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운요함의 동해안 정탐 활동과 조선 지방민의 대응
Ⅲ. 3일에 걸친 강화도 일대 공격과 나가사키 복귀에 대한 일본신 문의 신속한 동향 보도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875년 9월 20일 이양선에서 내린 보트를 타고 강화도 부근에 접 근한 무리가 있었다.
이들이 타고 있던 보트는 염하(鹽河)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 정부는 강화도 연안에 “해문(海門)을 방수(防守)하므로 타국의 선박은 근신하고 지나가지 말라”는 비석을 세우고 해안경계를 강화한 상황이 었다.1)
1) 지금도 초지진 등에 비석이 남아 있다. 석비에 새긴 원문은 “海門防守他國船愼 勿過”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포대 근처까지 접근해 오는 선 박을 내버려 둘 수 없던 조선 측은 이를 저지하고 ‘방수’하기 위해 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보트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한참 응사를 하 다가 함선으로 돌아갔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져 22 일에는 일본 병력이 영종성을 점령하였다.
이른바 운요함 사건(雲揚 艦事件)으로 일컬어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1876년 1월 일본 정부는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를 전권대신으 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부전권으로 삼아 조선에 파견하였 다.
조선 정부는 신헌(申櫶)과 윤자승(尹滋承)을 협상 대표로 파견 하여 일본 사절과 교섭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들은 세 차례의 협상 을 거쳐 일본 측이 제시한 13개의 조관을 하나씩 검토하여 수용 여 부를 판단한 다음, 조문을 다듬어 최종적으로 12개 조관으로 확정하 였다.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일 양국 대표는 「조일수호조규」 조인식을 거행하였다. 운요함 사건은 근대 한일관계의 시작과 관련하여 주요 연구주제 중 하나였다.
서계(書契)에서 사용할 용어의 격식 문제를 둘러싼 조 일 양국의 첨예한 신경전,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 단행, 기존 과 다른 서양식 복장을 입고 온 일본인 사절의 연향 참석 문제 등이 겹치면서 양국의 교섭은 공전을 거듭하였다.
운요함 사건의 발생은 지지부진한 협상 상황을 일거에 깨트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든 계기였다.
운요함 사건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에서 관심을 갖고 발생 배경과 전개 과정, 사건을 둘러싼 열강의 대응과 일본 정부 내의 동향 등을 중심으로 하여 다각도로 검토해 왔다.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에서 운요함 사건을 다루었다.2)
그 후로 한일 양국의 많은 연구자가 조선의 개항 문제와 관련하여 다보하시 저서를 참고하면서 운요함 사건을 서술하였다.3)
운요함과 관련된 공개 자료가 적었던 만큼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 上良馨)의 10월 8일 공식보고서가 사건 발생 경과를 설명하는데 주 로 활용되었다.4)
운요함이 나가사키(長崎)로 귀항한 다음 날 함장이 작성해서 해군성(海軍省)에 최초로 보고한 문서가 일본 방위성(防 衛省) 방위연구소(防衛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시점은 2002년이었다.5)
9월 29일 함장이 작성한 최초 보고서를 통해 운요함 사건과 관련된 전투는 하루가 아니라 3일에 걸쳐 전개되었으 며, 공식보고서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6)
2) 田保橋潔, 1940, 近代日鮮關係の硏究 上, 京城: 朝鮮總督府中樞院
3) 운요함 사건과 관련된 조일 양국의 연구성과와 동향은 김흥수의 연구에서 상 세히 정리하였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김기혁(金基赫) 등의 영미권 연구도 다 보하시 연구와 日本外交文書를 기본적으로 참고하여 사건 발생 경과를 서술 하는 정도를 넘지 않았다[김흥수, 2009, 「운요호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韓日 關係史硏究 33 ; Martina Deuchler, 1977,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 Key-Hiuk Kim, 1980,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 Korea, Japan and the Chinese Empire, 1860-188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김범 옮김, 2022,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막 –조선・일본・청, 1860~1882-, 글항아리)].
4) 자유당사(自由黨史)의 운요함 관련 기술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야마베 겐타로도 “강화도사건의 진상이 어떠한지 여기에 대해서는 운요함장인 이노 우에 요시카가 쓴 사건보고서밖에 자료가 없다.”고 기술하였다(山辺健太郞, 1966, 「江華島事件と朝鮮の開国」 日本の韓国倂合, 東京: 太平出版社, 29쪽).
5) 이 자료는 1964년 4월 13일 해군 중장(中將) 이토 스케마로(伊東祐麿)의 차남 이토 지로마루(伊東二郎丸)가 방위연구소 전사실에 기증하였다(「史料經歷書」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航記事).
6) 이태진, 2002, 「운양호(雲揚號) 사건의 진상 -사건 경위와 일본국기 게양설의 진위-」 조선의 정치와 사회, 태학사 ; 鈴木淳, 2002, 「 雲揚」艦長井上良馨の明 治八年九月二九日付け江華島事件報告書」 史學雜誌 111-12
이후 연구에서는 이노우에 함장의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는 일본 측 공문서를 정밀 대 조하고, 내용이 기재된 용지 양식까지 검토하면서 운요함 사건 관련 보고서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공부경(工部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보아소나드(Gustave Emile Boissonade de Fontarabie)의 법률 자문을 받아 함장의 문서를 조작하는데 깊숙 이 개입했을 정황상 가능성이 제기되었다.7)
근래 나온 외교사 연구 도 이 문제를 다루면서 군함 파견을 건의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 茂)가 사건을 사주하고, 당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오쿠보 도시 미치(大久保利通)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이를 묵인 혹은 방조하면서 벌어진 일종의 도박이자 ‘정치적 쇼’란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8)
운요함 함장 개인의 일탈 때문에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 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사건 발생과 보고서 내용 조작에 조직적으로 깊숙이 개입하였을 가능성을 당시 일본이 정치적 환경 속에서 제기한 것이다.
한편으로 함장의 최초 보고서가 실려 있는 명치팔 맹춘운양조선회항기사(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航記事)에 첨부된 「조선국회항잡지(朝鮮國回航雜誌)」란 항해일지에 주목, 수 록 기사 일부를 원문으로 소개하면서 운요함의 항적(航跡)을 규명하 는 방향에서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9)
다만 다른 자료와의 교차 검토 를 통해 접근하지는 않았고, 기존 연구와 마찬가지로 ‘담수’를 구하 러 조선 영해에 불법 진입한 운요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그쳤다. 다보하시는 이노우에 함장의 공식보고서대로 과연 하루 동안 벌 어진 전투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불확실한 면이 많다며 의문 점을 제기하였다.10)
하지만 이미 다보하시가 그의 저작을 출판하기 3년 전에 이 사건을 다루면서 운요함이 3일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다룬 연구가 있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 직하고 있던 와타나베 가쓰미(渡邊勝美)는 1937년 2월 교내 학술지 에 「조선개국외교사(朝鮮開國外交史)」라는 제목으로 575쪽에 달하 는 방대한 분량의 글을 게재하였다.11)
7) 김흥수, 2009, 앞 논문
8) 김종학, 2016,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역사비평 114
9) 金光男, 2007, 「雲揚号事件をめぐる一考察」 茨城大学人文学部紀要 社会科学論集 43
10) 田保橋潔, 1940, 앞 책, 409쪽 각주 4번
11) 渡邊勝美, 1937, 「朝鮮開國外交史」 普專學會論集 3, 京城: 東光堂書店, 153~575쪽
그는 이 연구를 4년 후 단행본 으로 출간하였다.12)
이 책의 제2편 제1장의 제목이 「일본군함운요호 포격사건(日本軍艦雲揚號砲擊事件)」이다.
와타나베는 7쪽의 분량을 할애하여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에 걸쳐 진행된 전투 경과를 서 술하였다.
집필 근거는 「운요함장 해군소좌 이노우에 요시카 복명서 (雲揚艦長海軍少佐井上良馨復命書)」와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가 쓴 명치외교요록(明治外交要錄)이었다.13)
다보하시보다 3년 앞서 시점에 이미 운요함 사건이 3일 동안 발생한 교전이었음을 밝 힌 연구와 관련 전거가 있었다는 사실은 운요함의 조선 도항과 활동 에 대해서는 당대에 발간된 자료부터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성 을 제기한다.
와타나베가 제시한 자료 외에도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서 조선역사(朝鮮史)를 통사 형식으로 정리한 하쿠분칸(博文館) 간 행 서적에도 운요함이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강화도와 영종도 일대 에서 전투를 벌인 경과가 실려 있다.14)
강화도 인근에서 담수를 구 하려고 보트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 조선군에게 포격을 당해 대응 에 나서 승전하였다는 기본 구도는 개찬된 공식보고서 내용과 동일 하다.15)
12) 渡邊勝美, 1941, 朝鮮開國外交史硏究, 京城: 東光堂書店
13) 위 책, 527쪽 註 221・註 223
14) 久保得二, 1905, 朝鮮史, 東京: 博文館, 270쪽. “이해 9월 우리 군함 운요함이 조선의 서해안에서 청국 뉴좡(牛莊)에 가는 항로를 측량하던 중, 담수가 부족 하기 때문에 같은 달 20일 닻을 한강 하구에 내리고, 보트로 강을 거슬러 올라 갔다. 강화도 포대에서 갑자기 여기를 포격했다. 대개 이것을 외국선으로 오인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명령을 전하였고, 21일 제1, 제2 포대를 공격, 22일 상륙하여 영종성을 함락하고 한국 병사 30여 명을 죽이고, 대포 38문을 빼앗았다. 우리 병사 중 사망자는 불과 1명 뿐. 요시카가 귀국 하여 이것을 정부에 보고하자 국론이 다시 활발해졌다.”
15) 뉴좡 항로를 측량하던 도중 운요함이 “담수의 결핍 때문에” 한강 하구에 닻을 내린 후 보트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선의 수비병이 갑자기 발포하여 대 응 사격에 나섰고, 조선 병력이 저항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격하여” 수 십 명을 살육한 다음, 곧바로 일본 정부에 보고하였으며, “무례하고 포악한 행 동은 좌시할 수 없었다.”는 기본 서술 구도는 1903년 간행된 책자에서도 찾을 수 있다(岡庸一, 1903, 最新朝鮮事情, 大阪: 靑木嵩山堂, 18~19쪽).
다만, 3일에 걸쳐 전투를 하면서 조선군을 죽이고, 대포 등을 노획하였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지 않았다.
메이지(明治) 시기 당 대의 사람들이 운요함의 조선 파견과 전투에 대하여 오히려 쇼와(昭 和) 시대 이후 후대의 연구자보다도 더 상세히 전개 과정을 알고 있 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16)
16) 1927년 조선사학회(朝鮮史學會)에서 간행한 조선사 책자는 운요함의 1875년 9 월 20일 행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는데, 며칠 간 전투를 하였는지 메이지 시기의 간행물보다도 불분명하게 기술하였다. “청국 뉴좡의 항로를 측량하고 돌아오던 길에 담수의 결핍을 알렸기 때문에, 이달 20일 강화도 동남방 일개 작은 섬 난지도(蘭芝島)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선장 이하 수십 명이 보트를 타고 한강의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였다. 강화도 남단의 도서인 포대에 서 갑자기 사격을 당해, 어쩔 수 없이 귀함했다. 우리 함선은 이 폭거에 응수 하기 위해서 초지진 포대와 영종도를 포격하고 곧바로 나가사키로 귀환하여 이 소식을 도쿄 정부에 급보했다.”(杉本正介・小田省吾, 1927, 朝鮮史大系 最近 世史, 京城: 朝鮮史學會, 88쪽)
많은 연구에서 운요함 사건의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일본 국내 의 정치적 배경, 국제환경 등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다 시 운요함의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연안 항해와 정탐활동을 다루려는 것은 여기서 출발한다.
운요함 사건은 1875년 시점부터 조작된 공식 보고서에 기재된 대로 과연 하루에 발생한 사건으로만 당대 사람들 에게 알려졌는가?
메이지 당대 신문과 출판물에서 운요함의 조선 도 항 관련 동향을 소개한 사례는 없었는가?
운요함의 조선 파견과 활 동에 대한 정보는 동아시아 내 다른 국가에서 간행되는 신문에서 보 도되고 있었는가?
운요함 승조원들은 두 차례에 걸친 연안 정탐 활 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조선에 대하여 어떠한 인식을 갖고 있었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마리를 제시하는 메이지 시기 간행 자료가 존재한다.
첫째, 1875년 당시 간행되던 일본과 청국의 신문에 서는 운요함이 조선 연안에서 벌인 정탐 활동의 전말을 보도하였다.
