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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그리스도인과 전쟁, 그리고 평화 - 전쟁과 평화론의 3가지 유형 - /이상규.백석대

시작하면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만행은 전쟁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 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수행자들(군인) 보다 더 많이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전쟁이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손봉호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 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의도하지 않는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행위주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잘 못이다. 훨씬 더 중한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다. 고의적 살인이나 실 수 혹은 전쟁에서 살인이나 피해자의 죽음에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전쟁에서 우연하 게 죽었다고 해서 고의적 살인행위로 인한 죽음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커졌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해진 오 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되고 그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어 야 한다. 2)

2) 손봉호, “그리스도인과 전쟁,” 「월드뷰」 126(2010. 11/12), 4. 필자는 이 글에서 도움을 입었고, 이 글의 논지를 따랐다. 그리고 현실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런 논의가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의 와중 에서 평화를 숙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이다.

1차 대전 당시 8백 만 명의 군인을 포함하여 1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최악의 소모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제2차 대전에서는 7천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민간인이 4천만 명이었다.

나치독일의 일으킨 독소전(獨蘇戰) 당시 소련의 20대 남성 70%(1,400만 명)가 전사했다.

스탈 린의 학살이 2천만 명, 마오쩌뚱의 학살 4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6.25전쟁은 3년 1개월 2 일 간의 전쟁이었는데, 당시 재산피해는 그만두고 인적 피해를 보면, 한국 및 UN군 피해자가 776,360(사망 전사 부상 실종)명, 북한 및 중공군 피해자 1,773,600(북한군: 801,000명, 중공군: 972,600명)명이었고, 민간인 피해(사망 학살 부상 실종)는 2,540,968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피난 민 32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여 명이 발생했다.

사망자 만 말한다면 군인 40만, 민간인 약 2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지난 5,600년 동안 1만 4천5 백 번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약 35억 명이 전쟁의 와중에서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무기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 외에도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도할 수 없는 정도의 강간, 납치, 협박, 인권모독, 인권유린이 이루지고 정의, 정직, 도덕 등 인간다움은 무력해져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일을 윤리의식 없이 자행하게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독일의 위험사회학자 율리히 베커Ulich Backer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베커는 현대의 재난에는 3가지 특징이 있 다고 했는데,

첫째는 재난의 원인 규명이 어렵고,

둘째, 재난의 범위가 대규모적이며.

셋째, 재난의 고통이 무한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기 독교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것이다.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된 평화론 가운데 아래의 3가지 유형에 대해 고찰하고 그 주장의 의의와 타당성 3) 그리고 현실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3) 기독교와 전쟁 및 평화에 대한 필자의 연구로는 이상규, 『평화운동과 평화선교』(공저, 한들출판사, 2009. 9), 85-142, 李象奎 外, 『キソスト者の 平和論, 戰爭論』 (いのちのことば社, 2009), 이상규 역,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본 전쟁과 평화』 (KAP, 2010), 이상규, “테르툴리아누스의 평화이해,” 「헤르메네 이아 투데이」 31(2005. 여름호), 43-51, 이상규, “초기 기독교의 평화주의 전통” 「역사신학논총」 11(2006. 6), 8-28, 이상규, “메노나이트교회의 평화주의 전통” 「한국교회사학회지」 44(2016), 207-242, 이상규, “4세기 이후 교회에서의 전쟁과 평화- 정당전쟁론의 대두와 중세의 성전론 -” 「백 석저널」 40(2021. 봄), 107-137 등이 있다.

이런 논의가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의 와중 에서 평화를 숙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1. 기독교평화주의 (Christian Pacifism) 4)

4) 이하에 대해서는 이상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SFC, 2021), 53이하에 의존하였음.

전쟁이나 폭력은 어떤 경우라도 용납될 수 없고 무저항 비폭력 비전 혹은 반전을 주장하는 입장을 평화주의라고 말한다.

이를 절대평화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평화주 의’Pacifism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인도적 평화주의Humanistic Pacifism이다.

전쟁이나 폭력 행사는 인간 생명의 살상 혹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는 점에서 허용 될 수 없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둘째, 실용적 평화주의Pragmatic Pacifism는 폭 력보다는 비폭력이 사회정치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에 비폭력을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셋째는 기독교회가 말하는 평화주의인데, 성경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 주셨고 초기 기 독교회가 따랐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을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기 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라고 불리고 있다.

이런 기독교 평화주의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인 경우가 초기 기독교와 16세기 재세례파 계 열의 메노나이트교회, 그리고 ‘역사적 평화교회’들이었다.

초기 기독교회는, 첫 300여 년간 비 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하르나크 Adolf von Harnack, 옥스퍼드대학의 캐둑 스C. J. Cadoux, 레이든대학의 헤링G. J. Heering, 메노나이트 학자들인 홀쉬John Horsch와 헐스버 그Guy F. Hershberger 등 여러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행했다는 말은 폭력이나 전쟁을 반대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한 조직인 군 복무도 반대했 다는 뜻한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폭력이나 전쟁을 비도덕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배척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평화주의 전통을 따랐던 이들이 초대교회의 테르툴리아 누스, 오리게네스, 힙폴리투스, 그리고 메노 시몬즈, 현대의 하워드 요더 스탠리 하우어워스 Stanley Hauerwas 등이다.

초기기독교 초기 기독교회가 군복무나 살상, 폭력, 전쟁을 반대한 것은 근본적으로 신약성경, 특히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따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 려대라는 가르침이나(마5:39),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라는 가르침(막9:4)을 제자도弟子道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이 땅의 질서로부터 자유롭고 자 하는 심리적 이민자들이었다.

2세기 중엽의 변증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Epistola ad Diognetum’에서는 이들을 ‘거주하는 나그네’라고 불렀다.

