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2. 무상함: 바울과 벤야민
3. 행복과 에피쿠로스에 맞서서: 레비나스
4. 바울과 에피쿠로스의 싸움을 연출해보다: 니체
5. 무상한 행복을 넘어서: 벤야민 텍스트의 열쇠로서 레비나스
6. 메시아적 정치: 바울, 벤야민, 아감벤
7. 맺으면서: 무위의 정치
<국문초록>
이 논문은 발터 벤야민의 「신학적・정치적 단편」(1921)을 중심으로 삼아 현대철학의 메시아론의 핵심 주제들을 다룬다. 벤야민의 이 텍스트가 메시아론의 주요국면이 만나는 교통의 결절점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우베스와 아감벤이 확인하듯 벤야민은 세상의 무상함이라는 사도 바울의 주제를 행복 속에서 피조물의 몰락이라는 형태로 이어받는다.
행복 속에서의 몰락이라는 이 논제를 우리는 레비나스의 논의들과 더불어 해명한다.
그 과정에서 피조물의 행복과 메시아적 몰락사이의 대립은, 니체가 극적으로 보여준 에피쿠로스학파와 바울 사이의 대립으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주제임이 발견된다.
아울러 바울과 벤야민에게서 니힐리즘으로 표현되는 피조물의 몰락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아감벤의 논의들과
더불어 해명한다.
주제어 : 벤야민, 레비나스, 아감벤, 행복, 메시아, 정치
1. 들어가며
벤야민이 1921년에 쓴 「신학적・정치적 단편」 1)은 말 그대로매우짧은단편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지극히 풍부하다.
1)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신학적・정치적 단편」, 발터 벤야민 선집: 역사의개념에대하여 외 5권, 길, 2008, 129~131쪽.
그것은 너무도많은정보가 압축되어 있는 작은 메모리카드 같아서 사람들이 독해할수있도록정보들을 펼쳐내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 니체가 기록하고 있는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바울의 싸움부터, 레비나스의 메시아주의, 타우베스와아감벤의 바울 해석 등등 현대사상에 와서 특히 주요하게 부각되고있는메시아주의의 주요 국면들로 나아가는 길들이 이 텍스트 안에 숨겨져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작은 단편 안으로 들어섰을 때 현대 철학의메시아사상의 주요 국면들로 나아가는, 그리고 서로를 연결시켜주는길들을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 역시 가능하다. 여러 사상들로부터출발해벤야민의 함축적인 텍스트의 자물쇠를 풀어내 메시아주의의 주요국면을벤야민의 글 속에서 발견하는 일말이다. 벤야민의 텍스트는 메시아주의와 관련해 하나의 분명한 논점을부각시키고 있다. 행복과 메시아의 관계가 그것이다. 그는 행복과 메시아를, 화살을 당길 때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으로 집약되는 힘의 축들처럼그려내고 있다. 행복과 메시아를 떠받치고 있는 둘 사이의 이 긴장감은어디서 오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하나의 힘 속에서 서로팽팽히맞서는 가운데 지탱하는 두 항 사이에 배치되어 있는 현대의 여러메시아론들의 등성이를 타고서 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볼 것이다. 많은함축을 답은 저 질문은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질문들로 분해돼이글의 탐구를 이끌 것이다. 메시아사상은 어떤 의미에서 내재적삶또는지상의 삶을 무상하게 여기는가? 지상의 무상함은 에피쿠로스이래지상의 행복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메시아는 내재적 세계에 대해 어떤정치를 펼치는가?
2. 무상함: 바울과 벤야민 벤야민의 텍스트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유대 메시아사상을 대표한다고 간주해도 좋을 한 성인의 작품으로부터 성찰을 시작할 것인데, 바로 바울의 편지가 그것이다. 그 자신 유대공동체의 자녀로서 유대교 경전을 통해 사유했던 바울을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적 관점에서 연구하는것은 최근의 한 연구 방향을 이룬다.
가령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에 들어서야 유대 학자들은 바울의 유대교적 콘텍스트에 대해진지하게재검증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 이래 여러 가지 사정이 분명히변화했으며, 베를린이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서 유대학자들은바울의 편지를 그 본래의 콘텍스트와 관련하여 독해하기 시작했다. 바울의편지들이 그 진상에 있어서 유대교적 전통에서 가장 오래되고어려운 메시아 텍스트라는 것은 여전히 숙고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2)
2) Giorgio Agamben, P. Dailey(tr.), The Time that Remains, California: Stanford Univ. Press, 2005, pp.2~3.
이 문장이 쓰일 당시(2000년)엔 유대교적 맥락에서의 바울 연구의 발전속에서도 바울의 메시아론은 소홀히 다루어졌다고 하지만, 오늘 날의 관점에서보자면 우리는 유대 메시아주의의 맥락 안에서 바울을 독해하려는중요한성과들을 가지고 있다.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 그리고이에영향받았으며 저 인용문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담고 있는 아감벤의남겨진시간 등이 그렇다.
특히 이 두 작품은 바울의 메시아주의를 유대교의 맥락으로 데려올 뿐아니라, 동시에 벤야민의 텍스트 속에서 바울과의 긴밀한 연대를발견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가령 아감벤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나오는 “약한(schwache) 메시아적 힘”이라는 구문에서의 ‘약한’이라는단어가 벤야민이 직접 만든 타이핑본에서는 자간 공백이 들어간특수한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말의 ‘인용가능성’을 발견한다. 물론저말의 인용 출처는 「고린도후서」의 문장 “내 권능은 약한 자안에서완전히 드러난다.”(「Ⅱ고린토」, 12: 9)이다. 벤야민이 참조했을 루터의번역은이 문장에서의 ‘약한’을 ‘schwache’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 「역사의개념에 대하여」의 “과거의 이미지는 휙 지나간다.”는 구절은 이미「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문장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사라져가고있기 때문입니다.”(「Ⅰ고린토」, 7: 31)에서 암시되고 있음을발견한다.3) 요컨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어휘는 전적으로바울의것임이 드러난다.” 4) 타우베스의 경우는 어떤가? “[바울이라는] 이단자를[유대교라는]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는 과업” 5)을 수행한 타우베스는 아감벤이전에는, “바울이 벤야민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는 점을명시한 유일한 학자” 6)이다.
3) 자세한 논의는 Ibid., pp.138~145 참조. 이 글에서 성서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를따른다.
4) Ibid., p.144.
5) 야곱 타우베스, 조효원 옮김, 바울의 정치신학, 그린비, 2012, 35쪽.
6) Giorgio Agamben, op. cit., p.140.
그는 벤야민의 「신학적・정치적 단편」 속에서「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와의 관련성을 발견한다. 바울의 편지들은 자연에 대한 묘사에 매우 인색하며, 그가나무한그루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는 인상을 준다. 자연에 대한 묘사가없는이유는 당연하게도 묘사의 필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연을포함해세상이 덧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덧없는 것은 찬란함을 지닐 수있고편지의 문장들은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겠는가? 아무의미가없는 것은 말 그대로 의미가 없기에, 편지의 문장들은 이들을묘사하기위해 낭비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피조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자신의 무상함에 대한 한탄뿐이다.
바울은 세상의 무상함에 대해이렇게말한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 날까지다함께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서」, 8: 20-23)
바울에게 자연은 전원시에서 노래하는 것 같은 의미에서 긍정의대상이결코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무상함의 증언자로서만 중요성을지닌다.
