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머리말
2. 의병부대의 의료 실태
3. 한의사의 의병전쟁 참여유형
4. 의병의 독립군 전환과 安鍾奭
5. 맺음말
초 록
한말의 의병부대에는 이동생활에 따른 질병과 전 투로 인한 부상 등 필연적으로 부상・병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병자의 치료는 전투력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논문은 한말 의병부대의 의료행 위와 한의사들의 의병 참여양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의진 내 에서 부상・병자를 치료하는 방식은 자체 치료, 은신 치료, 귀가 등이 있었다.
자체 치료는 대체로 간단한 응급조치에 그쳤을 것이다.
한 의약 지식이 있는 유학자(儒醫)들이 의진 내에서 치료하는 경우이다.
거동이 불편한 질병・부상자는 마을에 은신 치료 하거나 귀가하여 치료하였다.
이러한 방식이 보다 일반적이 었을 것이다.
따라서 의진 내에 ‘軍醫’ 등 별도의 부서를 두 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한말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의사들도 의병전쟁에 참여하였 다.
한의사들의 의병 참여는 중기의병 당시부터 확인되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의 후기의병에는 국내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한의사들은 의병장으로 거의하거나, 의진의 주요 참모로 활동하였다.
식자층이었으므로 의진내에서 주요한 직 책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업하지 않은 儒醫로서 의진 내에서 의료행위를 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확인되 는 수보다 훨씬 더 많은 한의사들이 의병전쟁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의사 의병도 경술국치 이후 만주지역을 중 심으로 독립군으로 전환해 갔다.
이는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 환한 일반적인 양상과 괘를 같이 하는 것이다.
주제어 : 의병부대, 의료행위, 한의사, 군의(軍醫), 유의(儒醫)
1. 머리말
한말 의병전쟁에 대해서는 종래 많은 연구가 있었다. 연구의 주제는 주로 특정한 의진이나 의병장, 또는 일정한 지역의 의병 활동, 의병장의 사상 등이다. 또한 의병 참여층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을 시도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1)
그 결과 농민, 상인, 임노동 층, 화적, 활빈당, 포군, 해산군인 등 다양한 계층·직업의 의병 참여가 밝혀졌다.
반면 특정한 직업이나 신분층의 의병참여를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포군과 농민층의 의병참여를 다룬 연구가 있는 정도이다.2)
이러한 분야의 연구가 소략한 이유는 자료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한말의 의병부대에는 이동생활에 따른 질병과 전투로 인한 부 상 등 필연적으로 부상·병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 병자의 치료는 전투력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 었다.
이는 어느 의병부대에나 공통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 나 지금까지 의병부대 내의 의료행위를 다룬 연구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의병사뿐 아니라 한의학사 분야에서도 관련연구를 찾 아볼 수 없다.
의병부대의 의료행위에는 한의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서양의 학을 익힌 洋醫들이 의병에 참여하는 경우는 없었다. 포군이 의병부대의 실제적인 무력기반이었던 것처럼, 한의사는 전투력의 유지라는 의진 내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렇듯 의병전쟁 당시 의료가 한의사에 의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의사들의 의병참여를 다룬 연구도 전무하다. 3)
의병부대의 의료실태에 대한 연구는 한말 의병전쟁과 의병부 대 내부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의병 참여층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한의사 의 의병참여 양상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의병부대의 의료실태를 밝히고 한의사라는 특정 직업인들이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한 양상을 제시하려한 것이다. 4)
다만 특정의진이 아닌 의병 활동 전반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모든 창의록, 일제측 기록 등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5) 특히 자료 상의 한계로 의병부대의 의료 행위 자체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부분이 아쉽 다.
의병의 자체기록인 창의록 등에서 구체적인 의료행위 관련 서술을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다.
2. 의병부대의 의료 실태
가. 한말 한의약사의 존재양태
조선시대 의원은 중앙 및 지방 기관에 배치된 醫官, 민간에서 진찰뿐만 아니라 약재도 같이 취급하였던 개업의, 의업을 직업 으로 삼지 않지만 의학적 소양을 갖추며 가족이나 친지들을 상 대로 의료행위를 한 儒醫 등 여러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신분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직업군으로서의 동질성이나 정체성 은 없었다.
근대 이전 민간의 한의학 전승은 주로 도제식 교육이나 독학 에 의존하였다.
의사의 자격을 규정하는 국가 차원의 면허제도 가 없었기 때문에 민간의 의료영업 역시 자유방임 상태에 놓여 있었다. 6)
이처럼 전문성과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한의학은 한말에 이르러 제도화된 근대 서양의학이 유입된 이후 그 문제 점이 더욱 부각되었다.
한말의 언론은 돌팔이(庸醫) 현상에 대해 의술을 중요시하지 않던 사회적 풍조, 그리고 면허제도와 표준화된 공식 의학교육 의 부재를 주된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면허제도와 정규의학교육 실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7)
갑오개혁 이후 조선정부는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서양의학 을 수용하고 기존의 왕도정치 이념에 입각한 三醫司체제를 완전히 해체시키고 인구관리를 위한 근대적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 기 시작하였다.
이 작업은 이후 광무정권이 계승하여 지속되었 다.
이렇게 구축된 보건의료체계는 위생국과 경찰 등의 행정체 제, 콜레라 방역체계, 의학교, 병원, 종두사업, 환경위생사업, 의 약관리 등의 내용을 포괄하였다.8)
의료인 자격 즉 면허와 관련하여 대한제국은 1900년 1월 내부 령 제27호로 의사규칙, 약제사규칙, 약종상으로 나누어 각각의 자격요건과 인허절차, 진료행위를 규정하였다.9)
서양의학에 입 각했지만 한의사도 공식적인 의사로 인정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서양의학 확대 보급을 지향했지만 한의학을 배제하지 않고 동서 절충을 모색하였다. 10)
기존의 의료활동자 중 위생국 주관 의술 개업시험에 합격한 자에 대해 시술인허장을 부여한다는 유예조 항을 두었다.
한의약업 종사자를 고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실제 는 실시되지 못해 종전대로 자유롭게 개업하였다. 11)
대한제국시기 광제원은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로 나누어 병존 체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는 광제원을 서양의학병원으로 전환하여 1906년 의학교, 적십자병원과 함께 대한의원으로 통합하였다.
