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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경종독살설 연구/김동율(고흥군보건소)外

Ⅰ. 서론

경종독살설은 조선의 20번째 왕인 경종의 죽음과 관련된

가설이다. 경종은 1724년 8월 25일 새벽 3시경 창경궁 환

취정에서 승하하였는데, 그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본 가설의 중심에 있다. 승정원일기 사관은 본 사건

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光佐曰, 昨夜詳問醫官, 則蟹醬及杮, 竝爲喫了, 則腹痛

大瀉云.

광좌(당시 약방 도제조)가 아뢰길, 어제 밤 의관에게

상세히 물어보니 게장과 감을 드시고 배가 아프고 설

사가 심하셨다고 합니다.

󰡔承政院日記󰡕 경종 4년 8월 21일

8월 20일 경종이 게장과 감을 먹었고 그 이후로 복통과

심한 설사가 나타난 것이다. 왕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

구하고 이 증세들은 사라지질 않았고, 결국 병마를 이겨내

지 못한 경종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경종이 죽고 난 이후, 신하들은 이날의 사건에 대

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누군가가 게장과 감에

독을 타서 경종을 죽인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본 사건의 용의자로 경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조선의 21

번째 왕 영조를 지목한다. 결국 이 가설은 영조가 집권하던

1700년대부터 지금까지 3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사람들

에게 회자되었다.

위 사건의 진위여부 파악이 본 논문을 시작하게 된 동기

이자 논문의 목적이다.

그동안 경종독살설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영조 당대에 일어난 논쟁들은 물론이거니와

현대에도 많은 역사연구자들이 다양한 역사적 근거를 토대

로 경종독살설의 진위여부를 가렸다. 의견은 독살임을 주장

하는 견해1)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견해2)로 나뉘며,

각 주장들은 경종의 죽음뿐만 아니라 경종과 영조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에도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본 연구는 경종독살설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위의 다양한

연구들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연구에 대한 배경 지식이나

중심 사료의 선별 및 사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하였다. 우선 본 경종독살설에 대한 연구에는 필

자가 지난 3년간 진행했던 연구주제들; 경종의 질병, 복용

했던 약, 체질적 특징 및 당시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과 그

의 건강사이의 연계성3) 등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사료

에 있어서도 기존에 주로 회자되어온 정치적 논쟁과 관련

된 내용4)은 최대한 배제하고 대신 의학적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특히 독살이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당시의 진료 과

정, 경종의 건강 상태, 그리고 의관들과 영조 사이에서 오

갔던 대화 속 진의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연구에 주로 사용된 중심사료는 󰡔승정원일기󰡕와 󰡔조선왕

조실록󰡕이다. 거기에 본 사안이 이미 여러 차례 화두가 되

었던 만큼 기존에 본 주제를 다룬 여러 사료나 연구논문,

단행본 서적 등에서도 크게 도움을 받았다. 또한 본격적인

의학적 분석에 있어서는 󰡔동의보감󰡕과 몇몇 의학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본고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장에서는 경종독살설의 배경을 설명하였다. 경종

독살설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어떤 배경에서 이 이

야기가 등장하였고, 엮여있는 인물과 사건들로는 무엇이 있

는지 알아보았다.

두 번째 장에서는 경종의 독살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

서 가장 중요시여긴 것은 사건을 최대한 실제에 가깝게 바

라보는 것이었다. 주어진 사료만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다행히 󰡔승정원일기󰡕에 비교적 자세한 기

록이 남아있어서 사건의 선후전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세 번째 장에서는 경종을 죽인 ‘무엇’에 대해 논하였다.

여기서는 경종의 몸에서 일어난 반응들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네 번째 장에서는 경종을 죽인 ‘누구’에 대해 논하였다.

유력한 용의자 영조를 중심으로 진행하였으며, 특히 경종이

죽기 전날 영조와 이공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대해 분석

함으로써 독살설 용의자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보충하였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 분석한 바를 정리하고 필자의 고찰

로 본고를 마무리하였다.

1) 이덕일. 󰡔조선 왕 독살사건󰡕. 서울 : 다산초당. 2005.

김용관. 󰡔영조의 세가지 거짓말󰡕. 서울 : 올댓북. 2010 등

2) 이상각. 󰡔조선왕조실록󰡕. 파주 : 도서출판 들녘. 2009.

이종호. 󰡔영조를 만든 경종의 그늘󰡕. 파주 : 글항아리. 2009 등

3) 김동율, 김태우, 차웅석. 「경종의 병력에 대한 연구1」. 한국의사학회지. 2012 ; 25(1) : 11-22 외 2편

4) 노론이 지지하는 세제(영조)가 소론이 지지하는 경종을 독살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조선 왕 독살사건󰡕(이덕일, 2005), 󰡔조선왕들의 생로병사󰡕(강영민, 2009) 등이 있다.

Ⅱ. 본론

1. 경종독살설의 배경

1) 독살설의 최초 제시자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주장한 사

람은 누구일까?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유추해

보건데, 여러 인물 중 심유현(沈維賢)이라는 사람이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백지원은 그의 저서에서 경종비의 동

생인 심유현이 경종의 시신을 직접 보고 독살임을 발설하

였다고 하였으며5), 이상각은 소론 강경파인 박필현, 이유

익, 심유현 등이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하여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을 옹립해 영조를

축출하려는 과정에서 경종독살설로 민심을 호도하였다고

하였다.6)

5) 백지원. 󰡔왕을 참하라-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서울 : 진명출판사. 2009 : 63-64.

6) 이상각. 󰡔조선왕조실록󰡕. 파주 : 도서출판 들녘. 2009 : 423-451.

실제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

이 있다.

若其凶言之窩窟根柢, 卽沈維賢是已, 維賢, 端懿王后弟也

그 흉언의 와굴과 근저는 바로 심유현(沈維賢)인데,

심유현은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아우였습니다.

󰡔영조실록󰡕 영조 4년 3월 14일

영조 4년 3월은 반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때의 반란

을 이인좌의 난, 혹은 무신난으로 칭하는데 반란의 주요 세

력은 당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였다. 영

조시대가 열리면서 정치적으로 밀리게 된 세력층이 영조를

내쫒고 자신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

었다. 결국 왕실에도 반란에 대한 정보가 들려오는데, 거기

서 반란군이 영조 퇴출의 명분으로 내세운 문구가 전달된

다.7) 이를 흉언이라고 표현한 것인데, 심유현이란 이름도

이 때 언급된다.

실록 사서의 말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일경과 박필몽

등이 경종이 죽은 해인 1724년에 시도한 모위를 이루지 못

하자 심유현을 꾀어 그를 도발하였으며, 이에 심유현이 흉

언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특히 ‘경종과 영조가 왕위를 주고

받음에 정대함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8) 반란의 주도세

력이 영조의 왕위 당위성에 반하는 흉언을 제시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7) 이상각. 앞의 책. 443.

8) 󰡔영조실록󰡕 영조 4년 3월 14일 1번째 기사

이후 심유현을 공초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玉色如常, 大臣請皐復, 始知昇遐.

옥색이 평상시와 같았는데, 대신이 고복을 청하여

비로소 승하하심을 알았다.

󰡔영조실록󰡕 영조 4년 3월 29일

이 말은 2년전 심유현이 이유익이라는 인물과 만나 갑진

년(1724년) 국휼(國恤), 즉 경종의 승하와 관련된 이야기

를 나누던 중에 했던 말이라고 한 것이다.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내뱉은 말임을 감안해보면, 이 말속에 숨겨진 그

의 의지는 자신이 경종독살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사람

이 아니라는 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영조 9년에 영조

가 자신의 왕위 당위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심유현은 심

지어 옥체의 안색이 평상시와 같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어

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9)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의지

와는 상관없이 받아드린 측에서는 이역시도 경종독살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로 받아드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심

유현이 실제로 경종 승하 즈음에 입시하였기 때문에10) 그

의 말의 신빙성은 더욱 높았을 것이다.

심유현이란 인물이 했던 말은 결국 영조의 왕위 당위성

에 반하려는 말이었다. 이는 흉언이라 일컬어지며, 정확한

문구가 왕실기록에 남아있지는 않다. 다만 영조 1년 1월

17일 기사의 하단부에 있는 실록사관의 논평부분에서 그가

한 흉언의 대강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사관이 흉언의 발단

에 대해 논한 부분에 따르면, 이유익과 박필현이 심유현을

꾀어 흉언을 만들었다고 하며 그 흉언이 신치운의 흉언과

같다고 한다.11)

9) 󰡔영조실록󰡕 영조 9년 7월 25일 1번째 기사

10) ‘令曰, 宗宰及金後衍・沈維賢, 俱爲入侍. 令曰, 錦平尉・礪山君, 入侍于御牀左右, 沈維賢・金後衍隨從, 可也. 錦平尉及沈維賢, 爲屬纊’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11) 󰡔영조실록󰡕 영조 1년 1월 17일 5번째 기사

신치운의 말은 다음과 같다.

臣自甲辰後, 不喫蟹醬, 此乃臣之逆心.

신은 갑진년(경종승하년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31년 5월 20일

영조4년 무신난이 일어난 시기에 이광좌가 말한 ‘흉언’,

결국 이 흉언은 영조 측에서 게장을 통해 경종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 요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러한 말을 만든 사람으로 주목한 사람이 바로 심

유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가 경종의 승하시에 경종 곁에서

상황을 지켜봤다는 점이 이러한 주장이 신빙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였다.

2) 독살설의 신뢰를 높인 상황적 근거들

이렇게 심유현에 의해 만들어진 경종독살설은 영조의 반

대세력들을 중심으로 퍼졌나갔다. 다만, 의심이 가는 것은

경종의 죽음을 심유현 혼자 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12)

어떻게 여럿이 함께 임종을 지켜보았는데 그 중에 겨우 한

사람의 의견이 이렇게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심유현의 말이 한차례의 거대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많은

 

12)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필자는 다음 두 가지 사건에 집

중하게 되었다.

첫 번째 사건은 경종 즉위년(1720년)에 발생한다.

出示吐出黃水, 幾一升許…

토해내신 황수가 거의 1승 가량으로…

󰡔승정원일기󰡕 경종 즉위년 12월 15일

이 하루 전날인 경종 즉위년 12월 14일, 경종은 토를 했

다. 다음날 그 소식을 듣고 약방에서 왕에게 찾아와 진찰을

요구한다. 그러나 경종은 증세가 대단하지 않으니 진료까지

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13) 그저 소화능력에 문제로

생긴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을 문제였다.

