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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역사의 실제 드러내기 : 『史記: 列傳』을 통해 본 사마천의 역사기술의 특징/김충열.경희대

동아시아의 고전 중 『사기』만큼 여전히 논쟁적 인 저작도 없을 것이다.

『사기』를 둘러싸고 전개 된 다양한 토론 주제들 중 본 논문은 그 역사기술의 특징을 조명한다.

역사기술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는 사마천의 이중적 말하기와 복수의 말하기, 그리고 개별 편의 특징적 기술방식에 초점을 두어 왔다.

하 지만 중국사학사의 전통과 관련하여 중요한 질문은 『춘추』이래의 도덕사관과 전국시대에 형성된 『춘주좌전』과 『전국책』 속에 드러나는 역사의 사실적 기술방식 사이에서 사마천이 어떤 관점을 취 하고 있는가이다.

그동안 이 주제는 사마천이 공자 와 『춘추』를 계승하고 있다고 하는 관점 때문에 하 나의 논의 주제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본 논문에 서 필자는 사마천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규범적 평 가를 전적으로 버리지는 않고 있더라도 그것은 『춘 추』 류의 도덕사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또 『사 기: 열전』을 통해 두드러지는 역사기술 방식은 포 폄보다 오히려 역사의 실제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음 을 주장한다.

본 논문에서는 특별히 전국기부터 진 (秦)의 통일까지를 분석하여 사마천이 이익과 전략 의 관점을 통하여 그 시대를 이해하였고, 전한기 인 물들을 다룰 때에는 각 인물들의 개성과 함께 그들의 장단점을 사실적으로 기술하여 어떠한 신화적 외피 도 제거하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의 역 사적 실제에 대한 관심은 통치를 이해할 때 그 실제적 효과를 중시하게 하였고, 도가적 통치관의 옹호와 유가의 예치와 법가적 통치에 대한 회의는 이 맥락에 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의 실제를 통하여 그는 역사란 본래 복합적(complex)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러한 역사기술 속에서 어떤 사관을 갖거나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주제어: 사마천, 사기 열전, 역사기술, 도덕사관, 도가적 통치관

Ⅰ.서론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가「사마천전」에서 평론한 이래 지난 1800여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사마천(司馬遷, B.C. c.145/135-c.86)의『사기』를 논평해 왔다.1)

오랜 『사기』의 해석사에서 두드러지고 또 흥미로운 사실은 정반대의 시각들이 공존하며 경쟁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은「백이열전」(伯夷列傳),「화식열전」(貨殖列傳),「유협열전」(游 俠列傳)과 같이 논란이 되는 전을 두고 발생하기도 하고, 사마천의 사상적 성향을 둘러싸고 발생하기도 하였다.

대조적 시각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체로 사마천의 삶과 저술에 대한 상세 한 정보가 담긴 사료가 없다는 점,2) 역사서로서의『사기』가 방대하고 역사의 복합적 측면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사마천의 생각을 일관성을 가지고 해석해 내기가 어렵다는 점, 그리고 사마천의 역사 서술방식의 이중성과 복수성 때문에 씌여진대로의 일차적 의미와 숨겨진 의도, 또 중심적 기술과 분산되어 있는 평가들 사이에 긴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3)

1) 진한 시대의 대표적 사서들인『사기』와 『한서』에 대한 개론적 설명을 위해서는 가오구어캉과 류제의 중국 사학사 저작을 참고할 것(高國抗 1998, 2장; 劉節 2020, 6장). 사마천 개인의 삶과 시대, 그의 저작에 대한 풍부 한 역사적 설명에 대해서는 일본학자 후지타 카쯔히사의 저작을 참고(藤田勝久 2001).

2)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거의 유일한 일차자료는 『사기』 마지막 편인「태사공자서」와 『한서』「사마천 전」에 실려 있는 ‘報任安書’ 뿐이다.

3) 씌여진 그대로의 의미와 달리 사마천이 은밀하게 한 인물을 비꼬거나 비난하는 이중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은 이성규의 글 참고(이성규 1984, 137-164). 한편 사마천의 인물평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곳에 산재해 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한 인물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은 그랜트 하디를 참고(Hardy 1994, 20-38). 이에 더해 리와이이는 한 사건에 대해 대조적 입장에 있는 인물들로 하여금 각자의 입장을 다르게 말하게 하는 방식을 사마천이 쓰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互見法”(principle of mutual illumination)이라고 칭함(Wai-Yee Li 1994, 395). 이와 같은 사마천의 글쓰기 방식은 과거 서양의 철학자들 이 박해 속에서 행간 속에 진정한 의도를 숨기는 秘傳的(esoteric) 글쓰기를 하였다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관찰 과 유사하다(Strauss, 1952).

『사기』를 둘러싸고 발생한 다양한 논란과 분분한 해석들 중에서 필자가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사마천의 역사기술의 특징이다.

역사기술이란 한 사건(혹은 사건들)이 나 한 시대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기술방식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

것은 편년체(編年體)와 기전체(紀傳體)와 같이 역사를 서술하는 기본적 구조를 가리키기도 하고, 개별 역사가의 개성적 서술방식 ― 사마천의 경우 이중성과 복수성의 말하기 방식 ―을 지칭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역사기술이란 사마천이 전통적인 도덕사관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역사관에 기초하여 비전통적인 역사기술법을 채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공자가 편찬한 소위 ‘육경’(六經) 이래로 도덕 사관은 중국사 기술의 중심적 관점으로 기능하여 왔다. 따라서 여러 해석가들은 사마천이 공자를 따르고 있으며 공자가 지었거나 편집하였다고 알려진 『춘추』를 모델로 하여 후세에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하여『사기』를 저술하였다는 관점을 견지해 왔다. 최근까지도 이 관점은 루안즈셩, 류제, 천통셩을 포함한 여러 중국 학자들, 그리고 미국의 중국학 연구자들인 왓슨(B. Watson), 하디(G. Hardy), 두란트(S. Durrant) 등에 의해 여전히 지지되고 있다(阮芝生 1985; 劉節 2020; 陳桐生 2004; Watson 1958; Harday 1994; Durrant 1995). 왓슨에 의하면, “사마천은 자신의 역사서를 공자의 노동[『春秋』]의 직접적 계승자로서 간주하였다”(Watson 1958, 92).『사기』는 고대의 모든 역사서가 그렇듯이 “교훈적”이고 “악을 비난하고 선을 지지하기 위해” 의도되었 으며(Watson 1958, ⅷ), “유학의 경전들에 기반하고 있고” “역사적 진리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 권위를 그 경전들에서 찾았다”(Watson 1958, 18). 두란트 역시 사마천의 목표는 “공자의 경로를 따르고, 예(禮)에 부합하는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표현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Durrant 1995, ⅹⅶ). 또 “공자는『사기』의 중심적 인물”이고, “사마천의 자아와 사명에 대한 이해는 그의 공자에 대한 관념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Durrant 1995, 29). 이 관점을 택하는 기존 연구들이 흔히 인용하는 부분이『사기』의 마지막 편인「太史公 自序」(권130)에서 사마천이 부친 사마담(司馬談)의 유언과 상대부(上大夫) 호수(壺遂)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마천은 호수의『춘추』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춘추』를 저술한 의도와 춘추의리(春秋義理)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명백히『춘추』의 대의에 공감하고 공자의 저술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사마천이 새로운 저술을 시도한 것은 부친의 유언을 따라『춘추』를 계승하여 춘추시대 이후를 보완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호수와의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새로운 사서를 저술하는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사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밝은 임금의 성덕을 폐하고 기재하지 않으며, 공신, 세가, 현대부의 업을 멸하고 서술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부친의 유언을 어기는 것으로 이보다 더 큰 죄가 없다”는 것이다.4)

이어서 그가 의도하는 것은『춘추』와 다른 새로운 저작을 창작(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사(故事)를 서술(述)하고 세세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 을 간추려 정리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라며 자신의 작업의 의도를 스스로 낮추고 있다.5)

4) “且余嘗掌其官 廢明聖盛德不載 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 墮先人所言 罪莫大焉.”「태사공자서」.

5) 「자서」에는 사마천이 부친의 말을 회상하며 주공(周公) 이후 오백년 후에 공자가 태어났고 공자 사후 오늘에이르기까지 오백년이 지났다며, 밝은 세상을 이어받고, 역전을 정정하고, 춘추를 계승하며, 시서예악에 근본을 두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여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부심 섞인 뉘앙스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先人有言 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 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 有能紹明世 正易傳 繼春秋 本詩書禮樂之際”「태사공자 서」.) 오백년은『史記: 書』「天官書」에 의하면 天運이 大變하는 시간으로 천문관이었던 사마천 부자가 『춘추』를 계승하는 새 역사서를 저술하여 그 천운대변에 대응하려 한 것이었다고 이성규는 해석하고 있다(이 성규 2007, 20-21)

이 대화를 그대로 수용하면, 우리는 사마천이 공자의『춘추』를 모델로 한나라의 성덕을 찬양 하는 사서를 편찬하려 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6)

6) 이성규는 『춘추』와 관련하여『사기』속에는 스승 동중서의 공양학의 전통, 즉 왕도와 왕법의 제시라는 규범 적 측면과 부친 사마담의『춘추』계승의 정신, 즉 문명의 보호와 전승의 측면을 겸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 만 사마천이 과연 공양학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지, 또 중국문명의 보호와 전승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는지는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이성규 2007, 18-19).

필자가 보기에 기존의 해석들은 이 부분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사마천의 저술을『춘추』 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자서」에서의 기술은 다른 편들에서 적잖이 드러나는 공자의 인용과 일관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이 관점을 택하는 학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춘추 모델론’을 정립하였다고 볼 법하다.

고민해야 할 점은「자서」에서 사마천이『춘추』를 강조하며 자신 의 저작을『춘추』의 부속서 정도로 취급하는 것의 의도이다. 사마천이 그의 유명한 이중적 말하기를 여기서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새 역사서를 저술하려고 하는 한 공자의『춘추』와 그 사관, 즉 ‘춘추의리’를 고려하 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춘추의리란 사마천에 의하면 “시비를 분별하고”(變是非)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치며”(釆善貶惡)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는 것”(撥亂世反之正)이다.

문제는 이 도덕사관이 복잡다단한 역사의 실제를 그리는 방법으로서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역사의 실제에 다가가면 갈수록 도덕적 관점의 적실성은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실제로『열전』속에서 사마천은 좀처럼 도덕적 관점을 강 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호수와의 대화에서 사마천이 자신의 저작이 새로운 창작이 아니라고 격하시켜 말한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역사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고민 위에서 춘추대의 대신 역사의 실제를 기술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과『춘추』 와 다른 새로운 역사 기술방식을 취하고 있는 자신의 저작의 파격성을 의도적으로 감추기 위한 발언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서」속에는 이 문제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고민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먼저, 그는 새 역사서를 편찬하려는 의도에 대하여, 한나라가 일어난 뒤 한무제(武帝)에 이르러 통치가 잘 이루어지는데도 그 은덕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데에서 찾고 있다.

무제기에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봉선(封禪)을 행하고,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게 되었고, 해외 이민족으로서 공물을 바치며 알현하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도 문무백관이 무제의 성덕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유능한 인재 또한 등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군주의 치욕이고, 그 은덕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관원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사관의 자리에 있음에도 임금의 성덕과 공신, 세가, 대부의 공업을 기술하지 않고 있으니 결국 자신의 죄라는 것이다.

