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서론
2. 환단고기 소재 단군신화의 서사단락
3. 단군신화의 서사 구성의 지향과 특징
4. 단군신화의 신화학적 의미
5. 결론
<논문개요>
본고는 환단고기에 수록된 단군신화에 대한 설화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동안 환단고기에 대한 논의는 주로 환단고기의 사료적 성격 검토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앞선 연구들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화하려는 목적 아래 진행된 연구들이다 보 니, 환단고기의 내용과 구성에 대한 문학적 관점에서의 텍스트 연구는 진행되지 못 하였다. 환단고기는 한국 고대사에 대한 20세기의 상상력이 담긴 텍스트로서의 가 치가 있으며, 이미 축적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환단고기에 수록된 단군신화에 대한 설화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환단고기내에 수용된 단군 신화 의 구성요소와 특징을 서사 단락을 나누어 화소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환단고기 내의 단군신화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고구하였다. 나아가 이 단 군신화가 결국 어떤 상(像)을 형상화하고자 하였으며, 그 의미와 효과는 무엇인지 살 펴보았다. 환단고기의 단군신화는 건국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환국의 유구한 역 사와 넓은 땅을 강조하고 있으며, 근대에 출현한 단군관이 수용되었다.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대마다 단군신화가 대두되었던 신화사적 맥락과 이유립의 개인적, 시대적 경험 속에서 이유립은 광복후 불안에 대한 대응으로 기존에 전승되던 단군신화를 바탕 으로 환단고기의 서사를 구축할 수 있었다. 환단고기는 개인의 전략적인 고안의 과정과 환단고기에 형상화된 과거의 천년왕국을 근거로 20세기의 정치적 신화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환인, 환웅, 단군을 지키려는 의도에 매몰되어 환국, 배달, 조선을 제국으로 형상화한 환단고기는 단군신화를 서사의 기본 구조로 채택하고 있는 구성상 일선동조론이나 단군과 스사노오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논의에 복무할 수 있는 조 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유립은 단군을 높이려고 했으나 역설적으로 일본의 침략논리에 포섭되어 버린 한계가 환단고기의 일역자인 가지마 노보루의 판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환단고기를 단순히 위서가 아니라 20세기의 정치적 신화로 자리매김하였을 때, 환단고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화로서의 성격을 근거로 이미 연구사적 판단이 끝난 환단고기를 둘러싸고 왜 끊임없이 논란이 계속되는지, 왜 일군의 사람들은 환단고기의 서사를 포기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어: 단군신화, 환단고기, 환인, 치우, 단군, 카시러, 정치적 신화, 스사노오 노미코토
1. 서론
본고는 환단고기(이하 환단)에 수록된 단군신화의 서사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간 환단에 대한 논의는 주로 환단의 사료적 성격 검토에 집중되었다.1)
1) 이도학, 「재야사서 해제 - 환단고기」, 민족지성 9, 민족지성, 1986; 조인성, 「규원사화 와 환단고기」, 한국사 시민강좌 2, 일조각, 1988; 조인성, 「한말 단군관계사서의 재검 토 - 신단실기, 단기고사,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3, 한국사편찬위원 회, 1989;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에 대 한 재검토」, 역사비평 10, 역사문제연구소, 1990; 조인성,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단기고사·규원사화」, 단군학연구 2, 단군학회, 2000.
이 검토를 통해 환단에서 주장하는 책의 저술 시기 및 저자가 실제와 다르며, 환단의 단군세기에 나타나는 역대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 등이 규원사화, 단기고사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 한국 고대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주장과 함께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가 추진되고 동북아 역사지도 편찬사업이 중단되는 배경과 맞물리면서, 다시 한 번 환단과 관련된 성과물이 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환단의 판본 현황을 비롯하여 환단이 공식 출간이 되기까지 어떠한 수정을 거쳤는지2) 환단을 출판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립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은 어떠한지,3) 함께 교유했던 사람들과 단체의 성격은 어떠했는지4) 등에 대해서 다양한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2010년대 이후로 쏟아진 환단에 대한 연구들은 기존에 있었던 환단의 위서논란에 대한 탄탄한 근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유립의 생애 및 교유관계까지 구체화시킴으로써 환단이 출판될 수 있었던 당대의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고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앞선 연구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을 구체화하려는 목적 아래 진행된 연구들이기 때문에, 환단의 내용과 구성에 대한 문학적 관점에서의 텍스트 연구는 진행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앞선 성과에 더해 내용의 진위여부를 넘어 위서가 성립된 사회적 배경과 관련지어 문학, 사회학, 정치학 등에서 다양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5)는 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환단은 고대사에 대한 사료로서의 가치는 지니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한국 고대사에 대한 20세기의 상상력이 담긴 텍스트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특별히 환단의 서사는 단군신화가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환단에 수록된 단군신화의 서사 구성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환단에 치우, 반고, 숙신국 등 중국 전적에 있는 신화의 내용이 수용되었고, 신화나 도교적 상상력에 기댄 서술이 민족 서사의 공간을 확장하는데 유효한 방식이었다는 논의가 제출된 바 있다.6)
2) 장영주, 「환단고기 성립과정 –내용변화를 중심으로」,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석사학 위논문, 2017; 이문영, 「환단고기의 성립배경과 기원」, 역사비평 118, 역사비평사, 2017; 이문영, 「환작된 환단고기」, 한국사학사학보 38, 한국사학사학회, 2018b.
3) 장신, 「유교청년 이유립과 환단고기」, 역사문제연구 39, 역사문제연구소, 2018.
4) 기경량,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파시즘」, 역사비평 114, 역사비평사, 2016; 이문영, 「 1960-1970년대 유사역사학의 식민사학프레임 창조와 그 확산」, 역사문제연구 39, 역사 문제연구소, 2018a; 김대현, 「사이비역사학자들의 이상한 민족주의 ; 상고사에 숨은 군부 독재의 유산」,사림 41, 연세사학연구회, 2018.
5) 김시덕, 「위서 비판에서 위서 연구로」, 역사비평 118, 역사비평사, 2017, 116쪽.
6) 정재서, 「환단고기의 신화, 도교적 상상력-전유의 민족서사」, 중국어문학지 45, 중국 어문학회, 2013, 28-29쪽.
이는 환단에 수용된 중국신화, 도교적 화소를 주로 살펴본 것이기 때문에, 본고 역시 이와 같은 시각을 공유하면서 환단의 근간을 이루는 단군신화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2장에서는 환단 소재 단군 신화의 구성요소와 특징을 서사단락을 나누어 화소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환단 내의 단군신화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고구할 것이다. 환단은 독립된 네 책으로 구성되었는데, 특정 서사단락이 다른 책에 똑같이 혹은 약간 다르게 서술되거나, 한 책 안에서 서로 다른 서사단락이 병렬적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서사 구성의 지향을 살펴보기 위한 선행 단계로, 환단 소재 단군신화의 서사단락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환단 소재 단군신화를 ‘사료로서의 타당성’이 아니라 ‘구성된 텍스트’로서 바라보았을 때의 장점, 즉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3장에서는 분석된 서사단락에서 보이는 환단만의 특징을 화소나 건국신화의 구조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구성된 텍스트의 요소 하나하나를 다루는 이 작업을 통해 단군신화가 결국 어떤 상(像)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는지가 밝혀질 것이다. 4장에서는 분석된 텍스트의 구성 요소들의 ‘상호관계’가 어떤 의미를 도출하는지를 논의하는 장이다. 미리 언급하자면 환단은 기존에 전승되던 단군신화를 토대로 형성된 ‘신화’이다. 브루스 링컨은 신화를 “단순한 분류 체계가 아니라, 서사형식으로 된 이데올로기(ideology in narrative form )”7)라고 규정하며, 분류는 중립적이지 않고 범주적일 뿐만 아니라 위계적이며8), “분류 체계가 신화라는 틀 속에 담겨질 때 그 이야기는 아주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모습으로 온갖 특정한 차별 체계를 그럴듯하게 포장한다고 주장”9)한다.
7) 브루스 링컨, 신화 이론화하기, 김윤성 옮김, 이학사, 2009, 246쪽.
8) 브루스 링컨, 위의 책, 245쪽.
9) 브루스 링컨, 위의 책, 246쪽.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신화의 의미와 형식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부과된 왜곡을 분명하게 밝혀내는 것은 신화의 의미작용을 해체하는 것으로 신화를 해독하는 일10)이 된다.
10) 롤랑 바르트, 신화론, 정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46쪽.
따라서 2장과 3장에서 밝혀낸 서사 단락과 화소를 포함한 서사의 구성 요소들이 조합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의미는 신화학적 관점에서 의미와 한계를 조망하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이다. 논의에 앞서 환단의 내용과 판본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환단은 환인(桓因)이 세운 환국(桓國)부터 고려까지의 내력을 정리한 것으로, 네 가지의 텍스트를 하나로 묶어 편찬한 책이다. 「삼성기전(三聖紀全)」( 삼성기전 상은 이하 삼상으로 삼성기전 하는 이하 삼하), 「단군세기(檀君世紀)」(이하 단세),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이하 태백)로 구성되어 있다. 현전하는 판본은 일본어 판본을 포함하여 4개로 알려졌는데, 일본어 번역본이 총 세 차례 간행된 것을 고려하여 총 6개로 정리하였다.11)
11) 판본 현황은 장영주, 위의 논문, 2017, 8쪽을 바탕으로 작성하되, 일본어 번역본(4번과 6 번)을 보충하였다.
표제 발행처 발행년도 소장처 비고
1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9.10. 국립중앙도서관 외 광오이해사 100부 한정, 오형기 정서본
2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12.22. 서영대 소장 재판
3 환단고기 동경: 역사와 현대사 1982 소화57.7.7. 서울대학교 외 일본어판
4 환단고기 부산:민족 문화 1982.11.25. 서울대학교 외 일본어판, 3번 자료에 정오표를 추가해서
부산에서 재발행
5 환단고기 배달의숙 1983 숙명여대
6 환단고기 新國民社 1984. 소화59.9.1. 일본어 개정3판 번역문 뒤에 글이 수록됨
일본어판의 경우 자유지 발행인 박창암을 거쳐 그해 가을에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鹿島 曻]12)에게 전달되었는데, 이 책의 해제에는 가지마가 환단을 이유립에게 직접 받았다는 서술이, 후기에는 번역 후에 이유립과 박창암에게 보내 지도를 받았다는 언급이 실려있다.13)
12) 가지마 노보루를 네이버나 야후 재팬에서 검색하면, 일본 한자의 표기는 ‘鹿島 曻’과 ‘鹿 島 昇’ 두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판본에는 ‘鹿島 曻’로 적혀있기 때문에 ‘鹿島 曻’로 적는다. ‘鹿島 昇’은 아마도 컴퓨터상에서 일본식 한자 입력의 편의나 제약으로 인한 오기 혹은 이칭으로 판단된다.