통감부는 동서의학 병존방침을 부정하고 광제원을 재편하여 서양의학 중심 정책을 폈다.
서양의학은 일제가 내세우는 ‘문명의 이로움’을 보여주는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철저히 서양의학 중심체제를 유지하였으며 1913년 11월 “의생규칙”이 반포되기 전까지 한의사에게 의료 면 허는 없었다.
통감부는 1908년 이후 양약을 중심으로 의약업에 대한 단속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한의사에게 면허가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 에 기존의 한의약 종사자들도 단속 대상에 포함되었다.
당국의 단속 조치는 한의사들 사이에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한말부터 한의학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제기된 상황에 이러한 조치는 위 기의식을 강화시켰다. 12)
한의학이 의료체계에서 주변화됨에 따 라 한의사들의 위기의식이 커져갔던 것이다, 13)
나. 의병부대의 의료방식
전투과정에서의 총상은 물론이고 풍찬노숙에 따른 여러 질병 등은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부상 (질병) 장병에 대한 의료행위는 매우 중요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 다.
의병부대에서 부상병의 치료행위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 졌을까?
현재 남아있는 창의록 등의 기록에 구체적인 의료행위 가 나타나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단편적으로 확인되는 기사를 토 대로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첫째, 의진 내에서 자체적으로 치료하였다.
의진에 의료전담 인력이 편성되지는 않았지만, 한의학적 소양을 가진 유생이 치료하는 것이다.
당시 개업을 하여 醫業을 생계 로 삼는 醫員(醫師)은 아니지만 한의학적 소양이나 의술을 익힌 유학자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영남유림의 계보를 잇는 유림 중 한사람으로 이후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던 郭鍾錫은 동의보감을 전부 암기했다고 한다. 14)
이와 같이 의술을 익힌 유학자가 의 진에 포함되어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후술하듯이 중기의병 이후 에는 유생 신분의 의사 즉 儒醫로서 의병부대에 참여하는 사례가 확인되는데 전기의병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을 것이다.
따라서 특 별히 軍醫 등의 직제를 두지는 않았지만 부상당한 병사를 자체적 으로 치료하는 것이 가능했다.
의진 내에서 자체적으로 약을 지 어 치료하는 경우로 전해산의진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가 확인된 다.
전해산의진의 경우 민간에서 약재를 지원받기도 하였다. 15)
군사를 거느리고 뒷산 기슭에 있는 梁씨의 재실로 들어가 밤을 따서 실컷 먹으며 약을 끓여 군사를 조리시켰다. 16)
이튿날 30일 壬子. 약을 지어 군사를 치료시키고 밤에 행 군하여 柳汀에서 유숙했다. 17)
(전략) 이날 밤에 전막 마을에서 나온 것과 진사범의 의연 금 백 냥을 가지고서 군비를 지출했다.
여러 군사로 하여 금 줄대어 파수를 보게 하고 보약을 지어 달여 먹었다. 18)
이석용의진의 경우에도 자체적으로 한약을 처방하여 진료하였 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면 이석용의병장 자신이 약을 제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일 丁未. (중간 불명) 洞山房에서 심신이 불안하여 枸杞 子湯에 인삼을 합해서 달여 먹었다. 19)
글을 보면서 약을 만들었는데, 이윽고 총소리가 나며 탄환 이 문 앞에 떨어지므로 마침내 몸을 날려 뛰어나갔다. 20)
둘째 留陣하는 지방 또는 민가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유인석의진의 소모장이었던 서상렬은 낙마하여 팔에 부상을 당하자 시관에 머무르며 치료하였다. 21)
김하락의진의 경우 좌선 봉장 이상태가 총상을 입자 주점에서 치료하였다. (전략)
達城店에 당도하니, 여러 장졸이 먼저 이 주점에 당도하였는데, 좌선봉 이상태는 바른 어깨가 총에 맞아 누 웠기로, 곧 약을 붙이고 치료하게 하였다. 22)
이강년의병장은 용소동전투에서 오른손과 뺨에 부상을 당하자 청풍, 단양 등지에 머무르며 치료하였다.23)
산남의진의 이규한 은 1908년 전투 중 중상을 당하자 다음과 같이 가까운 지역에 은신하여 치료하였다.
李圭桓 (중략) 至廣川戰하야 右肱에 中敵彈하고 得同志之 捄護而至巨洞元士文家하야 治療三月而蘇生하야 歸故鄕하 야 率妻子客於滿洲하다. 24)
산남의진 정환직의병장은 병으로 민간에 은신하여 치료하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金泰煥 (중략) 奉東广公療養於民間하고 求彈丸之事로 各其 出他之間에 大將이 被害하야25)
1909년 전해산의진의 선봉장 정원집이 고막원의 일본군 병참 을 공격하다 총상을 당하자 민가로 메고 가서 치료했으나 10여 일 만에 순국하였다. 26)
셋째, 병사의 고향 또는 집으로 돌려보내 치료하는 것이다.
전기의병 유인석의진의 경우 부상당한 민병, 포병 등은 집으 로 돌려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부상병에게 특별위로금을 지급하 기도 하였다.
다음의 기사는 위로금 지급을 언급한 내용이지만 귀가 치료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본읍(제천) 九眉에 사는 劉在元이 민병으로 충주에 갔다가 상처를 입고 돌아와서 병이 들고 또 굶주린다고 급한 사 정을 알림으로 守城將에게 명하여 벼 1섬을 주게 하고, 西 面 鄭己福에게도 같이 주게 하였다.[그때 부상당한 포병민병으로 구제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 27)
이강년의진의 경우 1907년 8월 죽령전투에서
“군사 朴興彔이 탄환에 맞았으므로 들것에 메어 獐項으로 돌아가 치료하게 하였 다”고28) 한다.
정용기, 정환직의 산남의진에는 후술하듯이 軍醫가 편성되어 있었지만 중상을 당한 경우에 귀가하여 치료하는 경우가 많았다.
