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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간토(關東)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식민지 조선 당국의 대응/최은진.국사편찬위원회

I.머리말

II.조선총독부의 동향 파악과 태세

III.경찰과 법원의 정보 보고와 대응

IV. 맺음말

I.머리말

2023년은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1 와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100주년 이 되는 해이다.

1 이 글에서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용어를 통일했다. 한국에서는 ‘관동대지 진’이란 표현이 더 익숙하나 일본에서는 ‘간토대진재’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데, 정 확히 대지진과 그로 인한 재해를 포괄하기 위해 ‘진재’ 개념을 쓰고 지명의 현지 발 음을 살려 ‘간토대진재’로 명명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진상 규명은 철저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 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도 없었다.

1923년 9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58분 도쿄를 중심으로 간 토지역에 진도 7.9의 큰 지진이 일어났다.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44만여 채의 가옥이 소실(燒失)되는 등 큰 재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날부터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느니, 일본인을 폭행했다느니, 폭동을 일으켰다느니, 우물에 독약을 풀 었다느니, 폭탄을 소지하고 투척했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경시청을 비롯하여 일본정부 당국은 일관되게 ‘조선인의 폭동’을 유언비어로 인식하고 있 었으나, 유언비어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정보물 인쇄·발행을 통해 그 조장·유 포에 앞장섰다.

자연재해로 인한 사회불안을 떠넘길 희생양으로 주로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을 지목한 가운데, 대재해로 인한 일본 국민의 좌 절을 조선인 학살을 통한 증오로 전화(轉化)하게 만든 것이다.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내무대신은 9월 2일부터 ‘조선인 내습(來襲) 폭 동’으로 도쿄 및 그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했다.

진재로 혼란한 와중에 성 립된 야마모토 곤베(山本權兵衛) 내각은 유언비어이던 ‘조선인 폭동, 일부 사회 주의자의 선동’을 인정하고, ‘그 내란으로의 발전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이례 적으로 재빠르게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9월 3일 간토계엄사령관은 명령의 시행 목적으로 “불령(不逞)한 거동으로부터 이재자(罹災者)를 보호할 것”을 들 어 ‘불령한 거동’을 상정했다.

계엄령은 학살자들에게 학살의 명분을 제공했다.

그 결과 공공연하게 조직적·계획적인 조선인 ‘대량 학살(제노사이드)’이 자행되 었다.2

이날 ‘조선인 폭동설’이 허위 보도임을 확인했는데도, 일본 군경(軍警)과 관헌이 만든 자경단(自警團, 재향군인회·청년단을 모체로 함)은 며칠간 조선인 집 단 학살을 자행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6,000여 명에서 1만 명 정도의 조선인이 살해당했다.3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한 선행연구는 대개 간토대진재로 인한 피해 현황과 조 선인 학살의 진실, 재일조선인의 대응 또는 일본 내 운동세력의 동향, 일본정부 의 사후 조치, 이후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한 기억의 계승 문제를 중심 으로 일본4 과 한국5 에서 이루어졌다.

2 關東大震災50周年朝鮮人犧牲者追悼行事實行委員會, 1975, 『關東大震災と 朝鮮人虐殺』, 現代史出版會, 35~36, 47쪽; 千葉縣における關東大震災と朝鮮 人犧牲者追悼·調査實行委員會, 1983, 『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びと』, 靑木書店, 20쪽; 강덕상, 1998, 「1923년 관동대진재 대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45, 59쪽; 朝鮮人强制連行眞相調査團, 2003, 『關東大震災朝鮮人虐殺』. 6~7쪽; 강효 숙, 2018,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의미」, 『전북사학』 52, 284쪽; 이만열, 2023, 「간토 조선인 학살 100주년」, 『푸른사상』 43, 10~14쪽; 김강산, 2023, 「제노사이드의 관점으로 본 관동대학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1, 90쪽.

3 姜在彦, 1960, 「關東大震災と朝鮮人迫害」, 『朝鮮問題硏究』 4(3·4), 59쪽; 山 田昭次, 1993, 「關東大震災の時朝鮮人虐殺責任のゆくえ」, 『歷史評論』 521, 20~21쪽; 강덕상, 1998, 위의 글, 62쪽; 강덕상, 1999,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을 보는 새로운 시각」, 『역사비평』 47, 178~179, 188, 191~194쪽; 關東大震災 85周年シンポジウム實行委員會, 2008, 『震災·戒嚴令·虐殺』, 三一書房, 91쪽; 山田昭次, 2011, 『關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 創史社, 16~46쪽; 다 나카 마사타카(田中正敬), 2014, 「간토대지진과 지바(千葉)에서의 조선인 학살의 추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7, 2쪽; 조경희, 2017, 「관동대지진 전후 제국일본 의 조선인 대책과 사회사업 사상」, 『대구사학』 128, 80쪽; 姜德相, 2020, 『關東 大震災』, 新幹社, 209~210쪽.

4 일본 연구로는 姜在彦, 1960, 위의 글; 朝鮮大學校朝鮮に關する硏究資料編集 委員會, 1963, 『關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の眞相と實態』, 朝鮮大學校; 關東大震災50周年朝鮮人犠牲者調査·追悼事業實行委員會, 1974, 『かくされ ていた歷史』; 關東大震災50周年朝鮮人犧牲者追悼行事實行委員會, 1975, 앞 의 책; 千葉縣における關東大震災と朝鮮人犧牲者追悼·調査實行委員會, 1983, 앞의 책; 山田昭次, 1993, 위의 글; 山岸秀, 2002, 『關東大震災と朝鮮人 虐殺』, 早稻田出版; 姜德相, 2003, 『關東大震災·虐殺の記憶』, 靑丘文化社; 朝鮮人强制連行眞相調査團, 2003, 앞의 책; 關東大震災80周年記念行事實行 委員會, 2004, 『世界史としての關東大震災』, 日本經濟評論社; 關東大震災 85周年シンポジウム實行委員會, 2008, 위의 책; 山田昭次, 2011, 위의 책; 關東 大震災90周年記念行事實行委員會, 2014, 『關東大震災記憶の繼承』, 日本經 濟評論社; 姜德相, 2020, 위의 책이 대표적이다.

5 한국에서는 최근 강덕상 외, 2013,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2013, 「관동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독립신문』의 보도와 그 영향」, 『사림』 46; 김인덕, 2015,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과 일본 내 운동세력의 동향」, 『동북아역사논총』 49; 다나카 마사타카(田中正敬), 2017, 「일본 내 관동대지진 때 의 학살사건 진상 규명 운동의 현황」, 『한일민족문제연구』 33; 조경희, 2017, 앞의 글; 강효숙, 2018,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의미」, 『전북사학』 52; 김계 자, 2019, 「일본의 대지진과 재일조선인」, 『일본연구』 32; 성주현, 2020, 『관동대 지진과 식민지 조선』, 선인; 김도형, 2020, 「관동대지진 한국인 피살자 명부 자료 의 분석」, 『북악사론』 12;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편, 2021, 『관동대진재조선 인학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김강산, 2022, 「관동대학살에 대해 해외 조 선인이 생산한 문건과 그 성격」, 『동국사학』 74; 김진웅, 2022,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지역 조선인 유학생계의 변화와 학생운동의 추이」, 『사림』 82; 배영미, 2022, 「한국 대중문화 속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련 서사 분석」, 『한일민족문제연구』 43; 김강산, 2023, 앞의 글; 이만열, 2023, 앞의 글 등의 연구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일어난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식민지 조선 당 국은 과연 어떻게 대응했는지와 관련해서는 아직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의 연구 몇 편에서 조선총독부의 재일조선인 정책 참여, 구제활 동의 측면에서 주로 분석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주로 식민지 조선 당국의 조선인 ‘보호’ 내지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고 조선인 ‘단속’ 내지 ‘차별’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았다.

물론 ‘보호’ 내지 ‘구제’와 ‘단속’ 내지 ‘차별’은 통치의 양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 내지(內 地)로 건너간 조선인에 대해서 일본정부와 함께 국가적 보호의 책임을 져야 할 식민지 조선 당국이 조선인 학살 상황에서 과연 보호와 구제의 입장으로 일관했 는지, 오히려 단속과 차별에 더 비중을 두지는 않았는지, 실제 식민지 조선 당국 이 당시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응했는지에 대한 연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 질 필요가 있다.

선구적으로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한 자료를 방대하게 수집·연구 한 금병동은 조선인 학살 발생에 총독부가 ‘경악’하면서 이 학살 문제로 일본의 조선통치가 크게 곤란해질까 하여 ‘민심 안정’을 위한 통첩을 발표한 것에 주목 했다.