일본 신문으로는 중앙지로 초야신문(朝野新聞)과 도쿄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 청국 상하이(上海) 영자신문으로는 노스 차이 나 헤럴드(The North China Herald)가 여기에 해당한다.
초야신문 에 실린 기사는 운요함에 탑승하였던 포병이 자신의 경험담을 가족에게 전한 편지를 입수하여 게재한 것이다.
함장 이외의 운요함 탑 승자가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으로 가치가 높다.
또한 초 야신문에는 운요함의 제1차 도항 때 함경도 영흥부(永興府)까지 올 라가 정보를 수집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던 중 경상도 영일현(迎日縣) 에서 지방관과 만나 문답을 나눈 기록이 실려 있다.17)
도쿄니치니 치신문은 1875년 10월 5일부터 ‘조선신보(朝鮮新報)’라는 연재란을 신설하였고, 운요함의 조선 내 활동을 전체 9회에 걸쳐 상세히 보도 하였다.18)
기사 출처는 1, 2차 조선 도항 당시 운요함에 승선하였던 가와무라 데루히데(川村煥秀)가 작성한 기록이었다.19) 그의 기록을 입수해 연재한 신문기사에 기초하여 이것을 신속하게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책자 형태로 편집하고, 삽화를 새로 추가한 출판물은 1875년 10월 15일자로 출간되었다.
조선군기(朝鮮軍記)란 제목의 책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자료이다.20)
17) 「投書」 朝野新聞 1875. 08. 12. 3면 2~4단. 투고자 이름은 耕田豊, 거주지는 나가사키(長崎) 에도마치(江戶町)라고 밝히고 있다. 실명인지 아니면 투고용 필명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18) 운요함 관련 기사는 1875년 10월 5일에서 10일까지 ‘조선신보’란에 제1(第一) 부터 제6(第六)까지 실렸다.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는 기사 제목 없이 운요 함 동향을 연재하였다.
19) 「朝鮮新報 第一」 東京日日新聞 1875. 10. 05. 3면 1단. “운요함(雲揚艦) 승조 사관 가와무라 데루히데 군이 지난 7월 중 나가사키(長崎) 정박 중에 조선해 (朝鮮海)를 순항하였을 사이에 연필로 종이조각에 적은 내용을 정돈하여 하 나의 책자로 엮어 둔 것을 빌릴 수 있어서 조선신보(朝鮮新報)란 이름을 붙이 고, 날마다 3~4엽(葉)씩 간행하겠다.”
20) 多田直繩 輯, 1875, 朝鮮軍記, 東京: 績文社(이하 朝鮮軍記). 이 자료는 현 재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 열람이 가능하다. 이 책자에서 인 용한 페이지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자료 하단에 기재한 숫자에 따라서 표기 하였다. 선행연구는 이 책이 등장한 시대 배경과 기본 서지사항, 그리고 도입 부에서 “일본, 지나의 속국이 되어서 독립한 적이 드물었다.”면서 조선이 중국 과 일본에 조공을 바치거나 복속되었다고 서술한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 도에 그쳤다. 글의 집필자와 수록 내용이 본격적으로 다른 텍스트와 비교, 분석 된 적은 없다(조동걸, 2010, 「식민사학의 성립과 내용」 한국근대사학사, 역사 공간, 297쪽 ; 최혜주, 2019, 「근대 일본인의 조선 안내서 출판활동과 조선인식」 정탐 -제국일본, 조선을 엿보다-, 한양대학교출판부, 181~182, 205~206쪽).
이 책을 간행한 편집자는 다다 나오쓰구(多田直繩)였다.
하지만 정작 연재기사의 소스를 제공하였 던 가와무라의 이름은 책자에 나오지 않는다.
운요함의 나가사키 복 귀가 이해 9월 28일이었음을 고려해 본다면 약 보름 정도가 경과한 시점에 대중을 대상으로 신속하게 배포된 출판물이었다.
이외에 1887년 출판된 회본명치태평기대전(絵本明治太平記大全)에도 운 요함 사건 당시의 상황이 실려 있다.21)
노스 차이나 헤럴드에 실 린 운요함 보도 기사는 비단 일본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영자신문을 매개로 하여 조선과 관련된 정보가 동아시아 내에서 신속하게 전달, 공유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와 같은 당대의 여러 간행 자료는 1875년 당시 운요함이 조선 연안을 돌아다니면서 벌인 정탐 활동의 실태, 3일간에 걸친 강화도・ 영종도 침입과 공격 양상, 이노우에 함장을 비롯한 승조 인원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 인식을 규명하는데 유용하다.
이 자료와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소장된 명치팔 맹춘운양조선회항기사의 수록 기사 를 교차로 검토하는 방법을 통해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기 이전 운요함을 중심으로 전개된 조선 연안 정탐 활동의 양상, 관련 기록 에서 나타나는 조선 인식, 관련 정보의 동아시아 내 유통을 살펴보 려 한다.22)
21) 依田準之助 編, 1887, 繪本明治太平記大全, 大阪: 此村欽英堂, 108~114쪽
22) 여기서는 운요함의 조선 내 동향과 관련하여 일본 측에서 당대 생산된 여러 기사를 중심으로 교차 검토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1875년 당시 영일현감 김 명구 등이 운요함을 목격하고 문정 활동을 나왔던 조선 지방관의 보고는 관찬 기록에서 찾을 수 없었다. 양국 관리가 주고받은 문답은 일본 측 기록을 중심 으로 검토하되, 조선 측 입장이 잘 드러나는 대목도 최대한 활용하였다.
Ⅱ. 운요함의 동해안 정탐 활동과 조선 지방민의 대응
1. 운요함의 1차 도한과 부산 입항 후 무력 과시
운요함은 나가사키 재류 영국 상인 토마스 글로버(Thomas Blake Glover)가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에 있는 선박제조회사(Hall, Russell & Company, Limited)에 발주하여 1870년 건조한 목재 증기 선이었다.23)
돛은 2개, 길이는 약 38m, 폭은 약 7.5m이었다. 함선 배 수량 245톤, 적재량 162톤이었고, 106마력이었다.24)
23)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일본이 사용할 군함으로 운요함, 호쇼함(鳳翔艦), 류조함(龍驤艦, 주문 당시에는 조쇼마루[Jho Sho Maru]였으나 선박 인도 후에 는 ‘龍驤’으로 선박명을 개칭) 세 척을 에버딘에 주문하였고, 완성된 선박을 일 본 측에 건넸다(Scottish Samurai Trail : The Story of Thomas Blake Glover, https://www.visitabdn.com/assets/Uploads/The-Scottish-Samurai-Trail.pdf, 최 종 접속일 2023. 09. 24). 글로버와 건조 군함에 대한 자료는 에버딘 박물관 아 카이브에서 소장 정보를 볼 수 있다(https://emuseum.aberdeencity.gov.uk/). 이곳에 소장된 운요함 설계도에 따르면 “Length twixt Perpendiculars 126ft, Breadth Extreme 24ft 6inc, Depth in Hold 10ft 3inc, Tonnage Register Gross 245tons”으로 기재되어 있다(SS "Wun Yo Maru" Japanese Naval Gunboat No. 169. 관련 서류철). 이 문서에 수록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신 동북아역사 재단 신효승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4) 海軍歷史保存会 編, 1995, 日本海軍史 第7卷, 東京: 海軍歷史保存会, 224~225 쪽 ; 海軍有終會 編, 2018, 幕末以降帝國軍艦寫眞と史實, 吉川弘文館(1935년 출간본의 복각), 16쪽. 1877년 1월 19일 다키노 나오토시(瀧野直俊) 운요함장 이 기재한 당시 기록으로 운요함은 건보트(gunboat), 길이 126척(尺), 너비 24 척 5촌(寸), 깊이 11척, 용적 162톤 74, 갑판 2층이었다(海軍省所轄軍艦雲揚艦 難破諸上申控[第拾九區阿田和村, 明治九年丙子十一月一日, 和歌山縣立圖書館 所藏], 23쪽 ; 「うんいやう」 大日本帝國軍艦帖[海軍文庫, 1894]). 현재 운요 함 모습으로 널리 알려진 함선 이미지의 출전은 大日本帝國軍艦帖이다. 일 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라이브러리에서 제공하는 해당 책자에는 운요함을 비롯하여 몇몇 함선의 이미지나 사진이 빠져 있다.
처음에는 야마구치번(山口藩)에서 사용하다가 1871년 5월 18일 메이지 정부에 운요함 을 헌납하였다.
운요함은 일본 국내에서 발생한 내란으로 사가(佐賀) 의 난을 진압할 때, 그리고 1874년 타이완 정벌(臺灣出兵) 당시 차출 되었던 선박이었다.25)
1875년 4월 말 조선에 파견되었던 모리야마 시게루는 히로쓰 히로 노부(廣津弘信)를 귀국시키면서 조일 간 교섭의 정체 국면에 타개하 기 위해 군함을 조선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조선 국 해로(海路) 연구’를 하려는 목적으로 운요함 파견을 결정했다.
운 요함은 5월 10일 시나가와(品川)에서 출항하였다. 효고(兵庫)와 모 지(門司), 요부코(呼子)와 가라쓰(唐津)를 거쳐 쓰시마 이즈하라(巖 原)에 들른 운요함은 22일부터 이틀 동안 이곳에서 체류하였다.26)
5 월 25일 부산에 도착한 운요함은 7월 1일 나가사키(長崎)로 귀환할 때까지 조선 연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27)
함선에는 이노우에 요시 카 함장을 비롯하여 총 76명이 승선해 있었다.28)
6월 12일에는 다이니테이보호(第二丁卯號)가 부산에 입항하였다.
이후 두 선박은 조선 연안을 측량하면서 정보를 수집해 나갔다.
이렇게 조선 해역으로 자 국 군함을 파견한 것을 두고 당시 나가사키 지역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수개월 안에 조선과 쟁단을 열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풍설을 언 론이 포착하여 보도할 정도였다.29)
조선으로의 군함 파견을 두고 지 역 민심에서도 조만간 사단이 날 수 있다고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 현지 일본 공관에 가 있던 우라세 유타카(浦瀨裕)는 운요함의 조선 도항으로 ‘성원(聲援)’을 얻을 수 있겠다며 기대감을 드 러냈다.30)
25) 海軍有終會 編, 1981, 近世帝國海軍史要, 東京: 原書房(1938년 출간본의 복 각, 제2쇄), 822쪽 ; 海軍歷史保存会 編, 1995, 앞 책, 224~225쪽 ; 海軍有終會 編, 2018, 앞 책, 16쪽
26) 「朝鮮新報 第一」 東京日日新聞 1875. 10. 05. 3면 1단 ; 朝鮮軍記, 5쪽
27) 田保橋潔, 1940, 앞 책, 396~397쪽
28) 이노우에 함장의 1929년 회고담에서는 운요함에 ‘60명 정도 승조’했다고 하였 으나, 기억의 착오이다(井上良馨, 1929, 「追憶祕話 江華島事變」 現代 10-1[大 日本雄弁会 編], 東京: 大日本雄弁会講談社, 103쪽). 이 자료는 한국학중앙연 구원 하성문고(霞城文庫)에 복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29) 「海外新報」 朝野新聞 1875. 07. 17. 2면 4단 ‘朝鮮と戰門將に起らんとす’
30) 外務省 編, 1955, 日本外交文書 卷8, 東京: 日本外交文書頒布會, #36 附記, 94쪽
6월 13일 훈도 현석운(玄昔運)은 일행을 데리고 운요함을 방문하 였다. 현석운을 맞이한 이노우에 함장은 선내에 탑재된 기관과 대포 등을 시찰하도록 안내하였다.
이노우에는 조선 관리 17~18인이 승 선하였다고 기억하였다.31)
이때 일본 측은 자국 함선의 위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 부산에 들어와 있던 다이니테이보함을 연습상대로 삼아 총과 대포를 교차로 발사하도록 지시했다.
조선 관리들이 크게 놀라 는 모습을 보면서 이노우에는 훈련을 중단시키고 함내 방화훈련을 보여주었다.32)
일본 함대가 구비한 무기의 위력과 승선 병력이 잘 훈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으로 연출한 행동이었다.
“무비 (武備)의 엄중함을 보고 두려워한” 조선인들이 훈련 중지를 요청하고 함선에서 내려가려던 모습을 보고 운요함 승선 사관은 “실로 그 체재가 어린아이보다도 열등하여 포복절도하였다.”고 인상을 기록했 다.33)
훈련 모습을 관람하고 놀란 조선인들의 모습을 두고 “인물에 게 기상이 없다.”고 평가하면서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얕 잡아 보았다.
