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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8)/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1회


가을 저녁 강가에서 소세양은 시를 읊는다.

쓸쓸하네 외로운 그림자 하나 노을진 강가
붉은 여뀌꽃 남은 송이 강 기슭 양쪽이 어둡다
서풍을 향해 느리게 걸으며 옛 짝을 부르네
만겹이나 될 만큼 깊은 운우(雲雨, 섹스)의 정, 알 수 없어라

蕭蕭孤影暮江심(水+尋)
소소고영모강심

紅蓼殘花兩岸陰
홍료잔화양안음

만(言+曼)向西風呼舊侶
만향서풍호구려

不知雲水萬重深
부지운수만중심

이 시는 소세양이 호남에 은퇴한 시절
좌의정 상진(尙震)이 가져온 그림족자에 써준 화제(畵題)이다.

상진이 좌의정이 된 것은 1551년이니
소세양 나이 65세 이후에 쓴 것이다.

그림 속에는 기러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저무는 강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 하나. 그 그림자가 고요한 강에 어른어른 비친다.

강둑에 핀 여뀌꽃은 거의 다 졌다. 여뀌꽃을 아는가.
꽃같지도 않은, 뭉친 깨알들같은 작고
길쭉한 꽃덩이를 달고 있는 물가의 꽃.

흰 빛이 나는 것과 붉은 빛이 나는 것이 있는데,
저마다 희미하고 하늘하늘하여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꽃이다.

그나마 다 시들었다.
어둑어둑해져오니 여뀌꽃부터 그늘에 잠긴다.
마치 옛 기억들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말이다.

강 쪽을 가만히 쳐다보던 소세양은 하늘에 나는 외기러기를 본다.
서풍을 따라 짝을 찾아 느릿느릿 날아가는 그는,

소세양을 닮았다. 젊은 시절 황진이가 있던 관서(關西)이기도 하고,
그 서쪽은 바로 새가 깃드는 둥지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림을 보니 서쪽 하늘은 첩첩의 구름이 끼어 어디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옛날이란 그렇게 겹친 기억과 망각들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옛짝을 부르지만 대답할 리 없다.

여기서 소세양은 운수(雲水)라는 말을 썼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떠올린 까닭이다.
바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겹겹 구름들을 핑계 삼아 행복하던 날들을 슬쩍 새겼다.


장안에서 이름 높은 시인 소세양인지라 황진이도 반가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이 남자는 희한한 말을 한다.

“내 오늘 달 밝은 밤에 명월을 품고, 다음 명월이 나올 때까지만 그대를 품으려고 왔노라.”

다른 기생들 같았으면 화를 내거나 지레 서러워 엉엉 울겠지만,
황진이는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2회


“공은 정말 풍류객이십니다. 그리 하실 수 있다면 그리 하십시오.”

그녀는 선선히 그렇게 말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렸을까.
남자는 왔다가 떠나가는 것이다.

사랑?
그건 미색에 홀린 자들이 작전상 읊는 ‘분식한 언어’일 뿐이다.

이 남자는 오히려 솔직하지 않은가?
나는 기생이다.

딱 30일만 놀겠다는 고객이라면 참으로 쿨하지 않은가.?
그 말이 황진이의 승부욕을 자극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많은 사내들을 보아왔지만 호언하는 자 치고 그 말을 깨지 않는 자를 보지 못했다.

특히 아름다움에 눈멀어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사내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나의 아름다움이 한겹 껍데기의 조화이며 한 시절의 빛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것으로 자랑 삼으려 할 까닭이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색(色)이 인간의 이성을 뒤흔드는 것임을 보아왔다. 이것 또한 하나의 도(道)라는 것을 그대에게 가르쳐주고 싶구나.

그대는 다음달 명월 아래서 명월은 품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명월은 당신 양곡(陽谷, 태양의 골짜기)을 환히 비추리라.

그래서 이 소문난 동거는 긴장감 넘치는 게임이 되었다.

소세양은 말했다 "난, 사람이 아니오, 명월에도 명월을 보고싶소

처음에 그들은 잘 생긴 남자와 여자로 서로에 취했다.
그 다음엔 술에 취했다.

그 다음엔 음악에 취하고 그
다음엔 시에 취했다.
술과 시가 버무려져 사랑이 되고 음악과 밤이 버무려져 운우가 되었다.

처음엔 남자와 여자였는데,
갈 수록 영혼이 소통하는 솔메이트(soul mate)가 되어갔고,
깊은 내부로 흐르는 소리를 알아듣는 지음(知音)이 되어갔다.

이건 기생이 아니라 마음이 가지런히 함께 눕는 친구이다.

이건 기생을 사러온 풍류객이 아니라
오랫 동안 벙어리처럼 닫았던 입을 열게 하는 정신의 반쪽이다.

사내의 몸에선 천하의 시가 흐르고 여인의 몸에선 지상의 노래가 솟았다.

그러다가 여윈 달이 봉긋해져 마침내 하루의 살점만 빠져있는 밤이 되었다.

그토록 사내의 깊은 속으로 들어간 황진이지만 이때쯤 되면
처음의 전열(戰列)을 가다듬는다. 내일이면 저 사람은 떠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3회


저 사람이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나는 이미 안다.
개성의 달빛 누대에서 황진이는 심호흡을 하며 비장의 시를 읊는다.


달빛 아래 뜨락 오동잎이 다 졌네요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래졌고요

누대는 높아 한 자만 더 오르면 하늘
사람은 취해서 천 잔의 술을 마셨네요

흐르는 물은 가야금 소리처럼 차고
매화는 피리 속에 향기를 넣네요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면
그리운 생각 푸른 물결처럼 길겠죠



月下庭梧盡
월하정오진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랭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송별소판서(送別蘇判書)’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한 달의 사랑게임이 실제로 있었던 일임을 증언해주는 듯 하다.


月下庭梧盡(월하오동진)과
霜中野菊黃(상진야국황)은
한 달 전 맹약을 할 때 말했던 것들이다.