이 논리를 따르면『사기』는 마땅히 한나라 군주들과 제후, 관리들의 업적을 찬양하 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문제는「자서」속의 이 기술이 본문에서 사마천이 실제로 그리고 있는 내용과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서』「사마천전」에 의하면『사기』가 세상에 나온 후 한무제를 다룬 본기 외 여러 편은 곧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는다고 씌여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그 내용이 가진 위험성 때문이다.7)

그것은 사마천이 한고조 유방(劉邦)을 기술하는 것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유방을 다루는「고조본기」(高祖本紀)는 대체로 그의 좋은 점을 부각하는 듯 보이나, 관련된 다른 편들 속에서는 유방의 인간적, 혹은 부정적 측면들 이 솔직히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사마천이 역사적 인물을 보는 기본적 시각은 그 공과를 공정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현재 전해지는 무제를 다룬「효무본기」는「고조본기」보다 더 노골적으로 한무제 통치의 실상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현존하는 내용이 사마천 의 원본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제가 방술(方術)을 좋아하여 불로장생을 추구하는데 노력하였고 명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봉선이란 것도 그런 일환이었음을 폭로하고 있다.8)

따라서「자서」에서 사마천이 호수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은 사마천이 실제로 저술한 내용과 차이가 크다.

같은 맥락에서,「자서」의 후반부는『사기』의 각 편을 요약하고 있는데, 이 중『열전』 의 편들을 요약하고 있는 부분에서 최소한 세 편의 내용이 본문과 많은 차이가 있다.

백이숙제 의 고사를 다룬「백이열전」(伯夷列傳, 권61)과 한무제 당시 승상이었던 공손홍(公孫弘)을 평한「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권112), 역시 무제기 법을 혹독하게 시행한 관리 들을 비판한「혹리열전」(酷吏列傳, 권122)이 그것이다. 그 중「평진후주보」와「혹리」 열전의 주인공들을 사마천은 본문에서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자서」의 요약에서는 중립적이거나 이들을 옹호하듯이 기술하고 있다.9)

7) 현재 한무제를 다룬 편은「孝武本紀」이다.「자서」의 『사기』 각 편을 요약하는 부분에서는「今上本紀」 로 표기되어 있다.

8) 현존하는「효무본기」의 내용은『史記: 書』「封禪書」의 武帝期 봉선을 다룬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9)「평진후주보열전」에 대해서는 “대신과 종친들이 다투어 사치를 일삼았으나 공손홍만은 의복과 음식을 절약해 문무백관의 모범이 되었다. 평진후주보열전 제 52를 지은 이유다.”고 하였다. 한편「혹리열전」에 대해서 “백성이 근본을 저버린 채 재주를 부리고, 간교한 짓을 일삼아 법률을 우롱했다. 선한 사람은 이들을 교화할 수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엄격한 형벌로 다스림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혹리열전 제 62를 지은 이유다”고 썼다.

 

그 이유는 동시대 인물들인 그들에 대한 비판이 알려지면 문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본문과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백이열전」의 경우 백이숙제가 먼 과거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없었으나 여전히 본문에서의 내용과 다르게 요약하고 있다.

“말세에는 모두 이익을 다툰다. 그러나 오직 백이와 숙제는 의리를 추구하며 서로 나라를 양보하다가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천하가 이들을 칭송했다.「백이열전」제 일을 지은 이유다.”10)

10) “末世爭利 維彼奔義 讓國餓死 天下稱之 作伯夷列傳第一”, 「태사공자서」.

이 요약은 공자의 백이숙제 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유보하고 있는 본문의 내용과 큰 차이가 있는 요약이다.

사마천이 본문을 충실히 요약하지 않은 것은 그의 관점이 공자의 의리관과 배치되기 때문으로 이해되어 진다. 한나라가 성립된 후 무제기에 들어와 유학은 국학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공자의 윤리관과 의리관이 있었다. 사마천이「자서」에서 춘추대의를 강조하고 자신의 저작이 공자 이래의 전통과 어긋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역사기술이 파격적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의도적으로 호수와의 대화를 설정하여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유학자들의 공격을 차단하려 하였다.

나아가『사기』가『춘추』를 모방하여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로 씌여졌다는 주 장은 우리를 반사실적 직관에 부딪히게 한다.『열전』을 중심으로 각 편을 고려해 보면, 사마천 자신이 명시적으로 도덕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그 도덕적 메시지가『춘추공양전』이나『춘추곡량전』, 심지어『춘추좌전』의 그것을 가 리킨다면, 사마천이 그러한 교훈을 주기 위하여『사기』를 지었다고 보는 것은 반사실적이 다.

사마천에게 두드러진 측면은 특정 사관이나 이념 대신 역사의 실제를 드러내는 방식의 역사기술이다.

미국의 중국학자 리와이이는 필자와 유사한 견해를 펼치면서도 사마천이 기존의『춘추』의 도덕적 권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서 필자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공양전』과『곡량전』에 나타난 도덕적 권위를 계승하면서도『좌전』의 역사적 관점과 자신의 역사 기술방식이 더해짐으로써 사마천이 공자와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본다(Wai-Yee Li 1994).

사마천이『춘추』의 도덕적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렇 지 않은가는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긴 하지만, 최소한『공양전』,『곡량전』 속의 넓은 의미 의 도덕적 평가를『사기』속에서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사마천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는데 초점을 두었고, 전의 마지막에 있는 자신의 논평(“太史公曰”)에서는 주로 ‘맥락’ 속에서의 완곡한 평가를 할 뿐, 명시적인 도덕적 평가는 거의 하고 있지 않다.

물론 사마천이 역사적 인물과 사건의 실제를 보여주고 간접적으로 독자들에게 평가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는 도덕적 관점을 완전히 버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구한말 유학자 이건창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사마천이 ‘인도’(人道)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천도’(天道)의 존재 는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천도가 선악과 관련된 인과응보의 도덕 원칙의 역사적 실현을 말한다면, 사마천은 천도를 부정하였다. 반면, 인도를 인간들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형성되고 통용되는 규범과 교훈, 지혜로 정의한다면, 사마천이 인도마저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11)

필자가 보기에 사마천이 의도한 역사기술은 천도가 없는 역사의 실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역사의 실제란 역사서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실제로 발생한 것을 정확하게 분별해 낸다거나 검증된 사실에만 의거하여 사건을 기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를 다루 는 태도와 관점에서 특정 사관에 기반하지 않고 한 인물 혹은 사건을 (자료의 제약 속에서나마) 있는 그대로 또 그 특징을 살려서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에서 사마천이 전설이나 전언(傳言), 또 자신의 추론을 사용하는 것, 그 결과 저자의 선호와 선판단, 그리고 사실의 왜곡이 불가피하게 더해지는 것은 역사의 실제를 드러내는 목표와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역사의 실제 이해에 방해가 되는 것은 개별 사실의 진위가 아니라, 유학의 도덕사관과 같이 특정 가치를 기준으로 체계적으로 사실을 선별하고 평가하는 이념체계이다.

이 관점은 미셸 닐란이 파악한 양극단의『사기』해석법, 즉 과거의 객관적 묘사로서의 역사서와 사마천 개인의 동기가 담긴 일종의 방서(謗書)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12)

11) 인도는 도덕적인 선악, 시비의 문제를 넘어서는 영역으로 역사적 교훈과 보다 가깝다고 생각한다.

12) 닐란은 두 대립적 해석법을 “사회과학적” 접근과 “서정적/낭만적” 접근으로 부른다. 두 접근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Nylan 1998-99, 203 참고. 한편 에스더 클라인은 한대부터 송대까지 ‘방서’와 구분되는 ‘實錄’으로서『사기』를 보는 관점과 논쟁들을 정리하고 있다(Klein 2018, ch.5).

역사 의 실제에 대한 기술을 통하여 그는 후대의 독자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주고자 하였다.

역사적 교훈은 좁은 의미의 옳고 그름의 구분을 넘어서 역사 속에서 인간들과 그들이 만드는 사건들이 가지는 다양성과 복합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후대의 인간들이 역사로부터 얻는 유용성과 관련이 있다.

역사기술을 통하여 사마천은 역사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메시지 를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였다.

도덕적 평가 대신 역사의 실제를 중시하는 기술방식은 전국시 대 이래 역사기술 상의 전환을 반영하는 것으로, 사마천은 그러한 기술방식을 채택하고 체계 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논문은 사마천이 역사의 실제에 대한 기술을 통하여 역사의 복합성(complexity)과 다양성(diversity)을 보여주려 하였음을 주장하는 시도이다. 기존의 유학적 세계관으로 조명 된 연구들이『춘추』로 대표되는 전통적 역사서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필자는 사마천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먼저, 2장에서는『사기』이전의 역사서들을 통하여 사마천이 취하고 있는 역사적 실제를 기술하는 방식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분석하고, 3장에서는 『열전』의 서론으로 평가받는「백이열전」을 분석하여 사마천이 어떤 역사적 관점을 취하 고 있었던가를 이해한다.

그 맥락에서 4장에서는『열전』이 어떤 구조와 역사기술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피고, 마지막 5장에서는 그의 역사관이 통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려고 한다.

Ⅱ.사기이전 역사서들의 역사기술의 경향

1.書經,論語,春秋公⽺傳, 春秋穀梁傳의 역사 기술

고대 중국에서 도덕사관이 최초의 사관으로 자리잡은 것은 도덕정치관의 영향 때문이었 다.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받는『서경』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서이기보다 정치적 교훈을 주는 정치학의 텍스트이다.

소위 요순 삼대 성왕들의 말과 행적을 담고 있는 『서경』을 요약하면 그것은 ‘올바른 통치란 무엇인가’로 집약된다.『서경』의 가장 중심적 주제 중 하나는 역사 속에 드러난 좋은 통치와 나쁜 통치의 전형들을 통하여 국가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있다.

현재 남아 있는『서경』중 진본으로 평가되 고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편들은 주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편들이다.13)

13) 『서경』의「康誥」,「召誥」,「洛誥」,「多士」,「無逸」,「君奭」,「多方」,「立政」편을 볼 것.

주대 초의 통치자들은 창업군주인 무왕(武王) 사후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고민하였고 역사 로부터 정치적 지혜를 얻고 있다.

주공(周公)과 같은 인물들이 고민한 내용은 국가의 붕괴는 통치자의 폭정에 있고, 반대로 국가를 오래 존속시키는 방법은 통치자가 삼가고 절제하며 백성을 위해 인정(仁政)을 펼치는 데 있다.

내적인 수신과 외적인 공적(功績)과 베품을 ‘덕’으 로 표현하였고, 덕을 통하여 ‘천명’으로써 주어진 통치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늘은 명(命)을 내리고 그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통하여 드러나며, 재이(災異)를 통하여 통치 자에게 경고한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통치자가 잘못을 고치지 않을 때는 명을 거두어들인다 는 사고가『서경』에 드러나 있다.

천명은 일관되지 않고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니 믿을 것은 천명보다 통치자의 덕에 있다는 천명미상(天命靡常)의 사고도 제시되어 있다.

