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일본의 한센 사업은 16세기 일본으로 들어간 서양선교사들의 시혜적 전도 사업과 함께 이뤄졌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기독교 탄압과함께 수난을 겪었다.
이후 에도시기의 한센인들은 신사나 절 주변에 집락촌을 형성하고 참배자들에게 구걸하는 형태로 생활해 갔다.
메이지기에 접어들어서도 국가가 콜레라나 페스트,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집중하게 되면서, 한센인은 집에서 몰래 치료하든가, 생활고와 차별로 인해 지역사회에서 배제되어 떠도는 삶을 이어갔다(久保井規夫, 2006: 119-121, 140).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신부 테스트위드(Testvuide)가 고우야마후쿠세이병원(神山復生病院, 1888), 미국장로회 선교사 케이트 영맨(Kate M. Youngman)이 이하이엔(慰廃園, 1894), 영국인 선교사 한나 리델(Hannah Riddell)이 가이슌병원(回春病院 1895)을 설립하여 한센인 치료와 구제 사업을실시했다(田中等, 2017: 41).
일본 주도의 한센 사업은 1907년 제정· 공포된 「나 예방에 관한 건」에서 출발하여, 1931년 제정된 「나 예방법」(구법, 새 법은 1953년), 1940년 「국민우생법」이라는 제도하에서 실시되었다.
한국의 한센 사업도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전도와시혜의 차원에서 시작되었지만, 일제 강점 이후 일본 한센 정책에근거한 식민지 의료체계 구축의 일환으로 변모했다.
한센병은 치료약인 프로민(Promin) 개발 후1) 더 이상 불치의 병이 아니게 되었고, 환자 인권 회복의 길은 확장되었다.
1) 일본에서의 한센병 치료는 1940년대 초반까지 인도 원산의 대풍자유(大風子油) 를 근육에 주사하는 치료법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주사 시 격통이 있고, 증상이 재발하기 쉽고, 효능의 불확실성이 문제시되었다. 그 후 1943년 미국의 파제이는 프로민의 한센병에 대한 효능을 보고했고, 일본에서는 이시다테 모리조(石館守三)가 1946년, 독자적으로 프로민의 합성에 성공해, 1949년부터 널리 도입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정맥주사용, 프로민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하여 경구제로 한 답슨이 세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981년 WHO의 연구팀에 의해리팜피신, 답슨, 클로파디민 중 2개 또는 3개 모두를 병용하는 치료법이 실시되었다. MDT(Multidrug Therapy=다제 병용 요법)라고 불리는 이 치료법은 가장효과적이고 재발률이 낮은 치료법으로서 한센병의 표준치료법으로 권장되고 있다. (https://leprosy.jp/about/cure/)
연구의 측면에서도 그간 다양한 연구와 자료조사·발굴을 통해, 한센 정책의 역사, 격리 정책을 바탕으로 한 환자 인권유린의 역사, 국가의 책임을 요구한 규탄의 역사로 이어지는 괄목할만한 성과를이루었다.
일본 한센병 관련 연구는 가와가미 다케시(川上武, 1982), 후지노 유타카(藤野豊, 1993), 야마모토 슌이치(山本俊一, 1993), 이카이 다카아키(猪飼隆明, 2016), 히로카와 와카(廣川和花, 2011)에의해 대표 되는데 이들을 통해,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의 증언, 환자의 강제 입소와 인권침해의 문제, 국가적 문제로서 한센 정책의 문제점, 한센 정책 세부에서 드러난 각 지자체의 대응과 사회적 분위기, 환자의 입장에서 본 생존의 역사 등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후지노 유타카(藤野豊編, 2002-2009)는 일본 한센병 연구의 기초자료를망라하여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편 한국에서의 연구는, 해방 이후 환자들의 증언이나 다양한자료를 통해, 일제강점기 환자와 피식민자라는 이중적 소수자로서당한 강제적 조치가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정근식은 일제강점기 소록도에서 한센인 삶의 실체, 의료분야에 있어 일본과 서양의 헤게모니 경쟁 구도 탐구, 식민지적 근대와 신체, 소록도 내 강제노역 등, 근대 시기 한센 정책에 대해 국가·사회·개인적측면에서 면밀하게 다뤘다(1996; 1997a·b; 2005).
이외에도 소록도강제노역에 대한 조사(이병례, 2006) 및 미디어에 드러난 조선 대중과 한센 정책의 공범적 관계성, 생의 권리 획득 위한 한센인들의주체적 노력, 일본 기독 단체의 시각에서 본 소록도(김미정, 2012; 서기재, 2017; 2022; 2023a·b)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그리고 다키오 에이지(滝尾英二, 2001; 2002; 2003)는 식민지 한센 정책에 관한1차 자료를 망라하여, 일제강점기 한국 환자의 삶과 국가의 정책등을 파악할 수 있는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선행연구를 통해 한국과 일본에서의 한센 사업의 시작점에 있는 존재들, 국가 정책이라는 거대 명령하에 이뤄진 한센 정책의 실상, 피통치자 및 환자라는 이중적 억압 구조에서 벌어진 차별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연구는 가시적인 권력이 아닌대중 집단의 환자에 대한 태도를 각종 미디어 기사를 통해 밝혀내고, 또 한센인들이 단순히 차별과 억압에 순응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존 투쟁에 나선 주체였다는 것을 밝힌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기존 연구가 일본 패전 이전의 상황과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는점과 연구의 대상에서 일본에서 살았던 한국(조선) 환자들이 간과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이 연구에서는 그간 면밀하게 다뤄지지 못한 재일조선한센인2)에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2) 구제국주의 시대에 도일한 한민족 중 한센병에 걸린 사람에 대해, 이념의 차이에 따라 재일한국한센인과 재일조선한센인으로 호칭하고 있지만, 이 연구에서는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형태의 ‘재일조선한센인’으로 호칭한다.
재일조선한센인은 일본의 패전 이전과 이후의 시대를 일본에서 살아간 한국(조선) 환자로, 격동의 시간 속에서자신들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디아스포라이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한센병이 발병한 사람들로, 강제징용혹은 개인적 경제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도일한 사람과 이들의 가족에 해당한다.
재일조선한센인과 관련해서는, 야마다 쇼지(山田昭次)가 다마젠쇼엔(多磨全生園) 재일조선인 입소자의 구술집을 도출했고(立教大学史学科山田ゼミナール, 1989), 김영자(金永子, 2003)는 재일조선인환자상조회 활동을 중심으로 한 생의 투쟁을 논한 바 있다.
그리고 한센병 문제에 관한 검증 회의 최종보고서(ハンセン病問題に関する検証会議最終報告書)(日弁連法務研究財団ハンセン病問題に関する検証会議編, 2007)나 근현대 일본 한센병 문제 자료 집성(近現代日本ハンセン病問題資料集成)(不二出版, 2003-2009) 등의 자료집을 통해 요양소 내 환자들의 삶의 세부를 알 수 있는 연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패전 후의 재일조선한센인에 대한 연구는 재일조선한센인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환자 생존의 역사를 탐구한 김귀분의 연구가 괄목할만하다(金貴粉, 2009; 2010; 2016; 2017; 2019, 2020).
그는 일본 사회가 바라본 한국(조선)인 입소자들에 대한 식민지통치의 결과물로서 얻어진 차별적 시선을 규명하는 시점으로 재일조선한센인의 삶을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선행연구가 재일조선한센인을 다룸에 있어서 국가나 사회의 폭력의 피해자로서 조명되었다는 측면이 강하다는 한계에서 벗어나, 재일조선한센인이 국가와 사회의 폭력 한가운데에서일본의 한센병 요양소에서 인간적 삶의 회복을 위한 투쟁의 주체로서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해 주목한다.