오동잎이 지고 들국화가 노래지면 우린 헤어질 거라고,
두 사람은 처음에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땐 이렇게 사랑의 속병이 생겨날 줄 몰랐다.
그런데 기약했던 달이 돌아오고,
날짜를 짚어가며 추측했던 서리가 내렸다.

오동잎이 떨어지는 것은 사랑의 배터리
잔량이 사라져가는 것과 다름없고

들국화가 노랗게 되어가는 것은
폭탄의 인화선이 타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오동잎 떨어지면 가슴이 내려앉고
국화가 짙어지면 슬픔이 짙어졌다.

그래서 오늘까지 왔다.

樓高天一尺
人醉酒千觴
(누대천일척)
(인취주천상)
앞부분은 명월의 이야기다.

황진이 스스로가 명월(明月)이기에 한 달이 지나면
이제 하늘에 걸린 명월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딱 한 자가 남았다.

뒷부분은 양곡의 이야기다. 이 사람은 슬픔에 술을 퍼마셨다.
명월이 하늘로 다가갈 수록, 남자는 비운 술잔을 쌓았다.

처음엔 색에 취해 술을 마셨고 나중엔 사람에 취해 시에 취해 술을 마셨다.

한달간 천 잔을 마셨다면 하루 서른 석잔씩은 마시지 않았는가.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유수화금랭)
(매화입적향).

이 대목은
이별파티에서 서로가 말없이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황진이는
가야금을 타고 소세양은 피리를 분다.
그런데 가야금 소리는 흐르는 물처럼 차갑다.
진이에게 ‘흐르는 물’이란 떠나는 사내와 동의어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4회


기약한 한 달이 되었다고
칼같이 끊고 떠나는 사람이니, 차가울 수 밖에....

평소엔 따뜻하던 음(音)들이 계곡 물소리에 묻혀 서늘해졌다.
소세양이 부는 피리에는 매화 향기가 난다.

계절은 오동잎과 들국화가 있는 가을이니,
매화꽃이 피어있을 리 없다. 소세양의 피리에
그려진 매화 문양이 아니었을까.

매적(梅笛)이니 거기엔 매화 향기가 있을 법 하다.
매화는 봄에 피는 꽃이다.

이 가을에 차갑게 떠나는 당신,
다음해 봄이 되면 매화처럼 다시 피어날까요.
피리 소리에 황진이는 슬쩍 희망사항을 숨겨 넣었지만.........

사실은 기약없는 이별의 괴로움이 있을 ‘긴 겨울’의 환기이다.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내일 아침에 가시겠죠? 그렇지만
그간 쌓은 정은 푸른 물결처럼 영원히 출렁거릴 겁니다.
그날 밤 소세양은 내내 그 시를 읊조렸다.

마음이 출렁거려 멀미하는 듯 했다.
천 잔의 술이 이제야 한꺼번에 취하는 듯 했다.
뱉은 말이니 어쩌겠는가. 말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이토록 귀한 사람을 어디서 다시 만나겠는가. 오마이갓.

이튿날 두 사람은 마주 섰다.
말없이 바라보는데 서로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보인다.
껴안아 뺨을 대니 맺힌 눈물이 한 줄기가 되어 주르르 흐른다.
손을 아직 잡은 채로 소세양은 돌아서 가려다가,
자석이 붙은 듯 다시 안겼던 자리로 돌아온다.

“그대, 미안하오. 나는 사람이 아니오.”
“대감, 그러하오시면...”
“양곡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소.
금월에도 명월을 보고 명월(다음달)에도 명월을 보고 싶다고.”
“서방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 있다.
하지만 황진이가 대승을 거둔 그 30일 전투가 끝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서둘러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면 그렇지. 양곡을 슬쩍 비웃으며,
황진이의 전설을 확성기에 담았을 것이다.

게임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삶은 게임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곧 헤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곡은 다시 벼슬에 나아갔을 것이고
황진이는 명성을 전리품으로 챙기고는 담담하게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양곡이 그날 아침 싹둑 자르고 떠나지 않은 것은,
그릇이 컸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잠깐 져주고 세상에 못난 인간이 됨으로써
기특한 지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오.”

그 말 속에는 한달 전의 약속을 상기한 의미도 있었지만,
한 달 전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도 있었다.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그때가 사람이 아니었지 않은가.
그런 역설도 숨어있었다.
세간의 눈들이 사라진 뒤에 그들은 조용히 이별을 했으리라.

굳이 여자를 이기려 들지 않는다는 것.

소세양은 그 지혜를 터득한 사내였다.

그리고 황진이는 얼굴이 예쁜 여인이 아니라,
영혼이 예쁜 여인이었다는 것을 그는 가슴에 담고 떠났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5회


소프라노 가수를 유혹하러 가다

여성 목소리 자유자재로
내는 평양 이언방…

하지만 진짜 좋아한 남자는
김경원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진이의 한시에는
수수께끼같은 남자 하나가 나온다.

‘별김경원(別金慶元, 김경원을 보내며)’.
관직 이름도 붙어있지 않고
별다른 설명도 없는 인물이다.

경원은 호인지 이름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의 내용을 보면 범상치 않다.


別金慶元(별김경원)
  
                -황진이

三世金緣成燕尾(삼세금연성연미)하니,
此中生死兩心知(차중생사양심지)를.
楊州芳約吾無負(양주방약오무부)이나,
恐子還如杜牧之(공자환여두목지)를.

<해석>
- 김경원(金慶元)을 이별하며 -
삼생(三生)의 굳은 인연 금실 좋은 짝을 맺었으니,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양인의 순정(純情) 서로 알리라.
양주(楊州)의 꽃다운 언약은 내가 배반하지 않을 것이나,
그대가 도리어 두목지(杜牧之) 같음을 두려워할 뿐이네.
*양주(揚州) : 당나라 말기의 멋쟁이 시인 두목(杜牧)이
벼슬살이 하던 색향으로, 그는 풍채가 좋아 기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함

이 시는 맹렬하지만 또한 언제 식을지 모르는
기녀(妓女)의 사랑 이야기를 읊은 작품이다.

