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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이순신(李舜臣)의 행적과 전쟁에 나타난 군사사상(軍事思想) 고찰/배일수(육군대).정희태(서경대)

목 차

1. 서론

2. 이론적 배경

3. 조선의 안보환경과 이순신의 전쟁수행

4. 6분법에 의한 이순신의 군사사상 분석

5. 결론

1. 서론

2022년 7월 27일에 개봉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한국 영 화사상 최대 관객수 1,760여만 명을 기록한 영화 ‘명량(2014)’ 이후 8년 만에 귀환한 이순신4)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 못지않게 이순신에 관련한 연구소와 학술논문, 기념비, 우표, 조형물도 전 국 곳곳에 즐비하다.

전쟁, 군사전략, 리더십, 경영 등 다방면에 서 연구가 되고 있다.

이순신과 관련된 많은 역사 유적들이 발 굴되어 전사적지 및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임진전쟁 당시 이 순신의 승전 모습과 전투 장면을 재현하여 테마 관광코스로 개 발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북한에서도 우표 발행과 더불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순신에 대한 열광은 단지 이 순신이 극적인 승리를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순신은 세계 전사에서 명장 중의 명장으로 평가되는 탁월한 장군이다. 그 평가의 근거는 물론 임진전쟁5)6) 때에 23전 23승, 13척 대 130여 척의 전투라는 해전사에서 불가사의한 승리의 기 록이다.

4) 이하 존칭과 계급, 직책을 모두 생략하고 ‘이순신’으로 약칭함. 이순신의 출신배 경 및 성장과정은 2011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 군사인물연구 조선편 Ⅰ, pp. 133~144를 참고하였다.

5) 임진전쟁은 일국사적 시각이 아닌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명칭이다. ‘왜란’이 란 용어는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든 이 전쟁의 본질을 명확히 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든 국제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명 칭을 사용하였다. 자세한 자료는 김문자 저임진전쟁과 도요토미 정권(서울: 경인문화사, 2021)을 참고하기 바란다.

6) 김강녕, “이순신의 수군전략과 전술,”이순신연구논총 17호(2012), p. 211.

이순신은 1592년부터 1597년간 일어났던 임진전쟁 기간 동안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3차례의 큰 해전과 20여 차례의 소규모 해전으로 풍전등화 같은 조선의 운명을 건 져냈다. 이순신의 해상에서 완전 승리의 공적은 이미 당대에 공 로를 인정받았다. 조선왕조 중흥의 제일공신자 즉, 원훈(元勳)으 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이순신의 조선 중흥의 원훈으로 빛나는 공적을 쌓을 수 있던 원동력은 이순신의 행적과 전쟁수행에서 나타난 군사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순신이 출생하여 생활했던 조선은 국제적으로 유리한 상 황은 아니었으며,또한 조선의 국정운영과 군사력 건설은 체 계적이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순신은 무 과에 급제하기 위해 무경칠서 등을 공부하였고,무과 급제 후 함경도에 봉직되어 여진족과의 전투를 경험하였다. 이순신 은 상관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하는 어려운 상황도 있었지 만 서애 유성룡의 천거에 의해 육군이 아닌 수군의 장수로 발탁되어 전라좌수사로 봉직하게 된다. 이때가 임진전쟁 발생 직전의 상황이다. 수군 장수로서의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이순신은 다른 수영(水營)과는 다른 모습으로 군영(軍營)을 정비해 나갔으며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에서 전투를 준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선승구전(先勝求戰)과 필승의 확고한 신념으로 전쟁에 임하여 이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 였다. 우리 역사 속에는 많은 장수들이 있었다. 임진전쟁 당시의 이순신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과정은 역사에 등장하는 어느 장수와 비교할 수 없는 비범한 군사적 혜안과 창의성이 있었 다. 이순신은 임진전쟁 시 수군을 지휘함에 있어 국가적 지원 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군의 지휘관으로서 건전한 판단과 추진에 장애가 되는 지휘계선의 간섭을 받는 등 열악 한 지휘여건이었다. 이순신은 임진전쟁 발발 이후 6년여 동 안 어려운 여건속에서 23전 23승이라는 절대적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의 군사사상과 전쟁에 대한 뚜렷한 전략 을 견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순신에 관한 연구는 군사사상(軍事思想) 측 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주로 해전의 승리 요인과 리더십, 이 순신의 행적과 해전 과정, 군사력 건설과 운영을 분석하여 교 훈을 도출하는데 치중하였다. 조선시대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현대의 군사사상 이론으로 연구하는 것은 400여 년 전의 사 상을 현대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차원에서 다소 무리한 시도 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연구하 는 연구자로서 한국적 군사사상과 군사전략 발전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조신호7)는 이순신의 사상적 배경을 연구하였고, 최해진8) 은 이순신 장군의 전략적 리더십 및 지휘통솔 측면에서 연구 하였다. 김강녕9)·임원빈10)·제장명11)·김병륜12)은 이순신의 군사혁신과 무기체계, 전략사상과 군사전략 차원에서 수군의 전략·전술을 연구하여 시사점을 제시하였다. 박현규13)는 임 진전쟁의 문헌 사료와 유적 문물을 연구하면서 민간사회에 두루 사용하는 보편성을 근거로 ‘임진전쟁’이란 용어보다 ‘임진왜 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나승균14)은 손자병법 13편을 적용하여 이순신의 병법과 손자병법을 비교하여 군사사상 세 가지 (만전사상, 속승사상, 제승사상)를 제시하였다.

7) 조신호, “이순신학(學)의 정립과 그 사상적 배경,이순신연구논총(2014)제23호

8) 최해진, “이순신 장군의 전략적 리더십,” 인적자원관리연구제14권 제2호(2007).

9) 김강녕, 앞의 글.

10) 임원빈a, “첨단 조선 수군과 이순신 제독의 혁신,”이순신연구논총제28호(2017)

11)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해전술과 귀선의 역할,”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창 립기념 학술대회(2007).

12) 김병륜, “임진왜란기 조선 수군의 전술,이순신연구논총제31호(2019)

13) 박현규, “한국에서의 임진왜란 연구 동향과 문물 사료,” 이순신연구논총34호(2021)

임원빈15)·김경 수16)는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순신의 애민정신과 나라사랑에 대 해 고찰하여 제시하였다. 고광섭17)은 이순신의 선조 출전 명령 을 거부하여 백의종군한 사실을 검증하여 사실과 다름을 제시하 였다. 방기철18)은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순신의 군령 집행을 연 구하여 이순신의 수군 운영과 공인으로서 모습을 제시하였다. 그 외 이순신이 활약한 시기의 조선의 군사전략, 군사지리, 방어 실태,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정구복19)·김종수20)·허태구21)·최 창국22)이 연구하였다. 본 연구는 앞에서 기술한 선행연구와 달리 현대적 군사사 상 이론을 가지고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고찰하였다. 조선시대 에 전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70만이라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던 임진전쟁부터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 행하였던 이순신의 전투수행과 행적을 바탕으로 군사사상을 고찰하였다. 연구의 틀은 임진전쟁에 나타난 이순신의 군사전 략과 리더십, 전쟁관, 사상, 철학, 가치관, 문화, 출생과 성장 을 망라하여 김유석의 군사사상 총론23)에서 구분한 6대 범주를 프리즘에 투영하여 이순신의 군사사상이 무엇인지 분석 하여 제시하였다.

14) 나승균, “군사사상 측면에서 이순신의 손자병법 적용 고찰,”군사발전연구 조선대학교(2010)

15) 임원빈b, “이순신 애민의 사상적 기반과 의미,이순신연구논총제36호(2022)

16) 김경수, “난중일기를 통해 본 이순신의 애민정신,”이순신연구논총제36호(2022)

17) 고광섭, “이순신의 선조 출전 명령 거부설에 대한 검증연구,”KNSTVol.5 No.1(2022).

18) 방기철, “이순신의 군령 운용 연구,”한국사연구192호(2021)

19) 정구복a,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2

20) 김종수, “임진왜란 초기 방어실태와 웅치·이치 전투,”전북사학51호(2017)

21) 허태구, “임진왜란과 지도·지리지의 군사적 활용,사학연구 113호(2014)

22) 최창국, “조선전기 북방 양계지역 제승방략의 실체와 현대적 함의,군사연구제136집(2013)

23) 김유석, 군사사상총론(서울: 황금알, 2022)

연구의 틀은 군사사상 6개 범 주인 ‘①전쟁에 대한 인식 및 이해, ②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건설, ③전시 군사력으로 전쟁수행, ④평시 국가안보 지원, ⑤평시 국가정책 지원수단으로써 군사력 운용, ⑥평시 군사력 관리 및 운영’을 가지고 이순신의 행적과 전쟁을 분석하여 이 순신의 군사사상을 살펴보고, 이를 융합하여 이순신의 핵심 군사사상을 제시하였다.

임진전쟁은 많은 고서와 현대 군사 사학자들에 의해 발굴 및 정리되고 있어서 임진년에서 정유 년까지 7여 년간의 전쟁에 대해 여러 전투와의 관계, 용어 정립, 발발 배경, 전후 강화협상 등 많은 분석이 있지만,

본 연구는 역사를 발굴하여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전·후에서 식별된 이순신의 전쟁의 본질과 전쟁의 이해, 군사전략, 군사 력 건설 및 운용, 민군관계 등을 분석하여 이순신의 군사사상이을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구성으로 2장은 전쟁, 군사사상, 군사전략에 대 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였다. 3장은 전쟁이 발발한 당시 조 선의 국방정책과 정세를 살펴보았다. 4장은 군사사상 6대 범 주별로 이순신의 사상을 분석하여 이순신의 군사사상이 무엇 인지 제시하고, 5장에 결론을 맺었다.

2. 이론적 배경

가. 전쟁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전쟁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진행하여 왔다. 전쟁의 정의 또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 하게 정의되고 있다. 이는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과 영역, 주 체, 수단 등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24)는 고대의 전쟁을 ‘무력을 동원한 싸움’이 라고 정의하면서 무력으로 싸우는 것을 전쟁으로 이해했다.

싸움이 전쟁으로 인정되기 위해 충족해야 할 조건이 사회별 로 다르고,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경우 어떤 사회에서는 전쟁으 로 인정될 수 있으나 다른 사회에서는 인정되지 않을 수 있 다. 국제 법학자 그로티우스(Hugo Grotius)25)는 ‘전쟁이란무력을 동원해 싸우는 행위자들의 상태’라고 정의하고 싸움 자체보다 싸움이 일어나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한 상태를 강 조한다.

24) 키케로(BC 106~43년) : 고대 로마의 철학자, 정치가, 국가론등저술

25) 그로티우스(1583~1645) : 네덜란드의 법학자, 정치가, 국제법의 아버지, 전쟁과 평화의 법 저술

첫째, 행위자들의 법적 대등성을 가지고 국가와 개인 의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고 하였다.

둘째, 실질적인 군사력을 사용해야 하고 경제력이나 정신력을 동원한 싸움은 전쟁이 아니라고 하였다. 국제 정치학자들은 전쟁에 관한 구체적 정의를 제기하면서 폭 력행위의 정치적 행위에 초점을 두었다.

불(Hedley Bull)26)은 전쟁이란 정치적 행위자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조직화된 폭력으 로 정의하면서 정치적 단위체, 물리적 폭력, 조직적 폭력, 상호 적 폭력 등 4가지 핵심 키워드를 강조했다. 일부 국제 정치학자 는 과학적 통계 방법을 이용하여 전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을 사상자 수로 제시하였다.

싱어(David Singer) 27), 브리머(Stuaart Bremer), 스몰(Melvin Small)은 전쟁이란 민 족적 실체 간에 수행되는 무력 투쟁으로 적어도 하나의 실체는 국가여야 하며, 1,000명의 군인 사망자가 발생해야 전쟁으로 인 정하고 그 이하일 경우는 분쟁이라고 정의하였다.