2. 운요함의 동해 연안 정탐 활동과 조선 지방관 접촉에 대한 신문 투고
이 해 8월 12일, 운요함이 경상도 영일현에 들렀을 때 지방관이 문 정하러 나와 진행한 필담 내용이 중앙지 투서란에 실렸다.34)
31) 井上良馨, 1929, 앞 자료, 104쪽
32) 朝鮮軍記, 13~24쪽 ; 依田準之助 編, 1887, 앞 책, 100쪽 ; 田保橋潔, 1940, 앞 책, 397쪽. 훈도 일행이 전투 훈련을 보고 “양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낯빛이 갑자기 변한”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그 모습을 삽화까지 실어서 소개한 자료는 朝鮮軍記이다. 이 책 16쪽은 서술, 17~18쪽은 ‘조선 관리 포성을 듣 고 간담이 서늘해지다’란 제목이 붙은 삽화이다.
33) 「朝鮮國回航雜誌」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航記事(이하 「朝鮮國回航雜誌」) 1875. 06. 13. 기사 34) 「投書」 朝野新聞 1875. 08. 12. 3면 2단
이 기사는 1차 도항 당시 운요함이 조선 연안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었 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35)
해군성 내 극소수 인원만 접할 수 있었을 운요함의 항해일지와 함장의 보고서를 제외한다면, 언론을 통해 가장 이른 시기에 대중에게 알려진 항해 관련 기록이었 다.36)
투고자는 도쿄니치니치신문 1,070호에서 운요함의 조선국 회항과 관련하여 조선 관리가 함선에 와서 술병을 요구한 사건을 게 재한 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조선에 있던 지인으로부터 소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내용상 차이가 있어서 관련 내용을 우편으로 신문사에 송부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여기서 투고자가 본 1,070호 기사는 1875 년 7월 17일자에 실려 있다.37)
35) 다보하시는 운요함이 6월 20일 부산에서 출항하여 동해안을 북상, 함경도 영 흥만에 들렀다가 영일만을 거쳐 29일 부산에 도착한 후 7월 1일 나가사키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무슨 자료를 참고해 운요함의 항 해 일정을 서술했는지 전거를 밝히지는 않았다(田保橋潔, 1940, 앞 책, 397쪽).
36) 「朝鮮國回航雜誌」
37) 東京日日新聞 1875. 07. 17. 3면 2단
조선 관리 한 명이 ‘국왕기(國王旗)’ 를 들고 수행원과 운요함을 방문하였고, 공무로 왔다고 여긴 함장이 답례를 하는 가운데 이 관리가 술 한 병을 달라고 요청하여 배에서 쫓겨났다.
함장은 해안에 가서 이 관리와 다시 만났는데 응접을 운 운하며 우롱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가 부정확하다고 판단한 투고 자는 지인에게서 얻은 필담 내용을 베껴서 신문사에 보낸 것이다.
이 기사에는 도착 날짜가 ‘6월 17일’, 문정 날짜가 ‘6월 18일’로 기 재되어 있다.
6월 20일 부산을 출항한 후 동해 연안을 따라 영흥만까 지 올라갔다가 29일 부산으로 돌아왔다는 「조선국회항잡지」 수록 내 용까지 교차해서 검토해 보면 투서에서 날짜 표기상 ‘卄’자를 ‘十’자 로 오인하여 옮겨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기사에 나오는 17일 은 ‘27일’, 18일은 ‘28일’로 보아야 이곳 일정을 마친 다음 곧바로 부 산에 도착하는 항해 일정과 부합한다.
운요함은 “조선국 동해안 연구로 순항할 것을 기도”하면서 6월 20 일 오전 0시 35분에 부산에서 출항하였다.
함경도 지역에는 이달 21일 도달하였다.
22일 영흥부의 ‘라자레프 항’, 즉 원산에 도착하였다.
운요함 승선 장교는 이곳이 동해안에서 ‘부산 다음의 좋은 항구’로 “유사시에 우리가 취한다면 유용한 장소”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항만과 하천의 측량, 지리와 토지 등의 풍토 조사 등을 하도록 이노 우에 함장은 부하들을 육지로 내보냈다.
운요함의 접근을 보고 몰려 든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복장을 구경하고, 연초를 비롯한 물품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에 건면을 던져주자 이것을 줍기 위해서 사 방에서 조선인들이 몰려들었다.
이 모습을 보고 운요함 승조원들은 “우매하고 비열하며 추하다.”며 조선인을 조롱하였다.
또한 “토지의 불결함과 인민의 나태함, 기타 모습이 실로 야만(野蠻)의 기풍”을 면하지 못한다고까지 표현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멸시관을 드러냈다.
이들이 상륙하자 조선 지방관이 문정을 하러 나왔고, 이들은 간단하 게 필담을 하였다.
조선 관리는 어느 나라 함선으로, 이곳에 왜 왔는 지를 물었다.
운요함 승조원은 이 배가 일본 군함으로 외국에 파견 한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각국을 순항하는 중이므로 조금도 의심할 것은 없다고 답하였다.
운요함에서는 부산항에서 준비해 온 조선 동전을 사용하여 정어리 등의 생선을 구매하려 했으나, 조선인 들은 연초와 맞교환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하천 등을 측량하는 작 업을 마친 후, 운요함은 6월 25일 오후 2시 넘어 원산에서 떠났다.38)
운요함은 6월 27일 오후 5시 무렵에 영일만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9시 사관 2~3명이 ‘측량을 위해서’ 상륙했다.39)
38) 운요함이 원산 지역에 정박하면서 지역민들과 접촉한 정황은 「朝鮮國回航雜 誌」 수록 기사의 내용에 기초하여 서술하였다. 참고로 자료 하단에 찍힌 숫자 를 기사별로 병기하였다.
39) 「朝鮮國回航雜誌」 1875. 06. 28. 기사. “오전 9시 호시야마(星山) 중기관사(中機 關士), 쓰노다 소위, 진구지 소위보가 측량을 위해서 큰 하천을 거슬러 인가가 있는 곳에 갔다.”(1834) “사관이 하천 안 등을 측량하도록 하기 위해 파견하였 다.”(1870)
원산 지역과 마찬가지로 영일만에서도 유사시 병력 주둔에 편리함이 있는지 탐색 하기 위해서 일본 장교들은 상륙하여 정탐 활동을 벌였다.
당시 일 본인들을 맞아 문정을 나온 조선 지방관은 영일현감(迎日縣監) 김명 구(金命求)였다.
그는 경주진관 병마절제도위(兼慶州鎭管兵馬節制 都尉)를 겸직하고 있었다.
운요함 관계자가 ‘측량 목적’으로 상륙했 다고는 하나, 이것은 엄연히 일방적으로 행한 불법행위였다.
조선 지방관으로서는 엄연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양선에서 병력이 상륙해 서 접근해 왔던 만큼 이를 경계하면서 ‘병력 1천 명’ 정도를 이끌고 해안가로 나왔다.
이들이 상륙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조선 측은 백사장에 막을 설치하고 현감의 수하들을 선발하여 운요함으로 보냈다.
조일 간 문답은 오후 2시 무렵부터 진행되었다.40)
40) 「朝鮮國回航雜誌」 1875. 06. 28. 기사(1841)는 ‘오후 1시 58분’부터라고 적혀 있 다. 사관들이 어느 국가, 어느 지역 출신이며, 몇 명 정도가 왔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먼저 있었다. 그 후에 영일현감의 부관들이 운요함에 승선하여 함장과 문정을 진행하였다.
양측은 먼저 각각을 대표하는 관리의 이름과 직위부터 확인하였 다.
운요함장은 자신의 직책이 해군 좌관(海軍佐官)으로, 성은 후지 와라(藤原), 이름을 요시카(良馨)라고 소개했다.
조선 관리는 조선과 일본이 ‘교린의 나라(交隣之國)’인데, 운요함이 연고도 없이 이곳 에 와서 정박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일본 사관은 “대일본제국 군함은 동맹 제국과 외국에 파견하여 우리나라 인민을 보호하려고 각국을 순항하므로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아울러 군 함은 각국의 해상을 항해하면서 가끔은 항구에 정박하기도 한다고 했다.
타국을 돌아다니면서 필요에 따라 각국 항구 안에 정박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굳이 문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다.
아직 조선과 정식 조약을 체결한 국가도 아닌 상황에서 다른 체결국을 거 론하면서 자신들의 연해 측량과 정박을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관리는 함선에 적재한 물건들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묻고 탑승 자 이름과 인원수 등을 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일본 군함이 “검수(檢搜)를 받을 이유는 없고”, 이러한 요구는 ‘억지’이며, “각국 해양을 횡행하면서 각국의 여러 항구에 닻을 내리기 때문에 매사 너 희들의 문정을 받을 겨를이 없다.”고 답하였다.41)
조선 관리 중 한 명이 품질이 좋은 술병이 있으면 두 병을 달라고까지 요구하였다가 일본 측이 크게 반발하면서 이들은 함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노우에 함장은 문정을 하러 온 조선 관리들이 일으킨 문제를 따지기 위해 가와무라 중위를 비롯한 ‘사관 5명’과 소총을 소지한 수행 원을 장막을 설치하고 나와 있던 영일현감 측에 파견하였다.42)
운요 함 사관들은 영일현감을 찾아가는 길에 호기심을 가지고 몰려든 조 선인들의 ‘북적북적함(雜沓)’을 두고 ‘체재가 없다.’고 보았다.
데려 온 조선 병사들도 “대오가 없고 호령도 실시하지 않는다.”면서 기율 이 잡히지 않은 병력이라면 몇 만이 있더라도 운요함 승조 인원만으 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43)
조선 측 병비(兵備)의 허 술함을 포착하면서 이것을 충분히 활용할 만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 에 2차 도항 당시 조선 측에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으 로 볼 수 있다.44)
김명구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가와무라는 “우리나라가 이처럼 애 매한 문정을 받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면서 문정을 핑계로 술병까 지 요구한 조선 관리의 행태를 문제 삼았다.
김명구는 문정 중 술병 을 요구한 관리를 처벌하겠다고 답하고, 문제를 일으킨 관리를 끌어 내도록 명했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지방관이 엄히 처벌하겠다는 의 사를 밝히자 일단 일본 측에서는 사정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일시적 으로 저지른 과오이니 처벌하지 말고 용서해 달라고 요청했다.45)
41) 이 부분의 문답이 朝野新聞 기사에는 빠져 있다.
42) 신문 기사에는 ‘사관 5명’이라고만 표현하였으나, 「朝鮮國回航雜誌」에는 가와 무라 중위, 다치미와 쓰노다 소위, 진구지 소위보, 야부치 소주계의 이름이 나 온다(1844).
43) 「朝鮮國回航雜誌」 기사(1896)
44) 이노우에 함장의 판단과 발언 관련 내용은 각주 77번 인용자료를 참고할 것
45) 「朝鮮國回航雜誌」에는 ‘문정별포장수기(問情別砲將手旗)’를 들고 가서 술병 요구로 사단을 낸 관리를 ‘곤(棍)’을 치도록 지시한 모습을 보고, “귀국의 법 률이 실로 엄중하니 우리들이 이를 알겠다.”고 필담한 대목이 실려 있다 (1900). 朝野新聞 기사에서는 이 대목이 빠졌다.
형벌을 3~4회 집행한 후, 일본 사관들이 영일현감을 누차 만류하고, 조선 측 법률 집행의 엄정함과 사죄의 진의를 함장에게 잘 전달하겠 다고 하면서 형 집행을 중지하였다.
이를 두고 투고자는 술병 요구로 “외국인이 보는 앞에서 이처럼 치욕을 받으면 실로 참기 어렵다.” 면서도 “그다지 부끄러운 모양도 없는” 조선인들이 얼마나 “염치가 없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혹평하였다.
투고 기사는 전체적으 로 「조선국회항잡지」에 실린 문답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투고자 가 맨 마지막에 “다만 필담의 문장은 거칠게 베껴서 보내기 때문에 아마도 잘못 베낀 전도(轉倒)도 있을 터이니 이를 용서해 주면 다행 이겠다.”고 밝혔듯이, 문답 순서가 약간 뒤바뀌거나 누락된 문구가 있는 정도이다.
투고자는 이 내용을 “저들 지방에 있는 한 친구”로부 터 얻었다고 밝혔다.