초기 기독교회가 군복무나 폭력,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을 보여 주는 흔적이 초기 교부들의 글 속에 나타나 있는데,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c.35-108는 자신을 해친 이들에게 복수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c.69-155는 빌립보인들에게 악에게 대항하 지 말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벧전2:23)에 순복하라고 했다.

변증가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180년경 동일한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혈전血戰, bloody game이라고 불리는 검투 사의 경기에 참여하거나 관람하는 것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생명을 파괴하는 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c.155-160의 권고는 보다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음란한 연극 관람이나 살상으로 이어지는 검투 경기 관람은 금지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또 174년경에는 기독교인들은 군복무를 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한 바 있다.

그 는 군인이 신자가 되었을 경우 즉각적으로 군복무를 그만두던지, 순교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 다고 보았다.

초기 기독교가 군 복무를 반대하고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행했다는 점은 2세기 후반의 이교 도 켈수스Celsus의 기독교 비판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켈수스는 기독교인들이 군복무를 반대하 고 전쟁을 거부한다면 결국 제국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반전 평화 주의를 공격했다.

또 258년에 순교한 키푸리아누스Cyprianus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범죄로 간주되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살인은 용기로 간주된다.”라며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 는 폭력이나 전쟁을 비판했는데, 이런 점들은 초기 기독교회의 평화주의적 입장을 보여 준다.

정리하면,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전쟁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아 전쟁 을 반대했고, 전쟁 중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살인이라고 보아 군 복무를 거부했다.

비 록 2세기 중반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61-180 치하에서 일부의 기독교 인이 군인이 되기도 했고, 3세기에 작성된 ‘히폴리투스의 교회법Canons of Hippolytus’에서는 실 제로 살인을 행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도 군인이 될 수 있다는 전향적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은 반전反戰 평화주의였다.

이런 현실에서 최초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출 신인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 274-295였다.

로마제국의 군인인 파비우스 빅토르Pabius Victor 의 아들이었던 그는 아프리카 지방 총독African proconsul 카시우스 디온Casius Dion의 징집 명 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여 295년 3월 12일 처형되었는데, 그가 최초의 병역 거부로 인한 희생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케둑스C. John Cadoux에 의하면 막시밀리아누스의 경우 와 동일한 병역 거부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들은 초기 기독교의 군 복무 반 대와 평화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준다.

3세기에 생산된 교회법에 의하면 목사가 가져서는 안 되는 직업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직업군인, 이발사, 수술 의사, 대장장이였다.

왜 이런 직업을 겸할 수 없다고 규정했을까?

그 이유는 앞의 세 가지 직업은 피를 보는 직업이기 때문이고, 마지막의 대장장이는 이 직업들의 도구를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착 목회 이전 자급 목회 시대의 일면을 보여 주 는 것이지만, 당시 교회의 평화주의적 이상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군복무와 관련하여 많은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2세기 말부터 교부들은 군 복무와 전쟁, 그리고 평화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변화의 중 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활동했던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3세기 중반 의 오리게네스와 히폴리투스였다.

이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테르툴리아누스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c. 160-c. 225는 197년경부터 224년까지 약 20여년에 걸쳐 집필활동을 했는데, 라틴어로 쓴 31편의 글이 남아 있다.

그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 『변 증서』는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기독교의 비폭력적 특성을 말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은 제국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 복무 를 포함한 제국민의 의무를 진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후기에 기록한 『화관론』과 『우상숭 배론』에서는 군복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군 복무를 반대한 것은 화 관과 함께 군 복무가 우상숭배와 관련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가 군 복무를 거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제국은 누가 지킬 것인가?

켈수스Celsus와 같은 이교 철학자들의 거듭된 질문이었다.

이 점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대답은 이교도들이 볼 때 수 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검, 곧 무기를 버릴 때 발생하는 제국의 위기를 테르툴리아누스는 상관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어떤 결과가 발생하던 그 여파 는 길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화관론』을 쓴 시기는 몬타누스파Montanist 이단으로 전향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몬타누스파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 속에 살았던 종말론적 이단이었음으로 테르툴리아누스 또한 재림의 때가 임박하다고 보았으므로 군사적 안전이든 위 기이든 간에 곧 지나갈 것으로 이해하고 군 복무는 기독교인들에게 적절치 못한 행위로 말하 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군복무를 반대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다.

캄펜하우젠Hans von Campenhausen, 존 헬제렌드J. Helgeland는 우상숭배의 가능성 때문이라고 말 하지만 메노나이트계 학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가 군 복무를 반대한 것은 우상숭배의 위험성뿐 만 아니라 피 흘림, 살상을 거부하는 반전사상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오리게네스

구약성경에 기록된 전쟁사를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하여 전쟁이나 군복무를 반대하고 평화주 의를 주창한 인물이 오리게네스Origenes, c. 185-254였다.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과 같은 전쟁 기록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싸움으로 해석하여 실제 발생한 전쟁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그의 입장은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사야서 2장 4절, “그가 열 방 사이를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 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 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 하리라.”라는 본문에서 ‘칼’을 투쟁과 교만을 뜻하는 것으로, ‘보습’ 이나 ‘낫’은 겸손의 의미로 해석하여 이 본문을 물리적 전쟁과 관련시키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구약의 전쟁 기사를 영적 전쟁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했다.

그는 구약의 전쟁 기사가 영적 전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대의 역사책들이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읽어야 할 책으로 전해졌으리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근거로 테르툴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이나 군복무를 반대하는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히폴리투스

군 복무와 살상을 반대하여 평화주의를 지향한 또 한 사람의 교부가 히폴리투스Hippolytus, c. 170-235였다.

윤리적 엄격주의자였던 히폴리투스는 자신의 『사도전승』에서 매춘업자, 매춘 부, 마술사, 점성가, 연극배우, 곡예사나 검투사, 우상 제조업자 등 특정 직업에 종사하거나 그 행위를 하는 자는 교회 회원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이 우상을 소지하거나 부도 덕 한 일을 지속하는 것도 부당한 일로 간주했다.

