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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17~18세기 일본산 담배의 조선 유입과 그 영향/신경 미.동국대

ꠙ 차례

1. 서론

2. 조선 내 담배 유입과 전파 경로

3. 일본산 담배의 유행과 영향

4. 결론

 

 

 

 

【국문초록】

이 글에서는 조선에 담배가 전해진 시기와 경로에 대하여 알아보고 일

본산 담배가 조선의 담배 발전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앞선 연구를 바

탕으로 담배의 전파시기를 추적한 결과, 일본으로부터 1610년 이전에 잎

또는 가공품 형태의 담배가 전해졌으며 1614~1618년 사이에 담배의 씨앗

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물론, 조선과 일본의 몇몇 사료에 임진왜

란 이전에 전해졌을 가능성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17세기 초

반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지하였듯이 담배는 유입 초

기에는 담뱃잎이나 가공품의 형태로 전해졌는데 이때 들어온 가늘게 썬

일본산 담배 ‘지삼’은 조선뿐만 아니라 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에

서는 지삼을 청과의 관계에서 사적・공적으로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지삼

은 높은 가격에도 엄청난 인기를 끄는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산 지삼을 모방한 조선산 지삼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담배의 인기는

조선 내 담배 재배 농가의 증가를 이끌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품경쟁력을

목적으로 담배의 품질 상승도 이루어져 18세기 청에서는 조선의 담배가

최고 품질로 인정받았다. 이 같은 조선의 담배 발전에 일본산 담배가 일정

역할을 담당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주제어】

조선, 일본, 담배, 지삼, 통신사행, 무역

 

 

 

 

1. 서론

전 세계적으로 기호품의 종류는 수없이 많고 우리는 각자의 취향대로

다양한 기호품을 즐기고 있다. 기호품이 가지각색인 것은 하나의 물품

이 기호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는 개인의 취향만이 아니라 당시의 사

회와 문화・경제 그리고 정치적 상황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

호품은 나라별로 당시의 삶과 문화를 투영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 연구는 이와 같은 기호품의 특성에 착안하여 담배를 주목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담배는 일본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

설이다. 16세기 후반 유럽에 전파된 이후 불과 반세기 만에 일본을 거쳐

조선에까지 도달하여 조선 사람의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담배

는 언제, 어떻게 조선에 전파되었으며 재배되었을까. 일본으로부터 들

어온 담배는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간의 담배 연구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담

배가 지닌 여러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가 담배의 전파와 확산1),

 

1) 곽현숙・김영경, 「동아시아의 담배 명칭 고찰」, ꠓ동북아 문화연구ꠗ 54, 동북

아시아문화학회, 2018 ; 柳益相, 「우리나라 古農書에서 본 담배 名稱과 傳

來」, ꠓ한국작물학회지ꠗ 39권 2호, 한국작물학회, 1994 ; 朴容玉, 「南草에 관

한 硏究-朝鮮王朝後半期에 있어서의 南草의 商・農業적 發展을 中心하여」,

ꠓ역사교육ꠗ 9, 역사교육연구회, 1966 ; 정기택, 「삼국에 전파된 담배의 이름

과 설화에서 동질성으로 본 한국 담배의 기원 연구」, ꠓ한국연초학회지ꠗ 37,

한국연초학회, 2015 ; 정인혁, 「담배 談論 一考」, ꠓ韓國古典硏究ꠗ 43, 韓國

17~18세기 일본산 담배의 조선 유입과 그 영향 115

 

재배방법과 의학적 효능2)에 집중된 아쉬움이 있다.

한편, 담배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문일평에서 출발한다. 문일평은 우

리나라 담배의 역사와 어원, 예절 등을 당시의 시각에서 서술3)하였다.

이 연구는 한미 50년사와 조선의 문화・예술에 관하여 서술하는 흐름에

서 작성된 것으로 비교적 소략하지만 우리나라 담배의 역사를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담배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도출한 연구자는 안대회와 이영학

이다. 안대회는 2015년 ꠓ담바고문화사ꠗ4)를 출간하였다. 이 연구는 담배

가 유입된 순간부터 기호품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순간까지를 다

양한 자료를 통해 설명한다. 이영학은 사회경제사적 시각에서 연초 산

업을 분석5)하였다. 조선 후기 연초가 유입된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탈

속에서 연초 산업이 어떻게 변용되었으며 이에 조선은 어떻게 대응하였

 

古典硏究, 2018 ; 최돈화, 「한국연초산업의 사적 고찰」, ꠓ상학논집ꠗ 14, 청

주대학교, 1972.

2) 박상영, 안상우, 「옛 문헌에 나타난 담배의 효능 및 담배 폐해의 대처」, ꠓ한

국한의학연구원 논문집ꠗ 13, 한국한의학연구원, 2007 ; 裵吉寬, 盧載榮, 「煙

草植物의 生理, 生態에 關한 硏究 : 第一報 培養液中의 K2O濃度가 煙草植

物의 生長 및 發育生理에 미치는 影響」, ꠓ煙草硏究ꠗ, 충북대학교 엽연초연

구소, 1977.

3) 문일평, ꠓ담배이야기ꠗ, 온이퍼브, 2015.

4) 안대회는 현재 학계에서 담배에 대해 가장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담배에

대한 많은 자료를 소개하고 해설한 ꠓ담바고문화사ꠗ, 문학동네, 2015가 대표

적이다. 이 외에도 18세기에 저술한 담배 전문 서적인 이옥(李鈺, 1760~1815)

의 ꠓ연경(煙經)ꠗ을 국역한 ꠓ연경, 담배의 모든 것ꠗ, 휴머니스트, 2008과 「담

배문화사의 시각으로 본 담배 假傳의 세계」, ꠓ한국한문학연구ꠗ 55, 한국어

와문학, 2014가 있다.

5) 이영학, ꠓ한국 근대 연초산업 연구ꠗ, 신서원, 2013. 이영학이 진행한 담배

관련 연구는 「역비논단-담배의 사회사: 조선후기에서 일제시기까지」, ꠓ역

사비평ꠗ 1991.2, 역사비평사, 1991 ; 「조선후기 담배의 급속한 보급과 사회

적 영향」, ꠓ역사문화연구ꠗ 22,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5를

참고.

 

는지를 한국 자본주의 발달의 흐름에서 살펴보았다.

이 연구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는 2020년에 도출되

었다. 장순순은 일본의 공문서를 활용하여 일본의 담배와 담뱃대가 어

떻게 전해지고 조선인의 생활문화로 투영되었는지 조・일 문화교류의

측면에서 “倭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6) 그 결과, 조선 후기 동래・부

산지역이 최상품의 담배 생산지로 알려진 배경에는 왜관과 일본 사행을

통해 유입된 일본산 담배와 담뱃대의 영향에 의한 것임을 논증하였다.

조선에 담배를 전해준 것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담배가 조선에 유입된 이후 조선

의 담배문화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다소 미흡하다고 생각한

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조선 내 담배 전파시기를 재검토하고 유입

된 이후 일본의 담배가 조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살펴보

겠다. 이 연구가 조선의 담배문화, 더 나아가 담배의 전파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담배문화 연구에 조금의 보탬이 되

기를 기대한다.

 

2. 조선 내 담배 전파 시기와 경로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진 담배가 전 세계로 퍼지기까지는 불

과 1세기가 걸리지 않았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담배를 얻은 이후 16세기에는 필리핀 등지로 퍼졌고 일본을 거쳐 조선

에까지 전해졌다. 그간의 연구를 통해 담배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에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7)

6) 장순순, 「한일 문화교류의 측면에서 본 조선후기 倭館-일본산 담배 및 담

뱃대를 중심으로-」, ꠓ항도부산ꠗ,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20.

