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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1030년대 고려-거란 갈등과 외교 재개/정나영.이화여대

1. 머리말

2. 양국 갈등의 배경

1) 大延琳 반란과 국경 지역의 불안

2) 거란 聖宗의 죽음

3. 양국 관계의 변화

1) 관계 단절과 국경 강화

2) 교섭과 외교 재개

4.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고려와 거란이 일시적으로 단교했다가 외교를 회복했던 1030년대 양국 갈등의 배경과 그 경과를 검토한 글이다.

여기에는 고려와 거란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영향을 주었는데, 본 논문에서는 국경 지역의 혼란과 거란 성종의 죽음을 갈등의 주요 배경으로 논의하였다.

거란의 통치가 이완되면서 동경을 중심으로 대연림 반란이 일 어났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거란에서 고려로 내투가 계속되며 국경 지역 혼란이 계 속되었다.

그리고 보주를 점령하고 고려의 사신을 억류하며 고려를 견제했던 성종이 죽고 정변이 발생해 내부가 혼란해지자, 고려는 그동안 공론화하지 않았던 압록강 동 쪽 지역 반환과 억류된 사신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특히 이때는 고려에서도 현종의 죽 음과 맞물려 거란에 대한 우려와 불만이 표출되었다.

양국이 사행을 중단하고 대립 국면에 접어든 후, 고려는 장성을 축조하며 서북 변 경을 강화하였다.

거란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다가 정종이 즉위하고 흥종이 친정을 시작한 후 고려에 교섭을 시도하였는데, 이후에도 양국 간 갈등은 이어졌다.

고려는 장성을 연장했고 거란은 국경 안정과 고려 견제를 목적으로 보주도통군사를 설치하며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고려는 송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배가 난파되면서 교 섭은 행해지지 못하였다.

이렇게 양국은 대립을 이어가다가 거란이 다시 고려에 관계 회복을 요구하고 고려가 사절을 파견하면서 외교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이후 고려는 이 시기 외교적 경험을 참고하여 갈등 상황에서도 교섭을 지속하며 안정적인 관계 유 지를 우선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1030년대 양국 간 갈등과 외교 재개는 향후 대거란 외교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 고려, 거란, 사행 중단, 보주도통군사, 외교 재개

1. 머리말

고려는 거란과 成宗 13년(993) 전쟁을 겪고 이듬해 공식 관계를 수립하 였다. 이전에도 양국 간 사절이 몇 차례 오간 적이 있었으나 이는 일시적 으로 이루어졌는데,1) 전쟁과 협의의 과정을 거친 후 고려는 성종 14년 (994)부터 거란을 중심으로 하는 외교를 본격화하였다.

그리고 두 국가가 합의한 외교 질서 속에서 사절 왕래는 규범으로 중시되었다. 이렇게 국교를 맺은 후 고려는 여러 명목의 사절을 수시로 보내며 거 란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2)

1) 성종 14년(994) 이전 거란은 太祖 天贊 원년(992)부터 980년대까지 5차례 고려로 사절 을 보냈고(高麗史 권1, 세가1, 태조 5년 2월; 권2, 세가2, 태조 25년 10월; 권3, 세가 3, 성종 5년 1월; 遼史 권3, 본기3, 태종 천현 12년 9월 辛未; 권115, 이국외기, 회동 2년), 고려는 太祖 7년(924)을 시작으로 모두 4차례 거란에 사절을 파견하였다(遼史 권2, 본기2, 태조 천찬 4년 10월 辛巳; 天顯 원년 2월 丁未; 권115, 이국외기, 천찬 3년; 천현 2년).

2) 거란은 새로운 외교 대상이었으므로, 고려는 종전 후 전후 문제를 논의하고 사행 방식 을 모색하고자 거란에 자주 사절을 파견하였다(정나영, 「高麗前期 對契丹 使行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3, 22~30쪽). 특히 국경을 접하게 된 양국은 현안 에 따라 두 국가의 조정과 거란의 동경 및 고려 조정, 거란과 고려의 지방 정부 간 다양한 층위로 사절 및 문서를 교류하였다. 이러한 두 국가 간 세 층위의 교섭 창구 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이 참조된다. 정동훈, 「고려-거란 관계에서 세 층위의 소통 구조」, 역사와 현실 107, 2018.

顯宗 원년(1010) 거란이 재차 고려를 침입한 후에도 두 국가 간 사행은 계속되었으나, 거란이 현종 5년(1014) 고려의 영유가 인정됐던 保州 지역을 점령하고3) 고려로의 공격을 재개하면서4) 양 국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에 고려는 대거란 사행을 중단했고 현종 7년 (1016)부터는 거란의 사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5)

그러나 현종 11년(1020) 고려가 거란에 稱臣하고 현종이 거란의 책봉을 받으면서6) 양국 관계는 다시 정상화되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서로 200회 이상 사절을 왕래하 며7) 안정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고려-거란 간 보주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1050년대부터 거란 이 弓口門欄과 정자[亭舍, 郵亭], 榷場 등의 시설을 세우거나 설치를 시도하 면서8) 압록강 지역 시설물을 둘러싼 갈등은 11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이때 고려는 대체로 문서를 보내거나 사절을 파견해 요구를 전달하며 외 교적인 방식으로9) 거란과의 갈등이 악화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때로는 교역 관련 시설 철거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10)

3) 遼史 권38, 지리지 2, 동경도. 1차 침략 당시 양국은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협상을 진행했고 합의에 따라 압록강 동쪽 지역은 고려가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행해진 양 국 간 논의는 연구자에 따라 徐熙-蕭遜寧 회담과 994년 地界劃定 및 조약으로 다양하 게 불린다(김순자, 「10-11세기 高麗와 遼의 영토 정책-압록강선 확보 문제를 중심으 로-」, 북방사논총 22, 2006; 이미지, 「고려 성종대 地界劃定의 성립과 그 외교적 의 미」, 한국중세사연구 24, 2008; 金佑澤, 「11세기 對契丹 영역 분쟁과 高麗의 대응책」, 韓國史論 55, 2009).

4) 遼史 권15, 본기15, 성종 개태 3년 6월; 高麗史 권4, 세가4, 현종 5년 10월 己未; 6 년 1월.

5) 高麗史 권4, 세가4, 현종 7년 1월 甲寅.

6) 高麗史 권4, 세가4, 현종 11년 2월; 3월 癸丑; 13년 4월.

7) 양국이 공식 관계를 수립한 후 기록상 고려의 대거란 사행은 240회, 거란의 사절 파 견은 239회 확인된다(정나영, 주 2)의 논문, 235-253쪽; 朴漢男, 「高麗의 對金外交政策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104-105쪽).

8) 거란은 보주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약화하려는 의도에서 시설물을 설치했다 고 이해된다(박종기, 「고려와 거란의 영토분쟁과 그 의미」, 정치와 평론 7, 2010, 119쪽).

9) 고려는 정종 시기부터 거란과의 갈등을 외교문서나 사절의 교환과 같이 외교적으로 풀어나가고자 하였고, 이때 양국이 994년 합의한 내용은 대전제로 활용되었다(이미 지, 태평한 변방: 고려의 對거란 외교와 그 소산, 景仁文化社, 2018, 215쪽).

10) 高麗史 권10, 세가10, 선종 5년 9월; 권11, 세가11, 숙종 6년 8월 乙巳.

이를 고려할 때 德宗 원년(1032, 거란 興宗 重熙 1년)부터 靖宗 3년(1037, 흥종 중희 6년)의 기간은 두 국가가 사행을 중단하고 대립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가 여전히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11) 새로 즉위한 흥종의 연호를 채택하지 않았던 것은 거란에서 볼 때 도발적인 태도였다.12)

특히 1차 침입 때 고려는 사절의 교통로를 마련한다는 명분 으로 여진을 내쫓고 축성을 인정받았으므로,13) 사행 중단은 양국 간 합의 에서 벗어난 행위이기도 하였다.

갈등이 대규모 무력 충돌로 확대되지 않 았으나 이때 고려와 거란은 몇 해 동안 대립하다 1037년 말 외교 재개 움직임을 보였고, 정종 4년(1038)부터는 12세기 초까지 중단없이 교섭하 며 관계를 이어갔다.

이에 연구자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고려의 대거란 강경책 추진과 외교 재개의 배경을 분석하였다. 우선 고려 국내 상황과 관련하여 대거란 정책 을 둘러싼 국내 정치세력 간 대립과 王可道 등 주요 강경론자의 죽음, 정 종의 즉위와 정치 주도세력의 변화가 고려의 외교 및 양국 관계에 영향 을 주었다는 논의가 있었다.14)

11) 이미지, 주 9)의 책, 205쪽.

12) 金在滿, 契丹・高麗關係史硏究, 國學資料院, 1999, 191쪽.