우탕문무(禹湯 文武)의 성왕들은 자신을 삼가고 통치를 잘하여 천명을 받은 사례들이고, 나라를 잃은 하나라의 걸(桀)과 상나라의 주(紂)는 폭정을 하여 결국 천명을 잃은 경우들이었다.

국가 유지를 위한 필요의 문제가 도덕정치관을 낳고 도덕정치관이 도덕사관을 형성하였다.14)

『서경』의 이 사상은 유학의 시조 공자에게서 계승되고 발전하였다.

애초 통치자를 위한 가르침이었던 덕 사상은 외적인 공적과 베품의 차원이 배제된 채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내면의 수기(修己)의 문제로서의 윤리철학으로 발전하였고, 도덕사관은 역사를 이해하는 중심적 관점으로 정착하였다.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논어』에는 공자가 역사적 인물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잘 드러나 있다.

「태백」(18-21)편과「위령공」(4)편에서 공자는 특히 순임금과 하나라 우임금을 평가하고 있는데, 순임금은 작위가 없이 통치하고 자신을 삼가고 바르게 남면(南面)하신 분이라고 평하고, 우임금은 자신의 식사와 의복, 집은 돌보지 않았지 만 공적인 일에서는 할 일을 다한 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순과 우 모두 자신을 삼가는 일, 즉 수기에 힘썼고 그 결과 큰 업적을 이룬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어』속에 드러난 공자의 도덕사관의 또다른 전형적 인물은 백이숙제였다.

주 무왕이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우는 것에 반대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알려진 백이숙제에 대해 공자는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며, 인(仁)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으므로 세상을 원망할 필요가 없었던 현인들로 칭찬하고 있다.15)

그들의 상나라 신하로서의 의리를 높이 평가한 것인데, 공자 자신의 의리관을 반영한다.

한편 춘추시대 초기에 제환공이 최초의 패자가 되도록 도운 관중에 대해서 언급할 때, 공자는 그의 업적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검소하 지 않았고 신하로서 분수를 넘어서 행동하여 ‘예’를 알지 못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6)

군신 간의 구분에 기초한 예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과 일관되어『논어』에는 새 왕조를 창립한 상의 탕왕과 주의 무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17)

공자의 보수적 의리관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춘추』와 그 주석서들, 특히『공양전』과『곡량전』에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역사에 대한 견해가 잘 드러난다.

편년체 방식으로 본격적 역사서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춘추』는 매우 축약적으로 씌여 있어서 해설서들이 등장하였는데, 한대 하휴(何休)는『春秋公羊傳解 誥』에서 그 학설이 구두로 전해지다가 한나라에 이르러 공양씨(公羊氏)와 그 제자 호무생(胡 毋生) 등이 처음으로 죽백에 기록하였다고 쓰고 있다.18)

14) 덕 개념을 중심으로『서경』의 정치사상을 해석한 연구에 대해서는 김충열 2022 참고.

15) “古之賢人也 ... 求仁而得仁 又何怨”.「술이」14.『논어』의「공야장」,「계씨」,「미자」 편에서도 백이 숙제가 언급되고 있다.

16)「팔일」 22 참고. 「헌문」 10, 16, 17, 18에서는 관중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7)『논어』에서 武王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은 무왕의 음악인 ‘武’가 소리의 아름다움은 지극하지만 그 내용의 선함은 지극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내용이 유일하다(「팔일」 25).

18)『공양전』과『곡량전』이 비록 한대에 처음으로 저술 형태를 갖추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구술형태로 전해 져 왔다고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박성진 2018, 749).

세 주석서 중『춘추』경문(經文)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좌전』을 뺀『공양전』과『곡량전』은 그 체제와 해석방식이 대체로 유사하다.

두 저작은 개별 사건들의 평가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예법, 의리, 도리의 관점에서『춘추』의 경문을 해설하는 점에서 거의 동일하다.

두 주석서에 의하면, 이미『춘추』자체가 예로 질서지워진 사회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그 관점 에서 씌여졌고 주석서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공양전』과『곡량전』이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의 한 예를 들면, 노환공(桓公) 2년에 송나라에서는 시해사건이 발생하여 신하인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그의 임금 상공(殤公)을 죽이고 그의 어진 대부 공가(孔嘉)도 함께 죽인 일이 있었다.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 첫 번째 경문에 대해『공양전』에서는 연루된 사람들 중에서 왜 대부 공가가 임금인 상공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지만 해설하고 있다.

뒤이은 경문들의 해설에서는 송나라에서의 반란을 환공 이 인정해 주고 그 뇌물로 “대정”(大鼎)을 받았으며 그것을 태묘에 들여놓았는데, 그것이 모두 “예법”에 맞지 않다고 비난하고 있다.『공양전』은 노환공이 선왕이자 이복형인 은공 (隱公)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점과 이 사건을 연계하여 환공의 부도덕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시각은『곡량전』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환공은 안에서는 임금을 시해 하고 밖에서는 반란을 인정한 대가로 뇌물을 받았으며, 돌아와 그 뇌물로 조상을 모셨으니 예가 아니다”고 평한다.

그런데 송나라의 이 사건은 전사가 있었다.

『공양전』은공 3년 기사 에 의하면 본래 송선공(宣公)은 왕위를 아들인 여이(與夷)에게 전하지 않고 동생인 목공(穆公) 에게 전하였다.

목공은 자신의 두 아들 풍(馮)과 발(勃)을 외국으로 쫓아내고 형의 아들인 여이에게 임금 자리를 전하였다.

이때 화독이 반란을 일으켜 상공이 된 여이를 죽인 후 정나라 에 있던 풍에게 임금 자리를 맡도록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공양전』은 결국 나중에 장공(莊 公)이 된 풍이 여이를 죽인 것으로 보고, 본래 임금자리를 적자에게 전하지 않은 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즉 송선공이 모든 화를 만든 것이라고 평하였다.

임금 자리는 형제지간이 아닌 부자지간에 계승되어야 한다는 계승의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공양전』과『곡량전』이 간략한 춘추의 경문을 ‘전’(傳)을 통해 해설하면서 사건들에 대해 꽤 상세한 설명을 하거나 평가를 하는 것이 사실이나, 두 저작은 역사서이기보다는 주석서이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춘추』경문의 의도를 정확히 해설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경문의 배경이 되는 사건들을 세세히 기록하는 것은 두 텍스트 저자들의 일차적 목적이 아니었다.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할 때는 주로 예법, 의리, 도리를 기준으로 하였고, 특정 사건을 이 기준틀에 맞추어 해석하거나, 도덕적 기준에 해당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는 평가 없이 사건의 전말을 기술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위의 송나라에서의 화독의 시해사건은『좌전』에 의하면 사실 애정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서 발단이 된 사건으로써 의리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예의와 계승의 문제로 해석하 기 위해 애정의 문제를 제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춘추좌전의 역사기술

『춘추좌전』은 앞에서 언급한『서경』,『논어』및『공양전』,『곡량전』과 역사 이 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맹자』와 함께 전국시대 중반기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좌 전』에서는 간략한 역사적 사실들과 의미 있는 사건들의 상세한 묘사가 뒤섞인 채로 편년체의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사건들의 경우 인과적 관계 속에서 하나의 스토리로 짜여져서 편년체 기술의 제약 속에서나마 독자들로 하여금 사건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19)

19)『좌전』이『맹자』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高津純也 2007 참고.

역사가는 객관적 거리를 둔 채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말도 적절히 배치하고 있다. 또 사건에 대한 자신의 논평도 적고 있다.

역사기술에 있어서『좌전』의 혁신성은 역사적 사건들이 인과관계와 맥락들의 설명 속에서 스토리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좌전』에서의 사건들은 천명과 무관하게 역사 속 인간들이 주어진 조건과 상황 속에서 펼치는 이익추구와 욕망의 표출, 또 음모, 전략들 의 상호작용으로서 나타난다.

역사는 이제 도덕의 굴레를 벗어나 인과적으로 설명되고 객관 적으로 이해되는 하나의 독립적 영역으로서 그려진다.『좌전』 속에서 역사는 도덕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인간의 특성들이 작용하는 영역이며, 따라서 역사는 그러한 측면을 적절 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술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좌전』이『사기』를 포함 한 후대의 역사서에 미치는 가장 거대한 영향은 바로 이 역사인식과 기술방식에 있다. 전한말 에 유향(劉向)이 편찬한『전국책』이나 사마천의『사기』는 바로 이『좌전』의 역사 이해 와 기술 방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실제로 사마천은『사기: 세가』의 춘추시대 제후국들을 기술한 부분에서『좌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좌전』과 달리 편년체의 역사기술을 버리 고, 본기, 세가, 열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기전체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차이이 다.

하지만『좌전』의 역사기술은 도덕적 역사관의 흔적을 지속적으로 남기고 있는 점에서 『사기』와 차이가 있다. 경(經)과 전(傳)에서 사실과 사건들은 대체로 전형적인 역사적 기술 을 택하고 있는데 반해, 전에서 사건을 기술한 후 저자는 ‘君子曰’, ‘君子謂’, 君子是以’ 등으로 시작되는 논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평들에서 저자는 대체로 도덕적 잣대로 사건들을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앞 절에서 설명한 송목공이 형의 아들인 여이를 후사로 세운 것에 대해『좌전』의 저자는 “군자왈, ‘송선공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겠다.

목공을 세우고 그 아들이 물려받은 것은 그 명이 의로워서였다’”고 평하였다.20)

선공의 명이 애초에 도의에서 나왔으므로 목공도 도의로 후사를 여이가 잇게 하였다는 평가이다.

하지만 뒤이어 발생한 화독이 상공과 대부 공가를 죽인 사건에 대해『좌전』은『공양전』,『곡량전』과 매우 다른 맥락을 기술하고 있다.

즉 여이가 상공으로 송나라를 통치할 때, 화독이 대부 공가의 미모의 아내를 탐내서 공가를 죽이고 이를 질책하는 상공까지 살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후 화독은 정나라에 있던 목공의 아들 풍을 불러 장공으로 세우고 주변국들에게는 뇌물을 바쳐서 사건을 무마하였다.

『좌전』에서는 노나라가 옛 상나라의 구정(九鼎)을 뇌물로 받은 것에 대해 노나라 장애백(臧哀伯)의 비판을 길게 인용하며 그 “비례”(非禮)를 한탄하고 있다.

『좌 전』에서의 기술은 상세한 맥락을 보여주는 점에서『공양전』,『곡량전』과 차이가 있으 나,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는 데 있어서는 차이가 거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독의 사건을 『사기: 세가』에서는 어떤 평가 없이 간략하게 기술하여 큰 대조를 이룬다.21)

『좌전』의 ‘군자왈’로 시작되는 논평 방식은『사기』의 ‘太史公曰’로 시작되는 논평으로 이어진 것이 분명하다.22)

20) “君子曰 宋宣公可謂知人矣 立穆公 其子饗之 命以義夫”, 『춘추좌전』 隱公3년 傳.

21)「宋微子世家」에서 사마천은 춘추시대 宋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서 화독의 사건을 이해하며 평가보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한편 송상공 시기에 衛나라에서는 위장공의 첩의 아들 인 주우(州吁)가 이복형제인 환공(桓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한 사건이 있었다. 주우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었을 때, 대부 석작(石碏)이 주우를 살해하게 하고, 주우의 일당인 자신의 아들 석후(石厚)도 가신으로 하여금 죽이게 한 일이 있었다.『좌전』에서는 이 사건을 “대의를 위하여 육친까지 죽인” 것으로 석작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사마천은 사실을 간략하고 정확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고 있다. 사마천의 초점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기술하는 데 있었다.『世家』「衛康叔世家」 참고.

