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머리말
Ⅱ.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Ⅲ.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Ⅳ. 맺음말
국문초록】
광해군(r. 1608-1623)은 한 조카가 주도한 계해정변(인조반정)으로 왕좌
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정변 바로 다음날 대비의 이름으로 반포된 반정
교서에 따르면, 정변의 명분 곧 광해군의 죄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군부의 나라인 명을 배반하고 이적인 후금과 화친을 도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후를 핍박하고 형제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광해군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평가는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동요 없이 거의 절대
적인 평가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전통적 평가에 대한 비판은 1930년대에 처
음 등장했다. 이른바 근대 역사학자들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
한 외교노선을 중립정책이자 당시 조선왕조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정책
으로 새롭게 평가하였다. 그들은 이른바 廢母殺弟행위에 대해서도 그 책
임을 당시 권력을 농단하던 北人에 돌림으로써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긍정
적으로 바꾸었다. 이런 수정주의적 해석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사
실상 통설이 되었다. 2000년에 출간된 한명기의 광해군은 이런 수정주의
적 흐름을 잇고 그것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런데 2012년에 출간된 오항녕의
광해군에서는 이런 수정주의적 해석을 전면 부정하고 광해군에 대한 평
가를 조선시대의 상태로 회귀시켰다. 이 비평논문에서는 이 두 책을 함께
놓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되, 국왕으로서 광해군이 행한 몇몇 정책뿐 아니라
그의 삶과 심리상태에도 중점을 두어 사안별로 살핀다.
【주제어】
광해군, 인조반정, 계해정변, 한명기, 오항녕, 조선
Ⅰ. 머리말
최근 한국사 관련 도서들 가운데 대중교양서가1) 절반을 훨씬 넘는다. 이들
가운데 관련 주제를 전공한 전문 역사학자가 집필한 저서는 매우 적은 편이다.
이는 역사학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지 않은 저자들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한국사 집필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
1) 현재 국내 학계와 출판계에서는 도서의 등급을 학술서, 교양서, 교과서 등
으로 구분한다. 이때 교양서는 사실상 전문 학술도서가 아닌 일반 도서를
가리킨다. ‘교양’의 본래 의미를 고려할 때 교양도서를 굳이 학술도서와 확
연히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전문 학자들보다는 일반대중을 주
요 독자층으로 삼아 집필한 도서가 대개 대중교양서 내지는 대중서로 불린
다. 따라서 이 비평논문에서는 교양서를 전문 학술도서와 구분하는 의미에
서 ‘대중교양서’나 ‘대중역사서’ 또는 ‘대중서’로 칭하되, 문맥에 따라 적절히
혼용할 것이다.
역과 DB화, 그리고 그 방대한 자료의 무료 공개는 굳이 역사학 훈련을 받지
않더라도 문학적 소질과 감각만 있다면 누구라도 조선시대의 역사에 대해 글
을 써서 출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반면에, 전
문학술서만 연구업적으로 간주하는 국내 학계의 현행 연구업적 평가제도는 전
문 역사학자들의 대중서 집필 의욕을 꺾기에 충분했다. 이런 상황이 십여 년
넘도록 지속되면서, 한국사 대중교양서 출간은 대개 전공학자가 아닌 일반 저
자들이 주도했다. 그렇다면 그런 대중교양서들에 대한 전공학자들의 서평이라
도 활발할 필요가 있는데, 이마저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서평을 연구업적에
포함하지 않는 현행 평가제도가 역시 이런 현상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이런 탓
에, 역사학 전공자들과 대중역사가들이 별다른 소통 없이 평행선을 달리며 각
자의 길을 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 계속되는 실정이다.
한국사 관련 대중역사서의 상당수는 인물을 통해 역사에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 리더십이나 여성사나 생활사 차원의 교양서들도 그 내용을 보면 대개
인물 중심으로 기술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얽히고설킨 중차대한 사건이나 어
떤 장기적 추이를 고찰하기보다는, 특정 시대의 특정 인물을 부분적으로 다루
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때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은 좋은 글감
이 된다.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거나, 기존의 평가를 뒤집을 만한 소지가
있는 인물일수록 책의 판매량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宋時
烈(1607~1689)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데 큰 전기를 마련한 한 대중교양서는 2)
무명에 가깝던 저자를 일약 최고의 대중역사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조선시대에서 역사적 평가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 光海君(1575-1641, r. 1608-1623)이다. 이런 인물이니만큼, 광해군 관련 대
중역사서가 무척 많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작 광해군을 집중
조명한 대중교양서는 지금까지 단 두 종뿐이며, 그나마 해방 이후로 전문학술
서는 아직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종의 대중역사서 저자가 모두 조
선시대를 전공한 전문 역사학자라는 점이다. 이는 관심도 많고 논란도 많은 인
2) 이덕일, 2000,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물인 광해군이라는 주제, 따라서 어떻게든 책을 집필하기만 하면 책의 판매부
수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역사가들이 아직 광
해군에 대해 본격적으로 건드리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 나와 있는
두 종의 도서를 대중역사서라고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 이제는 관련 분야 역
사학자들이 그 책들을 검토하고 비평함으로써 역사학의 수준 높은 대중화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대어, 이 비평논문에서는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긍정적으
로 평가하기 시작한 1930년대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정주의적 긍정론을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는 한명기의 광해군과3) 이런 수정주의적 해석을 전면
비판하고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內治에 초점을 맞춰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함
으로써 광해군에 대한 평가 자체를 조선후기의 상태로 되돌린 오항녕의 광해
군4) 두 저서를 함께 묶어 검토하고 비평하려 한다. 다만 두 평전이 워낙 다른
논지를 펴기 때문에, 2장에서는 한명기의 광해군에 대해, 3장에서는 오항녕의
광해군에 대해 비평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약 400여 년 전 광해군이라는
인물의 실제 삶을 20세기에 이르러 역사 연구의 소재로 불러내어 편의에 따라
재단한 현대 역사학자들의 광해군 평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되, 광해군의 입
장에 초점을 둘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된 광해군 관련 논저들 가운데 정작 광
해군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시각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Ⅱ.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2000년에 나온 한명기의 광해군은 1930년대 근대 역사학에서 광해군을 긍
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흐름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비록 대중서로 출간되
었지만, 그 내용은 광해군에 대한 근대적 평가의 결정판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3) 한명기, 2000,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4) 오항녕, 2013,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없으며, 광해군에 대한 단행본으로도 한글판으로는 최초이다. 그렇다면 광해군
이 축출된 1623년 이래 현재까지 400년 가까이 이어진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어떤 추이와 전환을 보일까? 한명기의 광해군이 갖는 사학사적 의미를 좀
더 생생하게 파악하기 위해 그 추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광해군에 대한 최초의 평가라 할 수 있는 反正敎書에서는 광해군에 대해
“천리와 인륜을 두절시켰으니, 위로는 皇朝에 죄를 범했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고5) 단언해 평가했다. 이는 위로는 君父인 명 황제를 배신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핍박했다는 의미다. 이런 평가는 조선왕조가 존속하는 한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바뀌기도 불가능했다. 그렇지
만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평가하는 사람의
정치적 노선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삼전도항복(1637) 이후에 광해군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背明죄목이 사실상
사라진 점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는데, 삼전도에서 인
조는 광해군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명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반정의 양대 명분
은 광해군의 背明[不忠]과 廢母[不孝] 죄목이었는데, 인조정권은 이 둘 가운데
前者를 너무나 쉽게 잃었으므로, 이후의 평가는 죄다 광해군의 廢母행위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背明행위는 공개석상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內治에 대해서도 광해군의 평가가 천편일률적이지는 않았다. 서인과 남인 중
에서도 인목대비의 廢位庭請에 참여한 바 없는 이들은 광해군의 패륜을 모후
핍박에 초점을 맞춰 거론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에, 폐위정청에 참여한 적이
있는 북인계열 인물들은 대개 광해군의 내치 실패 요인을 인사문제 곧 특정 정
파의 전횡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폐위정청에 참여한 자들이 불리할 수
밖에 없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광해군 대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대북계열에서 모후의 폐위 문제나 인사 문제보다 궁궐
영건 등 지나친 토목사업을 광해군의 패착으로 좀 더 부각시킨 경향도 마찬가
5) 光海君日記 券187, 15년 3월 14일 甲辰. “… 夫滅天理斁人倫上以得罪於皇
朝下以結怨於萬姓…”
지 이유로 파악할 수 있다.6) 정파 간의 이런 유의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
선왕조가 존속하는 한 광해군은 모후를 핍박하고 인사를 문란하게 하고 불필
요한 토목사업을 일으켜 민생을 피폐하게 한 인물로, 그래서 폐위되어 마땅한
인물로 인식되었음은 분명하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는 조선왕조가 망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30년대에 등
장했다. 타가와 고조(田川孝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洪熹등이 그 흐
름을 선도하였는데, 이들은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홍희는 廢母殺弟를 광해군의 잘못이 아닌 대북세력의 잘못으로 치부함으
로써 광해군이 당쟁 때문에 아깝게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7) 이런 평가는
1945년 이후 孫晉泰・申奭鎬・李丙燾등이 그대로 계승해,8) 한국사학계의 통설
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노력도 善・惡이라는 중세적 흑백논
리에 여전히 묶이기는 매한가지였다. 300년이 넘도록 惡으로 인식된 광해군을
善으로, 선의 상징이던 ‘인조반정’을 誤로 바꾸었을 뿐, 광해군 연구의 패러다
임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당쟁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
려는 연구 경향이 크게 대두하면서 ‘붕당정치’ 학설이 유행함에 따라, 광해군
정권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계해정변(인조반정)의 원인을 단순히 패륜행위 자
체보다는 붕당간의 공존을 부정하고 전횡을 일삼은 대북정권에 대한 사림 전
체의 반발로 보는 새로운 해석이 나타났고, 9) 이후로 널리 유통되었다.10)
6) 계승범, 2008,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전환」, 남명학연구
26.