이를 위해 일본의 한센 정책과 요양소 내의 한센인의 활동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재일조선한센인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리고 환자들이 요양소 안에서 전개했던 주체적인 활동 등을 재일조선한센인 단체인 우애회(友愛会)의자료 및 이들의 수기를 통해 살펴본다.3)
3) 특히 이 연구에서는 1948-1968년까지의 시기의 환자 저작물을 다루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가 후에 재일 한국·조선인 환자들의 삶의 기반을 닦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가 낳은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요양소라는 공간의 한센인, 이들의 생존 투쟁
한센병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873년 노르웨이의 아르메우에르한센(Armauer Hansen)이 ‘나균’을 발견하여 이 병이 나균이 일으키는 감염병이라는 것을 밝힌 후, 1897년 제1회 국제 나 회의에서 인정되는 과정을 거쳤다.
한센 사업에 일생을 바쳤던 스기무라 슌조(杉村春三)4)는 일본 근대 한센 정책의 특색은 사회 복지적 정신이 결여된 ‘요양소 중심주의’라는 점을 지적했다(猪飼隆明, 2016: 15).
4) 스기무라 슌조(1910-1994)는 하코다테(函館)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상경해 아오야마학원(青山学院) 문학부에 입학하였고, 센다이도호쿠학원(仙台東北学院)으로 전학한 후 감리교 교회에 속해, 세틀먼트(Settlement)활동을 하며 한센사업을 시작했다. 1935년, 국립나요양소인 호시즈카게이아이엔(星塚敬愛園)의원장 하야시 후미오(林文雄)의 강연을 듣고 감동하여, 1940년에 게이아이엔(敬愛園)의 의무과 촉탁이 되었지만, 1942년 해군성에 징용되어 퇴직, 징용 해제 후의1944년 만주(満州)국립요양소 동강원(同康院)에 부임했다.
일본 귀환 후, 1947년, 재단법인나예방협회의 촉탁이 되어, 1951년 구마모토에 부임한다. 1941년 2월 정부의 손으로 해체된 가이슌병원(回春病院)의 자리에 리델·라이트기념 양로원이건설되어, 스기무라는 1959년까지 재직한 뒤, 지아이엔노인홈(慈愛園老人ホーム) 원장, 특별양호노인홈 파울라스홈(特別養護老人ホームパウラスホーム) 원장 등을 역임했다. (杉村春三, 1986: 1-312)
즉, 요양소를 중심으로 요양소 밖의 환자들에 대해서는 ‘나균’을 퍼트리는 원흉이라고 비난하고, 요양소 안의 환자들에 대해서는 방문이나 미디어를 통해 환자들의 ‘불쌍함’을 극대화하여(비환자의 온정을 자극하여) 돕게 만드는 사업 구조라는 것이다.
이는 건강한 일반시민에게 있어서는 공중위생적 복지에 해당할지 모르나, 환자들에게는 같은 인간으로서 사회보장의 대상이 아닌 영원히 도움받는 주체인 ‘불쌍한 나환자’로 낙인찍는 시스템이었다.5)
일본에서 한센 정책이 시작된 근대 시기, ‘국제 나 회의’에 참석한 일본인 의학자들은 일본의 한센인이 근대 문명국 건설에 지장을초래하는 요소라고 여겼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해결을 모색했다.
일본에서는 1907년 「나 예방에 관한 건」을 시작으로 전국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립(公立)요양소(동경-全生病院, 아오모리현(青森県)-北部保養院, 오사카-外島保養院, 가가와현(香川県)-大島療養所, 구마모토현(熊本県)-九州療養所)를 설립하고, 경비의 절반은 국세로 부담하는 형태로 운영했다. 이후 1929년 「나 예방에 관한 건」이 개정되어 나병 국립요양소 설치가 법문화되었고, 1930년 최초 국립요양소인 나가시마 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이 개설되었다.6)
5) 국가에 의한 법적 규제, 요양소 건설과 환자의 일률적 수용 등에 대해 당시 일본 의료계나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이 불거져 나왔지만, 이러한 재야 의료관계자들의 양심적인 목소리는 ‘국가사업’으로 진행되는 한센 사업의 큰 물결 속에서 사라져 갔다. (田中等, 2017: 52).
6) 이 나가시마아이세이엔 개설 이후 국립요양소로서, 구사쓰(草津)에 구리우라쿠센엔(栗生楽泉園, 1932), 가노야(鹿屋)에 호시즈카 게이세이엔(星塚敬愛園, 1935), 오키나와(沖縄)에 구니가미아이라쿠엔(国頭愛楽園, 1938), 도호쿠신세이엔(東北新生園, 1939), 아마이와코우엔(奄美和光園, 1943), 스루가요양소(駿河療養所, 1944) 가 연이어 개설되었다. 기존 공립요양소는 1941년에 국립으로 이관되었다. (田中等, 2017: 77)
그리고 1931년 개정된 「나 예방법」을 통해 환자의 ‘업무상 병독 전파 염려가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자활생활권을 빼앗았다.
당시는 요양소 외에도 소위 ‘자유요양촌(自由療養村)’이라 하여 한센인들이 군락을 이루어 자활하고 있던 집락(集落)이 존재했는데(일본 동쪽으로는 군마현(群馬県) 구사쓰온천(草津温泉)집락지와 서쪽에는 구마모토현(熊本県) 혼묘지(本妙寺)집락지), 1940년경 불결의 온상이 된다는 명목으로 환자들을 잡아들여요양소에 강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 공립이었던 격리시설은 모두 국립으로 이관되어 국가의 철저한 관리하에 격리가 강화되었다(久保井規夫, 2006: 165, 169, 182-183).
일본은 패전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정책으로 한 세기 가까이 완전 격리 방식을 고수해왔다.
이러한 일본의 한센 정책은 일본 국민은 물론이고 타이완, 조선 등의 피식민지 국가 민족들과도 연동되어 있다.7)
7) 식민지에 일본이 세운 요양소는 1916년 소록도자혜의원, 1930년 타이완의 낙생원(楽生院)이 있다. 또한 위탁통치령이었던 남양군도에도 1926년 사이판섬에, 1927년 얄토의 에리섬에, 1931년 파라오의 고롤섬, 1932년 얍의 피겔섬에 각각소규모의 한센병 요양소를 개설했으며, 1939년 괴뢰국가 ‘만주국’에도 동강원(同康院)을 개설했다. (藤野豊, 2006: 10)
이러한 요양소 중심주의를 실천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 미쓰다 겐스케(光田健輔)이다.
미쓰다는 한센인을 치료의 대상이라기보다 감시와 관리의 대상, 동정의 대상으로 요양소 완전 격리를 주장한 인물이었다.
젠쇼병원(全生病院)장 미쓰다는 1915년 내무성에서 열린 격리시설 소장 회의에서, 입소자에 대한 징계권을각 소장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젠쇼병원에서는 남성 환자에 대한 단종(斷種)수술을 시행했다.
그리고 1916년 법률 「나 예방에 관한 건」이 개정되어 소장에게 징계 검속권이 추가되면서 격리시설 내에서 소장의 절대적 권력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미쓰다는 1930년에 오카야마(岡山)현의 첫 국립 격리시설인 나가시마 아이세이엔의 초대 원장이 되었고, 1936년 내무성(内務省)은 「20년 나 근절계획」 아래에서 ‘무나현(無癩県)운동’을 추진한 주도자로, 일본 한센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이끌어간 장본인이 되었다(藤野豊, 2006: 8-9).
이러한 국가 정책하의 환자 관리시스템은 환자들을 비국민(非国民)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즉 ‘나환자는 ○○이다’라는 식의 스테레오타입 규정으로, 환자가 비환자와 같이 다양한 생각과행동의 주체가 되는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을 소거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요양소에서는 어떤 시스템으로 환자 관리가 이뤄졌던 것일까. 1940년 기준으로, 환자들의 입소 절차를 살펴보면, 우선 요양소에서는 환자들이 입소하면 소지품을 소독하고 목욕하게 했다.
그리고환자가 소지한 돈은 도주나 감염 확대 방지 명목으로 원내의 통용권으로 바꾸어 주었다.
숙소는 병증에 따라, 지체가 부자유하거나맹인이 된 환자들이 지내는 ‘부자유 환자 숙소’, 신체가 불편하지않아 자립이 가능한 ‘경증 환자 숙소’, 18세가 되기까지의 젊은이들이 생활하는 ‘아동 숙소’가 각각 남녀 구분되어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 숙소의 대부분은 약 20㎡ 방이 4개가 연결된 식이었고, 숙소의 양옆에는 공동 화장실과 세면실이 붙어 있었다. 한 방의 정원은대략 8명이었다(青山陽子, 2014: 15-16).
