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우리는 역사에서 생성했던 政治體들의 국호와, 그 의미와 어원역할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특히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어원은현재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역사에서 ‘한(韓)’이라는국호는여러 번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이 계승한 대한제국은 역사에서사용되었던 ‘한국(韓國)’을 계승하였다.
이 때 ‘한(韓)’은 ‘han’ ‘kha’n ‘kan’ ‘gan’ 등으로 발음되는 ‘몽골어’ ‘튜르크어’ ‘퉁구스어’ 등의 알타이어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뜻은 하나(一), 크다(大), 길다(長) 넓다(廣) 진리(眞理) 왕(王) 추장(酋長) 알맹이(丸) 등이 있는데, 이것을한자라는 표기수단으로 표현할 경우 韓 漢 丸 汗 瀚 幹 可汗 등으로사용되었다. 특히 임금을 뜻하거나 나라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신라의임금인 ‘거서간’ ‘마립간’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관직 등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예는 알타이어계에서 많이 나타났다.
임금 또는 대추장을나타내는 용어로서 돌궐의 啓民可汗, 거란의 無上可汗, 몽골의 成吉思汗(Chingz khan) 등이 있다, 또한 이들이 세운 나라들 가운데에는마지막장에서 정리하였듯이 칸국을 칭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국가가 투르크계가 세운 위구르 칸국(回紇汗國・回鶻汗國. Uyghur Khaganate), 몽골계가 세운 금장한국(金帳汗國,Qipchaq ulisi(Jochi,Kipchak)이다. 따라서‘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의 어원과 의미는 한자로 풀이할경우에는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커다란 한국’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또한khan國(knate) 즉 커다랗고 하늘에 선택을 받은 특별한 나라라는의미를지니고 있다.
* 주제어 : 국호, 한국, 한, 크다, 하늘, 칸국, 칸
Ⅰ. 들어가는 말
한 집단에게 정체성1)은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한국은더욱중요하다.
자국인에 의해서 씌어진 역사서들이 망실되어 전승되지못했을 뿐만 아니라 ‘他’2)에 의해서 역사가 왜곡되었고, 그러한왜곡된역사서를 저본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했을 뿐 만 아니라 역사서를집필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서가 三國史記 이다. 또한우리는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자체의 文字를 조선 초기까지 갖지못했다.
1) 윤명철, 「고구려 담론1-그 미래 모델의 의미」, 고구려연구 9집, 2000 ;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1」, 고구려연구 13, 고구려연구회, 2002 ; 「단군신화와 고구려 건국신화가 지닌 정체성(identity)탐구」, 단군학연구 6, 단군학회, 2002 ; 「고구려의 정체성과 중국 동북공정의 배경」, 소설로 본 고구려의 역사와 한민족의 정체성, 소설가협회, 2004 ; 「고구려의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2」, 단군학연구 14, 고조선 단군학회, 2006.
2) 중국의 역사서 및 연구와 일본의 역사서 및 연구 등을 말한다.
문자를 대신할 다양한 기호3)들이 있었지만 漢字라는 문자만을고집했으므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역사를 왜곡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정체성이 왜곡되었고, 자의식 또한적지않게상실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 역사에서 생성했던 政治體들과국가들의 명칭이 왜곡되었고, 국호의 意味와 語源 役割을분명하게알지 못한다.4)특히 현재 우리가 역사활동에 참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적 실체의 국호인 대한민국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하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국호의 의미와 어원 역할등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찾는 작업에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 전 역사과정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임을알려둔다. 또한 근대 세계 이후 이미 세계질서에 진입하였으며, 현재처럼‘세계화(globalization)’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은 매주 중요하다. 우리 역사상에서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國家名(국호)5)은朝鮮・韓・高句麗 등이다. 朝鮮은 현재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3번, 高麗3번, 大韓 또는 韓國은 3번이다.6) 그 밖에 夫餘(扶餘), 三韓의 소국들(78국), 新羅, 百濟, 東濊, 沃沮, 豆莫婁(부여 멸망 후에 건국한 복국으로서大莫婁,大莫盧, 達末婁의 명칭이 있다.), 渤海(震, 振) 등이 있고, 기타우리와 동일한 언어계통인 鮮卑 계통, 契丹 계통, 靺鞨 계통의국가 및 종족들도 있다.
3) 이두를 비롯하여, 말을 사용한 설화 신화 등, 기타 다양한 형태의 예술등은역사를 표현하는 기호이다.
4) 정구복, 「우리나라 국호고-한반도 통일 이후 국호 제정을 위한 기초연구」, 장서각 29, 한국학 중앙연구원, 2013, 311~313 에서 국명과 국호의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5) 사료에는 국호와 국명이 혼용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국호라는 사용했다.
6)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국가들의 국호에 대해서는 정구복, 앞의 논문, 참조.
본고는 다양한 국호들 가운데 현재 대한민국과 직결된‘한국(韓國)’을 선택하여 그 어원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핵심기호인‘한(韓)’은 물론이고, 그 ‘韓’과 ‘韓國’의 관계 및 의미에 대해서논의와연구를 한다. 본고는 일차적으로 국호의 의미와 기능을 살펴본 다음에우리역사상에서 사용된 ‘한국’이라는 용어의 몇 가지 사례와 측면을살펴볼것이다. 이어 ‘한’의 의미와 역할을 언어학적, 사상적, 문화적관점에서 살펴보면서 한국의 正體性이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또한‘한(韓)’ 에 주력하되 조선・고구려・백제・신라・가야・고려・조선・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를 본문의 문맥과 연관하여 부분적으로 언급한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는 일찍부터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이루어왔으므로7) 역사 및 문화의 핵심기호이며 상징인 국호들은 맥락적으로한틀에서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列國時代8)나 三國時代 등 국가 간에는 정통성 및계승성경쟁이 활발했던 시대에는 국호들 간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연결성이 있었고, 일종의 역할분담이라는 인식도 있었을 가능성이크다.9) 마지막으로 전개한 논리들을 토대로 ‘한(韓)’과 ‘한국(韓國)’이라는국호의 발음과 의미가 한국문화의 영역을 넘어 공간적으로는 유라시아전반, 문화적으로는 알타이권의 임금 등을 지칭하는 언어 및 ‘칸국(kanate)’이라는 국가명 등과 연관되었음을 밝히고, 그 의미도모색해볼 것이다.
7) 윤명철, 「한국사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제언-고대사를 중심으로」, 한국사학사학보 9호, 2004.3.
8) 열국시대라는 용어는 조건이 멸망한 이후에 생성된 小國들을 말한다. 단재신채호를 필두로 문정창 등 선학들이 주장하였고, 남한에서는 윤내현이'거수국 체제'를 설정하면서 발전시켰고, 북한학계 또한 이러한 역사해석을해왔다. 필자의 역사유기체론을 토대로 설정한 용어로 표현하면 ‘原조선계승성’의 실현을 위해 생성된 동일한 계열의 소국가군과 국가들을 의미한다.
9) 윤명철, 「고조선 문화권 설정을 위한 역사관의 모색-몇 가지 이론의적용」, 고조선단군학 29호, 고조선단군학회, 2013
Ⅱ. 국호의 의미와 기능
국호에는 두 가지 사용법이 있다. 하나는 국호를 國名만으로나타내는 경우이고, 하나는 국명과 國體 또는 政體를 함께 나타낸경우이다.
전통시대에는 모든 나라가 국명이 곧 국호였는데, 즉수사가없었다. 또한 반면에 근대 국가 성립 후에는 국체를 함께 나타냈다.10) 예를 들면 ‘공화국’,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이다. 모든 존재물들에게‘이름(名, 號, name)’이란 존재의 의미 및 가치와 직결된다.
즉 정체성의 핵심으로서 기호이고 지표이다. 인간자체가記號이고, 인간의 생각이 미치는 모든 것에 기호의 網이 펼쳐진다.11) 기호의 일종인 象徵(symbol)12)은 내용상으로는 역사적 사건내지경험을 반영하며, 형식상으로는 물체나 현상 등으로 나타난다. 더나아가서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또는 사건을 당해서 경험이라는결과를낳게 하는 動因으로서, 記號나 論理의 형태를 띄운다.13) 그것은族名을 비롯한 집단의 명칭, 인간탄생신화, 건국신화, 국호 등에현시적묵시적으로 작동한다.
10) 「우리 국호의 변천」, 우사 조동걸 전집 1권, 6장 (2), 한국의 지식콘텐츠인용.
11)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5, 11쪽 ; 퍼스(1931~1958)에따르면 기호에는 도상(icon)・지표(index)・상징(symbol)의 세 가지 유형이있다.
12) 칼 G. 융 외 지음, 이윤기 옮김, 인간과 상징, 열린책들, 2004 ; MirceaEliade, Image and Symbols, Harvill press, London, 1961,
13) 엠마누엘 아나티 지음 ; 이승재 옮김, 예술의 기원, 바다출판사, 2008, 24쪽; 과거의 이미지, 기호, 표의문자 등은 우리 선조들의 사고방식, 사물을바라보는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의사소통을 했던 방식에 대해많은것을 보여 준다.
