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한국 국사학계에서의 수많은 논쟁들 가운데 하나는 고조선의 강역에 관
한 논쟁이다. 흔히 강단사학계로 불리는 주류사학계는 고조선의 강역을 북부 한
반도 안에서의 일정한 지역 그리고 만주 안에서의 일정한 지역을 합친 곳으로 한
정한다. 쉽게 말해, “소(小)고조선”설을 제시한다.
대조적으로, 흔히 재야사학계로 비주류사학계는 고조선의 강역이 북부 한반도와
만주는 물론이고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화북 그리고 베이징 일대에 걸쳤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대(大)고조선”설을 제시한다. 그러면 후자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그리고 조선의 『신단민사(神壇民
史)』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을 근거
로 제시한다. 이 글은 이 저서들의 저자와 내용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그것들이 사
료로서의 가치가 있는가를 검증하고자 한다.
주제어: “소고조선”설, “대고조선”설, 『산해경』, 『만주원류고』, 『신단민사』, 『단
기고사』, 『규원사화』, 『환단고기』
I. 문제의 제기
한국의 논쟁사에 자주 등장하는 논쟁들 가운데 하나가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느 학자들에 따
르면, 고조선은 단군조선 하나만을 말한다(이기백 1988, 2). 그러나 어느 다른 학
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단군조선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의 뒤에 나타난 위만조선까
지를 말한다(노태돈 1990, 35-54). 지난날 일정한 시기에 걸쳐 교과서에 나타났던
기자조선은 존재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기에(Shim Jae-hoon 2002,
271-306),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고조선의 강역에 관해,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 또는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주류사학자들은 문헌사료와 고고사료에 근거해 그것을 오
늘날의 북부 한반도의 일부 그리고 만주 일부에 한정한다. 그리고 그 국가적 성격
에 대해서도 “군장사회” 또는 “초기 국가” 정도로 이해한다. 대조적으로, 대학에
서 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국사학을 전공했다고 해도 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채 대학 또는 대학급 연구소 밖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재야사학자들 가운데서도
국수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한 이들은 고조선이 동북아시아를 지배한 “제국”이었
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전자를 “일제식민
사학에 젖은 사람들”로 매도한다. 일제가 조선=한국의 역사적 공간을 매우 좁게
한정지었었는데, 거기에 따라갔다는 것이다(안동준·임승국 1978, 24-51).
그러면 그러한 재야사학자들의 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산해경(山海經)』 또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 중국의 “사서”들 그리고 『신단민사』, 『단기고사』, 『규
원사화』, 『환단고기』 등 조선=한국의 ‘사서’들을 지적한다. 이 책들에 대해, 주류사
학계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단기고사』, 『규원사화』, 『환단
고기』 등은 위서(僞書)라고 단정한다.
이 책들은 어떤 책들이며, 이 책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이 글은 이러한 물
음들로부터 출발한다.
II. 중국의 “사서”들
1. 『산해경』
『산해경』은 선진(先秦) 시대에 출현한 책으로 중국의 고대 전적들 가운데 가장
기이한 책이다. 전설 속의 황제 우(禹)와 그의 재상 백익(伯益)이 함께 저술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학계에서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문연구자들은 이 책
이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
부터 전한(前漢) 초기까지 초(楚) 나라와 파촉(巴蜀)지역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다
고조선의 영토에 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국 및 조선의 “사서”들 391
가 전한 말 유수(劉秀)에 의해 정리됐고, 후한(後漢) 말에 등장한 삼국시대를 종결
지은 진(晉) 나라의 곽박(郭璞)이 주를 달면서 하나의 책으로 확정됐다고 본다. 그
이후에도 주석은 계속됐으며, 『산해경 전소(箋疏)』, 『산해경 교주(校注)』, 『산해경
신탐(新探)』 등이 출판됐다(정재서 1993, 19-25).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으로 구성된 이 책은 워낙 괴기스러운 얘기들을 많
이 담고 있어서 “사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이 책을 국역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임동석조차 “백불일진(百不一眞), 즉 백 가지 가운데 하
나도 진짜가 없는 내용으로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는 흥미롭고
이상하며, 이해할 수 없는 형상을 천연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그야말로 불가사의
한 몽상으로 가득 차 있는 기록이다”라고 논평했다(임동석 역 2011, 11).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신화학을 비롯해 민속학과 민족학 및
종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면 『산해경』에서 조선의 강역과 관계되는 부분은 어떤 것일까? 그 분량이
매우 많은 이 책에서 조선이라는 단어는 두 차례 나온다. “조선이 열양(列陽)의 동
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는 구절과 “동
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天毒)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앞의 구절에 대해 곽박은
조선을 “지금의 낙랑현”이라고 주해했고, 뒤의 구절에 대해 곽박은 조선을 “낙랑
군”이라고 주해하고 “천독”을 “부처가 태어난 나라인 천축국”이라고 주해했다.(정
재서 1993, 277: 327).
