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김옥균(1851-1894)은 당시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부국강병을 위해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결국 삼일 천하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 간 후, 약 1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면서
오가사와라(小笠原) 섬과 홋카이도(北海道)로 유배생활을 전전하다, 마침내
1894년 3월 27일 청나라의 이홍장과의 회담을 위해 상하이로 도착한 다음 날인
28일, 함께 동행했던 조선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과 비극적 죽음은 조선, 일본, 중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문학적 소재로서 다양하게 평가
및 해석되고 있다.
특히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1)는 김옥균을 소재로 한 최초의 희곡작품인
김옥균의 죽음(金玉均の死)(잡지 <人間>, 1920, 1)를 발표하였다. 사실 이
작품은 전체가 1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적으로 3월 28일 당일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저격당하는 전후 상황을 그리고 있다. 기존의 갑신정변을 소재로
한 작품2)과는 달리 김옥균의 죽음만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김옥균의
죽음과 그 현장에 관한 역사적 사료가 부족했던 만큼, 그 부족한 부분을 상상력
(극적 허구성) 혹은 작가의 역사 인식으로 창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한 작가의 역사 인식이란 김미도가 ‘역사극은 비록 과거의 사실을 다루면서
도 동시대적 현실 인식을 내포하기 마련이다’3)고 지적한 바와 같이, 김옥균의
죽음은 당시 아키타 우자쿠를 둘러싼 시대적 상황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필요
가 있다. 즉 아키타 우자쿠는 그의 일기에서 ‘사회적으로 보면 금년(1920년
- 인용자)도에는 일본 민중이 세력적으로 앙양(昻揚)할 때였다. 1918년 8월
쌀 파동을 필두로, 1919년 8월 도쿄 모든 시에 있는 각신문사 인쇄직공 총파업,
같은 해 9월 고베 가와사키 조선소 사보타주가 이어졌고 (중략) 이와 같은 민중
운동 발흥에 대해서 노동자, 노동계급의 문화적 욕구를 반영해서 연극운동이
1) 아키타 우자쿠(秋田雨雀, 1883-1962): 극작가이자 동화작가, 소설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
낭만적 경향의 희곡인 제일 먼저 동틀 무렵(第一の曉)(1911, 자유극장 초연)을 시작으
로 파묻힌 봄(埋れた春)(1912)을 발표하여 극작가로서 인정받았다. 1913년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 주재로 예술좌(芸術座)에 간사로 참가, 나중에 각본부원이 되었다. 아
버지의 투옥, 차녀의 죽음 등으로 한 때 신비사상에 사로잡혔지만, 이윽고 현실을 응시하
는 경향으로 바뀌어 희곡 토지(土地)(삼부작, 1917-1918) 등 자연주의적 경향이 심화되
었고, 그와 동시에 인도주의에서 사회주의 극작가로 바뀌어 희곡 국경의 밤(国境の夜)
(1920), 수류탄(手投弾)(1923), 해골의 무도(骸骨の舞跳)(1924)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선구좌(先駆座)를 일으켜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전개, 1927년 소련 방문 후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장이 되었고, 1934년 신협극단(新協劇団)을 결성하였다.
2) 본 작품은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김옥균을 소재로 한 희곡 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우선 일본에서는 1926년 10월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薰)의 김옥균(金玉均)
(잡지 <중앙공론>)이 있으며, 특히 1920년 김 환은 아키타 우자쿠의 金玉均の死을
김옥균의 죽음(잡지 <창조>)으로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후 한국에서도 김
옥균을 소재로 한 희곡으로, 김진구의 대무대의 붕괴(1929), 오영진의 동천홍(1973),
오태석의 도라지(1994) 등이 있다.
3) 김미도(1996), 「갑신정변 소재 희곡 연구」, 한국연극학, 한국연극학회, p.44.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4)라고 서술하고 있듯이, 그는 26년이 지난 김옥균의
죽음을 재현함으로서 1920년대 전후에 나타난 일본 사회의 불안과 문제점 그
리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고는 작품 김옥균의 죽음을 중심으로 분석하는데 있어, 우선
김옥균에 둘러싼 현실 상황을 시간적으로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자 한다. 또한 그가 오가사와라 섬에서 있었던 유배 생활의 추억을 통하여 추구
하고자 했던 이상 세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나아가 김옥균의 죽음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떻게 계승되어 이어져 가고 있는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품 분석은 1920년대 일본은 물론 각 시대마다 반복 ․
재생된 김옥균 위상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어 왔는가를 알아보는데 있어서
도 상당한 의의가 있으리라 본다.
