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서 론
2. 이론적 검토와 분석의 틀
3. 전장의 선택(地): 왜 미드웨이섬과 알류샨 열도였나?
4.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勝): 선전이후구승과 선승이후구전
5. 결 론
<초 록>
본 연구는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이후 우세한 기세와 압도적 전력을 앞세워 태평양전쟁의 주도권을 선점했던 일본제국해 군이 불과 6개월 후인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왜 패배하였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했다.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이번 연 구에서는 “미국해군과 일본제국해군은 진주만 기습 이후 미드웨이· 알류산 전역으로 이르는 6개월의 기간 동안 승리의 군형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대표적인 군사전략의 고전인 『손자병법』 제4편 군형(軍形)에서 손자가 제시한 ‘선승이후구전’이라는 개념 을 통해 미국과 일본제국해군이 진주만 기습 이후부터 미드웨 이·알류샨 전역으로 이르는 과정을 바라볼 것이다. 특히, 선승이 후구전의 승리의 군형을 달성하기 위해 제시된 ‘전장의 선택과 병법의 다섯 단계’를 그 분석의 기준으로 삼아 미일 양측이 어떠 한 과정을 거치면서 각자의 군형을 만들어나갔는 지에 대해서 면밀히 살펴본 것이다. 분석 결과 일본제국해군은 미드웨이·알류샨 전역 수립 단계에 서 상대적 유리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이미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의 군형으로 가는 길로 접어 든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반면에 미국해군은 1942년 5월까지 태평양 전 지역에서 불리한 전황(戰況)을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일본제국해군이 가졌던 상대적 유리함을 상쇄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1942년 6월 4일에는 승리의 가능성이 높은 군형을 만들 수 있었으며, 다양한 우연적 요소의 도움을 받으며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서 승리하여 태평양전쟁의 전세(戰勢)를 급격히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주제어 : 손자병법, 군형(軍形), 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 선전이후구승(先戰以後求勝), 전장의 선택(地)과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勝), 미드웨이·알류샨 전역(戰役)
1. 서 론
미국해군(United States Navy)과 일본제국해군(Imperial Japanese Navy, 日本帝國海軍)이 태평양의 해양 패권을 두고 세계 해전의 역사상 처음으로 항공모함 주력 함대 간 결전을 펼 쳤던 미드웨이(Midway Atoll) 해전이 발발했던 것도 벌써 80년 이 지났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미드웨이 해전은 미국해군에게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불멸의 승리로 기억되고 있으며, 반면에 그 상대방이었던 일본제국해군과 이들을 계승한 현대 일본의 해상 자위대(Japan Maritime Self-Defense Force, 海上自衛隊)에 게는 이날의 뼈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있다. 미국해군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의 극적인 대승이었던 미드웨이 해전은 학술 연 구뿐만 아니라 문학, 영화 등 다양한 매체의 훌륭한 소재가 되 어왔으며, 가장 최근인 2019년에는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 에 의해 다시 한번 영화화되어 미드웨이 해전이 다소 생소한 우 리 대한민국의 일반 대중의 입에도 회자(膾炙)되었다.1)
1) 이도연, “미국 본토 공격 막아낸 결정적 승리… 영화 '미드웨이'”, 연합뉴스 (2019년 12월 23일), https://www.yna.co.kr/view/AKR20191222045700005. (접속날짜 2022년 6월 6일).