26) 불(1932~1985) : 호주 출신, 옥스퍼드대 국제관계학 교수.

27) 싱어(1925~2009) : 미국 정치학 교수, 미시간 대학에서 전쟁관련 통계 및 전쟁의 원인 연구.

퀸시 라이트 (Quincy Wright)는 매우 넓은 의미에서 전쟁은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실체들 간의 폭력적 접촉”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정의 는 동물끼리의 싸움, 원시 부족간의 싸움, 그리고 현대 국가 간 의 적대적 행동 등이 모두 전쟁에 해당한다. 너무 포괄적인 전 쟁 정의로 보이지만, 외교관, 사회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군인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전쟁의 정의를 아우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정의라 할 수 있다. 28) 합동참모본부 는 전쟁이란 ‘상호 대립하는 2개 이상의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 간에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상대 방에게 강요하는 조직적 폭력행위이며 대규모의 지속적인 전투’ 로 정의하고 있다. 전쟁은 전역에서 일회성 전투로 끝나지 않으 며, 전쟁수행은 상호 전투력이 맞부딪치는 전투에만 국한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29) 이후 현대 전쟁은 변증법적이 고 질적인 변화를 보이는 세 번의 분기점에서 세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국가의 시발점이 된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1세대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제2세대), 제2차 세계대전 (제3세대)을 거쳐 지금은 새로운 세대인 제4세대 전쟁이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 30)

28) Quincy Wright, A Study of War(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4), p. 5.

29) 베스트팔렌 조약은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 이후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최초 이 전쟁은 유럽에서 신교와 구교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종교전쟁의 성격을 벗어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간의 세력 쟁탈전으로 바뀌었다.

30) 권영상, “린드 4세대 전쟁론의 재조명,”군사연구제144집(2017), pp. 299~300.

State Death(국가소멸)의 저자인 타니샤(Tanisha M. Fazal)는 ‘1816년 근대 민족 국가 체제가 시작된 이래 2000년에 이를 때까지 존재했던 나라는 207개국이 었는데 그중 66개국(32%)이 소멸하였다. 이 중 50개 국가(75%) 는 폭력에 의해서였다’라고 하였다. 한 국가나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전쟁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으며 오늘날에도 전쟁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국가가 현존 및 장차 위 협에서 자국의 안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전쟁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국가 총력전 수행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더불어 국가가 전쟁에 대비해 군사전략을 수립함과 동시 에 군사력을 건설하고 이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군사사상이 먼저 갖춰지어야 한다. 사상 연구는 ‘역사에 관류하는 본질적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역사 인식의 문제에서 시작한다. 우리 의 역사에도 대외침략 등 국가 위기에 맞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전략, 군사전략, 전술 등 많은 전쟁의 지 혜를 만나게 된다. 비록 이론체계나 사상적 틀을 갖춘 서적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그 행동과 선택에는 오랜 숙고와 신념의 소산인 군사사상이 내재하여 있다. 우리는 수많은 외침의 시 련을 이겨내고 생존해 온 민족이다. 많은 국가 위기를 극복하 는 과정에는 시대별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그 시대의 여건 에 맞는 군사사상이 있었다. 나. 군사사상 군사사상이란 군사 활동이나 군사 문제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나 관점을 말하는 군사(軍事,Military)와 사상(思想,Thought) 의 합성어이다. 군사는 주로 군대·군비·전쟁 등 군무에 관한 일을 말하며, 사상은 사고작용의 결과로 얻어진 체계적인 의식 내용을 말한다. 군사라는 용어에는 기능적 요소와 목적적 요소 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기능적 요소란 정치·외교·경제와 같이 국가목표를 달성하는데 기여하는 국가 고유의 무력적(武力 的) 활동을 말하며, 군대의 관리와 운용을 통해서 그 소임을 다 하게 된다. 목적적 요소란 여타의 국가 기능과 달리 무력이라는 수단에 의해 최종적인 정치 목적을 달성하거나 폭력이라는 수단 을 통해서 국가목표 달성에 기여하게 되므로, 국가가 예상하는 전쟁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국가가 요망하는 목 이순신(李舜臣)의 행적과 전쟁에 나타난 군사사상(軍事思想) 고찰 | 89 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폭력이 행사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31) 사상은 ‘경험에 기초한 현상에 대한 사유와 분석이란 사고 과정을 통해 도출한 것으로서 인간 생활을 이끌어가는 사고 의 내용’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결국 사상이란 신체적 활동이나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현상·인간현상과는 구분되는 ‘정신 적 활동 또는 그 결과’에 해당한다. 또 한편으로는 현실이나 그 것을 이루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유리(遊離)된 추상적인 이론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이론과 실천을 이어주는 매개체 내 지 결합으로서,말하자면 ‘이론적 실천’ 또는 ‘실천적 이론’의 성 격을 지닌 인간 활동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일정 수준 이상의 체계성을 갖추지 않은 단순한 충동이나 우연적·조건반사적 주 장이나 견해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립되고 특정한 전문이론의 의미 영역 속에서 당대의 개인적·사회적 인간 생활 과는 동떨어진 채 고도의 정합성을 이룬 추상적인 학설이 있다 면 그런 것 또한 사상의 중심주체가 될 수 없다. 즉,사상은 체 계화된 이론이 행동으로 나타났거나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체계적인 생각을 말한다. 32) 군사사상 정의는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육군본부는 군사 사상이란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재 및 장차 전쟁에 대 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어떠한 전쟁의지와 신념으로 어떻 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 발발 시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군 사력을 운용하는 개념적 사고체계’로 말하고 있다.33)

31) 나승균, 앞의 글, pp. 53~54.

32) 이강언 등,신편군사학개론(서울: 양서각, 2007), pp. 67~68.

33) 육군본부, 한국군사사상(대전: 육군인쇄창, 1992), p. 24.

대전대학교 군사연구원에서는 ‘한 나라의 군사적 실체나 군사 조직 의 행동, 혹은 군사이론·전략 등 군사전문가에 의한 군사이론이나 담론 등에 관류하는 무형적 가치체계’로 정의하고 있 다.34) 그런데 굳이 이러한 이론적 체계나 사상적 틀을 갖추 지는 않더라도 모든 군사행동에는 나름대로의 군사사상이 투 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군사사상’이라는 측 면이 전쟁수행과 분리되어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군사력 건설에 대한 이성적 근거와 군사력 운용에 대한 윤리 적 정당성 및 군사력 사용 방법에 대한 통일된 판단체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35) 백기인(2016)은 군 사사상을 ‘한 나라의 군대나 무장조직의 군사행동, 혹은 군사 적 천재와 같은 탁월한 군인의 리더십, 혹은 군사이론가 및 전략가 등 군사전문가에 의한 군사이론이나 담론에 관류하는 무형적 가치체계’라고 정의하고, ‘국가의 권력체계가 관료제로 제도화된 정책결정 구조에서는 군사사상이 국가정책이나 전 략으로 집단지성을 반영하기도 한다.’라고 주장하였다.36) 한 편 박창희는 더 확장된 개념을 적용하여 군사사상은 전쟁의 정치적 목적, 군사전략, 군사제도, 군사동원, 민군관계, 동맹 관계 등도 군사사상에 포함된다고 명시하여 기존의 일반적인 접근보다 광의의 개념에 접근하고 있다. 37)

34) 군사사상, 군사사상사의 개념에 대해서는 한국적군사사상의 정립방안모색(제 5회 군사학술세미나, 대전대학교 군사연구원, 2009) 참조

35) 진석용, “군사사상의 학문적 고찰,” 군사학연구통권 제7호(2009), p. 5.

36)백기인, 한국 군사사상 연구(고대~조선)(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 p. 24.

37) 박창희a,한국의 군사사상(서울: 플랫미디어, 2020), p. 43.

김유석은 전쟁 이 외의 군사작전을 포함한 광의의 군사개념과 사상의 특성 등 을 고려하여 군사사상을 ‘군사전문가나 여러 사람 또는 특정 조직이나 국가에 의해 전쟁과 전쟁 이외의 군사 문제 전반을 대상으로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고와 분석을 통해 미 래에 군사 분야에 대한 방향을 일정한 원리와 통일성을 갖고 정립한 군사에 대한 사고작용의 내용이다’라고 정의한다. 38)

군사사상의 범주는 그 정의로부터 찾아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때, 김유석은 군사사상 정의를 바탕으로 군사사상 범주 를 6가지로 구체화하고 세분하였다.

첫째 전쟁에 대한 인식 과 이해,

둘째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건설[平時養兵],

셋째 군사력을 운용하여 전쟁수행[戰時用兵],

넷째 평시 국가안보 지원,

다섯째, 평시 국가정책 지원 수단으로서의 군사력 운 용,

여섯째 평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군사력 관리 및 군 운영

으로 구분하였다. 39)

38) 김유석, 앞의 책, pp. 64~65.

39) 김유석, 앞의 책, pp. 94~96.

이전 연구가의 군사사상 범주 구분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전쟁관, 전쟁수행 의지 및 신념’과 군사적 측면에서의 ‘군사력 운용’과 ‘군사력 건설’로 3분법을 사용하 였다면 김유석은 6분법으로 광의의 군사사상의 범주를 제시 하였다. 본 연구는 김유석의 군사사상의 정의와 범주를 적용 하여 조선시대 임진년에서 정유년에 이르는 7여 년의 전쟁을 통해서 나타난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고찰하였다. 다. 군사전략 전략이란 용어는 전쟁과 관계가 깊다. ‘strategy’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군대는 군사령관을 의미하는 ‘strategus’ 또는 ‘strategos’에 의 해 통솔되었다. 사령관은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대방의 전 력, 지형 등을 고려하여 전투대형, 배치, 방진의 형태를 달리하 는 지혜를 동원하는 목적으로 ‘strategia’라는 사령관실을 운영 했다. 전략의 어원은 사령관의 지휘술 또는 용병술이 태동하는 장소를 의미하는 ‘strategia’에서 비롯되었다. 40)

전략은 원래 군사용어지만 그 개념이 국가전략과 군사전략 으로 구분된다. 국가전략은 전·평시를 막론하고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한 국가의 정치, 경제, 외교, 문화, 과학기술 등 제국력을 종합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방책이다.

국가 전략은 대전략이나 총체전략과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가마다 선호하는 용어가 조금씩 다르다. 제1차 세 계대전을 계기로 전쟁의 수행에 군사적 수단뿐만 아니라 비 군사적 수단의 비중이 확대되고 군사적 수단과 분리할 수 없 게 되어 전략은 종합적인 기획 차원의 노력을 의미하게 되었 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투의 사 용’, 조미니의 ‘장군의 작전술’, 몰트케의 ‘고려되는 목표를 달 성하기 위해 장군의 수중에 있는 수단을 실제적으로 적용하 는 행위’를 거쳐 전략의 개념은 협의의 군사적 개념보다 포괄 적인 개념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41)

군사전략은 시대별 개념 변천을 거듭하면서 클라우제비츠 는 군사전략을 ‘전쟁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전투를 운용하는 술’로 정의하면서 전쟁수행 차원에서 군사령관의 용병술로 정 의됐던 전략을 전략과 전술로 구분하여 처음으로 근대적 용 어로 제시하였다. 리델 하트는 군사전략을 ‘국가정책 목표 달 성을 위해 군사적 제 수단을 분배하고 적용하는 술’로 정의하 였다. 합동참모본부는 ‘국가목표 또는 국방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건설하고 운용하는 술과 과학’으로 정의하고 있다. 42)

40) 박창희b,군사전략론(서울: 플래닛미디어, 2018), pp. 65~66.

41)국방대학교, 안보관계용어집(서울: 국방대학교, 2005), p. 23.

42) 합동참모본부, 합동연합군사용어사전( 서울: 합동참모본부, 2014).

현대에 와서는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군사전략 개념이 확대되었다.