황진이가
삼세의 황금인연이라고 할 만큼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언젠가 양주에서 함께 살자고 하고
헤어지는 중에 시를 썼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 마음이다.

두목지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을 가리킨다.
목지는 그의 자이며, 호는 번천(樊川)이다.

그는 시에도 뛰어났지만 풍채가 수려했다.

그러니까
예쁜 황진이도,
잘 생긴 남자를 떠나보내면서 불안해하는 것이다.

떨어져 있어도 생사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인데도,
남자는 일단 눈에서 멀어지면 믿기 어렵다.
뿌리깊은 불신이 내내 그녀를 간섭한다.

황진이가 굳이 두목과 비교한 것은
김경원 또한 시에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황진이는 음악과 시를 잘하는 풍류남아
김경원(金慶元)과 사랑을 맺었다.
둘은 너무나 사랑했기에 죽어서도 서로 변치 않을 것임을 장담했다.
김경원은 별명을 ‘부운거사(浮雲居士)’라 하는데,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서 세상을 방랑하면서 살았다.
그러한 그와 영원히 함께 하기로 언약을 맺고서 동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김경원은 팔자에 든 방랑벽을 누르지 못해
다시 오마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대개 방랑객들은 차라리 바람은 붙들지언정
정녕코 잡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보내긴 하는데, 김경원의 풍채가
당(唐)나라의 시인(詩人) 두목지(杜牧之)처럼 수려하기에 염려가 되었다.
즉 이미 영원한 짝이 되기로 맹세했지만,
김경원이 너무나 잘 생겨 도중에 많은
여자들이 유혹하여 사랑을 빼앗아 가버리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천하의 황진이도 사랑 앞에서는 당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황진이가 김경원을 그리워 하며 지은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6회


황진이가 마음과 앞섶을 여는 남자들 중에는 가수 두 사람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이언방(李彦邦)이다.
이언방 이야기를 실은 사람은 허균이다.

조선 명종 때의 명창이었던 그는 여자 목소리를 잘 냈다. 가락이 맑고 높아서 듣는 사람들이 일제히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평양에서 이언방은 특별한 공연을 했다. 교방 기생 200명을 열을 짓도록 하여 앉혀놓고 한 사람마다 다가가 노래를 시켰다.

기생이 선창을 하면 이언방이 화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200명 중에는 행수(行首)기생도 있었고 열 살도 안되는 동기도 있었다. 이 남자는 여자들의 모든 목소리에 맞춰 막힘없이 노래를 불렀다.

이 놀라운 이벤트에 관한 소문은 황진이의 귀에도 들어갔다.

당대 노래의 귀재인 그와 만나 놀고 싶었다.

열 일 제쳐놓고 황진이는 이언방을 만나러 간다. 그런데 희대의 ‘남자 소프라노’인 그는 무대 바깥에서는 여자처럼 수줍음이 많았다.

절세 미인 황진이가 불쑥 얼굴을 내밀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댁이 이백 명의 여자 목소리를 가진 이언방이란 분이...신가요?”

언방은 불쑥 시치미를 뗀다.

“아...닌데요.”

“그럼, 뉘신지요?”

“저는, 이언방의 아우 됩니다. 형님은 밖에 나가셨소.”

“그렇다면 그분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소이다.”

“누구시며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시오?”

“나는 송도 기생 황진이라고 하옵고, 그의 음악을 사모하여 함께 터놓고 노래하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소이다.”

“황진이라면, 뭇사람들이 신이 내린 목소리라 말했던 그 기생이 아니오?”

“이언방 선생의 목소리에 비한다면 쇳소리에 불과합니다.”

“제가...형님의 노래를 조금 흉내낼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하오?”

이언방은 최대한 목청을 긁어가며 남자 목소리를 낸다. 한 곡조가 끝났을 때 황진이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나를 속이지 마시오. 내가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요. 당신이 이언방이오. 제나라의 명창 면구(綿駒)와 당나라의 가수 진청(秦靑)인들 당신보다 잘 부를 순 없을 겁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7회

선전관(宣傳官, 무관직) 이사종

선전관 이사종(李士宗) 또한 소문난 가수였다.

그와 진이는 천수원 냇가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사종은 공무로 송도에 왔는데 말을 매어놓고 관을 벗어서
배 위에 올려놓은 채 누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황진이가 지나가다가 그 소리를 들었는데,
깜짝 놀라서 말을 천수원 역에 매어놓고
숨어서는 오랫 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종자에게 말했다.

“노래가 이상스럽지 않은가.
여기서 볼 수 있는 보통 가객이 아니다.

내 들으니 도성에 풍류객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있어 당대의 절창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그 사람이 틀림없다.”

노래가 끝나자 종자가 달려가
그에게 물었더니 과연 이사종이라고 한다.

진이는
그 가락에 빠졌을까
고수는 고수를 알아 본다고..
그를 집으로 모셔와서 며칠을 같이 지낸다.

몇 년 전 이언방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회가 밀려왔다.

노래가 통하는 것은 피가 통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곧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그녀는 정말 이 남자와 살고 싶어졌다.
소세양의 제안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해보자.

“나으리와 딱 6년만 같이 살고 싶습니다.”
“어찌하여 하필 6년인가?”
“3년은 저의 사랑으로 살고
3년은 나으리의 사랑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미 관기를 벗어났고
재물도 많이 모았던 진이는
가재도구와 3년간 먹고 쓸 것들을 모두 싸서
이사종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삼년 동안
이사종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두 집 살림을 꾸려나간다.

그리고 3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이사종이 황진이를 먹여 살린다.

6년이 지났을 때 황진이는 서슴없이 자리를 털고 송도로 돌아온다.