살인을 대죄大罪로 간주하는 그가 검투 경기 의 참가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당시의 검투 경기가 인명 살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 다.

히폴리투스가 문제시한 세 가지 죄인 간음, 살인, 배교 중에서 살인은 직접적으로 군 복무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군복무도 엄격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는 『사도전승』의 3개항에서,

“하위 계급의 군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령을 받는다면 그 명령을 수행해서도 안 되며, 서약을 해서도 안 된다. 만약 이 점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교회 회원권을 박탈한다. 무력을 가진 자나 고위층의 관복인 자줏빛 옷을 입는 위정자가 있다면 그 직에서 사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원권을 박탈한다.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예비신자나 신자가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원권을 박탈한 다.”고 썼다.

재세례파와 평화주의

재세례파 운동은 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단일한 개혁 운동이 아니라 스위스, 독일, 모라비아, 네덜란드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복수 운동(複數基源設, polygenesis)이었다.

이 중 토마스 뮌쩌와 쯔비카우의 예언자들the Prophets of Zwickau, 멜키오르파The Melchiorites, 뮌스터의 재세 례파The Munster Anabaptists, 데이비스 요리스파The Group of Davis Joris 등은 폭력을 용인했던 반면에 스위스 형제단, 모라비아의 후터파, 그리고 메노나이트파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했 다.

재세례파 그룹 중에서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로 시작된 메노나이트교회는 일 체의 물리력 행사나 폭력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는 절대평화주의를 지향했는데, 이것은 4세기 이전의 교회가 지향해 온 평화주의의 회복이라고 볼 수 있고, 또 1530년대에 있었던 폭력적 인 재세례파 운동, 곧 조지 윌리엄스가 ‘혁명적 재세례파Revolutionary Anabaptists’라고 불렀던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 C.1500-1543과 그 후예들의 폭력과 난동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메노의 첫 저술은 뮌스터 사건 이후 1536년에 쓴 『레이든의 얀의 신성모독에 대항한 완전 하고도 분명한 방법Een gantsch duydelyck ende klaer bewys … tegens … de blasphemie van Jan van Leyden』이라는 소책자였는데, 이 책을 집필하고 두 달이 지난 후 뮌스터파가 함락되었기 때문 에 이 글은 굳이 출판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이 책이 출판된 것 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627년이었다.

이 책에서 메노는, ‘검劍 철학 주창자들’의 비기독교적 인 성격을 비판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이름으로 검을 사용한 뮌스터파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뮌스터의 종말론이 낳은 폭력적인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um 운동의 불행한 결말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보다 철저한 평화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메노는 이 전부터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평화주의적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뮌스터 사건은 자신의 확신을 재확인하는 계기였다.

이런 평화 이념은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평화사상이 대두되기 3백 년 전의 일이었다.

정리하면, 재세례파 운동은 초기부터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를 중시했고, 평화주의는 복음 의 핵심이자 총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imitatio Christi’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범과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은 메노를 포함한 재세례파의 생활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였다.

메노는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에서 재세례파 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메노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범은 비전非戰이나 반전反戰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대립, 투쟁, 폭력, 무기 소 지 등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이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확신의 근거는 신약성경이었고, 신약성경은 교회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닌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메 노는 루터처럼 로마 가톨릭의 교회관에서 완전히 떠나 있었다.

평화주의 입장을 보여 주는 메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1540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기독 교 교리의 토대Dat Fundament des Christelycken leers』였다.

이 책은 신자들을 위한 일종의 교리적 지침서이며 위정자들에게 헌정되었거나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 1536과 비교된다.

메노가 국가 권력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와 국가를 구분했지만, 국가 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통치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주장 과 함께 기독교 교리의 토대는 칼의 도道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라는 점을 주장했다.

이 책을 보면 메노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영성과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 의 평화주의적 경건pacifist piety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뮌스터파의 폭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단호하게 배격하면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평화주의적인 재 세례파를 변호했다.

미국교회사학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 ASCH 회장을 역임했던 헤롤드 벤더Harold Bender, 1897-1962는 재세례파가 세 가지 이상을 추구했다고 보았다.

첫째는 기독교의 본질은 제자도에 있다고 보아 제자도를 실천했다는 점,

둘째는 교회를 세상과 분리된 고난 받는 공동 체로 규정한 점,

셋째는 새로운 윤리로서 사랑과 무저항 사상을 제시한 점이라고 했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

초기 재세례파 지도자들과 메노 시몬스에 의해 강조된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은 재세례파의 첫 신앙고백서라고 불리는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The Schleitheim Confession of Faith, 1527에서 강조되고 재확인되었다.

이 고백서에서는 3가지 질문을 하고 있는데,

첫째, 기독교인들이 선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한 자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칼을 사용할 수 있는가?

둘째, 세속적인 문제 들에 대한 논쟁과 다툼에 대해 기독교인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셋째, 기독교인이 정부의 관리로 선출되면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세 질문에 대해 각각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 고 그 근거로 예수님의 모범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철과 동으로 무장하 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곧 진리, 의, 평화, 믿음,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말 씀으로 무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정신은 재세례파의 다른 논자들에 의해서도 강조되 었다.

예컨대, 훈련된 신학자이기도 했던 독일인 후프마이어Balthasar Hubmaier, C.1480-1528는 1527년 6월 24일 『검에 관하여Von dem Schwert』를 출판한 바 있다.

제7항에 대해서는 약간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할 것도 없이 슐라이트하임 고백서의 계승이었다.

후프마 이어는 이 책을 출판하고 한 달이 지난 후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1528년 3월 10일 비엔나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와 같은 비폭력 평화주의의 이상은 그 이후 재세례파 전통 에서 거듭 강조되었고, 이로써 많은 재세례파들이 비난과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길을 걸어갔 다.

