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1회
떼돈 한번 벌어보자 떼군~~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함부로 배지 못하도록 하는 송금(松禁)이라는 제도가 있어
635곳의 봉산(封山)을 지정하여 보호했다.
소나무는 건축재와 땔감에 관곽(棺槨)과 조선 등 수요가 많았으나 공급은 부족해서 집의 크기를 억지로 줄이는 정책을 펴기도 했을 정도다.
무릎을 겨우 들이는 좁은 집이라는 용슬(容膝)은 빈말이 아니었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많은 집을 짓게 되자 압록강 일대에서 목재를 들여왔다고 했다
그많은 목재를 어떻게 옮겼을까?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당시에 물길은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이 활용되었다.
목재는 매우 무겁지만 물에 떴으므로 나무를 엮어 물길따라 내려 보내는 걱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조선 초부터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목재를 공물로 바쳤는데 이 때 떼꾼은 물길로 떼를 옮기는 일을 했다.
세종실록에서는 강원도 백성들은 농한기가되면 떼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순전히 떼꾼으로 업을 삼은 이도 있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강 연안에 사는 모리배들이 공갈을 쳐서 떼꾼이 옮기던 나무를 빼앗거나 대금 지급을 지연하고 헐갓에 강매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세종은 실상을 조사해 그 폐단을 없애 주기도 했다.
세조와 성조 임금땐 나라에서 쓸 목재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적인 벌채를 금지햇다. 농사만으로 한 해를 넘기기 어려운 현지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처사였다.
떼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10분의 1의 세금을 거두는 시절도 있었다.
탐관오리들은 강원도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정도로 납버을 일삼았으며
떼꾼들에게는 벌채가 금지되었다는등의 명목으로 나무를 뻬앗거나 가두어 매를 치고 속전까지 요구하면서 괴롭히기도 했다.
떼꾼의 작업은 나무를 베는 일부터 시작한다.
나무는 가을에 열두자(4미터)정도로 미리 배어둔다.
이듬해 봄에 눈이 녹아 길이 미끄러워지면
산 아래의 강 어귀로 내려 보냈다.
떼는 열둘 내지 열다섯 동가리로 엮고 이를 기차처럼 연결했다.보통 30미터가 넘었으며
이것을 한바닥이라고 부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2회
두 사람이 한 바닥의 떼를 운행했는데 앞 사공은 물길을 잘아아야 해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맡았고 뒷 시공은 키를 잡아야 하므로 힘 좋은 사람이 맡았다.
떼는 얼음이 녹는 4월경부터 다시 얼기 전인 음력 10월 말까지내려 보냈다.
출발할 때 얼마분량의 나무가 내려간다는 도록을 적어주고 나무를 분실하면 배상책임을 지웠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몇 동가리 정도는 눈 감아 주었다.
물이 많을 때에는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이면 갈 수 있었지만 한달도 걸릴 때가 있기도 했다.
문제는 곳곳에 숨어 있는 돌부리와 여울이었다.
돌부리에 걸라면 떼를 묶은 부분이 찢어져 나무를 잃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살이 쎈 여울에 휘말리면 ‘돼지꼬리친다’라고 하여 뗏목이 돼지꼬리처럼 꼬이면서
묶은 곳이 몽땅 터져 버리게 된다.
이 경우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다.
가장 위험한 여울은 강원도 평창의 황새 여울과 영월의 되꼬까리 여울이었다.
위험한 직업인만큼 보상도 많았다.
1864년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동강에서 한강 일대는 떼꾼으로 넘쳐났다.
당시 군수 월급이 5원인데 떼를 한번 타면 15원을 받았다.
많게는 1년에 일곱 번 이상을 왕보을 할수 있으니 농사외에는 변변한 수입이 없던 사란들에겐 그야말로 떼돈을 벌 대박의 기회였던 셈이다.
“ 천질에 만질에 떼 품을 팔아서
술집 갈보 치마 밑으로 다 들어가구 말았네
돈스던 남아가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 맞은 국회라
술 잘 먹구 돈 잘 쓸 때는 금수강산일러니
술 안먹구 돈 떨어지니 적막 강산 일세 “
<<정선 뗏목 아리랑>>
그러다 보니 이들의 돈을 노리는 사람도 많았다.
남한강 가에 즐비한 주막에서는 떼꾼이 지날 때 마다
작은 배를 타고
따라오며 술과 노래로 유혹을 했다.
큰 돈을 벌어 씀씀이가 해퍼진 떼꾼들은 주색에 빠지거나
몽땅 속옷차림으로 고향에 돌아기기도 했다.
떼꾼은 강에 다리가 놓이고 보가 설치 되면서 점점 줄어들었고
1960년대 말 팔당댐이
건설되어 물길이 끓기자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떼꾼이 즐겨 부르던 아리랑만 남아 그들의 삶과 애환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3회
머슴들의 휴일~~
조선시대 머슴들에게도 휴일이 있었다. 과연 그랬을까
설.한식.단오.추석 같은 명절에도 그들은 오히려 쉬질 못했다.
양반이나 일반 양민들이 모두 하루를 쉬며 즐겁게 먹고 놀아도 그들은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더 고된 노동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머슴들에게 가장 편했던 시기는 농번기가 지난
겨울이었다.
이런저런 잡일이야 끓이지 않았지만 힘든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양이가 쥐를 몰 때도 도망갈 때를 남겨두는 법.
겨울철 말고 꼭 하루는 이들이 쉬는 날이었다.
바로 2월1일이다.
삭일(朔日)이라 하여 조정에서 농사에 힘쓴 것을 특별히 당부하는 날이다.
음력 2월1일은 바야흐로 농사일이 시작되는 때였다.
즉. 한 해 농사를 위해 갖가지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날 하루 노비를 쉬게 한 까닭은
한 해 내내 본격적으로 일을 시키기 전에 미리 그 수고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다.
주인은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노비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술도 듬뿍 먹여 거나하게 취하게 했다. 또 송편까지 빚어냈다.
정월 대보름 볏단에 담아 두었던 곡식을 꺼내 흰떡을 콩을 넣어 여민 다음 시루안에 솔잎을 깔고 이것을 올려놓고 푹 찌면 송편이 된다.
이 송편을 노비에게 나이 수만큼 먹이는데 나이 많은 노비는 이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이 외에도 팥이나 꿀,붉은 대추.삶은 미나리를 넣어 빚기도 했다.
이런 음식은 노비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2월 내내 먹는 시절 음식이 되었다.
이른바 머슴 날에는 따로 노비들끼리 모여 풍물을 치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들만의 잔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머슴 뿐 아니라 일반 농군중에 막 성인이 된 이들의 성인식도 겸했다고 한다.
경남 의령이나 양산지역에서는 이 날 스무살이 되는 사내들이 동네 어른과 일꾼들에게 술과 음식을 한턱 내서 이제부터는 나도 성인이요.하고 신고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노비의 날’. 혹은 ‘머슴의 날’은 가장 값싼 노동력을 일년 내내 제공 받는데 대한 주인의 배려였던 것이다,
주인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주인 맘대로 처벌을 해도 괜찮던 시절에 이렇게 노비들에게 하루 동안은 푹 쉬게 하고 푸짐한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비록 더 많은 노동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만 말이다 .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4회
프로바둑 기사 기객~~
“대국 세 판이 진행되면서 승패와 유불리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럴때면 구경꾼 모두 눈을 부릅뜨고 발을 구르며 그 형세를 돕고자 훈수를 두었다.
국수는 끝내 동요하지 않은 채 불리해도 막지 않고 유리해도 기뻐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법도에 따라 바둑을 두었다“
<안중관의 ‘회화집’에서>
한.중.일 세 나라는 바둑을 즐겼다.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바둑돌을 미리 깔아 놓고 공방하는 순장바둑을 주로 두었다.
김창업은 ‘노가재연행록’에서 중국인과 바둑을 두었던 경험을 이렇게 술회했다.
“우리식과 같지만 대국을 시작하며 배자(돌을 미리 까는 것)를 하지 않은 점이 달랐다.
삼국시대부터 사랑받은 바둑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온 가족이 즐기는 놀이로 자리매김 했다.
우리 고전 소설들은 가족이 모여 대국하는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들 소설은 임금과 신하. 남녀 성 대결.
그리고 조선후기 바둑열풍을 짐작케 한다.
바둑을 둔다고 쌀이 나오거나 떡이 나오지는 않을 터, 그래도 바둑을 생업으로 삼는 이도 있었다.
영조 때 문인 유본학은 김석신에게 보내는 글을 남겼다(문암유고)
김석신은 국수(國手)로 손꼽혔으며 내기 바둑을 두어 딴돈으로 생활을 했다.
김석신은 오늘 날 바둑으로 먹고 사는 프로기사인 셈이다.
그러나 내기 바둑만으로 생계를 꾸리기란 쉽질 않았다.
많은 바둑기사가 후원자를 두었다.
후원자가 있는 바둑기사는 기객(바둑을 두는 식객)이라 불렀다.
기객은 부호나 세력가에게 후원을 받으며 오직 바둑 기량을 갈고 닦았다.
유명한 기객으로 김종귀.양익빈.변홍편. 정운창 등이 기록에 나온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바둑 기사다.
바둑기사 가운데 최고봉에 오른 이는 국수 혹은 국기라 불렀다.
국수의 반열에 오르면 조선을 대표하는 바둑 기사로 큰 영예를 누렸다.
이중에서 김종귀 와 정운창은 여러 문인들의 글에 시심찮게 등장한다.
서로 한 시대를 풍미한 맞수 였기 때문이다.
김종귀가 한 발 먼저 국수에 자리에 올랐고 정운창은 김종귀를 누르고 새롭게 국수가 된다.
이서구의 ‘기객소전’에 따르면
정운창은 사촌 형에게 바둑을 배웠다.
어찌나 바둑에 몰두했던지 6년 동안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바둑돌을 손에 쥐면 먹고 자는 일 조차 잊었다고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5회
정운창은 조선 정조임금 때 문인 이옥이 지은 ‘정운창전’의 주인공이다.
정운창은 병치례가 잦았다고 한다.또 별난 구석이 있지만 다른 바둑 기사 역시 어려서부터 바둑공부를 했을 것이다.
6년동안 방안에서 바둑공부를 했다거나 10년만에 묘수를 터득했다는 일화는 정운창이 그만큼승부사의 기질과 집념을 보여준 기사라는 것을 알수 있다.
당시 바둑 기사 직업이었기 때문에 가능 했으리라 본다.
신예 정운창과 국수 김종귀의 대국은 한양이 아닌 평양에서 이루어 졌다.
김종귀의 후원자가 평양 감사였기 때문이다.
정운창은 긴 수련 끝에 세상에 나와 단박에 국수 김종귀를 이겨 버렸다.
이리하여 정운창은 평양감사의 기객이 된다.
평양감사는 정운창에게
백금(은화) 스무냥을 곧 바로 꺼내 주었다,당시 한양 집 한 채 금액이다.
실력있는 기사는 바둑대회에 초빙되었으며
대회를 주최한 사람은 큰 상금을 걸었다.
또 대국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고가의 상품이 걸리기도 했다.
한 정승은 정운창에게 최선을 다 하지 않는 다며 남원산 상화지(고급종이)를 상품으로 내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지만 바둑 기사는 서로를 존경도 했다.
한 정승이 개최한 바둑대회에서 김종귀와 정운창은 다시 대결을 했다.
두 판을 연거푸 진 김종귀가 정운창에게 눈짓을 주었다.
마지막 셋째 판에서 정운창은 일부러 실수(?)를 거듭했다.
이미 승패는 결정 되었으니 셋째 판은 김종귀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어우야담에 나오는 ‘바둑의 고수’ 이야기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등허리에 올라탄 놈도 있다 했으니 세상은 알면 알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세상을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세상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다가는 큰 코를 다치기 십상이라고 한다.
바둑을 두는 두 사람
“어 이거 축이 아닌가?”
“자네가 졌네 그려~. 그만 보고 돌 던지게나 ”
“거 참 알 수 없네 그려....분명 축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놈의 딱 한 수를 잘못보고,,”
“억울 해 하지 말게. 자네만 진게 아니야.
이 세상에서 아직 나를 이겨본 사람이 없거든.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칭구!!