13) 이문영, 앞의 논문, 2017, 41, 69쪽.
또한 개정 3판의 경우 번역문 뒤에 가지마 노보루의 글 2고를 포함하여 총 4고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환단에 대한 가지마 노보루의 관점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1번 자료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을 대상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환단의 크기는 25.7cm×18.9cm로 무곽에 무계이다. 한 면에 10행이고 한 행 당 22자이며 주는 쌍행이다. 영인본으로 표기 형식은 한문본이다.
2. 환단고기 소재 단군신화의 서사단락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신화로, 건국 신화는 건국에 관련된 인물의 계보를 중심으로 다양한 화소들이 붙고, 재구성된다. 따라서 기존의 단군 신화의 순차적 서사단락에 따라 강조되는 단군의 계보, 즉 환인-환웅-단군을 중심으로 환단의 서사단락을 정리하고자 한다.
환단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단군신화가 수록된 부분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표 1 환단 소재 단군신화의 서사단락 >
서사단락 삼상 삼하 단세 태백
1 환인이 출현해 환국을 다스리다. ○ ○ × ○
2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고 태백산 부근을 다스렸는데,
신시 에 도읍을 정하고 배달을 세우다. ○ ○ ○ ○
3 환웅이 웅씨녀를 아내로 맞이하다. ○ ○ ○ ○
4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과 싸워 이기다. ○ ○ × ○
5 왕검이 불함산 단목 아래로 내려오다. ○ × ○ ○
6 단군이 사람들의 추대로 조선을 세우다. ○ ○ ○ ○
7 비서갑 하백녀(匪西岬 河伯女)를 부인으로 맞이하다. ○ × ○ ×
8 단군이 여러 신하들과 나라를 다스리다. ○ × ○ ×
9 강화도에 제단과 성을 쌓다. × × ○ ○
10 당장경으로 천도를 하다. ○ × × ×
11 태자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참여하다. × × ○ ○
12 단군이 왕위를 물려주다. × × ○ ×
13 부루(扶婁)가 단군의 뒤를 잇다. × × ○ ×
14 기자가 존재한다. × × ○ ○
15 환인의 후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다. ○ ○ ○ ○
환단을 자세히 읽어보면, 환인과 환웅 등 중요 인물과 관련된 내용이 책마다 여러 번 반복되는데,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이는 각 텍스트들이 형식상 다른 전거를 끌어와서 적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서사단락들의 세부 사항이 차이가 있는 부분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환인부터 단군까지 총 12단락으로 구성할 수 있는데, 이 외에도 단군의 아들이나 기자, 한반도 주변의 다른 민족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단군신화의 서사적 확장이라는 점에서 이 단락들도 함께 다루고자 한다. 단락 15개를 모두 다루기보다는, 이 중 환단이 기존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어떻게 새로운 신화를 창출하여 냈는지 잘 드러내주는 단락 몇 개를 선정하여 살펴볼 것이며, 환단의 단세는 규원사화(이하 규원), 단기고사(이하 단기)와 비교했을 때 역대 단군명과 재위 기간이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14) 필요에 따라 규원과 단기의 서사단락도 함께 고찰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15)
14) 박광용, 앞의 논문, 1990; 조인성, 앞의 논문, 2000.
15) 규원사화와 단기고사의 서사단락은 박성혜, 「근대 계몽기 단군신화 연구」, 서울대학 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논문, 2016을 참고하였다.
먼저 단락 1부터 단락 3까지의 내용은 환인과 환웅에 관한 것이다. 발문에서는 두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환인은 7세를 전하였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환웅의 개천으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지냈고, 단군이 47세를 전하고 2096년을 지냈다.16) (환단고기 발)
16)“桓因傳七世云 而未詳其年代 自桓雄開天傳十八世 而歷一千五百六十五年 檀君傳四十七世 而歷二千九十六年”, 환단고기 「환단고기 발」, 137쪽,(띄어쓰기 필자, 주석에 있는 띄어 쓰기는 가독성을 위해 필자가 한 것임을 밝힌다. 그러나 이후로는 따로 ‘띄어쓰기 필자’를 부기하지 않는다.)
위 내용은 「환단고기 발」에 기록된 내용으로 환인이 7대를, 환웅이 18대를, 단군이 47대를 이어서 나라를 다스렸다고 적고 있다. 단군신화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인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환인-환웅-단군이 각각 ‘조(祖)-부(父)-자(子)’의 3대로 표현되어 있는데, 「환단고기 발」은 3대에 걸친 혈연관계가 세 왕조로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 환인이 출현해 환국을 다스리다.
1.1.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오자, 환인(桓因, 天帝桓因氏, 安巴堅, 監羣)이 어 돌로 불을 일으켜서 음식을 익혀먹는 것을 가르쳤다. (삼상)
1.2. 환인(桓仁, 安巴堅, 居發桓, 桓國天帝)이 천산(天山, 波奈留山)에 살면서 환국(桓國, 波奈留國)을 다스린다. (삼하, 태백) 환인과 관련된 서사단락에서 환인의 이름은 기존에 삼국유사이래로 전승되던 桓因 외에도 桓仁, 안파견, 거발환, 환국천제와 같은 이름이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특히 환국천제라는 명칭의 경우 “환인은 삼신을 대신하여 환국천제가 되었다(桓仁亦代三神爲桓國天帝)” 라고 하여 환인의 신분을 삼신에 버금가게 설정해놓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2.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고 태백산 부근을 다스렸는데,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배달을 세우다.
2.1. 천신의 명으로 환웅씨(桓雄氏)가 백산과 흑수 사이로 내려온다.
자정 (子井)과 여정(女井)을 천평(天坪)에 파고, 청구(靑丘)에 정지(井地)를 그렸다. 천부인을 지녀 오사(五事)를 주장하였다.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였다. 삼칠일을 택하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약을 먹고 신선이 되어 혼인예법, 농사, 목축의 방법을 정 하고, 교역을 해서 구역(九域)이 조공을 바쳤다. 후인이 지상최고의 신으 로 받들어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삼상)
2.2. 환국의 말년 환인이 서자 중 환웅을 천부인 3종과 함께 태백(太白)에 보 냈다.
이 때 반고가 기이한 술수를 좋아하여 분도(分道)하고자 하여 함께 가는 것을 청하자 그것을 허락하였다.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 기 신단수 아래(神市)에 내려왔다. 풍백, 우사, 운사(천부인 3종)이 곡식, 명,형,병,선악(五事)을 주장하게 하고,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재하였 다.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를 강연하고 무리들을 널리 가르쳤다. 환웅 이 천하의 이름을 배달(倍達), 그 도읍을 신시(神市)라 하였다. 18대를 전하고 1565년을 지냈다. (삼하)
2.3. 환웅이 력(歷)을 만들어 365일5시간48분46초를 1년으로 하였다. (태백)
2.4. 환웅천황(桓雄天皇)이 불을 얻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화식을 하고, 쇠 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났다.
사냥을 가서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는 데,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풍백, 우사, 운사, 치우에게 각각 동물로부터 오는 해를 없애고, 사는 곳을 정비하여 목축을 가르치고, 혼인의 법을 정 하고, 병마와 도적의 직책을 담당하게 하였다. (태백) 환웅에 관련된 서사단락을 살펴보면, 환웅은 태백 혹은 백산과 흑수 사이로 내려와서 백성들을 가르친다. 여기에서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 명, 병, 형,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는 내용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수록된 고기(古記)인용의 단군신화의 내용과 유사하다.17)
17) 환웅의 행위 즉, 천부인 3개를 가지고 풍백, 우사, 운사, 무리 3천을 거느리고 내려와서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교화하고 인간을 이롭게 하 는 내용과 유사하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 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 다.> 신단수(神壇樹;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 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 다. 이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神) 환웅(雄) 에게 기도하되 화(化)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 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서 먹어, 기(忌)한지 삼칠일(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하지 못해서 사람 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唐)의 고(高)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 <당의 요(堯)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 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으로,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 에 옮겼는데, 궁(弓) <혹은 방(方)이라고 한다.>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금미달(今 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다.”라고 하였다.”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庻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 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徃理之.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即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謂之 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 餘事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常祈, 于神雄願化爲人. 時神遺霊艾一炷蒜二十枚曰, ‘爾軰食之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號曰壇君王倹. 以唐髙即位 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 疑其未實.>都平壤城<今西亰>始稱 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逹, 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即位 己卯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亰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삼국유사 권 제1 기이제1 고조선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 db. history.go.k r, 2019.11.1. 접속)
환단의 환웅은 이외에도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데, 삼상에서 혼인법, 농사, 목축의 방법 등을 삼하에서 천경(天經)과 신고(神誥), 즉 경전을 가르치며 태백에서는 불을 얻는 법도 가르치고, 태고 문자를 만들기까지 한다. 불을 사용하는 법은 삼상에서 환인이 백성들에게 알려준 것인데, 환웅도 다시 불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환웅이 세운 나라를 ‘배달(倍達)’이라고 하는데, 배달이라는 단어는 신단실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8)
18) 신단실기에 따르면 단군이 단목 아래에 내려와 국호를 단(檀)이라 하고 그 칭호는 배 달(倍達)‘이라 하였으며, 비서갑(匪西岬) 하백의 딸(河伯女) 사이에서 태자 부루(扶婁)를 낳았다고 한다.
삼하에서 환웅이 태백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중국의 신화적 인물인 반고가 함께 내려왔다고 서술하는 것이 특징이다.
3. 환웅이 웅씨녀를 아내로 맞이하다.
3.1. 환웅씨(桓雄氏)가 웅씨녀를 후로 삼아 혼인의 법을 정하고,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삼상)
3.2. 곰과 범이 신단수에 와서 백성이 되길 빌자 환웅천왕이 쑥 한 묶음과 마 늘 20개를 신령하게 만들고, 이것을 100일동안 먹고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곰이 그대로 하여 의용(儀容)을 얻고, 웅녀(熊女)가 단수(壇樹) 아래에서 임신을 기원하니 환웅(桓雄)이 가화(假化)하고 웅녀(熊女)와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삼하, 태백)
3.3. 환국의 말기에, 씨족의 이름이 하나가 아니었는데, 원래 거주하던 자는 호랑이라고 하였고, 새롭게 이주한 자는 곰이라고 하였다.
