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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오키나와에서 마주한 고려 삼별초의 역사/도시환.동북아역사재단

1. 머리말

2018년 9월, 필자는 오키나와(沖縄)를 방문했 다.

오키나와군도의 작은 섬인 미야코지마(宮古島) 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시 묻는다”는 주 제로 개최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건립 1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기 위 해서였다.

출국하기에 앞서 오키나와 관련 자료를 찾아보 던 과정에서 2007년 ‘탐라와 유구왕국’을 주제로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을 개최한 국립제주박 물관의 삼별초 관련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 은 오키나와 출토품인 수막새가 당시 제주박물관 이 소장하고 있던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매우 흡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제주박물관이 소 장 중인 고려 기와는 삼별초(三別抄)의 근거지였 던 전남 진도 용장성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점에서, 오키나와의 우라소에성(浦添城)에서 출토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 高麗瓦匠造)’ 기와에 명기된 ‘계유년’이 1273년일 가능성 및 삼별초와 오 키나와와의 관련성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세기 이전 역사 속 동아시아의 섬으로서 오키나 와가 갖는 삼별초를 매개로 한 고려와의 교류사에 주목하고, 오키나와 고대 역사의 정립 과정에서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2. 오키나와 출토 ‘계유년고려와장조’ 기와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고려계 기와는 9종류 32형식에 이르는 다양한 양 태로 알려져 있는데, ‘계유년고려와장조’ 기와는 ‘고려와장’이라는 제작자 의 신원과 ‘계유년’이라는 제작 시기를 밝힌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계유년’이라는 시기와 관련하여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 등의 학설이 제시되었는데, 고려 원종 14년(1273)과 조선 태조 2년(1393)으로 압축되고 있다.

(1) 1273년 계유년설

고려 기와가 다수 출토된 오키나와 우라소에성(浦添城)은 슈리성(首里 城) 이전 중산의 왕성이었던 곳이다.

성터는 태평양전쟁 때 미군의 집중 포격으로 대파되어 거의 사라졌으나, 성 북측 낭떠러지 아래 왕묘인 ‘요 도레(ようどれ)’에 왕성의 형적이 일부 남아 있고, 영조왕(재위 1260 ~1299) 과 상령왕(1589 ~1620)의 능묘가 있다. 요도레 앞에 있는 유적 가운데 13세기 함순(송대 연호) 연간(1265 ~1274)에 조성되었다는 오키나와 최초 의 불사인 극락사(極樂寺) 터가 있다.

이 절은 유구(琉球)에 표착한 선감(禪 鑑)이라는 승려가 건립한 것이라 전한다.

즉, 14세기 이후 유구왕국의 중 심이 된 슈리성에 앞서, 그 전 단계에 우라소에성은 유구 고대왕국의 정 치적 중심이었고 정전의 건립을 비롯한 이 도성 건설에 고려가 깊이 연관 되어 있음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입증되고 있다. 그 시기는 ‘계유년’ 기와에 의하여 1273년설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2) 1393년 계유년설

오키나와 기와의 1393년설과 관련하여, 1392년 조선 왕조 개창은 일 부 정치엘리트에 국한된 정치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신왕조 개창에 의한 기술자 집단의 유민 발생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이 시기 정부 차원의 기술인력 지원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명 의 연호 대신 ‘계유’라는 간지만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도 해명이 되지 않 는다.

1393년설에서는 오키나와 파상궁(波上宮)이 소장하고 있던 고려종 도 이들에 의하여 유구왕국에 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이 역시 고려 말 조선 건국기의 역사적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다.

반면 오키나와 기와를 1273년 삼별초에 의한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120년 전 비정부 차원의 교류였기 때문에 이것이 “이전에 교류가 없었다”는 『고려사』 기록 과도 상충하지 않는다.

3. 유구왕국과 삼별초

(1) 유구왕국의 역사

유구왕국은 1429~1879년까지 일본 영토의 최남단인 오키나와현에 존 재했던 독립왕국이다.

160여 개의 많은 섬으로 구성되어 유구제도(琉球 諸島)라고 하는데, 가장 큰 섬인 유구섬을 중심으로 유구왕국이 존재했다.

유구섬은 제주도의 3분의 2 정도 규모이고, 제주도 남단에서 700km 지점 에 위치해 있다.

12세기부터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하여 오키나와섬 각 지역에 아지(按 司)라 불리는 호족을 중심으로 남산(南山)·북산(北山)·중산(中山)의 세 개 왕조가 생겼으며, 1429년 중산왕이 두 왕조를 통합하여 최초로 단일한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1430년 명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고, 명의 선덕제 는 쇼(尚)라는 왕성(王姓)과 함께 유구(琉球)라는 국호를 내렸다.

남쪽의 슈리(首里)에 수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오키나와현의 주도(州都)인 나하 (Naha, 那覇)시의 일부가 되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중산왕 상파 지(尙巴志)에 대해, 상은 성이고 호는 파지이며, 이름은 억재(億載)인데, 국왕이 거주하는 곳이 중산이므로 중산왕이라 칭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유구왕국은 1609년 일본 사쓰마번(薩摩藩)의 침공으로 중개무역 의 이익을 상실하게 되었고, 1879년 일본 제국에 병합되면서 현재의 오 키나와현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 이 지배했으나,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2) 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는 본래 고려시대 최씨무신정권의 사병조직으로, 1219년(고종 6년) 최우(崔瑀)가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

야별초는 도성 을 순찰하고 도적을 잡는 등 민간의 치안까지 담당하면서 좌별초(左別抄) 와 우별초(右別抄)로 확대, 재편되었다.