그러면서 총독부는 대체로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① 조선인 학살 신문기사 방지,

② 귀국 조선인 우대와 박해 사실 은폐,

③ 민족주의계열 신문 감시,

④ 학살 문제 보도기사 압 수,

⑤ 학살 사건의 원인을 소위 ‘불령선인’의 폭행으로 몰기,

⑥ 친일파 동원,

⑦ 조선인 진상 보고회 등 발언 탄압,

⑧ 재조일본인 자경단 조직 저지 등이다.6

6 琴秉洞 編, 1996, 「解說: 朝鮮人虐殺に關する植民地朝鮮の反應」, 『關東大震 災朝鮮人虐殺問題關係史料』 Ⅳ, 綠蔭書房; 關東大震災85周年シンポジウム實 行委員會, 2008, 앞의 책, 98~99쪽.

이러한 총독부의 대응 유형은 지금도 유효한 분석이나, 그 구체적인 사례까지 연구가 진전되지는 못했다.

노주은은 간토대진재 이후 조선총독부의 재일조선인 정책에 대해 대진재 처 리 과정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주로 대진재가 발생한 직후 총독부가 취한 초동 대응과 총독부 도쿄 출장원사무소의 조선인 수용소 운영, 총독부의 재일조선인 통제책에 대해 분석했다.

이를 통해 총독부가 진재 처리 과정에 합류하면서 능 동적으로 재일조선인 정책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3·1운동 이후 일본 내무성과 총독부의 신속한 연락망이 구축되면서 총독부의 재일조선인 정책 참여가 확대되었고, 이후 간토대진재를 겪으며 총독부의 재일조선인 정책 관여가 다시금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수용소 업무를 총독부에 일임하여 학살 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는 것처럼 선전했는데, 이때 총독부는 일본정부가 학 살 책임을 회피할 수단이었고 조선인 처리의 실무자 역을 자임했다.

총독부는 간토대진재로 예산이 삭감될까 우려했고, 학살 사건이 총독부 정책에도 영향을미칠까 위기의식을 느껴 적극적으로 진재 처리에 개입했다는 것이다.7

한편으로 성주현은 간토대진재가 일어난 뒤 총독부가 조선의 중앙과 지방에 서 벌인 구제활동에 주목했다.

총독부는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 3·1운동 때와 같은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날까 염려했다.

따라서 총독부의 지 시로, 또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인 경성부·인천부·대구부·부산부·평양 부·전주부 등 관의 주도로 구제활동이 이루어졌다.8

김광열은 총독부의 구제활동은 조선인 학살 사실을 왜곡·축소하고 그 피해 를 무마하려 자기방어적 사후 조처를 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총독부는 간 토대진재 발생지역에서 귀국한 조선인들에게 함구령을 내려 조선인 학살 사실 이 전파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또 한인 노동자의 도일을 당분간 금지했다.

그리 조선문신문의 학살 관련 보도를 통제했다.

다만 총독부는 1924년 6월 이전 조선인 사망자 830명을 선정하여 조위금을 교부했을 뿐이다.9

아울러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 학계에서 다나카 마사타카(田中正敬), 마 루모토 겐지(丸本健次),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 니시무라 나오토(西村直 登) 등이 간토대진재에 대한 식민지 조선인의 반응을 주로 다루면서, 간토대진 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식민당국의 정보 통제 측면을 다루었다.10

7 노주은, 2007, 「관동대지진과 조선총독부의 재일조선인 정책」, 『한일민족문제연 구』 12.

8 성주현, 2014, 「1923년 관동대지진과 국내의 구제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 성주현, 2020, 앞의 책, 31~50, 102~111, 170~187쪽.

9 김광열, 2015,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 치」, 『동북아역사논총』 48. 10 田中正敬, 2003, 「關東大震災はいかに傳えられたか」, 『歷史地理敎育』 657; 田 中正敬, 2005, 「關東大震災と朝鮮人の反應」, 『人文科學年報』 35; 丸本健次, 2005, 「關東大震災に對する植民地朝鮮の反應」, 『アジア民衆硏究』 10; 宮本正 明, 2006, 「朝鮮總督府關係史料にみる關東大震災」, 『アリラン通信』 36; 西村 直登, 2020, 「關東大震災朝鮮人虐殺をめぐる朝鮮人の生と記憶」, 同志社大學 博士學位論文.

그러나 이 들 연구에서 총독부의 대응 내용은 소략한 데다가, 이들 연구는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가 당시 치안 개황에 대해 요약·정리한 정기간행물인 『치안상황』을 주 된 사료로 삼고 있어 그보다 더 기초자료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선행연구를 참고하며 이 글에서는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이 일어 난 직후 식민지 조선 당국이 이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 과정을 전반적으 로 살펴보고자 한다.

중앙의 조선총독부와 지방의 도(道) 당국, 그리고 ‘비상’ 사 태에 발 빠르게 대응한 당국으로서 중요한 경찰, 법원이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해 어떠한 정보·동향을 파악·보고하고, 이에 어떠한 태세·대응을 취 했는지 구체화하고자 한다.

이로써 관동대진재가 식민지 조선 당국에 어떠한 영 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총독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 가 조금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면서 사료를 추가로 분석하고, 경찰·법원의 대응 에 대해서는 선행연구가 없으므로 새롭게 자료를 분석하겠다.

여기서 식민당국으로서 경찰과 법원의 대응을 별도로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 하다. 먼저 경찰은 ‘공공질서와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사 건 발생 시 총독부의 방침이 내려오기 전이더라도 즉각적으로 대응하거나, 정보 수사기관으로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미리 경계 태세 를 보이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독자성이 있는 당국이었기 때문이다.

법 원은 삼권분립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식민지기였으나, 입법과 행정의 기 능이 혼재된 총독부와 별개로 사상 통제 등 나름대로의 목적에 따라 사법권을 행사하던 주체적인 당국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경찰과 법원 각 당국의 정보 보고와 대응이 총독부에 전해져 그 태세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반대의 영 향도 물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앞선 연구에서는 대체로 식민지 조선 당국이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 살 상황에서 예산 문제 등 나름의 이유와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조선인 보호·구 제에 나선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는데, 과연 그러했을지 의문이 든다.

우선 일본 내 조선인 학살 상황을 식민지 조선 당국이 일본정부와 함께 은폐·축소하려 하 거나 진상을 왜곡하면서 학살을 더욱 조장한 측면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총독부 등이 본국의 ‘혼란’이 식민지 내 조선인 동요로 확산하지 않도록 경계와 감시를 강화하면서, 조선인은 단속으로 일관하고 일본인은 어떻게든 보호하 려는 민족 차별적 정책을 시행한 것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서무기록 중 하나인 『(1923년 9월) 간토의 진재에 대한 정보』(1923)를 기본 적으로 활용한다.

이 사료철은 468쪽으로 방대한데, 당시 조선총독부와 경찰, 법원 등이 파악한 정보, 민심의 동향, 그에 대한 대응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이 자료는 기존 연구에서 목록화하여 일부 언급한 적이 있으나11 아직 자세히 분석되지는 않았다.

이와 함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한 금병동 문고의 간토 대진재 관계 자료 및 연구12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11 성주현, 2020, 앞의 책, 182~184쪽.

12 금병동 문고 중 주로 다음의 자료 및 연구를 참고했다. 山本美 編, 1924, 『大正大 震火災誌』, 改造社; 姜在彦, 1960, 앞의 글; 關東大震災50周年朝鮮人犧牲者 追悼行事實行委員會, 1975, 앞의 책; 千葉縣における關東大震災と朝鮮人犧牲 者追悼·調査實行委員會, 1983, 앞의 책; 琴秉洞 編, 1996, 앞의 글; 丸本健次, 2005, 앞의 글; 宮本正明, 2006, 앞의 글.

이와 함께 당시 민간에서 작성된 자료, 간토대진재 및 조선인 학살 문제와 관련한 식민지 조선의 반응에 대한 자료집을 참고하겠다.

이 밖에 당시 식민지 조선 내 신문기사를 정리해 본다.

II.조선총독부의 동향 파악과 태세

1. 총독부의 초동 대응과 구제사업

1923년 9월 1일 밤 10시 30분에 사이토 조선총독은 일본의 대진재 소식을 접 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2시 경무국에 자세한 소식이 전해져 아침에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경무국장이 사이토 총독을 찾았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은 전날 오후 6시 반경 조선호텔 연회석상에서 무선통신으로 요코하마의 대화재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9월 2일 새벽 2시의 전보도 공보(公報)로 전해진 것이 아니었기에 총독부는 우선 대기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날 마루야마 경무 국장은 국경지역과 경상남도지사에게 “조선 내 인심의 동요와 내지 및 조선 외 ‘불령선인’과의 연락에 주의·경계”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낸다.

