震火災遭難実記(2010), 191.
73) フェリス女学院150年史資料集 第1集, 247.
74) フェリス女学院150年史資料集 第1集, 291.
여기에서도 학살의 주체는 민중(자경단)으로되어있다. 이러한 여학생의 기록은 페리스여학원 150년사 자료집의제7권으로서 간행되었는데, 페리스여학원 150년사의 상권이2022년에 간행되었다.
거기에서는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도요코하마의 상황에 초점을 맞춰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여학생의기록에 수록된 작문도 인용하고 있다.75)
학살의 주체에관해서는, “[악질적인 루머에] 선동된 자경단이나 청년단 등 일본인에의해학살사건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다.76)
75) フェリス女学院150年史上巻(2022), 362-364를 참조할 것.
76) フェリス女学院150年史上巻, 362.
4. 도요에이와여학원[東洋英和女学院]
지진 발생 후 11년이 지난 시점에 간행된 東洋英和女学院五十年史(도요에이와여학원 50년사)(1934년)에는, 지진 당시도요에이와여학원의 교원이자 기숙사 사감이었던 가모 레이코[加茂令子]의다음과 같은 지진 당시의 회상을 적어 놓고 있다. 서서히 지진이 잦아들어 안도하고 있을 무렵부터 왕왕 성행한것이XX소동,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어디까지 당시의 사람들 마음을어리둥절하게 했던 것일까요. 냉정함을 잃고 갈피를 못 잡는 마음. 당시를되돌아보며 그저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쪽 담장을 넘어갔다, 그리고 흙 마당으로 도망갔다고 사람이 달리는 소리, 총 소리, 계엄령이살포된 마을들은, 정말 살기가 등등하고 뒤숭숭한 이야기 그 이상이었습니다.77)
77) 加茂令子, “思ひ出の九月一日,” 東洋英和女学校五十年史(1934), 122.
여기에 나오는 ‘XX소동’이란 문맥상 ‘조선인 소동’을가리키는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는 직접적으로 조선인 학살을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문장 여기저기에 그것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나온다. 1945년 이후에 간행된 東洋英和女学院七十年誌(도요에이와 여학원 70년지)(1954년)에는 조선인과 관련된 서술로서, “지진에따른 유언비어”밖에 없으며, 동 학교의 학교사들 가운데조선인학살을 언급한 것은 1984년 간행된 東洋英和女学院百年史(도요에이와여학원 백년사)의 연표에 있는 “유언비어에 근거한조선인박해가 계속되다.”밖에 없다.78)
78) 東洋英和女学院七十年誌(1954), 26; 東洋英和女学院百年史(1984), 694.
이 학교의 학교사에서도‘학살’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적은 없다.
5. 그밖의 학교
쓰다주쿠[津田塾]의 학교사에는 1945년 이전의 유언비어에대한언급이 나온다. 津田英学塾四十年史(쓰다에이가쿠주쿠 40년사)(1941년)에는 “다소간의 유언비어도 항간에 떠돌았다.”라고하면서 폭도의 습격, 즉 조선인이 습격해 온다는 것은 허위라고한군대(제1사단)의 선전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79)
79) 津田英学塾四十年史(1941), 145.
어떤 의도로그러한 내용을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쓰다주쿠와 관련된학교사에서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 것은 津田塾大学100年史 資料編(쓰다주쿠대학 100년사 자료편)(2003년)의 연표에 들어간 “조선인폭동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살해가 시작됨”이라는 서술뿐이다. 릿쿄학원[立教学院]의 학교사 가운데 조선인 학살에 대한서술이 실린 것은 立教学院百五十年史(릿쿄학원 150년사)제1권(2023년)에서가 처음이었다.
