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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조원진.한양대

I. 머리말

Ⅱ.조선 전기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

Ⅲ.조선 후기 기자수봉설과 기자조선 평양설 비판

Ⅳ.맺음말

I.머리말

기자조선에 대한 연구는 크게 상말주초 기자의 역사성 및 동래의 실제 여부를 검토하는 연구와 기자조선이 한국사의 체계로 자리 잡은 후대의 기자·기자조 선 인식을 살펴보는 연구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갑골·금문에 나오는 기자 자료와 기후방정을 비롯한 요령성 객좌에서 출토된 상·주청동기에 대한 분석 과 한대 이후 기자동래설의 형성을 다루는 고대사의 영역에 해당된다.1

후자의 경우 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기자·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을 다루며 사학사 와 사상사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2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성립된 조선은 기자 동래를 인정하고 기자조선을 정사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했다.

기자조선의 역사성을 전면적으로 재평가하고 이를 부정한 연 구는 근대 시기가 되어서야 가능했다.3

1. 조원진, 2009, 「기자조선 연구의 성과와 과제」, 『단국학연구』 20, 416~429쪽.

2. 조선시대 기자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다음 연구가 참고된다. 박광용, 1980, 「기 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변천-고려부터 한말까지의 사서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6; 한영우, 1982, 「고려~조선전기의 기자인식」, 『한국문화』

3. 이외에 조선시대 학자 개인의 기자 인식에 대한 연구성과는 적지 않게 나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문 에서 소개하기로 하겠다. 한편 최근에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기자 등 고조선 관련 사료를 모은 번역집이 발행되어 관련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동북아역사재단, 2018~2022, 『한국고대사 자료집: 고조선·부여편』 Ⅰ~Ⅴ). 3 신채호, 1911, 『讀史新論』, 재미한인소년서회; 崔南善, 1929, 「朝鮮史의 箕子는 支那의 箕子가 아니다」, 『怪奇』 2.

현재 한국, 북한, 일본 학계에서는 기자 조선을 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중국학계 일각에서는 기자조선(기씨조 선)을 그대로 인정한다.4

기자조선의 역사적 실체가 부정되는 이유는 고고학상 으로 고조선문화에 은문화 요소가 없으며,5 문헌자료에서 시대에 따라 윤색되 는 과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전승은 위만조선 멸망 이후 등장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6

조선시대에도 비교적인 시각으로 기자조선의 실체를 의심하거나 관련 기록 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인식들이 있었다.

그동안 선행연구에서는 조선시대 기자 를 부정하거나 소극적으로 평가한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으나7 자세한 검토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자·기자조선에 대한 검토를 위해서는 전통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은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으나 그동안 조 선시대의 기자 인식을 다룬 연구에서는 기자조선을 인정하는 인식만 살펴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 기자 동래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는 주로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던 기록의 모순점을 지적하거나, 기자가 도읍한 곳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 등이 있었다.

이에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8

4. 중국학계의 기자조선 연구는 苗威의 『箕氏朝鮮史』(2019)로 정리되었다. 이에 대 한 내용과 문제점은 조원진, 2021, 「최근 중국학계의 기자조선 연구 동향 검토」, 『한국사학보』 85, 18~29쪽 참고.

5 .김정배, 1973,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學校 出版部, 180~198쪽.

6. 江畑武, 1983, 「箕子朝鮮開国伝承の成立」, 『阪南論集 人文·自然科学編』 18(4); 오현수, 2012 「기자 전승의 확대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대동문화연구』 79; 박대재, 2016 「기자조선과 소중화」, 『한국사학보』 65; 조원진, 2023a, 「기자 동래설의 성립 과정에 대한 검토」, 『한국고대사연구』 109.

7 .박광용, 1980, 앞의 글, 270~272쪽; 정재훈, 2004, 「조선후기 史書에 나타난 중 화주의와 민족주의」, 『한국실학연구』 8, 305쪽.

8 . 이 글에서 관련 사료의 번역은 다음 문헌을 참고했다. 동북아역사재단, 2018~2022, 앞의 책.

II.조선 전기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

선진문헌에 기자는 상 말기의 충신이자 현인으로 조선과 무관하게 기록되었다.

하지만 기자 당대보다 약 1,000년이 지난 전한시대에 이르러 『상서대전(尙書大 傳)』과 『사기(史記)』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고 하여 기자와 조선을 관련시 킨 기사가 확인된다.

그 내용에서 『상서대전』은 기자가 먼저 조선으로 가고 무 왕이 봉했다고 했으며 『사기』는 무왕이 먼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기록 에 차이가 있으나 기자가 이후 주나라에 조회했다는 내용은 같다.

하지만 무왕 이 기자를 주나라의 통치가 못미치는 해외에 봉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다.

또한 당시 정황으로 보아 기자의 동래가 사실이었다면 그의 조회는 사 실이 아닐 것이며, 조회가 사실이었다면 동래는 사실이 아니었을 것이다.9

이처 럼 전한대에 처음 등장한 기자 전승은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며 서로 모순된 내 용을 담고 있다.

또한 『상서대전』과 『사기』의 해당 기사는 본래 원본에 있었던 것인지조차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0

하지만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막연한 이 전승은 후한 이후 현지 풍속 기사에 기자의 교화 전승을 덧붙인 『한서(漢書)』와 위만 이전 고조선의 왕을 기자의 후손으로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등의 사례 처럼 후대로 갈수록 윤색이 더욱 확장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결국 고려 후기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우리 문헌에서는 최초로 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설정하여 전조선(단군조선)에 이은 기자조선 시대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반면 같 은 시기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기자의 동래는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겨가는 원인이 되었을 뿐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왕검조선(고조선)-위만조선’의 2조선 체계를 보여주었다.11

9. 천관우, 1989, 『고조선사·삼한사 연구』, 일조각, 29쪽.

10. 조원진, 2023a, 앞의 글, 23~24쪽.

11. 고려시대의 기자 인식과 우리문헌에서 기자조선설이 수용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조 원진, 2015, 「고려시대의 기자 인식」, 『한국사학사학보』 32 참고.

이후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을 인정하여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3조선 체계가 확고해졌다.12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태조 1년(1392) 예조(禮曹) 전서(典書) 조박(趙璞) 등 이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라고 상서했다.13

이를 계기로 단군과 기자는 국가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한 것 도 단군과 기자를 동시에 염두에 둔 것이다.

정도전은 태조에게 올린 글에서 단 군조선, 위만조선, 신라, 백제, 후백제, 고구려, 후고구려, 고려가 모두 천자의 명이 없이 나라를 세웠지만 기지만이 주 무왕의 명을 받아 ‘조선후(朝鮮侯)’가 되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14

정도전은 기자조선만 유의미한 국호를 갖게 된 이 유는 중국의 책봉을 받았기 때문이며 이는 기자조선과 그를 계승하여 교화를 실 천한 조선왕조만 정통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는 국사와 조선 건국에 성리학적 의미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유교 중심의 단일한 역사관을 지향 했다고 할 수 있다.15

조선시대에 단군과 기자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지 않고 서로 보 완하는 양상을 보였다.

태종 12년에는 하윤(河崙)이 단군은 우리 동방의 시조이 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한 사당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건의하여 기자사당에 단군위패를 함께 모시게 했다.16

12. 여말선초 기자 인식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가 있다. 최봉준, 2013, 「李穀의 箕子 중 심의 국사관과 고려·원 典章調和論」, 『한국중세사연구』 36; 최봉준, 2014, 「정도 전의 箕子 중심의 역사관과 급진적 문명」, 『韓國史學史學報』 29; 최봉준, 2015, 「여말선초 箕子 중심의 역사계승의식과 조선적 문명론」, 『韓國史學史學報』 31.

13 . 卷1, 太祖 1年 8月 11日 庚申.

14. 『三峯集』 卷7 國號.

15. 최봉준, 2014, 앞의 글, 84쪽.

16. 『太宗實錄』 卷23, 太宗 12年 6月 6日 己未.

세종대에는 사온서 주부 정척(鄭陟)이 평양의 기자사당에 가서 단군위패가 기자위패보다 낮게 배치된 것으로 보고 이를 시정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 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며 기자보다 무려 1,230여 년 먼저 나라를 세 웠다는 것이다.