2. 세 개의 공간 속에 나타난 김옥균의 죽음
김옥균의 죽음에서 무대 배경은 시간적으로 1894년 3월 28일이고, 공간적
으로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3층 건물 여관인 동화양행(東和
洋行) 2층 1호실 안5)이다.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6)인 김옥균과 홍종우, 오타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극이 진행이 되고 있다. 김현철은 ‘오타와 홍종우는 등장
빈도에 비해, 작품에서 갈등관계를 심화시킨다거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화시키
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김옥균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상대역에 불과할 뿐이다’7)라고 지적하고 있으나, 실은 1막인 단막 연극에서
무대 배경이동이나 각 등장인물의 성격 혹은 인물 간의 대립, 갈등을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다.
4) 秋田雨雀(1987), 雨雀自伝, 日本図書センター, p.79.
5) 이 날 김옥균과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는 2층 1호실에, 통역관 우바오런은 2호실 그리
고 홍종우는 3호실에 각각 투숙하였다.
6) 김옥균의 죽음에는 김옥균(망명자), 홍종우(자객), 오타 엔타로(太田延太郞, 청년), 시
마무라(島村) 대좌(한국의 대령에 해당), 그 외 급사 총 5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7) 김현철(2009), 「조선의 근대지식인으로서 김옥균의 형상화에 관한 연구」, 일본연구제
11집, 고려대학교 일본학연구센터, p.185.
오히려 상대역인 홍종우와 오타야말로 그들의 대사나 대화를
통해서 주인공인 김옥균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데 희곡적 역할이 있다고 하겠
다. 그러므로 김옥균을 비롯한 홍종우와 오타의 대화나 대사 속에는 김옥균의
당면한 현실, 말하자면 과거(말하자면 1884년에 있었던 갑신정변)를 포함한
현재(갑신정변 이 후, 약 10여년 간 일본 망명생활)와 다가 올 미래(상하이행에
서의 죽음)라는 김옥균의 선행적⋅전체적 삶을 한 공간에서 재현했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김옥균과 오타8)의 대화에서는 상하이에 오기 전 일본에 있었던
김옥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오타: (웃으면서) 하지만 아버지는 일본에 계실 때에는 일본 옷이 좋다고 말씀하
셨잖아요.
김옥균: (점잖게) 그야 물론이다. 일본에 있으면 일본 옷이 제일 좋지. 즉 일본
생활에 일본 옷이 가장 적합하단 말이다. 나카이 쵸민(中井平民)이 나를
‘김은 놀기를 좋아하는 사내’라고 말했지. (웃으면서) 하지만 일본과 같은
나라에 있으면 노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지 않니? 일본 옷을 입고 있으면
일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아.9) (p.225)
두 사람의 대화에서 김옥균은 일본에 있으면 노는 것 이외에는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하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황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오타가 말한 일본에 있었던 시기란 김옥균이 일본 정부의 강제
퇴거에 의해 오가사와라 섬(1886. 8-1888. 7)과 홋카이도(1888. 8-1890. 4)로
약 4년 간 유배 생활을 마친 1890년 4월 이후부터 상하이에 가는 1894년 3월
이전까지 해당된다. 이 시기에 김옥균은 ‘<재거(再擧) 계획 같은 것은 체념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별안간 방탕한 생활에 탐닉한 듯 보였다’
10)고 언급되어 있듯이, 자신이 지향하고자 했던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
병을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8) 여기서 오타는 실제 와다 엔지로의 모델로, 그가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후 아마
자키 토텐(宮崎滔天)에게 보낸 전문에는 ‘아버지(アボジ) 죽었다’라고 적혀있듯이, 와다
는 김옥균을 아버지로 불렀다. 이에 관련해서는 본 논문 4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함. 葛生玄晫(1916), 金玉均, 民友社, pp.105-106, 참조.
9) 텍스트는 金玉均の死(一幕)(秋田雨雀 作, 片上伸 ․ 相馬御風 編(1920), 十六人集, 新
潮社)을 인용하였다. 이하 페이지 수만 표기한다.
