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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7)/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2회

조광조는

“양사를 파직하여 언로를 다시 여라”고 요구하며 일약 공론 구심점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주위에 젊은 관료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정굉필. 안당 등 대신들도 힘을 실러 줬다.

사림이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서 재결집한 것이다.
중종은 혜성처럼 떠오른 조광조와 사림을 중용했다.

세조가
남이 장군 등 신진세력을 중용하여 한명회 등 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듯이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을 중용하여 연산군을 폐위하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

조정의 주도권을 쥔 조광조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는 지치(至治: 이상적으로 다스려 지는 정치)가 행해지는 이상 사회를 꿈꾼 인물이다.

’지치‘는 ’하늘과 사람의 근본이 같다‘는 성리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람이 수양을 통해 하늘과 간격이 없는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상을 뜻한다.

그 모델은 중국의 요순시대로 이를 실현하려면 군주와 신하, 백성까지 도덕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광조가 야심차게 추진한 ’도덕정치‘다

도덕정치를 펴려면 먼저 임금부터 도학에 정진해 요순같은 성군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도학 道學‘은 성리학을 말하지만 기존의 관학(성리학자들이 기존의 정치에 입문)과는 달랐다.

도학은 절의파(고려말 야은 길재의 학풍계승)가 발전시킨 새롭고 심회된 성리학으로 특히 도덕의 바탕이 된 자기 수양이 필수적이었다.

조광조의 도덕정치를 ’도학정치道學政治‘라 부르는 이유도 이전과 차별된 성리학을 전면에 내걸었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도학 계역의 성리학자들을 동원해 중종에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의했다.

<성리대전>은 송나라 이후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는 틈만 나면 임금에게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삼가는 자세로 다스르시라”고
권했다.

또 조정은 자잘한 일들은 신하에게 맡기고 군왕은 도학에 정진할 것을 주문했다.

임금이 도를 닦고 덕을 길러야 백성을 교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학적 경세론인  ’수기치인修己治人(자신을 닦아 사람을 다스림‘을 책에서 끄집어내 현실정치에 적용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3회

「“아랫사람들을 진작시킴은 윗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성상께서
먼저 기을 닦아 감동시킨다면 아레서도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지치至治‘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백성이 선하게 되거나 악하게 되는 것이 오직 임금에게 달렸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1년.(1516년)12월 12일>

나아가 조광조는
민간에게도 성리학적 도덕질서를 설파했다.
그는 <소학>.<근사록> 등의 성리학 입문서를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또 김안국이 교정한 <여씨향약언해呂氏 鄕約諺解>도 전국 팔도에 배포했다.
사대부의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여악女樂도 폐지했다.
여악은 관기들이 행해온 가무와 풍류로 양반관료들의 혼외 관계를 유발해 적지 않은 물의를 빚었다,

「“공자께서는 ’누가 나에게 나라를 맡겨 다스리게 한다면 1년이면 실적을 내고
3년이면 이상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 하신 바 있다. 공자가 미리 정해 놓은 정치의 규모와 시행방안을 일목요열하게 말 할 수 있겠는가?(중략)
공자의 가르침을 배운 그대들은 요순시대의 임금과 백성을 만들려는 뜻이 있을 것이다.
만일 오늘과 같은 시대에 옛날의 융성한 정치를 이룩하려면 어떤 것을 먼저 힘써아 하는지 모두 말하여 보아라.”」
<조광조 정암집.알성시책>

당시 중종은 정치적인 승부수를 띄우고 있었다

중종은 반정으로 즉위한 탓에 왕권이 부실하고 취약했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던 반정 3인방(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기회가 온 것이다.

중종은 힘의 공백기를 맞아 자라 목처럼 움츠러든 왕권을 신장시키고자 했다.

이럴때는 뭔가 그럴듯한 표상이 필요하다.
왕은 공자와 주자가 이상적으로 그린 요순시대의 왕도정치를 자신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위의 책문에는 이러한 임금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어떻게 답을 했을 까?

「“공자께서는 본래 있는(천지의) 도로 이끌고 본래 가진 (천지의)마음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쉽게 효험을 얻은 것입니다.(중략)
임금은 법도와 기강의 큰 줄기를 세우고 대신을 공경하여 정치를 맡겨야 합니다.
임금은 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야 다스리는 도가 확립됩니다.
옛날의 성스러운 임금과 현명한 재상은 성실한 뜻으로 서로 맏고 도리를 다하여 광명정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조광조 정암집>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4회

중종은 조광조의 답안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성인의 옛 정치에 조예가 깊고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충만했기 때문에
중종은 조광조를 눈여겨 보고 그와 교감을 나누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광조의 새로운 도덕정치는 군신간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두 사람은 성스러운 임금과 현명한 재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희대의 정치 실험은 우리가 알다시피  비극으로 귀결되고 만다.