『산해경』은 또 고조선 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한 소수 민족들 가운데 하나
인 숙신(肅愼)에 대해 짧게 두 차례 언급했다. 그 언급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숙신국(肅愼國)이 백민국(白民國) 북쪽에 있다. 그곳에 나무가 있어 이름을 웅
상(雄常)이라 하며 성인(聖人)이 대를 이어 나타나면 그 나무가 자라 백성들이 나
무로부터 옷감을 얻는다.”(임동석 역 2011, 905).
“대황(大荒) 가운데에 산이 있어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 한다. 숙신씨(肅
愼氏) 나라가 있다. 날아다니는 비질(蜚蛭)이 있으며 날개가 넷이다. 벌레가 있어
짐승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있다. 이름을 금충(琴蟲)이라 한다.”(임동석 역 2011,
1342).
조선에 관한 앞의 두 구절과 숙신에 관한 이 두 구절에 주목해 고조선을 연구한
초기의 연구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이가 안호상이다. 고조선에 관련된 여타(餘他)
의 자료들을 부차적으로 참고하면서, 그는 불함산이 백두산이고 ‘웅’은 환웅이며
‘나무’는 환웅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올 때 이용했다는 신단수(神檀樹)라고 풀
이하고 나서, 환웅의 아들 단군은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
한다. 그는 이어 숙신을 조선의 옛 이름이라고 풀이하면서, “숙신은 곧 조선이다”
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는 경우, 고조선의 활동무대는 숙신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와 화북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백두산을 중
심으로 성립된 고조선이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
적으로, 그는 고조선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오늘날의 연해주 그리고 베이징
을 포함한 오늘날의 중국 북부는 물론 중원까지도 지배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비판하는 연구자들을 “식민사학에 젖은 사람들”이라고 매도한다(안호상
1971, 32-50).
안호상의 이 해석을 이어 받으면서 다른 자료들도 활용해 고조선의 강역을 아
주 넓게 잡은 공동연구자들은 안동준과 임승국이다(안동준·임승국 1978, 24-51).
자신들 스스로가 시인했듯, 그들은 사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고조선에 관
련된 중국과 조선의 여러 책들을 읽고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해명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연구자가 김길만이다(김길만 2013, 32-56). 스스로
시인했듯, 그는 사학자가 아니다. 다만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고금문(古金文)을 꾸
준히 공부한 애향운동가”이다. 그 역시 『산해경』을 비롯한 여러 “사서”들을 비교
한 뒤, 조선이 “인류 최초의 나라”였다고 주장했다.
2. 『만주원류고』
재야사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중국의 “사서”들 가운데 하나가 『만주원류고』다.
『만주원류고』의 공식 명칭은 『흠정 만주원류고(欽定 滿洲源流考)』다. ‘흠정’이라는
단어가 말하듯,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6대 황제 건륭(乾隆: 1711-1799)은 건륭 42
년에 해당되는 1777년에 청의 발원지로 오늘날의 길림성 일대에 해당되는 건주
(建州)의 연혁, 만주의 시기(始基), 그리고 그 일대 지명의 연원과 변화과정을 상
세하게 조사해 책으로 만들라는 “유지(諭旨)”를 내각에 내렸다. 이에 따라 대학
고조선의 영토에 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국 및 조선의 “사서”들 393
사(大學師) 아계(阿桂)와 대학사 우민중(于敏中) 등이 중심이 되어 1778년에 완성
한 책이 바로 『만주원류고』다.