환자들은 요양소에 입소하게 되면, 수용 병동에서 1주일을 보내면서 몸을 청결하게 하고, 입소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지급품을 받으며 방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요양소 내에서 가명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처음에는 환자들 스스로가 자기 가족이나 지인이 부당한 일을겪지 않도록 하는 차원에서였으나, 나중에는 입소와 동시에 고참환자나 시설 직원이 가명을 쓰도록 안내할 정도로 하나의 문화로정착되었다.
이는 일반사회에서 자신이 쌓아온 인생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처음 입소한 환자들이 하게 되는 공동목욕탕 입욕 체험은, 병증이 심하게 진행된 고참 환자를 보고 겁을 먹게 됨과 동시에 환자로서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는 한편, 일반사회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절차로 작용했다(青山陽子, 2014: 37-41).
한센병이 불치의 병이라고 여겨졌을 당시의 환자들은 이와 같은 입소 의례를 거치고 평생을 ‘요양소’라는 공간에서‘소장’의 관리하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로, 생각과 행동을 통제·조정받았다.
그리고 환자들은 요양소 내 생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환자를 돌보거나 노동을 통한 생산 활동을 하는 등 의무적인작업을 해야만 했다.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적응은 퇴소하지 않는 한순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렇게 근대 시기 한센인을 격리하여 수용한 예는 일본에 국한된사항은 아니지만, 강제격리, 요양소 내에서의 강제노동, 반항하는환자들의 체벌이나 징역, 학살, 단종과 낙태를 강요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藤野豊, 2006: 11). 그리고 주의할 것은, 전쟁에 패한후의 일본이다.
근대 한센 정책에 대한 반성 없는 태도는 패전 이후 한센 정책에 국제정세를 반영하지 않은 형태로 유지되었다. 1953년 열린 마드리드 제6회 국제 나 회의에서는 신약 요법의 진정에 따라 역학위원회가 각국의 현행규칙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고, 1954년 인도에서 열린 MTL(Mission to Lepers)국제회의에서는 의학위원회로부터 한센병이 전염되므로 환자를 먼 곳으로 보내 격리시킨다는 관념이 폐지되어야만 한다고 명시되었다.
1956년 로마에서 열린 ‘나환자구제 및 사회 복귀 국제 나 회의’에서는 한센인도결핵환자와 마찬가지로 취급할 것으로 결의했다(らい文献目録編集委員会編編, 1957: 309-329).
이러한 국제적 조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나 예방법」을 시행했던것이다.
한센병 요양소는 사립에서 공립,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어 국가의 직접적인 관리 대상이 되었다.
권력의 주체들은 미디어나 학술지, 신문, 대중잡지에 각종 기사를 내뿜어 환자들을 관리해야 할 존재로 다루었으며, 대부분의 비환자 대중도 마찬가지로 인식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나 일반 대중의 한센인에 대한 취급이 그대로환자사회에 적용되었던 것일까.
실제로 환자들은 병증의 정도도 달랐거니와 각자의 출신, 나이, 성별, 생활환경, 교육환경, 심지어 다른민족이기에 가진 특성까지 그 층위가 다양했다.
한센병 요양소는국가명령을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환자 관리 코드에 맞는 주체로환자들을 동질화함으로써 격리수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각하게했지만, 한센인들은 전쟁 시기에나 패전 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생을 표현하는 주체로 존재해 왔다.8)
패전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자치회사’ 편찬 등, 환자 스스로 역사를 서술하는 작업이 각 요양소에서 이루어짐으로써 환자들의 목소리가드러난다.9)
환자들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자치회’10)는 세상과격리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환자 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삶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8) 패전 전의 환자들의 요양소 내 구성된 자치회를 통해 인습적 차별 관념 타파, 대우 개선, 편지나 소포의 개봉 반대, 작업 임금인상, 노동 시간 단축, 호적조사폐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외출 자유 획득 등의 외침이 있었지만 국가 권력과 편향적 언론 유포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오히려 환자들의 자주적 권리획득을위한 투쟁이 이어지자, 환자를 감금하는 중감옥(重監獄, 1938)이 설치되기도 했다. (田中等, 2017: 83-92)
9) 예를 들어, 다마젠쇼엔 환자자치회(多磨全生園患者自治会)의 구회일처(倶会一処-患者が綴る全生園の七十年)(一光社, 1979), 구라우라쿠센엔 자치회(栗生楽泉園患者自治会)의 풍설의 문양(風雪の紋-栗生楽泉園患者五〇年史)(동회 출판, 1982), 나가시마아이세이엔 입원자자치회(長島愛生園入園者自治会編)의 격절의 이정(隔絶の里程-長島愛生園入園者五十年史)(日本文教出版, 1982), 오쿠코묘엔 입원자자치회(邑久光明園入園者自治会)의 『바람과 바다 가운데(風と海のなか-邑久光明 園入園者八十年の歩み)』(동회 출판, 1989) 등이 있다.
10) 환자 중에는 집에서 돈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요양소에서 탈출하여 돈을 구해와 요양소 내의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했고, 그것마저어려운 사람들은 작업 노동 등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패전 이전부터 환자사회 내에서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에서‘자치회’가 마련되었다. 자치회의 수입으로 돈이 없는 다른 환자들을 돕는 것을통해 일정 부분 차별을 해소하고 도망자의 수를 줄이는 방편으로 삼았다(猪飼隆明, 2016: 19). 이러한 자치회는 관리 운영조직의 보조기능이나 말단기능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관리 운영조직을 대신하여 요양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조직임과 동시에 각자의 책임의 범위 내에서 생활을 영위해 가는 자치 조직이기도 했다. (青山陽子, 2014: 74)
이러한 자치회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이지만 환자의 생활조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선 중증 환자에서 경증 환자까지, 증상이 다양한 환자들이 존재하는 요양소 안의 환자 관리뿐만 아니라, 요양소 안에서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경제적인 격차 해소에도 관여했다.
또한 간병(付添)작업11)의 관리 운영도 맡았는데, 자치회 후생(厚生)부 담당자는 경증 환자를 찾아가 부탁하는 형식으로 중증환자 도우미를 구했다.
그리고 자치회 인사부는 원내 환자의 이동을 담당했는데, 숙소의 분배나 변경 등에 관여했다.
더 나아가, 환자의 불만을 접수하여 환자집단이 요양시설 관리자 측과 교섭하는역할도 담당했다. 이뿐 아니라 환자 대표끼리의 다툼, 시설 사무장의 횡포, 간병작업에 대한 불만 사항 발생 시 완충 및 조정 역할을하는 등, 원내 질서유지에도 깊이 관여했다(青山陽子, 2014: 62-73).
그리고 자치회는 교육 및 여가 활동을 영위하는 주체가 되기도했다. 예를 들어,
기쿠치게이후엔(菊池恵楓園) 내에 학교가 만들어진 것은 1921년으로, 학교는 가족사(舍), 오락실, 설교소와 번갈아가며 교실을 바꾸어 수신, 독서, 습자를 배우게 했다(国立癩療養所菊池恵楓園入所者自治会, 2006: 148).
이러한 교육의 효과는 환자로하여금 자기 가족이나 지인과 편지 왕래를 할 수 있게 했으며, 문장을 쓸 줄 알게 되면서 문예지를 만드는 등, 다양한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12)
11) 간병작업은 비교적 경증 환자가 중증 환자의 식사 준비와 식사 시 도움을 주고, 식사 후 정리하고, 목욕을 도우며, 이들의 숙소와 화장실을 청소하고, 의국에 동반하는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중증 환자 옆에 붙어서 일상을 돕는 식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12) 기쿠치게이후엔의 자치회의 경우, 부모와 떨어져 요양소에 들어온 아이들이 교육하기 위해 1931년 새로이 도서실 겸용 히노키소학교(檜小学校)를 세우고, 아동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 숙사, 소녀 숙사 건설을 요청하고 1933년 5월 각각의 숙사 감독을 추천하여 호조회(互助会)로부터 매월 돈을 지급하여 아이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도 했다. (猪飼隆明, 2016: 345-347)
하이쿠(俳句)나 단가(短歌)와같은 시문학은 이들의 삶을 위로해 주는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글이 세상에 소개되어 절망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치회에서는 패전 후 적극적으로 요양소 밖의 사회와 소통하며 환자로서의 권리획득을 위해 투쟁해 갔다. 가장 우선적으로드러나는 것은 한센병 치료제 프로민 획득을 위한 운동이었다.
