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머리말
2. 經略復國要編의 편찬과 구성
3. 經略復國要編을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
가. 엇갈린 ‘전략’과 ‘전술’: 명군의 평양성 전투
나. 놓쳐버린 ‘골든 타임’: 강화교섭과 출구 전략
4. 맺음말
초 록
경략복국요편은 임진왜란 초반 명군의 최고 지휘관이 었던 경략 송응창이 남긴 기록으로, 명 조정이 조선을 구원한 배경 과 출병 과정, 명군의 세부적인 전략과 전술, 그리고 평양성 전투 등 각종 전투와 강화교섭의 진행 등을 중국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매력적인 사료이다. 16세기 말 동아시아 삼국이 참전한 국제 전으로서 임진왜란의 다양한 문제를 재조명하기 위해, 본 논문은 경략복국요편의 편찬과 전승 과정을 살펴보고, 권별로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차후 연구에서 활용될 수 있는 주요 쟁점들을 소개한 다. 또한 앞으로 경략복국요편을 활용하여 구성할 수 있는 연구 사례를 실험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한국 학계의 임 진왜란 연구가 ‘새로운’ - 신선하고, 새삼스러우며, 꼭 필요한 - 발 전을 꾀하는 토대가 되기를 희망한다.
주제어 :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 송응창(宋應昌), 임진왜란, 동아시아 국제전, 명군(明軍), 평양성 전투, 강화교섭
1. 머리말
“새로운”이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다른 사전적 의미가 있다. 첫째,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는 ‘신선함’[ex. 새로운 상품], 둘 째,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새삼스러움’[ex. 볼수록 새로운 신 록], 그리고 셋째,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없어서 아쉬운 ‘간절함’[ex. 단돈 만 원이 새로운 형편]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의미는 언뜻 비슷해 보여도 각기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본 논문 이 “임진왜란을 보는 새로운 창”이라는 다소 도전적인 제목을 선 택한 이유도, ① 지금까지 잘 활용되지 못했던 사료를, ② 이전 과 다른 관점으로 새삼스럽게 재조명함으로써, ③ 앞으로의 활 용 가능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명나라까지 각자의 국 력을 기울여 맞붙은 동아시아 국제전이었고, 삼국의 역사적 흐 름을 완전히 뒤흔들어 버린 사건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한· 중·일 삼국에 전해지는 다양한 관련 사료의 존재만으로도 충 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1)
1) 陳尙勝・趙彦民・孫成旭・石少穎, “地區性歷史與國別性認識 -日本、韓國、中國有關 壬辰戰爭史硏究述評”, 海交史硏究, 2019-4.
한국에서는 2007년 발족한 한일문화 기금의 한일역사공동위원회 제2기 사업에서 임진왜란 관련 사료의 본격적인 목록과 해제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에서 만 들어진 임진왜란 관련 기록을 관찬 사료, 친필 필사본, 야담·야 사류, 문집류, 실기류 등으로 분류하여 상세한 해제를 내놓는가 하면,2) 개별적인 사료 검토에서 벗어나 목록화 및 데이터베이스구축을 통해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제안하거나, 3) 일본 측 사 료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과 해제가 한국어로 소개되기도 하였 다. 4)
2) 이상훈, “임진왜란관련 사료해제”, 한일문화기금・동북아역사재단 편, 임진왜란과 동아시아세계의 변동, 서울: 경인문화사, 2010.
3) 김일환, “임진왜란 편년사 집성 및 주제별 DB구축의 필요성”, 이순신연구논총 29, 2018.
4) 사에키 고지・스카와 히데노리・구와노 에이지 편, “중세 근세 일한관계 사료해제 집”,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편,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서울: 한일문화기금, 2010.
또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임진왜란 관련 기록을 초기 문헌 및 다이묘별 문헌, 太閤記류, 朝鮮征伐記류, 朝鮮軍記物류 등 총 5가지 기준으로 분류하고 각 기록에 대한 상세한 해제 및 소장처 정보를 제시한 연구도 국내 임진왜란 연구에 유용한 자 양분이 되었다. 5) 한편 각국 사료의 개별적 정리와 검토를 바탕으로 이제는 삼국의 사료를 통합적으로 하나의 시야 안에 넣는 거시적 관 점과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왜냐하면 전쟁 및 외교와 관련해 서 특정 국가의 사료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경우, 전체상을 파 악하기 어려울뿐더러 또 다른 편향과 오해를 재생산할 수 있 기 때문이다. 6)
5) 최관・김시덕, 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 서울: 문, 2010.
6) 이러한 맥락에서 기타지마 만지는 제1・2차 평양성 전투, 벽제관 전투 등을 한・ 중・일 삼국의 사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각국 사료의 서술 방식을 논하면서 교차 검증을 통해 철저한 사료 비판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기타지마 만지, “임진 왜란에 관한 일본・한국・중국의 사료와 그 특질(壬辰倭亂に關する日本・韓國・中 國の史料とその特質)”, 한일문화기금 편, 한일양국, 서로를 어떻게 기록했는가?, 서울: 경인문화사, 2017, pp.13-99.
그간 한국 학계의 임진왜란 연구 또한 조선과 일본 측 사료에 주로 의존하다 보니, 국제전의 중요한 한 축 을 담당했던 명 측의 역할과 그 영향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중국 측 자료 가운데 널리 활용된 것은 관찬 사료 인 明史와 明神宗實錄, 谷應泰의 明史紀事本末, 談遷의 國榷 등을 꼽을 수 있다. 우선 明史 가운데 임진왜란 시기에 해당하는 「神宗本紀」의 경우 萬曆 20년(1592)7) 5월 “왜가 조선을 침범하여 왕경(한양)을 함락하였고, 조선 왕 昖(선조)이 의주로 도망하여 원조를 요청하였다.”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주 요 전투 및 명군 지휘부의 임면 사항 등을 간략하게 기술하였 다.8) 또한 명사에는 「職官志」, 「兵志」, 「武備志」와 더불어, 列傳 중에서는 「朝鮮列傳」에서 전체 1/3가량의 분량을 임진왜란 과 정유재란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고 있으며, 야전에서 활약했 던 李成梁의 아들인 李如松, 李如伯의 열전 등도 수록하고 있 다. 9) 明神宗實錄 또한 임진왜란 발발 직전 명 측이 파악한 일 본의 동향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전쟁 준비, 조・명 및 명・일간 교섭 상황과 명 조정 내부의 동향 등을 상세히 담 고 있다. 10) 기사본말체 사서인 谷應泰의 明史紀事本末11)은 「援朝鮮」 편 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의 주요 사건을 서술했는데, 이 는 명사 「조선열전」에 수록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서술의 저 본이 되었다. 12) 그리고 편년체 사서인 談遷의 國榷은 일본의 조선 침공 소식을 시작으로 주요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서술하 되, 평양성 함락 등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직접 評語를 남기 기도 하였다. 13)
7) 이하 본고의 날짜 표기는 모두 음력이며 해당 연도의 정월 초하루가 속한 서력 연 도를 괄호로 병기한다.
8) 明史(北京: 中華書局, 1980) 卷20, 本紀二十, 「神宗」, p.275.
9) 明史의 「朝鮮列傳」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중국사서 조선전 역주사업의 결과로 2004년 번역 출판되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도 이 용할 수 있다.
10) 明神宗實錄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명・청실록 DB를 통해 이 용할 수 있다.
11) 谷應泰 編, 明史紀事本末, 北京: 中華書局, 1985.
12) 황원구, “明史紀事本末 “援朝鮮” 辨證 -明史稿・明史 關係記事의 底本問題”, 東方學志 48, 1985, pp.301-302.
13) 談遷 著, 張宗祥 校點, 國榷, 北京: 中華書局, 1988.
이상의 자료들은 명대 전체 시기를 포괄하는 사서이기 때 문에, 임진왜란 시기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발췌하여 활용하게 된다. 이러한 통사적 사료에 남겨진 史實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겠지만, 특정 사건을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그 사건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에 의해 작성 된 현장성 높은 자료가 좀 더 매력적일 것이다. 梁啓超의 표 현을 빌리자면 ‘바로 그때[當時], 바로 거기[當地], 바로 그 문제를 담당[當局]’한 사람이 남긴 사료일수록 더 믿을 만하 기 때문이다. 14) 이러한 측면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가장 가까운 시간과 공간에서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이 작성한 중국 측 자료 중 하나가 바로 宋應昌의 經略復國要 編(이하 경략으로 약칭)이다. 경략은 임진왜란 초반 명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경략 송응창(1536-1606)이 남긴 기록으로, 만력 23년(1595, 선 조 28) 전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목 그대로 “경략 (송응창)이 조선을 회복시켜 준 일에 대한 중요한 문서를 엮 은 책”이다.15)
14) 양계초 저, 유용태 역, 중국역사연구법,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pp.164-165.
