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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고구려(高句麗)최후(最後)의 戰爭/서영교.중원대

Ⅰ. 머리말

Ⅱ. 兩唐書 契苾何力傳의 時空間

Ⅲ. 薛賀水 전투와 戰線의 一進一退

Ⅳ. 熊津都督府 軍團의 北進과 전멸

Ⅴ. 新羅와 唐 연합군의 平壤城 함락

Ⅵ. 맺음말

Ⅰ. 머리말

664년 10월 淵蓋蘇文이 사망하고,1) 이듬해 초 고구려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장남 男生과 차남 男建이 충돌하면서 나라가 두 쪽이 났고, 장남이 밀리자 666 년 5월 唐에 원군을 요청하였다.2) 666년 6월 唐高宗은 고구려 내전 개입을 결정하였고, 9월에 군대를 보내 玄 菟城에 있는 男生을 구출했다. 667년 2월 新城 앞에 도착한 李勣의 주력은 7개 월간의 공방전 끝에 9월 성을 함락시키고, 薛仁貴가 이끄는 唐軍이 金山의 大會 戰에서 승리하여 南蘇·木底·蒼岩 3城을 장악한다. 동시기에 李勣은 압록강 하 류 쪽으로 진격해 大行城을 차지하여 唐으로부터 안정적인 수로 보급을 받을 수 있는 항구를 얻었다. 이로써 고구려에서 唐軍의 월동이 가능하게 되었다.3)

1) “是月,高麗大臣盖金終於其國.” 『日本書紀』 卷27, 天智天皇 3年(664) 10月.

2) 『舊唐書』 卷199, 高句麗傳.

3) 徐榮敎, 「唐의 고구려 內戰介入과 新城·大行城 점령」 『中國史硏究』 131(대구, 중국사학 회, 2021).

池內宏에 의하면 667년 9월 大行城 점령 이후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이전 까지 李勣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한 적이 없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전선이 교착 되었다고 보았다. 667년 10월 2일 李勣이 평양 북쪽 200리까지 남진한 사실을 명기한 『삼국사기』(문무왕 7년 10월 조)의 기록을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10월 2일 평양 북쪽 200리 지점에서 강심을 한성으로 보내 신라에게 평양 진격 을 독려한 뒤 11월 11일 이전에 그곳에서 철수한 唐將은 李勣이 아니라 그가 해 상으로 파견한 郭待封이라고 했다. 대동강이 아니라 평양 북쪽 200리 부근에 郭 待封이 상륙했다는 것이다.4) 고구려 최후의 전쟁을 서술한 池內宏의 논고는 唐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얼마나 奮鬪했는지 느끼게 하는 대작이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가 무너지는 과정을 상대적으로 단순화시켜 戰線의 유동성이 보이지 않는다. 玄菟城→新城 →大行城을 지나 평양으로 향하는 唐軍의 진군만 있을 뿐이다. 隋文帝·隋煬帝, 唐太宗·唐高宗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의 최후가 너무 무기력하다. 거목인 고 구려가 그렇게 쉽게 쓰러졌을까.5) 지금까지 池內說에 대한 충분한 비판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6)

4) 池內宏, 「高句麗討滅の役に於ける唐軍の行動」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6(東京, 東京 帝国大学文学部編, 1941), 204쪽. 같은 글의 5장 「高句麗の滅亡と安東都護府」: 정병준 譯, 「高句麗의 滅亡과 安東都護府」 『東國史學』 56(서울, 동국사학회, 2014), 411쪽.

5) 임기환, 「무너지는 고구려 (5) - 잊힌 압록강 전투를 찾아내다」 『매일경제신문』 (2021.05.27.)에서 “수양제, 당태종의 대규모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의 최후 치고는 너무 무기력해서 오히려 비애감이 들 정도다. 정말 그랬을까?” 라고 했다.

6) 최근 임기환이 池內宏의 논고를 검토하여 차별적인 성과를 내고자 했으나, 실패한 것으 로 판단된다. 임기환, 「고구려와 당 최후의 전쟁 과정 복원 시론」 『韓國史學報』 86(서울, 고려사학회, 2022.02). 본고는 2021년 10월 23일 고려대학교 청산관에서 개최된 제83회 동아시아고대학회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서영교, 「고구려 최후의 전쟁 - 李勣의 平壤城 함 락 -」 『제83회 동아시아고대학회 발표요지』 133-149쪽. 동아시아고대학회 홈페이지에 발표 요지와 조재우의 토론문이 올라와 있다(http://www.dongasia.co.kr/board01/ view.php?idx=1072, 검색일: 2022년 06월 10일).

그렇지만 전쟁과정 복원에 있어 쟁점이 되는 현존 사료들을 종합하면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다. 무엇보다 전쟁의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데 전술과 보급이란 관점은 매 우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錯綜되어 있는 여러 사료들을 이러한 관점에 따 라 분석하고 기존에 주목하지 않았던 사료를 제시함으로써 고구려 최후의 전쟁 과정을 새롭게 복원하고자 한다. 본고의 시간적 범위는 신성이 함락된 667년 9 월부터 평양성이 함락된 668년 9월까지의 1년 간이다. 먼저 兩唐書 契苾何力傳과 그 외 자료를 비교 검토하여 戰線의 유동성을 밝 혀내고자 한다. 다음으로 668년 2월 薛賀水 戰場의 위치를 규명하고, 이어 고 구려군의 반격으로 熊津都督府 軍團 1만이 입은 피해와 그것이 가져온 향후의 파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평양성 최후의 전투에 대해 고찰해 보 았다.

Ⅱ. 兩唐書 契苾何力傳의 時空間

중국의 여러 사서에 고구려 최후 전쟁 시기(666~668년)의 기록들이 있다. 그것들은 여러 시간대의 사실들이 뒤섞인 상태로 錯綜되어있어 사건의 선후관 계를 파악하기 힘들며, 기록들 사이에 충돌되는 부분도 있다. 『삼국사기』와 교차 검증을 해볼 때 그 가운데 兩唐書 契苾何力傳이 착종이 덜한 자료로 판단된다.7)

7) 池內宏은 兩唐書 契苾何力傳의 667~668년 기록에 대해 믿을 수 없으며, 착오가 심하 고, 심지어 杜撰이라고 했다. 필자는 두 何力傳을 본고의 初入口로 삼았다.

무엇보다 兩唐書의 두 기록은 구체적인 시간대를 파악 할 수 있는 단서가 보인다. 역사 복원에서 왜(Why)보다 언제(When)를 먼저 파 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의 시간 배열에 따라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며, 선 후관계를 먼저 파악한 후에야 보다 의미 있는 문제의식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 이다.

먼저 『舊唐書』 契苾何力傳을 보자.

A-① 乾封元年, 又為遼東道行軍大總管, 兼安撫大使.

A-② 高麗有眾十五萬, 屯於遼水, 又引靺鞨數萬據南蘇城. 何力奮擊, 皆大破之. 斬 首萬餘級, 乘勝而進, 凡拔七城. 乃回軍會英國公李勣於鴨綠水, 共攻辱夷·大 行二城, 破之.

A-③ 勣頓軍於鴨綠柵, 何力引蕃漢兵五十萬先臨平壤. 勣仍繼至, 共拔平壤城, 執 男建, 虜其王還.8)

밑줄 친 “곧 (契苾何力은) 군대를 돌려 英國公 李勣과 鴨綠水에서 합류하였 고, 함께 辱夷·大行 2성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李勣은 鴨綠柵에 군대를 주둔시 켰는데 何力이 蕃漢兵 50萬을 이끌고 먼저 평양에 도착하였다. 李勣은 뒤이어 도착하였고, 함께 평양성을 함락시켰다(A-②, A-③).” 라고 한 기록에 대해 池 內宏은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李勣이 契苾何力과 함께 辱夷城을 점령한 이후, 契苾何力이 먼저 평양으로 향했는데 李勣이 鴨綠柵에 주둔해 있었던 것을 지리 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으며, 李勣의 留頓地는 辱夷城 南쪽이었을 것이라고 했다.9) 池內宏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아래의 두 기록을 기준으로 『舊唐書』 契苾何 力傳(A)을 검토했기 때문이다.10)

8) 『舊唐書』 卷109, 契苾何力傳.

9) 池內宏, 앞 글, 173-174쪽.

10) 池內宏, 같은 글, 166-167쪽 참조.