1941년 미국에서 프로민에 의한 항-한센병 치료가 개시된 후, 일본에서는 패전 후 1947년부터 프로민 치료가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에 다마젠쇼엔(多磨全生園)에서는 이 약물에 의한 적극적 환자치료를 위한 운동을 요양소 환자와 정당 의원들이 연대하여 추진하였다(多磨全生園自治会, 1979: 173-177).
이 운동이 기반이 되어 1951년에는 각 요양소의 환자자치회가 결속하였고, 전국국립나요양소환자협의회(전환협)(全国国立癩療養所患者協議会(=全患協))가 발족하여환자 권리 회복에 앞장섰다(青山陽子, 2014: 12).
1953년 9월 25-29 일 전환협은 구리우라쿠센엔(栗生楽泉園)에서 제2회 지부장 회의를개최하고 차기 통상 국회를 목표로 하여 「나 예방법」의 재개정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1954년 1월 7일 전환협 의장 스에키헤이주로(末木平重郎)는 각 지부장에 대하여 「나 예방법 개정 조항에 대한 의견 및 운동방침의 요청에 대하여」를 통지했으며, 전환협본부에서 개정 조항의 초안을 내고 각 지부의 의견을 구했다.
이초안에는 ‘나(癩)’라는 호칭을 ‘한센씨병’으로 고치는 것에서부터, 강제 검진, 강제 수용 규정의 삭제·수정, 외출 제한 완화, 징계 규정삭제, 벌칙 규정 삭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개정·수정이 제시되었다(藤野豊編, 2007: 1).
환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모아 각 지방 행정 단체에 진정하기도 하고,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하며 법의 개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1953년 개정된 「나 예방법」에서는 구법에 의한 격리수용 방침과 질서유지를 위한 계고(戒告), 근신 규정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퇴소자에 대한 갱생 복지제도나 환자가족에 대한 생활보호법과는 별도의 원호(援護) 제도 도입 등의 요구가 반영되는 결과를 얻어냈다(青山陽子, 2014: 12-13).
이와 같이 요양소 내 한센인들의 삶은 균일한 것도 국가의 명령을 그대로 시행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1950-60년대는 한센인에게 있어 요양소 외부와의 교섭을 위한 격동의 시기로, 일본이패전 전부터 시행해 온 「나 예방법」의 틀을 환자 스스로가 해체해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또 다른 층위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있었으니, 이들은 재일조선한센인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한센정책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일본 요양소 내에서 또 다른 환자 역사를 만들어 간 사람들이었다.
3. 재일조선한센인의 삶
일제 강점 이후 한국(조선)인의 도일은,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이주했거나 전쟁 시기 강제연행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소수의 유학생을 제외한 재일조선인의삶은,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교육의 기회는 주어지기 어려웠고, 생활도 하급 노동자의 삶으로, 현상 유지조차도 어려운 나날을 이어갔다.
이러한 불결하고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재일조선인은 한센병이 발병하여 당시 격리 정책에 따라 요양소에 수용되거나한국(조선)으로 강제 송환되기도 했다.
이러한 재일조선한센인 문제는 일본 식민지 지배의 소산이다.
1945년 시점에서 전쟁은 끝났고식민지도 사라졌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식민지기를 거친 ‘인간’이 그 이후에도 생존하고 있고 식민지 시기의 ‘영향’ 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문제는 패전 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더구나 음지에서활동했던 재일조선한센인은 그 존재조차 잊혀져 갔다.
일본의 재일조선한센인 입소자는 1922년 젠쇼병원(全生病院, 1909 년 개설)의 연보를 통해 알 수 있고, 그 외 소토시마 보양원(外島保養院, 현 邑久光明園), 다이욘쿠 요양소(第四区療養所, 현 大島青松園), 규슈 나요양소(九州癩療養所, 현 菊池恵楓園)에서도 1923년에서1926년 사이에 한국(조선)인 입소의 기록이 존재한다(金貴粉, 2019: 8).
일본 요양소의 한국(조선)인 입소자의 비율은 1971년까지 6%전후로, 일반사회의 재일조선인과 비교하여 그 비율이 높았다(金貴粉, 2019: 10).
재일조선한센인은 일제강점기부터 앞서 절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일본 요양소의 관리체계 속에서 삶을 영위해 왔다.
그리고 일본은 패전을 맞이했다.
일본의 패전은 한반도는 물론이고일본에 살던 한국(조선)인에게도 자유와 희망의 소식이었다.
그러나 요양소 내의 재일조선한센인들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수밖에 없었다.
한국(조선)인이 ‘피식민자’에서 ‘외국인’으로 전환되면서, 추방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인등록령」이 요양소에도 적용되어 재일조선한센인들도 모두 등록해야만 했다.
요양소에서의 환자조사는 범죄자조사와 동시에 행해졌을 뿐 아니라, 요양소 측이 외국인등록증을 일괄 관리했던 점에서, 이는 차별적 관리와 치안을 위한 조치로 사용되었다는 것을알 수 있다(金貴粉, 2019: 70).
그리고 1951년 10월, 「출입국관리령」 에 의해 「나 환자 강제송환」의 대상에 해당하게 되었다.
환자들의청원13)으로 간신히 추방은 면할 수 있었지만, 이후는 ‘복지 격차’라는 문제가 환자들을 옥죄었다.14)
13) 다마젠쇼엔(多摩全生園)의 김철원 외 77인의 후생성을 시작한 각 기관에 보낸탄원서를 통해 재일환자들에게 인류애를 구하고 있다. 1952년 참의원 외무위원회에서는 한센인 강제퇴거 규정에 대해 심의하고 그 결과, 특별한 죄가 있지 않는 한, 한센인인 것만으로 강제퇴거 대상이 되지 않게 되었다. (金貴粉編, 2020: 8)
14) 1959년 1급 장애 한센인 복지연금이 월 1,500엔 지급되게 되었다. 일본인 장애인 이 2,250엔( 안금 500엔, 부자유자 위안금 250엔, 장애 복지연금 1,500엔)인 것에대하여 한국인은 750엔( 안금 500엔, 부자유자위안금 250엔)을 받게 되어 공동생활에 있어 큰 소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일조선인한국인한센씨병환자동맹은 이러한 문제해결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金貴粉編, 2020: 10)
요양소 내 환자들은 각각 병증의 정도, 개인사, 민족 등 다양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들을 한공동체로 묶는 이념은 ‘상호부조’였다.
비슷한 수준의 경제활동을통해 서로를 지탱하였던 것을 감안할 때 일본인에게만 제공되는‘연금’은 재일조선한센인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안겨 주었고, 나아가 생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요인이 되었다.
오쿠코묘엔(邑久光明園) 한국인 호조회(互助会)에서 발행한 고독(孤独)을 보면, 한센인으로서 요양소에서 근현대를 살아온 재일조선인의 삶을 파악할 수있다.