13) 高麗史 권3, 세가3, 성종 13년 2월, “蕭孫寧致書曰, ‘但以彼國信好早通, 境土相接. 雖以小 事大, 固有規儀, 而原始要終, 須存悠久. 若不設於預備, 慮中阻於使人. 遂與彼國相議, 便於要衝 路陌, 創築城池者.’ 尋准宣命, 自便斟酌, 擬於鴨江西里, 創築五城, 取三月初, 擬到築城處, 下手 修築 ….”

14) 박종기,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와 정국운영론의 추이」, 역사와 현실 30, 1998; 김 당택, 「高麗 顯宗・德宗代 對契丹(遼) 관계를 둘러싼 관리들 간의 갈등」, 歷史學硏究 29, 2007. 덕종 시기 대거란 정책의 방향과 관련해 조정에는 방어적이고 현실적인 노 선과 적극적인 국익 추구 노선, 거란과 관계를 지속해 백성을 휴식시키자는 3가지 계 열이 있었다는 논의도 있다(추명엽, 「8-11세기 해동천하의 형성과 전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2, 266쪽).

그리고 고려가 군사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거란 강경책을 추진했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15)

고려뿐만 아니라 거란의 국내외 상황을 참고하여 당시 거란이 欽哀皇后 주도의 정 변과 阻卜과의 충돌로 고려에 집중하기 어려운 사정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계속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고도 보았다.16)

또한, 고려가 덕종 즉위년 거란에 보주 점령을 항의하고 영토 반환을 요구하게 된 계기로 거란의 東 京을 중심으로 발생한 大延琳 반란이 주목되었다.17)

위와 같은 논의들은 고려가 거란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또 양국 관 계가 일시적으로 경색 국면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도 남는데, 고려의 강경한 태도는 덕종과 왕가 도와 같이 대거란 강경론의 주요 인물이 덕종 3년(1034)에 사망하고18) 거 란에서 흥종이 중희 3년(1034) 7월부터 親政을 시작한19) 후에도 몇 해 동 안 계속되었다.

15) 金在滿, 주 12)의 책, 192쪽.

16) 金在滿, 주 12)의 책, 192쪽; 허인욱, 「高麗 德宗・靖宗代 契丹과의 鴨綠江 城橋・城堡問題」, 歷史學硏究 38, 2010; 「高麗-契丹의 압록강 지역 영토분쟁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 위논문, 2012, 82~107쪽.

17) 金錫亨, 「契丹(遼)의 침입과 그 격퇴」, 歷史諸問題 3, 1949, 88~89쪽; 方東仁, 韓國의 國境劃定硏究, 一潮閣, 1997, 80~81쪽; 김순자, 주 3)의 논문, 268쪽. 한편, 대연림 주도 로 건국된 興遼國에 대한 연구는 이를 발해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부터 흥 요국과 고려의 관계, 흥요국 반란 기간과 이후 고려와 주변과의 관계, 흥요국 진압 이후 발해인의 고려 來投, 반란 과정 전반에 주목한 논의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李 丙燾, 韓國史 中世篇, 乙酉文化社, 1959, 200쪽; 金昌洙, 「高麗와 興遼國」, 海圓黃義敦先 生古稀紀念史學論叢, 동국대학교 출판부, 1960; 韓圭哲, 「高麗 來投・來往 女眞人」, 釜山 史學 25・26 合輯, 1994; 李孝珩, 이효형, 「興遼國의 성립과 對高麗 구원 요청」, 釜山史 學 22, 1998;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과 고려」, 발해유민사 연구, 혜안, 2008; 허인 욱, 「고려시대 ‘발해 유민’과 ‘발해계(渤海系) 고려인’ 연구」,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 동북아역사재단, 2019; 정나영, 「興遼國 건국과 高麗・契丹・女眞 관계의 변화」, 한국중 세사연구 60, 2020; 박순우, 「요대 발해인 대연림의 기병(起兵)에 대한 종합적 고찰」, 高句麗渤海硏究 77, 2023).

18)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3년 5월 丁丑; 9월 癸卯.

19) 遼史 권18, 본기18, 흥종 중희 3년 7월 戊子.

그리고 당시 거란이 조복과 충돌했을 때에도 거란-송 사 이의 사절 왕래는 이어지고 있었으며,20) 고려-거란 간 공식 관계가 이어 지는 동안 거란이 이 시기에만 외부와 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21)

20) 거란과 송 사이에는 매년 賀正使와 生辰使, 송나라 태후의 국상에 따른 각종 사절이 파견되었다(傅樂煥, 遼史叢考, 中華書局, 1984, 195~198쪽).

21) 중희 13년(1044) 거란과 西夏의 충돌에도 고려는 국왕 책봉을 감사하고 거란은 국왕 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다(遼史 권19, 본기19, 흥종 중희 13년 9월 壬申; 高 麗史 권6, 세가6, 정종 10년 7월 癸酉).

이에 당시 고려-거란 관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교가 단절되었 다가 재개되기까지 상황을 더욱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1030년대 고려와 거란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경색되었 다가 회복되었던 시기 양국 갈등의 배경과 그 경과를 상세하게 분석해보고 자 한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양국 간 갈등이 발생하고 계속된 배경을 국 내외적 상황과 함께 살펴보고, 3장에서는 고려와 거란이 갈등 상황에 어떻 게 대응했으며 정종 3년(1037) 교섭 재개는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 검토해보겠다.

이를 통해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양국 국내정치를 비롯해 고 려 서북지역 및 거란 동남부지역의 상황, 對宋 외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11세기 고려-거란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양국 갈등의 배경

고려와 거란은 1020년 외교를 정상화하고 이후 현종이 거란의 책봉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관계를 이어왔다.

전쟁 중 거란이 보주를 점령하면 서 고려는 압록강 동쪽 지역을 영유하지 못했는데, 후술하겠으나 외교가 재개된 후 이 문제는 공론화되지 않았다고 짐작된다.

그렇다면 1030년대 어떠한 상황에서 양국 간 갈등이 발생했고 관계가 단절되었던 것일까.

여기서는 그 배경을 당시 국경 지역의 혼란과 거란에서의 황제 교체를 중 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大延琳 반란과 국경 지역의 불안

먼저 갈등이 이어진 배경으로 거란 동경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그 이후까지 양국 국경이 불안정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사행 중단과 관계 단절의 직접적인 요인이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1030년대 각국이 대 립을 지속하면서 국경 방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과 관련되기 때문에 갈 등의 요인 중 하나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대연림 반란은 太平 9년(1029, 현종 20년) 거란의 동경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발해인인 대연림은 거란의 관리를 가두거나 죽이고 興遼國을 건립하 며 반거란 움직임을 주도하였고 반란에는 南女眞과 北女眞이 참여하였 다.22)

이때 대연림은 직책은 東京舍利軍詳穩이었는데, 거란에서 舍利이라 는 官名을 가진 사람은 나중에 여러 帳의 관리가 되었고23) 詳穩은 관부의 장관24)이라는 점에서 그는 거란의 관료 사회에 편입되어 어느 정도 지위 를 가진 인물이었다.

반란에는 성종의 駙馬였던 大力秋도 참여했으며,25) 동조했던 남・북여진은 모두 거란의 통제를 받았던 熟女眞이었다.26)

22) 遼史 권17, 본기17, 성종 태평 9년 8월 己丑.

23) 遼史 권116, 국어해, “舍利, 契丹豪民要裹頭巾者, 納牛駝十頭, 馬百匹, 乃给官名曰舍利. 后 遂爲諸將帳官, 以郎君系之.” 이는 돌궐에 있었던 사리(舍利)라는 관명에서 유래되었다 (김태경, 契丹小字辭典, 조선뉴스프레스, 2019, 68~69쪽).

24) 遼史 권116, 국어해, “詳穩, 諸官府監治長官.”

25) 遼史 권65, 표3, 공주표.

26) 남여진은 遼東半島 일대, 북여진은 遼寧省 瀋陽市 북부지역에서 吉林省 四平市에 걸쳐 분포한 숙여진의 일부로 추정된다(高井康典行, 「契丹[遼]の東北経略と「移動宮廷(行朝)」: 勃 興期の女真をめぐる東部ユーラシア状勢の一断面」, 金・女真の歴史とユーラシア東方, 勉誠出版, 2019, 35쪽).

그리 고 東女眞은 반란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고려에 戈船과 楛矢, 무기를 다량으로 헌상하며 이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27)

반란 참여 세력과 주위의 대응으로 볼 때 대연림 반란은 성종 말기 거란 내부 통치의 한계 와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28)

특히 遼史에는 대연림 반란과 흥요국 건국이 태평 9년(1029)에 있었 다고 하였지만, 반란 진압에 참여한 관리 2명의 묘지에는 반란 시작이 모 두 태평 8년(1028)으로 되어있는 점도 주목된다.