국가(國家)14)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고하고, 결속력이 강하며 집단 구성원의 의지와 집단의 목표가 강력하게 반영된 사회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국호를 제정하는 데에는 국가의 존재이유와 국가를 창조하고 선택한 집단의 세계관, 역사관, 발전목표 등을고려했다.
또한 자연환경을 비롯하여 신앙 종교 민속 등, 그리고歷史像이반영되었다. 물론 우리 역상의 국가들을 보아도 유사하다. 따라서 국호는 내부적으로는 집단의 결속과 공동체 의식의 확인, 다른집단과의 차별성을 인식시키며, 외부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명확하고강렬하게 드러내는 기호와 지표이다.
특히 우리처럼 오랫동안역사공동체를 이루어온 집단에게는 국가의 정통성 및 계승성의문제와도연결되어있다. 後發國家들은 先發國家 또는 母國家의 국명을차용하거나 변용시키는 모습이 드러난다. ‘朝鮮 계승성’・‘高麗 계승성’・‘韓계승성’ 등이 그것이다.15) 그런데 국호를 표시하는 ‘記號(code)’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전승력이 강한 것은 ‘文字’이다.16)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漢字’는거의 유일한 문자기호로서, 문화 일반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역사의 운동과 발전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4) 국가의 정의는 다양하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고대사를 이해할때는일본에 의해 번안돼서 만들어진 서양근대사의 국가(nation)라는 용어의적용방식에 대해 정확한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논리의전개상 큰 무리가 없으므로 구분이 없이 통상적인 국가개념으로 이해하면서논리를 전개한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와 유사한 것이 ‘國家社會 共同體說’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이다. 즉 국가는 자연스럽게 생기는일종의유익단체이며, 국가의 내재적 속뜻은 대중의 선량한 염원이라는 논리이다.
15) 윤명철,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1」, 고구려연구 13, 고구려연구회, 2002 ;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2, 단군학연구 14호, 고조선 단군학회, 2006.
16) 기호는 역사와 문화를 이루는 요소로서 종류와 활용방식이 중요하다. 기호를 장악하면 기록을 장악하고, 기록을 장악하면 해석과 평가의 권리를 가질수 있다. ‘漢字’라는 기호는 소통에는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한 측면이많지만기록에는 매우 유리한 기호이다. 특히 습득과 사용방식의 난이도로인하여권력과 계급의 메카니즘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동아시아 세계에서국가와 조직화된 문화가 형성되는 초기 단계에서는 유일한기호로서절대적인 위상을 가졌다. 기타 암각화, 회화문자, 신라의 이두, 일본의 가나, 돌궐의 문자를 비롯하여 그 후에도 글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자라는 논리적이고 조직적인 기호를 장악하여 ‘표현과기록의독점체제’를 구축한 것은 소위 ‘漢族’이 주도하는 ‘中國’17) 이라는 문화 및 정치체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 내부 뿐 만 아니라 국제관계의실제를자기들의 역사관에 맞춰 기술하였다. ‘春秋筆法’・‘爲國諱恥’・‘詳內略外’ 등으로 만들어진 소위 ‘中華史觀’이다. 이는 中華思想 또는華夷恩想으로 불리기도 한다.18) 반면에 주위의 대부분 역사적 실체들의國號・種族名・地名 등은 집단 스스로가 漢子라는 기호로 표현했거나, 중국에 의해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17) 1911년 신해혁명으로 孫文이 ‘中華民國’ 을 수립하기 전까지는, 적어도‘中華’ 혹은 ‘中國’ 이라는 호칭을 공식국명으로 사용하는 정체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외순의 논문. 그 밖에 공봉진은 앞 논문, 3~4쪽에서근대화 무렵의 중국 국호 차용과 관련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였다. 그는“새로운 국호에 대해서는 황준헌은 ‘華夏’, 양계초와 왕강년은 ‘中國’, 유사배는‘大夏’를 주장하였다. 또 양계초는 1902년에 ‘大中華民主國’, 장태염은‘中華民國’을 주장하였다.”라고 하였다.
18) 중화주의 (中華主義, Sinocentrism)에 대해서는 강정인・안외순, 「서구중심주의와 중화주의의 비교 연구: 그 전개과정 및 특성을 중심으로」, 國際政治論叢40집 (3호), 한국국제정치학회, 2000, 103~105쪽.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들이발생했다.
첫째, 중국의 이익과 세계관, 국가전략의 입장에서악의적인왜곡이 자행되었고, 오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본래의 의미와 는 무관하게 악의적으로 윤색된 匈奴19)・鮮卑・蠕蠕・突厥・蒙古등이다.
둘째, 명칭을 기록하는데 불확실하거나 잘못된 정보로인하여부족 종족명 국명 등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동일한사서에서도 각각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된 경우도 적지 않다. 이것은기록자인 중국 뿐 만 아니라 기록의 대상이었던 실체들에게도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정확한 명칭을 모르거나 또는 혼동하는경우가 자주 있었다. 예 맥 동이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유목민족이나 삼림민족들의 호칭에 대해서는 혼란이 심각할 수 밖 에 없었는데, 그들은 국가의 생성과정이 복잡하고, 형태도 다르기 때문이며, 정식으로외교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20) 우리 역사에서는 한자라는 기호를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주변의 다른 종족들과 달리 ‘穢’등 일부의 예외를 놓고는 악의적인 왜곡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한자라는 기호가 창조되고 발전되는초기과정에서 종족적, 문화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21) 또한 한자라는 기호의 가치와 유용성을 일찍부터 인식하였고,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호를 초기에 제정하거나, 또는중간에변경할 때 가능한 한 ‘原音’과 ‘원뜻’을 유지하려는 노력을기울였다. 예를 들면 ‘高句麗’에서 ‘高麗’로 개정, ‘斯盧國’ 등에서 ‘新羅’로개정, ‘加羅(駕落)’제국들이 ‘伽耶(加耶)’로 정착할 때 등이다.
19) 슌누 (Shunnu)라고 불렀는데, ‘하늘’ 또는 ‘해’를 뜻하는 알타이어이다.
20) 선비와 거란 말갈 계통의 여러 집단들과 나라들, 기타 크게 고아시아족으로 분류되는 소규모 집단들은 국명과 종족명 부족명 여부에 대해서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21) 이 부분은 많은 연구자들이 東夷의 한자 창조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일부는 동이와 韓民族의 연관성을 매우 깊은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리지린, 「고조선 국가 형성에 관한 한 측면의 고찰-한자 사용의 시기에 대하여」, 북한의 고대사 인식 1 (김정배 엮음),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1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국호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려주는 증거들은많다. 본고와 연관해서는 14세기 말‘ 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하는데강력한 역할을 담당한 鄭道傳의 발언이 있다. 즉 鄭道傳은朝鮮經國典의 국호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즉 新羅, 百濟, 高句麗는각각一 모서리만을 장악했던 지역분립성이 강한 국가였고 중국천자의명을 받지 않은 사대명분에 어긋나는 자립 국가라고 평가절하했다. 따라서 중국 천자의 명을 받았고 단군과 기자, 위만이 사용하여 그역사적 유래가 오래된 조선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개진했다.22) 또한 선발국가 또는 前 체제에 대한 계승성이 강했다. 高句麗는‘句麗’ 및 ‘槀離’에서 나온 것이지만 장수왕 시대에 이르면 ‘高麗’라는이름을 선택하였고, 훗날 멸망했을 때에도 ‘小高句麗’ 또는渤海처럼초기에는 자국을 ‘高麗’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말에弓裔는 ‘後高句麗’와 ‘高麗’라는 이름을 시용했고, 이어 王建은후삼국을 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高麗’라는 국명을 계속 사용하였다. 夫餘(扶餘) 고구려로 계승된 ‘忽本夫(扶)餘’를 비롯하여‘東夫(扶) 餘’ ‘北夫(扶)餘’ 이어 ‘東夫(扶)餘’ ‘曷思夫(扶)餘’ 등으로 부여라는이름을 사용했고, 백제는 부여를 계승했기 때문에 聖王이 泗泌城으로천도한 후에는 국호로서 ‘南夫(扶)餘’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밖에후삼국 시대 때 甄萱은 全州에 도읍을 정하면서 ‘後百濟’라고정하였다.
22)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60, 새얼문화재단, 2008, 5
Ⅲ. 역사에서 사용된 ‘한국(韓國)’
‘한국’은 대한민국 이전에 국호로서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 우선 우리 역사상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경국대전23) 및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에는 우리나라의 국호가시대및지역별로 정리되었으며 위치와 강역에 관한 자료가 수록되어있다.