13) ‘而出示吐出黃水, 幾一升許, 或有感氣癨漸而然耶?’ (󰡔승정원일기󰡕 경종 즉위년 12월 15일)

하지만 신하들은 이를 그렇게 넘기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라도 왕이 먹는

음식에 누군가가 장난을 쳤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즉 즉위년 12월에는 이와 관련해서 더 이상 자세한

논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종 2년 8월이 돼서야 다

시금 언급된다.

경종 2년 8월 18일, 당시 영의정이었던 조태구가 경종에

게 당시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때 수랏간 나인이었던 김

씨 성을 가진 궁녀를 찾아 조사하자고 제안한다.14) 이후

김씨 성을 가진 궁녀에 대한 추문이 지속적으로 요구되어

경종이 죽기 일주일 전인 경종 4년 7월 19일까지 김성궁인

에 대한 논쟁이 계속 된다.15) 이처럼 김씨 성을 가진 나인

을 통해 어선에 독을 타려고 했다는 사건, 즉 경종독살에

대한 이야기는 경종이 즉위한 이후로 죽기 전까지 지속적

으로 논의되었던 것이었다.

14) 󰡔경종실록󰡕 경종 2년 8월 18일 1번째 기사

15) 󰡔경종실록󰡕 경종 4년 7월 19일 1번째 기사

 

두 번째 사건은 경종 2년 3월에 있었던 목호룡의 고변이다.

急手者, 用何藥? ... 丸藥, 一歃卽斃.

급수란 어떤 약을 쓰는 것이냐? ... 환약을 한 개 먹으

면 즉시 쓰러져 죽게 된다.

󰡔경종실록󰡕 경종 2년 4월 12일 목호룡의 고변

所謂小急手, 乃是行藥也

이른바 소급수라는 것은 곧 독약을 쓰는 것입니다.

󰡔경종실록󰡕 경종 2년 4월 12일 정인중의 공초

목호룡은 경종 집권 시기 신임사화의 정점을 찍은 장본

인이었다. 그의 고변으로 인해 노론에 대한 탄압은 정점에

치달았으며 결국 사화가 발생하여 많은 수의 노론 측 대신

들이 죽임을 당한다. 목호룡은 노론 측에서 왕을 시해하기

위한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하면서 급수(急手)에 대한 이

야기를 한다. 위의 기사는 목호룡의 고변과 그로 인한 정인

중의 공초 중에 나타난 말들이다. 소급수는 독약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자객을 사용하는 대급수, 말을 지어내어 분위기를

조장하는 평지수와 함께 왕을 없애는 방법 중 하나였다.16)

16) 이상각. 앞의 책. 426

경종은 소론의 왕이었다. 그리고 그가 등극하던 당시 주

요 집권당은 노론이었다. 왕과 신하들 사이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경종을 죽이기 위해 모의

를 벌였다한들 이상할 것이 없던 상황이었다.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 시기에도 이미 폐위될 위협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경종이었다. 결국 그를 제거하려는 모의의 존재는 그 진가

여부를 떠나서 언제든지 추측이 가능했으며 경종 즉위년에

있었던 구토사건과 2년에 있었던 목호룡의 고변은 이 모의의

방법이 독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셈이다. 이처럼

경종의 삶과 독살이라는 단어는 이미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3) 독살설의 가시화

독살 가능성을 안고 있었던 왕, 그런 왕의 임종을 지켜보

고서 그가 독살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 그리고 이 말이

진실이라 믿는 혹은 진실이길 바라는 사람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을 통해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설화처럼 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에 큰

반항을 일으킨 이야기로 경종 독살설이 등장한 것이다.

독살설이 가장 크게 알려지게 된 사건은 영조 4년에 있

었던 반란이다. 앞서 이인좌의 난이라 언급했던 본 반란은

경종이 영조에 의해 독살 당했으며,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

이 아니라는 점을 명분으로 일어난 반란이었다. 이인좌가

이끈 반란군은 3월 청주성을 장악하고 이후 목천, 청안, 진

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나아갔다. 반란의 시작은 충청도

였으나 점차 영호남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4월 반

란군이 관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함으로써 이인좌의 난은 끝

이 난다.17) 이인좌부대가 군중에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놓고

17) 이상각. 앞의 책. 443

조석으로 곡을 했다는 기록이 󰡔당의통략󰡕에 남아있는데18)

이러한 행동들은 반란의 성패와 상관없이 경종독살설을 전

국적으로 알리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다.

본 반란이 경종독살설을 가시화시킨 정점에 있다면, 이

외에도 영조집권시기 동안 몇 차례 더 경종독살설이 표면

화된 사건들이 있었다. 그 가장 빠른 기록은 이인좌의 난보다

3년이나 빠른 영조 1년에 있었다. 1월 16일 영조가 출궁하

는 길이었다. 갑자기 해괴한 소리를 지르는 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붙잡아서 이름을 물으니 이천해라는 자였다.19)

18) 이덕일. 󰡔조선 왕 독살사건󰡕. 서울 : 다산초당. 2005 : 199-243.

19) 󰡔영조실록󰡕 영조 1년 1월 16일 2번째 기사

다음날 공초하는데 기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上命罪人凶言, 勿書文書中

죄인의 흉악한 말은 문서 가운데 쓰지 말라

󰡔영조실록󰡕 영조 1년 1월 17일

이천해의 말이 흉악하여 문서에 기록하지 말라는 말은

본 공초 기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중간 중간 이천해의

말 중 일부가 드러나 있는데, 이천해는 이 흉악한 말을 하

윤원이라는 자에게 들었고, 그가 했던 말은 환국과 관련된

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조실록 본 기록 말미에 사서는

이 흉언의 배후가 무신년에 드러났다고 하였다. 무신년은

바로 무신난, 즉 이인좌의 난이 있었던 시기이다. 사서가 말

한 무신년 역시 이 무신난을 일컬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의 주장이 공통적으로 신치운의 흉언과 같다고 하였다.20)

결국 이천해의 흉언, 무신년의 난은 모두 30년의 세월을

넘어 영조 31년 신치운의 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신치운의

흉언이란 바로 ‘갑진년 이후 게장을 먹지 않는다.’였다.21)

신치운의 흉언 역시 나주벽서 혹은 나주괘서라 불리는 사

건과 연계되어 있는데22), 본 사건 역시 경종독살설을 표면

화시킨 사건이었다.

20) 󰡔영조실록󰡕 영조 1년 1월 17일 5번째 기사

21) 󰡔영조실록󰡕 영조 31년 5월 20일 2번째 기사

22) 이상각. 앞의 책. 445

때는 영조 31년, 나주에 영조와 그의

정치에 대해 비난하는 글이 실렸다. 결국 역모자들은 모두

처벌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토역정시(역모자들의 토벌을 기

념하여 보는 과거시험)까지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때 예상

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而其下數幅, 作蠅頭字, 無非亂言悖說.

그 아래 몇 폭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

는데 모두 난언 패설이었다.

󰡔영조실록󰡕 영조 31년 5월 2일

심정연이라는 자가 자신의 답안에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토역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상황이

었다. 결국 심정연은 처벌되었고, 며칠 뒤 그 배후에 신치

운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를 공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때 신치운은 순순히 자복하면서 말한다. 신정연의 흉서는

자신이 시킨 일이며, 자신은 신하된 마음으로 게장을 먹지

않는다고 말이다. 영조가 즉위한지 30년도 넘은 해였다. 여

전히 선왕의 죽음과 게장, 그리고 영조 사이의 끈은 끊어지

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종독살설의 시작과 유포된 과정을 살펴보았

다. 본 가설은 심유현과 뜻을 같이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그들이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명제를

제시하던 배경에는 여러 차례 독살설과 얽혀있던 경종의 삶,

그리고 영조와 경종을 두고 벌어진 정치공방 등이 존재했다.

그들은 경종의 죽음이 영조때문이고 독살이라는 방법으로

선왕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들이 제시한 본 가설

은 당대에 정치적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강경소론파의 행동

에 의해서 여러 차례 역사에 등장하였으며, 특히 영조 4년

반란이라는 형태로 큰 파장을 일으켜 크게 이슈화되었다.

2. 경종의 독살 과정

영조는 즉위 초부터 30년 이상 독살설의 굴레에 묶여있

었다. 경종이 독살 당했으리라 의심되는 여러 상황들, 목격

자의 증언, 목숨까지 걸고 이를 표면화시킨 사람들까지 영

조를 괴롭혔던 본 가설이 허무맹랑한 한두 마디에서 비롯

되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이제는 본 사건의 진위여부에 대

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과연 경종이 독살 당했는가? 이 질

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바로

사건의 재구성이다.

당시를 돌아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는 왕실의 정식

사료들이다. 다행히 이 당시의 왕실 기록들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특히 당대를 살았던 사서들의 입장

과 견해가 들어있는 조선왕조실록, 일어났던 사건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해둔 승정원일기는 왕실을 바라보는 두 개

의 눈처럼 작용하였다. 여기서는 두 사료를 시간 순에 맞추

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통해 사건들의 선후관계를

조금 더 명확히 하였다.

1) 발단 : 게장과 감

1724년 7월 20일 경종은 감기증상을 보인다.23) 이때까

지만 해도 경종의 병은 평범한 감기 증상이었다. 세자시절

앓았던 학질(瘧疾)이나 두창(痘瘡)처럼 심각한 증세도 아

니었으나,24)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이 병이 8월 중

순을 넘어 한 달이 되었건만 지독히도 낫지 않았다는 점이

었다. 주요 증상은 수라염진(水刺厭進, 식사를 꺼리는 것),

침수불편(寢睡不便, 잠을 잘 못잠), 두부미동(頭部微疼, 머

리의 은근한 동통) 등이었으며, 수시로 한축(寒縮, 추워서

몸을 움추림), 번열(煩熱, 열이나고 답답함), 오심과 같은

증세들도 나타났다.

