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부여융과 부여풍의 행보
3. 부여씨 부인의 혼인과 부여융
4. 천수군 부인과 원건요의 혼인
5. 부여태비와 이옹의 혼인
6.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당에서 의자왕의 후손들이 어떻게 家格과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여 나갔 는가 하는 것에 관하여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부여융의 손녀가 괵왕 이옹과 혼인 한 것과 부여풍의 딸이 조인본과 혼인하고, 또한 그의 외손녀인 천수군 부인이 원건요 와 혼인한 사실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부여융과 부여풍은 의자왕의 아들이었으나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여 부여융은 당 왕조에 복무하였으나 부여풍은 당 왕조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부여풍은 사 로잡혀 영남으로 유배되었다. 그렇지만 부여융은 동생인 부여풍 가족의 후견인 역할 을 하였고, 나중에는 부여풍의 딸을 당의 관리인 조인본과 혼인시켰다. 부여융은 백제 왕실의 후손이 당에서도 계속해서 대우받고 살아갈 방법을 여기에서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조인본과 혼인하였던 부여씨 부인은 남편이 사망한 후 홀로 지내면서 딸인 천수군 부인을 재상의 아들인 원건요와 혼인시켰다. 이와 같은 혼인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부여융의 후손들이 측천무후 시대에서 정치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더 나아가 천수군 부인의 아들이 현종의 사위가 된 것도 이와 같은 연 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는 괵왕 이옹과 혼인하였다. 부여태비의 이러한 혼인은 부여융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였기에 가능하였고, 원건요 와 혼인한 천수군 부인의 역할도 컸다. 더구나 부여태비의 언니는 재상 집안에 시집을 갔으므로 여동생이 이옹과 혼인하는 데 있어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고 여겨진다. 망국의 후손들이 당에서 집안을 유지하며 왕실이나 혹은 고관의 자식과 혼인을 하 게 된 것은 부여융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으며, 부여풍의 후손을 내치기보다는 보 듬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배척하는 대신 화합하였기에 이와 같은 혼인이 성립될 수 있었으며 계속해서 당에서 부여씨 왕실의 맥을 유지했던 것이다.
주제어 : 의자왕, 부여융, 부여풍, 부여씨 부인, 천수군 부인
1. 머리말
백제 멸망 후 義慈王(?~660) 및 扶餘隆(615~682) 등을 포함한 왕족과 귀 족들이 당으로 끌려갔다. 당에 도착한 의자왕은 곧바로 사망하였으나 부 여융은 백제 고토로 돌아와 부흥운동 진압에 참여하였고, 나중에는 熊津 都督府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신라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다시 당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1)
1) 부여융에 관해서는 金榮官, 「百濟 滅亡後 扶餘隆의 行蹟과 活動에 대한 再考察」, 百濟學 報 7, 2012 및 방향숙, 「扶餘隆의 정치적 입지와 劉仁軌」, 한국고대사탐구 25, 2017 등이 크게 참고된다.
그렇지만 당에서 의자왕과 부여융의 사망으로 백제 왕족의 핏줄이 끊 어진 것은 아니었다.
의자왕의 증손녀인 扶餘太妃(690~738)가 虢王 李邕 (678~727)과 혼인한 사실이 묘지명을 통해 드러났으며,2) 그녀의 증손인 李濟(776~825)의 묘지명도 발견되어 당에서 의자왕의 핏줄이 외손쪽으로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3)
2) 張蘊・汪幼軍 저, 劉占鳳 역, 「唐「故虢王妃扶餘氏墓誌」考」, 목간과 문자 2, 2008(원래는 碑林集刊 13, 陝西省人民美術出版社, 2008에 게재) 및 金榮官, 「百濟 義慈王 曾孫女 太妃 扶餘氏 墓誌」, 百濟學報 창간호, 2009 그리고 정병준, 「唐代 嗣虢王 李邕과 王妃 夫餘氏」, 中國史硏究 145, 2023 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3) 김영관, 「百濟 義慈王 外孫 李濟 墓誌銘에 대한 연구」, 백제문화 49, 2013 및 정병준, 주 2)의 논문, 2023.
또한 부여풍(의자왕의 아들)의 딸과 사위인 趙因本의 합장 묘지명(이하 조인본 부부 묘지명)이 발견됨으 로써 그 후손들의 혼인과 행적에 대해서도 새로운 내용을 얻을 기회가 주어졌다.4)
이상과 같은 연구 성과를 통하여 의자왕 후손들의 당에서의 행적과 혼 인에 관하여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음은 이를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는 개별 묘지명 검토에만 치중하다 보니 당에서 활동한 의자왕 후손의 활동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는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러니까 의자왕 사후 부여융의 손녀 및 부여풍의 딸과 외손녀 등이 당의 왕족 혹 은 고관과 어떻게 혼인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검토한 연구 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 착목하여 본고는 의자왕 후손이 당 황족 혹은 재상의 집 안과 혼인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을까 하는 것 을 검토한 것이다.5)
4) 王連龍・叢思飛, 「唐代百濟太子扶餘豊女夫妻合葬墓誌考論」, 古典文獻硏究 34-2, 2021 ; 장 병진, 「백제 부여풍 후손의 행적에 관한 새 자료-조인본, 부여씨 부부의 묘지명-」, 역사와 현실 123, 2022 등을 들 수 있다. 5) 姜淸波, 「百濟國末代王室及后裔在唐朝的漢化過程考述」, 曁南學報 총제166기, 2012년 11 월, 152쪽 및 방향숙, 주 1)의 논문, 2017, 140쪽에서 “부여융 이하 부여씨의 당 사회 적응이 나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또한 정병준, 주 2)의 논문, 2023, 140쪽에서 의자왕의 후손도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 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같은 설명은 당의 이민족 지배 정책과 관련하여 설명된 것이 므로 부여씨 집안의 노력 등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 후손들의 당에서의 혼인 관계를 살펴보면 무 언가 서로 연결 고리가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한 의자왕 후손들이 당에서 이와 같은 혼인이 가능하였던 것은 부여융과 부여풍을 분리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에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에 관해서 다시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첫째로 부여풍이 죽지 않고 유배 가게 된 것을 부여융과 연결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6)
6) 다만 여기서는 백제 멸망 이후의 시점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것으로 하겠다.