7) 田川孝三, 1931, 「光海君の姜弘立に對する密旨問題に就て」, 史學會報 1;
稻葉岩吉, 1933, 光海君時代の滿鮮關係, 大阪屋號書店, 242-261쪽; 洪熹,
1935, 「廢主光海君論」, 靑丘學叢 20.
8) 경성대학 조선사연구회 편, 朝鮮史槪說, 홍문서관, 1949, 478-481쪽; 이병
도, 1959,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 국사상의 제문제 제1집. 더 상세한 검
토는 나혜영, 2015, 「광해군의 평가 양상에 대한 기억과 그 의미」, 서강대학
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3-26쪽 참조.
9) 오수창, 1985,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사론 13; 오수창, 2002, 「인
조반정과 서인정권」,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역사비평사.
10) 이런 동향은 이영춘, 1998,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32-142쪽;
이런 수정주의적 평가를 집대성한 학자가 바로 한명기다. 광해군에 대해 내
치 문제를 들어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던 전통적 해석이 1930년대 이후로 외교
노선의 탁월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 일색으로 전환되었음을 고려할 때, 광해
군 대의 상황을 국제상황과 외교문제에 중점을 두어 긍정적으로 파악한 한명
기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는11) 후자의 맥을 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를 토대
로 출간한 대중역사서가 바로 이 비평논문의 검토 대상인 광해군: 탁월한 외
교를 펼친 군주라는 단행본으로, 이 책이 수정주의적 해석을 집대성했음은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부제만 보더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광해군 평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대중역사서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광해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그의 세자시절 및
축출 이후의 상황까지 모두 다룬 점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국왕 광해군
의 정치와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해군의 생각과 입장을 찬찬히
살필 필요가 있는데도, 이전의 연구들은 즉위 이전 광해군의 삶에 대해서는 거
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축출당한 후의 상황 전개에 대해서도 사실상 무관심했
다. 그저 광해군이 마땅히 축출당할 만했는가, 아니면 부당한 축출이었는가라
는 단선적이고도 피상적인 질문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종
합적이고도 전체적으로 광해군에게 접근한 점에서 이 책은 광해군에 대한 학
계의 접근방법 수준을 한층 높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를 과거의 한 조각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현재로 끌어와
유비하려 시도한 점을 높이 살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가능하고 활발
할 때 역사학의 의미가 빛남에도, 20세기 후반 국내 역사학계는 이점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했다. 카(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열심히 읽으면서
도 최대한 사실만 전하겠다는 이른바 랑케(Leopold von Lanke) 식의 실증사
학이 우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가의 현실 언급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305-352쪽;
김용흠, 2006,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 I: 인조대 정치론의 분화와 변통론, 혜안, 63-124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군사정권 시절이라는 시대적 환경도 큰 몫을 했다. 이런 현상은 국내 역사학계
의 관성이 되어, 냉전구도가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추진된 1990년대에도 여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에서 2000년 전후 대한민국이 직면한 국제질
서의 재편 문제와 관련하여 광해군 대의 정치와 정책을 검토하고 그것을 현실
로 끌어와 설명한 점이 돋보인다. 이미 16년 전에 출간되었음에도 이 책의 의
미를 계속 인정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장점만 지닌 책은 이 세상에 없듯이, 한명기의 광해군에도 허심탄
회하게 복기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사실의 문제부터 해석의 문제에 이르기
까지 그 범위도 넓다. 논의가 필요한 사안은 많지만, 지면관계상 이 비평논문
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만 추려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광해군에 대한 이해
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더하고자 한다.
첫째, 광해군이 추진했다고 하는 이른바 왕권강화책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명기는 광해군이 추구한 왕권강화책으로 조선의 국왕
가운데 가장 긴 尊號를 받은 사실과 궁궐영건사업에 매진한 점을 들었
다.(139~154쪽) 이 둘은 서로 왕권강화와 관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렇지 않다. 먼저 외교노선 문제가 불거진 재위 후반기에 광해군이 받은 존호의
성격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명에서 監軍御使까지 직접 파견해
조선에 징병했음에도 감군어사의 면전에서 칙서를 거부한 광해군에게 온 조정
신료들이 한 목소리로 강청한 것이 바로 광해군이 받은 마지막 존호였다. 연이
은 庭請으로 온 조정의 행정이 마비되는 상황이 몇 달이고 이어지자 광해군은
마지못해 존호를 받았는데, “建義守正彰道崇業”이 바로 그것이다. 12) 그 의미는
“義를 세워 正을 지켰으며 道를 밝혀 業을 드높였다”는 것인데, 당시 조정논쟁
의 사안을 고려할 때 義・正・道등은 모두 ‘사대의 도리’를 가리키며, 業은 공적
이나 기업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존호의 뜻만 놓고 보아도 왜 광해군
이 이 존호를 받지 않으려 끝까지 버텼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광해군이
마지막으로 받은 이 존호는 왕권강화책의 산물이기는커녕 오히려 왕권의 미약
12) 光海君日記 券183, 14년 11월 8일 庚子.
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1620년에 朝鮮監護論문제를 성
공적으로 변무하고 나서 받은 “敍倫立紀明誠光烈”이라는 존호도 이 존호의 내
용을 당시 조정 논쟁의 성격과 관련해 분석해 보면, 倫・紀・誠・烈등이 사대의
리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 존호 또한 광해군의 왕권을 상징하기
는커녕 명에 대한 의리와 정성을 강조하던 신료들의 존호 수락 요구에 밀려 광
해군이 부득이 받은 것이었다. 이런 예들은 존호를 무조건 왕권강화 노력과 관
련지어 이해하려는 학계의 고정관념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존호는 그 존
호의 성격에 따라 오히려 왕권을 제어하는 도구로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13)
궁궐영건 문제도 그것을 광해군 자신의 왕권강화책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조선왕조 왕실의 추락한 위신을 추스르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궁궐
영건사업이 정녕 광해군의 왕권강화책이었다면, 그런 토목사업을 통해 광해군
의 왕권이 어느 정도 강해졌는지 분석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궁궐영건
사업은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몰락하는 한 원인으로
작동했다. 조선시대 국왕의 정통성과 안정성은 크게 두 가지 요소에 기초했는
데, 내부적으로는 양반사족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었고, 외부적으로는 명 황제
의 책봉을 받는 일이었다. 14) 그런데 자신의 왕권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누
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국왕 광해군이 바로 그 자신의 왕권을 받쳐주던 두 축
인 양반신료들의 전체 의견[親明排金]과 명 황제의 칙서[徵兵]를 동시에 거부
하고, 더 나아가 칙서에 따르자는 신료들의 주장을 심지어 邪論으로까지 몰아
붙이면서 강화할 왕권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국내 한국사학계에서는
‘왕권강화책’이라는 설명이 전가의 보도처럼 난무하다시피한데, 정작 그 왕권
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논증한 연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광해군의 왕권에
대해서도 보다 정치한 접근이 필요하다.
