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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후기 8도 감영의 입지 특징과 관원 구성에 대한 비교 고찰/이선희.중앙대

<目 次>

Ⅰ. 머리말

Ⅱ. 8도 감영의 입지 연혁과 이전 배경

Ⅲ. 8도 감영의 관원 구성 체계와 도별 특징

Ⅳ. 맺음말

[국문요약]

이 연구는 8도제 운영의 균질성 정도와 지역적 특수성을 고찰하기 위해 조선후기 감영의 여러 요소 중 입지와 관원구성을 비교분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지방행정을 입체적 으로 추적하는 일단이 되고자 한다.

입지 연혁에 따라

첫째 조선 초기 감영이 설치된 후 변동 없이 유지된 감영,

둘째 전란으 로 이전된 감영,

셋째 변동이 잦았던 감영 등으로 분류하여 입지 특징을 분석했다.

이로써 감영 입지 기준으로 서울과의 거리, 지역이 갖는 위상, 겸임지와의 일치, 도내 중앙부 등이 작용했음을 확인했다.

감영이라는 위상은 도마다 동일하지만 도내 행정 상황과 지역적 특징 이 감영의 입지에 반영되었음을 살폈다.

8도 감영에 공통적으로 파견된 관원은 도사ㆍ순영중군ㆍ검률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관찰사의 포폄대상으로, 지방행정의 균질성 확보에 고과가 주요한 장치였다는 시사점을 얻었다.

도별로 차이를 갖는 관원은

첫째 심약과 화사군관이 조선후기에 경기에만 파견되지 않았다.

둘째 계사는 평안도 감영에만 파견되었다.

셋째 역학은 황해ㆍ함경ㆍ평안 감영에만 파견되었 는데 역학은 감영보다 병영에 훨씬 많은 인원이 파견되었다.

공통요소와는 달리 대부분 포폄을 받지 않았다.

도별 차이를 갖는 관원은 업무의 특징과 도별 특징이 연관되어 보인다.

경기는 서울을 위요하는 공간이었고, 함경ㆍ황해ㆍ평안 등은 관방지역으로 특히 평안도는 사신 행차의 주요 노정에 있었다.

핵심어 : 8도제, 관찰사, 감영, 입지, 포폄

Ⅰ. 머리말

조선 초기 확립된 지방통치체제는 전국을 8도로 나눈 도제에 기반한다.

8 도제는 道名이 정해진 태종년간을 확립시기로 하지만 道域의 개편과 道의 최 고통치자인 관찰사의 임기와 眷率, 兼牧 등에 논의가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비되었다.1)

8도제는 도별로 시기를 달리하며 진행되었지만 법제적 위상과 관찰사에 의한 관할에 있어 전국을 동일한 선상에 두어 온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경기만 보더라도 독특한 면이 많다.

도명 자체 표기도 ‘도’를 붙이지 않았고, 타도 관찰사가 모두 2년 임기가 될 때에도 경기관찰사는 1년제가 유지되었 다.2)

뿐만 아니라 감영의 위치는 한성부에 위치하였고, 영조 이후 몇몇 왕들 은 경기관찰사를 경관직으로 흡수하려고 시도했고 한시적으로 시행하기도 했다.3)

1)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356~367쪽.

2) 속대전에서 관찰사의 임기는 경기를 제외한 모든 도가 2년으로 확정되었다.(속대전이전 외관직 瓜限)

3) 이선희, 「조선후기 한성부 내 경기감영의 입지 연구」, 서울학연구 45, 2011.

경기가 갖는 독특한 道制의 일단은 조선 정부가 8도제를 구상하고 시행함 에 있어, 도별로 나름의 인식을 달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중앙에서 도제를 운영함에 있어 도별로 어떤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 은 도제 운영의 실제를 규명하는데 필요해 보인다.

본고는 감영이 갖는 도내 최고단위라는 점에 근거하여 8도 감영을 비교함으로서 도제 운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려보려 한다.

감영은 도제가 실제 적용된, 제도와 실제의 중층적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위 감영별 연구4)는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 감영에서 제도적 으로나 공간적으로 충실하게 연구되어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5)

하지 만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 감영은 두 가지 면에 제한받아 왔다.

하나는 분 단 상황에 따른 여러 단절에 기인한 것으로 황해ㆍ평안ㆍ함경의 감영이 그러 하다.

세 곳 모두 관방지역으로 군정과 지역사회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던 반면 해당 감영의 직제나 구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평안도 재정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평양감영이 다루어져 참 고가 된다.6)

한편 건축학에서 평양의 도시구조 변화와 짝하여 평안감영의 특성을 살핀 연구가 발표되었다.7)

4) 감영 연구는 관찰사제와 지방제도에 대한 다음의 선구적 연구에 기반한다. 이수건, 앞의 책;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5) 감영에 대한 연구성과를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수건 외, 경상감영의 종합적 연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04; 이훈상, 「조선후기 경상도 監營 의 營房과 安東의 향리사회-안동 향리사회의 영방 주도권 유지 전략과 향리 가계들의 상호 견제 기제」, 대동문화연구 55, 2006; 이동희, 「고지도로 본 조선후기 全州府城과 全羅監營」, 전북사학 26, 2003; 이희권 외, 전라감영연구, 전주역사박물관 전라문화연구소, 2008; 尹汶 憲, 「朝鮮朝 公州(忠淸)監營考; 位置ㆍ機構를 中心으로」, 백제문화 20, 1990; 임선빈, 「충청 감영 역사기록 정리의 성과와 과제」, 지방사와 지방문화 11-2, 2008; 원영환, 「江原監營의 史的 考察」, 강원사학 4, 1988; 조승호, 「江原監營의 行政體制와 施設의 變遷」, 江原文化硏 究 16, 1997; 오영교, 강원감영연구, 원주시, 2007; 오영교, 「강원감영의 역사성과 변동에 대한 연구」, 지방사와 지방문화 11, 2008.

6) 권내현, 「조선후기 호조의 평안도 재정 활용」, 동양학 35, 2004; 박범, 「조선후기 평안감영 재원의 성격과 물류의 추이」, 한국문화 94, 2021.

7) 홍석주ㆍ김버들, 「조선 후기 평양부의 도시구조 변화와 평안감영의 특성」, 건축역사연구 30, 2021.

또 하나의 제한점은 監營誌의 부전과 특이한 입지 상황으로 인한 사료적 제한으로, 경기감영이 여기에 속한다.

읍지에는 행적적 계통이 명확하게 구 분되어서 한성부의 지리지에 경기감영에 대한 내용이 없다.

한편 경기관찰사 는 4곳의 유수를 겸임하였는데 유수는 경관직이었으므로 4곳의 유수부 읍지 에도 경기관찰사에 대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다.

8도 감영의 통합적 비교 연구에 앞서 경기감영지의 부재를 메울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 필요했다.

필자는 그간 畿營狀啓謄錄, <京畿監營圖>, 畿 營新定事例 등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경기관찰사의 업무특징과 포폄대상, 경기감영의 입지 변화와 배경, 경기감영의 인적, 공간적 구성 등을 거칠게나 마 정리했다.8)

8) 이에 대한 졸고는 다음과 같다. 「18세기 경기도관찰사의 업무 실태와 특징-畿營狀啓謄錄을 중심으로-」 장서각 23, 2010; 「조선후기 한성부 내 경기감영의 입지 연구」, 서울학연구 45, 서울학연구소, 2011; 「조선후기 경기감영의 인원 구성과 시설 특징」, 동양고전연구 73, 2018. 부윤 (종2품) 대도호부사 (정3품) 목사 (정3품) 도호부사 (종3품) 경기 廣州 양주ㆍ수원ㆍ부평ㆍ철원

<표 2> 조선 초기 도별 계수관의 관품(밑줄 표시 : 감영소재지)

도명 설치 이전 과정 경기 수원 廣州 →한성부 반송방 →영평 → 한성부 반송방 충청 충주 공주 경상 경주 상주 → 성주 팔거현 →대구 전라 전주 (변화없음) 황해 해주 황주 →해주 → 황주 →연안 →해주 강원 원주 (변화없음) 함경 함흥 영흥 →함흥 평안 평양 (변화없음)

<표 1> 8도 감영 설치 군현과 이전 과정

이를 바탕으로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 감영의 연구성과에 많은 도움을 받고, 황해ㆍ평안ㆍ함경의 감영지에 담긴 기초 정보를 더해 8도 감영의 통합적 비교를 시작해 보려 한다.