경남도지사 앞으로 전보를 보낸 것은 재일조선인 중 경남 출신자가 가장 많았으며, 일본에 서 귀환할 때 이용하는 항구인 부산항이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총독 부는 같은 날 서무부 문서과장 구라하시 기자무(倉橋鋕)를 도쿄·오사카·나고야로 출장 보내, 구라하시는 일본에서 총독부 진재 처리 정보계 업무를 맡았다.

또 그날 구니토모 쇼켄(國友尙謙) 경무과장, 우에다 이사무(上田勇) 체신국 부사 무관, 총독부 속(屬) 1명을 간토대진재 후 상황 조사와 조처를 위해 도쿄로 출장 보내고, 며칠 후에는 시가 기요시(志賀潔) 총독부의원장과 구호반을 구호활동 을 위해 진재지로 보냈다.

9월 3일이 되자 공식 전보로 “진재를 이용하여 재류조선인이 방화·투척 및 기타 불령수단”을 행하니 “조선 내 조선인의 동요를 엄중히 단속하고 조선인의 내지 도래(渡來)를 저지”하라는 지시가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으로부터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도착했다.

유언비어를 마치 진실인 것처럼 공식적으로 전한 것 이다.

이에 총독부는 9월 4일부터 ‘요주의인물’을 본격적으로 단속하고, 일본 경시청으로부터도 조선인의 도쿄 상경 저지 요청 전보를 받으면서 경계에 더욱 힘썼다.

9월 4일 밤 사이토 총독도 도쿄를 향해 출발하여 9월 5일 아침 부산에 도착 해 급히 쌀을 싣고 재해지로 향했다.

사이토 총독이 도쿄로 간 표면적인 목적은 일본의 새로운 내각 조직과 관련해서였고, 구제쌀에 대해 상의도 할 계획이 었다.

그런데 사이토 총독은 “소수의 조선인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한 것은 매우 유감”이라며 간토의 ‘조선인 폭동설’을 자인(自認)하고, “선량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조금도 위해를 가하지 않고 일본인과 똑같이 구호”하여 “‘일 선융화(日鮮融和)’의 결실을 거두겠다”고 밝혔다.

조선총독의 업무는 주로 조선총독부 도쿄 출장원사무소에서 이루어졌는데, 총독부 출장 직원, 출장소 직원들과 함께 주로 진재 정보 보고를 받고 사무를 처 리했다.

총독이 일본에 머물며 지시하면서 진재 처리 사무는 수용소에 수용된 재일조선인의 구호 업무와 노동 사역(使役), 조선 송환에 집중되었다.

이 수용소 업무는 일본정부가 관할하던 업무를 총독부에 넘긴 것이었다.

진재 후 일본경찰 은 육군과 협조하여 지바현(千葉縣) 나라시노(習志野) 보호수용소에서 조선인 3,000여 명을 관리했는데, 이후 이들 대부분을 총독부 출장소가 주관하는 도쿄 아오야마(靑山)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리고 그중 노동할 수 있는 조선인은 상애 회(相愛會)가 관할하는 니혼바시(日本橋) 수용소로 보냈다.

이후 9월 30일 총독 은 조선으로 돌아간다. 총독부가 운영하던 조선인 수용소도 10월 말 폐쇄되고, 일부 수용소의 경우 조선인 노동자 숙박소로 전환되었다.13

그 밖에 구제사업으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진재 의연금 모집을 각 국장· 부장 및 소속 관서장, 경성 제1차 소속 관서장 등에게 명했다.

간토대진재로 인 한 참상(慘狀)에 조선 내 관공리 일동이 의연금을 갹출하여 위자(慰藉) 구조 자 금으로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갹출하여 가능한 한 빨리 이재지(罹災地)에 송달 하도록, 총독부 앞으로 송금이 기일에 지체되지 않도록 신경 써 달라는 것이 었다.

① 갹출금은 월 봉급의 약 5/100를 표준으로 하고,

② 갹출금은 국·부에 서 취합하여 명세서를 붙여 반드시 9월 25일까지 총독부 회계회장에게 송부하 도록 하고,

③ 갹출금의 처분 방법에 대해서는 결정하는 대로 통지하기로 했다.14

13 이상 「總督一行豫定變更乎」, 『매일신보』, 1923.9.6; 「善良なる朝鮮人に對して は遺憾なく保護して居る」, 『京城日報』, 1923.9.16; 田中正敬, 2005, 앞의 글, 33쪽; 노주은, 2007, 앞의 글, 7~10, 16~19, 22~23, 32~33쪽; 琴秉洞, 2008, 앞의 글, 97~100쪽; 조경희, 2017, 앞의 글, 85쪽; 성주현, 2020, 앞의 책, 171~ 172쪽.

14 政務總監 → 本府 各 局·部長, 第一次 所屬 官署長, 1923년 9월 5일, 「震災義 捐金ノ募集ニ關スル件」, 庶務部長 → 本府 各 局·部長, 在京城第一次所屬官 署ノ長, 1923년 9월 17일, 「東京方面震災義捐金ニ關スル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大正十二年九月)關東ノ震災ニ對スル情報』, 26, 217쪽.

또한 조선총독부는 간토대진재로 인해 도쿄와 요코하마 2대 도시를 비롯해 각 지방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우선 식량으로 쌀을 도쿄에 직송하기로 하고 1만 석을 급히 수집할 계획을 수립했다.

쌀 수집에 대해서는 조선곡물무역연합회에 자문한 후 총독부원과 관계 도 당국 직원을 인천과 군산 에 파견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진재로 인해 시시각각 미곡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으나 ‘희생적 정신’에 호소하여 미곡을 특가로 제공하도록 하고, 도쿄에 도 착한 후에는 위 가격에 운임 및 기타 실비만 더한 가격으로 매도하게 했다.

도쿄 에서 미가가 위의 총 계산액보다 앙등해도 예약된 가격으로 매도하도록 하고, 만일 하락하면 총독부에서 차액을 보급하기로 했다. 이에 9월 3일 오후 인천에 서 쌀 4,700석을 제공하기로 계약되었고, 9월 4일 군산에서 5,150석, 경성에 서 150석의 선적(船積)에 착수했다.15

조선총독부 사회과에서도 간토대진재 후 구제사업을 실시했다.

예를 들어 부산에 진재구호사무소를 설치하고, 적십자 조선본부,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와 함께 쌀·생활필수품 제공, 의류·식료품 등의 위문품 운송, 이재민의 구조, 의 연금 모금을 진행했다.16

그리고 그해 9월 중순경 일본정부와 총독부는 조선의 귀족·부호에게 직접 적으로 구휼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례로 간토대진재 후 이완용(李完用) 후작 이 도쿄에 건너가는데 바로 일본정부와 총독부가 그를 도쿄로 부른 것이었다.

그 용건은 진재에 대해 귀족과 부호의 구휼금을 모집해 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고종의 조카인 조남승(趙南昇)이 북경(北京)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할 때 고종이 가지고 있던 한일은행(韓一銀行) 주식 3,000주(株)를 조남승에게 준 것을 이완 용, 민병석(閔丙奭)에게 명하여 이를 찾아내 구휼금으로 기부하도록 종용했다.17

15 「진재 구원: 식량공급계획」, 『동아일보』, 1923.9.6.

16 조경희, 2017, 앞의 글, 85쪽.

17 京城 本町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9일, 「震災ト民心ノ 傾向」,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215쪽.

2. 총독부의 사건 은폐·왜곡과 조선인 단속

조선총독부는 간토대진재 직후 일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정부로부터 공식 전보를 받은 후에는 조선 내 단속을 강화하며 일반 민심의 동향을 주시 했다.

아울러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사건이 총독부 식민통치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18 이에 우선 조선총독부는 언론을 통제하면서 당시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은 폐·축소·왜곡하려 했다.

총독부는 정부기관 이외에는 간토대진재 시 학살 관 련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언론을 탄압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민족주의계열 신 문기사를 검열·삭제하는 한편, 반대로 도쿄의 조선인들이 폭행했다는 유언비 어는 사실처럼 신문에 발표하게 하는 등 선전에 힘썼다.19

총독부에 의해 『동아 일보』, 『조선일보』는 그해 9월 1일부터 11일까지 학살 사건에 대해 게재 금지 600여 건, 차압 조치 10여 건을 당해 보도가 거의 불가능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만 간토대진재 발생 후 10여 일간 주로 일본인들의 참담한 피해 상 황을 보도하며 피해자 입장을 강조했다.

나아가 일본인 참상은 큰 데 비해 재일 조선인은 ‘안전’한 것처럼 보도하거나 ‘지극히 경미한 충돌’이 일어난 것으로 축 소 보도하여 진상을 왜곡했다.