“나라의 병통(병으로 말미암은 아픔)이 이익의 근원에 있다”
    <國家病痛在利源>

중종 14년(1519년) 11월 15일 밤,
조광조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사림 관료 15명이 긴급 체포되었다.

죄목은 서로 붕당을 조성하고 과격한 주장을 일삼아 조정과 국론을 분열시켰다는 것이었다.

불과 며칠전만 해도 정국공신(靖國功臣:중종반정 직후 책훈된 공신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기세 등등하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체포 된 것이다.

조광조는 다음날 이어진 심문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항변을 했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 뿐입니다. 나라의 병통이 이익의 근원에 있다고 망령되게 생각하였습니다.
국맥(國脈:나라의 명맥)을 새롭게 하여 끝없이 이어지도록 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중종실록 14년(1519년)11월16일>

조광조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하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신하들은 비록 그들이 이상적인 정치를 추구해 민심을 어지럽힌 잘못(?)을 있다고 해도
이 때문에 처벌하는 것은 죄목이 분명하지 않고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종임금은 막무가내였다.
왕은 서둘러 조광조 등을 처형하려 했다.

이에 영의정 정굉필이 만류하며 간곡하게 아뢰었다.

「“저 사람들은 임금님께서 뽑아서 요직에 두고 말을 다 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죄를 주면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한 달 후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서른 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와 함께한 동지들도 하나 둘 뒤를 따라 갔다.
우리 역사는 이 일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 고 부른다.

그런데 이 때는 아무도 몰랐다.
조광조 일파가 훗날 ’기묘사림己卯士林‘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역사에
다시 부할할 것이라는 사실을......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건 임금의 마음 뿐“

조광조를 죽음으로 몬 것은 그 자신의 강직함 때문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5회

조광조는 도덕정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이 가로막으면 상대가 임금이라도 충돌을 불사했다.

‘기신재忌晨齋(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불교의식)’와
‘소격서昭格署(도교의식을 강행하기 위한 관서)’을
혁파하는 과정이 특히 그랬다.

중종 13년(1518년)
소격서 철폐는 궁중 내명부가 연관된 일이어서
왕이 끝까지 윤허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성리학 이외의 ‘도道’는
잡스러운 것이라면서 퇴청을 거부하고 밤새 상소를 올렸다.

중종은 마지 못해 조광조의 요구를 들어 주었지만
이후로는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정몽주.김굉필,정여창에 대한 문묘종사 운동도
만만치 않은 역풍을 맞았다.

조광조는 도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면
도학자의 구체적인 전범(典範:본보기.모범)이 필요하다고
보고 중국 송나라 때 유명한 도통론道統論을 제기하였다.

그는 정몽주를 종주주로 삼는 절의파의 학풍에
조선 성리학의 전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문묘종사(文廟從祀:공자의 사당에 시주를 모시는 것)는
이를 공식화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행위였다.

하지만 정통성 문제는 권력구도에서  매우
민감한 사안인 것이다.

오랜 세월 ,조선의 주류세력을  자임해온 훈구파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
즉, 주류와 비주류가 서로 뒤바뀌는 권력의 전복(정권교체)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꼬투리를 잡으러 조광조의 문묘종사에 반대를 했다.

결국 정몽주만 문묘에 오르고
김굉필과 정여창은 배제되었다.

조광조의 스승인인데다
현역 대신들과 같은 연배라는 점을 들어
주류쪽(훈구파)에서 끈잘기게 물고 늘어진 것이다.

임금의 시선은 싸늘해지고 주류세력인
훈구파가 결집하자 조광조는 초조했을 것이다.

도덕정치를 펼쳐나가려면  훈구파를 극복하고 사림이
주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풍부한 인적자원이 필수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림은 힘을 실어줄 사람이 부족했다.  
중종 14년(1519년) 전격적으로 실시된
’현량과賢 良科‘는  사림의 이런 고충에서 등장한 제도로 보인다.

’현량과‘는 경영에 밝고 덕행이 높은 선비를 천거하여 등용하는 제도였다. 과거제도와 다른 제도다.

그렇게 28명의 선비가 뽑혀  중종 임금 조정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6회

사림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약진했다.
조광조를 지지하는 정굉필이 영의정, 안당이 좌의정, 이자가 우참찬에 올랐다,

그들 세상이다
그들 동료인 김정(형조판서).김식(성균관 대사성).이성동(대사간).김구(홍문관 부제한).등 요직에 등용된 자들도 그들 동료였다.

조광조 본인은 감찰의 최고 사형탑인 대사헌을 맡았다.
모조리 그들이 독차지 했다.

바야흐로 훈구파에서 사림으로의 정권교체(레짐체인지)가 무르 익고 있엇다.