孫永珏이 以病歸家하고 薦李亨杓而 未幾에 亨杓亦重傷而 歸之하다. 29) 皇甫覲 (중략) 立巖之敗에 重傷而歸하야 不復入陣하고 後 被執於敵하야(하략) 30) 池龍伊 (중략) 入陣爲左翼하고 與敵交鋒타가 重傷而歸하야 不復入陣하고 後에 避身於市하다. 31)
소규모 의진으로 일본군과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하던 후기의 병에 이르러서는 기동성이 요구되었으므로 부상병의 치료문제는 의병진영의 큰 고민거리였다.
1908년 의병을 면담한 바 있었던 맥켄지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날은 밤새도록 의병들이 이 도시로 1명, 2명씩 찾아 들 었다. 일본군과의 접전에서 후퇴를 했던 부상병들이 동료들에게 부축을 받아가며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몇 명의 의 병은 다음날 아침 일찌기 나를 찾아와 부상병을 치료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는 숙소에서 나가 그들의 부 상을 조사해 보았다. 한 부상병은 몸에 5발의 총탄을 맞았 으면서도 표정은 조금도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 닌 기쁜 빛이었다. 다른 2사람은 1발의 총탄을 맞긴 했지 만 퍽 더 위험스러운 부상이었다.(하략) 32)
일반적으로 의진 내의 질병ㆍ부상자는 귀가 또는 은신하여 치 료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총상 등은 외과적 조 치가 필요하여 의진 내에서의 치료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기 때 문이다.
특히 기동성이 요구되었던 후기의병의 경우 더욱 그러 했다.
의진 내에 한의사가 있는 경우 1차적으로 의진 내 자체치 료가 실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과적 치료가 어려운 경우 위 산남의진의 사례에서 보듯이 귀가 또는 은신치료할 수밖에 없었 다.
의진 내에서 자체치료한 경우에도 구체적인 치료과정을 보 여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 의병부대의 의료 직제화
전기의병 당시의 의병부대에 의료관련 직제는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의병의 가장 대표적인 의진이었던 柳 麟錫의진(湖左義陣)의 경우 직책만해도 52종이었고 직임을 담당 한 인물은 93명에 달했으나 의료관련 직책은 없었다. 33)
의진의 규모가 크고 관군과의 전투가 상시적이지 않았던 전기의병에서 軍醫가 의병부대의 직제로 편성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중기의병의 경우 정용기가 이끈 山南義陣에 다음과 같이 ‘軍 醫’가 부상병을 치료한 기록이 나타난다.
李景久召募於安德等地라가 被圍於敵而中丸 使鄭純基李世 起로 逼之하니 敵이 走入靑松邑하다 翌日에 使軍醫로 療 景久傷處而送之曰 士死於義면 何恨之有리요하다. 34)
左營將 李景久가 총상을 입자 군의로 하여금 상처를 치료하고 귀가시켰다는 것이다.
산남의진에 군의가 편제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용기의병장의 부친인 정환직이 궁내부 太醫院 醫 員을 역임했으므로35) 의료에 보다 민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사례이며 중기의병뿐 아니라 일본군과 수 시로 유격전을 벌인 후기의병의 경우에도 군제에 군의가 편성되 는 경우는 드물었다.
확인되는 한두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07년 봄 전남 능주에서 梁會一을 맹주로 하여 湖南倡義所가 조직되었다. 의진이 와해되자 1908년 초 李白來가 다시 호남창 의소를 재거의하였다. 재거의 당시의 부서는 이백래를 도대장으 로 하여 선봉-중군-후군의 전형적인 체제이면서도 파발도통장 등 특수한 부서를 두었다. 특히 主醫 1명과 從醫 2명을 두어 의 사를 정식으로 군제에 포함하고 있었다. 36)
의료관련 인원이 3명에 달했다는 것은 군사력의 유지에 그만큼 많은 신경을 기울였 다는 방증이라고 하겠다.
1908년 연해주에서는 이범윤과 최재형이 倡義會 또는 同義會 를 조직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37) 1908년 국내 진공 당시 동의회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38)
都營將 全濟益 參謀長 吳乃凡
參謀 張鳳漢, 池云京 軍醫 미국에서 돌아온 某, 후에 일본병에 체포되어 회령에서 총살되었음39)
兵器部長 金大連 同 副長 崔英基(御衛長) 經理部長 姜議官 동
副長 白圭三
左營將 嚴仁燮
제1중대장 김모
제2중대장 李京化
제3중대장 崔化春
右營將 安重根
중대장 3인 위와 같이 동의회에는 軍醫가 정식 직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의진에 편성된 군의가 어떠한 의료행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후기의병의 의병편제에 군의가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 상은 아니었다.
軍醫가 직제화되지 않은 것은 한의사 충원의 어 려움도 있었겠지만, 마을 은신치료나 귀가 치료 등이 일반적이 었기 때문일 수 있다.
3. 한의사의 의병전쟁 참여유형
의병 참가계층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1907∼1911년간 의병 재판기록에 근거한 연구에 의하면 한의사 의 의병 참여비중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재판을 받은 890명 중 직업이 ‘醫員’으로 기재된 경우는 5건이다. 40)
0.5%에 불과하 다.
그러나 ‘醫員’으로 기재되지 않은 儒醫 등을 고려하면 이보 다 더 많았을 것이다. 참여인원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한의사는 의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에서 한의 사의 의병참여 양상을 살펴본다
가. 한의사 의병장의 활동41)
1) 金東臣義兵將42)
김동신은 충남 懷德郡 炭洞面 德津洞 출신으로 1908년 당시 37세 였다.
일제에 체포된 후 작성된 청취서에 “職業은 醫也”라 고43) 한 것으로 보아 개업한 의원으로 보인다. 44)
신분은 중인이 었다.45)
1906년 음력 3월경 閔宗植의병장과 거의를 논의하였으 며 이 과정에서 민종식으로부터 承旨의 사령장을 받았다. 그는 승지를 표방하며 지리산 주변의 각 군읍을 돌며 군사를 모집하 였다.
1907년 음력 8월 高光洵, 奇參衍과 공모하여 內藏山 白羊 寺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지리산의 사찰을 근거지로 삼아 전남 곡성, 장성, 구례, 전북 남원, 순창, 정읍, 무주, 장수, 경남 안의, 함양, 지례, 거창 지에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김동신은 三南義兵都大將으로 불 리기도 했다. 김동신의병부대는 의병을 빙자하여 민간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가짜 의병을 퇴치, 처단함으로써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1907년∼ 1908년 전북과 경남 일대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격전을 벌였다. 김동신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했다가 6월 6일 체포되었 다. 재판결과 종신 유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풀려났다.