나아가 단군위패를 기자사당에 모신 것도 잘못이라 지적하면서 단군사당을 따로 세우자고 건의했다.

세종은 정척의 건의를 따라서 시행하라고 예조에 명했다.17

세종대에는 기자의 독자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세종 10년 평안 도 감사가 상소하길 기자사당의 위패가 ‘조선후기자(朝鮮侯箕子)’로 되어 있는 데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위라 이미 ‘조선후’라고 하고, 또 ‘기자’라 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사기(史記)』에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 하였으나 신하로 여기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에 기자는 주나라의 제후가 아니니 ‘조선후’가 아니라고 했다.18

이에 세종은 그 청을 받아들여 ‘조선후기자지위(朝 鮮侯箕子之位)’를 ‘후조선시조기자(後朝鮮始祖箕子)’로 고쳐 쓰게 하고 단군의 신위판도 ‘조선후단군지위(朝鮮侯檀君之位)’에서 ‘조선단군(朝鮮檀君)’으로 고 쳐 쓰게 했다.19

세종대에 기자는 제후(諸侯)에서 시조(始祖)로 격상되면서 그 독립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20

17 『世宗實錄』 卷29, 世宗 7年 9月 25日 辛酉.

18 『世宗實錄』 卷41, 世宗 10年 8月 4日 癸巳.

19 『世宗實錄』 卷49 世宗 12年 8月 6日 甲戌.

20 한영우, 1982, 앞의 글, 38~39쪽; 한영우, 2019, 『세종평전』, 경세원, 357~361쪽.

이처럼 세종대에는 기자의 독립성 문제 가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기자 동래에 대한 『사기』 송미자세가 등의 기사를 어 떻게 해석할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의 논의는 자료의 해석 문제에 집중되었으며 『사기』의 기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성종대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외기(外紀) 에 수록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사기』, 『한서』, 『위략』, 『후한서』 등의 자 료를 통해 기자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연나라와 대립한 조선 의 통치자에 대해서는 ‘조선후(朝鮮侯)’라 하여 기자조선이 주나라의 제후임을 명백히 했다. 『동국통감』은 기자의 행적을 더 높이 평가하며 기자조선과 주와의 사대관계를 분명하게 부각시키는 서술태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21

특 히 『동국통감』은 기자가 중국인 5,000명을 이끌고 조선에 왔다는 함허자의 기 록을 사론에 수록하여 후대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 音註東國史略)』, 22 『동사찬요(東史簒要)』, 23 『동사보유(東史補遺)』 24 등도 기자 의 동래 과정에 대해 함허자(涵虛子)가 언급한 『주사(周史)』 기록을 그대로 수용 했다.25

이에 따라 이들 문헌에는 기자가 중국 사람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 으로 피하는데 시서(詩書), 예악(禮樂), 의무(醫巫), 음양(陰陽)·복서(卜筮)의 무 리와 백공기예(百工技藝)가 모두 따라왔고 말이 통하지 않아 통역을 하여 알게 하였다는 내용이 동일하게 확인된다.

명종대의 학자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월정집(月汀集)』 권5의 「연경으로 가는 조 첨추를 전송하는 서문」(奉送趙僉樞如京序)과 「연경에 가는 이 첨추를 전송하는 서문」(送李僉樞如京序)에서 광녕성의 기자 유적을 언급하 기도 했다.

즉, 광녕성 북쪽에는 기자정(箕子井)과 기자묘(箕子廟)가 있고 후관 (冔冠)을 쓴 기자 입상(立像)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기자정만 남아 있다고 한다.

윤근수는 기자가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기에 행궁이 광녕에 있어 기자정과 기자묘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했다.

윤근수는 배구가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다’ 라고 언급한 것은 근거가 있다고 보고 기자를 봉할 당시 영평(永平)에서 요서(遼 西)를 걸쳐 동쪽으로 평양(平壤)에 이르는 지역을 전부 기자의 봉지로 삼았다고 해석했다.26

21 한영우, 1981, 『조선전기사학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88~189쪽.

22 『標題音註東國史略』 卷1 前朝鮮.

23 『東史簒要』 卷1 上 箕子朝鮮.

24 『東史補遺』 卷1 箕子朝鮮.

25 함허자(涵虛子)가 인용한 사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김태윤, 2019. 「『천운소통(天 運紹統)』의 기자(箕子)와 기자조선 기록 고찰」, 『인문사회』 21-1 참고.

26 『月汀集』 月汀先生集 卷5序 奉送趙僉樞如京序; 『月汀集』 月汀先生集 卷5序 送李僉樞如京序.

그의 연구는 조선 후기 기자조선의 강역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있기에 앞서 만주의 기자 유적을 주목한 선구적인 연구였다.

조선에서 기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임진왜란이 계기가 되었다. 이미 선조대에는 윤두수의 『기자지(箕子志)』와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가 편찬되며 기자 자료의 집대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윤두수는 선조 10년(157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사람들로부터 기자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충 분히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에 윤두수는 기자에 대한 기록과 논평을 모 아 『기자지』를 편찬했다. 하지만 일관된 체제를 갖추지 못한 한계가 있었는데 이이는 이를 보완하여 『기자실기』를 편찬한다.

이이는 『기자실기』에서 기자가 무왕 아래에서 벼슬하기를 싫어하여 조선으로 왔고 뒤에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조선에 봉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자는 무왕에 대해서 자율성을 가진 제후였다 고 이해했다.

이이는 선조 15년 명에서 온 사신을 접견할 때 부사(副使) 왕경민 이 늘 기자가 동쪽으로 온 사적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운데 본국이 기록 된 것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하자 자신이 저술한 『기자실기』를 주기도 했다.27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이여송은 평양성을 수복하고 성에 들어가 죽은 장졸에 게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에는 기자묘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28

이에 조선에서 도 기자 사당과 유적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할 수 없었으며 기자의 동래와 명군 의 구원이 가지는 관계성을 강조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29

또한 광해군대 에는 기자사를 숭인전으로 고치고 선우씨를 기자의 후예로 정하여 제사를 주관 하게 했다.30

27 『宣祖改修實錄』 卷16 15年 11月 1日 乙卯; 『栗谷全書』 栗谷先生全書 卷34 附 錄2 年譜 下.

28 『宣祖實錄』 卷34 26年 1月 11日 丙寅.

29 김경태, 2016, 「임진왜란 시기 朝鮮·明관계와 箕子인식의 양상」, 『한국사학보』 65, 183쪽.

30 『光海君日記』 卷52 4年 4月 27日 辛卯.

이처럼 임진왜란 이후 기자 및 기자조선의 존재를 매우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나 한편으로는 문헌에 나타난 기자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소극 적으로 평가한 경우가 나타나기도 했다.

먼저 선조 36년(1603) 8월 13일 조정에서는 주역의 명이괘(明夷掛)를 강독 하며 기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이 이르기를, “기자의 자손은 후세에 아는 자가 없으니 매우 서운하다. 기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것은 기자가 아니라 미자일 것이다. 기자는 무왕(武 王)만이 함께 도(道)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홍범(洪範)으로 그 도를 전하였을 뿐이고, 중국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은(殷)나라의 유민(遺民)을 거느리 고 동으로 향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실로 무왕이 봉(封)한 것도 아니고 주나라에 조회했을 리도 없다. 헛말이 전승되고 잘못을 답습하여 드디어 후세에 전하였으 니, 사서(史書)를 지을 때에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도간(陶侃)이 천문(天門) 에 올랐다는 것과 범여(范蠡)가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갔다는 것은 옛사람이 다 헛말이라 했다. 도간이 유양(庾亮)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유양이 그 말을 꾸며 만든 것이고, 서시는 병란에 죽었는데 오호(五湖)에서 배를 띄우고 놀 았다 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저 교동(狡童)의 노래도 기자의 말이 아닙니다. 나라를 잃은 뒤에 임금을 가리켜 교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느 중국 사신이 기자묘(箕子廟)에 알현하고, 시(詩)를 짓 기를 ‘백수에 무왕 만나 봉지를 얻었으나, 황천 가서 성탕을 뵐 낯이 없구나(白首 有封逢聖武 黃泉無面見成湯)’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무식한 말이니, 따질 것도 없다.”31

31 『宣祖實錄』 卷165 36年 8月 13日 丙申.