타우베스는 말한다.
“그럼에도 자연은 아주 중요한 범주, 종말론적 범주입니다. 덧없음 아래 있는 자연은 신음하고, 한숨짓습니다.” 7)
이러한 바울의 면모는 바로 벤야민에게서 발견된다. 그는독일비애극의 원천에서 바로크 극을 다루며 이렇게 말한다.
“자연이예전부터죽어 몰락해 있다…….” 8)
“피조물들의 은총 없는 죄악의 상태” 9)
같은표현은 바울에게서 보았던 것과 같은 무상한 자연, 종말론적 범주로서의 자연을 나타낸다. 다음 구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순교자 극의 의미에서는윤리적 위반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상태 자체가 몰락의 원인이다.” 10)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덧없는 피조물이라는 자연 자체이기에인간은 몰락(Untergang)하는 것이다. 아래 구절 역시 같은 것을말하고있다.
“인간의 행동은 일체의 가치를 박탈당한 것이다. 따라서새로운것이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공허한 세계이다.” 11)
7) 야곱 타우베스, 주 5)의 책, 173쪽.
8) 발터 벤야민, 김유동 옮김, 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사, 2009, 248쪽.
9) 발터 벤야민, 주 8)의 책, 248쪽.
10) 발터 벤야민, 주 8)의 책, 129~130쪽.
11) 발터 벤야민, 주 8)의 책, 208~209쪽.
타우베스는 말한다.
“저는 벤야민을 [종말론적 범주로서의] 자연과 자연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로마서」 8장과 세계정치로서의 니힐리즘을 말하는 「로마서」 13장에 대한 주석가로 보고 있습니다.” 12)
벤야민의이두 가지 주제(그러나 서로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첫번것을우리는 다루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것은 이 글의 뒷부분에서주요한숙고의 대상이 될 것이다. 피조물의 무상함에 관한 저 바울의텍스트를배경으로 하는 벤야민의 메시아사상은 어떤 것인가? 이제 우리가분석하고자 하는 주요 대상인 「신학적・정치적 단편」을 읽어보자. 미리말하자면여기서 우리는 타우베스가 맞닥뜨린 것 같은 곤란함을 얼마간체험할것이다.
“벤야민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완벽하게 알아낼 수는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 자체가 너무 짧고, 또 수수께끼처럼 되어있으니까요.” 13)
12) 야곱 타우베스, 주 5)의 책, 173~174쪽.
13) 야곱 타우베스, 주 5)의 책, 168쪽.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메시아 자신이 비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 세속적인것의 질서는 행복의 이념에 정향해야 한다. 이 세속적 질서가 메시아적인것과 맺는 관계가 역사철학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그것도그 관계로부터 일종의 신비주의적 역사관이 규정되는데, 이 역사관의문제를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해볼 수 있다. 한 화살의 방향이세속적인 것의 동력이 작용하는 목표를 나타내고 그 반대 방향이 메시아적집약성의 방향을 나타낸다면, 자유로운 인류의 행복 추구는 그 메시아적방향과 멀어지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가는 어떤 힘이 반대로향한길에 있는 다른 힘을 촉진할 수 있는 것처럼 세속적인 것의 세속적질서역시 메시아적 왕국의 도래를 촉진할 수 있다. …… 왜냐하면 모든지상의존재는 행복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추구하며, 그러면서 행복 속에서만그지상의 존재는 그 몰락을 발견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 총체적으로 사멸해가는 속세적인 것, 그 공간적 총체성뿐만 아니라 시간적총체성까지도 사멸해가는 속세적인 것의 리듬, 이 메시아적 자연의이름이 행복(Glück)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것의 영원하고 총체적인무상함[vergängnis, 사멸]으로 인해 메시아적이기 때문이다.14)
이 텍스트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울림을 간직하고있다. “총체적인 무상함”, ‘지상의 존재의 몰락’ 등등은 저 편지의 ‘신음하고한숨짓는 자연’과 공명한다. 타우베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기서행복은무상함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몰락과요! …… 벤야민은, 이것이야말로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인데, 창조에 대해서 바울적인 개념을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창조를 고통으로, 헛된 것(vergeblichkeit)으로보았던 겁니다.” 15)
바울과 벤야민이 자연 또는 내재적 세계를몰락하는무상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읽은 텍스트들 속에서 쉽게확인할수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이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장에서읽을수있듯, 그리고 타우베스가 확인하듯 바울에게 피조물의 헛됨은 창조자체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벤야민은 창조된 자연 안에서, 내재성의세계속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적・정치적 단편」이쓰인직후(1922)에 작성되기 시작한 벤야민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괴테의친화성에도 위 텍스트와 동일하게 덧없음을 세속 세계의 행복에서확인하고 있다. 다음 구절이 알려주듯이 말이다. “인간 안의 모든충동이새로운 죄를 끌어내듯이, 그의 모든 행위는 자신에게 불행을 끌어온다. 성가신 자라는 옛 동화의 소재에서 작가가 취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소재에서 너무 많이 흥청거리는 행복한 자가 결국 운명을 피할 수없이끌어오게 된다.” 16)
14) 발터 벤야민, 주 1)의 책, 130~131쪽. 대괄호는 번역자의 것.
15) 야곱 타우베스, 주 5)의 책, 169~171쪽.
16)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발터 벤야민 선집: 괴테의 친화력 10권, 길, 2012, 76쪽.
세속적 삶 속에서 행복한 자는 행복의 종결에이르는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울과 벤야민 사이의 이러한 괴리에 대해서 아감벤은 다음처럼쓰고있다.
“바울과 벤야민의 두 텍스트 사이에는 몇 가지의 실질적인차이점이 있다. 바울에게 창조는 의지됨 없이 덧없음과 파괴에 종속되어있으며, 바로 이런 까닭에 구원에 대한 기대 속에서 신음하며 고통받고있다. 그러나 이를 천재적으로 전도(傳導)시킨 벤야민에게 있어서자연은그 영원하고 완전한 덧없음 때문에 바로 메시아적인 것이며, 이메시아적인 덧없음의 리듬이 행복 자체이다.” 17)
바울에게 있고 벤야민에게계승된것은 무엇인가? 바로 세상의 덧없음이다. 덧없음이란 맥락과관련하여벤야민에게 있고 바울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행복이다.(우리는이런 차이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지 뒤에 살펴보게 될 것이다.) 벤야민은 세상의 덧없음과 행복을 중첩시킨다. 행복 추구를 통해 인류는 메시아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그러나 “어떤 힘이 반대로 향한 길에 있는다른힘을 촉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은 몰락을 발견하는 장이됨으로써 지상을 메시아를 위한 터전으로 만든다. 우리가 가지게 되는 의문은 단순하다. 어떤 의미에서 덧없음은행복이라는 외관을 가지는가? 또는 지상의 덧없음은 어떻게 행복 속에서실현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구원의 자리에서행복을찾는 사상들(가령 교부철학의 행복론)에는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유대전통의 맥락에서 메시아를 숙고한다는 것의 한 가지는 의미는, 타우베스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헬레니즘이
요리해 놓은 잡탕” 18)을벗어나 그리스 철학과 뒤엉키기 전의 메시아를 찾는다는 것이다.
17) Giorgio Agamben, op. cit., p.141.
18) 야곱 타우베스, 주 5)의 책, 63쪽.