자신감을 얻은 조광조는 훈구파를 비롯한 주류세력에게 칼를 겨누게 된다.
’정국공신‘ 개정이라는 초유의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중종반정 직후에 책훈된 ’정국공신‘은 인우너도 많은데다(117명)
원칙없이 납발된 측면이 강했던 측면이 많았다.

연산군에게 아부하고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유력한 공신과의
친분을 이유로 숟가락을 어물슬쩍 올린 양심불량자도 많았다.
하지만 중종임금이 이들 반정세력 덕분에 임금이 되었기에 어쩔수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바로 이점을 건드린 것이다.
중종의 최대 약점(?) 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한번 빼든 칼을 그냥 칼집으로 집어 넣을 수는 없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도덕적
의리가 통용되는 나라가 될 것인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로 전락할것인지? 선택을 구도로 짜고 공론을 띄웠던 것이다.

사사로은 이익의 근원은 바로 반정의 핵심세력인 ’정국공신‘ 들이었다.

「”정국공신 가운데는 페주(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이가 많은데 그 죄를 논하자면 용서가 되질 않습니다. 대저 공신을 중히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利를 밝히는 풍조가 생기므로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여기서 말미암습니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이利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중략)
이것은 소인이 모의에 참여하여 만 든 일입니다.
이 일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까 걱정스랍습니다“」
<중종실록 14년 1519년 10월25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7회

그러나 이익의 근원을 도려 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이었다.
그 이면에는 정국공신 개정으로 훈구파를 비롯한 주류세력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아침저녁으로 중종을 압박하며 정국공신 개정을 밀어 붙였던 것이다.
또한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적 잣대를 휘두르며
사림의 공론(여론)에 찬성하지 않으면 모두 소인배로 몰았던 것이다.

결국 임금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영의정 정굉필의 말마따나 함정이었던 것이다,.
중종의 마음속에는 이미 무서운 결심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속 맘을 파악하지 못했다.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후세의  사림은 기묘사화의 원흉으로 남곤을 지목했다.

뒤에 다시 등장하겠지만 이는 정략적 의도가 다분한 선택이었다.

그럼 실제 기묘사화를 주도한 인물은 누구일까?

당시 정치구도상 추측을 해 보면 조광조가 그렇게 믿었던 임금 ,
즉, 중종이 가장 의심 스럽다.

”조광조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며 국문 받을 때에 한 짓도 죽을만 하다.
조광조가 시종직에 오래 있었으므로 나도 그 사람을 조금 아는데 마음이 곧지 않다.“
<중종실록 14년(1519년)12월 16일>

중종은 남곤 등이 조광조의 목숨만은 보존해 달라고 간곡히 간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사사(賜死:사약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끓게하는 처벌)를 고집햇다.

사실 조광조를 발탁하고 중용한 인물이 바로 중종 자신이엇다.
그럼에도 매몰차게 사사를 고집한 것이다,

왜 극형을 주장했을까?

처음 조광조를 내세운데는 사림을 결집시켜 기득권세력 훈구파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사림이 훈구파는 물론 임금인 자신까지 거세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8회

중종은 훈구파가 독주하는 조정을 바꾸려 했지만
사림이 홀로 득세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금의 입장에서는 훈구파와 사림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울 이루길 바랬던 것이다.
이러한 구상이 흔들리고 사림쪽으로 기울어지자  중종은 조광조를 버리기로 결심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국공신들의 삭훈(削勳: 공을 깍음) 위기에 몰린 공신들의 반발도 한몫을 했다,
실제로 대궐문에 화실이 날아와 꽂이고무사들이 거사를 모의하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중종은 이를 이용했다,

남곤을 통해 심정.홍경주 등에게 은밀히 밀지를 보내 조광조를 제거하고 싶다는 뜻을 완곡하게 전한다.

이를 왕명으로 해석한 신하들이 명패를 받고 궁궐로 모여들자 왕은 (자신이 아닌) 조정의 뜻이라며 결심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사림은 정치세럭으로서는 아직 미약했다,
아직은 비주류였다. 조정에서 약진하기는 했지만 저변이 넓지 못해 언제든지 희생양이 될 소지가 있었다,

왕과 훈구대신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림을 끌어 들이기도 하고 내치기도 했다.