자네도 나 한테 조선팔도에 제일 잘 두는 고수라고 했잖아~
자. 그만 일어나세. 약속대로 술을 사게나...”
“ 나 같은 하수에게 이기고 술을 사라고...”
“자네가 먼저 지면 술을 사겠다고 했잖아....”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6회
여기 바둑 고수 이름은 김철권이다.
그는 전주 땅에서 소문난 바둑 고수였다. 내기 바둑으로 천금을 벌어 ‘도화’라는 절세미인 까지 첩으로 뒀을 정도였다.
김철권은 칭구에게 술을 얻어 먹고 거나하게 취해서 집으로 들어 왔다,
“나리....과음 하셨군요.
어서 옷을 벗으세요. 꿀물을 타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요..술 중에 공짜로 마신 술이 제일 맛이 좋거든...하 하.... 오늘도 내기 바둑에서 이기고 공짜 술 한잔 했습니다. ”
“영감~ 이제 내기 바둑 그만 두십시오. 그러다가 임자를 만나 큰 코를 다칠 수 있습니다”
“턱도 없는 소리!! 팔도에서 나를 이길 사람이 누가 있다고.... 다른 건 몰라도 내 두가지는 자신 할 수가 있어요 ~~”
“그게 뭔데요 영감나리~~”
“첫째는 바둑으로 날 이길 사람이 없다는 것. 둘째는 팔도에서 우리 ‘도화’같은 예쁜여자는 없다는 것 이지요”
“ 나리...두번 째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아니. 그러면 첫 번 째는 틀린 말이다..,,,그 말인가?. 첫 번째도 분명 틀림없는데.....”
“저 같은 계집이 무얼 알겠습니까 만 세상살아가는 이치가 바둑판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 까요?”
“뭐. 바둑판과 다를 바가 없다니....그게 무슨 말인고”
“몇 뼘밖에 안되는 그 좁은 바둑판에서 위에서 수백.수천의 기기묘묘한 묘수듫이 요동을 치지요. 몇 백 개도 안 되는 바둑돌들이 그 위에서 수 천 수 만 번의 온갖 재주를 다 부리지 않습니까? 그렇죠 영감 나리.....”
“그야 그렇지..... 바둑의 수란 그 변화무쌍함이 무궁무진하거니까~”
“ 나리 그렀습니다.
하물며 세상은 바둑판보다 엄청 더 넒은 판이옵니다.
그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 숫자 또한 바둑돌과 비교도 안될 만큼 많습니다,
바둑도 한 수 엎을 내다보기가 어렵다는데 하물며 이 넓은 세상 많은 사람중에 어디서 어떤 사람이 어떤 묘수를 가졌는지 그걸 어찌 알고 나리께서 팔도에서 제일가는 고수라고 장담 하시나이까 ”
“당신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한 말인데,.....암튼 바둑으로는 날 이길 사람이 없다는건 확실하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7회
“소첩의 말을 그냥 흘러 들으 시지 마시고 부디 내기 바둑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바둑을 그만 두고 말지. 바둑은 한판을 둬도 내기를 해야 제 맛이라니까!!”
자신만만한 김철권의 귓구멍에는 도화의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린 것이다.
“ 조선팔도에서 날 이길 사람 없다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라”
그러나 김철권이 곧 후회할 날이 닥쳤습니다.
“실례 합니다. 저기 가는 저 어리따운 아낙네는 어느 댁 부인입니까?”
“저기 저 여자.... 재는 이름이 ‘도화’이고 부인이 아니고 첩이야 첩...”
“어느 댁 첩입니까?”
“ 저기 저 바둑 잘 두는 김철권이라는 사람의 첩이야”
“바둑을 잘 둡니까?”
“바둑도 잘 두고 힘도 좋고 얼굴도 잘 생겼고..... 노상 말을 타고 지나가는데 동네 여자들이 그냥 자지러져버려요... 70먹은 나도 가슴이 벌렁거려...그러니 첩도 저리도 예쁘지.자넨 같이 못 생긴 사람은 저런 첩 구경도 못했을 거야”
이 남자는 일본 사람으로 조선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돈 많은 무역상인데 도화의 아름다운 자태에 그만 눈이 훌까닥 뒤집힌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오인 장사꾼이 김철권의 집을 방문했다.
“실례 합니다” “누굴 찾으세요”
“저는 일본 장사꾼입니다. 이 댁 주인어른이 항상 말을 타고 출입하신다기에 보석으로 수 놓은 좋은 말안장 하나 갖고 왔습니다”
“ 아~ 이 말안장을 팔려고 오셨군요”
김철권이 보석이 박힌 그 말안장을 보더니 입이 찢어 질 정도로 좋아했다.
“조선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말 안장이구나 .이게 얼마입니까? ”
그런데 그 왜인 장사꾼은 말 안장은 보지도 않고 바둑판을 보면서
“ 이 바둑판 아주 비싸게 보인구나”
“아니 이사람이. 남의 바둑판을 끌어안고 웬 헛소리를 하고 있는가요? 이 말안장 얼마인가요”
“ 녜. 쌀 스무 가마입니다. 그런데 이 바둑판은 얼마입니까?‘
“그건 파는게 아냐. 취미생활하는데 사용하고 있는건데....왜요? 혹 바둑을 둘 줄 아십니까?”
“일본에서 알아주는 바둑 고수입니다”
“그래요”
“ 말 안장하고 이 바둑판하고 교환 했으면 하는데요?”
“좋습니다. 나야 뭐 이 말안장이 욕심나거든....”
김철권은 쌀 두가마도 안되는 바둑판인데 그것도 모르다니 이 일본 사람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일본에서 활동하는 고수하고 바둑이나 한판 두어 볼까?.기 내기 바둑이야”
“내기 바둑을 .....” “ 그래 내기 바둑. 어떠신가요. 내가 이기면 이 말안장을 그냥 내가 갖고 당신이 이기면 이 바둑판을 그냥 갖고...... 어떠시지요?”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내기 바둑을 두게 된다.
“아이구나~~ 실수를 했구나....묘수가 없을 까?”
“ 묘수는 없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실력의 차이지요!!!”
그렇게 해서 보석이 박힌 말안장은 김철권이 그냥 공짜로 가져갔다.
그 왜인은 보석이 박힌 말안장을 뻬앗기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나으리... 지난번 왜인 장사꾼이 또 와서 영감님을 뵙고자 합니다”
“그래....이번엔 뭘갖고 왔을 까? 어서 안내 하거라”
“반드시 이겨서 말 안장을 되찾아 가겠습니다.”
“허 허 그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구나”
감히 청하지지는 못할 일이나 본래부터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다.
“ 제가 이기면 말 안장을 다시 찾아가고 지면 황금 열냥을 주겠다”는 것이다.
“어허 참으로 어리석은 장사꾼이구나”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8회
두 사람은 다시 내기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 오늘은 지난번 보다 조금 실력이 늘었군요......”
바둑판이 팽팽했다.
“ 계가를 해봐야죠!!”
“아니 결과가 뻔한데 계가를 하자구....한참 아래 하수구나~~~”
계가를 해보니 왜인이 한집을 졌다.
“ 자! 어서 황금 열 냥을 주시죠 ”
왜인은 황금 열냥을 건네주고 밖으로 나가면서 “당신은 진짜 고수입니다. 이제 다시는 안오겠다”고 소리를 치고 나가버렸다.
“늦게나마 실력차이를 인정하니 다행입니다. 말안장과 횡금 열냥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 영감마님. 지난번 왜인 장사꾼이 또 와서 뵙기를 청합니다”
“ 암만 생각해도 한집을 지다니 .....너무 억울해서 다시 왔습니다.”
“그래요....이번에는 뭘 갖고 오셨습니까?”
‘’이판사판입니다. 제가 조선에 팔려고 온 무역선에 실려 있는 전 재산과 무역선 까지 전부 내기에 걸겠습니다.“
아니 무역선 까지 걸다니 참 기가 막일 일이구나
이 김철권이 이제 팔도에 부자가 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당신이 그렇다면 나는 이집을 통째로 걸겠습니다”
“좋습니다....아니 그런데 내가 이기면 이집을 어떻게 일본까지 가지고 갑니까?
그러니 집 말고 다른거로 합시다요”
“음 ...그러면 논,밭인데 그것도 일본으로 갖고 갈 수도 없고.......어쩌지”
“그러면 사람을 걸어도 좋습니다”
“뭐 , 사람을,,,”
“영감님 첩 같은 거.......”
그런데 도화가 밖에서 이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기겁을 하고
김철권을 불러 냈으며
“나리 절대 아니 되옵니다.”
“ 에이 당신도 참 . 별 걱정을 다하는군. 내 이미 저놈 실력을 알고 있으니
전혀 걱정하지마라. 백번을 내기해도 백번 다 이길 자신 있다”
“절대 아니 돠옵니다. 옛말에도 내기하자고 먼저 덤비는 놈한테는 못당한다 했습니다.만에 하나 나리가 지면 저는 꼼짝없이 저놈을 따라 무역선을 타야 합니다,
“도화야........절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잠시만 기다려라”
결과는 어떠했을가요~~
도화는 무역선을 탈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허망했다,
내리 세판을 져버린 것이다.
왜인을 따라가는 도화를 바라보면서 김철권은
“뛰는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왜인은 자신이 고수임을 감추고 잔꾀를 부린 것이다.
그 간교함을 탓하기전에 세상을 너무 얕본 김철권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 도화는 눈물을 흘리면서....... 김철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 김철권아 내기 바둑 나서지 마라
천금 미인이 왜선에 실려 가고 저 배 얼굴 껴 안 듯이
말 안장 하나 끼고 않았구나“
다음에는 진짜 유쾌한 내기 바둑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49회
왕실 사람 중에 서철령이라는 어른은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진정한 조선제일의 바둑의 고수였다.
하루는 경상도에서 올라온 늙은 군사 한 사람이
감히 서철령을 찾아 한 수 겨루기를 청하니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 서철령은 기꺼이 그이 청을 들어 주었다.
그 늙은 군사는 서철령에게
“ 왜람되지만 내기 바둑을 두시길 청합니다”
“허 허 노인장 뜻이 그러하다면 그래야 지요.
무얼내기를 하실 찹입니까?”
“제가 타고 온 말을 걸겠습니다”
허 허 그렇게 하시죠...“
바득은 간단히 서철령의 승리로 끝이 났다.
늙은 군사는 삐쩍마른 말을 사찰령에게 맡기며 부탁하는데
“ 소인은 한양에서 일 년 간 번을 서기 위해 온 몸입니다.
청 하옵건데 일 년 후에 반드시 이 말을 찾으러 올 것이니
그 때 까지 말을 잘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허 허 그러시죠. 일년 후에 다시 한판 두어서 이 말을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서철령은 그 말을 잘 키우고 있었다.
살도 지고 건겅하게 잘 자라고 잇었던 것이다.
헌데 번을 끝낸 늙은 군사가 찾아와
“ 나으리 일 년 만에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 둘은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이번엔 늙은 군사가 가차없이 이겨 버린 것이다.
말을 되찾은 군사는
“ 이 놈 그동안 살도 찌고 늠늠해졌구나” 하면서
서철령에게 무릅을 꿇고 사죄를 했다.
“비천한 병졸의 몸으로 종실의 어른을 속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나를 속이다니.....무슨 말이오”
“소인에게 이 말은 귀중한 재산이옵니다.
그런데 이 객지에서 번을 두는 몸으로
어찌 이 말을 잘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해서
일부러 바둑을 져서 어르신께 말을 맡긴것입니다,”
“허 허 내 감쪽같이 속았구나 그려. 자 알어나시오 .
그렇다면 노익장께서 일부러 져주신 것이니 노익장께서
분명 저보다 한수 위 고수이십니다. 허 허 ...”
과연 그럴까요?
서철령은 늙은 군사의 딱한 사정을 눈치 채고
말을 살찌게 돌봐주었고 다음에 일부러 바둑을 져주어
그 늙은 군사가 말을 되 찾아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진정한 고수였던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0회
조선사대 남자들의 귀고리?
