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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임진왜란 시기 조명 관계와 명일 교섭-나이토 조안의 조선 경유를 중심으로-/이정일. 동북아역사재단

[국문요약]

본 논문은 1593년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재개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하인 나이토 조안이 북경행 사절의 명분으로 조선을 왕래한 약 2년 6개월 간 조선 조정의 대응 및 조선과 명의 갈등 양상을 살펴본다.

조선 조정은 조안의 자국 왕래를 기존의 개별적으로 가동된 조 명 관계ㆍ조일 관계ㆍ명일 관계가 유기적으로 결부된 새로운 국제적 현상의 전개일 수 있다 는 점에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먼저, 조안이 1593년 6월말 부산에서 북상하자 전쟁 발발 직 후 일본과의 대화 시도에서 체득한 절대 불신을 토대로 조안의 자국 경유 북경행 그리고 더 나아가 진행 중인 교섭 자체가 일본군의 기만술임을 명군에 알리며 그의 한성 진입을 반대했 다.

동시에 이전의 명일 간 공식 교류지 寧波를 통하지 않고 조선 땅을 굳이 다시 밟으려는 일본의 의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조안이 9월 평양에 진입하자 조안 사태가 명 조정과 직접 상의해야할 군사ㆍ외교 의제로 전화했음을 직시하고 일본군으로서 한 번도 밟지 못한 평양 이북과 명의 군사 변경 지역을 거치면서 벌일 그의 정탐 활동이 명의 국방에 직접적인 위협 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595년 상반기 책봉사절과 함께 돌아온 조안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조선 조정은 조안의 한성 출입을 금지하고 그의 정탐 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매진했 다.

더 근본적으로 조안의 왕래를 일본군의 기만술과 계속 연계시키며 군사 안보의 측면에서 계속 주시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대응과 더불어 책봉사 도해의 전제 조건인 일본군의 완전 철수가 지체되고 난항을 거듭하는 교섭의 현황을 명 조정에 그대로 전했다.

조안 사태에 대한 대처법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이 일본과의 교섭으로 종전을 추구한 명 중심의 안보 우선주 의를 상대로 명이 자국과의 군사ㆍ외교 협력을 등한시한다면 일본으로부터의 침략 위협에 더 쉽게 노출될 것이라며 자국 중심의 안보 의식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대명 외교가 명일 교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상고하고 조선ㆍ명 ㆍ일본 삼국 간 다면적 상호작용을 심찰하며 궁극적으로 전쟁의 국제성에 대한 이해력을 일 층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핵심어 : 나이토 조안, 조명 관계, 명일 교섭, 명일 관계, 안보

Ⅰ. 머리말

임진왜란 발발 이후 격렬한 전투가 전개된 1년이 지나고 1593년 4월 일본 군의 남해안 철수부터 1597년 7월 정유재란의 발발까지는 1593년 7월 진주 성 전투를 제외하면 대대적인 무력충돌이 없었다.1)

최근 학계에서는 교섭이 전쟁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 속에서2) 조선의 대 명 외교가 명일 교섭에 어떻게 작용됐는가를 면밀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 루어지고 있다.3)

1) 김문자, 「임진왜란기 일명 교섭의 파탄에 대한 一考察-사명당(松雲大師)ㆍ加籐淸正 간의 회 담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제28권 3호, 2005, 225쪽.

2) “임진왜란에 대해 보다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전쟁 초반과 후반의 전투 기간 이외에 약 5년간에 걸친 다양한 채널의 외교 교섭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가 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노영구, 「제8장 임진왜란 외교사」, 한국의 대외관 계와 외교사 조선편, 동북아역사재단, 2018, 316쪽.

3)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한명기, 「임진왜란기 明ㆍ日의 협상에 관한 연구-명의 강화 집착과 조선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98집, 2002; 김문자, 「임진 왜란기 일명 교섭의 파탄에 대한 一考察-사명당(松雲大師)ㆍ加籐淸正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 -」, 정신문화연구 제28권 3호, 2005; 김문자, 「임진왜란기의 교섭과 加籐淸正」, 한일관계사 연구 42집, 2012; 김경태, 「임진전쟁 초기의 군량 문제와 교섭 논의」, 역사와 담론 70집, 2014; 김경태, 「임진전쟁 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 사연구 166호, 2014; 김경태, 「임진전쟁기 교섭의 결렬 원인에 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 87집, 2014; 김경태, 「임진왜란기의 교섭과 加籐淸正-조선왕자의 送還문제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42집, 2012; 조원래, 새로운 觀點의 임진왜란사 硏究, 아세아문화사, 2005; 이장희, 개정ㆍ증보 임진왜란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2007; 김문자, 임진전쟁과 도요토미 정권, 경인문화사, 2021; 김경태, 「임진전쟁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강화조건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68호, 2014; 기타지마 만지, 임진왜란에서의 두 개의 화의조건과 그 풍문, 한일 교류와 상극의 역사, 경인문화사, 2010; 김경태, 「임진전쟁기(1594년) 조선군과 일본군의 이면교섭 연구-泰長院文書 수록 兩軍 書狀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61집, 2018.

김문자는 명일 교섭의 중층적 구조에 착목하여 명군 내의 서로 다른 주체-송응창ㆍ심유경 vs. 이여송ㆍ유정-와 이들을 지원하는 명 조정 내의 서로 다른 주체-강화파 vs. 반강화파-뿐 아니라 양측 교섭에 개 입하려는 조선 조정 등 다양한 행위자들 간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추이를 통 해 명일 교섭의 내연을 보다 구조적인 시각에서 살펴보았다.4)

김경태는 조 선 조정ㆍ명 조정ㆍ명군ㆍ일본군 등 여러 전쟁 주체들의 종전 해법과 수행 방식이 1593년 3월 이후 재개된 명일 교섭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 목하고 제 주체들 간 관계에 따라 나타나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밝혀냈다.

특히, 명일 교섭이 본격적으로 재개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하인 나이 토 조안이 1593년 6월부터 조선 內地를 통과해 북경으로 들어간 이후 명 조정이 책봉사 파견을 결정한 1년 6개월 여간 전개된 조선의 대명 전략을 통해 조선 조정ㆍ명 조정ㆍ명군이라는 세 주체 간 갈등 구조를 재조명했다.5)

기존 학계의 관심이 조선 의병ㆍ조선 수군ㆍ명군ㆍ도요토미 히데요시6) 등 으로 제한됐다면 위에서 언급한 최근 연구에서는 국가 단위의 최상위 행위자 로서 조선 조정과 명 조정을 개별 주체로 설정하고 이들과 기타 국내외 행위 자들 간의 관계가 전쟁의 전개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탐구한다.

이러한 방 법론적 확장은 임진왜란 당시 삼국의 대외 관계-조명 관계ㆍ조일 관계ㆍ명 일 관계-의 상호작용성을 재조명함으로써 국제전으로서의 임진왜란의 역동 성을 보다 다면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 일련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 논문은 1593년 3월 명일 교섭이 재개된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나이토 조안이7) 심유경과 함께 조선을 경유하여 북경에 갔다가 명의 책봉사와 함께 다시 조선을 거쳐 남해안의 일본군 진영으로 복귀한 사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을 살펴보고자 한다.

4) 김문자, 「임진왜란기 일명 교섭의 파탄에 대한 一考察-사명당(松雲大師)ㆍ加籐淸正 간의 회 담을 중심으로-」, 2005.

5) 김경태, 「임진전쟁 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 166호, 2014.

6) 조원래, 새로운 觀點의 임진왜란사 硏究, 아세아문화사, 2005, 21~38쪽.

7) 원명은 나이토 타다토시(內藤忠俊)였다. 이후 고니시 조안(小西如安), 고니시 히다노카미(小西 飛驒守) 등으로도 불렸다. 조안의 부친인 마츠나가 나가요리(松永長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장 이전의 강력한 무장 가문 중 하나에 속한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의 가신으로 활약했다. 미요시 가문과 교토 인근의 나이토 가문 간 협력 관계를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나이토 무네카츠(內藤宗勝)로 개명하고 나이토 가문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한편, 16세에 천주교로 개종한 조안은 아시카가 요시야키(足利義昭)의 수하로 들어갔다가 1580년대 말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이 됐고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임진왜 란에 참전했다.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 教文館, 1988. 전후 일본으로 돌아간 뒤 도쿠가와 막부의 천주교 탄압으로 1614년 필리핀으로 추방돼 약 12년간 머무르다 사망했다. Gregorio F. Zaide, Philippine Political and Cultural History, Philippin Education Co., 1957, p.300; Cristina Castel-Branco, Guida Carvalho, Luis Frois : First Western Account of Japan’s Gardens, Cities, and Landscapes, Springer, 2020, p.51.

우선, 상기 사안은 명일 외교와 관련 해서 일본 사신이나 사자가 조선을 통과해 북경으로 갔다가 조선을 다시 경 유해 되돌아 온 적이 전무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조선 조정은 명 조 정과 긴밀히 교류하면서 기타 국가들과는 대단히 제한적인 방식의 외교를 추 구했다.

조명 외교와 명일 외교는 별개로 가동됐고 따라서 조선 조정으로서는 제 3국의 외교 사절이 명과의 외교를 위해 조선을 거쳐 가는 외교 사절의 경로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1593년 4월 한성에서 철수한 이후 남해안가에서 십 수 개의 군 사기지를 건설하며 조선 수군의 견제를 받지 않는 경상도 해역을 통해 군량 과 병력을 한성 퇴각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지원받을 수 있는 환경 을 조성했다.8)

한성에서 수백 여 킬로미터 떨어진 조선의 남부 지방에 배치 된 명군과 비교해 볼 때 훨씬 효율적으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지속적으로 군수 공급을 확보한 것이다.