또한 1231년(고종 18)부터 몽골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포로로 끌려갔던 고려군 중에 탈출한 병사들이 중심 이 되어 몽골에 대항하는 신의군(神義軍)으로 결성되었다.

이로써 삼별초 는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통합한 총칭이 되었다.

이후 1232년(고종 19) 고려는 몽골군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였고, 삼별초는 약 30년 간 몽골에 맞서 특수정예군대로 대몽항쟁을 벌였다.

1258년(고종 45) 최씨무신정권이 몰락하자 몽골에서 귀국한 고려의 태 자가 1259년 원종으로 즉위, 몽골 세력의 지원하에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몽골의 압력 끝에 1270년(원종 11) 5월 개경으로 환도하며 삼별초의 해 산을 명령했다.

이에 저항한 삼별초는 6월 1일 배중손(裵仲孫)을 주축으로 항쟁을 일으키고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했다.

나아가 반몽 세 력을 규합해 6월 3일 강화도에서 전라도 진도로 남하한 뒤, 용장산성에 터 를 잡고 서남 해안 일대를 거점으로 몽골과 고려 조정에 대항했다.

결국 1271년(원종 12) 5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함락하자 온왕이 죽고 배중손은 전사했다.

삼별초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투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원종 14) 6월 여몽연합군에게 패 하여 섬멸되었다.

이것이 기존의 기록이다.

4. 삼별초의 오키나와 진출 가능성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계유년 고려 기와’는 1271년 삼별초의 잔여 세 력이 진도에서 제주로 이동할 때, 그 잔여 세력의 일부가 제주도가 아닌 제3의 지역으로 분산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아울러 1273년 제 주도에서는, 이미 진도에서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섬이 함락될 경우 진도 에 비해 많은 수의 도외(島外) 및 타국으로의 분산을 불가피한 대책으로 상정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제주도에서 탈주한 삼별초 잔여세력은 다시 고려 남서 연안의 도서 혹은 본토지역으로 회귀하거나, 보다 근본적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일본 열도 및 오키나와 등지로 필사적으로 탈주했 을 가능성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삼별초 잔여 세력의 해외 분산을 상정한다면, 의도적 이고 계획적인 항해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후대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표류하여 일본 열도 혹은 오키나와에 표착한 여러 경우를 통해 한반도 남해상에서 타국으로의 분산이 13세기에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 론되기 때문이다.

1700년 전후 조선과 일본 간의 표류민 송환 사례를 검 토하면 우선 일본으로부터의 조선 표류민 송환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점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1687~1696년까지 10년간 19회, 다음 10년 간 28회, 다음 10년간 29회, 1716 ~1726년까지 27회에 걸쳐 일본은 조 선 표류민을 송환하였다.

같은 기간 조선의 일본 표류민 송환은 4회, 0회, 6회, 7회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더욱이 조선 후기인 1599 ~1867년까지 조선인의 일본 열도 표착사건은 1,020건, 표류민의 수는 1만 37명이라는 또 다른 조사를 보면 일본 열도에 접근하는 것이 상당히 용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분석으로 볼 때, 진도 혹은 제주도에서의 삼별초 세력 은 섬이 함락되는 시점을 전후하여 진도에서의 1만여 명에 비하여 제주도에서 1,300명으로 포로 수가 감소한 점을 통해 삼별초의 일부가 규슈 (九州) 혹은 오키나와 등지로 이동하였을 개연성이 충분하고 가능한 일이 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5. 맺음말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의 시간적 배경인 편년을 중심으로 기와 에 명기된 ‘계유년’이 1273년일 가능성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다.

이 글 에서의 편년 논의는 주로 고려의 역사적 맥락과 기와 자료에 대한 비교 등 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유구 역사의 맥락을 넘어서는 보다 광범위한 고고학적 자료의 종합적 검토를 필요로 하는 문제라 할 것 이다.

그것은 이 글에서 논의한 기와의 편년 설정에 따라 유구의 역사 전 개와 중세 동아시아 교류의 역사가 크게 좌우된다는 점에서, 오키나와에 서 출토된 고려 기와에 관한 논의에서 연대 문제는 중요하다 할 것이다.

향후 오키나와에서 고려계 문물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기와에 한정되 지 않고, 도자기, 성채(城砦), 불교 등으로 주제가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오키나와의 토기 생산에 고려 토기의 기술적 영향이 인정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유구 최초로 영조왕 연간에 조성된 우라소에성 요도레의 사 원인 극락사 창건에 간여한 승려 선감이 고려의 승려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특히 유구왕국의 대표적 유적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석축성채가 등장하는 13세기라는 시점은 오키나와 고려 기와의 1273년 계유년설과 접맥하여 주목하게 된다.

성채의 출현은 외부와 연관을 갖지 않은 오키나 와에서의 자발적 발전이나 일본 열도로부터 기원했음을 찾을 수 없어 고 려 성곽문화와의 연관성을 검토할 만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키나와 유구왕국의 건국 기초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 한 사람들이 바로 삼별초”라는 주장과 관련하여, 고려사 연구의 권위자인 윤용혁 공주대학교 명예교수가 제기하는 “전쟁사 혹은 민족항쟁사의 차 원에서 나아가 중세 동아시아 교류의 국제적인 맥락에서 검토해야 할 과 제”라는 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북아역사포커스 9호(202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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