문제점

평화주의는 성경 교훈의 가장 근접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에 참여하기보다는 전쟁의 피해자가 되더라도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고상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한 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항거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의를 당하고 참는 것이 옳다.

소송과 관련 하여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고전6:7) 가르쳤다.

예수님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 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 대며”(마5:39)라고 가르치셨다.

이런 말씀에서 보면 불의한 세력에 당하는 것이 전 쟁에 이기는 것 보다 모든 이들에게 유리할 수 있다.

전쟁의 해악이 초래할 수 있는 파괴와 인명 살상 등 해악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점에서 폭력과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주의는 자기 희생적 성격이 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은,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려는 자기희생적인 노력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피해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기꺼 이 평화주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의 평화주의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통 을 경감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이웃을 위해서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는 점이다.

희생당할 아무런 이유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평화주의 확신 때문에 더 큰 희생을 당할 수가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손봉호는 이를 타자중심의 윤리라고 불렀다. 5)

5) 손봉호, 『약자중심의 윤리』 (세창출판사, 2015), 120 이하.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전투에 참가해야할 상황이고 싸 울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개인적 확신(평화주의) 때문에 집총을 거부하면 우리 쪽의 전투력은 그만큼 약해질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패전하면 나뿐 아니라 다른 이웃이나 동료나 공동체도 공통을 당하게 된다.

6.25 때 평화주의자가 많아서 전쟁 참여를 기 피하였다면 다른 모든 한국인들이 지금 북한 주민이 당하는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적ㅇ니 문제가 평화주의 원칙을 매우 난처하게 하는 질문이고, 켈수스의 비난도 이런 의 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으나 나의 확신 때문에 평화주의자가 아닌 이웃이나 동료 집단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수없이 반복된 질문이지만 여전히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평화주의 신념을 지키기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그 타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념을 지킬 것인가는 오늘 우리의 난제가 되고 있다.

2. 정당 전쟁론 (Just War) 6)

6) 이하는 이상규, 83쪽 이하에 의존하였음.

전쟁이 좋지 않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전쟁보다 나쁜 대안은 없다는 점에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 하고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전쟁은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 이다.

이사야 2장 4절,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 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는 상황은 지상에서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러 기에 플라톤Platon, 427-347 B.C.은 인류가 소멸되기 전까지는 전쟁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적인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기독교 사상가들조차도 어떤 전쟁도 반대하는 절대 평 화주의 대신 의로운 전쟁론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도덕적으로 양심의 가책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전쟁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편 가장 앞선 인물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 106-43BC였다.

그는 다음의 몇 가지 경우를 정당한 전쟁이라고 판단했다.

1. 전쟁에 참여할 유일한 정당성은 국가의 명예나 안전을 지키는 것이고,

2. 모든 협상이 실패했을 경우 이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며,

3. 상대에게 적절한 경고를 하기 위해 반드시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어야 하고,

4. 그 목적은 정복이나 세력 확장이 아니라 정의로운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5. 포로와 항복하는 모든 사람들은 보호되어야 하고,

6. 합법적인 군인만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이런 선에서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 곧 주류의 기독교회가 이 정당전쟁론을 제시했다.

물론 4세기 이후 곧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I, c. 272-337의 개종 312과 기독교의 공인313, 그리고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I의 기독교 국교화380, 392, 그 이후의 ‘역사적 상황’의 변화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역사적 상황이란 교회가 국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게 되고, 국가의 과제를 종교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상황 을 의미한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방어적 전쟁이든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든 상관없이 제국 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했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자 제국의 영토 확장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고, 초기 기독교회가 견지했던 평화주의는 퇴조 하고 그 대신 ‘정당전쟁론正當戰爭論, Just war theory’이 대두하게 된다.

무죄한 자를 방어하고, 부당한 탈취를 회복하여 정의를 보장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라면 전쟁은 정당성을 지니고, 이럴 경우 군 복무와 전쟁 참여는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제는 전쟁 자체가 문제 시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의로운 전쟁’이며 무엇이 ‘정당한 전쟁인가’가 중요한 논점이 되었 다.

이 이론을 제시한 첫 인물은 앞서 소개한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 B.C.106-43였다.

기 독교권에서는 암브로시우스Ambrosius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게 와서 정당전쟁이론 이 체계화되었고, 기독교인의 참전권參戰權은 의로운 전쟁론의 지지를 받으며 조직적으로 정당 화되었다.

이런 경향은 교회와 국가의 결속으로 볼 수 있는 기독교국가Christendom 시대의 자 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래서 캄펜하우젠은 “초기 기독교회는 평화주의적이었지만 콘스탄티누 스 대제 이후 교회는 제국을 지켜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고, 교회는 이런 책임을 회피할 수 없 었다.”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의 평화주의적 전통은 4세기 이후 ‘정당전쟁 론’으로 서서히 대치되기 시작한다.

350년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00-373는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일은 합법적이며, 칭송받을 일”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암브로 시우스Ambrosius는 “야만인들에 대항하여 고향을 지키고, 가정에서 약자를 방어하고, 약탈자로 부터 자국인을 구하는 싸움은 의로운 행위”라고 보았다.

4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평화주의 전 통은 더욱 후퇴하고 전쟁을 허용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392년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유일한 공인된 종교가 되자 교회와 제국은 협력자이자 동반자가 되었고, 군 복무나 병역兵役을 거부하 거나 제국의 이름으로 행하는 전쟁을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모든 전쟁을 옹호하게 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문제시함으로서 전쟁을 제한하고자 했다.

핵심은 그 전쟁의 동기나 원인이 정당 한가의 문제였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이 정당한 전 쟁인가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가로 대두되었다.