한문으로 된 필담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된 것 으로 볼 때, 운요함이 부산을 거쳐 나가사키로 복귀하던 길에 문정 에 참여했던 장교 가운데 한 명이 지인에게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도쿄니치니치신문 기사에 실린 기사까지 고려해 보면 정보 원은 가와무라 중위였을 가능성이 있다.
운요함이 경상도 연안에 정박하면서 조선 관리들과 접촉한 정황 은 또 다른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46)
지역명을 거론하지는 않았 지만, 앞서 서술한 도착 날짜와 문정 날짜가 각각 27일과 28일로 일 치하는 만큼 영일현 앞바다에 정박한 후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 사관들이 상륙하려 하자 조선 측에서 병사들 을 이끌고 와서 상륙을 막았다.
조선 관리는 “우리나라의 법제는 타 국 관민이 몰래 상륙하는 것을 금지한다.”며 만약 땔감과 식수를 필 요로 한다면 먼저 함선에 가서 인원과 탑재한 물건을 살펴보겠다고 말했다.47)
46) 依田準之助 編, 1887, 앞 책, 110~112쪽
47) 「朝鮮國回航雜誌」 1875. 06. 28. 기사(1873). “우리들은 군관으로 명을 받들어 문정하러 왔다. 이국의 선박이 만약 와서 정박하면 곧 지방관(土主官)이 전례 에 의거하여 문정을 하고 도신(道臣)에게 보고한다. 그러면 도신은 국왕께 계문(啓聞)을 한다. 이것이 곧 우리나라 법의 취지이다. 타국 사람이 육지에 내 리도록 할 수 없으며, 우리나라 국법에서 금지하고 있다.”
조선 측은 문정을 하는 기본적인 절차에 따라 해안가에 나타난 일본인들에게 대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여러 척의 작은 배를 타고 함선으로 건너와 총포와 기관을 살펴보았다.
그런 가운데 한 관리가 술을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정한다고 함선에 건너와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조선 관리가 한 말에 ‘무례함’을 느낀 일본 측에서는 “우리 함선이 항행하여 만국으로 가는데 일찍이 정박을 금지하고 상륙을 거부하는 일은 보지 못했다.
무슨 까닭으로 귀국을 위해서 상륙을 금지하고 함내를 사열하려는 이치가 있겠는 가?”라고 반문했다.48)
48) 「朝鮮國回航雜誌」 1875. 06. 28. 기사(1884). “우리 선박은 곧 군함이다. 어떻게 너희들의 점검 수색을 받을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말하는 바는 모두 존 경을 잃은 것으로 억지일 뿐이다. 우리 군함은 각국 해양을 횡행하기 때문에 때때로 각국의 여러 항구에 닻을 내린다. 따라서 매사 너희들의 문정을 받을 겨를이 없다. 속히 떠나라.”
앞서 나온 일본 사관의 발언과 맥락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문정을 위한 승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가운 데 일본 함선은 어느 곳에든지 가서 정박할 수 있다고 전제한 발언 이기도 했다.
이 말을 듣고 감정이 상한 조선 관리들은 일단 함선에 서 물러났다.
다음 날 양측은 다시 교섭을 진행하여 조선 관리들이 재차 함선으로 건너왔고, 이때 함장이 나서서 양측 감정이 상한 상 황을 수습하면서 “양국의 교의(交誼)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모 쪼록 일을 잘 처리하여 영원히 이웃과의 교제(隣交)를 온전하게 하 려 한다.”고 말했다.
이 다음에 나온 조선 측 대응이 술을 요구했던 관리를 처벌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조선 측에서는 부관의 일시적인 과오에 대하여 국법에 따라 엄정하게 징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 측도 해당 관리를 용서해 주라고 요청함에 따라 일단 문제가 되었던 상황은 매듭이 지어졌다.
물론 이 와중에도 운요함은 영일만 인근의 상황도 대략 파악을 마쳤으므로, 28일 오후 6시 40분 이곳에 서 출발하였다.
민란이 발생한 울산부(蔚山府)에도 기항하려 하였으 나 특이사항을 발견할 수 없어 29일 오후 3시 35분 부산항으로 복귀하였다.49)
49) 「朝鮮國回航雜誌」 기사(1904) 1875년 운요함(雲揚艦)의 조선 연안 정탐 활동과 신문보도 293 고 “풍속이 야비(野鄙)하고 게으르니 실로 포복하지 않을 수 없다.” 고도 표현하였다.
3. 1차 도한 문정 관련 기록에 나타난 특징과 운요함장의 조선 인식
앞서 검토한 여러 기록을 교차해 보면 경상도 영일현 앞바다 (Unkovsky Bay)에 정박한 운요함에서 조일 양국이 어떠한 방식으 로 문정을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자국에 유리한 부분을 우선 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적지 않은 만큼 주의가 필요하기는 하다.
초야신문에 게재된 나가사키 거주인의 투고 기사를 통해 필담으로 진행된 문답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회본명 치태평기대전에는 양측의 대응 양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는 상호 보완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두 가지 기록의 출전은 「조선국회항 잡지」로, 조금씩 구성이 다르기는 하나 전체적인 대화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국회항잡지」 수록 기사는 두 자료에 나오지 않는 당시 분위기와 인상 등을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 성이 있는 원자료이다.
여기서 이노우에 함장은 조선 연안에 정박할 경우 지방관이 문정을 나온다는 사실,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좋을지 에 대하여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은 기억해 둘 내용이다.
초야신문 투고 기사가 나간 이후 운요함 승조원들이 영일현감과 접촉한 내용은 1875년 10월 초 도쿄니치니치신문에 「조선신보」 란 제하의 기사로 좀 더 상세히 보도되었다.
영일현감 김명구가 운 요함으로 문정을 하러 건너올 때 ‘문정별포장수기(問情別砲將手旗)’ 와 ‘문정군관표기(問情軍官標記)’를 휴대한 수행원이 있었다.
이 기 사에서는 문정을 하러 온 조선인 관리 세 명에 대한 인상을 묘사하 였는데, ‘조선국의 불개화(不開化)’와 관리의 ‘백치(白痴)’ 같은 모습 에 대한 편견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수행해 온 병사들의 모습을 두고 “풍속이 야비(野鄙)하고 게으르니 실로 포복하지 않을 수 없다.” 고도 표현하였다.50)
또한 술병을 달라고 요구한 데 대하여 “함장과 사관은 저들이 과대한 말을 하고 또한 예의를 잃은 데 분개하였다.” 는 서술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51)
50) 이 부분은 「朝鮮新報 第五」(東京日日新聞 1875. 10. 09.)에만 나오며, 朝鮮軍 記에서 빠진 내용이다.
51) 「朝鮮新報 第四」 東京日日新聞 1875. 10. 08. 52) 1875년 7월 雲揚艦長 井上 海軍少佐→海軍指揮, 「朝鮮國回航雜誌」(1905~1909) 294 韓國史硏究(202)
이 연재기사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용을 편집하고 삽화를 추가하여 조선군기란 제목의 책자로 출판되었다.
영일현감과 이노우에 함장 사이의 문정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으로 소개하되, 기사에 나온 함장과 선원들의 조 선인들의 행동에 대한 ‘흥분’과 관련된 내용은 최종 출판물에서 사라졌 다.
일본군이 조선인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 제한 것으로 보인다.
운요함의 1차 도한과 관련하여 여러 신문에 관련 기사가 게재되고, 출판물로까지 간행되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었다 는 사실은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현안이었음을 보여준다.
1차 도항과 조선 동해안 정탐 활동을 마치고 나가사키로 복귀한 이 노우에 함장은 1875년 7월 1일자로 해군 지휘부에 활동을 보고하면서 조선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일본 측의 일방적인 복제 개혁에 따라 응접을 거부한 조선 측의 행위를 두고 이것은 ‘무례’한 행동으로 일본의 ‘국위(國威)’를 훼손한 일이며, “수백 년 이래 불개화한 습속 으로 실제로는 완고하고 우매”하기 때문에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치가 가혹하여 인민이 심히 괴로워하 여 위를 원망”하는 상황에서 울산부의 민란 발생 같은 내환(內患)까 지 발생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로 보았다.
따라서 이노우에는 “필히 조속하게 출병할 것을 희망”한다면서 야간에라도 병력 동원의 지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였다.52)
52) 1875년 7월 雲揚艦長 井上 海軍少佐→海軍指揮, 「朝鮮國回航雜誌」(1905~1909)
운요함의 2차 조선 도항 당시 강화도 인근에서 무력 도발을 감행하려는 이노우에의 상황 판단은 1 차 도항을 통해서 이미 명확해졌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Ⅲ. 3일에 걸친 강화도 일대 공격과 나가사키 복귀에 대한 일본신문의 신속한 동향 보도
1. 여러 기록을 교차해서 본 운요함의 2차 도한과 3일 간 무력도발 양상
1875년 7월 일본으로 회항한 운요함은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神 戶)에 기항하였다.
운요함은 8월 26일 고베에서 출발하여 다시 나가사키로 향하였다.53)
서해안을 북상하여 청국 잉커우(營口)까지 가는 수로를 측량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9월 12일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 출항하였다.54)
9월 20일부터 3일에 걸쳐 운요함이 강화도 초지진(草 芝鎭)과 영종도(永宗島), 항산도(項山島)를 왕래하면서 공격하고, 노획물을 나누어 실은 후 9월 28일 나가사키로 돌아간 경과는 잘 알 려져 있다.
나가사키 도착 후 다음 날 이노우에 함장이 작성한 보고 서가 존재했고,
10월 8일 공식보고서를 제출할 때까지 많은 조작이 내용상 가해졌다는 사실도 선행연구에서 상세히 규명하였다. 여기서는 운요함장의 보고서 이외에 새로운 자료를 몇 가지 추가 하고, 기존에 밝혀진 내용에 기초하여 9월 12일 운요함의 출항 이후 강화도 연안에서 발생했던 조일 간 무력 충돌의 경과를 서술해 보려 한다.
당시 운요함에 승선했던 포병 스즈키 가이이치로(鈴木魁一郞) 가 친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초야신문에 실려 있다.55)
53) 東京日日新聞 1875. 10. 13. 3면 3단 ; 朝鮮軍記, 65쪽
54) 이노우에는 “때마침 9월이 되어, 나는 본국 정부의 훈령 전보를 받았다. ‘귀관 은 한국 서해안에서 청국 잉커우까지의 해로를 연구한다는 명의하에 시위운 동(示威運動)을 계속했으면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라고 기억했다. 하 지만 1차 도항과 달리 운요함의 2차 조선 출항을 승인하는 해군성 문서는 아 직 공개되지 않았다(井上良馨, 1929, 앞 자료, 105쪽 ; 김흥수, 2009, 앞 논문, 240쪽).
55) 「雜錄」 朝野新聞 1875. 10. 13. 2면 4단. 스즈키의 경우 1876년 10월 31일 운요 함이 난파되던 시점에는 탑승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승선 인원 75명의 생존자와 사망자 전체 명단은 다키노(瀧野) 함장이 작성한 「雲揚艦難破ニテ始 末書」를 수록하고 있는 와카야마현립도서관 소장 자료에서 확인 가능하다( 海軍省所轄軍艦雲揚艦難破諸上申控, 16~21쪽).
서한 가운데 앞뒤로 약간 생략된 내용이 있기는 하나 운요함이 나가사키에서 출 항한 이후의 상황을 날짜별로 기술하였고, 기존에 알려진 공문서나 외교문서에는 없는 정보까지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새 자료이다.
이달(-9월, 인용자) 12일 당 항구(-나가사키, 인용자)를 출발하여 13 일 고토(五島)에 도착했다.
15일 오후 1시 조선국 평안도(平安道) 청산 진(靑山鎭) 항구에 들어갔다. 사관이 오인하여 얕은 곳에 올라가버려 상당히 곤란했다.
6시 반 넘어서야 깊은 데로 나아가 정박하였다.
이 항구에는 인가(人家)가 상당히 있었다.
17일 오전 10시 이 항구를 출 발, 19일 오후 4시 반 조선 도부(都府)의 강구(江口)에 도착했다.
이곳 으로부터 도성까지 20리라고 하므로 여기서 정박하였다.56)
운요함은 9월 12일 오후 4시 나가사키에서 출항했다.
9월 29일 보 고서에서는 고토(五島) 다마노우라(玉ノ浦)에 기착했다는 내용만 적혀 있는데, 스즈키 편지에는 13일 도착했던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출발하여 다음으로 향한 곳이 청산진이었다.
기존 문서에는 15일부 터 17일 사이 운요함의 항적(航跡)이 나오지 않으며, 강화도 인근 해 역에 도착하여 닻을 내린 19일부터 기사가 시작한다.