어째든 지상의 덧없음이 어떻게 행복의 외관을 지니는지에대한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레비나스의 텍스트를 열쇠로 삼을 때가 온것이다. 이런 시도의 결과로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종교와종파를거치고 세속적인 사상들과 조우하면서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지게된 메시아주의 안에서 벤야민과 레비나스의 메시아사상이 일면 유사한
모습을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3. 행복과 에피쿠로스에 맞서서: 레비나스
메시아주의에 깊이 침잠한 현대의 대표적인 두 사상가인 벤야민과 레비나스 사이에 좀처럼 직접적인 참조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프랑스군 제10사단에서 복무하고있던 레비나스는 1940년 6월 16일 렌느에 주둔하던 소속부대가독일군에의해 괴멸되자 4년간의 포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사상사가그의이름을 기억하게 만들 어떤 주요 작품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을 때였다. 벤야민은 레비나스가 포로가 된 날짜로부터 꼭 열흘 뒤, 결국 보내지 못하고 마는 마지막 편지를 아도르노에게 쓴다.
“출구 없는 상황이왔으니끝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피레네의 작은마을에서 나의 삶이 끝납니다.” 19)
19) 하워드 아일런드, 마이클 제닝스,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 평전, 글항아리, 2018, 888쪽에서 재인용.
같은 해 9월 27일, 우리가 잘 아는것처럼유럽탈출에 실패한 벤야민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다. 레비나스가 벤야민처럼 또는 수용소의 다른 유대인처럼 최후를 맞지 않은 것은그가 민간인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프랑스 군인으로서 포로가 되었기때문이다. 1940년, 이렇게 동일한 악(惡) 앞에 노출되었던 두 메시아 사상가사이에서 참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이후 벤야민이 유럽의 중요한사상가로 발굴되었던 시대를 살았던 레비나스 쪽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우리는이상한 침묵 밖에는 발견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참조할만한 어떤 구석도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1955년 아도르노에 의해서 벤야민 선집 두권이세상의 빛을 보긴 했지만, 너무 늦게, 즉 레비나스가 그의 사상적여정을거의 마무리 지을 무렵인 1970년대에 와서야 벤야민의 전모가, 즉전집이정리되기 시작했기 때문인가?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레비나스의 메시아사상이, 단편적인 형태로 남아있는 벤야민의 수수께끼같은구절들을 해명할 수 있는 열쇠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행복’에관한 구절들 말이다. 레비나스 사상의 외피는 그리스철학이 덮고 있다. 플라톤이국가론에서 제시한 정식 “선(善)은 존재(ousia)가 아니며, 존재 저편에있다.”(Ⅵ, 509b)는 사상은 레비나스 철학을 항구적으로 지도하는 이념이다. “존재저편의 선(Bien au delà de l’être)이라는 플라톤의 정식은 이주제들[레비나스 철학의 주제들]을 이끌고 나가는 가장 일반적이고 아무군더더기가붙지 않은 지표이다.” 20)
20) 에마뉘엘 레비나스, 서동욱 옮김, 존재에서 존재자로, 민음사, 2001, 7쪽.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는 낯선 유대메시아주의가 레비나스에게서 차지하는 절대적인 위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저그리스적 표피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레비나스의 저 구문에서선의이편에있는 ‘존재’란 바울과 벤야민에게서 목격했던 덧없는 창조된세계와상관적이다. 레비나스 철학의 한 부분을 감싸는 그리스 철학을 뚫고들어가면역사 속에서 이미 극적으로 출현했던, 그리스적인 것과 유대적인것의대립, 바로 헬레니즘을 주도했던 에피쿠로스와 이 에피쿠로스의도시로입성했던 바울의 대립의 변주를 목격할 수 있다. 설령 바울의텍스트자체가 레비나스의 명시적 참조 대상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레비나스는 존재의 세계, 원한다면 지상의 세계 또는 일상생활이이루어지는 세속적 세계를 ‘즐거움(jouissance, 향유)’을 누리는 세계로묘사한다. “즐거움은 세계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세계는우리의지향들에다 세속적인 먹거리의 풍성함을 제공하는데, 여기에는라블레(Rabelais) 류의 먹거리도 포함된다. 세계 안에서 젊음은 기쁨을누리며성급하게 욕망을 채우고자 한다. 이런 것이 세계이다.” 21)
예이츠가묘사했던 젊은이들의 세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젊은이들은 서로의품안에서, 새들은/ 나무에서-그들 죽어가는 세대들은-/ 노래 부르고, 연어 뛰어오르는 폭포, 고등어 우글거리는 바다,/ 어류 동물, 날짐승등 온 여름 동안/ 온갖 배고 낳고 죽는 것들을 찬양한다.” 22)
21) 에마뉘엘 레비나스, 주 20)의 책, 62쪽.
22) 예이츠, 정현종 옮김, 「비잔티움 항해」, 첫사랑, 민음사, 1974, 62쪽.
젊음이누리는이런세속적 행복에 대한 찬가는 셰익스피어의 「사랑의 헛수고」나「한여름밤의 꿈」에서도 인상 깊은 모습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이츠는 저 행복에 대해 “그들 죽어가는 세대들”이라는 단서를 붙이고있고, 우리는 그것을 ‘무상함’으로서 발견할 예정이다.)
또한 레비나스가 묘사한, 세속적 욕망의 만족을 통해 충만한즐거움을얻는 삶은 바로 라블레가 창조한 세계를 통해 대표되고 있는데, 그세계란 고대 에피쿠로스적 삶의 르네상스적 재림으로 성격 지을수있을것이다.
다음 인용에서 레비나스는 내재적 세계의 즐거움(향유)을묘사하기위해 라블레에 뒤이어 마침내 에피쿠로스를 등장시킨다.
“우리는숨쉬기위해 숨쉬며, 먹고 마시기 위해 먹고 마시며, 거주하기 위해 주거를 마련하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며, 산책하기 위해 산책한다. 이모든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삶이다. 삶은하나의 솔직성이다. …… 그것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그리고세계최초의 문학 석사 가스터 나리[라블레 작품의 등장인물]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아브라함이 그의 가축 떼를 방목하며, 이사악이 야곱이 집을 짓던 세계이다. 또한 그 세계 안에선 에피쿠로스가그의 정원을 가꾸고 ‘각각의 사람들이 그의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그늘곁에 머문다.’” 23)
내재적 세계의 이 즐거움이 바로 ‘행복’이다. 다음 텍스트가확인해주듯이 말이다.
“우리는 …… 자기성이 근본적으로 행복의 즐거움(jouissance du bonheur) 속에서 생산되는지 볼 것이다.” 24)
여기서 자기성은 세계 내재적인 주체를 기술하는 표현이다. 이 자기는 바로 행복의 즐거움속에서생산된다. 이때 행복과 즐거움은 구분 없는 하나이다. 그런데 이 행복의세계는이기적인 세계, 타자와의 관계를 모르는 세계이다.
“즐거움(jouissance)의 심리를 통해서, 에고이즘을 통해서, 자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행복(bonheur)을 통해서 생산되는 분리[개별자를 개별자로 성립시키는분리] 속에서 자아는 타인에 대해 무지하다.” 25)
레비나스는 내재적세계의즐거움과 동일한 것으로서 행복을 기술하며, 이것을 타인과의 관계에대한대립지점에 자리하게 한다.26)
벤야민에게서 메시아와 행복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운동의 양쪽 끝이었던 것처럼 레비나스에게서도 타자와의 관계는 행복의 반대편에 있다. “절대적으로 다른 자에 대한욕망은…… 행복 속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27) “타자와의 관계는 자연으로, 행복에의 약속으로 전환될 수 없다.” 28) 행복은 존재 안에 있는 것이다.