조선 선조 임금은(선조5년.1572년)
‘신체와 발부(髮膚)는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초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어 귀고리를 달아주는 중국 사람에게 조소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중외에 효유하라. 한양은 이 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꺼리어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을 주도록 하라“고 엄명을 했다
임금이 직접 이런 명령을 내린 것만 보아도 당시 남자들의 귀고리 풍습이 적잖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조임금의 전교 이후 남자의 귀고리는 사라졌고 여자들도 귀를 뚫는 대신 귀에 거는 파란 귀고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선조임금이 귀고리 풍습을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했는데 실제는 우리 민족의 오랜 풍습이라고 한다.
즐겨사용하는 장식구라는 것이다. 귀고리가 가장 화려하게 각광을 받은 것은 삼국시대다.
이 귀고리는 부적의 역할도 했다.
당시 무덤에서 다양한 형태의 귀고리가 출토되었고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다.
귀고리의 재료는 금.은.청동.금동 등 여러 가지였다.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역시 금귀고리였고 신라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남자 귀고리의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것은 역시 화랑의 귀고리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원래 정부가 훌륭한 인재를 뽑기 위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무리지어 어울리게 했던 데사 출발했다.
그런데 화랑은 같은 시대에 한 무리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많을 때는 7개의 화랑무리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는데 한 무리는 화랑 1명과 몇 명의 승려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여러 낭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화랑은 자신을 추종하는 낭도를 거느린 무리의 지도자인 셈이다.
따라서 화랑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화랑을 선정하는 기준이다.
당나라 승려의 신라 견문기인 ‘신라국기’에는
화랑의 선정 기준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한다.
“귀인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선발,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고 부르니 나랏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
화랑들은 대개 열 다섯 살에서 열 여덟살 정도의 젊은이다.
어여쁘다는 말을 붙여도 됨직한 나이에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분을 바르고 치장에 힘 썼다는 것이다.
화랑들은 특히 멋진 옷으로 치장을 하고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쓰는 등 귀족의 자제로서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사치를 부렸다.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귀고리를 했다는 것이다.
이미 화랑들은 자신의 무리가 더 뛰어남을 알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치장을 하고 금귀고리를 달았을 것이다.
조선 선조이래 금지되었던 남자들의 귀고리 착용이 4 백여년을 건너뛰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1회
가장 낭만적인 계모인 시계(詩契)~~
우리나라의 옛 마을에서는 갖가지 종류의 계모임이 있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재미있는 계모임이 많아서 청상과부들은 청상계를 묻었고 접이 나오는 아줌마들끼리는 젖계를 맺어서 젖을 못먹는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젖을 먹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동갑인 사람끼리 갑계, 과거에 합격해 함께 방이 붙은 동기생끼리 묻은 방계, 등 구실만 있으면 계를 묻었다.
많은 계 중에서 가방 낭만적인 계라고 하면 단연코 선비들끼리 모여서 하는 소위 詩契(시계)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잠깐 소개한다.
‘시계’란 마음이 맞는 선비들이 날을 정해 풍치 좋은 곳에 모여 시를 지으며 노는 모임이다.
멋들어진 경치를 보면서 그 날의 운을 띄우고 저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혹은 술이라도 한잔씩 걸치며 시상을 가다듬는다.
물론 시간제한이 있었는데 그것을 알리는 시한장치도 풍류가 넘친다.
시종(時鐘)이라는 것인데 엽전을 단 긴 끈을 근처의 나뭇가지에 길게 메[어놓은 다음 그 끈 중간에는 향나무를 꽂는다.
이 향나무가 시장장치 역할을 하는데 불을 붙이면 서서히 타 들어가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끈이 타서 끊어지게 된다.
엽전밑에는 놋대야를 엎어놓아서 엽전이 떨어지면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나게 되면 시 쓰기를 마쳐야 한다.
조선시대엔 유명한 ‘시계’도 많았다.
연산군 시절 조정의 화를 피해 고향에 돌아온 선비들 중 조춘풍 등의 선비들은 ‘학시사’라는 것을 했다.
‘학’은 지조의 상징인 새인데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은근히 눈을 내리깔며 그 오묘함이 글을 많이 들을수록 더하고 새벽의 꽃이슬로 벼슬을 닦아주면 선홍빛깔이 한층 맑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사시의 계원들은 학을 한 마리씩 기르며 일년 동안 지낸 후 일년에 한번 모여 저마다 데리고 온 학을 평가하고 그 해릐 수행정도를 비교하였다고 한다.
또 정약용은 벗들과 죽란시사라는 계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일년에 네 번 계절마다 모이는데 그 때마다 풍치가 훌륭한 곳에 모여서 자연의 소리를 벗 삼아 시를 짓고 서로의 시를 감상하였다.
시라는 것은 노래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는데 수천년 전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우리백성이 유난히 좋아하는 문학장르라고 한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시집이 많이 팔리는 나라중 하나이며
시 낭송 모임. 시 암송 모임 단체도 많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2회
암행어사~~~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
TV사극에 가끔 등장하는 어사 박문수든 언제나 남루한 행색으로 이 고을 저 고을을 떠 돌아 다닌다.
이는 신분을 숨기고 고을수령과 아전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속임수로 활용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마패를 뽑아 들고는 ‘암행어사 출두요!!’를 외친다,
암행어사가 비참하기 그지없는 행색을 한 이유는 연출이 아니고 실제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암행어사가 궁상을 떨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조선조 숙종 임금 당시
황해도로 파견된 암행어사 박만정의 여정을 따라 가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
“나으리 패초(牌招: 임금이 승지(비서실)를 시켜 신하를 부르는 일로 나무패에 부를 신하의 이름을 써서 보냈다)가 왔는뎁쇼”
“뭐야? 패초가 왔어? 알았다.”
조선조 숙종은 1696년(숙종임금 22년)3월에 이의창. 박만정. 이정겸에게 패초를 보낸 것이다.
“자, 다들 상피(相避) 단자(친적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벼슬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는 일)를 제출하시오”
불려 나온 신하 3명은 각각 상피 단자를 제출 한 다음 숙종임금에게 부복한다.
“ 음, 어디 보자. 니네들도 내가 어찌 불렀는지 대충 눈치를 챘겠지?”
“ 아니요, 전혀.......”
“아니 전혀 감이 안온다구.....”
“....................”
“자, 마패를 봐도 모르겠어?”
숙종은 그 때야 매패를 보여준다.
이의창, 박만정, 이정겸은 눈앞이 캄캄해 진다.
“에그,,,,,,꿈자리가 사납드니만....”
“ 뭐냐....임금 앞에서 꿈자리 운운........”
“ 아,,,닙니다,황공하옵니다.”
“일단 봉서(封書:원래는 임금이 근신이나 종친에게 보낸 사문서 였으나 암행어사에게 건네는 봉서는 일종의 임명장이다)를 받아라. 어허 이것들이 지금 어디서 봉서를 뜯으려고 그래?
거기 겉봉투에 쓰여 있잖아.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동대문 밖에서 뜯어볼 것)이라고!!!”
“.........”
“ 에, 그럼 이제 주려고 한 거 마저 주겠다.이건 사목(事目: 암행어기시 임지에 가서 해야 할 일)이니까 툼툼이 잘 챙겨보고 이건 유척(鍮尺: 놋쇠로 만든 자,암행어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중 하나가 각 고을의 도량형을 획인, 점검하는 일이었다) 이니 잘 챙겨라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한데 마패다. 박만정!!”
“예, 전허”
“너는 내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마패 두 개를 주마.”
“예, 두....개...”
“하나는 삼마패(말이 3마리 그려진 마패)니까 네가 사용하고 하나는 일마패거든?
이건 똘마니에게 줘라”
“성은이 망극......”
“ 아 그만,,,,,,,,,가서 고생하겠지만 이게 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 만큼 불평하지 말고 꾹 참고 백성 좀 잘 보살펴라. 알았지?”
“ 예, 전하.”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3회
어전을 나온 세 명은 그 길로 동대문으로 향한다
이들은 동대문 밖 관왕묘에 들어가 봉서를 뜯는데
“ 아, 젠장 이게 뭐야?”
“왜 그래....?”“나보고 함경도로 가래, 에구 어느 세월에 거길 가냐?”
“살다 보면 그런일 도 있지 뭐...”
“넌,어다야. 어러 충청도구먼 야 ! 나하고 바꾸면 안될까?”
“ 왕이 임명한 건데 어떻게...”
“만정아, 넌 어다야?”
“너랑 비슷해. 황해도구먼”
“야! 누구 약올리냐 ? 황해도와 함경도가 어떻게 비슷하냐?”
당시 이의창은 함경도로, 이정겸은 충청도로, 박만정은 황해도 각각 파견명령이 떨어졌다.
본서를 뜯어 본 세 사람은 사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길을 나서는데.....
“ 자 ,,,,그럼 이제 헤어지자고. 집에 가서 떠날 채비를 해야지”
“뭐, 집에 들려.... 몰라서 그래. 암헹어사는 임명장을 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곧장 임지로 또나야 하잖아......안그랬다간 죽을라고...”
그랬다. 암행어사는 가족에게도 어다로 떠나는지 알리지 않게하기 위해 봉서를 뜯는 즉시 임지로 가야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없었다,여비도 물론이다,
“어쨌든 다들 몸조심하시게나. 난 호조에서 나온 출장비나 받아서 출발하겠네...”
“그래....그럼 나중에 보세..무쪽록 몸조심 하게나....“
이렇게 뿔뿔이 임지로 떠나는 암행어사들, 박만정은 방자가 가져온 출장비를 기다렸다,
”나으리, 출장비 받아 왔습니다”
“그래, 넉넉하게 주더냐?”
“쫄다구 군바리 수준인데요?”
“이놈아, 요즘 병장 월급이 얼마나 올랐다구.......”
당시 박만정이 호조에서 받은 출장비는 쌀 5말, 광목 1필, 건어물 3마리와 굴비 3두릅, 엽전 5냥이다.
“에구,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 황해도를 한바퀴 돌려면 두달은 족히 걸리는데....이걸로 어떡하라구!!”
“나으리, 호조에서 그러는데요 나으르는 다른 암행어사보다 더 많이 줬다고 그러던데요?”
“ 뭐라구.....”
어찌하겠는가?
박만정은 호조에서 받은 출장비를 챙겨 들고 황해도로 출발을 했다.
“나으리, 이번 암행어사 활동은 며칠 정도 예상 하십니까?”
“두어달 정도면 되지 않겠나?. 한바퀴는 돌아야 하니까!”
“ 혹 갖고 계신 비자금 없으신지 궁금합니다요?”
“ 뭐, 비자금!! 이놉아 무슨 비자금은”
“ 에그머니, 출장비가 거덜나고 있습니다.......”
“뭔소리.....벌써.....”
“ 우리 팀 입이 몇 갠데 그런 말씀을...... 남들도 다 하는 회식도 한번 못했는데....”
“그래도 아껴 써야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4회
박만정과 그 일행은 열흘만에 호조에서 받은 출장비를 모두 써버린 것이다.
“제가 집에가서 돈을 좀 가져 올까요?”
“ 뭔 소리.....”
“나으리, 혹시 황해도에 일가친척이나 아는 지방 수령은 없어요?”
“ 야~ 누구 목 달아나는 꼴 보려구 작정했냐?”“그럼 어쩔실 것입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음, 어쩔 수 없구나, 평안도로 돌아가자구나! 하는 수없이 돈을 빌려야 겠다”
“ 거기에 아는 사람 있어유?”
결국 박만정은 평안도로 돌아가 돈을 빌렸다, 다시 황해도로 돌아왔다.
이렇듯 당시 암행어사의 출장비는 생계유지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당시 암행어사로 파견되는 관리들의 면면을 보자.
암행어사도 선발된 자들은 주로 임금의 시종신(侍從臣: 임금을 가까이 모신 신하)중에서 청렴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다.
암행어사로 선발된 날부터 고난의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박만정은 숙종 22년,1696년 3월, 황해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3월7일부터 5월12일 복명할 때 까지 60일간 탐문, 체험한 내용을 「해서 암행일기」에 기록했다,< 보믈제574호>
[일반어사와 암행어사]
임금이 지방에 파견하는 임시 관료는 일반어서와 암행어사가 있는데 그 차이는 공개와 비공개 차이였다.
일반어사는 이조(행안부)에서 임명하고 그 거동이 공개적이었지만 암행어사는 임금이 친히 임명할 뿐 아니라 그 임명과 행동을 비밀리에 부쳤다.