둘째로 부여풍의 딸이 당의 官人인 趙因本과 혼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부여융과 연결하여 헤아려 볼 것이다. 셋째로 부여풍의 외손녀인 천수군 부인의 혼 인에 관해서도 알아볼 예정이다. 마지막으로는 부여융의 손녀인 부여태 비와 괵왕 이옹의 혼인에 관해서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본고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의자왕 후손들이 당에서 혼인을 통해 어떻게 그들의 집안을 유지해 나갔는가 하는 것에 관해서 좀 더 새 로운 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재당 백제 유민사 연구에 조 그마한 기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부여융과 부여풍의 행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제 멸망 후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당으로 끌 려갔다. 의자왕이 당에서 사망한 후 약 3년 만인 663년 7월 17일에 부여 융은 孫仁師가 거느린 唐軍의 일원이 되어 백제 고토에 도착하였다.7)
7) 金榮官, 주 1)의 논문, 2012, 87~89쪽.
그 는 같은 해 8월과 9월의 白江口 海戰과 周留城 전투에 참여해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계속 백제 고지에 남아 그곳 유민들을 안무하였다. 그런데 의자왕의 혈육이었던 扶餘豐은 백제 부흥군을 이끌면서 왜에서 온 구원병과 4차례나 백강의 입구에서 당군과 혈전을 치루었는데, 결과는 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때 부여융은 부여풍이 661년에 왜국에서 처자 와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8)
또한 부여풍이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왜의 군대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는 형제끼리 서로 창끝을 겨누고 있었음을 말해준다.9)
어쨌든 이 과정에서 당군의 승리로 끝이 났고 부여융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그 결과 부여풍은 663년 8월 무렵에 고구려 로 달아났다.10)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부여융이 백제 고토로 귀환한 이후 부여 풍이 고구려로 달아났을 때까지도 두 사람이 서로 만났다고 보기는 어려 울 것 같다. 서로 다른 진영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대면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서로 뜻을 달리하였고 가는 길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거 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부여융은 웅진도독으로 668년 9월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 하는데 참전하여 일조하였다.11)
8) 日本書紀 권26, 제명천황 6년. 送王子豐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立豐璋爲王 立塞上爲輔 而以禮發遣焉
9) 부여풍을 무왕의 아들과 의자왕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서로 갈리고 있으나 최근 중 국에서 발견된 조인본 묘지명을 통해 의자왕의 아들임이 밝혀졌다. 이에 본고에서는 부여풍을 의자왕의 아들로 인정하고 논지를 진행할 것이다. 부여풍을 의자왕의 아들 로 파악한 최근의 견해로는 박주선, 「百濟 義慈王代의 신라 고립책과 對倭관계」, 韓國 史論 6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15 ; 「豊璋・翹岐의 동일인물설 검토」, 사학연구 140, 2020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에서도 부여풍이 의자왕 의 아들이라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10) 三國史記 권28, 의자왕 및 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 2년 조 그리고 資治通鑑 권 201, 당기17, 고종 용삭 3년 조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11) 김수미, 「扶餘隆 도독 체제 웅진도독부의 통치구조」, 歷史學硏究 32, 2008, 78~79쪽.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어 많은 사람이 당 으로 끌려갔을 때 부여풍도 포로가 되었다.
이 때에 부여융과 부여풍이 서로 만났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물론 이를 알려주는 기록이 없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승리한 측에 있었던 부여융이 패자인 부 여풍을 만났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측을 하는 이유는 부여풍이 고구려의 男建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점에서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新唐書 고려전에서는 668년 12월 고종이 장안성 含元殿에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군신들을 포 상하는 자리에서 남건과 부여풍을 유배형에 처하였음을 알려준다.12)
남 건이 죽지 않고 유배형으로 그쳤던 것은 친형인 男生의 적극적인 요청에 말미암은 것이었다.13)
이러한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부여풍도 죽지 않 고 嶺南에 유배된 것은 부여융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 을까 싶다. 즉 부여융은 형제인 부여풍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유배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황제에게 청원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 는 남생의 남건에 대한 兄弟愛로 드러났듯이 부여융도 부여풍에 대한 형 제애를 발휘한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다.14
그 결과 남건은 검주로, 부여 풍은 영남에 유배되었다. 이후 부여융은 고구려의 옛 땅에 교치된 웅진도독부에서 백제 유민을 안무하다가 682년 68세로 세상을 떠났고, 부왕의 무덤이 있는 낙양 북망 산 淸善里에 안식처를 얻었다.15)
12) 十二月 帝坐含元殿 引見勣等 數俘于廷 以藏素脅制 赦爲司平太常伯 男産司宰少卿 投男建黔州 百濟王扶餘隆嶺外(新唐書 권220, 열전145, 고려). 한편 자치통감에서는 부여풍의 유 배 장소를 嶺南이라 하였다.
13) 其年 與英公李勣等 凱入京都 策勲飲至 獻捷之日 男建將誅 公內切天倫 請重閽而蔡蔡叔 上感皇 睠 就輕典而流共工 友悌之極 朝野斯尙(「泉男生 墓誌銘」).
14) 당은 부여융에게 백제를 통치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수용한 것이라 짐 작된다.
기미지배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백제 고토의 유민들에게 관용이라는 것을 보 여줌으로써 당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들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5) 김영관, 주 1)의 논문, 2012, 106쪽.
결국 부여융은 망국 이후 당에 안정적으 로 정착하였고 정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영화롭게 지내다가 죽음을 맞 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부여풍은 영남에 유배된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조인본 부부 묘지명에서는 부여풍이 ‘帶方太子豊’ 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그를 대방태자라고 기록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661년 왜로부터 돌아오자 福信과 道琛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16)
이렇게 보았을 때 그는 한 때 백제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조인본 묘지명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대방 태자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아무래도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두 어야 할 것 같다. 의자왕이 무왕을 이어 즉위하자 당 태종은 ‘柱國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 봉하였다.17)
의자왕이 대방군왕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묘지명에서는 그 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진다. 다만 태자로 기 록된 것이 문제가 될 것인데 이는 부여융의 묘지명을 염두에 둔 것이 아 닐까 싶다. 부여융 묘지명에서는 ‘光祿大夫行太常卿使持節雄津都督帶方郡王’ 이라고 하였다.
이는 676년 건안 고성에서 웅진도독부가 부활했는데 이 때 당의 兗州와 徐州에 안치했던 백제 유민들이 이곳으로 옮겨진 것과 관 련이 있다.
