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 일본 육·해군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 양상
1)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항공기지 건설 양상
2)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육·해군의 항 공기지 건설 양상
3.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 전체 현황 및 잔 존 실태
4.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항공기지의 역할과 의미
5. 결론
■ 요약
한반도 전역에는 일본군이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건설했던 항공기지 유적이 다수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일본 육군과 해군이 한반도 곳곳에 건설했던 항공 기지의 건설 양상과 전체 현황, 그리고 역할과 의미를 고찰하였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이 한반도 내에 항공기지를 주로 건설한 때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였 다. 특히 남한지역에 더 많은 항공기지를 건설했는데 이는 미군의 공습과 상륙 에 대비한 조처였다. 자료를 통해 확인한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는 총 47개 소다. 이 중 남한지역이 31개소, 북한지역에는 16개소가 분포해 있으며, 육군 항공기지는 38개소, 해군은 9개소가 확인된다. 미군의 상륙이 가시화되면서 일 본군 항공기지는 점차 자살공격을 염두에 둔 특공기지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일본군은 보유하고 있던 비행기 중 500기를 특공기로 편성하는 한편 이들을 은닉하고 보호할 엄체 구축 계획을 추진한다. 당시 구축 계획에 따른 엄체는 200기에 달했으며 이중 적지 않은 수가 실제 건설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 금도 남한지역 곳곳에는 일본군이 건설한 엄체가 다수 남아 있다. 이들 엄체는 일제가 전쟁 말기 한반도와 식민지 조선인들을 침략전쟁의 볼모로 사로잡은 채 희생을 강제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상징적인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주제어: 아시아태평양전쟁, 한반도 주둔 일본군, 항공기지, 비행장, 엄체, 제 5항공군
1. 서론
한반도 전역에는 일본군이 건설했던 항공군사유적1)이 다수 잔존한다. 제주 大靜의 알뜨르 비행장을 비롯하여 전남 여수, 경북 영천, 광주와 대구광역시, 그 리고 지금도 공항으로 사용되고 있는 김포국제공항 등 일본군 항공기지의 흔적 은 한반도 도처에 즐비하다. 이 중 대다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건설된 것으 로 당시 전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글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군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 배경과 추이를 비롯하여 실태와 전체 현황, 그리 고 그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기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에 관 한 연구는 제주도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2)
1) 일본 육군과 해군은 항공 관련 군사시설, 특히 활주로를 중심으로 한 군사시설을 각각 다르게 불렀다. 즉 육군은 활주로 등 시설을 비행장으로, 해군은 항공기지로 명명하였다. 이글에서는 일본 육·해군을 가리지 않고 당시 일본군의 관련 시설을 항공기지로 통일해 서 기술했다. 아울러 현재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일본군의 비행장·격납고·엄체·연료 및 탄약고 등 항공 관련 시설을 ‘항공군사유적’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2) 일본군 항공기지 관련한 선구적 연구는 林鍾國의 日本軍의 朝鮮侵略史 Ⅱ(일월서각, 1989)를 들 수 있다. 주로 방위성에 소장되어 있는 「朝鮮に於ける戦争準備」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전쟁 말기 조선 내 일본 육·해군 항공 부대와 비행장의 개략을 저술하였다.
예컨대 쓰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와 조성윤 등은 전쟁 말기 일본군의 제주도 내 本土決戰 실태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항공기지 건설과 운용 상황을 언급한 바 있다.3) 신주백과 조건 역시 한반도 남서해안의 본토 결전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 일대에 남아 있 는 일본군 항공기지 실태를 조명하였다.4) 정혜경은 광주지역 아태전쟁 유적에 관한 대중서 속에 항공기지 관련 시설물을 언급하기도 했다.5) 또한 1945년경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방공부대와 항공부대의 현황과 활동에 대한 연구도 있 다.6) 아울러 아시아태평양전쟁기는 아니지만 1920년대 조선군의 한반도 내 항 공부대 설치 계획과 추이에 관해 천착한 글도 있다.7) 이 외에도 학계의 연구는 아니지만 한반도 내 일본군 군사시설에 관해 펴낸 주요한 저서가 여럿 공간되 었다.8)
3) 대표적으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5년부터 시행한 ‘일제하 제주도의 일본군 전적지 조사 연구’의 결과물을 책으로 발간 한 것이 있다(조성윤 엮음, 일제 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 보고사, 2008). 조성윤이 편한 책 속에는 塚崎昌之의 「제주도에서의 일본군의 ‘본토결전’ 준비: 제주도와 거대 군사 시설」과 조성윤의 「일제 말기 제주도 주둔 일본군과 전적지」, 강순원의 「태평양전쟁과 제주도 내 일본군 군사유적의 실태」 등을 주목할 만하다. 단, 쓰카사키의 글은 2003년 「濟州島における日本軍の‘本土決戰’準備: 濟州島と巨大軍事地下施設」라는 제목으로 ≪靑丘學 術論叢≫ 제22집에 이미 실렸던 것이다. 조성윤은 2012년 ≪탐라문화≫에 「알뜨르 비행 장: 일본 해군의 제주도 항공기지 건설과정」이라는 글을 추가로 게재하기도 했다.
4) 신주백, 「1945년도 한반도 남서해안에서의 ‘본토결전’ 준비와 부산·여수의 일본군 시설 지 현황」, ≪軍史≫ 70, 2009; 조건,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군의 광주·전남지역 군사 시설 건설과 전쟁유적의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03, 2022.
5) 정혜경, 우리 마을 속의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 광주광역시, 선인, 2014.
6) 조건, 「전시체제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防空 조직과 활동」, 수요역사연구회 편, 제국 일본의 하늘과 방공, 동원 1: 방공정책과 식민지 조선, 선인, 2012.
7) 이민성, 「1920년대 조선 주둔 일본군 항공부대 설치와 부지선정 문제」,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발표논문(未定稿), 2021.
8) 이완희, 한반도는 일제의 군사요새였다, 나남, 2014; 정명섭 외 지음, 일제의 흔적을 걷다, 더난출판, 2016. KBS PD였던 이완희는 전국의 일본군 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관련 자료를 찾는 한편, 현지인들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저서를 집필하였다. 특히 해운대·부산·밀양·군산·목포 비행장은 물론 ‘특공기지’로 활용될 뻔했던 수십 개소 의 항공기지에 관해 방위성 소장 자료를 활용하여 여러 사실들을 밝혔다. 다만, 항공기지 전체 현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관련 자료 역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하여 펴낸 보고서에도 항공기지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 문화재청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개년에 걸쳐 전국에 산재한 ‘태평양전쟁유적’ 일제 조사를 실시했는데 여기에 제주도는 물론 전남 여수와 경북 대구·영천의 항공기지 유적이 포함되어 있었다.9) 한편 일본군 항공기지는 조선인 강제동원의 장소로 언급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군은 비행장을 비롯한 항공 군사기지와 관련 창고 등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들을 동원했는데 이와 관련된 구술 자료집과 연구 논문이 발간된 바 있 다.10) 특히 정혜경은 아시아태평양전쟁유적 목록을 정리했는데 여기에는 약 170개소의 비행장과 항공부대, 비행장설정대 등이 망라되어 있다.11)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는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의 전모를 보여주지 못했 다. 특정 지역에 제한되어 있어,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 전반에 관해 이해하 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반도에 남아 있는 수많은 일본군 항공기지 는 일부 실태만 밝혀졌을 뿐 이들의 건설 및 주둔 배경, 전체적 양상, 그리고 역사적 의미는 거의 규명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쟁 말기 제17방면군 항공참모였던 우에히로 지카타카(植弘 親孝)의 기록이 주목된다.12)
9) 실지 조사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개 연간이었고, 2016년은 이전 조사 내용을 종합 하여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2013년에는 경남과 전남 해안, 2014년에는 경북과 충북, 2015년에는 충남과 전남, 제주도 일대를 조사하였다(문화재청, 태평양전쟁유적 일제조 사 종합보고서, 2016).