심지어 명군이 한강 이남에서 내려와 경상도 지 역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다.9)

8) 이정일,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대일 전략(對日 戰略)-1593년 일본군의 한성 퇴각을 중심으로 -」, 71~73쪽.

9) 조선이 명에 ‘화의를 가장하여 방비를 늦추고 이면에서 흉역을 꾸미는(其假和緩備, 而隂逞兇 逆)’ 일본군의 이중적인 작태와 잔혹성을 고발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진주성 전투를 예로 들었 다.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191쪽), 緊急倭情咨. 본 논문 속 사료의 연월일은 모두 음력임 을 밝혀둔다.

따라서 아무리 일본이 종전의 명분으로 명과 교섭을 진행할지라도 여전히 완전 철수를 미루며 대규모 공세를 취한 일본군의 움직임에 대해 긴장할 수밖에 없었 다.

이들이 파견한 조안의 자국 경유와 또 다른 방식의 군사적 도발과의 연 관은 합리적 의심으로서 충분했다.

반면에, 명 조정은 이미 1593년 하반기 주력 부대를 본국으로 철수시킨 직후부터 히데요시를 일본왕으로 책봉하되 군사 대응, 특히 자국의 동부해안 방어를 철저히 한다는10) 투 트랙의 원칙을 공공연히 천명했다.

외교적으로 교섭 타결을 위해서 일본과의 공조에 더 많은 노력을 쏟아 붓는 한편 군사적 으로 혹시 모를 재침에 대비하되 조선과 제한적인 공조를 추구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11)

특히, 명 조정이 교섭의 성사를 위해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본 사절의 조선 통과에 합의해 조안의 북경행을 승인한 사실 은 협상에서 배제된 조선의 외교적 위축을 그대로 반영했다.

조선 조정은 전 쟁이 명일 교섭을 통해서 종식된다고 하더라도 조안의 사례를 전거로 해서 전후 명일 관계에 자국이 끊임없이 연루될 위험성을 우려했다.12)

명의 대일 외교 노선에 있어서 이 같은 변화가 비록 전쟁이라는 상황 논리로 설명될 수 있었지만 기존의 긴밀한 조명 외교 관계에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은 1593년 평양성 탈환 이후로 일관되게 적을 계속 공격해 한 걸음도 디딜 틈 없이 몰아내거나13) 이런 방식의 군사적 물리력을 동원한 뒤 에 외교적 수단을 통해 물러갈 수 있도록 해야 온전하게 승리할 수 있다는 종전 해법을 제시했다.

10)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370쪽), 都司恭報倭情咨.

11) 명 조정은 필요 시 본토에서의 추가 파병에는 시간이 소요될 것이니 당분간 자체적으로 방어하 도록 하라는 우회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宣祖實錄 卷45, 선조 26年 閏11月 12日 壬辰. 때로는 조선을 언제까지나 지켜줄 수는 없으니 조선 스스로 자구책을 먼저 세워야 한다는 식의 직설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368~370쪽), 都司恭報倭情咨.

12) 실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 일본은 이미 명을 침공할 계획을 조선에 알리는 외교적 도발을 감행했 다.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내어 진상을 파악한 이후로 조선 조정은 침략 가능성에 관한 명 조정 과의 공유 여부 문제 및 명 내부에 유포된 조선과 일본의 협공설 등에 대한 해명 등 대명 관계와 대일 관계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현장을 목도하기 시작했다. 이장희, 임진왜란사 연구, 아세 아문화사, 2007, 29~35쪽; 윤경하, 「壬辰倭亂 직전 戰爭情報와 조선의 對應」, 강원사학 26, 2014, 28~34쪽.

13) 이정일, 「임진전쟁 시기 조선의 대일 전략(對日 戰略)」, 사총 104, 2021, 62~73쪽.

일본군을 대상으로 해서는 외교력을 역승-무력을 통한 승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할 때 완승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교섭이 막 다시 열린 1593년 봄철 조선 조정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일본군을 누르지 못한 상태에서의 화친 논의는 결코 명 조정이 원하는 방향으로 적을 물리쳐 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며14) 군사력을 우선순위로 하되 외교력이 장착된 전력으로 적을 압박하는 전략을 지지했다.15)

14) 이정일, 「임진전쟁 시기 조선의 대일 전략(對日 戰略)」, 67쪽.

15) 조선은 성공적인 대일 작전이란 모조리 진멸하는 것이 상책이고 그 다음 계책이 생사여탈을 완전히 명군이 손에 쥐고서 화친을 주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事大文軌 卷3(영인본 1책, 158~159쪽), 「本國請進兵剿賊」.

1593년 상반기 이후 재개된 명 일 교섭에서도 조선 조정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재침이 자국과 육해 상으로 연접한 명의 안보에도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강 조하며 자국과의 협력 강화를 역설했다.

필자는 조안이 한성과 평양을 거쳐 북경에 갔다가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복귀하는 기간 동안 조선의 대명 외교와 명일 교섭이 어떻게 연관됐는가를 자국중심주의 안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2 장에서는 조안이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조선 조정의 대응을 살펴보도록 한 다.

전쟁 발발 직후 일본과의 교섭 시도에서 체험한 절대 불신을 토대로 조 안의 조선 경유를 반대하고 일본군의 저의가 기만술에 불과함을 적극적으로 명군에 알리고자 한 조선의 시도를 되짚어 본다.

3장에서는 명의 책봉사절과 함께 자국으로 돌아온 조안에 대한 조선의 대응을 알아본다. 조선 조정이 조 안의 한성 출입을 금지하고 그의 정탐 활동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매진하는 등 조안의 자국 경유 문제를 계속 일본군의 기만술에 결부해 다루면서 책봉 사 도해의 전제 조건인 일본군 완전 철수의 지체를 폭로한 사실이 교섭의 전개에 끼친 영향을 재조명해 본다.

2장과 3장을 통해서 우리는 조선 조정이 조안의 자국 경유에 대해 민감하 게 반응한 이유가 일본군을 외교 전선에서 제압해 물리칠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에서 연유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안 사태를 겪으며 명 이 대일 외교의 호전을 이유로 자국과의 군사 협력을 간과할 때 명의 군사 안보가 일본군의 공격 위협에 더욱 노출될 것이라는 논리를 개발한 점도 간 과할 수 없다.

이러한 연구 지향은 조명 관계에 일본이 개입될 때 조선의 자국중심주의의 안보 전략과 명의 자국중심주의 안보 전략이 무엇이었고 양 자가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켰는가를 보다 심도 깊게 파고드는 데 중요한 단 서를 제공할 것이다.

덧붙여, 조안이 조선을 경유해 압록강을 건넌 1593년 하반기부터 책봉사절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와 남해안의 일본군 진영으로 돌 아간 1595년 하반기까지의 한정된 시기를 다루지만 해당 사료에 치중하기 보다는 본 주제를 계기성에 따라 當代的 문맥을 한 걸음 더 들어가 들여다보 는 방식으로 사료를 활용했다.

이러한 접근은 임진왜란 시기 조명 관계의 저 류에 흐르는 상호작용성을 조선의 관점에서 조람하고 전쟁이 갖는 다면성을 재해석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Ⅱ. 나이토 조안의 북경행과 새로운 국제적 현상

1. 나이토 조안의 북상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북진한 일본군 전체가 한성으로 퇴각해 집결한 1593 년 2월 현재 조선은 명군과의 협력을 통해 무력으로 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명군의 생각은 달랐다.

군량과 마초 운송 문제를 포함해서 군수 보 급이 전반적으로 한계치에 다다른 명군은 무력을 통한 한성 수복 뿐 아니라 한강 이남으로의 진격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인식했다.16)

16) 김경태, 「임진전쟁 초기의 군량 문제와 교섭 논의」, 역사와 담론 70집, 2014, 40~46쪽.

지나치게 확대된 전선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군량과 병력에 있어 절대 부족을 겪으며 조선 내지에서 고립될 위험성에 직면한 일본군과 거의 똑같은 문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명군과 일본군은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협상을 현 실적인 자구책으로 생각하게 됐고 양군의 이해가 합치되면서 전쟁은 대치 국 면에서 교섭 국면으로 바뀐다.

일본군은 1593년 4월 전군이 남해안으로 퇴 각하면서 철수를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하는 듯 한 제스처를 취했고 5월말 유키나가가 명군 사절 사용재와 서일관을 이끌고 나고야로 건너가 히데요시 를 만났다.17)

그리고 약 한 달 뒤인 6월 말 유키나가의 부하 나이토 조안이 심유경과 함께 강화 사절의 자격으로 부산을 출발해 북경으로 향했다. 양군이 협상을 재개하며 극적인 종전 타결 가능성의 분위기를 연출하자 무력을 통한 완전 진멸을 주창한 조선의 대일 전략은 그 입지가 좁아졌다.

4월 명군은 한성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에 대한 조선군의 추격을 방해하고 일 본군의 사살을 금지했다.18)

그런데 일본군은 조안이 부산에서 상경하기 시 작한 다음날인 6월 21일부터 약 10여일에 걸쳐 9만 여명의 대규모 병력으로 진주성을 또 다시 공격해 약 6만에 달하는 조선 군민이 살상했다.

조선군으 로서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전선만 남부 지방으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6월 이덕형은 심유경이 조안을 대동하고 조선 땅 을 경유해 북경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조정에 보고했다.19)

이덕형은 조안의 왕래 과정에서 피폐한 조선의 상황 뿐 아니라 해이하고 나태한 명군 의 실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므로 일본이 조선을 더욱 압박할 수 있음을 걱정 했다.