암브로시우스

4세기 서방교회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전쟁은 수용될 수 있다고 보는 정당전쟁론을 지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밀란의 주교가 되기 전 집정관이었던 그는 제국을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것이 신앙의 수호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당 시 아리안Arian족 등 이교 야만족들이 기독교 세계가 된 로마제국을 침략하는 것을 기독교 신 앙에 대한 모독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제국의 군사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 기 위해 구약 본문을 원용하기도 했다.

즉 블레셋과 다른 이방족속들에 대항한 이스라엘의 전 쟁을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이 점을 야만족에 대항하여 싸우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확대 적용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 정당한 전쟁으 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 전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보호하는 관점에서 허용될 수 있다.

둘째, 수도승이나 성직자들은 전쟁 행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셋째, 전쟁 행위가 정당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정당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말은 전쟁의 의 도와 목적, 원인 등이 정당해야 하며, 정당한 권위에 의해 전쟁이 선포되고 정당하게 수행되 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의 원인보다는 전쟁의 목적의 정당성을 중시했다.

전쟁이 기독 교 제국의 방어가 아니라 전쟁의 목적은 평화이어야 한다는 것이 암브로시우스의 입장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 때 와서 그리스도인의 참전 권參戰權은 정당전쟁론으로 조직적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는 전쟁을 다른 악과 마찬가지로 인간 죄의 결과로 인식하고 반대했다.

그는 지상에서의 온전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고, 완전한 평 화는 적들의 도전이 없는 천국에만 있다고 보아 지상에서의 평화는 비현실적이라고 인식했다.

지상에서의 전쟁은 불가피한데, 문제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암브로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도 전쟁의 목적은 평화의 회복이어야 하 고, 그 평화는 정의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정의가 없이는 진정한 평화가 이루 어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불의가 시정될 수 있다면 최선의 것이 지만,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그 전쟁은 정의로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세 가지 조건을 갖출 때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정당한 원인just cause이었다.

선제공격이 아닌 외부의 침략에 의한 불가피한 방어적 전쟁일 경우여야 한다.

둘째는 정당한 의도just intention였다.

전쟁의 의도가 복수나 앙갚음, 혹 은 상대편의 파멸이 아니라, 자행된 악을 제거하고 파괴된 평화를 회복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또 무죄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나 부당하게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한 경우도 의도가 정당 하다고 보았다.

셋째, 그 전쟁이 최후의 수단the last resort이어야 한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정의에 근거한 평화를 회복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곧 전 쟁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조건을 갖춘 경우의 전 쟁은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조건 외에도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의 규약을 말했는데,

첫째, 합법 적인 권위lawful authority를 지닌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어야 하고,

둘째, 비전 투요원 곧 민간인은 보호받아야 하며,

셋째, 전쟁 중에는 방화, 약탈, 학살 등을 자행해서는 안 되고, 그리고

넷째, 수도승이나 성직자들은 전쟁 행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것이 그의 전쟁 규약이었다.

정당전쟁론, 혹은 의로운 전쟁론이라고 할 때도 전쟁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 면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에도 이상과 같은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그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당한 전쟁은 승리의 가능성feasibility of victory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부가적 조건으로 제시했다.

전쟁은 불가피하게 인명 피해와 그로 인한 고 통을 수반하게 되는데, 이런 희생 이상의 선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굳이 전쟁을 해야 할 이 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이 점 또한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하게 하려는 의도 였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당전쟁론은 정당한 조건만 충족시키면 전쟁을 해도 좋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그 이상의 선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경우에만 전쟁이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당한 조건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가 능하면 전쟁을 억재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전쟁론은 절 대평화주의에서의 분명한 후퇴였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후 기독교의 비폭력적, 반전주의적 태도는 416년에 와서 완전히 전위되었다.

황제가 모든 군인들은 기독교 신자가 되 어야 한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제 군복무와 기독교 신앙은 아무런 충돌도 일으키지 않게 되었 다.

불과 1세기 만에 기독교의 입장이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이것을 레이든대학 교수였던 헤 링Gerrit Jan Heering, 1879-1955은 ‘기독교의 타락’이라고 불렀다.

이런 아퀴나스 루터나 칼빈에게로 이어지면서 서구의 주류의 기독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여 기서는 루터의 견해에 대해서만 소개하고자 한다.

루터

앞에서 지적했듯이 루터나 칼빈 등 주류의 개혁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아퀴 나스의 전통을 잇는 의로운 전쟁론 혹은 정당전쟁론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16세기적 상 황에서 약간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루터는 앞 시대의 정당전쟁론을 수용하되, 근본적으 로 국가 권력의 공권력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으로 보아 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루터는 왕이나 황제 같은 통치자가 신민을 보호하기 위한 직책을 실행할 때는 이에 복종해 야 한다고 보았고,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벌하는 전쟁은 평화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보아 이를 정당한 전쟁으로 인식했다.

즉 시민의 생명을 구하고 평화를 보존하고 방어하기 위한 방어적 전쟁은 정당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모든 평화적 수단을 강구하여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하고, 전쟁은 최후의 수단a last resort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 다.

평화적 수단을 강구한 후에 전쟁, 곧 필연의 전쟁war of necessity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은 정당전쟁론 전통에서 항상 강조되어 온 것이다.

전쟁의 범위는 악을 행한 자나 공 격자에게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본 것도 루터의 고유한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쟁과 평화 에 대한 루터의 생각은 특히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전쟁에 관하여Vom Krieg wider die Türken, 1529』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에서 루터는 군인의 직 자체를 하나님의 공직으로 보았고, 또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선제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 만,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방어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았고 이럴 경우 전쟁은 정당 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런 점에서도 루터는 이전 시기의 정당전쟁론을 수용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정당전쟁론은 루터파의 신앙고백서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신앙고백서 16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과 세속 정부에 관하여 우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즉 세상에 있는 모든 정권과 조직을 갖춘 정부와 법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제정하신 선한 질서이다.