영화 속 묘사된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 당시의 극적인 미국해군의 영웅담이 중심이 되었다. 우연적인 요소들이 하나하 나씩 연계되어 압도적인 전력 열세인 미국해군이 일본제국해군 을 물리쳤다는 서사는 비단 2019년 개봉한 이 영화에서 처음 언 급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위대한 전투들이 그 전투 고유의 신화(myth, 神話)를 만들어내고 발전시켜나가듯이 미드웨이 해전도 마찬가지였다. 2)
미국 내 미드웨이 해전 전문가인 파셜 (Jonathan Parshall)은 털리(Anthony Tully), 루 유(Lu Yu), 이승훈과 같은 아시아 학자들과 함께 미드웨이 해전을 ‘신화’가 아닌 ‘역사’의 영역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파셜의 말을 빌리자면 미드웨이 해전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 은 전투(Timeless Battle)’이이며, ‘진화하는 해석(Evolving Interpretations)’을 통해 영속적으로 해전 연구자들 곁에 남아 있다.3)
하지만 이러한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국내 학계의 관심과 연 구성과는 미드웨이 해전의 직접적인 당사국인 미국과 일본의 높 은 관심과 방대한 연구자료에 비해서는 매우 저조한 편이다. 그 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미국에서 이미 연구된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각종 저서와 논문을 토대로 미드웨이 해전의 국면을 하나 하나 세밀하게 관찰하려는 연구는 거의 전무했으며, 이미 도출 된 전훈(戰訓)을 토대로 서구와 일본 학계에서 연구한 자료를 해 전사 교재 제작 차원에서 번역 및 편집, 요약하는 등의 연구가 주류를 이뤘다.4)
2) 영화 미드웨이가 한국에서 개봉하기 약 4개월 전 한국어로 번역된 조너선 파셜 (Jonathan Parshall)과 앤서니 털리(Anthony Tully)의 저서는 이러한 미드웨이 해전의 신화를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하면서 이 신화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 다.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대중의 통념적 신화는 다음 자료를 참고.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이승훈 역,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서울: 일조각, 2019), 16-21쪽.
3) Jonathan Parshall, “Timeless Battle, Evolving Interpretations,” Naval History Magazine, Vol. 36, No. 3 (June, 2022). https://www.usni.org/magazines/navalhistory-magazine/2022/june/timeless-battle-evolving-interpretations?utm_ source=pocket_mylist (접속날짜 2022년 6월 7일)
4) 윌리엄 O. 스티븐스, 앨런 웨스트콧, 김일상 역, 『세계해전사(A History of Sea Power)』 (서울: 연경문화사, 1979); 해군대학 편, 『세계해전사』(대전: 해군대학, 1998).
물론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일부 해군 출신 연구자들이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해 이미 도출된 교훈 등을 재강조한 후속 연구들도 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그 자체에 대한 전쟁사(戰爭史)적인 심층적 분석이기보다는 연구자 자신이 주장의 논리성을 뒷받침하는 사례 중 하나로서 다뤘을 뿐이었다. 5) 이러한 기존의 경향과는 다르게 국방대학교에서 군사전략학을 전공한 이준일은 2020년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해군이 승리 할 수 있었던 요인을 고대 중국의 병법가이자 군사사상가인 손 자(孫子)가 저술한 병법서 『손자병법(孫子兵法)』 제5편 병세(兵 勢)의 내용을 분석의 틀로 삼았다. 그는 이를 ‘손자의 세(勢) 사 상’이라고 명명하여, 미국해군의 미드웨이 해전 승리요인을 ‘부대 의 적절한 편성(分數), 효율적 지휘통제체제의 구비(刑名), 기병 과 정병의 활용(奇正), 적의 허점에 병력을 집중(虛實)’ 등 네 가 지 요소를 중점으로 분석하였다. 6)
5) 김영기, “해군 작전보안 활성화 방안,” 『해양전략』 제46호, (1987); 윤혁민, “마한 (Alfred T. Mahan)의 해양 전략 적용을 통한 태평양 해전에 관한 연구,” (국방대 학교 군사전략학과 석사학위논문, 2007); 이용응, 김경률, "군사기획이 해전승패에 미치는 영향 연구: 쓰시마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을 중심으로," 『해양전략』 제137호 (2007); 문두식, “미드웨이 해전: 통신첩보전의 승리,”『군사논단』 제80호 (2014); 이종호, “태평양전쟁 시기(1941-1945) 美·日의 군사전략 변화 비교연구,” 『한국동 북아논총』 제82호 (2017).
6) 이준일, “손자의 군사사상으로 본 미드웨이 해전 시 미국의 승리요인 분석: 손자의 ‘세(勢)’ 사상을 중심으로,” 『KIMS E-Journal』 통권 1호 (2020), 22-25쪽. 김덕기 역시 영화 미드웨이(2019)의 개봉 이후 미드웨이 해전이 한국해군에 미치는 전략적 함의를 분석하기는 했으나, 이는 특정 이슈에 대한 서평이나 교훈 도출 중심의 단 문(短文)으로 학술논문이라고 보기에는 한계점이 있었다. 김덕기, “4차 산업혁명시 대에 다시 본 영화 「미드웨이」가 한국군에 주는 전략적 함의,” 『KIMS Periscope』 제187호 (2020년 3월 11일).