윤근수는 심사현과 호택을 통해서 조안이 심유경과 함께 6월 20일 부산을 출발해 올라갔고 7월 초순 한성에 도착했음을 선조에게 보고했다.20)

이 시기 의주에서 남하해 대동강 북편에 머무르던 선조와 조선 조정은21) 근기 지역으로 내려가지도 못한 채 조안의 상경 소식을 접한 것이다.

17) 히데요시는 7개의 강화 조건을 내걸었지만 심유경과 유키나가는 그의 강화 의사만 명 조정에 전달했다. 김경태, 「임진전쟁기 교섭의 결렬 원인에 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 87집, 2014, 325쪽.

18) 이정일,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대일 전략(對日 戰略)」, 51~53쪽.

19) 이덕형, 漢陰文稿 附錄 권1 年譜 上 漢陰先生年譜.

20) 宣祖實錄 卷40, 선조 26年 7月 10日 壬戌.

21) 6월에 평원에 도착했다. 宣祖實錄 권39, 선조 26年 6月 1日 甲申. 7월과 8월에는 남쪽으로 더 내려가 강서에 머물렀다. 宣祖實錄 卷40, 선조 26年 7月 1日 癸丑.

조안이 한성에 도착한 이후 10일 뒤인 7월 18일에 윤근수는 조안이 한성에서 이여송을 만 난 일을 조정에 전했다.22)

윤근수의 이번 보고에서 주목할 점은 이여송이 조안에게 광동이나 광서를 통하지 않고 굳이 조선을 통과하려는 점을 지적하 고 재침의 저의로 의심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일본 군을 진멸하지 않고 살려 주었는데 일본군은 왜 전라도를 침략하고자 하는가 를 질책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진주성 함락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본이 기존의 명 남부 해로를 택하지 않고 조선과 요동을 경유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남해안으로의 철군 이후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는 가에 대한 이여송의 문제 제기는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조안 사태를 심각 하게 생각하는 조선의 입장과 묘한 합일점을 보였다.

대조적으로 송응창은 일본군이 7월말까지 본국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하 면서 일본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고 향후 조치를 취할 것을 병부에 전함 으로써23) 일본군과의 교섭을 통한 종전에 힘을 실었다.

현재 조선에 잔류한 명군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방수하고 있어 일본군이 재침의 기회를 찾지 못해 부득이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낙관하면서 마치 종전의 마지막 단계에 이 른 것처럼 조선의 전황을 기술했다.

여기서 우리는 송응창이 일본군의 철수 를 언급된 때가 7월이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이 7월 초순부터 조안을 한성으로 진입시키며 교섭의 진전에 속도를 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조안은 8월말까지 약 두 달간 한성에 머물렀다. 그런데, 8월 초순 조선은 이여송이 조안과 함께 동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24)

앞서 기술한 바 와 같이 이여송이 불과 한 달 여전만 해도 조선을 지나 북경으로 가는 조안 에 대해 그 저의를 의심하는 발언을 했기에 조정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비변사는 이여송이 조안을 대동하려는 의사를 이덕형에게 비쳤음을 개탄해 하며 하나의 대책으로 송응창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을 건의했다.25)

22) 宣祖實錄 권40, 선조 26年 7月 18日 庚午.

23) 宣祖實錄 권39, 선조 26年 6月 29日 壬子.

24)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2日 癸巳.

조정은 송응창에게 일본군이 조선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조선의 방비가 느슨해지기만을 기다리며 남해안에 웅거하고 있음을 거론하며 일본 군 소탕을 요청하는 자문을 보내26) 우회적으로 조안의 평양행 소식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8월 30일 최흥원도 심유경이 조안을 대동하고 한성 을 출발해 평양으로 향하는 소식을 보고하면서27) 명군에 의한 엄격한 통제 가 이루어지지 않아 한성의 조안 일행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재물을 약탈하 는 만행까지 저질렀음을 알렸다.28)

한성에서 북상한 조안은 9월 6일 평양에 도착했다.29)

9월 3일 비변사는 평양으로 곧 들어올 조안 일행에 식량을 공급해야 할지에 대한 경기도순찰사 이정형의 문의에 대해서30) 비록 명군과 마찰이 생길 소지가 있다고 하더라 도 일체 불가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조선 조정은 자국을 유린했을 뿐 만 아니라 철수 이후로도 적대적인 행위를 보인 적군의 사신에게 스스로 물품을 제공하는 행위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9월 12일 평안도관찰사 이원 익이 조안의 도착을 조정에 보고할 때31) 식량 등을 공급해야 할지에 대해 문의하면서 ‘불구대천의 원수가 우리 땅을 경유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울 분을 함께 전달한 데서도 조정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25) 宣祖實錄 卷41, 선조 26년 8月 12日 癸巳.

26)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2日 癸巳.

27)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30日 辛亥.

28)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30日 辛亥.

29) 宣祖實錄 卷42, 선조 26年 9月 12日 癸亥.

30) 宣祖實錄 卷42, 선조 26年 9月 3日 甲寅. 이정형의 치계는 8월 29일에 조정에 올라왔다.

31) 宣祖實錄 卷42, 선조 26年 9月 12日 癸亥.

흥미롭게도 9월 초순 조안이 평양에 들어간 이후 그의 행방에 관한 조선 측 기록이 거의 없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정황은 송응창ㆍ이여송의 귀 국과 조안의 평양행이 일정 상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조안이 평양으 로 북상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때가 송응창과 이여송을 포함한 명군 주력이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한 8월이었다.

그런데, 8월 10일 한성에 서 출발한32) 이여송은 8월 14일 황주에서 선조를 만난 뒤33) 요동으로 향했 고 송응창도 같은 날인 8월 14일에 정주를 떠나 요동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 며34) 송응창과 이여송 모두 9월 23일에 압록강을 건넜다.35)

32)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2日 癸巳.

33)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4日 乙未.

34)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2日 癸巳.

35) 宣祖實錄 卷42, 선조 26年 9月 24日 乙亥. 국조보감에도 송응창과 이여송이 9월에 압록강을 건너 귀국한 것으로 나온다. 國朝寶鑑, 卷31 宣祖朝 癸巳 26年.

 

비록 8월 14일 현재 이여송은 평양 남쪽에 그리고 송응창은 평양 북쪽에 있었지만 그 이후 로 양자 모두 약 40일 동안 조선에 머물렀다.

조안이 평양에 들어간 9월 6일 부터 송응창과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너는 9월 23일까지 약 17일 동안 서로 마주칠 가능성은 없었을까?

지형ㆍ지리를 면밀히 고려해야 하겠지만, 조안이 한성에서 평양까지 약 260 킬로미터를 가는데 약 일주일 걸렸음을 감안할 때 평양에서 의주까지의 약 200 킬로미터 거리도 일주일 정도의 시간에 도달 할 수 있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우리는 조안이 평양으로 진입한 이후로 조선 조정 이 그의 북경행을 기정사실화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으로서는 여전히 자국 땅에서 철수하지 않는 적군의 영수 중 한 명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하가 자국 내지를 무사히 통과해 북경으로 가는 것을 군사 안보의 측면에서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개 국 이래 조선은 명을 제외한 이웃국가들과 대단히 제한적으로 통교했기에36) 일본 사신이 조선 땅을 통과해서 북경으로 간 경우는 전무했다.

36) 1523년 발생한 영파의 난에 대한 조선의 대응은 명과의 우호관계와 중립외교 간 균형 잡기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구도영, 「제7장 조선의 대명외교」, 한국의 대외관 계와 외교사 조선편, 동북아역사재단, 2018, 301~307쪽.

어떤 명분으 로라도 일본 사신이 자국 내지를 경유해 북경으로 갈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있을 수 없었기에 조안의 자국 경유 북경행은 기존 외교 관례의 파행으로 간주됐다.

2. 조선의 반대

조선 조정은 나이토 조안이 한성으로 들어오기 사흘 전인 7월 5일 경략ㆍ 총독ㆍ찬획에게 보낸 자문에서 그의 조선 통과 뿐 아니라 북경행 자체에 대 한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37)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의 심각 성을 알렸다.

근본적으로, 일본에 대한 절대 불신이다.

국토를 유린하고 수 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도 모자라 선대의 왕묘까지 파헤쳐38) 그야말로 조선 전체를 욕보인 일본군이었다.

화친을 명목으로 대화에 나섰을 때에도 명을 정벌하는 길을 빌려달라거나 함께 명을 정벌하자며 고압적인 분위기로 겁박 했다.39)

37) 宣祖實錄 권40, 선조 26年 7月 5日 丁巳; 신흠, 象村集 卷38 應製錄 咨奏 咨宋經略.

38) 성종의 능묘인 宣陵과 중종의 능묘인 靖陵이다. 이장희, 개정ㆍ증보 임진왜란사 연구, 아세아 문화사, 2007, 68~69쪽.

39) 1592년 4월 전쟁 발발 직후 상주에 도착한 일본군은 조선에 화친을 청했지만 조정에서 보낸 이덕형이 용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조령으로 이동했다. 宣祖實錄 卷26, 선조 25年 4月 17日 丙午. 평양을 공격하기 직전에 화친을 다시 요청해 조선에서는 이덕형을 보냈다. 宣祖實錄 卷27, 선조 25年 6月 9日 丁酉. 이때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와 겐소(玄蘇)가 나왔는데 화친이나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덕형이 명을 공격하려면 절강 등으로 진격했으면 될 터인데 어째서 조선으로 건너 왔는가라고 반문하며 정명가도의 요구를 결코 들어줄 수 없음을 역설하자 일본군은 곧바로 강화 불가를 통고했다. 宣祖實錄 卷27, 선조 25年 6月 9日 丁酉.