2) 徐丙熙義兵將
서병희는 경남 梁山郡 中北面 左壽洞 출신으로 1909년 당시 43세였으니 1867년생으로 추정된다.
향리인 경남 양산에서 한의 업을 경영하였다. 46) 신분은 알 수 없지만 개업의였던 것으로 보 인다. 1907년 음력 2월 “賣官運動을 위해” 서울에 왔다고 한다.
‘賣官運動’은 일제의 악의적인 표현이겠으나 서울에서 광무황제 가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등 국권이 상실되는 과정을 보며 항일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1907년 음력 10월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許蔿의진에 참여 하여 음력 11월까지 활동했다. 그가 허위의진에서 “陰謀團 同士 의 結合에 奔走”했다는 것으로 보아 허위가 주도한 ‘13道倡義大 陣所’의 서울 진공작전을 위한 의진간 연락 등에 종사했을 가능 성도 있다.
1907년 음력 12월 28일 경상도 방면에서 활동하라는 허위의 지시로 해산병 5명과 함께 서울을 떠나 경상도로 이동했 다.
이때는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직후이므로 허위의진이 전열 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서병희는 자신의 근거지인 경상도에서 활 동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경북 경주군 산내면에 웅거하던 尹政儀의진에 합류하여 활동 하다가 이듬해 1908년 음력 5월 윤정의 의병장과 분리하였다. 동년 음력 8월 경남 山淸郡 德山에 있는 朴東儀의진의 部將이 되었다.
음력 9월부터는 박동의 의병장의 副將인 李學魯의 饗官 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의병장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서병희의진의 편제는 실전 위주로 편성되었다.
소모, 도포, 파 수, 연습장의 필수 직제만으로 축소하고 부대는 1, 2, 3哨로 편 성하여 각기 什長이 지휘하도록 하였다.47)
유격전에 적합하도록 부대를 소대급의 단위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편성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유생 중심이 아니라 평민 중심으로 편성된 의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48)
활동 영역이 양산, 경주, 산청, 함안, 합천, 칠원, 창원, 진주, 의령, 고성 등 경남의 전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서병희 의병장은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남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 전을 벌였다.
일본군과의 교전은 주로 1908년에 집중되었다. 49)
1909년에 들면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일 본인 처단, 일본 상인배척 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일본 상인 처단활동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서병희 의병장은 일본 상인에 게 보내는 격문을 배포하는 등50) 전통 상권을 침탈하며 경제적 침략에 앞장서는 일본 상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그가 상인으로 변장하여 은신하려 했다는 사실에서 상인적 생활 에 익숙했을 것이며 따라서 일본 상인의 경제 침략에도 민감했 음을 알 수 있다.
한인에 대한 군자금 모집은 현금을 소지할 뿐 아니라 백성들의 수탈에 앞장서는 公錢領收員에 집중되었다.51)
서병희의진이 일제 헌병 경찰의 끈질긴 추격에도 경남 일대에 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서병희의 뛰어난 전술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위기에 빠지면 무기를 땅 속에 묻 어서 감추고 부하를 해산하였다.
자신과 부하들도 양민으로 가 장하거나 시장 상인으로 行商을 경영하며 은신하였다.
1909년 음 6월 20일경 漆原주재소를 습격하고 동지 상인 內 田 등을 살상한 서병희의진의 李斗湖는 귀로에 여곡리 최성옥 의 집에 무기를 은닉하였고, 이운오는 수합한 군자금을 분배받 아 의복을 사서 은신하였다.
또한 귀순을 가장했다가 다시 의 병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의진의 執事 였던 경남 산청군 거주 李云五는 하동수비대에 자수하여 산청 군수가 수여한 監視人銘心書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서병희의진에 참여하여 칠원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다 체포되었 다. 52)
그의 아들 徐斗成도 부친을 따라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 1908년 7월 13일 경남 양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피살되었다. 53)
次知로 있던 김성렬은 의진이 신반시장에서 일본인 상점을 습격할 당시 일본인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경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일 본군의 수색과 추적은 날로 가중되어 갔다.
결국 그의 의진은 1909년 음력 10월 10일 함안군 칠원 부곡리의 민가에 화승총 10정, 양총 2정, 거총 1정, 도 1진, 및 의류 등을 은닉하고 잠행에 들 어갔다.
그는 商人으로 변장하고 단독으로 김해군 등을 돌아다니 며 지방의 동향을 살폈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은닉했 던 총기가 모두 압수 당하고 부하 3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알 게 되었다. 그도 경남 昌原府 內西面 斜栗里에서 魚類商을 경영하 면서 일시 은신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주민의 신고로 12월 11일 구 마산주재소 순사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54)
이후 순국했을 것으 로 보이나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3) 徐鍾採義兵將
서종채는 전북 茂長郡 二東面 白羊里 출신으로 직업은 ‘針醫’ 였다. 55)
일제측 기록에는 徐應五로 많이 나온다.
1907년 음력 9 월 奇參衍의진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李大局의병장의 선봉장56)이 되었다.
1908년에는 의병장으로 독자의진을 이끌었다.
2백여 명 의 의병을 인솔하고 전남 담양, 함평, 전북 고창, 무장, 부안군 등에서 활동하였다.
함평의 秋月山, 무장의 高城山 등지에서 일 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 후 1909∼1910년 부안군 변산의 幸智島를 근거지로57) 도서지방을 중심으 로 해상과 육상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일제는 그를 “海賊的 匪 徒의 首魁”라고58) 칭하였다.
친일행위자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며 1913년까지 전북 고부, 무장, 부안 등지에서 지속적으 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13년 10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 역을 받았다. 그는 1907년부터 1913년까지 도서지방에서 장기간 의병항쟁을 지속한 의병장으로 주목된다.
4) 元逸常義兵將
원일상은 함남 北靑郡 陽坪社 甘土隅 사람이다.
1909년 당시 61세의 고령이었다.