23) 에마뉘엘 레비나스, 주 20)의 책, 70쪽.
24) 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La haye: Martinus Nijhoff, 1961, p.31.
25) Ibid., p.34.
26) 레비나스에서 존재 바깥과의 관계, 즉 초월 또는 메시아적 사건은 타인과의마주침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에게서 타인이란 근본적으로 존재내재적인 원리인 아르케(arché)의 타자로서, 무아르케적인(무원리적인), 내재성의바깥을열어주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분명 수수께끼처럼 나타난 무원리적인(an-archique) ‘저편’”(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La haye: Martinus Nijhoff, 1974, p.203.)
27) Emmanuel Levinas, Humanisme de l’autre homme, Montpellier: fata morgana, 1972, p.63.
28) Ibid., p.80.
“벗어남[초월함]과 행복은 필연적으로 존재 안에 발판을 지닌다.” 29) 타자와의관계라는 문맥 속에서 ‘초월’은 가능한데, 초월이란 레비나스에서‘존재와다르게’로 정식화 된다.(“넘어감[초월, passer]이란 존재와 다르게(autrement qu’être)됨, 존재의 타자에게로 가는 것이다.” 30)) 요컨대 초월은행복이기반으로 삼는 존재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리고 행복에 대한 비판, 즉 행복에는 타자와의 관계가, 그리고메시아의 도래가 부재한다는 저 비판은, 바로 에피쿠로스를 상대로동일한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레비나스는 도취나 마약 같은 것이 주는즐거움이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도취나마약같은것들은]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천진성과 순수성의 결과물도아니요, 그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31) 그러나 그는 이 문장에바로이어서에피쿠로스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책임과 분리되어 있다.” 32) 타인과의관계라는 문맥 속에서 찾아오는 메시아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세속적 삶과 행복 안에서 결핍을 이야기할 때, 그배후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는 철학은 바로 현세적 행복 자체를 상대화시킬수있는 현세 바깥의 외재성을 부정한 에피쿠로스주의이다. 내재적삶의근본으로서의 행복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항에 대해서 숙고하지않으면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행복이 현실로 가까이에 있다면 우리는모든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가까이에 없을 때에는 그것을손에넣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하는 것이다.” 33)
29) 에마뉘엘 레비나스, 주 20)의 책, 8~9쪽.
30) Emmanuel Levinas, Autrement qu'être ou au-delà de l'essence, p.3.
31) Ibid., p.222.
32) Ibid., p.222.
3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전양범 옮김, 그리스 철학자 열전, 동서문화사, 2008, 715쪽.
행복은 현세, 내재적삶속에서 인간이 가장 애써서 가꾸는 과실나무라는 것을 에피쿠로스는말하고있다. 행복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레비나스의 대립적 입장은 스피노자, 니체, 하이데거 등 내재성에 충실하게 존재함을 기술한 철학자들에 대해그가가지는다양한 대립적 관계들 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에피쿠로스주의는 세계 내재적인 행복의 긍정성과 충만함을 최초로 확인한철학일 뿐 아니라, 사변으로서의 철학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종교에서갈망하는 정도의 안식을 실천적 차원에서 역사상 가장 큰 유럽 제국의시민들에게 실제로 주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에피쿠로스주의자로서, 유한한 삶 너머의 무한을 갈망하지 않으면서도 영혼의 평온을 누리며자유인으로 죽는 법을 알았다. 종교 대신 철학이, 이성적 추론이 삶을구제하는데 성공한 가장 빛나는 경우 가운데 하나가 에피쿠로스주의인것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주의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계획하고 예측할수없는, 즉 인간의 수동성 속에서만 찾아오는 메시아가 줄 수 있는 구원을추종하는 사상이 두려워하며 마주하는 영원한 경쟁자다. 이런 경쟁의구도속에선 에피쿠로스주의가 옛날에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주사소한일에 불과한데, 이후의 여러 철학자들의 이름을 통해 그 사상은계승되었기때문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인간의 영혼이 언제든 에피쿠로스의진리를 스스로 발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기하학이물리적문서의 진실이 아니라 이성의 진실인 것처럼 에피쿠로스주의는 사라진책들속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주의자는에피쿠로스주의와 싸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사실 유대 메시아주의의가장 중요한 텍스트들의 저자 바울이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해 수행했던고대싸움의 반복이다.34)
34) 참고로, 바울과 에피쿠로스 사이의 싸움의 한 단편적 면모는 흥미롭게도 셀링의 풍자시 「하인츠 비더포르스트의 에피쿠로스적 신앙고백」(1799)에서도 발견된다.
“그래도난 즉시 늙은 바오로가 되지는 않았고/ 근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 포도주와구운고기를 내게 가져오게 했다./ 그런 것은 특별히 내게 필요한 것이었고/ 나는본성을되찾았다./ 다시 여인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두 눈으로 모든 것을 분명히볼수있었으며,/ 그로 인해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즉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시작했다.” (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 홍사현 옮김, 문학적 절대, 그린비, 2015, 373~374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셸링이 자신의 무종교적 진보성을 드러내기 위해, ‘늙은바울’ 에 대립하는 ‘에피쿠로스적 즐거움’을 시적 구도(構圖)로서 채용하고 있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싸움을 먼저 목격해야한다.
4. 바울과 에피쿠로스의 싸움을 연출해보다: 니체
우리는 바울이 철학자의 땅 아테네에 찾아갔을 때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 한낱 웃음거리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아레오파고법정에서 바울이 연설하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그를 비웃었다.(「사도행전」, 17: 32 참조)
이성의 이 쾌활한 웃음은너무도중요한 논점을 확인하고 있다. 메시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사이에가장 첨예한 대립이 바로 ‘죽음’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다는 점말이다. 메시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 사이의 가장 큰 쟁점이 죽음이라는것을잘 알았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니체다. 안티크리스트에서 그의 주된공격의 표적이 바로 바울인데, 여기서 바울은 죽음과 내세의심판에대한공포를 이용해 로마를 에피쿠로스주의로부터 빼앗은 자로 묘사되고있다. 니체에게서 에피쿠로스주의와 바울의 싸움은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연출된다. 에피쿠로스는 이미 이런 종류의 종교의 선행 형식과 싸운 적이있었다. 에피쿠로스가 ‘무엇’과 싸웠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루크레티우스를 읽어보라. 그는 이교도와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교에맞서 싸웠다.-그는 ‘지하적’ 제의들, 잠복하고 있던 그리스도교전체에 맞서 싸웠다.-불멸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진정한 ‘구원’이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이겼을 수도 있다. 로마의 존경할만한 사람은전부에피쿠로스주의자였기에: ‘그때 바울이 등장한 것이다.’ 바울, 로마와‘세상’에 대한 찬달라적 증오의 육화이자 찬달라적 증오의 천재인바울, 유대인이며 영원한 유대인의 전형인 바울 …… 그가 알아차렸던 것, 그것은어떻게 유대교 변두리의 작고도 종파적인 그리스도교-운동을 이용하여‘세계적인 불길’을 일으킬 수 있을지, 어떻게 ‘십자가의 신’이라는상징을가지고서 하부에 있는 모든 것, 은밀히-반항하는 모든 것, 로마 제국안에있는 아나키적 책동의 유산 전체를 거대한 힘에 이르게 할 수 있을지에관한 것이었다.35) 니체로부터의 이 인용은 그리스도교에 맞서 싸운 사상으로서에피쿠로주의를 조명한다. 로마의 주도적인 인물들의 보편적 사상인에피쿠로스주의는 구원을 불멸하는 내세에서 찾지 않고 현세의 행복에서찾는법을가르쳤다고 니체는 말한다. 어떻게 에피쿠로스의 로마를 무너뜨릴수있을까? 바로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으로 현세적 삶을 위협하는일을통해서다. “사람들은 ‘보복’과 ‘심판’을 필요로 했다.” 36) 이 문장에바로이어서 니체는 메시아를 이 보복과 심판의 이름으로 이해한다. “다시한번메시아에 대한 대중적인 기대가 전면에 나섰다: 어떤 역사적순간이주목되었다.” 37)
35) 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옮김, 니체전집, 15권, 2002, 310쪽.