비주류인 사림은 권력구조가 조금만 요동을 쳐도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조광조도 이런 정치의 속성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한 듯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 예로부터 소인들이 군자를 배척할 때는 그 명분을 찾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붕당으로 죄를 꾸며 끌어 넣었습니다“
<중종실록 13년(1518년) 2월2일>

하지만 조광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와 동료들은 이른바 이익의 근원을 도려내는 작업을 광범위하게 벌인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9회

훈구파의 특권을 보장해온 토지제도와 신분법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농장주의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한전제(限田制),노비를 줄이고 양민을 늘리기 위한 종모법(從母法) 등이 강구되었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과감하게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작아 본래 인물이 적은데다가 또 서얼(庶孼)과 사천(私賤)을 분별하여 쓰지 않습니다. 중원에서는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오직 골고루 쓰지 못함을 걱정하거늘 하물며 작은 우리나라이겠습니까?“」
<중종실록 13년(1518년0 3월11일>

조광조는 이처럼 경세가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는 데 현실적인 걸림돌이 된다면 이를 혁파하고자 했다.
그것이 조선의 기둥인 사대부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아라고 눈 하나 깜작하지 않은 그 였다,

그러나 세력을 키우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하는 급진적인 개혁은 항상 위험한 것이다,
기득권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잃거나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것이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조광조도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결국 조광조와 기묘사림은 붕당을 맺어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숙청을 당했다,

흥미로운 점은 기묘사화 훗날
사림의 저변을 넓히고 정권교체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조광조의 죽음은 향촌 사대부들에게 회자되며 신드름을 일으켰다.

조광조는 사후 ’불멸의 선비‘  우러름을 받았다.

광해군 2년(1610년),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영광까지 누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후예들은 도학의 껍데기만 뒤집어 썼을 뿐 경세의 알맹이는 품고 있지 않았다.

조광조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조선사를 통털어 가장 가장 극적으로 조형된 희생양이었다.

출처: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권경율)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0회

「“ 춘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 오리오 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귄가 하노라”」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은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소재에서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매양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서 자신의 거처를 찾던  그이가 어찌 된 일인지 감감소식이 없다.

살짝 서운함을 느낀 화담은 공연히 어리석은 마음을 탓하며
‘지는 잎 부는 바람에’ 시조 한 수를 띄운다.

얼마 후

송도 기생 황진이(黃眞伊, 생몰년 미상)가 밤이슬을 맞으며 서경덕의 거처로 향한다
바람길에 실려 온 스승의 속내가 그녀를 움직인 것일까?

하지만 초려의 사립문은 굳게 닫혀 있고 야속한 등잔불은 꺼진 지 오래다.
가을 밤 신기슭을 서성이는 마음에 시심이 일어난다.

‘춘풍에 지는 잎소리’를 어쩌란 말인가?

「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야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실제로 사제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성인(聖人)으로 여겼다.

30년 면벽 수도를 했다는 지족선사도 한 순간에 그녀에게 무너졌지만 화담 서경덕은
여러 해 동안 유혹을 했음에도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탄복한 황진이가 남녀관게를 떠나 인간데 인간으로 교류를 했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비록 산중처사였지만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냈다.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
혀균의 아버지인 허엽 등이 모두 그의 문인들이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를 떠나 삶의 면모만 놓고 본다면  황진이 만큼 스승을 닮은 제자도 없다.
공자에게 안희가 있었다면 서경덕에게는 황진이가 있었다고 할 만 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1회

연이은 사화(士禍)의 여파로 선비의 이상이 꺾인 시절,
서경덕은 벼슬에 얽메이지 않고
독자적인 처사의 길을 걸었다,

황진이 역시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이었던
조선사회에서 주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았다.

두 사람은 ‘ 격물(格物:사물이치)과
시심詩心’으로 마침내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터득했다.

“청산은 내 뜻이요,  인걸은 물과 같다”

황진이는 소설이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역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만큼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룰 보면
1957년
조긍하감독 영화 '황진이'(역: 도금봉)

1986년
개봉한 배창호감독 영화 '황진이'(역: 장미희)

2006년
KBS2 드라마 '황진이'(역: 하지원)

2007년,
장윤현감독 영화 '황진이'(역:송혜교)

2015년
신정균 감독의 '황진이' (역:신유주) 등이다

반면 그녀에 관한 역사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시조 6수와 한시 4수가
<청구영언>, <해동가요>, 등에 전해지고
몇 가지 야사가 선비들의 문집을 통해 알려진게 고작이다.

황진이 에피소드를 다룬 몇 권의 책
(이덕형의 ‘송도기이’, 허균의 ‘성옹지소록’, 김택영의 ‘송도인물지’, 임방의 ‘수촌만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서유영의 ‘금계필담’)에는 저마다 황진이의 매력을 다루고 있다

그 녀는 탁월한 재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성품도 호방하여 내키는 대로 세상을 주유했다.

황진이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일반적인 조선 여성과 달리 그 자신으로
자유롭게 살다가 간 것이다.