13) 계승범, 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193, 26-31쪽.
14) 계승범, 2013, 「세자 광해군: 용상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한국인물사연
구20.
둘째,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지지한 신료집단이 과연 존재했는지 재고할 필
요가 있다. 한명기는 대북의 거두 李爾瞻은 대외정책만은 광해군과 다른 입장
을 보였지만, 영의정 朴承宗은 광해군의 외교노선에 확실히 동조하였고, 그 밖
에도 몇 명의 측근을 더 들었다.(253~254쪽) 그러나 박승종의 태도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외교노선 논쟁 막바지에는 논쟁의 수위가 매우 높았는데, 박승종
은 “미봉책(=후금과의 대화)을 구사하려고 해도 온 조정이 正論(=排金論)을
따르는 통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 황공하다”는15) 식으로 회계하곤
했다. 실록 기사에 나오는 박승종의 의견은 대개 이런 식인데, 이런 태도는 현
실에 맞게 차선책을 구사해야 한다는 말을 늘어놓아 광해군의 뜻에 따르려는
마음을 피력한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누르하치에게 우호적인 서
신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박승종이 제시한 의견은
항상 회답 불가였다.16) 따라서 박승종이 광해군의 외교노선에 동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조정의 중론 운운은 왕명을 기피하기 위한 핑계일 뿐, 박승종 자신
이 왕명을 받들 의사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1618년 명이 후금 원정을 위해 조선에 처음으로 징병했을 때 광해군의 파병
불가 입장에 동조한 黃中允, 趙纘韓(동부승지), 朴鼎吉(좌부승지), 李偉卿(우
부승지), 朴子興(형조참판), 林衍, 尹暉(행사직) 등 7명도17) 불과 한두 달 만
에 파병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는 파병에 미온적인 사람을
공격하는 분위기가 조정에 워낙 팽배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노선에 동조한
지 불과 이틀 뒤에 윤휘는 자신의 뜻은 비변사의 견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온
갖 비방을 받고 있으니 사신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태도를 바꾸었다.18)
15) 光海君日記 券172, 13년 12월 5일 壬申. “… 且臣與同僚所見終始無違近
緣臣遘疾沈綿不與人接有何一分專主講和之心哉特以虜勢漸熾國勢漸弱每
欲以禮自固姑緩兵禍而已然正論之人心常嘉悅曰國家不可無此等正論必須
培養正論於此彌縫賊釁於彼實出於愛君誠心…”
16) 한 예로, 光海君日記 券172, 13년 12월 5일 壬申참조.
17) 光海君日記 券127, 10년 윤4월 26일 甲申; 券128, 10년 5월 2일 己丑; 5월
5일 壬辰.
18) 光海君日記 券128, 10년 5월 7일 甲午.
파병을 피하기 위해 황제에게 직접 주문하자는 등의 강성 발언을 함으로써 광
해군의 의견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박정길조차도 주문을 가지고 北京으로
가다가 楊鎬에게 저지당한 후에는 양호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상책이라면서
입장을 바꾸었다.19) 이위경도 박정길의 주문을 즉각 중지시켜야 한다는 승정
원의 전체 논의에 참여함으로써,20)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상황 전개에 따라 광해군의 노선에 다시 동조하기도 했으나, 전체
적으로 볼 때 외교노선 논쟁에서 광해군은 거의 늘 외톨이였다. 당쟁이 극심하
던 때였음에도, 외교노선 문제만큼은 조정 신료들이 당색을 초월해 이구동성
으로 국왕에 맞서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이런 조정 분위기는 이후 5년간 지속
된 외교노선 논쟁에도 거의 일관되게 나타났고, 광해군은 언제나 고립무원의
상태였다.21) 재위 마지막 1년간 온 조정이 행정마비상태에 빠지고 광해군이
중신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御醫조차 불신하여 물리친 극단적인 정치마비 상황
은 바로 이런 조정 분위기의 산물이었던 것이다.22)
셋째, 인조정권이 과연 광해군 대의 외교노선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는지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학계의 통설은 여전히 계해정변(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의 외교노선이 친명배금 정책으로 확실하게 바뀜에 따라 호란을 초
래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명기는 “인조반정 이후의 대후금정책은 광해
군 대 이래의 기미책에 기반을 둔 현상유지책”으로 보고,(277쪽) “반정 이후 그
들이 보인 대후금정책의 실제 모습은 광해군이 취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
다.”(280쪽)고 함으로써, 통설에 이론을 제기했다.23) 그는 반정 이후 조선이 親
明을 표명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排金의 기조를 지닌 것도 아닌, 일종의
19) 光海君日記 券130, 10년 7월 23일 己酉.
20) 光海君日記 券129, 10년 6월 20일 丁丑.
21) 계승범, 2007,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 역사학보193.
22) 계승범, 2008,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변화」, 남명학연구
26, 448-450쪽.
23) 이런 해석에 일부 학자들이 호응하였는데, 한 예로는 오수창, 2005, 「청과의
외교실상과 병자호란」, 한국사 시민강좌36 참조.
기미책이자 현상유지책으로 인조 재위 초기의 외교노선을 설명한 것이다.24)
그러나 이는 사안의 핵심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해석이다. 왜냐하면 후금의
대조선 압박이 계해정변(인조반정) 직전에 획기적으로 변한 사실을 간과한 채
도출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외교노선 논쟁이 치열했던 1618년 4월부터 1622년
말까지 근 5년 동안 후금은 조선에 서신을 십여 차례나 보내 화친을 요구했다.
광해군 대 마지막 5년간(1618~1622) 조정이 외교노선 문제로 시끄러웠던 이
유는 바로 후금의 이런 부단한 압박 때문이었다. 반면에 1623년부터 정묘호란
직전인 1626년까지 4년 사이에 후금은 조선에 단 한 통의 서신도 보내지 않았
다. 25) 이런 극명한 대조는 같은 시기 실록의 후금 관련 기사 숫자를 보아도 마
찬가지다. 1618년부터 1622년까지 5년간은 후금 관련 기사가 한 해 평균 150여
개인데 비해, 1623년부터 1626년까지 4년간의 한 해 평균은 20개 정도에 불과
하다. 그나마 그 스무 개의 기사도 대개 변방에서 보내온 단순한 첩보를 기록
한 것이며, 후금 측에서 조선에 무슨 요구를 해 온 것은 전혀 없다. 이런 극명
한 대조는 1622년 늦가을에 광해군이 “後金國汗殿下”로 시작하는 우호적인 국
서를 누르하치 앞으로 보낸 점과 광해군의 성화에 못 이겨 毛文龍의 무리가 椵
島로 이주한 것을 계기로 조선과 후금 사이의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기에 나타
났다.
실제로, 이때부터 시작해 정묘호란 발생 직전인 1626년 12월까지 약 4년 동
안은 후금이 요서 공략과 내부 사정 등으로 인해 조선에 어떤 압력도 가해오지
않았고, 그 결과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후금
이 조선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데, 조선이 먼저 나서서 후금의 비위를
건드릴 까닭이 전혀 없던 시기였던 것이다. 인조정권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을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요컨대, 인조정권이 崇明排金정책을 분명히 한
것은 확실하되, 이 시기에 후금이 조선에 압력을 가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상
24)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361쪽.