B-① “(總章元年(668) 9月) 李勣이 進軍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平壤城과 遼東 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보다 먼저(初) 李勣이 이미(既) 大行城을 격파하고 諸軍이 모두 모였는데, 契苾何力은 南蘇 등 8城을 함락시키고 鴨淥柵에서 李勣과 만났고, 合軍하여 辱夷城을 공격하여 다시 이를 함락시켰다. 何力 이 蕃漢兵 50萬을 이끌고 平壤을 압박하니, 李勣의 군대가 뒤이어 도착하였다. …”11)

B-② “(總章元年(668) 9月,癸巳[12일]) 李勣이 平壤을 뽑았다. 李勣이 이미 大行 城을 점령하였고, 다른 道에 출타한 諸軍이 모두 李勣과 만났다. 진격하여 鴨綠柵에 이르니,高麗가 發兵하여 막아 싸웠다. 李勣 등이 奮擊하여,그들 을 大破하고,200리를 추격하여,辱夷城을 뽑으니, (고구려의) 諸城이 도망 가거나 降者가 서로 이어졌다. 契苾何力이 먼저 군대를 이끌고 平壤城 아래 에 도착하니,李勣軍이 이어 이르렀다.”12)

契苾何力傳(A-①②③)과 비교해 볼 때 위의 두 기록(B-①, B-②)은 여러 시간대의 사건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다.13)

11) “總章元年九月李勣進軍會高麗之平壤城遼東悉平初勣既破大行城諸軍盡會契苾何力 拔南蘇等八城會勣於鴨淥柵合軍以攻辱夷城又拔之.何力引蕃漢兵五十萬人逼平壤勣 軍繼至.” 『冊府元龜』 卷986, 外臣部·征討5. 12) “李勣拔平壤. 勣既克大行城,諸軍出他道者皆與勣會,進至鴨綠柵,高麗發兵拒戰,勣 等奮擊,大破之,追奔二百餘裏,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相繼. 契苾何力先引兵至平 壤城下,勣軍繼之.”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總章元年(668) 9月, 癸巳(12일).

13) B-①(『冊府元龜』)과 B-②(『資治通鑑』)를 보면 후자가 전자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개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기록이다. 이때 『冊府元龜』 卷358, 將帥部·立功11의 다 음 기록은 주목된다. “乾封元年. 又爲遼東道行軍大總管兼安撫大使 高麗有衆十五萬 屯於遼水. 又引靺鞨數萬據南蘇城. 何力奮擊皆大破之 斬首萬餘級 乘勝而進凡拔七 城 乃回軍會英國公李勣於鴨綠水 共攻辱夷大行二城破之. 勣頓軍於鴨綠柵 何力引蕃 漢兵五十萬先臨平壤 勣仍繼至 拔平壤城 執男建虜其王還.” 언급한 『舊唐書』 契苾何 力傳(A)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기록의 원형은 대체로 『冊府元龜』 卷986, 外臣部·征討 5(B-①)와 『冊府元龜』 卷358, 將帥部·立功11 두 개로 좁혀진다. 池內宏은 전자를, 필 자는 후자를 취했다.

B에서 大行城 함락과 辱夷城 점 령 그리고 평양성 포위 공격(大行城→辱夷城→平壤城)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舊唐書』 契苾何力傳 (A-②, A-③)에 대한 池內宏의 의심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契苾何力傳(A-②, A-③)의 사건들이 모두 668년(總章元年) 한 해에 일어났다고 본 池內宏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번역한 『舊唐書』 契苾何力傳을 보자. A-① 乾封 元年(666년), 또 遼東道行軍大總管·兼安撫大使가 되었다. A-② 고구려 군대 15萬이 遼水에 주둔해 있고, 또 靺鞨 數萬을 이끌고 와서 南蘇 城에 주둔해 있었다. 何力이 이를 모두 격파하고 7개 城을 뽑았다. 그리고 군대를 돌려 李勣과 鴨綠水에서 만나 함께 辱夷城·大行城을 격파했다. A-③ 李勣이 鴨綠柵에서 頓軍하고 있는데 何力이 蕃漢兵 50萬을 이끌고 먼저 平 壤으로 갔고, 李勣이 이내 이어서 도착하여 함께 平壤城을 뽑았다. 男建과 고구려왕(虜其王)을 잡아 돌아왔다. A-①은 당연히 기록 그대로 666년에 해당된다. 압록강을 기준으로 잡았을 때 A-②와 A-③은 시공간적 분절이 확연하다. A-②에서 契苾何力과 함께 辱 夷城(청천강)까지 남하했던 李勣이 A-③에서 그 북쪽인 鴨綠柵 주둔해 있다. A-②에서는 李勣과 契苾何力과 함께 군사작전을 했지만 A-③에서는 따로 움 직이고 있다. 契苾何力이 먼저 평양에 도착하고(先臨平壤) 李勣이 뒤를 이었던 것이다(勣仍繼至). A-②는 667년에 大行城·辱夷城 점령을 전하는 것이고, A-③은 668년 평 양성 진격을 전한다. 667년에 契苾何力과 李勣軍이 大行城을 점령하고 辱夷城 까지 南下했지만 다시 북쪽으로 철수한 사실은 다음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확인 된다. C (문무왕) 7년(667) … 9월, (문무왕이) 漢城停(현 서울)에 도착하여 英公(李勣)의 소식을 기다렸다. 겨울 10월 2일, 英公(李勣)이 평양성 북쪽 2백 리 되는 곳에 도착하였다. 英公(李勣)은 그곳에서 이동하여 촌주 대내마 강심으로 하여금 契 丹 騎兵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경유하여 한성에 이르러 편지를 전달 하게 하였다. 신라군의 동원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대왕은 이에 응하였다. 11월 11일, 왕이 장새에 도착하여 英公(李勣)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따 라 왕의 군대도 역시 돌아왔다.14) 667년 10월 2일 평양 북쪽 200리까지 남하한 李勣은 11월 11일 직전에 철 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압록강(鴨綠柵)과 청천강(辱夷城) 사이에서 전선이 一 進一退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물론 위의 기록을 그대로 신뢰한다면 李勣軍은 9 월 14일 新城 함락 후 10월 2일 청천강 부근까지 20일 만에 進軍한 것이 되며, 그것이 시간 내에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15) 하지만 날짜까지 정확히 나와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할 수 없다.16) 또한 李勣軍에 소속된 契苾何力 휘하 遊牧民 騎兵의 기동성을 무시할 수 없다.17)

14) “九月, 至漢城停以待英公. 冬十月二日, 英公到平壤城北二百里, 差遣尒同兮村主大 奈麻江深, 率契丹騎兵八十餘人, 歷阿珍含城, 至漢城移書, 以督兵期, 大王從之. 十一 月十一日, 至獐塞, 聞英公歸. 王兵亦遇.” 『삼국사기』 권6, 문무왕 7년(667) 9~11월.

15) 조재우, 「고구려 최후의 전쟁에 대한 토론문」 (동아시아고대학회, 2021년 10월 23일, 고려대학교 청산관).

16) 노태돈은 『삼국사기』 기록대로 667년 10월 2일 李勣이 평양 북쪽 200리에 도착했고, 11월 초 회군하였다고 보았다.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216쪽.

17) 661년에 何力의 고구려 출병에서 遊牧騎兵을 이끌었다. “率諸蕃 三十五軍進討”, 『新 唐書』 卷110, 契苾何力傳. “以任雅相爲浿江道行軍總管,契苾何力爲遼東道 行軍總 管,蘇定方爲平壤道行軍總管,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水陸分道並進.” 『資治 通鑑』 권200, 高宗 龍朔 元年(661) 4月 庚辰.

무엇보다 李勣軍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급속 진군을 해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 667년 9월 경 郭待封의 唐水軍은 이어 도착할 보급선의 전복으로 평양 부근의 대동강 입구에 고립되어 있었다. 구출을 위해 李勣이 대동강으로 보급선 을 파견하는 한편 667년 10월 2일 청천강 부근까지 진군하여 契丹騎兵 80명을 신라로 보내 신라군의 北上을 독촉한 것은 男建의 고구려 군대를 남북으로 분산 시켜 郭待封 水軍의 안전한 철수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餓死·戰死로 인한 唐水軍의 괴멸은 고구려와의 전쟁 그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8) 필자의 『舊唐書』 契苾何力傳(A)에 대한 시간대 구분이 타당한지 여부는 『新 唐書』 契苾何力傳을 검토하면 확인된다. D-① 머지않아 蓋蘇文이 죽자, 男生은 아우에게 축출되었다. 아들에게 [唐의] 대 궐에 나아가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이에 [唐高宗은] [글필]何力을 遼東道行 軍大總管·安撫大使에 제수하고 그를 공격하게 하게 하였고, 李勣을 도와 함께 고구려로 가게 하였다. D-② 李勣이 이미 新城을 함락시키자, [글필]何力을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이때 고구려兵 15萬이 遼水에 주둔하고 있었다. [契苾何力이] 靺鞨 數萬 군대를 이끌고 南蘇城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글필]何力이 奮擊하여 이를 격파하 고, 萬명을 참수하였다. 승기를 타고 나아가 8城을 함락시켰다. [글필하력 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李勣의 군대와 합세하였고, 辱夷·大行 2城을 공 격해 이겼다. D-③ 나아가 扶餘를 함락시켰다. 李勣의 勒兵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글 필]何力이 군대 50萬을 이끌고 먼저 平壤으로 나아가니 李勣이 뒤이어 진 격하였다. 모두 7개월 동안 공격해 그를 함락시켰다. 그 王(보장왕)을 사로 잡아 바쳤다.19)

18) 徐榮敎, 앞 글.