황진이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조선 여성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여 태어나면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면 남편을 따르고
나이들면 아들을 따르는 게 숙명이었다.
고로 언로나 발언권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 구체적인 양상은 현대인의 고정관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시기에 따라 의외의 단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호주제도다.
지난 2005년 우리나라에서 ‘여성 호주 인정’을
골자로 한 호주제 개정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여성의 권리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유림을 중심으로
반대의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때 여성 호주주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제시되고 있다.
다음회에서 살펴 보기로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2회

1678년,
단성현(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호적대장을 보면 여성호주가 11퍼센트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양반.양인, 천민 등 신분에 상관없이 나타난 현상이다

장성한 아들내외와 함께 살고 있지만 호주는 어머니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비단 단성현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도 대동소이했으리라 여겨진다.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로 여겨지던 조선시대에도 여성호주가 이만큼 있었는데 ....

재미있는 점은 여성 호주의 비율이 양란(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이전에는 더 높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여성의 권리는 후기보다 전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더 컸다는 점이 흥미롭다.

17세기 중반의 부안김씨 문중 회의록을 살펴보면
“이제부터 출가한 딸은 제사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결정이 나온다고 한다.
분재기(分財記:재산 분배에 관한 문서)도 이즈음부터 출가한 딸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다.

이는 곧 그 이전에는 출가한 딸이 친정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도 균등하게 상속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에 여성이 출가외인으로 전략한 까닭은 무엇일까?

양란 이후 조선의 집권 새력은  무너진 사회의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성리학적 종법질서를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가부장사회로 변모했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 또한 떨어졌다.

전기와 후기의 소소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로 존재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여성의 덕은 누구의 딸, 아내,어머니로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내훈內訓>을 지어 남편을 하늘처럼 떠받들라고 부녀자들을 교육시켰다.

신사임당도 이율곡의 어머니로서 이름을 떨치고
오늘날 5만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었다.

조선 전역에 널리 퍼진 열녀비는 여성이 집안에 기여한 바를 평가하고 기른 것이다.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여성은 상상조차할 수 없었다. 이런 사회에 황진이라는 돌연변이가 출현 한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3회

「진랑(眞娘=황진이)은 개성에 살던  눈먼 여자 소경의 딸이다.
(황진이 어머니가 소경인데 아버지가 그녀를 버렸다)

성품이 쾌할해서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에 능하고 노래를 잘하였다.

일찍이 山水간에 놀기를 좋아하여 풍악산으로부터 태백산,
지리산을 지나 금성(錦城=나주)
에 이르렀다.

마침 그 고을 원님이 잔치를 베풀어 감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기생이 좌석에 가득한데 진랑이 떨어진 옷,
때묻은 얼굴로 상좌에 나가 앉았다.
이를 답으며 태연히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여러 기생들이 기가 질렸다」
<허균 ‘지소록識小錄’>

성품이 남자와 같다.
허균은 유배생활을 하던 중 쓴 <지소록>에서 황진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흔히  황진이 하면 미모와 교태를 떠 올리는데
<지소록>에는 그런 표현은 없다.
대신 남자를 뛰어넘는 호방한 성품과 거문고를 비롯한
음악적 재능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허엽은 황진이를 감화시킨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고
허엽의 아들 허균은 ‘성옹지소록’에서 황진이에 관한 일화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우선 그녀의 어머니 진현금(陳玄琴)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 주변에서 횡진이를 대강(?)은 알고 있지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잘 모른이가 많다.

현금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사람은
조선시대 허엽의 아들 허균이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역사소설가 이덕형씨과 김택영씨 등이다

이덕형과 김택영은
진현금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고,

허균은
황진이를 맹녀(盲女)의 딸이라고 말하고 있다.
진현금이 앞을 못보는 소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 소설가 이덕형과 김택영은 진현금의 맹인에 대한 언급은 없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4회

황진이의 어미 진현금이 매우 자색(姿色)이 있었다.

열여덟 살 때 병부교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화려하고 얼굴이 잘난 한 남자가 다리 위에 서서 현금에게 눈길을 보내며 혹 웃기도 하고 혹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하니 현금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문득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빨래하는 아낙들이 모두 흩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다시 다리 위에 나타나 기둥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끝내자 물을 청하였다.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떠서 바쳤다.

그 사람이 반쯤 마시고 웃으면서 돌려준 다음 다시 말하기를
“그대도 시험 삼아 마셔보라” 하였다. 마셔보니 술이었다.

현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로 인하여 두 남녀는 인연이 되어 정을 통하였다.

이렇게 해서 진랑(眞 娘)이 태어났다. <출처 :이덕형 ‘송도기이’ >

다리 위의 남자가 웃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진현금이 어떻게 알았을까.

주위에서 말해줬다면 그런 내용들이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덕형의 진술이 맞다면 허균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맹인 이라는 사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이 죽었을 때 그녀의 시를 모두 외워 유고시집을 낼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근거도 없이 황진이의 어머니를 맹인이라고 했을 리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분들의 진술이 둘 다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진현금이 다리 위의 사내와 통정을 할 때에는 시력이 정상이었으나,

이후에 어떤 이유로 앞을 못보게 되었어야 한다.