이 책은 제작의도가, 다른 여러 민족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특히 한족(漢族)에
대한 만주족 및 청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논증’하는 데 있었기에 원자료를 왜곡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왜곡의 정도는 심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료를 변조
하기도 하고 편언척구(片言隻句) 만을 인용하기도 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사료는
아예 없애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 책은 만주를 청의 발상지로 확정짓
고 만주에서 살았던 여러 다른 민족들을 자신에게 부용된 존재로 묘사할 수 있었
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마냥 경시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만주와
밀접히 연관된 조선족 및 그 주변민족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조선이나 삼한이 원래 만주에 있었고, 현재 만주의 길림(吉林)이 신라의
계림(鷄林)이었으며, 백제가 전성기에는 중국 동부연안과 요서 및 요동까지 진출
했다고 주장한 대목은 국사연구자들로 하여금 일단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
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내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국역본이 출판됐다(장진
근 역 2008; 남주성 역 2010).
그러면 이 책을 활용해 고조선의 강역을 넓게 설정했던 저술들에는 어떠한 것
들이 있었던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 저술들을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기와 강점기 그리고 그 이후의 두 시기로 나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대
적 배경에 따라 저술의 의도를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기와 강점기의 저술들로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
論)』 및 「조선상고문화사」를 비롯한 그의 일련의 저술들을 지적할 수 있다. 신채호
는 『만주원류고』 등을 활용하면서 숙신을 조선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고 고조선
의 강역을 넓게 설정한 것이다. 그의 저술 의도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일제식
민사학자들은 한민족 역사의 출발 시점을 늦춰 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 무대를 한
반도 안으로 한정했던 것인데,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민족주의사학자였던 신채
호는 이민족의 침략과 강점에 시달리는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조국의 역사가
그들이 주장하는 시점보다 훨씬 이전의 시점에서 출발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강
역보다 훨씬 넓었다는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동포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일련의 저술들은(신채호 1908: 1915)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
이 바람직하다.
신채호의 정신과 해석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민족주의사학자가 정인보이다. 그
는 “[『만주원류고』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 등장하는 ‘식신(息愼)’ 또는 ‘숙신’
또는 ‘주신(珠申)’ 등은 모두 조선을 의미한다”고 보면서, 고조선의 영역을 숙신의
영역까지 포함시켜 매우 넓게 설정했던 것이다(정인보 1946).
신채호 및 정인보와는 별도로, 마르크시스트 경제사회사학자였던 백남운은 숙
신과 조선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조선민족의 인종적 계통의 기축이 되는 것은
숙신족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백남운 1933; 심우성 역 2004, 107).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의도와는 달리, 일제식민사학자들은 『만주원류고』를 조선
의 역사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이용했다. 조선의 역사가 저급한 수준의 만주의 역
사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조선의 역사는 후진적이었다는 “만선사관(滿鮮史
觀)”을 정립하는 데 활용했던 것이다(이나바 이와키치 1922).
일제가 패망한 이후 남한과 북한의 국사학계는 『만주원류고』에 대해 훨씬 더 객
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남한의 경우, 이 책을 원자료로 활용
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제시됐다(홍이섭 1966, 203-213). 북한의 경우, 더 격렬한
표현으로 이 책을 매도했다. “대만족주의(大滿族主義)”의 시각에서 서술된 이 책
은 조선의 역사를 “란폭하게 왜곡했다”라는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비판했다(리지
린 1963, 33-34).
이러한 해석에 대조적으로, 앞에서 인용했던 안호상은 『만주원류고』의 여러 대
목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안호상 1971, 32-50). 숙신을 조선으로 간주하는 해
석은 계속됐다. 『라이파이』로 명성을 얻었던 만화가 김산호는 자신의 『대쥬신제국
사』에서 숙신을 “쥬신”이라고 쓰면서,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 등의 민
족이름들은 모두 쥬신족과 동일한 배달민족이다”라는 놀라운 명제를 제시했다(김
산호 1994). 국제경제학자 김운회는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쥬신”이라고 불렀는데, 이 “쥬신”이 한문으로 “肅愼” 또는 “朝鮮”으로 표기됐다
고 주장하면서, 조선=한국의 상고사에 등장하는 예, 맥, 물길=말갈, 여진, 동호(東
胡) 등이 모두 ‘쥬신’에 속하며 몽골 역시 ‘쥬신’의 한 부분이라는 해석을 제시했
다(김운회 2006). 철학도 정형진 역시 숙신을 조선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정형진
2006, 58-63). 이어 심백강은 『만주원류고』를 ‘소중한 역사기록’이라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저서의 여러 곳들에서 이 책에 바탕을 두고 조선=한국의 고대사를 해석했
고조선의 영토에 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국 및 조선의 “사서”들 395
다(심백강 2014a, 364-366).
