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오가사와라제도의 역사와 조선 망명자의 유배 /박한민.동북아역사재단

1. 오가사와라제도의 위치와 지리

일본 방송의 일기예보를 보면 일본 전국 지도의 동남쪽 한쪽 구석에 표시되는 섬이 있다. 오가사 와라제도(小笠原諸島)이다.

한국의 일기예보 지도 에 울릉도와 독도의 기상 상황이 나오듯이 일본 에서는 도쿄도(東京都)의 관내 지역으로 오가사와 라제도의 날씨까지 시청자들이 한눈에 알 수 있 도록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오가사와라촌(小笠原村) 홈페이지와 오가사와 라촌 관광협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오가사와 라제도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는 다음과 같다.

오가사와라제도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000km 태 평양에 산재한 많은 섬에 대한 총칭으로, 오가사와라 군도[小笠原群島: 무코지마(聟島), 지치지마(父島), 하하지 마(母島) 열도], 가잔열도[火山列島: 이오열도(硫黄列島)],세 개의 고립된 섬[니시노시마(西之島),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 오키노토리시마(沖ノ鳥 島)]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섬들은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 약 30%에 해당하 는 광대한 해역을 확보하고 있으며, 해상교통의 안전 확보, 해양자원의 개발·이용 등 국가의 안전과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1

북위 20˚25΄~27˚44΄, 동경 136˚4΄~153˚59΄의 광대한 해역에 크고 작은 30여 개 의 섬들이 산재한 오가사와라제도. 영화나 뉴스로 유명한 이오도와 오키노토리시 마 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약 3분의 1은 이러한 오 가사와라의 섬들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행정적으로 모두 도쿄도에 속해 있지만, 본 섬인 지치지마에도 공항이 없고, 교통은 도쿄 다케시바부두(竹芝棧橋)에서 대개 6일에 1편을 운항하는 정기선뿐입니다. 진정 태평양의 대해원(大海原)에 떠 있는 외딴 섬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2

1  www.vill.ogasawara.tokyo.jp/outline.

2  www.ogasawaramura.com/about

위 설명에 나오듯이 오가사와라제도는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여러 섬으 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본 전체의 배타적경제수역 중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광대한 지역이다. 아열대성 해양기후로 온난다습하며, 여름과 겨 울 사이의 온도차가 적은 편이다. 도쿄에서 약 1,000km 떨어져 있는 오 가사와라제도의 지치지마까지 가는 교통편은 1주일에 한 번 다니는 선박 오가사와라마루(おがさわら丸, 11,035톤, 여객 정원 894명)를 이용해야 하는 데, 편도로만 24시간이 걸린다. 오가사와라제도는 일본 본토로부터 태평 양에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한 번 가기조차 쉽지 않은 오지라 할 수 있다.

2. 무인도에서 일본 영토로 편입

(1) 무인도 시기

1716년부터 1735년 사이에 간행된 고문서로 필자를 알 수 없는 『손무 인도기(巽無人島記)』에 따르면, 오가사와라제도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 듬해인 1593년 마쓰모토(松本)의 성주 오가사와라 사다요리(小笠原貞賴)가 발견했다고 전한다.

1727년 사다요리의 자손을 칭하는 자가 에도(江戶)막 부에 자신의 선조가 발견한 섬을 거론하면서 오가사와라제도에 도항하여 현지조사를 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막 부에서는 신청서의 기술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신청자를 추방하 는 결정을 내렸다.

이 섬은 에도시대에는 ‘무인도(無人島)’로 지칭되었는데 여기에서 영문 명칭 ‘보닌섬(Bonin Islands)’이 유래했다고 한다.

에도막부는 1675년 시마 야 이치자에몽(島谷市左衛門)을 포함한 32명을 보내 오가사와라제도를 순 시하고 오도록 하였고, 시마야는 1개월 정도 체류한 후 돌아왔다.