묘지는 당대 작성된 자 료이므로 흥요국 건국까지는 아니라도 1028년부터 반거란 세력이 가시적 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9)

또, 반란 세력은 거란의 군사와 교통 요충지인 黃龍府를 비롯해30) 瀋州, 保州를 확보하고자 노력했고31) 고려에 여러 차례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며32)

27) 高麗史 권5, 세가5, 현종 21년 4월 戊子; 5월 乙卯. 이와 관련해 당시 고려가 전쟁을 대비해 여진에게 관련 물품을 요구하거나, 이러한 정황을 감지한 여진이 이에 호응하 면서 다량의 전쟁 물자가 고려로 진상되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추명엽, 주 14)의 논문, 259쪽).

28) 대연림 반란을 계기로 동경지역에 계속되었던 발해인 중심의 지방조직이 해체되고 東 丹國이 漢人관료체제로 흡수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는 논의도 있다(高井康典行, 渤海 と藩鎭 :遼代地方統治の硏究, 汲古書院, 2016, 39~41쪽).

29) 耶律宗福과 韓橁 묘지에는 반란 시작이 모두 태평 8년(1028)으로 되어있다(정나영, 주 17)의 논문, 304쪽). 이를 바탕으로 실제 반란 시작 시점은 묘지 기록을 따라야 한다 고 보기도 하고(王利华・王青煜・李宇峰, 「辽《耶律宗福墓志》校勘补述」, 辽金历史与考古 第 1輯, 辽宁教育出版社, 2011, 309쪽), 遼史가 오기임을 지적하면서도 반란 시점에 대해 서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澤本光弘, 「燕雲地域の漢人と滅亡以降の渤海人- 「陳万墓誌」 「耶律宗福墓誌」 「高爲裘墓誌」など遼代石刻をてがかり」, 渤海の古城と国際交流, 勉 誠出版, 2021, 77쪽). 그러나 대거란 사행이 1028년 연말에도 행해진 점을 볼 때(高麗 史 권5, 세가5, 현종 19년 11월 癸卯), 반란 세력이 이때까지 동경을 완전히 점거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사절은 대거란 사행에서 동경을 거쳐 황제가 있는 최종 목적지로 향했기 때문이다(정나영, 주 2)의 논문, 163쪽). 이를 바탕으로 할 때 묘지에서 언급 된 태평 8년(1028)은 대연림이 반거란 세력을 형성하고 확대해갔던 시점을 기준으로 작성되었고, 遼史는 이들 세력이 동경을 점령하고 흥요국을 건국한 시점을 준거로 반란 시작을 태평 9년(1029)으로 기록했다고 짐작된다.

30) 황룡부는 북쪽으로 여진의 본거지와 이어지고, 남쪽으로 거란 각 지역과 연결되는 군 사와 정치, 경제적 요충지였다(윤은숙, 「元代 滿洲지역의 주요 교통로와 중심 거점- 만주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82, 2022, 40쪽).

31) 遼史 권17, 본기17, 성종 태평 9년 8월 己丑.

32) 高麗史 권5, 세가5, 현종 20년 9월 戊午; 12월 庚寅; 21년 1월 丙寅; 7월 乙丑.

반거란 세력을 규합,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들 지역이 반란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33) 이처럼 흥요국이 東京道 지역을 넘어 고려와도 교섭을 시도하는 모습은 주변 지역에도 거 란의 통치력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흥요국 반란은 1030년 8월 대연림이 붙잡히면서 진압되었다.34)

고려는 흥요국의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고 반란 진압 후에는 서둘러 거란에 동 경 수복 축하 사절을 보내며35) 이전과 같이 거란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해 고려가 현종 12년(1021) 이후 처음으로 송에 사절을 파견한 사례가36) 눈에 띈다.

사행의 정확한 시기와 의도를 알기 어려우나 이전 의 사례를 참고하면 이례적인 대송 사행은 거란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 다.37)

33) 당시 郭元은 다른 관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동쪽 지역에 출병하였으나 이곳 을 탈환하지는 못하였다(高麗史 권94, 열전7, 郭元). 이러한 곽원의 움직임은 조정의 동의하에 가능한 것이었다(허인욱, 주 16)의 논문, 101쪽). 그러나 고려는 흥요국의 거듭된 원병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북방 변경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의론을 정하였다 (高麗史節要 권5, 현종 20년 12월).

34) 遼史 권17, 본기17, 성종 태평 10년 8월 丙午.

35) 高麗史 권5, 세가5, 현종 21년 9월 甲戌.

36) 宋史 권487, 외국3, 고려, 인종 천성 8년. 고려는 현종 12년(1021) 거란과의 외교 재 개를 알리는 사절을 송에 보냈고(高麗史 권4, 세가4, 현종 12년 6월 丁卯; 宋史 권 487, 외국3, 고려, 진종 천희 5년), 이후에는 사절을 파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37) 고려는 현종 5년(1014) 대거란 사행을 중단하면서 송에 사절을 보내 이전과 같이 歸 附할 뜻을 밝혔고(高麗史 권4, 세가4, 현종 5년 8월 甲子), 거란과 관계를 회복하자 이듬해 송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宋史 권487, 외국3, 고려, 眞宗 天禧 5년) 이후에는 사절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처럼 고려의 대송 사행은 고려-거란 관계와 밀 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는 고려가 당시 거란의 정세와 관련해 여러 외교 전략을 고심하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반란 직후 양국이 대립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반란 기 간부터 시작된 발해나 거란, 奚人의 고려 내투가 이후에도 계속되면서 국 경 부근의 혼란은 이어지고 있었다.

반란 중이었던 1030년 5월부터 水軍 指麾使・虎騎尉 大道李卿을 비롯해 來附하는 거란인과 발해인이 매우 많았는데,38) 내투는 덕종 연간(1031-1034)에도 계속되었다.39)

대규모 인원이 오지는 않았으나 이들 중에는 監門軍과 押司官, 主簿 등 관직이 있는 인물 이 있었고, 수군지휘사를 비롯해 渤海監門軍, 渤海諸軍判官, 左廂都指揮使, 保州懷化軍事判官과 같이 군인이 왔던 사례도 여러 차례 있었다.40)

이들 관직명이 사료에서 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소속과 임무를 상세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경도에 설치된 군사기구를 살펴보면, 당시 국경 인근의 상황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거란의 동경도에는 군사업무를 총괄했던 東京兵馬都部署司 아래 渤海軍 都指揮使司가 있었다.41)

발해군의 경우42) 전쟁이 일어났을 때 관료들이 각 지역 군사를 징집하면서도 이들은 감히 동원하지 못하고 황제에게 아 뢰어야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43)

특히 이중 상당수는 보주 부근에서 국경 방어를 담당하였고,44) 보주 來遠縣에는 해인과 한인 군사 7백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45)

또 덕종 원년(1032)에는 보주회화군사판관 崔運符가 고려에 來奔하였는데,46) 직명에서 볼 때 그는 보주 지역에서 군 사 관련 관직을 지닌 인물이었다.47)

38) 高麗史 권5, 현종 21년 5월 乙丑, “契丹水軍指麾使・虎騎尉大道李卿等六人來投. 自是, 契 丹・渤海人來附甚衆.”

39) 당시 송과 거란에서 고려로 온 사례는 다음의 책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바른, 고려 시대 외국인 이주 연구, 高大民族文化硏究院, 2022, 122~123쪽.

40)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즉위년 7월 丁卯; 己巳; 원년 3월 癸酉; 10월 丙午; 壬子; 丙 寅; 2년 5월 癸巳. 41) 遼史 권46, 지16, 백관지2.

42) 발해군은 거란의 중요한 군사자원이었으나, 때로는 통치를 위협하는 불안요소가 되 었다(孙炜冉, 「辽代军队中的渤海军人」, 黑龙江社会科学 第4期, 2018, 151~152쪽).

43) 林鵠, 遼史百官志考訂, 中華書局, 2015, 126쪽.

44) 이는 반란 당시 대연림이 보주에 주둔하고 있던 渤海太保 夏行美에게 반란에 동조할 것을 권하자 하행미는 統軍 耶律蒲古에게 보고했고, 야율포고가 발해군 800명을 죽이 고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차단했던 사례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遼史 권17, 본기17, 성종 태평 9년 8월 己丑).

45) 遼史 권38, 지8, 지리지 2, 동경도.

46)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원년 3월 癸酉.

47) 회화군은 개태 3년(1014) 설치되었던 보주 소속 군의 하나로 刺史가 있었는데(遼史 권38, 지8, 지리지 2, 동경도), 군사판관은 節度州에 설치된 관직이었다는 점에서 회화 군이 아니라 절도사가 있었던 보주 宣義軍에 있었을 수 있다.