그러면 숙신은 과연 조선과 동일한 것인가? 조선=한국 상고사 연구의 개척자
로 평가되는 김정학은 숙신과 조선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했다(김정학 1965,
317-453). 그의 제자인 김정배 역시 같은 해석을 제시했다. 김정배는 “숙신의 역사
와 조선의 내원(來源)과는 거리가 멀다”고 단언한 것이다(김정배 1973, 65-84). 권
태원과 손성태 등 역사학자들 역시 숙신과 조선을 별개의 존재로 이해했다(권태
원 1991, 541-554; 손성태 2014, 332). 특히 동북아시아의 소수민족들을 깊이 연구
한 김인희는 “퉁구스계 민족에 속하는 숙신은 한민족과 습속이나 언어에서 뚜렷
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별개의 민족으로 한민족과는 혈연적인 관계가 없다”고 단
언했다(김인희 2004, 4-10).
III. 조선의 “사서”들
재야사학자들이 위에서 살핀 중국의 “사서”들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조선=
한국의 여러 “사서”들에도 의존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 『신단민사』
이 책의 저자 김교헌(1868∼1923)은 조선왕조 말기의 문신으로 성균관 대사성
(大司成)을 역임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해 항
일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나철(1863-1916)의 뒤를 이어 대종교에서 가장 높은 지
위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했다. 당시 항일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적 사관에서
국사를 저술해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으려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역시 거기에
발맞춰 1923년에 『신단민사』를 쓴 것이다.
이 책은 “개천갑자년(開川甲子年) 상달(10월) 초사흗날(3일) 천신(天神)이 사람
으로 화하여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 인간의 366가지 일을 다스리기 시
작했다”는 서술로 시작했다. 이 책은 이어 “신인이 세상에 내려온 때로부터 124년
을 지난 시점에 백성들은 그를 추대하여 대군주로 삼고 나라이름을 단(檀)이라 하
였다”고 설명하면서 그 시점을 기원전 2333년으로 설정했다. 이 책은 이어 이 ‘단’
이 기원전 2311년에 ‘조선’으로 바뀌었는데 그 나라의 강역은 매우 넓었다고 부연
했다(김교헌 저. 고동영 역 1986, 29-31). 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한족 이외의
모든 민족을 뜻하는] 구이민족(九夷民族)이 살던 땅은 모두 조선 영토 안에 있었
다. 동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서쪽은 흥안령(興安嶺)을 끼고 사막에 뻗었고
남으로 발해(渤海)에 이르고 북으로 흑수(黑水)를 지나 소해(小海)에 닿으니 땅의
너비가 만여(萬餘) 리(里)나 되었다”고 썼다. 이 책은 “배달민족” 속에 우선 조선
과 부여가 포함됐으며 이어 예족과 맥족 및 옥저는 물론이고 숙신, 읍루, 물길, 말
갈, 여진 등이 모두 포함됐다고 썼다(김교헌 저. 고동영 역 1986, 33).
2. 『단기고사』
단군조선을 포함한 고조선에 관한 또 하나의 사서로, 『단기고사』가 제시된다.
이 책은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719년에 아우 대야발(大野勃)로 하여금 발해문자
로 집필하게 했으며 그 이후 한문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1230년이
지난 시점인 1949년에 서울의 조선복음사(朝鮮福音社)는 김해암(金海菴) 번역으
로 처음 출판했고 이어 1959년에 충청북도 충주시의 충북신보사(忠北新報社)는
정해박(鄭海珀) 번역/김재형(金在衡) 교열로 이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고조선의 역사를 전(前) 단군조선, 후(後) 단군조선, 기자조선(奇子朝鮮:
箕子朝鮮이 아니다)의 세 단계로 나누어 살폈다. 이 책에 따르면, 전 단군조선은
25대 1222년에 걸쳐 존속했으며, 후 단군조선은 23대 875년에 걸쳐 존속했고, 단
군조선에서 파생한 기자조선은 42대 1097년에 걸쳐 존속했다. 이 책은 고조선을
문명대국으로 묘사했다.