22) ‘君子曰’과 같은 論贊의 형식은 『춘추좌전』뿐 아니라 다른 사서에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唐代의 劉知幾에 의하면 ‘太史公曰’은『좌전』의 ‘君子曰’에 그 기원이 있다(이주량 2012, 196).

하지만『좌전』의 저자가 가졌던 도덕적 관점을 사마천은 따르고 있지 않다.

3.국어와 전국책의 역사기술

각각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사건들과 에피소드들을 국별체(國別體)로 다루고 있는『국 어』와『전국책』은 그 체제에서 거의 동일하다. 작은 장 단위로 분리된 개별 사건들과 에피소드들 속에서 저자들은 하나의 재미있는 스토리 형태로 역사를 보여준다.

사건들의 맥락과 상황, 그리고 행위자들이 취하는 전략은 주로 그들의 말과 대화들 속에서 드러난다.

역사가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건과 에피소드의 기술방식 속에서만 드러난다.

사건에 대한 평가보다 맥락과 인과관계 등을 스토리 형태로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두 저작은『좌 전』의 역사기술과 일관된다.

두 텍스트는 역사기술의 형식에 있어서는 매우 유사하나 전체 적인 분위기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에 있어서는 서로 간에 큰 차이를 보인다.

『국어』가 여전히 ‘도덕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면,『전국책』은 도덕적 메시 지를 제거하고 상황 속에서 행위자들이 취하는 정치적 ‘전략’들을 주로 드러낸다.23)

23)『국어』가『좌전』을 지은 좌구명이 참고한 일종의 “사료모음집”인 것에 비해(高國抗 1998, 103-111), 『전국책』은 사마천 사후 약 백년 후에 劉向(B.C. 77-6)에 의해 편집되어 만들어진 책이다. 중국 학자 鄭良樹 의 『戰國策硏究』, 1972에 의하면 유향은 당시 종횡가들의 여러 저작들에서 내용을 뽑아 『전국책』을 편집 하였다. 鄭良樹와 크럼프(James Crump, Chan-kuo Ts’e, 1979)는 그 텍스트 속의 뛰어난 변론들은 유세가 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모델 변론’으로써 구성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전국책』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종종 의심이 제기되었고, 실제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거나 어떤 경우는 사실을 변조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사마천은『전국책』의 원본에 해당하는 종횡가들의 여러 저술들을 참고한 것이 분명한데, 鄭良樹는『사기』 속의 전국시대 관련된 내용의 약 44%가 현존하는『전국책』의 내용과 일관된다고 한다. 사마천의 경우 그 원본을 참고하였으므로 위의 수치는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두란트는 사마천이 춘추시대를 기술할 때 『좌 전』에 의존하였듯이, 전국시대를 기술할 때에는『전국책』의 원본을 주로 의존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현존 하는『전국책』이 사마천이 참고한 종횡가들의 원본에서 나온 것을 강조하여『전국책』을 『사기』 이전에 있었던 텍스트로 간주하였다. Durrant 1995, 101-3에서 재인용.

『국어』 속에 있는 다양한 주제들 중 상당수가 도덕적인 내용을 다루거나 도덕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점에서는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좌 전』과 유사하다.

두 저작의 성립과정과 저자로 일컬어지는 좌구명(左丘明)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최소한 그 도덕적 메시지에 있어서 두 저작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국 어』 속의 두드러지는 부분 중 하나인「제어」(齊語)는 유명한 제환공과 관중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세가』에서 사마천이 기술하고 있는 제환공에 대한 서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마천이 사실 위주의 절제된 기술을 통해 제환공의 장단점을 공정하게 드러내려 하였 다면,『국어』 속에서 보이는 제환공의 패도는 사실상 ‘왕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고 환공과 관중의 치술은 ‘올바른 통치’의 전형으로서 옹호되고 있다.

즉 제환공의 패도는 도의에 기반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국어』에서는 “예”, “예법”, “덕”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 이 점은 여전히 춘추시대에 이러한 가치들이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 로 해석될 수 있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서인『국어』의 한 특성을 드러낸다. 역사 속 인물들의 ‘전략적’ 사고가 강하게 드러나는『전국책』에서는『국어』 속의 춘추 시대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기존 질서와 예법에 대한 존중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전국책』의 지배적 분위기는 열국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문제였다.

특히 강국인 진(秦)나라를 합종책을 통해 방어하거나 진의 경우 열국의 연대를 깨뜨리는 일이 주요한 정치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전국책』은 각국의 정치적 전략과 이해관계와 관련된 개별 인물들의 전략적 아이디어와 사건들, 에피소드들을 기술하는 텍스트이다.

도덕적인 시각을 배제하고 전략적 관점을 통하여 역사를 이해하는 점에서『전국책』은 기존의 역사서와 단절을 이루며,『서 경』이래 중국사 기술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하고 있다.

『열전』에서 사마천은 전국시대부터 초한지제(楚漢之際)까지의 인물들을 전략적 사고 위에서 행위한 것으로 기술 하고 있고 역사기술에서 도덕의 문제를 제거하고 있는데, 이 점은『전국책』의 역사기술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열전』은 사건이나 에피소드 중심이 아닌 인물들을 기사본 말체로 다루는 점에서 그 체제가『전국책』과 다르지만, 전략과 이익, 욕망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저자가 개입하는 대신 이야기 형태로 사건이 전개되는 점에서『전국책』과 유사하다.

리와이이는 사마천의 역사기술을 다루면서『좌전』의 역사기술이 미친 영향만을 고려하였 는데, 필자가 보기에는『좌전』과 함께『전국책』의 원본이 사마천에게 미친 영향도 진지하 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Wai-Yee Li 1994).

두 저작은 도덕적 평가보다 역사적 실제에 초점을 두고 있는 점에서『사기』의 역사기술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3.백이열전속의 역사와 도덕

『열전』의 첫 편인「백이열전」(권61)은 ‘백이숙제’의 고사에 대해 공자와 다른 견해를 제시한 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주목되고 토론되어 왔다. 예를 들어 당대(唐 代) 유지기(劉知幾)는 그의 저서『史通』권8에서 고요(皐陶), 이윤(伊尹), 부열(傅說), 중산보 (仲山甫)와 같이 공훈이 많은 인물들도 있는데, 백이숙제를『열전』 첫편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을 문제 삼았고,24)

남송대의 주희는『朱子語類』 권122에서 동시대 인물인 呂伯恭이『史 記』를 좋아하는 것을 비판하며 사마천의 해석이 원망하는 말들로 가득 차서 공자가 세운 백이숙제의 이미지를 망쳐놓은 것으로 비판하였다.25)

24) 이인호 2003, 109에서 재인용.

25) “孔子設 伯夷求仁得仁 又何怨. 他[司馬遷]一傳中首尾皆是怨辭 盡設壞了伯夷.”『朱子語類』 권122:16. 이 텍스트에서 사마천은 매우 단편적으로만 언급되고 있다.

한편 구한말 유학자인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은 기존의 해석들이 ‘怨’이란 표현에 주목함으로써 사마천이 정작 말하고자 하였던 의도를 놓치고 있으며 사마천의 진정한 의도는 공자를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동일하게 유학적 관점을 취하면서도 주희와 이건창의 해석은 정반대였다.

주희의 관점을 비판하고「백이열전」을 공자의 사상과 일관되는 것으로 평가하는 이건창의 해석은 흥미로운 관점이긴 하나 동시에 큰 결함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본 장은 이건창의「伯夷列傳 批評」(이하「비평」)을 토론하며 사마천의「백이열전」을 역사와 도덕의 관계를 중심으 로 분석해보고자 한다.26)

「비평」은 전반부에서는 전통적인 주석방법에 따라「백이열전」의 텍스트를 경(經)으 로 삼아 주석을 덧붙이는데「백이열전」전체를 절 단위로 구분하여 내용의 흐름을 해설하 고, 후반부에서는 스스로 전 전체를 평가하며 사마천이 의도했다고 생각한 대로 내용을 재구 성하여 요약하고 그의 메시지를 재강조하며 끝맺고 있다. 영재의 해석은 다음 몇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먼저, 사마천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미가’(采薇歌)를 인용하며 백이숙제의 고사를 다르게 해석하여 그들이 “원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라고 물었던 2절과,27) 이를 보다 일반화하여 백이숙제와 안연 같은 이들은 행실이 고결하였지만 굶어서 죽었고 도척(盜 蹠) 같은 도적은 온갖 악행을 다 하였어도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을 대조하며 “이른바 천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고 묻는 3절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26) 한국학문헌연구소 편,「伯夷列傳批評」,『李建昌全集 下』, 아세아문화사, 1978, 769-778. 이 자료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이희목 2007 참고.

27) 采薇歌는 다음과 같다: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포악함으로 포악함을 바꾸고서도 잘못된 것임을 모르는구나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신농, 우, 하의 시대가 홀연히 사라졌으니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神農虞夏忽忽焉沒兮) 아 떠나야지 명운이 쇠하였구나 (于嗟徂兮 命之衰矣)

「백이열전」의 명성은 사실 이 절들에서 기원하였는데도, 이 부분은 그다음에 오는 내용들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글쓰기의 과정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그 두 절이 나타내는 반유학적 메세지를 회피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의 구분법에 따른 4절은『논어』의 구절들을 주로 인용하고 있는데, 영재의 독특한 점은 이 절이 ‘인도’(人道)를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천도(天道)는 비록 믿을 수 없을지라도 인도는 믿을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사마천이 성인(공자)의 말씀에 의탁하려 하였다고 본다.

그는 인도론이 다시『논어』「위령공」 편의 한 구절과 가의(賈誼)의 <붕조 부>(鵬鳥賦)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소절(小節)인 5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도는 선(善)해야 하지만 선으로 부(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군자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사후에 이름(名)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이다.

5절의 두 인용문에서 ‘君子’와 ‘烈士’는 모두 ‘名’을 추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영재가「백이열전」의 핵심 혹은 “정필(正筆)”로 강조한 부분은 마지막 6절 로서 백이숙제와 안연이 공자를 만나서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고 쓰고 있는 부분이다.

주석에 서 그는 사마천이『사기』를 쓴 이유도 공자와 다름없이 군자와 열사를 위하여 이름을 세워주 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고, 같은 맥락에서 사마천의 본래 의도는 공자를 따르는 것인데 (주희를 포함한) 소유(小儒)들이 도리어 뱃속 가득 원망뿐이다는 말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영재의「백이열전」해석의 핵심은 사마천을 공자를 존중하고 따르는 공문(孔門)의 한 문도(門徒)로 보는 점이다.