즉 부여융은 고성에 새로 설치한 웅진도독부로 보내져 백제 유민들을 안집하였고, 다음 해인 677년에 이와 같은 관작을 받았다.18) 이 렇게 보면 부여풍이 대방태자로 기록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는 점이다. 부여융이 대방군왕으로 책봉되었던 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가 대방태자로 기술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여융이 대방군왕이었기에 왕 을 칭하지는 못하고 태자라고만 칭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19)
그런데 이 기록을 그대로 따를 경우 부여풍은 유배된 곳에서 해배되었 고 신원이 회복되어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죽었을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해배된 이유로는 그의 딸이 당의 관인 조인본과 혼인 16) 舊唐書 권220, 동이전 백제조 17) 三國史記 권28, 의자왕 즉위년 18) 김영관, 주 1)의 논문, 2012, 106쪽. 19) 더구나 682년 부여융이 죽고 그 손자인 부여경이 종3품 위위경을 제수받고 대방군왕 을 습봉하였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14 서강인문논총 68집 함으로서 성사되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을까 하는 것이다. 묘지명에서 태자로 기록된 것은 일단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20) 즉 조인본 부부 묘지명을 제작하면서 모계와 관련된 계통을 기술할 때 왕족의 후손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에 저항하여 영남으로 유 배된 인물이 아니라 의자왕의 후손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후손의 입장 에서 가계를 분식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짐작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부여풍이 유배지인 영남에서 해배되어 가족 들과 재회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욱이 부여풍의 신원회복 조치 가 있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21) 사정이 이 와 같았으므로 조인본과 혼인한 부여풍의 딸은 부여풍을 높일 필요가 있 었고, 그 결과 부여풍을 대방태자라고 표현하였던 것 같다. 더 나아가 그 의 외손녀가 源乾曜와 이미 혼인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의도적으로 기 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22)
3. 부여씨 부인의 혼인과 부여융
앞서 부여융과 부여풍의 삶의 궤적에 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 부여풍 의 딸인 부여씨 부인(647~729)과 조인본의 혼인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 자.
어떻게 하여 당의 관인과 영남으로 유배된 인물의 딸이 혼인할 수 있 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여풍은 解配되 20) 王連龍・叢思飛, 주 4)의 논문, 2021, 173쪽. 21)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6쪽이 각주 131)에서 부여풍의 후손이 황실, 재상가와 혼인한 사실을 언급하며 부여풍의 신원 조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시사하였다. 22) 이에 관해서는 본고의 제 4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다.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15 지 못한 채 영남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부여풍의 딸인 부 여씨 부인이 조인본과 혼인하였다는 사실은 궁금증을 불러오기에 충분하 므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하자. 부여풍의 딸인 부여씨 부인은 647년 왜에서 태어났다.23) 그녀의 어머니 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多臣蔣敷의 누이(妹)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24) 부여씨 부인은 태어난 이후 그곳에서 성장하다가 부여풍이 661년 무렵에 왜군을 이끌고 백제로 돌아갔을 때 함께 갔다고 한다.25) 그러니까 부여 씨 부인은 대략 14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께 전란으로 어수선한 백 제 땅에 발을 디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663년 왜군이 백촌강 전투에 서 패망한 이후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하였고, 주류성에서 항거하던 扶 餘忠勝과 扶餘忠志 등이 士女들을 데리고 당에 항복하였는데,26) 그 가운데 는 부여풍의 아내와 딸도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난 다음 부여충승이 백제 왕실의 일원으 로서 주류성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부여풍의 처자 등과 함께 항복했다고 한다.27) 이와 같은 사정을 감안하면, 이 때에 웅진도독부에서 활동하던 부여융 과 부여풍의 처자가 서로 만났을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왜냐하면 부여풍의 아내와 딸이 백제 고토를 떠나 당으로 향하기 전까지 어느 정 도 시간이 있었을 것이므로 당시 백제 고토 웅진도독부에서 일을 맡고 있었던 부여융과 만났을 가능성을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부 23) 王連龍・叢思飛, 주 4)의 논문, 2021, 171쪽 및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0쪽. 24) 王連龍・叢思飛, 주 4)의 논문, 2021, 171쪽 및 이재석, 「백제부흥전쟁과 부여풍장(扶餘 豐璋)・왜국 多臣氏」, 日本歷史硏究 54, 2021, 26쪽. 다만 부여풍이 일본에서 백제로 돌아오기 전에 多臣蔣敷의 누이(妹)와 혼인했음에는 틀림이 없다(日本書紀 天智天皇 即位前紀 (齊明)7년(661) 9월조). 25) 日本書紀 권26, 제명천황 6년 26) 舊唐書 권199, 동이전 백제조 27)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5쪽. 116 서강인문논총 68집 여풍은 고구려로 도망하였으나 그의 처와 딸이 항복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여융은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였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대면하였을 가 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당에 들어간 부여풍의 처자는 어떻게 생활하였고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존의 연구에서는 부여풍이 항복 을 거부하고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처자는 당에서 어려운 생활을 한 것 으로 추측하기도 한다.28) 그렇지만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볼 때 기존의 해석을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인본 부부 묘지명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묘지명에서는 그녀가 당에 도착한 이후의 삶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려주는 부분이 있기 때문 이다. A. 부인은 부여씨인데, 대방왕 의자의 손이고, 대방태자 풍의 딸이다. 그 순 리로움을 … 해서, 婺가 그 華에 내렸다. 四德이 이름나고(소문나고), 福・ 祿・壽의 조짐이 있었다. 마을에서 광채가 빛나니 그런 이야기가 우리 공 (조인본)에게 들렸다(「조인본 부부 묘지명」).29) 조인본 부부 묘지명에서는 부여씨 부인의 아름다움과 덕행에 대한 소 문이 ‘閭里’에 나돌았다고 한다. 여리라고 한 것으로만 보면, 장안이나 낙양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부여씨 부인이 살았던 곳이 정확히 어 디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조인본이 부여씨 부인에 관하여 알려진 소문을 듣고 혼인하였다고 한 것으로 볼 때 그가 지방관으로 있 었던 검주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 왜냐하면 28)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6쪽에서 “그녀의 삶의 공간은 장안이나 낙양에서의 호 화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하였다. 29) 夫人扶餘氏 皇朝帶方王義慈之孫 帶方太子豊之□[女也] □□其順 婺降其 … 華 四德有聞 三星 在候 暉暎閭里 言歸我公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17 조인본이 668년 무렵에 팽수현령을 지냈을 가능성을 시사한 연구가 있기 때문이다.30) 그렇다고 한다면 부여풍의 처자는 장안이나 낙양이 아닌 검 주 지역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31) 사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단계적으로 입당한 1만 2,000명 이상 의 백제 유민은 당 내지로 옮겨졌는데, 資治通鑑과 기타 유민 묘지들을 통해 이들이 徐州・兗州 그리고 676년 이전된 건안의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으로 徙民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32) 이러한 사실로 미루 어 볼 때 부여풍의 처자는 서주나 연주가 아닌 검주 지역에서 백제의 일 부 유민들과 함께 생활하였을 가능성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조인본이 팽수 현령으로 재직할 때 부여풍의 처자도 그 부근에 살았다고 하는 것 이 전제되거나 입증되어야 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조인본이 운암현령 에 제수되었다가 팽수현령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를 668년 무렵으로 파악 하고 있다.33) 그렇지만 이러한 논리도 추측에 불과하므로 만약 조인본이 팽수현령직에서 벗어나 중앙의 관리로 활동하였다면 앞선 연구는 성립되 기 어렵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부여풍 처자의 신분이다. 