‘학살’이라는 용어는 사용되고 있으나, 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히적지 않고 있고, 릿쿄대학이 위치한 이케부쿠로[池袋]에서“조선인한 명이 살해”된 것, 릿교대학에서 4명 정도의 조선인 학생을 숨겨주고 있던 것, 후에 릿교대학에서 공부한 뒤 작가가되는유치진(柳致真)이 일본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던 중 간토대지진을당해 어떤 일본인 부부에 의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등이기록되어 있다.80)
마지막으로 릿쿄여학원[立教女学院]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지진 당시 조선인과 관련된 기술로는 立教女学院の百二十五年(릿쿄여학원 125년사)(2002년)의 연표에 등장하는 “조선인학살”이라는 기술뿐이다.81)
80) 立教学院百五十年史第一巻(2023), 778-779. 릿쿄대학과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남아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릿쿄대학예과를 다니던 장준상(張準相)이라는 조선인 학생이 있었다. 그는가까스로 도쿄를 탈출해 자신의 소속 교회였던 일본성공회나라기독교회[奈良基督教会]에 돌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동 교회목사였던 요시무라 다이지로[吉村大治郎]가 일본도를 꺼내서는, “만약당신을 죽이고자 누군가가 온다면, 이 일본도로 나를 죽이고나서그렇게 하라고 말하겠다. 절대로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준상은 이후 일본성공회의 사제가되었다. 井田泉, “わたしの魂は主をあがめ”(2015년 8월 15일, 大阪·京都教区合同平和礼拝, 미출판).
81) 立教女学院の百二十五年(2002), 89.
학교사에서 조선인 학살을 언급한 서술로서 가장 처음발견되는 것은, 1964년에 간행된 아오야마학원 90년의 발걸음이었으며, 1967년에 간행된 메이지학원 90년사가 그 뒤를 잇고있었다. 용어를 살펴보면, 2000년 이후에 간행된 페리스여학원, 릿쿄학원, 릿쿄여학원의 학교사 이외에서는 ‘학살’이라는 용어가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학살의 주체에 관해서는, 주체로서군대와 경찰을 추가하고 있는 것은 전무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아오야마학원이나 메이지학원, 릿쿄학원 등의 학교사에서 조선인 학생을 지진 때 숨겨준 사실이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야마다 쇼지[山田昭次]는 지진 당시일본인이 조선인을 보호해준 사례 분석을 통해, 일본인이 그러한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적인 교류를 통해 그 조선인에대해친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한바있다.82)
82) 山田昭次, 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 167-171.
개교회에서보다 학교에서 조선인을 숨겨준 비율이높았던것은, 당시 교회와는 달리 학교에는 조선인 학생이 재적하고있었고, 또 일본인 학생 및 교직원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보다일상적인 교류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Ⅴ. 맺음말
본 연구에서는 우선 기독교계 신문·잡지 및 일본기독교사관계 등의 출판물에 등장하는 조선인 학살 관련 서술을 고찰해보았다. 그 결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학계의 조선인학살에 관한 축적된 연구를 바탕으로 계엄령의 명분이 “조선인폭동진압”이었으며, 그러한 계엄령 하에서 조선인을 학살한것은군대·경찰·자경단이었다고 쓴 논고가 존재하였지만, 1980년대이후는 학살이 자경단만에 의해서 자행된 것으로 파악하는서술이정착되어 나갔음을 보았다. 계엄령에 관해서는, 자경단을단속하는 것이 계엄령의 목적이었다고 보고 있는 서술도 있었다. 다음으로 개교회사의 서술을 고찰하면서, 개교회사에서학살에관한 서술이 등장한 것은 1980년경부터였으며 그러한 서술가운데 ‘학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였음을확인하였다. 또한 계엄령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언급하거나 학살의 주체를 군대·경찰·자경단으로 보는 것은하나도없었으며, 학살이 자경단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보는 서술이정착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기독교계 신문·잡지, 일본기독교사 관계 출판물이 1980년대 이후 보인 서술 경향과도합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학교사에 등장하는 서술을 검토하였다. 학교사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것은 1964년이었고, 이를 통해 개교회사보다 훨씬 이른 단계에서부터 조선인학살에대한 서술을 포함시킨 학교사가 등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학교관계자는 학계의 연구동향을 다소간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것일지도 모른다. 