15) 경략에 담긴 송응창의 표현을 그대로 따오자면, “1년 내내 힘을 다하여 조선이 이미 잃은 땅을 한 자 한 치까지 모두 옛 주인에게 돌려주고”, “여러 대에 걸쳐 공순하였던 속국(조선)을 회복” 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명나라의 임진전쟁 2: 평양 수복, 「#7-7 평양과 개성을 수복한 공적의 서훈을 아리는 상주(만력 21 년 3월 4일)」, pp.354-379. 이하 경략에 수록된 문서를 인용할 때는 최근 국립 진주박물관에서 번역 출판한 명나라의 임진전쟁 단행본(송응창 저, 구범진 등 역주, 명나라의 임진전쟁: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 역주 1-5, 진주: 국립진주박 물관, 2020-2021)을 기준으로 문서 번호와 제목, 일자와 페이지 수를 표기한다.
송응창이 경략으로 재임한 기간과 그 전후의 상주문・공문・명령서・편지 등을 엮은 것으로, 명 조정 각 部의 題本・奏本과 함께 조선과 주고받은 咨文까지 시간순으 로 배열하여 수록하였다.
송응창은 杭州 仁和縣 출신으로 嘉靖 44년(1565)에 進士가 되 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만력 20년(1592) 7월에 1차로 파병된 副 總兵 祖承訓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명 조정은 兵部侍郎 송응창을 經略軍門으로, 都督同知 李如松(1549-1598)을 提督軍 務로 삼아 4만여 명의 명군을 조선으로 출병시켰다. 송응창은 조선에 파병된 명군의 총책임자로서 병력·무기·군량·급여를 지원하고 이동시키는 모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북경의 황 제 및 실무자에게, 후방인 遼東과 山東 지역의 군관과 지방관에 게, 최전선의 사령관 이여송 이하 모든 장령에게, 그리고 조선 국왕과 신료에게 하루에 많게는 10여 통의 공문서와 사적인 편 지를 주고받으며 전쟁의 거의 모든 과정을 조율했다. 송응창은 평양과 한양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지만, 벽제관 전투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寧波를 통해 조공 하도록 하는 封貢案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조정과 명 조정의 主戰派, 감찰을 담당한 科道官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 았고, 결국 탄핵당하여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고향에 내려 가 은거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전쟁 수행 과정을 기 록으로 남기기 위해 저술한 책이 경략이다. 말하자면 경략 은 송응창이 임진왜란에 대해 남긴 공적인 기록임과 동시에 매우 사적인 기록으로서, ‘보고’와 ‘소명’을 위한 생생한 현장 의 증거였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임진왜란 연구가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연 구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 된 경략 판본을 이용해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참전과 그 정치 적 영향에 대해 선구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16)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략은 한국사 영역의 임진왜란 연구에서 명 측의입장을 살펴보기 위한 사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7) 특히 최근 발간된 임진왜란의 통사는 종전 연구에서 강조된 조선 및 일본 사료와 더불어 경략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임진왜란 초반 명군 의 참전 상황과 함께 ‘전쟁’보다 훨씬 치열했던 ‘논쟁’의 구체적 인 내용을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냈다.18)
16)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서울: 역사비평사, 1999.
17)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오호성, 임 진전쟁과 조·명·일의 군수시스템, 서울: 경인문화사, 2017.
18) 김영진, 임진왜란 : 2년 전쟁 12년 논쟁,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1.
이렇게 새로운 임진왜란 연구 경향의 연장선에서 본고는 경 략의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 해 Ⅱ장에서는 경략의 편찬과 전승 과정을 살펴보고, 권별로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차후 연구에서 활용될 수 있는 몇 가지 쟁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Ⅲ장에서는 앞으로 경략 을 활용하여 구성할 수 있는 연구 사례를 실험적으로 제시해 보 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임진왜란 연구 의 가능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그것을 기존의 자료와 관 점에 어떻게 반영하고 적용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 거리 를 두고 고민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 다. 더 나아가 경략의 ‘새로운’ 재조명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전으로서의 임진왜란 연구에 대한 학문적 영감과 외연이 더욱 풍부해지고 넓어지기를 희망한다.
2. 經略復國要編의 편찬과 구성
경략의 기본적인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목 첫머리에 보이는 ‘경략’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략은 명 조정이 송응창에게 부여한 직책의 명칭으로서, 그 임무와 권한에 대해서는 만력 20년(1592) 9월에 내린 만력제의 勅 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지금 특별히 그대에게 명하노니, 薊州・遼東・保定・山東 등 지로 가서 沿海를 방어하고 왜를 막는 軍務를 경략하라. 그대 는 마땅히 兵部에서 題本을 올려 윤허 받은 내용에 따라 要 害處 방어, 墩臺 건설, 戰船 제조 감독, 火砲의 대량 확보, 士氣 고무, 왜정 정찰 등 싸우고 지키며 위무하고 토벌하는 일체의 사무를 모두 편의대로 처리하라. 兵馬와 錢糧을 알맞 게 조치하고 使司・道員・將領에게 편의대로 임무를 맡겨 파 견하라. 총독과 더불어 계획하거나 의논해야 할 일은 충분히 상의하여 행하되, 선입견을 고집하지 말고 國事에 이롭기를 기약하라. 總兵・巡撫 이하는 모두 너의 지휘를 받는다.19)
19)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0-1 칙(만력 20년 9월 26일)」, p.52.
송응창이 받은 경략의 임무는 일본군과 대적하는 거의 모 든 부분을 망라했고, 그 모든 것을 편의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순무 이하의 모든 문관과 총병관 이하의 모든 무관이 그의 지휘에 따라야 할 만큼 명군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직위였다. 이처럼 경략은 임진왜란 초기 일본 군과의 전쟁에서 거의 모든 인원과 분야를 지휘하고 관장했 던 경략 송응창과 관련된 문서들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명 측 의 핵심적인 정보를 모두 담고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만력 22년(1594) 송응창은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한 일부 신료들의 탄핵으로 인해 경략에서 물러 나 은거에 들어갔다. 그 후 명신종실록에 송응창의 이름은 만력 24년(1596)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일본국왕 책봉 이 무산된 뒤 그의 책임을 추궁하는 데서 일부 등장할 뿐이 고, 이듬해 신임 경략 邢玠(1540-1612)가 군대 동원을 논의 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례를 원용한 정도이다. 國榷에서도 만력 27년(1599) 퇴임 관원들의 처우를 언급하면서 송응창에게 관인 신분을 유지하게 하라는 기록이 그와 관련한 마지막 흔적 이다.20) 만력 23년(1595)경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략의 전승 또한 온전치 못했다. 만력 연간 王在晉(1567-1643)의 海防纂要에는 송응창이 작성한 圖 부분과 상주문 몇 편만 실려 있으며, 그 출처는 권수가 기록되지 않은 “平倭復國編”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후 黃虞稷(1629-1691)의 千頃 堂書目에서도 송응창의 “朝鮮復國經略要編 6권”으로 책수를 권 수로 잘못 수록했으며, 이를 따른 明史 「藝文志」에서도 “經略 復國”이라는 이름으로 송응창의 저작을 실었다. 21)
20)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pp.36-37.
21)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pp.38-39.
흥미로운 사실은 정유재란 시기였던 만력 26년(1598, 선조 31) 6월 23일 선조실록의 기사에 “송응창이 지은 復高要 編”이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덕형은 이 復高要編을 살펴보고서, 송응창이 “왜적은 전라·황해·평안도 등을 경유한 뒤에야 중원 땅에 다다를 것이니 필경 이렇게 될 리는 만무하 다.”라고 기록한 부분을 지적하며, “천하를 그르치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22) 이덕형이 인용한 문장은 송응창이 圖說 부분에서 “만약 전라·경상을 지키지 못하면 이는 조선을 잃는 것이다. 이 미 조선을 잃었다면 왜적들이 육로로 요동을 침범할 수 있겠지 만, 이것을 염려하기에 부족하다.”라는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23) 이덕형은 임진왜란 당시 명과의 외교교섭을 전담한 인물로서 명 측의 속 사정에 능통했고, 임진왜란 초기 명군의 강화교섭 및 철군의 부당함을 힘써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따라 서 이덕형이 경략에 내린 악평에는 당시 명군의 총책임자였던 송응창을 깎아내리려는 분명한 의도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 다. 24) 한편 청조 乾隆 연간(1736-1796)에 경략은 제목에 있 는 ‘復國’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禁書로 분류되었다. 물론 여기 서 ‘復國’은 ‘조선을 돌려놓는다’라는 뜻이지만, 만주족 청조 의 입장에서는 체제 전복의 ‘反淸復明’을 연상시킨다는 점에 서 軍機處奏准全燬書目에 등재된 금서가 되었다. 25)
22) 선조실록 卷 101, 선조 31년 6월 23일.
23)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0-2 중국과 조선 연해 지도 서문(만력 22년)」, p.59.
24) 이철성, “李德馨의 임진전쟁 중 외교 활동”, 한국인물사연구 7, 2007, pp.12-14.