조선총독부 관리 출신의 재야사학자 문정창은 이 책을 위서라고 보지 않고 고
조선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면서 그 책에 근거해 고조선을
화려하게 묘사했다(문정창 1969, 78-82). 대조적으로, 대다수의 국사학자들은 이
번역본을 위서라고 본다. 달리 말해, 『단기고사』 그 자체를 가공이라고 보는 것이
다.
『단기고사』를 위서라고 보는 저술들로 우선 언론계 출신의 저술가 김삼웅의 논
문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단기고사』를 보면 3400년 전의 단군조선시대에 지
구·금성·수성 등의 행성이 태양의 외곽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거나
고조선의 영토에 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국 및 조선의 “사서”들 397
자발전차·경기구 등과 같은 과학적인 전기기계 제품을 발명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 여기에 그 당시 인구가 1억8천호(戶)였다는 등 인류사와 문화의 발전과정에도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사실이 기록됐다”고 지적하면서,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1959년 10월 복간당시에 날조된 것으로 추측되며, 원래의 『단기고사』와는 전혀 거
리가 먼 위서임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김삼웅 2004, 52).
이어 이문영의 논평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단기고사』에는 정말 말도 안 되
는 이야기들이 숱하게 적혀있다. 오죽하면 유사역사가들도 『단기고사』가 되면 ‘이
책은 문제가 좀 있다’라며 말을 아낄 정도이다. [… 이 책에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5세 단군구을(檀君丘乙) 때 감성관(監星官) 황포덕
(皇甫德: 황보덕으로 읽는 이들도 있다)이라는 사람이 북극성이라는 항성 그리고
수성·금성·지구성·화성·목성·토성·천명성·해명은성·명성 같은 행성에 대해 언
급한 구절이다”라고 비판한 것이다(이문영 2010, 81-85).
3. 『단군고기』 및 『단군세기』 등
역사학자 심백강은 단군에 관한 고기록들 가운데 고려 이암(李嵒)의 『단군세기
(檀君世紀)』, 『세종실록』 가운데의 「단군고기(檀君古記)」, 조선후기 북애(北崖)의
『단군기(檀君紀)』 그리고 역시 조선후기 허목(許穆)의 『단군세가(檀君世家)』 등 네
종류를 묶어 『단군고기록 4종(檀君古紀錄四種)』이라 명명하고 그 사료적 가치를
분석했다. 이 책들 가운데 『단군세기』는 1세 단군 왕검(王儉)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까지 단군조선 2000년의 역사를 기술한 책으로, 단군조선을 “제후
를 거느린 천자의 제국”이며 “중국이 조공을 바친 동아시아의 주역”으로 묘사했
다. 이 책은 우리가 앞으로 살필 『환단고기』 안에 수록되어 전한다. 『단군기』는 환
검(桓檢)으로부터 고열가까지 단군조선 47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우리가 앞
으로 살필 『규원사화』 안에 포함됐다. 『단군세가』는 단군조선뿐만 아니라 “환인(桓
因) ·신시(神市)시대”까지를 역사시대로 인정함과 아울러 숙신씨(肅愼氏)를 단군
의 후예로 인정했다.
심백강은 이 책들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강단사학계는 이 책
들을 “재야사서”로 취급해 그 사료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실정이라고
지적한 뒤, 이 책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제의했다(심백강 2001).
『단군고기』 등을 포함한 재야사서들에 주목한 심백강은 우선 “이런 기록들에 따
르면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환국(桓國) ·단국(檀國) 시대를 지나 천하를 경
영한 고조선왕국의 제왕이었고 단군조선은 변방의 소국이 아니라 9개의 제후국
을 거느린 대제국이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고조선은
단군에 의해 건국된 후 내란이나 외침 없이 2천년 역사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따
라서 카이사르의 로마보다 위대하고 유방(劉邦)의 한왕조(漢王朝)보다 위대한 나
라가 우리의 고조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슈메르가 서양역
사의 출발점이라면 고조선은 동양역사의 시원(始原)이다. 유럽의 선진국인 독일·
프랑스·영국·이탈리아의 역사는 천년을 넘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는 200여 년에
불과하다. 우리가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의 역사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것은
고조선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라고 부연했다(심백강 2014b, 211-213).