그리스도 인들이 공직을 맡거나 재판관으로 봉사하며, 제국의 법률이나 그 밖의 법을 따라 언 도하거나, 무법자를 권세로 벌하며, 정당한 전쟁을 이끌며, 군인으로 복무하거나to engage in just wars, to serve as soldiers 소송을 하거나 사고팔고 서약하며 재산을 소유 하며 혼인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직을 맡고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하며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쟁과 같은 무력의 사용은 적법한 통치자에 의한 것이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세속 통치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통치자의 법 집행을 인정하여 전쟁에 임할 수 있으나, 일반 시민의 경우에는 어떤 경우라도 임의로 무력이나 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을 잘 보여 주는 사례가 1524년부터 그 다음해 에 걸쳐 발생했던 농민전쟁 때의 루터의 태도였다.

루터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자가 무력을 사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우, 이를 진압하기 위한 무력 동원에 찬성했다.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루터는 폭력이나 전쟁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평화주의 자도 아니었다.

이 점은 두 가지 개혁 운동, 곧 광적인 열광주의나 낙관적인 평화주의를 반대 하여 일생 동안 싸웠던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안드레아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 1486-1541, 쯔비카우의 예언자들Zwickau prophets, 그리고 토마스 뮌처와 같은 혁명주의적 영성 운동도 반대했고, 세속 정부의 법과 검을 폐지하고자 했던 광적인 재세례파나 분리주의적인 집단들과도 거리를 두고자 했다.

‘두 왕국 교리two kingdoms doctrine’는 바로 이들 집단과의 구 별을 위해 필요했다.

결국 루터는 정당전쟁론을 수용하되 국가 권력의 무력 사용을 정당한 권 위의 행사로 보아 이를 용인했다고 할 수 있다.

종합과 정리,

그 이후의 발전 이상에서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의 정당전쟁론에 대해 소개했는데, 정리하면, 전쟁은 언제 어디서나 심각한 폭력과 파괴, 그리고 인명의 살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전쟁이 없는 샬롬의 상태가 가장 좋은 현실이지만, 인류의 역사란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류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정당전쟁론에서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한 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전쟁을 향한 정의jus ad bellum’, 곧 전쟁을 수 행할 수 있는 정의를 말한다.

둘째는 ‘전쟁에서의 정의jus in bello’, 곧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정의가 그것이다.

전자는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이 무엇인가의 문제이고, 후자는 전쟁 수행 과 정에서 그 전쟁이 정의롭기 위해서 지켜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 정의로운 원인causa iusta: 전쟁을 하는 이유가 공격당한 나라를 방어하는 것과 같 이 심각한 악에 대한 정의여야 한다.

2. 국가의 권위자에 의한 전쟁legitima potestas: 전쟁이 개인이나 사적인 특정 집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합법적인 권위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어야 한다.

3. 정당한 의도recta intentio: 전쟁의 의도가 다른 나라에 대한 복수나 약탈이나 파괴 가 아니라 파괴된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4. 최후의 수단ultima ratio: 전쟁은 다른 모든 수단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최후의 수단 이어야 한다.

5. 상대적 정의relative iustitia: 전쟁 당사국은 적국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6. 승리의 가능성facultas victoriae: 전쟁은 이길 수 있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만 시행되어야 한다.

또 전쟁의 결과가 고통과 악을 능가하는 선이 도출되어야 하고,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인적 물적 손실보다 더 큰 것이어야 한다.

또 ‘전쟁에서의 정의’, 곧 전쟁 수행 중 아래의 조건을 갖추어야 그 전쟁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1. 무력 사용의 제한: 전쟁 수행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그 이상의 파과를 가져오게 하거나, 사회 간접 자본의 파괴나 잔인한 폭력, 보복, 약탈 등은 금지되어야 한다.

2. 비전투요원의 보호: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이나 비전투요원은 피해가 가지 않 도록 보호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정당전쟁론은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고 행동할 능력이 있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 는, 본래 정당전쟁론은 정당화될 수 있는 기준을 제정함으로써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쟁을 허용하는 논리로 악용되거나 폭력 사용의 합리화 를 추구하는 전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점

앞에서 제시된 정당전쟁론이 말하는 전쟁 조건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 나 대동소이한데,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위’라는 문제도 단순하지 않다.

어떤 경우를 합법 적인 권위라고 할 수 있는가?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음으로 합법적 권위라고 할 수 있고, 6.25를 일으킨 김일성의 정권도 합법적인 권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 후의 상태가 전쟁의 원인이 되는 악을 충분히 보상할 때만 정당하다는 것도 이론 적일뿐 정확하게 산정(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란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상이기 때 문에 어떤 예측이나 계산도 정확할 수 없다.

셋째,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정당 성으로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는 구실이 ‘방어적’이라는 것인데, 이런 구실은 거의 모든 전쟁이 서 이용되어 왔다.

김일성도 (미군이 남한에서 출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예상되는 위협 에 대한 방어적 전쟁이라고 주장했고, 1967년의 이스라엘 비행기가 이집트비행장을 폭격함으 로 시작된 ‘6일 전쟁’도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이 예상되는 공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방어 적 공격이라고 주장한다.

넷째, 키케로가 주장하는 정당 전쟁이론과 기독교권의 정당전쟁론의 한 가지 차이는, 키케 로는 국가의 명예와 안전을 중시하고 있으나, 기독교권의 지도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말하 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키케로는 국가의 안전과 명예를 중시했으나 기독교지도자들은 국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기독교는 이런 형식의 국가관을 수용할 수 없다.

국가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 하나의 기 구일 뿐, 그것은 신성하지도 않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애국심이라는 것도 거대한 집단 이 기주의일 수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의 민족주의도 역사 언어 문화 관습을 공유하는 종족집단 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이지 그것이 윤리적이거나 절대적 가치일 수 없다.

이 렇게 볼 때 국가의 이익이나 명예 확보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수행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들과 양심적인 시민들은 전쟁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수행할 때 이를 비판했던 야나이하라 타다오失內原 忠雄가 이런 경 우였다.