10) 조성윤·지영임·허호준,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 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 선인, 200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일하지 않는 자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제주도 군사시설 구축에 동원된 민중의 기억, 2008; 정혜경, 「일제말기 제주도 군사시 설공사에 전환배치된 조선인 광부의 경험 세계」, ≪韓日民族問題學會≫ 35, 2018.
11) 정혜경, 우리 지역의 아시아태평양전쟁 유적 활용: 방안과 사례, 선인, 2018, 158~184쪽. 단, 목록 중에는 중복된 장소가 몇몇 눈에 띈다.
12) 우에히로가 기술한 자료는 防衛省 防衛硏究所에 소장되어 있는 「陸軍航空後方作戰準備に關 する資料 昭和17~20」(陸軍一般史料 文庫-依託-505) 이다. 우에히로는 이 자료를 1971년 2월 작성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방위청에서는 전사 편찬을 위해 전시기 군인들에게 전 사 기초 자료 작성을 요청하여 축적하고 있었다.
우에히로는 1944년 11월부터 패전 때까지 한반도 내 항공 주임 참모를 역임했으며, 1945년 5월부터는 제5항공군 참모를 겸직하기 도 했다. 그는 한반도 내 일본 육군의 항공기지 건설을 세 시기로 나누어 개괄했 는데 이를 통해 당시 육군항공기지 건설 개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 일본군 이 패전 전후 생산했던 기록들 속에도 한반도 내 항공기지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13)
13) 육군 항공에 대해서는 방위성 방위연구소 육군일반사료로 분류되어 있는 陸軍飛行場要 覽(北海道·朝鮮)(陸空-本土周邊-86-2), 飛行場記錄(朝鮮ノ部)(陸空-滿洲方面-125), 在滿 鮮北方陸軍 航空部隊槪見表(陸空-滿洲方面-135), 在朝鮮陸軍航空部隊 行動槪況(陸空-滿洲 方面-136), 그리고 해군 항공에 대해서는 해군일반사료 중 鎭海警備府引渡目錄(中央-引 渡目錄-5)를 참고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들 건설 현장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대본영과 총독부, 그리고 조선군은 최후 결전을 지속하려고 한반도를 군사요새화했지만 이를 위해 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것은 식민지 조선인이었고, 만일 미군의 공습과 상륙이 감행되었다면 그에 따른 전쟁 피해 역시 수많은 조 선인들에게 미쳤을 것이다.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지 배 실태와 당시 조선 내 전황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때 그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특히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육·해군의 항공기지 건설 양상과 전체 현황 등을 살펴보고, 이어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 목적과 그 의미를 일본 防衛省 防衛硏究所 소장 자료를 통해 규명하고자 한다.
2. 일본 육·해군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 양상
1)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항공기지 건설 양상
일본군이 한반도 내에 항공기지를 건축하려 한 움직임은 1916년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처음 확인된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 내 2개 사단 상주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와 더불어 조선 내 항공대 설치와 관련 시설 구축을 구상했던 것으 로 보인다. 기사는 도쿄발 미상의 육군 참모를 취재원으로 했는데, 조선이 군사 상 중요지점이기 때문에 항공대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항공대 설치와 함께 ‘樞要地’에 격납고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14)
14) ≪每日申報≫ 1916년 4월 3일자, 2면, 「朝鮮航空隊」.
그러나 기사는 단발성이었고 이후 항공기지 건설과 관련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군이 한반도 내 항공작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 초부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지루하게 반복되던 지상전에 변화를 준 것은 비행기를 활용한 공중 폭격이었고 그 효용성을 절감한 열강은 전후 앞을 다투어 항공 전력을 증대하기 시작했다.15) 일본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조차지였던 靑島를 공격하면서 항공기를 활용한 공습을 감행한 바 있고16) 독일군 비행기에 맞서 고사포 부대를 운용하기도 했다.17)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후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일본 전역에 항공기지가 건설되고, 유사시 공습에 대비한 방공연습도 대규모로 시행되었다.18) 한반도 내에 일본군 항공기지가 실제로 설치된 것은 1920년 말이었다. 당시 ‘간도 침공’을 위해 항공 전력을 보충하면서 활주로 및 격납고를 건설했던 것이다.
항공대 요원 및 기재(약 1/2)는 10월 14일에서 19일까지 내지를 출발하여 10월 22일 청진에 도착하였다. (중략) 10월 23일 요원 및 기재는 회령에 도착하 였다. 나가오(長尾) 공병 대위를 장으로 하는 제19사단 항공대를 편성하였다. 동 시에 미리 공병대대에서 정찰한 바에 입각해 비행장을 회령 서남부 속칭 ‘롯본마쓰(六本松)’ 동쪽 밭으로 선정하였다. 땅고르기 공사 및 격납고 건설에 착수함과 더불어 혼춘, 온성, 국자가, 나남 방면에 임시 착륙장을 정찰하였다. 11월 14일 제 준비가 완성되었고, 제1회 비행을 개시하였다.19)
15)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선구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군인 줄리오 두헤(Giulio Douhet)였다. 그는 1921년 制空權(The Command of the Air)을 저술하여 전쟁에서 항공 전력과 그로 인한 공습의 효용성을 강변한 바 있다(줄리오 두헤 지음, 이명환 옮김, 제공권, 책세상, 1999, 181~182쪽).
16) 荒井信一, 空爆の歷史, 岩波書店, 2008, 5~7쪽.
17) 防衛廳 防衛硏修所 戰史室, 戰史叢書19 本土防空作戰, 朝雲新聞社, 1968, 2쪽.
18) 방공연습 실시와 방공 및 항공부대 확충에 관해서는 조건, 「전시체제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防空 조직과 활동」, 98~112쪽.
19) 김연옥 옮김, 간도출병사, 경인문화사, 2019, 72~73쪽.
위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 내 최초의 일본군 항공기지는 1920년 10월부터 11월 사이 함경북도 회령에 건설되었다. 회령 서남부의 ‘롯본마쓰’라고 불리는 지역 동쪽에 비행기 이착륙을 위한 토지를 정비하고 격납고를 건설했으며, 혼춘과 온성, 국자가, 나남 등 국경 지역에 임시로 착륙할 장소를 물색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간도 침공을 위해 항공대를 편성하고 급히 히로시마 우지나(宇 品)에서 비행기 2기를 분해·수송한 뒤 재조립하여 운용했다.20) 일본군이 회령에 항공기지를 건설한 것은 간도를 침공한 일본군의 배후에서 비행기를 통한 정찰 및 폭격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와 더불어 “조선인들을 위협할 목적으로 조선 안쪽 방면”도 비행할 필요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21) 다만 회령의 항공기지는 ‘간도 침공’을 위해 임시로 설정한 것이었고, 한반도 주둔 일본군이 ‘항구적’으로 활용할 항공부대 편성과 기지 건설은 아니었다. 사 실 일본군의 ‘간도 침공’ 이전 한반도 내 항공부대와 기지 건설에 관한 의견이 제기된 바 있었다. 1920년 2월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제42회 제국 의회 중의원 예산위원회 제4분과에서 육군 항공대대의 조선 내 배치 계획을 언 급했던 것이다. 다나카의 당시 언급은 바로 착수되지는 못했으나 2년 뒤인 1922 년 3월 평양에 항공 제6대대가 편성됨으로써 실현되었다.22)이렇게 설치된 조선 군 예하 비행대는 1928년 제2차 ‘山東出兵’이나 1931년 ‘滿洲事變’ 당시 중국 전선 에 투입되었다.23)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직후에는 북한지역 방비를 위해 함경북도 회령에 제2 비행단 사령부 및 비행 1전대, 그리고 고사포 1연대가 신설되었다.24) 일본 해군 의 경우도 1933년 봄부터 제주도 毛瑟浦, 일명 알뜨르에 중국 침략을 위한 비행기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할 수 있는 비상착륙장을 건설한 것으로 확인된다.25)
20) 처음 수송된 2기 중 1기는 운용 초기 고장으로 사용 불능이 되었고, 이후 2기가 추가로 운송되어 결국 회령의 항공기지에서는 3기의 항공기가 운용되었다.(김연옥, 간도출병 사, 73·206쪽)
21) 김연옥, 간도출병사, 207쪽.