본문에서 첫째 감영의 설치 기준과 유지 배경 및 이전 감영의 입지 기준을 도별로 구체적으로 살필 것이다.

도별 사례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감영의 입 지가 갖는 당시 기준을 추적하려 한다.

둘째 감영에 파견된 관원의 인적 구 성에서 각 도별 공통 요소와 특수성을 추려낼 것이다.

비교는 동일한 기준을 가질 때 그 분석에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인적구성은 중앙에서 파견한 관원으 로 한정한다.

이들 중 공통 구성은 8도제와 관찰사제를 운영하는데 필수적인 행정적 균질성을 담보하는 요소이므로 조선후기 지방행정운영을 살피는 기 준이 되지 않을까한다.

한편 도별로 다른 구성을 갖는 관원은 그 파견 배경 과 지역적 특수성의 연관성을 검토할 것이다. 이로써 조선시대 8도제 운영의 도별 특수성을 환기하는 단초가 되고자 한다.

Ⅱ. 8도 감영의 입지 연혁과 이전 배경

감영이 설치된 기준에 대해서는세종실록지리지의 각도 道總條에 기반 하여 도내 계수관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되었고 또 서울에서 到界지점 과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선각적 연구로 정리되었다.9)

하지만 이 기준은 감영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에 한정되므로 조선후기까지 감영의 변동 과정을 추적하여 도별 감영의 이전 배경이 어떠하였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표 1>은 조선시대 각 도 감영의 설치 이래 변동과정을 총정리한 것이다.

주지의 사실대로 감영이 처음 설치된 곳은 공통되게 도내 계수관이었다.

1393 년(태조 2)에 각도 계수관이 새로 정해졌다.10)

하지만 계수관은 전통적으로 도내에서 읍격이 높고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고을로, 道名에도 영향을 미쳤다.

<표 2>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계수관 조직을 경국대전 외관직 관품에 따라 작성한 것이다.11)

밑줄 친 고을이 조선시대 감영지다.

<표 1> 8도 감영 설치 군현과 이전 과정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표 2> 조선 초기 도별 계수관의 관품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9) 이수건, 앞의 책, 362쪽.

10)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11월 12일(계축)

11) 이존희, 「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 15ㆍ16합집, 1981, 88쪽. 조선 초기 계수관제가 유지되는 동안 전주ㆍ경주ㆍ평양ㆍ함흥의 계수관은 관찰사가 겸임했다 충청도 충주ㆍ청주ㆍ공주ㆍ홍주 경상도 경주 안동 상주ㆍ진주 전라도 전주 나주 남원ㆍ장흥 강원도 강릉 원주 회양ㆍ삼척ㆍ춘천 황해도 황주ㆍ해주 연안ㆍ풍천 평안도 평양 안주ㆍ의주 삭주ㆍ강계 함경도 함흥 영흥 길주 경원

위의 표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이 확인된다.

첫째 감영의 처음 설치 는 8도 모두 계수관에 설치되었고 전라ㆍ강원ㆍ평안 등 세 곳은 조선 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둘째이전되더라도 또 다른 계수관으로 옮겨졌다. 충청 ㆍ황해ㆍ함경 등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앞의 두 가지 특징과 대별되는 경우 로, 계수관이 아닌 고을로 감영이 확정된 경기감영과 경상감영이 있다.

경기감영은 처음에는 경기에 설치되었지만 한성부 서부 반송방으로 옮겨 진 후 조선후기 내내 유지되었다.

경상감영은 처음 이전될 때는 계수관인 상 주로 이전되었지만 전란을 겪으면서 성주를 거쳐 대구로 확정되었다.

성주와 대구는 계수관이 아니다.

다시 정리하면 8도 중 경기ㆍ경상 두 곳을 제외한 6개 도가 계수관 지역에 감영이 설치되거나 이전되었다.

이렇게 설치된 8도 감영은 그대로 유지되거 나, 몇 가지 이유로 이전되었다.

감영이 이전된 경우는 전란으로 인한 경우 와 그 밖의 배경으로 나누어 살피려 한다. 우선 변동 없이 유지된 감영부터 살펴보자.

1. 설치 후 유지된 감영의 입지 특징

감영의 설치 기준은 세종 때 경상감영에 대한 논의에 잘 드러난다.

경상감 영은 처음에는 경주에 설치되었다가 1408년(태종 8)에 상주로 옮겨졌다.

그 러자 1448년(세종 30)에 경주민이 감영을 본래대로 환치하여 줄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 논의가 벌어져 상주를 유지하자는 의견 과 상주뿐 아니라 경주에도 감영을 두자는 의견으로 갈렸다.12)

당시 상주로 의견을 낸 황희 등도 경주가 상주보다 크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렇지만 상주가 감영으로 적합한 이유는 풍화의 흐름이 상주를 경유하여 남 쪽으로 내려가기 때문이었다.

상주가 경주보다 서울과 가까워서 감영지로 적 합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논의 내용 중 경상ㆍ전라ㆍ황해ㆍ강원ㆍ평안 등도 서울과 가까워 서 감영이 설치되었다는 내용으로 5곳 감영의 설치 배경에 참고된다.

이들 중 전라ㆍ강원ㆍ평안 감영 및 전주감영의 비교군으로 함경감영을 차례로 살 펴 유지된 배경을 가늠해보도록 한다.

우선 주목되는 지역은 풍패지향인 전주이다.

전주는 조선이 개창되면서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로 승격되어 전라도관찰사가 부윤을 겸임했다.

1403년(태종 3)에 전주부로 개칭된13) 후 조선 말까지 읍격이 유지되었다.

전주의 위상은 慶基殿으로 압축된다.

태종 때 전주를 비롯해서 평양과 경주에도 태조의 어용전이 조성되었는데 잠시 태조진전이라 고쳐 불렸다.14)

1442년(세종 24)에 전주는 慶基殿으로, 경주는 集慶殿으로, 평양은 永崇殿으 로 개칭되었다.15)

12) 세종실록 권120, 세종 30년 4월 5일(경신).

13)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전주부 건치연혁.

14) 태종실록 권24, 태종 12년 11월 15일(병신).

15) 세종실록 권96, 세종 24년 6월 22일(신해).

전주는 왕의 고향이라면 함경도 함흥과 영흥은 태조 이성계와 그의 조상 들이 주로 활동한 지역이었다.

태조의 潛邸에 함흥본궁이, 환조의 구저에 영 흥본궁이 세워졌다.

함흥본궁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궁이라 칭해졌고 목조 ㆍ익조ㆍ도조ㆍ환조 및 妃들의 위판을 모셨다.

태조는 정종을 왕으로 세운 후 이곳에서 살았고 사후에 유품 일부가 그대로 보관되었다.

뿐만 아니라 태조와 신의왕후의 위판이 함께 함흥본궁에 봉안되었다.

영흥본궁은 태조가 星 祭를 지낸 것으로도 전해진다.

태조는 1396년(태조 5)에 영흥본궁을 창건했 고 태조 훙서 후 태조와 神懿王后의 위판이 이곳에 봉인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고 1665년(현종 6)에 재차 중수했다.