이준일의 연구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유의미하다고 본다.
첫 번째, 미드웨이 해전의 전투사, 전쟁사에 집중한 국내 연구자 의 보기 드문 노력이라는 점이다. 그는 미드웨이 해전 자체를 손자의 ‘세’ 사상에 집중하여 바라봤으며, 이를 통해 미드웨이 해전 자체가 갖는 의미를 보다 심층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만 들었다.
두 번째, 손자병법이라는 ‘병법서’를 그 본연의 ‘군사전 략적’ 의미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국내 학계 에서는 『손자병법』이 본질적으로 병법서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에 대한 인문학적, 경영학적, 어문학적 접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7), 이준일의 이러한 방식의 접근보다는 『손자병법』을 보다 그 본질에 부합하는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연구자들 의 『손자병법』 해석을 준용하고 있기 때문이다.8) 물론 이준일의 연구 이외에도『손자병법』을 군사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 역시 존재한다. 9) 하지만 이번 연구는 미드웨이 해전이라는 사례에 중 점을 두고, 이를 『손자병법』이라는 군사전략적 고전의 내용을 토 대로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므로10) 그가 제시한 접근 방법 에 더 주목할 것이다.
7) 전명용, “『손자병법』 이론체계 연구,” 『중국학연구』 제76집 (2016); 송용호, 전명 용, “손자병법의 전략과 그 현대적 응용에 관한 연구,” 『동양고전연구』 제73집 (2018).
8) 손자병법을 보다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연구자와 그들이 주석(注釋)을 단 해설서는 다음과 같다. 손무, 박창희 해설, 『손자병법: 군사전략 관점에서 본 손자의 군사사상』 (서울: 플래닛미디어, 2017); 손자, 김광수 해설, 『손자병법』 (서울: 책세상, 1999).
9) 김진찬, 김은영, “손자병법 주요 구절 선별과 군사적 활용,” 『군사연구』 제142집 (2016); 서영식, “동서양 인문고전에 등장하는 군사지도자상에 관한 연구: 플라톤 의 『국가』와 손자의 『손자병법』을 중심으로,” 『군사』 112호 (2019); 이종호, 김연 준, “북한의 WMD 위협 극복을 위한 인간정보 운용방안: 손자병법 ‘용간편’ 현대 적 적용을 중심으로,” 『융합보안논문지』 제19권 제1호 (2019); 박동철, 정주호, “손자병법에 나타난 정보의 중요성에 근거한 이순신의 정보전 수행에 대한 연구,” 『한국치안행정논집』 제18권 제2호 (2021).
10) 군사학연구회 편, 『군사학 연구방법론』 (성남: 북코리아, 2017), 191-192쪽.
앞서도 간략히 언급했었지만, 이준일은 손자의 ‘세’ 사상이 담 긴 『손자병법』 제5편 병세(兵勢)의 내용을 중심으로 미드웨이 해 전에서 미국해군의 승리요인을 분석했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미국해군의 승리요인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왜 일본제국해군은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이후 상대적으로 우세한 기세 속에 서 왜 미드웨이 작전을 실패했는가’에 초점을 둘 것이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했던 1942년 6월 초순 에 발생한 미드웨이 해전 자체만을 살펴보는 게 아니라,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이후부터 시작된 약 6개월의 일본제국해군의 행태를 『손자병법』 제4편 군형(軍形)의 핵심 내용을 토대로 그들 은 어떻게 ‘승리의 군형’을 갖추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으며, 실 패로 이르고 말았는지를 중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11) 이 글은 제1장 서론을 시작으로 제2장에서는 군사전략적 관점 에서 바라본 『손자병법』의 이론적 내용을 간략히 검토하고, 미드 웨이·알류샨(Aleutian Islands) 전역(戰役, campaign)의 전반 을 바라보는 분석의 틀로써 승리의 군형을 완성해나가는 ‘전장의 선택(地)’과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勝)’를 제시할 것이다. 12)
11) 박창희는 군형을 ‘군대의 대형’으로 ‘진영 혹은 전투대형을 갖추다’라는 의미로 해석했으며, 군형편의 핵심은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군형을 편성함으로써 ‘선승이 후구전(先勝以後求戰)’, 미리 이겨놓고 싸우는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 다. 손무, 박창희 해설 (2017), 179쪽.