이렇게 발해군의 역할과 동경도 군사기구 및 병력 배치 사정을 참고하면, 반란이 진압된 후 고려에 온 발해 인과 해인은 양국 국경 부근이나 동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거란군 소속이 었다가 이탈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48)

이외에도 덕종 원년(1032)과 2년(1033)에는 평소보다 西女眞이 고려로 來 朝하거나 來獻한 사례가 많았다. 서여진의 내조는 1020년대 매년 1~2차례 있었는데, 1033년에는 고려로 내조하거나 내헌한 경우가 7회에 이르고 있어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49)

고려에서 서여진으로 불리는 여진 부족은 鴨 綠江女眞이나 曷蘇館女眞, 濱海女眞과 같이 거란에 편입된 숙여진으로50) 평 소 이들은 동여진보다 고려-거란 관계나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 다.51)

48) 당시 거란에서 고려로 온 인물은 반란에 호응했던 세력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바른, 주 39)의 책, 133쪽).

49) 추명엽, 주 14)의 논문, 299~305쪽.

50) 나영남, 「고려의 동・서여진의 관계」, 역사학연구 67, 2017, 222쪽.

51) 현종 원년(1010)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서여진은 향도 역할을 하였고 현종 8 년(1017)까지는 서여진의 내조나 내헌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가 龜州에 서 거란에 대승을 거둔 뒤 행해진 대송 사행에는 서여진 수령이 동행했을 정도로(추 명엽, 주 14)의 논문, 241~243쪽)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보였다.

따라서 이때 서여진이 고려로 자주 내조나 내헌한 사실은 양국 관계 나 국경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반란 진압 후에도 거란의 통제가 동남부 지역과 고려와의 국경 인근까지 효과적으로 이루어 지지 못하였고 불안정한 국경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2) 거란 聖宗의 죽음

대연림 반란 이후 국경 지역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거란 성종의 죽음과 흥종의 즉위는 갈등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란에서 성종이 죽고 새롭게 흥종이 즉위하자 고려가 서둘러 요구사항을 전달했고, 거란이 이를 거절하자 사절 파견을 중지하며 관계 가 경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란의 성종은 乾亨 4년(982) 穆宗에 이어 12살에 즉위해 태평 11년(1031) 까지 50년 가까이 재위하며 내부적으로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으 로는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거란의 전성기를 이 끌었던 황제였다.52)

거란의 고려 침략과 양국 간 공식 관계 수립이 모두 성종 재위 동안 이루어졌으므로 성종은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인 물이었다.

양국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성종은 한편으로 보 주를 점령한 후 이곳에 漢人을 이주시켜 압록강 동쪽에서 거란의 영향력 을 확대하고53) 현종 원년(1010) 거란에 파견되었던 사신을 억류하며54) 고려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현종 11년(1020)에는 이러한 현안이 해결되지 않은 채 외교가 정상화되었는데,55) 성종의 죽음 이후 이와 관련해 고려의 변화가 확인된다.

A-1. [덕종 즉위년(1031)] 工部郞中 柳喬를 거란에 보내 (황제의) 장례에 참석 하게 하고, 郞中 金行恭을 보내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게 하였다.

그 리고 表를 올려 압록강 지역 城橋를 허물고 억류된 사절[被留行人]을 귀 국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56)

52) 이계지, 나영남・조복현, 요・금의 역사, 신서원, 2014, 81~96쪽.

53) 거란은 개태 3년(1014) 보주와 定州를 점령하였고, 한인을 옮겨 宣州를 설치한 후 이 를 보주에 예속시켰다(遼史 권38, 지8, 지리지 2, 동경도).

54) 현종 원년(1010) 2차 전쟁이 일어나기 전 거란에 파견된 사절 중 정사 혹은 부사에 해당하는 8명은 억류되어 고려로 귀국하지 못하였다(李美智, 「고려 현종대 거란의 사 신 억류 사건과 對거란 강경책의 입안」, 사학연구 151, 2023, 62~63쪽).

55) 내부적으로 억류된 사신의 가족을 구휼하거나 이들 자제를 임용하며 위로하였다(高 麗史 권4, 세가4, 현종 11년 2월 甲辰). 그러나 거란과의 관계에서 이와 관련한 별다 른 언급은 보이지 않고, 고려는 이전과 같이 藩이라 칭하며 공물을 바치겠다[請稱藩納 貢如故]고 하며 화의를 요청하였다(高麗史 권4, 세가4, 현종 11년 2월).

56)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즉위년 10월, “遣工部郞中柳喬如契丹會葬, 郞中金行恭賀卽位. 表請毁鴨綠城橋, 歸我被留行人.”

A-2. [덕종 즉위년(1031)] 김행공이 거란에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거란이 아 뢴 바를 따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平章事 徐訥 등 29인은 (거란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사절을 보내지[通使] 말아야 한다고 하였고, 中樞使 皇甫兪義 등 33인은 만약 교류를 중단하면 그 해는 반드 시 백성에게 미칠 것이니 (이는) 우호를 계속하며 백성을 쉬게 하는 것 만 못하다고 하였다.

왕은 서눌과 왕가도의 의론에 따라 賀正使 파견을 중지하였으나, 성종의 태평 연호는 사용하였다.57)

사료 A는 덕종 즉위년(1031) 사행 때 고려가 표문을 올려 압록강 지역 에 설치된 시설을 철거하고 억류된 사신을 귀국시켜 줄 것을 거란에 요 청했고,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상황을 보여준다.

성종이 1031년 6월 붕어하자 거란에서는 이를 알리는 報哀使가 7월에 고려에 도 착했고,58) 고려는 그해 10월 성종의 장례에 참석하고 흥종의 즉위를 축하 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면서 위의 두 가지 요구를 거란에 전하였다.

57) 高麗史節要 권3, 현종 22년 11월, “金行恭還自契丹, 言不從所奏. 平章事徐訥等二十九人議, 告請不聽, 宜勿通使. 中樞使皇甫兪義等三十三人議, 若絶交, 其害必至勞民, 不如繼好息民. 王從 訥及王可道議, 停賀正使, 仍用聖宗大平年號.”

58) 遼史 권17, 본기17, 성종 태평 11년 6월 己卯;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즉위년 7월 己未. 총 68집

그 러나 거란이 고려의 요청을 거절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과 사행을 지 속해야 하는지를 논의하였는데, 다수는 교섭을 이어가자고 했으나 덕종은 서눌 등의 의견에 따라 사절 파견 중단을 결정하였다.

즉, 고려는 요구가 수용되지 않자 교섭을 중단하며 강경하게 대응하기로 했고 이는 양국 관 계가 일시적으로 단절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고려가 보낸 사신이 1010년부터 21년째 거란에 억류되 었고 보주가 점령된 지도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고려는 1020년부터 거 란과 교섭을 이어왔는데 왜 이때가 되어서 이 문제를 언급했을까.

여기에는 성종 말기 대연림 반란이나 국경 지역 혼란으로 거란의 통치가 전반 적으로 이완된 모습을 보였던 점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고려를 견제했던 성종이 죽고 거란에서 흠애황후가 정변을 일으 키며 정국을 주도하자59) 고려는 대고려 정책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며60) 위와 같은 요구를 전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이 시기는 고려에서도 왕위가 교체된 상황이었다.

康兆가 穆宗을 시해한 후 옹립되었던 현종은 거란의 침략으로 나주까지 몽진했다가 다 시 거란과 외교를 정상화하며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해 5월 훙서하였고 현종의 뒤를 이어 덕종이 즉위하였다.61)

현종은 거란이 보주 를 점령하자 대거란 사행을 중단하고 송에 사절을 파견하며 거란을 외교 적으로 압박하고62) 龜州에서와 같이 군사적으로도 승리를 거두었다.

거란 도 親朝나 강동 6주 반환과 같은 요구를 관철하지 못했고 큰 패배도 경험 하며 고려와의 관계에서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양국이 관계를 회복한 후 영토나 억류 사신과 같은 문제는 현 종 재위 동안 공식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고 짐작된다.

현종은 재위 후반 기 궁이나 羅城 등 각종 시설을 정비하고 국왕의 권위와 관련된 禁令을 제정하며 국왕을 정점으로 한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노력했으므로,63) 양국 간 갈등을 일으키거나 국정을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은 언급하지 않 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59) 흠애황후는 성종이 죽고 며칠 후에 부마 蕭匹敵 등을 죽이고 齊天皇后를 上京에 유폐 시키며 정권을 장악하였다(遼史 권18, 본기18, 흥종 태평 11년 6월 辛丑).