1696년(숙종 22)에 함흥본 궁과 영흥본궁에 神德王后의 위판이 추향되었다.16)

그런데 감영지의 유지와 이동이라는 면에서는 전주가 함흥에 비해 그 위 상이 명실상부함을 엿볼 수 있다.

풍패지향이라 해도 반란이 전혀 없었던 것 은 아니었다.

전주에는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있었고, 함흥 에는 1467년(세조 13)에 길주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에 가담한 함흥민이 관찰사를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함흥은 이로 인해 1470년(성종 1)에 郡으로 강등되고 감영이 영흥으로 이 전되었으며 道名도 함길도에서 영안도로 바뀌었다.

함경도 감영이 이전된 것 은 이 때뿐이다.

감영이 다시 함흥으로 돌아온 것은 1509년(중종 4)으로 道 名도 함경도가 되었다.17)

16) 강석화, 「영ㆍ정조대의 함경도 지역개발과 위상강화」, 규장각 18, 1995, 51쪽.

17) 여지도서 함경도 건치연혁.

전주는 전란으로 경기전 등이 파괴될 정도로 피해가 컸을 때도 감영은 이 전되지 않았다.

감영의 이전은 없었지만 후기로 가면서 감영지에 대한 논의 에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감영을 전주에 세 울 것을 건의하면서 나주와 전주를 견주어 평 한 부분이 그것이다.

전라감사 이홍로는 나주 와 전주의 단점을 말하면서 나주는 下道에 치 우쳐 있고, 전주는 上道에 치우쳐 있다고 했다.

<지도 1>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도 1> 전라도 전주와 나주 (<해동지도>)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하지만 전주는 영남과의 접경이 멀지 않을 뿐더러 호서와도 가깝고 물력도 조금 나은듯하 니 감영지로 적합하다고 보았다. 당시 체찰사 이덕형과 논의하여 감영을 전주에 둘 것을 건 의했다.

아울러 전주부윤을 파하여 관찰사가 겸임할 것을 청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18)

18) 선조실록 권136, 선조 34년 4월 9일(병자).

<지도 2> 강원도 원주ㆍ강릉 및 평안도 평양ㆍ안주(<해동지도>)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감영지는 그대로 전주로 확정되었지만 왕조의 기흥지라는 전주의 상징성 에 더해서 지역적 편의성을 함께 거론한 점이 흥미롭다.

유영화된 감영의 위 치가 갖는 실제적인 영향을 관찰사와 체찰사가 고려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때 경상감영에 대한 논의에서 서울에 가까운 계수관에 감영을 둔다 는 기준은 강원감영과 평안감영을 지도에서 확인하면 쉽게 이해된다.

도명에 포함된 각각의 계수관을 보면,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이다.

위의 강원도 지도를 보면 동해안에 인접한 강릉에 비해 원주는 현격하 게 서울에 가까울뿐더러 경기와 잇닿아 있었다.

<지도 2>의 평안도 지도에서 평안도의 도계는 평양으로 안주보다 서울에 인접했다.

뿐만 아니라 평양은 종2품 부윤, 안주는 정3품 목사로 평양이 관 품상 위였다.

하지만 강원도는 같은 정3품관이지만 강릉이 대도호부사, 원주는 목사가 다스렸다.

원주는 산과 산 사이에 들판이 섞여 있고 경기와 영남 사이에 끼여서 동해로 수운하는 생선ㆍ소금ㆍ인삼과 棺槨과 궁전에 소용되는 재목 따위가 모여 들어 하나의 도회가 된 곳이라 전한다.

또한 난리에 피하기가 쉽고, 서울과 가까워 벼슬길에 나갈 수 있어서 한양 사대부들이 여기 살기를 좋아한다고 평해진 곳이다.19)

강릉이 아닌 원주에 감영이 설치된 것은 서울과의 거리에 더해 당대 평가 대로 조운의 편리함과 토지 結數에서 강릉보다

원주가 월등히 많았던 경제적 조건도 함께 고려된 면이 있다.20)

19) 이중환, 택리지팔도총론 강원도.

20) 오영교, 강원도감영연구, 원주시, 2007, 32쪽.

2. 전란으로 이전된 감영의 입지 특징

충청도 감영은 1395년(태조 4)에 충주에 처음 설치되었다.

충청감영의 이 전 배경은 여지도서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으로 충주가 초토 화되어 1603년(선조 36)에 공주로 이전했다는 것이 그것이다.21)

<지도 3>에서 충주와 공주의 위치를 확인해 보면, 충주는 서울과 가깝고 청주와 공주는 충주보다 도내 중앙에 가깝다.

그런데 공주는 토지 결수와 인 구수에서 충청도 군현 53개 중 가장 수위를 차지했다.22)

<지도 3>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21) 여지도서 충청도 관찰영. 한편금영지에는 1600년에 공주로 감영이 이전되었다고 전한다. 몇 년의 차이에 대해 윤문헌은 장차 유영제를 위한 기초를 창설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윤 문헌, 「朝鮮朝 公州(忠淸)監營考; 위치ㆍ기구를 중심으로」, 백제문화 20, 1990, 44쪽)

22) 박범, 「조선후기 공주목 읍치의 공간 구성과 성격」, 충청학과 충청문화 28, 2020, 113쪽.

 

감영이 선조 때 공주로 이전되면서 선화당 등 감영의 독립관청도 건립되 었다.

공주로 감영지가 결정된 이후 고을 내에서 변동이 잦았다.

금영지 <선화당이건기>에 따르면 1600년에 감영을 세웠고 1603년에 감영을 산성 안으로 옮기고, 1604년 城池가 협소하여 읍내 구영으로 돌아갔다가 1645년 산성내로 감영이 한차례 더 이전되었다가 1653년에 읍내 구영으로 환치되었다. 1707년에 새로운 감영이 봉화산 아래에 신축되었다.23)

충청도에 비해 경상도 감영 이전은 보다 복잡한 과정을 밟았다.

조선 초기 경주에 감영이 설치된 것은 고려의 유제에 따른 것이다.24)

감영이 경주에서 상주로 옮겨진 것은 1408년(태종 8)으로 보인다.25)

1412년(태종 12)에 관찰 사가의 겸목을 폐지하고 상주에 새로 판사를 임명한 것26)을 보면 상주가 여 전히 감영임을 알 수 있다.

경상도는 땅이 넓고 인구가 조밀하다는 이유로 수차례 낙동강을 경계로 좌ㆍ우도 분도에 대해 조선전기에 지속적으로 거론되었다.

1519년(중종 14) 에 좌ㆍ우 감사로 나누어 낙동강 동쪽은 좌감사 소속으로, 낙동강의 서쪽은 우감사 소속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해에 폐단이 많다는 이유로 다 시 한 개 도로 환치했다.27)

23) 윤문헌, 앞의 논문, 45쪽.

24) 고려사 권57, 지 권11, 지리, 경상도, 동경유수관 경주. 1376년(우왕 3)에 안렴사의 營을 설치 하는 논의에서 경주로 정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5) 태종실록 권16, 태종 8년 7월 13일(기미).

26) 태종실록 권24, 태종 12년 8월 1일(계축). 27) 여지도서 경상도 관찰영.

<지도 3> 충청도 공주와 충주(<해동지도>)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분도 문제는 전란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592년(선조 25) 에 임진왜란으로 도로가 불통되자 좌ㆍ우감사로 나누어 좌감사는 경주에, 우 감사는 상주에 두고 병사와 수사의 일을 지위하게 했다.

1593년(선조 26)에 다시 하나로 합쳐 감영을 성주의 팔거현에 두었으니 곧 총병 유정이 주둔했 던 곳이다.28)

1595년(선조 28)에 다시 좌ㆍ우로 나뉘었지만 1596년(선조 29)에 하나로 합해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경상도의 중앙에 감영이 설치되었 다.