7) 담배의 시기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일본 상선이 부산 포구에 배를 대고 약 한 가지를 팔았다. 그 이름이 痰

破塊인데 덩어리진 가래를 잘 낫게 한다고 했다. 그 약을 복용할 때에는 구

리로 만든 작은 술잔을 쓰는데 그 크기가 참새 알을 반으로 갈라놓은 정도

다. … 잎을 가루로 내어 술잔 속에 채우고 불을 붙여서 자루 주둥이를 통

해 그 연기를 들이마신다. …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복용하여 가래와 곽란 및

가슴과 배의 질병을 치료하여 한두 번 효과를 보았고, 태우고 남은 재로는

옴이나 종기를 치료하였다. 그러자 3, 4년 사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리듯 앞다투어 구매하였다. 장안의 남녀가 어린애고 늙은이고 가리지

않고 병이 있거나 없거나 즐겨 태워서 연기를 마셔대니 코를 비트는 악취

에 거리에 가득했다.8)

위 기록은 柳夢寅(1559~1623)이 1612년 즈음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는 담배가 조선 사회에 유입된 사실을 추적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첫째, 약으로 사용했으며 잎을 가루로 내어 연기를 들이마

신다. 둘째, 부산 포구에서 일본 출신 상인이 판매했다. 셋째, 유입된 지

3~4년 만에 전국으로 퍼졌다는 점이다. 유몽인이 기록한 내용에 따르

면, 담배는 일본 상인이 처음으로 가져와서 가래를 낫게 하는 약으로 소

개하며 부산에서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생각하면 조선에

서의 담배 확산 과정 또한‘남쪽에서 전파된 외래품이 이후 토산품이

⑵ ꠓ芝峯類說ꠗ을 토대로 문일평이 주장한 1609~1614년 사이

⑶ ꠓ紀年通攷ꠗ・

ꠓ五洲衍文長箋散稿ꠗ 등에 기록된 1618년 무렵이다. 일본학계에서도 朝・日

간에 체결한 己酉約條를 담배 전파의 상한선으로 보고 있기에 양국 간의

논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鈴木達也, ꠓ世界喫煙傳播史ꠗ, 424~438쪽.) 다만,

그간의 연구에서는 담배와 담배 종자를 분류하지 않고 범박하게 담배로 통

합하여 유입 시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담배 종자의 전파는 담배

농가의 증가와 그에 따른 경제적 발달, 조선 내 흡연자의 증가 등 여러 변

화에 있어 분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담배 재배가 시작하여 국내에서

담배를 생산하는 것은 담배 수요와 공급에서 외래품인 것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기존 연구를 존중하되 담배의 전파와

담배 종자의 전파를 나누어 그 시기를 좀 더 세분화하려 한다.

8) 柳夢寅, ꠓ黙好稿ꠗ, 「痰破塊說」(안대회, ꠓ담바고 문화사ꠗ, 문학동네, 2015, 32~

33쪽 재인용.)

된9) 일본의 상황과 유사하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렇다면,

조선의 담배 유입과 확산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다음의 <표 1>은 담배의 전파에 대해 기록한 사료를 정리한 것이다.

9) 1624년 回答副使로 일본에 다녀온 姜弘重(1577~1642)은 일본의 담배에 대

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본은 대체로 날짐승에서 꾀꼬리와 까치가

살지 않고, 매도 드물었다. 그리고 길짐승에서는 범과 표범이 살지 않았다.

과일에서는 잣과 호두가 생산되지 않고, 채소에서는 수박이 없었다. 음식물

가운데에는 벌꿀이 나지 않았다. 호두・단목・담배[南草]・설탕・공작의 깃 등

은 모두 흔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본의 소산이 아니고, 모두 남

쪽 야만인들이 들여왔다. 그런데 남초만은 토산물이 되었다고 하였다.”(姜

弘重, ꠓ東槎錄ꠗ, 1625년 3월 5일)

10) 명확한 연도를 기록하지 않았으면 각 사료의 저술연대를 고려하여 역산하

여 추정하였다. 또한, 각 사료는 담배를 지칭하는 용어로 담파고・담바귀・남

초・남령초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모두 담배로 사용

하였다.

11) ꠓ順菴集ꠗ 권13, 雜著, 「橡軒隨筆」 下.

12) ꠓ黙好稿ꠗ, 「痰破塊說」.

출처 전파 시기10) 내 용

安鼎福, ꠓ順菴集ꠗ11) 1592~1598 임진왜란 이후 시작

柳夢寅, ꠓ黙好稿ꠗ12) 1608~1609 일본 해상이 부산포구에서 판매

3~4년 만에 전국에 유통

李睟光, ꠓ芝峯類說ꠗ13) 1609~1614 근래에 倭國에서 들어옴

張維, ꠓ谿谷漫筆ꠗ14) 1615 20년 전에 일본에서 들어옴

ꠓ仁祖實錄ꠗ15) 1616~1617

1621~1622

丙辰・丁巳년간에 바다를 건너 들어옴

辛酉・壬戌사이에 크게 유행

趙慶男, ꠓ續雜錄ꠗ16) 1617~1618 4~5년 전에 일본에서 종자가 들어옴

李圭景, ꠓ五洲衍文長箋散稿ꠗ17) 1618 광해10년 처음 들어옴

李圭景, ꠓ五洲衍文長箋散稿ꠗ18) 1618 광해10년 성행함

李瀷, ꠓ星湖僿說ꠗ19) 1620~1623 광해군 말년부터 성행

李裕元, ꠓ林下筆記ꠗ20) 1622 광해14년 倭國에서 들어옴

<표 1> 문헌에 기록된 담배 전파 시기

17~18세기 일본산 담배의 조선 유입과 그 영향 119

<표 1>에 따르면 담배 유입에 대한 기록 가운데 시기상 가장 빠른 것

은 安鼎福(1712~1791)의 글로 안정복은 특별한 시기를 언급하지 않고 임

진왜란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가장 늦은 시기는 李瀷(1681~1763)

과 李裕元(1814~1888)이 기록한 시기로 광해 말년인 1622~1623년 즈음

이다. 이 목록 중에서 저자가 생존하여 당대의 일을 기록한 것이 앞서

있었던 사실을 후대에 기록한 것보다 사실 여부에서 더욱 정확하리라

판단하여 유몽인과 이익, 이수광, 장유, 조경남의 언급을 주목하였다.

이수광(1563~1628)은 ꠓ지봉유설ꠗ에서“담파고는 풀 이름으로 남령초

라고도 부르는데 근래에 왜국에서 들어왔다.21)”라 하며 지금 많이 심는

다고 언급하였다. 이수광이 ꠓ지봉유설ꠗ을 저술한 시기는 1614년이다.

‘근래’라고 하였으므로 당시를 기점으로 5년 전까지를 근래라고 가정한

다면 1609년 즈음 일본에서 조선으로 담배가 들어와 1614년에는 많은

사람이 재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장유(1587~1638)의 기록은 1635년에 쓴 것이다. 장유는 엄청난 애연가

로 유명하였는데, 당시 유행하던 흡연에 관해 기술하면서“남령초를 피

우는 방법은 본디 일본에서 나왔고 일본인은 담박괴라고 불렀다. 그 풀

은 남양의 제국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20년 전에 시작하

13) ꠓ芝峯類說ꠗ 권19, 植物部, 「藥」.

14) ꠓ谿谷漫筆ꠗ 권1, 漫筆, 「南靈草吸煙」.

15) ꠓ仁祖實錄ꠗ 권37, 仁祖 16年 8月 4日.

16) ꠓ續雜錄ꠗ 권2, 「壬戌年」.

17) ꠓ五洲衍文長箋散稿ꠗ, 「賓主吃煙之儀辨證說」.