기사에는 ‘평안 도’ 지역이라 나오지만, 조선에서 ‘청산진’이 설치되어 있던 지역은 전라도였으므로, 지역명은 작성자의 착오로 보인다.
15일부터 이틀 동안은 청산진 근처에 정박하면서 지역 정보를 수집하였던 것 같다.
여기서 17일 아침에 출발한 후 운요함이 월미도 앞바다에 도착한 시 점은 9월 29일 보고서의 기재 시각과 같다
. 이 때 이노우에는 요코하 마(橫濱)에서 서양인으로부터 입수한 한강 부근의 지도를 소지하였 으나, 실제로는 항해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기억하였다.57)
56) 「雜錄」 朝野新聞 1875. 10. 13. 2면 4단
57) 井上良馨, 1929, 앞 자료, 105쪽 296 韓國史硏究(202)
20일 이곳을 출발, 항구로부터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정박했다.
이날 함장을 비롯하여 사관과 해병, 수부와 화부가 같이 보트를 타고 3리 정 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 근처 해안에 성으로 생각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그 포대로부터 우리 보트를 향해 갑자기 크고 작은 포를 난발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소총을 쥐고 여기에 응전하였으나 그 기 세를 당해내기는 어려웠다.
다행히도 본함까지 무사히 퇴각했다.58)
20일은 이노우에 함장을 비롯하여 사관들과 병력이 보트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날이다.59)
58) 「雜錄」 朝野新聞 1875. 10. 13. 2면 4단
59) 1875년 9월 29일 雲揚艦長 海軍少佐 井上良馨 報告書,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航 記事. “井上少佐星山中機關士立見少尉角田少尉八州少主計高田正久神宮司少尉補、 午後一時四十分、端艇ヲ乘リ出シ江華島ニ向ケ進ム”
초지진 포대를 거쳐 올라가려다가 조선 측에서 공격을 받게 된 시간대별 상황은 29일 보고서 서술이 상세한 편이다.
조선 측에서는 무단으로 영내에 들어온 선박으로 판 단했기 때문에 발포했다.
보트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일본 군인들 은 휴대해 간 소총으로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성으로 생각되는 세 군데란 29일 보고서에서 각각 제1포대, 제2포대, 제3포대라고 기재했 던 곳에 대응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측의 맹렬한 공격을 감당 하기 어려웠지만 함선으로 무사히 퇴각했다는 내용은 일치한다.
이 들의 복귀 시간은 저녁 9시였다.
21일 오전 7시 함 내에 일동이 정렬했다.
함장이 바로 무리를 향하여 물었다.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무리가 모두 흥분 하여 말했다.
“저들은 먼저 신문하지 않고 제멋대로 우리 배에 발포했 다.
만약 이대로 퇴각한다면 정말로 일개 함선으로서는 큰 치욕이다.
오히려 본 함선이 진격하여 저들에게 보복하자.”
함장이 곧 명령을 내 려 곧바로 저들 포대를 향하여 본 함선이 13~14町 정도 떨어진 곳까지 나아갔다.
저들 역시 맹렬하게 크고 작은 대포를 난사했다.
우리 함선 에서는 100斤, 40斤, 20斤 등의 포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적은 아예 움 직이지 않았다.
따라서 함선이 나아가 상륙하려고 했으나, 근처 바다 수심이 얕아서 여의치 않았다.
2시 넘어서 30町 정도 물러나 보트 를 타고 상륙하여 포대를 접수했다.
인가와 진영에 불을 지른 후 본영 으로 복귀했다.
4시 경기도 영종성(永宗城)에서 2리 떨어진 앞바다에 정박했다.60) (밑줄은 인용자)
조일 양국 병력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은 21일이 었다.
29일 이노우에 함장의 첫 보고서에는 새벽 4시부터 전원이 기 상해 있었고 8시에 전원 집합했다고 하였다.61)
그러나 위 기록에 따 르면 승조원이 갑판에 정렬한 시간은 이보다 한 시간 가량 더 빨랐 다. 이노우에 함장의 최초 보고와 달리 국기를 게양했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함장과 선원들의 발언을 놓고 보더라도 저쪽에서 먼저 발포했는데 이대로 퇴각해 버리면 ‘일개 함선’으로서는 치욕이 기 때문에 보복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서술이 기사 게재일로부터 이틀 후 간행된 조선군기에도 거의 그 대로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62)
수록 기사의 저본인 도쿄니치니치 신문 10월 13일 기사에는 없던 내용이다.63)
60) 「雜錄」 朝野新聞 1875. 10. 13. 2면 4단
61) 이노우에는 21일 오전 4시에 전투준비를 명령했다고 기억하였다(井上良馨, 1929, 앞 자료, 106쪽).
62) 朝鮮軍記, 67쪽. 전투 둘째 날 아침 함장의 선동 발언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해당 날짜를 ‘20일’로 혼동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63) 東京日日新聞 1875. 10. 13. 3면 3단
아래 표에 비교해서 제 시한 표의 밑줄 친 부분에서 잘 드러나듯이 출판 과정에서 편집자가 초야신문 기사를 보고, 정황 서술을 보완해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표 1> 1875년 9월 21일 전투 상황에 대한 도쿄니치니치신문과 조선군기 수록 기사 비교 :
< 東京日日新聞 1875년 10월 13일 3면 3단>
다음날 20일에는 본함이 지방 가까이 나아가가도록 하였지만, 깊 이 때문에 전진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먼 바다에서 포대를 보고 대포를 쏘았는데, 파열탄 2대는 확실히 성채 안으로 들어갔으므 로, 필시 살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朝鮮軍記 67~68쪽 >
다음날 20일 함장이 무리에게 물어서 말하기를, “이대로 하여 물러서겠는가 말겠는가?” 대중이 모두 흥분하여 말하기를, “저들을 일단 신문 없이 멋대로 우리 작은 배를 향하여 발포하였다. 만약 이대로 하여 물러난다면 진정으로 함선 한 대의 커다란 치욕이 된다. 오히려 본함이 진격하여 저들의 죄에 보복해야 한다”고 하 였다. 이에 함장은 곧 명령을 발포하였다. 지방 가까이 본함이 나아가도록 하였지만 어찌하겠는가? 깊이 때문에 전진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먼 바다에서 포대 장소를 바라보고 대포를 쏘았다. 파열탄 2대는 확실히 성채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필시 살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밑줄 친 부분은 추가된 서술)
보고서에서 ‘국가의 치욕(國辱)’이라고까지 기재했던 것과 달리, 현장에 있던 스즈키의 수기에는 국기와 국가를 강조하는 대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보고서를 작성해서 본국에 보고해야 하는 함장 입 장과 선내에서 보복해야 한다는 흥분을 기록한 병사 사이의 입장차 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제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로 보복해야 한다 는 선내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이노우에 함장은 공격하라는 명령 을 내렸다.
초지진의 약 1.4~1.5km 앞까지 나아간 운요함은 20파운 드, 40파운드, 110파운드 포탄을 발사했다.
29일 보고서에 따르면 일 본 측에서 먼저 40파운드 포를 시험 발사하자 조선 측에서 대응사격 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조선에서 쏜 대포는 12cm 구경의 대완구(大碗口)로 사정거리가 약 700~800m 정도에 불과하 여 대부분 바다로 떨어졌다.64)
64) 李瑄根, 1961, 韓國史 最近世篇, 乙酉文化社, 377쪽 ; 姜在彦, 1975, 「江華島事件前後」 季刊三千里 3, 60쪽 출처 서술 내용 67~68쪽
발사 후 탄약을 장전하는 데에도 수 십 분이 걸렸다.
따라서 일본 측에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오후 2시 넘어서(보고서로는 2시 40분) 일본 병력은 보트를 타고 항산도(보고 서의 제2포대)에 상륙하여 포대를 점령하고 불을 질렀다.
그 후 이들 은 함선으로 복귀했다.
22일 오전 6시 넘어 영종성의 동남쪽에 가서 성으로부터 14町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섬에 도착했다.
여기서 점차 나아가 10町 정도의 거 리에서 갑자기 발포하였는데, 적이 크게 패하여 도망치는 기색이 현저 했다.
우리 함선이 차츰 앞으로 나아갔고, 보트를 풀어 상륙했다.
사관 오가사와라(小笠原) 중위, 쓰노다(角田) 소위, 진구지(神宮司) 소위, 야부치(八淵) 소위, 포병 병사 6명, 수부와 화부(水火夫)까지 도합 31 인이 성문에 접근했다.
성의 좌우에서 비가 오듯이 소총을 난사했다.
보병 오시게 아무개(大重某)를 비롯하여 일동은 필사적으로 근처 석벽을 올라갔고, 결국 성에 들어가 큰 소리를 지르니 적병이 크게 낭패하 여 패주했다.
오전 9시 무렵 성에 불을 지르고, 마침내 대포 36문, 기타 소총과 도검, 깃발 등을 나누어 포획하고 함선으로 가져왔다.
우리 병 사는 전사가 한 명, 부상 한 명뿐이었다.
저들 사망자는 80~90명일 것 이다.65)
셋째 날인 22일 아침 운요함은 영종도로 향했다.
아침 6시 넘어 영 종도 동남쪽으로 이동했고, 성으로부터 약 1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발포하면서 전투를 개시했다.
보고서에서 6시 16분에 무기 를 장전하여 전투 준비에 들어갔고, 1시간 후 포대 전방 약 900m 앞 까지 전진하여 40파운드 포를 쏘기 시작했다는 내용과 별 차이가 없 다.
보트에서 일본군 병력이 상륙한 후에는 공성전이 벌어졌다.
전투 에 참가한 오가사와라 쓰네미치(小笠原恒道), 쓰노다 히데마쓰(角田 秀松), 진구지 소위를 거명한 것은 동일하다.
다만 전체 전투 동원 인원수는 22명과 31명으로 약간 차이가 난다.66)
이노우에 함장의 9 월 29일 보고서에서는 오가사와라 중위를 비롯하여 전체 28명이 전 투에 가담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22명은 인솔하였던 ‘총대(銃隊)’라 적혀 있다.67)
65) 「雜錄」 朝野新聞 1875. 10. 13. 2면 4단
66) 朝鮮軍記는 사관과 해병, 수부를 합쳐 32명이 영종성 근처에 상륙하였고, 오 가사와라 중위와 쓰노다 소위 등이 선봉에 서서 성내에 진입했다고 기술하였 다. 전투에 참여한 오가사와라와 쓰노다는 東京日日新聞 1875년 10월 13일 기사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 두 명의 이름은 이노우에의 회고담에 나 온다(井上良馨, 1929, 앞 자료, 107쪽).
67) 1875년 9월 29일 雲揚艦長 海軍少佐 井上良馨 報告書,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 航記事
이들은 ‘스나이더 소총(Snider rifles)’을 소지하고 ‘2차 전투(the second assault)’에 돌입하였다.68)
영종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 병력을 ‘약 500여 명 정도’로 추산하였는데, 이것은 이노우에 함 장의 29일 보고서와 영자신문에만 나오는 수치이다.69)
조선 병사들은 조총을 쏘며 일본군이 성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이들이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오는 것 을 막지는 못했다.
29일 보고서는 주로 동문과 북문, 서문으로 각각 진격한 장교들의 이름만 거론하였다.
스즈키는 자기가 아는 오시게 를 비롯한 병사들이 성벽을 타고 올라가 성 안으로 진입했다고 다른 측면을 기록했다.70)
일반 병사로서는 전투에 참가한 동료의 행동을 좀 더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기록에 남겨두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준비해 간 석유로 가옥에 불을 지르고, 운요함에서 지원 포격을 가하면서 조선 병사들은 서문 쪽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이곳도 일본군 6명이 문밖의 만세교(萬世橋)를 절단해 버려 “한 사람도 통과하지 못하였다.”71)
도망갈 길을 잃어버려 옷을 벗고 바다로 급 하게 뛰어드는 조선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해 24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만조였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군기 에는 이때 “대장으로 생각되는 자가 한 명 있었다.”면서 그가 입었던 붉은색 옷소매를 추가로 묘사한 서술이 나온다.72)
항산도 방향으로 도망한 자는 겨우 6~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73)
68) JAPAN AND COREA, The North China Herald, Oct 21, 1875, p. 414
69) 1875년 9월 29일 雲揚艦長 海軍少佐 井上良馨 報告書,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 航記事. “此トキ城中ノ人員ヲ目擊スルニ凡ソ五百余人ナリ” ; JAPAN AND COREA, The North China Herald, Oct 21, 1875, p. 414. “… which is said to have been garrisoned by about 500 men, though probably this is rather an exaggeration. Whatever may have been the exact number in the fort, it is sufficient that they could not resist the steady firing of the marines and soon fled in all directions.”