오타: 선생님은 도쿄에서 기생집에 드나들거나, 꽃을 희롱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
고 저는 항상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진정으로 나랏일을 생각하고
계시다면 그런 흉내는 당연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김옥균: 나라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일본인에게 과대평가
되어 있었다. 그야 나도 옛날에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또한 매우 어리석은 짓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조국을 위하여, 우리 국민을 위하여 한 일이었는지 매우 의문이다. (p.230)
김옥균의 일본 망명 생활은 일본에 의해 다시 한번 조국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던 기회마저 사라진 정치적 죽음11)을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조선에 의해
보내진 자객으로 말미암아 일상생활 속에 항상 죽음12)을 마주하며 보내고 있
었다. 그리고 자신의 혁명 의지가 점차 회의와 좌절로 점철되면서 결국 방탕한
삶으로 체념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 정부는
김옥균과 관련된 가족이나 동료를 역적으로 몰아 처형13)하였으며, 그 자신도
10) 한영섭 편(1984), 古筠 金玉均正傳, 古筠會, p.438. 한편 김옥균이 갑자기 방탕한 생활을
시작한 경위에 대해서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는 ‘나는 그의 신변 안전이 항상 염려되어
그에게 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內藏之助)가 교토에서 기라(吉良)의 첩자에게 방심한
것처럼 보여 어려움을 면했던 고사를 설명해 주고 지금까지의 우국적 행위를 싹 버리고
바보같은 시늉을 있는대로 해 보라고 권했다. 이 때부터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이내 유라쿠쵸(有樂町)의 여관 오구라(小倉)에서 거의 매일 시바우라(芝浦)에 있는 온
천에 가거나, 류암화명(柳暗花明, 기생들이 많은 거리 - 인용자)을 방황하기도 했다’(葛
生玄晫, 위의 책, pp.44-45)고 술회하고 있다.
11) 이 때 일본 정부의 배신적 행동에 분개한 김옥균은 갑신개혁의 전말(갑신일록)을 자세
히 기록하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전하여 위협하였다. 민태원(2006), 불우지
사 김옥균선생 실기, 도서출판 성심, pp.97-99, 참조.
12) 정일성은 ‘김옥균은 10여 년의 망명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일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실의(失意)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론가 탈출구를 찾기 위해 애썼다. 그 초조감이
바로 그를 청나라로 가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정일성(2001), 후쿠자와
유키치, 지식산업사, p.157.
13) 정부는 정변 직후 10월 22일부터 정변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884⋅1885⋅1886에 걸쳐 정변 관련자 20명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다. 갑신정변에 직
접 관련된 자들은 ‘모반대역부도죄(謀反大逆不道罪)’와 ‘모반부도죄’, ‘지정불고죄(知情
不告罪)’가 적용되었으며, 이 가운데 모반대역부도죄인은 능지처참에, 모반부도죄인과
지정불고죄인은 참형에 처했다. 그리고 정변 관련자들에게 모두 적몰가산(籍沒家産)과
파가저택(破家瀦宅)의 형이 집행됐으며, 그 부모와 형제, 처자에게는 연좌법이 적용되었
다. 박은숙(2005), 갑신정변 연구, 역사비평사, p.510.
1886년 일본에 온 자객 지운영14)에 의해 암살당할 뻔하였다. 그러므로 김옥균
이 오타에게 ‘나는 생활을 바꾸고 싶다.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
다’(p.227)라고 말한 의미는 자신을 둘러싼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이 앞으로의 정치적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적 필연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암살의 위협에서 정치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청나라 두 곳15)뿐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조선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갈 곳은 중국 이외에는 없다. 다만 김옥균과 오타, 홍종우의 대화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중국16) 또한 그의 일본 생활 - 죽음에 둘러싸인 정치적, 일상적
삶 - 과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김옥균: 바보같은 소릴 하는구나. 그런 소백정 같은 남자가 너 따위에게 조심할
것 같으냐. 그것은 나를 속여서 어디까지든지 도살장까지 데려 가려고
하는 거다. 나도 어디까지든지 속은 체하고 따라가는 거다. … 호랑이굴
에 들어가서 호랑이새끼를 얻을 때까지 말이다. …
오타: 하지만 선생님이 말한 그 호랑이새끼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선생님이 홍(洪)이나 오(吳)에게 끌려와 여기에 온 것을 일본 사람들은 모
두 슬퍼하고 있습니다. (p.229)
14) 고종은 지운영(池運永)에게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라는 자객 전권을 주어
1886년 4월에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지시하였다. 그 이전에도 송병준,
장은규가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박은숙(2011),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너머북스, pp.162-167, 참조.