선조는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하였다는 기록을 비판하며 조회를 간 사람은 기자가 아니라 미자라고 보았다.

기자는 중국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은 유민을 거느리고 동으로 향하여 왔으니 무왕이 봉한 것이 아니고 주나라에 조회했을 리 도 없는데 헛말이 전승되고 잘못을 답습하여 후세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덕형 도 교동(狡童)의 노래도 기자의 말이 아니라고 보면서 나라를 잃은 뒤에 임금을 가리켜 교동이라 할 수 없는데 옛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라 했다.

이러한 해석은 해외 국가인 조선에 무왕이 기자를 봉하고, 이미 동래한 기자가 다시 조회했다 는 기록상의 모순이나 ‘맥수(麥秀)’의 저자를 『사기』는 기자로 기록했으나 『상 서대전』은 미자라고 하여 차이를 보이는 점 등을 나름 합리적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기자 동래 기록에 대해 본격적인 비판이 정사신(鄭士信, 1558~ 1619)에 의해 제기되었다.

정사신은 25세에 문과급제 후 승문원(承文院)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56세에 밀양부사를 역임하기까지 30여 년이 넘도록 관직생활 을 했다.

그는 선조·광해군조에 걸쳐 벼슬을 하며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홍문 관이나 사간원 등 내직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도사나 부사 등 외직을 역임했다.32

32 김성규, 1996, 「매창 정사신 문학연구」,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5~18쪽.

비록 관료생활을 하면서 많은 글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1821년 그 의 7대손 정내성(鄭來成)이 정사신의 문집인 『매창문집(梅窓文集)』을 간행 했다.

『매창문집』은 5권 3책으로 구성되었고 권4 잡저에 「기자조주수봉변(箕 子朝周受封辨)」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논설은 정사신이 광해군 2년(1610) 동지부 사로 명에 사신으로 떠날 때 기자묘를 배알하고 지은 것이다.

정사신은 이 논설에서 『사기』 송미자세가에 기록된 기자 기록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비판한다. 그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사신은 주무왕이 기자 를 조선에 봉했다고 한 것에 대해 의리(義理)로 따져보았을 때 무왕이 어찌 봉작 으로 기자를 얽매겠으며 기자 또한 주나라의 봉작을 받는 것을 달갑게 여겼을 것이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신하라고 칭하지 않으면서 봉작(封爵)만 누 리는 것은 향당(鄕黨)에서 제 몸만 아끼는 자들도 하지 않는 짓인데 기자와 같은 성인이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상서(尙書)』 홍범편에 ‘13년에 무왕이 기자를 방문했다’고 한 것은 기자가 주나라를 조근한 것이 아니 라 무왕이 기자를 봉한 것이며 이들의 대화를 통해서도 무왕과 기자는 서로 대 등한 상황에서 대화한 것이지 임금의 입장에서 신하를 대하거나 신하의 입장에 서 나눈 것이 아니라 했다.

정사신은 『사기』의 기자동래 기사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사기』에는 기자가 아뢴 홍범을 실은 후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지만 신하로 삼지 는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미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고 하는데 신하로 삼지 않 았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 반문하며 말의 앞뒤에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상 서』 미자편에서 세 명의 어진이들(仁者)이 자신들의 마음을 역설하며 기자는 ‘상나라가 멸망한다면 다른 사람의 신복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 했는데 만약 무 왕에게 조선의 봉토를 수여받았다면 그렇게 말한 근거가 어디 있겠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만일 기자가 신복이 되었다면 공자께서 어떻게 세 명의 어진 이 중 하나로 칭송했는지 반문한다.

그렇다면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된 것은 누구에게 봉해진 것인지, 아니면 기 자는 조선에서 군주가 된 적이 없는 것인지 혹자의 물음에 정사신은 다음과 같 이 답한다.

기자가 조선에서 군주가 된 것은 없애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무왕이 봉작을 하사한 것은 아니며 기자가 길을 나서 멀리 방외(方外)의 해안에 성교(聲 敎)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향하여 동방의 백성들이 아이들을 들쳐 업고 기자 에게 귀부하며 그를 군사(君師)로 추대하고 교조(敎條)를 스스로 세웠다고 보 았다.

정사신은 요임금과 동시대라는 단군의 건국 기록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 는 단군과 요임금은 같은 시기 재위에 올라 상나라와 주나라 무렵에는 단군의 후예들이 1,000년 이상 이어졌지만 몽매하고 질박하며 중국과 통하지 않는 머 나먼 방외의 땅이었다고 설명한다.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던 시기에 이미 조선 이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알지 못했기에 기자를 그 땅에 봉할 수 없었으며 단군 의 시대가 쇠퇴해진 후에 조선의 백성들은 갓난아기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아 장아장 걸어가는 것과 같이 기자에게로 귀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왕(武王)과 성왕(成王), 강왕(康王)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주나라에서는 기자가 동쪽 땅을 교화시켰음을 확실히 알지 못했고 춘추시대에도 역시 조선이 있었음을 알지 못 했다고 보았다.

다만 성인만 성인을 알아볼 수 있으므로 공자가 구이(九夷)에 살 고자 했던 일은 기자가 조선 땅에 거함을 누추하다 여기지 않고 묵묵히 그 뜻을 미쁘게 여긴 것이라 이해했다.

그렇다면 『사기』의 기자 동래 기사가 실리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의문이 제 기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정사신은 사마천의 『사기』 기록이 진나라 이후 야인 이 만든 이야기를 잘못 답습하였다고 보았다.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예전부터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하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이야 기에 대해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항상 이것이 진(秦)나라 이후 야인(野人)이 만든 이야기를 사마천의 『사기』에서 답습한 오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수가 익숙해져 마침내 믿을 만한 역사로 여기게 되었다. 비록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가 『사기』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이 문제를 미처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二 聖)의 심사(心事)만 진나라 당시 분서갱유의 여파라고 모함을 받게 했다. … 또 논하자면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는 이야기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없었던 이야기 이다. 만일 당시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맹자가 ‘공자가 피부병 고치는 의원 집 에 묵으셨다’거나 ‘이윤이 요리하는 재주를 가지고 탕(湯)임금께 등용해주기를 요 구했다’거나 ‘백리해(百里奚)가 진나라의 희생을 기르는 자에게 자신을 팔았다’는 이야기에 대해 모두 도리를 근거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온 힘을 쏟았는데 유독 세 명의 어진이(仁者)의 큰 절개에 대한 흉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물리치지 않았겠 는가? 진나라의 분서갱유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전쟁이 끝난 뒤에야 방외의 먼 지역에 대한 정보가 흘러 흘러 점차 퍼지게 되었으니 세인들이 비로소 조선이라 불리는 땅이 있음을 듣게 되었다. 기자가 교화를 베풀었다는 풍문도 마침내 전해 져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주나라 무왕의 대봉건 시대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기 자가 봉토를 수여받고 임금이 되어 홍범구주(洪範九疇)와 팔조법금(八條法禁)의 교화를 베풀고 정전제(井田制)와 전부(田賦)의 제도를 기획하였다고 생각 했다. 여러 사람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잘못된 이야기를 답습하자 사마천이 『사기』에서 여기에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 이와 같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앞 서 ‘이것은 진나라 이후의 야인이 만든 이야기를 사마천의 『사기』에서 답습한 오 류’라고 한 것이다.33

33 『梅窓文集』 卷4 雜著 箕子朝周受封辨. 34 崔南善, 1929, 앞의 글.

살펴본 것처럼 정사신은 당시 은·주에서 조선은 통하지 않는 머나먼 방외의 땅이었기 때문에 당시 기자를 조선에 봉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왕이 기자를 봉 했다는 이야기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없었으며 진나라 이후에야 중국에서 조선 이 있음을 알게 되어 기자의 교화 이야기가 확대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 기』의 기자 동래 기사는 진나라 이후 야인(野人)들이 만든 이야기를 답습한 것 이라 판단했다.