재판 판결문에 직업이 ‘醫業’으로 기재된 것 으로 보아59) 개업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을 규합하여 함남 利原, 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3월 하순경 高翊奎 외 8명의 의병과 같이 무기를 소 지하고 利原郡 遮湖里에서 張高山과 그 동생을 결박하고 금전을 내놓으라고 위협하여 돈 1만 냥을 내겠다는 수표(가액이 1만 냥) 1장을 강탈하였다.
동년 3월 하순경 동도 甲山郡 陵口面 湖洞에서 高雲鶴 이란 자가 부정당한 행위가 있다는 풍설을 동리 사람에게 듣고 부하 의병을 시켜 이곳에서 고운학을 총살하였다.
그런데 이 고운학은 車道善의진의 부장 高云鶴으로 추정된다.
고운학은 차도선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1908년 3월 초 일본군에 귀순했다. 60)
원일상의 판결문에는 고운학이 “부정당한 행위가 있다는 풍설을 동리 사람 에게 듣고” 고운학을 살해했다고 한다. 여기서 ‘부정당한 행위’가 일본군에 귀순한 행위를 지칭한 것일 개연성이 크다.
살해 시점 이 귀순 직후인 1908년 3월 하순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원일상과 함께 활동한 고익규는 1907년 음력 12월 劉基雲의진 에 참여하여 4백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독립하였다.
이후 원일상과 뜻을 함께 하여 이원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 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61)
원일상은 1909년 9월 30일 대심 원에서 교형이 확정되어 10월 21일 교형 순국하였다. 62)
고익규 역시 1909년 3월 30일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63)
5) 朴樑來
경북 안동군 출신으로 1906년 당시 42세였으므로 1865년경 출생하였다.
판결문에 직업이 ‘醫業’으로 기재되었다.64)
떠돌이 의사로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65)
고종황제의 別入侍였던 그 는 1905년 참정대신 한규설의 친필서한을 받고 거의를 도모하였 다.66)
1906년 음력 3월 평북 龍川의 全德元의 집에 平安道儒約 所를 설립하고 賣國賊 처단을 계획하였다.
이후 민종식의 홍주 의진에 참가하기 위해 무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하였으나 홍주의 진이 패전하여 합류하지 못하였다. 이후 抗疏운동을 위해 통문 을 각지에 발송하고 강계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06년 12월 종신유형을 받았으나 15년으로 감형되 어 전남 莞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2월에 석방되었다. 67)
나. 의병진의 주요 간부 활동
1) 최익현의진의 참모 魯炳憙
중기의병에서는 魯炳憙의 사례가 확인된다.
노병희는 宮內府 太醫院 醫官이었다.
1902년 惠民院 主事에 임명되었다.
1903년 9월 6품 承訓郞에 서임된 후 英親王을 치료한 공으로 11월 4일 정3품 通政大夫 太醫院 兼 典醫에 임명되었다. 68)
1904년 11월 고종황제의 後宮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체포되기도 했다.69)
1850년생으로 1888년부터 1893년까지 최익현의 문하에 서 수학했다고 한다. 70)
1906년 최익현이 전남 태인에서 거사할 때 참여하였다.
이해 4월 최익현이 군사를 거느리고 임병찬과 합류하기 위해 泰仁으로 올 때 고석진 등과 함께 宗聖里에서 최 익현의진을 마중하였다. 71)
6월 최익현의진이 태인 武城書院에서 거의하여 정읍, 순창을 거쳐 남원으로 향할 때 참여하였다.
의진 의 醫官으로 활약했다고 하나72), 정식 직제로서 군의 또는 의관 이 편제되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최익현이 의진을 해 산하고 대마도로 유배되어 병이 들자 의사의 자격으로 대마도에 가서 최익현을 치료했다.
최익현이 순국한 이후에는 護喪으로 유해의 국내 송환에 기여했다.73)
2) 노응규, 이은찬의진의 참모 嚴海潤
嚴海潤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07년 당시 44세였으므로 1864년경 출생했다.
판결문에 “평소 醫術로 업을 삼았다”고 하 므로 개업의였다.
1906년 음력 11월 徐殷九의 병 치료를 위해 충북 黃澗으로 가서 盧應奎, 서은구와 거의를 논의하였다. 전기 의병 당시 경남 진주에서 활동했던 노응규가 황간에서 재거의 하자 참여하여 선봉장에 선임되었다.
얼마 후 체포되어 1907년 5월 유형 7년을 받고 유배되었으나74) 풀려나자 다시 의병에 참 가하였다.
1908년 음력 11월 李殷瓚의진의 참모로 경기도 포천, 양주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음력 12월에는 李鍾協의 진의 참모로 황해도 금천, 토산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 어 징역 5년형을 받았다.
1909년 4월 옥중에서 파옥 탈출을 시 도하다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75) 순국하였다.
엄해윤은 중기의 병으로 옥고 후에도 후기의병에 다시 참여하는 등 강고한 투쟁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이석용의진 중군장 呂圭浩
여규호는 呂柱穆이라고도76) 하며 전북 임실군 上東面 大雲峙77) 출신이다.
1909년 당시 38세였으니, 1872년경 출생했다.
판결문에 직업이 ‘醫師’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한의사로 개업을 했을 것이다.
1908년 음력 3월 이석용의진에 참여하여 중군장에 선임되었다. 78) 중군장은 일반적으로 의병대장 다음의 직책으로 의진에서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이석용의병장은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鎭安의 마이산에 서 500여 명의 의병으로 湖南倡義所를 결성하였다.
이후 진안읍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는 등 진안, 용담, 장수, 임실, 순창, 광 주, 함양, 곡성, 운봉,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 다.
1908년 3월 전북 남원군 沙村戰鬪에서 일본군에 패한 후 일 시 의병을 해산했다가 다시 재기하였다.79)
여규호가 이석용의진 에 참여한 것이 1908년 음력 3월이었다고 하니 이석용의병장이 재거의할 때 참여하여 중군장에 선임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1907년 거의 당시의 중군장은 金雲瑞였다.
판결문에서 확인되는 여규호의 활동내용은 주로 군자금 모집 이었다. 80)
이는 이시기 이석용의진의 기세가 초기의 수백명 군세에서 수십명으로 많이 약화된 상태였으므로 군수품 조달에 힘 썼던 것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이석용의진은 일본군의 공세로 인해 결국 1909년 음력 3월 의병을 해산하였다.