하지만 한동안은 표류 외에 오가사와라제도에 정주하는 사람 없이 방치되었다.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에도에서 1785년 간행한 『삼국통람도설(三國通 覽圖說)』의 부록 가운데 하나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三國通覽輿地路程 全圖)〉에서는 일본 본토와 달리 붉은색으로 칠해 오가사와라제도를 무인 도로 표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에서는 하치조시마(八丈島)에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여러 섬을 두고 “무인도. 본명은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嶋)이라고 한다. 80여 섬이 있다”고 기술하였다.

이 지도에는 동 해의 울릉도(竹島)와 독도에 조선과 같은 노란색을 칠하고, “조선이 소지 (朝鮮ノ持之)”했다는 문구도 담겨 있다(120쪽 지도 참조)

오가사와라제도가 다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포경선이 태평양을 왕래하던 1820년대부터였다.

1823년에는 미국의 트 렌짓(Transit)호, 1825년에는 영국의 서플라이(Supply)호, 1827년에는 영 국 함선 블로썸(Blossom)호가 기항하였다.

오가사와라제도에 각국의 포 경선이 드나들면서 섬에 정주하는 이탈리아·영국·미국 출신자들이 나오 기 시작했다. 1837년 8월 오가사와라제도에서 출항하던 선박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 런던, 스코틀랜드, 포르투갈 리스본, 이탈리아 시칠리아, 미국 보스턴, 덴마크 코펜하겐, 샌드위치제도(하와이) 출신자들을 합쳐 전체 42명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을 개항하기 위해서 출항한 매튜 페 리(Matthew C. Perry)가 이끄는 동인도함대는 1853년 오가사와라제도에 기 항하였다.

이때 페리는 지치지마 거주 미국인 나다니엘 사보리(Nathaniel Savory)에게 저탄소(貯炭所) 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구입하였다.

오가사와라제도 내 외국인 거주와 페리의 내항 소식을 접한 에도막부 는 1861년[분큐(文久) 원년] 12월 가이고쿠부교(外國奉行) 미즈노 다다노리 (水野忠德) 일행을 간린마루(咸臨丸)에 승선시켜 현지조사를 실시하도록 하 였다.

이듬해 3월까지 미즈노의 섬 체류와 조사를 통해 지치지마와 하하지 마(母島)에 미국과 네덜란드, 하와이 출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막부의 움직임에 대하여 주일영국공사 러더퍼드 올콕 (Rutherford Alcock)은 오가사와라제도가 일본령이라는 주장이 근거가 없다 면서 1827년 영국이 이 섬을 처음 취했다는 사실과 섬 거주자를 통한 페 리의 토지 구입 등을 거론하였다.

같은 해 8월 막부는 금전과 쌀, 경작지 지급 등의 유인 동기를 부여하여 하지조시마 거주민 38명을 모집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을 조요마루(朝陽丸)에 태워 오가사와라제도까지 이주시켜 섬을 개척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853년 5월 관리와 이주민 모두 오가사 와라제도에서 조요마루를 타고 퇴거하였다.

에도막부가 퇴거 조치를 단 행한 이유는, 전년 영국인이 살해당한 나마무기(生麦)사건으로 인해 영국 과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2) 일본 영토 편입 시기

오가사와라제도의 귀속 문제는 1873년 5월 외무성 관리 우에노 가케 노리(上野景範)가 주일영국공사 해리 파크스(Harry S. Parkes)와 면담하는 과정에서 다시 등장했다. 파크스는 막부가 섬에 관리를 파견했다가 퇴거 시킨 점, 섬에 영국인과 미국인이 각각 20명 거주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 하면서 일본이 오가사와라제도를 방기했다고 지적하였다.

1874년 1월 대장경(大藏卿)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는 오가사와라제 도 개발에 속히 착수해야 한다고 상신하였다.

일본 정부는 5월 12일 도민 (島民)의 무휼(撫恤), 토지 단속, 군함 왕래 규칙의 제정을 내용으로 방략안 (方略案)을 작성하였다.