60) 遼史에는 고려의 위문 사절이 7월에 도착했다고 되어있다(遼史 권18, 본기18, 흥 종 태평 11년 7월). 7월 초 황태후가 황족을 이끌고 성종의 빈소인 太平殿 앞에서 곡 하는 의식을 주관할 만큼 국정을 장악했으므로(古松崇志, 「契丹皇帝の喪葬儀礼-聖宗文 殊奴の喪葬儀礼と慶陵埋葬を中心に-」, 遼文化慶陵一帯調査報告書, 京都大学大学院文学研究 科, 2011, 8쪽), 이러한 거란 내부 사정은 고려에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61) 高麗史 권5, 세가5, 현종 22년 5월 辛未.

62) 정나영, 주 2)의 논문, 196쪽.

63) 임지원, 「고려 현종의 국정운영 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2, 180~186쪽.

덕종이 즉위했을 때는 이미 10년 동안 거란과의 외교가 안정적으로 이 루어지고 있었고, 덕종은 왕태자 시절 이미 거란의 책봉을 받아 후계자로 공인받았으므로64) 현종과 비교할 때 훨씬 권위가 강화된 상황에서 즉위 하였다.65)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양국 관계에서 묵인되었던 압록강 동쪽 시설물과 억류 사신 송환 문제는 보주 점령과 사신 억류를 고수했던 성 종과 거란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피하고자 했던 현종의 죽음이 맞물리면 서 공론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1031년 10월 대거란 사행 전 왕가도가 거란은 우호를 맺고 있으나 매번 고려를 병탄할 뜻이 있다고 하며 거란 의 정변을 이용해 요구를 전달하자고 주장했던 것처럼,66) 양국 관계에 대 한 고려 내부의 우려나 불만이 이때 표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4) 高麗史 권5, 세가5, 현종 14년 4월 庚子.

65) 현종 재위 東宮官 설치를 주도하고 동궁관직에 임명되어 태자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 던 蔡忠順과 柳韶, 黃周亮, 崔齊顔, 崔士威, 왕가도 등이 덕종 시기에도 宰樞로 활약했던 점에서 볼 때(金昌謙, 「고려 顯宗代 東宮官 설치」, 韓國史學報 33, 2008, 154~162쪽), 덕종 즉위 후 고려 내부의 정치 주도세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66) 高麗史 권94, 열전7, 王可道, “時遣工部郞中柳喬・郞中金行恭, 如契丹會葬, 且賀卽位, 可道 奏, ‘契丹與我通好交贄, 然每有幷呑之志. 今其主殂, 駙馬匹梯, 叛據東京, 宜乘此時, 請毁鴨綠城 橋, 歸所留我行人. 若不聽, 可與之絶.’乃附表請之, 契丹不從.” 을 보내지 않았고,이후 사절 교류가 중단되면서 양국은 대립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3. 양국 관계의 변화

1) 관계 단절과 국경 강화

고려는 대연림 반란이 진압되고 국경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빠르게 사행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덕종 즉위년(1031) 연말부터 거란에 사절을 보내지 않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는데, 사료 A-2에서 보면 덕종은 하정사 파견을 중지하면서도 거란 전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정하였다.67)

이 를 통해 고려는 중요한 외교 규범인 사행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양국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68)

이렇게 고려가 거란을 압박하면서도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며 외교 대상 을 바꾸지 않았던 배경에는 현종 21년(1030)의 대송 사행이 영향을 주었 다고 생각된다.

이때 사절은 이듬해 고려로 귀국하였는데,69) 당시 고려는 거란의 통치가 이완된 상황에서 송의 의중을 살피고자 사절을 보냈을 가 능성이 크다.

하지만 송이 고려와의 관계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자 고려는 거란과의 공식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요 구를 전하며 강경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택했을 수 있다.70)

67) 전 황제의 연호 사용은 새롭게 즉위한 흥종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려는 고려의 행위 로도 이해된다(허인욱, 주 16)의 논문, 86쪽).

68) 이미지, 주 9)의 책, 201쪽.

69) 고려는 元穎 등 293명의 사절을 송에 파견하였다(宋史 권487, 외국3, 고려, 인종 천 성 8년).

70) 정나영, 주 2)의 논문, 40쪽

이후 덕종 시기를 중심으로 고려와 거란의 대응은 아래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B-1. [덕종 원년(1032)] 거란이 遺留使를 보내 (이들이) 來遠城에 이르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내 朔州와 寧仁鎭, 派川縣 등에 성을 쌓아 (변란 에) 대비하였다.71)

B-2. [덕종 원년(1032)] 李禮均 등 8인이 거란에 사절로 갔다가 억류되어 돌 아오지 못하였으니, 妻子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72)

B-3. [덕종 2년(1033)] 平章事 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에 關城을 짓게 하였다.73)

B-4. [덕종 2년(1033)] 거란이 靜州를 침략하였다.74)

71)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원년 1월 乙酉, “契丹遺留使, 來至來遠城, 不納. 遂城朔州・寧仁 鎭・派川等縣, 備之.”

72)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원년 7월 壬申, “以李禮均等八人, 使於契丹, 被留不還, 賜妻子物 有差.”

73)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2년 8월, “命平章事柳韶, 創置北境關城.”

74)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2년 10월 丁未, “契丹侵靜州”

 

B-1에서 보이듯이 고려는 덕종 원년(1032)부터 거란이 파견한 사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란은 의례에 따라 성종의 장례 후 유류사를 고려에 보냈는데, 고려는 사절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행 중단과 이전 황제 연호 사용이 고려 내부적인 결정이었다면 거란 사절의 입국을 막은 것은 거란에 대한 고려의 강경한 태도를 외부적으로 공식화한 행동이었다.

이해 7월에는 B-2에서처럼 이예균 등 거란에 억류된 사신의 처자에게 물품을 지급하며 이들을 위로하였다.

억류된 관리의 가족에 대한 위무는 1020년 2월에 행해졌다가 10여 년이 지나 이때 다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는 당시 고려의 대거란 강경책을 의식한 정치・외교적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75)

고려는 B-3과 같이 북쪽 변경에서부터 장성을 축조하였다.

덕종 원년 (1032)에도 고려는 革車나 八牛弩 등의 각종 병기를 변방의 성곽에 설치하 며 국경 강화 움직임을 보였는데,76)

이듬해부터는 장성을 세우기 시작하 였다.

이는 기존에 쌓은 城이나 鎭을 연결하는 작업으로,77) 천리장성 축 조는 이때 시작되어 정종 10년(1044)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는 주요 지점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기존방식에서 나아가 국경 전체를 성벽으로 막는 방 어체계의 변화를 의미하였다.78)

75) 거란에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고려는 내부 단결을 위해 고려-거란 전쟁 전사자들을 贈職하고 억류 관리의 가족을 위로하였다(허인욱, 주 16)의 논문, 88쪽).

76) 高麗史 권81, 병 1; 高麗史節要 권4, 덕종 1년 10월.

77) 김용선・이기백, 高麗史 병지 역주, 일조각, 2011, 322쪽 각주 1384번.

78) 양시은, 「고려시대 전기 서북한지역의 관방체계」, 한국중세사연구 64, 2021, 82~85 쪽.

여기에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고 고려가 확보한 영역을 바탕으로 국경 방어선을 형성하려는 의도와79) 함께 당 시 국경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서북 변방을 안정적으로 경영하려는 목적 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고려는 정주를 새롭게 설치해 보주를 압박하는 거점 으로 삼으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80)

정주는 덕종 2년(1033)에 설치되 었고 이곳에는 1000호를 이주시켜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며, 이후에도 100 호가 더 옮겨졌다.81)

고려가 장성을 축조하고 새로운 지역을 설치하자 거란은 B-4에서처럼 그해 10월 정주를 공격하였다.

당시 거란 공격은 전 쟁으로 확대될 만큼 대규모 충돌은 아니었고, 고려를 위협하면서 추가 축 성에 대해 경고하고 또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82)

11월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서여진 156인의 공로를 인정하 며 포상하였는데,83) 이러한 서여진의 참여는 고려의 서북 변경 안정에 도 움이 되었을 것이다.

대거란 사행 중단과 거란 사절의 입국 거부는 중요한 외교 사안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장성 축조가 시작된 후 거란이 정주를 침략한 사 실은 장성 축조를 통한 국경 강화가 양국 관계에서 얼마나 민감한 사안 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84)

79) 윤경진, 「고려 현종말-문종초 北界 州鎭 설치와 長城 축조」, 軍史 79, 2011, 279쪽.

80) 윤경진, 주 79)의 논문, 297~298쪽.

81) 高麗史 권58, 지12, 지리 3. 주진군의 규모도 北界에서 郭州와 龍州, 嘉州에 이어 네 번째로 그 수가 많아(신안식, 「고려시대 兩界의 성곽과 그 특징」, 軍史 66, 2008, 11 쪽) 배치된 주진군도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많았음을 알 수 있다.