이 놀라운 계약 동거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조선 광해군 때 설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녀는 예쁜 여자로 사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고 싶어했다.

반면 재능을 알아보고 마음이 통하는
‘지음知音’들과는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황진이는
선전관으로 명창 반열에 오른 이사종과
6년간  동거를 했는데 첩의 예를 다하면서 헌신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


이 시는 이사종을 그리워 하며 썼다고 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베어
봄바람 이불 포개어 뒀다가
고운 님 오시면 이부자리처럼 펴겠다니

사랑에 빠졌을 때 황진이의
시심이 얼마나 풍성하고 깊은지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시인으로서 황진이의 힘은
이별의 정서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고 평한다.
황진이는 이별 앞에서 매달리지 않았다.

남자는 흐르는 물처럼 떠나가기 마련이다.
자신은 청산처럼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여성의 삶도 결국 혼자인 것이다.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우러 예어 가는고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거든 옛 물이 이실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8회

삼십년간 면벽 수도한 최고의 승려 지족선사

황진이는 그를 파계(?) 시킬 것인가.....그리고

이제 황진이의 명성을 드높인 두 남자를 만나 보자

‘성옹지소록’(허균)에는 황진이가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인용문 하나가 있다.

“지족 노선사가 삼십 년 동안 면벽했지만 내게 짓밟힌 바 되었다.
오직 화담 선생만은 접근하기를 여러 해에 걸쳤지만 종시 어지럽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이다.”

이 말이 후세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두 사람을 유혹하는 ‘황진이 야동’을 양산하게 했다. 황진이의 말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바람에, 이야기가 부풀려지면 질 수록 스님 지족선사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고
유학자  서경덕은 성인에 가까워졌다.

「  “지족선사는 삼십 년 면벽수행의 고집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친절한 분이었지요. (......)
사흘을 그곳에서 묵었지요.

지족선사와 나눈 말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떠오르는 풍경은 하나 있습니다.

둘째 날 오후부터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지족선사는 손수 푸르게 피어나는 안개와도 같은 차를 끓였지요.

솔잎차를 앞에 놓고 빗방울에 빗대어 서로의 마음을 떠보았답니다. 불제자는 빗방울로부터 벗어나려 했고
나는 그 빗방울을 온몸으로 맞으려 들었지요.

빗방울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에 사로잡힌다고 하기에 빗방울 하나도 잡지 못하는 이가 어찌 억겁의 연을 끊을 수 있겠느냐고 따졌답니다.

지족선사는 찻잔의 떨림을 조용히 응시하며 말을 아꼈지요.

깨달음이 아무리 깊다 한들 도의 문을 밀고 들어올 중생이 진흙에 코를 박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더 날카롭게 다가섰답니다.

욕심이 크면 집착이 두터운 법인가요.
설령 떼어내기 힘든 집착이라 하더라도 그 욕심을 만들어낸 먼지와 티끌을 쓸어내야 맑고 깨끗해지지 않겠습니까.

지족선사는 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갈 마음 뿐이었고 황진이는 날아오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땅바닥을 배로 밀며 기어다니는 이들의 눈물과 한숨을 사 년 동안의 유랑에서 직접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지족사의 풍광을 부슬부슬 쓰다듬는 가랑비가 누군가의 숨통을 턱턱 막을 수도 있지요.

대사님은 틀림없이 더 큰 도를 깨우쳐 더 높이 오르시겠지만 자비로운 걸음에 밟혀 피를 토하는 미물은 어쩌시렵니까.

지족선사는 결국 마음 바닥의 그림자를 드러냈습니다. 이 작은 절이 움직인다 하여 세상이 달라지겠소이까”」
<김탁환의 글 인용>
황진이의 고백체로 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 이 간다.

결국 마음 바닥의 그림자를 드러냈다는 그 말이, 파계(?)를 의미하는 아니겠는가

지족선사의 법명인 ‘지족(知足)’은 황진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말이다. ‘족함을 안다는 것’은 욕망을 조절하고 관리하는 능력에 관한 자부이다.

이름은 그렇게 붙여놓고 실제로는 전혀 지족(知足)하지 못했다는 비웃음(?)이 느껴진다.

황진이는
암자에 머무르며 정진을 하라는 스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산을 내려온다. 그리고 몇 달 후 선사의 파계소식을 듣는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09회


스님을  넘어뜨린  진랑은 서경덕을 유혹하러......

비오는 화담에 옷이 홀딱 젖은 여인이 들이닥치다

화담의 초가 하나
서늘하여 신선 사는 곳 같네

열린 창에는 산이 모여들고
물소리는 베개의 빈 속을 채우네

어둑한 골짜기를 바람이 맑게 쓸고
삐딱한 땅이라 나무들이 드문드문 기대어 섰네

그 가운데 거니는 사람
맑은 아침 책읽기를 좋아하네

서경덕의 '산에서 살다(山居)'


花潭一草廬 瀟灑類僊居
화담일초려 소쇄류선거

山簇開軒面 泉絃咽枕虛
산족개헌면 천현열침허

洞幽風淡蕩 境僻樹扶疎
동유풍담탕 경벽수부소

中有逍遙子 淸朝好讀書
중유소요자 청조호독서
읽기만 해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한정(閑情)의 시이다.
스스로의 호(號)가 된 ‘화담’은 이런 풍경 속에 있었다.

서경덕은 벼슬을 권하는 한양의 중앙정부의 뜻을 물리치고 지난 왕국인 고려의 왕도인 이곳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화담이야 말로 ‘지족’을 실천하는 사람이 기거하는 곳이라 할 만하다.

이 화담 별서(別墅)에 개성의 화류(花柳)가 지분냄새를 풍기며 뛰어든다.
그것도 이 고요한 도학자를 조롱할 목적으로 다양한 유혹 프로그램을 준비한 절색의 황진이다.

소세양과의 동거가 있은 뒤 사랑에 대해 잠깐 맛을 보긴 했으나, 남성사회 일반에 대한 황진이의 내밀한 조소(嘲笑)는 더 커졌다.