19) “未幾, 蓋蘇文死, 男生爲弟所逐, 使子詣闕請降, 乃拜何力爲遼東道行軍大總管、安撫 大使經略之, 副李勣同趨高麗, ①勣已拔新城, 留何力守. ②時高麗兵十五萬屯遼水, 引靺鞨數萬眾據南蘇城, 何力奮擊, 破之, 斬首萬級, 乘勝進拔八城. 引兵還, 與勣會 合, 攻辱夷·大行二城, 克之. 進拔扶餘. 勣勒兵未進, 何力率兵五十萬先趨平壤, 勣繼 進, 攻凡七月, 拔之, 虜其王以獻.” 『新唐書』 卷123, 諸夷蕃將 契苾何力傳. 앞의 기록 에서 ①(667년 10월 新城 함락)과 ②는 순서가 도치된 것 같다. 唐軍의 西에서 東으로 의 진격로를 고려하고, 언급한 『舊唐書』 契苾何力傳을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먼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 포인트만 보자.

D-①은 666년 6월 7일에 男生 의 아들 獻誠이 구원을 청하여 唐軍이 출동한 내용이다.20)

D-②의 新城 함락은 667년 9월 14일이다.21)

D-③의 扶餘 함락은 668년 2월 6일의 일이다.22)

契苾何 力의 고구려 종군 기록이 3개년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兩唐書 모두 동일하다. 契苾何力의 扶餘 전투 참전기록(D-③)에 대해 池內宏은 舛錯이 심하며, 『新 唐書』 찬자의 杜撰이라 했다.23) 하지만 이 기록이 『新唐書』 契苾何力傳(D-③)에 만 보이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668년 2월 薛仁貴가 소수의 병력(3천)으로 扶餘城을 함락시키고 그 주변의 降城 40개를 접수하기(F)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조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大淸一統志』 卷37, 契苾 何力 조에도 何力이 扶餘 지역 공략에 참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24)

본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 “以右驍衛大將軍契苾何力爲遼東道安撫大使, 將兵救之. 以獻誠爲右武衛將軍, 使爲 鄉導. 又以右金吾衛將軍龐同善·營州都督高侃爲行軍總管, 同討高麗.”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乾封 元年(666) 6月, 壬寅(7일). 21) “李勣拔高麗之新城,使契苾何力守之.”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乾封 2年(667) 9月, 辛未(14일). 22) “薛仁貴既破高麗於金山,乘勝將三千人將攻扶餘城,諸將以其兵少,止之. 仁貴曰‘兵 不必多,顧用之何如耳.’ 遂爲前鋒以進,與高麗戰,大破之,殺獲萬餘人,遂拔扶餘城. 扶餘川中四十餘城皆望風請服.”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總章 元年(668) 2月, 壬 午(6일).

23) 池內宏, 앞 글, 173쪽, 198쪽.

24) 『大淸一統志』 卷37, 契苾何力 조에서 “契苾何力鐡勒人 …進㧞扶餘 先引趨平壤 勣軍 繼之 髙麗平.” 이라 하고 있다.

667년 10월 2일에 李勣軍의 일원으로 평양 에서 200리 떨어진 지점까지 남하했던 契苾何力은 11월 11일에 북쪽으로 후퇴 했고(C), 668년 2월에 그는 薛仁貴를 원조하기 위해 압록강에서 扶餘城으로 향 했다.

668년 2월 契苾何力의 夫餘 지역 공략 이후 평양으로의 진군 이전까지 그의 소재는 그해 전선의 유동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Ⅳ장에서 다룰 것이다.

Ⅲ. 薛賀水 전투와 戰線의 一進一退

아래는 668년 2월에 薛仁貴가 諸將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은 병력(3천) 으로 扶餘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扶餘川 40城의 항복을 받은 기록이다.

F (668년) 2月,壬午(6일),李勣 等이 高麗의 扶餘城을 뽑았다. 薛仁貴가 이미 고 구려군을 金山에서 격파하고 乘勝하여 장차 3千人으로 扶餘城을 공격하려 하 였다. 諸將들이 其兵이 너무 적다고 하여 중지시키려 했다. 仁貴가 말하기를 兵 이 필히 많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있다. 드 디어 前鋒이 되어 진격하여 싸워 고구려군을 大破하고,殺獲한 것이 萬餘人이 었다. 드디어 扶餘城을 뽑자, 扶餘川의 40餘城이 모두 항복을 청해왔다.25)

위의 기록 첫머리에서 李勣 等이 扶餘城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109년 전 松 井等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李勣이 扶餘城 즉 農安 부근을 정복한 다음, 남으로 향하여 평양으로 진격 하였다. 그동안 각지에 산재되어 있던 唐軍을 자신의 휘하에 결집시켰는데, 그 러한 진격을 위한 경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생각해 보건대 지금의 農安 지방에 서부터 輝河江 유역을 가로질러서 佟佳江의 계곡에서 나온 다음에 鴨綠江을 건 너지 않았을까 한다. 도하 지점은 지금의 楚山이나 滿浦鎭 부근으로 상정된다. 그러므로 압록강에서 평양 방향으로 2백 리에 있던 辱夷城은 청천강의 어느 곳 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데, 그 위치는 분명치 않다.”26)

25) “李勣等拔高麗扶餘城. 薛仁貴既破高麗於金山,乘勝將三千人將攻扶餘城,諸將以其 兵少,止之. 仁貴曰: 兵不必多, 顧用之何如耳. 遂爲前鋒以進, 與高麗戰, 大破之, 殺 獲萬餘人, 遂拔扶餘城. 扶餘川中四十餘城皆望風請服.”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總章 元年(668) 2月 壬午(6일).

26) 松井等/이정빈 外 譯, 「隋唐二朝高句麗遠征の地理」 『滿洲歷史地理』 第1卷(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수·당 두 왕조의 고구려 원정의 지리」 『韓國古代史探究』 14(한국 고대사탐구학회, 2013), 286쪽, 註25.

松田等은 668년 李勣이 扶餘城(농안)에서 평양에 이르는 장거리 행군을 했다고 보았다.

그의 견해는 다음의 기록과 관련이 있다.

G 泉男建이 다시 兵 5萬을 파견하여 扶餘城을 구하려 하였다. 李勣 등이 薛賀水 에서 만나 合戰하여,크게 격파하니 斬獲 3萬餘人이었다. 大行城으로 진공하여 그 성을 뽑았다.27)

男建이 扶餘城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 5만을 보냈고, 薛賀水에서 싸움이 일 어났는데 여기에도 李勣이 등장한다. 扶餘城·薛賀水 싸움에 모두 李勣이 등장 하는 것은 두 지역의 거리가 가깝다고 여기는 근거가 되었다. 松井等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도중에 적(고구려군)이 扶餘城을 구원하고 자 왔으나 薛賀水에서 격파하고 나아가 大行城을 취하였다.”

松井等은 薛賀水 의 위치는 未詳이라고 하면서도 大行城은 648년 薛萬徹이 한때 점령한 압록강 하류의 그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28)

27) “泉男建複遣兵五萬人救扶餘城, 與李勣等遇於薛賀水, 合戰, 大破之, 斬獲三萬餘 人, 進攻大行城, 拔之.”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總章 元年(668) 2月.

28) 松井等, 앞 글, 286쪽, 註22와 23.

그는 薛賀水가 扶餘城과 멀지 않은 어느 곳으로 보았고, 때문에 압록강 하류의 大行城과 다른 동일명의 임시성을 만들어 냈다. 최근 男建의 군대가 扶餘城(농안) 부근까지 행군했고 인근의 薛賀水에서 패 전했다고 본 두 연구가 있다. 먼저 666년 12월 ~ 668년 2월 사이에 ‘平壤城-大 行城-烏骨城-遼東城-蓋牟城-新城-扶餘城’ 경로와 국내성 일대의 ‘國內城丸都城-매하구현-長春-扶餘城’ 경로, 그리고 동해안 경로는 唐에게 이미 장악 된 상태이기 때문에 扶餘城 구원전에 나선 5만 중 상당수가 李他仁의 柵城 권역에서 동원되고, 평양성에서는 소수 병력을 보냈다고 본 견해가 있다.29) 다음으 로 ‘平壤城-干城(咸興)-북청-柵城(琿春)-延吉-敦化-扶餘城’의 경로는 戰場 이 되지 않았으므로, 扶餘城 구원군 5만은 평양성으로부터 동해안을 북상하는 柵城경로로 扶餘城에 간 것이며, 이때 柵城의 城主인 李他仁은 후방 지원역할 을 했으며, 男建軍이 薛賀水에서 패전하기까지 50일이 소요되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30) 80년 전 池內宏도 扶餘城과 薛賀水가 인접한 곳에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扶餘城의 위치를 함경도 함흥에 비정하였고, 戰場이 된 薛賀水를 함흥을 지나 흥남시에서 동해로 흘러가는 城川江으로 보았다.31)

29) 김강훈, 「책성 권역의 고구려 부흥운동과 高定問」 『역사교육논집』 68(대구, 역사교육학 회, 2018), 249-252쪽.