18) ꠓ五洲衍文長箋散稿ꠗ, 「煙草辨證說」.

19) ꠓ星湖僿說ꠗ 권4, 萬物門, 「南草」.

20) ꠓ林下筆記ꠗ 권13, 文獻指掌編, 「淡巴菰」.

21) 이수광, ꠓ지봉유설ꠗ 권19, 식물부, 「약」, “淡婆姑草名 亦號南靈草 近歲始出

倭國 採葉暴乾 以火爇之 病人用竹筒吸其煙 旋卽噴之 其煙從鼻孔出 最能

袪痰濕下氣 且能醒酒 今人多種之 用其法甚效 然有毒不可輕試也 或傳南

蠻國 有女人淡婆姑者 患痰疾積年 服此草得瘳故名.”

였다.22)”라고 하였으므로 그 시기를 1615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경남(1570~1641)은 ꠓ속잡록ꠗ에서“4~5년 전에 종자가 일본에서 들어

왔다.23)”라고 하였다. 조경남이 위의 글을 작성한 1622년으로부터 역산

하여 추정하면 담배 종자가 조선에 유입된 것은 1617~1618년으로 산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자료는 공통되게 일본으로부터 담배가 들어온 것으로 기록하였지

만 시기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먼저, 유몽인의 기록의 경우 명확한

저술연도를 알 수 없고 본인이 직접 본 것이 아니기에 내용상 다소 불

분명해 보이는 점이 있다. 그러나 훈련 주부 金景祥(1548~?)이 부산 인

근을 둘러보고 올린 서계24)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6세기 말부터 이미

부산 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교역이 있었고 이후에도 왜관을 중심으

로 조・일 교류가 이루어졌다.25) 이런 사실과 함께 유몽인의 활동 및 ꠓ묵

22) 장유, ꠓ계곡만필ꠗ 권1, 만필, 「남령초흡연」,“南靈草吸煙之法 本出日本 日

本人謂之淡泊塊 言其草出自南洋諸國云 我國自二十年前始有之 今則上自

公卿下至轝臺蕘牧 無不服之 其草不見於本草諸書 未知性氣及主治 但味辛

似有小毒 人未嘗茹服 但燒煙吸之 吸多則亦令人暈倒 久服者不必然 世之

不服者 僅僅千百之一耳 頃見華人朱佐 浙江慈溪人也 言中國稱南草爲煙酒

或稱煙茶 百年前閩中已有之 今則幾遍天下 治赤鼻最有效 余問此物燥熱

必傷肺 何能治鼻 朱曰 能散滯氣故耳 其言亦有理.”

23) 조경남, ꠓ속잡록ꠗ 권2, 「임술년」,“南靈草 盛用於世 一名談博怪 四五年前

厥種來自日本 南方人取以植之致富者多.”

24) ꠓ선조실록ꠗ 69권, 선조 28년 11월 2일, “… 부산을 탐심하였더니, 머물러 있던

적은 다 도해하고 행장이 이곳으로 진을 옮겨 下將 6인을 거느리고 있는데

각기 수천 명을 거느렸으며 혹은 포수・검수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습니

다. 배의 수효는 6백 80여 척이었습니다. 또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왜인 正成

이란 자가 동쪽에 들어가 살고 있는데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으며 사신이

부산에 이른 지 거의 10일이나 되었는데도 와서 뵙지 않았다 합니다. 수축한

新城은 주위가 6~7리이고 또 시장을 개설하여 왜적의 남녀 및 우리나라 백성

들이 날마다 물화를 교역하고 있었습니다. 東平으로부터 凡川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거접하는 자는 3백여 호나 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佐子

川근처에 鮑作하며 거접하는 자가 또 1백여 호나 되었습니다. …”

호고ꠗ의 저술 시기26)를 고려해보면, 위의 내용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짐

작되는 1612년경에는 조선 사회 내 담배가 꽤 퍼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수광의 경우 ‘지금’ 많이 심는다고 언급하였기 때문에 이수광이 글을

저술한 1614년에 담배는 토착화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

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우리나라의 기후가 담배 농사가 불리하

지 않다는 담배의 재배적 특질27)을 고려하더라도 외래품이 토산품이 되

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두 사람의 기록을

살펴본다면 담배가 조선에 전해진 시기는 늦어도 1610년 이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장유와 조경남의 경우는 각각 1615년과 1617~1618년을 언급하였는데

앞선 두 사람과는 시기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조경남의 기록에서는 흥

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유몽인과 이수광이 담파고 또는 담배라고 언급

한 것과 달리 조경남의 경우‘種’이라고 기술했다는 점이다.

처음 담배는 씨앗이 아닌 재배된 잎, 또는 잎을 가공된 형태로 전해졌

다. 남쪽에서 온 풀이라는 뜻으로 쓴 ‘南草’, 남쪽에서 온 신령한 풀을

말하는 ‘南靈草’ 등-초창기 담배를 지칭했던 ‘-초’라는 명칭에서도 조선

에 유입된 초기의 담배는 담뱃잎이나 어느 정도 가공된 가공품의 형태

로 전해졌음을 가늠할 수 있다. 보통 새로운 작물이 전해질 때는 어떻게

파종하고 재배하는지 그 재배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져야 한다. 그

러나 담배 유입 당시를 기록한 사료에는 재배방법에 대한 설명보다는

대부분 어떻게 피우는지, 어디에 효과가 좋은지 그 효능과 사용법에 대

해 기록되어 있다. 담배 재배 기술은 17세기 중엽에 작성된 「南草田記」

25) 왜관에서의 교류에 대해서는 김동철, 「조선후기 통제와 교류의 장소, 부산

왜관」, ꠓ한일관계사연구ꠗ 37, 한일관계사학회, 2010 ; 「17~18세기 부산 왜

관의 開市와 朝市」, ꠓ한일관계사연구ꠗ 41, 2012를 참조.

26) 유몽인과 ꠓ묵호고ꠗ에 대해서는 김홍백, 「柳夢寅 文集에 대한 書誌的 고찰」,

ꠓ규장각ꠗ 48,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상세하다.

27) 南基恒・裵孝元 외, ꠓ新制 煙草學ꠗ, 1971, 鄕文社, 23~25쪽.

에 보이는 연초 재배 과정에서 단면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28)

이런 정황은 일본이 담배를 받아들인 과정과 상당히 유사하다. 상술

하였듯 담배는 일본의 토산물이 아니었다. 일본에 처음 전해졌을 당시

일본 또한 바로 담배 재배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일본에는 주로 포르투

갈과 네덜란드가 담배를 전파했는데 그들은 담뱃잎을 가지고 파이프를

이용해 피우는 흡연법을 전해주었다. 일본에서 담배가 인기를 끌며 생

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고, 이후 담배 재배에 성공하여 잉여생산물을 확

보한 일본은 그들이 남만 사람들에게 배운 그대로 그 식물을 조선에 전

파하였다.29)

재배되어 전해진 담배는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당시 담배의 가격은 은

으로 거래될 정도로 비쌌다. 따라서 전파 초기의 담배는 많은 사람이 쉽

게 사용할 수 있는 재화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비록 담배가 빠른 속

도로 전해졌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이 담배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담배 씨앗이 전해진 이후, 조선의 땅에서 담배가 생산・공급되면서부터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경남은 당시 성행하고 있던 담배의 출

발을 재배된 담배가 전해진 시점이 아닌 그 종자가 유입된 1617~1618년

으로 본 듯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담배는 일본에서 재배된 잎 또는 가공된 형태로 1610년보다

앞선 시기에 조선으로 유입되어 인기를 끌며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졌

다. 1614~1618년 사이에는 담배 씨앗이 들어와 재배가 이루어지기 시작

하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기 시작했고 1620년 이후에는 담배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 엄청나게 증가하였을 것이다.