82) 허인욱, 주 16)의 논문, 89쪽.

83)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2년 11월 辛卯.

84) 송-거란 간 체결된 澶淵의 盟을 바탕으로 고려와 거란 사이에 존재한 완충지대, 즉 境 界帶의 운용 규정을 살펴보면 기존에 설치된 성곽은 인정하되 새로운 성이나 해자와 같은 시설의 설치는 금지한다는 항목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허인욱, 「고려・거란의 境界帶 변화와 그 운용에 관한 연구」, 歷史學硏究 52, 2013, 288~289쪽).

그리고 사행을 중단하며 본격화된 갈등은 고 려의 축성으로 한층 더 고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주 침략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에 대응했던 정황이 보이지 않는데,85) 이는 당시 변경지역 통 제나 대고려 외교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과 관계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반란 기간과 이후에도 거란에서 고려로 내투가 이 어졌고 서여진이 고려로 내조하거나 내헌하는 경우가 평소보다 많았다.

그리고 성종 사후에는 흠애황후가 흥종을 대신해 섭정하는 동안 많은 공 신을 죽이고 그 형제와 집안의 노비가 많은 관직을 차지하면서86) 정사가 제대로 행해지기 어려웠다.

제천황후가 무고를 입었을 때 억울함을 호소 하며 황태후 세력에 항의했던 蕭普古를 중앙에서 몰아내고자 중희 3년 (1034) 동경유수로 임명했던 사례를 보면,87) 거란은 동남부지역 통치나 고려와 관련된 사안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85) 거란은 1031년 5월에서 1033년 이전에 고려 공격을 위해 송에 원병을 요청한 적이 있다(허인욱, 주 16)의 논문, 89~90쪽). 하지만 덕종 재위 동안 정주 공격 외 고려에 직접 대응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86) 황태후 집안의 노비로 團練使와 防禦使, 觀察使, 節度使 등 지방 장관을 맡은 인물이 40 명에 달하였다(契丹國志 권8, 興宗文成皇帝).

87) 遼史 권18, 본기18, 흥종 중희 3년 2월 壬辰; 권80, 열전10, 蕭朴.

따라서 국 경 방비나 외교 정책이 제대로 수립되거나 시행되기 어려웠고, 고려는 이 러한 상황을 이용해 교섭을 중지하고 장성을 축조하며 변경지역 강화를 시도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란의 정주 침략과 같이 고려의 국경 강화 움직임은 양국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 교섭과 외교 재개

덕종 3년(1034, 흥종 중희 3년)의 경우 양국 간 외교 양상은 보이지 않 지만, 이해 고려에서는 덕종 사후 정종이 즉위하고88) 거란에서는 흥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89)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88) 高麗史 권5, 세가5, 덕종 3년 9월 癸卯.

89) 遼史 권18, 본기18, 흥종 중희 3년 5월; 7월 戊子. 흥종 재위 여러 제도의 변화는 아 래의 글이 참고된다. 洪性珉, 「宋增弊交涉から見た遼の內部政勢と対宋外交戦略」, 史學雜誌 126(11), 2017.

이러한 내부 변화 속에서 양국은 이듬해 정종 원년(1035) 5월 사행 중 단 이후 처음으로 교섭하였다. 교섭을 먼저 시도한 쪽은 거란이었다.

이 때 거란은 來遠城에서 문서를 보내 고려가 여러 해에 걸쳐 사절을 보내지 않은 점과 축성한 사실을 추궁하고, 황제가 격노한다면 백성들이 편안하 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다소 위협적인 태도로 외교 재개를 요구하였다.90)

거란은 즉위 때부터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덕종이 죽고 새롭게 정종이 즉위하자 그동안 고려의 행위를 명시하고 또 위협하면서 관계 회복을 꾀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려는 이내 다음 달 6월 寧德鎭에서 회신하여 거란의 지적에 조목별로 반박하고 축성은 변방 지역 안정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억류 된 관리 6명의 송환과 압록강 동쪽 지역 반환을 요구하였다.

특히 고려의 요구를 달리 요청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고 그 해결은 황제에게 달려있다고 하며,91) 갈등의 원인이 거란에 있음을 분명 히 하였다.

90) 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원년 5월 甲辰, “契丹來遠城使檢校右散騎常侍安署, 牒興化鎭曰, ‘竊以當郡, 最近仁封, 有小便宜, 須至披達. 載念貴國, 元爲附庸, 先帝每賜優洽, 積有歲月, 靡倦 梯航. 昨因伐罪之年, 致阻來庭之禮. 旣剪除於兇逆, 合繼續於貢輸, 曷越數年, 不尋舊好, 累石城 而擬遮大路, 竪木寨而欲礙奇兵? 不知蜀國之中, 別有石牛之徑, 擧是後也, 深取誚焉. 今皇上紹累 聖之基坰, 統八方之國界, 南夏帝主, 永慕義以通歡, 西土諸王, 長向風而納款. 唯獨東溟之域, 未 賓北極之尊, 或激怒於雷霆, 何安寧於黎庶? 其於違允, 自有變通.’”

91) 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원년 6월, “是月, 寧德鎭廻牒契丹來遠城云, ‘竊以公文聿至, 備見 親仁. 責諭頗多, 固須宣剖, 略言一槩, 無至多譚. 其來示云, … 昨緣梯航, 六使被勒留於上國之 中. 宣・定兩城, 致入築於我彊之內, 未蒙還復, 方切禱祈. 幸遇皇帝陛下, 啓運惟新, 與民更始, 天上之汪洋四洽, 日邊之章奏尋陳. 乞放行人, 倂歸侵地, 無由得請, 以至于今. 倘兪慤實之誠, 敢 怠樂輸之禮? 祗在恩命, 何煩責言? 又云‘或激怒於雷霆, 何安寧於黎庶者.’ 伏想今皇上, 字小情深, 聽卑道廣, 乃睠寅賓之域, 必加推置之恩, 於我無辜, 有何憑怒? 細詳來誨, 似涉戱言.’”

거란이 먼저 교섭을 시도한 만큼 여기에는 거란에 외교적 부 담을 지워 고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 후 거란의 대응이 없었으므로 고려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봐 도 무방하다.

이처럼 정종이 즉위하고 흥종이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양국간 교섭은 있었으나 갈등은 크게 해소되지 못하였다.

이후 양국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외교 재개 전까지의 상황은 아래의 기록을 통해 추정해보고자 한다.

C-1. [정종 원년(1035)] 이달에 서북로 松嶺 동쪽으로 長城을 쌓아 변방 적과 의 충돌을 막고자 하였다. 또한, 梓田에 성을 쌓고 徙民하여 이곳을 채웠 으며 昌州라 불렀다.92)

C-2. [정종 2년(1036)] 이달에 進奉兼告奏使 尙書右丞 金元冲이 송에 가다 瓮津 에 이르러 배가 파손되어 돌아왔다.93)

C-3. [정종 3년(1037)] 이달에 거란의 내원성에서 황제의 宣旨를 받들어 寧德 鎭에 첩을 보내 이르기를, “고려는 일찍이 공물 진헌에 힘썼는데 근래에 이르러 점차 (이를) 지체하고 빠뜨린다고 들었다. 職貢을 계속 닦고 싶다 면 먼저 表章을 올려야 할 것이며, 진실로 성의가 검증되면 별도로 명령 을 반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門下侍中 서눌 등 14인이 의논하며 아뢰 기를 “마땅히 사절을 보내 告奏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94)

C-4. [정종 3년(1037)] 西北路兵馬使가 아뢰기를, “거란이 船兵으로 압록강을 침략하였다”고 하였다.95)

C-5. [정종 5년(1039)] 戶部郞中 庾先을 보내 위무에 사례하고, 압록강 동쪽에 증축한 城堡를 철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96)

92) 高麗史節要 권4, 정종 원년 9월, “築長城於西北路松嶺迤東, 以扼邊寇之衝. 又城梓田, 徙民 實之, 號昌州”.

93) 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2년 7월, “是月, 進奉兼告奏使尙書右丞金元冲, 如宋, 至瓮津, 船 敗而還.”

94) 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3년 9월. “是月, 契丹來遠城奉皇帝宣旨, 牒寧德鎭曰, ‘高麗之國, 早務傾輸, 近歲以來, 稍聞稽闕. 欲載修於職貢, 合先上於表章, 苟驗實誠, 別頒兪命.’ 門下侍中徐 訥等十四人議奏曰, ‘宜遣使告奏.’”

95) 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3년 10월, “西北路兵馬使奏, ‘契丹以船兵, 侵鴨綠江.’”

96) 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5년 2월, “遣戶部郞中庾先, 謝安撫, 仍請罷鴨江東加築城堡.”