전란 중에 설치된 대구감영은 병화를 입어 곧 혁파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601년(선조 34)에 체찰사가 다시 보고를 올려 대구에 감 영을 두어 부사를 겸하며 솔권할 것을 요청하여 시행되었다.29)

<지도 4>는 경상도 감영의 이전 과정을 도식화한 것이다.

<지도 4> 경상도 감영지의 이동과정 (<해동지도>위에 편집)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신라의 수도였고 고려의 동경이었던 경주는 조선 초기에 도내 최고 행정기구인 감영이 설 치되었다.

그러나 상주로 이전되었고 전란을 거친 후 최종적으로 대구에 감 영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대구는 계수관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초기 계수관제가 고려에 이어 유지되었지만 도제의 행정적 체계에서 계수관은 그 역할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30)

 

28) 팔거는 험애함이 자못 믿을 만하다고 평가되었다.(선조실록 87, 선조 30년 4월 21일(신사))

29) 여지도서 경상도 관찰영.

30) 이존희, 앞의 논문, 124쪽.

대구가 도내 중앙이라는 입지에 따라 감영이 설치되었고 조선 말까지 감영 이 유지된 것은 조선후기 8도제에 대한 운영실제를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계수관제가 조선 초기에 행정단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 도내 행정에 최적지로 도내 중앙부가 고려된 점은 道制 운영에서 실제적 효과가 지역민에게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기타 이전 배경별 입지 특징

경기와 황해감영은 8도 감영 중 이동이 가장 잦았다.

경기감영은 광주 → 한성부 반송방 →영평 →한성부 반송방 순으로, 황해감영은 황주 →해주 → 황주 →연안 →해주 순으로 이동했다.

경기감영을 먼저 보자.

수원에 설치되었던 경기감영이 廣州로 옮겨진 이 유는 감사의 겸임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31)

관찰사의 겸임처로 감영을 옮긴 사례가 주목되는 것은 2년 임기제ㆍ솔권제 등과 함께 관찰사제의 주요 쟁점이 겸목제이기 때문이다.

경기감영이 廣州에서 한성부 내로 들어선 시점은 1457년(세조 3) 경기관 찰사의 제도 변화와 입시의 시작, 그리고 1454년(단종 2)에서 1455년(세조 1) 사이에 마련된 돈의문 밖 김종서 가옥 공간 수용 등을 고려하면 1457년 (세조 3)으로 추정된다.

세조 때 반송방에 들어선 경기감영은 광해군 때 국방수비의 이유로 영평부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영평부 감영을 외영으로 부르 고, 京營과 함께 운영되면서 경기감사는 대부분 경영에 머물렀다.

인조 때 이괄의 난을 계기로 경기감영은 반송방으로 환치되었고 이후 변동 없이 유지 되었다.32)

31) 세종실록 권120, 세종 30년 4월 5일(경신).

32) 경기감영의 설치와 이전 배경 및 입지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고된다.(이선희, 앞의 논문, 2011)

경기감영을 세조년간에 한성부로 옮긴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경기 감영이 한성부에 입지함으로써 얻은 편의성은 경기 어느 지역에 위치하는 것 보다 높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편의성 첫 번째는 경기가 도성을 에워싸고 있어 한성부에 위치함으로써 경기 도내 중앙부에 감영이 입지하게 된 것이다.

경기는 중국 제도에서 연원 한다.

당에서 京都 治所 지역을 京縣으로, 경도 旁邑 지역을 畿縣으로 편제 한 것이다.

995년(성종 14) 개주가 개성부로 승격되면서, 개성부 주변에 경현에 해당하는 赤縣 6고을과 畿縣 7고을이 설치되었다.

이후 고려 현종 때에 이르러 적현과 기현 13고을을 합쳐 경기라 통칭했다.33)

이런 연원으로 말미암아 경기는 행정 道名이지만 왕성을 위요하는 공간 범위에 대한 개념어기도 했다.

고려 때부터 사용된 경기라는 이름은 조선에도 사용되었지만 왕성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바뀜에 따라 경기 권역도 변화가 필요했다.

태조는 조선 개창 직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경기의 도계 범위는 크게 변화했다.

왕성 중심의 경기 권역 정비는 태조와 태종 때에 진행되었 다.

이로써 이전 경기권역에서 북쪽을 베어내고 남쪽을 확장하여, 왕도와 경기 군현 간의 원근이 이전보다 등치되도록 다듬어 졌다.

경기 권역의 편제가 마무리된 1414년(태종 14)에는 종래의 경기 좌ㆍ우도를 고쳐서 다만 경기로 도명이 확정되었다.34)

두 번째는 경기감사의 업무 특성인 잦은 입시와 행행 업무 등을 수행하는 데 한성부 입지가 유효했다.

경기감사는 농형 보고 등을 위해 잦은 입시를 했다.

정조 때만 보더라도 경기감사의 입시 횟수는 월평균 2.5회였다.35)

한 편 경기관찰사는 타도에 비해 왕의 행행을 지원하는 업무량이 상대적으로 높 았다.

왕이 능과 원에 행행하는 것은 조선후기가 되면 길례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경기는 도성을 둘러싸고 있어서, 왕이 어디에 행차를 하든, 경기 지역을 거쳐야 했다.36)

33) 고려사 권56, 지제 10, 지리 1, 왕경개성부.

34) 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1월 18일(계사).

35) 이선희, 앞의 논문, 2010, 90쪽.

36) 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10월 2일(신해).

이처럼 한성부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감영은 도성을 감싸고 있는 경기권역 의 특징상 경기의 중앙부에 입지한 결과가 되었다.

한편 잦은 입시 등의 경기관찰사의 업무 특징에 효율적인 입지로서 기능했다.

다음으로 황해도를 살펴보자.

1408년(태종 8)에 풍해도에 파견된 관직명을 보면, 풍해도 도관찰사가 판황주목사를, 풍해도 병마도절제사가 판해주목 사를 겸임하고 있다.

즉 황주에 도관찰사가, 해주에 병사가 머물렀다.

풍해도는 1417년(태종 17)에 황해도로 고쳐지고37) 감영은 해주에 처음 설치되었 다.

새로운 도명에 따라 황해감영이 해주에 설치된 것이다. 관찰사는 해주목 사를 겸임하고 솔권하기 시작했다.38)

하지만 해주에 병영이 있었던 舊例는 이후에도 조정에서 자주 언급되었 다.

1449년(세종 31)에 해주는 절제영이 되고 황주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감 영과 절제영을 맞바꾼 이유는 황주가 땅이 좁아서 군사를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감영보다 병영의 입지에 대한 고려가 우선한 듯하다.39)

1593년(선조 26) 비변사에서 병영 설치와 관련하여 황해도 각지의 특성을 언급하여서, 해주와 황주의 특징을 알 수 있다. 해주는 황해도 24개 읍과 원 근이 하루 이틀 노정이었고, 황주는 병영으로 칭해져서 유방군이 번을 나누 어 출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병영에 대한 논의는 해주에 설치하는 것 으로 결정되었다.40)

이로써 해주에 병영이, 연안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지도 5>에서 연안의 위치를 보면 해주보다 서울에 보다 인접하여 있다.

<지도 5> 황해도 해주와 황주 및 연안의 위치(<해동지도>)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감영을 도내 군현 중 서 울과 가까운 곳에 둔다는 초기 기준에 부합하는 지역이다. 그렇지만 전통적 으로 황해도의 대읍은 해주와 황주여서인지 연안에 감영이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해주에 병영이 생긴 다음 해인 1594년(선조 27)에 해주에서 황주로 병영이 이전되었다.41)

이후 해주와 황주는 한쪽이 감영이 되면 한쪽은 병영이 되는 호환을 반복했다.