그는 산 속 깊은 곳의 암자를 찾아 고승을 만났다. 면벽 수도를 하던 지족(知足)은 이런 경우를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 실수를 범했다.

선사(禪師)도 이럴진대 대유(大儒, 큰 유학자)라 한들 이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성거산의 화담으로 들어간다.

봄비 뿌리는 어느 저녁답이었다. 제자들도 돌아간 듯 별서는 고요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0회

“어르신, 계십니까?”

안엔 사람이 없는 듯 인기척이 없다. 진이의 목소리가 지나간 뒤에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적막함을 키운다.

“화담 사부님, 안에 계신지요?”

진이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게 누구요?”

여닫이 방문이 삐꺽 열린다. 어둑한 방안에서 단정한 차림의 중년 하나의 얼굴이 보인다.

“저는...”

저는...이라고 말한 뒤 진이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까 하고 말을 가다듬는다.

그 사이, 서경덕은 뜻밖의 방문객을 훑어본다. 우장도 없이 왔는지라 얇은 옷이 다 젖은 여인이다. 화담은 놀라서 뛰어나온다.

“저런...감기 들겠소. 어쩌자고 이런 비오는 날에 여기까지 왔는지요? 어서 안으로 드시오.”

진이가 들어온 뒤 방문을 닫자 좁은 방안에 여인의 향그러운 냄새가 일순 가득해진다.

“소녀, 몸이 떨려서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사옵니다. 젖은 옷을 어떻게 해야할지...”

젖은 알몸을 닦아주는 서경덕에게 진이는

"소녀, 참된 만족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욕망만 날뛸 뿐"

“방이 따뜻하지 않아서...죄송하게 됐소이다.
일단 젖은 옷을 벗고 이불을 두르도록 하시오.”

이미 속이 훤히 보이는 적삼을 진이는 어렵사리 벗으며 말을 꺼낸다.

“저는 황진이라고 하는 기생으로...은자(隱者)의 높으신 학문의 향기를 맡고자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젖은 옷을 벽에 건 뒤 다시 젖은 치마를 벗으며 말한다.

“세상의 성취라는 것이 대개 무상한 것이어서 소녀,
지금까지 살면서 참된 만족을 느껴보지 못하였습니다.
욕망은 날뛰지만 대체 제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진이가 옷을 벗는 동안 화담은 책상 앞에 앉아 경전을 읽고 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며 말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1회


“허허. 사람으로 욕망의 구애를 받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소?
다만 그것을 정밀하게 살피면서 어리석음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진이는 속곳마저 벗으며 말을 잇는다.

“사부님은 그런 어리석음을 초월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몸이 으슬으슬하온데...잠깐 누워도 되겠습니까?”

알몸여인 옆, 책 읽다 코골며 잠든 사내~

화담은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 하시오. 괜찮으시다면 천으로 젖은 몸을 좀 닦아드리리다.”

“고맙사옵니다.”

이렇게 한 뒤 황진이는 별서에서 잠이 든다.
빗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방, 화담은 계속 책을 읽는다. 삼경이 되자
그는 기생의 옆자리에 누워 가볍게 코를 골며 편안히 잠에 든다.

이 풍경이 조선시대 내내 화제가 되었던 이채로운 현장이다.

한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은 여인이 알몸으로 잠들어 있는 그 옆에 한 지식인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앉아 독서를 하다가
이윽고 그 곁에 누워 코를 골기까지 하며 잠에 드는 상황.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혹여 화담 서경덕이
'남성'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짓궂은 시비를 붙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일체 없다.

그 사내에게서 그런 기색이 있었다면 남자를 경멸해온 황진이의 입이 가만히 있었을 리도 없어 보인다.


이날 이후 황진이는 여러 해 동안 화담을 찾았다.
화담이 그토록 태연한 것이 한때의 꾸밈인지 아니면 진짜 깨달음 끝에 얻은 도(道)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황진이의 불신도 지독하다 할 만하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2회

어떤 유혹과 상황에도 흔들림이 없는 화담의 태도를 보고서야 이 기생은 ‘테스트’를 멈췄다. 그리고는 화담을 일생일대의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이 유학자가 황진이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황진이를 옆에 재워두고 어떻게 생각도 하지 않고 허물도 만들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는가?
그는 대답한다.

“지경관리(持敬觀理)하라.”

경(敬)이라는 걸 놓지 말고 문제의 핵심(즉, 理)을 살펴보라. 무슨 말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는 공허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인 만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경이란, (신경을) 한 곳에 두고 두리번거리지 않는 것이다(主一無適之謂也).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아까는 황진이가 없었고 지금은 황진이가 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없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된다.

「接一物則止於所接
(접일물즉지어소접)
應一事則止於所應
(응일사즉지어소응)
無間以他也則心能一
(무간이타야즉심능일)
及事過物去而便收斂
(급사과물거이편수렴)
湛然當如明鑑之空也
(담연당여명감지공야)」

[해설]
황진이의 손이 내 손에 닿았거든 그걸 당겨 내 욕망으로 만들지 말고,
그 손이 닿은 상태에서 가만히 멈추기만 하라.
그녀가 내 옆에서 어떤 유혹을 해도,
그가 유혹하는 그 상태로 그냥 가만히 멈추기만 하라.
네 마음 속에 그 접촉이나 유혹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그 상태로 한결같이 있어라.
오래 있는 것도 아니다.
잠깐 그렇게 있노라면 그 대상과 사태는 저절로 지나간다.
지나가고 나면 다시 마음을 수습하기는 쉽다.

마지막 구절은 숨이 턱 멎을 지경이다.
거울이란 외물을 비추지만 그 안에 외물을 들여다 넣지는 않는다.
거울 뒤편은 텅 비어 있다.
외물은 거울 속에 비치고는 지나간다.
네가 스스로 ‘거울’처럼 생각하고 있으면,
외물이 들어올 수 없지 않겠는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3회


대체 화담은 어디서 이런 ‘스톱(止)’의 노하우를 익혔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군자가 공부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공부를 통해 그칠 줄 아는 법(知止)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황진이는 살아 생전 스승인 화담 서경덕에게서 무엇을 배웠을까?