36) 프리드리히 니체, 주 35)의 책, 270쪽.
37) 프리드리히 니체, 주 35)의 책, 270쪽.
바로 메시아가 가져다줄 심판의 순간 말이다. 바울이 한 일은 지금의 세계에 대해 우월한 ‘저편’을 도입하여, 지금의세계의 행복을 무상한 것으로, ‘허무’하게 만든 것이다. “그[바울]는‘세상’ 의 가치를 빼앗아버리기 위해서는 불멸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사실을 파악해냈다. …… 피안이 ‘삶을 죽여 버린다.’는 사실을파악해냈다. …… 허무주의자(Nihilist)와 그리스도인(Christ): 운(韻)이 맞는다. 비단운만 맞는 것은 아니다. 고대 세계의 수고가 깡그리 ‘부질없게되었다.’” 38) 저편이 출현한다는 것, 즉 이편의 삶이 저편에 매개되어 반성된다는것은이편의 행복을 허무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허무주의자이며, 이후 이런 허무주의는 벤야민의 메시아사상에서도 발견된다. “이몰락을 추구하는 일이 -자연이라고 칭할 인간의 단계들에 대해서도- 세계 정치의 과제이고, 그것의 방법은 니힐리즘으로 불려야 한다.” 39)
38) 프리드리히 니체, 주 35)의 책, 311쪽.
39) 발터 벤야민, 주 1)의 책, 131쪽.
짧지만 중요한 벤야민의 이 문장을 오늘 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대해선뒤에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미리 말하자면, 저 니힐리즘은니체의관점과는 다른 긍정적인 층위에서 일어선다.) 결국 에피쿠로스와 바울의 대립에서 관건은 죽음 또는 몰락을이해하는 방식이다. 에피쿠로스에게 그것은 가능한 유일한 행복을형태지워주는 경계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아무 것도 없는것에대해우리는 두려워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유일한 행복은 그 자체긍정될수만 있을 뿐 부정될 수 없다. 지금 이 삶 바깥에 아무 것도 없는데무엇을척도로 이 삶의 행복을 부정하겠는가? 반면 바울에게 현세적삶의끝이란, 현세를 몰락시켜 현세의 허무를 입증하는 진정한 국면의출현이다. 현세의 사물은 몰락을 위해 있는 것이지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아니다.이제 우리는 바울의 무상함과 벤야민-레비나스의 무상함 사이에왜편차가 생기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니체가 기술하고 있는 바울의입장에서보자면, 행복은 자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피쿠로스의 학설가운데있다. 반면 세속화 이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벤야민과 레비나스의입장에서 에피쿠로스주의는 학설로서가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세속적삶속에서 체험된다. 학설은 사라졌지만, 세속성이란 축복을 얻은인간들은삶 자체의 행복을 갈구하는 방식으로 저절로 에피쿠로스주의자가되었다.
이런 까닭에 앞서 보았듯 바울에게서는 피조물 자체가 무상한것이지만, 벤야민과 레비나스에게서는 피조물은 행복 속에서 무상하다.
5. 무상한 행복을 넘어서: 벤야민 텍스트의 열쇠로서 레비나스
레비나스의 철학은, 니체가 앞서 연출한 죽음을 둘러싼 바울과에피쿠로스의 싸움을 어떤 의미에서 그대로 반복하는 셈이다. 니체가앞서의인용에서 제시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고있는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여기서죽음이 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는지 에피쿠로스의 로마인 제자는이렇게 말하고 있다. 혹시 어떤 비참하고 괴로운 일이 있으려면, 그 나쁜 일을 겪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도 그 시간에 존재해야만 [한다.] 한데 죽음이 이것을 가로채버리고, 저 불행이 달라붙을 그 사람 자체를 존재하지 못하게 하므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죽음 속에는 우리가 두려워할 것 전혀 없는것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비참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또 일단 불멸의 죽음이 필멸의 생명을 데려가 버리면, 그가 언젠가 태어났었든, 아무 때도 태어나지 않았었든, 이제는전혀차이가 없다는 것을.40)
40) 루크레티우스, 강대진 옮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아카넷, 2012, 251쪽.
살아있는 것은 죽음을 결코 경험(인식)할 수 없다.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으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경험할 수 없는 미래인 것이다. 이러한에피쿠로스주의의 죽음에 대한 성찰을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비판한다.
에피쿠로스의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유명한 격언이 이렇게 다루어지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네가 있으면 그(죽음)는 없고, 그가 있으면 너는 없다.’는 고대격언은 죽음이 안고 있는 역설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격언은미래와의 독특한 관계인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41)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미래와의 독특한 관계로서 죽음과 우리가맺고있는관계를 에피쿠로스는 지워버리고 있다고 하는 걸까?
“[죽음 앞에서] 주체는 자신이 묶여 있고, 압도되어 있고 어떤 방식에서는 수동적임을발견한다. …… 우리가 죽음과 맺고 있는 관계의 주요 특성이 어떻게철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을 수 있었는지 나는 스스로 자문해 본다. …… 절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우리의 분석은 출발해야한다. 절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떠한 빛에 대해서도낯선것이어서 어떠한 가능성의 채택이 불가능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그안에붙잡혀 있음을 뜻한다.” 42)
41) 엠마누엘 레비나스, 강영안 옮김,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1996, 79쪽.
42) 엠마누엘 레비나스, 주 41)의 책, 78쪽.
에피쿠로스와 레비나스 모두 공통적으로죽음의인식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이 도래하면 내가 없으므로죽음은그저 경험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미래인 까닭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우리가 죽음 안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죽음은삶안에서 가능한 모든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능성의불가능성’이라 일컬어진다. 행복 역시 죽음에 영향 받지 않은 채 충만한것으로남지 못하고, 죽음 때문에 그 자체 결핍(불가능성)을 내포하는것, 무상한것이 된다. 우리가 맺는 죽음과의 관계란 곧 현세적 행복 안에서결핍을확인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메시아가 제시된다.
레비나스는 말한다.