<조선왕조실록> 에 암행어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때는 1509년(중종 4년) 11월이지만 그 연원은 조선개국 원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의주 등 국경지역의 불법적인 월강 무역을 금지 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행대어사를 보냈는데 그 임무가 지방관과 지방 토착세력의 불법과 탐욕을 규찰하는 것이었다.
이 때 후보자 추천방식은
임금이 지방에 암행어사를 보내기로 하고 어사 후보를 추천허러고 명령하면 3정승은 시종관(侍從官) 중에서 추천을 했다
추천이 끝나면
임금은 전국 360개 군현의 이름이 적힌 참댓가지를 추첨통에서 무작위로 뽑아 시찰할 고을을 정하는데 이를 ‘추생’이라고 했다, 따라서 암행어사를 추생어사라고 했다,
어사 후보자는 왕명을 받들어 어전에 나와 시찰할 군현의 이름이 적힌 봉서를 받는다.
이는 일종의 암행어사 임명장인데 표면에 도남대문외개탁(남대문을 나간 뒤 열어봄)이라고 씌어 있었다.
어사는 지정된 대문 밖에 나가 비로서 봉서를 열어보고 임무를 확인한 뒤 목적지로 직행했다.
어전을 나온 어사는 승정원(비서실)에서 <팔도어사제기사목> 1권과 마패 한 개, 유척 두 개를 지급받고 퇴궐한다.
*출두: 아행어사는 명읗 받은 당일 역마를 타고 방자 한 두명과 함께 목적지로 향한다. 암행 시찰을 마친 어사는 잠적 장소에서 유유히 나와 해당 고을 수령의 관가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데 이룰 출두라고 한다,
역졸과 방자가 관가의 삼문을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출두’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
이 때 암행어사는 공문사와 관가 창고를 검열하고 불법이 포착되면 ‘봉고奉告’ 두 글자를 쓴
백지에 마패를 날인해 봉한다.
이밖에 죄수를 재심하고 양민의 억울함을 보살핀다.
*보고서 작성:암행어사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보고서(서계書啓)와 부속문서(별단別單)를 한 통씩 작성해서 왕에게 제출한다.
서계(書啓)는 임금이 어사에게 특별히 명한 명령에 대한 내용이 상세한 보고내용이 담겨 있고
별단은 서계에 미진한 사항과 일반적인 사항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담는다.
서계는 필수다.
벼란은 임의사항이다.
출처: 발칙환 조선인물 실록(저자 이성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5회
길거리 원숭이 공연가 농후자~~
“별안간 꼭두각시가 무대에 올라오자
동방에 온 사신은 손벽을 친다.
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한다.
사람이 시키는 대로 절하고 꿇어 앉네“
<박제가 ’성지전도지’>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공연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다.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는 공연을 후희,
길들이고 조련하는 사람은 농후자라고 불렀다.
유랑 공연단의 일원이거나 시장을 떠돌며 홀로 원숭이를 팔았다.
본디 원숭이는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원숭이를 키웠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원숭이를 놀려 나무에 오르게 하는 장면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차돈이 순교한 뒤 원숭이가 때를 지어 울었다고 한다.
고려 문인 이인로는 ‘파한집’에 “지팡이를 짚고 청학동 찾아 나서는 첩첩산중에 원숭이 울음
소리뿐“이라는 시구를 남겼고
송정은의 ‘약헌집’에는 조선 전기 문인 최수성이 원숭이를 길러 편지를 전하는 데 썼다는 기록도 나온다.
원숭이는 외교 선물로 이 땅에 들어왔다.
동물은 국기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매와 사냥개를 보냈다.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은 매번 사냥개를 달라고 졸랐다.조선 사냥개가 워낙 뛰어났던 까닭에 명나라 무관들에게 큰 인기였다.
사냥개를 선물로 받아간 사신은 본국에 돌아가 이를 팔아 큰 이문을 남기기도 했을 정도다.
조선 태종임금은 친선을 위해 세자를 시켜 명나라 사신에게 사냥개를 한 마리씩 보냈고
다음 날 만찬자리에서 직접 두 마리 씩 주었다.
반대로 조선은 명나라와 일본에서 원숭이를 받았다. 일본은 원숭이를 많이 보냈다.
원숭이는 시복시 관원이 맡아 키웠다.
태종임금 시절 원숭이 숫자가 크게 늘어 궁 밖으로 분양을 했다.
분양한 원숭이가탈출해 야생화 하기도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6회
<세종실록>에 따르면
제주 목사 김인은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여 후임 목사 이붕에게 인계를 한 기록이 나온다.
궁궐에서 기르는 원숭이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성종 임금 당시
사복시 관원은 혹한에 원숭이가 죽을까 봐 흙집을 지어 주고 사슴 가죽을 입히자고 청했다.
사슴 가죽을 옷으로 잘못 들은 조정 신료가 백성의 삶을 먼저 살펴야 한다 며 ‘원숭이 옷’을 문제 삼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궁궐만이 아니라 저잣거리에서도 농후자가 공연을 벌였다.
조선 말기문인 도한기는 ‘관헌집’에서 청나라 사람이 한양에 와서 연행하는 원숭이 공연을 봤다고 썼다.
당시 공연은 원숭이의 습성을 이용한 것과 조련을 통해 익힌 기예를 선 보이는것 두 가지였다.
습성을 이용한 공연은 원숭이가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을 활용한다. 까마득이 높은 솟대를 세우고 그 끝에 먹이를 둔 다음 원숭이를 뛰어오르도록 했다.
오랜 조련이 필요 없었다.
다만 원숭이목에 도망가지 못하게 목줄을 단단이 채웠다.
19세기에 제작된 ‘태평성시도’에는
목줄을 맨 두 마리 원숭이가 높은 솟대에 오르게 하는 공연이 소개되었다.
이 장면에서 농후자는 염소를 곁에 두고 있다.사람이 말을 타듯 원숭이가 염소를 타는 공연도했을 것이다.
박제가가 쓴 ‘성시전도시’ 속 원숭이는 사람처럼 절하고 꿇어 앉아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중국사신에게 선보인 만큼 진귀한 공연으로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후자와 원숭이 사이는 어떠했을까?
조수삼의 ‘추세기이’에 ‘농후개자’라는 인물이 나온다.
농후개자는 원숭이를 희롱하며 빌어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숭이 공연으로 구걸하는 거지였던 셈이다.
직업의 일종인 셈이다.
농후개자는 원숭이 고연으로 돈을 벌 법 했으나 거지 행색을 면하지 못했다.
벌이가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이 감탄하며 돈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묘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농후자는 공연을 마치고 귀가할 때 항상 원숭이를 어깨에 올려 놓았다.
나중에 농후자가 죽자 원숭이는 배운 대로 사람처럼 울면서 절을 해 돈을 구걸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돈을 추렴해 거지를 화장 했다.
시체가 반쯤타자 원숭이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불길로 뛰어 들었다.
농후개자와 원숭이는 사람과 짐승. 주인과 물건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자 반려자였던 셈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7회
「'흥망이 유수하니
만윌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
태종 이방원의 스승 운곡 원천석(1330-?)의 시조이고
학창시절 국어교과서도 실렸다.
원천석은 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세상을 버리고 초야에 숨은 72현 중의 한 명이다
변방 무관 출신인 이성계는 본인 자식들중 이방원이 학문에 소질이 있자 원천석에게 가서 자식을 이방원을 제자로 받아 달라고 했다.
원천석은 거절했다.
이방원은 그럼 원천석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직접 찾아가 제자로 받아 달라고 부위를 맴돌아았다.
그렇게 끈기있는 이방원의 모습을 본 원천석은 이방원을 제자로 받아 주었고 이방원으로 고ㅓ거에 급제하였으며 변방출신무관이라는 꼬리표를 떼게 해줬다.
이성계는 세력 확장하고 고려말 실세가 되는데......
원천석은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는 등 그의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이성계는 조선의 초대 왕이 되는데 세자는 이방석으로 결종되었다.
이에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헤 제3대 임금 태종으로 등극한다.
유독 스승 원천석을 좋아한 태종이 왕위에 올리 끊임없는 부름에도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죽어서 묘소의 방향조차도 개경으로 향하게 만들어 그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원천석은 태종이 찾아올 줄 알고 빨래하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거처를 물으면 다른 방향으로 가르켜라 부탁하였는데,
그렇게 말한 할머니가 나중에 왕에게 거짓말 한 것을 알고 개울에 투신하여 죽은 곳인 '노구소'가 묘소의 근처에 있다.
원천석은 야사 6권을 저술하여 궤짝에 감추고서,
후손들에게 바른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궤를 열지 못하도록 유언을 하였는데,
궁금했던 후손이 열어 보고 이씨왕조로부터 멸문지화를 당할까 봐 다 불태웠다고 한다.
조선 태종이 어려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울때 태종의 밥을 해주었다는 그 할머니의 이야기가 유래가 된 강원도 횡성의 ‘노구문화제’도 열린다.
[ 因果應報 (인과응보) ]
시계를 옛날로 돌려 보자.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정적(政敵)인 정도전을 죽였지만,
사람만 죽였지
정책 중 많은 부분은 그대로 계승했다.
그래서 세종대왕 시대가 왔다.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지도자의 그릇이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광해군의 모든 정책을 부정하며
나라를 망국의 길로 이끌었다.
조선 시대 임금 중
가장 못난 자가
인조와 선조다.
선조보다 더 무능하고 옹졸한 지도자의 그릇이 인조였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보자.
칠삭동이 한명회와 야합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자기의 형제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조카 단종까지 죽이고 명신 김종서 등 자기편이 아닌 사람은 다 죽인 수양대군 세조는
어떤 과보를 받았나?
본인은 문둥병에 걸렸고, 두아들은 요절했으며,
그 손자대엔 연산군이 나왔다.
조선 왕계는
이후 전부 세조의 직계 후손 들이다. 선조도 인조도...
이후
영조와 정조 외에는 임금다운 임금이 없었다.
칠삭동이 한명회는 어떤가?
두 딸을 왕비로 밀어 넣었으나
자식 하나 두지 못하고 단명했고 손이 절손되었다.
자신은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했다.
역사는 철저히 인과가 되풀이된다.
야사에 전하는 세조의 딸 이야기를 하나 전 한다.
수양이
왕위를 찬탈하여 등극하자
세조의 딸이
아버지에게 울면서 간하기를
"어린 단종이
가엾지도 않으세요
단종은
출산 2일 후에
어머니 현덕 왕후를 잃고, 6살엔
할머니인 소헌 왕후를 잃고, 10살에는
할아버지 세종 대왕을 잃고, 12살 때는
부왕인 문종대왕 마저 잃었습니다.
제발 죽이지는 마세요."
충신들에게도
가혹한 짓 하지 말 것을 누차에 걸쳐 간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수양은 딸에게 사약을 내린다.
하지만
정현 왕후가
긴급하게 조치하여
딸을 야밤에
궁녀 하나만 붙여서 대궐 밖으로 빼돌렸다.
이후
수양은 뒤를 캐지 않는다.
그후 세조는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네 놈이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의 목숨을 가져 가겠다며
원한에 찬 욕설을 퍼붓고 세조에게 침을 뱉고 사라진다.
그날로
나이 20세인 세자는
낮잠 자다가 급사하였으며,
세조는
현덕왕후가 뱉은 침 부위에서 시작된 피부병이 온몸에 번져 죽을 때까지 고생하게 된다.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전국의 온천을 찾아다니다
속리산 온천으로 행차하던 중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
왕의 행차를 구경나온 계집아이가
죽은 줄로 알고 있던 딸과 너무 닮아 연유를 캐어 보니, 바로 세조의 딸이
그 지방에 은거하여 살고 있던터라, 세조가
뜻밖의 만남에 반가워하며
지난날 가혹함을 뉘우치며 딸에게 묻는다.
네 남편은 누구냐?
딸이 대답하기를
우연히 착한 나뭇꾼의 도움을 받고 지내다가
부부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김종서 장군의 친손자입니다.
김종서는
수양이 계유정란을 일으키면서
한명회가 작성한 殺生簿 (살생부) 1순위 척살 대상으로 철퇴로 때려 죽인 충신이 아니던가?