3. 거룩한 전쟁론 (The Crusade) 7)

7) 이상규, 99 이하를 참고하였음.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은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져 왔다.

‘거룩한 전쟁’이란 의미의 성 정은 전쟁 행위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이론으로서 대적과의 싸움은 신적 요구로서 신에 대 한 봉사이며 종교적 특권이자 구원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피하거나 거절해야 하 는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 목적에 의한 성스런 수단으로 간주한다.

이런 성전 개념은 구약으로 부터 도출된 개념인데, 크로스F. M. Cross, 고트발트N. W. Gottwalt, 폰 라트G. von Rad 등의 학자 들은 구약의 전쟁 기록을 ‘거룩한 전쟁milhāmāh qedhōshāh’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구약 에 보면 130건의 전쟁 기록이 있는데, 구약에서 전쟁을 뜻하는 밀하마milhāmāh라는 단어가 300회 이상 나타난다.

이런 구약의 전쟁 기록이 중세시대의 ‘거룩한 전쟁론’의 기초가 되었고, 이슬람의 지하드Zihard 사상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성전론을 뒷받침해 준 본문이 예레미야 48장 10절,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 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라는 말씀이었다.

이 본문이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를 시작으로 1291년까지 성지 탈환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 약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거였고, 이 본문에 근거하여 학살이 정당화되었 다.

이와같은 성전론이 대두하게 된 배경은 아래와 같다.

4세기 이후 이민족과 기독교 세계의 대립과 대결이 심화되면서 평화주의는 후퇴하고 의로운 전쟁론이 대두되었으나, 정당전쟁론은 이론적으로 빈번하게 왜곡되기도 했다.

야만인들이나 이슬람 세력의 호전적인 공격 앞에서 전 쟁의 정당성을 심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제국의 정복 전쟁은 이교도의 개종과 교화敎化를 위한 하나님의 일, 곧 성전聖戰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단적인 예가 590년 교 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재위 590-604의 경우였다.

그는 전쟁을 신앙 확산의 도구 로 여겼고, 기독교 신앙을 해치거나 모독하는 이민족의 행위에 대해서는 전쟁이 복수의 수단 이었다.

샤를마뉴Charlemagne, 재위 768-814는 8, 9세기 이탈리아 해안 지역을 습격하는 이슬람 교도들과 싸우는 기사들에게 ‘죽으면 천국으로 인도된다’고 가르치면서 거룩한 임무를 부여한 바 있고, 기독교적인 유럽이 계속해서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던 9, 10세기에는 의로운 전쟁 개 념이 특히 이교도들과의 전쟁 개념과 결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 레오 4세Leo Ⅳ, 재위 847-855와 요하네스 8세Johannes VIII, 재위 872-882는 이슬람 아랍인이나 노르만족과 같은 이교도 들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자들은 영생을 얻으리라 약속했다.

이교도와의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간주한 또 한 사람의 교황이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C.1015-1085 재위 1073-1085 였다.

이른바 서임권투쟁敍任權鬪爭, Investiture Controversy을 통해 교황의 권위를 신장한 그는 이교도와의 전쟁을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는 데 불가피한 정당한 조치로 이해했다.

1050년부터 스페인에서 시작된 재정복전쟁Reconquista도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성전聖戰, 곧 거 룩한 전쟁으로 간주되었다.

십자군 전쟁에 앞서 벌어진 1071년의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 으로서 십자군 전쟁의 전초전으로 불리고 있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Seljuq Turk군 5만 명과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동로마제국의 20만 대군이 만지케르트, 곧 지금의 터키 동부 말라즈기르트Malazgirt에서 벌인 전투로, 이때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가 승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는 포로로 잡혀가는 굴욕을 당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셀주크 투르크는 서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 전쟁은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를 가 져오게 된다.

십자군 전쟁(1095-1291)

만지케르트 전투로부터 꼭 25년 후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대표적인 성전이었다.

이 전쟁 에서 성전 개념이 구체적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에서 53세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1042-1099는 십자군 원정 을 선포했다.

10세기 이래 세력을 확대한 이슬람 세력 셀주크 투르크족이 비잔티움 제국을 압 박하고 1077년에는 기독교의 주된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박해 하자,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 재임 1081-1118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유럽 군주와 제후들을 향해 성지聖地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했다.

이때 그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고 외치 면서 호응했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하면 속죄받기 위해 하는 고행苦行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 속했다.

전대사全大赦, indulgentiae plenariae를 선포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육지에서 나 해상에서 이교도들과 싸우다가 죽은 모든 이들에게는 전대사가 주어질 것입니다. 나는 하 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으로 전쟁에서 죽은 모든 이들에게 모든 죄의 사면을 허락할 것입 니다.”

교황만이 아니라 ‘유럽의 양심’으로 불리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드St. Bernard de Clairvaux, 1090 –1153도 성전에의 참여는 수도사가 되는 것 이상으로 보람된 일이라며 참여를 호소했고, 모병 募兵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096년 8월 대규모의 다국적 군대가 결성되어 예루살렘으로 출 발했다.

이때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들을 ‘십자가의 전사들’이란 의미로 ‘크로케시그나티crocesignati’, 곧 십자군Crusade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쟁 은 1096년의 제1차 십자군을 시작으로 이후 여덟 차례에 걸쳐 1291년까지 200여 년 동안 지 속되었고, 유럽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637년 이래로 악한 이민족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은 기실 살인과 약탈 등의 거대한 폭력이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 같은 이는 전쟁을 통한 문제 해결 자체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의 목 소리는 군중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이슬람이나 이교도들로부터 기독교를 지키는 것은 거룩한 소명이며 이를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통제되지 않는 잔인한 폭력과 살상이 자행되었다.