해주와 황주는 황해도의 두 곳뿐인 계수관이라는 공통점과 지도에서 확인되듯 해주가 황주보다 서울에 가깝다는 특징이 비교된다.42)

37) 태종실록 권34, 태종 17년 12월 3일(갑신).

38) 여지도서 황해도 관찰영.

39) 세종실록 권125, 세종 31년 8월 25일(임신).

40) 선조실록 권39, 선조 26년 6월 26일(기유).

41) 여지도서황해도 병영

그런데 황해도는 서울 경기 지역의 북방 외곽방어에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변경인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외부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할 경우 황해도가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지만 지형상 산악이나 협곡이 없어 용이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황해도 군사는 평시에는 평안과 함경 강변 지역의 방어를 지원하려고 赴防하였고 긴급한 때에는 경기 일대를 방어하는 데 동원되었다.43)

이처럼 황해도는 民政과 軍政의 양축이 상시로 갈등하는 지역이었다.44)

42)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11월 12일(계축).

43) 강석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비체계」, 한국문화 38, 2006, 367쪽.

44) 황해도 지역의 민정과 군정의 업무 충돌 및 군정에 대한 비중에 대한 당대 논의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이선희, 「조선후기 황해도 수영의 운영」, 한국문화 36, 2006)

앞서 살핀 황주의 절제영을 해주로 옮겼던 세종 때의 결정이 이해되는 대목 이기도 하다.

황해도 고을 중 전통적으로 규모가 컸던 해주와 황주 중에서 서울과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황주에 비해 넓은 해주는 한편 감영으로서, 아 울러 병영으로서 그 입지가 적합했다.

해주와 황주의 호환과정을 보면, 1598년(선조 31)에 병영은 해주로. 1601 년(선조 34)에는 병영이 황주로, 1612년(광해군 4)에 해주에 다시 병영이 설 치되었고, 1641년(인조 19)에 황주로 재차 옮겼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 해주감영과 황주병영은 변동 없이 그대로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표 3> 조선후기 중앙에서 감영에 파견된 관원의 도별 상황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이처럼 황해도 감영은 계수관 중 서울에 가까운 해주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또 다른 계수관인 황주에 감영이 옮겨진 후 병영과 감영이 호환되는 과정을 밟다가 해주가 감영으로 확정되었다.

이상에서 감영의 설치 후 이전된 배경과 연혁을 살폈다.

각 도별 감영의 최종 입지 위치를 비교하면 조선시대 감영의 선정 기준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서울과의 거리,

둘째 왕의 고향 혹은 관방이라는 지역적 위상,

셋째 겸임지와의 일치,

넷째 도내 중앙부 등이다.

Ⅲ. 8도 감영의 관원 구성 체계와 도별 특징

1. 도별 감영 소속 관원의 공통 구성과 특징

중앙에서 파견된 감영 소속 관원은 법전에 명기되어 있는데 읍지 감영조 를 대조군으로 삼으면 교차 확인할 수 있다.

<표 3>은 법전과 지리지류 내용을 총합한 것으로 8도 감영의 관원 구성에서 8도에 동일하게 파견된 관원은 도사ㆍ순영중군ㆍ검률이다.

이들은 모두 관찰사에게 고과를 받는다는 점이 중요한 공통점이다.

관찰사는 매년 6월과 12월에 포폄장계를 왕에게 보고해야 했다.45)

실제 포폄장계를 봐도 법전에 지정한 달에 장계가 작성되었고 위 공통관원들이 포함되었다.46)

각 관원별로 업무 특징을 살펴보자.

도사는 관찰사 유고시에 그 임무를 대행하기도 하여 亞監司로 호칭되었 다.

조선 초기부터 수령관이라고도 불렸던 관찰사의 보좌관은 도사와 경력이 었다.

경력은 세종실록지리지 경기 항목에는 관찰사의 바로 次席에 종4품 경력이 설치되어 있다.47)

경력은 1404(태종 4)에는 관품이 정3품으로 通政 이 경력에 임명되어 관찰사를 보좌했다.48)

그러나 세조 때49)에 경력이 혁파 되고50) 감영의 수령관으로 도사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경국대전에는 경력이 기재되지 않았다.51)

도사 제도의 확립은 경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경기를 분할하여 경기좌우도를 만들고 양도에 각각 관찰사를 두고 수령관으로 하여금 보좌케 했다.

수령관은 경력과 도사로, 관품이 4품 이상이면 경력으로 5품 이하이면 도사로 임명했다.52)

45) 경국대전 吏典 褒貶.

46) 기영장계등록 1783년 12월 13일, 1784년 6월 13일.

47)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48) 태종실록 권8, 태종 4년 8월(을묘). 이때 감영 이외의 다른 관아의 경력은 모두 종4품으로 종전대로 했다.

49) 경력의 혁폐 시기는 이존희는 세조 12년으로, 이희권은 세조 11년으로 보고 있다. 전자는 세종 실록 지리지 의 내용에 따라, 후자는 증보문헌비고에 따라 각각 주장했다.

50)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6, 경기, “省經歷 只置都事”.

51) 도사직에 대한 연구 논문은 매우 적은 편이다. 조선후기 도사의 기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이 희권, 「조선후기 도사의 지방통치행정 기능」, 수촌박영석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1992) 외에 는 관찰사제에 대한 연구에서 감영 기구로서 간략하게 언급되거나 도사의 교체실태에 대한 고찰이 있는 정도이다.(장병인, 「조선초기의 관찰사」, 한국사론 4, 1978;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연구, 일지사, 1990; 이원균, 「조선시대 관찰사와 도사의 교체실태」, 부산수산대 논문집 27, 1981)

52)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연구, 일지사, 1990, 76쪽.

도사가 종5품으로서 각 도에 1명씩 제도적으로 배정된 것은 성종대의 일 이다.53)

이후로 도사는 1882년(고종 19)에 혁파되기까지54) 8도에 파견되었 고 법전에 제한된 관품은 종5품이다.

여지도서 감영조를 보면, 8도 감영의 도사는 임기가 동일하게 1년이다.

순영중군은 관찰사의 군사업무를 보좌했다.55) 왜란ㆍ호란을 겪으면서 각 도 관찰사의 업무 가운데 군사업무가 더욱 중시되자 종전에 관찰사가 自辟 해서 차정했던 군관 대신에 무반직 정3품 당상관 중군을 병조에서 차송했다.

일례로 함경도 감영 중군을 보면, 관찰사가 자벽하다가 1604년(선조37)에 비 로소 임금이 추천한 후보자 중에서 임명했다.56)

경기 중군은 타도에 비해 가장 늦게 설치되어 1768년(영조 44)에 신설되었다.57)

순영중군은 감영직제에서 관찰사 다음으로 관등이 높았다.

관찰사를 대신 하여 도내 수령과 찰방ㆍ별장들의 延命을 받기도 했다.

유영체제로 바뀌면서 중군이 신설됨과 동시에 각종 군관과 武士ㆍ병사들이 대량 감영에 배속됨으 로서 감영의 위용이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58)

순영중군은 대전통편부터 법전에 새로 설치되어 8도에 1명씩 배치되었 다.59)

53) 이존희, 앞의 책, 109쪽.

54) 증보문헌비고 직관 17, 都事, “今上十九年 廢各道都事”

55) 여지도서에 각 감영 중군조를 보면, 중군의 업무를 “佐治觀察使軍務事”로 규정했다.

56) 여지도서 함경도 감영 관직.

57) 증보문헌비고 권234, 직관고21, 외무직1, 중군.

58) 이수건, 「경상도감영의 성립과 직제」, 경상감영의 종합적 연구, 2004, 43~44쪽.

59) 대전통편 兵典 京畿.

법전에 순영중군이 명기됨으로써 병조에서 임명하여 감영으로 파견하 는 정식 보좌관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순영중군도 관찰사의 포폄대상이 되어 정기적으로 고과를 받았다.

검률은 종9품 無祿官이다.