70) 이노우에는 “2~3명의 병사가 성벽을 쭉쭉 기어 올라가는 모습이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하였는데, 그의 기록에서는 동행한 장교만 거론 하였다(井上良馨, 1929, 앞 자료, 107쪽).
71) 東京日日新聞 1875. 10. 13. 3면 3단
72) 朝鮮軍記, 70~71쪽
73) 東京日日新聞 1875. 10. 13. 3면 3단 ; 朝鮮軍記, 69~72쪽
결국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일본군은 영종성을 점령하였다.
스즈키는 조선 병력이 크게 낭패하여 패주했다고만 짧게 언급하였다.
하지만 29일 이노우에 함장 보고서에서는 살기 위해 옷을 벗고 바 다로 뛰어들거나, 바위 사이로 몸을 숨긴 조선 병사들의 다급한 도 피 모습을 두고 “배고픈 돼지 무리가 광야를 달리는 것과 같았다.”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일본군이 전투에서 노획한 대포 36문, 전사 자 1명과 부상자 1명 등의 결과는 두 기록이 일치한다.74)
스즈키는 전투 중에 조선인들이 80~90명 정도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보 고서에는 사망자 35명 정도, 생포한 인원 5명 등으로 적혀 있다.75)
보고서에서는 동문 앞에 있는 바위 정상에다가 전투 승리의 상징으 로 일본 국기를 꽂았다고 서술하였다.
도쿄니치니치신문과 조선 군기도 “성 위에 히노마루(日の丸) 깃발을 꽂고 수비병을 두면서” 조선의 지원 병력이 추가로 이곳에 올 지 대기하고 있었지만, 육지 에서는 일본군을 치러 오는 “한 발의 포성마저 들리지 않았다.”며, 다음날도 “적막하고 고요”하기만 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하였다.76)
74) 9월 22일 영종성 전투에서 부상으로 당일 사망한 자는 마쓰무라 치요마쓰(松 村千代松), 부상자는 후쿠다 겐지로(福田源次郞)로 모두 1등 수부였다(1875년 9월 29일 雲揚艦,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航記事 ; 1875년 10월 12일 雲揚艦 長 海軍少佐 井上良馨, 「江華島ニ於テ砲擊之節分捕之物品死傷之人名御屈書」 明治八年 朝鮮江華島砲擊始末 卷1[Ref. A03023623600]).
75) 구보는 朝鮮史에서 노획한 대포가 ‘38문’, 조선 병사 ‘30여 명’과 일본 병사 1명이 사망했다고 기술하였다. 대포 수량에서 발생한 약간의 오류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보고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久保得二, 1905, 앞 책, 270쪽). 이노 우에의 회고담은 “사상자 각 1명, 적으로 죽은 자 35명, 포로 12명”이라고 정 확한 숫자를 제시하였다. ‘포로 12명’을 이용하여 노획물을 운요함으로 운반했 다는 내용은 東京日日新聞과 朝鮮軍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는 오히려 조선인 포로 숫자를 줄여서 적은 것이 눈에 띤다.
76) 東京日日新聞 1875. 10. 14. 3면 1단 ; 朝鮮軍記, 72쪽
직접 전투에 참여한 스즈키 같은 병사로서는 전투 경과와 승리 여부, 전리품 취득을 중심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이노우에 함장의 보고서에서 두 차례 거론되는 ‘국기’가 스즈키 기록에는 국가의 상징으로 한 번도 거론되는 일조차 없다는 사실은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이후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할 때까지 핵심적으로 논란이 되었던 사항 가운데 하나가 운요함이 전투 당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는가, 조선 측이 이를 인지하였는가에 있었기 때문이 다.
이것은 국제법 위반 문제와 깊숙이 결부되어 있었고, 일본 정부 가 국제적으로 자신들의 공격 행위를 ‘정당방위’에 따른 대응으로 합 리화하려는 명분을 만들려는 의도와도 관련이 있었다.77)
77) 보트를 타고 이노우에 함장 일행이 3해리 이내의 조선 영해에 진입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려 했던 사실 자체도 문제이기는 했다. 이 문제에 대해 후대의 회고이기는 하나 이노우에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며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없 었다고 변명했다. 선행연구에서도 주목한 내용이다(김종학, 2016, 앞 논문, 29 쪽 ; 海軍歷史保存會 編, 1995, 日本海軍史 第1卷, 東京: 海軍歷史保存會, 225~226쪽). “뭍에서 3해리 바깥이라면 공해(公海)이겠지만, 그 이내 특히 하 천 안으로 들어가 이틀(二日)이나 있었다고 한다면 타국의 영해에 들어가 전 쟁을 한 것이 되므로, 국제공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논의가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3해리 이내가 영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법(國際公法)에서 석탄과 물(炭水)이 부족할 때는 상황에 따라 어느 곳의 항만을 가더라도 무방 하다고도 했다. 나도 이번에는 맑은 물(淸水)을 찾으러 갔는데,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井上元帥談」 海軍逸話集 第1輯[藤田定市 編], 東 京: 財團法人有終會, 1930, 13쪽). 日本海軍史의 경우 이노우에 함장이 보트 를 타고 염하를 거슬러 올라간 행위는 당대의 국제법 조문을 놓고 보더라도 ‘위법’하다면서도 “적극적인 ‘도발’ 의지가 있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고 기술하였다. 설령 위법한 행동을 했더라도 “조선 측이 경고 없이 대포를 쏜 것은 온당한 제지수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면서 사건 발생의 책임이 양쪽 모 두에게 있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였다(海軍歷史保存會 編, 1995, 앞 책, 226쪽). 본문에서 다루었지만 1차 도항 당시 조선 지방관과의 문정 경험, 2차 도항을 하기 직전 이노우에 함장이 해군성 본부에 보고한 보고서 내용을 아울러서 고 려해 보면 의도적으로 군사 도발을 감행하였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스즈키는 전투 경과를 서술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투 참여와 공적을 동생에게 알렸다.
그에 따르면 5명을 토벌했고, 1명을 생포했 다고 한다.
그는 9월 22일 영종성을 점령하였던 일을 두고 8년 전인 1868년 보신전쟁(戊辰戰爭)에 참가하여 음력 8월 23일 아이즈번(会 津藩)의 와카마쓰성(若松城)을 함락시킨 옛 추억을 떠올렸다.
음력 과 양력을 정확하게 환산해 보면 물론 날짜상 차이가 있기는 하나, 성 두 곳을 함락시키는 전투에 참여했던 흔치 않은 경험을 했던 만 큼 스즈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처럼 전투 경험을 서 한으로 남긴 스즈키 외에도 승선자 가운데 “9월 21일, 22일, 조선국 경기도 영종성에서 전쟁”이라고 이력서에 그 경력을 기재한 해군기 관공장(海軍機關工長) 오노 유키노리(大野行則)가 있었다.78)
운요 함 승선자에게 강화도와 영종도의 3일 간 전투는 생생한 기억이자 경험이었던 만큼, 관계자 가운데 회고담이나 이력서 등 관련 기록을 남겨둔 자가 더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2. 나가사키 귀항 후 운요함의 조선 내 전투 상황에 대한 보도와 일본 내 동향
운요함은 다음날까지 영종성에 남아 있던 전리품을 수습한 후, 24 일에는 급수까지 마친 다음 조선 해역을 떠났다. 나가사키에는 9월 28일 오전 11시가 되기 전에 도착하였다.79)
이날 11시 25분 운요함 함장은 사건 전말을 가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義) 해군대보(海軍大 輔)에게 전투 상황과 노획물, 사상자수를 개략적으로 타전하였다.80)
29일에는 이달 12일 출항부터 28일 귀항할 때까지의 사건 진행 일지 와 포획물품 목록을 정리하고, 수집한 영종성 도면을 첨부하였다.81)
78) 「明治18年11月20日 故海軍機関工長大野行則給助金下賜の件」(Ref. C11019610700). 여기 수록된 「이력명세서(履歷明細書)」에 따르면 오노는 덴포(天保) 7년(1836) 생으로, 1871년 11월 29일부터 운요함에서 2등 기관수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아사마함(淺間艦), 세이키함(淸輝艦), 치요다함(千代田艦) 등에서 기관사 보, 기관공장(機關工長)으로 승선하다가 1885년 10월 25일 사망하였다.
79) 東京日日新聞과 朝鮮軍記에는 모두 ‘29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것으로 서술 하고 있으나, 이노우에 함장의 보고서는 ‘28일 오전 10시 49분’이라고 일시를 기재하고 있으므로 ‘29일’은 일자 표기 오류이다. 회고담에서는 “28일 오전 10 시 50분 나가사키에 갔다”고 서술하였다(井上良馨, 1929, 앞 자료, 109쪽).
80) 1875년 9월 28일 오전 11시 25분 長崎 雲揚艦長 井上 海軍少佐→川村 海軍大輔, 明治八年 朝鮮江華島砲擊始末 卷1(Ref. A03023622800)
81) 1875년 9월 29일 雲揚艦長 海軍少佐 井上良馨 報告書,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 航記事 硏究(202)
덧붙여 10월 1일 삿사 도모후사(佐々友房)가 도쿄에서 받은 전보 에서 9월 28일 함장이 해군대보에게 보낸 전보 내용을 거론하고 있 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문서에는 강화도를 ‘흥화도(興化島)’ 라고 잘못 변환하여 기재한 표현과 부산에서 “육지 직경으로 90리” 란 표현이 그대로 나온다.
20일 ‘보트’로 ‘측량(測量)’을 하다가 조선 측의 ‘발포’가 있어서 응전하였고, 대포 ‘28’문과 ‘소총 그 외’ 물품을 포획하여 가지고 돌아왔다는 문구도 들어 있다.82)
숫자 ‘28’은 ‘삼십 팔(三拾八)’을 옮겨 적고 전보문을 보내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보 인다.
강화도에서 운요함이 벌인 전투 내용이 재야에 있던 인물에게 도 곧바로 전달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나가사 키로 돌아와 하선한 시점부터 운요함에 승선하였던 자들을 통해서 관련된 정보가 타전되고, 신문을 통해서도 시시각각 보도되기 시작 한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10월 5일자 문서에서 9월 30일자 초야신 문에 실린 운요함 동향 기사를 인용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지난 달 30일 초야신문에서, “28일 밤 7시 나가사키에서 보낸 전보 가 정부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운요함은 조선의 모 항구에 닻을 내리고 보트를 통해 항구 안을 측량하였는데, 조선의 포대에서 발포하였다. 따 라서 운요함은 여기에 응하여 전투를 개시하면서 병사를 이끌고 상륙 하였다.
이 포대를 차지하고 진영과 인가를 불태웠다. 그 소식을 모리 야마에게 알렸고, 곧바로 나가사키까지 돌아왔다는 소식이다”라고 한 다.
운요함에 승선한 소좌(少佐)는 이노우에 아무개(井上某)[사쓰마 사람(薩人)이다].83)
82) 「十月一日 東京より報告」 佐々友房文書 卷23(87-3)
83) 「明治八年乙亥十月五日朝寫」 佐々友房文書 卷23(87-3)
이 소식을 듣자마자 삿사는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에게 사 람을 보내어 사건 발생의 진위 여부를 문의하였다.
이타가키는 “전 보는 거짓이 아니다”라고 말하였고, “가장 흥분(最モ憤發)”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일본 정부에서 대회의(大會議)는 10월 2일 개 최하였고, 여기서 ‘정한’을 둘러싼 논의가 결정될 것이라고 전하는 자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후 내부적으로 보고서 내용을 조작하는 과정을 거쳐 10월 8일 보고서 개찬을 끝내고 다음 날 이것을 전달받 은 가와무라 해군대보가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태정대신에게 상 신했다.
9월 29일 보고서와 10월 8일 보고서 간의 내용상 차이와 문 제점은 선행연구에서 여러 공문서철과 개인 관련자료에 간행된 수록 된 함장 보고서를 대조하면서 상세히 검토하였다.84)
보고서를 개찬 하는 사이 10월 3일자 「관령(官令)」란을 통해 운요함이 강화도 근처 를 항해하다가 “뜻하지 않게 저들이 발포하였으므로, 상륙하여 그곳 의 이유를 심문하려 했는데, 저들의 발포가 점차 격렬해졌으므로 부 득이 함선도 발포하였다.