따라서 군사에 관한 체계적인 사유체계인 군 사사상이 국가 또는 개인에게 영향을 주어 용병술 체계상 최 상위인 군사전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군사사상이 가 지는 위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표 2> 군사전략 개념 확대

구분 과거 현재

 

목표 군사적 승리 국가(국방)목표 달성

수단 군사력 군사력+제국력 수단

범위 군사력 운용 군사력 건설+운용

시기 전시 전시+평시

3. 조선의 안보환경과 이순신의 전쟁수행

가. 조선의 안보환경

1) 조선의 국방정책과 정세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고려에 이어서 관료제를 바탕으로 통치하는 중앙집권 국가이다. 대외적으로 당시 강대국이었던 명 나라에 대해 사대주의와 여진·일본 등과의 관계는 교린정책을 구사하였다. 정치사상적으로는 유교의 예치주의를 표방하며 ‘병 기는 흉기다’라는 문치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군사조직은 사병을 혁파하여 국가가 군사를 보유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군과 지방군을 단일 통수체제로 지휘하여 국민개병제의 동원체계와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43)

 

43) 백기인, 앞의 책, p. 187.

조선은 건국 이후 200년간 큰 전쟁이 없었으며,국내적으 로 정치의 부패와 당쟁으로 인하여 외부에 시선을 돌릴 겨를 이 없었다. 친명 사대주의와 일본을 야만시하는 상황이 지속 되고 서양 문물 등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명나라와 여진족·일본에 대한 정세 파악을 위한 노력이 부족 하였다. 서인과 동인의 당파 싸움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망 각하게 하였고,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방어, 왜구의 노략질에 대한 방어 정도의 국방 태세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조선의 임진전쟁 직전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여진족의 세력 이 확장되면서 해안 일대에서의 왜구들의 침략에 대한 대비 가 소홀했으며,군 장수들의 보직이 정실에 의해 이루어졌음 을 알 수 있다.

1588년 일본은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 다. 교섭에 실패하고 돌아가면서 ‘조선이 통신사 파견을 거절 했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 나 조선은 이를 무시하고 대비하지 않았다. 이후 쓰시마 도주 의 노력으로 1591년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파견하였는데, 통 신사의 정사는 황윤길,부사는 김성일이었다.

이들이 귀국한 후 일본의 도발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으나 안타깝게 도 일본의 도발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일부 소극적인 대책만을 마련한 채 1592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명나라와 일본은 문화와 경제적인 의존도가 높은 가운데 민족 간의 갈등 또한 항상 존재하였다. 세 나라는 바다와 함께 공존하였으며,상대적으로 명나라는 조 선에 비해 강대국의 지위와 권한을 누리고 있었으며,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누리는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임진 전쟁을 통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592년 임진전쟁이 발생한 후 이듬해부터 조·명 연합군과 일 본군은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면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 섭에 치중하였다.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였지만, 명나라 는 일본군을 조선에서 철수시키는 것을 최선의 방책으로 판단하 고 일본과의 회담과 강화사(講和使)를 파견하는 등 강화에 적극 적인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일본은 명나라의 강화교섭에 적극 성을 보이지 않으면서 끝내 결렬되었고, 1597년 정유년에 일본 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전면 재침을 하 였다. 1598년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조선에서 완전히 철군 하였으며,명나라군도 1599년부터 철군을 하였다. 전쟁이 끝 난 후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지속적인 요청 을 하였으며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1609년에야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2) 일본의 정세

일본은 14세기 말엽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에 의해 남북조의 분열 현상을 종식하고 전국 지배권을 장악하면서 봉건제도가 발전하여 지방분권화가 확산하다가 15세기 중엽 봉건영주 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막부가 몰락하고 백여 년에 걸쳐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 게 된다.

이러한 전국시대를 마감시킨 사람이 바로 임진전쟁 96 |軍史 第127號(2023. 6.) 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그는 1590년 일본 전국을 통일하였으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다이묘(大名)들을 일시적으로 규합해놓은 상태에 불과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묘들을 휘어잡을 업적이 필요하거 나 다이묘들을 압도할 정도의 영향력이 필요했는데 조선을 정복하여 나름의 업적을 인정받고 조선을 새로운 자기 영지 로 삼아 동일본 쪽의 다이묘들도 전부 제압할 의도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실천하였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수용하면서 조총과 사격술,항해술이 발달하였으며,인도와 필리핀, 대만 등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 에 대해서도 정복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 당시 일 본의 혁기적인 군사혁신은 조총의 등장이다. 조총은 1543년 일 본 규슈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 사람이 탄 중국 선박이 표류해 오면서 일본에 조총(鳥銃)이 전해진다. 일본은 조총이 확산하면서 일본 역사가 바뀐다. 조총은 칼· 창·궁시 등의 무기에 비해 제작비가 많이 들어 경제력이 탄탄 한 거대 영주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었다. 은광 개발과 대외무역 을 통해 막대한 재원을 축적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소 영 주들을 제압하고 패자(霸者)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배경 에서다.

3) 명의 정세

주원장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이후 국력이 신장되다가 6대 왕인 영종이 1449년에 몽골족을 토벌하기 위해 50만 대 군을 이끌고 친정을 하다가 패전하였다. 영종이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국가적으로 위신을 실추시켰으며 정치적 내분과 환관들의 정치개입으로 인하여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후 무종의 사치와 유흥으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다가 무 종의 뒤를 이은 세종의 개혁의지에 따라 개선되는 듯하였으 나, 세종의 정책이 보수 귀족세력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초래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세종 시대의 또 하나의 큰 위협은 왜구들의 연안지역 침입 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북방 몽골족의 침입도 빈번하여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상황에 처한 명나라는 쇠퇴를 거듭하 였다. 임진전쟁 발발하던 당시 명은 1573년 신종이 즉위하여 과감한 개혁을 통해 정치와 경제, 국방 분야의 획기적인 성과 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개혁의 명신이었던 장거정이 죽고 난 후 신종의 사치와 방탕,조정의 퇴폐풍조로 인하여 혼란이 거듭되었다.

나. 이순신의 전쟁준비와 임진전쟁

1) 이순신의 전쟁준비

이순신은 임진전쟁이 발생하기 전인 1591년 4월 13일 전라 좌도수군절도사(정3품; 이하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 다. 1년여간의 전쟁 준비를 통해 임진전쟁을 치렀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 후 전라좌 수영의 군기(軍器)를 점검했다. 1580년 고흥지역의 발포만호(錄 浦萬戶)로 보직되어 2년여 동안 해안기지의 지휘관을 지내고 1589년 45세의 나이에 전라순찰사의 군관(軍官)과 조방장(助防 將)을 지낸 경험이 있던 이순신은 첫 수군으로서의 근무를 위해 서 군사들과 병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예하 장수들과 군기를 체 계적으로 점검하고,교육훈련체계를 정립한 이순신은 부하와 대화를 자주하면서 부하의 장점을 파악하여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였으며,의사소통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좌수사와 예하 장수,병졸들이 일심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어업에 종사하는 백성 중에서 남해안의 지형과 어선들이 다닐 수 있는 해도(海道) 전문가들을 찾아 이들의 조언을 구할 뿐만 아니라 이 들을 군사적으로 최대한 활용하였다. 조선 어선과 전투함인 판 옥선의 특정을 자세히 분석하고 적의 전투함 안택선의 특정과 약점 등을 분석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구상하였다.

이순신이 판단한 적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해보면 일본군은 일본의 통일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전 투의지와 조직력이 강하며,칼을 주무기로 하는 지상에서의 단병전(短兵戰)에 강하고,조총을 사용하여 살상 능력이 뛰 어나다고 판단하였다. 전투함인 안택선(安宅船: 안타케부네, 이하 안택선)은 해상수송을 위해 건조되었기 때문에 해상에 서의 이동속도가 빠르다고 분석하였다.

반면 조선의 지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지하고,병참선이 약하여 후방이 차단될 경우 지속적인 전투가 불가능해진다는 점과 일본 전투함인 안택선이 전나무 재질에 쇠못을 사용하여 충격에 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근접전투는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칼과 조총에 의해 공격을 할 경우 우리 군의 사기와 군기,방어능 력은 급격히 저하될 것이므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고,일본군이 지상으로 진격하고 해상로를 이용하여 서해를 거쳐 한강에 이르게 된다면 우리의 조정과 한성은 순식간에 적의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였다.

이순신은 먼저 일본군과의 전투는 육지가 아닌 해상에서 해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일본 수군이 남해를 통과하여 서해와 한강으로의 진출을 차단해야 한다는 결단을 하게 된다.

또한, 해상에서 전투를 하더라도 안택선과의 근접전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안택선이 해상에서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근접하지 못하도록 여건을 조성한 상태에서 적을 격파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을 격파하기 위해서 무 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이순신은 장수로서 신중을 기해 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했다.

첫째,국가를 위해 군이 할 일은 무엇인가?

둘째,적은 누구이며 적의 강약점은 무엇인 가?

셋째,적이 침략하지 못하게 하려면 할 일은 무엇인가?

넷째,침략한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다섯째,적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적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도록 하고,우리는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야 하는데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고민하고 결단했다.

이순신은 판옥선을 정비하고 전선(戰船)을 추가로 건조하였으며,군졸들을 확충하면서 주특기를 부여하여 훈련토록 하였다. 특히 전선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노를 젓는 격군(格 軍: 노군)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건장한 이들을 격군으로 선발하고 전선이 다양하고 일사불란한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훈련하였다.

전투 요원들은 포를 운용하는 포수(施 手)와 활을 사용하는 습사수(習射手), 그리고 창을 사용하는 살수(殺手)로 구분하여 장수를 임명하고 훈련을 강화하였다.

당시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에 따라 지상전이 만연된 상황 에서 해상전을 준비하는 전투력 증강은 많은 어려움이 따랐 다.

대부분의 조정을 비롯한 무인들은 지상전을 강화해야 하므로 이에 적극적인 동조를 하지 않았으며,지원 또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적의 강한 조직력과 근접전투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대 비해야 할지 고민하던 이순신은 방답군관이던 나대용의 전선에 대한 혜안과 능력을 발견하고 거북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이 또한 예산과 전투력이 많이 소요됨에 따라 많은 반대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순신은 거북선을 건조하게 하였고,이를 운용하기 위한 전술을 구상하였다.

임진전쟁이 발발하여 출전할 때까지 모든 준비가 되지 않아 첫 출전에서 거북선의 위력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사천해전에서부터 발휘된 거북선의 위력은 임진전쟁 이후 일본군이 대대로 이순신을 추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4월 13일 대마도의 대포(大浦)를 떠나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한 일본군은 14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한성을 향해 진격하였으며,경상도지역의 해안을 담당하던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은 제대로 전투를 해보지도 못한 채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반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군사력 건설과 교육훈련에 만전을 기하여 첫 전투였던 옥포해전에서부터 성과로 나타나게 되는데, 1592년부터 일본군이 철군을 한 1598년까지 이순신이 출전 했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달성하게 되었다.

2) 임진전쟁

임진전쟁은 병자호란과 더불어 근세 조선사에서 큰 전쟁이 었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일본군이 2차에 걸쳐서 침략하였다. 연인원 70만 명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일본, 명나라 등이 참전한 국제적 전쟁으로 세계사적인 대전쟁이기도 하다. 44)

44) 정구복b, “임진왜란 연구를 위한 제언,”이순신연구논총통권 제5호(2005), p. 371.

본 연구에서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이란 명칭으로 기술한 이유이기도 하다.

1592년부터 1598년에 걸쳐서 벌어졌던 임진전쟁의 주요 해전은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25회 정도이다.

<표3> : 생략 (첨부 논문파일참조)

해전의 규모와 전과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겠으나 본 연구는 해전을 분석하 기 보다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고찰하기 위해 임진년의 주요해전 과 한산도대첩, 정유년 명량해전을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임진년에는 총 4차례에 걸쳐 출동하게 된다.