허균이 굳이 황진이를 ‘맹녀의 딸’이라고 지칭한 것은, 당대에 그런 인식을 부각시키는 행동이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매우 자색(姿色)이 있었’던 진현금은 황진이를 낳고난 뒤에 눈이 멀어버렸다.
황진이는 눈 먼 어머니의 고통을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다.

역사 소설가 김택영은
‘다리 위의 사내’로 나오는 황진사가 황진이의 아버지다.

‘황진이는 중종 때 사람으로 황진사의 서녀이다.
그의 어머니 진현금이 병부 다리 아래에서 물을 먹다가 감응하여 황진이를 잉태했다.

황진이를 낳자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사흘 동안 풍겼다.’
<출처:김택영 ‘송도인물지’>

어머니 진현금의 신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다.

황진이가 서녀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진사의 첩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진현금 또한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리 위에서 러브콜을 했던 사내는 황진사인 셈이다.

여기서 아런 저런 이야기를 종합하여 재구성하면
황진이가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조건들이 짚인다.
즉 기생 진현금은 황진사 집에 첩으로 들어가 살다가, 어떤 병이나 사고로 눈이 멀어,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때 현금은 어린 딸 진이를 안고 나와 기방(妓房)에 몸을 의탁한다. 황진이는 자라면서 눈 먼 어미가 괄시당하고 고통받는 것들을 늘 보면서 자란다. 그녀의 눈이 되어주려 애쓰지만 마음만큼 되지는 않는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5회

자라면서 황진이는 주위에서 찬사를 듣는 미모의 여인이 되어간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불행을 가슴에 먼저 새겼기에 그런 찬사가 오히려 덧없게 느껴진다.

예쁘다는 이유로 다리 밑에서 간택된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자 버려졌다.

기방에 돌아왔으나 기생 행세는 커녕, 거문고를 더듬으며 눈칫밥을 먹고 있다.
한겹 살갗이 예쁘다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랑? 그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그런 질문들이 목울대를 은근히 씰룩이고 있었다.

황진이는 미모 따위에 의지하지 않기로 했다.
예뻐서 나쁠 거야 없지만 그것에 인생을 걸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녀는 노래와 거문고 솜씨가 뛰어나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기생이지만 선비들이 읽는 경전과 역사서를 몰래 탐독했다.

당시(唐詩)를 공부하며 감(感)을 키웠다.
그녀는 골이 텅빈 미녀가 되어 고객들을 향해 웃고 춤추는 존재가 되고싶지 않았다.

그 고객들에 대해 은밀히 경쟁 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신에게 성을 붙여주었다.
(원래 기생은 동성(同姓)의 사내들이 거리낌이 있을까봐 성을 밝히지 않는다.)

어머니로서는 진사의 딸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싶어 ‘황’ 씨를 사용했지만
황진이는 그 ‘황’ 한 글자가 무척이나 싫었다.

그래서 그 ‘황(黃)’의 그림자를 닦아내고 어머니 성씨인 ‘진’을 사용하여 ‘진랑’이라 했다.

진이가 은밀히 육체를 경멸하면 할수록 그녀는 도도하고 더 아름답게 보였고,
사내들은 더 속이 탔다.

황진이의 이제 슬슬 황진이의 남자 관계를  시작해보자

먼저
황진이가 15세 때 남자관게(?)는 아니지만  일이 일어난다.

이웃의 총각 하나가 스토커가 되어 늘 담장을 기웃거린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말을 걸려고 황진이에게 다가갔다가
심장을 얼게 하는 그 고고한 아름다움과 서늘한 눈매에 입이 딱 붙고 만다.
돌아와서는 드러눕는다.

그 부모가 찾아와 살려주는 셈치고 한번만 위로해주라고 했지만 진이는 듣지 않는다.

얼마 후 그는 상사병으로 죽고 만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6회


이 소식을 듣고 황진이는 큰 충격을 받는다.

대체 내 얼굴, 내 육신이 뭐라고 젊은 사람이 저렇게 자진(自盡)한단 말인가?
아름다움이 사람을 죽인다면, 아름다움은 죄악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남자의 상여가 지나가다가 황진이의 집 앞에 딱 멈춰섰다.
죽어서까지도 놓지 못하는 저 어리석은 집착.
그 집 사람이 와서 황진이의 옷가지를 얹어줘야 갈 것 같다고 말하자,

황진이는 저고리를 하나 꺼내준다.
관이 그제서야 움직인다.
상여꾼들이 죽은 총각의 원혼을 달래느라 연극을 한 것일까?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까닭없이 생겨난 내 몸뚱이의
요기(妖氣)가 세상을 어지럽혔구나.