다음 날 결국 상륙하여 포대를 접수하고 병기를 나누어 담았다.”는 내용을 태정대신 명의로 고시하였다.85)
이것은 “유언비어의 전파로 인심이 동요해서는 용이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 대신과 참의(參議)들이 「지방관에게 포달 할 안(地方官へ御達按)」을 회람하고 문구를 수정한 결과였다.86)
84) 김흥수, 2009, 앞 논문
85) 「官令」 読売新聞 1875. 10. 05. 1면 1단. 이 고시 전문은 영문으로 번역되어 상하이 발행 영자신문에도 실렸다(JAPAN AND COREA, The North China Herald, Oct 21, 1875, p. 414).
86) 「雲揚艦ヨリ朝鮮事件電信ノ儀上申」(Ref. A01100106700). 초안을 보면 “뜻하지 않게 저들이 발포하였고, 상륙하여” 부분에 줄을 그어 문구를 삭제하였다. 아 울러 뒷부분은 아예 초안 문구를 전부 삭제하고 새로 용지를 덧대어 문구를 기입하였다. 문안을 회람한 참의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마 시게노 부(大隈重信), 오쿠보 도시미치, 이타가키 다이스케,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 宗則), 이토 히로부미가 찍은 인장이 문서에 남아 있다.
처 음에는 이틀 간 포격과 대응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고시한 후, 다시 하루에 발생한 일로 보고서 내용을 조작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개찬된 보고서가 태정대신에게 올라간 날인 10월 9일, 초야신문 에는 이노우에 함장의 도쿄 도착 소식과 더불어 운요함이 조선에서 벌인 일을 상세히 보도하는 기사가 실렸다.
나가사키에서 발행되고 있던 영자신문 라이징선(The Rising Sun)에 게재된 기사라 소개했 다.
영자신문의 기사 출전은 나가사키신문(長崎新聞)이었다.
이 기사를 라이징선에서 받아서 영문으로 번역, 게재하였다.
이 기사 는 상하이 지역에서 발간되는 노스 차이나 헤럴드 10월 7일자 기 사에 실렸다.
기사는 나가사키 지역신문을 정보원(情報源)으로 하여 지역 간행 영자신문을 통해 상하이 지역으로도 신속하게 전달되었 다.
그것이 다시 도쿄에서 간행되는 중앙지로까지 정보가 전파되는 연쇄가 곧바로 일어났다.
일본 정부에 보고된 공식보고서에서 운요 함이 조선 연해에서 포격을 받은 후 하루 동안 전투를 벌인 것으로 정리된 데 반해, 이 기사는 운요함이 나가사키로 돌아온 지 보름이 지나기 전에 9월 20일부터 22일에 걸쳐 전투를 벌였던 정황을 비교 적 정확하게 서술했다.
지난 화요일 새벽(-9월 28일, 인용자)에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는 조선에서 귀착(歸着)했다.
우리들이 나가사키신문에 의거하여 알게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달 20일 저들 나라 해안을 측량할 때 조선 포대에서 운요함(雲揚艦)을 포격했다. 따라서 이 함선은 곧바로 여기 에 응전하여 쌍방이 대략 30분 가량 발포한 후 중단했다. 다음날 해병 을 상륙시켜 포대 하나를 습격하였는데, 저들로부터 포격이 특히 맹렬 하여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 다음 날(즉 22일) 해병이 다시 상륙하여 위의 포대를 포격하였다. 이번에는 어려움 없이 이곳을 탈취하였고, 포 대 안에 있는 진영(陣營)과 그 근방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전투가 끝 난 후 그 지역을 조사하니 조선인 30인의 사체가 있었다. 그리고 기타 다수는 바다 안으로 뛰어들어 익사했다. 포로가 된 자는 10명, 대포 36 문, 선조총(旋條銃) 10정과 그 외의 제반 물품을 나누어 포획했다. 일본인은 사망자 1명이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것은 라이징선, 즉 나가사키에서 가로쓰기로 발행되는 신문(長崎橫文新聞) 에 기재된 내용이다.87) (밑줄은 인용자)
87) 「朝鮮戰爭の景況少しく詳なる報を左に記す」 朝野新聞 1875. 10. 09. 1면 2~3단
기사는 운요함이 9월 20일 조선의 ‘해안을 측량’하다가 조선 포대 로부터 포격을 받았기 때문에 응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측량’은 나중에 일본 국내의 비판 여론을 의식해 전 신 암호 전달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다고 하면서 ‘탐수(探水)’로 문구 를 바꾸었다.88)
첫째 날 조일 양국의 응전 시간이 ‘30분 가량’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29일 보고서에서 초지진 포대(제3포대) 앞에서 벌어 진 일인데, 오후 4시 30분부터 5시까지 30분에 걸쳐 조일 양군이 응 사했다는 시간과도 일치한다.89)
셋째 날 전투가 종료된 후 ‘조선인 30인의 사체’와 ‘포로가 된 자 10명’이 있다고 했는데, 이노우에 함장 의 9월 29일 보고서에서 35명 정도 사망자와 12명 정도 생포자가 있 었다고 조사했던 수치와 약간 차이가 있는 정도이다.
대포 36문 포 획,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명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이노우에 함장 이 29일 처음 작성한 보고서 내용을 참고하여 내용을 축약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용상 일치하거나 유사한 부분이 발견된다.
나 가사키 지역 영자신문 보도 기사를 번역하여 도쿄에서 발간되는 초 야신문에서 10월 9일 기사로 내보냈다는 점, 그리고 앞서 다룬 운요 함 승조원 스즈키의 서한이 4일 후 같은 신문에 실렸다는 점 등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이 조선에서 3일간 전투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90)
88) 김흥수, 2009, 앞 논문, 259~260쪽
89) 1875년 9월 29일 雲揚艦長 海軍少佐 井上良馨 報告書,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 航記事 1875. 09. 20. 기사
90) 운요함이 20일에 조선 포대로부터 공격을 받은 후 반격에 나서 22일 영종성을 점령할 때까지 3일간 전투가 이루어졌다는 서술은 1880년대와 1900년대 일본 국내에서 발간된 서적에서도 확인된다. 정부 차원에서는 하루에 사건이 발생 했던 것으로 공식보고서를 조작하고 대외적으로 이것을 널리 활용하여 운요 함의 대응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스즈키 준도 유빈호치신문 (郵便報知新聞) 1875년 10월 9일에 ‘항설(巷說)’로 9월 29일자 보고서 개요가 유포된 적이 있다는 점을 짧게 지적한 바 있다(鈴木淳, 2002, 앞 논문, 70쪽). 와타나베 가쓰미의 연구는 오가와 헤이키치의 저작물을 논거로 제시하였다 (依田準之助 編, 1887, 앞 책, 113~114쪽 ; 小川平吉, 1902, 明治外交要錄, 東 京: 靑木嵩山堂, 89~90쪽). 308 韓國史硏究(202)
정부 기관지 성격이 짙은 도쿄니치니치신문에 운요함의 조선 도항과 관련된 기사가 10 월 초중순에 연재되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운요함 피격 사건이 알려진 이후 일본 국내 여론은 ‘정한 ( 韓)’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나뉘어 “조정과 재야의 논의가 분 분”했다.91)
요코하마마이니치신문(橫濱每日新聞)은 정한론, 도쿄 니치니치신문과 초야신문 등은 비정한론(非征韓論)을 주장하며 격론을 벌였다.
어느 쪽이든 조선을 ‘무례한 야만국’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92)
일본 정부가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전개한 대 외선전도 운요함이 조선으로부터 포격을 받았기 때문에 반격에 나섰 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노우에 함장의 조작 보고서는 일본 정부의 대내외 여론전에 적극 활 용되었다.
3일에 걸친 조선 연안 공격과 노략 행위가 내포한 국제법 위반의 문제보다도, 자국의 함선이 조선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 므로, 여기에 대응하여 조선을 어떻게 응징( 韓)을 해야 할지 여부 로 일본 내부의 여론 방향을 호도해 갔던 것이다.
3일 간 전투를 통 해서 벌인 가해보다도 포격을 받았다는 피해 사실을 강조하는데 초 점이 맞추어지면서 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 규명보다 조선에 책임 을 전가하고 이를 추궁하기 위한 사절과 호위 병력을 파견하는 방향 으로 흘러갔다.
정한론이 재차 비등한 가운데 구로다 기요타카 일행이 조선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조선 측 대표 신헌과 교섭하여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를 조인하였다.
이로부터 8개월 후인 1876년 10월 31 일, 운요함은 기슈(紀州) 아타와우라(阿田和浦, 현재 미에현[三重 縣] 소재) 부근을 운항하던 중 풍랑으로 인하여 좌초하면서 전체 승 선인원 75명 가운데 23명이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93)
91) 東京大學史料編纂所 編, 1975, 保古飛呂比 6,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300쪽
92) 吉野誠, 2002, 明治維新と征韓論, 東京: 明石書店, 194~197쪽 ; 北原スマ子, 2012, 「江華條約の締結」 近代日朝關係史(趙景達 編), 東京: 有志社, 133쪽
93) 郵便報知新聞 1876. 11. 09. 2면 4단. 운요함의 침몰 당시의 상세한 정황은 朝野新聞 1876년 11월 14일 기사와 郵便報知新聞 1876년 12월 7일 2면 3~4단 기사를 통해 소개되었다. 내용 중 결과적으로는 사망했지만, 승선했던 다치미 소위가 「航海日誌」와 측량기구 등을 챙기고 있던 정황이 나온다.
1875년 도한 당시 승선하고 있던 장교 가운데 앞서 도쿄니치니치신문에 항해 관 련 기록을 제공하였던 가와무라 중위, 측량을 담당하였던 다치미 소 위가 이때 익사하였다.
운요함의 승조원 중 이노우에 함장과 쓰노다 소위는 난파 사고 당시에는 탑승하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94)
이노우에 요시카는 1901년 해군대장(海軍大將)으로 승진하였고, 1929년 3 월 22일 사망하였다.95)
쓰노다는 가와무라 해군경에게 1874년 당시 발탁된 자로, 소위로 운요함에 승선하여 항해술을 익히기 시작하면 서 본격적으로 해군의 길을 걸었다.
1876년 구로다 기요타카 사행 당 시 모슌함(孟春艦)에 승선해 재차 조선에 건너왔고, 2월 10일 강화 도에 상륙하기도 하였다.96)
그로부터 23년 후인 1899년 8월 3일에는 해군소장(海軍少將)으로 한성에 들어와 주한일본공사관에서 체류하 기도 하였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다케시키 요항부 사령관(竹敷要港 部司令官)을 맡고 있었고, 쓰시마 전시지휘관(對馬戰時指揮官)으로 활동하다가 1905년 12월 13일 사망하였다.97)
94) 탑승 생존자 52명과 사망자 23명 명단은 海軍省所轄軍艦雲揚艦難破諸上申控 16~21쪽에 상세히 실려 있다. 생존자 가운데 당시 해군생도(海軍生徒) 가미무 라 히코노조(上村彦之丞)의 이름도 보인다. 그는 러일전쟁 당시 제2함대사령관 으로 울산 앞바다 해전을 담당하였고, 1910년 해군대장까지 승진하였다(海軍歷 史保存会 編, 1995, 日本海軍史 第9卷, 東京: 海軍歷史保存会, 23쪽).
95) 위 책, 10~11쪽
96) 「護衛鑑儀仗兵其他乘組員取締ノ件 附私人ヨリ軍艦へ便乘方願出ノ件」 黑田全權 大臣派遣關係 卷2(Ref. B03030140500: 0016) ; 1876년 2월 10일 孟春艦艦長 笠間 海軍少佐→辨理大臣 隨行 事務掛, 「護衛鑑儀仗兵其他乘組員取締ノ件 附私人ヨリ 軍艦へ便乗方願出ノ件」 黑田全權大臣派遣關係 卷2(Ref. B03030140600: 0106)
97) 「朝鮮通信(八月四日)」 東京朝日新聞 1899. 08. 13. 7면 1단 ; 「角田海軍中將」 東京朝日新聞 1905. 12. 16. 4면 3단
쓰노다의 최종 계급은 해군중장(海軍中將)이었다.