30) 李玟洙, 「李他仁의 唐 投降과 扶餘城의 高句麗 復國運動 鎭壓에 대한 分析」 『역사와 경계』 106(부산, 부산경남사학회, 2018), 9-11쪽. 31) 池内宏, 앞 글, 182쪽, 187쪽, 193쪽, 197쪽. 특히 182쪽에서 “여기서 나는 제3의 코 스를 취하였다고 생각되며 ‘병해략지’를 일본해 연안의 함흥·덕원 사이의 통로에 대 응시킴과 동시에 扶餘城의 소재를 이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咸興에 비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고 하였다.

필자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淸代 고증학자들이 편찬한 『大清一統志』 卷421, 薩賀水 조를 보면 扶餘城을 공격한 장본인은 李勣이 아니라 그의 別將 薛仁貴이며, 싸움이 벌어진 薛賀水의 위치는 扶餘城 일대와 무관한 압록강 하류 부근이다.

H 渌江은 國東北界에서 源發하여 長白山 西麓의 西南으로 흘러 바다로 流入 된다.…薩賀水는 開州의 西南에 위치하는데 一作 薛賀水라고 한다. 唐나라 乾 封 3年(668) 李勣 等이 髙麗를 정벌할 때 别將인 薛仁貴가 扶餘城을 함락시 켰다. 髙麗가 구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李勣(의 군대와)과 薛賀水에서 만났다. 合戰하여 李勣이 고구려군을 大破하였다. 追拔하여 大行城을 뽑았다. 舊志에 薛賀水는 北山中에서 나와 東南으로 흘러 鴨渌江으로 들어간다.32)

『大清一統志』는 淸皇帝의 칙령으로 편찬된 地理書이다. 淸을 세운 女眞族의 원주지인 만주지역에 대한 학자들의 고증은 엄밀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에 의 하면 開州의 西南에 위치한 薩賀水가 一作 薛賀水이며, 薛賀水는 北山中에서 나와 東南으로 흘러 鴨渌江에 합류된다고 한다. 開州 西南의 薛賀水는 현재 요 령성 鳳城市를 경유하는 靉河가 확실하다. 開州는 의주에서 1백여 리 떨어져 압 록강까지는 멀지 않고, 鳳凰山에 의거한 烏骨城이 위치한 곳이다. 근거를 제시 하지 않았지만 권중달은 “薛賀水, 요녕성 봉성시를 경유하는 하천”이라고 지적 한 바 있다.33)

32) “渌江在國東北界源發長白山西麓西南流入海 … 薩賀水在開州西南一作薛賀水 唐乾 封三年李勣等伐髙麗 别將薛仁貴克扶餘城 髙麗趨救與李勣遇於薛賀水 合戰勣大破 之 追拔大行城是也 舊志薛賀水出北山中東南流入鴨渌江.” 『大清一統志』 卷421, 薩 賀水.

33) 권중달 譯註, 『자치통감』 21(서울, 삼화, 2009), 436쪽 첫째 줄. 한편 劉矩·姜維東, 『唐征高句麗史』(吉林人民出版社, 2006): 이성재 감수, 『당의 고구려 정벌사』(서울, 동 북아역사재단, 2006), 291쪽에서 薩賀水를 지금의 요령성 단동 서남 40리라고 했다.

668년 2월 大行城에 주둔해 있던 李勣과 그의 군대는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 는 고구려군 5만이 압록강을 건너려 하자 城을 포기하고 (靉河를 따라) 북상하 여 烏骨城 근처 薛賀水까지 후퇴를 했고, 그곳에서 고구려 군대를 섬멸했던 것 이다. 같은 시기 멀리 扶餘 전선에 있었던 薛仁貴와 契苾何力이 薛賀水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男建의 고구려군은 扶餘지역까지 장거리 행군을 하지 않았고, 압록강과 인 접한 薛賀水에서 李勣에 의해 저지·격파되었을 뿐이다. 임기환의 논리적인 추 론이 적중했다.

“즉 살하수와 압록강 하구 대행성으로 이어지는 이세적 당군의 진격로를 보면, 살하수의 위치 역시 압록강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인다.”

“비록 부여성 일대가 신성을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라고 하 더라도, 압록강 전선 방어가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에서 그 멀리까지, 한 사람의 군사가 아쉬운 판에 5만 명이라는 대군을 보낸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상상하지 않을 일이다.”34)

男建이 실행한 薛賀水전투의 일차적 목표는 압록강 하류의 大行城을 차지하 고 본국으로부터 지속적인 해상보급을 받고 있던 唐軍을35) 북쪽 내륙으로 밀어 내, 보급 자체를 어렵게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34) 임기환, 「무너지는 고구려 (4) - 마지막 나당연합」 『매일경제신문』(2021.05.13.).

35) 徐榮敎, 앞 글. <그림 1> 설하수-대행성-압록책-욕이성-평양의 위치

하지만 男建은 수많은 전사 자를 남기고 퇴각했다.

직후 신라가 李勣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그 시점은 乾封 3년이었다.

I 乾封 3년에 이르러 大監 金寶嘉를 보내어 바닷길로 (요동에) 들어가 英公(이적) 의 進止를 살펴 처분을 받드니, 신라의 병마는 평양으로 집합하라는 것이었소.36)

668년 3월 6일(庚寅) 乾封에서 總章으로 연호가 개칭되었다.37)

36) “至乾封三年, 遣大監金寶嘉入海, 取英公進止. 奉處分, 新羅兵馬, 赴集平壤.” 『삼국 사기』 권7, 문무왕 11년(671) 「答薛仁貴書」.

37) “三月, 庚寅, 赦天下, 改元.”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總章 元年(668) 3月 6日.

乾封 3년은 그 직전을 말한다. 이때 바다를 통해 들어온 신라의 大監 김보가는 李勣을 만나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둘의 접선 장소는 어디인가? 언급한 『資治通鑑』 (G)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668년 2월 薛賀水전투에서 승 리한 李勣과 그의 군대는 다시 압록강 하구로 남하하여 大行城을 탈환했다(與李 勣等 … 進攻大行城,拔之)고 한다. 그곳에서 李勣은 신라 사신을 맞이했던 것 으로 여겨진다. 大行城은 보급을 받는 항구이기도 하지만 신라와 소통하는 창구 였다. 신라 사신은 李勣으로부터 평양 집결 시기를 통지받았다.

Ⅳ. 熊津都督府 軍團의 北進과 전멸

668년 6월에 劉仁願의 熊津都督府軍이 신라군보다 먼저 평양을 향해 북상 했다.

J (668년 6월) 22일에 (웅진)府城의 劉仁願이 귀간 미힐을 보내 고구려의 大谷·漢 城 등 2郡 12城이 항복하였음을 알리니, 왕이 일길찬 진공을 보내 치하하였다. 인문·천존·도유 등은 一善州 등 7군 및 漢城州의 병마를 영솔하여 唐의 軍營 으로 나아갔다(赴唐軍營). 27일, 왕이 서울에서 출발하여 唐兵에게로 나아갔다 (王發京赴唐兵) 29일, 각도의 총관들이 출발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풍병(病風) 을 앓았으므로 왕이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인문 등이 英公(李勣)을 만나 영류산 아래[영류산은 지금 서경 북쪽 20리에 있다.]로 진군하였다.38)

6월 22일에 劉仁願이 황해도의 大谷(평산)·漢城(신원군) 등 2郡 12城의 항 복을 받았다. 그날 인문·천존·도유 등 신라 지휘부는 배를 타고 평양 북쪽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이며, 6월 29일 李勣을 만나 평양 북쪽 20리까지 진군했다. 고구려 남부 2郡 12城의 항복에 대해 노태돈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성 은 국내성과 함께 당시 고구려의 부수도였다. 대곡성과 한성은 임진강에서 평양 에 이르는 중간에 위치한 중요한 거점이다. 이곳들이 항복하였다는 것은 한강 하 류에서 대동강까지 문이 열린 셈이다.”39)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래의 기록은 668년 8월 9일 고구려 전선에 서 長安으로 소환된 劉仁願이 唐高宗으로부터 재판을 받는 내용이다.40)

38) “二十二日, 府城劉仁願遣貴于未肹, 告高句麗大谷·漢城等二郡十二城歸服, 王 遣一吉湌眞功稱賀. 仁問·天存·都儒等領一善州等七郡及漢城州兵馬, 赴唐軍營. 二十七日, 王發京赴唐兵. 二十九日, 諸道摠管發行, 王以庾信病風留京. 仁問等遇英 公, 進軍於嬰留山下.[嬰留山在今西京北二十里.]” 『삼국사기』 권6, 문무왕 8년(668) 6월.