제1차 출동(임진년, 5월 7일~5월 8일)에 서는 모두 세 차례의 해전이 벌어지는데, 이 때 조선 수군의 함 선 규모는 전라좌수영 소속의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85척과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 등 6척을 합하여 총 91척이었다. 비록 원균이 지 휘하는 경상우수영의 함선 세력이 보잘것없었지만 어쨌든 개전 이래 최초로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통합 함대가 결성된 것 이다.

조선 수군의 전라좌도와 경상우도의 통합 함대는 5월 7일 옥포(玉浦)에서 판옥선과 크기가 비슷한 대선 13척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함선 약 30여 척과 조우하였다. 해전 결과 조선 수군 은 적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기타 지원선 5척 등 총 26척을 격파하였다.

같은 날 오후에는 합포(合浦)에서 5척(대 선 4척, 소선 1척)을 발견하여 격파하고 이튿날인 5월 8일에 고 성 땅 적진포(赤珍浦)에서 일본의 대·중선 13척을 모두 격파한 다.

전과를 종합해 보면 총 48척을 만나 그 중 44척을 격파시킨 반면 조선 수군은 단 한 척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제2차 출동(5월 29일~6월 7일)에서는 네 차례의 해전이 벌어 지는데 처음 두 차례의 해전인 사천해전, 당포해전에서는 제1차 출동과 비슷한 함선 세력인 26척이었는데, 당포해전 이후 전라 우수영의 함대가 합세 함으로써 함선 세력은 전투함인 거북선과 판옥선 기준 총 51척이었다.

제2차 출동의 첫 해전인 사천(泗川) 해전에서는 조우한 적 대선 15척을 모두 격파하였다.

두 번째 당포(唐浦)해전에서는 조우한 일본 수군의 대선 9척, 중⋅소선 12척 등 총 21척을, 세 번째 해전인 당항포(唐項浦)해전에서는 대선 11척, 중선 4척, 소선 13척 등 총 28척을, 네 번째 율포 (栗浦)해전에서는 율포해전 이전 가덕 해상에서의 소선 1척을 포 함하여 대선 5척과 중선 2척, 소선 1척 등 총 8척을 모두 격파 하였다.

전투 결과를 종합하면 조선 수군은 제2차 출동에서 조우한 일본의 함선 총 72척을 단 한 척도 남김없이 모조리 격파하였다.

제1차, 제2차 출동의 해전 결과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지상 전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랐다.

제1차 출동에서는 조우한 50여 척 가운데 44척을 격파, 분멸하였고, 제2차 출동에서는 조우한 72척을 모조리 격파, 분멸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2차 출동에서는 조우한 72척이 단 한 척도 살아남지 못한 그 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제1, 2차 출동을 종합해 보면 조선 수군은 일본함선 총 116척을 격파하였으며, 특이한 것은 이런 와중에서도 조선 수군의 함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완전한 승리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이순신의 장계를 전반적으로 분석해 보면 대략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확인된다.

하나는 함선의 척수 측면에서도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운 리 더 이순신의 탁월한 병법 역량이요 또 하나는 일본 함선을 압도하는 조선 수군의 단위 함정 당 질적 전투력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당시 조선의 주력 전투함이 었던 판옥선, 거북선의 단위 함정당 질적 전투력이다.

일본의 함 선 116척이 격파되는 상황에서 조선의 함선이 단 한 척도 격파 되지 않은 사실을 단순히 리더 이순신의 탁월한 병법 역량만 가 지고는 설명이 되지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방적 해전 결 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무기의 차이와 전술적 구사 능력이다. 조

선 수군은 일본 함선을 격파할 수 있 는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 등의 대형 화약무기를 가지고 이른바 총통(함포)포격전술을 구사하는 첨단 수군이었는데 반해 일본 수군은 활이나 조총 또는 칼 싸움에 의존하면서 등선백병 전술(登船白兵戰術)을 사용하는 재래식 수군이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조선 수군은 일본 함선을 격파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데 반해 일본은 조선 함선을 격파시킬 수 있는 무기가 없었던 것이 다.

조우한 일본 수군의 함선은 거의 모조리 격파된 반면 조선 수군의 함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는 이런 기이한 현상은 이후 이순신이 벌인 해전의 일반적인 전술적 특징이다.

제3차 출동 중에 있었던 견내량해전, 안골포해전에서도 적선은 100여 척이 격파 및 나포된 반면 조선의 함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다.

임진년 제4차 출동 중에 있었던 여섯 번의 해전에서도 일본의 함선은 160여 척 이상이 격파 되었는데 반해 조선의 함 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았다.

갑오년 당항포해전에서도 발견된 31척을 모조리 격파한 반면 조선 수군의 함선 피해는 역시 전무했다.

이렇게 볼 때 임진년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출동 그리고 갑오년 당항포 해전의 전투결과는 조선 수군의 질적 전투력과 이순신의 탁 월한 지휘역량을 잘 보여준다.

특히 임진년 네 차례 출동에서 조선 수군은 총 370여 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 반파, 나포하 였는데 반해 조선 수군의 함선 피해는 전무하였다. 6:4, 7:3, 8:2, 9:1정도의 승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10:0의 완전한 승리 였던 것이다. 세계해전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조선 조정에서 전쟁 준비는 전혀 안 하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 당파 싸움만 일삼다가 당했다는 부정적 역사관, 자학적 역사관은 부분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지상군은 준비가 턱 없이 미흡해서 20일이 채 못 되어 수도 한성이 점령되는 등의 치욕을 겪었지만 수군의 경우는 나름대로 착실한 전쟁 준비가 있었다는 역사 인식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열세인 조선 수군이 아니라 양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열세였지만 질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조선 수군이 있었기에 이순신의 전승 무패의 완전한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위대한 리더 이순신 뿐만 아니라 첨단 수군으로 발전해 있던 자랑스런 조선 수군 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순신 의 군사사상을 분석하기 위해 임진전쟁의 핵심 전투였던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가) 한산도대첩 1

592년 7월 8일 이순신의 제3차 출동에서 대응한 전투이 다.

한산도대첩은 일본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연 합 함대를 결성하여 조선 수군을 격멸하기 위해 출동한 73척과 조선수군 55척과의 전투였다. 당시 왜선들은 견내량에 있었고 이순신은 왜군과 전투하기에 부적합한 곳으로 판단했다. 지형과 암초 조류 등이 조선 수군에게 불리한 곳이었다. 이순신은 강한 적의 허점을 형성해야 했다. 적을 유인하여 아군의 전투력을 집 중할 수 있고,적의 전투력을 분산시킬 수 있도록 조성해야 했 다. 일본 수군의 연합함대 사령관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견내량 의 좁은 물길에서 이순신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 런 일은 없었다. 일본은 노도처럼 조선 수군을 추격하여 한산도 이르렀다. 이제 전투력을 집중하여 조선 전함을 격멸하기만 하 면 되도록 모든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도망가던 조선 수군이 넓은 바다에서 갑자기 대형을 변환했다.

지금까지는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을 추격해 왔는데,계속 모여드는 일본 전함과 좌우로 날개를 펴는 조선 수군의 대치현상이 역전되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향해 대포를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일본 수군은 뒤따라오던 14척을 제외하고 약 60척의 배가 포위망 안에 갖힌 꼴이 되 었다.

먼저 거북선이 일본함대의 대형을 분산시키며 대장선을 향해 진격하고 나머지 전선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상태 에서 대포를 집중적으로 쏘아댔다.

용인전투45)에서 1,600여 명의 병력으로 조선군 5~8만여 명을 와해시켰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연합함대가 불과 몇시간 만에 이순신에게 궤멸된 것이다.

45) 1592년 음력 6월 5일에서 음력 6월 6일 사이에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자락 근처(현 광교신도시 부근)에서 벌어졌던 전투이다. 임진전쟁 육상 전투 중 조 선이 가장 어이없이 실패한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600여 명의 군사로 무려 30배 ~ 50배가 넘는 5만 ~ 8만여 명의 조선군을 와해 시켰다.

일본 수군이 원하는 단병접전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으며,조선 수군의 피해 역시 경미하였다.

한산도대첩에서 대패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征 明)의 전략은 무산되었다.

일본은 곧 명나라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엉뚱하게 수군에 의해 진출이 저지 되고 결국 육지에서도 패배하기 시작하니 생존하기 위한 방 법을 강구해야 했다.

한산도대첩은 2차례의 출동으로 다져진 전투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해전이었다.

한산도대첩은 이순신의 기동력에 대한 자신감, 기동과 화력의 배합작전, 기만작전과 심리전을 이용한 하이브리드전, 원하는 장소에서 결정적 전투, 사전 철두철미한 훈련과 인화단결을 도모한 리더십 등의 총화였다.

나) 명량대첩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무기와 장비, 병력을 건설하고 훈련시켜 놓은 전투력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하던 중 궤멸되고 난 후 치러진 일본 수군과 조선 수군의 전면전이었다.

1591년부터 1597년까지 이순신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췄던 조선 수군이 1597년 음력 6월 말부터 7월 16일 칠천량해전 있기까지 수개월 만에 일본 수군에 의해 궤멸 당하고 만 것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1597년 음력 9월 16일 명량대첩 당시 수군의 전력 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일본은 133척의 전선에 조직적인 병력이 투입되었고,조선은 칠천량해전에서 궤멸되기전 배설에 의해 이탈한 12척의 전선을 중심으로 불시에 모집된 병력이 주력이었다.

전투력을 비교했을 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은 강력한 전투력으로 이순신에게 패배했던 해전을 설욕하기 위해 벼르고 있었던 터였고,

지형과 해로(海路)를 파악하고 훈련을 해왔다.

반면 이순신은 지형과 해로(海路)와 조류를 알았고 세(勢)를 형성할 줄 알았다.

비록 많은 수의 적이지만 동시에 싸우지 못하도록 만들고 조선 수군의 전선은 동시에 싸울 수 있도록 형성함으로써 승리를 달성할 수 있었다.

명량대첩의 패배로 일본군의 병참선이 차단되면서 북상을 포기하고 남해안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일본은 남해안의 해상 병참수송로가 차단되어 전라도 곡창지역의 병참 확보와 더불어 계속 진격하려는 전략은 좌절되고 기나긴 임진전쟁의 막을 내려야 한다

4. 6분법에 의한 이순신의 군사사상 분석

가. 전쟁에 대한 인식과 이해

전쟁의 본질이란 전쟁이 본디부터 가진 고유한 특성이나 모습이다. 본질의 속성은 보편적 속성과 고유 속성으로 구분 되는데 보편적 속성은 다른 대상들과 공통으로 소유하는 속 성이고, 고유 속성은 그 사물만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 성으로 필연적으로 이 사물 이외의 어떤 사물도 이 속성을 갖지 않는 것이다.

전쟁의 본질과 현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첫째는 전쟁의 본질과 전쟁의 정의이고,

둘째는 수행 신념의 측면이 며,

셋째는 전쟁의 성격과 양상에 대한 인식 및 이해이고,

넷 째는 전쟁의 원인에 대한 인식과 이해이며,

다섯째는 전시에 대한 인식과 이해로 전시의 개념을 어디까지 보는가의 문제 이다. 46)

46) 김유석, 앞의 책, pp. 96~97.

이러한 관점에서 이순신의 전쟁에 대한 인식과 이해 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임진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조선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분하여 전시와 평시체계를 구분하여 진관체계를 기본으로 하여 북방은 제승방략체계, 남서해안은 해군력으로 연안방위를 하였다.