앞서 보았 듯이 그들은 비록 멸망한 나라의 왕족이었지만 당에 항복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적어도 신분에 맞는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 을까 싶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당 정부로부터 일정한 경제적 지원을 받 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아울러 부여융으로부터도 관심을 받았다고 해석해 30)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7쪽의 각주 133) 참조. 31) 장병진은 주 4)의 논문, 2022, 256쪽에서 묘지명에 보이는 ‘閭里’라는 것을 근거로 하 여 장안이나 낙양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32) 植田喜兵成智, 新羅・唐關係と百濟・高句麗遺民-古代東アジア國際關係の變化と再編-, 山川 出版社, 2022, 110쪽. 33)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7쪽의 각주 133) 참조. 118 서강인문논총 68집 도 무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융이 태산 봉선을 위해 백제 고토에서 다시 당으로 돌아온 해가 665년 10월 경이었고, 봉선을 마친 후 666년 초에 작위를 받은 것으로 알 려져 있다.34)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당시 부여풍의 아내와 딸인 부여씨 부 인은 부여융으로부터 일정한 경제적 지원까지 받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 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부여융이 태산봉선 후에 고종의 명을 받아 곡부에서 행해진 공자 제사를 섭행하였던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 기 때문이다. 즉 고종이 사가경 부여융을 그곳에 보내어 선성제를 행하도 록 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에서의 그의 정치적 및 경제적 입지가 컸음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기 때문이다.35) 따라서 부여융의 이와 같은 입지를 생각해 볼 때 그는 부여풍의 아내와 딸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라고 여겨진다.36) 그런데 부여융은 666년 5월 중하순 무렵에 백제 고토에 설치된 웅진도 독부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부여풍의 아내와 딸의 직접적인 후 견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여풍의 아내 와 딸이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이해다. 왜 냐하면 부여융을 대신해서 누군가는 그들을 지원하였기 때문일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그와 같은 일을 담당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을 떠올릴 수 있다. 부여융이 백제 고토에서 도독으로 근무하는 동안 그의 아들은 당에 있었기 때문이 다. 더구나 부여융의 동생인 부여문사도 당에 있었고 그의 아들인 부여경 34) 김영관, 주 1)의 논문, 2012, 99쪽. 35) 방향숙, 주 1)의 논문, 2017, 125쪽. 36)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6쪽의 각주 130)에서는 부여씨 부인이 당에 들어왔을 때의 나이를 감안하여 부여충승이 후견인과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부여충승의 경제적 기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 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추측은 너무 막연할 뿐이다.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19 도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과의 교류 관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한 의자왕과 함께 끌려온 여러 명의 왕자들37)도 장안에서 생활하였을 가 능성이 크므로 부여풍의 딸이 사촌인 부여덕장이나 삼촌인 부여문사와 서로 교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의자왕의 후손이라는 공통점이 있 었고 부여융을 중심으로 한 구심점이 있었으므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알려주는 기록이 없는 관계로 무어라 단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나 의자왕의 후손이 장안에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들이 부여융을 대신하여 부여씨 부인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 가능 성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면, 부여풍의 딸인 부여씨 부인은 모친과 함께 부여융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장안 혹은 낙양 근처에서 지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지 않을까 싶다. 조인본 부부 묘지명에서 그녀가 살았던 곳을 ‘閭里’로 표현한 것은 지방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도리어 장안이나 낙양 부근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38) 귀양가 있는 부여풍 곁에 그의 부인과 딸이 함께 살았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여씨 부인은 모친을 모시고 장안이나 낙양에서 함께 살면서 부여융과 그 가족들로부터 경제적 지원 을 받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39) 그러면 부여씨 부인은 어떻게 하여 조인본과 혼인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에 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문제 해결 37) 日本書紀 권26, 齊明天皇 6년 가을 7월조를 보면,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간 백제 왕자는 태자인 융을 비롯하여 13명이라고 하였다. 38) 王連龍・叢思飛, 주 4)의 논문, 2021, 171쪽에서 宣陽坊에서 거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 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녀가 그곳에 살게 되었는지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다. 39) 王連龍・叢思飛, 주 4)의 논문, 2021, 172쪽에서는 부여씨 부인의 조인본의 노비였을 가 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조인본이 공을 세운 댓가로 부여씨 부인과 모친을 집안의 노비로 하사받았을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120 서강인문논총 68집 에 도움을 준다. B. … 공을 세우기를 원해 … 앞 황제가 장수에게 요동으로 갈 것을 명함에 속해, 군사에 참여하고 여러 번 싸우며 용맹을 떨쳐63) … 오영자(五營藉) …. 조정에서 특별히 불러 뵙는 배려를 입고 조금 승진했다(「조인본 부 부 묘지명」).40) 위의 기록을 보면, 조인본은 선대 황제의 명을 받아 요동을 침공할 때 참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선대 황제라 하였으므로 당 고종을 말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황제가 요동으로 갈 것을 명하였다고 하였 는데, 이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침공 때도 참전하였을 가능성을 생각 해 볼 수 있다.41) 그렇다면 그는 蘇定方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참전하였 고, 포로로 잡은 의자왕 및 부여융과 함께 당으로 귀환하였을 것이다. 이 때 그는 부여융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부여융이 태산 봉선 을 마친 후 666년 초에 작위를 받았고, 곡부에서 공자 제사를 섭행했기에 더욱 잘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조인본과 부여융은 서로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고 짐작 된다. 이러한 가운데 조인본이 배필을 찾자 부여융이 부여씨 부인을 추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조인본과 부여씨 부인 두 사람이 무려 20년이나 나이 차가 있다고 하며, 아무래도 조인본의 혼 인은 처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42) 두 사람의 혼인 시기 는 부여풍이 당으로 끌려온 이후의 일일 듯하며43), 부여풍의 의사와 관계 40) 願立功於 …(缺)… 昆 屬先朝命將[遼]東 乃參預軍事 百戰賈其餘勇 五營藉 …(缺)… 天庭特蒙召 見 □敭有裕 41) 王連龍・叢思飛, 주 4)의 논문, 2021, 168쪽. 42)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6쪽. 43) 조인본과 부여씨 부인이 혼인한 시점을 대략 668~670년 무렵으로 추정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부여융의 행적이다. 