심지어 재일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이 재일조선 인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고 왜곡 보도하기도 했다.20

<표 1>은 1923년 9~10월 ‘불온언동’과 유언비어 유포로 단속된 건수를 나 타낸 것이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소위 ‘불온언동’을 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로 1,300여 명을 검거 했다가 훈방 조치하거나 100여 명을 법규 위반 검사 송치, 즉결 처분했다.21

18 노주은, 2007, 앞의 글, 10~11쪽.

19 田中正敬, 2003, 앞의 글, 65쪽.

20 성주현, 2020, 앞의 책, 38, 41~42, 46쪽.

21 장세윤, 2013, 앞의 글, 307쪽; 이만열, 2023, 앞의 글, 17쪽.

<표 1> 1923년 9~10월 진재에 관련된 ‘불온언동’ 및 유언비어 단속 일람표 : 별첨 논문파일참조

구분 「칙령」 위반 「경찰범처벌규칙」 위반 「보안법」 위반 합계 훈방 검사 송치 훈계 방면 즉결 계 검사송치 훈계방면 즉결 계 검사 송치 훈계 방면 즉결 계 일본인 조선인 계 구류 과료 구류 과료 구류 과료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건수 인원 경기 4 4 3 3 7 7 7 7 26 28 48 52 74 80 충북 3 5 96 105 99 110 충남 (1) (1) 5 5 (1) 1 (1) 1 (2) 6 (2) 6 (2) 6 (2) 6 12 14 48 56 60 70 전북 1 1 1 1 1 1 1 1 2 2 52 67 52 67 전남 1 4 1 4 4 5 4 5 5 9 9 9 70 74 79 83 경북 1 1 1 1 1 1 29 31 1 1 31 33 32 34 5 5 165 186 170 191 경남 6 9 (1) 6 (1) 7 (1) 12 (1) 16 (1) 6 (1) 6 9 9 6 7 (1) 21 (1) 22 (2) 33 (2) 38 23 25 303 323 326 348 황해 6 6 6 6 6 6 2 2 20 32 22 34 평남 1 1 1 1 2 2 2 2 2 2 4 4 27 33 75 125 102 158 평북 12 21 12 21 강원 3 3 3 3 1 1 1 1 4 4 2 2 100 115 102 117 함남 1 1 1 1 4 4 4 4 5 5 5 5 40 40 45 45 함북 13 13 13 13 계 16 22 (1) 7 (1) 8 1 1 (1) 24 (1) 31 (2) 7 (2) 7 61 64 (1) 11 (1) 12 (3) 79 (3) 83 1 1 1 1 (4) 104 (4) 115 114 128 1,042 1,209 1,156 1,337

비고: 괄호 안 숫자는 일본인, 괄호 밖 숫자는 조선인을 가리킨다.

출전: 朝鮮總督府 警務局, 「關東地方震災ノ朝鮮 ニ 及ホシタル狀況」, 琴秉洞 編, 1996, 앞의 책, 38쪽.

 

<표 1>을 보면, 일본 천황이 공포하는 「칙령」 위반의 경우가 조선인 24건 31명 및 일본인 1건 1명,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의 경우가 조선인 79건 83명 및 일본 인 3건 3명, 「보안법」 위반의 경우가 조선인 104건 115명 및 일본인 4건 4명으 로, 어느 경우에도 조선인 단속이 현격히 심했으며 그 수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22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의 경우로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서울에 살던 김용구(金容球, 당시 21세)라는 동아일보사 문선(文選) 견습생이 그해 9월 7~8일 오후 8시경 종로 어느 이발점에 조선인들이 모인 곳에서 9월 8일경 『동아일보』 호외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이 신문 호외에서 삭제된 내용은 “이 번에 도쿄지방 진재 때 조선인이 음료수에 독약을 투입했다고 하여 죽는 자가 속출하고 있어, 지방민도 군대도 매우 분개하여 조선인으로 보이면 학생이든 노 동자이든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군도(軍刀)로 죽이거나 총살하거나 또는 무리하 게 구금하고 있다는 기사”라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것이다.

이에 9월 21일 동대문경찰서는 「경찰범처벌규칙」 제1조 제21호[사람을 광혹(狂惑)하게 하는 유 언(流言)·부설(浮說) 또는 허위의 보도를 한 자]에 따라 김용구를 구류 10일에 처 했다.23

22 「보안법」은 통감부가 1907년 제정했는데,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었다. 또한 총독부는 1912년 「경찰범처벌규칙」을 제정하여 일상생활도 엄격히 단 속했는데, 무려 87개 항목을 설정하고 여기에 해당하면 경찰관서에서 구류 또는 과 료로 처벌했다(법제처, 「경찰범처벌규칙」, 국가법령정보센터).

23 京畿道警察部長 → 法務局長, 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22일, 「流言蜚語 取締ニ關スル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286쪽.

즉 조선인 학살 상황에 대해 전한 것을 단속하여 「경찰범처벌규칙」 위 반으로 엄격하게 처벌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이때 ‘조선인 폭동 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총독부는 일본에서 귀국하는 조선인을 위무(慰撫)하거나 피해자를 자체적으로 조사하여 유족에게 1인당 100엔의 조의금을 지급하고, 지방관에게 유가족을 위로하도록 하는 등의 조처를 하기도 했다.24

9월 7일경부터 조선인 이재자가 조선으로 귀 국하기 시작했다.25

그러나 귀국자가 늘어나는 9월 10~20일에 들어서면,26 조선인 학살 정보가 식민지 조선 내 널리 알려져 이전에는 조선인 학살에 대해 반 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이제 비분강개하는 상황이 된다.27

심지어 재일조선인 중 에는 귀국해서 경성의 일본인에게 보복 행동을 하겠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28

이에 조선총독부는 많은 조선인이 귀국하면서 일본의 정보가 조선에 들어오는 것에 대응하여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간토대진재에 관련한 정보는 실제 학살 소식이든 유언비어이든 엄격하게 통제하려 했다.29

24 성주현, 2014, 앞의 글, 183쪽.

25 丸本健次, 2005, 앞의 글, 103쪽.

26 간토대진재로 귀국한 조선인은 1923년 9월 5일까지 1,086명, 9월 30일까지 1만 1,441명, 10월 11일까지는 무려 3만 1,563명, 1924년 1월 31일까지는 4만 8,316명(노동자 90%, 학생 4%, 기타 6%)에 이르렀다고 한다(「귀환한 조선인 벌써 1만여 명」, 『매일신보』, 1923.10.9; 「관동진재 후 귀환 조선인 총수」, 『매일신보』, 1924.3.12; 국사편찬위원회, 1972,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7, 152, 164, 250쪽). 그런데 그중 상당수인 4,000~5,000여 명은 오사카 서쪽 간사이(關西)지방 노동자들로, 진재 후 조선인으로서 일본에 머무르는 데 위험을 느껴 귀국하거나, 불경기가 이어져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일본 있던 조선인의 송환」, 『동아일보』, 1923.9.21; 「鮮人續續歸國」, 『京城日報』, 1923.10.2).

27 京城 本町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2일, 「震災ト民心ノ 傾向」,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63쪽; 宮本正明, 2006, 「朝鮮總 督府關係史料にみる關東大震災」, 『アリラン通信』 36, 3쪽.

28 京城 西大門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5일, 「內地震災 ニ對スル一般ノ狀況ニ關スル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172쪽.

29 西村直登, 2020, 「關東大震災朝鮮人虐殺をめぐる朝鮮人の生と記憶」, 同志社 大學 博士學位論文.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는 간토대진재 후 조선인 단속을 위해 조선인의 일본 내지 도항을 제한했다.

당시 대진재가 일어난 현장에 가족을 둔 사람이나 방학 을 맞아 귀국했던 유학생들이 재일조선인 안부를 우려하며 도항하고자 했다.

또 민간에서 현지에 조사위원을 파견하려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9월 6일부터 일본정부와 총독부는 일본 도항을 전면 제한했다.

총독부는 ‘과대한 선전’이 번지지 않도록 조선인의 이동을 금지하라는 일본 내무성 방침에 따라 조선인의 도일 금지를 선언했다.

이에 조선인 노동자 도항 금지에 대한 해제 요구가 9월 말부 터 조선 사회에서 거론되었고 점차 노동자 도항 금지 해제 요구가 거세어졌다. 하지만 총독부는 이듬해 6월 1일에 가서야 도항 제한을 철폐한다.30

한편 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이 활발한 국경지대의 경계를 강화했다.31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국외 형세를 고려하여 사찰 경계를 엄밀히 하고자 했다.