22) 평양의 항공 제6대대 설치 과정에 대해서는 이민성의 연구에 상세히 드러나 있다(「1920 년대 조선 주둔 일본군 항공부대 설치와 부지선정 문제」, 9~11쪽).
23) 宮田節子, 十五年戰爭極祕資料集15 朝鮮軍槪要史, 不二出版, 17~18쪽.
24) 宮田節子, 十五年戰爭極祕資料集15 朝鮮軍槪要史, 23쪽.
25) 塚崎昌之, 「제주도에서의 日本軍의 ‘본토결전’ 준비의 재검토」, 조성윤 엮음, 일제 말기 제주도의 일본군 연구, 373~374쪽. 塚崎는 2003년 제주도 군사시설에 관한 연구에서 모슬포 비행장 건설 始期를 1931년으로 기술한 바 있다. 그는 이후 관련 자료를 보강하여 실제 착륙장 건설이 시작된 것은 1933년 봄이었다고 정정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군 항공부대는 제한적인 활동만을 부여받았고 규모 역시 크지 않았다. 조선군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항공 군비를 증강한 것은 1941년 경부터였다. 1941년 ‘關特演’에 따라 조선 북부에 항공부대를 배치하여 對蘇戰에 대비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서태평양 일대에서 일본군이 미군의 공세로 패퇴를 거듭하게 되고 최후 결전의 분위기가 짙어지자 한반도 내 항공 부 대 증강26) 및 항공기지 확충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27)
26)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부대는 1952년 1월 유수업무부 제4과 항공반에서 제작한 「在朝鮮 陸軍航空部隊行動槪況」(1952.1.25. 留守業務部)(陸軍一般史料 陸空-滿州方面-136)을 참고할 수 있다.
27) 「第5章航空」, 朝鮮に於ける戰爭準備(陸軍一般史料-滿洲-朝鮮-2) 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C13070004500. 28) 「飛行場記錄(朝鮮ノ部)」(陸軍一般史料 陸空-滿州方面-125), 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C1612 0581600. 이 자료를 편철한 防衛硏究所戰史硏究サンター는 자료 생산 기관을 제1복원국으로 기재 하였다. 제1복원국은 복원청 예하 조직으로 戰前期 육군성 업무를 인계받아 복원 등 전 후 처리를 수행하던 기관이었다. 복원청은 1946년 6월 설치되었다가 1947년 10월 폐 지되었다. 즉 「飛行場記錄」의 생산일시는 1946~1947년경으로 판단된다. 참고로 제1복원국장은 최후의 조선군사령관이었던 上月良夫였다.
2)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육·해군의 항공기지 건설 양상
(1) 육군의 항공기지 건설 실태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 건설은 육군과 해군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일본 육군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 실태는 종전 직후 復員廳 第1復員局이 생산한 「飛行場記錄(朝鮮의 部)」에서 확인된다.28)
「飛行場記錄」에는 ‘朝鮮飛行場配 置一般圖’를 비롯하여 ‘航空無線局一覽圖’ 등의 지도와 울산·대구·영천·광주 등에 건설되었던 비행장 및 부속 시설의 도면, 그리고 관련 정보가 기재되어 있다. 「비행장기록」의 ‘조선비행장배치일반도’에는 한반도 지도에 비행장 위치를 표기해 두었는데 총 28개소에 달한다. ‘조선비행장배치일반도’와 비행장 도면 등을 참고하여 육군 항공기지 현황을 道別로 표기하면 <표 1>과 같다.
한반도 내에서 가장 많은 육군 항공기지가 있었던 곳은 함경도였고, 그중에서도 함경북도에만 6개소가 건설되어 있었다.29)
<표 1> 「飛行場記錄」 수록 한반도 내 일본 육군 항공기지 현황
道別 個所 航空基地 位 置 京畿道 3 京城30) 京畿道 京城府 汝矣島町 京城新31) 京畿道 金浦郡 陽西面 烏山 京畿道 水原郡 城湖面 烏山里 江原道 3 春川 江原道 春川郡 下文延里 平康 江原道 平康郡 石校里 江陵 江原道 江陵郡 忠淸道 2 大田 忠淸南道 大田郡 柳川面 鳥致院 忠淸北道 淸州郡 江外面 慶尙道 3 蔚山 慶尙南道 蔚山郡 蔚山邑 三里山 大邱 慶尙北道 達城君 解顔面 永川 慶尙北道 永川郡(東經128.48, 北緯35.55) 全羅道 3 光州 全羅南道 光州郡 群山 全羅北道 沃溝面 仙緣里 裡里 全羅北道 金堤郡 龍池面 長新田 黃海道 2 汗浦 黃海道 平山郡 金岩面 汗浦里 海州 黃海道 海州郡 平安道 3 平壤 平安南道 平壤府 溫井里 平安南道 江西郡 瑞和面 雪岩里 新義州 平安北道 龍川郡 新義州 咸鏡道 9 咸興 咸鏡南道 咸州郡 連浦 咸鏡南道 咸州郡 連浦面 宣德 咸鏡南道 咸州郡 宣德面 吉州 咸鏡北道 吉州郡 會文 咸鏡北道 會文洞 淸津 咸鏡北道 松鄕洞 會寧 咸鏡北道 會寧郡 碧城面 阿吾地 咸鏡北道 阿吾地 承良 咸鏡北道 承良 비 고
* 음영으로 표시한 장소는 지금도 공항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
29) 함경북도의 육군 항공기지는 吉州·會文·淸津·會寧·阿吾地·承良 등이다.
30) 여의도비행장을 가리킨다.
31) 김포비행장을 가리킨다.
함경북도의 항공기지는 대소전준비를 위해 건설된 것으로 소련 국경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다른 비행장 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종전 당시 제17방면군 항공참모를 역임했던 우에히로는 육군 항공기지 건설을 세 시기로 나누어 기록한 바 있는데,32) 이를 통해 전쟁 말기에는 주로 함경도를 제외한 ‘南鮮地域’의 항공기지 건설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우에히 로는 최후결전을 위한 天號作戰 준비로 주로 ‘南鮮’의 비행장을 정비했다고 회고 했다.33) 우에히로의 기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는 당시 육군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을 시기별, 유형별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특히 기지 건설을 세 시기로 나누었는데, 제1기는 1944년 초부터 10월까지로 대소·대미 작전 준비 시행기, 제2기는 1945년 4월까지로 대미 작전에 중점을 둔 작전 준비 시행기, 제3기는 1945년 5월 중국 전선에서 제5항공군이 한반도로 이동해 온 때부터 종전까지였다.34) 제1기인 1944년 10월까지는 항공기지를 신설하지 않고 기존 비행장을 활용 했다. 우에히로는 이 시기를 大本營에서 “조선 내 비행장을 설정하고 증강을 계 획”하는 시기였다고 기록했다.35) 본격적인 항공기지 건설은 제2기부터 추진된 다. 제2기에 신설된 항공기지는 신의주·신안주·해주·김포·수원36)·해운대·목포(望 雲)37)·제주 동·제주 서38) 등이었다.
32) 우에히로는 1944년 11월부터 제17방면군 겸 조선군관구 항공참모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 5월에는 제5항공군 참모를 겸직했기 때문에 한반도 내 육군 항공기지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에히로는 한반도 내 육군 항공과 관련하여 두 가지 기록을 남겼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陸軍航空後方作戰準備に關する資料 昭和17~20」, 다른 하 나는 「朝鮮の航空に關する植弘少佐回想」(陸空-日誌回想-874)이다. 두 자료 모두 분량이 많 지는 않지만 전쟁 말기 한반도 내 육군 항공 작전과 기지 건설에 관한 중요한 기록들이 다. 다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자료 내용을 교차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후 한반도 내 육군 항공기지 건설에 관한 내용은 위 두 자료의 내용을 섭렵하여 기술한 것이다.