25) 실록에도 그런 기사가 없으며, 入關前후금과 조선이 주고받은 서신들을 최
대한 모은 張存武・葉泉宏編, 2000,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1619-1643,
國史館자료에도 유독 이 시기에는 아무런 서신이 보이지 않는다.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지, 인조정권의 기미책(현상유지책) 때문에 이런 긴장완
화 형세가 조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조선 온건파인 누르하치가 죽고 초
강경파인 홍타이지가 즉위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후금이 조선을 침공한 점이나
훗날 결국 병자호란이 발생한 사실은 인조정권의 기미책이 전혀 독립변수(x변
수)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결국, 인조정권은 일부러 일을 만들어 排金하
지는 않았지만, 후금의 압력이 崇明기조에 저해가 될 때는, 이를테면 明과의
전통적 군신관계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압박을 받을 때에는 주저하다가도
결국에는 전쟁을 감수했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명 황제의 칙서는 거부하면서
도 누르하치와의 대화를 선호한 광해군의 정책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넷째, 광해군이 과연 內政에서는 소심하고 外政에서는 과단성 있었는지 숙
고할 필요가 있다. 광해군은 과연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면서도(7, 71, 120쪽) 동
시에 탁월하고 과단성 있는(副題) 인물이었을까? 광해군의 이런 이중성격(태
도)은 책 전편에 걸쳐 반복되는 저자의 일관된 평가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
로 보면, 전자의 성격은 大北의 부추김에 휘둘려 주로 內政에서 나타났고, 후
자의 성격은 신료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초지일관 밀어붙인 외교정책에
서 드러났다는 것이 한명기의 논지다. 그렇지만, 이런 이해가 과연 최선인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일단, 광해군도 우리와 같은 性情을 공유한 인간일진대, 같은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저렇게 극명하게 나뉠 수 있었을까? 내치와 외교에서 완전히 다른 면
모를 보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과연 인간사에서
얼마나 일반적인지의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설사 광해군이 그런 성격
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렇다면 광해군이 왜 그런 극명하게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설명했어야지, 단순히 소심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다는 자기모순 식의 평가만 하고 넘어가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필자가 보기에 광해군은 과단성보다는 소심하고 피해의식이 큰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에서 갖은 눈치를 보다가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왕이라면 아마도 광
해군과 영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영조가 나름대로
다양한 실력을 스스로 갖춰 신료들을 상대로 점차 우위를 점한 데 비해, 광해
군은 세자 때부터의 마음고생을 평생 지워버리지 못하고26) 피해의식에 잡혀
행동한 인물에 가깝다. 內政에서의 소심함은 한명기도 이미 누차 지적했기에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외교정책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라도 국왕이 되면 두 가지 사안에 온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하나는 자
신의 왕좌를 지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왕조를 보전하는 일이다. 광
해군이 국내정치에서 지나치리만큼 잠재적 정적 제거에 집착한 것은 바로 우
여곡절 끝에 간신히 차지한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태도 그 이상
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피해의식이 클수록 무리수는 나오게 마련인데,
광해군이 獄事를 남발하고 무리한 궁궐영건에 집착하다가 결과적으로 내치에
실패하고 끝내 정변을 맞아 몰락한 큰 배경은 바로 그의 이런 태도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방어적 피해의식은 외교노선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외교노선
논쟁 기간 중에 광해군이 견지한 태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누르하치와의 우
호적인 교신 및 유사시에 대비한 保障處확보였다. 광해군은 후금이 조선을 침
공할 경우에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하며, 왜란 때와는 달리 명도
조선에 구원병을 파견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장기적으로 볼 때 명
조차도 후금을 막을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정세판단을 내린 광해군이
국왕으로서 취할 태도는 하나뿐이었으니, 바로 후금의 침공을 미연에 방지하
는 것이고, 그 방법은 후금의 누르하치와 우호적인 대화를 개시하고 지속하는
길뿐이었다. 27) 명의 징병 요구에 광해군이 한사코 반대한 이유도 그의 현명한
26) 부왕 선조의 끊임없는 견제로 인해 세자 광해군이 겪은 숨 막히는 경험 및
그런 기억이 국왕으로서 취한 태도와 직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계승범, 2013,
「세자 광해군: 용상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한국인물사연구20 참조.
27) Seung B. Kye, 2006, In the Shadow of the Father: King Kwanghae and
His Court in the Early Seventeenth-Century CŏhnosKorea, doctoral
dissertatio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p. 219-254.
판단과 뛰어난 과단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왕조를 보전하기 위한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온 조정신료들의 반대로 후
금과의 대화가 여의치 않자, 그 다음에 광해군이 취할 태도는 유사시에 대비해
보장처를 마련해 두는 일이었다. 강화도의 안전도 믿지 못하던 광해군이 交河
천도를 지속적으로 제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이 많고 습하여
도성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조정의 중론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교하 천도
의지를 꺾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가 교하로 천도하려던 진짜 의도가 진정한 도
성의 건설이 아니라 방어가 용이한 보장처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의 이런 태도를 ‘탁월’이나 ‘과단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광해군은
내부의 적을 제거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적을 막는 데에도 시종일관 소심
하고도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다섯째, 계해정변(인조반정)이 과연 西人들이 광해군 재위 막바지에 다시
등용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변을 주도
한 인물들의 黨色문제이기도 한데, 한명기는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
조”(19쪽)했다거나, “반정공신 53명의 서인들”(263쪽)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
정변이 일종의 ‘서인정변’이라는 통설을 사실상 수용했다. 그에 따르면, 외교노
선을 놓고 대북세력과 충돌하게 된 광해군은 그 동안 소외되었던 소북, 서인,
남인 등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고, 대북의 李爾瞻도 ‘폐모’ 논쟁으로 이반된
士林의 인심을 수습할 필요를 느껴 이들의 진출을 막지 않은 결과, 서인계열이
이때 많이 등용됨으로써 정변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설명은 그 동안 각기
따로 연구되던 외교와 내정을 함께 묶어 고찰함으로써 당시의 정국 및 정변의
배경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데 의의가 있으나, 이런 현상을 과연 정변
의 성공요인으로 직접 연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이해가 정변 이후에
전개된 상황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맞을 수도 있지만, 정변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한명기도 책에서 지적했듯이,(261~262쪽) 정변 당시 동원된 병력은 고
작 1,000여명에 불과했으며, 장단부사 李曙가 이끈 400군병 외에는 사실상 오합
지졸이었다. 이런 병력으로도 정변이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도
성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훈련도감의 2,000여 병력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 결
정적이었는데, 당시 훈련대장은 李興立이었다. 이서의 병력 동원과 이흥립의 내
응이 없었다면, 이 정변은 성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서와 이흥립은 무과 출
신으로 학맥이 없는 탓에 당색 분별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당색을 판별할 때
학맥과 집안 외에도 정치적 후원자가 중요한 기준이 되므로, 이서와 이흥립의
정치적 후원자가 누구였는지가 중요한데, 그 후원자는 小北의 거두이자 외척이
던 영의정 朴承宗이었다. 이들이 박승종의 후원을 받게 된 데에는 사돈이라는
인척관계뿐 아니라 남다른 친밀함이 깊이 작용했다. 특히 이들의 친밀한 관계
는 당시 사람들이 다들 인정하던 공공연한 사실이었다.28) 요컨대, 정변의 모의
는 서인계열이 주도했을지라도, 정변을 성공으로 이끈 요인을 서인세력이 다
시 관직에 등용되었기 때문으로 단정하는 데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논쟁점들이 적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명기의
광해군이 기존의 광해군 이해와 해석의 틀을 한층 높인 점은 분명하다. 또한
광해군을 집중 조명한 단행본이 거의 나오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은 무
려 16년 전에 출간되었음에도 여전히 광해군에 대한 종합서로 읽히기에 부족
함이 없다.
Ⅲ.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한명기의 광해군 평가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은 2012년에 등장했는데, 그 장
본인이 바로 오항녕이다. 그는 몇 년 전에 조선의 힘이라는29) 대중역사서를
출간하면서 한 章을 할애하여 광해군에 대한 수정주의적 평가를 노골적으로
28) 光海君日記 券187, 15년 3월 12일 壬寅조; 仁祖實錄 券1, 1년 3월 13일
癸卯; 15일 乙巳; 25일 乙卯.