25)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pp.39-40.
자연히 경략은 四庫全書에도 포함되지 못했으며, 四庫全書總目 提要에서 侯繼國이 지은 兩浙兵制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일종의 비교 대상으로서 문제점을 간략히 언급하는 데 그쳤 다. 당시 四庫全書總目提要의 찬수자가 문제 삼은 것은 兩浙 兵制의 「倭警始末」 부분에서 조선국왕 선조가 올린 상주문이 실려있는 반면, 경략에는 이 문서가 실리지 않았다는 것이었 다. 이와 더불어 찬수자는 당시 遼東巡按御史 周維翰이 송응창 을 고발한 문서 등이 경략에 실리지 않았다는 점을 거론하며 송응창이 명 조정에 倭情을 거짓으로 전달했다는 여러 증거들을 일부러 넣지 않고 은폐했다고 비판했다.26) 현재 시점에서 경략에 실리지 않은 내용들은 조선 및 일 본 측 자료들과의 교차 검증이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에, 송응창에게 불리한 문서들이 경략에서 누락되었다는 점은 오히려 차후 흥미로운 연구 소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27) 다 만 四庫全書總目提要의 찬수자 입장에서는 兩浙兵制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는 목적하에 경략이 누락한 정보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송응창과 경략 전반에 대 해 “자신의 공적만을 늘어놓고 자신의 허물을 숨긴다.”라고 비판의 수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당시 경략이 금 서로 분류되었다는 점 또한 당시 찬수자가 거리낌 없이 오명 을 부여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경 략이 송응창 개인의 강화교섭 노선에 대한 변론을 위해 작 성된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이 형성된 계기는 바로 이 四庫 全書總目提要에 실린 평가가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8)
26) 四庫全書總目提要 卷100(子部10, 兵家類存目), 兩浙兵制』. 한편 여기서 언급된 조선국왕의 상주는 謝恩使 金睟가 가져간 것으로, 만력 21년(1593) 6월 이래로 일본군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일본군이 공순히 명의 조공과 책봉을 기다리고 있 지 않다고 폭로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외교문서의 요약본은 이정일 편, 국역 사대문궤 2,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20, pp.247-259 참조.
27) 일례로 경략 및 조선・일본 측 사료를 토대로, 명ㆍ일본 간 강화교섭이 진행되 던 시기 송응창이 단행한 정보 통제를 지적한 연구를 꼽을 수 있다. 김경태, “임 진전쟁기 경주 안강 전투와 강화교섭 국면의 변동”, 한국사학보 62, 2016.
28) 대표적으로 최근 중국의 임진왜란 연구자인 孫衛國의 경우 경략을 주된 사료로 이용하기는 했지만, 경략의 문제점을 지적한 四庫全書總目提要의 평가가 타 당함을 주장하면서 경략이 송응창의 자기변호를 위한 목적에서 송응창 위주의 자료들로 구성된 점, 경략에는 누락된 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경략이 가지는 편향성을 지적한 바 있다. 孫衛國, “萬曆援朝戰爭初期明經略宋應昌之東征及 其對東征歷史的書寫”, 史學月刊, 2016-2, pp.46-50.
비록 건륭 연간 금서로 분류되고 四庫全書에도 수록되지 못 했지만, 경략은 徐乾學(1631-1694)의 傳是樓書目을 비롯한 여러 장서 목록에 보존되었다. 청조가 멸망하고 남경 국민정부 가 들어선 시기인 1929년에 南京 國學圖書館(현 南京圖書館)의 관장이었던 柳詒徵(1880-1956)은 국학도서관 소장 자료 가운데 청말 장서가 丁丙과 丁申 형제의 장서 八千卷樓에 수록된 경 략의 역사적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개탄하며 영인 을 추진하였다.29) 또한 당시 國立中央大學(현 南京大學) 교수였 던 繆鳳林(1899-1959)이 경략에 대한 상세한 提要를 작성하 고, 30) 黃汝亨이 지은 송응창의 行狀과 송응창의 부인 淑人 顧氏 의 묘지명을 추가하여 國學圖書館 影印本이 간행되었다.31)
경략의 1929년 국학도서관 영인본은 대만에서 1968년 華文 書局이 재영인하여 中華文史叢書로 간행하였고, 1973년 간행된 明淸史料彙編과 1986년 간행된 中國史學叢書三編에도 수록 되었다. 32) 한편 중국에서는 국학도서관 영인본을 재영인한 것이 1990년에 간행된 壬辰之役史料匯輯과 2004년 간행된 中國文 獻珍本叢書의 朝鮮史料彙編에 수록되었으며, 2013년 간행된 中國古代海島文獻地圖史料匯編에는 경략의 圖 부분이 따로 수록되었다. 33)
29) 명나라의 임진전쟁 4: 전후 처리, pp.415-419.
30)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pp.23-47.
31) 명나라의 임진전쟁 4: 전후 처리, pp.356-358, 399-414.
32) 宋應昌 撰, 經略復國要編, 臺北: 華文書局, 1968; 沈雲龍 編, 明淸史料彙編 8 輯, 臺北: 文海出版社, 1973; 宋應昌 撰, 經略復國要編, 臺北: 臺灣學生書局, 1986.
33) 全國圖書館文獻縮微複製中心出版 編, 壬辰之役史料匯輯 上册, 北京 : 新華書店, 1990; 姜亞沙・經莉・陳湛綺 編, 朝鮮史料匯編15-16册, 北京: 全國圖書館文獻 縮微複制中心, 2004; 王士騏 編, 中國古代海島文獻地圖史料匯編, 香港: 蝠池書 院出版有限公司, 2013.
2020년에는 浙江大學出版社에서 點校本이 출간된 바 있다. 34)
34) 宋應昌 撰, 鄭潔西 · 張潁 點校, 經略復國要編, 杭州: 浙江大學出版社, 2020.
이하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경략에 수록된 여러 문서 의 작성일자 및 주요 내용을 권별로 요약하여 살펴보도록 한 다. 경략은 만력 20년(1592) 8월부터 이듬해인 만력 21년 (1593) 12월까지 송응창이 경략으로 재임하던 기간 작성하 고 발송한 다양한 공적・사적 문서와 더불어, 후임 顧養謙 (1537-1604)에게 인계하고 나서 유통된 문서들 가운데 임 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문서와 지도 등 도합 584개 문서를 총 14권과 2권의 부록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표 1> 경략의 전체 구성과 권별 주요 내용
구분 일 자 문서 수 주요 내용 勅 만력20년9월26일 (1592.10.30) 1 만력제의 송응창 임명 칙서 圖 만력 22년 (1594) 2 송응창이 작성한 沿海四鎭圖, 朝鮮圖 및 序文, 圖說 附 만력20년5월~9월 (1592.6~10) 16 명 조정에서 임진왜란 소식을 처음 접하고 대책을 논의한 상주문 卷1 만력20년8월~9월 (1592.9~11) 16 송응창이 경략 임명 이후 조선 출병 준비를 위해 병부 및 각 지역에 전달한 문서 卷2 만력 20년 10월 (1592.11~12) 55 卷3 만력 20년 11월 (1592.11~1593.1) 46 송응창이 조선 출병 준비를 놓고 조정과 협의한 문서, 군량 수송과 관련해 작성한 문서, 모든 장령에게 내린 명령문 卷4 만력 20년 12월 (1593.1) 38 명군 본대의 진군과 관련해 작성한 문서, 평양성 탈환을 위 한 전술 논의 卷5 만력 21년 정월 (1593.2) 89 평양성 전투를 위한 사전 준비 과정, 평양성 전투의 승전보 전달, 차후의 전략 및 전비 태세 논의 卷6 만력 21년 2월 (1592.3) 54 명군의 한양 진격 과정에서의 군량・병력 증원 방안, 전공 포상과 처벌 논의
卷7 만력 21년 3월 (1593.4) 32 공적 서훈을 명 조정에 전달, 평양・개성・벽제관 전투의 전투 경과보고, 일본과의 화의 관련 논의 卷8 만력21년4월~5월 (1593.5~6) 56 일본과의 강화교섭 관련 논의, 한양 수복 이후 일본군 추격 방안 및 명군의 퇴각 준비와 조선 방어선 구축 관련 논의 卷9 만력21년6월~7월 (1593.6~8) 34 일본군 추격 및 요충지 방어 전략, 일본과의 강화교섭 관련 논의 卷10 만력 21년 8월 (1593.8~9) 42 명군 본대 철수 및 조선 留守軍 배치와 조선 방어선 구축, 장병 포상 논의, 강화교섭 관련 논의 卷11 만력21년9월~10월 (1593.9~11) 40 유수군 정비 및 방어 체계확립 관련 논의, 광해군 南下 요구 卷12 만력 21년 11월 ~ 윤11월 (1593.11~1594.1) 26 강화교섭 진행에 대한 송응창의 해명 및 전황 보고, 경주 안강에서의 일본군과 전투 상황 보고, 송응창의 파직 상주문 卷13 만력21년12월~3월 (1594.1~1594.5) 10 경략 파직 이후의 사후 처리 관련 문서, 경략 재직 중 출병 의 성과 보고, 전비・포상 등 각종 비용의 결산 장부 卷14 만력 22년 4월 (1594.5) 3 경략 파직 이후 강화교섭안에 제기된 비판에 대한 변론 - 2 송응창의 귀국을 만류하는 조선 耆老들의 軸文 後附 만력 22년 8월 ~23년 정월 (1594.10~1595.2) 19 조선 출병군의 서훈 논의 및 승전 선포 의례 관련 문서, 도 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국왕 책봉 관련 논의 - 3 송응창의 행장 및 묘지명, 발문
우선 勅은 송응창을 경략으로 임명한 만력제의 칙서인데, 앞서 살펴본 대로 송응창에게 연해를 방어하고 왜를 막기 위 해 모든 사무를 맡기고, 일본군이 天朝의 처벌을 받고 조선이 上國의 비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한 내용이다. 이는 곧 임진왜란 초반 송응창에게 부여한 책무를 설정함과 동시 에, 명군의 참전 목적이 연해 지역의 방어와 일본군의 저지에 있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다음 圖는 송응창이 경략에서 물러난 뒤 만력 22년(1594) 에 작성한 것으로, 만력제에게 상주한 중국 및 조선 연해 지 도와 더불어, 지도의 서문 및 간략한 설명이 부기되어 있다.