이처럼 정사신이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자 동래 기사 자체에 의문을 품고 그 허구성을 검토해나간 부분은 근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제기된 기자조선의 허구성을 주장한 논지34와도 유사한 부분이 발견된다.

당시 국제정 세와 지리적인 관점에서 조선-은·주가 교류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선진문헌에 기자동래설이 나오지 않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합리적으로 기자 문제를 파악 한 것이다.

그의 논지대로 당시 주나라가 조선이란 나라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면 기자를 봉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통치할 수 도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정사신의 논리는 사실상 기자 동래와 기자 조선도 부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자의 동래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정사신의 변론은 시대적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사신이 『사기』의 기자 동래 기사를 전면 적으로 비판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정사신의 외교 경험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사신은 일찍이 북경에 갔을 때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예를 행 할 때 조복(朝服)을 입지 않고 다만 현포(玄袍)만 걸치고 들어가 반행(班行)에 참 석하는 것을 분통으로 여겨왔다.

이에 예부(禮部)에 나아가 ‘번국의 사신은 조복 을 입고 참반(參班)한다’고 한 명나라 집예(集禮)에 근거하여 논변하기도 했다.

비록 명 측에서 그의 건의를 수용하지는 않았으나 외교관례상 명분을 축적하는 데 기여하고 아무리 상국이라도 문화적 자존심을 지켜내야 한다는 주체의식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35

외교관계에서도 드러난 이러한 정사신의 주체의식은 한 중 관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기자 전승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검토를 가능하 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변론은 기자조선이 결코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외교현장에서 의연한 모습을 지켜나가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36

한편, 이후 기자조선을 부정하거나 소극적으로 평가한 인식도 있었는데 대 표적으로 『여사제강(麗史提綱)』과 『규원사화(揆園史話)』가 있다.37

『여사제강』 을 편찬한 유계(俞棨, 1607~1664)는 고려시대만 다룬 역사서를 편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 문자가 있었으나 재적(載籍)이 무징(無徵)하였고, 삼국분 쟁에 각기 문사(文史)가 있었으나 역시 전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

김부식이 편찬 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소재류(所載類)는 모두 황탄하여 족히 빙신(憑信)할 수 없고 또한 세대가 요원하여 국정연혁(國政沿革)과 인물출처가 가히 고신(考 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고려 태조의 즉위 후부터 끊어서 편년작서(編年作 書)하여 『여사제강』이라 했다.38

35 김성규, 1996, 앞의 글, 30~31쪽.

36 김성규, 1996, 위의 글, 44~45쪽.

37 정재훈, 2004, 앞의 글, 305쪽.

38 『麗史提綱』 凡例.

이것은 유계가 고대사를 서술하지 않은 이유를 밝힌 것이지만 나아가 기자 동래를 인정하면서도 기자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유계의 이러한 인식은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서만 참고한다는 무 징불신(無徵不信)의 유교사관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이다.39

그는 김부식의 『삼 국사기』는 황망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기자에 대한 문헌도 신뢰할 만한 것 이 아니라고 보았던 듯하다.

또한 『규원사화』는 숙종 원년에 편찬되었다고 하는 데 위서(僞書) 논란이 있는 문헌이기도 하다.

『규원사화』는 기자조선을 배제하 고 단군조선만 자세히 다루고 있다.40

39 김경수, 2000, 「『麗史提綱』의 史學史的 考察」, 『韓國史學史學報』 1, 97쪽.

40 한영우, 1975, 「17世紀의 反尊華的 道家史學의 成長: 北崖의 「揆園史話」에 대 하여」, 『韓國學報』 1.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기자조선이 정사에 편입되어 한국사의 체계에 자리 잡았고 기자조선의 실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기자 동래를 직접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했더라도 그 기사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으며 기자조선을 불신했던 또다른 흐름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III.조선 후기 기자수봉설과 기자조선 평양설 비판

조선의 지식인들은 두 차례 큰 전쟁을 겪으면서 이적(夷狄)으로 여겨왔던 일본 과 청의 침략을 경험하고 중국대륙에서 명과 청이 교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전 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직면했다.

특히 명이 멸망하고 재건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이제 유교문화의 정통은 조선에게 있 으며 조선이 곧 중화(中華)이고 조선의 문화가 중화문화(中華文化)라는 ‘조선중 화주의’가 나타났다.41

이에 조선을 명실상부한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규정하기 위해 유교문화를 전해준 것으로 인식된 기자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42

조선 건국 직후에는 역사 속에서 기자를 강조하여 주 무왕과 기자의 관 계를 명 태조와 이성계의 관계로 비유하여 조선왕조의 역사적 위상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성계가 명 태조의 제후이듯이 기자는 주 무왕의 봉함을 받은 제후라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가 없어지면서 조선 후기에는 조 선을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규정하기 위해 오히려 주 무왕에 대한 기자의 독 자성과 유교적 가치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43

이를 위해 조선 후기에는 기자와 주 무왕과의 관계가 많은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한 견해는 크게 보면 기자가 주 무왕에 의해 봉해졌다는 것(箕子受封說)을 인정하는 입장과 부정하는 입장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다시

① 기자가 조선으로 오면서 봉해졌다는 설과

② 기자 가 먼저 도망와서 자립하여 왕이 된 뒤에 무왕의 봉함을 받았다는 설로 나누어 진다.

후자는

③ 기자가 무왕과 빈주(賓主) 관계를 맺었다는 설

④ 전혀 빈주관 계나 군신(君臣)관계가 없었다는 설로 구분된다.

조선 전기에는 ①, ② 설이 병 존하다가 조선 후기에 오면서 ③, ④ 설이 등장하게 된다.44

한편, 이 시기에는 한국사 특히 고대사 인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 정통 론(正統論)이라는 사론(史論)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작업이 진행 된다.

이익·안정복 등이 주장한 위만 대신 마한을 정통으로 보아야 한다는 ‘삼 한정통론(三韓正統論)’이나 이종휘가 주장한 부여·고구려계가 단군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는 부여·고구려 중심의 한국사 체계는 새로운 한국고대사의 체 계화 시도였다.45

41 김문식, 2009,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새문사, 14~18쪽.

42 허태용, 2009, 『조선후기 중화론과 역사인식』, 아카넷, 248~249쪽.

43 허태용, 2015, 「전근대 동국의식의 역사적 성격 재검토」, 『역사비평』 111, 456~457쪽.

44 한영우, 1989, 『조선후기사학사연구』, 일지사, 177~178쪽.

45 이만열, 1976, 「17,8世紀의 史書와 古代史 認識」, 『韓國의 歷史認識』 하, 創作 과批評社, 315~355쪽.

그리고 이 시기는 전쟁을 겪으며 강역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요동을 기자조선을 비롯한 고대국가의 중심 무대로 보게 되었다.

이를 통 해 기자조선에 대해 지리 강역의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다.46

46 박인호, 2003, 『조선시기 역사가와 역사지리인식』, 이회, 25~30, 179~180쪽.

따라서 기자가 온 곳이 평양이라는 고정된 인식에서 벗어나 기자와 평양의 연관 성을 부정하는 견해도 나오게 되었다.

이에 이 장에서는 조선 후기 기자가 주 무왕에 의해 봉함을 받았다는 기록 (箕子受封說)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기자가 동래한 지역 및 기자조선의 중심이 평양이라는 견해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은 『동사회강(東史會綱)』에서 범례(凡例) 뒤에 논변(論辯)을 부기하였는데 이 중 1조가 「기자봉조선지변(箕子封朝鮮之辯)」 이다.

그는 이 논변을 통해 기자가 주 무왕에게 봉함을 받았다는 『사기』의 기록 을 검토한다.

그는 『사기』 송미자세가에서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였으나 『한서』 지리지에서는 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 하였고, 『후한서』에서는 기자가 은나라의 운수가 쇠퇴하자 조선 땅으로 피했다 고 했으며, 함허자는 『주사』를 인용하여 기자가 중국에서 5,000명을 데리고 조 선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었다고 하면서 상이한 기사를 대조했다.