“수고와여가의교대 속에서 우리는 수고를 통해 얻은 수확을 향유한다. 이 교대는세계의시간 자체를 구성한다. 이 시간은 천편일률적으로 따분한 것(monotone)인데, 그 까닭은 이 시간의 순간들 간에 서로 우열이 없기 때문이다. …… 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하지가 않다. 어떤슬픔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떤 죽음도 부활 없이는 견디어내지못한다.…… 희망의 진정한 대상, 그것은 메시아이며 구원이다.” 43)
43) 에마뉘엘 레비나스, 주 20)의 책, 152~154쪽.
이것은 벤야민의 텍스트의 해설이나 다름없다. 레비나스의위인용에서 첫 두 문장은 세속적인 세계 안에서 향유(즐거움), 즉 행복을얻는메커니즘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이라는 수고를 하고 봉급과여가를확보해 즐거움을 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즐거움의 획득을위한일과 휴식의 반복적 교대가 세계 안의 시간을 구성한다. 이 시간은, 아무런새로운 사건의 도래도 이루어지지 않는, 서로 우열 없는 순간들의천편일률적인 나열에 불과하다. 세속적 즐거움을 얻는 이 시간은 충족적이아니라 죽음 때문에 결핍된 시간, 결국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다. 오로지 메시아만이 이런 세속적 시간의 결핍을 새로운 국면을 여는데사용할수 있다. 이 문장을 우리가 앞서 읽었던 벤야민의 「신학적・정치적단편」과 겹쳐 놓아 보아야 한다.
“자신의 길을 가는 어떤 힘이 반대로향한길에 있는 다른 힘을 촉진할 수 있는 것처럼 세속적인 것의 세속적질서역시 메시아적 왕국의 도래를 촉진할 수 있다. …… 왜냐하면 모든지상의존재는 행복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추구하며, 그러면서 행복속에서만그지상의 존재는 그 몰락을 발견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존재자가 세계 안에서 수고와 봉급과 여가의 반복을 통해 하루하루행복을추구하는 일은 곧 이 행복은 영원한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모면할 수 없는 몰락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이렇게 지상의 ‘행복의 문제’ 에 제한해서 생각해 볼 때, 레비나스의 텍스트는 벤야민의 텍스트로 들어서기 위한
안내자가 되어 준다.
반대로 말하면 벤야민의 텍스트는 레비나스에 앞서 레비나스의 텍스트를 달성하고 있다.
6. 메시아적 정치: 바울, 벤야민, 아감벤
그렇다면 몰락하는 세계 자체 안에는, 내재성 안에는 문자그대로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천박한 탐닉 같이 것이 결코 아니다. 지상의행복은 유일한 행복이라서 그 자신을 보잘 것 없도록 만드는어떤비교의 척도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여, 덧없음이라는 틈새를통해메시아가 침입해 들어와 삶을 슬픈 초상화로 만드는 것을 막고, 오로지내재적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 에피쿠로스주의이다. 에피쿠로스주의는자연바깥에서 또는 죽음 이후에 도래할 것에 대한 상상에 사로잡혀, 인간이탄생과 더불어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을 제대로 챙기지못할까안타깝게 생각한다. 인간이 자신이 가진 재산이 무엇인지도 모른채삶을무상한 것으로 만드는 장님이 될까 염려하는 이가 에피쿠로스이다. 그렇다면 메시아주의는 내재성 바깥을 건너다보려는 시선을지니는데서가 아니라 ‘지금’의 내재적 삶의 변화, 지금의 파국이라는관점에서만공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메시아주의는내재적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내재적 세계를 다스리는관점에서만 공허한 것이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벤야민이 말하듯“세계정치”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가 다시 읽겠다고 약속했던, 바울의니힐리즘에 근접하고 있는 벤야민의 「신학적・정치적 단편」의 마지막 구절을읽어야할 때이다.
이 몰락을 추구하는 일이-자연이라고 칭할 인간의 단계들에 대해서도-세계 정치의 과제이고, 그것의 방법은 니힐리즘으로 불려야 한다.44)
우리는 이 구절을, 이 구절과 매우 닮은 벤야민의 또 다른텍스트속에서 이해해볼 수도 있다.
이 세계를 허무하게 만드는 메시아적니힐리즘은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는 바로크 비애극이 구현하는 현세의파국으로나타난다.
“피안에 대한 전망도 없이 …… 독일 바로크 드라마는자라났다. …… 중세가 이승에서의 사건의 무가치함과 피조물의 덧없음을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의 중간단계로 제시한다면, 독일 비애극은현세의절망상태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간다. 독일 비애극이 구원을 알고있다면, 그것은 신의 구원계획의 실현 속에서보다는 이러한 불행한 숙명자체의심연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45)
중세극은 피조물의 덧없음을 매개로 삼아 초월적, 외재적 세계로 나가는 구원의 계획을 도해한다면, 바로크극은
“피안에 대한 전망도 없이”, 불행한 숙명 자체의 심연 속에 머문다. 「신학적・정치적 단편」의 용어로 말하면, 몰락을 추구하고 니힐리즘속에서모든 것을 무상하게 만든다. 이런 것이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46)
44) 발터 벤야민, 주 1)의 책, 131쪽.
45) 발터 벤야민, 주 8)의 책, 118쪽.
46) 레비나스 역시 정치에, “메시아적 정치(politique messianique)”에 관심을기울인다. (Emmanuel Levinas, Nouvelles lectures talmudiques, Paris: Éd. de minuit, 1996, p. 63)
레비나스에게서 ‘외재성’ 개념이 그토록 중요함에도 이 메시아적 정치는 데리다가 그렇게 하듯 ‘내재성’의 관점에서 해석가능한 면모를 가질 것이다. “‘속에서너머(au-delà dans)’―다시 한번, 윤리적 또는 메시아적 초월의 정치적 내면화가 등장하는것이죠.”(자크 데리다, 문성원 옮김, 아듀 레비나스, 문학과지성사, 2016, 155쪽)
메시아적인 것의 이 정치적 내면화를 그는 “내재성 속의 이 초월”(같은 책, 186쪽)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내재화된 메시아적 정치를 벤야민처럼 ‘니힐리즘’ 개념 메시아적 소명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게 여기는이런 니힐리즘은 바울과 더불어 등장한다.
바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첫번째편지」에서 크레시스(Klēsis, 소명, 부르심)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해야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7: 29-32)
여기에는‘~아닌 것처럼’ 살라는 요구가 있지, ~처럼 살라는, ‘정체성의획득에대한요구’는 없다. ‘~아닌 것처럼’ 속에서 기존의 삶은 무한히 부정될뿐어떤정체성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현세에 주어져 있는 모든것이‘~아닌 것처럼’ 속에서 무상하게 될 뿐이다. 이 니힐리즘에 대해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피조물들의 끊임없는 절멸의 비탄에 영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그 절멸을 계산하고 기록할 수 있는 잘 구성된논의가아니라, 단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탄식’(「로마서」, 8: 26)이다. 이때문에, 절멸해 가는 것에 충실한 자는 어떠한 현재적 자기 동일성도 믿을 수 없다. …… 바울의 크레시스는 메시아적인 것과 주체와의 내적관계에 관한 이론이며, 가정된 동일성들이나 보장된 속성들을 지닌모두에대해스스로를 단번에 차별화하는 이론이다.” 47)
47) Giorgio Agamben, op. cit., p.41.