위와 같이 담배의 전파시기를 일단락할 수 있지만,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담배에 대해 알려진 자료와 연구를 통

28) 이영학, 앞의 책, 2013, 49쪽.

29) 안대회, 앞의 책, 2015, 30~31쪽.

해서는 당장 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으

므로 이 글에서는 그 가능성만을 먼저 논하려고 한다.30)

일본의 대표적인 蘭學者 大槻茂質(1757~1827)이 저술한 ꠓ蔫錄ꠗ에는

조선에 담배가 전해진 시기를 임진왜란 이전으로 앞당길 수 있는 기록

이 남아있다.

조선의 왕자 蔚海君의 <연초>시는 加藤淸正의 군영에 있을 때 지었다고

한다. 출처는 알 수 없으나 桐江滕子信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연의 기를 토해내는 것이

하늘을 꿰뚫은 구름 형상과 같다.

하루 종일 사랑함에 다함이 없으니

좋다! 소매 속의 그대31)

ꠓ언록ꠗ은 1796년 즈음32)에 저술되어 1809년에 간행된 담배 전문서이

다. 여기서 말하는 울해군은 선조의 아들인 臨海君(1574~1609)을 가리

키는 것으로 보인다. 임해군은 임진왜란 중 회령에서 順和君(?~1607)과

함께 왜장 가등청정에게 넘겨져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러한 사

실을 고려해보면 ꠓ언록ꠗ에 언급된 울해군은 임해군을 말하는 것으로

30) 담배의 전파 시기는 전파 경로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담배문화 형성과 영향

등과 관련하여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金斗鐘은“宣祖 末境이나 혹은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 군졸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만주

에 전입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金斗鐘, ꠓ韓國醫學史ꠗ, 探求堂, 1981, 278

쪽.) 라 하며 임진왜란 때 전해졌을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외에 아직 임진왜란 전에 전해졌음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자료는 찾지 못하

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다른 상황을 고려・검

토한 후 후속 연구를 통해 보완하려고 한다.

31) 大槻茂質, ꠓ蔫錄ꠗ 卷之下, 「雅賞第十」, “朝鮮王子蔚海君 煙草之詩 在於加

藤淸正軍營中所作云 出處未詳 桐江滕子信所臆記也 吐出自然氣 徹天一樣

雲 終日愛無盡 好是袖中君.”

32) ꠓ蔫錄ꠗ 卷之上, 「蔫錄考例」.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고 이름이 잘못 기록되었지만,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ꠓ언록ꠗ의 기록은 충분히 고려할만하다. 일반적으로 담배가 일본

에 전해진 시기는 天正・慶長연간 유럽 상선으로부터 소개된 것으로 보

고 있다.33) 전 세계적으로 담배가 전해진 후 담배가 확산한 속도를 고려

하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중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존재했을 것으로 예상한다. 담배의 전파에 군대와 전쟁이 일정 정도의

역할을 하였음은 중국의 담배 전파 과정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중국

변방의 군사 지역에서는 거친 풍토와 기후를 이겨내기 위하여 흡연이

만연했고, 이러한 흡연습관이 점차 민간으로 확대되었다.34) 이와 같은

정황을 고려해보면, 두만강 근처의 회령에서 포로로 잡힌 임해군이 일

본군의 군영에서 담배를 접했을 가능성 또는 그보다 앞서 담배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35)은 여전히 남아있다.

한편, 유몽인의 기록에는 부산을 시작으로 일본 해상에 의해 담뱃잎

이 들어왔다는 언급이 있다. 여기서 무역이라는 첫 번째 유통경로가 확

인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건너온 담배는 무역 이외에 어떤 방법으로

조선에 유입되었을까.

33)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가장 빠른 시기는 1576년이다. 일본의 이즈모사키 마

을의 토지세 장부에서 소규모의 담배 상인이 영업하고 있었음이 발견되었

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아직 포르투갈에서도 본격적으로 퍼지기 전이기 때문

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샌더 L.길먼・저우 쉰 외 지음, 이수영

옮김, ꠓ흡연의 문화사ꠗ, 이마고, 2006, 125~129쪽).

34) 기시모토 미오 지음, 노영구 옮김, 앞의 책, 2015, 109~110쪽.

35) ꠓ野乘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公甞曰 明宗末宣庙初 南草始出 終

有壬辰之變 昏朝末今上初 争著襖子[주:뒤터기라] 旡乃北奴相通之兆耶 未

久 其言果驗.”(ꠓ野乘ꠗ 20, 「尹格」) ꠓ야승ꠗ은 고려말부터 조선 영조 대까지

의 여러 야사를 모은 책으로 총 30권 30책으로 이루어졌다. 언제, 누가 지어

졌는지는 미상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동국

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쓰시마의 領主 요시나리[義成] 父子가 각종 그릇・후추・짐승 가죽 또는

가죽제품・담배 등을 두 首譯 이하의 모든 역관, 그리고 讀祝官・醫員・寫字

官・畫員 등에게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군관에서

졸병까지 각각 백반과 후추를 나누어주었다.36)

위의 사료는 1655년(효종6) 통신사의 從事官으로 일본을 다녀온 南龍

翼(1628~1692)의 기록이다. 남용익은 쓰시마의 영주로부터 여러 물품을

선물 받았는데 여기에 담배가 포함되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

견하였다. 처음 통신사를 파견한 이후 총 12번의 통신사를 파견하였는

데, 통신사를 파견할 때에는 막부와 쓰시마의 고위관료에게 전달하기

위한 예물[公禮單]을 가져갔다. 통신사행단이 일본 측 인사에게 예물을

전달하면 상대측에서도 답례로 예물을 지급[私回禮單]했는데, 이 선물

목록에 담배가 포함되었다.37)

통신사행단이 받은 선물 목록에 담배가 확인되는 것은 1624년 강홍중

의 기록이 가장 빠르다. 강홍중은 담배를 선물을 받았지만, 조선으로 갖

고 오지는 않았다. 1624년 회답부사로 일본으로 간 강홍중은 쓰시마에

도착하여 순풍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쓰시마 영주의 家臣이었던 橘

智正으로부터 다양한 그릇과 후추・담배를 선물 받았는데 情만 받겠다

는 뜻을 전하고 나머지 물품은 돌려보냈다.38) 이후 통신사행단은 보통

있는 일처럼 일본산 담배와 담뱃대 등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표 2>는 숙종8(1682년) 譯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洪禹載(1644~?)의 ꠓ東

槎錄ꠗ에서 담배를 선물 받았다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36) ꠓ扶桑錄ꠗ, 1656년 2월 3일.

37) ꠓ增正交隣志ꠗ 권5, 「下程」에는 숙종8년의 통신사행이 받은 선물목록에 담

배가 들어있으며, 1783년 영조39년 계미통신사행의 사예단에도 연초, 연관,

연죽등이 포함되어있다.

38) 강홍중, ꠓ동사록ꠗ, 1625년 3월 4일.

일본인에게 담배를 선물로 받은 것은 통신사행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고 부산의 왜관을 통해서도 담배 선물이 이루어졌다. 왜관에서는

왜관을 방문한 조선인을 접대할 때 일본요리를 내놓고, 술과 안주용 국물

을 접대하며 그들이 돌아갈 때는‘전례대로’ 담배를 선물하였다.39) 이처럼

일본산 담배는 상인을 통한 무역이나 통신사행단이 받아온 예물을 통해

서 그리고 왜관에서의 교류를 통해 조선 사회에 유입되고 전파되었다.