이를 통해 『한 서』 등에는 기자를 봉했다는 말이 없음을 주목했다.

또한 은나라의 세 어진 이 는 각기 스스로 떳떳함으로 선왕에게 헌신하였고 기자는 ‘상나라가 몰락하여도 나는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한서』의 기록이 옳다고 보았다.

임 상덕은 『사기』, 『한서』 등 여러 설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바가 있을 수 있다고 보면서 사마천의 기록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은 진실로 어긋나고 뒤섞인 것이 많아서 굳게 신뢰하기 어렵기에 반고는 이미 그 설을 따르지 않았다.

또한 반고가 논하여 서술한 조선인의 성품과 풍속은 인현이 가르친 조목들임이 모두 분명하다.

분명하여 믿을 수 있으 니 생각건대 별도로 고증하고 근거한 바가 있는 것이다.

『사기』의 여러 구절이 겨 우 송미자세가 중에서만 보여서 상세히 알기 어려운 것과는 같지 않다.

또한 3대 이전에는 중국의 제도와 문화가 미치는 곳이 넓지 않아서 장강과 회수 사이의 지 역까지도 또한 오랑캐의 땅이었다.

하물며 조선은 풍과 박에서의 거리가 만 리나 되니 이 시기에는 오히려 멀고도 황량한 지역에 있었다.

『주례』의 직방에도 기록 되어 있지 않았으니 중국과 통했을 리가 없을 듯하다.

구이(九夷) 팔만(八蠻)과 길이 통하는 날이 되어서야 조선도 역시 통하였을 것이다.

무왕이 기자를 스승으 로 높여서 봉토를 줄 때마다 먼 오랑캐의 지역으로 물리쳐버렸을 리는 없을 것 이다.

이것으로 추정해보면 조선 땅으로 피하였다는 이야기가 이치에 가까운 듯 하다.

세대가 멀고 문헌의 증명이 없으니 지금은 감히 확신하여 말하지 못하나 역 시 반고가 상세히 기록한 이 일의 기록을 감히 버릴 수 없다. 『사기』의 다른 세가 중에 나오는 몇 마디를 취하여서 말한 것은 어떨지 알 수 없다.47

임상덕은 『사기』의 기자 전승은 기록에 모순이 있을 뿐 아니라 정황상 신빙 성이 없다고 보았다.

임상덕이 언급한 것처럼 『사기』에는 기자 자료가 풍부하게 나타나지만 기자와 조선을 연결시킨 내용은 송미자세가에서만 확인된다.

그리 고 기자 동래 기사로 인해 『사기』 송미자세가의 기자 전승은 여러 모순이 발생 한다.

또한 당시 조선과 주나라는 만 리나 떨어져 통했다는 근거도 없다.

특히 임상덕은 조선과 주나라의 거리 등 기존에는 고려되지 않았던 문제들을 지적 했다는 점에서 기자 연구를 진일보시켰다고 할 수 있다.48

다만 『사기』와 달리 『한서』의 기록은 그대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49

47 『東史會綱』 凡例 下.

48 한영우, 1989, 앞의 책, 178쪽.

49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한서』의 조선전과 지리지에 나타난 조선의 모습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며 한대에는 기자와 조선의 관계가 아직 유동적이고 기자동래 설이 만들어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보았다(井上秀雄, 1982, 「「史 記」·「漢書」の東夷王者観」, 『朝鮮学報』 103, 24~27쪽).

한편, 『한서』의 기자 기록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가 참고된다. 조원진, 2023b, 「『漢書』의 古朝鮮·漢郡 縣·箕子 자료에 대한 검토」, 『동양학』 92, 115~119쪽.

 

『한서』 역시 기자와 조선을 관련시킨 기록은 지리지에만 발견되며 이 기사도 조선의 풍속 기 사에 기자의 현지 주민 교화 기사를 간단히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은 『북헌집(北軒集)』에서 기자가 홍범을 진술한 이유와 기자 동래의 원인을 검토했다.

그는 기자는 은의 남겨진 현인으로 무왕 이 기자를 방문하니 홍범을 진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은나라의 망함은 주의 행실 때문이며 무왕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무왕에 대해서는 신 하가 군주를 몰아낸 형세를 거스르는 것이기에 기자가 치도(治道)를 전해줄 수 는 있어도 그 조정에 입사(入仕)할 수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기자는 주의 영토 내에 거처하고 싶지 않 아 스스로 조선 땅에 숨었다고 보았다.50

유광익(柳光翼, 1713~1780)은 『풍암집화(楓巖輯話)』에서 기자가 주무왕에 게 봉해졌다는 기록과 『동국통감』에 인용된 함허자의 글을 검토했다.

먼저 유광 익은 평양에 있는 정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주공의 정전도 맹자가 살던 시 기까지 이미 찾을 수 없었는데 기자의 정전이 지금까지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히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51

50 『北軒集』 卷8 初年錄.

51 『楓巖輯話』 卷1 東方國都記略.

또한 기자는 이미 미자의 물음에 “남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라고 말하였고 해외 땅으로 피하였기 때문에 무왕에게 땅을 나누 어주는 조처를 받지 않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옛 책에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여 마치 무왕이 명령을 내리고 봉함을 받은 것처럼 되어 있고, 『동 국통감』 등도 잘못을 이어받아 시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기』의 기록에서 무 왕은 이미 기자를 신하로 여기지 않았는데 기자가 도리어 스스로 신하됨을 달게 여겨 무왕을 조회하러 갔다고 한 것은 앞뒤가 서로 모순되어 거짓이라 보았다.

그리고 함허자가 『천운소통』을 편찬하면서 『주사』를 인용하여 기자가 중국 사 람 5,000명을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하였고, 『동국통감』은 이를 그대로 믿어 책에 기재한 것은 잘못이라 한다.

또한 함허자가 살펴본 『주사』의 내용은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 분명하다고 보았다.52

유광익은 비교적 합리적인 시각으 로 평양의 정전과 『사기』의 기자가 주 무왕에게 봉해졌다는 기록을 비판했다.

나아가 『동국통감』이 인용한 함허자의 글은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하 며 그 기록의 신빙성이 없음을 밝혔다.

그동안 조선의 학자들은 『동국통감』 이 후 함허자의 글을 무비판으로 수용해왔었는데 이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 문제점을 밝힌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처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사기』의 기사를 비판하는 인식은 조선 후기 꾸준히 나왔다.

안정복도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임상덕 등의 견해를 소개하며 후세 사람들은 『한서』와 『후한서』의 기록을 신임하면서 『사기』는 본 래 소루(疏漏)하다고 평가했다.53

다만 이러한 논의는 『사기』와 함허자의 글을 비판하는데 그쳤으며 『한서』·『삼국지』·『후한서』의 기록을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는 기자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조선 후기의 사회 분위기에 서 기자 동래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리적인 관점으로 기자 동래 문제를 접근한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크게 평양의 기자 관련 유적인 기자묘·정전에 대한 문제와 기자가 동래하고 도읍한 곳이 평양인가 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평양의 기자 유적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겠다.54

52 『楓巖輯話』 卷1 箕子封朝鮮辨疑.

53 『東史綱目』 附 卷上 上 考異.

54 조선 후기 평양의 기자 유적과 기자의 권위를 활용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 가 있다. 김창수, 2022, 「조선후기 기자의 위상과 평양의 지역성」, 『서울학연구』 89; 신주엽, 2022, 「17-18세기 箕子 유적의 정비와 기자 인식」, 『대구사학』 148.

이미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서 “평양 대성산에 2개의 옛 성터가 있는데 하나는 기자 때 쌓아 성안 에 구역을 나누어 정전제를 실시했다”고 했으며, “기자묘가 평양성 북쪽 토산 위에 있다”고 기록했다.55

정전 유적의 경우 하은주 삼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였 던 정전제와 관련되었기에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한백 겸은 평양 기자의 정전 유적을 직접 둘러보고 저술한 「기전유제설(箕田遺制 說)」 56을 통해 정전제도를 나름대로 고증한 바 있다.