송응창은 지도의 서문과 설명을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를 지키지 못하면 조선을 잃는 것임을 주장하며 이 두 지역 방어 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여 육 로를 통해 요동 방면으로 침범하는 것은 염려할 필요가 없지 만, 해로를 통해 명의 연해 지역으로 침범하는 것은 명에 가 장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또한 송응창의 우선순위가 명의 연해 지역 방위에 있었음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어 附에는 명 조정에서 임진왜란 소식을 처음 접하고 대 책을 논의한 상주문 16건이 실려 있다. 이 중에는 일본의 목 적이 명 내지로 침투한다는 데 있다는 인식하에 요동과 연해 지역의 국내 방어 강화를 역설하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본군이 개성과 평양 일대를 점령하고 선조가 평양 을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달된 시점부터는, 조선에 군대를 파 견하여 나라 밖에서 일본군을 요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선조가 의주로 피신하여 요동으로 入朝 를 청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병부는 조선으로의 파병을 결정 하고 만력제의 재가를 얻어내었다. 이렇게 附에 실린 명군 파 병 전야에 제기된 상주들은 여타 사료들에 비해 상세한 내용 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명군 파병 직전 명 조정의 임진왜란 관련 인식 및 의사결정 과정의 변천을 살펴보기 위해 필수적 으로 검토해야 할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하 卷1부터 시작되는 본문은 각각의 문서에 제작된 날짜 가 명확히 기재되어 있으며 이를 시간 순서대로 수록하였다. 권1에서 권7까지는 매 권이 1개월 분량이고, 권8에서 권12까 지는 권10을 제외하고 모두 2개월 분량이다. 권13과 권14는 송응창이 사직하고 신임 경략 고양겸과 교대하는 시점 전후 의 상주문이 실려 있다. 비록 권별로 문서 수와 분량 등이 큰 편차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각 권에 실린 문서들은 특정 시기 명군의 전투 관련 보고와 더불어 명군이 당면한 주요 사안을 기준으로 크게 다섯 가지 국면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국면인 권1-3에서는 만력 20년(1592) 5월 과 11월까지 전쟁 발발 초창기의 문서들이 실려 있다. 명 조 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 사실을 파악하고 조선과 일본의 정세 및 이에 대한 방책을 논의한 결과, 병부우시랑 송응창을 경략으로 임명하여 조선으로 東征軍을 파병하기까 지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아울러 송응창이 각지에서 병사 들을 동원하고, 원정에 필요한 각종 병기, 군량 및 각종 비용 의 징발과 더불어, 이러한 물자들을 수송하는 방안까지 강구 한 흔적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해당 부분을 통해서 당시 명 조정이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전쟁 이 전 방어 및 전비 태세 등은 어떠했고, 전쟁 직후 진행된 명군의 동원 규모와 절차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기록에서는 조선으로의 원정 준비 못지 않게 북경 일대의 해안 방어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을 살 펴볼 수 있다. 이는 곧 일본군의 철저한 구축을 원했던 조선 측 과, 자국 영토를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지키는 선에서 전쟁을 매 듭지으려 했던 명 측의 확실한 온도 차이를 암시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두 번째 국면인 권4-5에서는 만력 20년(1592) 12월 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이루어진 조선-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 환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송응창이 화기를 활용한 제압사격 및 포위섬멸을 골자로 하 는 전략・전술을 강구하고, 이를 위한 각종 준비를 진행했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군량과 무기의 조달 등 명군의 군정 업무와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고, 차 후 조선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논의한 각종 전략이 고스란 히 담겨 있다.
평양성 전투 승리 이후 세 번째 국면인 권6-7에서는 만력 21년(1593) 2월과 3월 사이 명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해당 대목에서는 명군이 행군 중에 악천후와 전염병으로 고초를 겪는 상황, 銀 경제가 발전한 명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은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아 물자의 동원이 어려운 상황 등을 서술하고 있다. 35) 흥미로운 점은 통상적으로 명군의 패배라고 알려진 벽제관 전투가 경략에서는 평양, 개성에 이 은 세 번째 대첩으로 현창되고 있다는 것이다.36)
35) 임진왜란 시기 은을 중심으로 한 명 조정의 재정 문제와 명군의 물자 조달과 관련 해서는 萬明, “萬曆援朝之戰時期明廷財政問題 -以白銀爲中心的初步考察”, 古代 文明 12-3, 2018을 참조.
36) 송응창은 벽제관 전투에 나선 이여송이 적은 수로 많은 수를 공격한 것, 피로한 병력으로 편안한 병력을 공격한 것 등 병법에서 꺼리는 것을 범하기는 했지만, 친 히 장수들을 이끌고 용감히 혈전을 치른 끝에 왜의 두목을 사살하고 패퇴시킨 공 적을 대대적으로 현창하였다(명나라의 임진전쟁 2 :평양 수복, 「#7-7 평양과 개 성을 수복한 공적의 서훈을 아뢰는 상주(만력 21년 3월 4일)」, pp.354-379.).
네 번째 국면은 강화교섭 단계로 권8-11에는 만력 21년 (1593) 4월 명・일 간의 강화교섭으로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한 이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명 조정 내 강화교섭 반 대론자들의 반발로 송응창도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추격 노선 으로 선회하기는 했지만, 당시 그의 주안점은 7월에서 8월 사이에 진행된 명군의 퇴각과 留守軍을 중심으로 한 조・명 간 방어 전술 수립에 있었다는 증거가 다수 발견된다(후술). 만력 21년(1593) 7월경부터 일본 측이 강화를 진행하면서도 국지적인 군사도발을 일으키자, 송응창은 명군의 정예병인 南 兵 부대를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충지에 주둔시키며 대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본과의 강화교섭을 계속 진행하는 이중 적인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권12-14에는 만력 21년(1593) 11월부터 이듬 해 4월까지 송응창의 경략 임기 후반부의 상황이 정리되어 있다. 명 조정 내의 강화교섭 반대론자들의 비난이 격화되자, 원래 강화교섭안이 결코 자신의 진의가 아니었다고 애써 해 명하는 송응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송응창 자신이 명 조정에 거짓으로 제시한 일본군의 현황을 고의로 은폐하기 위해 누차 거짓된 보고를 일삼으며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해당 부분이 더욱 주목되는 이유는 경략 경질이 결정된 이후 송응창이 그간 조선 원정에서 거둔 성과를 총괄하여 정리한 보고서의 디테일에 있다. 특히 송응 창이 후임 고양겸과 인수인계를 마친 뒤 원정군이 그간 사용한 銀의 사용처와 數目을 상세히 기록한 결산 장부에 주목할 필요 가 있다. 37) 그간 임진왜란에 투입된 명 측의 재정 부담에 대해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38)
37) 명나라의 임진전쟁 4: 전후 처리 「#13-8 지출 및 남은 마가은을 정리한 장 부를 상부로 올린다는 상주(만력 22년 3월 6일)」, pp.138-157.
38) 2010년대 이후 발표된 전문적인 주요 연구논문만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경태, “임진전쟁 초기의 군량 문제와 강화교섭 논의”, 역사와 담론 70, 2014; 홍성구, “임진왜란과 명의 재정 -교과서 서술과 통설의 재검토”, 역사교육논집 58, 2016; 萬明, “萬曆援朝之戰時期明廷財政問題 —以白銀爲中心的初步考察”, 古代文明, 2018-3; 孫衛國, “萬曆朝鮮之役前期明軍糧餉供應問題探析”, 古代 文明, 2019-4; 陳尙勝, “壬辰禦倭戰爭初期糧草問題初探”, 社會科學輯刊, 2012-4; Masato Hasegawa, “War, Supply Lines, and Society in the Sino-Korean Borderland of the Late Sixteenth Century,” Late Imperial China, Vol.37, No.1, 2016.