고려는 C-1에서처럼 거란과 한 차례 첩을 주고받은 후 그해 9월부터 서북로 송령 동쪽으로 장성을 쌓고 창주를 새로 설치하였다.

고려는 6월 거란에 답문을 보냈는데, 고려의 요구에 대해 거란의 반응이 없자 국경을 강화하며 기존과 같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장성은 송 령 동쪽으로 연장되었는데, 이는 거란이 보주보다 더 상류에서 압록강을 건넌 후 내륙으로 우회해 고려를 침략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97)

즉, 장성 연장을 통해 거란과 서북 국경에 대한 방비가 한층 보강되었다 고 볼 수 있다. C-2는 고려가 정종 2년(1036) 송에 사절 파견을 시도했던 정황을 보여 준다.

김원충은 옹진까지 갔다가 배가 파손되어 고려로 돌아왔고 송에 이 르지 못하였다.

고려의 대송 사행은 거란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사안으 로, 당시 고려가 거란과 교류를 중단한 상황에서 송에 사절을 보냈던 점 은 양국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이때 고려가 갑자기 송에 사절을 보낸 일은 고려-거란 관계와 무관하지 않으며 송과 적극적으 로 관계 형성을 모색하거나 접촉을 시도해야 할 사정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겠다.

고려는 송에 사절 파견을 시도한 후 같은 해 7월 거란과의 전쟁 때 전 사한 康承穎을 추증하고 그 아들에게 初職을 제수하였다.98)

고려-거란 전 쟁이 끝나고 있었던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은 항쟁의식을 강조하기보다 주로 왕조에 대한 충성을 장려하고 국왕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이 컸고, 거란과의 관계를 의식하거나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 에서도 행해졌다.99)

97) 윤경진, 주 79)의 논문, 299~300쪽.

98) 高麗史節要 권4, 정종 2년 7월, “制曰, ‘乙卯歲, 契丹犯邊, 康承穎爲先鋒戰死, 厥功可念. 其贈軍器少監, 其子和, 授初職.’” 강승영은 현종 6년(1015) 전사했고 이듬해 관작이 太史 令으로 추증되었다(高麗史 권4, 세가4, 현종 6년 9월 癸亥; 7년 1월 乙卯).

99) 이미지, 「고려시기 對거란 2차 전쟁 유공자와 그들에 대한 추가 포상」, 韓國史硏究 157, 2012, 61~66쪽.

이를 참고하면 강승영에 대한 추증이 20년 만에 다 시 이루어진 데에는 거란과의 갈등 속에서 위기의식을 고취하고 내부 결속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정종이 즉위하고 두 해가 지나서도 양국 간 대립 국면은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C-3에서 보면 거란이 정종 3년(1037) 고려에 다시 첩을 보내 관 계 회복을 요구하자 고려 조정이 이를 받아들였던 모습이 확인된다.

이전 보다 거란의 태도는 위협적이지 않았고 이때 서눌을 비롯한 관료들은 사 행이 재개되어야 할 것을 아뢰었다.

특히 문하시중이었던 서눌은 앞서 A-2에서 거란이 고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사절을 파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었다.100)

고려의 요청은 여전히 수용되지 않 았던 상황이었으나 서눌은 태도를 바꾸어 사행 재개를 내세웠다.

한편 C-4는 정종 3년(1037) 거란의 수군이 압록강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다. 거란의 공격은 첩이 도착하고 고려가 사행 재개를 정한 다음 달에 이 루어졌다.

여기서는 거란이 병선으로 고려를 공격했다는 점이 주목되는 데, 이처럼 수군을 이용한 고려 침략은 이전 시기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 다.

거란은 보병과 기병을 주력으로 하였으나 송과의 전투에 수군이 참여 한 적이 있고, 수군은 점차 발달해 중희 15년(1046) 서하와의 전쟁에서도 활약하였다.101)

그런데 이때 거란이 평소와 달리 수군을 활용한 데에는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마지막으로 C-5는 외교가 재개된 후 정종 5년(1039) 고려가 거란에 사 절을 파견할 때, 거란이 압록강에 추가로 설치한 성보의 철거를 요청했던 모습이다.

당시 서눌은 예전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보를 추가로 설치 했는데 이제 다시 양국이 화친했으니 이들 시설의 철거를 요구하자고 건 의하였다.102)

100) 서눌은 왕가도와 유소, 金猛 등과 더불어 현종 시기부터 거란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견지했으며 덕종 즉위년 거란과의 단교를 주도한 정치세력으로 이해된다(박종기, 주 14)의 논문, 156~159쪽).

101) 刘一, 「略论辽朝辽东半岛海防」, 辽宁师范学院学报 第2期, 2017, 40쪽.

102) 高麗史節要 권4, 정종 5년 2월, “遣殿中監李成功如契丹, 獻方物, 戶部郞中庾先, 謝安撫. 判都兵馬事門下侍中徐訥言, ‘往年, 契丹欲於鴨江東加築城堡. 今復和親, 可因庾先附表, 請罷.’ 從之.” 위의 C-5나 4월 거란이 답서에서 성은 선제를 따라 설치했다고 한 점을 고려 할 때(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5년 4월, “庾先還自契丹, 詔曰, ‘省所告鴨江東城壁, 似妨 耕鑿事具悉. 乃睠聯城, 置從先廟, 盖邊隅之常備, 在疆土以何傷?’”), 당시 압록강 동쪽에 성 보가 더 설치된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欲”의 뜻을 “탐내다” 혹은 “탐욕 을 부리다”로 보고(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編, 漢韓大辭典 7, 檀國大學校 出版部, 2004, 727쪽) 서희가 언급했을 때 이미 성보가 증축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거란은 성보가 일상적인 변방 방비를 목적으로 세워졌다고하며 고려의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103) 이 기록은 양국 관계가 단 절되었던 어느 시기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추가로 시설을 설치했던 사실 을 알려준다.104)

그러면 고려는 어떤 배경에서 갑자기 송에 사절을 보냈고 이듬해에는 현안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거란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을까.

사료에 서 보이는 양국의 움직임과 기존 연구를 검토했을 때, 당시 거란에서도 국경 주변에 시설물을 세워 방어를 강화했고 특히 이때 고려 방어만을 담당하는 군사기구인 保州(都)統軍司가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한다.105)

보주 도통군사는 동경도의 군사기구 중 하나로 여기에는 太子營과 蒲州營, 大營 등 8개 군영이 있었으며106) 군영에는 고려 방어를 위한 전함도 배치되어 있었다.107)

蕭十三과 耶律寧과 같이 保州統軍使로 임명된 인물도 확인할 수 있으므로108) 보주도통군사가 존재했던 사실은 분명하다.

 

103) 高麗史 권6, 세가6, 정종 5년 4월 辛酉.

104) 거란은 조복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어가자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정종 3년(1037) 이후 성보를 추가로 설치했다는 견해도 있다(허인욱, 주 16)의 논문, 99-100쪽).

105) 정나영, 주2)의 논문, 42쪽. 遼史와 契丹國志를 통해 고려 방어를 전담하는 군사 기구로 보주도통군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다만, 遼史에서는 동경병마도부서 사 아래 보주도통군사가 있고, 契丹國志에는 보주통군사로 되어있어 명칭에 차이 를 보인다(遼史 권46, 지16, 백관 2; 契丹國志 권22, 控制諸國).

106) 遼史 권36, 병위지 하. 예종 12년(1117) 금이 동경의 開州를 점령하자 관리와 백성 은 배 140척을 강가에 정박했다가 바다를 건너 도망갔다(高麗史 권14, 세가14, 예 종 12년 3월 辛卯).

107) 高麗史 권14, 세가14, 예종 12년 3월 辛卯; 刘一, 주 101)의 논문, 40쪽.

108) 道宗 大康 5년(1079) 소십삼이 보주통군사로 임명되었고 예종 12년(1117)에는 耶律寧 이 보주통군사였다(遼史 권110, 열전40, 蕭十三; 高麗史 권14, 세가14, 예종 12년 3월 辛卯).

보주도통군사가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나 흥종 재위 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109)

그런데 위의 사료를 참고하면 거란은 1035년에서 1036년 사이에 보주도통군사 설치를 시작했 다고 추정된다. 즉, 거란이 고려에 첩을 보냈을 때 고려의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자 국경 부근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고려를 압박하고자 보주도 통군사 설치를 구체화하고 시설을 추가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에 고려는 향후 대응을 위해 고심하며 송에 사절을 보냈으나 배가 난파 되면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거란은 관계 재개를 요구하 면서도 수군을 통해 고려를 위협했는데, 수군은 보주도통군사와 함께 설 치되거나 확대되었을 수 있다.