3. 일본산 담배의 유행과 영향

17세기 초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담배는 담뱃잎 또는 가공된 형태로 전

해져 전국으로 유통되었고 淸에도 전해져 큰 인기를 끌었다. 淸人의 담

배에 대한 강한 기호는 여러 폐단의 원인이 되었다. 昭顯世子(1612~1645)

39) 왜관에서의 담배 선물에 대해서는 장순순, 「朝日 문화교류의 측면에서 본

조선후기 倭館」, ꠓ항도부산ꠗ 제39호, 부산광역시역사편찬위원회, 2020에

상세하다.

일시 제공자 수여자 선물 품목

6월 28일 쓰시마 도주 홍우재 연죽, 삼중궤

7월 12일 쓰시마 도주 당상

상관

담배 3근

담배 30근

7월 25일 효고 태수 3사신 담배

8월 14일 지대 료우구우칸베에 홍우재 담배[莨蓉]

9월 2일 마관 마지마 로쿠노신 홍우재 담배

효우시로우 자에몬 홍우재 담배

9월 18일 이이호우키의 태수 각 사신 남초

9월 21일 오카자키 태수의 집사 도리야마우시노수께 각 사신 담배

9월 24일 사와 태수의 집사 도즈카 사다유 홍우재 병화연죽

10월 16일 지쿠젠의 태수 사신, 역관 담배

<표 2> 홍우재가 선물 받은 담배 목록

17~18세기 일본산 담배의 조선 유입과 그 영향 127

가 머물렀던 瀋陽館에서는 청인을 접대하거나 일을 진행하는 데 어려

움이 있으면 담배를 선물40)하며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고, 포로로 잡

혀있던 조선인을 속환할 때에도 담배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속환 과

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속환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담배를 싣고 잇달아 들어와서 지금 관소에

머무르고 있는 수가 이미 많아 말썽이 생기게 하고 그 책임이 강원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속량하는 가격은 날로 뛰고 전에 연속해

서 속환하고 매매하던 길 또한 장차 막히게 생겼으니, 이로써 말씀드리건

대 해롭기만 하고 이득은 없으며 관소에 폐만 끼칠 뿐 아니라 아문통사도

모두 말하기를, “애초에 담배 들여오는 일을 허락한 것은 대략 관중에 있는

사람과 인질 등이 피울 수 있도록 일용의 밑천으로 삼고자 했을 뿐인데, 지

금에 와서는 바리바리 실어 들어오니 그 번잡함이 너무도 심하다 합니다.”

합니다. 전에 드린 보고 중에, 속환하려는 사람들을 두 달에 한 번 들여보

내라고 한 뜻은 대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나, 거듭 생각하니 오히려

타당하지 못한 듯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41)

조선 조정의 의도와는 다르게 청에서의 담배 수요가 늘어나니 이를

이용하여 이익을 남기려는 사람이 등장하며 문제가 발생했다. 담배를 통

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문제는 경제적인 것에 그치지

않았다. 청 조정에서 조선인을 속환할 때 담배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는

조치42)를 취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담배에 대한 청인

40) ꠓ인조실록ꠗ 35권, 인조 15년 7월 15일, “세자가 이역에 蒙塵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신민의 아픔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음식 따위 물건은

兩西에서 들여보내기는 하나 東界에서 나는 물건도 전부 빠져서는 안 되

니, 적당히 들여보내소서. 또 관소에 왕래하는 저들이 끊이지 않는데 일행

에게 줄 만한 물건이 없다 하니, 남초 3백여 근을 보내소서.”

41) ꠓ심양장계ꠗ, 인조 20년 6월 26일.

42) ꠓ심양장계ꠗ, 인조 16년 5월 27일에는 청나라 측에서 심양관에 전달하기를

“담배로 속환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계속 행동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처분을 기다리라.”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들의 욕구는 줄어들지 않았기에 조선이 청과의 문제해결에 있어 담배를

사용하거나 사행 때 예물로 가져가는 일은 18세기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 청으로 가는 사행에는 많은 예물이 포함되었다. 예물

에는 布・紬・銀兩・紙・扇부터 豹皮・鹿皮・靑黍皮・水㺚皮의 가죽류와 銀

粧刀・錫粧刀・倭劍의 검류 그리고 枝三草・銀烟竹43)등 다양한 물품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여기서‘지삼초’이라는 낯선 명칭이 눈길을 끈다. 도

입 초기의 담배는 南草, 南靈草, 痰破塊, 煙草, 煙茶, 南洋草, 妖草, 枝

三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지사미’ 혹은 ‘지삼’ 또한 담배를 가리

키는 말인데 이 말은 17세기에 등장하여 18세기에 널리 쓰이다가 점차

자취를 감췄다.44)

대저 南番에서 나왔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남초라고 하는데 그중 잘게

썬 것을 枝三伊라고 부른다. 이것은 倭語다.45)

徐浩修(1736~1799)의 언급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삼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로 잘게 썬 일본산 담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잘게 썬

담배라는 의미의 기자미타바고[刻みタバコ]에서 유래하였다. 1718년 일

본에 다녀온 申維翰(1681~1752)이 일본의 담배에 대하여 “조선의 남초

는 본래 동래의 왜관에서 얻어 온 것으로 시작되었다. 속된 말로 남초를

淡麻古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일본말의 多葉粉이란 音이 잘못 전해진 것

이었다. … 일본 사람들은 담뱃잎을 쪄서 말리고 독을 제거하고 실처럼

43) ꠓ磻溪隧錄ꠗ 권3, 田制後錄, 經費,“今則自戶曹資給極多 今自該曹給一行布

紬銀兩紙扇 以至豹皮鹿皮靑黍皮水㺚皮銀粧刀錫粧刀倭劍枝三草銀烟竹之

類 其數極多 蓋自亂後如此 而虜人誅求百端 王子權貴之奉使者 皆將賂行

貨 漸漸增添而然云 而猶求請不已 蓋求請旣有成例 故無人止之也.”

44) 안대회, 앞의 책, 2015, 53쪽.

45) ꠓ海東農書ꠗ 권4, “大抵出於南番 故俗稱南草 其切細者曰枝三伊 此卽倭語

也”

가늘게 썰었다.”46)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일본에서 유입된 지삼은 독특

한 방법으로 담뱃잎을 가공한 후 잘게 썬 담배임을 알 수 있다.

일본산 지삼은 최고급 담배로 조선과 청에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일

본과 무역 통로가 없는 청에서는 조선의 중개무역을 통해 지삼을 공급

받았다. ꠓ迎接都監應辦色儀軌ꠗ에는 칙사에게 하사하는 공식적인 물품

내역에 長竹과 함께 지삼초와 궤지삼초가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47) 조

선은 청의 관료나 중요인사에게 공적으로 때로는 사적으로 꾸준히 일본

산 지삼 선물을 하였다. 이는 청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

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선 측에서 먼저 주기도 하였다.

잠깐 있노라니 어떤 호군 기병이 바라보며 손을 휘둘러 즉시 그는 하직

하고 갔습니다. 신은 점심[中火]를 먹고 길을 떠나 전진하면서 진중에서 두

루 호장을 만나 보았는데, 호장이 마주 나와 서로 절하고 동서로 차례로 앉

아 안부를 물은 뒤에 신이 지삼과 남초 각각 한 봉씩과 연죽 하나씩을 나

누어 주니 기뻐하며 받고 사례하였습니다. 호장은 시중군 호인을 시켜 유

과 몇 그릇을 내오고 소주를 마시게 하므로 신이 사양하고 마시지 아니하

니 강권하여 마지아니하였습니다. 신은 마지못하여 몇 잔을 마시고 그만두

었습니다.48)

위의 기록은 조경남이 쓴 ꠓ속잡록ꠗ에 있는 내용이다. 1633년 조경남

이 후금의 장군에게 지삼과 남초 그리고 연죽을 선물로 주자 후금의 장

군이 기뻐하며 유과와 술로 보답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은 일본산 지삼

과 담배 그리고 담배와 관련된 도구를 청인에게 선물로 줌으로써 사교

의 매개체로 활용하였다.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도 일본산 지삼은 널리 활용되었다. 두 차례

에 호란 이후 조선과 청의 관계에서 일본산 지삼은 많은 역할을 하였다.