이 때 그는 백제 고토에서 웅진도독부 수장으로 활동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21 없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도 밝혔듯이 부여풍은 668년 고구 려 멸망과 함께 당으로 끌려와 영남에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의 딸은 이미 16세 무렵에 당으로 이주하였고, 부여풍이 포로가 되어 당 에 도착하였을 때 그녀는 대략 20세 초반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부여풍의 딸인 부여씨 부인은 663년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당으로 건너갔다.44) 그렇기 때문에 부여풍의 딸이 조인 본과 혼인하는 과정에서 부여풍이 간여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도 리어 부여융이 이 혼인에 간여하였을 가능성이 컸음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망한 나라 왕실의 후손 딸이 당의 고관과 혼인하였다는 것은 여 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정치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 측면이라는 것은 조정에서 귀부한 이민족의 왕실 후손과 당 관인과의 혼인을 추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부여융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혼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여융의 노림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는 백제 왕실의 후손들이 당의 고관과 혼인을 통해 당에서도 계속해서 집안 을 유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라 짐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조인본이 팽수 현령을 역임하면서 백제 유민과 맺은 인연으로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45) 그렇지만 이러한 설명은 수용하기 힘들다. 앞서 보았듯이 그녀는 부여융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장안 혹은 하였기 때문에 부여씨 부인이 조인본과 혼인하는 과정에서 간여하였을까 하는 의문 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혈족들 이 이미 당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기 존의 연구에서 밝힌 것처럼 부여융이 670년 전후한 시기에 당으로 돌아왔다면(양기 석, 「百濟扶餘隆의 墓誌銘에 대한 檢討」, 國史館論叢 62, 1995, 145~146쪽), 부여씨 부 인의 혼인에 부여융이 간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44)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5쪽. 45)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7쪽. 122 서강인문논총 68집 낙양 근처에서 지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지 않을까 싶다. 또한 부여씨 부인은 모친과 함께 살면서 부여융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부여씨 부인이 조인본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부여융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여융은 조인본과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기 때문에 그녀를 조인본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다고 짐작되는 것 이다. 사실 조인본도 이러한 혼인을 수락한 것은 부여융의 적극적인 노력 을 수용한 것이라 짐작된다. 또한 조인본은 부여융과 그 집안이 당에서도 계속해서 일정한 지위를 누리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선택을 하였다고 보아진다. 당대의 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家格이 맞아 야 했음을 염두에 두면,46) 조인본의 이와 같은 선택의 이면에는 부여융 집안을 무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47) 부여씨 부인은 남편인 조인본이 690년에 사망한 후 4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홀로 가문을 이끈 것처럼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 지만 여성 혼자의 몸으로 집안을 계속해서 이끌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도리어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이나 혹은 부여 융의 관작을 습봉한 부여경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부여씨 부인의 딸인 천수군 부인이 源 乾曜(?~731)와 혼인하였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48) 이상과 같이 볼 때 부여융은 부여풍의 가족들에 대해서 관심이 컸다고 46) 김수진, 「8세기 전반 泉氏 가문의 정치・사회적 復元과 婚姻」, 규장각 62, 2022, 343쪽. 47) 조인본의 입장에서 볼 때 부여풍의 딸이 어떤 출신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조인본이 그녀와 혼인하였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도가 있었을 것인데, 적어도 나이가 어린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적 어도 부여풍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집안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 문에 이와 같은 판단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48) 이에 대해서는 본고의 제 4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하겠다.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23 볼 수 있다. 부여풍의 딸을 조인본에게 시집보낸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입증한다. 이는 당에서 부여융과 부여풍의 후손이 서로 공존하여 지냈다 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결속을 통하여 부여씨 집안을 유지해 나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백제는 당에 의해 멸망했으나 부여융은 왕실 의 후손으로서 당에서 백제 왕실의 집안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의무감은 부여풍의 딸을 당의 고관과 혼인시 킴으로써 유지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천수군 부인과 원건요의 혼인
다음으로 부여풍의 외손녀이자 부여씨 부인의 딸인 천수군 부인이 원 건요와 혼인하게 된 배경과 이유 등을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의 기록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C. 딸이 있었으니 天水郡 부인으로 승상 源公(源乾曜)의 안살림을 맡았다(혼 인했다). 품성이 어머니를 닮아 온순하고 현명하며 아름답고 정겨움이 있었다. 어찌 명예가 邦族에만 퍼졌겠는가, 아마도 소문이 天朝까지 들린 듯하다(「조인본 부부 묘지명」).49)
위의 기록에서는 부여풍의 외손녀인 천수군 부인이 원건요와 혼인한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있다. 다만 그녀가 20대에 혼인하였다 고 한다면 690년에서 700년 사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앞서 보았듯이 천수군 부인의 모친인 부여씨 부인이 670년 무렵에 조인 49) 有女曰天水郡夫人 主饋於丞相源公 內則母儀 柔明婉嬺 豈唯譽流邦族 抑亦聲聞天朝 故特降渥恩. 124 서강인문논총 68집 본과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혼인 시기를 기초로 하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천수군 부인은 690년 무렵이면 20세 전후의 나이가 되 기 때문이다. 따라서 690년에서 700년 사이에 부여풍의 외손녀인 천수군 부인이 원건요와 혼인을 했다고 해도 과히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천수군 부인의 부친인 조인본은 690년에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천수군 부인의 혼인은 조인본이 죽기 전인 690년 이 전에는 성사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조 인본 묘지명에 보이는 바와 같이 어머니를 닮아 온순하고 현명하였다고 한 것으로 볼 때 부여씨 부인을 강조하고 있다. 부친인 조인본과 관련해 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그가 죽은 이후에 원건요와 혼인 하였을 가능성이 좀 더 크다고 믿어진다. 그러니까 조인본이 죽은 이후 천수군 부인이 원건요와 혼인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조인본이 사망한 이후 천수군 부인이 어떻게 하여 원건요와 혼 인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에 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이 를 알아내기 위해 원건요의 부친인 源直心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는 것도 논지 전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원직심은 당 고종대 재상으로 활동한 인 물이다. 그는 당 고종 시기에 司刑太常伯을 지냈다가 유배당한 후 죽었다 고 한다.50)
50) 源乾曜 相州臨漳人 祖師民 隋刑部侍郞 父直心 高宗時太常伯 流死嶺南(新唐書 권127, 열전 제52, 源乾曜光裕).