웅녀군(熊女 君)이 무리를 이끌고 환웅에게 와서 환웅의 백성이 되었다. (삼하, 태백)
이 단락은 규원과 단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환단만의 특징을 보여주는 단락으로, 삼상, 삼하, 단세, 태백 모두에서 확인된다. 웅씨녀(熊氏女)는 텍스트에 따라 웅녀(熊女 삼하), 웅씨왕녀(熊氏王女 단세), 웅녀군(熊氏君 태백)으로 이름이 다르지만, 이들의 행위는 동일하다. 삼국유사「고조선」조에서 환웅이 웅녀와 결연을 맺은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 환단에서는 곰이나 웅녀가 아니고 웅씨녀라 일컬어지는데, 삼하와 태백에는 두 가지의 전승이 함께 전한다. 곰이 금기를 이겨내고 웅녀가 되었다는 삼국유사와 유사한 전승이 있는가 하면, 곰과 호랑이는 씨족의 이름으로, 원주민이 호랑이였고, 이주민이 곰이라고 설정된 전승도 보인다. 여기에서 웅녀군은 이주민 무리의 우두머리로 이해가 되며, 환웅과의 결연이 아닌 환웅에게 복속하여 환웅의 백성이 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전승의 경우 곰과 호랑이를 ‘토템’의 개념으로 인식한 이후에 생성된 서사단락으로 추정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크게 두 가지로, 이물교혼 화소가 사라졌다는 점, 환웅과 웅녀의 결연이 아들 ‘단군’을 낳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즉 단군의 아버지가 환웅이 아니라는 것이다.
4.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과 싸워 이기다.
4.1.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 함, 치우는 뇌우를 크 게 일으켜 산과 강을 바뀌게 한다는 뜻)이 구리머리(銅頭)에 쇠이마(鐵 額)를 하고 큰 안개를 만들었다.
광석을 캐고 쇠를 녹여 병기를 만들었다. 염농(炎農)의 쇠함을 보고 서쪽에서 여러 번 천병(天兵)을 일으켜, 색도 (索度)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 사이에(淮岱之間) 나아가자, 헌후 (軒候)가 일어났다. 탁록(涿鹿)의 벌판으로 나아가 헌원(軒轅)을 사로잡 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吳將軍)을 서쪽으로 보내 고신(高辛)을 치 게 했다. (삼하, 태백)
4.2.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유망(楡罔)이 쇠하자 갈로산의 금을 캐어 탁록 을 쳐서 빼앗고, 구혼(九渾)으로 나아가 천하에 위험을 떨쳤다.
유망이 소호(少昊)에게 항전하게 하였으나, 소호의 군사들이 패하여 유망과 함 께 도망갔다. 공손헌원(公孫軒轅, 토착민의 우두머리)이 와서 싸우고자 하였으나, 기(冀),연(兗),회(淮),대(岱)의 땅을 모두 천왕이 차지하여, 탁 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를 잡으니, 헌원의 속국이 모두 신하로서 조 공을 바쳤다. 사기(史記)에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것은 장수 치우비 (蚩尤飛)를 이른 것이다.(태백)
4.3.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涿),예(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淮)대(岱) 를 평정하였다.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렀다. (태백)
규원, 단기, 환단에서 치우의 전쟁담이 다양하게 전승된다.
더불어 태백에는 규원의 치우 전쟁담을 수용한 흔적이 확인된다.19)
19) 태백에서는 규원에 기록된 치우의 전쟁담을 개작한 흔적이 발견된다. 규원의 「단군기」는 ‘兵主 祠蚩尤 蚩尤氏爲萬代强勇之祖’로 기록되어 있다면, 태백의 「신시본기」, 70쪽에는 ‘兵主 祠蚩尤 三神爲天地萬物之祖也 蚩尤爲萬古武神勇强之祖’로 기록되어 있다.
치우에 대한 이름이 다양한데, 자오지 환웅, 치우천왕이라고 불리는 치우는 삼상, 삼하에 따르면 14대 환웅으로서 신시 말기에 청구를 널리 개척하였다. 또한 치우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만들어 먼저 병사를 일으키는 호전적인 면모를 보이며, 헌원과 고신을 굴복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불어 중국 사기의 기록에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서술을 치우천왕이 아니고 장수 치우비(蚩尤飛)를 말한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5. 왕검이 불함산 단목 아래로 내려오다.
5.1. 신인왕검이 불함산의 단목나무 터로 내려왔다. (삼상)
5.2. 왕검(王儉)이 무진 당요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 단목의 터에 이르렀 다.(단세)
이 단락은 삼상, 단세, 태백에서 나타난다. 왕검은 환웅이후 18대가 지나서 나타난 인물로, 태백산이 아닌 불함산(不咸山)으로 내려온다. 태백에서는 왕검이 웅족(熊族)으로 설정되거나 웅녀군(熊女君)이 천왕의 신임으로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왕검이 내려온 신단수가 ‘불함산’의 단목나무 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로 상정되고 있는데, 단군왕검의 도읍이 ‘아사달(阿斯達)’이라는 모티프는 삼국유사의 위서(魏書) 와 고기(古記) 전승에서 이미 확인되는 화소인 바, ‘불함산’ 화소를 주목할 만하다.
6. 단군이 사람들의 추대로 조선을 세우다.
6.1. 단군이 사람들의 추대로 당요(唐堯) 무진년에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고 도읍을 아사달(阿斯達)로 정했다. (삼상, 단세, 태백)
이 단락은 모든 텍스트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단락이다. 삼하와 태백 은 사람들의 추대를 받았다는 화소가 변형되어 있는데, 삼하는 구환(九桓)이 소도, 관경, 책화를 주관하고 화백(和白)을 하니 구환이 단군왕검에게 모두 합쳐졌다고 적고 있다. 사람들의 추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신라시대의 회의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화백 이후, 구환이 합쳐졌다는 서술은 사람들의 추대로 단군왕검이 되었다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태백은 신인왕검이 백성들의 추대로 비왕(裨王)이 되어 섭정을 하다가 웅씨왕(熊氏王)이 죽고 나서 왕위를 이어받고, 구환(九桓)을 통일하여 단군왕검이 되었다고 기술한다. 이런 기술도 백성들의 추대를 통해 바로 단군왕검이 된 것은 아니나, 단군왕검이 되기 이전에 추대를 통해 비왕이 되었다는 추대화소의 변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11. 태자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참석하다.
11.1. 부루와 하우가 국경을 정하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가 조선에 속하 였다. (단세)
11.2. 부루가 도산에서 치수법(治水法)을 전했다. (단세, 태백)
이 단락은 규원, 단기에서도 확인되며, 단세, 태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자 부루는 하우(夏禹)가 도산(塗山)에서 주재하는 모임에 참여하는데, 이 모임의 성격을 두고 텍스트마다 약간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14. 기자가 존재한다.
14.1. 신해 원년 정해 27년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세 상의 일과 사절하였다. (단세)
14.2. 기자가 주왕에게 알려준 홍범은 본래 부루가 우사공(禹司空)에게 알려 준 오행치수법에서 비롯한 것이다. (태백)
14.3. 환인이 7세, 환웅이 18세 1565년, 단군이 47세 2096년을 지냈기 때문에, 기자가 그 사이에 있을 수 없다.
(「환단고기」 발」)
이 단락은 각 텍스트에서 기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단락이다. 규원, 단기, 단세, 태백에서 기자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단기는 기자(箕子)외에 또 다른 기자(奇子)라는 인물을 설정한다. 규원과 환단은 기자에 대한 언급이 소략할 뿐만 아니라 기자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15. 환인의 후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다.
15.1. 몽고족도 단군의 후손이다. (단세)
15.2. 치씨(蚩氏)는 치우씨의 후예이다. (태백)
15.3. 복희씨는 환웅천황의 후예이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았다. 신 농은 소전의 아들이며, 소전과 소호는 고시씨의 방계이다. 소전은 웅씨에 서 분화되었다. 창힐(蒼頡), 고신(高辛), 여상(呂尙)은 치우씨의 후예이 다. (태백)
15.4. 환웅천왕이 아직 군림하지 않은 시대에, 자부선생이 칠회제신의 력 (曆)을 만들고,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서 배웠다.(태백)
이 단락은 환인부터 시작된 계보가 어디까지 포함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락이다.20)
20) 이 단락은 실제 텍스트 안에서 단락 14에 이어서 서술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텍스트에서는 민족의 계보와 관련된 내용들이 장을 나누어 따로 서술되거나 단락 1부터 17까지 전 개되는 과정에서 중간에 삽입되는 등 서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파편화되어 민족의 계보들이 설명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환인의 계보로 언급된 민족만 따로 정리하여 서사단락으로 구성하였음을 밝힌다.
이에 따르면 단군의 후예로 몽고족도 포함되고, 환웅천황의 후예로 복희씨가 언급된다. 또한 단군의 신하인 고시씨의 방계로 소전과 소호가 언급되고 있는데, 소전의 아들이 신농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또한 창힐, 고신, 여상도 치우씨의 후손이며, 자부선생은 환웅 때 책력, 즉 달력과 삼황내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태백에는 단군 이후 탕을 도와 걸을 치게 하고 탕의 즉위를 축하했다는 언급도 있다. 복희, 고시, 소전, 소호, 신농, 창힐, 고신, 여상, 자부선생 등은 모두 중국 신화의 인물이다.
3. 단군신화의 서사 구성의 지향과 특징
3.1. 사실로서의 건국과 유구한 시간의 강조
한국의 건국신화는 건국을 위해 특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보다 어떤 인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인공이 탄생해서 건국하기까지의 일대기는 중요하다.21)
21) 오세정, 「한국 건국신화의 정치적 약호와 상징작용 연구」, Journal of Korean Culture 28,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2015, 171쪽.