즉 노령(露領) 방면의 ‘불령선인’이 이 기회를 틈타 한꺼번에 조선 국경을 넘어 충 돌을 빚을 듯하고, 또 북경·상해(上海)지방 조선인들이 조선 및 일본 내지에서 직접 행동 실행을 기도하고 있으며, 소련 공산당이 진재 구제를 명분으로 비밀리에 적화(赤化) 선전을 계획하고 있고, 간도(間島)지방 ‘배일(排日)선인’이 조선 내로 들어와 ‘소요’를 다시 일으키려고 획책하고 있다는 소식이 총독부에 전해 졌다.

여기에 더해 일부 중국인과 공산당, 소련인들이 일본의 재해에 ‘쾌재’를 부르며 ‘불령선인’들을 선동하는 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총독부는 국경지방의 경비, 해안선의 경계를 매우 엄격히 하려 함은 물론, 국외에 기차, 기선(汽船) 등을 타고 연락·왕래하는 자들을 더욱 주도면밀하게 사찰하려 했다.

예를 들어 당시 총독부가 파악한 정보를 보면,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이 북경에 체재하면서 동지 김창숙(金昌淑) 등과 모의하여, 일본 내지의 진재로 인 해 민심이 동요하는 기회에 시급히 여비를 조달하여 부하를 조선 내에 파견하여 ‘폭거’를 실행하고 인심을 선동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32

30 「當分の間鮮人勞動者內地渡航禁止さる」, 『京城日報』, 1923.9.8; 성주현, 2015, 「관동대지진 직후 재일조선인정책」, 『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발 표자료집』, 231쪽; 조경희, 2017, 앞의 글, 84~85쪽.

31 田中正敬, 2005, 앞의 글, 33쪽.

32 1923년 하반기 의열단은 만주·서울·도쿄 세 방면에서 대규모의 암살·파괴활동을 전개한다는 광역거사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1920년대에 북경으로 의열단의 본거를 옮긴 김원봉이 거사계획을 밀의하고 그해 9월 중순 선발대를 국내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위 정보는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창숙이 여기에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일본 거사는 오히려 간토대진재 후 조선인 학살과 단속이 이어지면서 거사 준비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김 영범, 『의열투쟁Ⅰ: 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75~177, 236쪽).

또한 총독부는 고려공산당이 상해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9월 7일 또는 12일 경 그 선전부의 대표들이 모여 일본 내지에 대한 주의 선전 건에 대해 결의한 점 에 주목했다.

고려공산당은 이번 진재를 틈타 선전에 착수하는 것이 매우 시의 적절하다고 판단했으나, 관헌의 경계가 엄격하여 출입이 곤란하니 당분간 상황 을 엿보아 빈틈을 노려 일본 내지에 선전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도쿄, 오사카, 교토를 중심으로 일본의 사회주의자, 조선인 유학생, 노동자 등 과 결탁하여 계속적으로 선전을 하여 다수의 동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결의했다는 정보를 총독부가 입수한 상태였다.

나중에 실제로 고려공산당은 당 원 약 70명을 무송현(撫松縣)에 숨어 있게 하면서 조선 내 선전 계획을 세우다 가, 25명이 장백부(長白府) 방면으로 남하하고, 잔여 세력은 임강현(臨江縣), 집 안현(輯安縣), 관전현(寬甸縣) 방면으로 분할 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와 서간도 국경지방에 있는 독립군 무장단체도 암호 전보를 빈번하게 주고받으며, 이번 진재를 기회로 하여 조 선 국경에 침입하는 비밀행동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33

33 이 정보는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임시정부와 만주 일대 독립군은 전보로 연락을 주로 취하지 않았다(김희곤, 2008, 『대한민국임시정부Ⅰ: 상해시 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19~122쪽).

한편 나중에 10월 초쯤 임시정부는 간토대진재 시 조선인 학살과 관련하여 진상을 국내외에 알리고자 국무원(國務院)에서 포고문을 각국 언어로 인쇄·배포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서간도지방에서는 환인현(桓仁縣)에 있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 府)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德)이 일본 내지 진재를 기회로 삼 아 조선 내 민심을 선동하여 일제히 만세를 고창하는 운동을 일으키도록 선전원 을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이미 9월 10일경 부하 6명을 조선내에 잠입시킨 상태였다.34

이렇게 조선인 사찰과 단속을 강화하면서도 조선총독부는 간토대진재 시 조 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그 발생 당초부터 단 한 건도 의견을 일본정부에 제 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총독부는 일본정부와 보조를 맞춰 조선인 학살 은폐 입 장으로 일관했다.

이듬해까지도 총독부는 책임 있는 성명은 고사하고 당국자 의 견이라 할 만한 담화를 전혀 발표하지 않았다.35 추가적으로 지방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도 당국의 대응에 대해 간략히 알아 보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 정무총감은 각 도에 통첩하여 ‘유언’에 인심이 혹하지 않도록 안심시키라고 명했다. 그 ‘유언’이란 ‘조선인 학살’에 대한 것이 었을 것이다.36

도에서는 주로 도경찰부가 나서 ‘민정 사찰’을 했는데, 대체로

첫째, 간토대 진재에 대한 부민(部民)의 감상,

둘째, 의연금 모금에 대한 감상,

셋째, 유언비어 에 대해 조사했다.37

34 이상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 外務次官 등, 1923년 9월 13일, 「國外ノ形勢ニ鑑 ミ査察警戒ヲ嚴密ナラシムル件」,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 外務次官 등, 1923년 9월 23일, 「京濱地方震災ニ關スル國外情報(其6)」, 朝鮮總督府 警務局 長 → 外務次官 등, 1923년 9월 23일, 「京濱地方震災ニ關スル國外情報(其7)」,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 外務次官 등, 1923년 10월 5일, 「京濱地方震災ニ關ス ル國外情報(其13)」,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 外務次官 등, 1923년 10월 13일, 「京濱地方震災ニ關スル國外情報(其21)」,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287~289, 302, 307, 395, 458~459쪽.

35 「진재 시의 조선인 殺戮 사건과 팸플릿 정책」, 『동아일보』, 1924.2.27.

36 「流言に惑はず安心せよ」, 『京城日報』, 1923.9.7.

37 성주현, 2020, 앞의 책, 184~185쪽.

『(1923년 9월) 간토의 진재에 대한 정보』에서는 대표적으로 강원도의 상황 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에서는 9월 5일 간토대진재에 대한 민정(民情)에 대 해 경무국장, 각 도지사,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 검사, 경성지방법원 철원지청 검사, 함흥보병 제37여단장과 제74연대장, 도내 각 경 찰서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도쿄 부근 진재와 관련해서 강원도 인민의 감상을 보면, 춘천지방에서는 9월 2일 오전 10시 매일신보사 춘천지국에서 읍 내 각 요소(要所)에 “이번 대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 시가는 완전히 쓰러졌다.

불이 나 지금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

전 시가가 전멸했다”는 게시문을 붙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놀라워했다고 한다.

일부 조선인들은 앞서 평양 지방의 대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아직 그 구제에 분주한데, 지금 또 내지에 진재로 참상이 벌어져 일본인이 진재를 두려워하여 조선, 만주 등지의 안전한 지대를 선택하여 올까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평강군(平康郡) 평강읍(平康邑) 내 일본인들은 이번 도쿄 부근의 진재는 실로 전에 없던 참화(慘禍)이므로, 9월 3일 정오 조선총독 앞으로 궁성(宮城)에까지 재해가 미친 사실에 매우 공구(恐 懼)하니 위문을 부탁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38

38 江原道 → 警務局長, 各 道知事,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春川支廳 檢事, 鐵原 支廳 檢事, 咸興步兵 第37旅團長, 咸興步兵 74聯隊長, 道內 各 警察署長, 1923년 9월 5일, 「民情彙報」,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21~23쪽.

이처럼 도의 상황을 보면, 간토대진재 소식이 공식 전보보다도 하루 정도 빨 리 9월 2일경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이토 총독은 이 미 9월 1일 밤 간토대진재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9월 2일 새벽 2시에 공식 전 보는 아니지만 전보를 받은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이날 아침 사이토 총독에게 이 에 대해 보고한 후, 국경지역과 경상남도를 포함하여 재빠르게 각 도에 소식을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방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안전한 조선으로 많이 이주해 와서 그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한 점이 눈에 띈다.

진재 후 총독부 는 조선인이 일본에 건너가는 것은 제한했지만, 일본인이 조선에 오는 것은 제 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정부의 지시에 따라 총독부는 최대한 조선인은 단속하고, 일본인은 보호하도록 민족적으로 구분하여 조처했다.