여기에서 패전 이후 신약 보급과 연금제 실시로 달라진 요양소 내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각자 성장해 온 생활환경이나 성격, 거기에 연령이나 경제력이 다른 사람들 대여섯 명이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있기에, 자칫하면균형이 깨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렇게 되면 바로 공동생활체의파멸로 이어지기 때문에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표면상으로는 평온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갈등과 증오가 끊임없이 격렬한 싸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중략) 프로민 신치료제가 생길 때까지는일정한 코스가 있었습니다. 입원, 경증 숙사에서 시작하여 부자유자숙사로 이어지는 과정은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는 피할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프로민 신약의 출현은 이 노선을 완전히 소멸시켰습니다. 입원-경증 치료-퇴원이 더 이상 꿈과 같은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퇴원까지는 아니어도 평생 경증 숙사에서 사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요양소를 지탱해 온 윤리, 호조상애(互助相愛)는 프로민 신약의 출현에 의해 붕괴해 버렸습니다. (중략) 호조상애의 윤리 붕괴를 대신하여 찾아온 것은, 경증 환자는 퇴소, 부자유한 환자에게는 삶을 보장해 주는 것(연금)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부자유자 숙사 환자는 이 새로운 보장제도의 적용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민연금의 적용을 제외하고 있는 것입니다. (崔南龍編, 2007: 51-52)
요양소의 한민족 단체([표 1] 참고)는 연금문제가 불거지기 이전에는, “요양소 내에서서로 돕고 격려해 가는”(河村寿夫, 1960: 38) 차원의 친목회 형태로존재했으나, 국민연금에 의한 생활격차로 인해 이에 대한 시정 운동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다.
그것이 전환협(全患協) 아래에서 전국 조직으로1959년 12월에 결성된 재일조선인한국인한센씨병환자동맹(현, 재일한국·조선인한센병환자동맹)이었다(金貴粉編, 2020: 2).
재일조선한센인 단체는 같은 병을 가진 동포 간의 친목과 스스로의 생활과 복지 향상을 위해 결속하고 운동을 추진해 갔다(全国ハンセン氏病患者協議会, 2002: 144).
1960년 5월 12일 스루가 요양소(駿河療養所)에서 제1회 지부장회가 열리고 그 후 참가자 대표에 의해서 민단중앙본부, 총련중앙본부, 국회의원, 후생성(厚生省), 대장성(大蔵省)에 진정하는 것으로한국(조선)인 입소자에 의한 투쟁이 시작되었다(金貴粉, 2019: 83-84).
이러한 투쟁에 대해, 일본인 환자 측에서는 외국인으로서과분한 주장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고독은 이러한 원내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표 1] 각 요양소에 설립된 한국(조선)인 단체(1962년 기준, 金貴粉, 2019: 81 참고)
요양소명 한국인 단체명
松丘保養園(青森県) 互愛会
東北新生園(宮城県) 朝友会
栗生楽泉園 (群馬県) 協親会
多磨全生園(東京都) 朝鮮人互助会
駿河療養所(静岡県) 親睦会
長島愛生園(岡山県) 親和会
邑久光明園(岡山県) 朝鮮人同郷会
大島青松園(香川県) 友興会
菊池恵楓園(熊本県) 友愛会
星塚敬愛園(鹿児島県) 同友会
조선인 환자 동맹이 결성되어 그 동맹으로부터 서명부 작성의 의뢰가 자치회 사무소에서 이뤄졌다.
호조회에서도 많은 일을 했지만, 서명에 있어서 일본인 환자 중에서 서명을 거부하는 사람이 많이나왔다. 한국(조선) 환자에 대한 일본인 환자의 생각이 마침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진 약간의 감정의 균열, 그런 사소한 것이 의외로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것을 나는 분명히 자각할 수 있었다. (崔南龍編, 2007: 85)
이는 요양소 내에서의 집단생활 유지를 위해 겉으로 표출하지 못했던 양 민족 간의 균열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각장애 일본인 환자들은 재일조선한센인의 처우개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조해 주었다.
「전국한센씨병맹인연합협의회(全国ハンセン氏病盲人連合協議会)」는 원내 외국인에 대해 연금에 해당하는 처우를 요구했고(金貴粉, 2019: 84) 이것은 그 후의 전환협의 연금 운동 노선에 그대로 이어졌다.15)
15) 1959년 8월에 나가시마 아이세이엔에서 개최된 전환협 제4회 지부장 회의에서는, 전 지부의 대표가 연금 문제의 심의 가운데 인도적 입장에서 외국인 1급 장애인의 원호 조치를 강하게 요구하고 연금 준용 요구를 결정했다. 또한 다음 해11월 마쓰오카 호요우엔에서 개최된 제5회 지부장 회의에서도 생활보호법이나예방법의 가족 원호의 적용과 외국인의 일본 정부에 대한 세금 납입, 인도적·국제적 친선 등의 요구 근거를 밝히면서 외국인 환자에게 연금 적용을 요구했다. (金貴粉, 2019: 86)
많은 일본 환자가 요양소에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한국(조선) 환자들에 대해, 민족을 불문하고 인도적인 입장에서 처우해 줄 것에 동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1962년부터 ‘외국인특별위안금’ 500엔이 지급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 환자의 연금도 증액되었기에 연금 수급자와의 차이는 더 벌어졌다.
환자들은 1964년부터 1971년에 걸쳐입소자들에게 일률적인 생활비 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후생성 앞에서 했고, 각 원내에서도 데모를 했다(金貴粉, 2019: 94).
그리고 마침내 1972년부터 모든 입소자에게 생활비에 해당하는 금액으로장애인 연금 1급 상당 금액이 지급되게 되었다.
한편 1960년대 일본인 입소자들에 의해 고향을 방문하는 사업이펼쳐졌는데(森田竹次, 1969: 40-41), 이러한 분위기는 모국 방문이오랜 소망이었던 재일조선한센인에게도 한국방문을 추진하는 배경이 되었다.
구리우라쿠센엔 입소자였던 김하일(金夏日)은 한국 기독교구라회의 초대로 1974년 3월 8일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金貴粉, 2019: 236-237).
그리고 1975년 10월 13-28일까지 오쿠코묘엔지부의 9명이 한국을 방문했고, 같은 해 12월 15일 발행 동맹지부보(同盟支部報)(158호)에는 한국한센병환자 회복자 단체인 한성협동회(韓星協同會)를 통한 조국 방문 희망자 모집 기사가 게재되었다.16)
또한 1960년대 초반, 재일조선한센인들도 자기 삶의 궤적을 기록하여 스스로를 알리고 세상 밖과 소통했다.
환자들은, 한국(조선) 및 일본에서 지내온 개인사와 요양소에서의 고된 노동, 종교적 생활, 해방 이후 일본 사회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치료와 복지의 대상이 되기 위한 분투 등을 자신의 한글 이름과 함께 세상에 내놓았다(崔南龍編, 2007: 1-252).
또한 김하일과 같은 경우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표현을 하는데, 요양소 내의 단가(短歌)회에 들어가 잡지등에 시를 게재하는 등 한센인으로서의 삶을 문학으로 드러냈다.17)
16) 그 신청 요강은 다음과 같다. ① 한 그룹의 인원은 4명 이내로 한다. ② 한 그룹의 구성원은 같은 도 출신자 또는 인접도 출신자로 조직할 것. ③ 숙박은 원칙적으로 서울 시내는 여관, 그 외 지역은 농장(정착촌)에 민박으로 한다. ④ 서울주변 견학에 대해서는 희망이 있으면 협동회 사무소원이 안내한다. ⑤ 서울 주변 이외의 견학 안내인에 대해서는, 각 농장(정착촌)과 개별적으로 절충한다. ⑥교통비, 여관 민박의 숙식비, 안내인에의 사례 등, 체재 중의 제반 경비 일체는방문자가 부담한다. (金貴粉, 2019: 244-245)
17) 김하일은 1946년 9월 25일 구리우라쿠센엔에 입소하여 1953년 점자를 읽기 시작했고, 1955년에는 한글 점자를 배웠다. 1960년에는 요양소 내에 한글학교가 열려한글 교육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는 가집을 여러 편 출판했는데, 1971년 제1 가집 「무궁화(無窮花)」 1986년 제2 가집 「황토(黃土)」 1987년 구리우라쿠센엔의 한
재일조선한센인의 삶은 일본 한센 정책에 맞서 생의 권리를 주장해 가는 일본 환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형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민족으로서 자신들만의 단체를 구성하고 민족적 자긍심을키우는 것과 함께 외부적으로는 일본인 환자집단, 요양소 관리집단, 나아가 전쟁의 주체였던 일본이라는 국가를 향해 적극적으로 자기생의 권리를 주장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재일조선한센인 단체의 기록을 통해 그 구체적인 활동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4. 우애회를 통해 본 재일조선한센인
4.1 우애회의 출발 과정
일본 요양소라는 공간에서 한국(조선) 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어떻게 드러내며 삶을 지탱했을까.