조선에게 일본군의 화친이란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강요하거나 상대방을 압박하는 기만술일 뿐이었 다.

불과 1년 전 명 정벌을 위해 조선을 대상으로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한 것을 화친이라고 포장한 일본이 이제 명을 대상으로 또 다시 화친을 명분으 로 자국의 길을 빌려 북경으로 나간다고 하니 결코 신뢰할 수 없었다.

절대 불신은 조선 조정의 반화친론에 있어 중핵을 차지했다.

둘째로, 절대 불신의 근저에는 변화무쌍한 양면성이 존재했다.

조선은 명 일 교섭이 재개되기 직전인 1593년 2월과 재개되기 시작한 3월에도 일본군 과의 교섭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양면성 때문임을 밝혔다.

윤두수는 앞에서 화친을 얘기하고 뒤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의 양면성을 절대 불신의 근거로 집었다.40)

1592년 침략 직후 상주까지 진격한 일본군이 화친을 요청했 지만 바로 그 다음날 조령을 넘었고 임진강에서 다시 화친을 요청했지만 바 로 그 다음날 개성으로 진격했고 중화에서 화친을 요청했지만 그 다음날 다 시 평양으로 진격했다.41)

그런데, 자문에서 조선 조정은 양면적 기만술의 대상을 조선으로만 국한 하지 않았다.

명과 협상하면서 조선을 공격하는 이중성만이 일본군의 양면성 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강약의 이중 성을 드러내는 것이 원래 일본군의 습성인지라 명군에 대해서도 언제든지 강 온의 양면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조안이 조선을 지나가면서 조선군의 강약, 군량의 결핍, 직통로와 우회로, 지형의 난이는 말 할 것도 없고 조선에 머무는 명군의 허실도 탐지할 것에 대해 근심했다.42)

자문에 따르면, 순안 이서는 명으로 가는 대문과도 같은 지역으로 적이 점 령하지 못했는데 조안 일행이 지나가면서 분명히 지리ㆍ지형을 염탐할 것을 걱정했다.

즉, 평양 이북을 단순히 자국의 북부 지역으로 한정하지 않고 명 의 국경 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 습득이 가능한 근접 지역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자국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명의 안보 간 상관성을 부각시킨 것이 다.43)

40)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175~176쪽), 請絶和事速行征進呈文.

41)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272~273쪽), 回咨.

42) 宣祖實錄 卷40, 선조 26年 7月 5日 丁巳; 신흠, 象村集 卷38 應製錄 咨奏 咨宋經略.

43) 한성과 비교할 때 육해 상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 가까웠기에 평양은 1593년 상반기 이래 명 군의 최대 거점이었다. 명군은 일본군의 육상 공격에 대해서 평양에 자체 방어선을 쳐야 압록 강 건너 요동과 북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원래, 새로운 觀點의 임진왜란사 硏究, 303쪽. 일례로, 邢玠는 1597년 3월에 올린 주문에서 한성이 무너지면 평양을 지켜야 하고 평양마저 무너질 경우 조선이 완전히 함몰돼 명군은 요동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힘든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했다. 事大文軌 卷19(영인본 2책, 406쪽), 兵部直陳防禦以 保屬國.

이와 같이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교섭 재개를 대명ㆍ대조선 군사 전술 의 일부로 간주하고 조안의 조선 경유를 주둔 명군의 전력 노출 뿐 아니라 명 본토의 안전과도 연관될 수 있음을 명군에 상기시켰다.

마지막으로, 조선은 조안의 자국 경유 북경행이 명의 대일 외교 정책과도어긋남을 짚었다.

전쟁 이전에는 표문의 구비 여부를 떠나 일본과의 모든 물 적 그리고 인적 교류를 영파에서만 수행하도록 허락했고 조공의 시기와 항로 에 대해서도 규제를 따르지 않으면 일체 노략질하는 도적으로 간주해 엄정 대처했기 때문이다. 왜 명이 최소한의 접촉만 유지하는 ‘거리두기’ 노선44)을 준수하다가 지금의 대일 교섭에서는 일본의 청을 그대로 들어주는 파격을 보 이는가?

이 같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선은 명군의 대일 교섭이 비정상적임 을 적시했다.

일본과의 공식 창구가 기존의 영파일 것이라는 생각은 조선에서 유포하지 않았다.

1593년 2월 중순 이후 전쟁이 교착 상태로 접어들면서 교섭이 다시 진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 이미 영파를 통한 일본과의 교류 가능성 이 명군 수뇌부의 입에서 나왔다.

이여송은 평양으로 철수하고 교섭이 다시 진행되면 일본이 영파를 통해 교류할 것이라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45)

송응창의 영파 발언은 무게감이 더 실렸다.

명일 간 교섭 재개의 조짐이 포착되자 여러 루트를 통해 명군 지휘부에 반대 의사를 전달한 선조는 1593년 3월 송응창을 만나고 온 홍진으로부터 보고를 받는 다.

여기에는 송응창이 관리를 파견해서 일본군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히 데요시로부터 항서를 받아 오게 할 것이며 그 대가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 으로 책봉하고 영파를 통해 입공을 허락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46)

44) 구도영, 「16세기 조선의 ‘영파의 난’ 관련자 표류인 송환: 朝ㆍ明ㆍ日의 ‘세 가지 시선’」, 역사학 보 224집, 2021, 200~201쪽.

45) 宣祖實錄 卷36, 선조 26年 3月 8日 癸亥. 약 10여일이 지난 뒤에도 이여송은 조선에서 자신의 탄핵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고자 함에 감사를 표하면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영파의 옛길 로 명에 진공하면 조선이 당분간 재침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宣祖實錄 卷36, 선조 26年 3月 20日 乙亥.

46) 宣祖實錄 卷37, 선조 26年 4月 1日 乙酉. “송응창이 추구하던 강화란 일본군이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를 송환하고 조선에서 물러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죄를 한다면 일본을 대신하여 명 조정에 요청하여 책봉과 조공 허락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며, 조공은 조선을 거치지 않고 寧波로 들어오는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김경태, 「임진전쟁 교섭 전반기 (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65쪽.

송응창의 발언을 통해서 우리는 명일 교섭에서 봉공이 협상의 주요 의제가 될 것이고 기존과 같이 영파가 조공길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송응창이 발설한 영파를 통한 명일 교류의 재개는 히데요시의 항서가 북경에 전달되고 양국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든 이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상기 항서를 가진 일본 사절이 어디로 북 경에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데 송응창이 일부러 누락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기존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명일 간 공식 교류에 있어 조선을 경유한 사례가 전무했고 협상이 재개될 당시까 지만 해도 표면적으로 명군 지휘부조차 영파를 통한 명일 교류의 재개를 당 연시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국 경유 소식은 조선 조정을 발 칵 뒤집어놓았고 앞서 서술한 이덕형의 경우에서와 같이 조안의 한성 진입이 조선에 있어 대단히 불리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냈다.

한편, 8월에 들어 전방에는 다시 군사적 위기감이 고조됐다. 일본군의 경 주 침입설이 나돌기 시작한 때가 바로 8월 초순이었다.

선조가 언급했듯 이,47) 경주는 일본군이 부산에서 한성을 목표로 북상할 때 서쪽 방면의 진주 와 함께 동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침입설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 아 진주성 함락을 경험한 조선으로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선조는 새롭 게 나도는 경주 침입설을 진주성 공격 이전 침입설의 유포와 연결 지으면서 대비책 마련을 비변사에 명령했다.48)

비변사 역시 先聲 이후 공격하는 일본 군의 습성이 진주성 함락 이전부터 늘 그랬음을 상기하며 경상우도 고령에 주둔한 명 총병 유정에게 미리 알려 함께 대비할 것을 요청했다.49)

47)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0日 辛卯.

48)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9日 庚寅. 진주성 함락을 통한 전라도 공격로의 확보는 1593 년 4월 남해안으로의 철수 이전에 이미 히데요시가 지시한 전선의 재정비 구상 속에 포함된 사안이었다. 김경태, 「임진전쟁기 교섭 연구」, 81~86쪽.

49)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0日 辛卯.

경상좌도 순찰사 한효순이 최전방의 정보를 통해 일본군이 울산과 경주를 공격할 조짐 을 보이고 있다고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알렸고 유성룡은 명군 장수 유정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권율로 하여금 경상좌도로 들어와 군사를 지휘하 도록 했다.50)

조선에서 볼 때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퇴각한 이후 본국으로 완전히 철수 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주성 공격 등 군사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공격 설이 나돌다가 조안이 부산을 출발한 다음날 진주성을 공격했다.

8월 들어 경주 공격에 대한 정황이 새롭게 포착되고 공격설이 나오자 조선으로서는 조 안이 한성을 출발하는 시점에 일본군이 경주를 공격하지 않을까 긴장할 수밖 에 없었다.51)

명군에게 있어 북경을 가는 조안은 전쟁 종식의 사자로 인식됐 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불구대천의 원수가 다시 한강을 건너갔다’는 최흥원 의 표현에서처럼52) 진주성 함락의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은 조선에게 있어 조안은 재침의 화신일 수 있었다.