한민족의 역사와 국호 제정에는 ‘朝鮮 정통성’과 ‘韓 계통성’이강력하게 작동하였다. 우선 帝王韻紀 下는 ‘故屍羅 高禮 南北沃沮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 라고 하여 신라 고구려 등의국가들은단군의 자손임을 칭했다고 기술하였다. 이어 「漢四郡及列國紀」에도‘… 三韓各有幾州縣 … 數餘七十何足徵 於中何者是大國 先以扶餘沸流稱 次有屍羅與高禮南北沃沮穢貊 … 世系亦自檀君承. 라고하였다.
또 後漢書 권85, 동이열전 예전에 “濊及沃沮 句驪本皆朝鮮之地也.”라는 기록이 있다. 만약 사료를 그대로 신뢰한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하나의‘종족공동체’ 내지 ‘문화공동체’라는 의식을 강렬하게 가졌던것으로보인다. 이러한 기록과 인식은 중국의 舊唐書등 사서에서도나타난다. 그 밖에 선비계와 거란계, 말갈계도 역사적인 경험은물론자연환경에 차이가 있다 해도 조선의 후예인 통일체임이 분명하다.24) 특히 고구려의 조선 계승성은 여러 곳에 나타났다.25) 물론 조선계승성은 기자조선의 실재 여부26)와 위만조선의 조선 정통성 여부에 대한 여러 견해들은 과거부터 있었다.
23) 6典 앞에는 治國의 대요로서 正寶位・國號・定國本・世系・敎書를 기술하여천지 자연의 이치에 따라 仁으로써 왕위를 지켜나가야 할 것, 국호를‘조선’으로 정한 것이 기자 조선의 계승이라는 점, 왕위 세습은 長者나 賢者로서해야 한다는 것, 교서는 문신의 힘을 빌어 높은 수준으로 제작되어야한다는점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24) 윤명철, 「東아시아의 海洋空間에 관한 再認識과 活用-동아지중해모델을중심으로」, 동아시아 고대학 14, 동아시아 고대학회. 경인문화사, 2006. 기타 필자의 논문 참조.
25) 윤명철,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1」, 고구려연구 13호, 고구려연구회, 2002 ;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2」, 단군학연구14호, 단군학회, 2006.
26) 기자조선의 존재와 위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갑자기 두드러지는데, 이유와배경은 정도전의 ‘국호고’에서 드러난다. 童蒙先習 總論에도 유사한귀절이 있다. 즉 “국호를 조선이라고 고쳐 내림. 당시 이성계는 자신의고향이었던 동북지역의 명칭인 和寧과 함께 朝鮮이라는 국호를 명나라에올렸는데명나라에서 조선이 좋다는 의견을 보내왔다고 전해진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본고와 연관하여 소위 ‘三韓 正統論’이 있다. 삼국사기에보면 김유신 등은 ‘一統三韓’, ‘三韓一家’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문장에 사용된 ‘韓’이라는 용어의 실체에 대하여 여러 설이있지만, 崔致遠은 마한-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의 관계로 파악했고, 權近은 마한-백제, 변한-고구려, 진한-신라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와 韓百謙에 의하여 삼한과 삼국의 관계가부정되었다. 삼한은 한강의 남쪽에, 북쪽에는 조선, 예맥 등의 국가가동시에 있었으며 마한-백제, 변한-가야, 진한-신라라는 비정과강역이확정된 후 이는 조선 후기에 새로운 역사학으로 등장하여 크게풍미한역사지리학의 정설로 정착되었다.27)삼한(마한)정통설은 조선조 숙종 당시에 洪汝河가東國通鑑提綱에서 주창하여 조선 후기실학사서나 한말 사서에 계승되어 당대 지식인의 역사인식을 지배하였다. 三韓의 존재와 역할 등에 대해서는 三國志・後漢書・晉書 등에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대표적인三國志魏志韓傳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소위 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準王이 “將其左右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라는 내용이다.
즉 한이라는 땅에 가서 왕이 되고, 韓王을 칭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또 이 기록의 원전격이 되는魏略에는“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란 내용도 있다. 이는 역으로추산해서 기자조선의 임금은 성이 ‘韓氏’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견해들을 조선의 학자들은 갖고 있었다.28)그런데 삼국지의 撰者는 이부분의 기사만 ‘馬韓・辰韓・弁韓’의 三韓으로 소개하므로써 이것이 종합적으로는 하나의 ‘韓‘인 동시에 ’三韓‘이라는 병렬적인 구성 관계임을 표기로서 강조하고 있다.29)
27) 정구복, 「한백겸의 史學과 그 영향」, 진단학보 63, 진단학회, 1987.
28) 許穆의 東事 1 檀君世家에 “漢나라 高後 때에 衛滿이 조선을 점거하자朝鮮侯인 箕準이 남쪽으로 달아나 金馬에 이르러서 馬韓을 세웠다.”라고기재한다.
29) 신현웅, 「三韓起源과 ‘三韓’의 成立」, 한국사연구, 122, 2003, p.26 ; 「三韓硏究의 現況과 管見」, 新羅文化 21집, 2003.에는 삼한 연구의 여러 문제들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후한서에 “韓이 세 종류가 있는데, 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국이 있다.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倭와 접하였다.”라고 하였다.
한편 414년에 건립한 ‘광개토태왕릉비’에도 ‘韓’이라는용어가11번 등장하였다.30)
‘三韓’은 ‘삼한일통’과 더불어 삼국유사에25회정도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도 약 7회 정도 등장한다. ‘삼한’의용례는 고려사절요에서 188회, 고려사에는 약 234회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한국 전역’을 뜻하는 ‘삼한’이 도합 602회, 승정원일기에는 191회 쓰였다. 그밖에 동쪽에 있는 韓이라는 의미를지닌東韓도 많이 나타난다.31) 그런데 馬韓・辰韓・弁辰 등 三韓의 기원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하는 문제가 있다. 근대 이후에 삼한의 성격과 위치 등은 일반적으로 2가지 관점으로 나뉘어 졌다.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보면‘북삼한 남삼한’32) 문제이다. 삼한의 기원을 재지 원주민 사회의 성장과 발전이란 관점으로 파악해 보는 경향이 있으며.33) 삼한의 기원이 모두 북방 유이민 세력의 남하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려는견해도있다.34) 신채호는 「前後三韓考」와 조선상고사에서 馬韓은 평양을 중심으로 위치하였고, 辰韓은 하얼빈 일대에 있었으며 弁韓은蓋平의동북부 지방인 ‘아리티’에 있었다고 주장했다.35) 安在鴻은“韓이반도의 남북에만 있던 부족이 아니요, 오늘날의 요서지방에까지연접해 있었다”고 주장했다.36) 즉 만주 일대 및 화북 일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30)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34쪽.
31) 황태연, 위의 책, 35쪽.
32)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한국사연구회, 1982.
33) 이병도, 「三韓問題의 新考察(2)」, 진단학보 3, 1935 ; 「韓名稱의 起源과辰韓의 性格」, 韓國古代史究, 博英社, 1976.
34) 신채호, 「三韓分立時代」, 朝解士古史, 1931 ; 申采浩 全集 (上), 螢雪出版社, 1972 ; 「前後三韓考」, 朝鮮史硏究草, 申采浩 全集 (중), 螢雪出版社, 1972 ; 千寬宇,「三韓攷 第 l 部: 三韓의 成立 過程」, 史學연구 26, 1975.
35) 신채호, 조선상고사, 삼성문화재단, 1977, 90~91쪽.
36)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상), 민우사, 1947, 236쪽.
반면에 현재 국사학계의 통설은 ‘韓’은 반도 안쪽에 있었으며, 특히 한강 이남을 의미한다.37)소위 고조선(필자는 ‘原조선’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사용한다.)의 후기 또는 말기 단계에 병존했던 한강 이남의 소국 연합(연맹)을 말한다. 분명한 것은 서기 전부터 三韓이라는 정치적 실체가 존재했고, 또한 소위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대에 나타나는 삼한에 관해서는 당시 신라 고구려 백제가 벌인 상황과 연관되었으며, 현재 한 민족의 구성원인 고구려 백제 신라를 표시하는 범칭이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북한은 1970년대 이후로는 ‘조선사람’ 기원문제에 집착을하여38) ‘조선족’이라고 명명하였고,39) 濊・貊・韓의 종족집단으로구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韓’ ‘濊’ ‘貊’을 한민족의 주요구성원으로 보는 시각은 선학들을 거쳐40) 愼鏞廈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고있다.41) 三韓이 아닌 韓은 이미 詩經 韓奕編에 ‘韓城’과‘韓侯’가 등장하면서 시작한다.42) 韓은 전국시대 7국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였다.
37) 신복룡, 「한국정치사에 있어서의 식민지사관의 오염, 특히 국호 ‘한’의의미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13), 1979.1, 197~198쪽.
38) 백기하・장우진, 「조선사람 머리뼈의 인류학적 특징」, 고고민속논문집 (5), 사회과학출판사, 1973.