III.경찰과 법원의 정보 보고와 대응

1. 경찰의 조선인 운동 경계 및 경제적 위기 우려 보고

간토대진재에 대한 공식적인 전보가 오기 전날인 9월 2일, 이미 종로경찰서장 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檢事正) 앞으로 서울 시내 정황에 대해 보고했다. 우선 서울청년회에서 기념회를 거행하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그 간부가 출두하여 기 념회 개최를 희망했음을 전했다.

이에 대해 경찰이 보고한 이유는 서울청년회39 는 간토대진재를 계기로 사회주의운동을 일으킬까 경찰 당국이 가장 경계·감 시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40

도쿄에서 간토대진재에 대한 공식 전보가 온 다음 날인 9월 4일에 바로 종 로경찰서장은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앞으로 간토대진재에 대한 ‘민중의 감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첫째, 일부 학생 및 주의자로 간주할 만한 무리가 서서히 상하 계급과 통하 며 이번 대재해에 대해서 동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이번 재해에 대하여 이렇다 할 정치적 논평은 거의 없지만, 경제 방면 에서 논평하여 그 장래를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① 간토대진재 구제에 큰 비용이 필요해지면서,41 그 영향이 조선에 미쳐 예년의 보급금이 중지되지 않을까 걱정했다.42

39 서울청년회는 1921년 서울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청년단체로, 상해파(上海派) 고려 공산당 국내 세력과 대립하여 당 조직을 지향한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했다. 이후 전 위 조직체인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기 위해 화요파와 경쟁하다가 1929년 8월 해체되 었다.

40 京城 鍾路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2일, 「市內情況報告 ノ件(第二報)」,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6~12쪽.

41 간토대진재로 인한 손해액은 백수십억 엔에 달했다고 한다(大日本雄辯會講談社, 1923, 『(大正)大震災大火災』, 89쪽).

42 조선총독부는 1924년도 보급금으로 3,000만 엔을 요구하려다가 간토대진재의 영향으로 치수사업계획을 포기하기로 함에 따라 1,000만 엔을 삭감하여 2,000만 엔 을 요구했다(「내년도의 보급금」, 『매일신보』, 1923.10.11).

게다가 각 개인에 대한 납세율이 가중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② 현재도 금융 핍박 곧 금융시장에서 자금의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상태 인데 이번 재해의 결과 이것이 더욱 심해지고, 물가는 모두 폭등할 것으로 예상 되었다.43

43 그렇지 않아도 1923년에 조선 서부지방은 대수해(大水害)를 입어 금융의 핍박을 받고 물가가 등귀하는 상태였다(江原道警察部長 → 警務局長, 各 道知事, 朝鮮 憲兵隊司令官,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春川·鐵原支廳 檢事, 咸興步兵 第37旅 團長, 咸興步兵 第74聯隊長, 道內 各 警察署長, 1923년 9월 23일, 「內地震災 ニ對スル部民ノ感想(第10報)」,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266쪽).

예를 들어 당시 필수품인 쌀은 2배로 가격이 올라, 조선처럼 무산자 (無産者)가 다수인 곳에서는 당장 생활에 위협을 받는 상태였다. 이에 당국이 ‘간상배(奸商輩)’를 단속해 주기를 희망했다.

③ 건축 재료, 의류는 물론 식량, 쌀값 등의 폭등을 피할 수 없는 때 반드시 폭동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④ 경성부 내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는 자가 쌀값이 앙등할 것을 예상하여 쌀 을 매점매석하고, 특히 정미상(精米商), 백미상(白米商) 등 미곡상이 쌀값을 더 올렸다.

⑤ 일본은행이 소실되어 중국 은(銀)의 시세에 커다란 변동이 생겼는데, 재해 전에는 일본 돈 1엔에 대해 중국 돈 1엔 30전 정도이던 것이 재해 후에는 정반대로 일본 돈 1엔에 대해 중국 돈 90전 정도가 되었고 앞으로도 더 변동할 것으로 보였다.

⑥ 일본 내지의 보험회사(생명화재 포함)는 모두 이번 재해에 대 해 보험금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경성에 있는 이들 회사의 지 점 모두 내지에 본점을 두고 있으면서 본사와 동일한 보조를 취할 것이므로 가 입자에게 커다란 관계가 있어 지불 요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⑦ 한성은행 관계자 말에 따르면, 한성은행 도쿄지점에 예금 600만 엔이 있는데 이에 대한 상당한 대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이번 재해로 인해 대출금이 회수될 전망 은 없고 예금자는 전부 인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혹 은행이 망하지 않을 까 우려되었다.

셋째, 일본제국의 수도인 도쿄가 전멸한 것은 일본이 이전부터 취해 온 식민지 정책이 참혹했던 결과로, 이번 사변은 소위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넷째, 고학생(苦學生)들은 매 시각 발행되는 신문의 호외를 보고 좋아하는 태도를 보이고 동정하는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섯째, 이번 재해로 인한 실업자 구제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이들이 주의자와 공명하여 일대 변동이 생길 수 있는데 주의자가 은밀히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섯째, 보천교, 천도교, 조선교육협회, 기독교회, 불교청년회 등이 이번 재 해에 조금도 동정을 표하지 않고 도리어 환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고학 생 회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민심을 선동하고자 하면서 우선 학생 방면을 선동하려고 하여, 공사립 학교 학생의 동맹휴교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곱째, 이번 재해에는 유족 가운데 주의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일본정 부는 보고 있어 철저히 단속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여덟째, 이번 대재해에 대해서 유족들은 크게 동정하고 있으니, 이재민 구조 와 관련하여 셋쇼노미야(攝政宮)[히로히토(裕仁), 훗날 쇼와(昭和) 천황] 전비(典 費) 등의 반을 할당하여 여기에 충당하는 것이 적당하겠다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홉째, 이번 재해 시 많은 궁성(宮城)을 개방하여 이재민을 수용하는 것을 보고 이러한 일은 민주국(民主國) 건설의 전조(前兆)라고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 이었다.44

44 京城 鍾路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4일, 「東京地方震災 ニ對スル部民ノ感想」,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17~20쪽; 京城地 方法院 開城支廳 檢事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3일, 「震災ニ關 スル民心ノ傾向」,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182쪽.

그 밖에 강원도경찰부장도 도내 평강(平康)지방 민간에서 대진재로 인해 일 본 내지의 은행과 회사가 다수 소실되어 일본 화폐 가치가 떨어지게 되리라 예 상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경성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진재 이재민 구원을 위한 의연금 모집에 열성인데, 이는 결국 호세(戶稅) 및 기타 세금으로 부과·징 수되지 않겠는가 지방민들이 예상하고 있다고 알렸다.

한편 회양(淮陽)지방의 일부 민간에서는 배일사상을 품은 ‘불령 무리(徒輩)’가 일본 내지의 진재를 기회 로 하여 음모를 기도하는 자가 많다고 보고했다.

또한 조선에 있는 미국인 선교 사 및 기타 기독교 신자들 중에 이들 ‘불령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면에서 원 조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는 것이었다.45

위 경찰의 ‘민중’ 동태에 대한 보고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간토대진재가 미칠 경제적 영향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논의가 오간 점이다.

간토대진재 구제 에 큰 비용이 필요해지면서 일본정부가 조선에 보내던 예년의 보급금이 중지되 지 않을까 걱정하고, 각 개인의 납세율이 가중되지 않을까 우려했으며, 금융 핍 박이 더 심해지고 쌀값 등 물가가 폭등하여 당장 생활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질까 염려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 상황 속에 당국은 ‘폭동’이 발발하지 않을까 주시하면 서, 경제 부문에서는 제 물가 등귀를 우려하여 칙령 「폭리취체령(暴利取締令)」 46 을 시행했다.

「폭리취체령」은 꽤 효과가 있어 그 발포 후 물가가 앙등하지는 않 고, 쌀값도 이전보다 조금 상승하는 데 그치고 곧 하락한 것으로 보였다. 한편 치안 부문에서는 유언비어 단속 등을 위해 「치안유지령」 47을 적용하는 등 나름 의 방책을 강구했다.

45 江原道警察部長 → 警務局長, 各 道知事,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春川·鐵原支 廳 檢事, 朝鮮憲兵隊司令官, 咸興步兵 第37旅團長, 咸興步兵 第74聯隊長, 道 內 各 警察署長, 1923년 9월 15일, 「內地震災ニ對スル部民ノ感想(第6報)」, 京 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151~152쪽.

46 「폭리취체령」이 9월 10일 일본 척식국 통신에 따라 조선에서도 시행되었다(「시행 의 필요가 적은 것은 오히려 환희하는 바이라」, 『매일신보』, 1923.9.12).

47 9월 7일 과거 두 번이나 유산된 「과격사회운동취체법」안을 부활시킨 「치안유지령」 이 긴급 칙령으로 공포되어, 치안을 해치는 사항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징역 10년의 중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1925년 「치안유지법」의 전신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 국민족문화대백과』).