서경덕은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도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화담은 공맹이나 주자 같은 성현의 말씀읗 무조건 따르기 보다는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격물(格物)에 치중했다.

그는 뭔가에 꽂이면 그 글자를 벽에 붙여 놓고 궁극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묵묵히 앉아서 사색을 한 사람이다.
먹고 자는 것도 입은 채 이치를 파고들다가 마침내 깨달음이 있으면 비로서 성현의 말씀과 맞춰본 임물이다.

격물을 앞세우는 서경덕의 특유한 탐구법은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화담은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학업 대신 나물을 뜯으러 산을 오르내렸다.
하루 종일 산을 돌아 다녔는데 그의 나물 바구니는 항상 텅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고 한다.
부모가 연유를 묻자 소년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 “나물을 뜯다가 새끼 새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날은 땅에서 한 치 정도 날지 못하다가
다음 날은 두 치, 그 다음 날은 세 치를 날다가 점차 하늘을 날아다니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날마다 새끼새가 조금씩 더 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며 그 이치를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터득하기 어려웠습니다,” 」
<박세채 ‘남계집’>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서경덕이 글을 배운 것은 15세 무렵이었다.
딱히 스승이라고 할 만한 이도 없었다.
이웃집 선비의 도움을 받아 <대학>,<서전書典>.<역경易經>.등을 독학 했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성현의 말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경덕의 학문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 ‘氣一元論’도 이같은 행보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서경덕은 우주 공간에 충만한 원기를 탐구대상으로 삼고 그 氣의 본질을 태허太虛라 하였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기의 율동이다. 그 내적 작용원리를 理로 여겨 기에 종속시켰다.

따라서 생성과 소멸은  일정한 원리에 따라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여기서 기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도술을 떠올리게 한다.
기가 한데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그 물건이 사라진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앞서 서경덕을 도사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평한 것도 그의 주장에 불가사의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담의 제자 목록에 간혹 전우치가 거론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본다.

서경덕에게 벼슬은 거추장 스러운 짐 일뿐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4회

그는 1519년
기묘사림이 추진한 현량과에 우선 순위로 천거되었으나 시험장에 나가지 않았다,


1531년에는
어머니의 간곡하신  청으로 생원시에 응시를 해서 장원을 차지 하엿는데 성균관 수학 도중 짐을 싸고 만다.
1544년에는
효행과 학문이 깊다하여 후릉참봉이라는 관직이 내려졌지만 극구 사양을 했다.
이때 서경덕의 시가 <실록>에 전해진다.

「글  읽던 당세에는 새상을 경륜하려 했더니
만년에는 안자의 가난 되려 즐기네.
부귀에는 다툼 있어 손대기 어려우나
임천(林泉;자연)에는 꺼림  없이 몸을 둘 만하거늘
나물 캐고 고기 잡아 배울 채우고
달과 바람을 읊조리어 정신 맑히네.
학문의 의심 없는 경지에이르러 쾌활하게 지내면
헛된 일생 되는 곳을 벗어 날 수 있으니.
<중종실록. 39년(1544).6월6일>

기묘사화로 사림이 뿔뿔이 흩어져 은거에 들어간 시대였다,
서경덕은 벼슬아치가 아닌 산중처사의 길을 선택했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에 도취해 살았던 인물이다.
양식이 떨어져 솥에 이끼가 끼었지만 얼굴에 조금도 굶주린 빛이 없었다,
<허균 지소록>

산수의 아르다운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 춤을 추었고 눈이 샛별처럼 빛났다
<이긍익 ‘연려실기슬’>

항상 만족하고 기뻐해서 세간의 득실과 시비의 영욕이 모두 그의 가슴속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이 ‘석담일기’>

서경덕은 진정한 자유를 추구했다.
한자로 ‘自由’는 스스로 말미암을 뜻한다,
독자적인 처사로서의 삶이 그러하다
하지만 자유에는 대가 또한 따르는 법이다.
이단 취급하는 세간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5회

서경덕은 퇴계 이황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다.
성현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유학의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기(理氣)를 논하는 것이 무질서하고 미덥지 못하며 잡되다는,  이황답지 않은 거친 표현도
사용했다
<퇴계집>

서경덕은 평생 하늘과 하나됨을 추구하며 자연의 이치를 실천하는 삶을 실았다.

1546년
임종을 앞둔 그가 제자에게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연유라고 한다.
서경덕에게 죽음은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 이라는 것이다.

“제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일지니......”

「“만물의 이치를 보면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같다
시작에서 끝으로 돌아가니 항아리 치며 노래한 뜻을 알겠다.
아~ 인생이 약상(弱喪)같다는 것을 아는 이 얼마 되는가?
제 집으로 돌아가듯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름일지니”」

항아리 치며 노래 하였다는 것은 장자가 아내를 앓고 보여준 괴이한 행동을 말한다.
친구인 혜시(惠施)가 아내가 죽었는데 슬프지않은가 하고 묻자 장자는
“죽음은 사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를 슬퍼하면 천명을 어기는 것이네”
라고 대답을 했다.

달이 차면 기울 듯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고로 죽음은슬퍼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약상(弱喪: 고향을 떠나 방랑함)을 마치고 제집ㅇ,로 돌아가는 것이니 노래를 불러 축하함이 마땅하다.

그 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자연의 이치라는 말이다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배운 것은 바로 인간 회복을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가르침이었다.