차도가 있다 없다를 반복하던 중, 8월 중순부터 작게나마

호전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25) 8월 20일 오전, 약방은

평소와 동일하게 왕의 안부를 여쭙는다. 약방에서는 경종에

게 차도가 있는지 물었으며, 왕은 몇몇 증세들이 좋아졌으

며 입진(임금을 진찰하러 들어감)하지는 말라고 한다.26)

이렇게 8월 중순 이후로 호전된 상태를 유지하거나 조금씩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27)

그러던 8월 20일 밤 깊은 시각, 임금에게 흉격불안(胸膈

不安)의 증세가 나타났다. 약방에서는 급히 동변(童便)과

소합원(蘇合元)을 드린다. 이어서 강차(薑茶)와 두시차(豆

豉茶)를 내온다. 이후 호전된 증세가 보임을 확인하고서야

이날의 급작스런 상황은 마무리 되는데,28) 실록에서는 당

시 경종의 증세를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팠다(胸腸絞痛)

라고 표현하였다.29)

이튿날인 21일 파루시(罷漏時), 즉 새벽 4시경에 왕이

계속해서 설사(水泄不止)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穀味全無所進) 인삼속미음을 제

공한다. 약방의 정식 문안인사를 통해 입진허가를 받은 신

하들은 사시(오전 9시~11시)에 입진한다. 입진 내용에는

전날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번 증세에 대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증상들과는 달리 전날 먹은 게장과 감

이 그 이유라고 하였다.30)

20일 기록에서 오전 중에는 별 문제가 없었고, 증세가

밤부터 익일 새벽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아 게장과 감은 저

녁 즈음에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약방에서는 본 증세

가 음식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고 생각하여 곽향정기산을

처방한다. 저녁문안을 한 기록도 있기는 하나 증세와 관련

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31)

23) ‘自上有微感之候, 自三昨, 水刺厭進, 寢睡不平, 頭部微疼云.’ (󰡔승정원일기󰡕 경종 4년 7월 20일)

24) 김동율, 김태우, 차웅석. 「경종의 병력에 대한 연구1」. 한국의사학회지. 2012 ; 25(1) : 11-22.

25) ‘寒熱・煩惱・口淡・惡心之候, 水刺厭進, 差勝, 微疼之候少減’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13일)

26) ‘聖體調攝, 若何?…寢睡安穩, 勿爲入診.’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0일)

27) ‘聖候諸症少減’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15일), ‘寒熱・煩惱・口淡之候少減, 惡心, 水刺厭進, 頭部微疼之候, 益減後一樣‘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18일), ‘寒熱・煩惱・口淡・惡心之候差減, 水刺厭進, 頭部微疼之候, 益減後一樣’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0일) 등

28) ‘聖候有胸膈不安之候’, ‘童便一升, 薑汁少許, 蘇合元七丸, 卽爲封入’, ‘薑茶湯入之事, 下敎, 故封入, 而豆豉茶, 亦宜於卽今症候, 差備醫官在外時’,

‘旣有膈間稍爲開利之敎…諸醫等以爲, 更觀曉來症候, 議藥.’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0일)

29) ‘上胸腹絞痛, 招醫官入診’ (󰡔경종실록󰡕 경종 4년 8월 20일)

30) ‘罷漏時, 藥房詣閤門外, 口傳啓曰, 卽今聖候, 水泄不止, 而穀味全無所進, 此最切悶…人蔘三錢重, 粟米飮進御.’, ‘巳時, 上御環翠亭. 藥房入診入侍

時… 昨夜詳問醫官, 則蟹醬及杮, 竝爲喫了, 則腹痛大瀉云.’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1일)

31) ‘卽今症候, 猶有挾食餘氣, 藿香正氣散元方, 白朮代蒼朮, 更加便香附七分, 麥芽炒五分, 連進二貼, 宜當云’, ‘藥房夕問安時’(󰡔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1일)

2) 계속되는 설사와 혼곤(昏困)

약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증세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8월 22일 사시(오전 9시~11시)에 약방에서 입시하는데 아

직까지는 왕이 약방의 질문에 직접 대답한다. 약방에서는

계속되는 설사를 가장 큰 문제로 보았으며, 이에 처방을 곽

향정기산에서 황금탕으로 바꾼다. 그 외에도 감두탕이나 옅

은 쌀죽을 드려 어떻게든 설사를 멎게 하고 빠져나간 곡기

를 채우고자 한다.32)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 증상은 여전했다. 도리어 23일부

터는 정신의 혼미해지는 증세까지 더해졌다. 약방에서는 기

존에 드리던 탕약을 정지하고 재차 처방을 논의하기로 한다.

32) ‘伏未審夜來, 聖體調攝, 若何?…答曰, 知道。諸症候與昨一樣.’, ‘則皆以爲卽今泄候最悶, 藿香正氣散, 今姑停進, 黃芩湯, 加防風一錢, 連進三貼, 宜

當云’, ‘上以手指, 點來沾口, 仍爲進御甘豆湯少許’, ‘卽今臣等所見處, 進御粥飮, 若何?’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2일)

다만 속미음만은 계속해서 드린다. 그리고 이날 도제조

이광좌는 왕에게 삼차를 진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인삼차가 지갈보중기(止渴補中氣, 갈증을 멎게 하고 중

기를 더해줌)하는 효능이 있으니 현재 왕의 증상에 적합하

다고 하였다. 왕이 삼차를 먹는 모습을 본 수의(首醫) 권성

징은 약효를 보기에는 한번 드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재차 드시기를 권한다.33)

33) ‘昏沈之氣有之乎? 上曰, 有之矣’, ‘全廢水刺, 今至積日, 而泄候又爲頻數, 此最悶慮。粟米飮旣已再次煎入, 有難兼進湯劑黃芩湯, 今姑停進’, ‘光佐曰,

症候如此之時, 蔘茶進御, 則止渴補中氣, 故一兩重茶煎來矣, 進御伏望’, ‘聖微診察後曰…一番蔘茶, 猶不足, 更進, 似好矣。上曰, 持茶來.’, ‘光佐曰,

粟米飮, 又爲待令矣.’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3일)

3) 승하 임박

다음날인 24일 묘시(오전 5시~7시)가 되어 약방에서 문

안한다. 삼차를 드신 후 증세의 변화를 물었는데 왕이 직접

대답하지 못하고 다른 이가 대신 전한다. 왕은 여전히 혼곤

한 상태였다.34) 사시(오전 9시~11시)가 되었고 환취정에

계신 왕에게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왕의 음성은 미약해지고

식사는커녕 대변을 가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35) 이때

에 의관들이 왕의 처방을 논하는데 이공윤이 지금까지 먹

였던 인삼차 말고 계지마황탕을 사용하면 설사를 멎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계지마황탕을 올려 복용케 하였다.36)

해가질 무렵 약방에서 입진코자 하였으나 거절당한다.37)

그리고 유시(오후 5시~7시)가 되어서야 임금의 증세가 중

해져 약방에서 급히 입진한다.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

리는 가운데 세제가 울면서 삼부(蔘附)를 쓰라고 명령한다.

이에 도제조가 급히 삼부를 준비시킨다. 그리고 미리 준비

되어 있던 인삼차를 제공한다. 왕이 조금 마시자 의관 차석

인 방진기가 인삼차를 더 복용해야 한다고 말한다.38)

곧이어 경종이 삼차를 한 그릇 더 복용하고, 이공윤이 진

찰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이공윤이 삼차를 사용을 반대한

다. 이에 세제는 나설 자리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나선

다면서 이공윤을 크게 꾸짖는다.39)

잠시 후 왕의 증세가 조금 나아진다. 임금의 콧등에 온기

가 생기자 의관들은 이를 회복의 증조로 보고 이어서 다시

삼부차를 대령하였다.40) 그러나 더 이상의 호전은 없었다.

세제는 침을 사용하는 방도에 대해 의관들에게 물었으나

쓰지 않아야 한다는 대답만을 들었다. 얼마 후 왕을 진찰한

의관들이 한결같이 왕의 맥이 끊겼다고 말하였다.41)

34) ‘卯時, 藥房口傳啓曰, 蔘茶進御後, 氣候更若何?…傳曰, 茶飮進御後, 昏困乍睡.’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35) ‘巳時, 上御環翠亭。藥房入診入侍時…玉音乍不分明…上放下大便…’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36) ‘巳刻復入診…若進桂枝麻黃湯二貼, 泄瀉可立止. 遂煎入進服.’ (󰡔경종실록󰡕 경종 4년 8월 24일)

37) ‘閉門時, 藥房口傳啓曰, 伏聞有醫官入診之命, 臣等亦爲入侍, 詳察夕間氣候之意, 惶恐敢啓。傳曰, 勿爲入診’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38) ‘酉時, 差備醫官入診, 上候諸症, 比午間猝重, …都提調以下, 蒼黃疾趨, 未到環翠亭, 已聞布帳內, 有飮泣聲…東宮涕泣下令曰, 急用蔘附, 急用蔘附.

光佐顧謂肇, 急持蔘附, 來煎于戶外…又下令曰, 議藥攜貳, 至於此境, 此後則斷勿撓屈於他議, 專用蔘附, 以爲回陽聖躬之地…持午間所煎人蔘二兩重

茶入侍矣…進服少許…震夔診察上兩顴骨及鼻梁, 退伏曰, 宜更用蔘茶.’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39) ‘上曰, 唯. 都提調耶? 玉音未了圓, 親自仰首, 盡服一器. 卽銀中碗. 光佐曰, 請使李公胤診察. 公胤入謂光佐曰, 毋多用蔘茶, 吾藥進御後, 又用蔘劑,

則氣運通旋之道易塞矣下令曰, 此何等時耶? 謂之不宜用蔘劑乎? 人固有立己見處耳, 君父病患, 何等重大, 而必欲立己見, 使不得用蔘劑, 桂枝麻黃湯,

此公胤所勸用之藥 若無效, 將若之何?’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40) ‘今則少似愈. …又下令曰, 予不解醫理, 尙知蔘附, 力能回陽, 昨日用蔘, 今日旋停, 心甚爲鬱矣. 想必以公胤之言, 持難而不用矣. 光佐曰, 豈獨以公胤

之言爲難乎? 莫非臣等老迷之致矣. …鼻梁似有溫氣…上候少似鎭定…下令曰, 急用蔘附, 提調自戶外, 持蔘附茶入來.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41) ‘東宮涕泣曰, 診察上躬, 停進藥物, 何如?…令曰, 到此地頭, 亦可下鍼耶? 醫官曰, 兩頰俱寒, 手足皆冷, 今雖下鍼, 但傷玉體, 已無及矣. …聖徵曰, 脈

候已無, 玉體無溫處矣. 震夔曰, 脈候絶矣, 四體冷矣.’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4) 경종 승하

24일 밤, 고비는 순조롭지 않았다. 결국 25일 새벽 3시경

이 되자 창경국 환취정에서 경종의 승하 소식이 들렸다.42)

이렇게 조선의 20번째 왕 경종의 시대는 끝이 났다. 30년

간의 세자생활, 그에 비해 너무도 짧은 4년간의 재위기간이

었다. 자식도 없었던 경종은 자신의 이복동생 영조를 세제

로 세웠으며, 결국 그의 죽음 며칠 뒤 세제는 조선의 21번

째 왕으로 등극하였다. 아래 지금까지의 과정을 경종의 주

요 증상을 중심으로 소략하였다

42) ‘上在昌慶宮環翠亭, 昇遐’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5일)

3. 경종을 죽인 ‘무엇’

이제 본격적으로 경종의 사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앞서 살펴본 그의 죽

음으로 향하는 과정은 사인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관

점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의 죽음이 단 5일간의 과정을 통

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갑작스러운 죽음, 갑

작스러운 몸의 변화를 일으킨 ‘어떤 변수’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작용한 변수

가 실제로 그가 앓고 있던 질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며 이는 두 가지 관점,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동시에 시사한다.