여규호는 1908년 음력 12월경 체포되어 1909년 3월 5일 광주 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였으나 기각, 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1909년 6월 17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81)
4) 倡義會 軍師 吳相元
오상원은 1845년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해주이다.
부친인 吳兢 濬은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을 뜻하는 幼學이었다.
오상원은 17세 때인 1861년(철종 12년) 식년시에서 137명 중 70등으로 3등인 진사가 되었다. 82)
함북 회령에 거주하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간도로 건너갔다.
1909년 재판 당시의 주 소지는 간도 百草溝 社芥田洞이었으며 ‘醫業’으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儒醫로서 백초구에서 개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64세의 노령임에도 1908년 음력 2월경 노령 烟秋(노보키에프 스크, 현재 크라스키노)에서 이범윤 등과 倡義會를 조직했다. 83)
이범윤이 ‘元帥’ 그가 ‘軍師’의84) 직책을 맡은 것으로 보아 그가 창의회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범윤은 1908년 5월경 崔才亨 등과 함께 同義會를 조직하여 부총장을 맡았으며 이와는 별도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창의회를 조직한 것이다.
동의회와 창의회가 중심이 된 연해주 의병부대는 1908년 7월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85)
동의회 부대는 都營將 全濟益, 左營將 嚴仁燮, 右營將 安重根 을 중심으로 국내진공전을 전개했다.
창의군도 두 차례 이상 나 뉘어 관북지방으로 진공하였다.
창의군의 경우 前軍의 최고 지 휘관은 사령장(前衛司令)인 正尉 金榮璿(金永先)이었다.
後軍의 최고 지휘관인 都領長은 도강시에는 金鑽鎬였지만, 일본군과의 전투 때 그가 의진을 이탈했기 때문에 朴昇規(朴昇奎)가 署理로 대신 맡았다. 86)
동의회와 창의회 두 계통의 의병은 수차에 걸쳐 진공로를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국내로 진입하였고 상호 연합전 선을 구축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7월 18일 창의회 金永先이 의병 백여 명을 인솔하고 회령 남방 2킬로 지점까지 진격, 점령하였다.(會寧戰鬪)
7월 21일 홍범도, 차도선의진 및 최덕준의진(鏡城義兵) 등 국내의병과의 연합을 위해 무산, 갑산을 목표로 진격하던 안중근의병부대, 金 永先의병부대가 회령에서 합류하였다.
그러나 靈山 蒼大坪에서 전열을 정돈하기도 전에 일본군수비대와 맞서 두 차례의 교전 끝에 패배하였다.(靈山戰鬪)87)
이와 같이 동의회와 창의회의 의병부대는 1908년 7∼8월 활 발하게 국내진공전을 전개하였다.
이중 창의회가 중심이 된 국 내진공전의 배후에는 오상원이 있었다.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활동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 즈음부터(1908년 음력 2월) 1909년 1월까지 사이에 尹 炳道를 西江에 朴勝奎를 水靑에 金鑽鎬를 吏灣에 파견하 여 폭도를 모집케 하여 수백 명을 획득하고 이에 탄약을 지급하였으며, 그 동안 1908년 음력 6월 중, 金永善에게 명 령하여 약 2백명의 폭도를 인솔하고 일본병을 습격하고자 慶源에 갔으나 일본병이 없어서 永善은 이동하여 靈山으 로 가서 그들과 싸웠으나 패주하고 또 동년 음력 7월 중 김찬호에게 명령하여 약 1백명의 폭도를 거느리고서 일본 병을 치려고 鍾城으로 보내는 등의 행위를 하여 내란을 일으킨 자이다. 88)
즉, 그가 尹炳道를 西江, 朴勝奎를 수청, 金鑽鎬를 이만에 파 견하여 의병 수백 명을 소모하고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같은 해 음력 6월∼7월 김영선과 김찬호를 지휘 관으로 1∼2백명의 의병을 국내에 파견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판결문 내용은 주도 인물 의 한자명만 상이할 뿐 위에서 본 당시의 다른 전투기록을 통 해서도 확인된다.
오상원이 창의회의 군사로서 이러한 활동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오상원을 “내란죄의 주범”이라고 보았다. 89)
결국 그는 1909년 초 일본 헌병에 체포된 후 1909년 4월 27일 대심원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이 확정되어 같은 해 6월 8일 교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90)
그가 체포된 것은 함북 온성 서방 50리 의 만주 傑滿洞에 거주하는 최두성이란 자가 걸만동의 일본 관 헌에게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1910년 3월 13일 이범윤 휘하 조 상갑이 파견한 부대원이 걸만동에 와서 밀고한 최두성을 참살하 기 위해 소재를 탐문하기도 했다.91)
5) 鏡城義陣의 참모 金用鉉
金用鉉(金龍鉉)은 함북 경성군 주북면 서원동에 거주하였다.
1908년 당시 33세였다.
일제 기록에 ‘醫師’로 기재되었다.
서양 의술을 배운 의사가 아니라 한의사로 봐야 할 것이다.
1908년 3월 함북 경성에서 조직된 최덕준의진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였 다.
의진을 결성할 당시에 최덕준이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하는 과정에서 소지했던 「충의안」을 빼앗겼는데 이 「충의안」에 최덕준 의진의 초기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92)
忠義案
總領 최덕준 林鳳松 貳領 金用鉉, 임학유
參領 전명학(체포), 강문경
肆領 이태영, 윤용극
五領 김성삼, 전봉익
義案 안태곤 외 28명
총령부터 이령, 삼령, 사령, 오령까지 지휘부가 기재되었고 ‘義案’에는 병사들이 기재되었다.
김용현이 최덕준 다음에 貳領으 로 등재된 것으로 보아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일제의 ‘폭도수괴조사표’에 김용현만이 유일하게 “최덕준의 참모”라고93) 기재된 사실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최덕준의진은 군사가 450여 명이 달했으며 함북지방의 대표적 인 의병부대였다.
특히 대한협회 경성지회와 연계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 대한협회 경성지회가 최덕준의진에 군자금과 정보를 제공했다.
이는 의병활동과 계몽운동의 연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되는 것이다.