거란에는 동경도 지역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기구가 이미 있었는데, 왜 보주도통군사가 설치되었을까. 여기에는 보주의 전략적 중요성이 고려되 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연림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 세력은 보주에 주 둔하고 있던 하행미에 동참을 권유했고, 진압군은 고려와 발해인, 여진인 이 연합할 가능성에 대비해 이들의 요충지[要衝]를 먼저 점거하였다.110)

109) 고려가 국경 지역에 천리장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자 흥종은 성종이 고려 정벌 때 건 립하거나 수축한 주, 성을 바탕으로 保州路를 설치하고, 이를 총괄하는 기구로 보주 도통군사를 세워 보주와 定州, 宣州 등을 여기에 예속시켰다고 보기도 하고(姜维公・ 黄为放, 「辽与高丽边界视域下的渤海移民」, 社会科学战线 第12期, 2017, 123쪽), 태평 11 년(1031) 이후 중희 13년(1044) 이전에 설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余蔚, 中國行政區 劃通史 遼金卷, 复旦大学出版社, 2017, 83~84쪽). 한편, 중희 5년(1036)에서 10년(1041) 사이에 세워졌다는 논의도 있다(王珏, 「辽代保州与东南边防研究」, 河北大学碩士學位論文, 2018, 64쪽).

110) 遼史 권87, 열전17, 蕭蒲奴, “太平九年, 大延琳據東京叛, 蒲奴爲都監, 將右翼軍, 遇賊戰蒲 水. 中軍少卻, 蒲奴與左翼軍夾攻之. 先據高麗・女直要衝, 使不得求援, 又敗賊于手山.”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국경이 불안한 상황에서 서여진은 이전보다 고려 와 적극적으로 교섭하였고, 고려는 장성을 축조하며 국경 지역에 대한 방 비를 강화하였으므로 거란은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거 란에서는 기존에 동북지역을 담당하는 군사기구로 東北路詳穩司와 黃龍府都部署司가 있었는데, 1060년대 후반부터 1070년대 초까지 五國部의 반란 이 계속되고 생여진 세력이 강해지자 東北路統軍司를 별도로 설치한 사례 가 있었던 점이 참고된다.111)

111) 遼史 백관지에는 동북로통군사가 도종 大安 6년(1090)에 설치되었다고 되어있지만 (遼史 권46, 백관지 2), 이전부터 東北路統軍使의 임명 사례가 확인되며 이에 실제 咸雍 7년(1071)부터 대강 3년(1077)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동북로통군사 는 행정기구를 長春州에 두고, 장춘주와 泰州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烏古敵烈統軍司, 남쪽으로는 황룡부 인근까지 관할하였다(王雪萍・吴树国, 「辽代东北路统军司考论」, 中 国边疆史地研究 第1期, 2014, 56~59쪽).

이렇게 고려는 이전에 공론화하지 못했던 요구를 거란에 분명히 전하 고 갈등이 이어지는 동안 장성을 연장하며 서북지역 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거란도 보주도통군사를 설치하며 고려를 압박하였고 고려-송 관계 에 진척이 없자 고려는 향후 대거란 외교 전개에 관해 고심했을 것이다.

고려는 강경책을 통해 외교 현안을 공론화하고 방어 시설을 강화하는 실 익도 얻었으나, 변경의 위협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 이 먼저 관계 회복을 요구하자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 는 명분을 확보하고, 대립을 지속하기보다 사행을 재개하며 향후 현안을 논의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선회했다고 볼 수 있겠다.

4. 맺음말

이상으로 1030년대 고려-거란 간 대립 국면이 이어지다 양국 관계가 회복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해 양국 갈등이 발생하고 이어진 배 경을 두 가지로 살펴보았다.

먼저 거란 동경을 중심으로 대연림 반란이 일어나면서 반란 기간과 진압 이후까지 고려와 거란의 국경이 불안정했 던 점을 그중 하나로 들 수 있다.

동경이나 국경 주변에 대한 거란의 통 제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던 상황에서 이어진 국경 지역의 혼란은 양국이 변경에 시설물을 확충하며 방비를 강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둘째로 거란 성종의 죽음은 갈등이 발생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양국 관계는 고 려가 사절 파견을 중단하면서 대립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이는 성종 사 후 고려의 압록강 지역 반환과 억류 사신 송환 요구를 거란이 거절하면 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이전에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다가 성종 이 죽고 정변으로 거란의 내부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공론화하였다.

특 히 성종의 죽음은 거란과의 갈등을 지양했던 현종의 죽음과도 맞물리면 서 고려-거란 관계에 대한 우려와 불만이 표출될 수 있었다.

이렇게 양국 사이의 외교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1037년 연말이 되어서야 재개되었다.

이에 3장에서는 이 시기 양국의 대응을 크게 사행 중단과 국경 지역 강화, 교섭과 관계 재개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1032년 과 1034년 사이 고려는 사절 파견을 중지하고 거란 사절의 입국도 거부 했으며 압록강 주변으로 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거란은 정주 를 침략했던 것 외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거란은 정종이 즉위하고 흥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듬해 고려에 문서를 보내며 교섭을 시도했는데, 이후에도 양국은 대립을 이어갔다.

고려가 장성을 연장하고 거란도 보주 도통군사를 설치하며 고려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자,

고려는 송과 교섭을 모색하는 한편 거란 침략 때 전사한 인물을 추증하며 위기의식을 고취하 는 모습도 보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거란이 먼저 외교 재개를 요구하자 고려는 관계 회복의 명분을 확보하고, 양국 관계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태도를 선회하였다.

1030년대 고려-거란 간 갈등과 외교 재개는 이와 같 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1037년 고려가 사절을 보낸 후부터 거란의 연호 사용 을 중단할 때까지 양국은 교섭을 이어갔다.

이후에도 시설물 문제로 거란 166 서강인문논총 68집 과 갈등이 있었으나 고려는 문서나 사절을 통해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방 식으로 대응하였고, 거란이 대내외적으로 세력이 약해졌을 때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는 현종 원년(1010)에도 거란의 조정 과 동경에 사절을 적극적으로 보내 전쟁을 막고자 했듯이 고려의 외교적 대응은 1050년대 새롭게 등장한 방식이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가 이후 거 란과의 갈등 속에서도 관계 안정을 우선시하며 외교를 전개했던 데에는 고려가 거란에 대해 온건책과 강경책을 구사하며 얻은 외교적 경험이 중 요하게 작용했다고 짐작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1030년대 고려와 거 란이 대립했다가 다시 외교를 재개했던 이 시기는 이후 양국이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사료

高麗史 高麗史節要 契丹國志 遼史 金史 宋史 김위현 외 역, (國譯)遼史, 檀國大學校出版部, 2012.

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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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onfrontation and Conciliation: Study on the Goryeo-Khitan Relations in the 1030s

Jung, Nayoung(Ewha Women'Univ.)

This article investigates the development of Goryeo-Khitan relations in the 1030s, focusing on their conflicts and restoration of relations. So far, various domestic and external factors have been examined as the background of the conflict. It is assumed that the tension between the two states at that period was influenced by the border insecurity and the death of Emperor Shenzong (聖宗). Instability of the bord er d uring and after the rebellion in the Eastern Capital of Khitan, was related to the reinforcement of defense capabilities in the border area. In addition, Emperor Shenzong, who occupied the eastern region of Amnok river and detained Goryeo envoys, passed away and there was political upheaval led by empress dowager. With this backdrop, Goryeo demanded the return of the east of Amnok river and Goryeo envoys. These issues were officially discussed as King Hyeongjong (顯宗), who focused on the peaceful relations with Khitan, passed away at that time. After Khitan declined Gogyeo’s requests, the two entered crunch phase, suspending the exchange of envoys. Goryeo soon initiated the construction of fortress to strengthen its northwestern border. Once Emperor Xingzong (興宗) started to govern on his own and King Jeongjong (靖宗) was on the throne, Khitan responded to the issue and tried to interact with Goryeo. However, the conflict remained. Goryeo extended the fortress along the border, and Khitan started to establish Baozhou Military Control Office to manage Khitan’s southeastern region and contain Goryeo. With the establishment of new military officie near the border, Goryeo attempted to contact with Song, but it failed due to the shipwreck. The next year, Khitan sent document to Goryeo and demanded the restoration of relations. Goryeo reinforced its border while the threat by Khitan also increased. In this context, Goryeo changed its stance and decided to send envoy. From then, Goryeo adhered to diplomatic ways to deliver their request to Khitan whenever the tension arose regarding the facilities near the border. Thus, it is presumed that experiences from the confrontation and conciliation in the 1030s were important reference for Goryeo’s diplomacy to Khitan.

Key words : Goryeo, Khitan, suspension of diplomatic mission, Baozhou Military Control Office, restoration of relations

접수일자 : 2023년 11월 24일 심사완료 : 2023년 12월 11일 계재확정일: 2023년 12월 11일

서강인문논총 6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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