타이완 침공이 끝난 후 오가사와라제도에 대한 정 책 추진은 내무경(內務卿)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발의해 추진하였다.

1875년 8월 23일 외무경(外務卿)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와 파 크스 주일영국공사는 오가사와라제도의 귀속 문제를 다시 논의하였다. 파크스는 오가사와라제도가 일본의 ‘속지(屬地)’인지를 물었다.

데라지 마는 오가사라와가 일본에 ‘가까운 섬’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관할이 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파크스는 “멀고 가까움으로 소속 여부를 정한다면 류큐섬은 중국의 속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가까 운 섬’이 관할 근거는 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게다가 오가사와라제도 에는 영국·미국·러시아 등도 선박과 관리를 파견하고 국기도 게양해둔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거론하였다.

데라지마는 오가사와라제도가 일본령 인 근거를 명확하게 파크스에게 제시할 수 없었다.

1875년 11월 21일 일본 정부는 외무성·내무성·대장성·해군성 소속 관원으로 구성된 관리단을 현지 상황을 파악할 목적으로 오가사와라제도 에 파견하였다.

파견 관리는 다나베 다이치(田邊太一, 외무성), 고바나 사쿠 스케(小花作助, 내무성), 하야시 마사아키(林正明, 대장성), 네즈 세이키치(根 津勢吉, 해군성)였다.

다나베와 고바나는 앞서 막부가 파견하였던 간린마루 에 탑승하여 오가사와라제도에 도항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일행은 11월 21일 요코하마(橫濱)에서 출항하였고, 24일 지치지마 후타 미항(二見港)에 도착하였다.

관리들은 섬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소집해 성별, 출신지 등 인적사항을 조사한 후, 지치지마와 하하지마에 영주하기 위한 동의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관리를 파견했던 네 성(省)은 연명으로 ‘오가사와라섬 착수 방략 견적서’를 제출하였고(1876년 1월 27일), 일본 정 부는 오가사와라제도를 내무성 소관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해 10월 17일, 일본 정부는 ‘오가사와라항 규칙’과 ‘오가사와라섬 세칙(稅則)’ 등 단속규칙을 제정하여 12개국 공사에게 회람하면서 섬에 대한 관할통치를 통고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오가사와라제도에 대한 영유권 행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자국민과 이들의 재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호, 자국민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겠다는 의견을 제기하였다.

프랑스와 독 일 등 10개국은 통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877년 1월에는 내무성 이 관할하는 오가사와라제도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초대 출장소장으로는 고바나 사쿠스케가 취임하였다.

소장에게는 직제상 “섬 전체 일체의 사무 를 관리하고 거류 내외의 인민을 보호하며, 개척과 기타 섬 안의 일반 사 무를 장악”할 권한이 부여되었다.

1878년부터는 출장소장이 경찰사무와 재판사무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1880년 10월 초 사다요리신사(貞賴神社) 내에 설립된 〈오가사와라섬 개 척비(開拓小笠原島之碑)〉에는 섬의 연혁, 구 막부의 순시, 메이지정부의 통 치 경위, 다나베 다이치 등의 시찰과 개척의 의의가 기술되었다.

여기에 ‘오가사와라’란 섬이름이 붙은 이유는 오가사와라 사다요리가 섬을 발견 했기 때문이라는 서술이 들어 있다. 이오도는 1891년 9월 칙령으로 일본 소속의 도서(島嶼)로 고시되었다.

미나미도리시마는 1898년 7월 24일 도쿄부 고시로 오가사와라 도청(島廳) 관할이 되었다. 오키노토리시마는 1920년대에 들어 두 차례 군함이 측량한 후, 1931년 7월 6일 내무성 고시로 오가사와라 지청 관내에 편입 되었다.

1880년 10월부터 오가사와라제도는 이즈제도(伊豆諸島)와 더불어 도쿄 부 관할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오가사와라 출장소장은 “지사(知事)의 명을 받아 포고·포달·명령을 섬 안에서 시행하고, 거주 내외국 인민의 경찰· 개척·식산 등과 기타 섬 전체의 일체 사무를 총괄”하였다.