더욱이 진재에 대해 ‘불온한 언동’을 한 자는 징역에 처하라는 명령이 발포되었다는 말도 전해졌다.48

또 경찰은 한편으로 고학생, 실업자, 보천교, 천도교, 기독교회, 불교청년회, 조선교육협회, 유족 등이 소위 ‘주 의자’와 연대하여 민심을 선동하여 동맹휴교 등의 운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상당 히 경계했다.

그러나 간토대진재로 인한 경제적 위기에 대한 우려는 지역별로 다소 차이 가 있어, 거의 경제적 영향이 없는 지역도 있었고, 오히려 쌀값이 폭등하여 대지 주가 차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9월 13일 인천경찰서장이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에게 보고한 ‘민심 경향 및 기타에 관한 건’을 보면, 간토대진재가 지역경제 에 미치는 영향이 클까 처음에는 우려했다고 말하고 있다.

인천에 재해 소식이 보도되자 실제 일시적으로 특종 물품 가격이 다소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 이다.

상인들도 이번에 발포된 「폭리취체령」이 조선에도 적용될 것으로 보이자 크게 경계하는 태세를 보였다.

수요자들도 내지의 진재 발생 당시에는 여러 물 가의 폭등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활난을 걱정했다.

하지만 일부 대지주는 쌀값이 폭등할 것을 예상하여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인천지방 주민들 은 거의 자작하거나 자급자족하는 자가 많아 특별히 걱정할 상황은 펼쳐지지 않 았다는 것이다.

한편 지역에 따라서는 오히려 미가가 하락하는 곳도 있었고, 「폭리취체의 건」 부령(府令)이 발포되어 쌀값이 오르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다.49

48 京城西大門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4일, 「內地震災ニ 對スル一般ノ狀況ニ關スル件」, 春川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5일, 「東京地方震災ニ對スル部民ノ感想」,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164, 169~170쪽.

49 仁川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3일, 「民心ノ傾向其他ニ 關スル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38~40쪽; 「米界의 前途觀」, 『조선일보』, 1923.9.16. 일본에서는 간토대진재 직후 상공업이 일시적으로 중단되 었다. 그러나 간토대진재로 물가가 등귀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일본정부가 비상 수단으로 「징발령(徵發令)」, 「폭리취체령」, 「지불연기령(支拂延期令)」을 발동하 고 생활필수품 수입관세를 감면하면서 일부 소수의 물가가 등귀했다가도 곧 1~2할 정도 하락했다고 한다(大日本雄辯會講談社, 1923, 앞의 책, 103쪽; 山本美 編,1924, 앞의 책, 94~95쪽).

또한 경기도경찰부장은 간토대진재로 다소 물가가 오른다 해도 당국에서 폭리 단 속에 대한 준비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며 크게 우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특 히 경성과 인천의 재고 미곡은 약 8만 석으로 반년 양식은 되고, 또 햅쌀이 계속 나올 것이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쿄 일대 식량 공급과 생활 안정이 곧 회복될 것으로 전망하여, 경성의 물가가 오른다 하더라도 길어 야 한 달 정도일 것으로 예측했다.50

50 「조선에는 물가가 폭등할 리가 없다」, 『매일신보』, 1923.9.7.

2. 법원의 체제 수호 자세와 일본인-조선인 충돌 대비

간토대진재에 대한 공식 전보가 온 바로 이튿날인 1923년 9월 4일, 경성지방법 원 검사정은 종로경찰서장에서 보고받은 내용의 대개를 조선총독부 법무국장, 고등법원 검사장, 경성복심법원 검사장에게 보고했다.

즉 도쿄 진재에 대한 정 보로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감상이 주로 학생들에 의해 전해져서 이를 믿는 자 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첫째, 일본제국의 운명도 끝인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이지(明治) 폐 하의 시대는 치정(治政)이 구석구석까지 미쳐 미동(微動)도 없이 사시사철 사람 들이 평화로웠는데, 다이쇼 시대 지금은 심히 이에 미치지 못해, 즉 정쟁(政爭) 이 그치지 않고 노동쟁의라는 커다란 문제가 일어났으며 이에 더해 미증유의 천변(天變)까지 일어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경제 문제는 아무리 수 완가라고 해도 수습할 수 없고 사회조직이 파탄 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둘째, 공산제의 실현을 촉진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자산가가 천재 (天災)를 기회로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려고 하는 한편, 무산자는 실업하여 궁핍 해지고 있다고 했다. 이에 충돌이 일어나면 정치 중심을 확고히 하며 이를 진압 해야 하나, 무산자(無産者) 운동 봉기가 일어나도 제지하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 이다.

셋째, “머지않아 동양의 사회조직에 일대 개혁”이 있으리라 전망하고 있다 는 것이다.

넷째, 일본은 세계 제일의 지진국이자 화재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리학 연구는 세계 제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지리학자 중 과거 30년 이내에 일본이 물에 휩쓸려 갈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것이 적중했다는 것이다.

또한 ‘지식 유산자(有産者) 계급’은 “이번 재해는 미증유의 것으로 일본의 손 해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선과 동양 각국에 누를 끼쳐 손해가 크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무산자 및 주의자들이 ‘준동(蠢動)’을 기도하 고 있는데, 다행히 서울청년회 관계자 다수가 검속 중이나 그들이 석방되면 이 러한 ‘동요’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이번 대진재 복구에 커다란 국비가 필요하게 되면서, 조 선총독부에 대한 예년의 보급금을 지불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조선 민족은 경제상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밖에 이번 진재로 인해 내지 일본인 다수가 조선에 이주하여 동양척식주 식회사 등이 이때까지 조선인이 소작해 왔던 토지의 소작권을 빼앗아 일본인에 게 주고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또 조선 이주 일본인이 많아지면서 면장, 순사 등 관공리도 조선인보다 일본인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에 조 선인 생활에 커다란 불안이 생겼다고 했다.

이에 조선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적극적 행동에 나서, 천도교청년당, 조선교육협회, 노동연맹회 등 단체가 같은 의견을 갖고 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점을 걱정했다.

그리하여 일본인과 조선인 의 충돌이 크게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실제로 9월 중순경 부산에서는 대자본의 미곡무역회사인 스즈키(鈴木)상점 을 조선인들이 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한편으로 조선 재주 주의자 가 일본 내지 재주 주의자와 이번 기회에 연대하여 함께 활동하지 않을까 우려 했다.51

이에 심지어 재조일본인 중에는 조선인에게 위협을 느껴 한밤중에도 칼 (刀)이나 검(劍), 엽총 등의 무기를 호신용으로 휴대하고 있는 자도 생겼다.52

이처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간토대진재 이후 ‘괴소문’이 퍼져 일본제국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고, 공산주의가 확산할까 우려했다.

특히 경찰 보고의 연장선 상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 조선인과 경제적으로 충 돌하면서 ‘동요’가 일어나지 않을지 걱정하며 대비하려 한 점이 눈에 띈다. 각 법원 지청 검사들도 경성지방법원 검사장 앞으로 민심의 경향에 대해 보 고했다.

예컨대 9월 7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는 간토대진재에 대한 관 할 지역 민심의 경향과 관련하여, 특히 사회주의적·무정부주의적 경향이 있어 이를 시찰하여 총독부에 수시로 통보하겠다고 했다.

또한 관할 지역에서 이와 관련하여 범죄가 있을 때는 즉시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진재에 대해 유 언비어를 퍼뜨리거나 폭리를 취하려고 하는 자에 대해서 단속하겠다고 보고 했다.53

51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 法務局長, 高等法院 檢事長, 京城覆審法院 檢事長, 1923년 9월 4일, 「東京震災ニ對スル一部ノ民ノ感想ニ關スル件」, 京城地方法 院 檢事局, 1923, 앞의 책, 1~5, 7~9, 13~15쪽.

52 京城 本町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17일, 「震災ト民心ノ 傾向」, 京城 西大門警察署長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22일, 「內 地震災ニ對スル一般ノ狀況ニ關スル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284, 317쪽.

53 京城地方法院 水原支廳 檢事 → 京城地方法院 檢事正, 1923년 9월 7일, 「民心 ノ傾向ニ關スル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27~28쪽.

무엇보다도 각지 법원에서는 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를 가능한 한 처벌 하려고 했다.

9월 11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는 고등법원 검사장에게도 민심의 경 향에 대해 보고한다.