29) 오항녕, 2010, 조선의 힘, 역사비평사.
비판한 바 있다. 여기서 검토할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30) 대체로 그 장의
내용을 더 발전시켜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비록 대중서의 형태이지만, 저자
는 전문 역사학자로서 꾸준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학
계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특히 이 책에서는 1930년대 이래 지속된 수정주의적
평가를 전면 뒤집되, 광해군에 대한 평가를 계해정변(인조반정) 이후 조선왕
조 내내 이어진 전통적 평가로 회귀시켰다. 따라서 광해군에 대한 종합적이고
도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해서는 두 단행본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오항녕의 광해군이 갖는 사학사적 의의라면 해방 이후 거의 천편일률적으
로 각종 개설서와 교과서에 실린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통설을 완전히 뒤집은
점을 일순위로 꼽아야 할 것이다. 기존 통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도전성과 과
감성은 일단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논쟁적인 논
저보다는 어떤 특정 사실을 발굴하여 그것을 학계에 보고하는 리포트 식의 논
문을 여전히 양산하는 국내 전근대 한국사학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역사적으
로 중요한 인물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놓고 이렇게 도발적인 단행본이 나온 사
실만으로도 크게 환영할 일이다.
또 한 가지 의의는 이른바 역사평가의 척도에 대해 나름대로 한 가지를 분
명하게 제시한 점인데, 그 요체는 근대주의의 시각으로 전근대의 어떤 대상을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14~23쪽) 솔직히, 조선왕조를 주도한 지
배엘리트층으로서의 양반과 그 사상으로서의 유교에 대해 지나치게 망국의 책
임을 물은 20세기 역사학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저자가 “1910년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강제 병합된 것은 1623년 인조반정 때문”이라는 해
석의 어처구니없음을 책의 맨 앞에서 지적한 것도 바로 이런 문제와 직결된 것
이다. 이런 입장은 이 책의 전편에 걸쳐 반복적으로 강조되는데, ‘근대발전주
의’의 시각으로 전근대 조선시대를 일방적으로 재단하여 부정적 품평을 가하
는 풍조가 여전히 만만치 않은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오항녕의 광해군은
이런 문제제기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
30) 오항녕, 2012,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그렇지만 역시 장점으로만 가득한 책은 이 세상에 없듯이, 오항녕의 광해
군에도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해석이 적지 않다. 일일이 거론하려면 끝도 없지
만, 이 비평논문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만 추려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광해
군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더하고자 한다.
첫째, 광해군의 죄상을 상세히 정리한 반정교서의 내용 분석을 재고할 필요
가 있다. 오항녕은 광해군의 失政과 暴政의 근거를 반정교서의 내용에서 찾았
고, 그것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해 정리했다. ① 형제와 종친들을 살해하고
무고한 옥사 남발, ② 궁궐 건축 등의 토목공사, ③ 舊臣을 내쫓고 姻婭와 후
궁・환관들과 영합, ④ 매관매직과 가렴주구, ⑤ 오랑캐와 내통 등이 바로 그것
이다. 이를 풀이하면, ①은 넓은 의미의 ‘廢母殺弟’를 가리키며, ⑤는 명에 대한
배신 곧 외교노선 문제를 이른다. ②는 말 그대로 궁궐영건사업을, ③은 大北
의 전횡을, ④는 기강의 문란을 의미한다. 오항녕은 이 다섯 가지를 같은 비중
으로 열거하면서, 선행 연구자들이 ①과 ⑤만 강조한 것은 문제라며 신랄하게
꼬집었다.(35~37쪽) 이는 반정의 취지를 사실 그대로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②, ③, ④의 내용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문제제기이자, 실제로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제기와 집필기준은 반정교서에 대한 오해이자, 솔직히
억지에 가깝다. 먼저, 위 다섯 가지가 반정교서에 모두 나오기는 하지만 분량
(비중)에서는 각각 크나큰 차이를 보인다. 광해군에 대한 죄목을 나열한 전체
분량에서 일단 ⑤의 背明이 43%, ①의 廢母殺弟가 31%를 차지한다. 이 둘을
합치면 74%로, 반정주체세력은 반정의 명분 곧 광해군의 죄상을 크게 이 두
가지로 천명한 셈이다.31) 배치 순서를 보아도, ①의 廢母殺弟가 시작이고 ⑤의
背明이 대단원을 이룬다. 이런 비중과 배치는 교서를 작성할 때 반정세력이 가
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광해군의 죄목이 바로 ①과 ⑤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항녕은 선행 연구자들이 ②, ③, ④의 내용은 무시한 채 ①과 ⑤만 강조했다
31) 계승범, 2008,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전환」, 남명학연구
26.
면서 선행 연구자들을 도매금으로 비난하지만, 저런 비중의 차이를 고려할 때,
선행 연구자들의 관심이 ①과 ⑤에 집중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전혀 아니다.
반정교서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곡해한 결과, 오항녕은 책의 章들을 대개
②, ③, ④와 관련된 내용으로 채웠다. 반정교서의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다는 저자가 왜 반정교서의 26%를 차지하는 데 그친 사안들로 各章을 구성했
는지, 다른 말로 상대적으로 볼 때 반정교서의 핵심에서 비껴난 내용을 중심으
로 책을 집필했는지 의문이다. 이뿐 아니라, 오항녕은 ②, ③, ④의 내용이 “지
금까지 연구자 사이에서 별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36쪽) 단언했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③, ④의 내용에 대해서는 ‘붕당정치’ 학설이 유행
하기 시작하던 1980년대부터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大北의 전횡을 인조반
정의 주요 동인으로, 곧 광해군의 결정적인 失政으로 강조하는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런 추세는 지금도 학계에서 이어지고 있다.32) 요컨대, 반정교서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교서 분석상의 오류뿐만 아니라 관련 기존연구들을 제대
로 검토하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둘째, 臨海君과 永昌大君의 죽음에 대해 그것을 단순히 광해군의 폭력성으
로만 풀이하기보다는 보다 다양한 이해가 필요하다. 역사 평가에 임할 때 후대
의 시각(기준)으로 전대의 어떤 인물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면, 후대에 형성
된 잣대를 전혀 모르는 그 인물은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을 것이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21세기 역사가가 광해군을 평가하고자 할 때 잊지 말
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살던 시대는 왕조국가 시대였고, 광해군 자신
은 바로 그런 국가의 군주였다는 사실이다. 후대의 시각, 곧 근대주의의 시각
으로 전통시대의 광해군이나 반정을 일방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책의
서두에서 크게 강조한 점으로 볼 때, 저자 오항녕의 입장 또한 이와 다르지 않
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정작 자신이 광해군
32) 각주 9번과 10번 참조. 특히 인조반정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분위기에 대
한 비판은 오수창이 이미 오래 전(2002년)에 제기한 바 있다.
대의 사건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평가할 때는 지극히 21세기 역사학자의 시각,
곧 후대의 시각에서 광해군 대 사안을 판정하는 이중성을 책의 도처에서 드러
내기 때문이다. 임해군 옥사에 대한 오항녕의 논지 전개는 그 좋은 예이다.
임해군이 정말로 역모를 꾸몄는지 여부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확
언할 수 없으며, 다만 누명을 쓰고 죽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정도로만 말할
수 있다. 저자도 각종 혐의 내용의 비현실성과 증거 자료의 조악함을 많은 지
면을 할애하여(37~81쪽) 낱낱이 열거하고 강조함으로써 임해군의 억울함과
광해군의 폭력성을 상당히 부각시켰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이런 해석(평가)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당시가 왕조국가 시대였음을 망각한 채 현대
사법부의 기준으로 사건을 재단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위하기 전에 세자의 강력한 정적(경쟁자)으로 존재한 바 있는 형제라면,
즉위하자마자 대개 제거되는 것이 왕조국가 시대에는 다반사였고 으레 그랬다.