원직심이 언제 죽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측천 무후 즉위 후 얼마지 않아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원건요가 천수 군 부인과 혼인하였을 무렵에는 생존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보면 원건요는 부친인 원직심의 의도에 따라 혼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원직심이 어떤 의도로 아들인 원건요를 천수군 부인과 혼인하게 하였는지 는 알 수 없으나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원직심과 부여풍이 영남에서 해배 되면서 서로 접근한 관계로 혼사가 이루어진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51)
그렇지만 부여풍이 외손녀인 천수군 부인이 혼인하였을 때까지 생존하 였는지 의문일 뿐만 아니라 그가 이 혼인에 있어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조인본 부부에게는 아들이 있 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52) 그러므로 조인본 집안의 영향력이 컸다고 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부여씨 집안의 노력에서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것은 부여융의 관작을 이어받은 부여경의 영향력 때문이 아 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부여경은 측천무후 시기 대 방군왕과 위위경을 제수받았다.53) 더구나 당시 부여문선도 공을 세운 바 가 있기 때문에 부여씨 집안은 측천무후 시기에 여전히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부여풍의 손녀인 천수군 부인이 원건요와 혼인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판단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690년 무렵이면 측천무후가 집권하였고 정치적 영향 력을 강하게 행사하고 있던 때이다. 이 때에 천수군 부인이 재상의 아들 인 원건요와 혼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부여경의 영향력이 작용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수군 부인이 명문 집안의 자제와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부여씨 가문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 다. 이렇게 보면 부여씨 집안이 당에서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 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유기적인 관계로 말미암아 당에서 계속해서 재 상 집안과 혼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며 더 나아가 부여씨 집안을 유지하 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천수군 부인의 아들인 원청의 혼인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51) 王連龍・叢思飛, 주 4)의 논문, 2021, 173쪽. 52) 조인본 부부 묘지명에는 “嗣子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앞서서 죽었다”라고 되어 있다. 즉 아들을 일찍 잃었음을 말하고 있다. 53) 강청파, 주 5)의 논문, 2012, 153쪽. 126 서강인문논총 68집 천수군 부인은 원건요와의 사이에서 여러 명의 아들을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원청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는 현종의 사위가 되었 다.54) 즉 원청은 현종의 딸인 진양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혼인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하여 조인본 부부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 술되어 있다. D. 딸이 있었으니 천수군 부인으로 승상 源公의 안살림을 맡았다(혼인했다). 품성이 어머니를 닮아 온순하고 현명하며 아름답고 정겨움이 있었다. 어 찌 명예가 邦族에만 퍼졌겠는가, 아마도 소문이 天朝까지 들린 듯하다. 그 까닭으로 두터운 은혜를 베푸셔서 부인 소생의 아들을 공주(현종의 진양공주, 眞陽公主)와 혼인하게 하셨다. 옛날에 둘째 아들 수문은 일찍 이 鵲巢의 총애에 응해,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갖추었고, 바야흐로 鳳樓의 拜를 하사받아, 천고를 단번에 익혔다. 그 빛이 구족에 드날리니, 비록 상문(재상가)에서 비롯한 경사라고 하지만, 역시 부인의 誠孝로 그 렇게 된 것이다(「조인본 부부 묘지명」).55) 위의 기록 중 일부는 앞서 인용하였지만 논지 전개를 위해 다시 적어 보았다. 묘지명의 내용을 보면, 천수군 부인의 자질이 뛰어났고 그것으로 인해 황족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수사적 인 것이라 보아진다. 이와 같은 혼인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원건요와 현종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원건요는 현종에게 자 신의 아들 3명이 중앙의 관직을 지내자, 자신의 아들 2명을 외직으로 보 낼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원건요는 현종의 총애를 얻었고 승진하여 승상이 되었다. 54)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7쪽. 55) 有女曰天水郡夫人 主饋於丞相源公 內則母儀 柔明婉嬺 豈唯譽流邦族 抑亦聲聞天朝 故特降渥恩 以夫人所生男尙主 昔仲子手文 始應鵲巢之寵 叔安美質 方錫鳳樓之拜 翕習千古 光揚九族 雖慶 自相門 亦夫人誠孝所致.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27 이와 같은 이유로 천수군 부인의 아들이 현종의 사위가 되었으나 중요 한 점은 천수군 부인은 의자왕의 외손으로서 당 황실과 연결되었다고 하 는 점일 것이다. 부여태비가 괵왕의 비가 되었고 천수군 부인의 아들이 현종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망족의 후손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해서 명망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56)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의자왕의 후손이 당에 정착한 이후 계속해서 집 안을 유지하고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혼인관계에서 비 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직계 남자 후손보다는 여성을 통한 후손으로 이어진 핏줄이 더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그 특징 을 찾아볼 수 있다.