12) 이번 연구에서는 미드웨이 근해에서 펼쳐진 해전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기에 일본 제국해군이 함께 추진했던 알류샨 전역(戰役, campaign)까지 복합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당시 일본제국해군의 알류샨 작전이 미드웨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검토할 것이다. Mitsuo Fuchida, Masatake Okumiya, Midway, The Battle that Doomed Japan: the Japanese Navy’s Story (Annapolis: U.S. Naval Institute Press, 1955), pp. 78; 83-84; Samuel E. Morrison,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 Volume 4: Coral Sea, Midway, and Submarine Acitions, May 1942-August 1942 (Annapolis: U.S. Naval Institute Press, 2010), pp. 77-78.
제3장에서는 일본제국해군이 왜 미드웨이와 알류샨 전역을 선택 하였는지와 미국해군이 이러한 일본제국해군의 전략적 선택을 간파하고 대비해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제4장에서는 『손자병법』 제4편 군형에서 제시한 ‘병법의 다섯 단계’의 입장에서 일본제국해군이 결국에는 ‘선승이후구전’을 달성 하는 ‘승리의 군형’이 아니라 ‘선전이후구승’의 ‘패배의 군형’으로 왜 치달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논할 것이다. 마지막 제5장 에서는 이 글의 주요 내용과 논지를 요약하고 이 연구의 한계점 을 분석하여, 향후 연구과제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2. 이론적 검토와 분석의 틀
가.『손자병법』의 군사전략적 해석: 전쟁론, 전쟁술, 부대 기동, 결전 수행
‘손자(孫子)’란 손무(孫武)를 높이는 존칭으로, 그는 기원전 500년경 동양을 대표하는 불후의 고전 『손자병법』을 저술했다. 『손자병법』은 약 2,5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자타공인 동양 최고의 병법서(兵法書)의 지위를 누려왔으며, 동양의 대표적 병 서로 손꼽히는 『무경칠서(武經七書)』 “손자(孫子), 오자병법(吳 子),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삼략(三略), 육도(六韜)” 중에도 으뜸으로 꼽힌다. 후한말(後漢 末) 대표적 전략가인 조조(曹操) 역시 『손자서(孫子序)』에 “내가 읽은 병서와 전책(戰策)이 많은데 손무가 저술한 병법이 가장 심 오했다”라고 서술할 정도로13), 『손자병법』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최고의 ‘군사전략 이론서’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다.
13) 손무, 박창희 해설 (2017), 6쪽; 손자, 김광수 해설 (1999), 8쪽. ‘
하지만 『손자병법』의 그 본질이 ‘병법서, 군사전략 이론서’임에 도 불구하고 국내 시중에 다수 존재하는 많은 번역서, 해설서들은 그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보다는 대중의 관심을 쉽게 사로 잡을 수 있는 기업 및 조직경영, 어문학적 해석에 치중하는 모 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앞서 서론 에서도 언급했듯이 『손자병법』을 보다 군사과학적,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한 것은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 수 김광수의 해설서(1999년)와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과 교수 박창희의 해설서(2017년)가 있다. 김광수와 박창희의 해설서는 해석방법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손자병법』의 근본이 군사문제를 다루는 병서, 군사전략 이론서에 있다고 보 고 접근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14) 다만 본 연구에서는 『손 자병법』을 보다 사회과학적 틀에 가까운 군사학적 관점에서 분석 한 박창희의 접근 방법과 해석을 기준으로, 손자가 이 병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13개 편 각각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보 다는 이 13개의 편이 어떠한 논리적 체계 속에서 상호 연계되고 있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박창희는 『손자병법』을 ‘전쟁론(전쟁 일반), 전쟁술(결전의 용 병), 부대기동(우직지계 기동), 결전 수행’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바라보고 있다. 15)
첫 번째, 전쟁론을 다루는 ‘시계(始計), 작전 (作戰), 모공(謨攻)’편의 핵심 내용은 각각 ‘전쟁을 결심하기 위한 준비와 비교를 통한 승산 판단’16), ‘전쟁에 돌입한 이후 군수(軍 需)의 문제를 고려한 속승(速勝)의 추구’ 17), ‘공격을 도모함에 있어 최소한의 피해에 의한 온전한 승리(全勝) 추구’ 18)이다.