기쿠치게이후엔(菊池恵楓園)의한국(조선) 한센인 자치단체인 우애회(友愛会)에서는 창립 20주년을맞아 우애회 20년사(友愛会二十年史)18)를 일본어로 발간했다.
우애회는 기쿠치게이후엔에 재원하고 있는 재일조선한센인이 처음‘조선인회(朝鮮人会, 1948)’로 시작하여 명칭을 ‘우애회’로 바꾼 후, 환자들의 생을 위해 활동한 단체이다.
이 책의 발간사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우리는 불행하게도 일본 제국주의 정책 아래에서 국가와국(조선)인 합동문집인 도라지의 시(トラジの詩)편집위원회 편 「도자지의 시」 등을 출판하였다. (金夏日, 1990: 1-254) 18) 이 책은 1968년 우애회에서 발간했다.
이 우애회 20년사는 후지노 유타카가편찬한 근현대일본한센병 문제 자료집성 보권13(近現代日本ハンセン病問題資料集成 補券13)(不二出版, 2007: 192-226)에 수록되어 있는데, 원문이 그대로 실려있기에, 韓石峯編, 友愛会二十年史(友愛会, 1968: 1-126)에 준하는 원문 페이지를 인용한다.
자신을 약탈당하고, 가혹한 정치에 신음하는 망국의 민족으로, 36 년간 비탄의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패배로, 그 모든 상황에서 해방되어 조선민족으로서 당당히 자기를 주장할 권리를 갖고 나서, 이제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본의 패배에도 하늘은 우리에게 아군이 되지않아, 미·소 양대 강국의 자기 독점적인 사상 간섭에 의해 국가와민족이 두 개로 나눠지는 가장불행하고 슬픈 사태에 몰리게 되었다. 이런 냉엄한 현실 속에서 한센병을 온몸에 무겁게 지고, 이국에서, 게다가 사회로부터 격리 단절된 요양소 안에서 동포 간의 친목과 협동, 화합을 목적으로 우애회조직을 결성하고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국운이 없는 것을슬퍼하기 전에 국가와 민족을 이런 도탄의 고통과 불행으로 이끄는 지도자들에 대해 울분을 토할 길이 없다. (중략) 20년 세월이 지난 오늘 역시 생각나는 것은 우애회를 조직하고 누구보다도 열정을 기울여 온 선배 여러분의 얼굴이다. 이렇게 선배여러분의 노고와 계속된 노력의 결실이 20주년을 맞이함과 동시에그 증거로서 「우애회 20년사」가 발간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韓石峯編, 1968: 1-2)
[그림 24] 우애회 20년사 표지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발간사는 한반도 전체에 활짝 피어난 무궁화를 그린 표지([그림1] 참고)와 같이, 일제 강점이라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발생한 고통, 해방 후에도 이어졌던 민족 분단의 고통, 외국인으로서 민족적설움을 겪은 한국(조선) 환자들이 하나가 되어 자신들의 생을 잘지탱해 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한국(조선)인 단체 탄생의 조짐을 보이던 시기는 일본 패전 후 1946년 5월경이다.
재일한국·조선인 사회는 동경의 ‘재일조선인대책위원회’를 시작으로 자치적 성격의 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했고, 이는 전국적 단위인 ‘재일조선인연맹’ 조직에 이르게 되었다.
처음 환자사회에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무관심했다. 그중 병증도 가볍고 비교적 건강하며 의식이 분명했던 환자는 짐을 싸서 무허가로요양소를 탈출하여 귀국하기도 했다.
요양소에 남은 사람들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했던 자신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음속으로는 여러 생각이 있어도 그것을 표면화하는 기운으로는발전하지 못했다. 그 근원은 역시 육지에서 외로이 떨어진 섬이라고 불리는 요양소라는 별세계의, 암흑과 같은 골짜기 속에서 어느틈엔가 정신 그 자체도 일본인화되어 갑자기 해방되었다고 해도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그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어두운 동굴 속의 바위틈에 들러붙은 박쥐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韓石峯編, 1968: 35)
이처럼 시대와 사회가 변했지만,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병증의 정도도, 한반도 내의 가족도, 경제적 상황도 전혀 따라주지 못하여 요양소에 적응해 버린 환자들의 자포자기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석봉(韓石峯)이 용무가 있어 요양소에서 나가시내에 갔을 때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하게 되었고, ‘재일조선인연맹(구마모토현 본부)’으로부터 요양소 내 동포 상황 조사를 요구받게되어, 요양소의 김우갑(金又甲) 등과 함께 명부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재일조선한센인 단체가 뜻을 모은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1939년 창씨개명 이후 요양소 내 한국(조선)인들의 이름이 일본식으로 바뀌어 한국(조선)인 식별 작업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환자쪽에서 스스로 한국(조선)인이라고 밝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석봉 일행이 용모나 말투 등으로 추측하여 ‘한국(조선)인이 아니냐.’ 고 물어보는 식으로 조사를 진행했다(韓石峯編, 1968: 36).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요양소 내의 한국(조선)인들을 파악하고 명단을 제출하여 요양소 밖 한국(조선)인 조직과 연계되는 듯했으나, 특별히 요양소로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소외의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947년, 김우갑은 초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마모토현 재일조선인연맹에 참가했다가 예기치 못한 참석에 당황한 본부의 분노를 샀다.
그러고 난 후 기쿠치(菊池)지부에서몇 차례 요양소로 위문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기쿠치게이후엔 우애회의 전신인 ‘조선인회’의 정식 발족은 1948 년 8월 20일이었다.
당시 기쿠치게이후엔은 입원자 수가 늘어, 처음1,000여 명이었던 환자는 1,200여 명이 되고 한국(조선)인도 28명정도에서 70명으로 늘어났다(韓石峯編, 1968: 40).
새로 유입된 한국(조선)인 중에는 배움이 있고 의식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상황에서 김우갑은 대표직에서 사퇴하고 다음 회장은 문길수(文吉秀)가 되었다.
문길수는 조선인 환자 단체구성 초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48년경의 기쿠치게이후엔 재원 동포는 약 70명 정도였다. 당시조선 동포의 명부를 보관하고 있던 김우갑은 조선인회가 구성되자대표직을 사퇴하고 문길수와 강순수(姜順受)가 정·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원내의 조직이 명확하게 갖춰지고 수박과 과자를사서 신체 부자유자나 입원자를 찾는 등, 드디어 모임도 궤도에 진입했을 무렵, 불법 소주 제작 횡행 시대를 맞아 소주를 만드는 자가 생기고, 도박, 싸움이 일어나거나 하여 (일본인)자치회 보안부도몹시 곤란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후에 조선인회에서 ‘우애회’로 개정되어, 우애회에서는 이대로 회원의 비행을 방임하는것은 회의 체면뿐 아니라 민족의 수치라 여겨 회원의 질 개선에 나섰다. (韓石峯編, 1968: 16)
이처럼 일본 패전 후 혼란기에 불치의 병을 안고 요양소에 입소한 한국(조선)인들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박이나 싸움 등의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빈번했다.
요양소 내 한국(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회원의 상호 친목과 자립적 우애정신에 충만한 민족성의 자각을 높여 동포의 이익을 지키고 동맹본부를 발전시켜 보다 건전한 요양 생활에 근거한 문화향상을 꾀한다(韓石峯編, 1968: 4).”는 취지로, 민족성 자각과 환자 삶의 질 개선을 표방하며 우애회를 결성했던 것이다.
우애회는 방종을 일삼는회원 규제의 역할 등을 통해 요양소 일본인 자치회의 신뢰를 얻었다.
또한 외국인등록증 관련 문제나 재일조선한센인 관련 문제 발생 시 적극적으로 해결해 가는 등, 자정(自淨) 운동의 주체, 단체교섭의 주체가 되었다.