법률 조항을 상고하고 형사사건에 따라 적절한 조문을 확인하여 사송업무에 조율의 정확성을 확보하는 직무를 맡았다.

경 국대전에는 각 도 감영에 1인의 검률이 파견되었다.

단, 전라도는 감영 외 에 제주에도 검률이 파견되었다.

속대전에는 변화가 없다가 대전통편에 이르면 개성부와 강화부에 검률이 증치되었다.60)

검률은 사법적 직단권의 적용을 살필 수 있는 지표라서 검률이 파견된 행정단위를 살피는 것은 의미 가 있다.

강화부는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검률이 파견되었고 流刑 이하의 죄에 대한 직단권을 갖게 되었다.61)

이후에 검률은 19세기 후반에 통제영과 한성부에 증치된 것으로 보인다.

통제영에는 1870년 말에 신설되었다.

병영에 검률이 파견된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통제영이 고성에 있어 고성현령을 판관으로 낮추고 통제사가 고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관제를 변통한 결과였다.62)

즉 통 제사에게 검률이 파견되었지만 이것은 고성 수령을 겸임하는 통제사에게 파 견된 것이다.63)

60) 대전통편 이전 경관직 종2품아문 개성부, 강화부.

61) 대전통편 형전 추단 강화부직단.

62) 승정원일기 고종 7년 6월 29일(갑자).

63) 이훈상, 「조선후기 중인의 지방 파견제도와 그 실상」, 대동문화연구 113, 2021, 505쪽.

검률은 형률의 적용과 함께 律文의 교육을 담당했다.64)

<표 4> 전국에 파견된 검률의 수효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검률의 임기는 법전에는 없지만 여지도서 감영지에 자세하다.

각 도별 검률 주관 기관과 임 기를 정리하면 <표 5>와 같다.

<표 5> 여지도서 감영조 검률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위 표를 보면 강원감영의 검률만이 2년의 임기를 가졌고 충청ㆍ평안ㆍ황 해ㆍ경상ㆍ함경 등 5개 감영의 검률은 15개월을 임기로 했다. 검률을 試才하 여 差遣하는 곳은 충청에만 이조에서 심약과 검률을 차견했다.65)

강원ㆍ평 안ㆍ황해ㆍ경상ㆍ함경 등의 감영에는 형조에서 시재하여 차견했다.

경기감영 검률의 임기와 파견 담당처도 타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 로 보인다.

경기감영 검률의 역할은 경기감영 소속 검률의 포폄장계에서 그 일단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1783년 12월과 1784년 6월에 작성된 포폄장계 를 보면, 당시 포폄을 받은 검률은 李允迪이었고 ‘上’을 받았다.

검률을 포폄 하는 기준은 율문 한 가지 조항이었다.66)

64) 대전회통 이전 외관직. 법전에 규정된 정원에 따라 각 도에 파견된 검률은 죄의 경중에 따라 형률을 적용하거나(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3월 5일(을묘)) 각도에 파견된 검률이 율문을 가르쳤다.(세종실록 권5, 세종 1년 8월 12일(갑신))

65) 충청도 관찰영조를 보면, 심약과 검률을 하나로 묶어 “審藥檢律 竝自吏曹試才差遣 十五朔交遞”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심약은 전의감과 혜민서의 의원 중에서, 검률은 형조 소속 관원 중에서 試才하여 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66) 기영장계등록 1783년 12월 13일, 1784년 6월 13일.

2. 관원 구성 차이에 나타난 도별 특징

<표 3>을 환기하면 감영에 파견된 관원 중 審藥과 畫師軍官67)은 경기에 만 파견되지 않았고, 計士는 평안도에만 파견되었으며 譯學은 변경지역인 평 안ㆍ황해ㆍ함경 감영에만 파견되었다.

이들 관원의 업무 특징을 살펴보고 도 별 특징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자.

<표 6>을 보면 감영에 파견된 심약은 무록관으로 대부분 예조에서 파견했 다.

<표 6> 여지도서 감영조 심약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임기는 15개월에서 2년까지로 도마다 차이가 있었다.

심약에 대한 자세 한 규정은 惠局誌68) 연혁조 외임 항목에서 찾아진다.

심약의 주된 업무는 진상하는 약재를 간심하고 士庶군병을 구료하는 등의 일이었다.

兩都目 취재에서 분수된 차례에 따라 차출되고, 임기는 16개월, 일수로는 480일로 했다.69)

舊例에 임기를 채우면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차례 에 따라 파견하였는데 매번 파견되는 심약의 수효에 많고 적은 폐단이 생겼 다. 1765년(영조 41) 이후로는 月令醫員처럼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교대 임 명하도록 바뀌었다.

감영의 심약은 약재진상과 士庶軍兵의 치료 등을 병행했 고 병영심약은 군병의 치료 업무만 했다.

하지만 함경 북병영ㆍ남병영, 평안 의 심약 3원은 감영심약과 마찬가지로 약재 진상을 담당했다.70)

67) 충청ㆍ함경 감영은 화사로, 황해감영은 화사비장이라 했다.(여지도서 충청도 관찰영, 함경도 관찰영, 황해도 관찰영 관직) 본고에서는 화사군관으로 일원하여 표기한다.

68) 혜국지(奎 7361)는 1719년(숙종 45)에 久任官 姜渭聘이 작성한 것으로, 1778년(정조 2)에 卞泰恒등에 의해 重修되었다. 혜국지에 대한 다음의 연구가 있다.(박훈평ㆍ안상우, 「혜민서 관청지 혜국지 편제와 내용 연구」, 한국의사학회지 27, 한국의사학회, 2014)

69) 혜국지 연혁 외임 심약. 70) 박훈평ㆍ안상우, 앞의 논문, 124쪽.

그런데 경기감영의 심약은 근무일수도 타도에 비해 짧은 1년이었고 설치후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1689년(숙종 15)에 복구되었고 1700년(숙종 26)에 혁파되어 대전통편에 반영되었다.71)

심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전하는 혜국지에도 경기감영에만 혁파한 이유는 적혀 있지 않다.

폐지 이유에 대 한 몇 가지 단서를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심약의 업무 특징과 경기의 지역적 특징이 고려될 만하다.

심약은 관찰사나 병사 등 외관의 군의관이고 진상 약재의 간심을 맡았다.

그런데 경기 감영은 입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대문을 나서면 바로 감영이 있었다.

더욱 이 경기에는 병영이 없었다.

타도 병영에 심약이 파견된 점과 비교할 때 시사점 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경기관찰사는 개성ㆍ강화ㆍ수원ㆍ광주 등 4도 유수부의 경관직 유수를 겸임하고 있었다.

결국 서울과 멀리 떨어진 외관에 근무하는 지방관과 장수를 살피는 심약이 경기감영에 파견될 실제적 필요는 매우 낮았다. 둘째 경기가 에워싸고 있는 도성과 성저십리에 구료기관이 있었다는 점이 다.

도성 안에는 혜민서가, 도성 밖에 활인서가 있었다.

동활인원은 동소문 밖에, 서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있어서 각각 大路와 연결됐고, 빈민과 환자들 에게 약재를 무료로 나누어 주는 구료기관의 기능이 강했다.72)

또한 활인서 에는 수용자를 위한 숙소ㆍ병도 및 한증소 등의 치료소가 부설되어 있어 도 성의 환자를 구료할 뿐만 아니라 도성으로 모여드는 빈민과 환자를 돌보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73)

71) 혜국지 연혁 외임 심약.

72) 이규근, 「조선시대 의료 기구와 의관 : 중앙 의료 기구를 중심으로」, 동방학지 104, 1999, 151 쪽.

73) 이선희, 「조선후기 성저십리에 위치한 관서의 종류와 입지 특징」, 장서각 41, 2019. 2

심약이 경기의 지역적 특징과 관찰사의 업무 특징과 연동되었다면 화사군 관이 유독 경기감영에만 파견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까?