14) 손무, 박창희 해설 (2017), 10-14쪽; 손자, 김광수 해설 (1999), 9-12쪽.
15) 『손자병법』의 마지막 제13편 용간(用間)은 그 내용이 ‘전쟁론, 전쟁술, 부대기동, 결전 수행’이라는 네 가지의 기본 축에 속하지 않은 부록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 만, 그렇다고 해서 손자가 전쟁수행에서의 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며, 그는 제1-12편 전반에서 전쟁과 용병법의 근간에 정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마지막 부분인 용간편에서 이를 앞에서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손무, 박창희 해설 (2017), 545-572쪽.
16) 위의 글, 19-73쪽.
17) 위의 글, 75-122쪽.
18) 위의 글, 123-175쪽.
. 두 번 째, 손자의 전쟁술, 결전의 용병 이론이 담긴 ‘군형(軍形), 병세 (兵勢), 허실(虛實)’편의 핵심 내용은 각각 결전 수행 이전에 용 병술 구상 차원에서 ‘먼저 이겨놓고 전투를 행하는(先勝以後求 戰) 것이 가능한 군형(진영)을 편성하는 것’19), ‘승리의 군형을 통해 결정적 전투에서 세(勢)와 절(節)을 발휘하는 것’ 20), ‘적의 강점에 대칭적으로 맞서기보다는 적의 허점을 조성하고 이를 공 략하는 것’21)이다.
19) 위의 글, 177-212쪽.
20) 위의 글, 213-254쪽.
21) 위의 글, 255-298쪽.
이와 같이 제1편 시계에서 제6편 허실까지 이 어지는 『손자병법』의 구성은 손자가 원정작전(遠征作戰) 수행 간 의 실제적 용병을 논하기에 앞서 전쟁과 결전의 용병과 관련된 이론적 기반을 서술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표 1> 『손자병법』에 대한 군사전략적 해석
전쟁론 전쟁술 (결전의 용병) 부대 기동 (우직지계 기동) 결전 수행 ① 시 계 始⁀ 計‿ ② 작 전 ⁀作 戰‿ ③ 모 공 ⁀謨 攻‿ ④ 군 형 ⁀軍 形‿ ⑤ 병 세 ⁀兵 勢‿ ⑥ 허 실 ⁀虛 實‿ ⑦ 군 쟁 ⁀軍 爭‿ ⑧ 구 변 ⁀九 變‿ ⑨ 행 군 ⁀行 軍‿ ⑩ 지 형 ⁀地 形‿ ⑪ 구 지 ⁀九 地‿ ⑫ 화 공 ⁀火 攻‿ 전 쟁 전 준 비 와 비 교 를 통 한 승 산 판 단 전 쟁 돌 입 시 군 수 문 제 고 려 속 승 추 구 최 소 피 해 에 의 한 승 리 추 구 선 승 이 후 구 전 가 능 한 진 영 편 성 결 정 적 전 투 에 서 세 와 절 발 휘 적 의 허 점 조 성 / 공 략 우 직 지 계 기 동 간 용 병 다 양 한 상 황 변 화 고 려 한 용 병 의 가 변 성 지 형 과 적 정 을 고 려 한 용 병 결 전 장 의 지 형 을 고 려 한 용 병 적 중 심( 수 도) 공 격 하 는 결 전 의 용 병 화 공 으 로 결 전 수 행 지 원 / 보 조 ↕ ↕ ↕ ↕ ⑬ 용간(用間) : 첩자 운용을 통한 정보획득 (각 편에 제시된 정보들과 유기적 상호작용)
* 출처 : 손무, 박창희 해설 (2017), 15쪽.
이어서 손자는 본격적으로 원정작전 수행을 위해 실제 전장에 서 필요한 부대의 기동과 결전 수행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 논하 고 있다.