39)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218쪽.

40) “卑列道行軍總管·右威衛將軍劉仁願坐征高麗逗留,流姚州.” 『資治通鑑』 卷201, 唐高 宗 總章 元年(668) 8月 辛酉(9일). 池內宏은 劉仁願의 逗留를 667년(乾封 2년)의 일 로 보았다. 池內宏, 앞 글, 184쪽.

K 劉仁願, 貞觀中에 右威衛將軍卑列道行軍總管이 되어 司空인 李勣과 합류하기 로 했는데 늦어서 도착하지 못하였다. 소환하여 京(장안)에 이르자 帝가 그에 게 이르기를 自古로 軍法에 後期는 모두 사형이다. 仁願이 상주하기를 臣은 前 後 40인이나 되는 사람을 시켜 李勣 處에 보냈습니다. 도로가 거칠어서 모두 도착하지 못했는데 最後의 1인이 처음으로 大軍에 도착하였습니다. 臣은 延津 등 7城을 쳐서 함락시켰고, 이어 平壤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李勣의 兵馬가 갑 자기 돌아가 버렸습니다(旋歸). 事有와 因緣이 있었기에 臣의 허물(咎)이 아닙 니다. 帝가 대답하기를 너의 領兵 1萬餘 명은 모두 强兵卒인데 (지금) 亡城 아래 邑에 千(1,000)人도 남아 있지 않았거늘 이러한 변명으로서 더욱이 사기를 들 어 치려고 하느냐? 마침내 영을 내려 끌고 나가 廟堂에서 (劉仁願을) 斬하려 하 는데, 仁願이 하소연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帝가 그에게 東海(백제) 鎭守의 노고를 생각하여 특별히 死刑을 면하게 하고 姚州에 유배를 보냈다.41)

41) “劉仁願 貞觀中爲右威衛將軍卑列道行軍總管 與司空李勣期會 逗遛不赴驛 召至京 帝謂曰, 自古軍法後期皆死 仁願奏曰, 臣前後使四十餘人往李勣處 塗路荒梗悉皆不 達 最後一使始得至大軍. 臣又打得延津等七城 欲擊平壤 李勣兵馬遽以旋歸 事有因 緣非臣之咎 帝曰, 汝領兵萬餘咸勁卒 亡城下邑未有千人 以此分疏更爲矯詐 遂令拽 出 欲於廟堂斬之 仁願號訴不輟聲 帝以其有鎮守東海之勤 特免死 配流姚州.” 『冊府 元龜』 卷447, 將帥部·違約狥私縱敵較敵違約. 앞의 기록에서 연호 貞觀中은 잘못이 며, 總章元年으로 바꾸어야 한다. 劉矩·姜維東, 『唐征高句麗史』(中國, 吉林人民出版 社, 2006): 이성재 감수, 『당의 고구려 정벌사』(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6), 291쪽에 서 貞觀中은 乾封中이라고 했다.

6월 22일에 漢城·大谷을 접수하고 평양으로 향했던 劉仁願과 그의 군대는 아마 6월 말에서 7월로 접어드는 시점에 고난의 행군을 했던 것 같다. 고구려군 의 저항이 너무나 강했다. 劉仁願은 평양 북쪽 20리에 주둔해 있던 李勣과 소통 하기 어려웠다. 劉仁願이 40명이나 되는 전령을 보냈지만 모두 연결되지 못했다 고 한다. 마지막 한 사람이 도착하여 李勣과 그의 군대가 북쪽으로 후퇴한 사실 을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성 남쪽 근교에서 男建의 군대는 결사항전을 했다. 고구려는 隋唐과 오 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승패를 주고받고 때로는 평양성이 적의 공세에 노출되 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동안 국운을 지키는 데 성공해왔다. 고구려에는 자기 공동체와 자부심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42) 唐高宗은 “너의 領兵 1萬은 모두 强卒인데 지금 亡城 아래의 邑에 1千人도 남아 있지 않다.” 라고 하면서 劉仁願을 질책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평양으로 가기 위해 延津 등 7城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劉仁願은 熊津都督府 軍團 1만 가운데 90% 이상을 상실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참사는 이듬해 唐에게 우환이 되 어 돌아왔다. 669년부터 본격화된 吐蕃의 靑海·타림분지 잠식과 침공,43) 같은 해 고구려 에서 시작된 현지인들의 반란으로 熊津都督府의 唐 병력은 보충되지 못했던 것 으로 보인다. 신라는 熊津都督府의 이러한 취약점을 곧바로 파고들었다. 신라 의 백제지역 잠식에 唐高宗은 진노했다. 그해 5월에 신라는 황제에게 謝罪使를 파견해야 했다.44) 이듬해인 670년 정월 唐高宗은 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구금하도록 판결했다. 문무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유민들을 차지했기에 일부 사신을 억류했다.45)

42) 임기환, 「무너지는 고구려 (6) - 평양성 최후」 『매일경제신문』(2021.06.10.) 참조.

43) Helmut Hoffman, “Early and medieval Tibet”,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p. 308.

44) “又遣欽純角干良圖波珍湌, 入唐謝罪.” 『삼국사기』권6, 문무왕 9년(669) 5월.

45) “高宗許欽純還國, 留囚良圖, 終死干圓獄. 以王擅取百濟土地遺民, 皇帝責怒, 再留使 者.” 『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670) 봄 정월.

669년 年初부터 신라는 소수의 唐軍이 지키고 있던 熊津都督府 지배지역을 점령해 들어갔고, 671년 말 구백제지역을 대부분 차지 했다. 한편 K에서 “李勣의 兵馬가 갑자기 돌아가 버렸습니다.” 라고 하는 劉仁願 의 항변에서 알 수 있듯이 668년 7월 초 劉仁願의 병력이 전멸하자 李勣은 북쪽 으로 후퇴했다. 劉仁願의 항변기록(K)에 대해 그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기 위해 변명한 내 용이고, 唐高宗이 여기에 대해 “거짓으로 속이고 있다.” 라고 답변 하였다는 점 에서,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지 주저된다는 지적이 있었다.46) 이러한 의문의 여 러 근거 가운데 하나는 668년 契苾何力이 李勣보다 먼저 평양으로 진격했다고 기록한 『舊唐書』 契苾何力傳(A-③)이다. 하지만 그때(6월) 契苾何力의 대군이 李勣 함께 평양 북쪽 근교에 주둔해 있 었다면, 熊津都督府軍의 북상은 수월했을 것이며, 李勣 군대와 연결도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평양의 男建 측 고구려군이 북쪽에서 契苾 何力 대군의 견제를 받아 힘이 분산되어 남쪽에서 진격해오고 있던 熊津都督府 軍에 맹렬한 저항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힐 수도 없었 을 것이다. 그들의 전멸은 契苾何力의 대군(蕃漢 50만)이 아직 평양 북쪽에 도착하지 않 은 상황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며, 劉仁願의 병력이 소진되자 李勣은 일단 鴨綠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新唐書』 卷220, 高句麗傳의 아래 기록을 분석하면 알 수 있다. 편의상 연접된 기록을 3개로 나누어 원문으로 배열했다.

L-① 男建以兵五萬襲扶餘, 勣破之薩賀水上, 斬首五千級, 俘口三萬, 器械牛馬稱 之. 進拔大行城.

L-② 劉仁願與勣會, 後期, 召還當誅, 赦流姚州.

L-③ 契苾何力會勣軍于鴨淥, 拔辱夷城, 悉師圍平壤. 47)

46) 조재우, 앞 글.

47) 『新唐書』 卷220, 高句麗傳.

668년에 해당되는 위의 기록은 그해 李勣의 종군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L-①은 668년 2월 薛賀水에서 李勣이 男建軍을 격파하고 압록강 하구 부근 에 위치한 大行城 탈환한 사실이다

L-②는 내용적으로 볼 때 『冊府元龜』 卷447의 기록(K)과 정확히 대칭된다.