5. 부여태비와 이옹의 혼인
이제는 부여융의 손녀인 부여태비(690~738)의 혼인에 관해서 알아보기 로 하자.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부여덕장의 딸인 부여태비 즉 부여융의 손녀가 虢王 李邕(678~727)과 혼인하였고 그 해가 대략 711년으로 추정되 고 있다.57)
괵왕 이옹은 神堯皇帝의 증손이고, 司徒 虢王 李鳳의 손자이고, 56) 김영관은 주 2)의 논문, 2022, 84쪽에서 “당 황실 입장에서 멸망시킨 국가의 왕족과 혼인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설명이나 당 황 실에서 이와 같이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부여융 이하 그 후손들의 노력과 영향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방향숙은 고종이 부여융과 그 일족에 대하여 예 우를 한 것은 백제 유민들의 심리적 안정을 가져오고 당 사회에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측천무후 시기에도 부여융의 일족을 대우한 것은 기미의 징표가 됨으로써 통치에 이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방향숙, 주 1)의 논문, 2017, 126쪽). 더 나아가 현종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진 것을 같 은 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57) 부여태비의 혼인 시기에 관해서는 張蘊・汪幼軍 저, 劉占鳳 역, 주 2)의 논문, 2008, 229 128 서강인문논총 68집 曹州刺史를 지낸 定壤公 宏의 아들이다.58) 부여태비는 괵왕 이옹의 두 번 째 부인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연 유로 말미암은 것일까 하는 것이다.59) 이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이 없으므로 당시 당에서 활동한 부여 융의 후손들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부여융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扶餘德璋이 주목된다. 현재 그의 묘지명이 발 견되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부여융의 직계라는 사실 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부여덕장의 長女인 부여태비의 묘지명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묘지명에 따르면, 부여덕장이 친부이고 부 여융의 손녀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러하다.60) 그런데 부여덕장은 부친인 부여융의 봉작을 이어받지 못하고 조카인 扶餘敬이 襲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존이 연구에서는 부 여덕장이 습봉하지 못하였던 것은 그가 어떤 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 로 파악하고 있다.61) 부여경이 扶餘文思의 아들이고 그에게 관작이 내려 간 것으로 볼 때 부여덕장은 부여융의 맏아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융에게는 부여문사와 扶餘文宣 등의 아들이 있었다. 더욱이 부여덕장 의 경우 앞의 두 사람과 달리 行列을 달리하였으므로 부여융이 본부인 이 외의 다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62) 이러한 쪽 및 234쪽에서는 710년 혹은 그 이후로 파악하고 있으며, 김영관, 주 2)의 논문, 2009, 128쪽에서는 711년으로 보고 있다. 정병준은 주 2)의 논문, 2023, 138쪽에서 711년 이후 혼인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58) 괵왕 이옹에 관해서는 김영관, 주 2)의 논문, 2009, 125쪽 및 정병준, 주 2)의 논문, 2023을 참고할 것. 59) 정병준은 당이 관하 이민족을 안정시켜 이용하기 위하여 우대하였고 그러한 연장선 상에서 의자왕의 후손도 대우하였다고 하였다(정병준, 주 2)의 논문, 2023, 141~142 쪽). 그렇지만 이러한 판단은 당의 입장만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60) 김영관, 주 2)의 논문, 2009, 124쪽. 61) 김영관, 주 2)의 논문, 2009, 134쪽. 62) 백제 사비시기의 항렬자 사용에 대한 전고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의 경우를 통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29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부여덕장이 아버지의 관작을 이어받지 못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여덕장은 언제 태어났고 또한 언제 혼인하였을까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이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으 나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 하게 알 수는 없으나 부여융이 그를 30세에 낳았다고 가정할 경우 그는 645년 무렵에 태어났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을 하는 이유는 이미 그의 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여덕장이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태어났음에는 틀림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부여덕장은 당으로 건너와 그곳에서 성장하였으므로 당인과 혼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당에 끌려왔을 때의 나이가 대략 15세 무렵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대략 670년 이전에는 혼인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딸이 690년에 태어난 것이 확실하므로 이러한 추정은 그리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부여태비가 태어났을 때 조부인 부여융은 이미 682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부여덕장은 부여융의 관작을 습봉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그녀가 711년 무렵에 괵왕 이옹과 혼인 할 수 있었던 것이 더욱 궁금해진다. 이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자면, 부여덕장 에게는 또 다른 딸이 있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 李巨의 모친인 扶餘氏는 吉溫 嫡母의 여동생이다(舊唐書 권112, 열전 62, 해서 볼 때 중고기 이후 왕족의 돌림자와 항렬 사용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면(김창겸, 「신라시대 人名의 行列字 사용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39, 2021), 백제에서도 왕족에게는 이와 같은 항렬 사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특히 백 제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신라보다 앞서 이와 같은 항렬자 사용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30 서강인문논총 68집 李巨傳).63) 위의 기록에서 보면, 李巨의 모친인 부여태비에게는 언니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吉溫(?~755)의 적모였다고 한다. 적모는 첩의 자식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부여태비의 언니에게 첩의 자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 다.64) 다시 말해서 부여태비의 언니는 吉琚와 혼인하여 본부인의 지위에 있 었다. 그런데 길거는 본부인인 부여태비의 언니 이외에도 첩을 두었는데 그 사이에서 길온이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부여태비의 언니가 적모라고 불 리게 된 것이다. 결국 길온은 길거의 서자였으므로 부여태비의 자매의 아들 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吉溫은 당 현종대 유명한 酷吏로 알려져 있다.65) 길거는 吉頊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 다. 다만 그의 형인 길욱은 聖曆 2년(698) 정월에 天官侍郎・同鳳閣鸞臺平章 事로 승진하였다고 한다.66) 이는 길거의 형인 길욱이 재상에 올랐음을 말 한다. 이렇게 볼 때 부여태비의 언니는 재상을 배출한 가문과 혼인하였음 을 알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부여태비의 언니가 길욱의 동생인 길거와 혼인할 수 있 었던 것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부여씨 집안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부여태비의 언니가 길거와 혼인한 시기를 63) 巨母扶餘氏 吉溫嫡母之妹也. 64) 우에다 기헤이나리치카(植田喜兵成智), 「‘내시지번’으로서의 백제・고구려유민-무주시기 부터 현종 개원기에 이르기까지 유민 양상과 그 변화-」, 고구려발해연구 64, 2019 : 新羅・唐關係と百濟・高句麗遺民, 山川出版社, 2022, 224쪽 및 정병준, 주 2)의 논문, 2023, 139쪽. 65) 김영관은 길온의 출세에는 당 황실과 혼인한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가 가진 배경 도 일정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김영관, 「在唐 백제 유민의 활동과 출 세 배경」, 한국고대사탐구 35, 2020, 85쪽). 그렇지만 부여태비의 아들인 이거는 길 온에게 미움을 싸 관직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舊唐書 권 209, 열전 134, 酷吏 吉溫). 66) 資治通鑑 권206, 성력 2년 정월.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31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부여씨 집안이 여전히 세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즉 부여경은 측천무후 시기 대방군왕과 위위경을 제 수받았다.67) 더구나 당시 부여문선도 공을 세운 바가 있었으므로 부여씨 집안은 측천무후 시기에도 당 황실에서 여전히 중시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길욱은 비록 좌천되어 재기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재상으로 있 었을 때 중종이 조정으로 돌아오는 데 기여한 공이 인정되어 예종 초에 어사대부로 추증되었다.68) 이렇게 볼 때 부여태비 집안과 길욱 집안은 당시에도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부여태비 를 이옹과 혼인할 수 있도록 추천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논지 전개는 사료가 없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여태비가 이옹과 혼 인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하는 하나의 실마리로 이끌어 낼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또 하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천수군 부인측에서 부여태비를 이옹과 혼인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천수군 부인의 남편인 원건요는 현종 즉위 후 빈왕부 장사가 되었다. 그 이전에 그는 강남도 순찰사 및 간의대부를 역임했는데 이 때에 괵왕이 부여태비 와 혼인을 하였으므로 간접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 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천수군 부인이 원건요와 혼인하고, 이후 부여태비가 이 옹과 혼인하게 된 것은 부여융 집안과 부여풍 집안이 대립하지 않고 서 로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 협조 아래 그들 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당의 관인과도 계속해서 혼인하 였고 더 나아가 황실의 후손과 혼인도 할 수 있었다고 짐작된다. 67) 강청파, 주 5)의 논문, 2012, 153쪽. 68) 新唐書 권117, 길욱전.