33) 植弘親孝, 「朝鮮の航空に關する植弘少佐回想」.
34) 제5항공군은 1945년 3월 조선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주로 중국 전선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5항공군이 조선으로 이동할 당시 함께한 비행기는 120여 기였다. 사령관은 下山琢磨 였다(防衛廳防衛硏修所戰史室, 戰史叢書19 本土防空作戰, 536~537쪽). 제5항공군은 이 동 후 제17방면군의 위수지역 내에 주둔했지만 종전까지 양자 간 “지휘 계통은 없었다” 고 한다(植弘親孝, 「朝鮮の航空に關する植弘少佐回想」).
35) 이 시기 대본영에서 조선 내 비행장 설정 및 증강을 계획한 인물은 제2과의 少佐 高木作之 였다(植弘親孝, 「陸軍航空後方作戰準備に關する資料 昭和17~20」).
36) 烏山飛行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37) 목포비행장으로 불렸으나 실제는 전남 무안군 望雲面에 있었다. 지금도 望雲面과 이웃한 玄慶面에는 당시 건설된 엄체가 남아 있다. 현재 무안군에는 무안국제공항이 있다
.38) 제주에는 모두 세 곳의 육군비행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제주공항 인근으로 제주시 龍潭洞(정뜨르)의 육군 제주 서비행장, 朝天邑(진드르)의 육군 제주 동비행장 등이 있었고, 제주도 내륙인 橋來里에 은밀비행장이 있었다. 교래리 비행장은 건설 중에 종전 을 맞았다(강순원, 「태평양전쟁과 제주도 내 일본군 군사유적의 실태」). 제주 동남쪽 대정의 알뜨르 비행장은 해군 항공기지였다.
제2기에는 신설 외에 기설되어 있던 連浦·宣德·함흥·평양·溫井里·경성(여의도)·대전·대구·울산·군산·광주·사천·회령·청진·會文 등의 비행장과 관련 시설을 증강했다. 제3기에는 대규모 신설은 없었지만, “旣設 飛行場을 증강하거나 隱密(또는, 隱匿) 飛行場을 건설”하였다. 제3기에 만들어진 은밀 비행장은 밀양, 담양, 금호, 전주, 제주도39) 등이었다.40) 우에히로가 기록한 육군 항공기지 현황은 「비행장기록」의 자료와 대부분 일 치하지만 일부 비행장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어 주목된다. 우에히로는 제2기인 1944년 10월부터 1945년 4월 사이 신설된 항공기지 중 「비행장기록」에 수록된 것 외 해운대와 목포(망운), 그리고 제주 동·서 비행장 등 네 곳의 항공기지를 추가로 언급했다. 또한 시설을 증강했던 비행장 중에서도 사천이 새롭게 등장한 다. 제3기 은밀 비행장의 경우는 밀양 등 다섯 곳 모두 「비행장기록」에 누락되어 있었다. 요컨대 「비행장기록」과 우에히로의 기록을 종합하면 종전 당시 한반도 내 육군 항공기지는 총 38개소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육군 항공기지와 관련하여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陸軍飛行場要 覽(北海道, 朝鮮)」에는 비행장 외에 掩體41)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42)
39) 은닉 비행장이었던 제주도 교래리 비행장은 1945년 7월경에 만들어졌다. 참고로 제주 서비행장은 4월, 동비행장은 7월경에 완성되었다(植弘親孝, 「朝鮮の航空に關する植弘少佐 回想」).
40) 은닉 비행장은 소형기가 겨우 이착륙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건설했다. 우에히로는 은닉 비행장이 본문에 언급한 곳 외에 1~2개소 더 있었다고 기록했다(植弘親孝, 「陸軍航 空後方作戰準備に關する資料 昭和17~20」).
41) 엄체는 지면에 반원형으로 구축된 구조물이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작은 언덕처럼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전쟁 말기 건축 자재 수급이 어려워지면 서 철근 없이 만들어진 것도 있다고 한다. 육군과 해군, 그리고 각 항공기지에서 운용한 비행기 종류에 따라 엄체의 형태와 크기도 각기 다르다. 엄체는 종종 격납고와 혼용되어 불리기도 하는데, 비행기를 격납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특별히 은닉과 보호의 역 할이 추가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42)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陸軍一般史料 陸空-本土周邊-86-2). 이 자료에는 경성과 대 구, 울산 등 11곳의 육군 비행장 현황이 담겨 있다.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은 종전후 미군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문건인 탓에 38도선 이남 지역의 육군 비행장만 언급되어 있다.
<그림 1> 경북 영천 금호강 수변에 남아 있는 엄체 : 생략 (별첨 논문파일 참조)
( 자료: 2022.11.5. 필자 촬영.)
실제 한반도내 일본군 항공기지 유적에는 콘크리트로 축조된 상당수의 엄체가 발견되고 있는데, 그 현황을 보여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육군비행장요람」에는 육군 항공기지 11곳의 위치와 비행장 도면, 그리고 축조 방식, 엄체 개소 등이 수록되어 주목된다.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육군 비행장 주변에는 수십 개소의 엄체가 함께 건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많은 수가 파괴되었지만 일부는 아직도 농경지나 주거지 주변에 남아 있다. <표 2>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경북 영천과 전남 무안비행장 인근에는 거대한 엄체가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43) 엄체를 비롯하여 연료와 탄약을 보관할 시설들은 1945년 5월 이후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44)
43) 경북 영천에 비행장이 들어선 것은 중일전쟁 직후였다. 당시 영천에 ‘飛行 不時 着陸場’을 건설했다고 한다(朝鮮總督官房 文書課, 「朝鮮時局宣傳事務槪要: 朝鮮中央情報委員會活動狀況 竝ニ同會附事項」(1937.11.20.), 昭和12年 時局宣傳事務報告). 이후 종전 직전 금호강 수변을 비롯하여 비행장 인근에 다수의 엄체가 건설되었다.
44) 植弘親孝, 「陸軍航空後方作戰準備に關する資料 昭和17~20」.
한편 한반도 주둔 일본 육군은 비행장 시설의 관리 및 복구를 위해 별도의 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다.
1944년 10월 특설경비공병대를 편성하여 비행장과 연안 경비를 위해 필요한 시설 복구를 담당시켰던 것이다.
특설경비부대는 애초 조선인 재향군인을 주축으로 편성된 부대였으나 이후 조선 내 징병제도 시행에 따라 다수의 조선인 청년들이 부대원으로 충원되기도 했다.45)
45) 宮田節子, 十五年戰爭極祕資料集15 朝鮮軍槪要史, 59~62쪽.
<표 2> 「육군비행장요람」에 수록된 육군 비행장과 엄체 현황
飛行場 位 置 滑走路 等 施設 槪況(활주로 단위는 m) 大邱 朝鮮 慶尙北道 達城君 解顔面 - 비행장 도면 있음(활주로 60×1,500, 栗石鋪裝) - 엄체 大 30개소, 수용시설 580명분 蔚山 朝鮮 慶尙南道 蔚山郡 蔚山面 - 비행장 도면 있음(활주로 60×1,500, 60×1,200, 60×1,000, 마카담 포장) - 엄체 大 24개소, 수용시설 600명분 海雲臺 朝鮮 慶尙南道 東萊郡 南面 - 비행장 도면 있음 - 엄체 大 18개소, 수용시설 300명분 四川 朝鮮 慶尙南道 泗川郡 四川面 - 비행장 도면 있음(활주로 60×1,500, 콘크리트 포장) - 엄체 大 40개소, 수용시설 600명분 大田 朝鮮 忠淸南道 大田郡 柳川面 - 비행장 도면 있음 - 수용시설 150명분 群山 朝鮮 全羅北道 沃溝郡 沃溝面 - 비행장 도면 있음 - 엄체 大 15개소, 수용시설 1,300명분 水原 朝鮮 京畿道 水原郡 - 비행장 도면 있음(활주로 60×1500, 콘크리트 포장) - 엄체 大 44개소, 수용시설 600명분 京城46) 朝鮮 京畿道 富川郡 吾丁面 - 비행장 도면 있음(활주로 80×1,200, 80×1,100, 80×900, 콘크리트 포장) - 엄체 大 46개소, 수용시설 600명분 龍山47) 朝鮮 京畿道 - 비행장 도면 있음 - 엄체 5개소, 수용시설 100명분 海州 朝鮮 黃海道 海州郡 泳東面 - 비행장 도면 있음(활주로 60×1,500, 栗石鋪裝) - 엄체 30개소, 수용시설 400명분 濟州島 朝鮮 濟州島 - 비행장 도면 있음(십자 모양의 활주로, 300×1,000, 200×1,000) * 출전: 日本 防衛硏究所 戰史硏究センター 所藏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46) 김포비행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표 1> 김포비행장 위치인 김포군 양서면과 <표 2>의 부천군 오정면의
경성비행장은 인접한 지역이다.