이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국가가 만들어지기 위해 어떤 갈등과 통합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고, 건국 과정에서 신성한 천명(天命)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건국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신화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건국신화의 관점에서 환단의 특수성은 환단의 환인-환웅-왕검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기존에 전승되던 조(祖)-부(父)-자(子) 3대의 계보와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 개의 왕조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건국신화에서 결연으로 인한 자녀의 출생과 조-부-자의 계보는 왕조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데 흔히 사용되던 화소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도 3대의 계보는 지켜졌고,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나 고려세계22)에서 고려의 태조 왕건도 조상들의 대를 이은 신이한 결연을 통해 탄생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건국신화, 특히 단군신화의 계보의 흐름을 두고 그 계보의 전범이 2대기인지 3대기인지 논란이 있었던 연구사의 흐름을 상기한다면,23) 혈연을 바탕으로 한 3대의 계보가 세 왕조로 바뀌는 것은 건국신화의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나아가 각 신격의 기능까지 해체되고 있다는 점에서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국신화에서 기능이란 신화 서사 내에서 행위의 주체가 수행하는 행위의 목적과 관련된 것으로, 건국 신화는 ‘파견자-중개자-실현자’라는 3기능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24) 이를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예로 설명한다면, 환인은 천명을 고지하는 파견자, 환웅은 환인의 명에 따라 결연과 같은 방식으로 건국주를 중개하는 중개자, 단군은 건국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실현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환단에서 환인은 “삼신을 대신하여 환국천제가 되어25)” 스스로 환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며, 7대를 이어갔다.
22) 조현설, 「고려 건국신화 「고려세계」의 신화사적 의미」, 고전문학연구 17, 한국고전문 학회, 1999, 11쪽.
23) 이지영, 한국 신화의 신격 유래에 관한 연구, 태학사, 1995, 1-14쪽.
24) 제1대인 천신은 최고신으로 창세신화에서는 주역이지만 건국신화에서는 중개자를 통하 여 배후에서 건국에 관여하는 파견자이며, 2대인 시조신은 시조신화의 주역이었으나 다음 단계인 건국신화에서는 건국이라는 목적을 위해 계기적으로 존재하는 중개자, 3대는 건국 신화의 주역으로 건국주이자 사후 국조신이 되는 실현자가 된다. (조현설, 동아시아 건국 신화의 역사와 논리, 문학과지성사, 2003, 280-290쪽.)
25)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53쪽, “桓仁亦代三神爲桓國天帝”
환인의 이와 같은 행위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비교하였을 때 지고신의 위치에서 천명을 고지하는 환인의 기능이 해체된 것이며, 중개자가 없이 스스로 건국을 실현하는 실현자가 된 것이다. 환인이 고대의 건국신화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버리고 실현자의 기능만 수행하듯이, 환웅 역시 환인이라는 파견자의 명을 따라 바로 배달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이 때 환웅도 중개자가 없이 스스로 건국을 실현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단락 5와 단락 6에서 보듯, 단군 역시 파견자와 중개자 없이 단목 아래로 내려와 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나라를 세운다. 요컨대 환단의 단군신화는 파견자-중개자-실현자의 기능이 해체되고 모두 각 나라의 실현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견자와 중개자의 기능이 약화 혹은 해체되고 실현자의 기능만 강화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단군신화의 전승사적 관점에서 실현자만 남아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신인(神人)이 단목(檀木)아래로 내려왔다’는 화소를 권근이 쓴 ‘응제시(應製詩)’의 자주26)에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유형은 환인과 환웅, 즉 파견자와 중개자를 배제하고 실현자만 남은 유형이다. 이를 두고 응제시에서 “단군은 천신의 성격보다도 신인이라는 인간적인 측면이 강조”27)된 것을 두고 유가의 천인 합일적 합리주의로 인해 고대 국가의 형성기에 만들어진 기존의 3기능 체계가 중세에 와서 해체된 것으로 본 바 있다.28)
26) 태조실록, 태조 6년(1397) 3월 8일, “始古開闢東夷主 : 聞設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 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 db. history.go.kr, 2019.11.1. 접속)
27) 조현설, 앞의 책, 408쪽.
28) 조현설, 위의 책, 407-410쪽.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았을 때 응제시의 단군신화가 인간으로서 단군과 그의 건국을 강조하기 위해 파견자와 중개자를 생략했다면, 환단은 환인, 환웅, 단군의 실재와 건국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각 인물들을 실현자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파견자와 중개자의 기능을 약화 혹은 생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환인, 환웅, 단군이 각각 실현자로서 건국한 나라는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가? 이들이 세운 환국, 배달, 조선은 각각 이전 세대의 영토나 지배의 영향력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형상화된다.
환인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환국을 예로 들면, 환단의 가장 첫머리에 “우리 환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29)라고 하여, 환인의 건국이 가장 오래된 것임을 천명한다. 구체적으로 이 시기는 환인과 환웅이 사람들에게 불을 쓰는 법을 가르쳐야 할 만큼 아직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 가장 오래된 과거로 형상화되어 있다. 환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천명은 서사의 배치라는 측면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서사학의 논의에 따르면 텍스트의 가장 첫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첫 부분은 독자들에게 특정한 인식의 틀을 제공하며, 독자들은 처음에 생성된 틀에 맞춰서 그 틀과 유사한 정보를 연결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30) 이에 따르면 환단의 삼상의 가장 첫 문장에 제시된 환국에 대한 서술에서 그 내용상으로나 배치상으로나 가장 오래된 국가가 환국이라는 명제를 강조하려고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환단의 단군신화에서 신이성이 약화되고 역사성이 강화된 것으로 보이는 서사적 장치는 이뿐만이 아니다. 환웅이 결연을 맺는 웅씨녀의 신분은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곰이 금기를 거쳐 인간으로 변한 웅녀의 경우도 있지만, 웅씨라는 성을 가진 여자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심지어 태백은 웅녀군이 환웅에게 와서 환웅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설화의 전통에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부류가 서로 성적으로 결합한다는 ‘이물교구(異物交媾)’ 화소31)는 신화나 민담, 전설, 고전 소설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신이한 탄생을 위해 전제되는 것이다.32)
29)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4쪽, “吾桓建國 最古”
30) Menakhem Perry, “Literary Dynamics: how the order of a text creates its meanings”, Poetics Today, Vol. 1. No.1/2, Special Issue: Literature, Interpretation, Duke University Press, 1979, 50쪽.
31) 라인정, 「이물교구설화의 용어 정립과 유형 분류」, 어문연구 29, 어문연구학회, 1997, 217쪽.
32) 라인정, 위의 논문, 218쪽.
그런데 단락 3에서 이물로서의 웅녀의 성격이 이미 인간으로 바뀌어 있거나 혹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로 제시되는 것은, 더 이상 이물교구의 화소를 건국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신이한 자질로 여기지 않는 전승자들의 인식 속에서 해당 화소가 변형된 것을 보여준다. 또한 웅녀군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집단의 통합으로 건국이 가능했다고 하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언급이 신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대신 들어가 건국의 정당성과 사실성을 보장하고 있다. 단락 1부터 단락 3까지는 단군을 중심으로 단군 윗대의 계보가 확장된 것을 보여주었다면 단락 5와 단락 7은 단군 이하의 계보의 확장을 보여준다. 단군이 비서갑의 하백녀와 혼인을 하고 부루를 낳는다는 단락 7은 13세기 말 삼국유사 「고구려」조의 「단군기」에서 처음 확인되는 화소로,33)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전승되었다.
33) ≪(단군기(檀君記)≫에 이르기를 “[단]군(君)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상관하여 아이 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 루이다.”라고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異母兄弟)일 것이다.)“壇君記云 “君與西 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名曰夫婁.” 今拠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고구려조, 국사편 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 db. history.go.kr, 2019.11.1. 접속.)
그런데 단군의 후대 계보에 부루를 언급하는 것을 넘어서, 조선이 47대에 걸쳐 2096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구체적인 시기를 확정하고, 각 단군의 이름과 치세의 내력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근대 이후에야 확인되는 화소이다.
요컨대 환단의 단군 신화는 기존에 전승되고 있던 단군신화와 관련된 화소들을 수용하였으나, 단군에 집중하기보다 단군의 윗세대와 아랫세대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서사가 큰 폭으로 확장된 것이다.
3.2. 넓은 ‘땅’에 대한 관심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환국, 배달, 조선의 영역도 확장되고, 여러 종족들이 이 계보 안에서 출현한다. 이와 관련하여 환단의 서술상의 특징과 몇 단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단락1과 관련하여 환인이 세운 나라에 대해 “파나류산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다. 천해의 동쪽 땅이고 또한 파나류국이라 칭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으로 5만 리, 동서로 2만 여리이다.34)”라는 구절이 있다. 이 서술은 그 단위를 굳이 환산하지 않더라도, 차지한 땅이 매우 넓었다고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뒤이어 파나류국은 총 12국(國)으로 구분된다는 내용이 추가되는데 이 역시 파나류국이 넓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넓은 땅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과 싸워 이겼다는 단락 4에서도 땅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간취된다. 치우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전승은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35)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치우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36) 황제의 승리를 언급하는 내용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도 전하고 있다.
34) 환단고기, 삼성기하, 6쪽, “波奈留之山下 有桓仁氏之國 天海以東之地 亦稱波奈留之 國 其地廣南北五萬里 東西二萬餘里”
35) 산해경의 성립년대에 대해 서주 초기(B.C.12세기)부터 위진시대(A.D.3-4세기)까지 주 장되고 있는데, 성립 지역은 초국(楚國)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국의 경우도 이미 백제 때에 일본에 산해경을 전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이 책이 읽혔다고 볼 수 있고 중국 문인들의 문학을 향유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문인들도 산해경의 내용을 수용하였다(정재서, 산해경, 민음사, 2008(신장판), 20-24쪽).