북방 여진과 몽고에 대해서 북방 양계에 대해 제승방 국방정책을 가지고 융통성있게 위협이 있는 곳에 중앙집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려는 전략을 수립하였고 해상은 수군 전력을 양성하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제승방략체계는 그간 조선은 진관체계의 국방정책을 수행했으나 을묘년(명종 10년, 1555)에 왜변이 일어난 이후에 김수문에 의해 분군법 을 시행하여 제승방략체계로 변경하였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논의했지만 결국은 논의만 된 상태였다. 47)

47) 유성룡, 앞의 책, pp. 43~45.

그 당시 조선의 외교정책은 명과는 사대, 여진과 일본 등과는 교린정책을 펼쳤다.

조선은 주변국과의 국제관계도 원활하지 못했고, 국 정운영과 군사력 건설 및 운용 또한 체계적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545년 한양에서 출생한 이순신은 32세 무과에 급제 후 42세에 함경도에 조산보의 만호와 이듬해 녹둔도 둔전관으로 봉직되어 여진 오랑캐를 무찔렀으나 이일이 거짓으로 보고하여 백의종군을 하는 등 어려운 상황들이 전개되었다.

서애 유성룡의 천거에 의해 육군이 아닌 수군의 장수로 발탁되어 47세 나이로 전라좌수사로 봉직하게 된다.

임진전쟁은 전라좌수사로 봉직된 이듬해에 발발하였다.

첫째 이순신의 전쟁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만전사상(萬 全思想), 속승사상(速勝思想), 제승사상(制勝思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만전사상은 만전지계(萬全之計)사상으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군사사상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 롭지 않고(知彼知己 百戰不殆),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不知己 不知彼 百戰必敗)는 것이다.

만전사상은 완전한 계책으로 조금도 허술함이 없이 전쟁에 임하 여 반드시 승리하는 사상이다. 만전은 국가의 생존과 국민의 생 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자보이전승(自保而全勝)’의 사상으로서 평시에 국방의 충실을 기하고 유사시에 대비한 전투준비태세 에 있어서의 만전을 기한다고 할 수 있다 즉,현재는 평안하더 라도 전쟁을 잊으면 위태롭다는 망전필위(忘戰必危)의 사상으로 서 이순신은 강한 군사력을 포함한 국력을 배양하고,아군의 취 약점을 확인하여 이에 대해 대비태세를 갖추고,승리할 수 있다 고 확신하는 경우에 전쟁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하였다. 이 순신이 임진전쟁의 첫 전투였던 옥포해전을 시작할 때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산과같이 고요하고 무겁게 하라’고 한 것은 바로 만전사상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속승사상은 전쟁을 수행하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므 로 조금 미흡하더라도 빨리 종결해야 하는데,이는 전쟁을 오래 끌어 국가에 이익이 된 예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기 때 문이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막대한 전비를 투입하였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 계가 끊임없이 전쟁 비용을 투입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순신은 ‘전쟁에 있어서 승리는 귀하나 오래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전쟁의 속성을 아는 장수만이 백성의 생명과 국가 안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라는 내용 등에서 나타난 것 처럼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한 상태에서 개전 이 되면 최단 시간 내에 전투를 종결하여 완벽한 승리를 달 성하고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전쟁 에서 기교를 부리면서 멋있게 이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비 록 멋있는 종결의 형세가 아니더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사 상이다. 이순신이 해전을 치를 때 1~2시간 내에 종결했던 것은 멋있게 승리를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원하는 승리를 달성했기 때문이며,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셋째, 제승사상(制勝思想)은 제승지형(制勝之形) 구비전략 또는 제승전략(制勝戰略), 그리고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최소의 피해 와 희생을 통해 ‘이기거나 아니면 최소한 지지 않는’ 불패전략 (不敗戰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승이란 말은 손자병법 제6 편 허실편에 나오는 말이다.

제승지형(制勝之形)은 전쟁에서 이 기기 위해 장수가 사용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승리를 이 끌어내는 전략, 전술 등의 요소를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말 의 뜻은 승리를 위해 은밀하게 그 유리한 조건을 사전에 만들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48)

48) 노병천, “이순신 장군의 제승(제승)과 불패(불패) 전략,” 평화와 안보 제2권(2005), p. 51.

세(勢)를 형성하여 적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과 교전 결정권과 장소의 선택권 등을 확보함으로써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다. 승리를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상황을 유리하게 조성하여 승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순신의 군 사적 천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난 후 한산도에 제승당 (制勝堂)을 지어 거기에서 모든 작전계획을 세우고 또 여러 장수들과도 의논하였다.

제승당은 운주당(運籌堂)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는데,운주당이란 이름은 한산도에서만이 아니라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주둔하는 곳에 편의상의 명칭으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 것으로 결국 운주당과 제승당은 같이 불려 진 것으로 믿어진다.

이순신은 제승사상에 기초하여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선제공격전술, 함포포격전술, 화공전술, 진법전술, 기만작전과 심리전, 포위섬멸전등 다양한 전술을 전투상황에 맞게 창의적으로 구사하여 모든 해전에서 연전연승의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했다.

둘째로 전쟁에 대한 수행 신념은 이순신의 군사적 천재성에서 엿볼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군사적 천재에 관 한 내용은 손자병법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임진전쟁과 같 은 결과도 이순신이 군사적 천재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 다.

이순신은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지식과 인격수양 및 무예 를 연마함으로써 문무를 겸비한 장수이면서도 군사력 운용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하였다.

임진전쟁 난중일기에 기록된 내용에도 군사력 및 전략전술 연구,군사시설 및 병영 점 검,활쏘기,거북선 건조 및 전투실험 등 이순신은 자신을 포함하여 지속적인 훈련과 지휘체계를 정립하는 데 매진하였 음이 잘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타고난 천재적 군사적 자질은 바로 직관력과 혜 안,그리고 공간 감각이다. 이순신은 어떤 사물을 보면 즉각 적으로 속성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력과 혜안이 이순신이 냉정함과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이를 토대로 왜군과의 전투를 연구하는 이 순신은 수군의 전략을 ‘왜의 증원 및 병참선 차단’에 두고 해전에서 결정적 전투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정과 주요 장수들은 ‘왜군은 섬나라 사람들이므로 육전에 취약’하다고 판 단하고,육지에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만약 조선이 육지에서 싸울 수 있도록 육군만 건설하고 수군을 건설하지 않았다면 임진전쟁의 상황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순신은 수군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극히 제한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수군에 필요한 재원을 자체적으로 확보 하기 위해 해로 통행첩49)을 발행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다. 50)

49) 해로 통행 첩 제도의 시행은 이순신의 통제영 수군 입장에는 백성과 왜군 세작을 구별하는 군사적 통제 수단이 될 수 있고, 어민 등 피란민들의 처지에서는 수군으 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는 방법이다. 피란민은 배에 싣고 다니는 곡식 중의 일부를 통제영에 주면 되는 것이고, 수군이 지키는 안전한 곳에서 생활할 수 있어 상생하는 제도이다.

50) 최학삼, “이순신의 수군재건과 특별조세 징수에 관한 연구,”JOCT Vol.4, No.2, 2018, pp. 10~11.

이순신은 공간감각을 가지고 작전구상과 현장의 피아 상황 을 고려하여 전투에 임했다. 제승당에서 장수들과 의논을 하 는 것은 작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겠지만, 전투를 해야 할 지역의 기후와 날씨,지형 조건,피아 전략과 전력 및 전술의 차이등 제 요소를 고려하여 논의한 다음 현지에 가서 재차 관찰한 뒤 전투에 임함으로써 승리를 달성하였다.

이러한 전쟁 경험을 통해서 향상된 육안과 심안(心眼) 능력은 적과 아군의 상태와 지형에 맞는 공간 감각을 토대로 승리할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완승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의 전투수행 신념은 한산도대첩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순신은 국가전략 목표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군사전략을 구사하였다.

임진전쟁 당시 전라도 지역의 지상전에서 결정적 전투를 하는 것보다 한산도에서 일본 수군과 해상에서 결정적 전투를 하는 것이 국가전략 목표 달성에 최대 이 점으로 판단하여 한산도에서 결정적 전투를 하였다.

이순신은 수륙양면으로 해상 보급로와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확보하여 한양과 평양으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전략을 꿰뚫어 본 것 이다.

이러한 결정적 전투를 하기 위해 이순신의 솔선수범 리더십, 지형의 이점 활용, 정보작전, 기만작전 및 심리작전, 포위섬멸작전, 유인격멸작전, 창의적인 학익진 전법 활용 등은 이순신의 전쟁에 대한 임전필승의 수행 신념에서 발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전쟁 성격과 수행 양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민관군 통합방위작전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총력전 사상을

볼 수 있다.

당정논쟁과 문약한 군사 운용으로 관과 군의 전 력이 미미했지만, 전국 각 지역 각 계층에서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 합동으로 일본군과 전투하였다.

한산도대첩 간에 육지 에서는 권율, 황진, 이정란, 이광을 위시하여 전주성을 의병과 관군이 지키어 전라도 지역으로 공격하는 일본의 수륙양 면작전을 육지에서 방어할 수 있었다.

이순신과 전라도 합동군은 육군 및 수군 전력을 통합하여 합동작전을 구사하였다.

1592년 7월 8일 일본군이 지상과 해상으로 공격하여 전라도를 포위하여 점령하고 한양에서 평양으로 진출하는 일본군 의 보급로를 원활히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전라도 지역의 지상군과 수시로 연락하면서 합동작전을 하였다.

해상에서의 패배는 전라도 함락과 동시에 일본군의 보급로를 열어준다는 판단으로 한산도에서 결정적 전투를 하기로 하였 다.

이순신은 비록 여수에 본영을 둔 전라좌수사 사령관이었 지만 경상우수사 지역인 거제지역까지 출병하여 전라우수사 이억기 사령관, 경상우수사 원균 사령관과 해상에서 합동작전 55척의 함선으로 일본군 야시모토 73척에 대응하여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는 육군 및 수군, 의병과 백성이 함께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총력전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은 전장의 지형과 정보 그리고 리더십을 잘 활용하여 전투현장에서 최상의 전투 승수효과를 발휘하도록 지형과 사람을 활용하였다.

지형과 정보를 이용한 선승이후구전(先勝 而後求戰)의 자세로 견내량의 좁은 해로의 수심과 물살을 이용한 적을 기만하고 유인하여 넓은 지역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판옥선으로 수성을 쌓고 와타나베의 쇄기전법이 말려들도 록 유인하였다.

학익진을 편성할 때도 함선의 장단점과 지휘관의 능력과 태세를 고려하여 편성하였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리더십과 성격을 고려하여 편성하였다.

일본 안택선을 가장 지근거리까지 유인하여 포위섬멸이 가능하도록 지휘의 통일과 대담성을 유지하였다.

일본군이 의기양양하게 학익진 전법에 말려들었을 때 함포와 판옥선의 기능을 잘 조합하고 화약의 양과 교란탄을 이용하고 판옥선의 급선회 능력을 이용하여 일본 해군 77척을 섬멸하고 와카자키는 도주하고 14척만 수습하여 패주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전과확대하여 부산진 등 일본 함선을 추가로 격침하여 더 이상 수군 전력이 발휘되지 않도록 하였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상에서 전투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하드웨어(판옥선과 거북선)와 소프트웨어(이순신 창의적 전법)의 조합이다.

판옥선의 기능과 거북선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창의적인 전법이 조합되어 한산도대첩에서 일본 수군 와타나베 야스하 쇄기전법이 먹히지 않도록 했다.

이런 전법의 변화를 일본군이 알아차릴 때는 대응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건설

국가는 국가안보를 위해 제반 위협요소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응요소를 도출하여 이를 획득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 이게 된다. 특히 국가안보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요소 중에서 무엇보다 군사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제한된 자원 범위 내에 서 군사력을 건설하게 된다.

군사력 건설은 양적 확충과 질적 확충을 구분할 수 있다.