47) 여의도비행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전쟁 말기 항공기지에 대한 건설 및 관리를 위해 야전비행장설정대가 편성되었다.종전 당시 한반도 내 일본 육군 항공부대의 주력이었던 제5항공군은 항공총군 예하로 제17방면군의 지휘 아래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수지역의 전반적인 관리 책임은 제17방면군과 조선군관구사령부가 맡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제5항공군은 작전에 관해서는 한반도 내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가졌지만, 항공기지 설정이나 구축에 관해서는 제17방면군이 담당하고 있었다.48) 이에 제17 방면군은 예하에 야전비행장설정대를 편성하고 1945년 5월 이후 제5항공군의 항공기지 건설을 주도하고 있었다.49)
48) 당시 일본군은 ‘空地分離方式’에 따라 비행장을 설정하고 관리하는 지상부대와 비행부대를 분리해 편제하고 있었다.
49) 植弘親孝, 「陸軍航空後方作戰準備に關する資料 昭和17~20」.
(2) 해군의 항공기지 건설 실태
아시아태평양전쟁기 한반도 주둔 일본 해군은 鎭海를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진해 일본군 해군기지는 1904년 진해만방비대, 1916년 진해요항부를 거쳐 아시아태평양전쟁 직전인 1941년 11월 20일 진해경비부로 승격되었다. 진해경비부는 아시아태평양전쟁 개전을 위해 한반도 전역의 해군 부대 및 항공기지를 전시체제로 운용하기 위해 설치되었다.50) 진해경비부가 관할하던 한반도 내 해군 항공기지에 관해서는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航空基地圖를 통해 전반적인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51)
50) 「要港部令及旅順要港部令ノ改正等ニ際シ海軍進級令其ノ他ノ勅令中ヲ改正ス」, 公文類聚・第 六十五編・昭和十六年・第七十九巻・官職七十六・官制七十六・任免一(外務省~商工省), ア 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A02030300600.
51) 航空基地図 樺太, 千島, 北海道, 朝鮮, 中國, スマトラ, 馬來 等(海軍一般史料⑤-航空基地-95)
항공기지도에는 총 9개소의 해군항공기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원산을 제외한 여덟 곳은 모두 38도선 이남의 남한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항공 기지도에 수록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 3> 항공기지도에 수록된 일제 해군항공기지 실태
기지명 건설년도 최후사용 엄체 연료저장설비 중형용 소형용 鎭海(水)53) 1933 1945.8 0 有蓋 6 터널식 지하 3개소 250톤 濟州島 1937 1945.8 격납고 13 20 - 釜山 1945.4 1945.8 - 20 터널식 약 600㎡ 중 일부 연료 고 光州 1945.4 (前 비행장) 1945.8 - 18 터널식 약 5,470㎡ 중 일부 연 료고 迎日 공사중 미사용 격납고 1 20 터널식 약 3,100㎡ 중 725㎡ 연료고 麗水(水) 공사중지 미사용 - 5 터널식 2,680㎡ 중 600㎡ 연 료고 平澤 공사중 미사용 - 9 터널식 1,700㎡ 중 250㎡ 연 료고 甕津 공사중 미사용 - 21 터널식 5,070㎡ 중 1,040㎡ 연료고 元山 1940 1945.8 격납고 있음 있음
* 출전: 日本 防衛硏究所 戰史硏究センター 所藏 「航空基地圖 樺太, 千島, 北海道, 朝鮮, 中國, スマトラ, 馬來 等」.
항공기지도에는 각 항공기지의 건설연도를 비롯해서 종전 당시 사용 여부, 엄체 여부 및 숫자, 그리고 연료저장설비 현황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진해와 제주⋅부산⋅광주⋅원산 등은 종전 전에 건설되어 활용했고, 영일⋅여 수⋅평택⋅옹진 등은 공사 중에 전쟁이 끝나 활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항공기지도에 따르면, 일본 해군 항공기지 중 가장 먼저 건설된 것은 1933년 진해였고, 그다음이 1937년 제주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항공기지의 경우 1930년대 초반부터 이미 조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에,52) <표 3>의 건설년도는 전략적인 의미를 갖는 항공기지 건설 시기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광주의 경우 1945년 4월 건설했다고 기재한 다음 괄호 안에 ‘전 비행장’이라고 적었는데, 이 것은 광주가 육군의 비행장으로 활용되다가 전쟁 말기 해군 항공기지로 변경된 사실을 기입한 것이다. 또한 ‘엄체’라는 항목에 중형용과 소형용으로 나누어 각 항공기지별 건설 현황을 기재했는데 앞서 살펴본 육군항공기지 내 엄체와 연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52) 塚崎昌之, 「제주도에서의 日本軍의 ‘본토결전’ 준비의 재검토」, 372~374쪽.
53) (水)는 수상기 운용 비행장을 의미한다.
아울러 연료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터널식으로 구축한 지하시설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도 항공기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종전 이후 진해경비부가 생산한 북위 38도 이남 조선 항공기지 조서 를 통해서도 해군 항공기지 건설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54) <표 4>는 자료에 기재된 8개 지역의 항공기지 실태를 표로 정리한 것이다. 북위 38도 이남 조선 항공기지 조서에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진해를 비롯한 남한 내 8개 지역에 건설되었던 해군 항공기지의 실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중 부산항공기지는 김해국제공항으로 영일항공기지는 포항공항 등으로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여수시 新月洞 바닷가에는 당시 콘크리트로 축조했던 활주로가 아직도 절반쯤 바다에 잠긴 채 남아 있다.55)
54) 「北緯三十八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鎭海警備府引渡目錄(中央-引渡目錄-5) アジ ア歷史資料センター C08010531500. 진해경비부인도목록은 패전 이후 일제 해군성 이 해체되고 만들어진 제2복원국에서 한반도 내 해군 군사시설을 미군에 보고하기 위해 만든 자료였다.
55) 여수항공기지는 현재 신월동 한화공장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한화공장은 국가중 요시설로 출입이 어렵지만 아직도 일본군의 흔적이 다수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여수⋅ 순천 10⋅19사건의 현장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표 4> 북위 38도 이남 조선 항공기지 조서의 해군 항공기지 실태
도별 항공기지 위치 활주로 등 시설 개황 慶尙南道 鎭海 慶尙南道 鎭海邑 安谷里 활주로, 유도로, 有蓋掩體 6기, 격납고 釜山 慶尙南道 金海郡 비행장, 활주로, 유도로, 엄체 20기 慶尙北道 迎日 慶尙北道 迎日郡 비행장, 활주로, 유도로, 엄체 20기 全羅南道 濟州島 全羅南道 濟州島 齊州邑* 비행장, 유도로, 엄체 20기, 격납고 光州 全羅南道 光山君 활주로, 유도로, 유개엄체 18기 麗水 全羅南道 麗水邑 활주로, 유도로, 유개엄체 5기 京畿道 平澤 京畿道 平澤 비행장, 활주로, 유도로, 엄체 9기 黃海道 甕津 黃海道 甕津郡
비행장, 활주로, 유도로 비고 음영으로 표시한 장소는 지금도 공항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
* 제주항공기지 본부는 제주읍에 있었고 활주로 등 제반 시설은 대정면에 있었다.