15) 1886년 조선에서 보낸 자객 지운영의 김옥균 암살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은 이것
을 기회로 김옥균을 퇴거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 김옥균은 미국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여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일본 정부에게 기한을 연기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끝내 가지 못하고 오사가와라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었다. 민태원, 위의 책, pp.97-99,
참조.
16) 후쿠자와 유키치전(福沢諭吉伝)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상하이행에 대해서
‘상하이행은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琴秉洞(1991), 金玉均と日本,
綠陰書房, p.765, 재인용)
홍종우: (짧은 침묵 후, 빠른 어투에다 조선어로 말한다) 김선생님, 저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옥균: (점잖게, 조선어로) 무엇을 들었는가?
홍종우: 많은 자객이 선생님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김옥균: 무슨 이유로?
홍종우: 선생님이 상하이에 왔다고 해서요.
김옥균: 내가 상하이에 왔다구 해서? (p.237)
사실 김옥균도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에게 ‘수백, 수천 명의 호위가 있어
도 죽을 때는 죽는다. 인간만사 운명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을 수 없다. 이홍장이 나를 속일 요량으로 공손히 맞이하겠지만 내가
그를 속일 생각으로 그 배를 탄다. 그곳에 가서 이내 죽던가, 붙잡혀도 그만이
다. 5분만이라도 대화할 시간이 주어지면 내 것이다’17)고 말한 바와 같이, 그
스스로도 상하이행18)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김옥균에 있어서 정
치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일본 현실에서 벗어나 앞으
로 갈 상하이행이야말로 비록 자신이 현실적으로 죽는다 하더라도(그리고 결
과적으로 상하이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정치적 삶, 말하자면 조선의 자주
독립과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아키타 우자쿠는 단막극임에도 불구하고, 무대 배경인 객실 안에서
전개되는 김옥균과 오타 그리고 홍종우의 대사나 대화에 나타난 김옥균의 과
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같은 시간대에 응축함으로써 김옥균의 죽음을 통한
총체적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김옥균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 그
이면에는 그가 꿈꾸는 이상 세계를 현실 세계와 대비시켜 보다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 葛生玄晫, 위의 책, p.104.
18) 김옥균 일행은 1894년 3월 23일 고베(神戶)에서 출발하여 3월 27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일행으로는 와다 엔지로와 홍종우 그리고 통역관 우바오런(吳靜軒) 4명이며, 홍종우는
상하이 가기 전 이일직과 함께 김옥균의 암살을 모의하였다.
3. 현실 너머 꿈꾸는 세계
김옥균의 죽음은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옥균의 죽음(현실적⋅정
치적 삶을 아우르는 총체적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한편으로
그가 꿈꾸고 있던 이상 세계도 나타나 있다. 우선 김옥균이 지향하는 이상 세계
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오타와의 대화 속에 언급한 오가사와라 섬에
관한 추억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오타: (감정적으로)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오가사와라 섬에서 뵜을 때 선생
님은 훨씬 젊으시고 건강한 분이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정말로 나랏일을
근심하신 지사(志士)의 모습이었습니다.
김옥균: 그랬던가, 나도 나이를 먹었지만 오타 너도 많이 컸다. 그 때 너는 요렇게
작은 아이였는데 말이다…
오타: 그 때도 저는 선생님을 매우 나이가 많으신 분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선생
님은 오가사와라 섬에 몇 해 계셨지요?
김옥균: 선생님이란 말은 그만 하거라. (중략) 오가사와라 섬에 몇 년 있었더라?
햇수로 삼 년 있었나? 너를 만난 것은 섬에 간 그 해 가을이었으니까.
(pp.227-228)
오가사와라 섬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천Km 떨어진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고온 다습한 섬19)이다. 일본 정부에 의해 그곳으로 유배간 김옥균은 자신의
정치적 삶과 행보가 차단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정치적 중압감이
나 일상생활을 둘러싼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옥
균이 오가사와라 섬에 체류하는 동안 섬마을 주민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독서
나 낚시 때로는 불교를 통한 수양을 쌓기도 하였다. 특히 어린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 중에서 와다 엔지로(작품에서는 오타 엔지로)를 귀여워하였다.
19) 오사가와라 섬은 도쿄에서 남남동으로 약 천 킬로 떨어진 태평양에 있는 30개로 이루어
진 섬으로, 크게 지치지마(父島), 하하지마(母島), 이오섬(硫黃島), 미나미토리시마(南鳥
島)로 구성된 제도(諸島)이다. 당시 도쿄와 오사가와라 섬을 오가는 배는 1년에 4번이며
약 21일 간(오늘날에도 가는데 28시간) 걸렸다. 1886년 8월 29일, 김옥균이 처음 이 섬을
도착해 머문 곳은 지치지마(父島)이다.