1593년 교섭 재개 이후 송응창이 조선 조정과 명 조정의 교신을 가로막고 있었기에53) 조선 조정은 8월말까지 조안의 북경행 및 자국 경유가 명 조정 의 결정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9월 초순 조안이 명군의 별다른 제재 없이 평양으로 진입하자 비변사는 명 조정이 조 안의 조선 경유를 인정한 것으로 예측하면서 철회 요구를 계속 할 경우 오히 려 명 조정과 명군 모두를 자극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내다 보았다.54)

50)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13日 甲午. 일본군의 경주 공격설은 1593년 후반기까지도 계속됐다.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290~291쪽), 回咨. 마침내 11월 초순 일본군이 경주 인근의 안강현에서 명군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宣祖實錄 卷44, 선조 26年 11月 12日 壬戌; 宣祖實錄 卷44, 선조 26年 11月 19日 己巳.

51) 1594년 정월 심유경이 웅천에서 히데요시의 항표를 갖고 한성으로 향발하자 조선은 1593년 6월 심유경이 조안과 함께 부산에서 북상한 직후 일본군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한 일을 명 측에 상기시켰다.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191~192쪽), 緊急倭情咨.

52) 宣祖實錄 卷41, 선조 26年 8月 30日 辛亥. 53) 김경태, 「임진전쟁 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70쪽. 조선은 1593년에 2월, 3월, 5월, 7월, 9월, 11월, 12월 총 7차례에 걸쳐 북경으로 사신을 파견해 일본군 의 도발과 남해안 군사 기지화 등 끝나지 않은 전시 상황에 대해서 명 조정에 알리고자 시도했 다. 11월까지 모두 실패했으나 윤11월 사헌의 방문에 대한 사은의 명분으로 12월에 파견된 정사 김수와 부사 최립에 의해서 진주성 함락 및 일본군의 남해안 군사 기지화 등 1593년 하반기 전방의 최신 정보가 명 조정에 전해질 수 있었다. 상동, 91~94쪽.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도 밟지 못한 평양 이북 땅을 거쳐 압록강으로 나가면서 다양한 군사ㆍ지리 정보를 채집할 조안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 다.

선조는 평양을 포함해서 관서 지역의 지형ㆍ지리ㆍ군사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 노출이 국가의 존망과 직결되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슈화할 필요성을 역설했다.55)

비변사는 大明會典 속에 명태조가 일본과의 교류를 일체 중 단하고 무력으로 대응한 「祖訓」의 사례가 있음을 근거로 조안의 자국 통과 를 반대하는 자문을 예부로 보낼 것을 구상했다.56)

54) 宣祖實錄 卷42, 선조 26年 9月 1日 壬子.

55) 상동.

56) 宣祖實錄 卷42, 선조 26年 9月 9日 庚申.

여기서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조안이 평양을 지나 요동으로 가는 길이 서서히 가까워지자 조안을 견 제하는 대책상의를 위해서 병부만이 아닌 예부와도 접촉할 기회를 만드는 방안을 모색했다는 사실이다.

조안의 북경행과 관련한 명의 병부와의 갈등은 군사적으로 결코 조선에 유리한 카드가 될 수 없었다.

동시에, 조안의 자국 경유가 명일 교섭의 한 결과물로 외교 사안에 해당됐기 때문이라도 예부와 활발하게 접촉할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종합하면, 조선은 1593년 3월 교섭이 재개될 때 일본군에 대한 절대 불신 에 의거해서 화친=기만책이라는 공식을 명군에게 제기했고 조안의 자국 경 유를 반대할 때도 활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남해안에서 철 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성책을 쌓고 병력을 증강하며 진주성 공격과 같이 육상 에서 도발을 벌이는 일본군의 높은 재침 가능성과 이에 대한 양국 간 군사 협력의 강화를 핵심 과제로 강조했다.

1593년 9월 조안의 평양 진입 이후 조선 조정은 그의 자국 경유를 더 이상 반대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좀 더 포괄적으로 일본과의 교섭에 있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군사 안보 와 관련한 사안들을 명과 공유하며 조안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있었 다.

조명 간 지리적 상접을 조선의 군사 안보와 명의 군사 안보 간 불가분성 으로 환치시킨 공생의 담론 역시 이러한 시도와 궤를 같이 했다.

비록 종전이라는 대의를 위한 한시적이고 조건적인 행보였다고 하더라도 명이 戰前과 비교해 우호적인 자세로 대일 관계를 재설정하고 여기에 조선을 개입시키고자 한 것은 분명 새로운 국제적 현상의 전개였다.

조안의 자국 통과 문제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은 외교 환경의 변화 속에서 조선이 어떻게 자국의 생존을 위해 대처해 나갔는가를 보여준 척도였다.

Ⅲ. 나아토 조안의 복귀와 조선 외교의 대응력

1. 1594년 12월 나이토 조안의 북경 진입

송응창과 이여송이 귀국하고 나이토 조안도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입할 무렵, 조선 조정은 1593년 윤11월 칙사 사헌의 방문에 대한 답례를 명목 으로 사은사 김수와 최립을 12월에 파견해 조안 사태를 명 조정에 직접 거론 하기 시작한다.

김수와 최립은 2월 북경에 도착한 뒤 명 조정의 대소 신하들 과 접촉하며 1593년 하반기 최전방의 실상, 심유경의 농간, 히데요시의 7개 요구 사항 등과 더불어 조안의 조선 및 요동 경유가 명의 국방, 특히 遼左 방어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을 공유했다.57)

57) 이정일, 「임진왜란 전반기 조선의 對명 전략」, 역사와 실학 66집, 2018, 309~318쪽.

전쟁의 승패, 더 구체적으로 명의 군사 안보에 미칠 해악을 역설하는 데 주안점을 둠으로써 조명 간 군사 협력 재강화라는 차원에서 조안 사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 보면, 같은 시기 아직 북경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조안보다 발 빠르게 대일 교섭의 주요 쟁점을 공식화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꺼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정한 궤도에 오른 교섭의 추동력을 상쇄시키기란 녹록치 않았 다.

조안의 사례를 이어 일본 측 사자의 자국 통과 문제가 재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94년 1월 말경 12명의 일본인이 심유경을 따라 북경으로 가려는 사건이 발생했다.58)

경위는 이러하다.

약 두 달 전인 1593년 윤11월 초순 유키나가가 심유경에게 조안이 북경에 가면 명의 사신과 함께 돌아올 것에 합의했음에도 일정이 늦춰지고 있고 또 북경으로 가는 동안 20일마다 조안 과의 서신 왕래를 약속했으나 전혀 소식이 없다며 조안과의 원활한 교신을 요구했다.59)

그리고 이를 빌미로 명 측이 요구한 항표문 봉진과 대마도로의 철군을 따를 수 없다고 밝혔다.

에 심유경이 1593년 12월 말 웅천으로 다 시 내려가60) 유키나가를 만나 히데요시의 항표를 건네받았다.

이 항표는 명 군을 거쳐 조안이 명 조정에 바치기로 예정된 것이었기에 협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했다.

양측 모두 상대방에게 공유 사항을 알리 고 상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고 특히 일본군으로서는 교섭의 최전방에 있는 조안으로부터 얻는 정보와 상황 판이 히데요시가 원하는 대로 교섭을 타결시키는데 있어 중요한 근거로 작용 했을 것이다.

조선 조정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교섭의 안정적 진행을 명분으로 심유 경과 동행하려는 12명의 일본인들에 대해 명군에게 이들을 엄하게 통제하거 나 함께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고 차후 명 관리들의 왕래에 일본인 대동을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61)

그러나 12명의 경유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지 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교섭과 관련해서 명 측 관리들이 조안을 수행 한 일본인을 포함하여 일본인과 함께 오가는 사례를 실록을 통해 심심치 않 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응창에 이어 전쟁의 총책을 맡은 고양겸의 경우도 그가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은 1594년 3월 중순 측근으로 하여금 조안의 수하 2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가도록 했고62) 또 다시 정탐병 3명을 차출해 남해안 일본군 진영에 가서 완전 철수를 개유할 때도 소서비와 동행한 부하 2명이 함께 따르도록 했다.63)

58)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258~263쪽), 本國請勿許參將沈帶同倭使入內地.

59) 宣祖實錄 卷45, 선조 26年 閏11月 4日 甲申.

60) 한효순의 치계에 의하면 1593년 12월 25일 밀양에 도착한 심유경은 사흘 뒤인 12월 28일에 웅천에 있는 유키나가 진영으로 들어갔다.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267~268쪽), 回咨.

61) 事大文軌 卷8(영인본 1책, 258~263쪽), 本國請勿許參將沈帶同倭使入內地.

62) 宣祖實錄 卷49, 선조 27년 3월 16일 甲午.

63) 宣祖實錄 卷53, 선조 27년 7월 14일 庚寅.

고양겸 후임인 손광 역시 그의 두 차관을 조선에 보내 일본군 진영 으로 가는 명 측 인사들에 대한 호위에 철저히 할 것을 요청했을 때도 소서 비의 수하 2명이 동행했다.64)

또한, 고양겸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전원 철 수를 요구하는 문서를 보낼 때 명의 정탐병과 함께 조안의 수하 2명이 함께 일본군 진영에 들어갔다.65)

책봉이 확정되고 나서 명 측 사자 3명이 일본군 진영으로 내려가 책봉 결정과 함께 전원 철수를 지시할 때도 조안의 수하 3명이 동행했다.66)

더욱이, 병부상서 석성과 수뇌부를 포함하는 명 조정은 대일 강경 노선 보 다는 오히려 그 반대 입장을 굳히고자 했다.