그는 주자와 맹자는 은대의 정전을 보지 못했기에 그들이 주장한 정전제도는 오류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둘러본 실증적 고증을 통해 평양에 설치한 정전은 ‘정(井)’자의 형태 가 아닌 ‘전(田)’자의 형태라고 주장했다.

한백겸의 기자 정전 연구는 이후 많은 학자가 관심을 보이고 평양 정전 유적의 실체를 논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평양의 정전 유적은 동아시아문명의 계승자적 위치에 조선이 자리하고 있 음을 주장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57

하지만 기자 시대의 정전 유적이 지 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그리고 평양의 기자묘는 기자의 동래와 기자조선의 실체를 입증해줄 수 있 는 유적이었으나 한편으로 중국문헌에는 이와 상반되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되 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두예가 말하길 ‘양국(梁國) 몽현(蒙縣)에 기자 총(箕子塚)이 있다’”(杜預云 梁國蒙縣 有箕子塚)고 했다.

이 기록을 인정한다면 기자는 동래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은 기자가 평양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기록을 신빙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국 역대총목』, 58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59 『풍암집화(楓巖輯話)』, 『기년동사약 (紀年東史約)』 60 등에서는 『대명일통지』에 “몽현에는 기자묘가 없고, 산동(山 東) 포정사(布政司) 고적 조에는 평양성 밖에 기자묘가 있다”고 하였는데 두예의 설은 어디에 근거한지 알 수 없으며 잘못 전해 들은 것으로 보았다.

55 『高麗史』 卷58 志12 地理3 北界 西京留守官 平壤府.

56 『久菴遺稿』 上 雜著 「箕田遺制說」.

57 이영호, 2009, 「儒敎의 民本思想과 朝鮮의 井田制 受容」, 『퇴계학논총』 15, 253~259쪽.

58 『東國歷代總目』 箕子朝鮮.

59 『燃藜室記述』 別集 卷19 歷代典故 箕子朝鮮.

60 『紀年東史約』 卷1 箕氏朝鮮紀 戊午.

이러한 견해는 두예의 설을 합리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양국 몽현의 기자묘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홍경모(洪敬謨, 1774~1851)와 이 규경(李圭景, 1788~1863)에 의해 이루어졌다.

홍경모는 먼저 『총사(叢史)』 동 사변의61에서 고대사 속의 주요 쟁점을 고증하며 기자를 조선에 봉한 기록에 대 해서도 검토했다.

그는 일찍이 사마천의 『사기』가 실제 사실을 얻은 것이 아닌 지 의심된다고 밝혔다.

그는 은나라가 멸망해도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것 이 기자의 뜻으로 은이 망했을 때도 무왕에게 단지 홍범만 베풀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자는 무왕의 신하가 되려고 하지 않았고 무왕도 신하로 삼으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 기자를 봉하고 봉작을 받았을지 반문한다.

홍경모는 기자가 조선 으로 피하자 조선 사람들이 추대하여 왕으로 삼은 것이고 무왕은 다시 기자를 빈사(賓師)로 머무르게 한 것으로 이해했다.

주서(周書)에서 기자에게 어떤 명령 을 내린 말이 없으며 조선이 이때 중국에 복속되지 않았는데 무왕이 어찌 제후 로 봉할 수 있었는지 비판한다.

그는 『한서』 지리지에 “은이 쇠퇴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라고 한 것이 이치에 맞으며 사마천의 『사기』는 그 실제를 얻지 못한 것과 다르다고 보았다.

그리고 홍경모는 『관암존고(冠巖存藁)』 기자묘기(箕子墓記) 62에서 기자묘에 대해 상세히 다룬다.

61 『叢史』 外篇 東史辨疑.

62 『冠巖存藁』 2 箕子墓記.

그는 『사기색은』에서 “두예가 말하길 양국 몽현에 기자묘 가 있다”고 했고, 『수경주』에 “몽현은 박성에 있다”고 하여 몽박은 곧 북박이 며, 『청일통지』에 “기자묘가 귀덕부 상구현에 있다”고 했으며 또한 “포주에 기 자묘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몽현의 기자묘를 끌어들인 것이지 별도로 포주 에 기자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며 기자묘 관련 기록을 제시한다.

홍경모는 『당서 (唐書)』에 “요동은 본래 기자의 나라이다”라 하였고, 『성경지(盛京志)』에도 “심 양 봉천부와 의주·광녕은 모두 조선계이다”라 하였으니 요(遼) 지역이 태반은기자의 강역으로 요하 이동과 한수 이북은 모두 기씨의 땅이라 보았다.

하지만 후손들이 연 말기에 서쪽 경계 1,000리를 잃으며 요 지역이 중국으로 편입되 었다고 한다. 그는 몽박과 상구 등은 요 경계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몽박과 상 구, 평양에 있는 기자묘 중에서 어느 것이 기자묘인지 검토했다. 홍경모는 결론 적으로 기자는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기에 그 장사 지낸 곳은 마땅히 도읍지 근 처라고 보았다.

따라서 진짜 기자묘는 기자가 도읍한 평양에 있는 무덤이며 몽 박, 상구 등의 무덤은 기자 이후 사군들이 이곳에 장사 지냈기에 기자묘로 통칭 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기록에 나타난 기자묘가 모두 4곳임을 밝히고 각 무덤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기자묘는 평양에 있다고 확신했다.63

또한 홍경모는 평양의 정전 유적은 기자의 정전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미 맹자시대에 정전제도 를 정확하게 연구할 수 없었는데 기자가 실제로 구획한 정전이 당시까지 선명하 게 남아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홍경모의 연구는 관련 자료를 모아 기자묘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다만 기자가 평양에 도읍 하였다는 전제 아래 논지를 전개하였기에 평양의 기자묘를 진짜 기자묘로 인정 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64에서 기자묘와 강역 문 제를 다루었다.

63 이군선, 2014, 「洪敬謨가 본 古都 平壤과 그 遺蹟」, 『동양한문연구』 39, 244~ 246쪽.

64 『五州衍文長箋散稿』 天地篇 地理類.

이규경은 『수서(隋書)』 배구전에서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 이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했다”고 하고, 『대명일통지』에 “‘영평부 15리에 고죽 군이 보읍으로 받은 나라가 있다’고 했고, 또 ‘조선성은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읍으로 받은 땅이다. 이로써 고죽국과 함께 이웃이 되었다’”는 기록을 소개했다.

이규경은 이를 통해 두예가 말한 양국 몽현에 기자 무덤이 있다는 기 록과 평양 토산에 기자 무덤이 있다는 설 중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자신의 견해 를 밝혔다.

그는 배구가 고려는 본래 고죽국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고려는 곧 고구려이며, 고구려 강역의 서북은 요수를 넘어 영주 를 접했는데 고죽국이 지금의 영평부로 이미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 있다고 보 았다.

『정자통(正字通)』에 “지금 영평부에 기자성이 있으며 기자가 이 영평부를 봉읍으로 받았다”고 했으니 지금의 영평은 옛 유·영주 바깥 지역으로 통틀어서 조선이라 일컬어졌다고 이해했다.

따라서 고죽국 역시 봉읍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며 처음에 기자를 영평에 봉하였기에 기자성이 있다고 했다.

기자는 주나라 가 봉한 바를 피하여 지금의 평양에 와서 거하니 역시 바깥 지역을 다스린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고구려는 곧 조선의 땅을 거느렸고 영평 역시 그 지역에 들어 갔기에 배구의 말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고죽이 춘추 시대 이래로 조선 의 차지가 된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위략』에 조선과 연나라가 만번한을 경계 로 삼았다고 했는데 번한은 『한서』에 요동군 속현으로 언급된 만(滿) 땅의 경계 로 요산 변두리 요새라고 보았다.

이규경의 주장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을 만주로 확장하면서 기자와 고죽을 관련시킨 기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면서 나 온 것으로 주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견해는 조선 후기 만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사회적 분 위기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만주에 대한 구체적인 지리 지식은 청 나라 서적의 입수로 심화될 수 있었다.

숙종 23년(1697) 『성경지(盛京誌)』가 입 수되고,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성경지』에 실려 있는 「성경여지전도」를 확대 복제하여 숙종과 비변사에 바쳤다.