39) 조선고고연구, 1999년 1호(110호) 에 본격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40) 金庠基, 「韓濊貊 移動攷」, 동방사 논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41) 愼鏞廈,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韓國學報 102, 2001 ; 「고조선국가의형성-3부족 결합에 의한 고조선 개국과 아사달」, 사회와 역사, 제80집, 한국사회사학회, 2008.
42) 정형진, 「시경 한혁편의 한후와 한씨조선에 관한 새로운 견해」, 고조선단군학 13, 고조선 단군학회, 2005 제4장에 상세하게 논하고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와 해석을 할 때 ‘三韓一統’ ‘三韓一家’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고려 또한 후삼국을 통일한 위업을완수한이후에는 통일공신들에게 ‘三韓功臣’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주변국에서도 ‘韓’이라고 부른 예가의외로많이 있었다.43) 8세기 이래로 일본 사서에서는 한국을 가리키는나라이름으로 신라, 고려, 백제, 가라, 가야, 고려, 조선 등을 사용하면서, ‘韓’은 대륙의 총칭격인 지명으로 주로 사용했으며, 국가를이름으로부르는 것보다 ‘韓(가라)’으로 호칭하는 것을 선호했다.44) 일본인들은187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 정계에 강하게 대두된 ‘조선정벌론’을당시에는 ‘征韓論’이라고 불렀다. 1880~90년대에 만들어진일본의공문서나 일본신문에서도 ‘조선조정’을 종종 ‘韓廷’, ‘조선軍兵’을‘韓兵’으로 부르기도 했다.45) 그런데 대한민국은 三韓의 ‘韓’과 연관되어 있다.
43) 여기에 대한 예는 황태현, 「‘대한민국’ 국호의 기원과 의미」, 정치사상연구21(1), 한국정치사상사학회, 2015, 38쪽 참조.
44) 강창일, 「통일조국의 이름짓기, 일본에서는 한 조선-고려가 어떻게사용되었나」, 역사비평 계간 21호, 1993년, 63~64쪽.
45) 황태연, 앞의 논문, 38~39쪽 ; 황태연, 앞의 책, 37~39쪽 ; 황태연, 대한민국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33쪽.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1948년 5월 31일에 개회하여, 7월 1일 국호를 대한민국이라할 것을 가결하였다. 그와 연관된 부분은 아래의 내용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는 우리나라의 國號・政體・主權에 관한 조항이며①항의내용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헌법본문과 같은 법규범에 해당하는 헌법 前文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이라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다.46)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것은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중국 상해에서 있은 첫 의정원(오늘날의국회)의 결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채택여부를 놓고 적지 않은 논란들이 생겼고, 갈등도 있었다.47) 그러나결정된 이후에는 일부의 예외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립운동은‘大韓’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戊午獨立宣言書’도정식명칭은 ‘大韓獨立 宣言書’였다. 또한 수많은 독립군 단체들도이러한 예를 따랐다. 그런데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한 사실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민국’이 1912년에 선포된 ‘中華民國’의‘민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48) 또 일각에서는‘民國’ 을 미국식 민주국가와 같은 ‘民主國’의 준말로 보기도 한다.49)” 황태연은 이것을 지적하면서 색다른 주장을 펼친다.
46) 이충우, 「국호 ‘대한민국’」, 인문학연구 4, 관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1 ; 이완범, 앞 논문, 63~64쪽에 당시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47) 이 과정에서 벌어진 논란과 각 파의 주장에 대하여는 황태현, 「‘대한민국’ 국호의 기원과 의미」, 정치사상연구」, 21(1), 한국 정치사상사학회, 2015.5, 41~42쪽, 참조. 황태연, 앞의 책, 51~70쪽.
48) 황태연, 위 논문, 3쪽에서 박찬승 ; 서희경 ; 한인섭 ; 양영석 ; 윤병석; 김희곤 ; 이선민 등을 거론하였다.
49) 황태연, 위 논문, 35~36쪽. 정옥자는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의 국호에서제국을 민국으로,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바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민국’을 ‘국민주권국가’, 즉 ‘민주국가’로 이해하는 듯하다. 이완범은‘민국’이중화민국의 영향이라고 보면서도 동시에 ‘민주국’으로 이해한다.
즉 고종은이렇게말하였다.
“우리나라는 곧 三韓의 땅인데, 國初에 천명을 받고 통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統合爲一), 지금 천하의 이름을 ‘大韓’이라고정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일찍이 각국의 문자를볼때마다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韓’이라고 했으니, 이는 아마 미리 징험을 보이고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천하에 성명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천하는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다.“50)라고.
또한황제로서 즉위식을 하기 전날인 1897년 10월 11일 고종은 국호제정을 위해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의정議政(총리대신의 새 칭호)인 심순택은 “우리나라는 옛날에 기자가 봉해졌던 ‘조선’이란 이름을따라 이를 국호로 삼았는데 이는 처음부터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고 전제하고, “나라가 오래 되었어도 천명이 새로워지는 오늘날 국호의 제정하는 것이 전법典法에 맞다”고 주장했다고 하였다.51) 이렇게 고종과 몇몇 신하들은 소위 ‘기자정통론을 부정하면서 자주의 상징으로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1897년 9월 18일(음력)에 고종은 天地의 際를 白岳의 양(南)에서올리고 대한으로 국호를 정하였다.52) 이러한 상황을 놓고 정옥자는 “‘대한’은 삼한, 즉 옛 삼국의영토를모두 아우른다는 뜻이 담겨 있고, ‘민국’ 이념은 18세기 영・정조이후중요시된 소민(小民), 즉 백성 위주의 국가를 지향했다는 것이다.”53) 라고 했다.
50) 高宗實錄, 광무 원년 10월 11일조.
51) 이는 과거를 향해 500년 전통의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미래를 향해일본제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자주독립적 ‘민족국가’를 세우려는 고종과 당시근왕세력의 구본신참론적 ‘대한제국 건국’ 의지이다.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31쪽.
52) “告祭天地於白嶽之陽 卽皇帝位 定有天下之號曰大韓 以是年爲光武元年.” 高宗實錄, 광무 원년 10월 13일(양력), 日省錄 광무 원년 9월 18일(음력)의기록.
53) 정옥자, 「훼손된 국가 정통성 되살아났나」, 동아일보, 2008년 4월24 일.
비슷한 맥락에서 한영우 교수도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의 후신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54)고 말한 것을 소개했다. 황태현은 國體와 政體를 구분하면서, 고종 시대에 벌어진 ‘民國’ 이념에 대한 논의들의 특징은 ‘民’을 ‘國’의 근본으로 삼아 민국이념을 새로운형태로 부활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이라고 평가하였다.55) ‘民國’이 결코 외부에서 영향받지 않은 것임을 주장하면서 “동학교도와 독립협회및 만민공동회 회원들, 그리고 언론인과 신문독자들, 심지어 도적들까지 이렇게 ‘민국’이라는 말을 쓸 정도이니 조선 후기에 ‘민국’이라는단어가 얼마나 대중화되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라고 말하였다.
이어 대한제국 시기에 들어서면서 ‘大韓’이라는 용어가 아주 광범위 하게 사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였다.56) 이러한 그의 이론과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일본의 주장처럼 근대 중국의 영향을 받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한제국이 韓을 계승하였고, 그것이 조선(중화질서의 소산)을극복하려는 노력이고 기도였음은 일본 정부의 반응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대한국군과 대한제국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의미에서검열기구와 헌병 경찰을 총동원하여 ‘大韓’이라는 명칭을 말살하는것이었다. 1910년 5월 30일 제3대 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비밀리에 구성된 병합준비위원회를 통해 7월 7일 21개조의‘병합실행방법세목’을 수립하고 제1조에 “한국을 개칭하여 조선으로할것”으로 명시하여 국호 ‘대한’의 말살과 ‘조선’ 명칭의 복고 사용을방침화 했다.57)
54) 한영우, 「대한민국 건국60년의 인과적 이해」, 대한민국 건국 60년기념학술회의 대한민국 건국 60년, 과거-현재-미래, 국사편찬 위원회-동아일보주최, 2008년 7월 11일, 7~8쪽.
55) 황태현, 위의 논문, 63쪽.
56) 황태현, 위의 논문, 64~65쪽.