36) 정재서, 위의 책, 323쪽,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가 이에 응룡으로 하여 금 기주야에서 그를 공격하게 했다. 응룡이 물을 모아 둔 것을 치우가 풍백과 우사에게 부 탁하여 폭풍으로 거침없이 쏟아지게 했다. 황제가 이에 천녀인 발을 내려보내니 비가 그 쳤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功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 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그런데 환단은 치우가 황제인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기에서 죽였다는 치우는 장수 치우비를 이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치우가 전쟁에서 승리한 탁록의 위치를 섣불리 비정하는 작업은 차치하고, 삼하와 태백에서 염농(炎農)의 쇠함을 보고 병사를 일으켜 전쟁을 하였다는 서술을 바탕으로 치우가 중국 한족이 거주하던 땅까지 정벌했다고 강조하는 의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도는 치우천왕이 서쪽으로 탁과 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와 대를 평정하였으며, 땅 넓이는만 리에 이르렀다는 단락 4.3.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은 영토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환인과 환웅, 치우, 왕검이 다스렸던 나라와 관련된 집단을 언급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단락 15는 환인, 환웅, 단군에 이르는 계보에 포함된 집단을 언급해주는데, 몽고족, 복희씨, 신농의 아버지 소전 등이 언급된다. 여기에서 복희씨는 삼황오제의 삼황에 해당하는 신화 인물로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 따르면 동방의 천제로 불리는 인물이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 역시 삼황에 해당하는 신화적 인물로 동방의 신으로 농업과 의약을 발명한 신으로 알려져 있다.37) 즉 환단은 중원의 신화 인물들까지 환인으로부터 시작하는 계보 아래에 있음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서술은 땅에 대한 관심과 나라를 세우는 데 기여한 인물로서 환인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이 집단의 범위는 몽고와 중원의 범위를 넘어서기까지 한다. 단세의 3세 단군 가륵 시절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배반하자 여수기에게 명하여 우두머리인 소 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 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 로 도망쳐 세 섬에 웅거하며 천왕이라 참칭했다.38)
37) 정재서,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 창작과 비평사, 2010, 154-158쪽.
38) 환단고기, 단군세기, 17-18쪽, “戊申十年, 豆只州濊邑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犁. 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 今轉音爲牛首國也. 其後孫有陜野奴者, 逃於海上, 據三島, 僭稱天 王.”
위 내용에 따르면 3세 단군 가륵을 배반한 두지주의 우두머리가 소시모리인데, 그 예읍을 소시모리라고 일컬으며, 소시모리의 후손이 바다로 도망쳐 스스로 천왕이라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두머리의 이름과 예읍을 소시모리라고 일컫는 것은 일본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어휘 선택이다. 일본서기의 소잔명존(素戔鳴尊, 스사노오노미코토)이 신라국의 증시무리(曾尸茂梨)라는 곳에 있었다는 구절39)에서 증시무리의 발음이 일본어로 소시모리이며, 이 지역은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강원도 춘천으로 비정하여 일선동조론의 근거로 소비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40)
39) 일본서기 1, 小島憲之 等 校注·譯, 東京: 小學館, 1994, 98쪽, “素戔鳴尊帥 其子五十猛 神 降到於新羅國 居曾尸茂梨之處”
40) 장신, 「일제하 일선동조론의 대중적 확산과 소잔오존 신화」, 역사문제연구 21, 역사문 제연구소, 2009, 2-16쪽.
단세의 기록은 마치 이와 같은 담론을 의식했던 것처럼 ‘소시모리’, ‘우수국’, ‘세 섬’등을 콕 집어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단세가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텍스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단세에서 소시모리는 몇 만리가 넘는 큰 땅 중에서도 주도 아닌 읍의 추장이었고, 배반으로 인해 죽은 인물이다.
이 후손이 바다로 도망쳐 천왕이라 ‘참칭’ 했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일본은 단군을 배반한 자의 후손으로부터 세워진 바다 밖 세 섬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중원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성립되는 데 영향력을 준 나라가 바로 단군의 조선이라는 말인 것이다.
3.3. 근대적 단군관의 수용
조선 후기에 소중화를 자처했던 중화에 대한 조선의 숭모는 시간이 갈수록 그 목소리에 균열이 생기더니 근대에 이르러서는 탈중화를 주장한다.41)
그리고 중화를 극복하려는 언설은 환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단락 2에서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태백으로 오는 과정에 “이 때에 반고가 있었는데 기이한 술수를 좋아하고 분도하고자 하여 함께 갈 것을 청하니 이에 (환웅이) 그것을 허락하였다”42)고 하여 반고에 대해 부정적인 서술을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41) 앙드레 슈미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985-1919, 정여울 옮김, 휴머니스트, 2007, 64쪽.
42)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 7쪽, “時有盤固者好奇術欲分道 而往請 乃許之”
반고(盤古)는 중국 창세신화에서 혼돈 중에 탄생하여 하늘과 땅을 나눈 거인인데, 반고(盤古)와 다른 반고(盤固)는 창세신격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환인의 명을 받은 환웅이 건국을 위해 길을 갈 때, 다른 뜻을 품고 동행을 청하는 인물이며, 도리어 그의 청을 받아들인 환웅이 어진 인물처럼 형상화되고 있다. 이 외에도 단락 11에서 부루가 하나라 우와 함께 국경을 정하거나(단세), 도산에서 우에게 치수법을 전하는 것(태백), 단락 15.4에서 자부선생이 책력과 삼황내문을 만들었고 공공, 헌원, 창일, 대요의 무리들이 그것을 와서 배웠다는 서술은 중화를 넘어서는 문화적 우월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43) 자부선생과 관련하여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에 따르면 자부선생이 청구에 온 황제에게 초기 도교의 경전인 삼황내문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44) 그런데 태백은 자부선생이 삼황내문을 만들어서 환웅에게 전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니45) 이 서술에 따르면 중국 도교의 원류도 환웅의 때에 시작되어 전파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3) 정재서, 앞의 논문, 2013, 21쪽. (이 모티프 외에도 환단에 차용된 중국 신화 인물이 중 국에서 어떻게 인식되었고, 환단에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자세한 분석이 실려 있다).
44) 옛날에 黃帝가 동쪽으로 靑丘에 이르러 風山을 지나 紫府 先生을 뵙고 《三皇內文》을 받아 그것으로 온갖 신들을 부렸다.(昔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先生, 受三皇內文, 以 劾召萬神.) (정재서, 위의 논문, 22쪽 재인용.)
45)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 74쪽, “곰과 범이 서로 다투던 때, 환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환은 구황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환족이 유목 농경 하던 곳에 신시의 가르침이 열렸다. (중략)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께서 칠회제신지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을 천폐에 진상하였다. 천왕께서 이를 기뻐하며, 삼청궁을 세워 그곳에 거하게 하였다. 공공, 헌원, 창힐, 대요의 무리가 모두 와서 배웠다. (熊虎交爭之世 桓雄天 王尙未君臨, 苗桓乃九皇之一也. 在昔 已爲我桓族 遊牧農耕之所 而及神市開天 適以是時 紫 府先生造七回祭神之曆, 進三皇內文於天陛. 天王嘉之, 使建三淸宮而居之. 共工,軒轅,倉呂,大 撓之徒皆來學焉.)”
마지막으로 단락 14에서 기자에 대한 회의적인 언급은 중화를 극복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현전하는 기록상 고려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자는 주왕에 의해 조선왕으로 책봉되어 조선에 중화 문명을 전파한 상징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는데, 단락 14에서 보듯 기자가 알려주었다고 하는 홍범 9주가 사실은 부루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서술이나,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계보 사이에 기자가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언급은 기존에 전승되던 중화와의 연계 의식을 부인하는 서술이다. 이렇듯 중국 신화의 인물이나 기자 등 기존의 중국 신화나 관련 전승을 끌어와서 해당 내용을 변용시킨 것은 환단에 수록된 단군신화의 서사적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런데 다수의 선행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앞서 언급한 서사단락이 근대에 산출된 텍스트들과 관련이 깊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환단의 내용이 20세기 전반에 향유된 규원, 단기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은 이미 여러 논자들을 통해 언급이 되었다.46) 또한 자부선생 화소와 유사한 내용이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확인된다. 현전하는 조선도교사는 이능화의 생존 당시 출판되지 못한 것을 1959 년 동국대학교에서 영인, 출판한 것이지만47) 그 저술 시기는 1928년 이전48) 혹은 1930년 전후로49) 추정된다.
46) 박광용, 앞의 논문, 1990; 조인성, 앞의 논문, 2000.
47) 이능화, 조선도교사(재판), 이종은 옮김, 보성문화사, 1986, 5쪽
48) 이종성, 「이능화 조선도교사의 학술사적 의의와 한계」, 인문학연구 81,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202쪽.
49) 최준식, 「이능화의 조선도교사」, 종교연구 9, 한국종교학회, 1993, 90쪽.
이 책은 자부선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적고 있다.
단군 삼대의 신화와 최근 도가(道家)의 삼청설(三淸設)은 다 우리 해동 이 신선의 연원이라고 국내외 서적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신 선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皇帝)가 공동(崆峒)에 있는 광성자(廣成 子)에게 도를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진(秦)나라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가 동쪽 청구(靑丘)에 와서 자부선생(紫府先生)에 게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다고 하였다. (제1장 총설)50)
50) 이능화, 앞의 책, 23쪽.
진나라 갈홍이 지은 포박자에는,
황제가 동방 청구에 와서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보고 삼황내문을 얻어 만신(萬神)의 이름을 새겼 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한 청구란, 청 일통지에 보면 「청구는 고려 경내에 있다」하였다. (중략) 진 천문지에는, 청구는 칠성의 진성자리에 있는데 동이의 나라라고 하였다. (중략) 조선에 신시가 강림한 것과 중국에 황제가 수도 한 일은 모두 청구지역이요 자부의 세계이다 (3. 황제, 자부선생에게서 삼황 내문을 받다)51)
51) 이능화, 위의 책, 44-46쪽.
조선도교사는 갈홍의 포박자의 언급을 근거로 황제가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을 받았고 해동이 조선임을 강조하며, 해동을 신선의 연원이라고 여기고 있다. 조선도교사에서 포박자의 전승을 근거로 도교의 자생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태백이 포박자의 전승을 끌어와 자부선생에 대해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아가 태백은 조선도교사의 자부선생과 관련된 전승에 삼황내문과 함께 칠회제신지력을 추가하고, 황제 외에도 공공, 창일 등의 인물을 추가하였으며, 도교 자생설의 시기를 환웅이 군림하기 이전 시기까지 끌어올리고 있다.52) 뿐만 아니라 환단에 나타난 논의의 틀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1927)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방 문화의 연원과 단군을 계기로 하는 인류 문화의 일부면’이라는 「불함문화론」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최남선은 ‘밝’ 사상을 종교와 문화의 핵심 사상으로 제시하고 이 사상을 공유하는 문화를 지나, 인도와 대비되는 ‘불함문화(不咸文化)’로 설정한다. 여기에서 불함은 “밝(Pǎrk)의 총수격인 백두산(장백산,태백산) 의 옛 이름”53)으로 “‘밝’의 가장 오랜 자형”54)인데, 불함 신앙의 분포범위는 일본, 동부 지나, 류큐, 만주, 몽고, 중앙아시아, 발칸 반도까지 이른다.55) 최남선에 따르면 불함 문화권 안에서 밝사상이 처음 나온 지역은 카스피해 부근이지만,56) 가장 장구한 기간, 한 토지 안에서 하나의 민족이 일관되게 통일된 역사를 가지고 문화적 방사점이 된 것이 조선이며,57) 단군은 이 문화의 옛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열쇠와 같다.58)
52) 각주 45번 참고.