황진이는 이런 스승을 사모하며 닮아 갔다.
황진이의 삶은 화담 만큼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허허롭다.
독립적인 여성 으로서 스스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렸다.
물론 조선시대 여성이었기에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을 것은 자명하다
역사기록 이면의 말 못할 고충들이 어머어마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더욱 스승이 고마웠고 또 자신이 뿌듯 했던 것 같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6회

「진랑(황진이)이 일찍이 화담에게 말하엿다.
“송도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절(絶)이란
‘더 이상 없는 것’으로서 최고 베스트를 말한다.

화담이 궁금해서 물었다.
“무엇이 삼절인고?”
이에 진랑이  답하였다.

‘박연폭포와 선생과 저입니다“
그러자 화담이 웃었다.

박연폭포는 경차가 빼어나고 아름답고, 화담은 학문과 인격이 높았다면 자신은 무엇이 베스트라고 생각하였을까.

세상의 관행에 개의하지 않는 주체적인 삶과 자유로움을 말하는 게 아니었을까. 천하의 남자들을 대적하고 농락한 일에 대한 자부심이었을까.

한양까지 떠들썩하게 한 명성을 만들어낸 ‘기생다움’을 스스로 그렇게 평가한 것일까.

애향심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송도(개성)의 최고 경물인 박연폭포를 3절에 포함시킨 것으로, 그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여인은 빼어난 시인답게 폭포 풍경을 생생하고 우렁차게
그려낸 시 한편을 남겼다.

하늘이 뿜은 한 갈래 물길이 골짜기를 숫돌처럼 가는 듯
용이 사는 연못으로 백 길이나 되는 물이 모이고 모이네

날아온 샘물이 거꾸로 쏟아지니 은하수가 아닌가 싶고
성난 폭포가 가로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가 굽었다

우박이 튀고 천둥이 달리니 골짜기가 꽉 찼고
구슬 절구에 옥을 빻으니 맑은 하늘까지 환하다

풍류객들이여 (중국의) 여산이 낫다고 말하지 말라
누가 해동의 으뜸인 천마산을 알겠는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7회


박연폭포(朴淵瀑布)
                             -황진이

一派長天噴壑? (일파장천분학농)
龍湫百?水??(용추백인수종종)

飛泉倒瀉疑銀漢(비천도사의은한)
怒瀑橫垂宛白虹(노폭횡수완백홍)

雹亂霆馳彌洞府 (박란정치미동부)
珠春玉碎澈晴空(주춘옥쇄철청공)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여산승)
須識天磨冠海東(수식천마관해동)

[해석]
한 줄기의 긴 하늘이 골짜기에서 뿜어져 내려
폭포밑 웅덩이에 백 인의 물이 고여있네

​날던 샘물이 거꾸로 쏟아지니 의심컨대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는 비끼듯 완연히 흰 무지개 같네

​우박은 어지러운 듯 번개가 달리ㄴ는 듯 골짜기에 퍼지고
구슬이 솟은 듯 옥이 부서지는 듯 갠 허공에 많구나

유랑하는 ​나그네여,여산이 좋다 멀하지 마소
반드시 천마산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인 것을
알아야 하리니

이 시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박연폭포의 아름다움과 기개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박연폭포의 위용이 이러하니,
나그네는 중국의 명산인 여산(廬山)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며 우리나라
송도(松都)에 있는 천마산이 으뜸이라 표현하고 있다.

박연폭포의 싯 글은
아무 감관에서 나올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통찰력과 표현력이 어우러져야 가능한 절창이다.

진이는
이런 감각적인 표현을 능란하게 할 수 있는
대(大) 시인이었다.

그녀는 송도(지금의 개성) 자체에 대한 시도 남겼다.

지금은 길이 막힌 개성공단이 있는 그 도시는,
고려의 수도였고, 황진이의 자부심이었다.
황진이는 송도의 상징적인 기생이다
눈 속에 지난 왕조(고려)의 빛깔이 숨어있고
차가운 종소리에 옛 나라의 소리가 담겼네
남쪽 누대에 쓸쓸히 홀로 서 있노라니
허물어진 성곽에 저녁 안개가 피어나네


송도(松都)
                               -황진이
雪中前朝色 (설중전조색)
寒鐘故國聲(한종고국성)
南樓愁獨立(남루수독립)
殘廓暮煙生(잔곽모연생)

[해석]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그녀는 왜 개성(옛 고려의 수도)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
그녀는 정신과 육체가 철저히 고려 여인이었다.
지금의 서울인 한양(조선의 수도)의 정권에서
뭔가를 성취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고려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이 점에서 개성을 결코 떠나지 않았던
유학자 서경덕과 통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학문과 인품의 소통 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공감대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왕조가 바뀌어
한양이 나라의 중심이라며 들먹거리지만,
고색이 창연한 개성이 역사적 자존심을
지닌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녀는 한낱 ‘지방 기생’이 아니라,
송도라는 ‘문화중심지’를 기반으로 피어난
전국적인 스타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송도에 관한 그녀의 시에는
그러나 사라진 것들에 대한 비감이 서려있다.

아무리 고려를 자랑해도 현실은 현실이 아닌가.

눈 속에 고려 빛깔이 서려있다는 대목은 참 멋지다.
청자의 푸르스름한 기운과 응달의 눈이 지닌 색깔이
닮아있지 않던가.

특히 눈을 시리게 하는 맑음이 닮았다.

차가운 종소리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시절에 대한 회억이 아닐까. 청자와 불교.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을
열 글자에 아름답게 그려냈다.

남루(南樓)는 옛 선비들이 들끓던 곳인데,
이젠 아무도 없고 황진이 혼자 올라가 쓸쓸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산을 이은 성곽들은 최근엔 정비하지 않아 허물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마치 전성기의 옛 병영처럼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실은 연기가 아니라, 저녁답의 안개일 뿐이다.