화원이 지방에 파견된 것은 1703년(숙종 29) 또는 1704년을 시작으로 한 다.

이때는 통제영이나 병영 및 수영에만 파견되었고 감영은 포함되지 않았 다.

1740년(영조 16)에 전국 감영에 裨將 一窠를 화사군관으로 채워서 화원 을 파견했다.74)

감영에 화원 파견을 시행할 초기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숙종과 영조 때 설치된 화사군관으 로 파견된 화원은 도화서 화원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75)

화사군관은 관찰사가 중앙에 올려 보낼 도형을 그리거나 지방의 실정을 전달하는데 시각적 효과를 마련하는데 일조했다. 더하여 파견처의 국가 역사 에도 역할을 담당했다.

1797년(정조 21)에 함흥 본궁의 풍패루를 중건할 때 함경도 감영 소속 화사군관 이명규가, 1799년(정조 23)에 황해도 곡산부의 聖后私第의 舊基에 비각을 건립할 때는 황해도 감영의 화사군관 이사집 등이 참여했다.76)

감영에 파견된 화원은 중앙에서 필요에 따라 소환되기도 했다. 일례로 영 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에서는 충청감영에 移文하여 당시 화사비장으로 파견 된 화원 張壁萬을 공문이 도착한 즉시 역말에 태워 올려 보내도록 했다.77)

이때 서울에 있는 화원은 대부분 서툴 뿐만 아니라 장벽만은 이런 일을 여러 번 해 보아서 비할 데 없이 숙련된 사람이라 평한 부분이 주목된다.

화원 중 선발되어 지방에 파견된 경우 처우가 나았다는 점에서 지방에 파견된 화 원의 실력이 출중했다는 점을 반증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영조가 전국 감영에 화사군관을 파견할 때에 경기감영에도 화원이 배치되 었다.78)

대전통편을 보더라도 전국 감영ㆍ병영ㆍ통영ㆍ수영에 화원 1인씩 을 군관의 정원 안에서 차출하여 보낸 것이 명시되었다.79)

그러나 어느 시점 에선가 화사군관은 파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80)

74) 승정원일기 1745년(영조 21) 4월 21일(계해). “庚申年渠輩上言, 自本曹覆奏, 各道監營裨將 一窠, 以畫員啓下率去事, 判下.”

75) 이훈상, 「조선후기 지방 파견 화원들과 그 제도, 그리고 이들의 지방 형상화」, 동방학지 14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8, 501쪽.

76) 이훈상, 앞의 논문, 2008, 341쪽.

77) 嘉禮都監儀軌 英祖貞純王后 도청의궤, 移文秩. 기묘(1759년(영조 35)) 5월.

78) 승정원일기 1745년(영조 21) 4월 21일(계해). “益炡曰, 臣旣爲回啓, 故在畿營時, 率去畫員 矣.”

79) 대전통편 병전 군관 총론.

80) 이훈상, 앞의 논문, 2008, 310쪽.

기영신정사례에는 경기감영 소속 관원과 관속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군관 4명이라고만 적혀있고 화사 혹은 화사군관은 없다.81)

여러 정황을 살펴보더라도 경기감영에만 화 사군관이 파견되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미제로 남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계사는 전국에서 평안도 감영에만 유일하게 파견되어 평안도 재정의 특수 성을 보여준다.

계사는 산학청 소속으로 지방에 파견된 경우는 평안감영 한 자리뿐이었다.82)

평안감영에 파견하는 계사는 호조에서 뽑아 보냈고 임기는 2년이었다.83)

평안도는 조선 초기부터 감영이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여 건물 이 건립되었고, 관찰사는 2년 임기로 평양부윤을 겸임하며 率眷했다.84)

평안도는 변방이라는 지역적 입지에 더해 의주대로를 통해 중국 사신이 오가는 중요 길목으로 사신접대가 행정적 특징 중 큰 부분을 차지했다.

이를 위해 호조에서 거두어야 하는 田稅는 그대로 평안도에 남겨져 호조의 재원으 로 활용되지 못했다.

평안도가 다른 도에 비하여 재원이 풍부하다고 일컬어 지는 이유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평안도 지역사회의 구조적인 특징은 이러한 재정 운영을 바탕으로 삼았다.85)

평안도의 군역자들은 감영ㆍ병영ㆍ방어영을 비롯한 도내의 군사 시설에 소속되었고, 그들로부터 수취한 軍布는 중앙에 상납되지 않았다. 이렇게 비 축된 군포 역시 부분적으로 지역 내에서 활용되었다.

그러나 대청외교가 안 정되면서 평안도에 남은 재원은 호조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86)

역학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 때와는 달리87) 교수관이 설치되었고 1406년(태종 6)에 10학에 포함되어 설치되었다.

81) 기영신정사례 料錢.

82) 계사와는 달리 경관청 중 지방에 관원을 파견하던 중인의 비율은 높았다. 지방 파견 인원이 많은 부서의 중인 중 4분의 1 정도가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었다.(이훈상, 「조선후기 중인의 지방 파견제도와 그 실상」, 대동문화연구 113 , 2021, 505쪽)

83) 여지도서 평안도 관찰영 계사.

84) 여지도서 평안도 관찰영.

85) 박범, 「조선후기 평안감영 재원의 성격과 물류의 추이」, 한국문화 94, 2021, 36쪽.

86) 권내현, 「조선후기 호조의 평안도 재정 활용」, 동양학 35, 2004, 220쪽.

87) 고려 광종대에 과거가 실시되면서 잡업도 설치되었다. 하지만 譯科가 포함되었다는 기록은

아직 없다.고려시대에는 譯業을 천시하여 국자감에도 설치하지 않고 통역을 담당하는 舌人들 은 천인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정광, 「역과 시권 연구의 제문제」, 정신문화연구 15, 한국학중앙연구원, 1992, 112쪽)

譯科도 경국대전에 선발 과정이 자세히 정해졌다. 역과는 초시와 복시만을 거치되, 漢學ㆍ蒙學ㆍ倭學 ㆍ女眞學 으로 나누어 額數는 초시에는 한학만 23인으로 하고 나머지는 각 4인 등을 사역원에서 試取했다.88)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漢學鄕試 규정이다. 황해도 7인, 평안도 15인을 관 찰사가 차사원을 정하여 錄名하고 시취하게 하였고 대전회통까지 유지되 었다.89)

88) 경국대전 예전 諸科.

89) 대전회통 예전 諸科.

<표 7>은 감영을 포함하여 전국에 파견된 역학의 근무처와 변화상을 법전 별로 정리한 것이다.

<표 7> 지방에 파견된 역학의 근무처와 변천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감영을 살펴보면, 역학이 파견된 곳은 황해도와 평안도 였고 후기에 함경도에도 역학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다른 관원에 비해 감영 보다 병영에 파견된 역학의 수효가 훨씬 많다는 점이 주목된다.

함경도에 역학을 파견하게 된 연혁은 뚜렷하다. 여지도서에 숙종 갑진 년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국경을 정할 때 처음 이 자리를 두었고 서울의 담당 관아에서 뽑아 보낸다고 했다. 그렇지만 숙종 대에는 갑진년이 없다.

가까운 갑진년은 1724년(경종 4)이다.

역사적 사건을 통해 확인해보면 목극 등이 국경을 정하기 위해 조선 측 대표와 함께 압록강 일대에서 만나 조사를 하고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정하고자90) 한 시 기를 알 수 있고 이때가 임진년이다.

당시 기록에 근거할 때 숙종 갑진년은 숙종 임진년의 오기인듯하다.

이렇듯 평안도와 황해도는 조선 초기부터 역학이 향시를 통해 관찰사에 의 해 선발되었고, 별도로 역학 1명이 감영에 파견되었다.