세조는
무릎을 치며 한탄하기를 금상에 오를 욕심으로
천하 충신들을 다 죽이고 내가 천벌을 받는구나.
세조는
딸에게 한양에 돌아가서 부마궁을 짓고 너희를 부르리라 하고 약조한다.
얼마후 딸에게 사람을 보냈더니
딸의 가족은 집을 비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다.
내가 조카와 동생들과 딸까지 잡았으니
죽어서 선왕들을 무슨 낯으로 대할 것인가?
因果應報(인과응보)의 철칙이 순환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금도 어김없이 구르고 있다. (無)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0회
최고 권력자의 왕자 시절 사부. 하기에 따라서는 부귀영화가 보장된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닦을 학문과 선비의 도리는 불사이충.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라 배웠다.
그것도 외적을 치러 간 장수로서 칼을 거꾸로 들고 달려와 권력을 빼앗은 인물의 아들이었다. 하여 속세를 떠나 산중에 터를 잡았다.
옛날 같이 학문하던 벗이 권문에 들어와서 함께 '국사'를 논의하자는 시문을 보내왔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눈 속에 홀로 푸르러
총림(叢林)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네
이미 찬 마음으로 진실한 도를 행하니
악마와 외도가 어찌 그 문정(門庭)을 엿보랴.
원천석은 이 무렵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시 한 편을 썼다.
<고의(古意)>라는 제목이다.
백호산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
추위를 잊으며 천년 절조를 홀로 지켰네
더러운 냄새와 꽃다운 향내를 얼마나 겪었기에
늙은 줄기가 반만 남은 채로 옛길에 서 있나.
이성계는 '민생'을 내걸고 고려 왕조를 뒤엎고 새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왕자의 난'을 비롯한 골육상쟁으로 민생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농민들의 땅을 빼앗으려는 신 권력층의 횡포를 보면서 원천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지초와 난초 밭에는 향내가 퍼지지 않고
아름다운 그늘에 가시덤불만 한창일세
그 향내 물리치고 싸늘한 기운까지 더하니
태양 빛이 담 그늘을 비추지 못하네.
자리를 말듯이 온 산천을 독차지하고
주머니를 뒤지듯이 노비까지 다 수색하네
닭과 벌레를 얻고 잃음이 어느 때에야 다하랴
하늘 끝을 바라보니 어느새 석양일세.
권력의 상층부가 부도덕하고 부패하면 '아랫 것'들이 설친다. 사도가 무너지고 새 조정의 관속들은 잇속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백성들을 대신해 읊다>라는 시는 처절한 풍속화다.
생애는 물같이 차갑고
부역은 구름처럼 어지러워
갑자기 성 쌓는 군졸이 되었다가
또 쇠 다루는 일꾼까지 겸하기도 하네
바람과 서리에 농사까지 그르치고
끝없는 눈발에 누더기 옷 다 떨어졌네
처자 부양할 걱정 잊지를 못해
마음이 끓어 불타는 듯하네.
원천석은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 병환이 잦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서재에는 먼지가 쌓였다.
그런데 누가 약재를 보내주었다.
산속 서재에 달포 드러누웠으니
바깥사람 그 누가 가난한 집을 찾아오기 좋아하랴
게다가 약까지 보내 쓰라린 병을 고쳐주니
바퀴 자국의 물고기 신세를 면한 듯 감사하구나.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2회
「이 때에 이르러 일이 발각되니 헌사(憲司)에서 그 사실을 추핵(推劾)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순성(蓴城:충남 태안의 옛이름)에 있을 때에 여러 대언(代言)과 대가를 따라간 장상(將相)에 명하여 그 죄를 의논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맹인이 조사(朝士) 가문의 부녀자와 간통을 하였으므로 이는 다른 여리(閭里) 사람이 간통한 예가 아니니 마땅히 극형을 가하여 풍속을 바로 잡으소서 하였다.” 」
<태종실록 16년(1416년(2월25일>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이숙번은 생각이 좀 달랐다.
이숙번은 화간 죄는 장형 80대라고 율(律)에 정해져 있으니 법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법은 그러했지만
사안이 너무 충격적인데다가 과부 제석비의 경우 살인죄까지 있는 터라 이들은 극형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태종은 여론을 따라 과부 제석비와 맹인 승려 신전을 사형에 처했다.
여기서 여론이란 당시 이를 ‘공론’이라 했는데 사부대들의 의견’을 일컫는다
이렇게되자 이숙번은 내심 불만을 품게 되었고, 세자 이제(양녕대군)를 만나 이날의 판결이 잘못 되었다며 불평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숙번의 불만을 들은 세자는 은밀히 부왕에게 이숙번이 자신에게 한 이야기를 보고했다.
그리고 태종은 이숙번이 자신을 제치고 세자에게 자신의 판결을 비판하는 말을 했음에 대해 몹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홀로 이숙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 화간(和奸)은 장80대에 처한다는 율(律)이 있으니 참하라고 명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듣고“이숙번은 나와 말하여야 옳을 것인데 어찌하여 몰래 세자에게 청하는가?” 하였다
<태종실록 16년(1416년)2월25일>
이후 이숙번이 보인 태도 또한 문제였다.
이숙번은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었음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라도 하는 듯 한 동안 병을 핑계로 궁에 출입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숙번의 칭병은 허위였고 이 와중에도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다니며 태종의 결정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숙번은 좌대언 서선을 만나 얼마 전 박은이 우의정이 된 것에 대해서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숙번은 왜 자신을 제치고 하필 박은 따위가 우의정이 되었는가에 대해 한껏 불만을 토로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때 이숙번의 불평은 서선을 통해 태종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숙번의 오만 불손한 행동에 대해서 당연히 태종은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1회
<태종 이방원과 일등공신 이숙번>
1416년 2월 25일,
태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며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던 이숙번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대언(代言:왕명 출납직.승정원)의 자리에 있던 윤수라는 인물이 세상을 뜬 후 그의 아내 제석비는 과부로 살게 되었다.
「대언 윤수의 장례에 쌀·콩·종이를 부의하고 관곽을 내려주다
윤수(尹須)의 상(喪)에 쌀·콩 30석,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하고, 유사(有司)에 명하여 관곽(棺槨)을 주었으니, 윤수가 대언(代言)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 하사(下賜)가 있은 것이다.」
<태종실록 8년(1408년)2월 28일>
그러던 어느 날 과부 제석비가 액막이를 위해 맹인인 승려 신전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게 되었다.
과부 제석비는 맹인 승려 신전에게 밤 밤(栗)을 대접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두 사람은 정분을 나누고 사통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비밀스러운 관계를 가진지도 여러 해가 지나자 급기야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이까지 하나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과부 제석비는 이것이 세간에 알려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하였고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자신을 모시는 어린 여종을 죽여 입막음을 시키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결국 과부 제석비와 맹인 승려 신전 사이의 불륜은 덜미를 잡히게 되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고 있는 조선에서 사대부 집안의 과부가 사통을 한 것도 충격적인데
하필 상대가 조선 유학자들이 주적으로 삼고 있던 승려였다니
이에 따른 파장은 상당히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단순히 불륜을 저지른 정도가 아니라 살인까지 감행했음이 드러나 온 조정을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故 대언)代言) 윤수의 아내 제석비와 장님 중 신전의 목을 베었다.처음에 윤수의 아내 제석비가 불경을 읽어 액맥이 하고자 하여 신전을 청해 와서 피적율(皮狄栗: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밤)을 주면서 “밤 맛이 어떠세요?” 하니 장님이 “매우 답니다.”하였다.
윤수의 아내가 장님을 희롱하기를 “밤보다 맛이 더 좋은 것이 있어요” 하고 인도하여 그와 사통한 지 여러 해 였는데 자식을 낳았으나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어린 시비(侍婢)를 죽여서 입을 막았었다.」
<태종실록 16년 (1416년( 2월 25일>
태종은 즉각 신하들을 소집해 이 두 사람의 처벌을 논의하게 되었다.
신하들은 사안이 사안인지라 일반적인 간통죄로 처벌할 수 없으며, 특수한 사례 인만큼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하들은 만약 과부 제석비가 그냥 평민 집안의 아낙이었으면 모를까 명색이 사대부 집안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이를 좌시할 경우 사대부들의 풍속이 무너질 것이라 본 것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2회
「이 때에 이르러 일이 발각되니 헌사(憲司)에서 그 사실을 추핵(推劾)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순성(蓴城:충남 태안의 옛이름)에 있을 때에 여러 대언(代言)과 대가를 따라간 장상(將相)에 명하여 그 죄를 의논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맹인이 조사(朝士) 가문의 부녀자와 간통을 하였으므로 이는 다른 여리(閭里) 사람이 간통한 예가 아니니 마땅히 극형을 가하여 풍속을 바로 잡으소서 하였다.” 」
<태종실록 16년(1416년(2월25일>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이숙번은 생각이 좀 달랐다.
이숙번은 화간 죄는 장형 80대라고 율(律)에 정해져 있으니 법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법은 그러했지만
사안이 너무 충격적인데다가 과부 제석비의 경우 살인죄까지 있는 터라 이들은 극형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태종은 여론을 따라 과부 제석비와 맹인 승려 신전을 사형에 처했다.
여기서 여론이란 당시 이를 ‘공론’이라 했는데 사부대들의 의견’을 일컫는다
이렇게되자 이숙번은 내심 불만을 품게 되었고, 세자 이제(양녕대군)를 만나 이날의 판결이 잘못 되었다며 불평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숙번의 불만을 들은 세자는 은밀히 부왕에게 이숙번이 자신에게 한 이야기를 보고했다.
그리고 태종은 이숙번이 자신을 제치고 세자에게 자신의 판결을 비판하는 말을 했음에 대해 몹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홀로 이숙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 화간(和奸)은 장80대에 처한다는 율(律)이 있으니 참하라고 명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듣고“이숙번은 나와 말하여야 옳을 것인데 어찌하여 몰래 세자에게 청하는가?” 하였다
<태종실록 16년(1416년)2월25일>
이후 이숙번이 보인 태도 또한 문제였다.
이숙번은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었음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라도 하는 듯 한 동안 병을 핑계로 궁에 출입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숙번의 칭병은 허위였고 이 와중에도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다니며 태종의 결정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숙번은 좌대언 서선을 만나 얼마 전 박은이 우의정이 된 것에 대해서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숙번은 왜 자신을 제치고 하필 박은 따위가 우의정이 되었는가에 대해 한껏 불만을 토로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때 이숙번의 불평은 서선을 통해 태종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숙번의 오만 불손한 행동에 대해서 당연히 태종은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3회
「좌대언(左代言) 서선이 말하였다.
“지난 5월25일에 신이 마침 강무(講武)의 상소를 하나 정하는 일 때문에 명을 받고 이숙번의 집에 이르니, 이숙번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정사는 어떠한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 ‘박은이 우의정이 되었다..’하니, 이숙번이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말하기를 ‘박은은 일찍이 내 밑에 있었는데 명이 통하는 자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은 필시 ‘어찌 하여 나를 버리고 박은을 천거하였는가?’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종실록 16년(1416년)6월 4일>
눈치 빠른 신하들은 태종과 이숙번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러자 일부 대신들이 연명으로 이숙번의 오만 불손한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받아본 태종은 급기야 이숙번을 지방으로 쫓아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숙번이 지방으로 내쳐지는 처벌을 받게 되자 신하들은 이미 태종의 마음이 이숙번을 떠났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신하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숙번에게 더 강한 처벌을 해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권력의 생리가 그렇다.
그러나 태종은 이숙번은 단지 성품이 과격한 것뿐이라며 신하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이숙번을 지방으로 내치는 정도의 수준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아마도 태종이 이숙번을 내친 이유는 단순히 자신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숙번이 처벌을 받은 것은 세자 이제(양녕대군)에게 접근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즉 태종은 이숙번이 훗날 세자를 갖고 놀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며,
이것이 이숙번과 하륜의 처세학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더군다나 이숙번이 나이 또한 더 젊으니 곧 세상을 뜰 하륜과 달리 세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4회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를 떠난 이숙번은 이후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숙번은 언젠가 태종이 자신을 다시 불러줄 것이라 믿었지만 태종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이숙번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다.