4. 『규원사화』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조 제19대 숙종 2년인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 또
는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고 자칭하는 도가학자(道家學者)에 의해 쓰였다고 주
장됐다. ‘규원’은 그가 쓰던 서재의 이름이다. 그는 어느날 고려 때 이명(李茗)이라
는 사람이 쓴 『진역유기(震域遺記)』라는 비서(秘書)를 발견하고 이것을 통독한 뒤
『규원사화』를 썼다고 주장했다. 『진역유기』는 전승되지 않았다.
『규원사화』는 “환웅대왕”이 수천년에 걸쳐 세상을 거느렸으며 그의 판도가 오늘
날의 만주 일대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이어 “숙신”을 “단군의 유족”
이라고 말하면서 “숙신”으로부터 “말갈”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 책은 마지막 부
분에서 「단군연대표」를 제시했는데, 여기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47대 고열가에 이
르기까지 1195년 동안 존속했다(신학균 역 1968).
주류사학자들은 『규원사화』의 경우 1910-1928년 사이에 저작된 위서로 추정한
다.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를 부인한 최초의 국사학자는 한영우다. 그러나 그
는 이 책이 위서라고 직설적으로 단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책을 근거로 조선=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한다거나 단군조선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하는
데 그쳤다(한영우 1975, 23-57). 국사학자 송찬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이
책을 위서라고 단정한 것이다(송찬식 1977, 74-77). 한영우와 송찬식의 뒤를 이어
고조선의 영토에 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중국 및 조선의 “사서”들 399
국사학자 조인성 역시 이 책을 위서라고 판정했다(조인성 1987, 653-662). 국사학
자 박광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이 “친일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비
판했다(박광용 1990, 205-220). 국사학자 송호정은 이 책을 위서로 볼 수밖에 없는
논거를 자세하게 제시했다(송호정 2004, 284-288). 그러나 대종교 또는 단군교 계
통의 저술인들은 『규원사화』를 진서로 간주한다(송호수 1983, 119-142). 변호사 이
상시는 이 책을 진서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위서라고 보는 주류사학자들
을 비난한다(이상시 1990, 134-219: 226-235: 250-276).
5. 『환단고기』 또는 『한단고기』
『환단고기(桓檀古記)』(어떤 재야사학자들은 桓을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
면서 『한단고기』로 표기한다)를 옹호하는 재야사학자들은, 이 책이 『삼성기(三聖
紀)』·『단군세기(檀君世紀)』·『부여기(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 등, 발생과 전
래 및 출처가 서로 다른 책들을 1911년을 기점으로 계연수(桂延壽: 1864∼1920)
가 합편한 것으로 주장한다(임승국 역주 1986, 9-11). 이 책은 우선 환인천제(桓因
天帝)가 “하느님의 나라”라는 뜻의 환국 또는 한국을 세웠고 그 나라는 7대에 걸
쳐 존속했는데 환인천제의 후손인 환웅이 신시에 도읍하여 나라이름을 배달(倍
達)로 고쳤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책은 이어 배달의 말기에 치우천왕(蚩尤天
王)이 나타나 영토를 더욱 넓혔고 그때로부터 1565년을 이어갔는데, 마침내 기원
전 2333년에 환인과 환웅의 후손인 단군왕검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면서 조
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로 계속한다. 이 책은 조선이 단군왕검으로부터 47대를 계
속해 2096년 동안 존속하면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위대한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환단고기』는 우선 한 일본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
업한 변호사인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는 일본의 고대사를 화려하게 꾸미는 저술
들로 일본학계에서도 “유사사학자”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 책이 그에게는 조선
과 일본의 조상은 같다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의 근거로 읽혔던 것이다. 그
래서 그는 이 책을 일본어로 역간하기에 이르렀다(가지마 노보루 역 1982). 이 책
은 곧 “대고조선설”을 제기해 온 몇몇 한국인들에게도 감명을 주었다. 우선 안호
상은 이 책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조선을 화
려한 제국으로 묘사했다(안호상 1985). 그에 이어 임승국은 가지마 노보루의 책을
바탕으로 이 책을 국어로 역간하고 안호상의 역사인식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안호상과 임승국은 문정창을 비롯해 자신들의 역사인식에 공감하는 여타의 연
구자들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구성하고 그 이름 아래 1978년 10월 31일에 “국
정교과서를 편찬하는 문교부가 단군을 신화로 간주하고 고조선의 역사를 초라하
게 설명한 것은 잘못이므로 이것을 고쳐야 한다”는 취지에서 문교부를 상대로 법
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주류사학계를 대표해 국사편찬위원회는
그들의 주장이 역사적 자료들에 근거하지 않은 “궤변”이라고 반론했다. 법원은 행
정소송 제기를 기각했다.