따라서 ‘채미가’를 인용하며 백이숙제의 뜻을 재평가한 부분과 천도가 옳은가 그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제기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영재는 청대학자 장학성(章學誠)을 따라「백이열전」을 “史記列傳總序”라고 이해 하고 있다.28)

하지만「백이열전」의 ‘서론’으로서의 성격은 단지 마지막 절의 공자와의 연관 성에서『사기』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본문인 여러 전들을 읽다 보면 천도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사마천이 실제로 드러내려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사마천의 의도는 무엇보다 천도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었고「백이열 전」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29)

나아가 ‘군자와 열사를 위하여 이름을 세워주는 자’로서 공자와 사마천의 역할을 정의하는 것은 하나의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마천의 『열전』 속의 인물들 중 군자와 열사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가 드러내고 있는 인물들과 그들이 만든 역사는 군자, 열사의 삶과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영재의 해석은 따라서「백이 열전」을 본문의 전들과의 대비 속에서 분석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는「백이열전」의 해석을 통하여 사마천이 아닌 공자를 구해내려 하였다.

필자는 영재와 달리「백이열전」을 다섯 절로 구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제1절은 요임금이 천하를 양위하려 하였다고 전해지는 허유(許由)와 하나라 말기의 변수(卞隨)와 무광(務光)과 같이 높은 절의를 가졌다고 전해지는 이들의 사적이 문서로 남아 있지 않은 점을 의아해하는 일종의 도입부이다.30)

28) 심지어 그는「백이열전」을 “史記全部總序”로 확대해석하고 있기도 하다.「백이열전」이『열전』 전체의 ‘서론’에 해당된다는 언급은 章學誠(1738-1801)의『文史通義』 권6「書敎下」의 기술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성규 2007, 47.

29) 송대 정이(程頤)는 사마천이「백이열전」에서 안회가 요절하고 도척이 천수를 누린 것을 대비시켜 천도의 존재를 의심한 것에 대해, 일개인의 경우를 가지고 보편타당한 天理의 존재를 따지는 것으로 비합리적이라고 이해하였다. 이인호 2003, 118에서 재인용.

30) 제1절: “夫學者載籍極博 ... 其文辭不少槪見 何哉”.

 

제2절은 백이숙제의 일화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채미가’를 인용하며 그들이 원망하였 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으로 끝을 맺는 부분이다.31)

제3절은 2절의 내용을 보다 일반화하여 천도는 늘 선한 사람과 함께 한다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백이숙제와 안연의 사례에서처럼 선한 사람이 굶어 죽고 반대로 도척 같은 이가 천수를 누리는 것을 말하며

“나는 몹시 의심스럽다. 소위 천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며 깊은 회의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32)

제4절은 스스로의 말을 자제하고『논어』속의 구절들을 주로 인용하며 “淸士”와 “君子” 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절이고,33) 마지막 5절은 같은 밝음은 서로 비춰주고 같은 류는 서로 모인다고 하며, 백이숙제와 안연의 행적이 공자의 기록에 의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고 말하 고 있는 부분이다.34)

기존의 해석들이 강조하였듯이 사마천의 의도는 이 마지막 절들에 들어 있다.35) 영재 역시 이 절들을 통해 사마천이 공자를 따르고 있다고 보았다.

31) 제2절: “孔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 由此觀之 怨邪非邪”.

32) 제3절: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33) 제4절: “子曰 道不同 不相爲謨 ...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34) 제5절: “賈子曰 貪夫徇財 烈士徇名 夸者死權 衆庶憑生 ... 惡能施于後世哉”.

35) 조선 후기 학자 강규환도「백이열전」을 해석하며 마지막 절을 백이전의 핵심으로 파악하였다. 姜奎煥,『賁 需齋集』권8「伯夷傳籤錄」. 이승수 2014, 71-72에서 재인용.

그는 마지막 절의 내용을 강조하 여, 사마천이 사가(史家)인 공자를 따르고 있다고 보고 자신도 암혈지사(巖穴之士)와 덕행을 쌓은 여항지인(閭巷之人)을 드러내 주는 “청운지사”(靑雲之士)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영재의 문제는 2, 3절과 4, 5절을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은 점에 있다.

2, 3절의 메시지가 천도에 대한 회의라면, 4절에서 사마천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청사”와 “군자”의 길에 대한 묘사이다.

2, 3절과 4절은 “道不同 不相爲謀 亦各從其志 也”로 연결되어 있다.

즉 다양한 길이 있는데 길이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사람들은 각자의 뜻을 따라 각자의 길을 택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 절에서 청사와 군자의 인용은 옳은 길의 추구로서가 아니라 세상의 다양한 길들 중의 하나로서 인용하 였다.

뒤이은 5절에서 인용된 가의(賈誼)의 문장에서는 탐부(貪夫)의 財를 좇는 길, 열사(烈士) 의 名의 추구, 과자(誇者)의 權의 지향, 중서(中庶)의 生의 도모의 길로 세분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절에서 사마천은 다양한 길들 중에서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서로를 비춰주고 서로 모이기 마련이다고 말하며, 공자가 같은 부류인 백이숙제와 안연을 드러내 주었다고 적고 있다.

사마천 자신은 이름을 추구하는 淸士와 君子의 길을 가려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지만, 이 세상에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2, 3절에서 말한 천도가 없는 세계와 4, 5절의 자신의 길에 대한 묘사와 사가로서의 역할의 자임은 연속적이다.36)

36)「백이열전」의 해석의 어려움 중 하나는 2, 3절과 4, 5절의 내용이 일관되지 않는 듯 보이는 데 있는데, 이 문제는 4절에서 淸士와 君子의 길을 옳은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로 해석하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백이열 전」해석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이승수 2014, 2절 참고.

자신의 삶의 지향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다른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데에 사마천 의 세계관의 특징이 있다.

이 전제가 5절에서 말한 사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실제로 발휘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열전』의 본문에 해당하는 68편의 전들은 그 다양한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열전』전체와 관련하여 고려해 볼 때, 서론으로서의「백이열전」은『열전』속의 두 가지 큰 주제를 미리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天道’와 ‘人道’의 관계로 역사 속에는 궁극적으로 선한 쪽으로 사태를 이끄는 천도와 같은 것은 없지만, 이 세계 내에서 통용되는 사람의 도리와 관습으로서 인정되는 규범과 가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우리가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 인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4절의 “세상이 혼탁해지면 청사가 드러난다”(擧世混濁 淸士乃見)와 “군자는 사후에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와 같은 구절은 인도의 관점을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둘째는 천도가 없는 역사의 기술과 청운지사로서의 역할 사이의 관계이다.

청운지사로서 사마천은 각 시대의 두드러진 인물들의 면면을 적고 역사에 남길 의무를 가졌다.

하지만 그가 천도가 없는 역사를 가정하고 있었기에 역사는 도덕적 평가보다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 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실제로『열전』전체에서 사마천이 가졌던 어떤 뚜렷한 이념이나 사관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그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실제 드러내기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역사적 실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교훈을 주고자 하였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초점을 두는 인물들은 백이숙제나 안연과 같이 선하면서도 비극적인 삶을 산 인물들이 아니라 세속적인 인물들 중 기록으로 남길만한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절의자(節義者)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대체로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면모 를 가진, 동시에 개성적인 인물들이었다.

동일하게 청운지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도덕사관을 가진 공자와 그렇지 않은 사마천의 목표는 매우 달랐다.

Ⅳ.사기:열전의 구조와 그 기술방식

1.열전의 체제와 두가지 역사기술

『열전』총 70편(권61-130) 중 첫번째 전인「백이열전」과 마지막「태사공자서」를 제외하고 68편을 시기적으로 구분해 보면, 춘추시대 인물들의 전이 권62에서 67까지 6편, 전국시대 인물들의 전이 권68에서 84까지 17편, 진대(秦代)와 초한지제 인물들의 전이 권85 부터 95까지 11편, 마지막으로 전한기 인물들의 전이 34편이다.

전한기로 구분된 인물들 중 한대 초기에 고위직에 오른 여럿은 이미 초한지제부터 활동하던 인물들인데, 앞부분에 배치된 전들 중 96권에서 100권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이 그렇다.

게다가 여러 전들이 주제 중심으로 묶여서 한두명의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여러 인물들을 동시에 다루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 전들인「귀책열전」(龜策列傳)과「화식열전」(貨殖列傳)은 인물이 아니라 점 복(占卜)과 부(富)의 축적과 같은 주제 중심으로 전이 구성되어 있다.

체제상 춘추전국에서 초한지제까지의 전들이 34편이고 전한기로 구분되는 전들이 또한 34편이다.

권86「자객열전」(刺客列傳)의 논평에서 사마천은 다섯 명의 자객은

“그 의행(義行)을 이루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였지만 뜻을 세움이 뚜렷했고 그 뜻을 추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 어찌 망령된 일이 되겠는가!”고 적고 있다.37)

37) “此其義或成或不成 然其立意較然 不欺其志 名垂後世 豈妄也哉”, 「자객열전」.

또 권124 「유협열전」에서는 민간의 협객들 중 행실과 이름을 닦아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존경할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유가와 묵가에서는 이들을 배척하고 기록 하지 않지만 자신은「유협열전」에서 다루어 이들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자 한다는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이로 보아『열전』의 기본 의도는 각 시대에 두드러진 혹은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작업, 즉 ‘청운지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에 있었다.

사마천이 드러내고 있는 인물들은 대체로 정치외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체제 상 本紀와 世家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인물들, 각 시대의 뛰어난 장군들, 노자, 한비자, 맹자, 순자와 같은 이름난 학자들, 굴원, 가의, 사마상여와 같이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긴 이들, 또 자객이나 의협(義俠)처럼 한 시대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포괄되어 있다.

그 속에는 소위 절의자로 불릴 만한 사람들이 몇 있긴 하지만 그들은 수적으로 많지 않다.

사마천이 인물들을 기록하는 목적은 단지 이들의 개인적 삶을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하여 그들의 시대의 역사를 드러내려 하였다.『열전』 속에서 개인들의 삶과 행적이 씨줄에 해당한다면 정치외교사는 그 씨줄을 꿰뚫고 이어지는 날줄에 해당한다.

개별 전은『춘추좌전』이래의 역사기술을 따라 사건들의 묘사와 인물들의 말을 잘 배합하여 하나의 재미있는 스토리를 구성한다.

그 스토리들은 대체로 도덕적 평가 대신 역사의 실제를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대체로 그 스토리의 마지막에 오는 “태사공왈” 에 그의 평가가 들어있기도 한데, 그의 평들은 ‘맥락 속에서’ 합당하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들일 뿐 역사적 맥락을 넘어선 어떤 특정한 원칙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권88「몽념열전」(蒙恬列 傳)의 경우 진시황 사후 간신 조고(趙高)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몽념 장군에 대한 사마천의 평이 들어 있다.

사마천은 그가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서 백성의 궁핍을 구제하고 노인과 고아를 부양해 모든 백성을 안온하게 만드는 일에 힘쓴 대신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하여 만리장 성을 쌓는 공사를 일으켰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몽념과 고관이었던 그의 동생 몽의(蒙毅)가 죽임을 당할 이유가 있다면 이 이유 때문이고, 몽념이 스스로 얘기했다고 하는 지맥(地脈)을 끊은 것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사마천의 몽념에 대한 평가는 선악과 시비의 도덕관에 기초 해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될 수 있는, 또 이 세계 내에서 공유되는 하나의 약한 당위론에 기초해 있다.38)

38) 사마천이 도덕적 기준에 따라 평가했다면 몽념장군이 아니라 간신 조고와 당시 재상으로서 이를 방조한 이사 (李斯)를 비판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천도라기보다는 인도에 가까운 것이다.