태종이 세상을 뜬 후에도 이숙번은 십년을 넘게 계속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처럼 일평생 유배지에서 썩게 된 이숙번은 말년에 가서야 드디어 한양 땅을 밟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1438년,
국왕이었던 세종은 부왕인 태종의 무덤인 헌릉의 비문 기록이 모호하다며 이를 수정하도록 명했다.
문제는 실록에 기술된 내용으로도 정확한 실상을 알기 힘든 부분이 있었기에 당시 일을 소상히 알고 있던 이숙번을 불러들이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이숙번은 오랜 유배 생활을 끝내고 한양으로 불려와 경연청에 출근하여 과거 일들을 구술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물론 이 일이 끝나자 신하들은 선왕께 죄를 지은 이숙번을 계속 도성에 들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숙번의 공로를 생각해 한양은 불가하지만 적어도 경기 지방에서는 살 수 있게끔 배려해 주었다.
「...(중략)... 그러나 내 마음에 생각하기는, 숙번이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엇던 것은 아니었으며
태종께 친히 아뢰었는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는가?
유양이 이에 보전되었으니 숙번이 무슨죄가 있겠는가....(중략)....그러나 태종께서 이미 등용하시지 아니 한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할 마음이 있겠는가?
내 마음에는 생각하기를
경외(京外)에 종편(從便)시키는 것이 가할 것 같다.
만약 경중(京中)이 불가하다면 경기로 양이(量移)히는것도 가할 것이다」
사실 세종은 이숙번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진 않았다.
세종은 이숙번이 공로가 많은데도 뜻하지 않게 부왕의 눈 밖에 나서 억울한 유배 생활을 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부왕인 태종이 이숙번을 그렇게 처리하기로 결정한 이상 자식 된 도리로 부왕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세종이 이숙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경기 지역에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1440년 결국 이숙번은 끝내 복권되지 못한 채 향년 68세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공신이라도 버릴 떼에는 과감하게 버렸다.
이 점이 세조 수양과 대조적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5회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임금이 모든 관원들에게 문자가 새겨진 패(牌)를 차도록 하였는데
그 패에 위와 같이 적혀 있었다.
<이긍익 ‘연려실기’ 연산조고사본말>
이 패(牌)가
연산군이 관원과 내시들에게 차게 했다는 그 유명한 ‘신언패愼言牌’이다.
입을 굳게 다물고 혀 간수를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살벌한 경고였다.
조선은 건국이래 언로를 열어 도덕의 나라를 일구는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추구해왔다.
그런데 연산군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는 중국에서나 볼 수 있는 전제군주제를 욕망했다.
이를 위해 연산군은 언로에 철퇴를 가하며 무시무시한 공포를 조성했다.
그 결과가 ‘무오사화戊午史禍(1498년)’ 와 ‘갑자사화 甲子士禍(1504년)’이다.
흔히들 ‘무오사화’하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떠 올린다.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의 죽음과 땔려야 뗄수 없다.
하지만 알고 보면 조의제문 건도, 폐비 윤씨 건도 표면적인 발화점에 불과하다.
연산군의 속내는 언로의 봉쇄를 통한 「왕권의 강화」에 있었다.
대신이고 언관들이고 닥치고 충성만 하라는 뜻이었다.
그는 언로의 중심 부서 홍문관과 사간원도 폐지해 버렸다.
연산군의 광기 어린 폭정은 어찌보면 세조 이래 누대에 걸쳐 쌓여온 ‘비정상’들이 둑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물론 조선의 통치체제를 완성했다고 평가를 받는 그의 아버지 성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장차 저 원상(院相)들을 어디에 쓰라?”
원상이란 조선 시대에, 왕이 죽은 뒤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로 원로급 재상이다
성종 이혈(李娎:1457-1494)은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7년간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에 의탁한다.
‘청정’은 섭정(攝政)과 달리 대리인이 원상(院相)들의 자문을 받아 국정을 처결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섭정은 신하들과 의논하지 않고 대리인이 독자적으로 처결할 수 있다.
원상은 말 그대로 군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 재상이 상주하는 제도다.
이 경우 대비는 명목상의 웃전일 뿐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권한은 원상에게 주어진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6회
따라서
성종 초년의 조선은 훈구대신들 중 원상이 조정을 쥐락펴락 하는 그야말로 권신의 시대로 흘러갔다.
세조의 비(妃)인 대비 정희왕후는 원상들에게 조정을 맡기고 궁궐의 큰 어른으로서 성종의 훈육에 전념을 다 했다.
훈구 원상들은 육조의 겸판서(兼判書)가 되어 나랏일을 지도했는데 이 때문에 실제 판서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원상들은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며 부와 지위를 공고히 다졌다.
왕과 대비를 포함해 당시 조선 땅에서는 누구도 원상들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대간(사헌부 관리 등) 역시 훈구원상들의 눈치를 보며 슬슬 기었을 뿐이다.
성종 3년(1472년) 6월~
사헌부 지평 박시형이 경연 자리에서 원상의 혁파를 주장했다.
그러자 오히려 사헌부 동료들이 들고 일어나 박시형에게 죄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는 좌천 되었다.
성종 3년(1472년)12월~
일명 김순성 사건이다.
김순성은 병조정랑 직에 있다가 평창군수로 발령을 받았는데 아내의 병을 핑계로 부임을 거절했다.
당시 국법에 따르면 정당한 사유 없이 지방 수령을 회피하는 자는 6년간 임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김순성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알짜 보직인 평양부 서윤(시장 보좌 ,4급)에 임명 되었다.
대간들이 들고 일어 났다
사헌부는 김순성이 상관으로 모셨던 병조겸판서(원상) 한명회가 뒤를 봐주었다고 하면서 두사람의 국문을 요청했다.
하지만 한명회가 누구인가?
원상중의 알짜 원상이다.
성종 임금의 장인이 아닌가? 살아있는 권력을 탄핵 하다니....그 불똥은 고스란히 사헌부로 돌아갔다.
한명회가 병조의 겸판서의 사직을 청하자 성종은 오히려 사헌부 관리를 꾸짖었다,
「“대간臺諫이 작은 일로써 정승을 죄를 청한다면 모든 정승이 어찌 안심하겠느냐?
무슨일로 정승으로 하여금 말 할수 없게 한다면 내가 깊은 궁궐에 있으면서 어떻게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들을 수 있겠느냐?
대간은 나의 귀와 눈이 되니 큰일에 관계되면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와같은 작은일을 번거롭게 청함이 어찌 옳겠느냐?“」
<성종실록 3년(1472년)12월8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7회
이어서 성종은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권감을 좌천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원상 김국광. 성봉조가 처벌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주청했다.
조종(朝宗.역대임금)이래로 시헌부 대간의 말이 맞지 않으면 발언한 자를 죄를 주었을 뿐이다.
사헌부에서는
누구 한 사람의 발언이 아니고 사헌부 모든 관리들이 합의한 사항이라고 해명을 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사헌부 관리 전원 좌천으로 마무리 된 사건이다.
조선역사에 전무후무 한 일이다.
「이는 원로대신을 중하게 여기는 뜻이다.
(그러나) 김국광.성봉조 등은 언로(言路)가 상(傷)함을 아뢰지 않고
도리어 조종(朝宗)의 고사( 故事)를 들먹였으니 이 무슨 의미인가?
가령 조종(朝宗)에 이런 일이 있었더러도 어찌 인용하여 본 받을 수 있겠는가?
이는 말 한마디로 나라를 잃게 함이 아니겠는가? 장차 저 원상(院相)들을 어디에 쓰랴?」
<성종실록 3년(1472).12월8일>
“잘못 천거한 처벌은 시행할 만 하다”
성종임금 초년에 훈구원상들은 국법위에 군림했다. 권력과 위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고
부귀와 영화는 하늘을 찔렀다.
수렴청정에 나선 대비 정희왕후는 그들과 적절하게 타협하며 무리 없이 어린 임금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상들 앞에서는 ‘문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라고 솔직히 고백을 하고 자신을 낮췄다고 하니 어지 보면 진정한 고수가 아니었나 싶다.
이윽고 성종7년(1476년),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성종7년 동안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원상제가 철폐되었다.
훈구원상 한명회는 성종임금이 친정을 시작하고자 원상제을 철폐하려고 하자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권력을 놓기 싫었을 것이지만 임금이 성년이 된 이상 아쉽지만 원상들도 대놓고 반대를 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잠깐 한명회를 좀 살펴본다.
그는 세조의 킹메이커였을 뿐 아니라 다음 후계자인 예종임금의 장인이었다.
그의 사위 예종임금이 건강이 좋지 않아 일찍 사망하자 이번에도 자신의 사위를 성종임금으로 앉히고 훈구원상이 된 것이다.
대비 정희왕후가 성년이 된 성종의 친정을 위해 자신의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 훈구 원상제 폐지)는 뜻을 밝히자 한명회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그 반대의 논거로 제시한 말이 문제가 되었다.
「“지금 만약 주상에게 정사를 돌려준다면 이는 국가와 신민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이 대궐 안에서 술을 마시더러도 마음 편할 수 있겠습니까?
노산군(단종)은 나이가 어린데도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간사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지금도 중궁(中宮:왕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전하께 정사를 돌려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성종실록 7년(1476년) 2월19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8회
아무리 천하의 한명회라도 임금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대궐안에서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 없을까 봐 주상에게 정사를 돌려주지 못하겠다니 그야말로 망언 중 망언이 아닐 수 없다.
스무살이 된 성종을 10대 초반의 단종과 비유를 한 것도 어불성설이고 왕비가 정해지지 않아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없는 것도 궁색한 변명이다. 마침 자기 딸이 성종 비(妃)였던 공혜왕 후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자신 같은 든든한 장인이 없으면 반쪽 짜리 군주라는 밀 아닌가?
실로 오만방자했다.
성종 왈
“내가 아직 친정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인가?”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지만 신료들은 꿀 먹은 벙어리 였다.
군주가 성인이 되면 수렴청정을 거두는 것이 법도인데 한명회의 위세에 눌려 아무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어 던 것이다.
이 때 성종의 흑기사로 총대를 멘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후일 조선의 최고의 간신이 된 유자광인데 당시 성종에게 별로 대접을 받질 못했다,
그는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함. 중국 진나라 승상 조고가 위세를 부리며 황제를 농락한 행위) 고사까지 들먹이며 한명회를 강력히 틴핵을 했다,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센 표현(?)이었던 것이다.
「“신이 듣 건데 농담으로 하는 말도 평소 마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한명회가 마음속에 (임금에 대한)예의가 없으므로 말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미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고 성학(聖學:제왕의 학문)또한 고명합니다.
대비께서는 마땅히 전하에게 정사를 돌려줘야 하고 전하께서도 굳이 사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종실록 7년 (1476년)2월19일>
한명회는 얼마 후 임금에게 사직을 청하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성종도 유자광을 불러
“말이란 한 번 기록이 남으면 역사에 전해져 고칠 수 없다.”며 대신을 조고에 빗댄 것은 지나쳤다고 꾸짖었다.
<성종실록 7년(1476년)3월1일>
유자광을 꾸짖기만 했지 파직이나 유배를 보낸 다든지 하는 그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그래야 한명회의 권위가 설텐데.....
이 때부터 한명회의 권세는 바람 바진 풍성처럼 수그러 들었다, 권세의 특징인 그렇다,
결국 유자광이 한명회의 목에 방을 단 셈이다
한명회는 지금의 압구정에 자신의 호를 따서 ‘압구정(갈매기가 찾아오는 곳)’이라는 정자를 만들고 거기서 보내게 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9회
1481년,
한명회는 중국 사신들을 자신의 정자에서 접견도 하는 등 여전히 권력의 끈을 놓치 않았다.
어느 날 명나라 사신 접견을 명분으로 정자가 비좁으니 임금이 사용하는 차일(천막)을 빌려달라고 건의를 했고 임금은 단칼에 거절을 했는데
한명회도 물러나지 않고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임금으로부터 ‘부원군‘이라는 벼슬칭호를 박탈당하고 권력의 끈을 놓게 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이후 병석에 누워 있다가 1487년 사망 했으며
연산군 때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하여 부관참시까지 당하게 된다.