1) 갑작스러운 변화

(1) 변수 추적

경종은 8월 25일 새벽 3시에 승하하였다. 왕실에서 극도

로 아픈 왕을 대하는 상황을 추정해 보건데, 그가 외상이나

정신적 공격 등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즉 그의 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만한 요소는 그가 먹은 음식, 그가 복

용한 약, 그날의 기후 등으로 보인다. 왕실기록에도 그가 음

식과 약 이외에 별도로 몸에 영향을 줄만한 요소와 마주하

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죽음을 직접적으로 일으

켰을만한 요소는 그가 먹은 것들과 무관하기 힘들어 보인다.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 또 다른 근거는 그가 죽기 전

에 일으켰던 몸의 반응이다. 그는 한 달이 넘도록 식사를

꺼리는 증세를 겪어왔으며, 죽기 5일전부터 일으켰던 반응

역시 끊임없는 설사로 모두 소화기와 관련된 증상들이다.

피를 토한다거나 상처가 곪은 것도 아니고 엄청난 고열에

시달린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음식과 관련된 요인이 경종

을 괴롭게 만든 주요 변수로 보인다.

그가 죽음에 도달할 무렵 먹었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은

속미음이다.43) 주로 인삼과 함께 끓여졌는데 좁쌀로 만들

어진 이 음식은 곡기를 받아드리기 힘든 상태의 환자에게

곡기를 넣어주기 위해 사용된 음식이다. 왕실에서는 꽤 다

용된 식치 처방인데, 특히 누군가가 오래 아팠거나 몸 상태

를 좋지 않을 때는 어김없이 인삼속미음을 사용하였다.44)

본 식치 처방이 죽음에 다다른 사람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

해 연구된 바는 없으나 그간 왕실에서의 사용례나 인삼속

미음과 관련된 의학 기록들을 고려해보면 이로 인해 경종

이 죽음에 한 발 더 다가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고려해볼만한 대상은 24일에 복용한 삼부차이

다. 삼부차가 고려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경종독살설의

제1 용의자 영조가 추천한 처방이었으며, 동시에 부자가 독

성을 가지고 있는 약재이기 때문이다. 우선 부자의 독성에

대해서 살펴보면, 󰡔동의보감󰡕을 비롯한 여러 의서에서 부자

가 대독(大毒)하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부자를 사용할 때는

포제를 해서 그 독성을 줄인 다음 사용하도록 했는데, 동의

보감에 나온 삼부탕 역시 포제를 한 부자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부자가 인삼과 함께 사용되면 그 독이 제어된다는 기

록이 있어45), 당시 사용하였던 삼부차 역시 독성은 상당부

분 제어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당시 삼부차에 있을만한 부자의 독성은 대독한

약재가 보일만큼 강한 독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경종은 혼곤하고 거의 죽음과 직면한 상태였기 때문에 작

은 독성이라도 그의 몸에서는 크게 반응했을 수 있다. 그러

나 그의 몸이 삼부차를 먹고 나서 일으킨 반응을 살펴보면,

콧등에 온기가 돌아오고 코피가 약간 보이는 게 전부이

다.46) 이런 반응들은 독을 먹고 그 독으로 인해 생사의 변

수가 생긴 환자의 반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도리어 당시

의관들은 이러한 몸의 반응을 긍정적인 반응으로 해석했

다.47) 삼부차가 정말 그의 사인으로 작용했다면 좀 더 악

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죽음을 일으킨 원인물질은 그 자체가 독성을 가지

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이를 전후로 해서 몸에 어떤 변화,

특히 몸이 악화되는 변화가 나타나야 죽음의 원인물질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고민해

볼만한 요소는 그의 몸 상태의 변화이다.

43) ‘人蔘三錢重, 粟米飮進御’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1일), ‘煎入粟米飮’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3일), ‘煎入粟米飮’ (󰡔승정원일기󰡕 경

종 4년 8월 24일) 등

44) 人蔘粟米飮은 󰡔승정원일기󰡕에만 약 1300번 가량 등장하며,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을 돌보는데 사용되었다.

45) ‘有大毒…凡用須炮令裂, 去皮臍使之…甘草, 人參, 生薑相配, 正制其毒也.’ (󰡔동의보감󰡕 「탕액편・초부(하)」 부자) ‘治陽虛自汗. 人參五錢, 附子炮一

兩. 右剉, 作三貼, 薑三片, 水煎服.’ (󰡔동의보감󰡕 「내경편・진액문」 삼부탕)

46) ‘鼻梁似有溫氣…上鼻孔衂血少現’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47) ‘光佐曰, 公胤言, 桂枝湯進御後, 衂血必出, 而仍愈云矣. …上候少似鎭定, 故光佐少退戶外, 與諸醫議藥’(󰡔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그가 죽기 전 가 장 마지막에 보인 증세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세를 일으킨 요소로 가장 의심이 되는 것은 그가

3일 전부터 끊임없이 설사를 했다는 사실이다. 물 같은 설

사를 계속 했다는 것은 인체 내부의 진액이 계속해서 빠져

나갔음을 의미하며 영양분과 수분이 모자란 상태에서 인간

이 혼곤한 상태에 빠지는 것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몸의 반

응이다.

그가 설사를 시작하고 수분과 영양소의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혼곤한 상태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당시 의관들도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그들 역시 계

속해서 미음과 차를 제공하여 어떻게든 이러한 문제를 해

결하려고 하였다.48) 그러나 먹는 것들을 흡수하지 못한 채

모두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경종의 병증 상태가 문제였다. 즉

설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몸을 회복시킬 수 없었던 상황이

며, 반대로 설사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장 중요한 병

리기전이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설사라는 본 병증이 경종의 사인과 가장 밀접하

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설사를 일으킨 원인물질은 8월

21일 그가 설사를 하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역으로 추적

해보면 알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그가 설사를 시작한 시

기는 20일 늦은 밤부터 21일 새벽 사이이다. 무언가가 그

보다 조금 전에 그의 몸에 흡수된 것이다. 그런데 경종은

지난 7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먹은 음식이 거의 없다

가 8월 20일에서야 갑자기 음식을 먹는다. 기사에 따르면

왕이 계속 식사를 하지 않아 다들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이날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49) 즉 그가 8월

20일에서야 무언가를 먹었으며, 결국 이 때 먹은 것이 그의

설사병을 야기 시킨 원인물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경종이 이날 먹은 음식 전체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

다. 왕의 밥상은 그 성격상 여러 가지 반찬들이 함께 올라

왔을 것인데, 그 중 유일하게 기록된 것은 게장과 감이었

다. 게장과 감에 대한 언급은 경종이 설사를 심하게 하자

의관들이 했던 이야기 중에서 등장하는데 이 두 음식이 서

로 상극이라 함께 복용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말을 한다.50)

실제로 이 둘의 조합이 설사를 일으킨다는 의서의 기록도

있으며51), 조합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게와 감은 모두 차

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52) 설사라는 증상에 직접

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결국, 경종의 죽음과 관련되어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요

인은 8월 20일 그가 먹은 식사에 있을 것이며 당시 의관들

의 의견이나 의서의 기록들을 근거로 본다면 식사에 올라

왔던 반찬 중에서도 게장과 감이 그의 결정적 증세를 일으

키는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음식으로 인한

설사로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다. 경종이 정말 소급수

의 방법으로 시해된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

아있기 때문이다.

48) 설사를 한 이래로 粟米飮을 비롯하여 人蔘茶, 豆豉茶, 薑茶등을 사용하였다.

49) 이종호. 󰡔영조를 만든 경종의 그늘󰡕. 파주 : 글항아리. 2009 : 212

50) ‘進蟹醬, 繼進生柿, 是醫家所忌.’ (󰡔경종실록󰡕 경종 4년 8월 20일)

51) ‘不可與蟹同食, 令腹痛, 吐瀉.’ (󰡔동의보감󰡕 「탕액편・과부」 홍시), ‘凡柿同蟹食, 令人腹痛作瀉’ 二物俱寒也.‘ (󰡔本草綱目󰡕 「果部」 第三十卷 柿)

52) ‘性寒一云冷’ (󰡔동의보감󰡕 「탕액편・과부」 홍시), ‘性寒一云涼’ (󰡔동의보감󰡕 「탕액편・충부」 해(蟹))

(2) 독사용의 여부

8월 20일 게장과 감이 포함된 식사를 했다. 그런데 그날

먹은 식사에 누군가가 독을 첨가하였다. 이를 모르고 식사

를 한 왕이 결국 중독증세로 인해 사망하였다. 경종이 독살

당했다면 이런 과정으로 독살될 확률이 높다. 실제로 조선

시대 왕실에서는 중한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독약을

사용하였다. 이때 사용된 가장 대표적인 물질은 비상인데,

경종 즉위년에 황수를 토한 사건에 대한 대책으로 경종에

게 흑두를 먹이면서 언급된 대표적인 독약 역시 비상이었

다.53) 그 외에도 경종과 가까운 왕인 숙종, 영조의 집권시

기에도 독살과 관련된 기사가 등장하는데 이때도 어김없이

비상이 나온다.54)

동의보감에서도 약재 비상은 독성이 강하므로 조심히 사

용토록 권고하였다.55) 비상의 주요성분은 비소인데 비소가

몸에 흡수되면 구역, 구토를 시작으로 수양성 설사, 복통을

비롯하여 출혈, 폐부종 등 다양한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56)

이중 수양성 설사는 경종이 일으킨 증세와 동일하다. 의심

스러운 점은 허약한 상태의 경종이 이 비상을 먹은 것 치고

는 5일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을 버텼다는 점인데, 이는 음독

한 양이 적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53) ‘時聖曰, 醫書云, 黑豆炒, 爲茶長服, 則能解砒礵及百草毒云.’ (󰡔승정원일기󰡕 경종 2년 8월 18일)

54) ‘以其毒藥, 指爲砒礵, 或稱如橡子’ (󰡔승정원일기󰡕 숙종 32년 4월 18일), ‘欲以砒礵毒殺滅口’ (󰡔영조실록󰡕 영조 4년 5월 13일)

55) ‘然有大毒, 不可輕服’ (󰡔동의보감󰡕 「탕액편・석부」 비상)

56) 위형수, 이승희, 서영환, 김정구, 김기창, 장창수, 노형근. 「비소 급성 중독으로 인한 사망 1예」. 대한내과학회지. 2005 ; 69(1) : 103-104.