조정은 이를 통해 심양·영고탑·오라· 선창 등 만주의 주요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65

남구만은 『약천집(藥泉 集)』에서 요동은 애당초 기자가 봉지를 받은 지역이라 보았으며, 평양의 정전 유적이나 함허자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보았다.66

65 이명종, 2014, 「17·18세기 조선에서 ‘만주=故土’ 의식의 출현과 전개」, 『동아시 아문화연구』 58, 225쪽. 66 『藥泉集』 卷10 疏箚 進盛京地圖兼陳北關事箚; 『藥泉集』 卷29 雜著 東史辨證 箕子.

이 외에 기자조선의 영역을 만 주 지역으로 확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홍여하, 유형원, 이익, 안정복67 등이 있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68에서 번한현은 지금의 요양성이며, 요하는 매우 많은데 패수는 그중의 하나로 요양성 서쪽에 있었다고 보았다.

요동 수천 리는 지금의 팔주 지역인데 옛날에는 조선 에 속하여 모두 기씨의 소유였다고 이해했다.

평양은 본래 요양의 옛 이름이었 지만 기자의 도읍에 옮겨 불렸기에 패수도 대동강으로 옮겨 부른 것이라 판단 했다.

지명 이동을 통해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겼다고 이해하 는 것은 현재 학계의 연구 성과와도 비슷하다.69

다만 홍여하는 기자는 요수를 건너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하여 기자가 도읍한 곳은 평양이라고 보았으며, 양국 몽현의 기자묘는 지자(支子)인 중(仲)이나 그 자손의 무덤이라 보았다.

유형원 (柳馨遠, 1622~1673)은 그가 저술한 전국 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 志)』 70에서 기자조선의 강역을 검토했다.

그는 오운(吳澐)의 ‘요하의 동쪽 한수 (漢水)의 북쪽은 모두 기씨(箕氏)의 땅이다’라는 주장을 인용하고 『한서(漢書)』,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 『요동지(遼東志)』 등의 기록을 근거로 요하의 동 쪽은 기씨(箕氏)의 땅이 분명하다고 보았다.

또한 패수(浿水)는 지금의 압록강이 라고 해석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 71에서 단군이 요임금과 같 은 시기에 건국하였고 순임금이 12주를 설치할 때 현재의 요(遼)·심(瀋)에 해당 하는 유주(幽州)도 포함되었는데 이곳이 단군과 기자의 옛 영토라고 판단했다.

67 이익, 안정복의 기자 인식에 대해서는 김문식, 2000, 「18세기 후반 順庵 安鼎福의 箕子 인식」, 『한국실학연구』 2; 김문식, 2003, 「星湖 李瀷의 箕子 인식」, 『退溪 學과 韓國文化』 33, 참고.

68 『東國通鑑提綱』 卷1 朝鮮紀 上 殷太師.

69 서영수, 1988,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한국사시민강좌』 2.

70 『東國輿地志』 總序. 71 『星湖僿說』 卷1 天地門 檀箕疆域; 『星湖僿說』 卷2 天地門 朝鮮地方.

그는 기자의 수도는 평양이었으나 연나라와 국경이 접해 있고 고죽도 그 가운데 있었다고 보았다.

이익은 지금 만리장성 밖으로 요(遼)·심(瀋)의 지역이 모두 조 선 영토 안에 있었다고 이해하며 만번한은 지금의 압록강이었다고 해석했다.

안 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 72에서 『한서』, 『당서』, 『요 사』 지리지, 『요동지』, 『일통지』, 『성경지』 등의 자료를 검토하여 요동의 태반 이 기자의 제봉(提封)이 되었다고 보면서 오운이 “요하 이동, 한수 이북이 다 기 자의 땅이었다”고 한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기자는 평양에 도읍했다 고 이해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역사지리 연구는 단군과 기자의 강역을 평양 일대에 비정 하던 설에서 요동·요서를 포괄하는 지역으로 확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조선 전기 역사가들이 고대의 지명을 한반도 내로 비정하려던 역사인식에서 벗 어난 새로운 인식이었다.73

또한 이러한 인식은 역사지리학의 발전으로만 볼 수 는 없다.

안정복에게 지리 고증은 ‘기자마한정통론’의 논리적 토대를 만드는 것 이었으며 이를 통한 강목체의 자국사는 다시 문화적 중화관의 정당성을 확인하 고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74

72 『東史綱目』 附 卷下 地理考 箕子疆域考.

73 정구복, 2008, 『한국근세사학사: 조선 중.후기 편』, 경인문화사, 59쪽.

74 배우성, 2014, 『조선과 중화』, 돌베개, 299쪽.

다만 이러한 연구는 대부분 기자가 도착한 지역과 기자조선의 중심을 여전 히 평양으로 보면서 그 강역을 만주로 확장해보았기에 평양의 기자묘나 기자의 평양 동래를 비판하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연행을 다녀오며 직접 만주의 지리를 검토하고 돌아온 학자들에 의해 기자조선의 첫 도읍 및 기자가 동래한 지역은 평양이 아니라는 인식이 나오게 되었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청나라에 다녀오기 앞서 1773년 평양을 방 문하여 기자가 시행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유적을 돌아보고 「기자전기(箕子 田紀)」를 지은 바 있다.

그는 기자전의 유적을 바탕으로 정전(井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으로 법전(法典)의 설치를 주장하기도 했다.75

그리고 박지원 은 1780년 청나라 건륭(乾隆) 황제의 칠십 수(壽)를 축하하기 위한 외교 사절단 으로 청나라를 방문하고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기게 된다.

『열하일기』 도 강록(渡江錄)에서 그는 『한서(漢書)』, 『명일통지(明一統志)』, 『당서(唐書)』, 『요 사(遼史)』, 『금사(金史)』, 『문헌통고(文獻通考)』 등 국내외 방대한 문헌을 인용 하여 기자의 봉지를 만주 일대로 파악했다.

박지원은 『금사』 76와 『문헌통고』에 의하면 광녕·함평은 기자의 봉지(封地) 라 했으니 영평·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이며, 『요사』에 발해 현덕부는 본래 기자를 봉한 평양성으로 지금의 요양현이라 했으니 요양현도 또 하나의 평양이 라고 보았다.

75 염정섭, 2012, 「燕巖의 『課農小抄』에 대한 綜合的 檢討」, 『연암 박지원 연구』, 사람의무늬, 197쪽.

76 함평부(咸平府)가 고조선의 땅으로 기자의 봉지였다는 내용은 『금사』가 아니라 『원사(元史)』의 기록(『元史』 卷59 志第11 地理2, “咸平府 古朝鮮地 箕子所封 漢屬樂浪君”)에서 확인된다(김명호, 2022, 『열하일기 연구』(수정증보판), 돌베 개, 630~631쪽).

그는 광녕이 평양이었다는 근거로 광녕현에 기자묘가 있어 한관을 씌운 소상을 세웠는데 명나라 가정(嘉靖) 때에 전쟁에 불타버렸다는 기록도 제 시했다.

따라서 기자가 처음에는 영평·광녕 지역에 있었는데 연나라 장군 진개 에게 쫓겨 2,000리 땅을 잃고 동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머무는 곳마다 평 양이라 하였는데 대동강에 있는 평양도 그중의 하나이며, 패수도 고구려의 경계 변화에 따라 변했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연구는 현재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 있다가 연나라 진개의 침입으로 평양으로 옮기게 되 었다는 이동설의 논지와 유사하다.

또한 박지원은 『한서』 지리지에 현도와 낙랑 은 있지만 진번과 임둔은 보이지 않는 것을 근거로 한사군은 요동에만 있는 것 이 아니라 여진 땅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보았다.

박지원은 이러한 역사지리적 고증을 통해 지금까지 국내의 평양만 유일한 ‘평양’인 줄 아는 우리나라의 고루 한 선비들이 패수의 위치도 한반도 안에서만 찾으려는 데 대해 통렬하게 비판 했다.77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기 때문에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고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라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 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원래 조선의 땅이며, 숙신, 예, 맥 등 동이(東彛)의 여 러 나라가 모두 위만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喇), 영고탑 (寧古塔), 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78

77 김명호, 2022, 위의 책, 147~148쪽.