조선조의 수렴청정의 역사를 살려보자
성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대왕대비로서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명종은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선조는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이복 숙모이자 양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왕대비로서 1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는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계적증조모인 정순황후가 대왕대비로서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은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대왕대비로서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5촌 종숙모이자 양어머니인 순원왕후가 대왕대비로서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당시 철종은 충분히 친정할 수 있는 나이였으나 정치 능력이 부족하여 순원황후 김씨의 도움을 받았다.
고종은 11세의 나이로 즉위여자 9촌 삼종숙모이자 양어머니인 신정황후가 대왕대비로서 1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일찍 친정을 시작은 군주는
연산군이다.
18세에 즉위하여 영의정 이극배의 섭정기를 한 달 간 지낸 후 친정을 시작했다.
다음 숙종은
즉위 당시 13세였으나 명민하고 학문이 뛰어나 모후 명성왕후 김씨의 반대를 뿌리치고 영의정 허적의 섭정기를 한 달 간 지낸 후 친정을 시작했다.
오랜세월 훈구대신들에게 짓눌러 온 왕권이 회복의 조짐을 보인 것은 성종임금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0회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 임금은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였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에 응하는 학술 연구기관이다, 이로써 홍문관, 사헌부.사간원의 언론 삼사(三司)가 갖춰졌다.
삼사는 가각 경연(홍문관). 감찰(사헌부). 간쟁(사간원)을 관장했다.
이 공식적인 언로를 통해 공론(여론)과 민심이 국정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고
이 무렵부터 기존의 왕권, 대신권(의정.장관.각료)과 더불어 언론권이 새로운 권력의 축으로 떠오른 것이다.
성종은 삼사의 관리인 언관 자리에 과거를 통해 새로이 등장한 선비들을 기용했다.
일찍이 고려 말~조선 초 부터 중앙조정에 진출한 관학파와 달리 향촌에서 절의를 지키며 학맥 을 이어 온 사류(士類)였다.
초창기 사림(士林)은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몽주-길재-김숙자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었다.
성리학의 도덕적 의리를 숭상하는 사림의 언관들은 훈구대신을 거침없이 탄핵을 했다.
성종은 김종직을 신임하고 사림의 비판을 수용한 입금이다.
「동지사 김종직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기용하는 것은 전조(銓曹:이조(행정부)와 병조(국방부))에 맡깁니다.
그러나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은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재상으로 하여금 각각 아는 이를 천거하게 한 것입니다.다만 그 사이에 적당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니 잘못 천거한 데 대한 처벌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나라로 내려오면서 거개가 이 방법을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길를
“잘못 천거한 처벌은 시행할 만하다”
<성종실록 16년 1485년 11월 3일>
경연(經筵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ㆍ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 자리에서 김종직이 성종에게 아뢴 간언이다.
재상이 사람을 잘 못 천거하면 그에 따른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김종직의 주장에 성종은
“잘못 천거한 처벌은 시행할 만하다”라고 하여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당시 언론권을 가진 사림은 경연.감찰,간쟁을 통해 훈구파를 탄핵하고 공격을 했다.
잘못된 천거에 대한 처벌도 마찬가지였다.
조정 인사에 관여하는 것은 훈구파 대신들의 대표적인 권능 중 하나였다.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은 그 택임을 물음으로써 훈구파의 목을 죄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1회
이 시기에 조선은 성종의 왕권을 주축으로 한 훈구파의 대신권과 사림파의 언론권이 균형을 이루며 안정기에 접어든다.
현대적 의미와는 다르지만
삼권분립을 통해 견제와 균형의 정치질서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 질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면서 조선의 독특한 정치 구조로 자리를 잡게 된다.
성종에게는 삼권분립이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훈구파의 힘이 여전히 막강한 상황에 그들은 어머어마한 경제력(富을) 가지고 있었고
조정과 궁궐.지방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조력자들이 넘치고 있었다,
임금이 친정을 한다고 해서 훈구파들의 탄탄한 기반이 쉽게 무너질 리 없는 것이다.
성종이 언로를 연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는 결국 세력 싸움이다.
세력이 부족하면 정면으로 부딪히는 건 무모하다 .
자칫하면 역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종은 예종과 달리 직접 나서지 않았다.
대신 언론 삼사를 구축하고 사림을 등용하여 자동적으로 훈구파를 견제하게 했다.
사림이라는 언로를 이용해 이이제이 (以夷制夷) 한 것이다.
정치 질서가 안정되면서 사회 문화의 업적도 활짝 꽃을 피었다.
특히 <경국대전>은 조선의 법령과 규범을 집대성한 공식 법전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준거로 쓰였다.
태종 6년(1397년)의 <경제유전>이래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보완을 거듭해온 법전이 드디어 완전체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건국 100년 만인 성종 임금에 이루러 통치체제를 제도적으로 완성하였다.
한 나라가 태어나 틀을 온전히 짜기 까지 10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인 틀을 짰다고 해서 100년 동안 쌓여 온 독기가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그 독기는 감정의 골이 패인 음지에 숨었다가
통치에 허점이 보이는 순건 한꺼번에 분출되어 뿜어 나오기도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2회
연산군~
성종은 재위 초반에 훈구원상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이들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삼사에 등용했는데 그의 아들 연산군은
처음부터 사림(士林) 언관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언관들은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수륛제(水陸齊l 죽은이의 영혼을 달래는 불교 의식)의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수륙제는 전통적으로 왕실에서 행한 의식이었지만 유교 예법상으로는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상관부터 유생까지 번갈아 가며 새 임금을 괴롭혔다,
그들은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사림의 완고한 주장을 받아 준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유산인 셈이다.
연산군은 내정(궁궐의 일)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림의 태도가 불쾌했다.
조선 건국 이래 신하들은 임금에게 간하되 외정(外政:조정의 일)에 한하는 것이 관례였다.
내정은 신하된 자가 넘볼 수 없는 왕의 고유 영역이었다.
따라서 사림파들이 언관을 통해 내정에 간섭하는 행위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고
사람파들은 ‘자신들의 명예만 생각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무리’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부왕(선왕)의 묘호는 다음 왕을 승계한 자의 몫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부왕이 죽은 후, 중국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성왕(成王)에 비견되므로 ‘성종成宗’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다.
성왕은 유가에서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성종’묘호는 아버지의 권위를 높여 왕권을 신장하려는 연산군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내세우는 사림(士林)은 임금의 뜻에 반대를 한 것이다.
그들은 성종보다 격이 떨어지는 인종(仁宗)을 주장하며 연산군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수륙제를 마치고 성종 묘호를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연산군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언관들의 오만 방자한 언론권 행사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연산군에게는 아버지 성종처럼 맘에 거슬려도 참고 다독이는 인내심과 포용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 사림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고 있던 연산군에게 걸려든 제물이 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었다.
여기에 세조에게 은혜를 입은 유자광의 절대적인 충성심, 그리고 사관 김일손과 이극돈의 개인감정까지 얽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산군의 의지였고
그는 <조의제문>을 역심의 근거로 삼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3회
1498년에 발생한 무오사화는
조선에서 선비(사림)들이 입은 최초의 화(禍)였다.
이 사화(士禍)의 칼끝은 초창기 사림의 발원지인 김종직의 학맥을 향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고 김일손.권오복 등은 여러사람이
능지처참(凌遲處斬)에 처해졌다.
간악한 파당을 이뤄 ‘위대한 세조’를 헐뜯은 대역죄였다.
이밖에도 많은 선비들이 유배를 떠나거나 관직을 잃었다.
뒷날 오현(五賢)으로 추앙받으며 문묘에 종사되는 김굉필과 정여창도 귀양길에 올랐다.
자연히 언로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정치의 재미를 본 연산군은 멈추지 않았다.
1504년 3월 20일 저녁,
연산군은 선왕의 후궁이었던 엄씨와 정씨를 대궐 뜰에 묶어놓고 문초를 했다.
자신의 어머니 윤씨(폐비)가 두 사람의 참소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유다.
연산군은 정씨의 아들인 왕자 항(桁)과 봉을 불러 두 죄인(엄씨,정씨)을 몽둥이로 치라고 명했다.
봉은 어머니임을 알아채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연산군은 엄씨와 정씨를 참혹하게 죽인 다음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향했다.
「왕이 이르기를
“할머니는 어찌하여 제 어미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한 밤중에 친손자 연산군에게 봉변을 당한 할머니 인수대비는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창경궁 건춘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극의 불길은 곡 신하들에[게 옮겨 붙었다.
무려 239명이 피를 봤다.
그 가운데 사형.옥사.부관참시 등 극형을 받은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실권을 쥔 많은 대신들이 목숨을 잃었고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때 까지 훈구대신의 정점에 있었던 한명회, 정창손 등 누대의 공신들이 관에서 다시 나와 목이 잘렸다.
이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엄밀히 따지면 선비들이 화를 당한 사화(士禍)와는 다르다.
사화는 보통 사림이 왕이나 훈척(勳戚:훈구파,외척)에게 숙청을 당하는 것을 말하는데 갑자사화는 훈구파도 당했고 사림도 당했다. 대신,언관들 모두가 당했다.
과연 그들이 떼죽음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를 능멸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으니”」
드라마에서 대개 연산군이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뒤늦게 알고 미치광이가 되어 사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그려진다.
정말 연산군은 페비 윤씨의 피눈물이 베인 수건을 외할머니에게 전해 받고 돌아 버린 것일까?
이는 후일 편찬된 <기묘록己卯錄: 안로 편저>의 주장일 뿐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4회
사실 연산군은 즉위 초에 성종의 묘비문을 살피다가 폐비 윤씨의 일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연산군 일기.1495년3월16일>
그 날 왕은 수라를 들지 않고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그렇다면 연산군은 어째서 그 때 바로 죄를 묻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슬픈 일이지만 국사와는 일단 선을 그은 것이다.
그가 후일 사화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다른 각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위를 업신 여기는 풍습을 고쳐 없애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
이세좌는 선왕에 큰일을 당하였는데도 힘써 다투지 않았다.
오늘에 와서는 나이와 지위가 모두 높아지자 교만과 방종이 날로 더하였다.
내가 친히 주는 술까지 기울여 쏟고 마시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0년. 1504년3월30일>
이세좌는 갑자사화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그는 성종이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할 당시 형방승지로서 독이 든 약사발을 들고 간 인물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약사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다.
문제는 이세좌가 부왕이 독 사발을 가지고 가라고 할 때 왜 말리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이 진짜 열 받은 것은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이었다.
이세좌를 필두로 신하들에게 줄줄이 극형을 내리는 와중에 내린 전지(傳旨:왕명)를 보자.
「“지금 습속이 아름답지 못하여 위를 능멸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으니 그 폐단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지러운 나라를 다스리려면 중한 법을 쓴다’고 하였다.
지금부터 위를 능멸하는 죄를 범하면 경중을 따지지 않고 죄를 주어 인심이 바른데로 돌아가도록 할 것이다.
. 이를 조정과 민간에 널이 알려라“ 」
<연산군일기10년(1504년)5월7일>
갑자사화는 실상 신하들의 능상(凌上: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업신여김)을 응징하고 임금의 권력을 극대화하려는 시도의 의미를 내포하는 사건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연장선에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5회
훈구대신들 뿐 아니라 사림 언관들이 또 다시 대거 처벌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의 죄목은
대신들의 ‘능상’을 뻔히 알면서도 탄핵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로 절대왕권을 추구한 연산군은 무엇보다 언로를 틀어막는 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대간이나 재상으로 위를 의심하는 말을 한 자가 있으면 상고하여 아뢰어라,”」
<연산군 일기 10년(1504년)5월8일>
당시 훈구파는 1세대가 퇴장하며 세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신으로 발ㅇ런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임금 성종이 애지중지한 덕분에 목소리를 키운 사림(士林) 역시 반대를 일삼으며 왕을 쥐고 흔들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폐비 윤씨 일을 빌미로
거듭 사화를 일으키면서 사대부의 언로를 통째로 봉쇄를 한 것이다.이러한 공포정치 아래서는 입이 화(禍)를 부르는 문이고 혀가 자신을 베는 칼이 된다는 말이 꼭 맞았다.
「“우리 임금은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려니와”」
백성이 언로에 대해서도 강경한 조치가 취해졌다.
1504년 폭군을 비난하는 한글 투서가 외척 신수영의 집에 전해졌다. 익명의 봉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옛 임금이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 머리 끊듯이 죽이는가.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려니와, 무슨 의심이 있으랴, 」
연산군은 즉시 도성 문을 닫고 투서한 자를 잡아 들이라고 명했다.