기존의 연구들은 대부분 연 대기 기록이나 일부 관원의 상소에 언급된 단편적인 통계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이를 주요 근거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재정 과 관련된 실제 수치는 ‘바로 그때[當時], 바로 거기[當地], 바로 그 문제를 담당[當局]’한 최고 책임자가 최종적으로 지출 확정하 여 보고한 통계가 최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상식에 비추어 봤을 때, 송응창이 남긴 세부적인 수치들은 앞으로 좀 더 세밀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다. 39)
39) 본고에서는 지면의 제한으로 생략하지만, 해당 장부를 활용하여 임진왜란 초반 명 군의 군비 지출 양상과 그에 따른 재정 부담에 대해 면밀한 고찰이 가능할 것으 로 기대한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추후 별고를 기약한다
3. 經略復國要編을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
가. 엇갈린 ‘전략’과 ‘전술’: 명군의 평양성 전투
만력 20년(1592) 12월 중순 명군 본대는 마침내 遼陽에 집결하여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진군했다. 명군 본대의 주 된 목표는 우선 평양을 탈환한 뒤에 한양을 수복하는 것이었 다.40) 경략 송응창 또한 출진 준비가 한창이던 12월 초에 작 성한 여러 문서에서 일본군의 주된 근거지를 평양과 한양으 로 파악하고, 본대를 평양과 한양으로 출진시키겠다는 계획을 보고했다.41)
40)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0-5-13 병부의 상주(만력 20년 9월 25일)」, p.118.
41)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4-1 호부에 보내는 자문(만력 20년 12월 2일)」, pp.424-426.
이러한 대전략 아래 명군 본대는 전략적 교두보인 평양성 탈환을 위해 구체적인 전술 마련에 돌입했다. .
만력 20년 12월 8일에 송응창이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명령에는 출병 초반 명군의 동원 상황 및 준비 태세를 살펴 볼 수 있는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첨부된 단자에 기재된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병부의 공문으로 동원한 병마의 수 는 마병과 보병이 각각 절반으로, 이미 도착한 병력이 30,100명,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병력이 17,900명이었고, 직할부 대인 標下는 총 1,332명이 동원되었으며, 大將軍砲・滅虜砲・마 름쇠・快鎗・三眼銃・筤筅・钂鈀・탄환・활・화살 등 각종 화약 무기와 병장기의 목록이 상세하다. 42) 송응창은 12월 17일 내각대학사 趙志臯와 張位에게 보고하 는 서신을 통해, 평양성 탈환을 위한 전반적인 틀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송응창은 일단 沈惟敬이 제시한 강 화 교섭책을 통해 평양을 얻는다면 전투력을 아껴서 한양을 탈환할 수 있으니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劉黃裳과 袁黃, 그리고 이여송과 논의한 결과, 우선 심 유경을 이여송에게 넘겨주어 동행하게 하고, 장차 평양에 근 접하여 병력을 정비하고 기다리게 한 뒤에 심유경으로 하여 금 일본군과 접선해 하루와 이틀 사이에 평양성에서 출성하 게 하고 만약 일본군이 평양성을 나가지 않으면 즉시 군대를 이끌고 토벌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43)
42)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4-10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명령(만력 20년 12월 8일)」, pp.444-452.
43)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4-26 내각대학사 조지고・장위에게 보고하 는 서신(만력 20년 12월 17일)」, pp.488-489.
다른 한편으로 송응창은 12월 19일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 신을 통해 일본군의 군량이 부족한 상황이고 조선의 관병이 일본군을 포위하고 있으니 속히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심 유경의 강화교섭 노선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일깨웠다. 44) 이어서 12월 23일 병부상서 石星에게 보내는 서신에 서는 심유경의 강화를 통해 일본군의 진군을 늦춘 것은 명군 본대의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할 때는 이로웠지만, 지금은 명군 의 준비 태세가 완비되었고 일본군의 월동 준비가 되지 않았 으니, 봄여름이 오기 전에 일본군 토벌의 시기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45) 또한 송응창은 12월 28일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병과도급사중 許弘綱이 심유경의 속임수를 비난했다는 점을 근거로, 심유경을 잘 대하면서도 그의 돌발 행동에 방비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46)
44)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4-28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편지(만력 20년 12월 19일)」, pp.491-492.
45)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4-31 병부상서 석성에게 보고하는 서신(만 력 20년 12월 23일)」, pp.499-500.
46) 명나라의 임진전쟁 1: 출정 전야, 「#4-37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신(만력 20년 12월 28일)」, p.510.
이러한 정황들을 살 펴볼 때 송응창은 일단 심유경의 강화교섭 노선을 통한 일본 군의 평양 철수를 꾀하는 계책을 실행은 하되, 해당 계책이 성공할 공산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가능한 한 신 속하게 일본군을 토벌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만력 21년(1593) 정월 4일 평양성 전투가 임박한 시점에서, 송응창은 이여송과 찬획 유황상에게 보내는 격문을 통해 평양성 동측만 남겨두고 평양성을 포위하며 일본군이 동쪽 으로 나와 대동강을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타격한다는 전술 아 래, 총 일곱 가지의 세부 작전 지침을 제시했다. 그 면면을 살펴 보면, ① 각 문을 포위한 뒤 마름쇠를 여러 층 펼쳐서 적군의 요격을 방지하고 독화살과 화포를 통한 제압사격, ② 독화살 공 격 이후 해독약을 지참한 병사를 보내서 성 내부의 정황을 파악 한 뒤에 평양성 진입을 결정, ③ 차선책으로 마름쇠를 문밖 좌 우에 깔고 중도의 달아날 길은 열어두고 화포로 성문을 부순 뒤에 성 내에 별동대를 진입시켜 화공 개시, ④ 본대는 달아나는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기회를 보아 성으로 돌입, ⑤ 성으로 돌입 했을 때 일본군 장수는 생포할 것, ⑥ 백병전을 펼칠 때도 화기 를 우선으로 하되 발포는 절도에 맞게 할 것, ⑦ 招降旗를 세워 조선 인민의 투항을 유도할 것 등이었다.47) 기존 연구에서 활용 된 사료에서는 이러한 송응창의 구체적 전략 수립이 잘 드러나 지 않을뿐더러 실제 전장에서 활약한 이여송의 용병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48) 경략에서 드러난 송응창의 평양성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 수립은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47) 명나라의 임진전쟁 2: 평양 수복, 「#5-8 제독 이여송, 찬획 유황상・원황에게 보내는 명령(만력 21년 정월 4일)」, pp.38-42.
48) 기타지마 만지, 2017, pp.18-23. 기타지마는 명 측 자료로서 명사와 명신종실 록을 제시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明史紀事本末 卷62, 「援朝鮮」과 國榷 卷 76, 萬曆 21년 정월 갑술조의 내용과도 대동소이하다.