57) 황태연, 위의 책, 49~50쪽.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국치일에 순종이 발표한 칙령 제318조에 따라 “‘韓國’의 국호는 개정하여 지금부터 ‘朝鮮’이라 칭한다”라고 하였다.58) 먼저 ‘대한’ 이라는 나라 이름을 말살시킨것이다. 그리고 모든 활자매체에는 ‘韓’이라는 이름을 지우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정기와 주체성을 말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따라서 1910~1945년까지의 식민지 시기에는 ‘조선’이라는이름은 사용할 수 있어도 ‘대한’이나 ‘한국’이라는 이름은 사용할수없었고, 사용했다면 그것은 지하 단체나 해외 독립운동 단체의경우였다. 1918년 음력 11월 만주・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39명이 작성했던 ‘戊午독립 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 선언서’에서도 ‘우리 大韓’으로 시작된다. 이외에도 ‘대한독립단’・‘대한독립군’・‘대한학생광복단’・‘대한정의군정사’・‘대한청년단’・‘대한독립군비단’ 등 수많은 이름들에 주로 ‘대한’이 붙었으며, ‘한족회’와같이 한을 붙인 경우도 있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규식의 한국혼과 같은 저서도 같은 맥락에서 제목을 붙였다.59) 김상일은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즉 “‘한’은 단순한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우리 한국인의 실존(Korean existence)이요, 생물적인 본능에서 우러나온 말임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60) 그렇다면 근대화 과정에서 채택한 ‘韓’이라는 국호는 적어도 기자조선과연관성을 깊게 인식하고 만든 ‘조선’이라는 용어 및 개념과는 차이가 분명했다.
58) 매일신보, 1910년 8월 30일.
59) 김기빈, 일제에 빼앗긴 땅이름을 찾아서, 살림터, 1995, 15~18쪽; 이완범, 앞 논문, 61~62쪽, 재인용.
60) 김상일, 한철학・한국 철학의 사상과 정신학적 해석, 展望社, 1988. 22쪽.
Ⅳ. ‘한국’ 및 ‘한’의 의미
이충우는 대한민국의 구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순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대 +한 +민국이라는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61) 이어‘대한민국’의 ‘大’와 ‘韓’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張三植 編, 1985 참조)라고 하면서 아래처럼 서술하였다.
⑴ 대(大) :
㉠ ① 크다(小之對), ② 지나다(過也), ③ 길다(長也), ④ 높이는 말(尊稱, 太와같음),
㉡ ① 극하다(極也), ② 심하다(甚也), ③ 太와 同.
[한자 大에 해당하는 고유어 ‘크다’와 ‘높이다’의 의미를 보면,
‘크다’는
① <길이, 넓이, 부피 따위가> 보통의 정도를 지나다,
② <키가>보통보다 높다,
③ <규모, 정도, 범위나 또는 세력이나 힘 따위가> 심하거나, 대단하거나, 강하다,
④ <생각하는 범위나 도량의 폭이> 넓다,
⑤ <사회적 존재나 됨됨이가> 뚜렷하다, “두드러지다”의 의미이고
‘높이다’는
①<사회적 존재나 됨됨이가> 뚜렷하다, 두드러지다,
② 높게 하다,
③존경하다,
④ 존경하는 말을 쓰다”는 의미이다. (신기철・신용철 편, 1986 참조)]
⑵ 한(韓) :
① 한나라(國名-萬所封 <左傳),
② 나라 이름(朝鮮國名三-),
③ 우물 담(井垣),
④ 한국(大-, 朝鮮改稱)62)
물론 대한민국은 ‘大’가 지닌 의미와 역할도 크지만 본고와는 연관성이 적으므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韓國은 韓+國이다. ‘나라’라는 말은 한자로 邦・國・國家등이 있다.63)
61) 이충우, 앞의 논문, 47쪽.
62) 이충우, 앞의 논문, 48쪽 재인용.
63) 우리나라에 해당하는 단어는 ‘吾邦’이다. 그런데 金富軾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進三國史記表」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를 ‘吾邦’이라고 기록하였다.
본고는 ‘國’또는 ‘國家’의 의미와 용례, 역사적인 연원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한(韓)’의의미와용례 위상 등을 언어학적 의미적 문화적 역사적인 관점에서살펴본다.
‘어느 민족의 문화는 그 민족의 고유한 언어나 어휘체계를통하여그특징이 잘 나타나는데,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런 언어 혹은 언어체계를 「문화목록(文化目錄;Inventory)」이라고 한다.
최남선은‘ (不鹹)’ 을, 全圭泰는 「」・「」・「」을 문화목록어로 선택한후 자기논리를전개했다.
김경탁은 「감」을 구석기시대, 「탁」을 신석기시대, 「밝」을청동기시대, 「한」을 철기시대의 목록어로 보고 있다.
그리고 김상일은 「한」을 한국문화를 특징짓는 어휘로 보았다.64) ‘한’은 언어학적, 사상적, 문화적으로 혈연 종족 언어 정치 사회 문화 (민속종교예술등)에 구현되어 있다.
먼저 한의 언어적인 의미를 살펴본다.65) 「한」은 고대의漢字吏讀로 그 音을 假借할 때, 「桓・韓・汗・幹・翰・旱・甘・丸・感・含・馯・漢」 等으로 音譯이 되어 神名・人稱・族稱・位號・國名・地名・山名 等에쓰여왔다.66) 그리고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등의「환」이 있다. 그러면 많은 借字를 갖고 있는 「한」은 무슨 의미를 갖고있을까?① 大 ; ② 衆, 多, 諸 ; ③ 永, 長 ; ④ 一 ; ⑤ 廣 ; ⑥ 正; ⑦始; ⑧ 最 ; ⑨ 權威者, 王者 ; ⑩ 天 이 외에도 「한가지」・「한결같이」・「無窮」의 뜻이 있다.67)
64) 김상일, 「‘한’의 生成論」, 한국철학연구 (17), 해동철학회, 1988, 29~30쪽.
65) 이 부분에 대하여 필자는 「단군신화에 대한 구조적 분석」 성균관대학교석사학위 논문, 1985 ; 윤명철, 「단군신화에 대한 구조적 분석」, 한국사상사학보 2호, 1985를 통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그 후 일부 연구자들의새로운 연구 성과를 일부 반영하여 아래 글을 작성하였다.
66) 李鍾益, 「한밝思想考」, 東方思想論叢, 1975, 434쪽.
67) 안호상, 앞의 논문, 164~170쪽.
이같이 한」은 至高・最高・眞理・完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68)단군신화에 나오는 桓因 또는 桓國・桓雄 등이 있다. 이것은 可汗과 함께「한」의轉音으로서 「환하다」와 같이 「밝음」을 나타낸다.69)
王・絶對者・眞理・큰・넓은 等의 뜻이 있다. 또한 지명으로서 고구려의 수도인丸都, 서울인 漢城 등이 있다.
그리고 한강 한글 한길 등 많은 분야에서사용되었다. 따라서 앞에서 본 것처럼 알타이어 문명권70)에서는‘한(韓, kan,khan)’이 국명은 물론이고 건국신화에도 반영되었다. 또한 ‘한’은 신라의 ‘居西干’, ‘麻立干’처럼 왕호 또는 가야의 ‘留天干’처럼 족장의 호로 사용되었다.
또한 신라의 ‘舒發翰’(‘舒發韓’, ‘舒弗邯’) ‘角干’, 백제의 ‘烏干’처럼 관직명에 사용되었으며,71)
68) “양주동 교수는 「한」은 大衆, 多의 意라 하고 「」과 합성어가 되어「한」은 즉 天이며 뜻으로는 大光明이 된다고 하였다” (李鍾益, 앞의 논문, 437쪽에서 再인용) ; 「한」의 어원과 의미는 많은 글에서 다루고 있다. 가장대표적인 것으로 金相日 한철학, 展望社, 1985가 있다.
69) 李鍾益, 위와 같은 논문, 424~425쪽 ; 안호상, 「古代韓國思想에 관한硏究」, 亞細亞硏究, 高大亞細亞問題硏究所, 1962, 175쪽.
70) 알타이어계란 18세기 중반 스타라흐렌베르그가 제창한 ‘알타이어족설’부터시작하였다. 알타이어계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인 알타이지방을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캄차카 반도에서 서쪽으로 발칸반도까지, 북으로는시베리아북부에서 남으로는 중국 서남부까지 미치는 아주 광대한 지역에서사용되었다. 알타이어는 사용하는 종족에 따라서 튜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로구분하고 있다. 이는 근대에 사용한 종족의 명칭을 고려하여 분류한 것이다. 현재는 총 인구 약 6466만 가운데 투르크계 5864만, 몽골계 314만, 만주ㆍ퉁구스계 288만 등 3그룹으로 나누었다. 1928년 람스테드(Ramstedt)는알타이어를 몽골어, 만주어, 투르크어, 한국어로 나누었다. 현재 한국어는알타이어(드라비다어 및 중국절강지역 언어도 포함되었다는 주장들이 있다.)라는큰틀 속에 포함되어 각 요소들이 다 나타나지만, 다소 차이가 있어 ‘예맥어’라고 분류하고 있다.