비상이 가장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독약의 종류를 여기에

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만약 경종의 몸 상태를 알고 있다

면 비상까지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경종을 괴롭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하를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약재들, 대표적으로 파두 같은 약재만 하더라도 한 달간 식

사를 하지 않은 경종의 몸에는 지속적인 설사를 일으킬 수

도 있다.57) 결국 당시에 설사를 일으킬만한 독약은 충분히

존재했을 것이다.

57) ‘最能瀉人’ (󰡔동의보감󰡕 「탕액편・목부」 파두)

이처럼 경종의 설사증상이 게장과 감에 의한 것이냐 비

상과 같은 독약에 의한 것이냐는 경종의 증세만을 가지고

분석하기 힘들다. 분명 두 가지 모두 당시의 경종에게 설사

를 야기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조금

다른 측면, 특히 사건이 일어난 정황을 통해 독의 사용여부

를 분석해보았다. 일단 누군가가 독살을 계획한다고 생각해

보자. 독을 사용한다는 것은 목적이 분명하다. 독을 먹은

사람을 죽음이나 그에 엇비슷한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생긴다. 본 계획

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독살의 예비 피해자가 반드시 독을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독을 먹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독살인 셈이다. 그런데 경종은 수라염진이라는

증후로 약 한 달간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로도

식사를 할 가능성보다는 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렇다면 음식물에 독을 넣어서 죽이는 방법이 과연 그를

죽이기에 합당한 방법이었을까? 혹 발각되었을 때 발생할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면서까지 말이다.

독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는 이유는 경종을 죽게

만든 요소가 게장과 감이냐 독이냐 하는 것이 큰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독은 반드시 당사자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다. 반면 게장과 감이라면 두 가지 경우가 다

가능하다. 경종을 해치기 위해 몸에 맞지 않는 차가운 성질

의 반찬을 내놓았을 수도 있고, 그런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냥 내놓은 음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조는 󰡔천

의소감(闡義昭鑑)󰡕에 당시 내놓은 게장과 감이 가을철의

별미여서 올라왔을 뿐이라고 말한다.58)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말로도 볼 수 있으나, 게장과 감이 가을철 별미임이

특별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니 당시 반찬으로 우연히 게

장과 감이 올라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경종의 몸에 급작스런 변화를 일으킨 무엇, 그 무엇이 8

월 20일 식사, 추정컨대 그날의 저녁식사에 있었음은 분명

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게장과 감을 비롯한 음식이 있었다.

음식물에 독이 들어갈 가능성도 있으나, 그러기엔 경종의

음독 확률이 낮아 보인다. 도리어 경종의 소화기관이 안 좋

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먹을 거라는 신념으로 차가운 음식

을 계속 내놓은 것이 더 안전한 공격방법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결국 경종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간 그 무엇은

그날의 저녁메뉴에 있었으며, 그 안에는 게장과 감이 있었

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2) 지속적인 문제

경종은 재위 이후 급격한 건강상의 변화를 겪는다. 즉위

이전 몇몇 유행성 질환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이겨나갔으며

또 平穩한 기간이 길었던 반면, 즉위 이후 경종은 虛證으로

인한 여러 만성 질환에 시달렸다.59) 이렇게 된 데에는 세자

로 지내는 30년은 물론이거니와 왕이 되기 3년 전부터 시작

된 대리청정 기간, 왕이 된 이후 신임사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를 적대시하는 노론세력과 끊임없이 싸워야했던 상황적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0)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경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 건강과 관련하여 그리 좋은 상태

를 유지하지는 못했다는 점만큼은 약방기사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그러던 1724년 7월 경종이 아프게 되는데,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증세는 식사를 못하는 것이었다.61) 그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된 것은 그해 7월 17일부터이다.

기사에 따르면 경종은 7월 20일 3일 전부터 있었던 수라염

진, 침수불편, 두부미동 등의 증세를 치료받는다. 이날 의관

들이 권한 처방은 가감량격산으로 六經의 熱, 특히 상초 열

을 물리치는 처방이었다. 당시 경종의 맥상이 홍, 부, 삭하

고 寒縮없이 머리의 통증과 입맛의 변화만 있다는 점 등이

처방의 근거였다.62)

58) ‘甲辰八月景廟違豫時水刺厭進之候漸加宮中閔迫二十日御厨於水刺供蟹醬卽秋節新味故景廟以此多進水刺伊時宮中皆歡喜’ (󰡔闡義昭鑑󰡕券之二)

59) 김동율, 김태우, 차웅석. 「경종의 병력에 대한 연구1」. 한국의사학회지. 2012 ; 25(1) : 11-22.

60) 김동율, 김남일, 차웅석. 「󰡔승정원일기󰡕의안을 통해 살펴본 경종의 기질에 대한 이해」. 한국의사학회지. 2013 ; 26(1) : 41-53.

61) ‘水刺全不進御, 幾過三十日’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0일), 경종 4년 7월 말부터 8월까지 계속해서 식사를 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논의

하는 모습이 보인다.

62) ‘聖徵曰, 脈候左三符數, 而右三符有力如昨, 左右稍帶洪數矣…’, ‘加減涼膈散, 加黃連酒炒一錢, 最宜於卽今聖候’ (󰡔승정원일기󰡕 경종 4년 7월 20일)

그러나 가감량격산을 복용하고 수 일이 지났음에도 경종

은 낫질 않았다. 이에 의관들은 재차 진료를 시행하여 청서

육화탕, 사군자탕에 산치자와 축사인을 가한 처방 등으로

처방을 바꾼다. 두 처방은 모두 暑, 暑濕을 치료하는 처방

으로 공통적으로 暑邪에 대한 인식이 담겨있다.63) 맥상이

초기 가감양격산을 처방했던 때보다 沈해졌으며, 무엇보다

도 수면문제도 해결되고 머리 아픈 증상도 조금은 감소했

는데 식사는 계속 꺼리고 있었기에 이 부분에 조금 더 집

중한 것으로 보인다.64)

이후 한열의 증세가 나타났다. 이에 시진탕을 처방하였다

가 한축하던 증상이 사라지자 승양산화탕을 권하였다.65)

이는 울결된 열을 해소하는 처방이었다.66) 이후로 몸에 나

타나던 훈증하는 열을 문제로 생각하여 진사익원산, 시령탕

을 처방하였다.67) 이후 열의 증세는 조금씩 호전되었으나

수라염진만큼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되었다. 결

국 8월 9일부터는 수라염진과 두부미동 외에도 寒熱, 煩惱,

口淡, 惡心 등이 더해졌고68) 8월 19일이 되자 의관들은 왕

이 困臥하지 않은지를 걱정하는 상황까지 도달한다.69)

경종의 증상에 대해 의관들이 생각한 병인은 주로 暑, 暑

濕, 熏熱 등이었다. 그리고 경종이 재위 이후 여러 차례 앓

아왔던 증상이나 복용한 처방에도 이러한 병리가 보인다.

같은 해 5월에는 汗毒에 대한 치료로 滑石末을 사용하였으

며, 이때도 빠지지 않고 水刺無減한지를 물었다.70) 직전해

6월에도 汗疹이 발생하여 고생하였으며71), 그해 5월에 사

용한 加味調中湯의 목표역시 降火消痰이었다.72) 박태초는

경종의 몸상태를 아예 上焦有熱, 下焦有濕73)이라 하였다.

경종이 원래 肥濕한 체형74)이었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그가 暑邪에 쉽게 상하고, 지속적으로 濕熱의 병리를 가지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경종이 죽기 한 달 전부터 앓아왔던 질병에 대해

살펴보면, 서사에 취약한 왕이 그해 여름철 서사를 만나 내

상을 입고 한 달간 곡기를 섭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고 볼 수 있다. 즉위 1년 5월(음력이므로 한여름), 3년 5월,

4년 5월까지 즉위한 이후 단 한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여름

마다 한 달 이상씩 질환이 있었던 것은 그가 여름철 사기

에 취약함을 보여주며, 경종 4년 7월이 가을임에도 불구하

고 여름 못지않게 더웠다는 점75) 역시 이를 뒷받침 한다.

여기까지 경종을 죽인 그 무엇에 대해 추적해보았다.

종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힌 물질은 게장과 감으로 보인

다. 그날의 음식에 독성 물질을 넣었을 수도 있으나 확률은

조금 낮다고 본다. 한편, 당시 경종의 몸 상태역시 좋지 않

았다. 즉위 이후 서사에 취약한 면모를 자주 보였던 경종은

그해 여름에도 어김없이 서사로 인해 고통 받았으며, 특히

식사를 꺼리는 증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한 달이 되도

록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결국 게장을 먹기 직전

인 8월 19일에는 의관들이 경종의 체력을 걱정해야 할 상

황76)까지 도달하였다.