세 번째, 우직지계(迂直之計)의 부대 기동을 다루는 ‘군 쟁(軍爭), 구변(九變), 행군(行軍)’편의 핵심 내용은 각각 ‘적의 강력한 주력 부대를 피해 적 중심(수도)으로 곧바로 기동하는 우직지계 기동 간 용병의 중요성’ 22), ‘원정작전 시작 이후 우직 지계 기동 간 맞닥뜨릴 수 있는 다양한 상황 변화와 이를 고려 한 용병의 가변성’ 23), ‘적 중심을 향한 우직지계 기동 시 지형 (地形)과 적의 정세(敵情)를 고려한 용병법’ 24)이다.
22) 위의 글, 299-344쪽.
23) 위의 글, 345-370쪽.
24) 위의 글, 371-410쪽.
마지막 네 번 째, 원정작전 수행의 클라이막스인 실제 결전의 모습이 펼쳐지 는 ‘결전 수행’은 ‘지형(地形), 구지(九地), 화공(火攻)’편의 핵심 내용은 ‘결전장(적의 수도)에 도착하여, 그 지형을 고려한 실제적 용병의 방법’25), ‘적 중심(수도)를 공격하는 결전의 용병’26), ‘효 과적 공격 방법인 화공을 통해 결정적 전투 수행을 지원하는 것’ 27)이다.
25) 위의 글, 411-450쪽.
26) 위의 글, 451-514쪽.
27) 위의 글, 515-542쪽. ‘
이와 같이 제7편 군쟁에서 제12편 화공까지 이어지는 『손자병법』의 후반부는 손자가 앞서 전반부에서 논한 전쟁과 결 전의 용병과 관련된 이론적 기반을 토대로 실제 적 중심(수도)을 공격하는 원정작전을 위한 부대 기동의 시작에서 최종 결전 수 행 과정까지의 실질적 용병법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군사전략적 관점의 『손자병법』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표 1>과 같다.
나. 군형(軍形):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군형 편성을 통한 선승이후구전 달성
앞서 살펴봤듯이 『손자병법』의 13개의 편(編)은 ‘전쟁론, 전쟁술 (결전의 용병), 부대 기동(우직지계 기동), 결전수행’이라는 네 가지의 축으로 체계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손자병법』은 13개의 편 중 그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혹자들은 다소 협의의 관점을 토대로 손자의 군사사상을 ‘싸우지 않고 이기는 부전승(不戰勝)’이 중심이라고 말하거나, 대중들이 쉽게 접해 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知 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문구가 『손자병법』의 모두인 것처럼 단정 적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접근이 다. 서양과 동양의 군사사상 분야에서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전쟁론(On war)』과 더불어 군사전략적 정수(精 髓)의 양대 산맥인 『손자병법』은 결코 그와 같이 피상적이고 단 편적으로 접근해서는 심오(深奧)한 손자의 군사사상을 제대로 간 파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 필자는 이번 연구에서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이후부터 1942년 6월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 이르는 시기를 중심으로 일본제국해군이 어떠한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위한 ‘군형’ 편성을 위해 노력했는가를 중점적으로 바라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손자병법의 네 가 지 축인 전쟁론, 전쟁술, 부대 기동, 결전 수행 중에서 ‘결전의 용병’을 구상하는 단계인 ‘전쟁술’의 측면에서, 결정적 전투가 발 발하기 이전에 어떻게 선승이후구전을 달성하기 위한 진영, 군 형을 편성해나갔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손자병법』 제4편 군형의 내용을 면밀히 살 펴볼 필요가 있다. ‘군형(軍形)’이란 ‘군대의 대형’을 말하며, ‘진 영 혹은 전투대형을 갖추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시작한 두 국가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싸우기 위해 진영 을 갖추고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것이다. 손자는 군형편을 통해 ‘방어와 공격의 본질(攻守論)을 관통하는 온전한 승리(全勝)’, 그 리고 ‘승리할 수 있는 군형을 편성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손자가 말하는 핵심은 ‘적을 압도할 수 있는 군대의 대형을 편성’함으로써 미리 이겨놓고 싸우는 전쟁, 즉 ‘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28) 그렇다면 과연 ‘선승이후구전’은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인 가? 손자는 군형편의 첫 구절에서 “아군이 빈틈없는 방어대형을 완비함으로써 적이 이기지 못할 태세를 갖춰야 함(先爲不可勝)” 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손자가 전쟁의 본질 측면에서 공격보다 방어가 우세하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 다. 손자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도 “적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고,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려 있다(不可勝在己, 可勝在敵)”라고 말하며, 전쟁의 승리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방어는 본질적으로 적의 승리를 거부하는 데 그 목적이 있고, 공격은 그러한 상대 방의 강력한 방어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려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손자는 탄탄한 방어를 통해 아군 스스 로를 온전히 보전하는 가운데 적의 허점을 찾아 공격함으로써 ‘온전한 승리(全勝)’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29)
28) 위의 글, 179쪽.