양적 확충은 소총의 경우를 예를 들 면 M1 소총보다 성능이 뛰어난 K2 소총으로 무장하는 것이고, 직책에 따라 K3 기관총 또는 K1 기관단총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51)

또한, 군사력건설에 대해 유형·무형전력 측면에서 보면 유형전력은 전력구조의 현대화, 부대 수, 전투기, 항공 모함 등과 같은 것을 갖추는 것이다.

무형전력은 정신력 및 체력, 단결력, 준비태세, 훈련수준 등과 같은 군사능력을 개 발하고 건설하는 것이다.52)

51) 김유석, 앞의 책, pp. 182~183.

52) 이필중, “한국의 군사력 건설의 문제점 및 발전 방안,”한국의 군사력건설과 전략 (서울: 국방대학교, 2002), p. 4.

눈에 보이는 유형전력은 병력과 무기, 장비 등이다.

무형전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투력으로 정신전력, 사기, 리더십 정도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당연히 포함되고 다른 중요한 무형전력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부족한 유형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무형전력을 높이기 위해 수군 병사 들을 철저히 훈련시켰다.

서로 믿고 단합하게 했으며, 인상적인 연설을 통해 부대정신을 드높였다.

이순신의 첫 전투였던 옥포해전이 임박했을 때, 휘하 병사에게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신중하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라고 지시하며 전장에서 지휘통일을 하였다.

명량해전 출전을 앞두고 이순신의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 生) 정신훈화는 부족한 유형전력을 보충하는데 충분한 연설 이었다.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건설에 있어서 이순신은 양적 확충 못지않게 질적 확충이 역시 매우 중요하고, 유형전력 못 지않게 무형전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소신있게 준비 한 것이다.

부하 장병의 훈련에도 창의적인 방법과 용병술을 이용하여 반복 훈련을 한 다음에 실전에 투입하였다.

1594년 3월에 있었던 제2차 출정은 첨자진(尖字陣)과 학익진(鶴翼陣)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전승불복 즉, 같은 전술을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고 변형하여 학익진 전법을 응용하였다. 일본 안택선 쇄기 식 공격 전술을 역이용하여 최대한 지근거리까지 유도하여 수성을 쌓아서 방어적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판옥선의 기동의 이점과 함포의 장점을 이용하여 판옥선을 순식간에 회전하여 함포를 이용하여 대량살상을 하였다. 살상지대를 이 용하였고 교란탄과 환구탄을 병용하여 대량살상을 유도하였 다. 군사혁신을 통한 상대적 우위 점령 및 군사혁신의 전투현 장에서 유연성 있는 적용으로 상대적 전력우위 및 전투력의 상승효과를 달성하였다. 임진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군의 전술능력을 향상시킨 병서는 기효신서(紀效新書)였다.

기효신서가 도입된 시기 를 1593년 2월 무렵이라는 보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기효신서의 완질 혹은 중요내용 일부가 도입된 것은 이보다 2~3년 앞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임진전쟁 발발 직전인 1592년 3월 5일 좌의정 유성룡이 보내준 병서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을 읽고 이순신은 “참으로 특이한 전술”이라고 탄복했으며, 그 내용이 해전과 육전 그리고 화전(火戰)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기효신서의 내용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기 전에 “저도 방략(方略)에 따라 방비를 튼튼히 하고 적을 제압할 제반 사항을 각별히 조치 했다.”라고 밝힌 점은 이순신이 체득하고 있던 고전병서(古典兵 書)와 다른 전술내용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보낸 병서를 보고 탄복했고, 방략에 따라 적을 제압할 조처를 한 이순신의 전술은 바로의 기동항해와 전투진 형(학익진)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기효신서의 전술을 그 대로 실전에 적용할 수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기효신서에서 다루는 무기와 조선 수군이 사용하고 있는 무기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즉 기효신서의 무기체계는 경화기인 조총, 불랑기(신비포, 호준포) 육합총, 백자총과 투척 무기인 탕관, 산화포, 이두표, 그리고 화살류의 화전 등이었다면 임진전쟁 당시 조선 수군의 무기는 중형화기인 천자, 지자, 현자, 황자 포이며, 화살류로 장전과 신기전 그리고 편전이었다.

실전 무기가 다른 상태에서 기효신서의 전술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승전의 전술이 될 수 없다.

또한 이순신이 해전에서 자주 사용 했던 전술은 학익진이었지만 기효신서의 전투진형에는 학익진 이라는 명칭이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작성한 전 투편성은 중위장, 좌부장, 중부장, 유군장(遊軍將), 우부장, 후부장, 좌척후장, 우척후장, 한후장, 참퇴장, 돌격장 등 장수의 전투임무가 부여되어 있지만 기효신서수조에는 위와 같은 직무 편성이 없다.

이순신이 작성한 직무편성표는 세종 때부터 시행 되었던 지상군의 전술인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직무편성과 일치하고, 세종 때 발간된 계축진설(癸丑陣設) 진도법(陣圖法)의 행군 진(陣)과 유사하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이순신이 조선 고유의 전술과 새로 도입된 기효신서의 전술을 응용하여 실전의 전술로 활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이순신 함대가 기동항해를 하다 적을 만나면 신속하게 전투 진형으로 전환하는 전술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유형전력에 있어서도 이순신은 창의적 군사혁신 마인드를 가지고 거북선과 같은 신무기를 전력화하였다.

이순신이 전력화한 거북선의 실마리는 고려의 과선(戈船)과 검선(劒船)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선이라는 이름은 뱃전에 짧은 창검을 빽빽하게 꽂은 데서 기인했다.

이런 모양의 배를 만든 까닭은 11세기 동북 지방에 침입해온 여진족 군사들이 한꺼번에 수 십명씩 고려의 배에 뛰어들어 근접 백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뱃전에 창검을 빽빽하게 꽂은 이유는 근접 백병전을 선호 하는 여진족 군사들이 뱃전 위로 쉽게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 기 위한 것이다. 검선(劒船)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절요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고려 우왕 3년(1377년) 만호(萬戶) 손광유 (孫光裕)가 강화도 착량(窄梁)에서 왜구와 전투 중 부상을 당했는데, 검선을 타고 빠져나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세종실 록에는 검선(劒船)에는 한 자 되는 창과 칼을 뱃전에 벌려 꽂아서, 적이 칼을 뽑아 들고 배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이렇게 볼 때 고려 때부터 조선초까지 수군에서 과선과 검선을 운용하게 된 공통의 이유는 근접 백병전에 능한 여진족이나 왜구가 우리의 함선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대부터 동이(東夷)라고 불리면서 활쏘기에 능했던 우리 군사들이 근접전인 칼싸움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거북선(龜船, 귀선) 또한 마찬가지다. 거북선은 뱃전 위로 거북 등 모양의 개판(蓋板)을 덮어서 칼싸움에 능한 적이 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과선이나 검선이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의 함선이다.

거북선이란 명칭은 조선조 태종실록에 처음 나온다.

태종 때 처음 등장했으나 실전 배치되지는 못했다.

1592년 이순신에 의해 비로소 실전에 쓰이도록 건조됐다.

임진전쟁 시기 운용된 거북선의 특징은 임진년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 간략한 내용이 있고, 이순신의 조카 이분 (李芬, 1566~1619년)이 쓴 이순신 ‘행록(行錄)’에 약간 더 상세한 내용이 있다.

이분은 여러 차례 통제영에 가서 거북선을 관찰할 수 있었으므로 장계 못지않게 신뢰성이 높은 자료다.

임진전쟁간에 거북선의 부족한 내용을 보완해주는 것이 1795년 발행된 이충무공전서이다.

귀선도설에는 당시 통영 에 있었던 통제영 귀선과 여수에 있었던 전라좌수영 귀선의 그림을 수록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기록했다.53)

이후 임진전쟁이 발발하는 임진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에 보낸 장계(狀啓)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에 거북선이 본격 등장하기까지 그 어디에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나 활동 흔적이 없다.

이렇게 볼 때 임진전쟁 기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창제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54)

다. 전시에 군사력으로 전쟁수행

군사력을 이용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전 쟁 발발 시 군사력을 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군사력을 활용 하는 용병은 이뿐만 아니라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군사력 운 용부터 전쟁수행 등을 위해 운용하되,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운용이다.

둘째, 국가목표 및 국가안보목표를 달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한다.

셋째, 대관세찰의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군사력을 운용하는데 있어서 인간존중 정신이 반드시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55)

53) 최권호, “임진왜란기 거북선, 어떻게 만들어지나" 국방일보(2022년 8월 18일 9면).

54) 임원빈c, “임진왜란기 거북선, 왜 만들어야 하나?,”국방일보(2022년 8월 16일 9면).

55) 김유석, 앞의 책, pp. 211~218.

이러한 측면에서 이순신이 전시에 군사력으로 전쟁수행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군사력 운용이다.

전쟁의 억제는 상대방이 전쟁을 일으키면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여겨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막강한 억제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조선은 일본 통신사의 보고에 의해서 전쟁이 일어나지않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이순신은 전쟁연구와 교육 훈련을 통해 전쟁에 대비하므로 억제를 달성할려고 군사력을 운용하였다.

임진전쟁전 이순신은 백의종군 후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을 때 실제 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모집하고 확보된 전함과 거북선을 정비하여 지속해서 전쟁준비를 하였다.

정유재란시에도 용인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일본군은 수로를 확보하여 보급선이 확보되면 한양으로 진격하여 전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으나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리로 해상 보급로가 막혀 결국 전쟁을 포기하여 철수하게 되었다.

12척의 배로 일본 수군 133척을 궤멸시킨 이순신의 리더십과 탁월한 군사력 운용으로 전쟁이 더 이상하지 못하도록 억제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둘째로 국가목표 및 국가안보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군사력을 운용하는 것이다.

정유재란시 조선의 군사전략 목표는 일본군이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해군과 육군의 연합을 차단하고 전쟁지속능력을 차단하여 국토를 방위하는 전략이었다.

전략개념은 남해안에서 일본군이 수륙양면으로 협동 공격하는 것을 차단하고 해상에서 적을 격멸하는 것 이다.

이에 대한 군사력 운용은 전라도 지역의 관군과 의병으로 전주성 함락을 방지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함선 55척과 거북선 3척으로 해상에서 전투하는 것이다.

국가전략 차원에서 수륙양면으로 협동하는 일본군을 해상에서 결정적 전투를 하여 적의 보급로 차단과 전략적 목표인 전라도 점령을 무력화하는 군사전략이다.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으로 일본 수군 133척에 대항하여 중과부적으로 후퇴하거나 해전에 패배하였다면 조선은 일본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 구국일념으로 명량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순신의 국가안보전략의 목표달성에 기여하는 군사적 혜안과 지혜를 발휘하는 군사전략가로서 모습이다.

이순신은 1592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된 이후 수군의 재건을 위해 30일간 60km의 대장정을 하던 도중에 선조의 교지를 받았다.

선조는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교지를 받은 다음 날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은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항명으로 여겨지는 장계를 올려 보냈다.

죽음을 각오한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하여 일본 수군을 남해안 진출을 차단하지 못한다면 일본군으로 남해안의 보급수송로를 확보하게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56)

56) 황현필, 앞의 책, pp. 294~303.

이순신의 군사전략적 판단은 남해안의 해상수송로를 차단하지 못한다면 일본군이 한양 점령 이후 평양으로 진격 하여 조선이 함락될 것으로 여겨 선조의 교지까지 거슬리며 수군을 재건한 것이다.

이는 이순신의 군사전략적 판단이 국가목표와 국가안보목표 달성에 기여한 것이다.

셋째로 대관세찰이 시각을 견지하여 군사력을 운용하는 것 이다.

소나무 숲을 보지 못하고 전나무만 보고 숲 전체를 전 나무숲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이순신이 해전에서 창의적인 진법 전술을 구사하였다.

병세(兵勢)에 있어서 진을 형성하는 것은 그 싸움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옥포, 당포, 한산도, 부산포 등 많은 전투에서 싸운 형태를 볼 때 대 동소이한 것 같지만, 그것을 병세면에서 볼 때 실로 다양한 모습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전장 상황에 따라 진형(陣形)에 변화를 창의적으로 적용하였다.