46) ꠓ海遊錄ꠗ 下, 「聞見雜錄」.

47) 안대회, 앞의 책, 2015, 55쪽.

48) 조경남, ꠓ속잡록ꠗ 3, 1633년 5월 11일.

조선에 담배가 유입된 이후 담배와 관련 도구는 청나라에서 담배에 대

한 높은 수요에 맞물려 주요 교역품으로 떠올랐다. 1637년 비변사에 청

하기를 “贖還使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지삼초 100근

과 담뱃대 100개를 別人情으로 지급”49)하자고 할 만큼 일본산 지삼은

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물품이었다.50)

이시해가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세 사신이 이형장을 시켜 전언하기를,

‘우리가 돌아간 뒤 攝政王과 여러 왕에게 바쳐야 할 물품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세 칙사가 각각 枝三 1,000匣씩 얻어 가기를 원하니 주상께 아뢰어

구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는데, 정 칙사는 또 그 두 배의 수량을 얻기 원한

다고 합니다. 겨울에 칙사 행차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동래에서

지삼을 사 왔었는데, 그 비축분으로 수량을 맞춰 들여보내 주겠습니다. 감

히 아룁니다.”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51)\

49) ꠓ승정원일기ꠗ, 인조 15년 윤4월 27일, “속환사가 저쪽에 도착하면 반드시

人情을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일에 따라 주선할 수 있습니다. 들으니 該

曹가 지급한 의례적인 노자는 지극히 약소하여 가지고 가는 양은 적은데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일이 성사될 가망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해조의 재력

이 근래에 상당히 쌓였고 일본에서 보낸 은자 또한 수천 냥이라고 하니 300

냥을 덜어내고, 지삼초 100근과 담뱃대 100개를 別人情으로 칭하여 특별히

제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50) 이러한 사실은 만주어로 쓰인 청나라 고문서 ꠓ舊萬州檔ꠗ에 Jisami라는 용어

가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백인의 연구에 따르면 Jisami

는 ꠓ구만주당ꠗ의 천총 5년~천총 10년 사이, 한이 귀족에게 상 또는 선물로

하사할 만큼 귀중한 물품이었다. 관련 기사에서 지삼은 Dambagu와 함께 등

장하고 있으며 1630년대를 제외한 다른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근

거에서 연유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Jisami는 ꠓ滿文老檔ꠗ에서 Kijimi로 바

뀌어 이해되었고, 海蔘 또는 海鼠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ꠓ구만주당ꠗ에 기록

된 Jisami는 당시 조선에서 사용되던 지사미의 차용어일 가능성이 크며, 이

는 일본산 담배인 지사미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백인, 「ꠓ舊萬州檔ꠗ의 Jisami

와 ꠓ滿文老檔ꠗ의 Kijimi」, ꠓ알타이학보ꠗ 제6호, 한국알타이학회, 1996).

51) ꠓ승정원일기ꠗ, 인조 25년 3월 8일.

위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동래에서 사 오는 일본산 지삼은 청

으로 가는 사행에 있어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청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청의 섭정왕과 여러 왕에

게 선물할 엄청난 양의 일본산 지삼을 필수로 챙겼다. 청의 무리한 요구

라는 것을 알면서도 청과의 관계를 위해서 거절할 수 없었던 조선에서

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52) 일본산 지삼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산 지삼이 청과의 관계에서 사용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몽골 지

방에서 소를 사는 일에 사용한 일화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평안도에서

牛疫이 발생53)한다. 우역은 같은 해 9월에는 한성에서도 발생할 만큼 널

리 확대되었다. 한성에서 소의 가격이 하락하고, 우역을 피하려고 구매한

소를 도살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을 내렸다.54) 그런데도 우역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성에서 우역

이 발생한 지 한 달 뒤에는 서쪽 지방까지 퍼져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

도 없다.”55)라고 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비책으로 가장 먼저 논의되던 것은

제주의 소를 사들이는 것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행되지 못하였

고, 이후의 몽골 지역의 소를 구매56)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52) ꠓ승정원일기ꠗ, 인조 27년 1월 30일,“또 아뢰기를 ‘발매한 뒤로 2, 3일 동안

저들이 고른 것은 수달피 744장, 청서피 762장, 녹비 44장, 궤지삼 1,000갑,

백면지 600권인데, 줄곧 물품을 바치도록 독촉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물력

이 고갈되어 구하여 들일 수가 없습니다. … 백면지는 본래 시전에 비축된

물품이 아니므로 해조에서 구하여 지급하게 해서 책임을 모면할 방도로 삼

겠습니다. 아울러 피물도 넉넉한 수량을 바치라고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독촉하고 있는데, 온갖 방법으로 설득하여도 들어줄 리가 없으니, 매우 걱

정되고 염려됩니다. 감히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다시 더욱 마음을 다

해 설득하여 시민들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없애 주라.’하였다.”

53) ꠓ인조실록ꠗ 33권, 인조 14년 8월 15일.

54) ꠓ인조실록ꠗ 33권, 인조 14년 9월 21일.

55) ꠓ인조실록ꠗ 33권, 인조 14년 10월 12일.

이 당시 몽골의 소를 사들이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인조 16년 정

월 초 5일 비변사에서 장계를 올리기를“이번에 소를 구매하기 위해 가

지고 가는 지삼은 심양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저지를 당할 염려

가 있으니 앞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57)라 하였다. 같은 시기 심양

에서 보내온 장계에는 청 조정에서 담배금지령을 내린 후 이를 어긴 자

를 엄히 다스리고 있음을 알리는 내용58)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도 조선에서는 몽골의 농우 구매를 추진하였고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대응품으로 일본산 지삼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당시 일본산 지

삼이 조선뿐만 아니라 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무엇보다도 청과의

관계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 아뢰기를, “소를 사기 위한 後運에 쓸 지삼초를 경상감사가 비축해

놓은 布木을 덜어내어서 동래부에서 사들이게 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닙니

다. 그런데 이번에 동래부사의 첩정 안에‘보낸 30동에서 28동을 덜어내어

지삼초 1,200근을 사고 2동은 소연죽 2,300개를 사서 보냅니다. …’라고 하

였습니다. 지삼초를 看品해 보니 왜의 지삼초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 장

사꾼이 파는 물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습기가 많이 스며든 것으로 봐서 이

는 필시 倭譯이 성의 없이 혹 자신들의 돈으로 쓸모없는 물건을 사서 구차

하게 숫자만 채워 보냈을 것이니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해당 왜역

을 攸司로 하여금 우선 추고하게 하고 지삼초를 다시 마련해서 바치도록

하소서. 동래 부사도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소서.” 하

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59)

위의 글은 인조 16년의 기록으로 몽골의 소를 사 오는데 일본산 지삼

을 활용한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에도 동래지역은 여전히

56) ꠓ인조실록ꠗ 26권, 인조 16년 1월 4일 ; ꠓ심양장계ꠗ, 인조16년 4월 29일의 기

록에도 역관 조효신과 김경신이 소 37마리를 사서 돌아왔다고 하였다.

57) ꠓ비변사등록ꠗ, 인조 16년 1월 5일.

58) ꠓ심양장계ꠗ 인조 16년 4월 29일 ; 5월 27일 ; 6월 8일 ; 6월 21일.