29) 위의 글, 180-185쪽.
이어서 손자는 용병술의 수준을 구분해 논하고 있다. 그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용병술을 구상하는 수준이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아주 뛰어 나다고 할 수 없다(見勝不過衆人之所知, 非善之善者也)”라고 말 하면서, 뻔한 용병술을 통한 값 비싼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는 ‘이길 수밖에 없는 승리를 이루어내는 사람(勝於易勝者)’이야 말 로 진정으로 뛰어난 용병술을 지닌 장수(善戰者)라고 보았다. 그 러므로 손자는 ‘뛰어난 장수’는 반드시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을 태세를 갖추고 적의 패배를 놓치지 않을 것(立於不敗之地, 而不 失敵之敗也)”이라 확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손자는 군형의 편성 은 곧 장수의 용병술과 직결된다고 보았고, 뛰어난 용병술을 가 진 장수가 지휘하는 ‘승리의 군대(勝兵)’는 적이 감히 예상치 못 하는 병력운용을 통한 장수의 뛰어난 용병술을 바탕으로 방어와 공격에 모두 유리한 군형을 편성함으로써, “먼저 이겨놓고 싸움 을 시작(先勝以後求戰)”한다고 본 것이다. 반대로 뛰어난 용병술 을 갖추지 못한 장수가 지휘하는 ‘패배의 군대(敗兵)’는 “싸움을 시작하고 난 후에 승리를 구하는(先戰以後求勝)” 것이다. 30)
30) 위의 글, 194-198쪽.
<표 2> 『손자병법』의 내용을 토대로 정형화한 병법의 4단계
계(計) ⇒ 형(形) ⇒ 세(勢) ⇒ 허실(虛實) 피아 승부 예상 유 리 ( 利 ) 하 면 개전 유리함(利) 이용 용병술 구상 / 군형(軍形) 편성 <先勝以後求戰> 거센 물살 같은 세의 발휘 세의 발휘 방법 피실격허(避實 擊虛)
* 출처 : 손무, 박창희 해설 (2017), 201쪽.
앞서 살펴본 『손자병법』 전체의 흐름과 군형편의 내용을 토대 로 손자가 말하는 병법을 정형화해보면 가장 먼저 피아간의 승 부를 ‘유리함(利)’이라는 기준을 통해 아측의 유리함이 상대적으 로 우세할 경우 개전(開戰)을 결심하는 1단계 ‘계(計)’가 있을 것 이며, 앞서 판단을 통해 도출된 유리함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전 장에서의 용병술을 구상하고 군형을 편성하는 2단계 ‘형(形)’이 이어질 것이다. 다음은 앞의 두 단계를 거치며 만들어진 선승이후 구전의 태세를 실제 전장에서 거센 물살과 같이 발휘하는 3단계 ‘세(勢)’를 거치는데, 이때 반드시 적의 강점과 약점을 면밀히 파 악하여 취약한 부분에 압도적 기세를 집중하는 4단계 ‘허실(虛 實) 또는 피실격허(避實擊虛)’가 거의 동시에 병행되어야만 할 것 이다. 이와 같이 정형화된 4단계 손자의 용병술은 <표 2>와 같 이 표현할 수 있다.31) 각 단계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전쟁 개시 이후 실제 작전임무를 부여받은 전투지휘관이 가장 공을 들여야 하는 단계는 바로 2단 계 ‘형(形)’일 것이다. 장수의 뛰어난 용병술로 ‘선승이후구전’의 군형을 갖추지 못한다면, 세의 발휘와 피실격허는 요원(遙遠)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 분석의 틀: 전장의 선택(地)과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勝)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손자는 장수의 용맹성을 기반으로 하는 ‘용감(勇敢)한 승리’보다는 장수가 결정적 전투를 이미 시작 하기 전에 ‘전략적 묘수(妙手)’를 통해 이미 대국적인 차원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계략으로 교묘(巧妙)하게 승리하는 것을 상수(上手)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제4편 군형(軍形)은 ‘당연 한’ 승리를 위해 장수의 교묘한 용병술을 전개하기 위한 구상 과 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제5편 병세(兵勢)는 앞서 장수가 구상했던 용병술을 실제로 발휘하는 모습을 나타내 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2)
31) 위의 글, 200-201쪽.