병진(兵陣) 형태로 볼 때 이 순신이 즐겨 쓴 것으로 볼 수 있는 기본 진법은 어린학익(魚 鱗鶴翼)·학익진(鶴翼陣)·어린진(魚鱗陳)·팔진기문법(八陣奇文 法) 등이다.

먼저 학익진법에 대해서 살펴보자. 학익진법 또는 어린학인은 옥포해전에서 첫선을 보인 이래 율포·당항포해전 등에서도 즐겨 사용하였다. 57)

57) 김강녕, 앞의 글, p. 236.

다음으로 어린진(魚鱗陳)을 들 수 있다.

특히 옥포해전 때에는 학익진도 첫선을 보이기도 했지만 어린진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어린진이란 대열로 진격할 때 큰 전선을 따르게 하며 대선과 소선이 모두 넓은 기폭을 올리게 하여 전선의 수가 많아 보이도록 하는 진법이다.

물론 이러한 진형만을 가지고 모든 전투를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형세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켜 적용하였다.

예컨대 어린진형에서 학익진을 바꾸기도 하고 또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합분산의 조합을 가미한 팔진기문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어린진법으로 기선을 제압하여 적을 포위한 뒤 팔진기문법으로 적의 함대를 쳐부수는 것이다.

이순신은 단일적인 처방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장점과 우세 한 것 기능을 조합하는 하이브리드적인 전법으로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에서 종말을 알리는 전쟁을 한 것이다.

그동안 사용하였던 전법과 무기로 뻔한 전법을 구사하기보다 기 존의 전법과 무기체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형된 무기를 개 발하고 모든 수단을 하나로 조합하여 지난번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전법의 지휘로 전쟁에서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군사적 천재만이 할 수 있고 이순신과 같은 명장만이 할 수 있는 특화된 군사적 혜안이다.

미래 전쟁 주인공은 연주장에 서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연주할 수 있는 지휘자만의 특권 이듯이 전장에서 모든 수단을 조합하여 맛있는 비빔밥을 누 가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넷째로 군사력을 운용하는데 있어서 인간존중 정신이 반드시 밑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문과 무를 접하였고,이를 토대로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백성과 병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떤 직책에서 어떤 임무 를 수행하더라도 이를 실천하였다.

주로 변방에서 근무하면서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고 장수가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면서 인간존중의 정신을 항상 밑바탕에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군과 해전 종료 후 몇 척을 남겨두고 적들이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패잔병들이 내륙에서 백성을 약탈하고 괴롭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애민사상이 해전 전술에까지 스며든 인간존중 정신이라 할 수 있다. 58)

58) 임원빈b, 앞의 글, pp. 30~35

라. 평시 국가안보 지원

국가안보에 대한 개념은 견해가 다양하지만, 국가안보란 국 내·외의 각종 군사·비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목표를 달 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 군사, 문화 등 여러 수단을 종합적으로 운용하여 당면하고 있는 위협을 효과적으로 배제 하는 것이다. 또한 일어날 수 있는 위협의 발생을 미리 방지 하여 나아가 불의의 사태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을 말한다. 오 늘날 안보개념은 안보행위 주체, 안보 영역, 안보유형이 확장 되고 심화하여 국제사회의 상호의존성, 비군사적 요소의 상대 적 증대, 인간안보 위협 해소 등 비전쟁 군사행동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평시 국가안보 지원’ 역시 범위와 영역이 자연스럽게 확대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 국가안보 지원은 어떻게 군사력을 지원 할 것인가에 주안을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평시 국가안보 지원은 이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재해재난, 감염병 확산, 환경 오염, 식량안보 등 인간안보 등과 같은 포괄적 안보개념을 포함하여 다양하게 확대되었다. 59)

59) 김유석, 앞의 책, pp. 237~238.

이순신의 평시 국가안보 지 원분야 군사사상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이순신은 해상에서 전쟁의 엄중한 상황에서 백성의 생계와 안전을 늘 배려하였다.

어민의 안전과 생업을 보장하기 위해 바다에 경계선을 설치하고 안전이 확보된 지역에서만 어로를 허용하였다.

어민이 경계선을 넘어 고기잡이한 경우에 군령을 적용했을 정도로 엄격했다.

군과 관련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위험지역에 고기잡이하다 일본군에게 사로잡히면 수군과 관련된 정보가 일본군에게 전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민을 위해 안전이 확보된 지역에서만 어로를 허용한 것이 었다고도 할 수 있다. 60)

임진전쟁 당시는 포괄적 안보개념이 없었지만, 어민을 위한 이순신의 배려는 지금의 포괄적 안보 개념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상륙 이후 파죽지세로 5월 3일 한양을 함락했다.

일본군의 침략 축선에 있던 수많은 영남의 백성들이 호남지역으로 피란길에 오르자 이순신은 아래와 같이 장계를 조정에 올린다.

여기에서 이순신은 백성들이 기아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자 했던 사상은 지금의 식량안보 차원 백성의 생명과 삶을 보장 하고자 하는 애민정신이 아닌가 한다.

“영남의 피란민들이 본영 경내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자들이 200여 가구나 되는데, 각각 임시로 살 수 있도록 하여 겨울을 지내게 하였는데, 지금은 구호할 물자를 마련할 길이 없습 니다. 비록 사변이 평정된 뒤에는 제 고장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당장 눈앞에서 굶어 죽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보낸 서장(書狀)에 의거하면 전일 도착한 비변사의 공문에, ⟨이번에 여러 섬 중에서 피란하여 농사지을 만한 땅이 있으면 피란민을 들여보내어 살 게 하되, 형편을 참작하여 시행하라⟩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신은 피란민들이 들어가 살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는데, 돌산도 만한 곳이 없습니다.” 61)

60) 방기철, 앞의 글, p. 113.

61) 임원빈b, 앞의 글, p. 52.

마. 평시 국가정책 지원 수단으로서 군사력 운용

평시 국가정책 지원 수단으로서 군사력 운용을 군사사상 분석 범주에 포함하는 이유는 평시부터 군은 전쟁 등 국가 위기관리를 위해 준비된 상태이므로 국가 내에서 다른 조직 이나 기능보다 인적·물적 자원을 즉각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한된 국가 예산 대비 대체 능력 을 투입할 때 막대한 추가 예산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시 우선 군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쟁에 대비하는 임무 이외 평시에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로써 군사사상 차원에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군과 관련한 국가정책을 구현하는 것과 국가가 정책을 구현할 수 있도록 군이 지원하는 것은 왜 중요한지 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둘째, 세계의 일원으로서 국제 평 화에 기여하는 것은 직·간접적으로 국가에 어떤 이익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셋째, 재난대응 및 지원, 공익 지원, 국가기능 회복 지원 등과 같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 이런 것들이 군사사상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62)

62) 김유석, 앞의 책, pp. 255~256.

이러한 차원에서 이순신의 평시 국가 정책 지원 수단으로서 군사력 운용에 관한 군사사상을 고찰 하고자 한다.

임진전쟁 당시에 군이 국가정책을 지원하는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이순신이 전쟁터에서 부하 장병이 전사한 경우에 시신을 배에 실어 고향으로 보내주고, 고향에 있는 처와 자식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한 구휼(救恤)의 조치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해전에서 전사한 부하 장수와 군졸들을 위해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했던 사례는 지금의 국가가 시행하는 보훈 정책을 전투현장에서 구현한 사례이다. 63)

바. 평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군사력 관리 및 군 운영

평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군사력 관리 및 군 운영은 큰 범위에서 보면 평시 양병의 한 분야이다.

하지만 김유석은 군사사상을 구분할 때 순수한 양병 분야는 두 번째 범주로 구 분하면서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건설(戰時 養兵)’로 분류하였다.

이는 군 조직편성에 따라 인원, 장비 및 물자를 활용하여 부대를 갖추고 교육훈련 등을 통해 준비태세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전쟁에 대비한 ‘순수 양병’ 분야이다.

반면에 여섯 번째 범주는 두 번째 범주를 통해 양병한 군사력을 효율성·경 제성을 고려하여 평시 최적의 상태로 ‘유지관리’하는 것에 주 안을 두는 것이다. 64)

이러한 관점에서 이순신의 평시 효과적 이고 효율적인 군사력 관리 및 군 운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학익진이 자주 등장하여 학익진은 이순신이 고안한 독창적인 전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학익진은 조선 문종이 편찬한 병서인 동국병감에 기록 되어 있으며 조선군은 학익진을 잘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학익진은 수군을 위한 진법이 아니라 육지에서도 운용하는 기본 진법인 셈이다. 65)

63) 임원빈b, 앞의 글, pp. 17~19.

64) 김유석, 앞의 책, pp. 268~269.

65) 유성룡, 앞의 책, pp. 153~154

이순신은 이러한 기본 진법을 익히 알고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지상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군사력을 어떻게 운영하고 싸워서 이길 것인가 평시부터 준비하 였다.

이순신은 민간요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민간 어선과 민간인을 활용하여 군사작전을 하였다.

민간인을 세작 (細作)으로 운용하여 일본군의 활동을 파악하고 첩보로 활용 하였다.

또한, 부족한 함선을 극복하고 보급지원, 구조를 위 해 민간어선을 동원하였다.

명량대첩 간에 군사력 열세를 극 복하기 위해 13척의 전함과 함께 민간어선이 동원되어 전투 하였다.

이순신은 해군력을 모집할 때도 탁월한 리더십과 민군 친화력으로 많은 국민을 모집하였다.

이순신의 국민에게서 신망은 선조가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군사력은 유사시에 정규군 외 많은 민간인을 동원하여 활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민간인에 대한 두터운 신망은 유사시 군사작전의 승패와도 같은 것이다.

지금의 민군관계는 ‘민’과 ‘군’이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각의 영역에 충실하면서 상호 융합되고 협조 및 지원하여 이를 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가목표와 국가안 보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사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접근할 수 있다.

첫째, 군이 민의 영역도 충분히 수용하고 활용 해야 한다는 점이다. 군이 국가안보목표나 국방목표를 달성하 기 위해 군사 분야 외에도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기술·자연 환경 분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둘 째,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기술·자연환경 분야가 국가목표 를 달성하는 데 대해 군이 기여하도록 지원하고 협조해야 한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400여 년 전에도 두터운 민군관계를 이용한 평시 효율적인 군사력 관리 측면에서 리더 십을 발휘한 것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의 기록이 남아있는 1,472일 중 134회 군 령을 집행했다. 주로 전쟁을 준비하는 평시에 집행하였고 전시 상황을 감안해도 빈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66)

66) 방기철, 앞의 글, pp. 91~92.

이순신은 전쟁준 비 차원에서 전투준비를 점검하며, 군관들과 색리(色吏)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으면 곤장을 쳐서 전투준비태세에 소홀함을 없 도록 하였다.

또한 이순신은 애민정신을 발휘하여 부하가 백성에게 해를 끼치면 곤장을 치면서까지 군기강을 확립하였다.

이순신의 군령집행은 주로 전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집행하여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러더십이다.

이는 양병한 군사력을 평시 최적의 상태로 ‘유지관리’하는 것에 주안을 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남도의 비경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개인을 위해 조직을 이용하거나 권력을 남용하 지 않았다.

현재의 군사력으로 전투할 수 있도록 진법을 연구 하기도 하고,장차 어떠한 전쟁양상이 나타날지 예측하면서 진법을 연구하고 이를 위하여 판옥선을 추가로 건조하고 거북선을 만들었으며,편전과 큰 화살을 만드는 등 군사력을 건설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갖춰진 무기체계의 기능을 제대로 알고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였다.

이 순신은 조정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부하를 적재적소에 활 용함으로써 수군의 재건을 독자적으로 해결하였으며,적극적인 첩보활동을 통해 적과 지형 및 기상을 알기 위해 노력하였다.