<표 4>의 ‘활주로 등 시설 개황’ 항목에 보면 유개엄체나 엄체 기수가 명시되 어 있는데 그 숫자가 <표 3>의 소형용 엄체와 지역별로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해나 제주 등 기존에 존재했던 항공기지 외에 전쟁 말기 건설되었거나 건설 중이었던 곳에도 상당수의 엄체가 구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육군 항공기지에도 다수의 엄체가 구축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항공기지 내 엄체의 구축 시기와 형태를 살펴보면 일제가 전쟁 말기 특정 의도를 가지고 엄체를 조성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한다. 요컨대 일본 육⋅해군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특수한 전략적 목적을 띠고 항공기지에 수 십, 수백 기의 엄체를 구축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더욱 상세히 살펴보겠다.
<그림 3> 제주도에 남아 있는 엄체와 관련 시설들:자료: 2019.4.21. 필자 촬영(생략:별첨 논문파일참조)
3.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 전체 현황 및 잔존 실태
지금까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정비된 한반도 내 일본 육·해군 항공기지 실태 를 살펴보았다.
아래에서는 여러 자료에 산재되어 있는 일본 육군과 해군의 항공 기지들을 한데 묶어 전체 현황과 그 특징을 기술하도록 하겠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 육군과 해군이 한반도 내에 건설한 항공기지는 육 군 38개소, 해군 9개소 등 총 47개소에 달한다.56)
56) 필자가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것만 산정한 것으로 추가 자료 및 증언을 통해 늘어날 수 있다.
다만 건설 계획 단계였거나 건설 중에 전쟁이 끝나 자료에 수록되지 않은 곳이 추가로 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
<표 5>는 자료에서 확인된 것만을 대상으로 간략히 전체 현황을 표기한 것이다.
<표 5>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 전체 현황
한반도 47 개소
(남한 지역 31 개소)
경기도 4 육군 3 京城(汝矣島) 京城新(金浦) 烏山 해군 1 平澤
강원도 3 육군 3 春川 平康 江陵
충청남도 1 육군 1 大田
충청북도 1 육군 1 鳥致院
경상남도 6 육군 4 蔚山 海雲臺 四川 密陽 해군 2 鎭海 釜山
경상북도 4 육군 3 大邱 永川 琴湖 해군 1 迎日
전라남도 5 육군 3 光州 潭陽 木浦(務安) 해군 2 光州 麗水
전라북도 3 육군 3 群山 裡里 全州
제주도 4 육군 3 濟州島 齊州 齊州 교래리 해군 1 濟州島
( 북한 지역 16 개소)
황해도 3 육군 2 汗浦 海州 해군 1 甕津
평안남도 2 육군 2 平壤 溫井里
평안북도 1 육군 1 新義州
함경남도 4 육군 3 咸興 連浦 宣德 해군 1 元山
함경북도 6 육군 6 吉州 會文 淸津 會寧 阿吾地 承良
총 47개의 항공기지 중 남한지역에 31개소, 북한지역에 16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장 많은 항공기지가 위치한 것은 함경북도로 6개소 모두 육군의 항공 기지였다. 이들은 모두 대소전을 고려한 것들이었다. 함경북도에 가장 많은 항공 기지가 분포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한지역은 북한지역보다 2배 이상 많은 항공기지가 위치해 있었다. 남한지역의 항공기지는 상당수가 아시아태평양전쟁 기 건설되었으며 이는 다분히 미군의 공격을 대비한 조처였다. 북한지역 16개소 중 육군의 항공기지는 14개소였고 해군은 2개소에 불과했 다. 이에 비해 남한지역 31개소 중에는 7개소의 해군 항공기지가 확인되는데, 대부분 전쟁 말기 구축된 것들이다. 일본군의 한반도 내 항공기지 건설과 연관하여 주목할 변화가 있다.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한반도 방공지구 개편 추이다. 한반도 내 방공지구는 크게 북선· 중선·남선지구으로 나누어졌고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지구는 다시 여러 개의 소지구로 세분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각 지구별 전략적 중요도에 변화가 생기고 이에 따라 지구의 범위 및 소지구의 세분화 정도도 달라졌다. 예컨대 1942년 7월에는 북선지구의 범주가 함경도, 남선지구는 전라남도와 경 상도, 제주도, 그리고 나머지 지역이 중선지구로 구분되었고, 북선지구는 다시 나진·회령·나남·함흥 등 네 개 지구로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북선지구를 촘촘하게 편성함으로써 소련군을 향한 방공 대비를 철저히 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1945년 4월 북선지구는 경기도와 강원도 이북 전체의 넓은 범위로 구성되었고, 남선지구는 오히려 둘로 나눠서 전라도를 서선지구, 경상도를 남선지구로 세분 화했다. 상대적으로 남선지구를 촘촘하게 구성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57)
57)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한반도 방공지구 편성과 변화에 대해서는 조건, 「전시 총동원체제 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조선인 통제와 동원」(동국대 박사학위논문, 2015), 123~124쪽 참조.
요컨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한반도 주둔 일본군은 미군의 공습과 상륙을 막기 위해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항공기지를 확충하고 해당 지역의 방공지구 역 시 높은 밀도로 재편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군이 건설했던 한반도 내 육·해군 항공기지에 관해서는 해방 후, 그리고 한국전쟁기 미군이 생산한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미군은 일본군이 남긴 항공기지(Air Base)와 비행장(Air Field)을 재정비하여 항공군사시설로 사용했는 데, 관리 편의상 ‘K-(번호)’ 등의 방식으로 표기했다.58) 이러한 방식으로 표기된 항공기지 또는 비행장은 총 58개소에 달한다.59) 단, 이중 몇몇 장소는 중복되어 있고 불명확한 것도 눈에 띄기 때문에 58개소 모두를 일본군이 건설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대부분은 앞서 살펴본 47개소와 일치한다. 일본 육군과 해군이 한반도에 건설했던 항공기지의 자취는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김포를 비롯해서 오산·춘천·강릉·대구60)·군산·김해·포 항 등의 비행장 시설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군 항공기지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건설했던 활주로를 해방 이후 미군이 보수하여 활용했고, 다시 우리 군이나 정부에서 인수한 뒤 확장 보강공사를 통해 사용하고 있는 사 례이다. 또한 일본군이 비행기 은닉을 위해 구축했던 엄체도 아직 한반도 곳곳에 산재 해 있다. 전체 잔존 현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인된 것만 열거하면, 제주 알뜨르 비행장 일대 10기를 비롯하여 무안 6기, 여수 4기, 영천 4기, 밀양 2기, 김해 4기, 사천 1기 등 30여 기가 넘는다.61)
58) K-1은 釜山(金海) 항공기지, K-2는 大邱 東 비행장, K-3는 浦港 비행장, K-12는 望雲 비행장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59) Gordan L. Rottman, Korean War Order of Battle-United States, United Nations, and Communist Ground, Naval, and Air Forces, 1950-1953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2), pp. 205~206. 비행장의 대부분은 ‘南鮮’지역 에 있었고 애초 일본인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미국에 의해 업그레이드되고 확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0) 대구의 경우 일본군이 주둔했던 항공기지와 지금의 대구공항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61) 이 중 전남 무안과 밀양의 일본군 엄체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 군 주둔지 등 민간인 출입이 어려운 지역에서 추가로 엄체가 확인될 가능성도 있다.
4.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항공기지의 역할과 의미
일본군이 한반도에 건설한 항공기지는 대부분 전투에 직접 활용되지는 않았 다.
예외적으로 제주도의 해군 항공기지가 중일전쟁기 渡洋爆擊62)의 기점으로 활용된 바가 있었지만63) 대부분의 항공기지는 ‘준비’ 단계에서 종전을 맞이했 다.