그리고 어린 와다 또한 김옥균을 위해 그가 좋아하는 수박을 갖다 주기도 했는
데, 이후 와다는 김옥균이 1888년 8월 홋카이도로 떠날 때까지 그의 집에 묵으
며 학교를 다닐 정도20)로 친하게 지냈다.
이처럼 김옥균은 같은 일본이긴 하나 약 3년 동안 현실을 떠나 정치와 무관
한 사람들과 순진무구한 9살 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도 정치가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접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갑신정변 이후 현실적으
로나 정치적으로 항상 죽음을 마주하며 보냈던 그에게 있어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오가사와라 섬에서
의 자유로운 삶의 경험은 이후 그가 유배 생활을 끝내고 현실 세계(도쿄)로
돌아 온 뒤 이상 세계로서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김옥균: (전략) 너는 언젠가 남양(南洋, 태평양의 적도 부근에 널리 흩어져 있는
많은 섬들을 포함한 넓은 바다 - 인용자)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
지?
오타: 네, 말했습니다.
김옥균: 남양에 가서 너는 무엇을 할 생각이지?
오타: 무엇을 할지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만, 뭔가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중략)
김옥균: 과연, 재미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오타, 네가 남양에 가려는 생각이 있
을 정도라면 아메리카에 갈 생각은 없느냐? 아메리카에 가서 농부가 되는
거다…
오타: 농부요? 농부가 되어 무엇을 합니까?
김옥균: 돈을 모으는 거다. 돈이 밑천이다. 돈만 있으면 재미있는 일을 다 할 수가
있다. 네가 가면 나도 가마. 나도 너와 함께 농부가 될 터이다. 오타 너는
가고 싶지 않으냐. (pp.231-232)
오타는 자신이 남양을 가고 싶어하는 이유로 ‘어쨌든 남양에는 아직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섬이 많다고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타가
말한 아직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섬이란 바꾸어 말하면 다른 나라의 간섭
을 받지 않는 나라로, 누구나 차별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20) 박은숙, 위의 책, pp.175-176, 참조.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오타의 말에 대해서 김옥균은 남양이 아닌 아메리카
(미국)에 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것은 오타가 어려서 모르는 국제 정세, 말하
자면 남양은 언젠가 강대국의 식민지 경쟁에 의해 점령될 것이며, 점령국은
피점령국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 가능성을 내포해 두고 한 말이라 하겠다.
그러한 까닭에 김옥균은 오타에게 남양보다는 남의 나라에 속국이 될 걱정이
없는 자유로운 나라, 즉 미국에 갈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김옥균이 알고 있는 미국에 관련해서 살펴보면, 1882년 5월 조선은 미
국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1883년 7월 조선 정부는 보빙사(報聘使:
미국국정시찰단. 1883, 7-1883, 5)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 때 파견된 사람들
중 홍영식은 후에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그는 미국에서 약
40여일을 체류하면서 국제박람회, 은행, 병원 등 시찰은 물론 미국 정치와 농사
개량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귀국21)하였다. 그러므로 김옥균은 미국에서 돌아온
홍영식을 통해서 당시 미국에 관해 여러 사정, 예를 들어 미국의 민주주의 제
도22)나 개량된 농업 기술 등에 관해 들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김옥균에게 있어서 미국이란 나라는 당시 자신이 지금까지 꿈꾸며 이루
고자 하였던 이른 바 자주독립과 부국강병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세계에서 오타와 함께 농부가 되고자 하는데, 이것은 현실에서 잠시나
마 떠나 정치가가 아닌 한 무명의 농부로 살면서 한 곳에 정착해 살길 바라는
한낱 희망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사실은 김옥균이 이와 같은 이상 세계에서의
삶을 오타뿐만 아니라 자객 홍종우에게도 같이 갈 것을 귄유하고 있다는 점이
다.
21) 신용하(2000), 初期 開化思想과 甲申政變硏究, 지식산업사, pp.152-153, 참조.
22) 미국은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종결되었고, 1870년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되어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또한 보빙사 일행 중 유길준은 국비유학생의 자격으
로 미국에 체류하며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학교에서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영문 편지에는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활발하고 산업화가 잘 된 나라다.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
는 매우 훌륭하다. 이 정책이 최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적고 있다. 신동준(2009), 개화
파 열전, 도서출판 푸른역사, p.177, 참고.