연해주의병부대의 1908년 8월 국내진공전 당 시 장석회부대가 함북 경성까지 진출하여 최덕준부대 등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김용현은 이러한 최덕준의진에서 활동하다 귀가했다가 1908년 6월말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귀순을 청한 자로 간주되어 소위 ‘면죄문빙’을 교부받았다. 94)
그럼에도 이후 계속 최덕준의 진에서 활동하였다.
즉, 같은 해 9월 27일 군사를 이끌고 경성 군 주온면 대성현의 보통학교를 습격하는 등 활동하였다. 95)
6) 洪範圖義陣의 서기 韓雲燮
한운섭은 함남 咸興郡 德山面 大德里 출생으로 중국 奉天省 長白府 大東社 梨田洞에 거주하였다.
1912년 당시 28세였으며 판결문에 직업이 ‘醫師’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한의사로 개업했 던 것 같다.
1908년경 홍범도의진의 서기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음력 2월 20일경 高雲學96) 외 19명의 의병과 함께 총기와 창을 휴대하고 함남 갑산군 熊耳面 都上里에서 군수품을 수집하 고 취식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12년 9월 5일 함흥지 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97)
4. 의병의 독립군 전환과 安鍾奭
일제의 침탈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의병활동에도 불구 하고 1910년 나라를 강탈당하자 의병들은 만주, 노령 등지로 이 동하여 새롭게 독립군으로 전환해갔다.
안종석은 독립군으로 전 환해간 의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종석은 충남 大興郡 二南面 加德里 출신이며98) 1917년 체포 당시에는 중국 和龍縣 崇化社 上天坪 南仁瑞의 방에 기숙하고 있었다.
체포 당시 45세였으므로 1872년경 출생하였다.
前 秘書 丞이었다고 하며99) 독립운동 중에는 ‘醫生’ 등으로 생계를 유지 했다. 100)
儒醫라고 할 수 있다. 101)
1908년 음력 4월경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孟峴 부근 에서 서당교사로 있었다.
유인석이 1908년 봄 연해주로 망명하 여 멍고개(孟嶺)에 거주했는데, 안종석의 망명시기와 거주지를 보면 유인석과 함께 연해주로 망명했을 개연성도 있다.
이후 유 인석이 주도하여 1910년 6월 21일(음력 5월 15일) 조직한 13道 義軍에 참여하였다.
13도의군 결성의 사전작업으로 1909년 말부 터 1910년 초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義員案』에 등재되 어 있다. 102)
총 539명이 수록된 『의안록』에 유인석, 이재윤, 이범윤, 이남기,이상설, 우병렬, 박양섭, 박치익, 심상돈 다음인 10번째로 수록 되어 있다.
황실의 종친인 이재윤, 연해주의병의 실질적 지도자 로 13도의군의 彰義軍總裁인 이범윤, 鏡城의병장 출신으로 13道 義軍 壯義軍總裁인 이남기, 헤이그특사이자 13도의군 都通信 이 상설은 모두 13도의군의 핵심적인 지도자였다.
그 외에 우병렬, 박양섭, 박치익은 모두 유인석을 隨從했던 평안도 의병장들이었 다. 103)
이들 다음에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그의 위상이 상 당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서 1910년 8월 유인석, 이범윤, 이상설 등이 조직한 聲明 會에 참여하였다.
그는 유인석의 명을 받고 같은 해 음력 8월 17∼18일경 함경도 원산에 밀파되어 일본 관헌의 시설과 민심의 동향 등을 조사하였다.
13도의군은 국내에 조직 결성을 추진하 였다.
고을마다 총재, 통령, 참모, 총무 등의 직책을 두어 전국 적 조직망을 계획하였다.
그가 원산에 밀파된 것도 이러한 국내 조직 결성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露領으로 귀환하였으나 러시아 관헌에 의해 성명회는 이미 해 산한 후였고 많은 성명회와 13도의군의 간부들이 체포되거나 각 지로 은신한 상태였다.
이후 그는 노령과 만주 국경, 간도 등지 를 유랑하며 동지의 규합에 힘썼다.
1914년 음력 정월경에는 간 도 국자가에서 孔敎會에 입회하여 포교원이 되었다.
공교회는 표면 상으로는 공자를 추앙하는 모임이었으나, 복벽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포교를 빌미로 이 범윤의 부하로서 성명회원이기도 했던 李起林, 張興敬, 金永澤 등과 회합하였다.
또 공교회원인 閔培植, 의병 출신의 韓相悅 등 과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5년 음력 7월 하순 그는 길림성 東寧縣 高安村(일명 三岔口)에서 민배식 등과 의병조직을 결의했다. 104)
고안촌 남방 15리 인 三石峴(일명 三石拉子)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노령과 만주 각지에 배포하며 동지를 규합했 다.
그 결과 음력 9월 하순 동지 80명, 소총 50정, 권총 3정, 탄약 약 7천 5백 발을 확보하였다.
총기는 러시아제 5연발총, 일본 단발엽총 등이었다.
마침내 彰義所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 이 직제를 갖추었다.
〈표 1〉 彰義所 편제 : 생략 (첨부 논문파일참조)
특이한 것은 별도로 국권회복을 맹세하는 彰義誓所를 설치하 여 가입자들이 결의를 다지도록 한 점이다. 또한 직제도 한말 의병의 일반적 직제가 아닌 독립군적 직제를 채택하였다.
군사 중에는 해산군인 출신들도 있었다. 106)
이들은 본부인 삼석현에서 노령 스베찬에 이르는 18리 간의 통행인에게 여객 보호를 명목으로 1인당 2원씩을 징수하여 군자 금에 충당했다.
이 과정에서 분쟁이 생겨 러시아 관리 1명을 사 살하기도 했다. 겨울철을 맞아 군대를 운영하기 어렵게 되자 노 령 스베찬으로 이동하여 자금 방책을 마련하고 블라디보스톡으 로 진출해 더욱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스베찬에서 자금 마련이 어렵자 두만강 일대로 나와 함북 慶興의 일본군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1915년 음력 10월 1일 7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실행에 나섰으나 스베찬에서 러시아 기병과 충돌하였다.