고양겸도 임기 초반인 1594년 상반기부터 교섭을 완결하고자 조선 조정에 봉공 요청 주본을 올릴 것을 줄 기차게 요구했다.67)

그리고 봉공을 통한 교섭 성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고양 겸의 의사는 조선에 주둔한 명군에게도 이미 전달된 듯하다.

일본군이 완전 히 철수하면 명 조정이 봉공을 허락할 것이라는 총병 유정의 발언에서와 같 이68) 주둔 명군도 봉공을 대세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주청사 허욱이 봉공 주문을 갖고 북경으로 떠난 8월이었다.

흥미 롭게도 봉공 가능성이 높음을 언급한 유정도 8월에 한성으로 올라와 철병 의사를 밝혔다.69)

이항복에 의하면 고양겸이 유정을 본토 방어에 투입하고자 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70)

64) 宣祖實錄 卷56, 선조 27년 10월 13일 丁巳.

65) 宣祖實錄 卷57, 선조 27년 11월 10일 甲申.

66) 宣祖實錄 卷58, 선조 27년 12월 6일 己酉.

67) 김경태, 「임진전쟁 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79~80쪽.

68) 宣祖實錄 卷54, 선조 27년 8월 16일 辛酉.

69)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당시 호남에 주둔한 유정이 7월28일 상경했다. 宣祖實錄 卷54, 선조 27년 8월 5일 庚戌. 선조는 한성에 도착한 유정을 직접 맞이했다. 宣祖實錄 卷54, 선조 27년 8월 13일 戊午. 이후 유성룡이 유정을 만나 철병의 불가함을 알리며 그의 북상을 만류했다. 宣祖實錄 卷54, 선조 27년 8월 16일 辛酉.

70) 宣祖實錄 卷54, 선조 27년 8월 10일 乙卯.

과연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1일 선조가 유정을 전별하면서71) 잔류 명군은 9월에 철수했다.

명은 조안 의 북경 진입을 허락하기 3개 여 월 전에 자국 군대의 철병을 완료한 것이다.

유정이 귀국길에 오른 9월 중순 허욱이 북경에 도착했고 주문이 전달된 이후 명 조정에서는 책봉과 조공을 모두 허락할지 책봉만 받아들일지에 대한 논의로 좁혀지다가 결국 책봉사 파견이 결정됐다.

석성은 차관을 조선 조정 에 보내어 책봉이 결정됐고 곧 조안을 북경으로 불러들일 예정임을 알렸 다.72)

얼마 지나지 않아 명 조정에서는 진운홍을 조선으로 보내 유키나가에 게 책봉 소식을 알리고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재차 통고할 계획을 알렸다.73)

비슷한 시점에 조안은 북경에 들어가서 책봉을 간청하며 책봉사가 부산에 도 착하면 일본군이 전원 철수할 것이라고 맹세했다.74)

이때 책봉을 위한 명의 조건은 총 세 가지로

1) 봉공만 허락할 뿐 조공을 허락하지 않고

2) 한 명의 일본군도 부산에 남아있지 않고 철수하며

3) 영원히 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75)

이와 같이 1594년 9월 허욱의 주문이 북경에 도착한 즈음에 잔류 명군이 조선에서 철수를 단행했다.

그리고 책봉 결정이 나자마자 조안의 북경 진입이 허락하고 조선 조정과 남해안의 일본군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명 측 사자 들이 조선에 빈번히 왕래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외교 사자가 조선을 거쳐 북 경에 들어간 전무후무한 사건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자국중심의 안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명 조정이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막대하게 투입되는 군사적 수단보다는 국가 자원의 동원이 상대적으로 적은 외교적 수 단을 비용 효율이 높은 종전 해법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은 변화하는 국제적 환경 속에서 자국 안보의 원칙을 방기하거나 명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만은 않았다.76)

71) 宣祖實錄 卷55, 선조 27년 9월 11일 丙戌.

72) 宣祖實錄 卷58, 선조 27년 12월 4일 丁未.

73) 宣祖實錄 卷58, 선조 27년 12월 19일 壬戌.

74) 神宗實錄 卷280, 만력 22년 12월 23일.

75) 宣祖修正實錄 卷28, 선조 27년 9월 1일 丙子.

76)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강화에 반대하며 조안을 제외한 일본인들을 돌려보내고 조선에서 일본군 을 완전히 철수시키는 방안을 제시한 예부 홍계준의 주본을 습득하는 등 명 조정 내부에서 제기되는 반교섭론의 동향을 계속 주시했다. 宣祖實錄 卷52, 선조 27년 6월 2일 己酉. 정유재 란 초반 군량 지원에 있어서도 조선 조정은 명군과 이견이 있을 경우 역할 분담을 명확하게 밝혔다. 일례로, 조선 조정은 해운과 육운을 관장하는 조선 관리의 재배치를 원하는 명군에 대해서 담당 업무에 익숙한 관리들의 급작스러운 교체가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을 개진하며 따르 지 않았다. 그리고 명군이 조선의 군량을 실은 선박과 명의 군량을 실은 선박에 관하여 쌀과 콩의 수량, 운송 일정, 운송 지점, 담당관을 일괄적으로 통제하려고 하자 조선 조정은 이미 정해진 자국의 규례에 따라 자국의 쌀과 콩을 운반하는 것이 지연과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고 답신했다. 事大文軌 卷28(영인본 4책, 259~260쪽), 回咨.

12명의 일본인에 대한 조치요구에서처럼 현실적으로 명 관리들과 동행하는 일본인들을 구인하거나 처 벌할 수 있는 직접적인 권한을 갖지 못했지만 공식적으로 엄금 및 단속을 요청하며 신속하게 반응한 이유를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책봉사라는 명의 대일 외교 사절이 일본 측 관계자와 함께 조선 내지 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또 다른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했다.

책봉사와 함께 복귀하는 조안의 존재는 명일 교섭 속에 고립된 조선의 외교 현실을 반영하 고 있었다.

교섭의 최대 고비 중 하나인 책봉을 허락 받았을 뿐 아니라 이제 는 책봉사와 함께 돌아오는 조안에 대한 조선의 대처법은 무엇이었을까?

2. 1595년 나이토 조안의 복귀

조선 조정은 1595년 1월 초순 병부로부터 명 조정의 책봉 결정에 대한 자 문을 받았는데 주요 내용은 책봉사 2명이 나이토 조안과 함께 요동에 머무를 것이며 남해안 일본군이 전원 철수한 이후에 이를 확인하는 주문을 조선이 올리면 일본으로 건너가 책봉 의례를 거행한다는 계획이었다.77)

77) 宣祖實錄 卷59, 선조 28년 1월 4일 丁丑.

조안이 책 봉사와 발을 맞춰 움직일 예정임을 알린 것이다.

선조는 명 조정이 히데요시 가 반드시 명 조정과의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는 조안의 말을 일방적으로 신 뢰한 반면에 허욱이 주문에서 언급한 전선의 위급한 현황을 곡해해 책봉 요 청의 근거로 삼고 책봉의 책임을 조선에 지우려 하는 편파적인 행태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했다.78)

교섭의 성사를 위한 명의 선택이 조선의 안보와 상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심유경이 한성에 도착하자79) 선조는 조안의 수하가 함께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성안에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할 것을 명했 다.80)

그리고 약 20 여일이 지나 조안과 함께 한성으로 들어오는 책봉사 일 행의 응접에 세심하게 대처했다.

선조는 한성으로 들어온 책봉사와의 접견 시 자신이 조안과 함께 있을 수 없음을 하교했고 비변사는 조안 일행이 책봉 사 행렬과 거리를 두고 들어오되 성문 밖에 머무르는 방안을 마련했다.81)

조안의 재통과를 제지할 수는 없었지만 물리적인 거리두기를 통해서라도 적 국에 대한 절대 불신을 명 책봉사절 앞에서 밝히고자 한 것이다.

동시에 일 년 전과 마찬가지로 조안의 귀환 시 자국 내지로의 정탐 여부를 주시했다.

책봉사가 한성에 진입할 즈음에 항왜 2명이 명군에 다시 귀순했다가 책봉사를 만나 조안에게 넘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82)

조선 조정에서는 조안에게 기밀이 누설될 여지를 차단하고자 이들에 대한 반환을 명 측에 요 구하기로 결정했다. 즉, 조안 일행의 첩보 활동 뿐 아니라 한성을 비롯한 조 선 내부에서 간첩 행위를 하는 자들과 조안이 접선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도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병조에서는 조안 일행을 남대문 밖의 지정된 장소에 서 체류하도록 접대도감과 함께 관리하고 있으나 이들이 명 사신단 속에 변 장하고 성내로 잠입할 경우도 대비해 사역원의 통사들로 하여금 하루 정도 거리의 반경에서 탐문해 잡아낼 것을 건의했다.83)

선조는 성 안으로 숨어 들어오면 또한 보고되는 바가 있을 것이니 병조가 또한 처리하라고 추가로 명했다.84)

78) 宣祖實錄 卷59, 선조 28년 1월 30일 癸卯.

79) 선조는 심유경을 4월 8일에 접견했다. 宣祖實錄 卷62, 선조 28년 4월 8일 庚戌.

80) 宣祖實錄 卷62, 선조 28년 4월 7일 己酉.

81) 宣祖實錄 卷62, 선조 28년 4월 14일 丙辰. 선조는 책봉정사 이종성과 책봉부정사 양방형을 4월 28일에 접견했다. 宣祖實錄 卷62권, 선조 28년 4월 28일 庚午.

82) 宣祖實錄 卷62, 선조 28년 4월 26일 戊辰.

83) 宣祖實錄 卷62, 선조 28년 4월 26일 戊辰.