그 외에 운요함의 영종성 전투에 가담한 오가사와라 중위와 호시야마 중기관사는 구로다 사절의 도한 당시 ‘측량’을 위해 모슌함이나 다카오마루(高雄丸)에 탑승하여 활동하고 있었음을 공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98)
98) 1876년 1월 25일 指揮官 仁禮 海軍大佐→辨理大臣 黑田淸隆, 「護衛鑑儀仗兵其 他乘組員取締ノ件 附私人ヨリ軍艦へ便乘方願出ノ件」 黑田全權大臣派遣關係 卷2(Ref. B03030140600: 0074, 0095)
이러한 사실은 운요함 승선 자들이 러일전쟁 발발 시점까지 조선과 관련된 여러 사건에 직간접 적으로 계속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Ⅳ. 맺음말
이 글에서는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는 하나의 계기 였던 운요함의 조선 파견과 관련된 활동을 기존 자료와 새로 발굴한 자료를 교차 검토하면서 상세히 분석하였다.
운요함은 나가사키 주 재 영국 상인 토마스 글로버가 스코틀랜드 애버딘에 있는 선박 제조 회사에 1870년 주문을 넣고, 건조를 마친 후 일본 측에 인도한 선박 으로 1871년 메이지 정부에 헌납되었다.
운요함은 조선의 해로를 파 악한다는 목적으로 조선 연안에 두 차례 파견되었다.
선행 연구에서 는 주로 운요함의 2차 도항시 강화도에서 무력 도발을 전개한 과정,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의 보고서 조작, 일본 국내 정치의 상황에 주 목해 운요함의 동향을 검토해 왔다.
여기서는 운요함이 조선에 파견 되었을 때 생산된 기록, 신문 보도, 운요함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간행된 출판물 등의 기록을 폭넓게 검토함으로써 운요 함의 조선 연안 정탐 활동, 승조 인원들이 조선에 대하여 가지고 있 던 인식과 언론상의 정보유통 양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도쿄니치 니치신문과 초야신문에 문정 내용과 승선자의 경험담이 곧바로 게재되고, 심지어 부정확한 동향 보도에 대해서는 지인에게 얻은 기 록을 송부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운요함의 조선 파견과 관련된 풍 부한 정보가 이노우에의 보고서 조작 작업과는 별개로 가감 없이 대 중에게 신속하게 전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차 도항 당시 함경도 원산 지역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운요함은 경상도 영일만 지역에 잠시 들렀다.
이때 조선 지방관이 무슨 목적 으로 내항하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문정에 나온다는 사실을 이노 우에 함장은 체험하였다.
또한 함장과 인솔한 일본군 병력은 조선의 지방민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조선보다 자신들이 문명 단계가 우위 에 있다는 시각을 기본적으로 깔고 이들을 조롱하거나 멸시하는 인 식을 가감 없이 자신들의 기록에 남겼다.
조선의 ‘무비’가 체계적이 지 않다고 판단한 이노우에 함장은 무력을 동원한다면 일본의 ‘무위’ 를 조선에게 확실히 보여줄 수 있겠다는 결론을 1차 도항에서 내렸 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는 해군 지휘부에 신속한 병력 파견 을 요청한다는 의견을 상신하였다.
2차 도항에서 강화도 연안 지역 에서 보트를 타고 염하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조선 측을 도발한 행위 는 이미 선행한 정탐 활동과 경험에 입각하여 충분히 조선군을 상대 할 만하다고 판단을 내린 결과였다.
운요함의 조선 정탐 활동과 연안 조사를 통한 해도(海圖) 작성은 이후 다른 군함의 파견으로 이어졌다. 운요함에 승선해 활동하던 측 량 장교들은 조선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76년 10월 31일 미에현 앞바다에서 운요함이 침몰하면서 익사하였다.
생존한 장교들 가운데 일부는 구로다의 조선 파견 때 재차 조선에 건너와 ‘측량’ 업 무를 계속 담당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조선 연안 측량은 1877 년부터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하나부사 요시모 토(花房義質) 일행을 호위, 수송한 다카오마루, 모슌함, 아마기함(天 城艦) 등에 탑승한 장교들이 이어받았다.
동해와 황해, 남해를 오가 면서 개항에 적합한 지역을 확인하는 가운데, 향후 군사 진출에 적 합한 지역 관련 정보를 지속적으로 집적해 나갔다.
또한 참모본부에 서 파견된 가이즈 미쓰오(海津三雄) 같은 위관급 장교들은 조선 내 지 곳곳을 드나들면서 정탐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리정보 수집의 결 과는 1888년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의 간행과 조선 연안에 대한 해도 작성, 각국 수로국(水路局)과의 해도 공유 등으로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1875년 운요함의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연안 파견과 정탐 활동을 새로 발굴한 자료와 기존의 운요함 관련 일지 기록을 통해 내용의 정확성을 교차 검토하였다.
이 작업을 통해 당대에도 이미 은폐 이전의 많은 정보가 신문과 출판물을 통해 일본의 나가사 키와 도쿄, 청국의 상하이 등지에서 정보유통이 이루어지고 있던 양 상을 규명하였다.
운요함이 나가사키에 귀항할 때마다 관련자로부터 조선 내 활동과 관련된 정보가 흘러나와 언론 보도로 이어졌다. 관 련 정보는 나가사키 지역 영자신문의 번역을 통해 이웃 국가로도 신 속하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운요함장이 강화도 지역에서 벌인 전투 를 하루로 조작하던 시점에 이미 ‘3일 전투’ 사실이 상세히 보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당대 생산된 자료에 대하여 좀 더 면밀한 검토와 추적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스즈키나 오노처럼 운요함에 탑승한 자 가 남긴 기록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운요함 승선 장교 가운데 러일전쟁 시기까지 활동하면서 해군대장이나 해군중장까지 올라간 자가 세 명이나 된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운요함 승선자의 생애 관련 회고록, 나가사키 지역 내 관련 기록, 조선 지방관의 보고 나 문정 기록을 추가로 발굴하는 작업은 추후의 과제일 것이다.
주제어 : 운요함(雲揚艦), 강화도,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정탐활동, 나가 사키(長崎),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초야신문(朝野新聞), 노스 차이나 헤럴드(The North China Herald), 토마스 글로버
참고문헌
1. 자료
明治八 孟春雲揚朝鮮回航記事(日本 防衛省 防衛硏究所 所藏) 明治八年 朝鮮江華島砲擊始末 卷1(日本 國立公文書館 所藏) 保古飛呂比 卷6(東京大學史料編纂所 編,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75) 朝鮮軍記(多田直繩 輯, 東京: 績文社, 187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佐々友房文書 卷23(87-3, 日本 國立國會圖書館 憲政資料室 所藏) 「追憶祕話 江華島事變」(井上良馨, 大日本雄弁会 編, 現代 10-1, 東京: 大日本雄弁会講談社, 1929, 한국학중앙연구원 霞城文庫 소장) 海軍省所轄軍艦雲揚艦難破諸上申控(日本 和歌山縣立圖書館 所藏) 黑田全權大臣派遣關係 卷2(日本 外務省 外交史料館 所藏) 絵本明治太平記大全(依田準之助 編, 大阪: 此村欽英堂, 1887, 日本 國立 國會圖書館 所藏) 読売新聞, 東京朝日新聞, 東京日日新聞, 郵便報知新聞, 朝野新聞 The North China Herald
2. 단행본
김기혁 지음, 김범 옮김, 2022,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종막 –조선・일본・ 청, 1860~1882-, 글항아리 李瑄根, 1961, 韓國史 最近世篇, 乙酉文化社 최혜주, 2019, 정탐 -제국일본, 조선을 엿보다-, 한양대학교출판부 岡庸一, 1903, 最新朝鮮事情, 大阪: 靑木嵩山堂 久保得二, 1905, 朝鮮史, 東京: 博文館 吉野誠, 2002, 明治維新と征韓論, 東京: 明石書店 渡邊勝美, 1941, 朝鮮開國外交史硏究, 京城: 東光堂書店 小川平吉, 1902, 明治外交要錄, 東京: 靑木嵩山堂 杉本正介・小田省吾, 1927, 朝鮮史大系 最近世史, 京城: 朝鮮史學會 山辺健太郞, 1966, 日本の韓国倂合, 東京: 太平出版社 314 韓國史硏究(202) 田保橋潔, 1940, 近代日鮮關係の硏究 上, 京城: 朝鮮總督府中樞院 海軍有終會 編, 1981, 近世帝國海軍史要, 東京: 原書房 海軍歴史保存会 編, 1995, 日本海軍史 第7・9卷, 東京: 海軍歴史保存会 海軍有終會 編, 2018, 幕末以降帝國軍艦寫眞と史實, 東京: 吉川弘文館 Martina Deuchler, 1977,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3. 연구논문
金光男, 2007, 「雲揚号事件をめぐる一考察」 茨城大学人文学部紀要 社会 科学論集 43 김종학, 2016, 「조일수호조규는 포함외교의 산물이었는가?」 역사비평 114 김흥수, 2009, 「운요호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韓日關係史硏究 33 이태진, 2002, 「운양호(雲揚號) 사건의 진상 -사건 경위와 일본국기 게양 설의 진위-」 조선의 정치와 사회, 태학사 조동걸, 2010, 「식민사학의 성립과 내용」 한국근대사학사, 역사공간 北原スマ子, 2012, 「江華條約の締結」 近代日朝關係史, 東京: 有志社 鈴木淳, 2002, 「 雲揚」艦長井上良馨の明治八年九月二九日付け江華島事件 報告書」 史學雜誌 111-12 1875년 운요함(雲揚艦)의 조선 연안 정탐 활동과 신문보도 315
Abstract
The Warship Unyokan’s Reconnaissance Activities around the Coast of Joseon and the Newspaper Reports in 1875
Park, Han-Min
In this article, the activities related to the dispatch of the warship Unyokan(雲揚艦) to Joseon, which was one of the opportunities for the signing of the ‘The Joseon-Japan treaty of Amity’ in February 1876, were cross-examined with well-known and newly discovered documents. The Unyokan was a warship ordered by Thomas B. Glover, a British merchant in Nagasaki, from Aberdeen, Scotland, and bulit in 1870, used by the Meiji government since 1871. The Unyokan was dispatched to the coast of Joseon twice to grasp the sea route of Joseon, and survey activities were conducted in various places. Here, records of journals, newspaper articles, and books published shortly after the Unyokan incident were widely reviewed when the Unyokan was dispatched to Joseon. As a result, we examined the ship’s activities to spy on the coast of Joseon, the negative perceptions of the crew members of the ship and information circulation patterns after returning to Nagasaki. Inoue Yoshika, the captain of the Unyokan, who visited Wonsan, Hamgyeong province during the first voyage, experienced that the Joseon local government official’s coming out to check the purpose of Inoue’s visit. The conversation with the governor of Yeongil(迎日縣 監) was also reported in detail in Japanese newspapers. The act of provoking the Joseon troops of Ganghwa Island during the second voyage was the result of judgement that it was sufficient to deal with the Joseon army based on the experience at the time of the first voyage. The Japanese military’s battle process in Ganghwa Island and Yeongjong Island for over three days was introduced in detail in the Japanese central daily newspaper at the time. Review of the contents of newspaper articles and publications indicates that a lot of information before the concealment was already actively exchanged in Japan and Shanghai. Whenever the Unyokan returned to Nagasaki, information related to activities in Joseon was released to the public from those involved. Related articles were quickly delivered to other countries in East Asia through the translation of English newspaper in Nagasaki. The fact that the “three-day battle” was already reported in detail at the time when captain of the Unyokan was manipulating the battle in Ganghwa Island into a day shows the necessity of more careful review and tracking of the data produced at that time.
Key Words: Unyokan(雲揚艦), Ganghwa Island, Inoue Yoshika(井上良馨), reconnaissance activities, Nagasaki, Tokyo nichi nichi shinbun(東京日 日新聞), Choya shinbun(朝野新聞), The North China Herald, Thomas Blake Glover
韓國史硏究(202)
투고일 : 2023. 07. 30 심사완료일 : 2023. 09. 01 게재확정일 : 2023. 09. 02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실제 드러내기 : 『史記: 列傳』을 통해 본 사마천의 역사기술의 특징/김충열.경희대 (0) | 2024.11.18 |
---|---|
전세의 원형, 조선후기 세매관습의 특성에 관한 연구(24-3-29) /최영상.한국주택금융공사 (0) | 2024.11.18 |
임진왜란 시기 조명 관계와 명일 교섭-나이토 조안의 조선 경유를 중심으로-/이정일. 동북아역사재단 (0) | 2024.11.15 |
동학농민혁명기 재조선일본인(在朝日本人)의 전쟁협력 실태와 그 성격/박맹수.원광대 (0) | 2024.11.14 |
중국인들의 한국전쟁, 『항미원조』(백지운, 창비, 2023) 서평 /한담.전남대 (0) | 2024.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