53) 최남선, 불함문화론· 살만교차기, 전성곤 옮김, 경인문화사, 2013, 21쪽.
54) 최남선, 위의 책, 57쪽.
55) 최남선, 위의 책, 59쪽.
56) 최남선, 위의 책, 62쪽.
57) 최남선, 위의 책, 83쪽.
58) 최남선, 위의 책, 4쪽.
즉,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북아시아에 오래된 문화 공동체가 있었음을 상정하고, 그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 조선이며, 불함문화권으로 문을 여는 계기가 단군이라고 주장한다. 환단에서 환인, 환웅, 치우, 단군이 차지했던 넓은 땅을 강조하고 환인의 계보 안에 여러 집단을 포함시키는 것은 최남선이 상정한 불함문화권과 지리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함문화론」이 상정한 것은 종족이나 국가, 영토가 아니라 문화권이며, 논의를 전개할 때 당시의 민속학적, 인류학적, 음운학적 지식과 방법론 등을 대거 활용하였다. 이에 비해 환단은 환인과 환족을 기원으로 두고, 그들이 영위했던 국토로서 넓은 땅을 제시하였으며, ‘론(論)’이 아니라 ‘기(記)’를 표방하며 단군신화를 끌어와 역사적 사실을 적으려 했기 때문에 논리의 비약이 많고 거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에 최남선이 상상한 동북아시아의 문화권과 단군의 위상이 해방 후 이유립이 상상한 과거의 국가와 영토, 환인의 위상과 유사한 것은 흥미로운 점이며, 이는 기존에 전승되던 단군신화의 상상력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단군신화의 신화학적 의미
지금까지 환단소재 단군신화의 구성 요소를 서사단락과 화소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며, 역사적 사실로서의 건국을 강조하고, 유구한 시간과 넓은 땅을 가진 환국이라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환단의 단군신화가 구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의미를 신화학적 맥락에서 검토함으로써, 환단소재 단군신화의 의미와 한계를 밝히고, 이를 통해 환단의 단군신화가 만들어내는 기능과 효과를 탈신화화하고자 한다. 신화에 대한 논의는 많은 학자들이 진행하였는데, 환단의 경우 카시러(E. Cassirer 1874-1945)의 논의가 가장 적합할 것으로 생각된다. 카시러의 논의를 끌어오는 것이 타당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카시러의 논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본격적인 논의로 나아가고자 한다.
카시러는 신화의 내용이나 동기를 문제삼기보다, 신화를 만들어내는 인간 정신의 기능에 주목59)하여, 상징형식의 철학에서 현대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를 보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신화와 신화적 사고를 언급하였으며, 이 때 신화의 사고방식은 신화의 순기능으로서 생명의식, 생명의 연대성, 공감적 사고 등을 말한다.60)
그러나 신화에는 역기능도 존재한다. 사회,경제적인 위기 상황에 신화적 사고가 정치철학으로 침투되면, 신화는 개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집단과의 일체감을 심어주고 인간은 분석과 반성의 능력이 약화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화이다.61)
59) 신응철, 「카시러의 신화철학과 정치적 신화 해석」, 현대유럽철학연구 52, 한국현대유럽철학회, 2019, 4쪽.
60) 신응철, 카시러 사회철학과 역사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4, 99쪽.
61) 신응철, 위의 책, 2004, 99-100쪽.
카시러는 국가의 신화를 통해 유럽 파시즘을 대상으로 현대의 정치적 신화에 대한 수법을 고발하고 있다. 따라서 카시러가 신화적 사고 자체에 대한 양면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신화적 사고의 역기능으로서 이데올로기라는 관점에 주목하고 있는 점, 카시러의 분석이 유럽 나치정권의 정치적 이념의 허구와 실체를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본고의 논의에 적절하다는 판단이다.
신화를 “서사형식으로 된 이데올로기”로 보고 환단의 단군신화가 자연스럽게 구성한 의미작용을 분석하려는 접근에 적합하며, 연구사적으로 환단 에 대한 판단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환단을 둘러싸고 끊이지 않는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카시러의 논의가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4.1. 과거의 천년왕국과 파시즘적 사고
신화학적 관점에서 환단 소재의 단군신화는 카시러의 말을 빌려 “솜씨있고 교묘한 기술자가 만든 인공품”62)으로서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현대의 정치적 신화63)라고 말할 수 있다. 카시러는 국가의 신화에서 신화의 역기능으로서 나치즘, 파시즘 등의 본질64)을 파헤치며 정치적 신화의 수법을 언급하였다. 이에 따르면 “현대의 ‘정치적 신화들’은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불안전한 집단을 효과적으로 묶고 단단히 결속시키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고안하여 집단적으로 투입한 것65)”이다. 여기에서 현대의 정치적 신화가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고안’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카시러는 신화를 “인간의 사회적 경험의 객관화이지 그 개인적 경험의 객관화가 아니다”66) 라고 하면서 플라톤이 자신의 변증법적, 윤리적 사상의 목적에 따라 신화를 만든 것을 두고 신화의 본질적인 특성이 빠져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67)
62) 에른스트 카시러, 국가의 신화(개정판), 최명관 옮김, 도서출판 창, 2013, 384쪽.
63) 카시러는 그의 책에서 ‘현대의 정치적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시기는 20 세기 전반에 부상한 나치즘을 다루면서 사용한 단어이다. 그런데 국문학 영역에서 20세기 전반을 흔히 ‘근대’라는 단어로 지칭하기 때문에 카시러의 논의에서 사용된 ‘현대’와 ‘근대’ 가 서로 다른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카시러의 ‘현대’ 는 시기적으로 20세기 전반을 지칭한다.
64) 에른스트 카시러, 위의 책, 7쪽.
65) 하이츠 파에촐트, 카시러, 봉일원 옮김, 인간사랑, 2000, 136쪽.
66) 에른스트 카시러, 위의 책, 76쪽.
67) 에른스트 카시러, 위의 책, 75-76쪽.
즉 카시러가 말하는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나온 신화라는 것은 한 개인의 치밀한 역량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특성을 염두에 둔 것이며, 따라서 현대의 정치적 신화는 자연스러운 상상력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환단을 20세기의 정치적 신화로 규정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환단이 탄생하기까지 이유립은 오랫동안 환단에 들어갈 내용들을 구상하고 조정하였다. 그는 1961 년 대종교에 들어가 대전 시교당 전무로 있다가 1963년 대종교인들을 데리고 나와 단단학회를 조직하고, 1965년 단단학회의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하면서68)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환단의 뼈대가 되는 서사를 구성하고 있었다. 커발한과 1970년대 월간 자유 51호(1976년 4월호)부터 85호(1979년 8월호)69)등에 구체적인 사례가 남아있으며, 1979년 최종적으로 환단이 출판되었다.
68) 이문영, 유사역사학비판, 역사비평사, 2018, 124쪽.
69) 장영주, 앞의 논문, 2017.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시를 들자면 “持三印하시고 主五事하시사 在世理化하시며 弘益人間하시니 號爲神市天皇氏라( 커발한에 인용된 삼신기)”가 삼상에서 “持天符印 主五事 在世理化 弘益人間 立都神市 國稱倍達”로 이름이나 지명등이 세심하게 자구가 조정된 것이나70) 1979년 환단에는 없던 목차인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가 1983년 환단에는 추가되거나, 삼하에서 환인의 나라에 대한 국명이 ‘파내류국’, ‘파내국’, ‘파내류지국’등의 변천을 겪은 것을 들 수 있다.71)
70) 이문영, 앞의 논문, 2018b, 304쪽. (본고에서 끌어온 예시 외에도 개인의 전략적 고안으 로 볼 수 있는 점이 많은데, 커발한과 환단의 자구 대조는 이 논문에 자세하다.)
71) 장영주, 앞의 논문, 20-24쪽.(이유립이 사료를 정식으로 출판하기 이전에 부분 인용했던 문구와 공식 출판된 환단의 문구를 대조하는 것이 이 논문의 방법론이자 목적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례는 이 논문을 참고하면 된다)
이는 환단을 구성하는 데 있어 기존에 전승되던 화소들이 활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환단에 수록된 단군신화가 개인의 전략적인 고안의 소산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전략적인 고안의 소산으로서 환단의 단군신화는 무엇을 형상화하였는가? 카시러는 현대의 정치적 신화는 “특수한 한 국민과 한 민족 의 천년왕국”72)을 계속 예언하며, 게르만 민족에게는 전쟁의 천년왕국이 약속되었다고 말하였다.73) 여기에서 천년왕국이란 “모든 희망은 충족되고 악은 송두리째 제거되는 시간이라는 관념”74)을 말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은 기존에 전승되던 단군신화를 끌어와 새로운 서사를 구성하면서 환국의 유구한 역사와 환인의 후손들이 차지했던 넓은 땅을 보여주며, 환인, 환웅, 치우, 단군으로 갈수록 민족의 계보와 그들이 차지한 땅은 계속해서 확장된다. 환단의 단군신화에서 형상화되는 환국, 배달, 조선은 각각 제도와 기술이 발달하고 영토와 후손이 점점 확장되는, 안정되고 아름다운 천년왕국으로 인식된다. 이는 환단의 단군신화를 현대의 정치적 신화로 규정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가 된다. 그런데 환단에서 확인되는 천년왕국이 ‘있어야 할’ 천년왕국이 아니라, ‘있었던’ 천년왕국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왜 환단에서는 단군신화를 기반으로 한 ‘과거’의 천년왕국이 형상화되었을까. 과거의 천년왕국이 불러일으키는 영향력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이유립의 생애를 살펴보았을 때, 이유립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유교회의 교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75) 당시 조선유교회는 단군교와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녹동서원에 단군전을 건립하고 한 달에 두 번 녹동서원의 강습생들이 단군전을 참배하게 하였다.76)
72) 에른스트 카시러, 상징 신화 문화, 도널드 필립 붜린 편, 심철민 역, 아카넷, 2012, 387 쪽.
73) 에른스트 카시러, 위의 책, 2012, 357쪽; 에른스트 카시러, 앞의 책, 2013, 393쪽.