요약하면, 청운지사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인물들의 사적을 기록하는 일과 그 인물들을 통하여 그들의 시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2.전국시대에서 초한지제까지의 역사기술

전국시대에서 초한지제까지를 다룬 전들은『열전』전체의 중심적인 전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고대부터 사마천의 당대까지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역사가 바로 이 시기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전통의 붕괴가 극심하여 전통적인 천자국과 제후국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 으며 열국은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부강’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었다. 전국시 대는 진(秦)나라에서 변법을 시행하여 진이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하는데 기여한 상앙(商鞅)에 대한 전으로 시작하는데, 상앙과 진효공의 만남에 대한 묘사는 이 시대의 특성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이다. 현자를 찾고 있던 진효공에게 유세하여 등용되고자 한 상앙은 처음에 전설적인 요순의 치도를 말하여 효공의 관심을 끌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두 번째 만남에서 는 하나라 우왕, 은나라 탕왕, 주의 문무왕의 치도에 대해 말했으나 역시 효공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상앙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세 번째 만남에서는 춘추오패의 패도(覇道)를 말하였 고 그제서야 효공의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효공의 관심사를 알아차린 상앙이 그 다음 대면에서 의도적으로 “彊國之術”에 대해 얘기하자 효공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화는 전국시대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즉 열국 경쟁의 시대에 각국의 군주들은 부강을 중요하게 여겼고 유세가(遊說家)들 혹은 외교전략가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생존할 수 있는 전략을 조언함으로써 입신출세를 도모하였다. 실제로 전국시대를 다룰 때, 사마천은 이들 유세가들을 가장 먼저 다루고 있다. 권68부터「상군열전」(商君列傳),「소진열전」(蘇秦列傳),「장의 열전」(張儀列傳),「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이 다루어지고, 뛰어난 진(秦)의 장 군들을 기록한「양후열전」(穰侯列傳)과「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이 뒤를 잇고 있 다. 이들 유세가들 혹은 종횡가들을 먼저 다룬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그 시대가 외교전략가들 의 시대였음을 말해준다. 일례로 진시황을 도와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사(李斯)는 스승 순자 (荀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사마천은 적고 있다: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때를 얻으면 놓치지 말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만승의 대국이 싸우는 때입니다. 유세가들이 천하의 정사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나라는 천하를 삼킨 뒤 스스로 왕을 칭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지위나 관직이 없는 선비가 바삐 다녀야 할 때로, 유세가에게는 결정적인 시기에 해당합니다.”39)

사마천이 맹자를 평하면서 그의 사상의 현실적 한계를 지적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맹자는 제선왕과 양혜왕에게 유세하여 지위를 얻고자 하였으나 당시 열국의 왕들은 맹자의 말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야기가 많고 실정에 부합치 않는다고 여겨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사마천은 적고 있다.40)

39) “斯聞得時無怠 今萬乘方爭時 遊者主事 今秦王欲呑天下 稱帝而治 此布衣馳騖之時而遊說者之秋也”, 권87 「이사열전」.

40) 권74「맹자순경열전」. 김병준은 맹자와 순경을 중심으로 해석한 기존 독법과 달리,「맹자순경열전」의 본 문은 자신들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던 공자, 맹자와 달리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먼저 약간 굽힘으로써 군주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추기(騶忌), 추연(騶衍), 순우곤(淳于髡), 순경(荀卿) 등을 대조 한 글이라는 것을 뛰어나게 논증하였다. 사마천의 실용적 접근이 드러나는 부분이다(김병준 2021).

역사기술의 관점에서 전국기의 열전들을 볼 때 두드러지는 점은 다른 시기보다 전략적 사고와 이익의 관점이 강조되어 드러나고 있는 점에 있다.

그것은 소위 ‘전국칠웅’이 경쟁하던 이 시대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열국간의 영토를 둘러싼 전쟁이 잦았고, 외교전략가들이 각국의 생존전략에 대하여 유세하였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주변국과의 전략적 동맹과 파맹이 흔하였기 때문이다.

전국기 열국간의 국제관계는 유세가들인 소진(蘇秦)과 장의(張 儀)로 대표되는 합종책과 연횡책의 대결로 요약된다.

전국시대 최대의 강국은 서쪽의 진(秦) 나라였고 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조(趙), 위(魏), 한(韓), 초(楚)나라는 항상 진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소진의 합종책은 진을 제외한 열국이 연합하여 진을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였 다.

반면 진나라를 위하여 유세가로 활동하고 있던 장의는 개별 국가들로 하여금 강국인 진과 연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연횡책의 논리로써 합종책을 깨뜨리려 하였다.

각국의 군주 들은 합종책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진의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과 전략적 압박 또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합종책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자국의 이익과 전략적 상황 속에서 각국은 대체로 합종책과 연횡책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다.

이들 중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진은 전략상황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권70「장의열전」에서 잘 드러나듯, 장의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전략게임을 각국의 군주들 에게 펼쳐 보이면서 생존을 위해 결단하여야 하는 각국의 군주들을 두렵게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진과의 연대를 맺도록 압박하였다.41)

41)「소진열전」과「장의열전」을 분석하며 두 사람의 설득 기술을 연구한 고광민은 두 사람이 각국의 상황을 철저하게 사전 학습하고 군주들의 감정을 격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설득에 성공하였다고 보았다(고광민 2019, 449-472).

실제로 진이 당시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백만 대군과 뛰어난 장군들만이 아니라 여러 외교책략가들과 그들이 사용한 전략과 이간계들이 함께 맞물려 작동한 데 있었다.

권81「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서 잘 드러나듯, 진은 조나라를 무너뜨릴 때 이간계를 써서 조의 왕으로 하여금 군사문제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고 있던 자신의 장군들을 불신하게 하였고 이목(李牧)과 같은 뛰어난 장수들을 직위에서 해임하게 하였다.

조왕 천(遷)은 장군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이 반란을 꾀한다는 진의 이간계에 속았고 국가의 멸망보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데 관심을 둠으로써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실제로 이 시대 인물들의 행위 동기는 도의나 대의보다 개인의 이익에 기반하고 있었고 이익의 논리가 역사를 끌고 가는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권73 「백기왕전열전」에서 잘 드러나듯이, 진(秦)의 책사이자 승상인 범수는 백기장군이 공을 더 세워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고, 왕전장군은 진의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치러 떠나면서 자신과 일족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하찮은 전답과 저택을 요구하여 진시황의 의심을 없애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익의 논리의 지배는 진나라의 운명 역시 결정하였다.

권87「이사열전」(李斯列傳)과 뒤이은「몽념열전」에서 사마천은 왜 진이 진시황 사후 4년만에 붕괴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간신 조고가 펼친 이익의 논리와 2대왕인 암군 호해(胡亥) 때문이었다.

진시황 급사 후 조고는 먼저 재상 이사를 이익의 논리로 설득하여 자신이 보필해 온 어린 호해를 왕으로 세웠고 또 호해를 간악한 논리와 전략으로 설득하여 진의 정치를 장악하였다.

이익과 전략의 논리가 진나라 통치자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던 바탕 위에서, 간교한 신하 조고가 어린 왕 호해를 통제하자 진나라는 급속하게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본래 이익의 논리에 기반한 법치와 술치로 일어섰던 진나라는 같은 논리로 내부로부터 스스로 붕괴하였다. 법치 속에 존재하던 질서와 엄정함이 무너지자 진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 다.42)

권89「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부터 시작되는 소위 초한지제는 도의라고는 찾 아보기 어려운 전쟁 상황과 전쟁 후 반역의 기미를 보인 장군들에 대한 소위 토사구팽으로 평가되는 사건들의 기술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이 시대의 역사가 ‘이익’의 논리 위에서 만들어진 것을 사마천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권74「맹자순경열전」에서 사마천은 “태사공왈”을 서두에 두면서『맹자』를 읽을 때 양혜 왕이 맹자에게 “何以利吾國”이라고 묻는 장면을 대할 때마다 한탄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어서 “이익이야말로 실로 혼란의 시작이다. 공자가 이익을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은 혼란의 근원을 막으려는 취지였다”고 하며,『논어』「리인」편에서 “이익을 좇아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고 하였는데,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하는 병폐가 어찌 다르겠는가고 한탄하고 있다.43)

명백히 전국기의 맥락에서 그는 이익의 논리가 낳는 문제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이 이익(利) 그 자체를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본 것은 아니다. 권129「화식열 전」에서는 삼대 이래 사람들이 욕망을 채우는 것에 몰두하면서 이익추구 성향은 사람들의 본성이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또「禮書」에서는禮로써 이욕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44)

이 세 편은 다른 관점에서 利를 다르게 조명하고 있는데 서로 모순된다고 볼 수 없다.45)

42) 진의 멸망을 公(public)의 논리만을 강조하는 法治에서 찾고 그에 대한 교훈으로서 한나라는 共(common), 혹은 禮를 더하여 外禮內法의 통치원리를 채택하였다는 흥미로운 견해는 장현근 2010을 참고.

43) “余讀孟子書 至梁惠王問 何以利吾國 未嘗不廢書而歎也 曰 嗟乎 利誠亂之始也 夫子罕言利者 常防其原也 故 曰 放於利而行 多怨 自天子至於庶人 好利之弊何以異哉”, 권74「맹자순경열전」.

44) 반고의 기록 이래「예서」(禮書)에서는 사마천의 글이 아닌 ‘僞書’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루안즈셩과 같은 학자 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阮芝生 1985, 35-49 (“附論二: 再論 <禮> <樂> 二書之眞僞”) 참고. 45) 필자는『史記: 書』의「평준서」(平準書)와「화식열전」의 관계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평 준서」는 무제기 한나라의 재정상황과 그 정책들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화식열전」은 ‘富’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과 큰 부를 쌓은 “소봉”(素封)들과 그들이 사용한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두 편에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보이나, 필자가 보기에 전자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였 고, 후자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부의 의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표출하였다. 두 편은 부를 기술하는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역사가로서 사마천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다르게 드러나는 역사의 복합적 작용을 이해하고 있었다.46)

46) 기존 연구들 중『사기』를 유학의 전통 속에서 해석하려는 학자들에게서 일원적 해석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루안즈셩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화식열전」을 무제기 세속의 부를 좇는 풍속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지어 진 하나의 ‘謗書’로 보고 있다. 또「예서」를 인용하며 사마천이 강조한 것은 예의였고 예로 지나친 이욕을 막는데 그의 진정한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이 도덕주의적 해석은「화식전」의 텍스트를 벗어난 것으 로 그 전의 내용으로는 지지되기 어렵다. 그는 사마천의 ‘복합적’ 역사기술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듯 보인다(阮 芝生 1985).

3.전한기 인물들의 기술

사마천은 한무제(武帝, B.C. 156-87) 시기를 살았다.

한고조 사후 혜제(惠帝) 때 왕실 내에서는 여태후(呂太后)에 의한 전횡이 있었고, 문제(文帝)의 성세에 뒤이은 경제(景帝) 때에 는 제후국들의 영토를 삭감하면서 그에 대한 반발로 소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있었으 며, 무제 시기에는 진나라가 복속시켰던 주변 이민족들의 땅을 무력으로 회복하고 북쪽 변경 을 자주 약탈하는 흉노족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전한기는 사마천 자신의 시대였고, 그의 부친 사마담에 이어 ‘太史’로 봉직한 시기라 이 기간의 열전들은 보다 상세하고 종종 인물들의 성향과 특징에 대한 직접적인 평까지 담고 있다.