1886년 11월 부터는 출장소를 오가사와라 도청으로 변경하면서 출장소장도 도사(島司) 로 명칭을 바꾸었다.

도사의 직무는 “지사의 지휘, 감독을 받아 법률·명령 을 섬 안에서 집행”하도록 규정되었다.

1877년부터 오가사와라제도로는 연 3회 범선이 다니는 정기항로가 개 설되었고, 1887년부터 기선이 다니기 시작하였다.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이 오가사와라제도로 유배된 시점은 바로 여 기로 기선이 왕래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3. 오가사와라제도에 유배된 두 한국인 망명자

(1) 1886~1888년 김옥균의 유배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정변 에 실패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선박을 타 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13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1885년 초 조선 정부는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서상우(徐相雨)를 일본 에 파견하였을 때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반출해간 울릉도 목재의 반환, 김 옥균을 비롯한 망명자의 인도 등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개항이후 아직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조선에 대하여 국사범은 돌려보내 지 않는다는 만국공법 규정을 핑계로 대며 송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1885년 말에는 오이 겐타로(大井憲太 郞)를 비롯한 자유당 세력과 김옥균이 제휴하여 병력을 이끌고 인천항을 통 해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하 게 퍼졌다.

1886년 조선 정부는 지석영 (池錫永)의 형 지운영(池運永)을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의 암살을 꾀하였다.

하지 만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김옥균은 일본 정부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였고, 자객 지운영은 조선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김옥균을 일본 국내에 그대 로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886년 6월 11일 야마가타는 조선 정 부에 ‘불쾌감’을 유발하고 일본의 “치안과 외교상 평화를 방해”한다는 이 유로 김옥균에게 이달 27일까지 국외로 퇴거할 것을 통지하였다.

김옥균 은 보름의 말미를 요청하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갈 비용을 급히 마련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김옥균의 친구 가운데 “1천 리의 대양 너머 무인도 호칭이 있는 오가사와라제도로 보내지는 일을 가련하다고 여겨 여비를 주선”하려는 자가 있기도 했으나, 여의치는 않았다.

결국 그는 요 코하마 외국인 거류지에 있는 그랜드호텔에 머물다가 8월 7일 일본 경찰 에 강제 연행되었고, 다음 날 도쿄부로 넘겨졌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와라제도로 유배보내어 다른 정치세력과 연계할 수 있는 고리를 차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일본 신문은 오가사와라제도를 ‘원도(遠島)’ 나 ‘절해(絶海)의 고도(孤島)’라고 지칭하였다.

1886년 8월 9일 오전 6시 반 시나가와(品川)에서 오가사와라제도로 출 항하는 슈고마루(秀鄕丸)에 탑승한 김옥균에게 이의고(李誼杲)가 동행하 였다.

유혁로(柳赫魯), 정난교(鄭蘭敎), 신응희(申應熙)가 슈고마루까지 따라 가 이들을 배웅하였다.

김옥균 일행은 악천후 등으로 배 위에서 고생하다 가 같은 달 29일 오가사와라 후타미항에 겨우 도착하였다.

“평소 거동을 시찰하고 정기 항해 때마다 자세히 보고”하라는 훈령에 따라 김옥균의 오 가사와라 생활은 오가사와라 출장소장이 정기적으로 내무성 등에 보고하 였다.

섬 생활을 시작한 김옥균과 이의고에게 일본 정부는 ‘난민구조규칙 (難民救助規則)’을 적용하였다.

김옥균은 지치지마에 거주하면서 독서를 하거나 바둑을 두며 소일하 였다.

그와 바둑을 두려고 일본의 바둑 명인 혼인보 슈에이(本因坊秀榮)가 오가사와라제도까지 찾아오기도 하였다.

조선과 일본 내의 소식은 오가 사와라제도까지 종종 왕래한 유혁로가 가져왔다.