김옥균: 오사가와라 섬에 있을 때, 오타는 자주 수박을 갖다 주었었지. 너도 그
때 일을 기억하느냐?
오타: (그리운 듯이) 네. 기억하구말구요. (후략)
김옥균: 오가사와라에 있을 때가 내 일생에 제일 즐거운 때였다. (중략) 그 곳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생활은 매우 쓸쓸했을 것이다.
(중략)
김옥균: 또 한번 오사가와라에 가고 싶다. 나도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시간에
그 섬에서 농부라고 했다면 지금쯤 부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홍종우에
게) 홍군, 오타는 남양에 가서 섬의 왕이 된다고 하는데, 자네도 가지
않겠는가? 조선에 있는 것보다도 남양에 가는 편이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말이오.
홍종우: (웃으면서) 오타씨, 저도 써 주시겠습니까?
김옥균: 써주고말고, 자네는 일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궁중 고문관 정도쯤은 될
수 있을 게야. (pp.240-242)
김옥균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 세계에 홍종우도 함께 동참하길 바라는데,
이것은 홍종우(조선)와 오타(일본) 게다가 현재 세 사람이 있는 중국을 포함한
삼국 모두가 차별없이 평등한 세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이상 세계는 작게는 과거 갑신혁명을 일으킨, 그리고 현재 고국을 돌아
가지 못하고 망명을 한 이유이기도 하며, 크게는 미래에 상하이에 와 이홍장과
담판하여 주장하고자 한 조선, 일본, 청 삼국의 공존과 번영을 주장한 삼화주
의23)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것은 아키타 스스로가 1920년대 일본 민중에게
바라고자 했던 자신의 이상적 세계24)일지도 모른다.
23) 김옥균이 청나라로 가기 직전 자신의 이름을 이와다 미와(岩田三和)로 쓰고 있는 것처럼,
김옥균은 말년에 삼화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조선과 청나라, 일본 등 삼국의 공존
과 화맹을 통하여 서양침략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옥균과 후쿠자와의 견해가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후쿠자와의 견해는 일본이 맹주가 되고, 청나라와 조선은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김옥균은 삼국이 대등한 관계로 공존 번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권정노(2007), 누가 역적인가, 어문학사, p.233, 참조.
24) 아키다 우자쿠는 1920년 사회 분위기에 관련해서 ‘아직 소부르조아적 아나키즘 경향을
띄고 있지만, ‘국가’ 및 ‘권력’에 관한 사회학설이 학교 강당에서 공공연히 논해지게 되었
다. (중략) 사회주의, 진보적 사상사, 문학자 및 학생에 의해 전(全) 일본적 결사 ‘사회주
의동맹’이 창립된 것도 이 해(1920년 - 인용자)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秋田雨雀, 위의
책, p.77.
이와 같이 김옥균은 현실과 동떨어진 오가사와라 섬에 있었던 추억을 통해
자신의 궁극적 목표이자 원하는 이상 세계를 구체화하고 있다. 다만 오가사와
라 섬에서 보여지는 평화롭게 자유로운 세계가 시기적으로 여름인 것과 달리,
조선은 겨울25)로 상징되고 있다. 이것은 비록 김옥균이 그의 이상 세계를 실현
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상하이에 왔지만, 조선은 영원히 겨울이 될지 모른
다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어쩌면 상하이로 출발하기 전 이미 자신의
이상 세계가 실현 불가능한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한편으로 이것은
아키타 우자쿠가 김옥균의 대사를 통해 바라본 당시 조선의 모습 - 1910년 일본
에 의해 강제병합된 조선이 앞으로도 자주자강의 어려움과 요원함 - 을 간접적
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4. 김옥균의 죽음과 청년 오타
이처럼 김옥균의 상하이행은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정치적 실현 의지는 후카자와(深沢)가
준 몬츠키(紋付, 문양이 들어간 일본식 겉옷)로 상징화되고 있는데, 이 몬츠키
는 지금까지 김옥균의 정치적 삶의 역정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그의 죽음 이후
에도 영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오타: 그렇습니까? (짐 속에서 몬츠키를 꺼내며) 보세요, 여기에 몬츠키가 있습니
다. 이것은 후카자와 선생님이 주신 겉옷이지요?