78 『熱河日記』 卷1 渡江錄 6月 28日 乙亥. 79 『燕轅直指』 卷1 出疆錄, 11月 24日 鳳凰城記.

이처럼 박지원은 기자조선의 첫 도읍을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게 되면서 자 연스럽게 평양에 있는 기자 관련 유적도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홍여하가 지명이동설을 통해 고조선의 도읍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 동했다고 파악할 수 있는 논지를 펼치고도 결국 기자가 도읍한 곳은 평양이었다 고 한 것과는 대조된다.

비록 박지원이 체계적인 역사서를 편찬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이러한 인식은 청에 다녀온 다른 학자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김경선(金景善, 1788~1853)은 박지원의 영향을 받은 학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1832년에 청나라에 다녀오고 『연원직지(燕轅直指)』를 편찬한다.

『연원직 지』에서 그는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아 기자가 평양에 도읍 하고, 평양에 정전이 있으며, 평양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말하면 믿지만 요동에 평양에 있다고 하면 꾸짖으며 괴이하게 생각한다고 보았다. 또한 한사군의 절반 은 요동에 있고 절반은 여진에 있다고 이해했다.79

김경선 역시 박지원과 마찬 가지로 요동에도 평양이 있었다고 이해했다.

이를 통해 기자가 평양에 도읍하였다는 인식과 평양의 기자 유적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학 자들의 견해에 그쳤으며 기자조선을 완전히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 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성해응이 평양에 있는 기자묘 (箕子廟)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변증하자, 이양천(李陽川)이 큰 소리로 “우리나 라에 겨우 기자 하나가 있는데 그대는 그것마저 잃어버리고자 하는가? 그 무슨 심사인가?” 하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80는 당대의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당대 기자가 조선의 정체성 문제와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잘 말해주며 이러 한 기자에 대한 존숭과 관심은 당색과 학파를 떠나 조선의 모든 지식인이 공유 했다고 할 수 있다.81

80 『縹礱乙籤』 卷15 業秘紀5 睡餘演筆 下.

81 조성산, 2009, 「조선후기 소론계의 古代史 연구와 中華主義의 변용」, 『역사학보』 202, 61쪽.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도 기자 자료를 해석하는 과 정에 그 기록의 모순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노력은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진 근 대 시기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연구가 나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IV.맺음말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성립된 조선은 기자의 동래와 기자조선의 실체를 그대 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시대에 따라 기자조선이 더욱 강조된 시기 가 있었으나 기자조선의 역사성 자체를 부정하는 인식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자조선을 부정하거나 소극적으로 평가한 인식들 도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후 기자를 강조한 인식과 함께 관련 전승을 본격적으 로 비판한 정사신의 인식이 나오기도 했다.

정사신은 『매창문집』에서 기자가 주 나라에 조회하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이야기는 진나라 이후 야인이 만든 이야기를 사마천의 『사기』에서 답습한 오류라고 보았다.

그는 은·주가 조선과 통하지 않았고 춘추전국시대까지 조선을 알지 못했기에 기자를 봉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대(漢代)가 되어야 비로소 중국에서 조선이 있음을 듣게 되 었다고 이해했다.

이것은 사실상 기자 동래와 기자조선도 부정할 수 있는 논리 였다.

이 외에 『여사제강』 등 기자조선의 실체를 확신하지 못한 문헌도 확인 된다.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자 정통론의 입장과 결부되어 주 무 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설을 반박한 견해가 꾸준히 나왔다.

주로 주 무왕 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사기』 기록의 문제점이 검토되었으며 함허자의 글 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또한 만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고조선의 강 역이 만주까지 이르렀고 요동과 평양에 동일한 지명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 었다.

이를 통해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은 평양은 지금의 평양부가 아니라 요 동에 있었던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고 기자가 평양에 왔다는 기록을 무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했다.

조선시대에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그쳤으며 기자 동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교 적 객관적 시각에서 기자조선 관련 기록을 검토했던 이러한 인식은 근대 시기 기자조선을 극복하는 연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근대 시기 기자 인식에 주는 과정에 대해서는 후고를 통해 다루고자 한다

참고문헌

사료

『久菴遺稿』, 『高麗史』, 『冠巖存藁』, 『紀年東史約』, 『東國輿地志』, 『東國歷代總 目』, 『東國通鑑提綱』, 『東史綱目』, 『東史簒要』, 『東史會綱』, 『梅窓文集』, 『北軒 集』, 『三峯集』, 『星湖僿說』, 『麗史提綱』, 『燃藜室記述』, 『燕轅直指』, 『熱河日記』, 『藥泉集』, 『五州衍文長箋散稿』, 『元史』, 『月汀集』, 『栗谷全書』, 『朝鮮王朝實錄』, 『叢史』, 『楓巖輯話』, 『縹礱乙籤』, 『標題音註東國史略』.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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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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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 조원진 이 글은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성리학을 건 국 이념으로 성립된 조선은 기자 동래를 인정하고 기자조선을 한국사 체계에 받 아들였다.

그럼에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자조선을 부정하거나 관련 기 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인식들이 있었다.

기자 전승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는 주로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던 기록의 모순점을 지적하거나, 기자가 도읍한 곳이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

대표적으로 정사신은 『매창문집』에서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하고 무왕이 기 자를 조선에 봉한 이야기는 진나라 이후 야인이 만든 이야기를 사마천의 『사기』 에서 답습한 오류라고 보았다.

그는 한대(漢代)가 되어야 비로소 중국에서 조선 이 있음을 듣게 되었다고 이해했다.

조선 후기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사기』의 기사나 『동국통감』에 인용된 출처가 불확실한 함허자의 글을 비판하는 견해가 꾸준히 나왔다.

박지원의 『열 하일기』 등은 기자의 도읍지를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것을 부정적으로 파악하 기도 했다.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그쳤으며 기자조선을 완전히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시대 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기자조선 관련 기록을 검토한 이 러한 인식은 근대 시기 기자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주제어: 조선, 기자, 기자조선, 『매창문집』, 『열하일기』

ABSTRACT

Critical Review on Kija Joseon in Joseon Dynasty Cho Wonchin This paper examined critical awareness on Kija Joseon(箕子朝鮮) in the Joseon(朝鮮) Dynasty. Joseon, which established Sung Confucianism as its foundational principle, recognized the theory that Kija(箕子) came to Korea and incorporated Kija Joseon into the Korean history system, though it was somewhat recognized that the Kija Joseon was rejected from a relatively objective viewpoint or that related records had to be critically reviewed. The Kija tradition has been criticized by two views: it contradicts with the record showing that King Wu enthroned Kija as the king of Joseon; and the capital determined by Kija was not Pyongyang. For example, Jeong Sasin noted in Maechangmunjip(『梅窓文集』) that the story in which Kija paid a visit to the Zhou dynasty and King Wu enthroned him as the king of Joseon, which was created by an unrefined man after Qin, was wrongly repeated in Sagi(『史記』) of 조선시대 기자조선에 대한 비판적 인식 | 367 Samacheon. He understood that Chine had not heard about Joseon until the Han dynasty. There has been continuous criticism against the article of Sagi, which argues that Kija was enthroned as the king of Joseon, or Ham Heoja’s unauthentic writing quoted in Dongguktonggam(『東國通鑑』). Park jiwon’s Yulha Journal(『熱河日記』) and others negatively recognized the viewpoint that Kija’s capital was Pyongyang. The critical awareness on the Kija Joseon was limited to some scholars in the Joseon Dynasty, and there was a limit in completely rejecting it. Such an awareness, which make records about the Kija Joseon from a relatively objective viewpoint, in spite of the historical limit, has an implication, in that it led to a full-fledged reconsideration on the Kija Joseon in the modern times.

Keywords: Joseon(朝鮮), Kija(箕子), Kijajoseon(箕子朝鮮), Maechangmunjip(『梅 窓文集』), Yulha Journal(『熱河日記』

동북아역사논총 81호(2023년 9월)

투고: 2023년 7월 24일, 심사 완료: 2023년 8월 14일, 게재 확정: 2023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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