59) ꠓ승정원일기ꠗ 인조 16년 2월 28일.

일본에서 유입되는 담배 유통의 중심이었다. 그렇기에 조정에서는 소의

거래에서 사용하기 위해 질 좋은 일본산 지삼을 동래부에서 사들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담당한 왜역이 일본산 지삼이 아닌 조선에서

만든 지삼을 보내 문제가 되었다. 이 기록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지점

은 왜역이 일본산 지삼을 구매할 자금으로 조선에서 만든 지삼을 구매

하여 일본산 지삼으로 가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17세기 일본산 담배의 유통에서 중요한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 번째는 당시 일본산 담배는 조선의 담배보다 값비쌌다는 사실이다.

몽골에서 농우를 구매하는 데 필요한 일본산 지삼의 가격은 1근에 면포

1.18필60)에 해당하였다. 17세기 이후 포목 한 필은 쌀 4말 정도였으니

일본산 지삼의 가격이면 쌀 4말 이상을 살 수 있는 정도였다. 일본산 지

삼은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내린 거액의 돈이 왜역에게

주어졌고, 왜역은 이익을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자금을 횡령하고 남은

돈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국내산 지삼을 구매하여 눈속임을 하려고 했

던 것이다.

두 번째는 일본산 지삼을 모방한 조선산 지삼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일본산 지삼은 일본만의 가공법을 통해 만든 잘게 썬

담배였다. 이러한 담배가 조선에 유통되고 청에까지 전파되며 품질의 우

수함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일본산 지삼은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피울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산 지삼에 대한 인

기를 배경 삼아 고수익을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에서 생산된 담뱃

잎을 가공하여 일본산 지삼인 것처럼 판매하는 사람까지 나타난 것이다.

세 번째 시사점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조선산 지삼이 등장한 것뿐

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산 지삼과 조선산 지삼을 구별하지 못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기사를 보면 조정의 관계자가 동래부에서 올라

60) ꠓ비변사등록ꠗ 인조 16년 2월 10일.

온 지삼을 본 순간 바로 일본산 지삼이 아님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물건의 품질 정도를 자세히 살펴보는 간품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조

선산 지삼임을 알아챘다는 것은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산 지삼과 조선

산 지삼이 육안으로는 구별이 힘들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조선의 담배

가공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위의 일화를 통해 짐작해보면 일본산 지삼은 조선의 담배 발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산 지삼은 평소 가격이 1,000갑에

은자 20냥 정도에서 은자 25~26냥까지 치솟아도 구매하기 힘들 정도로

그 인기는 대단했다.61) 담배가 지닌 고부가가치는 조선 사회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농가의 확산을 불러왔다. 그들 중에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지삼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자 일본산 지삼을 흉내 내는 사람

이 생겨났고 더 나아가 일본산 지삼의 품질을 따라잡기 위한 품질 개량

도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담배 가공업 또한 발전할 수 있던 것이다.62)

白石이 또 말하기를“우리 일본 담배의 품질이 귀국의 것에 비해 어떠합

니까?”하므로, 南崗이 대답하기를 “조선의 토산품에는 못 따를 것 같습니

61) ꠓ비변사등록ꠗ, 숙종8년 3월 1일,“아뢰기를 "칙사 행차에 연속으로 소용될

잡물이 일시에 귀해졌습니다. 그 중 倭匣의 枝三값이 더욱 뛰어올랐습니다.

평소 1,000갑의 값이 은자 20냥에 불과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각 참에서 무

역할 때에 25~6냥을 지급하는데도 사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호조

에 비축된 지삼은 4만 갑에 이르니 만약 이로써 각 참의 소용되는 수량을

헤아려 1,000갑의 값을 20냥씩으로 정하여 양서에 내려 보낸다면 편리할 것

같습니다. 계속 생각컨대 지삼 만 갑의 값은 겨우 은자 2백 냥이지만 양서

의 각 고을은 재력의 고갈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각 고을에 값을 요구하기

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양서의 감사에게 분부하여 호조와 상의해서 잘 헤아

려 선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62) 18세기 서울에 생겨난 折草廛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절초는 일본산 지삼과 같이 담뱃잎을 잘게 썬 담배였다. 절초를 판매

하는 사람을 折草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葉草廛에서 담뱃잎을 사다가

잘게 썰어 사람들에게 판매했다(ꠓ비변사등록ꠗ, 영조 5년 7월 12일.)

다.”하니, 백석이 말하기를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 맛은 모르겠지만 빛깔

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것입니까?”하였다. 靑坪이 말하기를 “만약에 그 빛

깔을 취한다면, 그것은 눈으로 담배를 피우는 것이지요.”하니, 백석이 말하

기를“그러면 그 맛이 빛깔과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까?”하였다.63)

위의 내용은 1711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任守幹(1665~1721)이

사행단과 일본인 新井白石(1657~1725)와의 필담을 기록한 것이다. 백석

이 일본의 담배를 조선의 담배와 비교하자 부사로 사행에 참여한 이방

언이 “조선의 토산품에는 따르지 못할 것 같다.”라고 대답한다. 이 상황

은 단순히 조선인이 가진 조선 상품에 대한 자부심 또는 일본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말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시기는 조선산 담배의 품

질 향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로 이방언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여 대답한 것이다.

일본산 지삼의 흔적은 그 존재가 지워진 이후에도 발견된다. 조선에

서 담배 품질 개량이 이루어진 18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호남지역의 鎭

安과 관서지역의 三登에서 재배된 담배가 최상품으로 인정받았다. 사람

들은 이 두 담배를 통칭하여‘鎭三草’라고 불렀는데 柳得恭(1748~1807)

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왜국에서는 담배를 담바고라 부르고, 잘게 썬 담배를 支三伊라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의 말도 그러하다. 대개 이 풀이 본래 왜국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어를 배워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

말이 왜어인 줄을 모르고 망령되이 해석하기를 “담바고란 膽破塊라는 뜻

이니 연초의 성질이 담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지삼이는 鎭三味라는 뜻이

니, 호남의 ‘진안’과 관서의 ‘삼등’에서 좋은 연초가 생산되기 때문이다.”라

고 하는데, 그 설명이 통하는 듯 하지만 사실 견강부회가 심하다. 자고로

63) ꠓ東槎日記ꠗ, 「江關筆談」, “… 白石曰 本邦烟品 與貴邦如何 南崗曰 不及於

敝邦之產矣 白石曰 不信不信耳 其味未知 如其色不佳何 靑坪曰 若取其色

是目食也 白石曰 其味在牝牡驪黃之外耶 ….”

망령되이 해석하는 자들은 대부분 이와 같다.64)

유득공이 이 글을 쓸 때 조선에서 일본산 지삼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렇기에 당시 사람들은 지삼이 어디에서 유래한 말인지 잘 알지 못하

고 진안과 삼등에서 나는 품질 좋은 연초를 뜻하는 진삼과 같게 인지하

고 있었다. 유득공이 이 글을 쓴 것은 말에 대한 무지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지만, 담배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지삼이라는 단어가 질 좋은 담

배를 뜻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례는 대중

에게도 품질 좋은 담배로 널리 인식되었던 일본산 지삼의 인기를 방증

한다고 할 것이다.

한편, 18세기 일본산 담배와 함께 선물로서 많이 사용된 물품이 있다.

煙竹・煙管 등 흡연을 위한 도구가 그것인데, 다음의 <표 3>은 18세기 통

신사행단의 기록에서 담배와 흡연 도구 선물을 받은 내용의 대강을 정

리한 것이다.

64) 유득공 지음, 김윤조, 김종태, 김성애 옮김, ꠓ고운당필기ꠗ, 한국고전번역원,

2020, 389쪽.