71)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1, p.53.에서 조선의 왕이 한씨성을칭한 것은 우리말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즉 만몽어에 군장을 汗(Han) 혹은可汗(Khahan)이라 하고, 부여・고구려에서도 대인을 加(Kha), 신라에서도군장・대인을 幹(Khan), 今(Khum)이라 한 것 등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일부 지명 등에서도 나타났다. 최남선은 ‘한국’을 ‘어른이 다스리는 큰 나라’라고 해석하였다.72)
‘한’이라는 어음이 가진 의미와 용례 역할 등을 보다 더구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박,감 등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한 을 유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문화집단의기호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독립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우선 ‘ ’이 있다.「」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하기 위해 양주동氏의 설을 인용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이 ‘光明・國土’의 義로 古史에 ‘發・我・佛・沸・不・夫餘・夫裏・火・原・平・坪・評・赫・昭・明’ 乃至‘白・百・伯・貊・泊・樸・瓠’ 等字로 국명・지명・족명・인명 등에 借字됨은 周知의 일이다 ….”73)라고 하였다. 여기서 樸은 白・伯등의글자로표기가 되는가 하면 또는 發・我・佛 등의 글자로도 표기가 되었는데이것은 모두 의 각각 다른 표현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정리하면은 ‘발’과 ‘박’으로 나뉘어져 쓰이고 있으며 ‘백’・‘밝’・‘벽’은‘배’로변화되어 사용되고 있다.74) 그러면 많은 借字를 갖고 있는 ‘ ’은 무슨 의미를 갖고있을까?은 일반적으로 ‘밝다’ 즉 ‘光明’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六堂 崔南善은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얘기하고있다. 즉 “(park)은 … 古義에는 神・天 등이었고, 神이나 天은그대로태양을 의미하는 것이다.”75)하여 은 神을 나타내며 太陽神을 상징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72) 최남선, 조선 상식문답, 기파랑, 2011, 26쪽.
73) 梁柱東, 古歌硏究, 박문서관, 1942.
74) 안호상, 민족의 주체성과 화랑얼, 배달문화연구원, 1967, 11쪽.
75) 崔南善, 「不鹹文化論」, 崔南善全集 V2, 高大亞硏, 1973, 44~45쪽; 최근에는 周采赫, 「브르칸(不鹹)이즘과 柳花, 그 母胎回歸신앙 연구」, 한국의고대문화 형성, 백산학회 편, 2007에서 또 다른 관점에서 자기 논리를전개하고있다.
朝鮮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워졌다.
‘白民之國 (山海經)’・‘發國’・‘扶餘國’・‘不與國’・‘貊國’ 등으로서 이는모두 「」 즉 ‘光明’의 뜻을 가지고 있다. 鷄林遺事에서 ‘檀倍達 國那羅 君任儉’이라고 하였듯이 檀은 倍達(또는 白達)로서도 표기된다.76) 檀을 표기하는 또 다른문자인 樸達・倍達이 상호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이는 借音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倍와 樸은 무슨 의미를 갖고 똑같이 ‘達(tar)’과합쳐져 ‘檀’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일까? 臥遊錄의 기록과 太白山에 대한 설명을 비교해 보면 樸達・倍達은 동일한 명칭인 白山・ 白頭山 즉 太白山의 또 다른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樸=倍=白의等式이 성립된다. 박혁거세는 거서간이다. ‘赫’은 ‘빛나다’ 라는뜻이다. 박은 밝음 광명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 ’이다. 따라서불함산태백산 백두산 등은 빛 즉 광명의 상징이다. 徒太白・大樸山・樸達山・白階山・白山・白嶽山・白嶽・白達・白頭山・伯牙岡…. 또 하나는 ‘’ 이다. 필자는 「단군신화의 구조적 분석」,77) 이라는논문에서 ‘熊’으로 표시된 존재는 생물학적 의미의 곰이 아니라이미몇 단계의 문화변천과 역사상의 변화로 인하여 의미가 ‘地母神’으로변한 것임을 주장한바 있다. 古 Asia族은 강한 곰 토템을 가지고있으므로 곰을 神으로 모시며,78) Ainu語의 경우는 「神=熊=Kamui」라는관계로서 곰과 神을 표현하는 音까지 똑같다.79) 古 Asia族은우리나
76) 안호상, 앞의 책, 11쪽 재인용.
77) 윤명철, 「단군신화에 대한 구조적 분석」, 한국사상사학보 2호, 1985 ; 윤명철, 단군신화, 또 다른 해석, 백산자료원, 2008.
78) 金貞培, 「古朝鮮의 民族構成과 文化的 複合」, 白山學報 12, 1972, 72~75쪽, 참조. 79) 강길운, 「古朝鮮三國에 對한 比較言語學的 考察」, 언어 2 , 忠南大부설언어훈련, 1981, 34쪽.
古 Asia族은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를 이룬 종족들인데도 불구하고 현재 한반도에서는 곰토템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단군신화에 있는 곰의存在는 무엇이며, 古 Asia族과의 관련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될까?양주동씨는 增訂古歌硏究의 序說 「上代歌謠의 一班」에서“‘’ 은 <・검・곰・금> 등으로 互轉되는 神의 古語로 ‘王’의 古訓<尼叱今 寐錦 乃至 上監>에 仍用되었다.” 하여 은 神의 古語임을말했다. 동시에 熊을 뜻하는 곰이 神의 古語인 ‘’과 동일한 것으로서壇君神話에서 熊이 등장된 것은 王儉의 ‘儉’ 때문이라는 주장을하고있다.80) 그런데 이 ‘’은 알타이어 계통에서는 神・君・人의뜻을가지고 있는 말로서 우리말 ‘’과 일치하고, 특히 동북 시베리아에서는무당의 명칭을 ‘kam/gam’ 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아이누어로‘kamui’는神, 熊을 가리킨다. 또한 터키, 몽고, 신라는 ‘kam’, 일본은‘kami’라는음으로 神을 나타낸다.81) 따라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熊은 神을 의미하며, 王+儉은가장으뜸가는 王+(神)이 된다.82) 정인보는 王儉을 鄕劄法을적용하여‘임검’이라 읽는 것은 조금도 이상이 없다고 하여 ‘임검’을순수한명칭으로 보았다.83)
80) 梁柱東, 增訂古歌硏究, 일조각, 1908, 8쪽. 안호상은 앞의 책, p.129.에서“ 이 우리말 감(龕)과 검(儉=神)의 이두문 적기인 한자적기란 것은정인보님을 비롯해 양주동, 이병도, 조지훈님 등 여러 학자들의 보편적인이론이다.”라고 하였다.
81) 강길운, 위와 같은 논문, 언어 (2), 忠南大 부설언어훈련, 1981, 34쪽.
82) 안호상, 민족의 주체성과 화랑얼, 129쪽 ; 樸時仁은 알타이神話, 三中堂, 1980, 102쪽에서 “王儉은 王(중국말)과 儉(<神君>)은 본가, 외가처럼한자와 조선말을 함께 쓴 것이다.”하였다.
83) 鄭寅普, 朝鮮史硏究 上, 서울신문사, 1946, 44쪽.
강길운은 알타이어계의 언어분석을 통해서“王儉은 nimgəm으로 발음하여 ‘上神’ 또는 ‘上巫’의 뜻이다.”라고 하며, 유사한 예로써 만주어의 ‘niŋgu(上・頭)’, 古터키어에서 ‘gam(巫・神)’, 신라에서 ‘kam(神)’을 들었다.84) 결론적으로 ‘’은 알타이어의神을상징하는 기호이면서, 우리 문화권에서는 지모신의 성격을 지녔다. 安自山은 桓과 解慕를 「」의 寫音이고 雄과 漱는 ‘숫컷’을 나타낸다고하였다.85) 또한〈곰〉의 어원은〈가마〉・〈가마〉는 흑(黑)을 뜻하는것이라는 주장도 있다.86) 백두산의 명칭은 다양한데, 주로 ‘ ’계와 ‘’계로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蓋馬大山・蓋馬山 등으로 불리워졌다. 또한 단군신화에나오는 九月山・弓忽山・今彌達 등이 있다. 모두 ‘’계의 언어이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보면 해모수와 유화가 등장하는 무대가 三國史記에서는 ‘熊心山’으로, 삼국유사에서는 ‘熊神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고구려에서는 백두산을 개마산으로 불렀다. 이러한 감계의 언어는 백제에서도 많이 나타난다.87) 대표적인것은 두 번째 수도인 ‘熊津’이다. 웅진은 ‘고마나루’ 인데, 이는북사, 에서 ‘固麻城’으로 표기한데서도 동물인 곰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감계 언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웅진은 ‘신의 도읍지’ 즉首都라는 의미이다.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고마’라고 부른다.88) 감계언어는국명 뿐 만 아니라 山名, 江名, 村名 등을 비롯하여 수없이남아있다. 이는 일본에서도 동일하다.
84) 강길운, 「古朝鮮三國에 對한 比較言語學的 考察」, 언어 (2), 忠南大부설언어훈련 1981, 35쪽.
85) 李丙燾, 「檀君神話의 解釋와 阿斯達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30쪽.
86) 박병식, 어원(語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 (上),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07, 134쪽.