김옥균이 오가사와라에 있던 동안의 생활과 인적 교류는 금병동(琴秉洞)이 관련 자료를 추적하여 상세히 소개하였다.

김옥균은 섬 내 소학교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 를 잘 따랐던 소년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는 1894년 김옥균이 상하이(上 海)로 건너가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을 당한 호텔까지 동행하여 그 광경을 목격했다. 오가사와라의 아열대성기후에서 류머티스로 고생하던 김옥 균이 오가사와라제도를 떠난 것은 1888년 7월 29일이었다.

일본 정부가 김옥균을 보낸 다음 유배지는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였다.

(2) 1902년 유길준의 유배와 김옥균의 거주 흔적

유길준은 1880년대 초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설립한 게이오 기주쿠(慶應義塾)에서 유학하였다.

1883년 보빙사 민영익(閔泳翊)과 함께 미국에 건너간 그는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에서 수학하다가 갑 신정변 발발 이후 유학을 중단하고 유럽과 수에즈운하, 동남아 지역을 경 유하여 귀국하였다.

유폐되어 있는 기간 중 자신의 미국 유학 경험과 일 본에서 입수한 최신 지리서적 등에 기초하여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저 술하였다.

1894년 조선 정부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정계에 복귀하였 고, 내부대신까지 올라가 단발령 등 각종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발발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붕괴하면서 역 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1년 유길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조직한 혁명 일심회(革命一心會)의 혁명 거사 계획에 가담하여 귀국을 도모하려 했다.

하지만 1902년 들어 이 계획은 밀고로 실패하였다.

사건에 가담한 자들 가운데 장호익·조택현·김홍진 등은 참수형에 처해졌고, 오세창 등은 일 본으로 망명하였다.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兪星濬)도 체포되어 옥고를 치 렀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 村壽太郞)에게 이 사건의 동향을 보고하면서 사건 관계자 유길준에 대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상신하였다.

1902년 5월 4일 경시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후, 유길준은 퇴거 처 분을 받아 6월 4일 도쿄를 떠나 오가사 와라제도로 가야 했다.

그는 하하지마 의 오키무라(沖村)에 있는 가네가와 도 조(金川藤造) 집에 체류하였는데, 휘호 등을 써주면서 소일하였던 것 같다.

유 길준이 써준 휘호는 가네가와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하치조시마 역사민속 자료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그는 김 옥균이 머물던 지치지마의 옛 집까지 찾아가 시를 지었는데, 「구당시초(矩堂 詩抄)」에 한 수 남아 있다.

쓸쓸한 정자는 아득한 바닷가에 있고

지난 십 년을 되돌아보니 옛일이 티끌이로다

정원의 화초는 주인이 떠난 줄도 모르고

그 시절 봄인 듯 푸르고 푸르구나

『모지신보(門司新報)』 1902년 11월 6일 자 기사를 보면, 유길준이 지치지 마의 오기우라(扇浦)에 체류하면서 이 시를 읊었던 곳은 오기타마 다메키치 (扇玉爲吉)의 집으로 추정된다.

이 기사를 통해 “세상사와 연을 끊고 칩거하 면서 고기잡이 불이 보이는 곳에서 한가로이 생애를 보내고 있다”는 유길 준의 근황을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김옥균에 비해 유길준이 오가 사와라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은 편이다.

김옥균처럼 무더운 섬의 날씨에 건강이 나빠진 유길준은 육종윤(陸鍾允)을 통해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에게 연락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달라는 청원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길준은 오가사와라제도에서 1년 정도 체류한 후 하치조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1906년 3월 까지 3년 동안 체류한 후, 도쿄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07년 7월 순종이 즉위하고 일본 망명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면 서 귀국할 길이 열렸다.

8월 12일 유길준은 장박, 이진호 등과 함께 도쿄 를 출발하였고,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16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망명길에 오른 유길준은 오가사와라제도, 하치조시마 등 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1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고 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2024년 여름 동북아포커스 9ȣ (1).pdf

동북아역사포커스 9호(2024.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