4.2. 요양소 밖과의 교섭 및 투쟁
재일조선한센인의 요양소 밖과의 교섭 및 투쟁은 「외국인등록령」, 「국민연금법」이라는 두 가지 국가적 조처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일본에서는 1952년 4월 28일 「외국인등록법」을 공포·시행하였는데, 이런 과정에서 요양소에서는 한국(조선)인들의 무단외출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외국인등록증을 한꺼번에 보관했다.
이에 대해 우애회 환자들은 ‘등록증을 개인이 언제나 휴대해야 한다’라는 법적 근거를 내세워 개개인이 받아냈다(韓石峯編, 1968: 43-44).
환자로서의 개인적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예이다.
한편 「출입국관리령」에 근거해 외국인 강제송환에 한센인들도 포함되는 분위기를 막고자 하는 「한국인 나 환자 강제송환에 관한 건」이라는 탄원서 제출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조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이국 일본에서 불행하게도 병에걸리고, 현재 일반사회와도 분리된 처지의 몸이 되어, 삶과 죽음을일본 정부에 맡기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병에 국경이없다는 인도주의 입장에 입각해 아무런 차별 없이 일본인 환우와동등하게 대우하여 우리 한국인 환자 일동은 늘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951년 10월 4일자 관보에 기재된 정부 명령 제319호, 「출입국관리령」 제24조에 의하면, 외국인 강제송환에 관한 내용이 우리 한국인 환자에게도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고, 이 명령은 일본으로부터 우리 한국인을 한 명도 남김없이 국외로 추방하려고 하는악령이기에, 이 명령을 폐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백해무익한 자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령을 입안해 강제 송환하는 것은 인도주의를표방하고 문화국가라고 불리는 일본 정부가 취할 정책이 아니라고믿는 바입니다. 과거 우리가 도항해 온 이유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고 또 일본군국주의의 정책에 근거한 징병, 징용 등으로 도항해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생각지도 못한 불행한 병에 걸린 자를 강제 송환한다는 것은 너무 무자비한 처치입니다. 게다가 현재 내란이 극심한 조국으로 우리 한국인을 강제적으로 퇴거시키는 정령을 입안하는 것에 참으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요양소에서 치료받고 있는 한국인 환자의 대다수는 건강 면에서도 매우 약한 사람이 많고 장거리 여행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모쪼록 조국이 통일되어 평화롭게 되고 우리에 대한 수용 태세가 완비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그때는 우리 스스로 귀국을 희망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상의 사정 등을 잘 살펴주셔서, 그러한 정령이 시행되지 않도록, 우리 한국인 환자 일동 날인하여 항의 탄원하는 바입니다. (韓石峯編, 1968: 47)
이 ‘항의탄원서(抗議嘆願書)’는 한국인이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맞지만,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질병을 가진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솔직하고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이 사건은 전국의 환자들이 통일된 의견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 가지 우애회에서의 대외적 교섭을 위한 생의 투쟁은 1959 년의 국민복지 연금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규모가 작은 재일조선한센인 단체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 문제였다.
기쿠치게이후엔에서는 국민복지연금법에서 제외되는 외국인에게도 적절한원호 예산 조처를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우리 전국 한센병 요양소에 입소 중인 조선인 환자는 모든 일에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현재까지 요양 생활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늘선생님의 배려요 은사임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금법이 성립하여 우리 환자에게도 복지연금이 적용되게 된것은 요양소에 일대 광명을 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연금법을 외국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아 같은 요양 생활을하는 우리 조선인 환자에게는 큰 충격이자 앞으로의 요양 생활에불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제2차 대전 중 강제징용이나 병역 등으로 오게 되어 일본 건설에 협력한 이른바 일본의 조선통치가 낳은 피해자임과 동시에 현재도 일본의 법률에 따라 요양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한일회담에서 모든 일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요양소 내에의 사정을 잘 살펴보신 후 연금이라는 명목은 다른 것으로 바꿔도 이것에 필적하는 원호 방책을 세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352 日本語文學 第100輯 선생님께서는 여러모로 바쁘실 것으로 알지만, 저희가 꼭 실현하고싶은 절실한 소원을 담아, 선생님께서 혜량하여 주시길 진심으로진정하는 바입니다. (韓石峯編, 1968: 71-72)
우애회를 비롯한 환자단체에서는 지속적으로 연금준용화 등에 관련된 진정서를 후생대신, 각 요양소 과장, 그 외 관계 당국에 제출하고 한국 언론사에도 서신을 보냈다.
이러한 운동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인 환자단체, 재일조선인 단체, 비환자 일본인등도 가세하여 추진에 큰 동력을 제공했다.
1960년 5월 12일 수루가 요양소에서 제1회 지부장 회의 개최를 계기로 일반사회 민족단체의 반향을 일으켰다. 비로소 재일조선인 사회가 한센인 문제에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민단 기관지 민주신문 8월 17일자에 일본 각지에 있는 재일조선한센인들이 국민연금으로 인한 차별을 겪고 있다는 것을 거론했다.
민단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일본당국과 적극적 교섭을 진행했을 뿐 아니라 한국 정부에도 이러한재일조선한센인의 목소리를 전했고, 국제타임즈(한국계신문)에도 관련 기사가 보도될 정도로(韓石峯編, 1968: 76) 요양소 외부로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4.3. 요양소 내 한국(조선)인의 삶
한편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였지만 우애회의 내부적 갈등은 빈번했다.
우선 같은 민족으로 하나가 되어 힘을 모아야 할 민족 간의‘사상의 분단’이 심각했다.
우애회는 ‘사상을 논하지 않고 남북 중립을 견지한다’는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원 사이의 사상적대립 현상은 끊이지 않았다(韓石峯編, 1968: 17).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시비론을 전개해 가다가 사상적인 감정이 폭발하여 환자 간의싸움이 빈번해졌고 상해 사건까지 일어났다.
싸움은 개인 대 개인에서 집단 대 집단으로 번졌다.
기쿠치게이후엔의 일본인 자치회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우애회에 관련 문제해결을 일임했다(韓石峯編, 1968: 42).
그러나 남북 간의 이념대립은 지속되었다.
1959년은 8월 북한으로의 귀국 희망자 문제가 야기되고, 의견이 엇갈림으로써 7명이 탈회 신고를 우애회에 내놓고 임원의 검토하에 수리하였다(韓石峯編, 1968: 72).
그 결과 사태는 오히려 악화되어 7명이 회에서 제명된것에 불만을 품은 환자 22명이 회를 탈퇴하여 ‘귀국희망자촉진회’를새로이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우려하여 또 다시 환자들의통일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9명이 ‘통일알선위원회’를 만들게 됨으로써 요양소 한국(조선)인 환자 조직이 3개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韓石峯編, 1968: 77).
별다른 성과 없이 사라지게 된 이 조직의 분단에대해, 우애회 20년사에는, ‘이 사건은 한국(조선)인의 수치를 일본인 환자들 앞에서 드러낸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면서 다시금 다음과 같은 우애회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 우애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라 환자자치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간성을 발전 향상시키고, 공통의 복리를 지키고, 일본 환우들과도 친선 우호를 깊이 다지는 것이 그 주된 목적입니다. 동시에회원 개개인이 어떠한 사상, 신앙의 소유자이든 모임에서는 그것을문제시하지 않습니다. 현재 우애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국이 통일하여 국가명이 하나가 될 때까지는 재일조선·한국인한센병동맹본부의 기본적 노선과 방침에 근거하여 건전한 회로서 발전시키는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포 개개인이 민족정신을 투철히 하고 자긍심을 갖고 자치회와 모든 환우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韓石峯編, 1968: 81-82)
우애회에서는 과거 식민주체였던 일본에서 요양 중인 한국(조선) 환자 간의 분열은 자신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지만 사상적 대립으로 인한 ‘조선인회(북조선귀국집단)’ 과 ‘우애회’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우애회에서는 이 양회의 통일을 위해 ‘한센병 기쿠치지부(ハ氏病菊池支部)’라는 명칭 변경을 시도했지만, 우애회 쪽에서의 반대자가 있어 변경이 쉽지 않았다(韓石峯編, 1968: 82).