87) 정호완, 「지명소 ‘고마’의 의미와 분포」, 우리말글 (36), 우리말글학회, 2006.
88) 같은 예는 趙堈熙, 「日本의 韓半島 國名에 대한 綜合的 調査硏究(1)」, 일어일문학 33, 2007.
이러한 현상들을 고려하면 ‘한’・‘한국’은 알타이 언어권과 관계가 깊음을 알 수 있다.89) 그 밖에도‘한’은 사상90)뿐만 아니라 문화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불함문화의 ‘불함’이란 ・광명・하늘・하늘신 (天神): 하느님을뜻하는 고어로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1922)라는 긴 제목의 글에서 육당은 이미 역사 연구 항목의 하나로 ‘불함문화’를 논급하고있다.
특히 이 책의 17쪽에서 ‘대가리’란 말도 터키와 몽골어인 ‘탕그리(tangri)’와 ‘텡그리(tengri)’와 同類語로서 天神을 표상하며 그것의 인격화된 이름이 후세에 ‘대감(taigam)’으로 남는다고 설명하고있다. 경주의 土含山이 대갈산(taigar산) 및 대감산(taigam산)이다. 나라민족들의 문화 속에 불함문화가 은연 중 자라 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89) 이러한 견해는 아래 인용한 신채호를 비롯하여 최남선 등이 갖고 있다.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8쪽에서 “고대아시아 동부의 종족(宗族)은 (1)우랄 어족(語族), (2)중국 어족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한족(漢族), 묘족(苗族), 요족(猺族) 등은 후자에 속하고 조선족, 흉노족(匈奴族)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鮮卑), 여진(女眞), 몽고(蒙古), 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지금의 신강족),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의 종족(種族)이 되었는데, 지금의 몽고, 만주, 터키, 조선 네 종족 사이에 왕왕 동일한 말과 물명이 있는 것은 몽고제국(元) 시대에 피차간에 관계가 많았으므로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고사를 참고하면 조선과 흉노 사이에도 관명(官名), 지명(地名), 인명(人名)이 같은 것이 많은데, 이는 상고에 있어서 이들이 동일한 어족(語族)임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90) 최재목 ; 조숙경, 「우리 건국신화에 내재된 ‘한’사상의 시론적 고찰」, 陽明學 39, 한국양명학회 논문집, 2014・12 ; 이근철, 한사상과 문화, 엠-에드, 2004 ; 김상일, , 온누리, 1984 ; 신정일, 한 사상의 본질 , 대한철학회논문집, 1981 ; 박용숙, 한국의 시원사상, 문예출판사, 1985 ; 민영헌, 선과 한, 세종출판사, 1995 ; 한자경, 한국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 제갈태일, 한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더불어책, 2004 ; 김기태, 한사상의 역사적 정통성에 관한 연구, 교육논총, 인천교육대학교, 2001 ; 양근석, 「한 사상의 논리 연구」, 한국 동북아논총 9, 1998 등.
불함문화의 전파 노선은 흑해→카스피해→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사얀산맥→야블로노이산맥→흥안령산맥→태행산맥 이동→조선→일본→유구91)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91) 최남선 지음, 정재승, 이주현 역주, 불함문화론,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
Ⅴ. 유라시아에 나타난 칸국들
‘한’의 음과 의미, 용례 등을 상술하였지만 ‘韓國’은 ‘칸(Kan Khan) 국’과 동일하다. 한국이라는 국호의 의미와 성격을 이해하고, 알타이문명권과의 연관성을 알기 위한 한 방법으로 유라시아 지역에서명멸한 ‘칸국’들을 조사하여 소개한다. 汗國(Khanate, Chanat ; 중국어발음으로는 hán guó이다.) 은 돌궐어이다. ‘可汗’이라는 최고지배자가통치하는 政治體, 즉 국가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적 실체는유라시아초원에서 활동하였던 종족과 부족에게는 상징적인 의미를지니고있다. 汗國은 부락, 추장의 영지, 또는 公國・王國 심지어 帝國을뜻한다. 선비가 처음으로 ‘可寒’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 후몽골계인유연이 역시 ‘可汗’이라고 사용하였다. ‘汗國’이라는 단어는 Turkish 혹은 투르크-몽고어(Turco-Mongolian)의 어휘이다. 근대 터키어 중에서 ‘hanlık’ 그리고 ‘kağanlık’으로‘汗國’을 표현한다. 아제르바이잔어로는 ‘xanlıq’, 몽골어로는‘khanlig’, 역사 자료에서 나타난 ‘克烈汗國-the Khanate of the Kerait)’(遼,金시기에 몽골 고원 일대 활동한 강대한 부족. 遼史에서 ‘阻蔔’・‘北阻蔔’・‘達旦’으로 불린다.)는 몽골어로 ‘Khereidi n Khanlig’라고 한다.
대표적인 칸국은 突厥 汗國(Turkic khanates)이다. 552年부터630年까지 존속하였는데, 583년에 동돌궐, 서돌궐로 분리된 채 630년까지 존속하다가 657년에 당나라에 멸망하였다. 그 후 682년에후돌궐이 복국하여 744年에 回紇에 멸망할 때까지 193년 동안 존속하였다. 역사상에 나타난 突厥汗國(Turkic khanates)은 아래와 같다.
-아래 생략-
[突厥汗國 계열/몽골 계열의 4대 汗國들/‘後 蒙古汗國’ 계열의 汗國/18~19 세기 Qajar empire시기의 고카삭 汗國과 이란 汗國]
그 외에 ‘한’ 또는 ‘칸(kan, khan)’은 지배자의 명칭(왕호), 지명, 강명, 산명 등에 활용되었다.92) 예를 들면 신라의 居西干, 麻立干, 가야의留天干, 신라의 舒發翰(舒發韓, 舒弗邯) 角干, 백제의 烏干 등이있다.
92) 한텡그리(khan-tengri) 산. 현재 중국 신강성 유오이(維吾爾) 자치구 서쪽끝에있는 산으로 천산(天山) 산맥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 높이 6,995m.
可汗은 蒙古語:хан/ᠬᠠᠨ,土耳其語:hakan라고 하는데 大汗, 合罕, 汗王, 簡稱汗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4세기 이후로 유목민족들의지배자를 뜻하는 칭호이다. 알타이어계에서는 대수령을 뜻하는용어이다. 3세기 경에 처음으로 선비족의 추장을 “可寒”이라고 한자로기록하였다. 可汗은 한 나라의 국왕에 대한 칭호로서 402년 柔然의수령인社崘이 막북지방을 統一한 후에 스스로 칭한 것이다. 鮮卑, 回紇, 柔然, 鐵勒(高車), 突厥, 吐穀渾, 阻蔔, 女真等 등의 수령을 다可汗이라고 칭하였며, 몽골제국이 멸망한 후에 그 영향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The Timurid Empire), 카작 한국(The Kazak Khanate) 부하라 한국(The Bukhara Khanate), 동유럽의 크림칸국(The CrimeanKhanate), 카잔 한국(The Kazan Khanate) 등이 可汗을 칭하기시작했다
Ⅵ. 맺음말
본고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다양한 부분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은 왜곡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한자라는 기호를 전적으로 사용한데 다른 폐해이다.
한민족의 역사상에는 다양한 정치체와 국가들이 존재했는데, 그 존재들을가리키는 것이 이름이고, 國號이다.
본고는 제 2장에서 국호의 의미와 기능을 살펴보았다. 존재물에게‘이름(名, 號 ,name)’이 지닌 의미와 가치는 절대적이다. 이름은 존재의 선언일 뿐 아니라 ‘記號(code)’이며 ‘象徵(symbol)’이므로 다양한 의미와 역할이 담겨있다. 따라서 국호의 어원과 의미를 아는작업은매주 중요하다.
현재 우리의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그런데 이 국호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한민족 역사의 계승성과 정통성을표방한 것이다.
특히 한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제 3장에서는역사에서 사용된 한국의 예를 살펴보았다.
이미 중국의 사서에는기원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韓이라는 국명과 ‘韓侯’의 존재가 등장한다.
이것이 현재 한민족과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가는 다양한 설이있다.
본고에서는 그 부분을 일부만 살펴보고 우리 역사에서 나타난 한국의 예를 열거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학들의 연구가 매우 많아서 소개하고 정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성립과정과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제 4장에서는 ‘한국(韓國)’ 및 ‘한(韓)’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한국이라는 국호에서 중요한 기호는 ‘한’이다.
따라서 한을 분석하였는데, 기존의 선학들의 연구성과와 필자의 오래전 논문 등을 참고하여 ‘한’ 의 의미를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열거하였다.
다음에는 한이라는기호가 가진 논리적 사상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다. 물론 언어학적인 분석 속에서 그러한 부분이 다소 언급되었지만, 이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체계화 시키지는 못했다. 본
고는 이러한 부분에서매우 미진하지만 추후 논문으로 작성할 때에는 대폭 보완할 예정이다.