62) 바다를 건너 장거리 비행을 통해 폭격 등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63) 중일전쟁기 제주 항공기지에는 육상공격기부대였던 木更津海軍航空隊가 주둔하고 있었 다. 木更津海軍航空隊의 중국 공습에 관해서는 다음의 자료가 있다. 「南京攻撃戦闘詳報 木 更津海軍航空隊(昭和12.8.22)」, 第1連合航空隊戰鬪詳報 昭和12.8~12.10(海軍一般史料② 戰史-支那事變-33) 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C14120255500.
그러나 일본군 항공기지가 미군의 공격에 대비한 최후 결전 시설이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과연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는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두 가지 점을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는 한반도 주둔 일본 육·해군의 결전에 따른 작전과 지휘 관계 변화,
둘째는 이러한 변화에 바탕 한 항공기지의 ‘결전’ 운용 실태이다.
우선 일본 육·해군 간의 협정과 방위 및 지휘 관계의 재편 상황을 살펴보자.
일본 육군과 해군은 각각 항공대를 운용했고 이로 인해 항공기지 역시 개별적으로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 결전을 위해서는 양자 간 작전과 지휘에 통합을 이루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일본 육·해군은 위수지역과 작전을 둘러싸고 이견이 있어 왔다. 공군을 따로 운용하지 않았던 일본군의 경우 육·해군이 각각 항공대를 보유하게 되면서 그 위수지역 및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일찍이 1921년 9월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장은 「陸海軍航空任務分擔協定」 을 체결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본토를 비롯한 제국 영역의 주요 지점에 대한 방공은 육군이 맡고, 해군은 근거지대를 비롯한 해군 기지와 해안에 침입하는 함선 및 항공기에 대한 방공 활동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64)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1923년 6월 체결된 「陸海軍防空協定의 件」이 있는데, 진해와 영흥은 해군이, 경성·평양·신의주·원산·진해만·마산항·부산항은 육군이 대공 방어를 분담한다는 협정이었다.65)
64) 防衛廳 防衛硏修所 戰史室, 戰史叢書19 本土防空作戰, 5쪽.
65) 「陸海軍防空協定ノ件通牒」, 大正12年 軍事機密大日記 3/6 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C0203 0152900.
이후에도 일본 육·해군은 작전과 관련된 ‘임무 분담 협정’을 지속적으로 맺어 왔다. 결국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초에는 「本土作戰에 관한 陸海軍中央 종전 직전 일본 육군의 항공병력 운용 계획 協定」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본토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은 패전 후 일본 군이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회답한 문서철인 연합군사령부회답서류철에 편철 되어 있다.66) 「본토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에는 ‘主敵’ 미군의 공격을 대비해 남서 제도를 제외한 일본 열도, 조선, 사할린 등에서 일본 육군과 해군이 수행 작전 계획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협정에 부속된 형태로 육군과 해군의 항공 작전에 초점을 맞춘 「決号航空作戰에 관한 陸海軍中央協定」이 체결되었는데 이를 통해 전쟁 말기 한반도 내 항공기지 운용 실태 및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67)
<그림 4> 「決号航空作戰に關する陸海軍中央協定」:생략 별첨 논문파일참조
(* 출전: 日本 防衛硏究所 戰史硏究センター 所藏)
66) 미군은 점령군의 입장에서 패전국 일본 측에 종전 직전의 작전 및 전비 상황 등을 상세히 요구했는데 이에 따라 생산·제출된 방대한 양의 문서철이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소장되 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방위연구소의 “陸軍一般史料-中央-終戰處理”라는 항목으로 분 류되어 있다. 향후 이 항목의 문서군에 대한 면밀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67) 「本土作戰に關する陸海軍中央協定」과 「決号航空作戰に關する陸海軍中央協定」의 주요한 내용 에 대해서는 조건,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군의 광주·전남지역 군사시설 건설과 전쟁유적의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03, 2022, 190~192쪽을 참조할 수 있다.
「결호항공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내용은 ‘特功用 航 空機’, 즉 ‘特功機’ 운용에 관한 부분이다. ‘특공’이란 ‘특별공격’을 일컫는 것으로 ‘戰死’를 전제로 제작된 ‘특수 병기’를 활용하여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68) ‘특별 공격’은 사실상 ‘자살공격’을 지칭했기 때문에 「결호항공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 협정」의 ‘특공기’ 운용은 결국 ‘자살공격’을 위한 작전 계획을 설정한 것이었다. 「결호항공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의 요지는 “특공 공격에 의한 적 상륙 선단의 격멸”에 있었다.69) 그리고 이를 위해 한반도 곳곳에 항공기지 및 관련 시설을 확충했는데, 이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앞의 제2장 2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엄체’ 구축 계획이다. 특히 ‘특공기용 엄체’ 구축에 관해서는 「決号兵站準備 要綱」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70) 「결호병참준비요강」에 따르면,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특공기 운용을 위해 ‘본토결전’ 지역 전역에 걸쳐 총 2,050기에 달하는 엄체를 구축할 계획이었 다. 그리고 이중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에는 총 200기의 엄체를 건설하는 것으 로 명시되어 있다.71)
68) 일본군이 ‘특별공격’을 본격적으로 계획한 것은 과달카날 전투 등 남서태평양 지역의 패배가 명백해진 1943년 중기부터였다고 한다. 당시 미군의 압도적 물량에 대항하기 위해 ‘必死必殺’의 각오로 특별공격을 본격적으로 결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해군 군령부 제2부장 대좌 구로시마 가메토(黑島龜人)는 ‘특공적 전법과 전비’를 중시한 인물 이었는데, 1943년 8월 6일 “戰鬪機에 의한 衝突擊”, 즉 자살 공격을 제안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 시종무관이었던 대좌 죠 에이이치로(城英一郞) 역시 “적함선을 비행기의 육 탄공격에 의해 격멸”하기 위해 ‘특수항공대’ 편성을 주장했다(防衛廳 防衛硏修所 戰史室, 戰史叢書45 大本營海軍部·聯合艦隊(6): 第3段作戰後期, 朝雲新聞社, 1971, 322~323쪽).
69) 「決号航空作戰に關する陸海軍中央協定」, 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C15010006200.
70) 「決号兵站準備要綱」, 連合軍司令部の質問に對する回答文書綴(事實調査部)(陸軍一般史料-中 央-終戰處理3), 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C15010006600.
71) <표 2>와 <표 3>에는 항공기지별로 구축했던 엄체 현황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이 특공 기용 엄체를 포함한 것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특공기용 엄체는 遮蔽·秘匿에 초점을 두고 기존의 것을 정비 하거나 부족할 경우 신설토록 했다. 특공기용 엄체가 구축된 곳은 제주를 비롯하 여 사천·해운대·울산·목포(망운)·대구·군산·수원(오산)·경성·해주·온정리·力浦·평 양 등이었다. 제주가 20기로 가장 많았고, 그 외 지역은 모두 15기씩 구축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특공기용 엄체 구축 계획과 더불어 실제 특공기 운용에 관한 자료도 있다. 「결호항공작전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에 첨부된 ‘陸軍航空兵力配備竝運用計畫’ 에는 항공총군을 정점으로 한 제1항공군, 제5·6항공군의 특공기 운용 계획이 수 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미에현(三重縣) 스즈카(鈴鹿)를 경계로 동쪽은 제1항공군, 서쪽은 제6항공군이 담당했으며, 한반도는 제5항공군의 위수지역으로 설정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각 항공군 예하의 항공기를 일반기와 특공기로 나누어 표기했는데, 제5항공군 예하에는 일반기 200기, 특공기 500기가 기재되 어 있다.
즉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5항공군은 500기의 ‘자살공격기’를 운용 할 계획이었던 것이다.72)
72) 제5항공군은 당초 중국에 주둔하고 있다가 1945년 5월경 주력이 한반도로 이동했다. 제5항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규모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를 보인다. 다만, 종전 후 일본군이 미군 측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제5항공군 예하에는 총 695기의 항공기가 있었으며, 이 중 가용기가 557기, 불가용기가 138기라는 기록이 있다(조건, 「전시체제기 조선 주둔 일본군의 防空 조직과 활동」, 128쪽.