나아가 언문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했다.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행위도 금했고 이미 언문으로 구절을 단 책은 불살랐다.
한글은 초기에 궁궐이나 양반가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보급되다가 그 즈음에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쓰이고 있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6회
물론
문제가 된 한글 투서는 사대부의 소행일수도 있었지만
추후 백성의 언로를 탈까 봐 연산군은 예방적 차원에서
‘한글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실제로 당시 저잣거리의 민심은 인금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연산군은 채홍사를 동원해 전국에서 여인들을 차출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들에게 ‘흥청’ 등의 이름을 붙이고 예인(혹은 기녀)으로
만들어 날마다 잔치를 열고 ‘흥에 겨워 재물을 마구 쓴다’는
‘흥청망청’이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
향락에 소요되는 비용은 백성들에게 2-3년 치의 세금을
미리 거둬들이는 식으로 충당했다.
사냥터를 조성한다고 민가를 철거하고 거주민들을
내쫓기도 했다.
민심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임금에 대한 백성의 반감은 안으로만 쌓이지 않는다.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 홍길동도 연산군 때 농민반란을
이끈 실존 인물이었다.
그가 의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충청도 일대를 무대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것은 결코 사실로 보인다.
<실록>에 홍길동이 향촌 토호들의 협력을 받아
조정 유력인사와 교류한 정황도 드러나 있다.
<연산군 일기. 6년(1500년)10월 28일>
충청도는 홍길동이 휩쓴 뒤로 황폐화 되어 10여년 후에도 조세를 거두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중종실록 8년 (1513년)8월29일>
비록 <실록>은 농민반란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연산군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훈구파와 사림, 그리고 백성을 한꺼번에 적으로
돌린 임금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는 훈구파가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허무하게
왕위에서 쫓겨났고 사림이 휘갈긴 붓질에 의해
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남게 되었다.
보통 폐군주는 백성의 동정을 사기도 했는데
연산군은 모욕과 조롱속에 철저하게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연산군은 오늘 날 까지도 폭군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예술을 장려하고 군사력을 키우려 한 부분을
재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낙인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대부와 백성의 언로를 무자비하게 틀어막으려 한 죄업이 그가 행한 공포정치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역사의 심판을 낳았다.
다만 연산군의 죄악 또한 세조부터 성종까지
누대에 걸쳐 선왕들이 쌓아 온 업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권경율)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7회
“양사를 파하고 언로를 다시 여소서”
「請罷兩司復開言路」
“근자에 박상,김정등이 구언(求言)에 따라 진언하였습니다.
그 말이 지나치다 해도 쓰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어찌하여 죄를 줍니까?
더구나 대간이 죄주기를 청하여 의금부의 낭관(정5품)까지
보내 잡아 왔습니다.
대간이 된 자는 언로를 잘 열어 놓은 뒤에야
그 직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 등에 대하여 혹 재상이 죄 주기르 청하더라도
대간은 구제하여 언로를 넗혀야 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언로를 훼손함으로써 먼저 그 직분을 잃었습니다.
신이 어제 정언(正言)이 되어 어찌 직분을 잃은 대간과 일을 같이 하겠습니까?
서로 용납 할 수 없으니 양사(兩司)를 파직하여 언로를 다시 여소서.”
<중종실록 10년(1515년 11월22일>
조선 11대 임금 중종(1515년) 11월
사간원 정언(정6품)조광조(1482~1519)가 임금에게 양사(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을 전부 파직하라고 청하였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 갓 출사한 신출내기 언관이 감히 선배들을 모두 몰아 내라는 주장을 하다니.......
조산역사에 조광조(趙光祖_ 이름 석자는 한번 쯤 들어 봤을 것이다,
이 발언에는 언로와 대간에 대한 사림파 조광조의 소신이 담겨 있었다.
언로가 통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 지고 있고 언로가 막히면 어지러워져 망한다는게 그의 믿음이었다.
대간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간의 직분이 나라의 언로를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언( 求言: 임금이 국정에 관하여 널리 비판의 말을 구하는 것)에 응한 신하를 처벌하여 한다면 마당히 소매를 걷어 붙이고 말려야 한다.
그런데 대간이 오히려 앞장서서 죄를 청하였으니
스스로 언로를 훼손한 셈이다.
무거운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8회
조광조의 요구는 양사의 대산들을 전부 파직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언로를 다시 여시라(復開言路)”는 것이었다.
이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라며 언로를 틀어막은 연산군 시대를 온전히 청산하라는 외침이었던 것이다,
또 훈구대신들의 반칙과 특권으로 얼룩진 조선을 전면적으로 쇄신하라는 건의이기도 했다.
조광조의 주장은 조정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뜻있는 관료와 선비들이 조광조를 중신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기묘사림(己卯士林)‘은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치(至治)와 도학(道學)을 추구하는 도덕정치가 조선땅에 출현한 것이다.
”신하의 도는 임금이 아닌 의(義)를 따르는 것“
15세기 후반 조선의 통치체제가 제도적으로 완성되면서 건국이념인 성리학도 사회전반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새롭고 심화된 성리학이 널리 퍼져 나간것도 이 즈음이다.
원래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의 복송오자(北宋五子)가 꿏피우고 주자가 집대성한 이학(理學)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때는 세상 만물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을 탐구하는 관념론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성리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경세(經世)의 학문으로 바뀌어 갔다.
정도전 등 조선 건국 초기 받아들인 것도 원나라에서 수입한 경세의 성리학이었다.
이들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관학(官學)을 통해 조선의 통치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반면 새 왕조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고 향촌으로 뿔뿔이 흩어진 절의파(고려 길재의 후학)는 성리학의 원형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송나라의 학문으로 되돌아가 복송오자와 주자의 이학을 파고 들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경세론에서 이치와 심성을 사유하는 관념론으로, 성리학의 무게중심을 옮긴 것이다.
초창기 사림(士林)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새로운 성리학의 신봉자들은 학문의 성취를 쌓으면서 서서히 도덕정치의 꿈을 키워 나갔다.
대표적인 집단이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 도덕적인 의를 앞세우는 완고한 정치철학으로 무장하고 윤리운동을 펼쳐나갔다.
훈구파로 변질된 관학의 후예들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동안 과거를 거쳐 조정에 진출한 사림은 훈구파의 견제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종대에 이르러 사림은 임금의 후원을 등에 업고 약진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제도적인 장치가 바로 언론권과 낭관(郎官: 이조, 병조 인사실무)권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9회
사림은 사헌부 ,사간원,홍문관에서 언론을 담당하는 언관(言官)과 이조.병조의 인사 실무를 처리하는 낭관(郎官)을 장악했다.
이 벼슬들은 품계상으로는 중하위급이지만 당상관이나 재상이 되려면 반드시 밟아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사림 관료들은 거침없는 논리로 훈구파 대신은 물론 임금까지 비판하였다.
왕조시대에도 그런 때가 있었다.
조선이 그러한 나라였다.
성종 임금당시 ,실록> 에는 그들이 훈구대신들을 탄핵하고 임금을 압박하는 사례가 넘쳐난다
임금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왕명까지도 거부하기도 했다.
비근한 예로
성종 24년(1493녀)10월,
영의정 윤필상의 탄핵을 둘러싸고 왕과 사림 관료들이 충동한 일화를 들 수 있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윤필상이 사직 상소를 올리자 성종은 ’불윤비담不允批答: 사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재신임장‘을 내렸다.
그런데 이를 전하라는 명을 받은 홍문관 교리 유효인이 임금에게 항명을 했다.사헌부의 탄핵이 정당하므로 ’불윤비답‘은 전할 수 없다고 임금에게 항명을 했다.
화가 난 성종은 당장 유효인을 국문했다.
그러자 홍문관 전헌 성세명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하의 도(道)는 의(義)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게 아닙니다“
<성종실록 24년(1493년).10월27일>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이다,
이는 당시 사림 관료들의 정체성이 응축된 표현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도덕적 의리에 입각한 공론(公論;여론)을 중요시 했다.
사림관료들은 공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임금과 훈구대신을 괴롭혔다.
언관들은 완의(完議) 즉, 내부적으로 합의가 되면 저돌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연일 상소를 올리고 경연자리에서 간했다.
이 과장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사하고 홍문관이 문헌 근거를 뒷받침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공론이 관철되지 않으면 사직을 요청했다.
임금이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면 다시 공론을 재개했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면 그이도 합세를 했다.
인사실무자인 낭관들이 한통속이라 그 나물에 그 밥인 인물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밀어 붙여도 안되면 이번에는 사관들이 나서서 문제의 공론을 사평(史評)으로 남겼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0회
’신 등은 그의 살덩이를 씹고 싶숩니다”
이쯤 되면 권력자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다.
왕의 권위나 조정의 기강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론에 발목이 잡혀 현안이 지연되기 일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동을 걸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법으로 언관과 낭관의 인사에 제도적인 자울성을 부여 했기 때문이다.
홍문관의 경우
홍문록(弘文錄:동료들의 평가에 기초한 자체 인선명부)이 인사고과에 반영을 해야한다.
사헌부의 경우
부적절한 인물이 임용이 되면 서경(署經: 5품이하 관료에 대한 신원조사)을 거부했다.
사간원의 경우
피혐(避嫌: 자발적인 교체요구)을 적극적으로 활용을 했다.
낭관의 경우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하는 자천권 때문에 외압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림 관료들은
도적적인 정체성을 강화하고 언관과 낭관을 아우르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날이 갈수록 강경한 언론권을 행사했다.
이는 이전의 양반관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보습이다,
조선은 통치체제의 완성과 함께 전환으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한 고난의 가시 밭길이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재위 초반부터 사림관료들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성종의 수륙제 거행과 묘호 제정등 민감한 사안을 놓고 사림관료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대신들도 사림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연산군 3년(1497년)
원로대신 노사신이 왕의 입장을 옹호하며 대간이 명예를 얻고자 꼼수를 부린다고 비판을 하자 사간원 정위 조순이 극언을 퍼부었다.
“노사신의 죄는 비록 극형에 처해도 도리어 부족합니다.
신 등은 그의 살덩이를 씹고 싶습니다,”
<연산군 일기 3년(1497년.7월21일>
조순은 노사신이 비판이 성리학을 해치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살덩이를 씹고 싶다는 발언은 선을 넘은 막말이 분명했다.
이에 연산군은 조순에게 답을 내리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는 필시 ‘내가 대간이 되었으니 이렇게 이야기 해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연산군 일기 3년(1497년)7월21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1회
이 말은 사림 관료와 언로에 대한 연산군의 시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산군은 속으로 응징을 다짐 했을 것이다.
마침내 무오사화,갑자사화의 피바람이 닥쳐 왔다.
연산군의 철퇴를 맞은 초창기 사림은 무기력하게 물러가지 않고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과업을 이어 나갔다.
“아랫사람을 진작시킴은 위사람에게 달렸다”
조광조는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이다.
17세대 어천찰방(魚川察訪)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초창기 사림의 학통을 이은 것이다,
그는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등 성리학 입문서를 바탕으로 학문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실천적인 윤리관을 정립했다.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평소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자세를 꼿꼿이 하며 언행을 절제했다.
이 때문에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515년 조광조는 서른넷의 나이로 과거(일성시)에 급제하고 언관이 되었다.
때마침 조정은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의 유배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그들은 장경왕후 윤씨(중종의 제 1계비. 인종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비어있는 중전 저리를 중종의 전처인 신씨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고 상소를 했다.
신씨는 누구일까?
신씨는 중정반정(1506년) 직후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로 중종의 왕비가 되었다가 중정반정 후 강제로 이혼( 중종에게 강제로 이혼을 하게 함)을 당했던 인물이다.
만약 그녀가 다시 중종비로 북귀하게 되면 그녀를 쫓아낸 반정 공신들의 입장이 난처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공신들은 김정과 박상의 유배를 주장했고 여기에 연산군 시절 피를 본 대간들 까지 가세를 했다.
조광조는 현실적으로 신씨의 복위는 무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시의 복귀를 주장한 김정과
박상에게 죄를 주는 것도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언로 개방에 최선을 다 해야 할 대간들이 오히려 처벌에 앞장선 것은 직분을 망각한 처사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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