또 하나는 언어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드러났지만 ‘한’이 문화의 핵심기호 또는 문화목록인 것을 확인한 만치 민속 신앙 등 문화현상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의미와 가치를 지녔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알타이어에서 공유하는 기호로서 확인된 만치 ‘한’ 및 ‘한국’은 알타이 문명권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이 작업을 통해서 우리 문화가 ‘알타이 문명권’, ‘유라시아공간’ 과 어떠한 관계성을 갖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우리문화의 정체성 가운데 중요한 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때문에 본고는 국호에 한정된 연구라는 현실을 고려하여 유라시아의 역사에서 나타난 한국 또는 칸국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을했다. 그 결과 우리와 동일한 ‘한국(Khan,Kan)’을 국호로 채택했던 알타이어권의 튜르크계 몽골계 국가들이 매우 많았음을 확인할 수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추후 우리가 유라시아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는데 매우 의미깊은 근거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추후분단을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국호선택과 개정에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구복의 연구가 참고 된다.93)
참고삼아 언급하면 필자는 2005년도에 발표한 저서에서 ‘한고려국’이라는 명칭을 제안한 바 있다.94)
93) 정구복, 「우리나라 국호고-한반도 통일 이후 국호 제정을 위한 기초연구」, 장서각 29, 2013.4, 한국학중앙연구원.
94) 윤명철,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삼성경제연구소, 2005. 참조.
<참고문헌>
저서
Mircea Eliade, Image and Symbols, Harvill press, London, 1961.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5.
김기빈, 일제에 빼앗긴 땅이름을 찾아서, 살림터, 1995.
김상일, , 온누리, 1984.
김상일, 한철학-한국 철학의 사상과 정신학적 해석, 展望社, 1988.
민영헌, 선과 한, 세종출판사, 1995.
박병식, 어원(語源)으로 밝히는 우리 상고사 (上), 용인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07.
박용숙, 한국의 시원사상, 문예출판사, 1985.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상), 민우사, 1947.
신채호, 조선상고사, 삼성문화재단, 1977.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2006.
안호상, 민족의 주체성과 화랑얼, 배달문화연구원, 1967.
梁柱東, 增訂古歌硏究, 일조각, 1908.
梁柱東, 古歌硏究, 박문서관, 1942.
엠마누엘 아나티 지음 ; 이승재 옮김, 예술의 기원, 바다출판사, 2008.
이근철, 한사상과 문화, 엠-에드, 2004.
윤명철,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삼성경제연구소, 2005.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81.
鄭寅普, 朝鮮史硏究 上, 서울신문사, 1946.
제갈태일, 한사상의 뿌리를 찾아서, 더불어책, 2004.
최남선, 조선 상식문답,기파랑, 2011.
칼 G. 융 외 지음, 이윤기 옮김, 인간과 상징, 열린책들, 2004.
한자경, 한국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청계, 2016.
사료
高宗實錄, 광무 원년 10월 11일조.
高宗實錄, 광무 원년 10월 13일(양력).
日省錄 광무 원년 9월 18일(음력)의 기록
논문
강길운, 「古朝鮮三國에 對한 比較言語學的 考察」, 언어 (2), 忠南大부설언어훈련, 1981
강정인, 안외순, 「서구중심주의와 중화주의의 비교 연구: 그 전개과정및특성을 중심으로」, 國際政治論叢 40집 (3호), 한국국제정치학회, 2000.
강창일, 「통일조국의 이름짓기, 일본에서는 한 조선-고려가 어떻게사용되었나」, 역사비평 계간 21호, 1993. 金貞培, 「古朝鮮의 民族構成과 文化的 複合」, 白山學報 12, 백산학회, 1972.
김기태, 「한사상의 역사적 정통성에 관한 연구」 , 교육논총, 인천교육대학교, 2001.
金庠基, 「韓濊貊 移動攷」, 동방사 논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김상일, 「‘한’의 生成論」, 한국철학연구 (17), 해동철학회, 1988.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1982.
리지린, 「고조선 국가 형성에 관한 한 측면의 고찰-한자 사용의 시기에대하여」, 북한의 고대사 인식 1 (김정배 엮음), 대륙연구소출판부, 1991.
백기하 ; 장우진, 「조선사람 머리뼈의 인류학적 특징」, 고고민속논문집(5), 사회과학출판사, 1973.
신복룡, 「한국정치사에 있어서의 식민지사관의 오염, 특히 국호 ‘한’의의미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13, 1979.1.
愼鏞廈,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韓國學報 제 102집, 2001.
신채호, 「三韓分立時代」, 朝解士古史, 1931 ; 申采浩 全集 上, 螢雪出版社, 1972.
신채호, 「前後三韓考」, 朝鮮史硏究草, 申采浩 全集 중, 螢雪出版社, 1972.
신현웅, 「三韓起源과 ‘三韓’의 成立」, 한국사연구, 122, 2003.
안호상, 「古代韓國思想에 관한 硏究」, 亞細亞硏究, 高大亞細亞問題硏究所, 1962.
양근석, 「한 사상의 논리 연구」, 한국 동북아논총 9집, 1998.
윤명철, 「단군신화에 대한 구조적 분석」, 한국사상사학보 2호, 한국사상사 , 1985.
윤명철, 「고구려 담론1-그 미래 모델의 의미」, 고구려연구 9집, 고구려연구회, 2000.
윤명철,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1」, 고구려연구 13, 고구려연구회, 2002.
윤명철, 「단군신화와 고구려 건국신화가 지닌 정체성(identity)탐구」, 단군학연구 6, 단군학회, 2002.
윤명철, 「한국사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제언-고대사를 중심으로」, 한국사학사학보 9호, 한국사학사연구회, 2004.3.
윤명철, 「고구려의 정체성과 중국 동북공정의 배경」, 소설로 본고구려의역사와 한민족의 정체성, 소설가협회, 2004.
윤명철,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성에 관한 연구 2, 단군학연구 14호, 고조선단군학회, 2006.
윤명철, 「東아시아의 海洋空間에 관한 再認識과 活用-동아지중해모델을중심으로」, 동아시아 고대학 (14), 동아시아 고대학회, 2006.
윤명철, 「고조선 문화권 설정을 위한 역사관의 모색-몇 가지 이론의적용」, 고조선단군학, 고조선 단군학회, 2013.
이병도, 「三韓問題의 新考察(2)」, 진단학보 3, 진단학회, 1935.
李丙燾, 「檀君神話의 解釋와 阿斯達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이완범, 「국호 ‘대한민국’의 명명」, 황해문화, 새얼문화재단, 2008.
李鍾益, 「한밝思想考」, 東方思想論叢, 1975.
이충우, 「국호 ‘대한민국’」, 인문학연구, 4, 관동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1.2.
정구복, 「한백겸의 史學과 그 영향」, 진단학보 63,진단학회, 1987.
정구복, 「우리나라 국호고-한반도 통일 이후 국호 제정을 위한 기초연구」, 장서각 29, 한국학 중앙연구원, 2013.
정형진, 「시경 한혁편의 한후와 한씨조선에 관한 새로운 견해」, 고조선단군학 13, 2005.
정호완, 「지명소 ‘고마’의 의미와 분포」, 우리말글 36, 우리말글학회, 2006.
趙堈熙, 「日本의 韓半島 國名에 대한 綜合的 調査硏究(1)」, 일어일문학(33), 2007.
千寬宇, 「三韓攷 第 l 部: 三韓의 成立 過程」, 史學연구, 26, 1975.
최남선 지음, 정재승, 이주현 역주, 불함문화론,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
崔南善, 「不鹹文化論」, 崔南善全集 V2, 高大亞硏, 1973.
최재목 ; 조숙경, 「우리 건국신화에 내재된 ‘한’사상의 시론적 고찰」, 陽明學, 제39호, 한국양명학회 논문집, 2014・12.
황태현, 「‘대한민국’ 국호의 기원과 의미」, 정치사상 연구 21(1), 한국정치사상사학회, 2015
※ 투고일자 : 11. 14 심사일자 : 12. 08 게재확정일자 : 12. 14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종독살설 연구/김동율(고흥군보건소)外 (0) | 2024.11.22 |
---|---|
김옥균의 죽음을 둘러싼 비극적 현실과 이상 세계 추구-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의 김옥균의 죽음을 중심으로-/윤상현.가천대 (0) | 2024.11.20 |
고조선의 영토에 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중국 및 조선의 “사서”들:그 내용과 평가/ 김학준.단국대 (0) | 2024.11.20 |
역사의 실제 드러내기 : 『史記: 列傳』을 통해 본 사마천의 역사기술의 특징/김충열.경희대 (0) | 2024.11.18 |
전세의 원형, 조선후기 세매관습의 특성에 관한 연구(24-3-29) /최영상.한국주택금융공사 (0) | 2024.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