특히 일본에서 은밀히 귀국하여 유언을 퍼뜨려서 선동을 감행하거나 오해로 인심을 혹란(惑亂)시키고 ‘불온한 언동’을 하는 자가 있어 엄 중히 시찰하고 정탐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경찰범처벌규칙」, 「보안법」 등 국법에 위반하는 행위를 할 때는 경찰서와 합동하여 가차 없이 이 들을 검거하여 송치하겠다고 보고했다.54

이와 같이 법원으로 전해진 간토대진 재 관련 식민지 조선 내 민심에 관련한 정보 보고는 고등법원장에까지 전해 졌다.55

54 京城地方法院 水原支廳 檢事 → 高等法院 檢査長, 1923년 9월 11일, 「民心ノ 傾向ニ關スル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97~102쪽.

55 高等法院 檢事長 → 地方法院 檢事正, 支廳 檢事 및 檢事事務取扱, 1923년 9월 6일, 「民心ノ傾向ニ關スル件」, 京城覆審法院 檢事長 → 地方法院 檢事正, 地方法院 支廳 檢事 및 檢事事務取扱, 1923년 9월 6일, 「民心ノ傾向ニ關スル 件」, 京城地方法院 檢事局, 1923, 위의 책, 24~25쪽.

이러한 보고를 보면, 법원은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로 인한 조선인 ‘동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여, 「경찰범처벌규칙」이나 「보안법」을 적용하여 엄격히 관계자들을 처벌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IV.맺음말

조선총독부는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은폐·축소하고 진상을 왜곡하 는 데 주력했다. 우선 총독부는 언론을 통제하면서 당시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은폐·축소·왜곡하려 했다.

아울러 총독부는 간토대진재 후 조선인 단속을 위 해 조선인의 일본 내지 도항을 제한했다.

한편 총독부는 독립운동이 활발한 국 경지대의 경계를 강화했다.

총독부 경무국은 국외 형세를 고려하여 국경지방의 경비, 해안선의 경계를 매우 엄격히 하고, 국외에 연락·왕래하는 ‘불령선인’들 을 더욱 주도면밀하게 사찰하려 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 련해서 단 한 건도 일본정부에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보건대 총독 부가 3·1운동 또는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사건을 겪으며 이후 능동적으로 재일조선인 정책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선행연구의 분석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 로 판단된다.

지방의 상황을 보면,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안전한 조선으로 많 이 이주해 와서 그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했다.

진재 후 총독부는 조선인이 일본에 건너가는 것은 제한했지만, 일본인이 조선에 오는 것은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한 조선인은 단속하고, 일본인은 보호하도록 민족적으로 구분하여 조처한 것이다. 경찰은 ‘치안 유지’를 먼저 신경 쓰며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의 영향으로 조선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계했다.

경찰은 간토대진재에 대한 공식 전보 가 오기 전부터 서울청년회 등 사회주의단체가 간토대진재를 계기로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킬까 가장 경계·감시했다.

또한 경찰은 한편으로 고학생, 실업자, 보천교, 천도교, 기독교회, 불교청년회, 조선교육협회, 유족 등이 소위 ‘주의자’ 와 연대하여 민심을 선동하여 동맹휴교 등의 운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상당히 경 계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하에서도 총독부가 우선시했던 ‘치안제일주의’ 의 방침이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사건을 겪으며 경찰당국을 통해서 더욱 강 화된 것이다.

한편으로 경찰은 식민지 조선이 간토대진재로 인해 경제적 위기에 처하지 않을까 주시하며 보고했다.

간토대진재 구제에 큰 비용이 필요해지면서 일본정부가 조선에 보내던 예년의 보급금이 중지되지 않을까, 각 개인의 납세율 이 가중되지 않을까, 금융 핍박이 더 심해지고 쌀값 등 물가가 폭등하여 당장 생 활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질까 우려했다.

당국은 이러한 경제적 위기로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운 것이다.

법원에서는 간토대진재 이후 ‘괴소문’이 퍼져 일본제국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고, 공산주의가 확산할까 우려했다.

이에 법원이 나서서 사상 통제를 우선시 하며 사법권을 행사하려 했다.

대진재를 빌미로 ‘체제 수호’를 위한 통제와 탄압 이 거세진 것이다.

각지 법원에서는 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를 가능한 한 처벌 하려고 했다.

법원은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로 인한 조선인 ‘동요’에 매우 민 감하게 반응하여, 「경찰범처벌규칙」이나 「보안법」 등을 적용하여 엄격하게 관 계자들을 검거하려 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 조 선인과 경제적으로 충돌하면서 ‘동요’가 일어나는 상황에 대비하려 했다.

이상으로 이 글에서는 간토대진재 100주년을 맞아 아직 연구가 미흡한 주 제에 대해 사료를 발굴·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연구는 무엇보다도 간토대진재 당시 조선인 피해 현황과 학살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고, 일본정부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기억을 계승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 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직 연구되지 않은 자료가 산재해 있다.

예컨대 국사편찬 위원회에서 수집한 금병동 문고와 박경식 문고에 포함된 방대한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관련 자료 및 연구서를 비롯하여,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헌정자료인 「간토대진재 대책협의회 기록」, 「호소이 하지메(細井肇)의 서한(書 翰): 간토대진재 이후의 시국에 관한 의견」, 「한상룡의 서한: 간토대진재 이후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편지」, 국문학연구자료관 소장 모리야 에후(守屋榮夫) 문 서 중 도쿄부지사 히라쓰카 히로요시(平塚廣義)-도쿄시장 니시쿠보 히로미치 (西久保弘道) 서간(書簡),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와사키시(川崎市) 후레아이 관 소장자료인 ‘간토대진재 시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고 위령하는 회’의 『회보』, 오사카부 오사카시 이카이노(猪飼野) 샛바람문고 소장자료인 잡지 『글 방』[현대어학숙(現代語學塾)], 규슈대학(九州大學) 조선사학연구실 모리타 요시 오(森田芳夫) 문고 자료인 잡지 『백엽(白葉)』[백엽동인회(白葉同人會)] 등의 자료 중 미검토 내용을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를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참고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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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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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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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식민지 조선 당국의 대응 최은진 조선총독부는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은폐·축소하고 진상을 왜곡하 는 데 주력했다. 우선 조선총독부는 언론을 통제하면서 당시 조선인 학살의 진 실을 은폐·축소·왜곡하려 했다. 아울러 총독부는 간토대진재 후 조선인 단속 을 위해 조선인의 일본 내지 도항을 제한했다. 한편 총독부는 독립운동이 활발 한 국경지대의 경계를 강화했다. 총독부 경무국은 국외 형세를 고려하여 국경지 방의 경비, 해안선의 경계를 매우 엄격히 하고, 국외에 연락·왕래하는 ‘불령선 인’들을 더욱 주도면밀하게 사찰하려 했다. 지방의 상황을 보면, 특히 조선인들 은 일본인들이 내지에서 안전한 조선으로 많이 이주하여 그들에게 또 다른 피해 를 주지 않을까 걱정했다. 식민지 조선 당국은 최대한 조선인은 단속하고, 일본 인은 보호하도록 민족적으로 구분하여 조처했다. 경찰은 간토대진재와 조선인 학살의 영향으로 조선인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까 경계했다. 한편으로 경찰은 식민지 조선에 경제적 위기가 생기지 않을까 주 시했다. 법원은 간토대진재 이후 일본제국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가 활동하는 것을 가능한 한 탄압하려 했다.

또한 식민지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 조선인과 경제적으로 충돌하면서 ‘동 요’가 일어나는 상황에 대비하려 했다.

주제어: 간토대진재, 조선총독부, 경찰, 법원, 학살, 제노사이드

ABSTRACT

Colonial Joseon Authorities Response to the Great Kanto Earthquake Disaster and Massacres of Koreans

Choi Eunjin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focused on covering up, minimizing, and distorting the truth about the Great Kanto Earthquake Disaster and the massacres of Koreans. First of all,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controlled the media and tried to conceal, minimize, and distort the truth of the massacres of Koreans.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lso restricted Korean crossing to Japan in order to crack down on Koreans after the Great Kanto Earthquake Disaster. The authorities organized their actions along ethnic lines to crack down on Koreans and protect Japanese as much as possible. The police were wary of a Korean movement in the wake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Disaster and the massacre of Koreans. On the other hand, the police kept an eye out for economic crises among the colonial Korea. After the Great Kanto Earthquake Disaster, the courts sought to punish communist, socialist, and anarchist as much as possible that threatened the Japanese imperialist system. They also worried and prepared that the increasing number of Japanese immigrants to colonial Korea would lead to economic conflicts with Koreans and cause “agitation”.

Keywords: The Great Kanto Earthquake Disaster,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police, court, massacre, genocide

동북아역사논총 81호(2023년 9월)

* 투고: 2023년 7월 15일, 심사 완료: 2023년 8월 22일, 게재 확정: 2023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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