한 달간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경종이 게장이 나온 그날,

식사를 한 사실은 상당히 의외다. 속열이 있는데다가 항시

따뜻한 미음과 차만 조금씩 먹었던 경종이었기에 간이 진

하고 차가운 성질의 이 음식들이 더욱 끌렸던건 아니가 싶

다. 특히나 매년 여름마다 서습으로 고생한 측면에서 생각

해본다면 가을에 나오는 별미란 경종에게 오랫동안 사그라

든 입맛을 한 번에 돋구어 주었던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63) ‘水刺厭進之候, 累日未減, 此是暑濕所傷, 淸暑六和湯三貼’, ‘則皆以爲水刺厭進之候, 出於暑濕所傷, 四君子湯, 加山桅・薑汁炒一錢, 縮砂炒硏五分,

連進三貼’ (󰡔승정원일기󰡕 경종 4년 7월 25일, 28일)

64) ‘坫曰, 左脈, 如昨沈靜, 右脈, 亦如昨… 水刺厭進, 最甚可悶’, (󰡔승정원일기󰡕 경종 4년 7월 25일)

65) ‘則皆以爲柴陳湯, 加白豆蔲炒硏五分, 連進三貼, 宜當云’, ‘則皆以爲升陽散火湯, 連進三貼, 宜當云’, ‘柴胡白虎湯, 初入粳米百粒矣’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일, 4일)

66) ‘治火鬱, 及五心煩熱.’ (󰡔동의보감󰡕 「잡병편・화문」 승양산화탕)

67) ‘而辰砂益元散, 溫蜜水, 間間調進, 宜當云’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13일), ‘柴苓湯元方, 去桂心, 加山栀薑汁炒・白芍藥炒各一錢, 黃連薑汁炒

七分, 連進三貼, 宜當云’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16일) ‘治傷寒熱不退’(󰡔동의보감󰡕 「잡병편・한문」 진사익원산), ‘治傷寒熱病’(󰡔동의보감󰡕 「잡

병편・한문」 시령탕)

68) ‘而寒熱・煩惱・口淡・惡心之候, 有差減之效’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9일)

69) ‘光佐曰, 數日內, 或有困臥之時乎?…光佐曰, 卽今殿坐已久, 久坐不難乎?’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19일)

70) ‘夏炎如此, 豈無汗毒乎? 前頭善爲調攝之意, 敢達。滑石末塗付, 似好矣. 肇曰, 退出後, 滑石末, 當劑進矣’ (󰡔승정원일기󰡕 경종 4년 5월 14일)

71) ‘玉體使醫官診察, 若有汗沴[疹]’ (󰡔승정원일기󰡕 경종 3년 6월 26일)

72) ‘則以爲卽今所進加味調中湯, 貼數雖多, 不無降火消痰之效’ (󰡔승정원일기󰡕 경종 3년 5월 2일)

73) ‘濕則熾盛, 上焦有熱, 下焦有濕矣.’ (󰡔승정원일기󰡕 경종 3년 5월 12일)

74) 김동율, 김태우, 차웅석. 「경종의 병력에 대한 연구1」. 한국의사학회지. 2012 ; 25(1) : 11-22.

75) ‘昨今秋暑, 無異盛夏, 當午則極難堪’ (󰡔승정원일기󰡕 경종 4년 7월 23일)

76) ‘始慮上候虛憊也’ (󰡔경종실록󰡕 경종 4년 8월 19일)

다만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 경종의 몸이 전과는 사 뭇 달랐다는 점이다.

증상은 잘 잡히지 않았고 그전과는 달리 완전히 식사를 못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는 경종이 조금이라는 식사를 하길 바라던 신하들의 모습에서도 확인된

다.77)

77) ‘光佐曰, 臣等方爲入侍矣, 此時水刺進御, 則喜幸何可言?’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7일), ‘親見水刺進御, 雖不多進, 臣等退而相喜’ (󰡔승정월일

기󰡕 경종 4년 8월 11일)

결과적으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본

다면 경종을 죽인 무엇에 대한 논의는 ‘아픈 왕의 부적절한

식사’로 보인다. 그 식사에서 화두가 된 음식은 게장과 감

인데 차가운 성질의 두 음식이 한 달 간 식사를 못한 경종

에게 독약처럼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그

에게 꼭 독을 사용했어야 하는가? 확실한 죽음을 위해서는

독을 사용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이미 경종의 몸은 차가운

음식에 대한 면역력은 없어 보인다. 정말 경종을 죽이고 싶

었다면 먹을지도 알 수 없는, 아니 먹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은 음식에 독을 타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게장과

감을 내놓아 식사를 부추겼다고 보는 것이 보다 훨씬 자연

스럽게 그를 죽이는 방법이지 않았을까?

4. 경종을 죽인 ‘누구’

경종독살설은 자못 경종이 ‘독살’ 당하지 않았는가라는

소위 죽음의 방법에 대해 질문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경종독살설이 더욱 의미를 가졌던 것은 그가

독에 의해 죽었느냐 다른 도구에 의해 죽었느냐가 아니었

다. 경종이 타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독살이라는 구

체적인 옷을 입힌 것일 뿐이지 실제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경종을 죽였느냐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경종을 죽였는가? 경종이 죽고 300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이 질문에 단 한 차례도 다른 인물이 거론된 적이 없다. 오

직 조선의 21번째 왕이자 경종의 이복동생, 영조만이 용의

자로 지목되었을 뿐이다.

1) 영조와 게장

영조는 즉위 이후, 황형에 대한 타살의혹 때문에 여러 차

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반란군의 주장에 직접적으

로 분노를 표출한 경우도 있었고, 게장이 올라간 그날의 상

황을 직접 설명한 경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경종사후

경종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직접 표현함으로써 자기와 황

형사이의 우애를 표현하곤 하였다. 자신의 책 󰡔어제대훈(御

製大訓)󰡕에는 황형의 어진 마음과 우애로 인해 지금의 자신

이 있다고 하였으며, 󰡔감란록(勘亂錄)󰡕에는 경종의 지극한

우애와 어진 마음이 없었다면 조선의 오늘이 없었을 것이

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재위기간동안 수차례에 걸쳐

경종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표현하였다.78)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그의 이 모든 행동이

계획된 거짓이었을 수도 있다. 경종을 죽이긴 했는데 지속

적으로 자신을 의심하는 말들이 생기고 그런 사실들이 역

사기록에 남으니 이를 무마하기 위해 시도한 연극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뛰어난 연기자 영조는 경종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다급한 연기를 하였으며, 그 죽음 이후에도

평생 경종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존재라고 칭송하였

지만 그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

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영조는 정말 경종을 죽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추적은

경종의 죽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게장과 감에서부터 시

작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가장 회자되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영조가 그날 식사에 영향을 주지 않았냐는 것이

다. 거기에는 그날의 식사에 독을 탔다던가, 혹은 게장과

감이 의가에서 꺼리는 음식임을 알면서도 왕에게 진상했다

던가 하는 식의 가정들이 존재한다. 물론 영조 본인은 󰡔천

의소감󰡕을 통해 그날의 음식에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아쉽게도 󰡔천의소감󰡕은 영조 자신의 저서이기에 객관성

이 다소 떨어진다. 그 외에 여러 사료들 속에도 그날의 음

식에 영조가 직접 관여를 했는지에 대해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후대에 영조가 어의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게장과

감을 경종의 상에 올렸다는 주장이 있는데79) 정식 사료들

에 이러한 상황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이게 사실이

라면 영조와 어의들 사이에서 본 문제에 대한 책임공방이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 기록도 전혀 없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영조가 게장을 올렸는가.’하는 고민

은 앞서 영조가 독을 탔는가의 고민과 상당부분 유사하다.

두 경우 모두 영조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저질렀다는 뜻

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77) ‘光佐曰, 臣等方爲入侍矣, 此時水刺進御, 則喜幸何可言?’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7일), ‘親見水刺進御, 雖不多進, 臣等退而相喜’ (󰡔승정월일

기󰡕 경종 4년 8월 11일)

78) 이종호. 󰡔영조를 만든 경종의 그늘󰡕. 파주 : 글항아리. 2009 : 247-264.

79) 이덕일. 󰡔조선 왕 독살사건󰡕. 서울 : 다산초당. 2005 : 241

즉 영조는 경종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날의 식사를 살해 도구로 활용하였다는 것

인데, 여기서 나오는 질문은 독을 사용하였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날의 식사가 살해 도구로 적합

했는가다.

만약 영조가 경종을 시해할 목적으로 그날의 식사에 독

으로든 음식으로든 압력을 가하였다면 그는 상당한 우연의

일치에 기대어 작전을 진행한 것이다. 그의 목표는 결국 음

식을 먹어야만 성립하는 것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경종은

한 달 전부터 음식을 꺼리는 증상을 심하게 호소하고 있었

다. 이건 음식을 먹지 않으려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음식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음식을 통해 경종에게 상해

를 입힐 생각이었으면 그가 자주 복용하던 인삼속미음이나

각종 차 처방, 탕약 처방을 활용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2) 인삼부자 논쟁의 의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조에게 의심이 가는 부분은

바로 그가 이공윤과 논쟁한 내용 때문이다. 영조는 경종이

죽어가는 마당에 의사의 말보다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는

모습을 보인다. 이공윤이 인삼을 먹으면 기의 소통을 막아

자신의 처방에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공윤을 다그치며 삼부차를 먹인다.

이날의 논쟁을 살펴보면서 필자는 몇 가지 의문이 생겼

다. 하나는 이날 영조의 태도인데, 영조의 목적이 경종을

죽이는 것, 그것도 티 안 나게 일부러 한참 아픈 사람에게

독을 먹여 죽이는 것이었다면 이날 이렇게 자신의 용의자

됨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앞서 모든 경우

의 수를 뛰어 넘어 영조의 계략이 적중된 것이라면 그는

상당한 연기력과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단

한 차례의 실수로 자신을 드러냈냐는 뜻이다. 이어서 또 다

른 하나는 이날의 사건이 경종 독살사건의 용의자 지목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질 만함에도 불구하고 왜 당대, 즉 영조의

집권시기에는 독살사건의 화두가 되지 않느냐는 점이다. 분

명 이날의 의료 논쟁과 관련된 당대의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날 영조가 했던 언행은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의심의 눈으로 그날의 사건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몇 가지

발견한 것들이 있었다. 우선 당시의 논쟁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하 내용은 승정원일기의 8월 24일 기사 내용 중에

서 삼부 논쟁과 관련된 부분만을 필자가 발췌한 것이다.80)

유시(酉時)에 왕의 증세가 중해진다. 약방에서 다급히

입진하였는데 이미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도제

조의 물음에 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동

궁(영조)이 울면서 명령한다.