갓 피어나는 기생에게 이 사건은 트라우마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남자들만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유수 송겸이 술자리를 열었는데 황진이가 나왔다.
풍류에 일가견이 있었던 송유수는 그녀를 보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다!”하고 신음같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황진이가 왔다고 하자,

송유수의 첩이 궁금해서 문틈으로 그녀를 엿본다.

그 틈새로 뿜어나오는 아름다움.
“저렇게 예쁠 수가...이제 내 신세는 조졌구나”하면서
아우성을 지르며 술자리 가운데로 뛰쳐들어온다.

곁에 있던 종들이 기겁을 하고는 함께 뛰어와 밖으로 모셨지만
이 여자는 실성한듯 다시 뛰어들어와 술판을 뒤엎는다.

송유수는 놀라 일어서고 손님들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송겸의 첩을 그토록 절망케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일을 당하고난 뒤에도 송겸은
다시 어머니 수연을 맞아 황진이를 또 부른다.

황진이는 어머니의 실패한 인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남자와 눈이 맞아 청춘을 걸었다가 비참해지는 걸 봤다.
그래서 얻은 교훈 1호. 남자에 대한 철저한 불신.
작업을 할 때 하는 달콤한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레짐작으로 겁부터 먹고 도망치지는 않는다.

그녀는 당대의 내노라하는  명사들과 교류를 했다
지체가 높다고 아무나 하고 사귀지 않았다.

때로는 겉과 속이 다른 양반 남성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위선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기도 했을 정도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7회


남자가 그리워하면 나도 그리워한다. 사랑하면 나도 사랑한다.
그러나 황진이의 사랑 게임은 진지전(陣地戰)이다.

가장 쪼다 같이 당한 사람은 그 유명한  벽계수이다.
벽계수는 왕실 종친이자 당시 조선 최고의 군자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었다.

온 나라에 황진이의 명성이 퍼지자 왕실의 종척이었던 그는, 이 멋진 기생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저 도도한 여자가 분명 퇴짜를 놓을 듯 하니 함부로 데이트 신청을 할 수가 없다.

유명한 시인이었던 손곡 이달이 그의 지인이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빙그레 웃더니 이달이 말한다.

“공이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오.”
“예. 그러리다.”

벽계수가 손곡의 자문을 구한 까닭은
황진이와 손곡이 교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허균의 가문이 그 중간에 끼어있다.
허봉, 허난설헌 자매의 스승이 손곡 이달이었고, 허봉의 아버지인 허엽이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다.

화담과 황진이가 인연이 있으니, 결국 손곡과도 닿아있다고 봐야 한다. 손곡은 황진이의 ‘깊은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거문고를 맡겨서 뒤따라 걷게 하십시오. 황진이의 집을 지나가셔서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면서 거문고를 타고 계십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겁니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서 빨리 말을 타고 떠나십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따라올 겁니다. 취적교를 지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면 성공입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 지어낸 것일까?

손곡은 어떻게  황진이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것일까?
거문고를 타며 술을 마시는 그것만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황진이는 당신이 궁금해질 것이다.

그런데 손곡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코치해주지 않았다.
황진이가 빼어난 시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벽계수는 그대로 했다.
과연 황진이가 따라왔다. 그는 이제 됐구나 싶어 달이 훤한 취적교 위로 말을 몰았다.
그때, 조선의 베테랑 악사도 입을 딱 벌렸던, 신이 내린 목소리로 시조 창이 흘러나온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노래도 노래거니와 가사가 말발굽을 세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8회

푸른 산 속에 흐르는 푸른 계곡물아,
잘도 흘러간다고 졸졸거리지 말아라.
푸른 바다에 한번 도착한 뒤에 다시 돌아오려면 기회가 없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꽉 차 있으니 놀다 좀 가시오.

벽계수와 명월을 맞춘 천의무봉의 은유이다.
어이 벽계수씨~~쉬었다 가세요.

‘취한 오빠’의 팔을 잡는 무뚝뚝한 호객(呼客)도 언어 몇 개가 초간장을 치면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절절한 유혹이 된다는 걸 황진이는 유감없이 보여준다.

모두들 이 시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감동’이 줄었지만,
당시 벽계수는 처음 듣는지라 영혼의 뒤통수를 치는 사이렌의 노래 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손곡의 말을 잊어버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그때 나귀가 취적교를 다 간 난간에서 비틀거린다.

벽계수는 땅에 떨어져 무심한 표정으로 일궜던 카리스마를 바닥에 처박고 만다.

황진이는 껄껄 웃으며 팔짱을 끼고는 돌아선다. 한 소리 툭 뱉지 않았을까.

“그대는 명월에 계수나무 심을 생각 마시고, 그냥 쭈욱 흘러가는 게 좋겠소.”