그러나 국사찾기협의회에 동참한 연구자들은 꺾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연구
자가 우선 이중재였다. 조선=한국사를 독학한 그는 “요(堯) 왕검은 단군조선 제3
기 제1세 단군이었다”는 해석을 제시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국 땅에 없
었으며 삼국은 모두 현 중국대륙을 무대로 하여 활동했다”는 주장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한문자는 한민족의 조상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해석도 제시했다
(이중재 1990).
이중재와 비슷하게 『환단고기』를 진서로 받아들이고 고조선의 역사를 화려한
제국의 역사로 묘사한 연구자가 고준환이었다. 법학자인 그는 “‘한민족의 상고시
대’는 ‘환단조선(桓壇朝鮮)’으로서 그것은 씨족국가에서 출발해 종족국가로 성장
한 단계의 고대국가였다. ‘환단조선’을 바탕으로 ‘한민족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
조선이 건국됐다. 단군은 그 국가의 최고통치자였다”라고 주장하면서, “단군조선
의 영역은 만주를 포함한 중국과 시베리아 및 연해주를 포괄했다”고 부연했다(고
준환 2002, 82-87).
『환단고기』를 진서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입각해 조선=한국의 고대사를 설명하
려는 연구자들은 그 이후에도 줄을 이었다. 우선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간주
하면서 ‘단군성조(檀君聖祖)’로 모시는 증산교가 이 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
섰다(안경전 주해 2012). 증산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박성수는 이 책이 결코
위서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증산교의 입장을 뒷받침했다(박성수 2014, 5-27). 지
승도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지승 2012).
IV. 맺음말
우리가 앞에서 살핀 저술들은 조선=한국의 고대사를 설명함에 있어서 적절한
사료들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주류사학계 또는 정통사학계의 일치된 판정이
다. 그러나 이 저술들을 진서라고 내세우며 고조선을 ‘화려한 제국’으로 묘사하는
재야사학계 일각에서는 그러한 판정을 내린 국사학자들을 ‘일제식민사학에 젖은
사람들’이라고 매도한다. 그들의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다. 우리가 앞에서 살핀 저
술들을 근거로 고조선을 ‘화려한 제국’으로 묘사한 소설과 같은 저술들에 매혹된
사람들이 없지 않으며, 정관계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비록 소수이지만 그러한 저
술들에 기울어져 “대고조선” 또는 “고조선제국”이라는 역사상(歷史像)을 제시하
는 저술가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적극적이다.
주류사학자들 또는 정통사학자들은 대체로 그러한 저술들을 비판하기를 주저
해왔다. 그러나 2010년에 이문영이 공개적으로 그리고 학술적으로 그들을 비판하
면서(이문영 2010)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2016년 이후 조선=한
국의 고대사를 정통으로 전공해온 젊은 학자들이 “젊은역사학자모임”을 결성하고
학술적으로 권위 있는 『역사비평』의 뒷받침 아래 그러한 저술인들을 ‘사이비역사
학자’들로 명명하고(젊은역사학자모임 2017), 이 “젊은역사학자모임”의 명명에 대
한 반론이 제기됨으로써, 우리가 앞에서 살핀 저술들에 대한 논쟁에는 새로운 국
면이 열렸다.
투고일: 2017년 9월 30일
심사일: 2017년 10월 12일
게재확정일: 2017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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