“급히 삼부를 쓰라. 급히 삼부를 쓰라.”

이에 도제조가 급히 삼부를 준비케 한다. 동궁이 또

이르길,

“약을 의논함에 두 마음을 품고 끌어 이지경에 이르렀

으니 이후로는 다른 의견으로 어지러이 휘지 말고 오

직 삼부로 성상의 몸을 회양(回陽)시키도록 하라”

이어 인삼차를 대령하고 경종이 조금 먹는다. 도제조

가 차가 식었으니 덥히라고 명령하였으며 그 와중에

인삼과 부자를 약원에서 가져온다. 동궁이 제조에게

삼부차 조제를 명한다. 어의 방진기가 동궁의 명령 하

에 왕을 진찰하였는데 곧 인삼차를 더 사용해야 한다

고 말한다. 임금을 내시에게 기대게 하고 동궁이 도제

조에게 약을 다시 드리라고 명한다. 임금이 한숨과 함

께 도제조인가라는 말을 하고 소리가 마치기도 전에

약을 한그릇 복용하였다.

이어 광좌가 이공윤의 진찰을 요청한다. 이공윤이 이

광좌에게 말한다.

“인삼차를 쓰지 마십시오. 제 약을 진어한 이후에 인삼을

사용하면 곧 기운이 통하고는 도는 길이 쉽게 막힙니다.”

이에 동궁이 말한다.

“이 어찌함이냐? 인삼을 쓰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

는 것인가? 사람이 진실로 자기가 나서서 의견을 말할

처가 있을 따름인데 군부의 병환이 이처럼 중대한데

반드시 자기 의견을 세우고자 하여 인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느냐. 계지마황탕(이는 공윤이 권하여 사용

한 약)이 만약 효과가 없으면 장차 어찌할 것이냐?”

이후 왕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동궁이 말하길

“내가 의약의 이치에 해박하지는 않으나 인삼부자가

회양할 수 있음은 알았다. 그럼에도 어제 인삼을 사용

하다가 오늘 도리어 (복용을)중단케 하였었으니 마음이

심히 괴롭다. 생각건대 분명 공윤의 말로 인해 어지럽

게 되어 사용치 않았음이다.”

도제조 아뢰길

“어찌 공윤의 말로만 그랬겠습니까? 신

등이 늙고 헤매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80)

󰡔승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4일 마지막 기사 내용이다.

80)원문에서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여러 내용들이 존재하나 삼부논쟁과 관련하여 직접

적으로 연관이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필자가 제외시키고 실었다.

여기서 필자가 발견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하나, 인삼차

를 쓰는 것은 영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의관인 진기

역시 인삼차를 더 드려야 한다고 하고 있으며, 도제조를 비

롯한 약방 관계자들 대부분이 인삼차를 드리는 것에 대해

서 문제 삼지 않는다. 실제로 처음 인삼차를 쓴 것은 23일

이었는데 이때도 인삼차를 주장한 것은 약방이었다.81)

둘, 그런 와중에 영조는 인삼부자를 주장했고, 대다수의 어의들

은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셋, 오직 이공윤만이 여기에 반대의견을 주장했는데, 이 때 이공윤이

반대한 것은 영조가 말한 인삼부자가 아니라, 그전부터 계속

해서 사용되었던 인삼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날의 상황이 용의자 영조가 드러난 상황이 되려면 영

조가 시해목적을 가지고 인삼부자를 사용하려 했어야만 한

다. 인삼은 분명 그 전부터 어의들의 주장에 따라 사용한

것이니, 만약 영조가 시해를 목적으로 이 처방을 주장했다

면 초점은 인삼이 아니라 부자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윤

역시 부자에 대해서는 일언절구 표현치 않는다. 이 상황은

도리어 이공윤이 자신이 속한 의사집단의 뜻을 번복하는

모양새로 보인다.

한편, 약방의 태도도 석연치 않다. 영조가 주장한 인삼부

자가 공윤의 말처럼 경종에게 적합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약방이 이날 너무도 영조에 협조적이다. 사실 경종이 죽게

되면 자리의 위협을 느낄 사람은 영조가 아니라 당시 집권

층이자 약방 제조를 담당하던 소론이었다.82) 또 왕이 죽으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왕실 어의들이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조의 생각에 협조적이었으며, 오직 이공

윤만이 영조의 의견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3) 방외의인 이공윤

인삼부자논쟁은 영조가 언급한 ‘급용삼부’ 즉 인삼부자를

사용하라고 명령한데서 비롯된다.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 영

조가 양기를 돌리는 목적으로 인삼부자를 논한 것은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경종의 몸상태에서 인삼부자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 타당성이 있으며, 이는 이공윤을 제외한 나머지

의사들의 순응적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공윤은

왜 이 상황에서 홀로 나섰을까? 그것도 자신이 속한 어의집

단의 의견을 번복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혹 이공윤은 기존

의 어의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을까?

이공윤이 처음 왕실에 등장한 것은 숙종 35년(1709) 11

월 10일, 국왕의 약을 함께 논하는 자리였다. 그의 이름 앞

에 학생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데 그가 왕실에 속한 정식

의사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83) 이때까지만 해도 이공윤의

의견이 왕실 진료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다.

같은 해 12월 이공윤이 왕의 맥진 결과를 다음날 도제조가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84)

그렇다면 정식 의관도 아닌 이공윤은 어떻게 왕의 진료

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당시 숙종의 병이 잘

낫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36년 1월 기사에 따

르면 왕은 방외의인(方外醫人)의 입진을 허가하지 않았는

데 신하들이 왕의 병이 잘 낫지 않음을 들어 왕을 설득하

여 이공윤 등을 입진케 하였기 때문이다.85) 어찌되었든 이

공윤은 숙종 35년 11월을 기시로 36년 겨울까지 왕의 질

병치료에 참석하였다.86)

이후 숙종 39년 윤5월 그는 불명예스럽게 왕실기록에 다

시 등장한다. 이공윤이 춘천에서 국가 일을 핑계로 쌀을 빼

돌렸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창집은 이공윤을 의술만 믿고

세상을 농락한 자라고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이공윤은 추

문을 받고 유배까지 가게된다.87) 그러나 같은 해 12월 또

다시 이공윤은 그 의술을 인정받아 의약동참을 하게 된다.88)

이듬해 3월까지 의약동참으로 등장하는 이공윤은 숙종 41

년 1월부터 6월까지 또다시 진료에 참여한다.89)

이공윤이 다시 등장한 것은 경종 2년(1722년) 8월이다.

여기서 그는 의술은 뛰어나나 인간됨이 좀 경솔한 인물로

81) ‘光佐曰, 症候如此之時, 蔘茶進御, 則止渴補中氣, 故一兩重茶煎來矣, 進御伏望’, ‘聖微診察後曰…一番蔘茶, 猶不足, 更進, 似好矣. 上曰, 持茶來.’(󰡔승

정원일기󰡕 경종 4년 8월 23일)

82) 경종2년 신임사화 이후 소론이 정권을 잡았는데, 특히 여기서 등장하는 약방 도제조 이광좌, 이조, 남취명은 모두 소론 측 인사이다.

83) ‘今日藥房入診時, 儒川都正濎, 學生李公胤, 付軍職, 竝同參議藥事, 榻前定奪’ (󰡔승정원일기󰡕 숙종 35년 11월 10일)

84) ‘昨者李公胤, 雖以爲帶數, 而醫書, 以一息五至爲好矣’ (󰡔승정원일기󰡕 숙종 35년 12월 14일)

85) ‘頤命曰, 症候彌留已久…而前此方外醫人, 如儒川都正濎・郭善完・李公胤三人, 有勿爲入診之敎, 故不得入侍, 而其在廣加商確之道, 不可不集衆見而折

衷, 務歸十分詳盡也.’ (󰡔승정원일기󰡕 숙종 36년 1월 21일)

86) 숙종 36년 2월 10일에 상을 받는 것으로 왕실기록에서 이공윤의 등장은 일단락된다.

87) ‘春川築堰主謀者, 乃士人李公胤, 而挾其醫術, 籠絡一世. 本州五百餘石大同, 稱以被災, 瞞報該廳, 亟請代納, 從輕折錢, 而錢出公胤, 米入公胤. 指使

方伯, 督發四五邑烟軍, 輒加威迫, 又囑都事, 使自摘奸, 可謂布衣有權矣. 公胤及方伯, 守令, 不可不嚴覈處之.’ (󰡔숙종실록󰡕 숙종 39년 윤5월 2일)

88) ‘及梁山定配罪人李公胤放送, 撥馬分付本邑, 給馬罔夜上送, 同參議藥事, 榻前定奪’ (󰡔승정원일기󰡕 숙종 39년 12월 25일)

89) 12월 추천받은 이후 숙종 40년 1월 9일부터 3월 18일까지 입진에 참여한다. 그 후 41년 1월 19일부터 다시 입진하여 6월까지 입진한다.

묘사된다.90) 10일 뒤 기사에는 그의 가계에 대한 짧은 설

명이 나오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承旨(정3품)였던 이정규,

아버지가 掌令(정4품)이었던 이민징이라 하였다.91) 이공윤

이 상당한 집안의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이공윤

은 경종 재위기간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대부분 약방의

의관들과 함께 왕을 진료하는 기록이다.

여기까지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이공윤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사람이 조금 경솔하긴 하나 의술만큼은 뛰어났던

인물로 보인다. 그는 정식 의관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의술

로 인해 ‘방외의인’이라는 이름으로 의약에 동참한다. 그가

왕실의료에 참여했던 초기에는 비교적 높은 신뢰를 받지

않았으나 경종조에 이르면 그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

았다. 특히 경종이 복용했던 도인승기탕과 시평탕은 모두

공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92) 또 경종이 죽기 전에

복용한 계지마황탕 역시 공윤의 의견이었다.