74) 에른스트 카시러, 위의 책, 2012, 357쪽.
75) 장신, 앞의 논문, 2018, 199쪽. (장신의 연구에 따르면 이유립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 유교회의 교인으로 활동했는데, 1932년 9월에 창립된 조선유교회에서 운영한 명교학 원의 제1회 졸업생(우등생)이자, 조선유교회의 기관지인 일월시보의 2대 주필로 활동하 였으며, 명교학원을 졸업한 이후 고향인 평북 삭주에서 삭주지교부와 삭주전교실을 설립 하여 조선 유교회의 세를 늘리는데 힘썼다).
76) 황영례, 「안순환의 유교 종교화 운동과 녹동서원」,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57쪽.
따라서 조선유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이유립 역시 단군교에서 향유되던 단군신화나 단군과 관련된 담론 및 의례에 익숙했을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이유립이 환단의 단군신화를 구성하는 데 있어 배경지식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일제 강점기 내내 민족의 상징으로서 단군이 중시되고 단군과 관련된 다양한 담론이 확장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유립은 피식민지인으로서 단군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격동을 몸소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시러의 논의에서 보듯 정치적 신화는 ‘정서적으로’ 지배된 감정공동체를 만들어내는데77), 특히 이 시기는 정치적 신화가 그 기능을 발휘하기 좋은,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던 시기이다. 앤서니 D. 스미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시기에는 기존에 있었던 ‘인종적 민족’의 유대와 감정을 ‘민족’적 유대와 감정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중시된다.78) 이 때 기존의 과거가 재발견 혹은 재구성되는데, 신화와 상징, 공동체의 기억 등이 주요 소재가 된다. 재발견되는 과거는 현재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구성되며, 이렇게 재발견된 과거는 현재 공동체에게 과거의 드라마를 전달함으로써 현재 공동체는 선조의 삶과 시대를 다시 살아가고 스스로를 운명공동체로 만들어낸다.79)
77) 신응철, 앞의 책, 2004, 113쪽.
78) 앤서니 D. 스미스, 민족의 인종적 기원, 이재석 옮김, 그린비, 2018, 289쪽.
79) 앤서니 D. 스미스, 위의 책, 373-375쪽.
즉,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유립은 단군이라는 민족적 상징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인 동요와 공동체를 결합시키는 힘을 몸소 체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경험은 그가 환단의 뼈대로서 단군신화를 선택한 이유(혹은 단군신화가 이유립을 매개로 다시 부상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환단은 해방 이후 출판된 자료라는 것이다.
이유립이 일제 강점기에 향유된 단군신화를 잘 알고, 단군이라는 상징이 주는 영향력을 몸소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왜 해방 이후 환단이 필요했을까. 그 이유를 섣불리 단언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왜 환단을 썼는가에 대한 기존의 입장인 “이유립이 창교한 태백교의 종교적 기원을 보증하기 위해 그 자신이 꾸며낸 거짓 사화”80), “기자조선을 부정하기 위해서 환단고기를 조작해냈다.”81)는 견해만으로는 환단이 출판된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카시러는 신화의 진정한 하층 구조는 사고(thought)로 되어 있지 않고, 감정(feeling)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화의 일관성을 논리적 규칙이 아닌 감정의 통일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82) 그는 나치정권이 만들어낸 신어의 특징으로 단어의 의미보다는 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정동적 분위기’83)를 짚어냈으며, 신화를 구성하는 데 사용된 낱말들이 환기하는 분위기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스미스 역시 “특정한 사람과 결합하여 특징적인 배경에서 잊지 못할 사건이 특유한 분위기”84)에 주목한다.
80) 유영인, 「대종교 경전형성 소사」, 대종교원전자료집 백봉전집, 역사공간, 2017, 152쪽.
81) 이문영, 앞의 논문, 2018b, 295쪽.
82) 신응철, 앞의 논문, 2019, 6쪽.
83) 에른스트 카시러, 앞의 책, 2013, 386쪽.(번역된 본문에 ‘정동적 분위기’로 적혀있기 때문 에 그대로 적었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정동은 정동이론에서 말하는 ‘affect’로 이해하기보 다 앞서 카시러가 계속해서 언급한 맥락, 즉 논리적인 이성에 대응되는 감정으로 이해하 는 것이 적절하다.)
84) 앤서니 D. 스미스, 앞의 책, 375쪽.
그렇다면 기존에 전승되던 단군신화와 비교하였을 때 환단의 단군신화가 독특하게 불러일으키는 분위기와 단어는 무엇인가. 환단은 어떤 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일군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환단의 특징으로 환인이 세운 나라인 환국, 강력한 정복군주로서의 치우가 형상화하는 이미지에 대해 언급할 만하다. 3장에서 살핀 대로 단군보다 더 오래된 조상인 환인, 그가 ‘가장 처음으로’ 개창했던 남북으로 5만리, 동서로 2만여리가 되는 땅인 환국. 이렇게 재발견된 과거는 이유립에게 그리고 환단의 단군신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다시 살아갈 선조의 삶과 시대로서 어떤 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들까. 오래된 시간과 접맥되어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천년왕국으로서의 환국이 불러일으킬 분위기는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오래된 기원을 가진, 군사적으로 강력하고 넓은 나라와 그 후손으로서의 자신감과 충만감이 아닐까. 이와 같은 분위기는 치우라는 단어에서도 충분히 감지될 수 있다.
치우가 탁록에서 헌원과 싸웠다는 화소는 규원에서도 확인되는데, 여기에서 형상화된 치우는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사람을 살핀 후 스스로 회대(淮垈)와 기연(冀兗)의 땅에서 물러나는 모습이다.85) 그러나 태백에서 형상화된 치우는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서쪽으로 탁, 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와 대를 모두 평정한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장을 물리하고 땅을 다스리며, 조공을 받는 나라. 자랑스러운 14대 환웅과 그가 다스린 나라의 면모이다. 그렇다면 왜 해방 이후에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 대륙을 집어삼키는 기상을 가진 단군신화가 출현할 수 있었을까.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이유립이 환단을 집필한 이유는 이유립이 태백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일수도 있고,86) 기자조선을 부정하기 위해서일수도 있다.87) 이는 이유립이 1960년대에 태백교를 창시하였고, 환단에 기자를 부정하는 언급이 나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집단이 불안정할 때 정치적 신화가 생산된 사례를 근거로 1960년 당시 이유립이 만들었다는 태백교라는 공동체 혹은 대한민국이 ‘사회적으로 불안전한 집단’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1950년대의 한국 전쟁의 경험, 1960년대 반공이 강화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반감과 재침략의 불안을 야기시키고, 생성된 불안을 강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간첩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강화되었던 문화적 환경들도88) 당시 사람들에게 피부로 와 닿는 불안이었을 것이다.
85) 박성혜, 앞의 논문, 24쪽.
86) 유영인, 앞의 논문, 152쪽.
87) 이문영, 앞의 논문, 2018b, 295쪽.
88) 권보드래·천정환, 1960년을 묻다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천년의 상상, 2012, 130, 176-179쪽.
실제로 환단이 공식 출판되기 이전, 이유립은 박창암, 임승국 등과 함께 1970년대에 자유지에 여러 글을 기고했다. 1968년 6월 창간된 잡지 자유는 냉전 질서 속에서 북한 등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반공’의 ‘정신’무장을 앞세우기 위해 창간된 잡지였고 창간 초기에는 문인, 문학평론가, 정치평론가 등 당대 저명한 인사들의 글이 실렸다.89) 그러다가 1976년부터 잡지의 논조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이 때 박창암, 임승국 등이 보여준 사관은 자유와 민족의 개념을 상고사로부터 끌어와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반공의 체계였고, 냉전 질서 안에서 상대를 의식하며 체제와 사상의 우월성을 스스로 부풀리는 반공적 민족의 자긍심을 위한 것이었다.90)
89) 김대현, 앞의 논문, 258쪽.
90) 김대현, 앞의 논문, 261, 264쪽.
1970년대 후반 자유지에 대한 위와 같은 언급은 환단을 구성한 신화학적 이유와 호응되는 적실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기실 불안한 시대상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서 건국신화인 단군 신화가 주목받는 것은 신화사를 더듬어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략 이후 이승휴가 단군을 시조로 한 제왕운기를 편찬하고, 일연의 삼국유사에 단군신화가 수록된 것,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추대를 받는 ‘인(仁)’의 발현자로서의 단군이 소환된 것, 20세기 초기에는 기자를 넘어서는 문명의 개창자로서 단군이 소환된 것 모두 예증이 된다.
그리고 해방 이후 단군신화는 호전적인 태도로 넓은 땅을 차지하는 나라, 군사적 역량이 충분한 나라를 상상하며 또 다시 소환된 것이다.
4.2. 제국의 신화가 갖는 한계
이렇듯 환국의 위대함과 유구한 역사를 강조하는 환단의 단군신화는 자민족 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 등 이웃한 나라에서 이 서사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환단은 출판 후 일본어로 곧장 번역되어 여러 번 출판되었다.
이를 두고 기존 연구에서는 번역을 한 가지마 노보루[鹿島 曻]가 환단이 한일문화동원론을 근저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 조선의 고대사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환단은 친일적 민족주의의 요소가 강한 책91)이라는 의견과 환단이 투라니즘과 연결되는 여지가 있다고 한 의견이 있었다.92) 실제로 일본어 번역 3판 환단에는 기존 번역에 더해 네 개의 글을 싣고 있는데, 첫 번째 글인 「환단고기에 대하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사기,일본서기등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대지구, 즉 대해원의 수호 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嗚尊・須佐之男命)인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조선사에서는 그것이 단군인 것이다. 이 신은 결코 한 나라, 한 민족만의 신 이 아니라 세계의 주신이었고, 지구상 모든 종교는 이 신에서 생겨난 것이 다. (중략) 원래 가지마 씨의 사관은 문명 각지의 역사가 모두 공통의 신과 원문명에 의해 시작된다고 하는 것으로, 데구치 옹의 신관과 통하는 것이 있 다. (중략) 스사노오노미코토 대신이 장백산을 시작으로 소시모리 땅에 내 려와 천국의 모습을 지상에 실현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전부터 스사노오 신의 연고지에 천국의 가르침이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지마 노보루씨에 의해서 본 서가 간행된 것은, 실로 나의 예측을 뒷받침 하는 것이다.93)
91) 박광용, 앞의 논문, 1990, 218-219쪽.
92) 이문영, 유사역사학비판, 역사비평사, 2018, 82-83쪽.