경략에 상세히 기록된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포진은 대체적으로 기존 연구에서 활용한 명 측 사료들과 비교했을 때 유사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구체적인 전투 양상을 비교해 보면 송응창의 사전 계획과 이여송의 실제 전공 간에는 미묘 한 차이가 발견된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본격적인 공세 이전부터 평양성 내의 일본군을 유인해서 피해를 줬고, 일본 군은 야음을 틈타 명군 일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공 세가 이뤄진 시점에서, 이여송은 직접 평양성 아래까지 육박 해서 공격을 지휘하고 병사를 고무했다. 명군 진영에서는 평 양성으로 포격을 가하기는 했으나, 이는 본격적인 병사들의 진군 이전에 일본군의 수비를 제압하는 역할이었고, 이러한 포격은 송응창이 염두에 둔 것처럼 攻城의 핵심 역할을 담당 하는 수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이여송이 주도한 명군의 평양성 공성 방식은 군대가 직접 성을 올라 공격하는 백병전의 형태였다. 이러한 실제 전투 양상은 포격을 통한 일제사격 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일본군을 동쪽 대동강 방면으로 퇴각 시킨 뒤에 대동강을 건너는 틈을 노려 적을 격퇴한다는 전술 을 강조했던 송응창의 의견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울러 송응창이 제시한 전략에서 일본군의 요격을 막는 수단으로 강조했던 마름쇠와 관련된 서술은 사료상 확인되는 평양성 전투의 양상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명군, 심지어 이여송조차도 몸소 평양성 앞까지 육박한 점이나 일본군 또 한 성을 나와 요격에 나선 점을 미루어 볼 때, 평양성 전투에 서의 마름쇠는 송응창이 기대했던 것만큼 사실상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여송은 적군의 기동을 차단하는 마름쇠의 설치가 자신이 전개하려는 백병전을 위주 로 하는 공성전에서는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고 판단하고 마름쇠의 설치를 진행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앞서 살펴보았듯이 송응창은 상황 에 맞게 별동대를 보내서 적정을 파악해 군대를 대거 진입시 키는 방안이나, 별동대를 잠입시켜 화공을 벌인 뒤에 본대를 진입시키는 방안을 차선책으로 제시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러 한 별동대의 활용은 모두 마름쇠의 설치와 독화살인 毒火飛 箭 및 神火飛箭, 大將軍神砲를 위시한 화포의 화력전을 기본 적으로 상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 전장에서 이여송이 펼 친 전술과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지휘부에서 논의한 ‘紙上談兵’ 이 실제 전장에서 그대로 적용되리라는 법도 없고, 실제 전장 에서는 이치에 맞게 변화하는 ‘合變’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다. 경략에 보이는 송응창의 전략과 전술이 실제 전장에서 다르게 펼쳐진 것 또한 北虜와의 전쟁 경험이 풍부한 야전 사령관이었던 이여송의 판단하에 변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동안 알려진 평양성 전 투의 양상이 원래의 계획과는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한편 선행연구에서는 조선 측 기록과 明史의 언급을 토 대로 문관 송응창과 무관 이여송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는 점, 두 사람의 불화가 평양성 전투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절강 출신 송응창이 기반을 둔 南兵과 요동 철령 출신 이여송이 이끄는 北兵 간의 갈등으로 번졌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 다. 49)
49) 김경록, 조선중기 한중군사관계사,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2, pp.498-501; 김영진, 2021, pp.243-245; 한명기, 1999, pp.130-135; 孫衛國, 2016, pp.41-44.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경략에는 평양성 전투 이후 송응창과 이여송이 군사의 운용을 놓고 벌였던 미묘한 신경 전을 엿볼 수 있다. 평양성 전투 이후인 정월 14일에 참군 鄭文彬과 趙汝梅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응창은 자신이 구상했 던 평양성 탈환을 위한 전술과 야전 사령관인 이여송이 주도 한 평양성 전투의 실제 과정에서 차이가 있었던 부분을 아래 와 같이 언급하였다. 仰城公(이여송)께서는 한번 북을 울려 평양을 함락하였으 니, 이것이 세상을 덮을 만한 뛰어난 공임을 저는 기쁘게 알았습니다. 다만 존귀한 편지를 받아 보건대 유키나가와 겐소 등 여러 수령을 거의 사로잡을 뻔하였는데 다시 그 물을 빠져나갔다고 하니 조금 유감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듣건대 ㉠성을 공격할 때 사다리가 사방에서 모 여들고 군사들이 용기를 떨쳐 먼저 올랐다고 하니, 이는 제가 생각하였던 공격하고 포위하는 방법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다만 유키나가 등이 형세가 막히자 성루에 올라갔기에 사로잡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화기를 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텐데 어찌하여 밤 을 틈타 달아나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설령 몰래 숨었다 하더라도 수만의 군중에서 어찌 알아챈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만약 내가 앞서 파견했던 정예병 두 부대를 대동문 좌우에 매복해 두거나 대동강 東岸에 매복 해 두었다가 그 장수가 이르기를 이르러 호령을 내려 맞 아 공격하고 또한 대군이 그를 뒤따랐더라면 그 장수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어 몸에 한 쌍의 날개가 생겨나 도 결코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략…) 듣건대 ㉣성루를 포위하였을 때 대장군포도 도착한 것이 있었다 고 하니 이것으로 공격하였다면 분명히 성루가 가루가 되 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황이 없는 때에 이 한 수를 빠트 렸으니, 비록 드높은 공훈에 누가 되지는 않겠지만, 실로 마땅히 뒷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50)
50) 명나라의 임진전쟁 2: 평양 수복, 「#5-34 참군 정문빈・조여매에게 보내는 서 신(만력 21년 정월 14일)」, pp.94-96.
(강조는 인 용자) 우선 ㉠의 경우, 앞서 살펴보았듯 명군 병력이 직접 평양성 에 육박해 성벽을 오르는 것은 송응창이 생각한 최선의 전술 이 아니었다. 다만 야전 사령관인 이여송이 직접 병사들을 독 려하고 절강 병사들을 위시한 병사들이 성벽을 올라 명군의 깃발을 세우는 큰 전공을 세웠던 점과 송응창이 제기한 전략 이 백병전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송응 창은 명군이 백병전을 주공으로 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킨 것 이 자신의 전술과 같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송응창은 ㉢을 통해 자신이 강조했던 전략, 즉 퇴각하는 일본 군을 대동강 변에서 요격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이 이행되지 못했던 점을 대놓고 아쉬워했다. 비록 일부 사료에서 명군이 대동강 변으로 퇴각하는 일본군 3백여 명을 무찔렀다는 기록 이 존재하나, 51) 일본군 공격의 주안점을 대동강 변에서의 섬 멸전으로 상정했던 송응창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 한 성과였다.
51) 燃藜室記述 卷16, 「宣祖朝故事本末」; 明史 卷238, 「李成梁傳」, p.6194.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 ㉣에서 송응창은 사전에 논의한 것만큼 평양성 공격에 화포의 사용이 적극적이지 않았던 점 을 문제 삼고 있다. 특히 명군이 평양성으로 육박하며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이 평양성 내부의 누각으로 이동해 농성하 는 상황에서 명군 진영에 화포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아서 적을 격멸하지 못하고 결국 은 적을 도망치게 했다고 탓하였다. 달리 말하면 송응창은 명 군의 주된 목적 중 하나인 일본군 지휘부의 생포에 실패한 원인을 이여송이 지휘한 전장의 소극적인 화기 운용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이처럼 경략을 통해 종전 연구에서 明史 등의 사료들 을 토대로 명군의 주요 공적으로 알려진 만력 21년(1593) 평양성 전투가 실제 송응창의 전략대로 온전히 전개되지 못 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평양성 전투에서 명군이 구상했던 전술과 실제 명군이 전개한 전술 사이에는 상당한 편차가 존 재했으며, 이를 놓고 후방에서 전체 국면을 지휘한 총지휘관 인 송응창과 전방 야전의 총책임자인 이여송 간의 미묘한 신 경전 또한 존재했음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 놓쳐버린 ‘골든 타임’: 강화교섭과 출구 전략
만력 21년(1593) 3월 용산에서 진행된 명·일본 간의 강화교 섭과 관련하여 선조수정실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 면, 심유경이 책봉사의 파견을 위한 두 가지 조건으로 일본군의 한양 후퇴와 조선 왕자 및 신하들의 송환을 얻어냈다고 전한 다.52) 반면 경략에 수록된 4월 3일 이여송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일본군이 조선의 왕자와 신하들을 되돌려 보내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며, 일본군을 공격 내지는 포위한다는 전 술을 상정하고 있었다.53) 그리고 송응창은 4월 15일 이여송 등 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왕자와 신하들 및 인질이 될 왜장을 보 낸 뒤에야 책봉 사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며, 일본군을 방어하면 서 그들이 피폐해진 틈을 타 공격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54)
52) 선조수정실록 卷27, 선조 26년 4월; 연려실기술 卷16, 「宣祖朝故事本末」. 조 선 측 사료에서는 구체적으로 4월의 어느 시점에 강화교섭이 이뤄졌는지 확인하 기 어려운데, 경략에서 만력 21년 4월 16일 송응창이 이여송에게 보낸 편지에 “심유경이 왜의 진영에 머무른 지 사흘째”라는 구절을 통해 심유경이 강화교섭을 위해 일본 측 진영으로 간 것이 4월 13일을 전후한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1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편지(만력 21년 4월 16일)」, pp.49-50). 아울러 4월 28일 이여송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심유경이 4월 말 시점에도 일본 측 진영에 계속 머물러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23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편 지(만력 21년 4월 28일)」, p.77.).
53)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4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신(만력 21년 4월 3일)」, pp.26-28. 54)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0 제독 이여송 등에게 보내는 서신 (만력 21년 4월 15일)」, pp.47-48.
용산에서의 강화교섭 타결 이후에도, 송응창은 일본 측의 강화교섭 조건 이행을 유심히 살폈다. 이는 명군이 한양에 들어온 시점인 4월 20일과 21일에 병을 이유로 한양에서 철수 하지 않았던 일부의 일본군이 실제로 환자인지를 조사하게 한 것이나,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 병이 나은 뒤에 돌려보낼 것을 당부하며 일본군의 완전한 한양 철수를 의도했던 것에 서도 엿볼 수 있다.55) 일본군이 한양에서 빠져나온 것을 기 뻐하면서도 송응창은 전라도에 신칙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가 로막게 하는 등의 방안을 제의하면서, 조선 왕자와 신하들 그 리고 인질이 될 왜장을 확보해야만 완전한 공적이 될 수 있 다며 강화협상 조건의 이행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56) 일단 강화 노선으로 선회한 이상, 송응창은 이에 반발하는 조선을 설득하는 한편 견제해야 했다.57) 조선이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교섭을 방해하거나, 명군의 실책을 명 조정에 고 발하여 자신을 위기에 빠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송응 창 이하의 명군 지휘부는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에 적절히 대 응하는 한편, 명 조정 내의 분위기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워 야 했다. 진격도 후퇴도 명 조정에서 탄핵의 빌미가 될 수 있 기 때문이었다.58)
55)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4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명령(만 력 21년 4월 20일)」, pp.56-57; 「#8-16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신(만력 21년 4월 21일)」, pp.60-61.