L-②는 K기록에서 원인과 결과만 뽑아 압축한 모습이다.48)

“劉仁願이 李勣과 연결(會)하고자 하였으나, 기일을 놓쳤다(後期)” 라고 하는 것은 6월에 북진한 劉 仁願軍이 동시기 압록강에서 남진한 李勣軍과 연결되지 못한 사건을 아주 명확 히 전하고 있다.

L-③은 평양에서 鴨綠으로 철수한 李勣이 契苾何力를 만나 다시 평양으로 진군한 사실을 전한다. 그렇다면 평양을 사이에 두고 북남에서 李勣軍과 劉仁願軍이 연결하지 못하 고 있던 그때(6월→7월) 契苾何力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언급한 『新唐 書』 卷123, 契苾何力傳(D-③)에서 “(668년 2월 계필하력이:필자) 扶餘를 함락 (拔)시켰다. (하력이 扶餘에서 南下하여 보니:필자) 李勣의 勒兵이 나아가지 못 하고 있었는데, 何力이 군대 50萬을 이끌고 먼저 平壤으로 나아가니, 李勣이 뒤 이어 진격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668년 2월에 扶餘城이 떨어지자 그 주변의 40城도 唐에 항복했다(F). 契苾 何力은 그 성들을 접수하고 안정화시키는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 하할 때 휘하 병력이 50만이었다고 한다. 이 숫자에 과장이 있다고 보고 그 절반 이하로 잡아도 엄청난 대군이다. 그 규모로 보아 契苾何力은 기존의 唐軍을 재조직하는 것은 물론이고 扶餘 城과 그 주변 40성의 고구려인 투항 병력을 대거 끌어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唐 에 이미 투항한 男生 휘하 國內城 등 6城과 10만여 戶의 사람들49) 가운데 일부의 입대와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러 부류 사람들을 행군 조직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48) “劉仁願, … 與司空李勣期會 逗遛不赴驛 … 配流姚州.” 『冊府元龜』 卷447, 將帥 部·違約狥私縱敵較敵違約.

49) “公은 國內城 等 6城 10萬戶를 이끌고 호적을 기록해 轅門에 바쳤다.” 『泉南生墓誌銘』. 권덕영, 『재당한인묘지명연구』 [역주편](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1), 216쪽.

과거 적이었던 사람들을 자신이 통제 할 수 있는 戰力으로 역전시키는 작업은 결코 단순하다고 볼 수 없다.

契苾何力이 대군을 이끌고 鴨綠에 도착했을 때 李勣의 勒兵이 나아가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한다(A-③·D-③).

평양에서 금방 철수했기 때문에 李勣과 그의 군대(勒兵)가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契苾何力과 그 휘하의 대 군이 먼저 평양으로 진군한 이후에야 李勣과 그의 군대가 뒤를 따랐다. 668년에도 鴨綠에서 평양 사이에서 一進一退가 재현되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해 李勣의 행군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월에 李勣은 大行城을 포 기하고 압록강에서 북상→오골성 부근의 薛賀水에서 男建의 고구려군 격파→ 南進하여 鴨綠江岸의 大行城 탈환→6월에 鴨綠에서 남하하여 청천강 부근의 辱 夷 점령→6월 29일 직전에 평양 부근에 도착→7월 초 평양 부근에서 북쪽으로 후퇴하여 鴨綠에 도착→8월 초 契苾何力 대군의 뒤를 이어 다시 평양성으로 진 격→ 평양성 포위.

Ⅴ. 新羅와 唐 연합군의 平壤城 함락

다음의 자료는 頭滿江 하류의 동쪽 琿春 일대로 비정되는 柵城의 大城主인 李他仁의 墓誌銘이다.

M-① 이때 (고구려 조정이) 公(李他仁)에게 柵州 都督 및 總兵馬를 제수하여 고구 려의 12州를 주관하고, 靺鞨 37部를 통솔하게 했다. 大總管 英公(李勣)이 關中[三秦]에서 황제의 推轂之禮를 받고, 변경지역[萬里]에 군사 지휘권을 행사할 斧鉞 자루[柯]를 除授받아, 皇帝의 新書를 받들어 廟堂의 上略을 잘 수행했다. 公은 (고구려가) 망할 기미가 있음을 깨달아, (멸망 조짐을 알리 는) 梁水에 떨어진 별을 보고, 처신함에 모름지기 귀의할 곳을 알아 曹魏의 군대가 100일도 되지 않아 公孫氏를 함락시킨 사실을 인지했다. 이에 황급 히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轅門(軍營)에 이르러 투항했다. 微子가 周나라 에 내투했듯이 나중에 機微를 알아채 더욱 부끄러워했지만, 陳平이 楚나라 를 버린 것처럼 먼저 깨달아 하지 않았다.

M-② 英公이 마침내 公을 돌려보내 그에 소속된 집단을 통솔하여 북을 치면서 기세를 떨쳐 함께 나아갔다. 公의 용맹은 三軍에서 으뜸이었으니 사람들 의 칭찬이 급속히 퍼졌나갔고, 한번 말한 것을 천금처럼 여기니 백성들의 노래 속에 빠르게 반영되었다. 마침 쇠처럼 견고한 군영의 충직한 신하들 로 하여금 적의 칼을 막아내라는 符節을 황급히 풀어버리게 하였고, 石城 이 아홉 번이나 저항했지만 순식간에 대적하여 성문을 열어젖혔다. 전진하 는 데에 더 이상 저항이 없어서 즉시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본래) 漢四郡의 땅이었던 고구려가 唐의 강역으로 편입되었고, 九夷를 널리 모아 다시 正朔에 귀의시켰다. 英公(李勣)을 따라 당에 入朝하니 특별히 그 노고 를 치하하여 右戎衛將軍을 제수하셨다.50)

50) 余昊奎·李明, 「高句麗 遺民 <李他仁墓誌銘>의 재판독 및 주요 쟁점 검토」 『한국고대 사연구』 85(서울, 한국고대사학회, 2017), 385-388쪽 참조. 권덕영, 앞 글, 350-351 쪽 참조.

M-①에서 李他仁은 두만강 하류의 柵州의 都督·總兵馬로서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12州를 주관하고, 靺鞨人 37部를 통솔하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고구 려인과 靺鞨人으로 구성된 大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李勣에게 투항하였다.

M-②에서 英公 李勣은 李他仁에게 휘하의 병력을 통솔하여 진군하게 했다 고 한다. 이때 李勣은 鴨綠柵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李他仁과 그의 군 대는 契苾何力의 大軍 속에 섞여 그곳에 도착했고, 李勣으로부터 唐의 官軍임을 정식으로 인정받고 평양으로 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를 수호해왔던 李他仁 휘하의 柵州 병력이 이제 고구려의 마지막 숨 통을 끓을 人狼떼가 되었다. 唐에 항복하여 고구려를 붕괴시키는 데 참여한 사람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N (高慈)의 아버지 高文(高質)은 본국(고구려)에서 位頭大兄 겸 장군을 역임하였 는데, 고구려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내다보고(預見高麗之必亡) 마침내 형제들을 이끌고 聖朝에 귀순하였다. 總章 2년(669) 4월 6일 조칙을 받 들어 明威將軍 行右威翊府左郞將에 임명되었고, …51)

고구려에서 位頭大兄으로 장군을 역임한 高文(高質)과 그 아들 高慈 그리고 그 집안사람들이 대거 唐에 투항하여 그러한 흐름에 합류하였고, 이듬해(669년) 高文은 황제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左郞將에 임명되었다. 물론 男生 휘하의 고구 려인들도 그러했다. O 그의 용맹을 높이 사 遼東을 토벌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公은 과연 고구려의 옛 신하로서 형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平壤을 크게 격파하는 데에 最先鋒이 되 었고, 이로 인하여 공을 세워 宜城府 左果毅都尉 摠管에 제수되었다.52) 男生을 따라 唐에 투항했던 高玄은53) 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 평양성 공 격의 最先鋒으로 참전했다. 男生 휘하의 國內州·契丹·靺鞨 병력은 물론이고,54) 夫餘城과 주변 40城(扶餘州)의 병력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51) “父文本蕃任三品位頭大兄兼將軍 預見高麗之必亡 遂率兄弟歸款聖朝奉 總章二年 四月六日 制授明威將軍行右威衛翊府左郎將.” 「高慈墓誌銘」. 권덕영, 앞 글, 90쪽, 102쪽.

52) “勑其驍勇討以遼東公誠舊人實爲諳億大破平壤最以先鋒因之立功授宜城府左果毅 都尉摠管.” 「高玄墓誌銘」. 권덕영, 앞 글, 33쪽.

53) “從南生而仰化, 慕斯聖敎. 自東徙而來王” 「高玄墓誌銘」.

54)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 遣子獻誠訴之.” 『삼국사기』 권49, 개소 문전.