93) 古事記 日本書記等を正しく理解すれば、大地球すなわち大海原の守り神はスサノヲ ノミコト(素盞嗚尊・須佐之男命)であることが判る。そして朝鮮史ではそれが檀君なので ある。この神は決して一国一民族だけの神でなく、世界の主神であって、地球上総ての宗 教はこの神から生まれたのである。(중략) 元来鹿島氏の史観は、文明各地の歴史がすべて 共通の神と原文明によって始まるとされるものであって、出口翁の神観に通じるものがあ る。(중략) 神素盞鳴尊の大神が長白山をはじめソシモリの地に天降って、天国の姿を地上 に実現されたのだから、このことは少しもおかしくない。このようなわけで私はかねがね 尊のゆかりの地に、天国の教が隠されているにちがいないと考えていたが、鹿島 曻氏に よって本書が刊行されたことは、実に私の予測を裏付けるものである。(木庭次守, 「환단 고기에 대하여」, 환단고기(일본어 개정3판), 新國民社, 1984, 514-517쪽).
키니와 츠기모리[木庭 次守, 1917-1993]94)가 쓴 이 글에 따르면,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지구의 수호신이자 세계의 주신이며, 지구의 모든 종교는 스사노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조선사에서는 단군이며, 스사노오는 소시모리에 내려왔다. 따라서 스사노오의 연고지에 환단과 같은 천국의 가르침이 숨겨져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환단이다. 스사노오와 단군이 동일한 존재라는 논리는 일제강점기에 신도계 일부 인사들이 일선동조론의 일환으로 주장한 내용으로, 1910년을 전후하여 조선에 신사를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1920년대 중반부터는 소시모리가 강원도 춘천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춘천에 신사를 설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다.95) 이와 더불어 인용문에서는 환단을 일역한 가지마 노보루의 사관이 데구치 옹의 신관과 통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데구치는 일본의 신도계 신종교인 오모토[大本]의 교조였던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 王仁三郞, 1871-1 948]를 말한다.96) 1920년대 오모토는 황도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며, 세계관의 전제로 진정한 대도(大道)인 황도(皇道)를 상정하고, 황도를 통해서 기존의 종교나 학문이 가지는 불완전함 극복될 수 있다고 정당화하였다.97) 오모토의 사상은 일본 내 많은 신종교집단에 다양하게 전승되었으며, 현대 일본의 신종교집단에게서 확인되는 내셔널리즘적 행보와 긴밀히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98)
94) 오모토의 신도로,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자신의 신학을 집대성해 구술한 레이카이모노 가타리(靈界物語)에 관한 자료를 포함하여, 오모토의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95) 장신, 앞의 논문, 2009, 373-382쪽. 96) 박해선, 「다이쇼기 일본 민중종교의 종교적 내셔널리즘 –오모토(大本)의 사례를 중심 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9-10쪽.
97) 박해선, 위의 논문, 10, 20, 32쪽.
요컨대 환단의 3번째 일역판에 실린 글을 살펴보면, 20세기 초부터 침략의 논리로서 만들어진 일선동조론이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일본의 민중종교의 맥락과 맞물려서 여전히 소비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선행 연구에서 우려했던 점이 환단 일본어역 3판에서 실제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환단이 일선동조론과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번 언급된 바와 같이 이는 환단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책들, 즉 규원, 단기 등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언급할 때 확인되는 한일문화동원론99)의 내용이 그대로 수용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이유립의 성장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친일적 성격을 가진 단군교에 노출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98) 박해선, 위의 논문, 45쪽.
99) 박광용, 앞의 논문, 1992b, 117-119쪽.
이 점으로 인해, 환단이 친일적 민족주의의 요소가 강하고, 그 내용이 투라니즘과 연결될 여지가 많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환단이 처음부터 친일적 민족주의를 최종 종착지로 삼고 쓴 책이라기보다는 신화를 전유하는 구성방식 자체가 갖는 문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한 민족의 시조가 제국의 시조로 탈바꿈 되었을 때, 제국이 여러 민족을 포함하며 그 경계가 한없이 넓어질 때, 그 정점의 인물이 다른 인물로 치환된다면 특정 민족의 우수함을 드러내는 서사는 충분히 제국 내 다른 민족의 서사로 소비될 수 있다.
이러한 예를 환단이 잘 보여주는데, 환족에 몽고족이 포함되고, 한족의 신화적 인물들이 환웅과 치우의 후예이고, 환족을 배반한 자의 후손이 일본을 세웠다는 식의 확장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환족의 후예라는 상상을 만들어낸다. 서로 다른 민족을 환족이라는 큰 틀로 묶는 것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결국 일선동조론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환단이 단군 신화를 바탕으로 서사를 구조화했기 때문이다. 신화 담론은 본질상 인류적 보편성, 문화권적, 민족적 특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시각에서 신화를 전유하느냐에 따라 민족의 담론이 될 수도 있고, 탈민족의 담론이 될 수도 있다.100)
결국 건국 신화의 양면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한 민족의 시조를 제국의 시조로 자리매김하려했던 환단의 욕망은 환인을 제국의 시조로 주조함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고의 자리에는 환국의 경계에 들어있는 어느 민족의 시조든지 접근할 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단군을 스사노오로 바꾼 가지마 노보루의 작업이 바로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민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화가 가진 양면성을 간과한 경우는 사실 그 전에도 있었다. 단군을 지킴으로써 조선을 지키려고 했던 최남선의 일련의 활동, 즉 「불함문화론」, 「만몽문화」의 저술 활동을 두고 “지배자의 담론에 포획되더라도 단군신화와 불함문화를 지키고 있으면 민족이 재창출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101)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나, 단기를 두고 “세계적 단군문화 수준에 자부심만 가지면 친일파이든 일본문화이든 포용할 수 있다는 속빈 허풍선이 논리”102)라고 말한 것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00) 조현설, 「민족과 제국의 동거」, 한국문학연구 32,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7, 238쪽. 박광용은 대단군민족주의가 보편주의와 민족주의가 상호 보완관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는데, 이러한 언급 역시 대단군민족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온 문헌텍 스트들이 단군신화의 단군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박광용, 「대단군 민족주의의 전개와 양면성」, 역사비평 19, 역사비평사, 1992a, 225-239쪽).
101) 조현설, 위의 논문, 246쪽.
102) 박광용, 앞의 논문, 1992b, 120쪽.
이 텍스트들은 모두 작자와 서술된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단군신화의 단군 지키기에 집중한 나머지 건국 신화 자체가 가진 양면적인 속성을 간과한 것은 동일하다. 신화, 특히 건국 신화는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을 하나로 묶는 응집력, 구성원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집단이 힘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쉽게 끌어올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가 되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화를 끌어와서 특정한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녹록치는 않다. 신화 자체가 가진 인류 보편적인 특성, 문화권적인 특성, 민족적인 특성 중 어느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확대될 때, 그것은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또한 신화를 기반으로 응축된 공동체의 힘이 다른 공동체를 향한 차별과 배제를 조장하고, 억압을 강요할 때도 이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힘’이 아니라 ‘파괴하는 힘’이 될 수 있다.
5. 결론
본고는 환단에 대한 기왕의 연구가 사료로서의 성격을 밝히는 데 집중하고 이를 구성된 텍스트로서 바라보는 접근이 부재했다는 판단 아래, 환단 소재 단군신화의 구체적인 양상을 순차적 서사단락으로 정리하고, 서사단락을 구조화하는 데 사용된 화소들의 기원을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환단 소재 단군신화에서 건국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단군신화에 내재된 구조를 해체하고, 환국의 유구한 역사와 넓은 땅을 강조하려고 하는 지향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환단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근대에 출현한 단군관이 수용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대마다 단군신화가 대두되었던 신화사적 맥락과 해방 이후 여전히 불안정한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유립은 기왕에 전승되던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불안에 대한 대응으로서 환단의 서사를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환단은 오랜 시간에 걸친 전략적 고안의 과정을 거쳐 과거의 천년왕국을 형상화하였으며,
이는 카시러의 용어를 빌려 “현대의 정치적 신화”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환인, 환웅, 단군을 지키려는 의도에 매몰되어 환국, 배달, 조선을 제국으로 형상화한 환단은 단군신화를 서사의 기본 구조로 채택하고 있는 구성상 일선동조론이나 단군과 스사노오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논의에 충분히 복무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립은 단군을 높이려고 했으나 역설적으로 일본의 침략논리에 포섭되어 버린 한계가 환단의 일역자인 가지마 노보루의 판본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 논의는 환단에 대한 연구사의 지평을 넓히고 환단소재의 단군신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환단을 단순히 위서가 아니라 정치적 신화로 자리매김 하였을 때, 환단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화로서의 성격을 근거로 이미 연구사적 판단이 끝난 환단을 둘러싸고 왜 끊임없이 논란이 계속되는지, 왜 일군의 사람들은 환단의 서사를 포기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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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orientation of narrative composition of the Dangun Myth in and its meaning
Park, Seong hye(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paper attempts to analyze the version of theDangun myth contain ed in the Hwandangogi. Until now, the discussion on the Hwandangogi has focused whether this book can be considered a historical work. However, the question of its historicity aside, this book is also valuable as a text representing the imagination of the people who lived in the 20th century. Therefore, it is essential to approach the Dangun myth contained in this text from the perspective of viewing it as a literary narrative. Chapter 2 of this paper breaks down the narrative structure of the Dan gun myth in the Hwandangogi. This approach is good for demonstrating the way in which the Dangun myth was composed. In chapter 3, this paper explains what is emphasized in the Hwandango gi version of the Dangun myth: the nation has a long history and a large territory. Chapter 4 explains the meaning of the Dangun myth by borrowing Cas sirer’s phrase and calling it the Hwandangogi as a ‘poitical myth of the 20th century’. The Dangun myth in the Hwadangogi shows the desire for a strong nation named Hwan Guk, which has a large territory. Howev er, this nation can easily be changed into the territory of the Japaneseempire and Dangun just as easily changed into Susanoonomikoto, a myth ic figure known as a sibling of the mythical founder of Japan, in the disco urse of Japanese imperialism.
Key words: Dangun Myth, Hwandangogi, Hwan-in, Chi-woo, Dangun, Cassirer, Political Myth, Susanoo nomikito
구비문학연구 제55집 (2019. 12. 31.)
2019년 11월 20일 투고 12월 17일 심사 완료 12월 17일 게재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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