‘~아닌 것처럼’에충실하자면, 세상 안에서 어떤 정체성(~임)도 가질 수 없다. 어떤 정체성이건무효화해서 ~아닌 것이 되려는 운동의 지속만이 가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을 우리는 이렇게 쓸 수도 있다. “바울에게서 영생이라는주제는단지 미래의 모습뿐만 아니라 메시아적 시간(“지금이라는 시간(ho nyn 과 연결 지어 이해하고 해명하려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kairos)”)에서 삶이라는 특별한 성격, 메시아인 예수 속에서의삶[도] …… 함께 가리킨다. …… ‘아닌 것처럼’은 메시아적 공동체의 구성원의 모든 법적 조건과 모든 사회적 행동을 현재 시점에서 유지하는 동시에 무위의 것으로 만든다. …… 메시아적 삶이란 삶이 미리 규정된 형식과 일치할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 삶을 ‘예수의 삶’을 향해 열기 위해 모든 비오스를 철회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무위는 단순히 무기력이나 휴식이아니라그와 반대로 특히 빼어난 메시아적 유위[일, operation]다.” 48)
‘~아닌것처럼’ 은 내재적 세계의 지금 현재적 시점에서 수행되는 일이다. 여기서그것은죽음 이후 같은 외재적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다.(죽음을 넘어다보는것이관건이 아니라는 맥락에서 바디우는 니체의 바울론을 비판하며이렇게말하기도 한다. “‘삶을 죽여 버리는 것’은 일종의 야성적 기쁨과함께‘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고린도전서」, 15장 55절)라고묻는자의 의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히려 ‘죽음을죽여버리는 것’이라는 공식이 바울의 기획을 보다 더 잘 요약해줄 것이다.” 49))
내재적 세계에서의 ‘~아닌 것처럼’은 현재적 ‘비오스(bios)’를 철회하는공식이다. “비오스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 50)을가리킨다.
48)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정문영 옮김, 왕국과 영광, 새물결, 2016, 506~507쪽.
49) 알랭 바디우, 현성환 옮김, 사도 바울, 새물결, 2008, 139쪽.
50)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옮김,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33쪽.
즉 그것은 사회적 정체성 안에서 영위하는 삶이다.
따라서 비오스의 철회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자기정체성(자기동일성)으로부터벗어나는 일, 모든 정체성을 무효화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정체성을가지고만 수행할 수 있는 현세의 일들로 부터 벗어나 무위의 상태가되는일이다.
행복론과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일이 필요하다면, 이런비오스의 철회 속에서만 우리는 세속적인 항들과 코드화되어 있는것으로서 행복이라는 것을 삶의 근본원리로 삼지 않고도 내재적 삶 안에충만하게머무를 수 있다.
모든 자기정체성이 무효화됨으로 행복을 누릴주체역시없는 것이다. 니힐리즘의 활성화, 즉 내재적인 것들을 무상하게함으로써내재성 안에서 도달한 국면은 정체성을 지닌 원리에 지배받기보다는무한정적인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위가 어떤 의미에서 ‘메시아적유위’인가? 그것은 현세적 정체성의 무효화 속에서 달성되는 메시아의유위, 즉‘무위 속의 유위’라는 점에서 안식일 안에 들어 있는 파괴행위같다.
“잘알려져 있다시피 안식일에는 모든 멜라카(Melakhà), 즉 모든생산적인노동을 금지해야 한다. …… 하지만 순수한 파괴행위, 완전히 파괴적이거나 탈창조적인 성격의 행위는 메누하(menhchà), 안식일의 휴식과 닮아있다고 하며 따라서 금지의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이 아니라 무위와 탈창조가 도래하는 정치의 패러다임[이다.] ……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특수한 종류의 안식휴가이다. 그 휴식은 스스로를구제하지 못하면서도 구제를 가능케 하고 스스로를 만회할 수 없으면서도그구원을 발생하게 한다. …… 무위는 태만이 아니라 카타르게시스이다.” 51)
생산적인 일이 아닌 파괴(무효화)는 안식일과도 같은 무위 속에서유일하게 허용될 수밖에 없는 유위이다.
이 유위 자체가 모든 생산적일과그기반인 주체의 동일성을 저버리는 무위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이것이 메시아적 유위이고, 그것은 바울의 용어 ‘카타르게시스(Katargēsis)’로표현된다. 무효로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 카타르게시스는 신약성서에 스물 일곱 번 사용되며, 그 가운데 스물여섯 번이 바울의 편지들에등장한다.52) 이 말은 “이율배반적 행위를 표현” 53)하는데, “메시아적 카타르게시스는 단지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성취를 가져오는 것이다.” 54)
51) 조르조 아감벤, 이경진 옮김, 도래하는 공동체, 꾸리에, 2014, 151~152쪽.
52) Giorgio Agamben, op. cit., p.160 참조.
53) Giorgio Agamben, op. cit., p.99.
54) Giorgio Agamben, op. cit., p.99.
이말의 이런 이율배반적 성격은 루터가 이 말의 번역어로 채택한‘지양(Aufheben, 페지하고 보존함)’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헤겔의 변증법속에 이 말이 채택되면서 더욱 보편적이 되었다.55)
55) Giorgio Agamben, op. cit., p.99~101 참조.
이런 카타르게시스는그야말로 이율배반의 구현으로서, 바울에게는 율법의 무효화를 통해 율법이 사랑으로 완성되는 일이다.(「로마서」, 13: 10 참조)
벤야민의“세계정치”의 관점에서 말하면, 그것은 니힐리즘에 몰입하는 것, 즉세속적인 것들의 무효화에 몰입하는 것으로, 현금의 정체성을 무효로 함으로써 새시대를 도래케 한다.
현세적인 것의 무효가 곧 현세적인 것이 받는결과이므로, 카타르게시스의 결과는 지상을, 내재성을 위한 것이다.
7. 맺으면서: 무위의 정치
메시아주의는 유대, 기독교의 전개과정 속에서 수많은 얼굴을가지게되었다. 벤야민의 「신학적・정치적 단편」은 메시아주의의 모든얼굴을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어떤 단일 문헌도 이를 해낼 수는없다), 현대 메시아사상의 주요 국면들이 만나는 핵심 지점을 보여주고있는교통의 결절점과도 같다.
그 결절점에서 형성되어 있는 메시아사상이 바로 우리가 탐구해온 바인데, 그 탐구를 한 마디 질문의 형태로 요약해보자면 이럴 것이다. 메시아사상은 어째서 세상의 무상함을 목격하며 그 무상함은 어떻게 세속적 행복을 먹이로 삼아 실현되고, 또 무상함속에서의 몰락은 어떻게 세상의 정치가 될 수 있는가?
타우베스와 아감벤이 드러냈듯, 벤야민의 텍스트의 세상의 무상함을 매개로 메시아의 도래라는 논제에 접근하는 바울이있다.
「사도행전」이 연출하고 있는 바울과 아테네 철학자들 사이의 대립을염두에둔다면, 세상의 무상함에 대한 바울의 논제의 대척지에서 우리는, 니체가그렇게 했던 것처럼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을 발견할 수 있다. 벤야민은이행복이 세속적 삶 안에서 추구되는 가치라는 점을 발견하고 바울의 메시아론이 제시한 세상의 무상함을 행복 속에서의 몰락이라는 주제로 변형시켰다. 이런 주제는, 내재적 삶의 행복의 필연적인 결핍은 메시아적인 것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레비나스 사상의 한 국면과공명한다.