이 시기 열전들은 먼저 한고조와 문제 시기 고위 관리를 지낸 인물들 중 국가에 공로가 있거나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들을 다루는 부분(권96-105)과 경제와 무제 시기 국내 의 반란과 주변 이민족과의 전쟁을 다루는 부분(권106-118), 그리고 순리(循吏)와 혹리(酷 吏), 유림(儒林)과 유협(遊俠), 영행(佞幸), 골계(滑稽) 등 다양한 주제로 묶여진 전들을 다루는 부분(권119-129)으로 크게 구분된다.

각 인물들의 전은 시기별, 맥락별로 배치되어 있다. 대체로 전들은 유사한 인물들을 묶어서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기의 전들도「한장유열 전」(韓長孺列傳, 권108)과「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권117)을 제외하고 모두 두세 명 혹은 여러 인물들을 함께 묶어서 다루고 있다.

이 시대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이전 시대의 인물들에 비해 역사적 중요성 면에서 떨어지고 그들의 삶과 행적도 다소 밋밋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이 시기 인물들의 전 속에는 각 인물들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고 역사 속 인간의 장단점을 함께 주목하는 사마천의 관점도 잘 나타나 있다.

전한기의 수많은 인물들 중 사마천이『열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인물들은 유경(劉敬), 숙손통(叔孫通)과 같이 한고조기에 좋은 제안을 하여 국가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한 경우, 난포 (欒布)와 같이 의리를 위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은 기개를 높이 산 경우, 장석지(張釋之), 풍당(馮唐)과 같이 문제기에 직언을 하여 군주를 잘 계도한 경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과 같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들, 장건(張騫)과 같이 흉노의 영토를 넘어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과의 교류를 개척한 인물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인물들의 주류는 당시 한왕실의 관리로서 활약한 이들에 대한 기술이다.

사마천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관리들은「혹리열전」속의 여러 인물들을 빼고는 대체로 선인(善人)들이었다.

그들은 관리로서 대체로 충직하고 청렴한 인물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고조기의 주창(周昌)이나 문제, 경제기의 원앙(袁盎)과 조조(鼂錯), 무제기의 급암 (汲黯)과 같은 인물은 강직하고 두려움 없이 직언을 한 점에서 공통적이나 개인적 성향과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보였다. 권101「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 傳)과 뒤 이은「전숙열전」(田叔列傳)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은 모두 충후하고 공경하며 신중 한 처신으로 이름을 날린 경우이다.

고조기의 숙손통과 경제와 무제기의 한안국(韓安國)은 기지와 재치를 가졌던 관리들이었다.

사마천은 이들이 동시에 한계와 단점도 가졌음을 지적한다. 고조기에 한나라의 유교적 의례들을 정비하여 한나라의 유종(儒宗)이 된 숙손통은 상황에 따라 아첨도 하였고 처음에 항우를 섬기다가 유방을 섬겨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문제, 경제기에 간언을 잘한 원앙과 조조는 자신들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듯한 간언을 하였고 그 때문에 천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반면, 문제기의 장석지와 풍당은 역시 직언을 자주 하였지 만 동시에 신중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자신과 네 자식의 봉록이 총 만석에 달하여 “萬石君” 으로 불린 석분(石奮) 집안에서 승상까지 오른 석경(石慶)이나 경제 때의 승상이었던 위관(衛 綰)은 모두 충후하고 신중한 처신으로 유명하였지만, 백성을 위한 원대한 계책은 없었던 인물들로 사마천은 평하고 있다.

나아가 사마천이 관직생활을 한 무제기에 고관이었던 인물 인 한안국과 공손홍, 급암, 장탕(張湯) 등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본문 속에서 그들의 인물 됨에 대해 직접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기도 하다.

유학의 박사로 뒤늦게 관직에 들어와 최고직 인 승상에까지 오른 공손홍에 대해 사마천은 그가 겸손하고 청렴하며 업무에 두각을 나타내어 한무제의 총애를 입었지만, 남을 의심하고 시기했으며, 겉으로는 관대한 척했으나 속마음은 알 수 없었던 인물이라고 평하면서 자신과 틈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것처럼 꾸몄지만, 뒤로는 은밀히 설욕하고자 했다고 적고 있다.

고관인 주보언(主父偃)을 죽이고 동중서(董仲舒)를 교서(膠西)로 쫓아낸 것은 그의 힘이 작용한 결과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체로 사마천이 전한기 관리들에 대한 전들에서 의도한 것은 이들의 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충직한 관리들로서 악한 면보다 선한 면이 더 많은 인물들이었지만 각각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계와 단점도 가진 이들이었다.

강직한 이들은 그들의 강직함이 낳은 문제가 있었고, 온화하고 충후한 인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상당수는 교묘한 방식으로 군주에게 아첨하고 능란하게 처신하여 입신출세를 도모 하였다.

자신들의 인간적 성향과 그 시대 상황들의 중층 속에서 일부는 성공적으로 관직생활 을 마치기도 하고, 일부는 특정 사건에 잘못 연루되거나 정적들에 의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 기도 하였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사마천의 기술방식 속에서 역사적 인물들은 어떠한 신화적 외피도 내벗겨지고 있다.

한고조 유방에 대한 묘사가 그렇듯이 그들은 선한 면과 악한 면, 뛰어난 점과 추한 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매우 인간적인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사마천이 그리고 있는 바의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었고 국가는 체계적 인 통치철학 위에서 운영되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변덕스러운 자들이었고 역사의 상당 부분은 우연성이 지배하였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조건들에서 부여되는 과제들 이 있었고, 여러 대안들이 경쟁하였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합리적인 판단뿐 아니라 비합리적인 판단들이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사마천은 그리고 있다.

Ⅴ.사마천의 통치관

사마천의 실제 드러내기로서의 역사 기술방식은 그가 과거와 당대를 바라보는 역사관이 기도 하다.

이 사관은 그의 통치에 대한 이해에도 침투되어 있다.

『열전』 중 그의 통치관이 비교적 명시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사실상 마지막 전인「화식열전」(권129) 앞부분의 “태사 공왈”에 있는 내용이다.

과거의 일보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다루며, 부의 의미, 나아가 거부를 이룬 사례들을 기술하고 있는 이 전은「백이열전」과 마찬가지로 논란을 일으키는 전이며『열전』의 결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전이다.47)

47)「백이열전」과「화식열전」은 다른 주제를 다루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점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점에서 두 전은『열전』의 서론, 결론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성규와 이승수는 두 전의 메시지가 ‘도덕과 물질’, ‘義와 利’로 상반되고 그 사이에 있는 전들은 양자의 다양한 변주라고 본다. 필자와는 다른 견해 이다(이성규 2007, 84; 이승수 2014, 86-87).

사마천은 노자『도덕경』 80장 속의 “至治之極”을 인용하며, 옛날에는 이웃나라가 서로 마주보고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상황에서도 백성들은 각자 자신의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나라 옷을 편히 여기고, 자신의 업을 즐기고,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는 말로 전을 시작한다.

이어서 근세를 끌어당겨 옛날로 돌아가기 위해 백성의 이목(耳目)을 과거로 덧칠하고자 하여도 거의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 구절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통치를 이상화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유구한 경향을 사마천 역시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의 조건을 그가 인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뒤이은 “태사공왈”에서 그는『시경』,『서경』에 보이는 요순과 하나라 이후의 상황을 열거 하며, 사람들은 눈과 귀로는 아름다운 소리나 좋은 모습을 추구하고, 입은 여러 고기의 맛을 보려 하고, 몸은 편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재주와 유능함을 자랑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이런 풍속이 백성들에게 파고들어 오래된 상황에서 이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 속에서 우리는 사마천의 통치관을 엿볼 수 있다.

사마천에 의하면 최상은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따르는 것(善者因之)이고, 다음은 백성을 이롭게 하여 이끄는 것(其次利道之)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게 하는 것(其次敎誨之), 다음이 바로잡아서 가지런히 하는 것(其次整齊之)이고, 최하가 백성과 더불어 다투는 것(最下 者與之爭)이다.

『사기』 번역가 신동준 선생에 따르면, 위 문장은 당시 중국의 사상들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선호와 평가를 나타내고 있다.

그 관점에 따르면, 사마천에게 최선의 통치관은 도가사상이고, 그 다음이 상가, 그리고 유가와 법가가 뒤를 잇는다(신동준 2015, 945-6).48)

48) 천통셩은 이 구절을 유가적으로 해석하여 공자의 ‘富民而敎’ 사상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신동준의 견해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陳桐生 2004, 441-2).

당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면, 중국사에서 가장 잘 다스려진 시기 중 하나로 꼽히는 한대 초의 소위 ‘文景之治’는 도가사상(혹은 “黃老思想”)의 유행 속에 경제적으로 자유방임적 정책 이 취해진 시기였다.

사마천이 도가와 상가적 방법을 최선의 통치관으로 치는 것은 이 정책들 로 인하여 무제기 초기의 풍요함이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나아가 최하인 “백성과 더불어 다투는 것”은 무제기에 연이은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점점 말라가면서 재정 확충을 위해「평준서」에 나오는 대로 소위 “興利之臣”을 이용하고 사회적 불안정을 酷吏를 통하여 다스린 당시의 상황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문제는 사마천의 도가적 통치관 긍정이 당시 무제기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으로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고『사기』의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여태후본 기」(呂太后本紀)에서 사마천은 고조 사후 여태후가 실권을 가졌을 당시 한왕실 내에서의 모략과 사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태사공왈”에서는 이 당시 군신 모두 휴식을 취하고자 하여 무위지치를 행하였고, 그 결과 천하는 평안하여 형벌이 드물었고, 죄수도 희귀했으며, 백성은 농사일에 힘써서 의식이 날로 풍족해졌다고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효문본기」(孝文本紀)에서는 문제(文帝)의 겸양(謙讓)의 정치와 그로 인한 성세(盛世)를 묘사하는데, 그 배후에 있는 사상적 기조는 무위지치와 인정(仁政)이었다.

중국학자 리장즈가 지적하듯이 무제기에 들어와 유학이 통치이념으로 대두하기 전까지 한나라의 통치는 대체로 도가적인 무위지치에 기반하고 있었다.(李長之 1983, 8-10)

도가적 통치관은 개별 인물들에 대한 편에서도 옹호되고 있는데,「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에서 공신이면서 소하(蕭何) 이후 상국의 자리에 오른 조참(曹參)이 황로사상에 기대어 무위지치로 잘 다스린 점을 강조하 거나,「급정열전」에서 급암을 평하며 그가 황로학을 받아들여 큰 원칙만 다스리면서도 담당한 지방을 잘 다스렸고 일을 적게 만들려고 노력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데에서 드러난 다.

리장즈나 이인호, 김원중과 같은 연구자들도 사마천의 사상이 도가사상에 기초해 있음을 지적하였다(李長之 1983, 7장; 이인호 1996; 김원중 2021, 5장).

이들의 연구의 문제는 사마 천의 도가적 성향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거나,「태사공자서」속의 사마담의 소위 ‘六家 之要指’에 나오는 도가에의 경도가 사마천에게 전승된 것으로 보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후자의 해석의 문제는 사마천이 유학자인 동중서에게 배운 점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지 않고, 동시에 뛰어난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상이 단순히 부친에게서 전승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의 허술함이다.