세자 시절부터 자신의 최대 약점 곧 장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라는 점을 집요
하게 파고든 정치공세는 세자 광해군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으며, 동시에 장
자였던 임해군과 적자였던 영창대군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자 광해군의
최대 정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즉위한 후에 광해군은 실제로 그 아킬레
스건을 없애기 위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집요하게 노력했는데,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왕조시대라면 어떤 군주라도 그렇게 했을 사안이다. 발생
하더라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옥사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사건을 놓고 저
자는 임해군의 역모 여부를 ‘죄형법정주의’와 ‘증거제일주의’의 시각에서 상당
한 지면을 할애해 분석했다. 그렇지만 이는 임해군 사건을 왕조시대의 정치행
위로 보지 않고 근현대의 형사사건으로 본 결과로, 책의 서두에서 저자 스스로
경계한 후대의 기준으로 임해군 사건을 판정한 것에 다름 아니며, 모순이다.
영창대군의 안전도 왕조국가에서는 전혀 보장될 수 없었다. 정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왕자라면 모를까, 즉위한 국왕의 강력한 라이벌이 된 바 있는 왕자
의 목숨을 보장해 줄 만한 장치가 당시에는 없었다. 그저 최후의 승리를 거두
고 즉위한 새 국왕의 자비를 바랄 뿐이었다. 저자가 언급한 遺敎七臣문제가
(92쪽) 왜 발생했을까? 임종에 임박한 宣祖가 자기 사후에 영창대군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을 예견하고 7신을 불러 어린 대군을 잘 보호하라고 유언을 남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국왕 선조조차도 자기 사후에 영창대군이 언제
라도 제거될 수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좋은 증거이자, 정적(경쟁자)이 된
바 있는 왕자를 제거하는 일이 왕조시대에는 충분히 가능한 사안이었다는 방
증이다.
요컨대, 임해군(장자)과 영창대군(적자)의 존재는 광해군의 아킬레스건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광해군이 즉위하지 못했으면 모를까, 그들의 목숨은 사
실상 새로 즉위한 국왕 광해군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은덕을 입으면 살아남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든 제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대의 정치 환경이었다. 그런데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광해군
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면, 그런 태도야말로 근대의 시각으로 광해군을 정죄
한 것에 다름 아니며, 이는 책의 서두에서 천명한 저자 본인의 전제와도 어긋
난다.
임해군 문제를 다룬 김에 한 가지 더 추가로 지적하자면, 임해군 옥사와 대
명 외교가 과연 인과관계였는지도 의문이다. 오항녕은 광해군이 즉위 직후에
밀어붙인 임해군 옥사를 대명외교의 자승자박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광해군
이 너무 성급하게 임해군 옥사를 일으킨 결과 명과 관계가 불편해졌고, 급기야
임해군을 직접 만나 조사하기 위해 명의 조사관이 한양에 들어왔고, 조정에서
는 엄청난 뇌물을 주고 마무리했음을 들어, 광해군을 비난했다.(76~81쪽) 그
러나 이는 사건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거나, 그렇지 않다면 의도적인 왜
곡으로 보인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광해군은 이미 세자 시절에 세자 책봉 주청을 무려 다섯
번이나 거절당한 전력이 있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핵심이 바로 장자 임해군이
있는데도 왜 차자인 광해군을 세자로 삼는가라는 추궁이었다. 이런 상황이었
으므로, 즉위 후에 바로 올린 국왕 책봉 주청의 결과도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
다. 실제로, 예부가 의문을 제기한 내용도 바로 임해군의 존재 때문이었고, 당
시 명에서는 임해군 옥사를 잘 모르고 있었다.
광해군의 즉위를 승인하기 위해
서 明입장에서는 장자 임해군이 어떤 상태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
서 이 사안은 광해군이 능동적으로 대처할 여지가 거의 없는, 다른 말로 임해
군의 옥사가 발생하지 않았을지라도 甲의 입장인 명 조정의 태도에 따라 불거
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단이 마치 광해군이 성급히 일으킨
임해군 옥사로 인해 발생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단순히 편파적이기에 앞서
차라리 왜곡에 가깝다.
셋째, 인목대비 廢位論, 이른바 廢母論에 대해 그것을 단순히 패륜으로 보는
차원을 넘어 보다 심층적 분석이 필요하다. 오항녕은 “인목대비의 사안은 의리
와 관련되기에 반드시 (목숨을 바쳐서라도 母后를) 지켜야 한다.”고 천명한 李
恒福의 주장을 들어, 이 폐위논쟁의 성격을 不義의 문제로 파악했다.(124~128
쪽)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이 논쟁을 패륜이나 불의의 문제로 보므로, 오항녕
의 시각은 학계의 중론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단순히
“자식이 어떻게 감히 어머니를 처벌할 수 있는가?”라는 윤리 문제이기 이전에,
“충효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국가에서 모후가 반역을 꾀했다면, 그 처벌을 어떻
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놓고 신료들이 양분된 사안이었다. 다른
말로, 충과 효는 정치무대에서 언제라도 서로 충돌할 수 있는 유교의 양대 가
치였는데, 인목대비 폐위 문제가 바로 그 사례로 부각된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때 찬반 양측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중국의 사례를 대거 인용
하면서 치열하게 맞섰다. 舜의 일화로부터 시작해 唐代의 ‘中宗反正’ 곧 則天武
后를 몰아내고 中宗이 복위한 사건을 거쳐 宋代의 태후 폐위나 유폐 사건에 이
르기까지 다양한 전례들이 거론되었고, 자의적인 해석이 난무했다.
그 가운데 胡寅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 朱熹의 ‘모범답안’을 보면, 인목대
비 폐위논쟁의 본질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주희는 중종이 복위한 후에
는 그 生母인 측천무후를 태묘로 끌고 가 宗社를 뒤흔든 죄목으로 처형했어야
옳았다고 단언했다. 33) 이것이 바로 주자학적 의리의 본질이었다. 주희가 저런
33) 資治通鑑綱目 券42, 乙巳神龍元年. “胡氏曰武氏之禍古所未有也張柬之
말을 했으니, 역모에 연루된 대비를 (그것도 생모도 아닌 대비를) 처벌하는 것
은 오히려 문젯거리도 안 되는 사안이었다.
그렇다면 인목대비 폐위논쟁의 본질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인목대비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 곧 입증이 안 된 혐의로 모후를 핍박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식이 있는 신료와 유생들은 당색을 초월하여 폐위
론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렇지만 廢位庭請에 불참한 신료들의 명단을 환관
을 통해 정기적으로 확보하는 등 사실상 국왕(광해군)이 폐위론을 배후에서
주도하는 상황에서, 인목대비는 죄가 없으니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을 대놓고 할
자는 많지 않았다. 그러면 어떤 논리로 대비를 보호할 것인가? 바로 “어떤 경
우에도 자식은 어미를 처벌할 수 없다”는 조선 버전의 새 논리가 등장했다. 이
는 설사 인목대비가 역모와 저주행위에 연루되었을지라도 어떠한 처벌도 불가
하다는 극단적인 논리로, 주자학 본연의 義理論에서도 벗어난 변형이었다. 따
라서 당시 폐위 여부 논쟁의 논리는 충과 효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인가의 논
쟁으로 상당히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34) 실제로, 이 논쟁의 폭력적 결말(폐위
반대론자들 숙청 및 대비의 유폐)과 역시 폭력을 수반한 극적인 반전(인조반
정)은 조선왕조의 통치이념과 가치체계의 진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
으로 작동했다. 따라서 폐위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결과로 등장한 패륜이
나 불의라는 가치론적인 낙인만 볼 것이 아니라, 그런 낙인이 붙기 이전 곧 논
쟁 당시의 관점에서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선악의 판단이라는 중세적 시각으
로만 이 주제를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넷째, 궁궐영건 등 토목공사 문제를 좀 더 다양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광해
군이 무리하게 추진한 토목공사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정적이며,
等第知反正廢主而不能以大義處非常之變爲唐室討罪人也… 兵旣入宮當先
奉太子復位卽以武氏至唐太廟數其九罪廢爲庶人賜之死而滅其宗中宗不
得已與焉然後足以慰在天之靈雪臣民之憤而天地之常經立矣…”
34) Seung B. Kye, 2006, In the Shadow of the Father: King Kwanghae and
His Court in the Early Seventeenth-Century CŏhnosKorea, doctoral
dissertatio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p. 128-151.