8월 초에 이르러 신라군과 唐연합군이 평양성 앞에 최종 집결한 것으로 보 인다. 『冊府元龜』 卷19, 帝王部·功業에 평양성 최후를 알리는 기록이 있다.

P-① [高宗 總章元年(668) 8월에(필자)] 高藏 및 男建이 太元兄 男產과 將首領 98 人을 보내, 백기를 들고 出降하여 入朝를 청하였다. 李勣이 禮를 갖추어 延 接하였다. 하지만 男建만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P-② 總章 元年(668) 9月, 李勣이 또 營을 平壤城으로 이동하였다. 男建이 자주 城門을 열고 兵을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하였다.

P-③ 男建의 下捉兵總管인 승려 信誠이 몰래 사람들 보내와 軍門에 이르렀다.

(李勣이:필자) 城門을 열고 내응하기를 허락하였다(7일). 5日이 지나고, 信 誠이 開門하였다(12일). 勣이 兵을 풀어 들어가 登城하게 하고 북을 치고 城 門樓에 불을 지르니 4面에 불이 일어났다. 男建이 窘急하여 칼로 자신을 찔 러 자살하려 하였으나 죽지 못했다.55)

사료 P-①에서 668년 8월 12일경 평양성이 당나라군에게 포위된 이후 보장 왕(高藏)과 男建이 男產과 將首領 98人을 보내 唐에 항복을 청하였다.56)

55) “高藏及男建遣太元兄男產將首領九十八人, 持白幡出降請便入朝. 勣以禮延接男建猶 閉門固守. 總章元年九月, 勣又移營於平壤城. 男建頻遣兵出戰, 皆大敗. 男建下捉兵 總管僧信誠密遣人, 詣軍門, 許開城門爲內應, 經五日, 信誠果開門, 勣縱兵入登城鼓 譟燒城門樓四面火起, 男建窘急自刺不死.” 『冊府元龜』 卷19, 帝王部·功業. 56) “李勣拔平壤. … 圍平壤月餘, 高麗王藏遣泉男產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詣勣降, 勣 以禮接之.”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總章 元年(668) 9月,癸巳(12일).

李勣이 禮로서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렇지만 항복조건이 맞지 않아서인지 男建의 마음 이 바뀌었다. 그는 평양성의 문을 굳게 닫고 최후의 항전을 할 터였다. 사료 P-②에서 알 수 있듯이 평양성 앞에서 전투가 개시된 것은 9월에 들어 와서부터이다. 男建이 자주 성문을 열고 나와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좁은 골짜 기에서 싸운 경험이 많은 신라군이 평양의 시가전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答薛仁貴書」를 보면

“番軍·漢軍 모두가 蛇水에57) 집결하니, 男建도 출병하 여 결전을 하고자 하였다. 신라 군사가 단독으로 선봉이 되어 먼저 大陣을 격파 하니, 평양 성중의 기세가 꺾였다.” 라고 하고 있다.58)

평양성 앞 蛇水에서 벌어 진 싸움에서 신라 大幢의 少監인 본득이 큰 공을 세웠다. 漢山州 少監 김상경 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공이 커서 一吉飡의 官位와 벼 1천 석을 상으 로 받았다. 沙飡 구율은 蛇川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서 적과 싸워 크게 이 겼다.59) 平壤南橋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신라의 軍師 斧壤사람 구기가 이 싸움에 서 크게 활약하였다.60) 여기에 대해 임기환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평양 남교 전투는 안학궁 남쪽에 있었던 시가지와 대동강 남쪽을 잇는 다리 에서 벌어진 전투다. 이 다리 유적은 1980년대 초에 북한에서 발굴하였는데 대 략 길이가 375m, 너비 9m의 나무다리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 신라군이 대동강 북쪽의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남교 다리를 둘러싼 전투가 치열했던 모양이다.”61)

57) 淸代 고증학자들은 『大清一統志』 卷421, 虵水 조에서 “虵水在平壤西境.” 라고 하 였다. 후에 池內와 津田은 蛇水를 평양 북쪽 교외에서 대동강으로 흘러드는 合掌江(평 양 동쪽)으로 비정했다. 池內宏, 앞 글, 85-86쪽. 津田左右吉, 「高句麗戰役新羅進軍 路考」 『津田左右吉全集11 - 滿鮮歷史地理硏究1』 (東京, 岩波書店, 1964), 190쪽.

58) “此時, 蕃·漢諸軍, 摠集蛇水, 男建出兵, 欲決一戰. 新羅兵馬, 獨爲前鋒, 先破大陣, 平壤城中, 挫鋒縮氣.”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1년(671) 「답설인귀서」.

59) “大幢少監本得, 蛇川戰功第一.” “漢山州少監金相京, 蛇川戰死, 功第一, 贈位一吉 湌, 賜租一千石. 牙述沙湌求律, 蛇川之戰, 就橋下涉水出, 與賊鬪大勝, 以無軍令, 自 入危道, 功雖第一而不錄, 憤恨欲經死, 旁人救之, 不得死.” 『삼국사기』 권6, 문무왕 8 년(668) 10월.

60) “軍師斧壤仇杞, 平壤南橋戰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七百石.” 『삼국사기』 권6, 문무왕 8년(668) 10월. 61) 임기환, 앞 글(2021.06.10.).

M-③에서 開門을 약속한 지 5日이 지난 9월 12일 男建의 부하인 信誠이 평 양성문을 열었다고 한다. 「答薛仁貴書」를 보면 신라의 정예 騎兵 500이 최초로 入城했다고 한다.62) 신라군이 길을 열자 唐兵이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城위에 올라가 城門樓 사 면에 불을 질렀다.63) 연기가 자욱한 평양성 大門 싸움에서 신라의 黑嶽令 선극이 크게 선전을 했다. 漢山州의 少監 박경한은 고구려의 고위 장성인 軍主 술탈과 그 부하들을 척살했다.64) 여기에 대해 임기환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평양성 안 전투에서 신라 한산주 소감 박경한이 고구려 軍主 述脫을 죽인 공으로 포상받았는데, 軍主라고 하면 최고위 군사령관으로서 술탈은 아마도 평 양성 방어를 책임진 최고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65) 평양성 北門에서 신라의 軍師인 南漢山 사람 북거가 부하들을 잘 통솔하여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고,66) 신라 誓幢의 대병력이 성내 마지막 저항 거점으로 보 이는 고구려 사령부(軍營)에 들여 닥쳤다. 전멸을 각오한 고구려군의 저항이 지 속했고, 그들이 모두 쓰러졌을 때까지 신라군이 밀고 들어갔을 것이다. 誓幢의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인 김둔산이 큰 공을 세워 沙湌의 관위와 租 700石을 사 여 받았다.67)

62) “於後英公更取新羅驍騎五百人, 先入城門, 遂破平壤, 克成大功.” 『삼국사기』 권7, 문 무왕 11년(671) 「답설인귀서」.

63) 『冊府元龜』 卷19, 帝王部·功業(M-③).

64) “… 漢山州少監朴京漢, 平壤城內殺軍主述脫, 功第一. 黑嶽令宣極, 平壤城大門戰功 第一, 竝授位一吉湌, 賜租一千石 ….” 『삼국사기』 권6, 문무왕 8년(668) 10월.

65) 임기환, 앞 글(2021.06.10.).

66) “軍師南漢山北渠, 平壤城北門戰功第一, 授位述干, 賜粟一千石.” 『삼국사기』 권6, 문 무왕 8년(668) 10월.

67) “誓幢幢主金遁山, 平壤軍營戰功第一, 授位沙湌, 賜租七百石.” 『삼국사기』 권6, 문무왕 8년(668) 10월.

시가전은 야전과 전투 양상이 다르다. 장소가 협소하기 때문에 단병접전이 벌어진다. 長槍의 사용은 제한적이고 주로 劍이나 도끼·곤봉이 사용된다. 전투 는 피를 튀기는 양상을 뛸 수밖에 없고, 짧은 시간에 상상할 수 없는 희생자가 나 온다. Q (문무왕 8년(668) 9월 21일)大軍이 함께 合하여 平壤을 포위했다. 高句麗王이 먼저 泉男産 等을 보내 英公(이적) 앞에 이르러 항복을 청했다. 그리고 英公이 (고구려)王 寶臧과 王子인 福男·德男 그리고 大臣 等 20餘萬口를 데리고 唐으 로 돌아갔다.68) 668년 9월 12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69)

68) 『삼국사기』 권6, 문무왕 8년(668) 9월 21일 조에서 20만을 唐으로 데리고 갔다고 하는 데, 고구려 전역에서 끌려간 총수를 말하는 것 같다. Denis Twitchett and Howard J Wechsler, “Kao-tsung and Empress Wu”,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p. 284 참조.