방외의인은 승정원일기에서 방외의사(方外醫士), 방외의

(方外醫), 외의(外醫)와 같은 표현으로 여러 차례 등장하는

데, 이는 왕실에 소속된 내의(內醫)와 상반되는 표현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왕실의 의관이 되어 어의가 되기까지

왕실에서 교육받았던 내의들과는 달리, 그들은 왕실 밖에서

별도로 의술을 연마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진료하는 내

용에서도 이러한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경종의

맥상을 설명할 때 왕실 내의들은 좌우 촌관척의 맥상을 설

명하는데, 이공윤은 濕脈이라는 단어로 맥을 설명한다.93)

처방 역시 이공윤이 주장한 처방은 이공윤의 처방이라 별

도로 설명할 정도로 내의집단과는 조금은 다른 대우를 받

았다.94) 즉 내의와 다른 ‘외의’라는 측면에서 이공윤은 조

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바탕으로 그날의 논쟁을 다시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양상이 그려진다.

23일 내의들의 의견에 따라 인삼차를 대령한다. 그럼에

도 설사가 멎지 않아 의관들의 고민이 깊어진 가운데 외의

이공윤은 새로운 처방으로 계지마황탕을 제시한다. 계지마

황탕은 실제 설사를 치료하는데 사용되는 처방이기에95) 약

방에서도 계지마황탕을 경종에게 진어한다. 한편 24일 영조

의 말을 통해 추측컨대 이공윤는 계지마황탕을 사용하면서

인삼은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조는

이렇게 처방이 한가지로 진행되지 않고 바뀌는 상황에 대

해서 석연치 않게 생각했었다. 계지마황탕을 복용하고 시간

이 더 지났으나 경종의 몸상태는 도리어 악화되었고 어느

새 죽음에 임박한 상황까지 도달한다. 이에 영조는 삼부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내의들은 그의 의견에 따라 삼부

를 준비한다. 그러나 외의 이공윤은 계지마황탕을 사용하였

기 때문에 인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영

조는 공윤의 행동에 화를 내고 경종이 조금 안정되자 치료

를 일률적으로 하지 못한 점, 그리고 그 원인에 외의 이공

윤이 있다는 점을 비난한다.

그날의 논쟁을 외의와 내의의 의견차로 보게 된 또 다른

근거는 바로 재위기간동안 영조가 외의에 대해 취한 태도

에 있다. 실제로 영조는 자신이 집권한 이후 상당기간 외의

들이 왕실에 들여오는 것은 엄히 반대한다. 이에 대해 신하

들과 논의하는 모습도 여러 차례 보이는데 영조의 뜻은 상

당히 단호했다.96) 결국 도제조의 설득과 노력이 더해지고

도97) 1년이 더 지나서야 다시금 외의의 의약동참이 이루어

졌다.98)

이렇게 생각해보면 영조가 그날 논쟁에서 했던 말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된다. 그는 이공윤이 인삼을 쓰지 말라

는 말을 하기 전부터 이미 의견이 분분하여 처방이 일률적

이지 못한 점을 비판하였다. 또 이공윤의 말 이후에도 왕의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감히 나선 이공윤에 대한 비판에

머물지 않고 처방을 어지러이 사용하였다는 점을 비판한다.

90) ‘李公胤則自上亦嘗見之, 其爲人, 雖似粗率, 而醫術則時有奇中處’ (󰡔승정원일기󰡕 경종 2년 8월 18일)

91) ‘士人李公胤, 卽故承旨廷圭之孫, 故掌令敏徵之子, 亦名家也.’ (󰡔승정원일기󰡕 경종 2년 8월 28일)

92) ‘則永徽殿參奉李公胤以爲, 上候別無大段症候, 而惟是血道礙滯, 致有氣升之候, 若用桃仁承氣湯二貼, 則必有奇效云’ (󰡔승정원일기󰡕 경종 3년 6월

18일), ‘公胤所命, 只是桃仁承氣湯・柴平湯二藥云’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3월 13일)

93) ‘公胤診曰, 臣在閭閻, 未嘗診人之脈, 故素不知脈, 而大抵似濕脈矣.’ (󰡔승정원일기󰡕 경종 2년 12월 29일)

94) ‘李公胤以爲…桃仁承氣湯二貼, 則必有奇效云’ (󰡔승정원일기󰡕 경종 3년 6월 18일)

95) 계지마황탕은 󰡔동의보감󰡕 風泄, 飱泄, 久泄에 등장하는 처방이다.

96) ‘上曰, 自先朝時見之, 內局藥路多歧, 方外醫則每用峻劑, 此是術不精明之過, 豈有逆心而然耶?’ (󰡔승정원일기󰡕 영조 원년 3월 18일), ‘鎭遠曰, 年前

以方外醫員, 勿爲入參於議藥事, 下敎, 而當其病患之時, 焦悶之際, 意未嘗不在於方外醫, 多效於閭里間者, 使之入參於議藥, 則似有愈於局方醫官’ (󰡔승

정원일기󰡕 영조 2년 2월 17일), ‘方外醫人, 雖有名稱, 超出局方者, 未之多見, 而徒守方書, 偏執己見, 故無其實效, 而反或有害矣. 甲辰後, 見辛巳

故事, 有方外醫人勿用之敎, 深歎聖鑑之孔昭, 而仍亦有所下敎矣.’ (󰡔승정원일기󰡕 영조 2년 10월 14일)

97) ‘鎭遠曰…我國取人, 專尙門閥, 識者之慨歎, 久矣。至於藥院, 則乃是保護聖躬之地, 只當觀其技術, 而猶有此習, 尤可駭也. 臣兄鎭厚, 累經兩醫司提

擧, 勸奬醫官, 甚勤矣. 每稱諸醫中, 術業精明者, 有四人, 卽秦後觀・鄭道成・文興郁・姜渭聘也.’ (󰡔승정원일기󰡕 영조 2년 10월 14일)

98) ‘光佐曰, 朝入診, 至今不下, 臣等當出擧行矣. 方外醫鄭思恭, 素知此等患候, 故今日同爲入侍矣’ (󰡔승정원일기󰡕 영조 3년 11월 16일)

여기서는 의사들의 반대 중에도 끝까지 인삼부자를 먹이려

했던 영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삼, 인삼부자의 사용

에 긍정적이었던 영조와 내의들과 인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외의 이공윤이 보일 뿐이다.

여기까지 영조를 주요 용의자로 보는 두 가지 사건을 살

펴보았다. 영조가 게장 혹은 독을 사용하여 왕을 죽였다는

관점은 음식을 먹지 않을 확률이 높은 경종에게 썼다는 측

면에서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한편 며칠 뒤 발생한 인삼부

자논쟁 역시 상황의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살펴본다면 영

조가 인삼부자를 통해 경종에게 상해를 입히려 했다고 보

기는 어렵다. 만약 이 모든 상황까지도 영조의 머릿속에서

나온 지략이라면 영조는 왕이 거의 죽어가는 시점에서 인

삼부자를 외치면서까지 자신의 용의자 됨을 드러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Ⅲ. 결론 및 고찰

시대를 거쳐 논의된 경종 독살설. 본고에서는 이 경종독

살설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사료들, 특히 의료와 관

련된 사료들을 중심으로 독살설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조 집권 시기에 당쟁의 큰 화두였던 경종독살설은 심

유현을 비롯하여 당시 영조의 집권을 반대한 무리들에 의

해 만들어진 가설이었다. 이 가설의 핵심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종은 죽기 5일전 게장과 감

이 포함된 식사를 하고 갑자기 심한 설사를 하다가 죽었는

데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조가 이날 먹은 게장과 감

에 독을 넣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게장에 독이 들어있기는 힘들

어 보인다. 당시 경종이 보인 설사병은 독약이 아니어도 충

분히 일어날 수 있는 증상이었으며, 만약 독살을 계획했더

라도 식사를 꺼리는 것이 주요 증상인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독을 탄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도리어

그가 자주 먹던 죽이나 차, 약 등에 독을 타는 것이 독살을

계획하는 사람 입장에서 더 합리적이다. 즉 경종의 증상은

실제 독에 의해 발생 하였다기보다는, 한 달 간 식사도 제

대로 못한 채 앓아왔던 경종이 성질이 차가운 게장과 감을

먹고 일어난 설사증세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독이 아니라 해도 영조가 게장을 통해 의도적으로 경종

에게 상해를 입히려 했다면, 영조의 경종시해설은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독살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영조가 경

종을 시해하려 했다면 먹을 것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사용

하여 시해하는 편이 더욱 적절하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경

종의 몸이 크게 변화한 시점이 바로 게장과 감을 먹은 그

몇 시간 뒤였으며 증상도 소화기 문제였다. 영조의 다른 도

구가 끼어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경종이 죽기 전 영조가 경종에게 인삼부자를 먹이

려 하면서 당시 의사였던 이공윤의 의견까지 무시하는 발

언을 한다. 이를 영조의 시해과정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보

다는 외부 의사의 영입에 대한 영조의 분노로 보인다. 의사

들과 영조의 대립이라고 보는 관점과는 달리 당시 영조는

내의들과 뜻을 같이 해왔다.

이상을 통해 결국 필자가 내린 경종독살설의 진위여부는

거짓이다. 경종의 죽음은 평소 서습에 취약했던 사람이 서

습상을 당해 한 달 가까이 식사를 못해 기력이 없는 상태

에서 차가운 성질의 음식을 갑자기 먹고 끊임없는 설사를

하다 죽은 것으로 귀결된다.

 

그의 사인을 연구하신 분들은

그가 전염성질환99)이나 위장관 감염성질환100)으로 죽었다

고 보았는데 필자가 생각하는 경종의 사인은 설사로 인한

극심한 탈수이며, 그 이면에 장기간 병을 앓으면서 약해진

위장관의 기능상 문제가 동반되었다고 본다.

영조는 자신이 집권하던 중 오랜 시간에 걸쳐 황형 경종

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였다. 경종이 죽던 그날도 어김없

이 경종이 죽어가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정말 이 모든

게 경종독살을 숨기기 위한 그의 계획이고 연기였다면, 먹

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게장을 통해 경종을 시해하려는

조금은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은 영조가 선택할만한 행도이

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99) 홍성봉. 「조선조 역대왕의 수명과 그 사인」. 한국인구학회지. 1991 ; 14(1) : 35-46.

100) 이해웅. 󰡔조선시대 현종, 숙종, 경종, 영조의 질병에 대한 연구󰡕. 동의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6 : 5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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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지. 1991 ; 14(1) : 35-46

한국의사학회지 제 27권 1호

접수▸2014년 05월 11일  수정▸2014년 05월 27일   채택▸2014년 05월 23일

 

 

경종독살설 연구.pdf
1.7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