오항녕 또한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263~311쪽) 광해군을 극도로 비난했
다. 필자 또한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광해군의 입장을 고려하면
다른 층위의 설명도 가능하다. 한 예로, 당시가 왕조시대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李氏王室의 나라이자, 그 정점에 국왕이 위치한 왕조국가였다. 따
라서 궁궐은 곧 나라의 상징이자, 왕조 그 자체를 뜻하기도 했다. 이런 당대의
시각으로 볼 때, 왜란으로 궁궐이 거의 다 불탄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궁궐 공
사는 불가피했는데, 문제는 그 정도를 어느 선까지 인정할 것인가이다. 이점에
서 광해군이 그 선을 넘은 것은 분명하다.
다만 오항녕은 궁궐 공사를 왕권강화와 연관해 이해하던 기존 연구 시각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렇지만 왕조국가에서 궁궐과 왕권이 불가분의 관계
임은 자명하다. 불탄 경복궁 터를 도성의 중심에 방치한 채 그 옆의 궁에서 정
사를 볼 때 왕의 권위는 물론이고 왕실과 왕조의 권위에도 좋을 일은 없다. 19
세기 중반의 興宣大院君이 무리하면서까지 경복궁을 다시 세운 이유들 중에
왕권(왕실) 강화 의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왕권강화라는 표현보다
는 ‘왕실의 권위 회복’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만, 그래도 궁궐건립과 왕권
이 어떤 식으로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상식까지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아울러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대해 그 규모를 줄이거나 타이밍을 늦추자는
반대는 재위 기간 내내 간헐적으로 제기되었지만,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강도
가 높아졌다. 궁궐영건에 대한 신료들의 반대는 1618년까지 별로 심하지 않았
다. 1617년에 仁慶宮과 慶德宮의 신축이 시작되자 반대 의견이 개진되기는 했
으나 35) 그때뿐이었다. 인경궁과 경덕궁의 신축이 조정의 쟁점으로 급부상한
것은 공사가 이미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1618년 초여름, 즉 遼東의 軍門들이 조
선에 파병을 요구해 옴에 따라 그 대책을 놓고 조정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주지하듯이, 파병 불가를 주장한 광해군에게 온 신료들은 파병 준
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맞섰다. 궁궐공사 문제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1618년부터 1622년까지 5년 동안 궁궐영건에 대한 반대 의견이 개진
35) 光海君日記 券116, 9년 6월 28일 辛酉; 券117, 9년 7월 1일 癸亥.
된 기록을 광해군일기에서 찾아보면 모두 20개에 달한다.36) 그런데 그 중 8
개가 파병 여부 논쟁이 한창이던 1618년 윤4월부터 7월까지 석 달 사이에, 그
리고 7개가 姜弘立의 패전으로 인해 조정이 충격에 휩싸였던 1619년 3월과 4월
두 달 사이에 몰려 있다. 이것은 전체 반대 의견의 75%에 달하는 수치다. 따라
서 궁궐영건 문제는 사실상 조선군의 파병과 패전을 전후해 집중적으로 제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궁궐 영건에 대한 논란은 당시 조정에서 벌어지던 외교
노선 논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전쟁과 궁궐공사 가운데 왜 궁궐을 택하고 전쟁을 포기
했을까? 오항녕은 광해군이 국방에 쓸 물화마저 궁궐공사비로 전용했다면서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이 과정에서 광해군의 생각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광
해군에 대한 호불호 내지는 賢愚판단에 앞서 그의 생각 자체를 탐구하는 것은
인물사 연구의 기초정석임에도, 저자는 이를 소홀히 했다.
앞의 2절에서 기술했듯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왕조를 보존하기 위한
방책은 광해군이 보기에는 하나뿐이었다. 후금이 일단 조선을 침입하면 조선
의 군사력으로는 그 鐵騎를 막을 길이 없고, 왜란 때처럼 명이 조선을 도울 여
력도 없으니, 조선왕조의 보존을 위해서는 누르하치와 우호적인 대화를 열어
야한다는 것이 광해군의 판단이었다. 이에 대해 신료들은 전쟁과 토목공사는
동시에 진행할 수 없으니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그 경비를 후금에 맞서기 위한
국방비로 돌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37) 이런 신료들을 상대로, 광해군은
파병하지 않는다면 후금의 침입을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 이미 진행 중인 궁궐
건축을 중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맞섰다.38) 이런 논쟁의 결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평소에도 유사시에 대비한 保障處확보에 골몰한 점이나, 혹시라도 후
금이 침공해올 경우 국왕인 자신이 靖康의 變으로 끌려간 欽宗과 徽宗처럼 될
36) 필자의 부주의로 혹시라도 누락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필자의 논
의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37) 光海君日記 券127, 10월 윤4월 17일 乙亥; 23일 辛巳; 券128, 10년 5월 16
일 癸卯; 券129, 10년 6월 6일 癸亥.
38) 光海君日記 券129, 10년 6월 15일 壬申.
까봐 불안해한 까닭 또한 모두 광해군의 소극적이고도 방어적인(심리상태)의
산물이었다. 광해군의 지나친 토목공사는 당대의 시각으로 보나 현재의 시각
으로 보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失政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현상으로만 비난
할 일이 아니라, 그런 무리수를 감행한 광해군의 생각도 함께 살펴야 ‘인물사’
로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편파적인 사료 인용과 해석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책의 전편
에 걸쳐 숱한 사례가 이어지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만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오항녕은 姜弘立이 이끌고 나간 조선군의 참패를 크게 비난하되, 그 화
살을 광해군에게로 돌렸다.(350쪽) 그러나 광해군은 비변사를 필두로 온 조정
이 즉각 파병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뒤덮인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끝까지 파병
에 반대하다가 황제의 징병칙서가 도착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지못해
파병을 윤허했다. 따라서 이 원정실패에는 비변사의 책임이 누구보다도 막중
하다. 준비 부족이니 기회주의라는 저자의 평가는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으로,
정말로 비난을 하려면 그 화살을 국왕이 아니라 비변사로 돌렸어야 합당하다.
저자는 대동법 시행 의견은 있었으나 전혀 시행하지 않은 선조 대에 대해서
는 함구하고, 그래도 시범적이나마 최초로 시행한 광해군 대에 대해서는 신랄
하게 비난했다. 심지어 경기도 이외의 지역으로 확대해 실시하지 않은 것도 모
두 광해군 탓으로 돌렸다.(167쪽) 이런 식의 논리라면, 인조와 효종도 여전히
제한된 지역에서 대동법을 시행했으니 비슷한 비중으로 비난해야 형평에 맞지
않을까? 특히 아예 시행조차 안 한 선조에 대해서는 어떤 강도로 비난해야 형
평이 맞을지 궁금하다.
재상을 역임한 당상관이자 89세의 鄭仁弘을 국가의 예우 관례를 깨뜨리고
참수형에 처한 지나침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로지 정인홍의 잘못과 죄악만
강조한 저자의 설명(110~129쪽) 또한 편파적이다. 정인홍에 대한 사형이 다분
히 정치적 판결이었음은 자명한데, 임해군 옥사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근대의
시각’으로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정인홍의 죄목에 대해서는 같은 잣대가 아니
라 中世의 잣대를 적용하여 그 처벌을 당연시했다. 이는 이중 잣대의 좋은 예
이다.
오항녕은 선조와 광해군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한 이유가
① 세자 책봉을 연이어 거절한 명나라 때문은 아니며,(99~101쪽)
② 선조는 광해군의 세자 자질을 의심했다는 논조의 기술(128쪽 外)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관계파탄의 책임을 전적으로 광해군에게 돌린 셈이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이다 못해 왜곡에 가
까운 해석이다.