성내에도 기찰ㆍ수탐 시스템이 가동된 정황을 살필 수 있는데, 조안의 간첩 활동을 방첩하는 조선 조정의 노력을 방증한다.

책봉사절의 한성 방문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절대 불신이라는 조선 조정의 기본 방침은 흔들림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한편, 명이 책봉사 파견 이전부터 책봉 승인을 누차 전달했고 심지어 책봉 사가 조안과 함께 한성에 들어와 있는 시점에도 일본군이 전혀 움직이지 않 고 오히려 부산에서 책봉사를 기다리고 있다며 또 다시 시간을 끄는 양상을 보이자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철수 이행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항복은 책봉정사 이종성이 어쩔 수 없이 조안을 후대하는 이유가 철수를 단행하지 않고 책봉사의 부산 방문만 요구하는 일본군의 버티기 전술 때문이라며 교섭의 주도권이 일본군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했다.85)

이 러한 발언에는 명 조정이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이상 일본군이 결코 순순히 제 발로 물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책봉사가 부산에 가더라도 어떤 화근거리를 불러일으켜 철수를 늦추 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할 것이다.

결국 일본군에게는 교섭이 지연작전의 일환이라고 주장한 반화친론의 불쏘시개, 즉 절대 불신이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1595년 9월초에 남하하기 시작한 책봉정사 이종성은 10월 중순 경 합천까지 내려갔는데 약 60%의 일본군이 철수했으나 기요마사 부대가 남아 있음을 걱정하며 조안을 통해 유키나가로 하여금 기요마사를 소환해 즉시 철군할 것 을 명령하고 철수를 완료해야 본인이 도해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86)

조 선 조정은 이종성이 기요마사의 철병을 포함해서 일본군 전체의 완전 철수를 확인한 뒤 부산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화근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관측했다.87)

84) 宣祖實錄 卷62, 선조 28년 4월 26일 戊辰.

85) 宣祖實錄 卷65, 선조 28년 7월 10일 辛巳.

86) 宣祖實錄 卷69, 선조 28년 11월 1일 己巳.

87) 김경태, 임진전쟁기 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171~172쪽.

그러나 이종성이 석성의 압박에 떠밀려 밀양에서 양산 을 거쳐 11월 22일 부산으로 들어가면서88) 이전 달에 도착한 책봉부정사 양방형과 더불어 책봉사절의 두 대표가 모두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제대로 확 인하지도 못한 채 부산에 진입하게 됐다.

조선이 예상한 바와 같이, 일본군의 태도는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기 이 전과는 딴판이었다.

책봉사가 양산에 도착했을 때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가 마중을 나오기는 했지만 부산에 도착해서는 佛事를 거행한다며 수 일 간 모 습을 드러내지 않고 책봉사를 홀대했다.89)

철수 시기와 관련해서 히데요시의 지령을 받고 돌아올 야나가와 시게노부만을 기다린다면서 대답을 회피하 기까지 했다.90)

초조해진 이종성은 12월이 되자 심유경과 조안에게 구체적 인 도해 날짜를 물었다.91)

이에 대해서 심유경은 기장에 둔거한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필두로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에 정사가 부산에 왔어야 한다며 그 의 거조를 경박한 행위로 비난했다.

그러면서 심유경은 앞서 기술한 유키나가와 요시토시처럼 책봉사의 도해 시기와 관련해서 시게노부가 도착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못박았다.92)

88) 이호민, 五峯集 卷12, 奏文 倭情奏文 丙申二月.

89) 이종성에 따르면 본인이 부산에 온 지 8일 만에 유키나가가 찾아왔다고 한다. 宣祖實錄 卷74, 선조 29년 4월 18일 甲寅.

90) 宣祖實錄 卷70, 선조 28년 12월 12일 庚戌.

91) 宣祖實錄 卷70, 선조 28년 12월 16일 甲寅.

92) 당시 시게노부는 “양국을 오가며 정보수집 및 외교적 절충에 힘쓰는 등 강화교섭의 실무를 맡고 있었다.” 김문자, 임진전쟁과 도요토미 정권, 2021, 199쪽. 조선에서는 시게노부가 11월 15일 에 책봉사의 도해와 관련해 일본으로 건너가 히데요시에게 보고할 것이라는 정보를 11월 초순 에 얻었다. 宣祖實錄 卷69, 선조 28년 11월 2일 庚午; 宣祖實錄 卷69, 선조 28년 11월 3일 辛未.

결국, 책봉사가 부산으로 들어간 이후 일본군의 철수 여부 보다는 책봉사의 도해 여부가 주요 이슈로 급부상하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변화는 명 조정이 일본군의 요구대로 책봉사를 파견했음에도 자국이 원하는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해결하지 못한 채 철수 문제의 주도권을 뺏기는 패착을 둔 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약 1년 전 북경에서 조안이 자신 있게 공언한 책봉 후 철수라는 간명하고도 투명한 원칙이 이렇게 복잡하고 불투명한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시게노부가 돌아온 뒤의 상황은 어떠 했을까?

황신의 치계에 의하면 12월 중순 시게노부가 돌아온 직후 유키나가ㆍ조안 ㆍ겐소 등은 심유경과 함께 조선 배신이 책봉사와 동행할 것을 논의하기 시 작했다.93)

조안이 북경에서 약조한 세 가지 사항에 없는 조선 사절의 파견이 라는 또 다른 변수를 만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종성의 접반사 김수가 치계 한 바에 따르면 시게노부가 돌아온 이후 조안이 이전과는 상반되는 행동을 보인다.94)

조안은 시게노부가 돌아온 이후 다시 일본식으로 머리를 깎고 의복을 바꾼 뒤 정사의 행소로 출입하지 않았다.

조선으로 올 때 이종성이 그 를 명나라의 복식으로 치장시켜 자신의 수하로 두고 출입시 늘 함께 한 사 실을 고려할 때95) 조안의 일본식 회귀는 새로운 변화의 전조라고 할 것이 다.96)

조선 조정은 시게노부가 돌아온 이후로 약 2달 간 책봉과 관련해서 진전 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595년 3월부터 1596년 1월까지의 상황을 명 조정과 공유했다.97)

93) 宣祖實錄 卷71, 선조 29년 1월 1일 무진. 황진의 치계에 의하면 1595년 12월 21일에 시게노부 와 조안이 조선 배신의 파견과 관련해서 심유경과 논의했다고 한다. 시게노부의 도착 이후라야 책봉사의 도해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심유경의 발언이 16일임을 감안할 때 시게노부는 17일 과 21일 사이에 일본에서 복귀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병부가 이종성에게 보낸 차부 내용 속에는 시게노부가 12월 18일에 부산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했다. 宣祖實錄 卷73, 선조 29년 3월 29일 丙申. 다른 기록에는 12월 19일에 돌아왔다고 기록했다. 이호민, 五峯集 卷12, 奏文 倭情奏文 丙申二月. 94) 宣祖實錄 卷71, 선조 29년 1월 21일 戊子.

95) 신흠, 象村集 卷57, 天朝詔使將臣先後去來姓名 記自壬辰至庚子, 封倭冊使諸官一行往來各 衙門.

96) 이러한 상황에 대해 비변사는 고언백ㆍ권응수ㆍ박의장 등 최전방 지휘관들에게 신칙하여 경계 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宣祖實錄 卷71, 선조 29년 1월 21일 戊子.

97) 이호민, 五峯集 卷12, 奏文 倭情奏文 丙申二月.

주요 내용은 일본군의 철수 여부와 책봉사의 부산 진입이다.

3 월 병부가 일본군의 완전 철수 여부를 문의하자 조선은 9월 현재 일본군의 철수 현황을 奏文으로 알렸다.

적이 본래 둔거하는 지역에서 그대로 본국으 로 떠나간 것이 아니라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옮겨 다니다가 약 10 군데 는 방옥을 불태운 뒤 떠났고 김해ㆍ서생포ㆍ부산포ㆍ가덕도ㆍ안골포에는 남 아있는데,98) 그 중 기요마사 부대는 서생포에 그리고 유키나가 부대는 부산 포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음 달인 10월 8일에 책봉부정사가 부산에 진입했고 그 다음 달인 11월 22일에 책봉정사도 부산에 들어갔으며 12월 말 시게노부가 조선의 사절 2~3명도 책봉사절과 동행할 것을 요청한 사실을 시 간 순으로 기술했다. 위 주문에서 일본군이 철수를 이행하면서 책봉사와 책봉부사가 부산으로 들어가 도해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도해를 관 철시키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완전 철수가 반드시 선행돼야 했지만 후자가 여 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책봉사절만 부산으로 들어갔다.

조선 조 정은 일본군의 완전 철수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책봉사가 부산 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말이 계속 바뀌고 곡절이 더욱 많아지 고 있음을 비판했다.99)

조안이 시게노부가 돌아온 이후로 히데요시가 명의 책봉을 받지도 않았고 유키나가가 명으로부터 관직을 받지도 않았는데 본인 만 유독 명의 복장으로 꾸밀 수는 없다고 하면서 머리 스타일과 복식을 일본 식으로 다시 바꾼 것도 변화무쌍한 일본군의 주요 사례로 손꼽았다.100)

내부적으로 통신사 파견 문제가 새롭게 수면 위로 떠오르자 사간원에서는 일본군의 작태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성을 제기했다.101)

98) 약 11개월 뒤인 1596년 8월 현재까지 일본군은 부산ㆍ죽도ㆍ가덕도ㆍ안골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事大文軌 卷17(영인본 2책, 226쪽, 234~235쪽), 申諭倭酋約定謝恩倭數.