출처 날짜 내용

임수간, ꠓ동사일기ꠗ 1711년 9월 4일 담배[煙草]

1711년 7월 20일 담배[煙草], 은담뱃대

1711년 9월 11일 담배[煙草]

1711년 10월 1일 담배[煙草], 담뱃대주머니

신유한, ꠓ해유록ꠗ 1718년 8월 18일 담배[南草]

1718년 9월 11일 담배[靈草]

1718년 6월 30일 담배 도구

曺命采, ꠓ奉使日本時聞見錄ꠗ 1748년 2월 24일 담배[煙草], 담뱃대, 작은 화로, 타구

1748년 3월 5일 담배[煙草], 담뱃대

1748년 3월 9일 은화로, 은 담뱃대

1748년 3월 12일 담배[煙草]

1748년 3월 27일 담배[煙草]

<표 3> 18세기 사행록에서 보이는 담배와 흡연 도구

위의 표에는 여러 특징이 드러난다. 먼저, 17세기 동아시아에서 큰 인

기를 끌었던 일본산 지삼은 더는 눈에 띄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모두 담배 산업이 발달하면서 일본산

지삼이 가졌던 특별함은 평범하게 변해갔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신 담

배에 대한 각양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남초・연초・영초・낭탕 등 좀 더 다

양한 품종의 담배가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두 번째, 담배와 관련된 도구가 다양해졌다. 담배 도구를 선물로 주는

것은 17세기에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상술한 <표 2> 홍우

재의 기록이나 남용익, 김지남의 사행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629년 사신으로 조선에 다녀간 일본 사신의 기록에는 ‘기세루[담

뱃대]’와 ‘기사미다바코’ 등을 조선의 화공에게 주며 그림을 부탁하는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65) 그런데 <표 3>을 보면 담배와 함께 선물하는

관련 도구는 담배 주머니, 담뱃갑, 담뱃대, 화로 등 굉장히 다양하다.

즉, 17세기 초 처음 담뱃잎과 함께 관을 사용한 흡연법이 전해지며 연죽

등의 담뱃대를 함께 주던 관행이 담배의 인기에 힘입어 담배 도구도 발

전・다양해지며 각양의 담배 도구를 선물로 주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에

서도 담배함, 담뱃대, 화로 등 담배와 관련된 도구가 발달하였는데 동래

에서 만든 담뱃대는 최상의 품질로 인기가 높았다.66)

65) 규장각한국학중앙연구원 엮음, 김수진 책임기획, ꠓ세상 사람의 조선여행ꠗ,

글항아리, 63~66쪽.

66) 장순순, 앞의 논문, 2020, 70~72쪽.

1748년 4월 5일 담배[煙草]

1748년 4월 17일 담배[煙草]

1748년 5월 16일 담배 도구

1748년 6월 15일 담배[莨菪]

1748년 7월 10일 담배[煙草]

趙曮, ꠓ海槎日記ꠗ 1764년 2월 25일 담배함

1764년 4월 16일 담배[煙草], 담뱃갑

各處私禮回禮 담배[煙草, 南草], 담뱃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산 담배는 담배가 전파된 첫 1세기

동안 동아시아 흡연자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67)

이후 18세기에 이르면 조선산 담배는 생산과 품질 면에서 빠르게 발전

하였다. 17세기 조선으로 유입된 외래품 중 하나였던 담배가 18세기에

이르면 청에서 조선산 담배를 최고급품으로 생각할 만큼68) 발전한 것이

다. 이러한 조선의 담배 발전에 일본산 담배가 하나의 자극 요인이었음

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4. 결론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기호품인 담배가 처음 조선에 들어

온 것은 17세기 초였다. 처음 담배가 전해졌을 때 담배는 일본에서 재배

된 담뱃잎 또는 가공된 형태로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담배 씨앗

이 유입되면서 담배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증가하였다.

담배 유통의 중심에는 통신사행과 왜관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

일 관계가 재개되면서 조선은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통신사행

단은 많은 예물을 받았는데 이 목록에 담배와 관련 도구가 포함되었다.

왜관에서도 담배의 유통이 이루어졌다. 왜관에서는 왜관을 출입하는 사

람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담배도 선물로 주었다. 이렇게 일본산 담배는

받은 사람이 주변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또는 시장을 통해서 전국에 유

통되었다.

한편, 조선에 유입된 일본산 담배 중 담뱃잎을 잘게 썬 형태로 가공된

67) 장순순, 앞의 논문, 2020, 55쪽.

68) 李海應, ꠓ薊山紀程ꠗ 권5, “人無男女老少 皆吸煙茶 細切極乾 盛以囊 吸時

以烟柸納于囊 盛茶而傳火俄吹卽爇盡 蓋洋烟稱佳品 而我國之烟 尤爲彼人

所珍.”

지삼은 17세기 동아시아의 인기품이었다. 독특한 가공법을 이용하여 만

든 지삼은 단어 그대로 조선에 전해져 지삼 또는 지삼이라고 불렸고, 청

에는 Jisami로 전해졌다. 일본산 지삼은 고가의 물품이었음에도 그 인기

는 상당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일본산 지삼을 청과의 공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적

관계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우역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청의 감시

를 뚫고 몽골의 농우를 사기 위해 최고급 일본산 지삼을 준비하기도 하

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산 지삼을 모방하여 조선산 지삼이 만들어진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일본산 지삼이 고부가가치의

상품이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담배의 인기와 그로 인한 높은 수익성

은 조선 내 담배 재배 농가의 확산과 상품경쟁력을 위한 품질 개량을

불러왔고 이 과정에서 일본산 지삼을 모방하여 조선산 지삼이 만들어지

기도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조선에 유입된 일본산 담배의 인기

가 조선의 담배 발달에 일정 부분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과 청에서 지삼의 인기는 18세기 조선산 담배의 품질 발달로 점

차 사그라졌다. 18세기 청에서 최고급품으로 인정하는 담배는 조선산

담배였다. 그러나 통신사행단이 받은 선물 목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

본산 담배와 담배 도구는 18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조선 사회에서 인

기를 끌었다.

 

논문투고일 : 2021. 6. 30 심사완료일 : 2021. 8. 1 게재확정일 : 2021. 8. 10

140 韓日關係史硏究 제7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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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introduction and influence of Japanese tobacco

in Joseon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Shin, Kyoung-Mi

This article examines the time and route of tobacco use in Joseon

Dynasty. Next, the influence of Japanese tobacco on the development of

tobacco in Joseon Dynasty was reviewed. As a result of tracking the

spread of tobacco based on the previous study, it was estimated that

tobacco in leaf or processed form was transmitted before 1610, and

tobacco seeds were transmitted between 1614 and 1618. Of course, in some

historical data remaining in Joseon Dynasty and Japan, there is a record

of the possibility that tobacco was introduced before the Imjin War, but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it was introduced in the early 17th century.

As is well known, tobacco was transmitted in the form of tobacco leaves

or processed products at the beginning of its introduction. Thinly sliced

Japanese tobacco ‘Jisam’ introduced during this period was very popular

not only in Joseon Dynasty, but also in the Qing Dynasty. In the Joseon

Dynasty, Jisam was actively used in relations with the Qing Dynasty. Jisam

was a high value-added product that was very popular despite its high

price. For this reason, Korean Jisam, which imitates Japanese Jisam,

appeared. The popularity of tobacco led to an increase in the number of

tobacco-growing farms in Joseon Dynasty, and based on this, the quality

of tobacco was also increased for product competitiveness. It seems clear

that Japanese tobacco played a certain role in the development of

tobacco in Joseon Dynasty.

【Key words】Joseon Dynasty, Japan, Tobacco, Jisam, Toshinsahaeng, Tr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