결국 2년간의 분열 소동 끝에, 1961년 5월 18일 양측의 임원이 회의를 거친 결과, 명칭은 ‘우애회’로 유지하고, 회칙조직의 조문에 ‘한국·조선’을 넣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韓石峯編, 1968: 83).
이러한 이념적 갈등은 있었지만, 우애회에서는 요양소 한국인의통합과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했다.
재일조선한센인들은 발병 이전에도 가난한 환경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고, 발병 후에는 눈이 어두워지거나 손가락 신경의 마비 등으로 글을 읽고 쓸수가 없는 상황에 놓여있던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애회에서는 녹음기를 구입해회원들의 음성(회원들의 고생담)을 녹음하여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韓石峯編, 1968: 12-14).
이는 일반사회와 가족들에게 있어 잊혀진 사람들이 아닌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겨진다는것을 의미했다.
또한 환자들의 녹음 내용은 전국 다른 요양소의 한국(조선) 환자와 교류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韓石峯編, 1968: 17).
이러한 녹음기 외에도 환자들은 한국 전통악기를 구입하기 위해 수년간 원내 작업을 통해 모은 돈을 내놓기도 했는데, 당시 회장이었던 강순수는 이것을 ‘민족정신’과 ‘동포애’의 결과라고 평가한다.19)
19) 우애회에서는 같은 환자들 중 의료형무소와 같은 곳에 있거나 증상이 악화되어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위로했다. 기쿠치게이후엔 재일조선한센인들은 1958 년 7월 방송부 주임의 협력으로 조선 민요와 지인에게 보내는 목소리를 테이프에 수록하여 각원에 보냈다. 우애회 10주년 행사 때에는 재일조선인 중앙예술단이 와서 성대하게 치뤘다. (韓石峯編, 1968: 65-67)
그리고 우애회는 위안 행사 등을 통해 조선 민족이 함께 공감하고 향유할 수 있는 환자문화 행사를 주관했다.
이러한 행사는 환자들에게 있어 ‘사막의 오아시스’(韓石峯編, 1968: 20)와 같았다고 한다.
이는 환자들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조국의 노래를 부르고, 조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처지에 대해 위로하는 형태였다.
우애회 목표는 “설령 한센병 환자로 이국의 요양소에 있는 쓸모없는 사람일지라도, 조선 민족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일본인환우들과 친선을 다지며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민족의 긍지를 견지하여, 지속적으로 회를 지키고 발전시켜 갈 것을 지향”(韓石峯編, 1968: 119)한다는 것이었다.
우애회에서는 민족 간의 사상적 대립을통합·조정하고, 환자 복지를 위해 원 내외로 활동하며 요양소 내의한국(조선)인의 입지를 다져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 요양소의 재일조선한센인들은 일본의 한센 정책속에서 한국(조선)인으로서의 민족성을 지키고, 일본 식민주의 정책의 소산인 자신들의 입장을 표시하며, 스스로의 환경을 개선하고자활동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식민지 시기와 패전 후의격동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같은 민족 그리고 같은환자 공동체와 연대하며 자기 생의 권리를 획득해 갔던 것이다.
5. 결론
한센인들의 생을 위한 투쟁은 세월을 거치며 그 목적을 달성해갔다.
패전 후 1953년 「나 예방법」이 개정되었지만, 삶의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상황 속에서 일본 요양소의 환자들은 각각의입장을 표명하는 단체 결성과 활동을 통해 인간으로서 권리 회복을위한 궤적을 만들어 냈다.
환자들이 결성한 자치회는 요양소 관리운영의 보조적인 역할을 넘어, 요양소 내의 환자들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다른 환자단체와 교류하고, 관리 운영하며, 요양소의 운 영자나 더 상위의 국가기관과도 교섭하는 역할까지도 담당하며 환자로서의 입장을 확고히 해 갔다.
그리고 일본 한센 정책의 변화속 활동 주체이기도 한 재일조선한센인들도 일본 내에서 ‘피식민자로서의 환자’ ‘외국인 환자’라는 변화를 거치며 생을 위한 민족적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요양소 내에서는 일본인 자치회와협조·연대했고, 요양소 밖과는, 재일조선인 일반사회에 대한 요구와호소를 비롯하여 일본 국가의 각 지방 및 국가 단체를 상대로 교섭을 이뤄내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 1996년의 「나 예방법」 폐지 이후, 「나 예방법」위헌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요구가 1998년 요양소 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2001년 5월 11일 구마모토(熊本)지방재판소에서 원고 승소가 결정되었다.20)
20) 「나예방법 위헌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2001년 구마모토재판소에서 「나예방법」을 헌법위반이라고 단죄하고, 정부와 국회의 법적 책임, 즉 격리정책을 계속 추진해왔던 국가의 법적 책임, 그리고 국회의원이 「나예방법」을 제정한 입법행위, 그리고 이것을 1996년까지 개폐(改廢)하지 않았던 입법부작위를 단죄(猪飼隆明, 2016: 11)하는 것을 통해 한센인들은 인권 회복의 길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2001년 6월 22일, 「한센병 요양소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법률」이 시행되어 입소자뿐 아니라 퇴소자나 비입소자 나아가 일본 식민지기에개설된 해외 요양소 입소자에 대한 보상금이 지급되게 되어 한국 소록도나 대만낙생원 입소자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金貴粉編, 2020: 11-12).
이는 국적과 상관없이 구제하는 방침이어서 한국(조선)인 입소자에게도 희소식이 되었다. 재일조선한센인들은 모국, 심지어 자기 가족에게서도 잊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강제적인 이국의 의료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한민족 정체성을 담은 문화를 창조하고, 요양소 밖의 사회나국가에 까지도 목소리를 내어 삶의 변화점을 만들어 갔던 존재였다.
이들이 형성한 민족 문화적 유대, 상호부조 하의 동고동락, 교육과 문학을 통한 자기 발신 등은 동아시아 근현대 역사의 소용돌이가 남긴 한민족 역사의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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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要 旨 >
この研究は、ハンセン政策が始まった近代から現代に至る日本のハンセン事業の中で、ハ ンセン病患者が自分の生存の権利を獲得するため闘争した歴史を探る。そして日本のハンセ ン事業の歴史の一部でありながら‘患者’と‘外国人’といった理由で疎外されてきた在日朝鮮ハン セン人の日本療養所での生活について考察する。在日朝鮮ハンセン人は日帝強占期に日本 へ渡り、ハンセン病が発病して日本の療養所に収容され、敗戦後も日本療養所で生を営ん でいた存在である。特に本研究では、在日朝鮮ハンセン人の療養所の患者集団との交流及 び連帯、二重的な少数者として生存権獲得のためにした努力、南北分断による民族間の対 立局面に焦点を合わせて考察している。
< Abstract >
The researchers explored the history of the struggles of patients with Hansen’s disease to obtain their right to life in Japan’s Hansen’s project from the modern era when the policy on leprosy began to the present day. We examined the lives of Koreans in Japan who had been diagnosed with Hansen’s disease and werepart of the history of Japan’s Hansen’s project, though they were marginalized for being “patients”and “foreigners.”These Koreans came to Japan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developed Hansen’s disease, were confined to Japanese leprosy sanatoriums, and continued to live therein even after defeat the 15 years war. In particular, the study focus is “the exchanges and solidarity of Koreans in Japan with Hansen’s disease with patients in leprosy sanatoriums,”“efforts made to acquire the right to life as a dual minority,”and “ethnic confrontation caused by the division of the North and South.”
주제어:한센병 요양소(leprosy sanatoriums), 환자자치회(patients’ self-governance association), 재일조선한센인(Korean Hansen's disease patients in Japan), 우애회(Uae-hoe), 생존 투쟁(struggle for survival)
논문접수일 : 2024. 01. 29 논문심사일 : 2024. 03. 03 게재확정일 : 2024. 03. 05
日本語文學 第10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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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년대 고려-거란 갈등과 외교 재개/정나영.이화여대 (0) | 2024.10.09 |
경상도 지역의 항일운동과 大倧敎 -1910~1920년대 초반을 중심으로-/이숙화.한국외대 (0) | 2024.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