그런데 벤야민의 텍스트의 진정 주목할 만한 면모는 세상의무상함, 세상의 몰락을 토로하는 니힐리즘을 ‘정치’로서 발견한다는데있다. 그정치란, 아감벤과 더불어 살펴보았듯, ‘무위’를 통해 사회 정치적지위를비롯한 내재적 세계의 모든 동일성을 무화시켜 새로운 세계의 발생을 위한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메시아 적인 것의 도래와더불어내재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메시아적인 것이 열어놓는외재적세계에 대해선 무지할지라도, 메시아적인 것 때문에 내재성 속에서 저정치는 체험하게 된다.’ 사상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무위의 정치사상은 종말의때와 일손을 멈추고 쉬는 것을 겹쳐놓은 바울로부터 유래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 간 이도그의 일손을 멈추고 쉬는 것입니다.”(「히브리서」, 4장 10절) 또한 ‘무위의정치’는근대 철학의 ‘노동의 정치’의 대척지에서 해방의 새로운 가능성을탐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노동이 근대 정치사상에서 가지는 중요성이란어떤것인가? 가령 헤겔에게서 노예는 노동을 통해 비로소 타율적인 종속관계로부터 해방되어 독자적인 존재에 이른다. 정신현상학의 유명한페이지들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의식은 여전히 대상에 얽매인채독자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결국 의식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데는노동이 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 스스로가독자적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마침내 그[노예]는 완전무결한 독자 존재임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 그리하여 의식은 타율적으로 밖에는느껴지지 않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자력으로 자기를 재발견하는 주체적인의미(eigner Sinn)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56)
마르크스에서 역시마찬가지다.
“노동자의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그의 노동의 산물로 나타나그속에보존되어 있다. 노동이 형성하고 규정한 사물은 인간의 사회적세계를채우고 거기에서 노동의 대상으로서 작용한다. 노동자는 그의 노동이 이세계를 영속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속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자기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 그리하여 ‘고되게 일하고 봉사하는’ 인간[노동하는 의식]은 이제 자립적인존재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직관하기에 이른다.”(대괄호는역자의것)57)
56)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임석진 옮김, 정신현상학 1권, 한길사, 2005, 232~ 233쪽.
57)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김현일 옮김, 이성과 혁명, 중원문화, 2017, 162~163쪽.
이러한 근대 사상의 기획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무위의정치는 노동이 아닌 무위 속에서 타율성을 벗어나 해방에 이르려한다. 메시아에 대한 사색의 도정으로부터 결과한 저 ‘무위의 정치’를, 그전모는 아니더라도 윤곽 정도를 어떤 부조의 형상을 손끝으로짐작해보듯그려볼 수 있을까? 무위의 정치적 흔적들부터 보자. 가령 무위의축일(祝日)이라 할 만한 공휴일을 제정하는 일이 국가의 중대 사안가운데하나라는 것은 무위가 가진 정치적 힘에 대한 암시일 것이다. 정치는늘무위를 두려워하여 빨간 날짜 몇 개 속에 가두어 둔 채 열매가 붉게익으면수확하듯 노동의 먹이로 사용하려 한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에서흔히보듯 불만에 찬 신하가 병을 핑계로 출근을 하지 않고 이불 깔고빈둥거리며 무위를 달성할 때 왕의 정치는 타격을 입는다. 또 노동자가파업을하고 노동을 종료할 때 이는 정치적 효과를 달성한다. 그러나이러한예들은 무위와 정치의 깊은 연관성을 짐작하게는 해주지만, 경우에따라서는무위가 여전히 목적에 매개됨으로써 유위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지적을받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위의 정치에 대해, 공동체를 화두로 삼은 낭시와더불어사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 사상에서 ‘무위’에 몰두하는 대표적인 사상가로 아감벤과 낭시를 꼽을 수 있을 텐데, 낭시는 아감벤과는 또다른방식으로 이 화두에 접근하며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내세운다.
그는공동체에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는 융합을 위한 계획의 대상이 아니며, 보다 일반적으로, 생산이나 실현을 위한 계획의 대상도 아니다.” 58) 공동체의본질은 그야말로 목적과 그 실현을 위한 계획에 입각해 집단적으로노동하는것이 아니라, 무위이다. “공동체는 이루어야 할 ‘과제’의 영역에속할수없다. …… 본질적으로 공동체는 블랑쇼가 무위(無爲, désœuvrement)라고명명한 것에 자리 잡는다. 과제 내에서 또는 과제 너머에서, 과제로부터빠져나오는 것, 생산과 완성을 위해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것이다.]” 59)
낭시의 공동체론과의 영향 관계 속에 놓인 블랑쇼 역시 말한다.
“공동체는어떤 생산적 가치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동체는효용성의측면에서 어떤 목적을 갖는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60)
58) 장-뤽 낭시, 박준상 옮김,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47~48쪽.
59) 주 58)의 책, 78~79쪽.
60) 모리스 블랑쇼, 박준상 옮김,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문학과지성사, 2005, 26쪽.
우리는보통 무엇인가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함께 협력해서 일하는것을공동체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공동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파괴로부터 나오는 결과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동원하고, 배타적인 집단을 만드는 일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공동체를 동질적 속성에 매개된 자들의 집단으로 꾸미고 공통적 목적을 설정할 경우 출현하는 것은 예를 들면 혈통적 배타성을 지닌 파시즘, 전체주의, 집단이기주의 등등이다.
반면 우리는 애초에 어떤 목적을 위한 기능이나수단에매개된 자들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의 근본은‘무위’인것이다. 결국 우리의 근본의 자리에서 이 무위를 확인한다는것은, 배타적 집단을 이루려 할 때 개개인에게 강제되는, 학교, 회사, 국가의 어지러울 정도로 피곤한 다양한 발전 계획에서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각종 목적과 이념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이 파괴가 이름을 가져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 그것도 ‘무위의 정치’ 외에 다른 것일 수 있겠는가? 이 정치 사상의 역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나이의 실로 짜인 옷자락을 길고 느리게 끌면서 집요하게 인류를매혹시켜왔는지도 모르겠다. 주나라의 마지막 날들이 낙엽처럼 쌓여갈때, 오직 사라지기 위해 국경에 다다랐으나 방해꾼을 만나 난데없이 글을 써야했던 한 철학자가 이미 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책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관리가 졸라서 받아낸 철학자의 문장을 전하고 있다.
“무위를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爲無爲, 則無不治)”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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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appiness and the Messianic Downfall: St. Paul, Benjamin, Levinas, Agamben
Seo Dong Wook
This paper focuses on Walter Benjamin's “Theological-Political Fragment” (1921) as a key to understand various themes of Messianism in contemporary philosophy. This is because Benjamin’s text can be served as the nodal point of communication in which the major aspects of the Messianic thought meet. As Taubes and Agamben explain, Benjamin transforms the subject of the Apostle Paul, that is, the world's caducity, into a form of the caducity of creatures in happiness. We study this topic with the Levinasian thought which deals with the happiness of the world in some negative way. In the process,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happiness of the creatures and the Messiah is found to be a subject that goes back to the conflict between Epicureanism and Paul, which Nietzsche has dramatically shown in The Antichrist. In addition, the political implications of the caducity of the creatures in Paul and Benjamin are elucidated in connection with Agamben's discussions.
Key Words:Benjamin, Levinas, Agamben, Happiness, Messiah, Politics
접수일자 : 2018년 07월 13일 심사완료 : 2018년 10월 17일 게재확정 : 2018년 10월 24일
서강인문논총 5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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