69) 『資治通鑑』 卷201, 唐高宗 總章 元年(668) 9月 癸巳(12일) 조.

그 직후 李勣은 보장왕이 보낸 사절 단장 男産을 맞이했다. 항복의 의사를 전달받은 그는 이후 평양 사람들을 분류하 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규모 포로의 送致가 있을 터였다. 고구려 보장왕과 왕자들 그리고 귀족 大臣들 휘하 고위층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송 명단에 올랐고, 9월 21일 唐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고구려 시스템의 중요 운영자들이요, 행정가, 과학자, 기술자, 문예인 등 엘리트 들이었다. 李勣이 고구려 지배층의 뿌리를 뽑아 중국으로 옮긴 것에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唐은 그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고구려의 사회체제를 완전히 붕괴시 켜 미래의 재생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 결과 669년 현지에 남은 고구려인 들의 저항의 불길이 맹렬히 타올랐지만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고, 조직화되지 못했으며, 이전과 같은 사회를 재건하지도 못했다.

Ⅵ. 맺음말

지금까지 兩唐書 契苾何力傳의 검토를 통해 전쟁의 시공간을 분석하고, 『大 淸一統志』를 통해 薛賀水 戰場의 위치를 규명하였으며, 668년 7월 초 평양 남쪽 에서 熊津都督府 軍團의 전멸을 전하는 『冊府元龜』 기록을 찾아냈다. 그 결과 고 구려 최후의 전쟁에서 戰線의 一進一退가 반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 목 고구려가 쓰러지는 모습은 장대했다. 666년 6월 唐이 고구려 내전 개입을 결정했다. 같은 해 9월 唐은 고구려의 玄菟城을 접수하였고, 이듬해인 667년 2월 新城 앞에 도착하여 장기간의 공성 전에 들어갔다. 그해 9월 新城을 뽑은 李勣은 압록강까지 남하하여 大行城 등을 점령하였다. 667년 10월 李勣軍과 契苾何力은 辱夷城(청천강 하류)까지 남하했다. 그 곳에서 파발을 뛰어 신라군의 북상을 독촉했다. 대동강 하구에 고립된 郭待封 이 이끄는 唐水軍의 탈출 시간을 벌기 위해 男建의 병력을 남북으로 분산시켜야 했다. 구출작전이 완료된 것으로 보이는 11월 11일에 李勣軍과 契苾何力은 大 行城으로 철수했다. 이듬해인 668년 2월 李勣의 부장인 契苾何力이 북상하여 薛仁貴를 도와 夫 餘城을 점령하고 그 주변의 40성에 대한 항복을 받아냈다. 扶餘지역이 唐軍의 손에 떨어지자 男建의 고구려군 5만이 평양 쪽에서 북상했다. 그들이 鴨綠江으 로 진격해 오자 李勣은 大行城을 포기하고 開州(오골성 부근)의 薛賀水까지 후 퇴하여 대열을 정비했다. 그는 그곳에서 男建의 군대 5만을 격파했고, 南進하여 大行城을 탈환했다. 668년 6월 29일 압록강에서 남하한 李勣軍이 평양성 북쪽 20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북진해오던 劉仁願의 熊津都督府軍은 고구려의 큰 저항에 부딪쳐 李勣軍과 연결되지 못했다. 劉仁願이 40명이나 되는 전령을 李勣에게 보냈지만 모두 도착하지 못했고, 마지막 한 사람이 도착하여 李勣과 그의 군대가 북쪽으로 후퇴 한 사실을 전했다. 6월 말에서 7월에 접어드는 시점의 전투에서 熊津都督府軍 1 만은 전멸했고 李勣은 鴨綠으로 되돌아갔다. 扶餘지역에서 蕃漢兵 50만(扶餘州·柵州·國內州의 고구려병력 포함)을 이 끌고 남하한 契苾何力은 鴨綠柵에 머물러 있던 李勣보다 먼저 평양으로 향했고, 8월 초 李勣이 이를 따라갔다. 668년 8월 12일 경 평양성이 포위되었다. 여기에는 북상한 신라군도 가세 했다. 『삼국사기』 「답설인귀서」를 보면 番軍·漢軍 모두가 蛇水에 집결하니, 男建 이 성문을 열어 군대를 출동시켰다고 한다. 신라의 大幢이 이를 막아섰고, 男建 군대의 大陣을 격파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신라의 大幢 少監인 본득이 가장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沙飡 구율 은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다. 漢山州 少監 김상경 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지만 공이 커서 一吉飡의 官位와 벼 1천 석을 상으로 받 았다. 동시에 신라의 軍師 仇杞가 平壤南橋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곳은 안학궁 남 쪽에 있었던 시가지와 대동강 남쪽을 잇는 다리였는데 신라군이 대동강 북쪽의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곳이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男建의 부하인 信誠이 내응하여 평양성의 문을 열었다. 신라의 정예 騎兵 500이 성안으로 들어가 길을 열었다. 그러자 入城한 唐兵들이 城門樓에 불을 질렀다. 羅唐軍이 물결처럼 평양성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성 안 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신라 誓幢의 幢主인 김둔산이 고구려군의 사령부인 軍 營까지 쳐들어갔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신라 漢山州의 少監 박경한은 성내에서 고구려의 고위 장성인 軍主 술탈과 그 부하들을 打殺했다. 성의 北門에서도 치 열한 전투가 있었다. 신라의 軍師인 南漢山 사람 북거가 이 싸움에서 큰 공을 세 웠다고 한다.

9월 12일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했다. 함락 후 10여 일이 지나 唐 나라 총사령관 李勣이 고구려의 왕과 왕자들 그리고 귀족 등 휘하의 고위층 등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을 배에 태워 唐으로 끌고 갔다. 唐은 최상층의 뿌리를 뽑아 고구려의 사회체제를 완전히 붕괴시켜 미래의 재생 가능 성을 짓밟아버렸다.

다음 해인 669년부터 남겨진 고구려인들의 저항의 불길이 맹렬히 타올랐지만 그들은 이전과 같은 사회를 재건할 수 없었다. 668년 10월 唐高宗은 승리한 장수 李勣을 시켜 고구려 王과 그 휘하의 사람 들을 唐太宗의 무덤(昭陵)에 바치게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병을 얻어 죽은 황제를 위로하는 의례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李勣과 그의 군대는 승리 의 노래를 부르며 長安으로 개선했다. 고구려왕과 휘하 사람들이 황실의 조상신 들을 모신 太廟에 바쳐졌다. 전쟁을 목격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그들이 시야에 들 어오자 遼東에서 고구려가 사라졌다는 것을 체감했으리라.

唐朝의 역사에 박힌 가시가 뽑혔다.

주제어 : 契苾何力, 李勣, 劉仁願, 平壤城, 扶餘城, 薛賀水, 大行城, 熊津都督府 軍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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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Last War of Goguryeo Seo,

Young kyo (Jung won Univ.)

In 1941, Ikeuchi Hiroshi(池內宏) wrote and published a paper on the war of the fall of Goguryeo. It was his masterpiece. But he did not consider the fluidity of the borders of war. According to his argument, Goguryeo collapsed with little resistence. However, the advance and retreat of the front line were repeated in the Last War of Goguryeo. In September 667, Chinese general Lee Jik(李勣), who received the Teaheang castle(大行城) at the mouth of the Amnokgang(the Yalu River), moved south to the Cheongcheon River in October, but withdrew to Amnokgang in November. Immediately after the fall of Puyo castle(扶餘城) by the Chinese army in February 668, Goguryeo's 50,000 troops moved north. Lee Jik gave up Teaheang castle and retreated to the nearby Ogol Fortress There, Lee Jik defeated the Goguryeo army and went south to recapture Teaheang castle. In June of the same year, Lee Jik advanced north of Pyeongyang. In that place, he met Silla’s prince Kim Inmoon. However, his troops were not connected with another Chinese army coming from south from Baekje. In early July, However, his troops could not come into contact with 10,000 Chinese troops coming from south from Baekje. Because, the latter were attacked and exterminated by Goguryeo troops in early July. and Lee Jik withdrew to Amnokgang. In early August, Lee Jik advanced to south, surrounded the Pyeongyang Castle on August 12 and captured it on September 12. As a result, the Kingdom of Goguryeo fell, but not without fierce resistance. Goguryeo’s final war was magnificent.

Keywords : Qìbìhélì, LiJi, Liu Renyuan, Pyongyang Castle, Puyo Castle, Salhasu, Teaheng Castle, Governor-General of Ungjin's army

(투고일자: 2022.05.06. 심사일자: 2022.05.10. 게재확정일자: 2022.05.24.)

歷 史 學 報 第 254 輯 ( 2022.6 )

 

 

高句麗 最後의 戰爭.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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