56)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5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신(만 력 21년 4월 21일)」, pp.58-59.
57)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5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자문(만력 21 년 4월 4일)」, pp.29-36. 58) 김경태, 2014, pp.99-100.
한양을 수복한 직후 송응창은 곧바로 일본군의 추격 계획 을 세우기 시작했다. 송응창은 일본군이 후퇴 과정에서 사방 으로 흩어질 것을 우려하여 조선으로 하여금 바다를 차단하 게 하고, 이여송 또한 기회를 틈타 공격 준비를 해둘 것을 지시했다. 다만 아직 심유경의 사자와 조선의 왕자 및 신하들이 일본군 진영에 있으니, 이들을 우선 빼내야 한다고 당부하였 다. 59) 또한 송응창은 가토 기요마사가 고집을 피우며 조선의 왕자와 신하들을 송환하지 않는 점을 문제 삼으며, 이여송으 로 하여금 휘하 장수를 보내 가토 기요마사의 후미를 쫓게 하고, 경상도 등지의 조선군과 협공을 하는 방향도 제시하면 서 더 강경한 대책을 강구했다. 60) 이어 조선 측에 자문을 보 내서 명군이 일본군을 추격하겠다는 내용을 조선국왕에게 보 고하게 하고, 61)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륙 군병을 정돈해 일본 군 추격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62)
59)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7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신(만 력 21년 4월 25일)」, pp.62-63.
60)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8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명령(만 력 21년 4월 25일)」, pp.64-66.
61)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9 예조판서 윤근수에게 보내는 명령 (만력 21년 4월 25일)」, pp.67-70.
62)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20 제독 이여송, 찬획 유황상에게 보 내는 명령(만력 21년 4월 26일)」, pp.71-73; 「#8-21 유정, 전라도・경상 도・충청도 등에 내리는 명령(만력 21년 4월 27일)」, pp.74-75. 한 가지 흥미 로운 사실은 이때 송응창이 고안한 가토군의 추격 전술이 전쟁 초반 송응창이 여러 차례 내세웠던 ‘화포를 통한 포위 섬멸’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송응창이 조선에 보내는 자문에서 자신이 최근에 보낸 화약 무기를 수군에게 분배하여 모 든 바다로부터 부산을 에워싸는 전술을 채용하도록 한 것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19 예조판서 윤근수에게 보내는 명령(만력 21년 4월 25일)」, pp.67-70.).
그리고 송응창은 5월 6일 내각대학사 조지고와 장위 그리 고 석성에게 현시점까지 자신의 전략을 보고했다. 송응창은 먼저 일본군이 지키던 한양의 형세가 매우 어려웠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면서 일본과의 교섭행위를 “虎離山之計”, 즉 호랑이 를 산으로부터 떼어놓는 계책으로 여겨 이를 聖旨로 결정해 줄 것을 청한 것이라 해명했다. 또한 아직 한양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공적을 서훈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군대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호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최근 명 조정 에서 여러 논의가 일어난 것을 두고 실로 답답하다는 심정을 토 로했다. 즉, 송응창은 해당 보고를 통해 자신이 일본과의 강화보 다는 일본군 추격에 주력하겠다고 명 조정에 선언한 셈이다. 서 신 말미에 보이는 “부산에서 소식이 들어오는 날에 마땅히 급히 보고하겠다.”라는 다짐 또한 일본군을 부산까지 추격하겠다는 강 한 자신감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63) 송응창이 이렇게 급격한 태세 전환을 보인 원인은 같은 서 신에서도 언급되지만, 명 본국의 동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 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송응창이 일본군과 교섭을 시작했다는 정황이 이미 명 조정에 전해졌고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진 행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강화교섭에 대한 반대 의견은 일본 군을 섬멸하자는 의견과 철수론으로 나뉘었지만, 공통적으로 송응창과 이여송이 책봉과 조공을 허락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며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응창은 점차 커지는 반 대파의 의심과 비난에 대응해야 했다. 64) 설상가상으로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승전을 보고할 때 조선인의 시체를 일본인으로 속였다는 탄핵안이 제출되기까 지 했다. 65)
이에 요동순안어사 周維翰이 진상 조사를 위해 조선으로 파견되었고,66) 순안어사는 격전지였던 평양, 개성, 벽제의 주민들을 데려가 이여송의 접전 상황을 추궁하기도 하였다. 67)
63)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30 내각대학사 조지고・장위, 병부상 서 석성에게 보내는 서신(만력 21년 5월 6일)」, pp.92-96.
64) 김경태, 2014, pp.133-134.
65)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3 제독 이여송에게 보내는 서신(만 력 21년 4월 2일)」, pp.24-25. 66) 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43 요동순안어사 주유한에게 보고하 는 서신(만력 21년 5월 19일)」, p.123.
이처럼 명 조정에서 제기된 의혹들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송응창은 조선에서 분투하는 명군의 상황을 실시 간으로 보고하면서 일정한 성과까지 거두어야 했고, 이전과는 다르게 확고한 추격 의지를 내보여야 했던 것으로 생각된 다. 68) 한편 조선 측에서는 명군의 일본군 추격 동향과 관련해 경략과 상반된 기록을 남겨 주목된다. 69) 선조실록에 따르 면, 일본군은 한양을 떠난 뒤 5월 초순 경 이미 상주를 위시한 영남 지방에 웅거하려는 모습을 보였고 증원군도 부산 등지로 속속 파견되고 있었다. 70) 결과적으로 만력 21년(1593) 4월 초반 에 송응창이 조선군의 일본군 추격을 만류했던 조치가 일본군이 영남 지방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게 된 ‘부메 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선조실록의 5월 2일 기사에서는 처음부터 명 측 장수들이 조선군의 일본군 추격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원수 이하의 장수들이 이미 병장기를 거두고 일부 부대를 해산시 키는 바람에 5월 초 송응창이 지시한 추격 명령에 제대로 대 응할 수 없었다는 비변사의 馳啓를 확인할 수 있다.71) 이는
67) 선조실록 卷38, 선조 26년 5월 17일.
68) 송응창은 5월 19일 내각대학사들과 병부상서 석성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명군 군 중에서 명군 병사들이 “강한 왜군을 상대하며 몇 달 되지 않아서 조선의 토지를 이미 수복했으나 밤낮으로 추위로 고생하며 염채조차도 하나 먹지 못하며 공로가 적지 않은데도 언관들은 도리어 승전보가 모두 거짓이라 말하고 있다.”라고 억 울해하는 상황을 호소하기도 했다(명나라의 임진전쟁 3: 강화 논의, 「#8-46 내각대학사 왕석작・조지고・장위, 병부상서 석성에게 보고하는 서신(만력 21년 5월 19일)」, pp.131-136.).
69) 선조수정실록 卷27, 선조 26년 5월 1일; 류성룡 저, 김시덕 역해, 징비록 : 한 국의 고전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으로, 파주: 아카넷, 2013, p.445.
70) 선조실록 卷38, 선조 26년 5월 12일, 5월 22일. 한편 경략 卷8에 수록된 문 서들(#8-39, 40, 42, 43, 46)에서도 일본군이 상주에 머물며 옛 성들을 연결하고 鳥嶺의 험지에 주둔하며 방어선을 구축한 모습을 명 측 또한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1) 선조실록 卷38, 선조 26년 5월 2일.
결국 송응창이 일본군 추격 방침을 급작스레 전환한 것이 초 래한 ‘나비효과’였다. 하지만 송응창은 병부상서 석성에게 보낸 보고에서 되려 일본군의 후미를 쫓아 공격하고 싶었으나 조선의 병사 중에 쓸만한 게 없어 한스러울 따름이라며 일본군 추격의 책임을 조선군에게 미루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 다. 72)
72) 명나라의 임진전쟁3 : 강화 논의, 「#8-42 병부상서 석성에게 보고하는 서신(만 력 21년 5월 17일)」, pp.121-122.