이 시조가 19세기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인 자하 신위(하(신 자하1769~1847)를 )에게도 인상적이었던지 7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해놓았다.

靑山影裏碧溪水 容易東流爾莫誇
청산영리벽계수 용이동류이막과

一度滄溟難再見 且留明月影婆娑
일도창명난재견 자유명월영파사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
쉽게 동쪽으로 흐른다고 너 자랑마라
한번 바다에 닿으면 다시 보기 어려우니
명월에 머무르면 그림자가 춤추리라

황진이에 관한 진술자들은 그녀가 ‘남자같았다’는 말을 한다. 화장을 안한 것이 더 곱다는 조선 최강 ‘생얼미인’ 황진이가 남자같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용모와는 달리 성격에서 호방하고 거리낌없는 태도가 있었다는 얘기이리라.

내숭 안 떨고 약한 척 하지 않고 순진무구한 척 하지 않는 당당하고 씩씩한 기색. 조선 남자들은 황진이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황진이는 지조를 중히 여기고 순결을 프라이드로 삼는 ‘일편단심 기생’이 아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9회

다만
그녀는 늙은 고관대작의 첩실로 들어가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자 하는 출세욕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황진이는 오히려 철저히 육체적인 사랑을 게임처럼 즐기며 사내들에게 한치도 꿀리지 않는
일대일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논다.

어렸을 때부터 당시(唐詩)를 익혔던 황진이는 한시에도 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옥봉이나 운초, 혹은 매창처럼 많은 시를 남기지 않았다.
시조의 풍격(風格)으로 보면, 마음의 거문고(심금)를 울리는 시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감질나게도 몇 편만 겨우 전해지니 아쉽기 그지 없다.

사후에 그녀의 시를 거둬주는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죽을 때 황진이는 집안 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저는 천하 남자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죽거든 비단도 관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먹어, 세상 여자들로 하여금 저를 경계삼도록 해주십시오.”

집안사람은 그녀의 말대로 했는데, 어떤 남자가 그 시신을 거두어 장단(長湍) 구정고개 남쪽에 묻었다고 한다.

<‘송도인물지’에서> 이렇게 자신의 육신을 물가 모래밭에 내던지라고 한 여인이니 굳이 시를 남기려는 뜻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 남자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는 말은 여운을 남긴다.

육신이 한 사내에게 얽매이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던 그녀는, 천하 남자들을 위하여 흔연히 자신을 개방했다.

그녀는 바다를 지나가는 모든 배를 비춰주는 등대처럼 조선 사회의 ‘공공재(公共財)’인 자신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후회는 또 후회대로 남는 법인가 보다. 다른 여인들에게 자신을 경계삼도록 죽은 몸뚱이마저 모래바닥에 내팽개쳤다.

소세양(蘇世讓, 1486~1562)과의 동거

천하 남자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라지만, 각별한 남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30일 동거 게임’으로 입방아에 오른 진이의 연인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0회


임방의 ‘수촌만록(水村漫錄)’에 전하는 이야기다.

소세양은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이란 호를 썼으며

전라도 관찰사와 형조, 호조, 병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좌찬성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율시(律詩)에 능한 시인이며 송설체를 잘 쓰는 명필로 소문났던 익산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는 인종 1년(1545년)에 당시 권신이던 윤임 일파의 탄핵을 받고 쫓겨났다가 그해 일어난 을사사화로 복귀했다.

대윤(윤임)과 소윤(윤형원)의 갈등이 사화를 빚어냈던 종종-인종-명종 대의 정치적 혼란기를 살았던 그에 관한 정치적 평가는 여기서 섣불리 내릴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감성이 풍부하면서도 강직한 면모가 있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이렇게 호언했다 한다.

“사내가 여색에 빠진다면 사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그에게 한 친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색도 여색 나름일세. 자네는 송도 기생 황진이가 와도 나무토막처럼 있을 수 있을까?”
그러자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계집 앞에 나무토막처럼 있는다고 말하지 않았네.

다만 내 욕망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네. 약속을 하나 하겠네.
내가 송도의 명월(明月)이를 명월이 뜨는 날 만나서 그 다음 명월이 뜨는 밤에 헤어지겠네.

하루도 어김없이 돌아서 나올테니 두고 보게.”
“허허.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어쩔 셈인가?”

“그렇다면 나는 사람도 사내도 아닐세.”

대감, 나랑 딱 30일만 놀겠다는 말씀이오?

양곡(소세양 판서)은 두 가지 놀랄 만한 약속을 한 셈이다.

하나는 황진이와 동거를 하겠다는 얘기이고, 또 하나는 그 동거를 정확하게 한달 만에 끝장내겠다는 것이다.
내가 스물 다섯 살의 기고만장한 기생을 만나러 갔다.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