획득된 첩보를 토대로 반드시 현장 확인을 통해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평시 이순신의 머릿속에는 전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즉, How to fight?를 늘 생각하는 사상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사. 이순신의 대표적인 군사사상

앞에서 분석한 범주별 내용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핵심 적이며 대표할 만한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도출하고자 했다. 먼저 범주별로 도출한 핵심 군사사상을 분석하여 이 중에서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내용을 도출한 다음 이를 다시 압축하 여 핵심사상을 도출하였다.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범주별 핵심 사상을 토대로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이순신의 사상을 도출하였다.

이순신의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사상은 총력전, 만전, 속승, 제승, 무형전력, 군사혁신, 임무형 리더십, 애민사상, 보훈사상, 엄격한 군령 집행으로 선정할 수 있다.

 

<표4> : 생략(첨부 논문파일 참조)

도출된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사상을 다시 압축해 보면 만 전, 속승, 제승, 군사혁신, 무형전력은 전장우위로 전쟁 승리 를 조성하기 위한 여건 조성과 전쟁 종결 태세로 ‘총력전으로 강력한 전쟁여건 조성과 속전속결’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임무형 리더십, 애민사상, 보훈사상은 최고 사령관의 책임감과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생존을 최고 덕목으로 생각하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사상을 견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절차를 통해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사상 중에서 최종 압축된 핵심사상은 ‘총력전, 속승, 제승, 군사혁신, 임무형 리더십, 애민’ 등 으로 선정할 수있다.

이렇게 압축된 핵심사상을 중심으로 이 순신의 군사사상은 ‘국가 총력전으로 군사혁신과 임무형 지휘를 통한 속전속결전’이라 말할 수 있다.

5. 결론

성웅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연구는 단편적으로 해전과 일대기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 무과 급제 이후 함경도 조산보 만호와 녹둔도 둔전관 공직 생활과 1차 백의종군, 임진전쟁 당시 백전백승, 2차 백의종군, 그리고 백척간두의 국가위기 속에서 삼도수군통제사 관직을 제수하는 등 파란 만장한 인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순신은 선조의 수군 재건 불가의 교지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으로 13척의 전함으로 130여 척이 넘는 일본 수군을 남해안에 수장시켰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신분에서 국가를 위하는 조정 대신들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유지하여 조선 수군이 궤멸된 후에도 이를 다시 재건하여 대규모의 일본 수군을 일격에 격침하게 된 것이다.

무조건 임금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가를 위하여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임금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이익에 합하면 출전하고 이익에 합하지 않으면 출전하지 않았던 것은 개인에게 이롭지만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사상의 6가지 범주를 중심으로 이순신의 군사사상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첫째, 전쟁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만전사상(萬全思想), 속승사상(速 勝思想), 제승사상(制勝思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쟁에 대한 수행 신념은 이순신의 군사적 천재성에서 엿볼 수있었다.

전쟁 성격과 수행 양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민관군 통합방위작전으 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총력전 사상을 볼 수 있다.

둘째,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건설은 양적 확충보다 질적 확충이 중요하고, 유형전력보다 무형전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 식하여 소신있게 준비하였다.

훈련에 있어서도 창의적인 방법과 용병술을 이용하여 반복 훈련을 한 다음에 실전에 투입하 였다.

특히, 이순신은 창의적 군사혁신 마인드를 가지고 거북선과 같은 신무기를 전력화하였다.

셋째, 전시에 군사력으로 전쟁수행으로 이순신은 13척의 전함으로 일본군 130여 척의 전함을 수장시키는 탁월한 임무 형 지휘와 군사력 운용으로 전쟁을 종결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국가전략 차원에서 수륙양면으로 협동하는 일본군을 해상에서 결정적 전투를 하여 적의 해상 보급로와 전략적 목표인 전라도 점령을 좌절시켰다.

전술적 차원에서는 학익진법 등을 형세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켜 어린진형에서 학익진을 바꾸기도 하고 또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합분산의 조합을 가미한 팔진기문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넷쩨, 평시 국가안보 지원 차원에서 이순신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무를 전장에서 발휘하여 피란민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대민사상과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다섯째, 국가정책 지원 수단으로서 군사력 운용으로 이순신 은 전사자가 발생시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고, 미망인과 가족 에게 구휼조치를 시행한 것은 국가의 보훈정책을 전투현장에 서 구현한 사례이다.

여섯쩨, 평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군사력 관리 및 운용으로 이순신은 평시에 형성된 대군 신뢰로 전시에 민간어선과 민간인을 군사적으로 활용하여 군사작전을 가능하게 하였고, 평시 군령 집행을 엄격하게 하여 군사력을 최적의 상태로 ‘유 지관리’하는 것에 주안을 둔 것에서 볼 수 있다.

전략문화를 일반적으로 전쟁 및 전략에 관해 한 국가가 갖는, 다른 국가와 비교하여 명확히 구별되는 신념, 태도, 행동 패턴으로 본다면67) 이순신의 군사사상은 우리나라 고유의 전략문화 속에서 형성된 고유의 군사사상이라 할 수 있다.

67) 박창희b, 앞의 책, pp. 391~393.

AI 기반 과학기술 강군 육성 목표로 ‘국방혁신 4.0’ 계획을 수립 하고 추진하고 있다. 68)

68) 국방부 군구조개혁 추진관실, “AI기반과학기술강군육성목표… 미래안보환경에맞는 군사전략정립,”국방일보(2022년 9월 28일), https://pdf.dema.mil.kr/pdf/pdf Data/2022/20220928/B202209280801.pdf(접속날짜: 2022. 10. 3.).

추진중점 중 하나인 ‘미래 안보환경에 부합하는 군사전략 발전’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전략문화 속에서 본 연구에서 도출된 이순신의 ‘국가 총력전으로 군사혁신 과 임무형 지휘를 통한 속전속결전’ 군사사상을 고려하여 발전되길 기대한다.

현대 군사사상 이론으로 분석한 조선시대 이순신의 군사사상 연구 결과는 4차 산업혁명과 첨단과학기 술을 바탕으로 국방혁신을 도모하는 국가 및 군사차원에서 국가안보전략 수립과 군사전략 수립 활용에 유용한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초 록

본 연구는 충무공 이순신의 행적과 전쟁을 통해 나타난 군사사상을 현대적 관점의 군사사상 이론으로 고찰하였다. 연구범위는 『난중일기』, 『징비록』, 『이순신의 바다』 등의 서적과 각종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등에 나타난 전쟁 준비와 전쟁 수행과정에서 발휘하였던 군사전략과 전술, 국가관, 애민사상을 선행연구하였다. 이순신의 군사사상은 선행연구에 기초하여 김유석의 군사사상 이론으로 임진전쟁과 명량대첩, 노량해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연구한 결과로 이순신의 군사사상은

첫째, 전쟁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만전사상(萬全思想), 속승사상(速勝思想), 제승사상(制勝思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쟁에 대한 수행 신념은 이순신의 군사적 천재성에서 엿볼 수있다.

또한 통합방위작전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총력전사상도 있었다.

둘째, 군사력 건설은 양적 확충 못지않게 질적 확충이 중요하고, 유형전력 못지않게 무형전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소신있게 준비하였다.

훈련에 있어서도 창의적인 방법과 용병술을 이용하여 반복 훈련 후 실전에 투입하였다.

특히, 이순신은 창의적 군사혁신 마인드를 가지고 거북선과 같은 신무기를 전력화하였다.

셋째, 용병에 있어서는 이순신은 탁월한 리더십과 군사력 운용으로 전쟁을 종결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명량대첩간 국가전략 차원에서 일본군을 해상에서 궤멸시켜 해상 보급수송로 차단과 전략적 목표인 전라도 점령을 좌절시켰다.

전술적으로 학인진법을 형세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켜 어린진형에서 학익진을 바꾸기도 하고 또는 이것을 바탕으로 이합분산의 조합을 가미한 팔진기문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넷째, 평시 국가안보 지원 차원에서 이순신은 피란민의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안전을 보장하는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다섯째, 국가정책 지원 수단으로서 군사력 운용 측면에서 이순신은 전사자가 발생시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고, 미망인과 가족에게 구휼조치를 시행한 것은 국가의 보훈정책을 야전지휘관이 전투 현장에서 구현한 사례이다.

여섯째, 평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군사력 관리 및 운용 측면에서 이순신은 평시에 형성된 대군 신뢰를 바탕으로 전시에 민간어선과 민간인을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평시 엄격한 군령 집행은 군사력을 최고의 전투준비태세로 ‘유지관리’하게 하였다.

범주별로 분석한 내용을 압축한 이순신의 핵심 사상은 ‘국가 총력전으로 군사혁신과 임무형 지휘를 통한 속전속결전’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순신 군사사상 고찰은 현대 군사사상 이론을 정립과 국가안보전략 및 군사전략 수립에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주제어 군사사상 이순신 전쟁 군사혁신 군사전략

This study examines the actions of Yi Sun-sin of Chungmugong and the military thought that emerged through war with a modern perspective on military thought theory. The scope of the study is a prior study of military strategies and tactics, national views, and philanthropy that were shown in books such as 『Nanjung Ilgi(亂中日記)』, 『Jingbirok(懲毖錄)』, 『The Sea of Admiral Yi Sun-sin』 and papers published in various academic journals in the process of preparing for war and conducting war. Based on the preceding studies, Yi Sun-sin's military thought was examined by Kim Yu-seok's military thought theory, focusing on the Imjin War, the great Myeongnyang sea war battle, and the Noryang sea war battle. As a result of the study, the military thought of Admiral Yi Sun-sin can be examined in the first, the recognition and understanding of the essence of war in Well-prepared Posture (萬全思想), Short war (速勝思想), and Made-up Win (制勝思想). His belief in war can be seen in Yi Sun-sin's military genius. There was also the idea of an all-out war effort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through integrated defense operations. Second, recognizing that qualitative expansion is more important than quantitative expansion and that Intangible fighting power is more important than tangible fighting power, the military power construction has been prepared with confidence. In training, creative methods and Military art were used to put into practice after repeated training. In particular, Admiral Yi Sun-sin had a creative military innovation mind and used new weapons such as the turtle ship. Third, in terms of mercenaries, Yi Sun-sin made a decisive contribution to ending the war with his excellent leadership and military force operation. In terms of the national strategy between the Battle of Myeongnyang, the Japanese forces were destroyed at sea, blocking the maritime supply route and the strategic goal of occupying Jeolla-do. Tactically, the Hakinjinbeop (鶴翼陣法) was changed in various ways according to the situation to change the Uhlinhakik (魚鱗鶴翼) form, or based on this, the Paljingimunbeop (八陣奇文法) with a combination of unity and dispersion was used. Fourth, in terms of supporting national security in peacetime, Yi Sun-sin provided a place for refugees to live and could get the ideology of Ae-min (愛民) Patriotism that guarantees safety. Fifth, in terms of military force operation as a means of supporting national policy, Yi Sun-sin sent the body to his hometown in the event of a dead person and implemented relief measures for widows and their families. Sixth, in terms of effective and efficient military force management and operation during peacetime, Yi Sun-sin was able to use civilian fishing boats and civilians militarily in wartime based on the trust in the army formed during peacetime. did. Yi Sun-sin's military thought, which compressed the core ideas analyzed by category, can be said to be 'a fast and decisive war through military innovation and mission-type command as a national total war'. This study of Yi Sun-sin's military thought will be a useful resource for establishing the theory of modern military thought and establishing national security and military strategies

Key word : Military Thought, Yi Sun-Sin, War, Military Innovation, Military Strategy

원고투고일 : 2023. 4. 2, 심사수정일 : 2023. 5. 17, 게재확정일 : 2023. 6. 5.)

軍史 第127號(2023. 6.)

 

KCI_FI0029662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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