필자는 이 문제는『사기』전체에서 사마천이 드러내고 있는 역사관과 관련하여 논증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마천의 사상에 관한 한, 그의 도가적 경도는 인정할 수 있을지라도 그가 과연 유가를 전적으로 배척하고 도가를 옹호하였는가는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문제이다.

「공자세가」를 보면 사마천이 명백히 공자를 존중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태사공왈”에서 “나는 공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하고 노나라의 공자 묘당을 방문하였을 때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 [발걸음을] 돌이키고 머뭇거리며 떠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49)

49) “余讀孔氏書 想見其爲人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祗廻留之不能去云”, 권47「공자세가」.

한 학자로서 공자가『열전』이 아닌『세가』에 편입된 것은 그의 지적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제자들을 소개하는「중니제자열전」이 있고, 전한 초기 오경(五經)의 박사들과 학문의 사승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하는「유림열전」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필 자가 보기에 사마천의 유가에 대한 비판은 그 사상의 특정한 측면들이었다.

예를 들어,「공자 세가」에는 춘추시대 공자와 동시대 인물인 안영(晏嬰)이 제경공(景公)에게 유자(儒者)들의 단점을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유자는 말재간이 있고 융통성을 잘 부려 법으로 규제할 수 없고, 아랫사람으로 두기도 어려우며, 상례를 중시해 슬픔을 다한다며 큰 장례를 치르고, 유세를 다니며 관직이나 후한 녹을 바라며,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는데 이는 평생을 다 해도 터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를 채용하 여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조언한다.

제나라의 존경받는 재상 안영의 말은 사실 사마천 자신의 유자들에 대한 평이었다.

「유협열전」에서 사마천은 유자 와 유협(游俠)을 비교하며 유자들의 허위의 도덕관을 은근하게 조롱한다.

백이숙제가 수양산 에서 굶어 죽었음에도 주무왕은 보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성인으로 추앙받는데, 이것은 흉포한 도적들인 도척과 장교를 그 일당이 칭송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학문에 얽매이거나 짧은 의리에 사로잡혀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 세상의 흐름을 좇아 영예를 추구하는 속인들보 다 나을 수 있지만,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고, 의리로 목숨을 던지며, 세상을 돌아보지 않는 유협보다는 못하다고 사마천은 은근히 냉소를 표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사마천의 유가 비판은 대체로 그 사상의 비현실성과 비실제성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사마천의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사마천이 맹자를 비평한 맥락도 대략 유사한 이유였다.

사마천이 도가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신선술이나 양생술이 아니라 도가적 통치관을 말한 다.

「화식열전」에서는 백성들이 “자신의 일에 힘을 쓰고 각자의 일을 즐거워하면 이는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아 밤낮으로 멈추는 때가 없으며,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몰려들고 억지로 구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스스로 물품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어찌 도에 부합되어 저절로 그리 되는 징험이 아니겠는가?”고 묻는다.50)

그에 의하면 제나라가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된 이유, 월나라 구천(句踐)이 존망에 처했다가 오나라를 무찌르고 춘추오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도가적이고 상가적인 경제정책 을 썼기 때문이다.

도가적이고 상가적인 방식은 백성의 이익 추구를 긍정하고 정부가 인위적 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는 대신 시장의 논리로 물자의 수급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진나라의 혹정에서 벗어난 후 한나라의 상국이었던 조참은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고 무위지치를 행하였는데, 이에 대해 “천하 사람들이 함께 그 미덕을 칭찬하였다”(天下俱 稱其美矣)고 사마천은 썼다.

무제기의 급암 역시 “통치에 있어서는 무위에 힘썼고 대체를 넓히고 법조문에 구애받지 않은” 방식으로 잘 다스렸다고 평했다.51)

50) “各勸其業 樂其事 若水之趨下 日夜無休時 不召而自來 不求而民出之 豈非道之所符 而自然之驗邪“,「화식열전」.

51) “治務在無爲而已 弘大體 不拘文法”, 권120「급정열전」.

사마천의 도가적 통치관 옹호는 따라서 어떤 특정한 이념에 기댄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살던 시대에서 보고 경험한 역사적 실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로서 사마천은 당위적 측면보다 현실적이 고, 실용적이며, 실제적인 측면을 보기를 선호하였다.「유협열전」에서 유덕자(有德者)는 이익(利)을 누리게 해주는 자가 유덕자라고 말한 것처럼, 좋은 통치는 백성들에게 편안함과 이익을 주는 것이다. 백성들은 관습을 따르고 이익을 좇아 행위하기 마련이다.

이 관습을 무너뜨리지 않고 이익추구를 보장하여 그들의 삶을 유지시키는 것이 통치의 대체라 할 수 있다.

사마천이 보기에 유가와 법가의 ‘有爲’의 통치관보다 도가의 ‘無爲之治’가 우월한 것은 그 실제적 효과 때문이다.

역사의 실제를 중시하는 사마천의 역사관이 그의 통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유이다.

Ⅵ.결론

사마천의『사기』가 위대한 역사서로 평가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중국사의 기원부 터 자신의 시대까지를 다룬 거대한 스케일, 왕가, 제후가, 그리고 개별 인물들을 분리하여 기술하며 동시에 다양한 역사서술의 방식을 동원하여 기술하고 있는 점, 또 치국의 토대가 되는 문물제도들의 정리, 나아가 사마천의 역사가로서의 공정한 평가와 뛰어난 글쓰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사마천의 역사기술의 한 측면, 즉 그의 역사기술이 중국사에서 최초의 주요한 사관인 도덕사관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드러내려 하였다는 점이다.

이미「백이열전」에서부터 사마천은 유학의 도덕사관에 의문을 던지고 역사의 실제를 드러내려고 하였다.

특히『열전』의 주요한 시기인 전국기와 진나라 의 통일 및 초한지제를 다룰 때 그는 사람들이 이익과 욕망을 따르고 그를 위해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위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전한기 인물들의 기술에서는 그들의 장점과 단점 을 그대로 기술하여 어떠한 신화적 요소도 제거하고 있다.

『사기』가 이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역사서로서의 생생함을 잃지 않고 여전히 많이 읽히 는 까닭은 특정한 이념이나 원칙에 따라 기술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의 역사적 실제를 강조하는 역사기술 방식은 사마천 자신의 창조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그에 앞서 시도된 역사기술 방식들 중에서 취사선택할 자유를 가졌고, 역사의 실제를 강조하는 기술방식을 택한 것은 우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마천의 개인사와 관련하여 볼 때, 역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은 그의 부친과 그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한 복수의 성격이 짙다.52)

52) 한무제가 사마담을 노리개로 대하고 악사와 광대처럼 취급하였다는 내용이『한서』「사마천전」에 있다.

자신이 받은 부당한 고통에 대해 영원히 복수하는 길은 관련된 인물들과 사건들을 오직 사실에 기초하여 드러냄으로써 만대 후까지도 생생히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한고조부 터 무제까지 전한기 왕들의 인물됨과 정책들을 여실히 기술하여 그 문제들과 실정(失政)을 드러낸 것은 이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사기』는 이 관점에서만 해석될 수 없다. 사마천은 역사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 하나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과거의 역사가들처럼 그도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주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교훈은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수많은 인물들의 개별적 삶을 조명함으로써 유사하면서도 서로 다른 인간사의 사례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들의 개별적 삶의 역사는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각각의 시대적 맥락과 개별적 삶의 조건들 하에서 그들은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삶 속에는 성쇠와 부침, 행운과 불운, 위대한 요소와 비극적 요소가 들어 있다.

그들의 삶에서 보여지는 인간사의 진실은 역사란 하나의 결론과 이념으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 은 마치 사마천이 한고조 유방을 그릴 때, 하늘이 내린 인물처럼 신비스러운 측면을 그리기도 하고, 수많은 인재들을 포용하는 통치력을 드러내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자식들마저 해치는 잔인함을 묘사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삶은 시대적 조건과 상황들이 끌고 가는 것이면서도 어떤 인물들의 경우는 그들의 의지와 결단이 삶의 과정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인물들의 삶의 단면들을 보여주며 사마천은 결론을 내리기를 꺼려하였다. 평가를 자제한 대신 그는 인물들의 에피소드와 일화 등을 그대 로 보여주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였다.

역사 속의 인간은 선악으로 구분되기도 어렵고 궁극적 으로 역사에 선이 작용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역사기술 방식은 따라서 역사를 가능한 한 그 맥락 속에서 사실적으로 기술하여 인물들과 그들이 관여한 사건들이 다양하게 해석되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리와이이가 말한 ‘호견법’이나 복수 의 말하기 방식은 사마천의 역사이해와 맞물려 있었다.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겨 둔 점에서 사마천의 역사기술은 동시에 문학적이었다.

다른 역사기술 방식을 취함으로써 사마천은 공자의『춘추』와 다른 버전의 역사를 창작 하였다.

「태사공자서」에서 상대부 호수에게 자신의 저작은 새 역사를 창작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은 이 점에서 자신의 의도를 숨길 필요에서 나온 신중함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마천은 자신이 공자와 다른 역사기술로써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자서」에서 공자 이후 오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또 한명의 위대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부친의 말을 인용한 것은『사기』에 대한 자신의 자부심을 은밀히 드러내는 언급일 수 있다.

리장즈가 표현한 대로, 그는 “제2의 공자”(第二個孔子)가 되라는 부친의 유언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공자를 계승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드는 방식을 통해서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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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s)┃

Exhibiting Historical Reality: An Analysis of Sima Qian’s Historiography in the Biographies of the Shiji Kim, Choong-Yeol (Institute of Public Governance, Kyung Hee Univ.)

This paper aims to provide fresh insights into Sima Qian’s historiography by highlighting the divergence of the Shiji from traditional Confucian historical narratives. Previous studies on Sima’s historical writing have mainly focused on his ironic narrative style and his multifaceted narrative approach. The unique writing styles of individual chapters have also been explored. However, an important question that arises is Sima’s stance towards two previously distinct approaches to interpreting past events. Since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春秋), moral interpretation has been a prevalent approach to historical writing. However,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 a new perspective emerged, as seen in the Zuo Commentary (春秋左傳) and Intrigues of the Warring States (戰國策), which emphasized factual events over moral judgments of historical figures. In analyzing the Biographies of the Shiji, this paper argues that while Sima did not entirely abandon a moral perspective, his emphasis was on exhibiting historical reality. Specifically, when examining biographies from the Warring States Period to the war between Chu(楚) and Han(漢), it becomes clear that Sima viewed this period as dominated by ‘interests and strategy’. On the other hand, when discussing figures from the early Han period, Sima focused on providing a balanced analysis of individual figures’ positive and negative sides, highlighting their diverse characteristics. His general interest in historical reality also led him to see real effects of governance, which is why he preferred a Taoist approach to rule. By focusing on the reality of the past, Sima acknowledged the inherent complexity of history and refrained from making broad generalizations about ancient Chinese history. Sima aimed to present the diverse and complex aspects of human existence in history for future generations.

key words: Sima Qian, Biographies of the Shiji, Historiography of the Shiji, Confucian understanding of History, Taoist view of Governing

논문투고일: 2023년 10월 17일 심사개시일: 2023년 10월 28일 심사완료일: 2023년 11월 11

정치사상연구 제29집 2호, 2023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