먼저, 저자는 ①의 근거로 왜란 초기부터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을 다섯 차례나 시도한 점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는 주청 횟수라는 표면적
횟수만 본 것일 뿐, 주청 논의별 각각의 내용과 배경 및 선조의 의도 등은 제대
로 살피지 않은 결과이다. 이 문제를 다룬 한 연구에 따르면,39) 모두 13차례 발
생한 세자책봉 주청 논의 가운데 선조가 적극 나선 경우는 사실상 없었고, 선
조는 대개 주청 논의를 거부하곤 했다. 세자책봉 주청이 혹시라도 받아들여질
약간의 가능성조차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신료들의 압박에 밀려 선
조가 마지못해 허락하여 주청사를 파견한 횟수가 다섯 차례일 뿐이지, 선조에
의해 제지당한 주청 논의가 더 많았던 것이다. 주청사 파견의 피상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내면도 살피고 고려해야 보다 균형 있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선조가 광해군을 천대한 이유를 광해군의 자질부족 때문으로 설명한 것도
문제이다. 선조가 광해군을 노골적으로 압박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왜란 중
선조는 자신의 권력이 조금이라도 세자에게 넘어갈 가능성 때문에 거의 병적
으로 광해군을 사사건건 견제했으며, 종전 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전방위 압
박을 가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讓位소동이다. 선조는 모두 21차례나
양위하겠다며 소동을 피웠는데, 그것은 실제로 양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
료들에게 자신(국왕)과 광해군(세자) 가운데 한 명을 택하라고 강요하는 무서
운 경고였다. 이때마다 세자 광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며칠이고 곡기를 끊고
뜰에 엎드려 양위 전교를 거두어달라고 읍소하는 일뿐이었다. 40) 懿仁王后가
39) 계승범, 2012, 「임진왜란 중 조명관계의 실상과 조공책봉관계의 본질」, 한
국사학사학보26.
40) 계승범, 2013, 「세자 광해군: 용상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한국인물사연
구20.
죽은 후에 선조는 세자 책봉 주청 건의를 묵살하고 왕비간택 문제를 우선했으
며, 계비를 맞아들인 후에는 역시 병적으로 대군의 탄생을 위해 경주했다. 이
런 상황을 무시한 채 광해군의 자질만 문제 삼은 평가는 공정하지도 않을뿐더
러, 무엇보다도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오항녕은 책의 전편에 걸쳐 광해군을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정작 광해군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저자가 광해군을
역사 연구의 대상이자, 인문학자가 가장 중시하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단지
법정에서 피고를 대하는 검사의 입장에서 이 책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
무리 일반대중을 상대로 글을 쓸지라도 사료에 기초한 설명 및 논리성과 합리
성에 기초한 해석은 필수적이다. 오히려 역사 관련 전문지식과 역사학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지 않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책을 집필하는 저자라면 이런 논리
의 일관성과 합리적 상식에 더더욱 기초해 글을 써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항녕의 광해군은 기존의 광해군 평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점은 좋으나,
그것을 조리 있게 설득하는 데에는 성공적이지 않다. 특히 너무 일방적이고 자
의적인 해석은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Ⅳ. 맺음말
한명기가 1930년대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로부터 시작해 해방 후 이병
도를 거쳐 이어진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 곧 수정주의 해석을 집대성
했다면, 오항녕은 그런 수정주의적 해석을 전면 부정하고 광해군에 대한 평가
를 근 400년 이전 계해정변(인조반정) 직후의 상태로 돌이켰다.
문제는 두 저자 모두 좀 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에 따라 광해군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두 저
자의 책은 모두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다루지만, 그들의 책에서 정작 광해군 입
장에서 기술하거나 고려한 부분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난세를 맞아 천신만고 끝
에 즉위한 광해군이 무엇을 놓고 고민하고 집착했는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책의 주인공은 광해군이고 제목도 광해군이지만, 역설적이게
도 이 두 책에서 광해군이라는 한 인간은 잘 보이지 않는다. 광해군에 대해 우
호적인 변호 내지는 준엄한 구형만 들릴 뿐이다. 이는 연구하는 대상 인물의
마음상태나 의식구조가 어떠한지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저자의 입
장에서 광해군을 임의로 소환해내어 활용하고 평가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일
수도 있다.
특히 오항녕은 계해정변(인조반정) 당사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함으로
써 역사 공부를 ‘허전하게’ 만들었다. 현대의 역사가라면 정변을 일으킨 주동자
들이 권력을 잡은 직후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해 믿기보다는 그
내용과 함의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뿐 아니라, 현재의
통설이라 할 수 있는 수정주의적 해석을 전면 비판하려면, 논리적으로 두 가지
작업을 해야 했다. 內政상의 실정을 부각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니라, 외교노선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광해군의 오류와 잘못을 논증해야 논지가 더 살
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즘에는 수정주의 해석에서도 광해군의 내정을 대체
로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정주의적 해석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다면서도 정작 광해군의 외교노선 문제를 정치하게 다루지 않은 점이 아쉽다.
법정에 비유하여 두 저자의 연구 태도를 비평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광해군
이 형사법정의 피의자로 앉아있다고 가정하면, 한명기는 변호사 역할을, 오항
녕은 검사, 특히 공안검사 역할을 한 셈이다. 피고석에 앉은 광해군의 삶과 생
각과 행동동기를 면밀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는 데
유리한 질문들만 골라서 피고에게 질문을 하되, 질문에 대한 피고의 답변에는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면이 있다. 이런 태도는 두 저자에게서 모두 발견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공안검사’ 역을 맡은 오항녕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조선왕조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광해군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張
三李四가 아닌 국왕이었기 때문이자, 그의 재위기간이 바로 동아시아 국제질
서의 재편이 시작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광해군 대 조정에서 오간 숱한
논쟁들이야말로 조선왕조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해군
에 대한 이해나 평가는 다양할수록 좋다. 다만 2015년 현재까지도 광해군에 대
한 단행본이 대중서뿐인 점은 크게 아쉽다. 일본인 학자 이나바가 광해군에 대
한 학술저서를 1930년대에 처음으로 출간한 지 80년이 지났음에도 한국인 학
자에 의한 전문학술서가 한 권도 나오지 않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제는 이
분법적 논쟁을 잠시 쉬고, 가치 지향적 윤리적 판단도 잠시 내려놓고, 광해군
시대 전반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심층적인 연구서가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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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 B. Kye, 2006, In the Shadow of the Father: King Kwanghae and His Court in
the Early Seventeenth-Century Chosŏn Korea, doctoral dissertatio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Abstract
Two Conflicting Views of King Kwanghae
in Korean Historiography
KYE, Seung-Burm
King Kwanghae (r. 1608-1623) was deposed by the Palace Coup of 1623
launched by his nephew. According to the royal message promulgated in the
name of the Queen Dowager immediately following the coup, the causes for
the coup, or King Kwanghae’s crimes, can be roughly divided into two main
categories: King Kwanghae’s betrayal of Ming China to the barbaric Manchu
and the persecution of the queen dowager and princes. This negative view of
King Kwanghae was absolute for about 300 years until the last day of the
Chosŏn dynasty. It was not until the 1930s that such a traditional view began
to draw criticism. Detractors evaluated King Kwanghae’s foreign policy as
neutralist and the best choice Chosŏn could have made at the time, turning
between two powers, Ming China and the Later Jin (Manchu). As for the issue
of the queen dowager, they blamed the Senior Northerners and portrayed King
Kwanghae as victimized of factional strife. This revisionist interpretation was
transmitted to the post-1945 Korean scholars. Han Myŏnggi’s Kwanghaegun,
published in 2000, was a monograph that lined up with the revisionists and
summed up their interpretations. O Hangnyŏng’s Kwanghaegun, published in
2012, however, rejected revisionist interpretations and supported the traditional
view of King Kwanghae. With emphasis on King Kwanghae’s mentality and
his policies and politics, this review article critically examines the two
conflicting views of King Kwanghae.
Keywords : Injo Restoration, Palace Coup of 1623, Han Myŏnggi, O Hangnyŏng,
Chos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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