우세한 러시아군의 화력에 패배하여 많은 군사가 사산하고 30여 명만 남자 동녕현으로 돌아왔다. 107)
이에 11월 15일 군수관 이모를 琿春縣 東溝인 高麗坪에 파견 하여 그곳 주둔 중국군에 통과를 교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당초의 계획은 혼춘현 高麗坪, 靑溝子, 荒溝를 경유하여 密江으로 나와 동 對岸인 美占 및 穩城을 습격하여 일본관민을 참살하 려는 것이었다. 108)
그는 혼춘현의 黃丙吉과 연계 활동을 모색하 기 위해 부대의 지휘를 이기림에게 부탁하고 李惠植 1인만을 대 동한 채 煙兎拉子로 갔다.
그런데 당시 동녕현으로 돌아온 군대 중 6명의 군사가 老黑山 산중에서 중국군에게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안종석에 불만을 품은 이기림은 소장한 무기를 모두 大平溝 吳周赫의 집 으로 운반하고 오주혁과 함께 안종석을 배척했다.
결국 군사들 도 모두 四散되고 말았다.
부대가 소장했던 무기 중 군총 42정 마저 여기저기 팔려나간 것 역시 아쉬운 점이었다. 109)
이후 안종석은 1916년 2월 동녕현에서 소위 강도범으로 중 국관헌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110)
일본군에게 인도되지는 않았지만 풀려난 후에도 그는 醫生, 서당교사, 심지어 잡화행 상을 하며 재거의를 모색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7년 3월 3일 함북 무산부근에서 일본 헌병분대에 체포되 었다.
3월 15일 청진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으나 증거불충 분으로 방면되었다.
당시 미주의 『신한민보』는
“의기가 구름 갓다 도문강에 챗죽을 던지는 한국혁명군- 불행히 패하얏스 나 일인은 낙담 상혼”이란 제목으로111) 그의 거사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후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5. 맺음말
한말 의병부대에서 질병·부상자의 치료는 의병부대와 전투력 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의진 내에서의 의료행위는 자체 치료, 은신 치료, 귀가 등이 있었다.
자체치료는 대체로 간단한 응급조치에 그쳤을 것이다. 의진 내 의 한의사나 한의약 지식이 있는 유학자인 儒醫들이 치료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외과적 조치가 필요한 부상자의 치료는 자체 치료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결국 거동이 불편한 질병·부상자는 마을에 은신 치료하거나 귀가하여 치료하였다.
이러한 방식이 보다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의진 내에 ‘軍醫’ 등 별도의 부서를 두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중기의병 당시 산남의진, 후기 의병의 동의회, 이백래의 호남창의소 등에서 軍醫 직제가 확인 된다.
의진 내에 한의사가 참여하고 있는 경우 1차적으로 의진내에 서 일정한 의료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의료행위의 구 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다.
창의록 등 의병측 기록에도 구체적 인 의료행위가 언급된 경우는 거의 없다.
한의학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석용의 창의록에도 구체적인 치료과정을 보여 주는 내용은 없다.
이는 창의록이 주로 의진 전체의 운용을 중 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의병에 참여한 한의 사의 의료기록이나 개인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의병부대에서의 구체적인 의료행위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한의사들의 의병 참여는 중기의병 당시부터 확인되며 1907년 군대해산 이후의 후기의병에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전기의 병 당시에도 儒醫들의 참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상으 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통감부의 서양의학 중심정책과 한의학 홀대가 한의사들의 의 병참여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자료는 찾아지지 않는 다.
그러나 다른 신분·계층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경제적, 정치 적 침탈이 위기의식을 제고시켰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의병전 쟁 과정에서 한의사 의병 간의 연대 등 한의사 의병만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
직업적 의식보다는 개인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이해된다.
지역적으로는 함경도 지방에서 한의사들의 활동이 두 드러졌다. 이 지역이 녹용, 산삼 등 약재의 산지로서 한의약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112)
함남 북청(원일상), 갑산(한운섭), 함북 경 성(김용현) 등에서 참여사실이 확인된다.
한의사들은 의병장으로 거의하거나, 의진의 주요 참모로 활동 하였다.
식자층이었으므로 의진 내에서 주요한 직책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의병관련 기록에 농업 또는 양반으로 표기 되었으나 실제로는 개업하지 않은 儒醫로서 의진 내에서 의료행위를 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확인되는 수보다 훨씬 더 많은 한의사들이 의병전쟁에 참여했을 것이다.
의병전쟁에 참여할 당시 개업의였던 경우가 대부분이나, 안종석 같은 儒醫 는 의병 참여 이후 생계 등의 필요에서 의료능력을 활용하였다.
한의사 의병도 경술국치 이후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독립군으 로 전환해 갔다.
안종석의병부대는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병부대에는 한의학적 의료행위가 중심 이었으나, 독립군 부대에는 서양의술을 익힌 양의도 참여하면서 한의학, 서양의학이 혼재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향후 별도의 연 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주 1)-112) : 생략 (첨부논문참조)
참고문헌 : 생략 (첨부논문파일참조)
(Abstract)
Medical Practice of Righteous Army and Oriental Medicine Doctors’ Participation in the War of the Righteous Army during the Daehan Empire
Kim, Sung-min
Treatment of injuries and diseases in the righteous army units was a very important issue in terms of maintaining combat power. This thesis is a study examining the medical practices and the participation of oriental doctors in the righteous army units. In general, medical practices within the righteous army unit included self-treatment, hidden treatment, and return home. Self-treatment would have been largely a simple type of first aid. Diseases and injuries causing mobility difficulties were treated in hiding in the village or by unit members returning home. Therefore, there were not many cases of having separate departments such as "military doctors" within the righteous army unit. The participation of oriental medical doctors in the righteous army has been confirmed since the mid-term righteous army war, and it also has been established that such participation occurred in various regions in Korea during the late righteous army war. Oriental medicine doctors served almost as righteous army chiefs or as major staff members of righteous army units. Since it was an educated class, it was often in charge of major positions within the unit. Like other righteous armies, the righteous army of oriental medical doctors was converted into an independent army centered on Manchuria after the fall of the Daehan Empire.
軍史 第129號(2023. 12.)
(원고투고일 : 2023. 10. 9, 심사수정일 : 2023. 11. 12, 게재확정일 : 202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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