99) 이호민, 五峯集 卷12, 奏文 倭情奏文 丙申二月.

100) 상동.

101) 宣祖實錄 卷73, 선조 29년 3월 22일 己丑.

조안을 북경으로 보내며 책봉을 요구하더니 부산까지 책봉사가 내려와도 지금과 같이 시간을 끌고 있고 그 와중에 조선의 통신사 파견 문제를 새롭게 꺼내며 또 다시 지 연시키고 있는 추세라면, 통신사 이후 또 어떤 사안으로 책봉을 지연시키려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더 본질적으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통해서 한없 이 시간을 끄는 일본군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간원은 책봉사 도해의 지연과 일본군 철군의 지체를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하며 일본군이 재침의 기회 를 엿보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명에 이 사실을 알리고 강경 대응으로 나가는 것을 문제 해결의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물론 이러한 견 해가 조정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조안의 왕래를 일본군 기만전술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 2년 전 그의 자국 통과를 반대한 논리와 맥락관통하고 한 달 전에 명에 보낸 상기 주문에서의 정세 탐색 및 전망과도 상통한다.

조안의 삭발ㆍ환복 이후 40 여일이 지나고 사간원의 상소 이후 약 15일이 경과한 1596년 4월 초순 책봉사 이종성이 부산을 탈출했다.102)

102) 宣祖實錄 卷74, 선조 29년 4월 10일 丙午; 宣祖實錄 卷74, 선조 29년 4월 18일 甲寅.

명의 사신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돌아간 일대 사건이었다.

명 조정은 책봉 결정 후 거 의 한 달도 채 안 돼 책봉사를 파견했고 심지어 조안을 볼모가 아닌 책봉사 의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시킬 정도로 배려했다.

그러나 부산으로 들어가 이 종성이 탈출하는 1596년 4월까지 약 14개월 간 선철수 후책봉이라는 원칙은 무시됐고 조안이 이종성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만 즉각 철수 → 철수 중 → 히데요시의 지령에 따라 철수 시기 조정 등 최소 세 차례나 변곡점이 만들 어졌다.

이후에는 조안이 북경에서 합의한 3대 원칙과 무관한 조선의 사절 파견이라는 외교적 사안을 꺼냈는데 완전 철수와 연계될 소지가 보였다는 점 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요컨대, 조선을 통과한 조안의 북경행 뿐 아니라 명의 책봉사와 함께 조선 을 경유한 조안의 복귀 역시 조선 외교에 있어 미증유의 파장이었다.

명 중 심의 안보 전략에서는 자국을 위협할 만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일본에 대 해 외교적으로 유화책을 사용하고 전통적인 우방국인 조선에 대해 군사적으 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전쟁으로 인한 인적 희생과 물적 손해를 최소화하 는 접근이 현실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조선 중심의 안보 전략에서도 더 이상 의 국력 소진을 막기 위해 싸우지 않고 일본군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조안이 책봉사절과 함께 남해안으로 내려간 11개월 동안 일본군의 완전 철수가 교섭 성사를 위한 최대 분수령이 되면서 부터 대화로만 일본군 스스로 물러가게 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를 두고 조선 과 명의 안보 전략에 있어 차이가 보였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벌여 무력으로 획득한 최소한의 성과인 남해안 일부를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103)

103) 1594년 8월 조선에서 철병을 준비한 총병 유정은 일본군의 뜻이 명과의 혼인을 구하고 조선의 땅을 나누는 데 있기에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宣祖實錄 卷54, 선조 27년 8월 16일 辛酉. 히데요시는 일본에서 동남아로 이어지는 국제 교역의 활로를 개척하는 데 있어 조선이 필요했고 따라서 남해안에서의 완전 철수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문자, 임진전 쟁과 도요토미 정권, 160~172쪽.

명의 경우 책봉과 일본군 철수가 연동돼야 한다고 믿었지만 일본의 경우 책봉과 남해안 잔류를 별개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명이 동의해서 조선 땅에 일본군이 일부라도 주둔하는 것 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

명은 해로와 육로 모두 북경과 인접한 조선의 지형 지세로 인해 조선에서의 일본군 주둔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선으로서는 일본군의 주둔을 당연히 용납할 수 없었고 따라서 책봉사 파견에서 단 한 번도 소홀하게 간과하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일본군의 완전 철수 이행 여부 였다.

조안이 자국 땅을 통과해 명으로 넘어 들어가 교섭의 첫 관문인 책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때 명의 압박에 의해 쓰여 진 조선의 주문은 책봉 선택의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

대조적으로, 조안이 복귀한 이후 조선은 교섭의 마지막 관문인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공식화하려는 명의 의도와는 상 반되게 철수할 의사가 없는 일본군의 동태를 낱낱이 전달했다.

조안 복귀에 대한 조선의 외교적 대응이라고 할 것이다.

Ⅳ. 맺음말

본 논문은 1593년 하반기 조안의 조선 경유 북경행에 대한 조선의 반대와 1595년 조안의 복귀에 대한 조선의 대응을 통해서 대명 외교와 명일 교섭간 상관성을 계기적으로 되짚어보았다.

무엇보다도, 조선은 조안 사태를 명 일 관계에 자국이 개입됨으로서 기존의 개별적 양국 외교가 자국을 매개로 하는 삼국 외교로 고착화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따라서 힘의 강약에 따라 공 격과 화친을 병용하는 일본군의 전술적 특성을 기만술로 단정한 기존의 반화 친론을 기반으로 조안의 자국 경유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조 선은 조안이 일본군으로서 한 번도 밟지 못한 평양 이북과 조명 국경 지대를 통과하면서 명의 변경 지역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채집할 위험성이 매우 높고 이러한 첩보 활동이 명의 국방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 했다.

조안의 자국 경유가 명에게 끼칠 폐해에 대한 지적은 일본이 조선과 요동에 진출할 때 발생할 군사 안보의 위기를 예견한 것이며 동시에 조명 군사 협력의 논리를 보다 견고하게 내재화한 것이다.

한편, 1595년 상반기 책봉사와 함께 복귀하는 조안의 재통과를 제지할 수 없었지만 조선 조정은 조안의 한성 출입을 금지시키며 그의 정탐 활동을 막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 다.

그리고 복귀한 이후 조안의 변모와 철수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일본군의 동태를 명 조정에 그대로 전달했다.

결론적으로 조안의 자국 왕래에 대한 조 선의 대응에 대한 분석은 임진왜란 당시 명과 일본 간 교섭이라는 전례 없는 군사ㆍ외교 사안에 대해서 조선이 어떻게 자국중심의 안보 전략을 구사했는 가를 고찰하는데 도움을 준다.

결국, 전쟁을 통해 나타난 현안과 당면 과제 를 해결해야만 할 순간에 조선과 명이 선택한 근본적인 해결 방식의 전거는 자국 안보 우선주의였다.

명일 교섭이 재개된 이후 조선이 대일 전략의 다각 화를 추진하게 된 주요 배경과 임진왜란 시기 조선ㆍ명ㆍ일본 삼국 간 다면적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 증진에도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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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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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hosǒn-Ming Relations and the Ming-Japan Negotiations during the East Asian War, 1592~1598 -Focusing on Chosǒn Strategy against the Japanese Delegation to the Ming-

Lee, Jeong-il*

This article examines both the dynamic responses of Chosǒn to the passage of Naitō Joan (c. 1549~1626), dispatched for peace negotiations to the Ming, from Pusan to Peking in the second half of 1593 and from Peking to Pusan in the second half of 1595. First, as Naitō Joan approached to the capital-Hansǒng-, Chosǒn basically belittled the Ming-Japan peace negotiation itself as strategic deception of the Japanese armies and further problematized the intention of Joan who would go through the territory of Chosǒn instead of Ningbo, the official port of entry for Japanese delegation before the East Asian War, 1592~1598. The Chosǒn government considered use of this unusual overland route, or the land of Chosǒn as a grave breach of the normal diplomatic protocol between Ming and Japan in the prewar regional order. The Chosǒn government also warned the Ming government that any unhampered yet undetected espionage operations by Joan in his journey from Chosǒn to the Liaodong Peninsula, where the Japanese armies never marched, might cause * Senior Researcher,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serious harm to the Ming’s state security. And, as Joan returned to Pusan along with the Ming delegation to Japan from the first quarter of 1595, the Chosǒn government strove to minimize the negative effect of his presence on the security of Chosǒn by blocking his entrance to the capital and forestalling any possibility of his espionage. Moreover, the Chosǒn government continued to stress the failure of the Japanese armies to keep to the promise made to Chosǒn and the Ming at the termination of the war, to point out the peace negotiation as a major part of the Japanese military deception, and to ask the Ming for a further military cooperation with Chosǒn for final victory. Likewise, the Chosǒn government sought active plans able to counterbalance the accommodative strategy of the Ming government for the peace negotiations with Japan. By so doing, this article enables us to analyze the way the dynamic responses of the Chosǒn government against the Ming rapprochement with Japan made impact not only on the process of the Ming-Japan negotiations, but also on the direction of the Chosǒn-Ming relations during the war. This orientation will also empower us to recapture the multilayered structure of interaction among Chosǒn, Ming, and Japan as one important feature of the war.

Keywords : Naitō Joan, Chosǒn-Ming relations, Ming-Japan relations, Ming-Japan negotiations, state security

朝鮮時代史學報 106호

투고일 : 2023.06.27. / 심사일 : 2023.08.15.~2023.08.30. / 심사완료일 : 2023.08.30.

 

임진왜란 시기 조명 관계와 명일 교섭 -나이토 조안의 조선 경유를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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