5. 결론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한반도를 최후의 결전장으로 만들었다.
충청 남도 대전에는 제17방면군의 지하사령부를 만들었고,73) 인천시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 일대에는 지하공장과 창고를 건설했다.74)
73) 森田芳夫, 朝鮮終戦の記録: 米ソ両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巌南堂書店, 1964, 18~19쪽.
74) 조건, 「일제 말기 일본군의 仁川陸軍造兵廠 地下化와 강제동원 피해」, ≪한국근현대사연 구≫ 98, 2021, 187~198쪽.
충청북도 영동의 산간에는 당시 일본군이 굴착한 수십 개소의 지하 군수시설도 확인된다.
제주도의 수많은 오름에는 이오지마(硫黄島)나 오키나와(沖縄)와 같은 지하 벙커가 만들어졌고, 해안에는 특공용 병기가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파헤쳐졌다. 이런 종류의 벙커와 동굴은 전라남도 내륙과 해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일본 육군과 해군의 항공기지가 건설되었다. 당시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반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는 육군 38개소, 해군 9개소 등 총 47개소에 이른다. 단, 자료에서 파악되지 않은 은닉비행장 등을 포함하면 종전 당시 50개소가 넘는 항공기지가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항공기지는 1920년대부터 하나둘씩 건설되기 시작했고, 1930년대를 지나 1940년대 본격적으로 신설 또는 증강되었다. 제17방면군과 제 5항공군 항공참모를 겸직했던 우에히로 지카타카는 육군 항공기지 건설을 세 시기로 나누어 회고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 육군 항공기지의 신설과 증강 은 제2기인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에 집중되었다. 한반도에 건설되었던 일본군 항공기지는 종전 직전 ‘特功基地’로 변모했다. 일본군은 ‘최후 결전’을 위해 비행장 주변에 특공기용 엄체를 대규모로 구축했고, 가용 항공기 중 대부분을 특공기로 편성했다.
결국 수십 개소에 달하는 항공기지 는 ‘자살공격’의 시발점으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와 식민지 조선인은 ‘본토결전’의 인질로 사로잡힌 채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피해를 감내해야 할 운명 에 직면했다.
만일 일본이 무모한 전쟁을 지속했더라면 한반도는 수백 기의 ‘자 살 공격기’가 발진하는 죽음의 전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는 전쟁 말기 만들어졌던 엄체 등 일본군 항공군사유적이 상당수 남아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 일본 육·해군 항공기지의 연원과 건설 양상, 전체 항공기지 현황, 그리고 항공기지의 역할 및 의미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까지 확인한 일본군 항공군사유적과 관련 자료에 비해 항공기지 각각의 구 체적인 실태 및 특징을 규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향후 육·해군별, 시대별, 지역별 항공군사유적의 구축과 실태, 특징, 잔존 실태 등에 대한 추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항공기지 건설을 위해 강제동원되었던 식민지 조선인 들의 피해 실태에 대해서도 연구를 지속되었으면 한다. 또한 이들 연구를 바탕으 로 한 교육적·정책적 활용 방안도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다.
<부록> 한반도 내 일본 육·해군 항공기지 현황
연 번 군별 비행장 (항공기지) 위치(도) 위치(군이하) 출전 1 육군 京城(汝矣島) 京畿道 京城府 汝矣島町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2 육군 京城新(金浦) 京畿道 金浦郡 陽西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3 육군 烏山 京畿道 水原郡 城湖面 烏山里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4 육군 春川 江原道 春川郡 下文延里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5 육군 平康 江原道 平康郡 石校里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6 육군 江陵 江原道 江陵郡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7 육군 大田 忠淸南道 大田郡 柳川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8 육군 鳥致院 忠淸北道 淸州郡 江外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9 육군 蔚山 慶尙南道 蔚山郡 蔚山邑 三里山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10 육군 海雲臺 慶尙南道 東萊郡 南面 - 植弘親孝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11 육군 四川 慶尙南道 泗川郡 四川面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12 육군 密陽 慶尙南道 - 植弘親孝 13 육군 大邱 慶尙北道 達城君 解顔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14 육군 永川 慶尙北道 永川郡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15 육군 琴湖 慶尙北道 - 植弘親孝 16 육군 光州 全羅南道 光州郡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17 육군 木浦(望雲) 全羅南道 務安郡 - 植弘親孝 18 육군 潭陽 全羅南道 潭陽郡 - 植弘親孝 19 육군 群山 全羅北道 沃溝面 仙緣里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20 육군 裡里 全羅北道 金堤郡 龍池面 長新田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21 육군 全州 全羅北道 - 植弘親孝 22 육군 汗浦 黃海道 平山郡 金岩面 汗浦里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23 육군 海州 黃海道 海州郡 泳東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24 육군 平壤 平安南道 平壤府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25 육군 溫井里 平安南道 江西郡 瑞和面 雪岩里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26 육군 新義州 平安北道 龍川郡 新義州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27 육군 咸興 咸鏡南道 咸州郡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28 육군 連浦 咸鏡南道 咸州郡 連浦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29 육군 宣德 咸鏡南道 咸州郡 宣德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30 육군 吉州 咸鏡北道 吉州郡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31 육군 會文 咸鏡北道 會文洞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32 육군 淸津 咸鏡北道 松鄕洞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33 육군 會寧 咸鏡北道 會寧郡 碧城面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34 육군 阿吾地 咸鏡北道 阿吾地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35 육군 承良 咸鏡北道 承良 - 飛行場記錄(朝鮮ノ部) 36 육군 濟州島 濟州道 - 陸軍飛行場要覽(北海道, 朝鮮) 37 육군 濟州島 濟州道 濟州 - 植弘親孝 38 육군 濟州島(교래 리) 濟州道 濟州 - 植弘親孝 39 해군 鎭海 慶尙南道 鎭海邑 安谷里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0 해군 釜山 慶尙南道 金海郡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1 해군 迎日 慶尙北道 迎日郡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2 해군 濟州島 全羅南道 濟州島 齊州邑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3 해군 光州 全羅南道 光山君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4 해군 麗水 全羅南道 麗水邑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5 해군 平澤 京畿道 平澤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6 해군 甕津 黃海道 甕津郡 - 北緯38度以南ニ於ケル朝鮮航空基地調書 - 航空基地図 47 해군 元山 咸鏡南道 - 航空基地図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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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struction of Air Base on the Korean Peninsula by the Japanese Army during the Asia-Pacific War and Its Meaning
CHO Geon
There are many remains of air bases built by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Asia-Pacific War on the Korean Peninsula. In this article, we looked at the construction patterns and overall status of air bases built by the Japanese Army and Navy throughout the Korean Peninsula. In addition, the role and meaning of the Japanese military air base at the end of the war were also considered. It was at the end of the Asia-Pacific War when the Japanese military mainly built air bases on the Korean Peninsula. In particular, more air bases were built in the South in preparation for U.S. air strikes and landings. There are a total of 47 Japanese air bases on the Korean Peninsula confirmed through the data. Among them, 31 are in South Korea and 16 are in North Korea. Of the 47 air bases, 38 air bases for the Army and 9 for the Navy are identified. As the landing of the U.S. military became visible, the Japanese air base gradually transformed into a place with suicide attacks in mind. As a result, the Japanese military organized 500 of its planes into units for suicide attacks. It also implemented an aircraft shelter deployment plan to hide and protect them. At that time, there were 200 aircraft shelters according to the construction plan, and many of them were actually built. Even now, many aircraft shelters built by the Japanese military remain throughout the South. These aircraft shelters are important in that they are symbolic remains to prove that the Japanese forced sacrifices by capturing the Korean Peninsula and colonial Koreans as hostage to the war of aggression at the end of the war.
Keywords: Asia-Pacific War, Japanese troops stationed on the Korean Peninsula, air bases, airfields, aircraft shelter, the 5th Air Force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4집 2023년 봄호
투고일: 2월 23일, 심사완료일: 3월 4일, 게재확정일: 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