함경도에는 숙종 때 청나라 사신과 수행한 조사과정에 통역관으로 역학이 새로 파견되게 되었다.

감영에 파견된 역학은 모두 사역원에서 시재하여 파견하였는데 임기는 차 이가 있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는 30개월을 임기로 하는데 함경도는 24개월 에 교체되었다.91)

역학은 경국대전에 5명이었다가, 대전통편에는 16명으로 파견 인원과 장소가 확장되었다.

하지만 경기ㆍ충청ㆍ강원에는 역학이 파견된 적이 없다.

감영에 파견된 3명에 비해 나머지 13명은 통제영과 수영 및 병영에 파견되었 다.

특히 전라도에 6명, 경상도에 3명의 역학이 파견되었지만 감영에는 배치 되지 않았다.

역학은 대외교섭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것을 주도적으 로 끌고 나가거나 결정할 권한이나 위상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을 받지 못한 면도 크다.92)

90) 숙종실록 권51, 숙종 38년 2월 24일(정축).

91) 여지도서 평안도 관찰영, 황해도 관찰영, 함경도 관찰영.

92) 이훈상, 앞의 논문, 2021, 51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학의 파견처에서 감영과 병ㆍ수영이 비교되는 것은 관찰사의 도별 업무 특징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앞서 살핀 검 률과도 비교되는 지점이 있다.

단선적 이해이지만, 검률이 사법행정 운영에, 역학은 변경지역 대외교섭 활동에 그 역할이 특정지어 진다고 하겠다.

즉 병영에는 검률이 파견되지 않 은 것과 역학이 주로 변경지역 병영과 군현에 배치됨으로써 관찰사의 사법권 주도와 대외업무에 대한 한정을 엿보게 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8도 감영에 균일하게 파견된 관원은 관찰사의 포폄대상 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전국 감영에 공통으로 구성된 관원은 관찰사의 공 적 고과를 통해 관할된 것이다.

도별 특징과 맞물려 관원 구성에 차이가 있 었던 경우는 심약을 제외하고는 관찰사의 포폄대상이 아니었다.

아울러 주목 할 것은 1895년(고종 32) 3월 18일 갑오개혁으로 여러 관제가 개혁될 때에 지방에 파견되던 심약ㆍ화원ㆍ寫字官ㆍ역학 등이 일괄적으로 혁파되었다는 점이다.93)

93) 승정원일기 고종 32년 3월 18일(기축).

당시 시도의 효력 여부를 떠나 이와 같은 시도는 지방행정에 지역 별 특수 구성에 대한 정비이기 때문이다.

Ⅳ. 맺음말

본고는 감영의 입지와 관원 구성에 대한 도별 비교연구를 통해 제한적이 나마 다음의 내용을 고찰했다.

8도 감영의 입지는 변동여부에 따라 세 부류로 살폈다.

하나는 조선 초기 감영이 설치된 후 변동 없이 유지된 경우,

두 번째는 전란을 겪으면서 감영 이 이전된 경우,

세 번째는 이동이 빈번했던 경우 등이다.

이를 통해 조선후 기 감영의 입지 특징은 서울과의 거리, 지역이 갖는 위상, 겸임지와의 일치, 도내 중앙부 등으로 세분됨을 확인했다.

도내 대읍 중 서울과 가까운 곳에 입지한 감영은 전라ㆍ강원ㆍ평안 등이었 다.

지역의 위상에 맞게 설치된 후 변동이 없었던 곳으로 전라감영은 왕조의 고향이라는 특수성이, 강원과 평안 감영은 행정제도의 큰 변화를 겪지 않은 중심도시라는 점에서 배경의 일단을 살폈다.

감영이 도내 중앙부에 위치한 경우는 경상ㆍ충청ㆍ경기 감영이다.

중앙에 서 행정중심지를 정할 때 백성들의 이동거리에 유의하였던 점을 보면 감영이 도내 중앙부에 위치하는 것은 도제 운영에 효율성을 높이는 실제적 조치로 평가된다.

경상도와 충청도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감영이 이전됨으로써 앞서 감영 지보다 도내 중앙부로 확정된 경우이다.

경기감영은 여러 차례의 이전을 거 쳐 한성부에 입지했다.

조선 초기 수원에서 廣州로 이전된 배경은 경기관찰 사가 광주목사를 겸임했기 때문이었다.

세조년간에 한성부 반송방에 위치함 으로써 도내 중앙부에 입지하게 되어 관찰사의 업무 편의성이 높아졌다.

8도 감영에는 도사ㆍ순영중군ㆍ검률 등이 동일하게 파견되어 관찰사를 보좌 했다.

모두 관찰사의 포폄을 받는 관원으로 정기적 고과를 통해 관할되었다.

도별 감영의 관원 구성에서 차이점은

첫째 심약과 화사군관이 전국 감영에 파 견되었지만 경기에만 파견되지 않았다.

둘째 호조에서 파견하는 계사는 평안 도 감영에만 파견되었다.

셋째 역학은 감영보다 병영에 파견된 수효가 훨씬 많았는데 황해ㆍ함경ㆍ평안 감영에만 파견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도별 특성과 연관해 보면 이전 배경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경기는 서울과 맞닿아있는 점, 관방지역인 함경도와 함께 평안도는 사신을 접대하는 업무 등이 그것이다.

8도제는 이처럼 공통요소를 통해 관찰사의 통치운영 균질성을 확보하는 한편, 도별 지역 특징에 따라 특수한 구성을 통해 도단위 관할에 효율성을 높였다.

그 일단을 감영운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1. 원사료

高麗史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經國大典, 續大典, 大典通編, 大典會通 六典條例 嘉禮都監儀軌 英祖貞純王后 畿營狀啓謄錄, 畿營新定事例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增補文獻備考 惠局志

2.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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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Comparative Study on the Gamyeongs of 8 Provinces Government’s Characteristics of the Location and the Composition of Government Officials in the Late Joseon Dynasty Yi, Sun-hui* This study aims to identify the degree of homogeneity and regional characteristics of the provincial system by analyzing the location and government composition of Gamyeong. This will provide general direction to trace regional governa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location characteristics are analyzed in three categories : Gamyeongs that remained unchanged after the installati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ones that moved due to war, and ones that moved for other reasons. As a result,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at the distance from Seoul, the status of the region, the distance with the concurrent office, and the central part of the province as the main aspects for the selection of the Gamyeong. In other words, the status of the Gamyeong is the same for each province, but the location of the Gamyeong was determined after the administrative situation and regional characteristics of the province were considered. The officials commonly dispatched to the 8th Provincial Gamyeong were ** Assistant professor, Chungang University Dosa, Sunyeongjungun, and Geomryul. All of them were subject to performance evaluations, and it was suggested that their performance was a major device in securing the homogeneity of local administration. The government officials who differ by province were Shimyak, Hwasa-Gungwan, Gyesa who was dispatched from Hojo, and Yeokak. Shimyak, Hwasa-Gungwan was not dispatched only to Gyeonggi in the late Joseon Dynasty. Gyesa was dispatched only to Gamyeong, and Pyeongan. Yeokak was dispatched only to the Yellow Sea, Hamgyeong, and Pyeongan Gamyeong. Yeokak was mainly dispatched to Byeongyeong. Unlike the common officials, most of other officials were not subject to performance evaluations. Officials that differ by province seem to be related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ir task an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province. Gyeonggi was the space surrounding Seoul, and Hamgyeong, Hwanghae, and Pyeongan were border areas, especially Pyeongan was on the main route of the embassador.

Keywords : 8 Provincial System, Governor, Gamyeong, Location, Performance Evaluation.

朝鮮時代史學報 105호

투고일 : 2023.04.27. / 심사일 : 2023.05.19.~2023.06.02. / 심사완료일 : 2023.06.02.

KCI_FI00297876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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