용어를 보면,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것은2000년 이후에 출판된 페리스여학원, 릿쿄학원, 릿쿄여학원등의학교사뿐이었다. 다만 아오야마학원의 학교사에서는 ‘학살’이내포한 의미와 유사한 ‘살육’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학교사에서도 개교회사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살의 주체에 군대와경찰을추가하고 있는 서술은 전무했으며, 계엄령의 목적에 관해서분명히 언급한 것은 없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1960년대부터 축적된조선인 학살에 관한 연구성과는, 1970년대까지의 기독교계신문·잡지및 일본기독교사 관계 등의 출판물 중 일부 서술을 제외하고기독교계의 조선인 학살 관련 서술에는 반영되지 않았다는점이다. 조선인 학살을 언급해 온 것 자체는 일정한 평가를 부여할수있겠지만, 1980년대 이후의 서술에서 학살의 주체를 자경단으로만 적고 있는 것에서, 일본기독교계는 학살에 대한 국가적책임을 약화시키는 데 가담해 버렸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 본 연구에서는 연구대상을 도쿄 및 가나가와에 있던개신교교회와 학교로 한정하였다. 도쿄, 가나가와 이외에 학살이있었던 지역(지바·사이타마·군마 등)의 교회·학교, 가톨릭 교회·학교, 나아가 YMCA 등 기독교 기관의 역사서에 대해서도 조사및고찰 40 「한국기독교와 역사」제60호(2024년 3월 25일) 을 해나가야 할 것인데, 이것은 향후 연구과제로 남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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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간토대지진 발생 이후 일본 개신교계가 조선인학살에 대해 어떻게 언급하고 기록해 왔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이를위해 우선 간토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이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다뤄져 왔는지를 개관한 뒤, 기독교계 신문·잡지, 일본기독교사 관계등의출판물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기술되어 왔는지 살펴보았다. 그 뒤다수의 조선인이 학살된 현장이었던 도쿄 및 가나가와에 있던 개신교회의개교회사 가운데 포함된 관련 서술을 고찰한 뒤, 마지막으로 기독교계학교의 학교사 속 서술을 검토하였다. 고찰에서는 1) 학살에 대해 어떤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가(학살, 박해, 살해 등), 2) 학살의 주체를 누구로 보고 있는가(자경단 혹은 군대·경찰·자경단), 3) 계엄령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라는 세 가지 점에 주목하였다. 고찰의 결과, 1960년대부터 축적된 학계의 조선인 학살에 관한연구성과는, 1970년대까지의 기독교계 신문·잡지 및 일본기독교사 관계등의 출판물 중 일부 서술을 제외하고 이후 기독교계의 조선인 학살관련서술에는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 밝혀졌다.
주제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기독교, 개교회사, 학교사
日文抄錄
關東大震災朝鮮人虐殺に關する日本キリスト敎界の歷史記述に對する考察 李相勳本硏究の目的は、關東大震災の發生以降, 日本のプロテスタント敎界が朝鮮人虐殺についてどのように言及·記錄してきたのかについて明らかに 이상훈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관한 일본기독교계 역사서술에 대한고찰43することにある。本硏究ではまず, 日本社會において關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がどのように扱われてきたのかについて槪觀すると共に, キリスト敎界の新聞·雜誌や日本キリスト敎界關係などの出版物においてこの問題がどのように記述されてきたのかについて見た。そして次に多くの朝鮮人が虐殺された現場である東京と神奈川にあるプロテスタント敎會の個敎會史およびプロテスタントのキリスト敎主義學校の學校史の中の記述について檢討した。 考察の際には, 1) 虐殺に對してどのような用語を使用しているか(虐殺, 迫害, 殺害など), 2) 虐殺の主體を誰としているか(自警團あるいは軍隊·警察·自警團), 3) 戒嚴令をどのように捉えているかの三点に注目した。考察の結果, 1960年代より蓄積されていった朝鮮人虐殺に關する硏究の成果は, 1970年代までのキリスト敎界の新聞·雜誌や日本キリスト敎史關係などの出版物における一部の記述を除いて, キリスト敎界の朝鮮人虐殺關連の記述には反映されてこなか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
キーワード: 關東大震災, 朝鮮人虐殺, 日本キリスト敎, 個敎會史, 學校史
접수일 : 2024.1.15. 심사 완료일 : 2024.2.1. 게재 확정일 : 2024.2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60호(2024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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