한 가지 사례를 말한다면,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제1차 십자군은 사흘 동안에 3만 명을 살육했다.

‘성스러움聖’을 ‘전쟁戰’에 더하면 전쟁이 정당성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폭력이나 살인에 무감각하게 되어 더욱 잔혹하 게 된다.

그렇게 십자군 전쟁은 잔인한 폭력을 정당화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은 가장 추악한 포력과 살상의 원인이었다.

여러 전쟁과 그 폐해를 경험한 11세기 프랑스에서, 그리고 후에는 독일에서 ‘하나님의 평화 pax Dei, Peace of God’와 ‘하나님의 휴전treuga Dei, Truce of God’ 운동을 펼쳐졌지만, 성전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는 무력했다. ‘하나님의 평화’란 전쟁에서 제외되어야 할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전쟁에 가담하는 자들을 제한하려는 운동이었다. ‘하나님의 휴전treuga Dei’이란 1027년 프랑스 툴루스Toulouges에서 모인 툴루스 공의회에서 정한 규정으로서 군사 작전 혹은 군사 활동 기간을 제한하는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토요일 저 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후에는 주현절부터 승천기념일까지, 그 리고 사순절에서 성령강림절 이후 8일까지, 그리고 매 주일과 금요일에는 전쟁을 피하고 휴전 해야 한다는 그런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이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십 자군에 가담하는 이들은 실제로 자신을 칼을 휘두르는 거룩한 ‘하나님의 전사milites Dei’ 혹은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로 인식했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칼을 맞고 희생된 자가 순교 자였으나, 이제는 칼을 써서 사람을 죽인 자가 순교자로 추앙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제점

앞에서 보았듯이 성전론은

첫째, 인간(개인이나 집단)의 뜻을 신의 뜻으로 동일시할 위험이 있다.

자기는 의롭고 상대는 악하다고 간주하고 이의 척결을 신의 뜻으로 동일시한다.

둘째, 신의 이름을 빙자한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 행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파괴, 인명 살상을 정당화 하고 이를 신을 위한 분투奮鬪로 간주한다.

셋째, 이런 이념 때문에 전쟁은 잔인하게 수행된 다.

성전론은 이것 아니면 저것 흑백논리를 따라 적을 신에 대한 원수로 간주되어 가차 없이 제거하되 극단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극단적인 이슬람 세력이나 최근 아프카니스탄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

살인 학살 처형 등은 전쟁 행위는 성스러운 수단일 뿐이다.

맺는말

이상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 전통의 3가지 유형의 주장에 대해 검토하였다.

각각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고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후 첫 300년간은 평화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4세기 이후 정당전쟁론으로 대치되었고, 중세 교회에 서는 거룩한 전쟁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다시 평화주의가 제시되기도 했으나 주 류의 기독교회는 정당전쟁론 전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에는 전쟁은 현실적으 로 불가피하다는 현실주의 war realism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정당전쟁론은 16세기 종교개혁자 들에게도 계승되어 가톨릭뿐 아니라 주류 개신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현대 평화사상에까지 영 향을 끼쳤다.

즉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를 거쳐, 루터Martin Luther, 칼빈 Jean Calvin,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폴 렘지Paul Ramsey로 이어 오면서 주류 교 회의 전쟁론으로 발전되었다.

즉 이들은 악에 대항하고, 약자를 보호하고, 적의 공격에 대한 정당방위로서의 방어적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라는 입장에서 거의 일치하였다.

물론 이런 중세의 큰 흐름 가운데서도 병역 거부나 비폭력, 반전 평화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4세기 투르의 마르틴Martin of Tours, C.316-397, 로마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 된 11세기 카다리파Catharie나 12세기 왈도파Waldenses도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대체적으로 소 小종파 기독교 집단이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이탈리아 동북부 지역인 파두아의 마르실리오 Marsilio of Padua, C.1275-1342 또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1324년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 Defender of the Peace』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사회 통합 요소는 교회가 아니라 국가라고 보았고, 세속 군주의 기능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아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또 종교 문제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강제력 사용을 반대하였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에 근거한 경우에’ 국가 권력을 통해 이단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하여 이단 박멸을 위한 국가 권력 의 무력 행사를 정당화한 이론Compelle intrare을 반대한 것이다.

마르실리오는 평화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교황우선주의Curialism를 반대하고 교회 회의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월하다고 주 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14세기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도 평화를 중시하여 전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가르쳤으나, 전쟁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민중을 계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평화지향적이였으나 절대평화 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보헤미아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Jan Hus, C.1372-1415의 후예인 후스파 Hussite에는 얀 지슈카Jan Ziska, C.1360-1424)와 같은 전투적 지도자가 있었는가 하면 평화주의를 지향한 이들도 있었는데, 그러한 인물이 페트르 폰 첼시츠키P. von Chelcicky, C.1390-C.1460였다.

이들 외에도 아탈리아의 위대한 문인 단테Dante, 1265-1321,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피에르 드보 와Pierre Dubois, C.1255-C.1321 같은 평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중세 주류 기독교는 정당전쟁론 혹 은 성전론을 근거로 전쟁을 수용했으나 소종파 혹은 소수의 인물들에 의해 초기 기독교의 평 화주의가 미약하지만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중세의 긴 역사를 견디며 평화의 이상을 이어 왔 다.

문제는 앞에서 제기한 3가지 이론은 전쟁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지 못하고 그것이 전 쟁을 억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쟁은 너무 악하고 그 결과가 영속적인 고통이라는 점에서 그대로 둘 수도 없지만, 동시에 복잡한 이해과계와 국제질서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어 떤 것으로도 전쟁을 억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면서 가능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가능한 정의롭게 수행되어 희생과 고통을 줄이고 전쟁이 가능한 속히 끝 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방 지하고 전쟁 억지력을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Peacemaker은 복이 있다고 하셨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마5: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학술원 공개강연회 원고 (2023.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