(중략)
김옥균: (전략) 후카자와 선생은 훌륭한 어른이다. 일본에 후카자와 선생 정도의
사람이 세 사람 있다면 훌륭한 나라가 되겠건만… 이 겉옷 문양은 내가
생각해 낸 것이다…
오타: 아버지는 후카자와 선생님을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25) 홍종우: (조선어로) 우리나라에도 봄은 오겠죠.
김옥균: (조선어로 탄식하듯이) 어쩔지 모르겠네. 우리나라는 영원히 겨울이 될지 몰라.
(p.242)
김옥균: (전략) 후카자와 선생은 위대하구 말구, 일본 정치가나 지사 따위는 그
분의 마음을 조금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 분은 50년 앞서 일본
에 태어난 분이니까 말이다…
오타: 겉옷을 개어 넣을까요?
김옥균: (양복 위에 겉옷을 입고, 그대로 의자에 앉아 상념에 젖는다)
(pp.225-226)
오타가 김옥균에게 말한 몬츠키26)는 실제 후쿠자와 유키치의 부인이 선물
한 것이다. 사실 김옥균과 후카자와(深沢, 실제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
吉))의 관계는 김옥균이 1881년, 그리고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건너갔
을 때 후쿠자와를 만났으며, 그리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도쿄
에 가 처음 찾아 간 곳이 후쿠자와 집이었다. 이 때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맞이해
주었고,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의 주요 정계 인물들을 소개해 주거나 문명
론에 관한 논의 등 여러 모로 도움27)을 주었다.
즉 후카자와는 일본의 선각자이면서 조국 문명개화에 일생을 보낸 인물로,
그리고 김옥균이 상하이에 와서 그가 준 몬츠키를 입는 모습을 통해 그 자신
또한 일본의 후카자와와 같은 선각자 모습으로 교차되면서 조선 근대화를 위
한 혁명 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상념에 젖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에선 후카자와가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한 것과는
달리, 조만간 있을 이홍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내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6) 김옥균이 상하이에 가져간 몬츠키에 관련해서 ‘상하이에서 흉탄에 쓰러졌을 때까지 소중
하게 건사해 가지고 있던 한 벌의 일본식 ‘기모노’가 있었다. 이것은 그의 후원자요 은사
이기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선생의 부인이 증여한 물건이었다. 이른바 ‘히노나미노
아야(日波紋)’가 화려한 무늬로 새겨진 의복인데 이 ‘히노나미노 아야’는 일찍이 ‘와타나
베 하지메’(渡辺元)란 사람이 김옥균의 정문(定紋)으로써 고안하여 이렇게 명명한 것이
다’(한영섭 편, 위의 책, pp.469-470)고 서술되어 있다.
27) 김옥균이 죽고 난 후에도 후쿠자와는 진정사(眞淨寺) 주지 데라다 후쿠쥬(寺田福壽)
앞으로 서신을 보내 ‘김옥균씨 일은 정말 불행하고 불운한 일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며 법명(法名)과 독경을 부탁했다. 망명 중 김씨와 친해진 오이 켄타로(大井憲太郞),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은 ‘김씨우인회(金
氏友人會)’를 만들어 유해 인수와 장의를 계획하고 사무국을 교순사(交詢社)에 설치했
다. <정일성, 위의 책, p.159.>
또한 김옥균과 오타의 대화에서는 몬츠키로 대표되는 김옥균의 정치적 삶과
함께 오타가 김옥균에게 부른 ‘아버지’라고 부른 호칭에서 두 사람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사실 1888년 김옥균이 홋카이도로 떠날 때 와다와 헤어진 이후,
1890년 김옥균이 건강 치료차 도쿄에 왔을 때, 당시 열 세 살이었던 와다와
재회28)하였다. 그리고 약 4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지내면서 김옥균은 와다를
아들로 대하였고, 와다도 김옥균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었다. 예를 들어 김옥균
이 상하이로 떠날 때 오타만을 데리고 간 것은 비록 김옥균과 오타가 나이도
국적도 서로 다르지만, 혈연관계 이상 신뢰 관계로 맺어진 사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작품에서는 김옥균이 홍종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이 두 사람
의 관계가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오타: (전략) (죽은 김옥균이 있는 곳으로 달려 가 가슴에 손을 댄다, 피로 물든
얼굴을 껴안으려 한다. 눈물이 하염없이 죽은 자의 얼굴에 떨어진다) 아버
지~ 아버지, 정신차리세요. 이제 제가 있으니 정신차리세요.