6. 맺음말
이 논문은 당에서 의자왕의 후손들이 어떻게 정치적 및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여 나갔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이를 위해 부여융의 손녀가 괵왕 이옹과 혼인한 것과 부여풍의 딸이 조인본과 혼인하고 또한 그의 외손녀인 천수군 부인이 원건요와 혼인한 사실에 관하여 집중적으 로 검토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부여씨 집안이 당으로부터 인정을 받 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혼인이 성립되었다고 하였으나, 이와 같은 설명만 으로는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새롭게 접근해 본 것이다. 그래서 부여융 혹은 그의 후손들 특히 여성을 통한 후손으로 이어진 핏줄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부여융과 부여풍은 의자왕의 아들이었으나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였다. 부여융은 당 왕조에 복무하였으나 부여풍은 당 왕조에 대하여 반기를 들 었다. 그 결과 부여풍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부여융이 백제 왕실 의 최고 후손이라는 책임감으로 형재애를 발휘하여 부여풍은 사형당하지 않고 영남으로 유배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여풍이 유배되자 부여융은 부 여풍 가족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는 부여풍의 딸을 당의 관리인 조인본과 혼인시켰다. 이는 부여융이 부여풍의 가족들을 내치지 않고 백 제 왕실의 핏줄임을 인정하여 최대한 감싸 안은 결과였다. 또한 부여융의 이러한 노력은 백제 왕실의 후손이 당에서도 계속해서 대우받고 살아갈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당의 관인 조인본과 혼인하였던 부여씨 부인은 40여 년 동안 홀로 지 내면서 딸인 천수군 부인을 재상의 아들인 원건요와 혼인시켰다. 이와 같 은 혼인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부여융의 후손들이 측천무후 시대에도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고 재당 의자왕 후손들의 혼인과 활동 133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천수군 부인의 아들이 현종의 사위가 된 것도 이와 같은 연장선 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편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는 괵왕 이옹과 혼인하였다. 부여태 비가 이와 같이 혼인할 수 있었던 것도 부여융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정 치적 활동을 하였으며 그 결과 그에 걸맞는 지위를 유지하였기에 가능하 였고, 원건요와 혼인한 천수군 부인의 역할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 다. 더구나 부여태비의 언니는 재상 집안에 시집을 갔으므로 여동생이 이 옹과 혼인하는데 있어 적잖은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의자왕의 후손, 특히 외손들이 계속해서 당에서 고관과 혼인하게 된 것은 당의 정책과 유관한 것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의 자왕 후손들의 노력이 컸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부여융의 노력과 그를 이은 부여경 등이 당의 조정에서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에 이와 같은 혼인이 성사될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망국의 후손들이 당에서 집안을 유지하며 왕실이나 혹은 고관의 자식 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은 부여융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으며, 부여풍의 후손을 내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배척하는 대 신 화합하였기에 이와 같은 혼인을 할 수 있었으며 계속해서 당에서 정 치 및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다만 이 논문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부분도 없지 않은데, 그것은 의자 왕의 남성 후손들의 활동이다. 부여경 이후 남성 후손들에 관해서는 사료 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더 밝히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다만 의자왕의 남성 후손들과 관련된 기록이 새롭게 나타나길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표 1> 의자왕 후손 가계도>69)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69) 이 표는 장병진, 주 4)의 논문, 2022, 258쪽의 <그림 4, 조인본, 부여씨 부부의 가계도> 와 김영관, 주 65)의 논문, 2020, 83쪽의 부여융 집안 후손 가계도를 각각 이용하여 조합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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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arriage and Activities of Descendants of King Uija of Tang
Cho, Bumhwan
This thesis examines how the descendants of King Uija maintained their family and status in Tang. To this end, we focused on the fact that Buyeo-yong's granddaughter married King Yi Ong, Buyeo-pung's daughter married Cho In-bon, and his grand d aughter, wife Cheon Soo-gun, married Won Geon-yo. Buyeo Yong and Buyeo Pung were the sons of King Uija, Buyeo Yong served in the Tang Dynasty due to different political lines, but Buyeo Pung rebelled against the Tang Dynasty. As a result, Buyeo-pung was captured and exiled to Yeongnam. However, Buyeo-yong took good care of his younger brother's family and served as a guardian, and later married Buyeo-pung's daughter to Jo In-bon, the manager of the party. It can be said that Buyeo Yong found a way for the descendants of the Baekje royal family to continue to be treated and live in Tang. Buyeo's wife, who married Jo In-bon, lived alone after her husband's death and married her daughter, Mrs. Cheon Soo-gun, to Won Geon-yo, the son of the Prime Minister. The fact that such a marriage was able to be established is not irrelevant to the fact that Buyeo-yong's descendants were treated highly even in the era of Cheonsunmu. Furthermore, it can be understood in this extension that the son of Cheon Soo-gun's wife became Hyeonjong's son-in-law. Meanwhile, Buyeo Taepi, the great-granddaughter of King Uija, married King Goek Iong. Buyeo Taepi was able to marry like this because Buyeo Yong's descendants continued to maintain political status, and his wife, Cheon Soo-gun, who married Won Geon-yo, played a major role. Moreover, since Buyeo Taabi's older sister married into the Jae-sang family, it is believed that her younger sister played a role as a stepping stone in marrying Yi Ong. It was possible because Buyeo Yong's devoted efforts were the result of Buyeo Yong's dedication to maintaining the family in Tang and marrying the children of royal families or dignitaries. They were able to marry like this because they united instead of rejecting each other, and continued to maintain their family in the Tang.
Key words : King Uija, Buyeo-yong, Buyeo-pung, Cho In-bon, King Goek Iong
접수일자 : 202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 2023년 11월 29일 게재확정 : 2023년 11월 29일
서강인문논총 6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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