군소리 하나 없이 깔끔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황진이가 너무도 개성을 잘 알고 또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8회

송도(松都)
                               -황진이
雪中前朝色 (설중전조색)
寒鐘故國聲(한종고국성)
南樓愁獨立(남루수독립)
殘廓暮煙生(잔곽모연생)

[해석]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그녀는 왜 개성(옛 고려의 수도)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했을까.
그녀는 정신과 육체가 철저히 고려 여인이었다.
지금의 서울인 한양(조선의 수도)의 정권에서
뭔가를 성취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고려인으로 살기를 원했다.
이 점에서 개성을 결코 떠나지 않았던
유학자 서경덕과 통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학문과 인품의 소통 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에 대한 공감대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왕조가 바뀌어
한양이 나라의 중심이라며 들먹거리지만,
고색이 창연한 개성이 역사적 자존심을
지닌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녀는 한낱 ‘지방 기생’이 아니라,
송도라는 ‘문화중심지’를 기반으로 피어난
전국적인 스타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송도에 관한 그녀의 시에는
그러나 사라진 것들에 대한 비감이 서려있다.

아무리 고려를 자랑해도 현실은 현실이 아닌가.

눈 속에 고려 빛깔이 서려있다는 대목은 참 멋지다.
청자의 푸르스름한 기운과 응달의 눈이 지닌 색깔이
닮아있지 않던가.

특히 눈을 시리게 하는 맑음이 닮았다.

차가운 종소리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시절에 대한 회억이 아닐까. 청자와 불교.
고려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을
열 글자에 아름답게 그려냈다.

남루(南樓)는 옛 선비들이 들끓던 곳인데,
이젠 아무도 없고 황진이 혼자 올라가 쓸쓸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산을 이은 성곽들은 최근엔 정비하지 않아 허물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마치 전성기의 옛 병영처럼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실은 연기가 아니라, 저녁답의 안개일 뿐이다.

군소리 하나 없이 깔끔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황진이가 너무도 개성을 잘 알고 또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19회

이제 우리는 가장 낯설고 가장 자유로운 황진이를 만나러 갈 때가 됐다.

조선에서 가장 예쁜 여자 황진이는 행복하게 살았는가?
이 질문은 황진이에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붙들리는 에피소드들과 증언들을 취합해서 간결히 말한다면, ‘아니다’이다. 황진이는 행복하지 않았다.

500년 전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렇게 간단히 평가하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거친 방식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국색(國色)이란 소릴 들을 만큼 예뻤지만 별로 즐겁지 않았다.

몸뚱이란 것이 무상하며 사내들의 관심은 곧 돌아설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육체를 아끼지 않았다. 마음이 동하면 서슴없이 동침했다.

기생들이 즐기는 화장을 삼간 까닭은 워낙 피부가 고와서이기도 하지만 그런 꾸밈이 그녀의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진이는 평생 버림받은 눈 먼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냉정한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여자의 운명을 동정하고 남자를 철저하게 불신했다.
그녀는 한 꺼풀만 벗기면 욕망으로 가득 찬 위선적인 인간들을 가차없이 공격하고 조롱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런 그림자만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여인은 시와 예술을 뜨겁게 사랑했다.

소세양과 김경원을 사랑한 것은
시를 사랑한 것이며,

이언방과 이사종을 사랑한 것은 예술을 사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학문을 좋아했다. 화담에게 바친 경배는, 물론 ‘사전 테스트’가 있긴 했지만 깨우침을 갈구하는 그녀의 진심이 담긴 것이었다.


황진이는 자유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느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자유를 예술에서, 시에서, 학문에서, 사랑에서 찾으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조선기생이 누릴 수 있는 자유란 것이 황진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정적인 삶을 팽개치고 유랑을 떠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320회

그녀는 몸을 팔고 사내는 구걸을 한 '금강산남녀'

금수저남자 이생과 함께 떠난 무전여행.........
거지기생의 깜짝 리사이틀에 놀란 사또

그녀는 금강산과 태백산, 지리산을 거쳐 금성(나주)을 도는 무전여행을 감행한다. 시기는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나이가 들어가는 서른 이후가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여행길의 위험과 고독을 줄여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황진이는 재상의 아들인 이생(李生)을 찍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온다.

‘사람됨이 호방하고도 맑아서 함께 외방에서 놀기를 일삼았’던 친구였다. 말은 멋있게 대접해주고 있지만,

툭 까놓고 보면 방랑기가 좀 있는 부잣집 건달이다. 황진이는 데리고 다니기에는 ‘딱’이라고 생각하고 점잖게 제안을 한다.

“내가 들으니 중국 사람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한 번 금강산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제 내가 우연히 선랑(仙郞)을 뵙게 되었으니 함께 산을 유람하시지요. 갈건야복(葛巾野服) 차림으로 승경(勝景)을 샅샅이 찾아본 뒤에 돌아오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이생은 길이 고생스럽겠다 싶어서 하인을 대동하려 했다.
황진이가 말렸다. 여행을 사치스럽게 하면, 그 참맛을 느끼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생은 억센 베옷을 입고 삿갓을 쓰고 양식 보따리를 등짐으로 졌다.
그리고 황진이는 베적삼에 무명치마를 입었고 여승이 쓰는 소나무겨우살이로 만든 모자를 썼다.

대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었다. 그런 차림으로 남녀는 금강산에 들어갔다.

처음엔 차림도 우습고 해서 껄껄거리며 떠났을 것이나, 양식이 떨어지고 신발과 옷이 헤지면서 두 사람은 거지가 다 되었다.

그런데도 황진이는 금강산 곳곳을 하나도 남김없이 봐야 한다면서 누더기 차림으로 강행군을 했다.

마을이 보이면 이생은 걸식(乞食)을 하고 황진이는 아낌없이 몸을 팔았다.
어떤 사람도 이 지저분한 차림의 여자가 대스타 황진이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계곡에서 나오는데,
시냇가의 솔밭에서 선비 열댓명이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며칠 굶주렸던 두 사람은 거기로 다가갔다. 먼저 황진이가 선비들에게 큰 절을 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묻는다.
“자네도 술을 마실 줄 아는가?” 그러자 황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을 잡은 뒤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노랫 소리가 금강산 자락을 메아리치니 곱고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