요컨대 만력 21년(1593) 4~5월 전선의 교착 상황에서 경 략 송응창은 강화교섭의 흐름과 조선 조정의 강경한 반대 여 론, 그리고 명 조정의 비판과 의심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 를 하며 조선에 파병된 명군을 신중하게 운용해야 했다. 이에 4월경에는 일본 측의 강화교섭 이행 여부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고, 강화교섭의 흐름을 고려해 조선군의 일본군 추격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다만 일본군이 강화교섭의 조건인 조선 왕자 등의 송환을 준수하지 않는 상황과, 명 조정에서 송응창 -이여송의 강화교섭 노선에 반대하는 여론이 존재했던 점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송응창은 5월 초반에야 적극 적인 일본군 추격 노선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송응창이 일본 군 추격 여부를 놓고 저울질하던 사이 일본군에게 영남 일대 의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내어주었으며, 일본군 추격을 갈 망하던 조선 육군 일부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조・명 연합군의 일본군 추격은 이미 ‘골든 타임’을 놓쳐버리 게 되었다.
4. 맺음말
임진왜란 초반 전쟁의 거의 모든 분야를 관장한 경략 송응 창이 남긴 경략은 당시 명 측의 핵심적인 정보를 수록한 중요한 기록이었으나, 이후 각종 악평과 오명이 부가되며 후 세로의 전승이 순탄치 않았다. 임진왜란을 보는 ‘새로운’ 창으 로서 경략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 본고는 경략의 권별 내 용을 총 다섯 가지 국면으로 정리하여 살펴보았다. 첫 번째 국 면(권1-3)은 전쟁 발발 초창기, 두 번째 국면(권4-5)은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의 전후 과정, 세 번째 국면(권6-7)은 평 양성 전투 이후 명군의 한양 진군, 네 번째 국면(권8-11)은 명·일본과의 강화교섭이 시작된 전황의 변화, 그리고 다섯 번 째 국면(권12-14)은 송응창의 경략 임기 후반부에 해당하는 내 용이다. 각각의 국면을 통해서 우리는 임진왜란 초반 경략 송응 창이 직면해야 했던 긴박한 전황과 더불어 엇갈리고 비틀어진 계획과 실제, 군정과 군령, 그리고 명-일본-조선 사이에서 얽히 고설킨 의심과 타협의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본고는 두 번째 국면과 네 번째 국면에 주목하 여 경략을 통해 재조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를 분석해 보았다. 우선 만력 21년의 평양성 탈환 과정과 관련해 경략 에서는 여타 사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명군 내부의 미묘한 상 황을 간취해 낼 수 있었다. 평양성 전투와 관련해 明史 등에 서는 야전 사령관인 이여송의 지휘 아래 명군의 백병전을 위주 로 공성이 이루어진 ‘결과’만을 서술하였다. 반면 경략에 나와 있는 ‘과정’에 따르면, 당시 최고 지휘관 송응창은 화기를 통한 제압사격을 계획했고, 일본군이 퇴각하여 강을 건너는 틈을 노 려 일망타진한다는 전술을 강조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명의 가 장 빛나는 승리였던 평양성 전투에서조차 지휘부에서 의도한 전 략과 실제 야전에서 행해진 전술에 상당한 편차가 존재했던 것 이다. 그리고 명·일본 간 강화교섭이 진행되던 시기와 관련해, 경략에서는 당시 일본군의 추격과 강화교섭을 동시에 주재했 던 송응창의 복잡한 속내와 위태로운 줄타기를 여실히 보여준 다. 송응창은 만력 21년 4월 초반까지는 강화교섭의 성사를 위 해 조선군의 일본군 추격을 만류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러나 한 양을 수복한 4월 말 이래 강화교섭이 난국에 봉착하고 명 조정 의 강화교섭에 대한 반대 여론 및 파병군에 대한 의심이 더해지 자, 돌연 명군과 조선군의 협공을 통한 적극적인 일본군 추격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5월 초반에야 완전히 적극적인 추격 노선 으로 선회하였다. 송응창이 명군의 출구 전략을 놓고 저울질하 던 1개월여의 시간 동안 일본군 추격은 적절히 이뤄지지 못했고, 일본군은 영남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결국 송응창의 애매한 태도와 左顧右眄으로 인해 조·명 연합군 이 일본군을 추격하여 섬멸할 수 있는 적기, 즉 ‘골든 타임’은 허무하게 흘러가 버렸다. 이상 살펴본 경략은 명 조정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 원한 배경과 출병 과정, 명군의 세부적인 전략과 전술, 그리 고 평양성 전투 등 각종 전투와 강화교섭의 진행 과정 등을 중국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사료이 다. 명·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한창 진행되던 1595년을 전후한 시점에 송응창에 의해 간행된 경략은 기존 임진왜란 연구에서 널리 이용된 정사류와 실록류 사료들이 모두 전쟁이 끝난 지 상 당 시간이 흐른 뒤에 찬수된 사료들임을 고려하면, 원 사료로서 가치가 훨씬 높다고 하겠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정사나 실록 사료에 수록되지 않은 임진왜란 당시의 공문서가 그대로 전재되 어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송응창이 명과 조선, 그리고 일본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과 당시의 긴박한 정황을 모두 생생 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삼국 역사서의 미비 한 점을 보충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물론 경략은 송응창 자신이 강화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을 변호하려 작성한 의도적인 산물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 는 것처럼, 사실의 은폐나 왜곡을 노린 축약이나 刪削 등이 곳곳에 존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만 명・청 시대의 실록을 위시한 관찬 사료 또한 찬수 과정에서 의도적 인 ‘조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73)
73) 명·청 시대 실록 자료의 ‘기록 조작’에 대해 본격적으로 규명한 최근의 연구성과 는 다음과 같다. 구범진, “병자호란 전야 외교 접촉의 실상과 청의 기만 작전, 그 리고 청태종실록의 기록 조작”, 동양사학연구 150, 2020; 구범진・정동훈, “초 기 고려-명 관계에서 사행 빈도 문제 -‘3년 1행’과 명태조실록의 기록 조작”, 동양사학연구 157, 2021; 정동훈, “3년 1공인가, 4년 1공인가 -고려-명 관계에 서 歲貢 빈도와 『명태조실록』의 조작”, 한국사학보 86, 2022.
송 응창 개인의 의도가 가미되었다는 혐의만으로 사료 자체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는 어렵다. 오히려 본고가 시도한 사례 분 석과 같이 서로 다른 입장과 관점을 가진 여러 자료가 동일한 사건을 다룰 때 나타나는 충돌과 모순에 주목한다면, 당시의 상 황을 좀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 른 자료들과의 교차 검토와 상호 비판을 통해 경략에서 송응 창이 드러내려 했던 것은 무엇이고, 숨기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 었으며, 그것이 다른 자료들과 어떻게 어긋나고 연결되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은 분명 임진왜란을 보는 기존의 관점을 훨씬 풍성하게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2020-2021년에는 명나라의 임진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총 5권 분량의 상세한 역주서가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74)
74) 송응창 저, 구범진 등 역주, 명나라의 임진전쟁: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 역주 1-5, 국립진주박물관, 2020-2021.
이 역주서는 충실한 번역은 물론, 꼼꼼한 주석과 상세한 인명록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특별한 독법이 요구되는 경략의 공문서와 서신 등을 읽어내는 데 많 은 도움을 제공한다. 또한 역주서(제1~4권)와 함께 교감·표점 본(제5권)을 발간하여, 독자들이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하면서 읽 을 수 있도록 했다. 21세기 들어 맞이한 새로운 연구 경향과 경략에 대한 역주서의 발간을 통해 한국 학계의 임진왜란 연 구 또한 ‘새로운’ - ① 신선하고, ② 새삼스러우며, ③ 꼭 필요 한 -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보는 ‘새로운’ 창으로서 경략에 앞으로 더 많은 관심과 활용이 기대되는 이유다.
<참고문헌>
1. 사료
經略復國要編 國榷 明史 明史紀事本末 明神宗實錄 四庫全書總目提要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燃藜室記述
2.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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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New Window to the Imjin War : Revisiting the Jinglüefuguoyaobian with Case Studies
Park, Min-su Kim, Young-jin
The Jinglüefuguoyaobian (經略復國要編, literally, Essentials on the Restoration of Joseon, Compiled by Song Yingchang) was written by Song Yingchang, the supreme commander (jinglüe) of the Ming army during the early stage of the Imjin War. The detailed accounts behind the decision to join the war, elaborate depictions of military strategies and tactics, and comprehensive records of the process behind the peace negotiations shown from the Chinese side all make this source a fascinating read. To shed new light on various aspects of the Imjin War as a 16th-century international event involving Korea, Japan, and China, this article examines the process of compilation and transmission of the Jinglüefuguoyaobian and provides overviews of each volume that can be used for future research. In addition, we present two case studies based on the Jinglüefuguoyaobian. Through this examination, we hope to lay the groundwork for a “new” - fresh, inspiring, and necessary - foundation for the academic research in the Korean academia for the Imjin War.
Keywords : Jinglüefuguoyaobian, Song Yingchang, Imjin War, International War in East Asia, Ming Army, Battle of Pyongyang Fortress, Peace Negotiations
(원고투고일 : 2023. 3. 28, 심사수정일 : 2023. 5. 18, 게재확정일 :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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