(중략)
시마무라: 알겠네. 자네 혼자서 괜찮은가?
오타: 여기는 괜찮습니다.
오타: (시마무라가 나간 뒤에 한참이나 죽은 김옥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트렁크를 열어 몬츠키를 꺼내 죽은 김옥균 위에 덮고, 조용히 말한다) 자,
선생님이 가장 존경하던 후카자와 선생님이 주신 몬츠키를 덮혀 드릴께요.
선생님은 왜 몬츠키를 가져왔는냐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더 이상 몬츠키
를 입을 때가 없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오타는 김옥균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눈물이 저절
로 넘쳐 눈을 뜰 수가 없다. 오타는 양 손으로 눈을 훔치며 죽은 자의 가슴에
쓰러져 통곡한다) (pp.246-247)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오타는 김옥균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몬츠키를 덮어
28) 와다 엔지로는 ‘이후 1890년 도쿄에 전람회가 있었던 해입니다. 저의 가족은 이미 도쿄로
돌아 왔었기에, 저도 우에도(上野) 부근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씨와 매우 닮은
사람이 인력거를 타고 스쳐지나가는 것을 봤습니다. (중략) 그 후 4, 5일이 지나서 김씨로
부터 저희 집에 편지를 보내, 지금 홋카이도에서 양생(養生) 때문에 도쿄에 돌아와 있으
니, 꼭 놀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葛生玄晫, 위의 책, pp.121-122.
주고 있는데, 그의 대사 속에는 아들의 입장에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서 오는 슬픔은 물론 김옥균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상하이에 왔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 그리고 그가 바라는 이상 세계가 무위로 끝난
데서 오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오타의 대사는 단순히 이러한
김옥균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과 아쉬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김현철이 ‘김옥
균과 오타의 관계는 아버지란 호칭으로 인해,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관계로
고정되어 버린다’29)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말은 결국 아버지인 김옥균이 죽음
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 오타로 이어지는 연속성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작품은 여기서 끝나면서 김옥균은 오타에게 아무런 유언없이 죽
음을 맞이하였지만, 평소 김옥균과 같이 삶과 죽음을 함께 한 오타는 그가 의식
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김옥균의 사상을 영향받았음에 틀림없다. 특히 오타가
김옥균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몬츠키를 덮어 주는 있는 행동은 바로 김옥균
이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정치적 삶 - 그의 이상 세계 - 이 오타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29) 김현철, 위의 책, p.184.
결국 김옥균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상하이로 왔지만, 현실
화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일생 동안 지향하고자
했던 정치적 삶, 즉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그리고 삼화주의는 비록 그의
죽음으로 이상 세계에 머물고 말았지만, 그의 아들인 오타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결 론
한 작가가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 역사적
인물의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애초에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역사적 인물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본다.
게다가 연극을 전제로 한 희곡은 소설과는 달리 - 더욱이 그 역사적 소재
가 과거의 인물이 아닌 동시적 인물이라면 - 작가의 의도가 좀 더 강하고 명확
하게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후지타 다쓰오(藤田龍雄)는 ‘주인공과 암살자의 심리적 교착(交錯)에서 그
시대의 커다란 불안을 읽어 낼 수 있다’(秋田雨雀硏究, 津輕書房, 1972, p.50)
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김옥균이 일생 동안 조국을 위해 지향해 온 정치적 삶과
비극적 죽음은 바로 작가가 살던 시대적 불안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키타 우자쿠는 1920년대의 시대적 불안을 김옥균의
죽음을 통해 문학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1894년 3월 28일 상하
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을 소재로 하여, 그의 죽음에서 총체적 삶을 응축함으
로서 아키타 자신이 살던 암담한 현실을 보고자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지향하
고자 하는 사회, 즉 모두가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
다. 즉 김옥균의 죽음을 통해서 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오타와 같은 젊은 청년들
에게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쳐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과 함께 미래의
새로운 이상 세계를 향해 출발이 되는 계기를 주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선각자이자 혁명가인 김옥균의 죽음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과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옥균의 죽음에 나타난 김옥균 죽음과 위상은 단순히 역사적
한 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현실의 모순이나 문제점을 반영하고,
현실을 극복하는 표상적 존재로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텍스트】
秋田雨雀 作, 片上伸⋅相馬御風 編(1920), 金玉均の死(一幕), 十六人集, 新潮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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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고 일 : 2013. 0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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