32) 위의 글, 199-200쪽.
그렇다면 과연 ‘선전자(善戰者)’는 어떻게 선승이후구전을 달성 할 수 있는 승리의 군형을 만들어 나가는 것인가? 손자는 군형편의 마지막 구절을 통해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아래와 같이 제 시하고 있다. “전투를 벌일 전장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 용병술을 구상할 수 있고(地生度), 용병술이 구상되면 가용 병력의 총 규모 가 적정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度生量). 이어서 가용 병력 규모가 적정하다고 판단되면 전투 국면 요소요소에 투입 할 병력의 구체적 숫자를 계산할 수 있고(量生數), 각 요 소별 투입 병력의 수가 계산되면 피아간의 전투수행 과정 을 비교할 수 있다(數生稱). 마지막으로 피아간 전투수행 과정 비교 결과 확신이 선다면, 이를 바탕으로 승리할 수 있는 군형을 갖출 수 있다(稱生勝)…… 승리하는 장수의 싸움은 마치 터놓기 위해 천 길의 계곡(결정적 지점) 위에 가둬놓은 물(압도적 병력)과 같으니, 이를 형(形)이라 한다 (勝者之戰, 若決積水於千仞之谿者. 形也).”33)
33) 위의 글, 202쪽.
승리의 군형을 만드는 단계는 ‘전장의 선택(地)’을 시작으로, 그 이후 순차적으로 ‘전장에 따른 용병술의 구상(度)’, ‘용병술에 따른 가용병력의 충분성 판단(量)’, ‘총 가용 병력에 기반한 각 요소별 세부 투입 병력의 결정(數)’, ‘구상한 용병술과 병력의 규 모, 세부 배치에 따른 피아간의 세부적인 전투 수행 과정 사전 분석(稱)’, ‘피아간 전투 수행 과정 비교를 통해 확신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는 군형 형성(勝)’의 과정을 거쳐 손자가 군형편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선승이후구전’을 달성할 수 있는 것 이다. 이러한 선승이후구전의 과정을 <표 3>과 같이 간략히 나 타낼 수 있다.
<표 3> 선승이후구전의 군형 편성을 위한 전장의 선택과 병법의 다섯 단계
구 분 핵 심 의 미 지(地) 전 장 피아 상황, 지형, 보급 등을 고려하여 전장 결정 도(度) 용병술 전장에 도착한 후 실지형 및 적정 고려 용병술 결정 양(量) 가용병력 용병에 필요한 병력의 충분성 판단 수(數) 투입병력 지역별, 방어 및 공격 태세별, 단계별 투입병력 결정 칭(稱) 피아 비교 다양한 상황별로 피아 전투수행 과정 분석 승(勝) 승리의 군형 승리할 수 있는 군형으로 ‘선승이후구전’ 달성
* 출처 : 손무, 박창희 해설 (2017), 206쪽.
본 연구에서는 <표 3>에서 제시된 ‘선승이후구전의 군형 편성을 위 한 전장의 선택과 병법의 다섯 단계’를 분석의 틀로 1942년 6월 직접적인 미드웨이 해전 발발 이전의 미국해군과 일본제국해군의 미드웨이·알류샨 전역 구상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해군 과 일본제국해군을 미드웨이·알류산 전역에서 승리의 군형을 만들 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전개했는가?’라는 문제제기와 함께 그 분석 의 기준으로 앞서 설명한 『손자병법』 군형(軍形)편에서 제시된 선승 이후구전의 기반인 ‘전장의 선택(地)’과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 勝)’를 선정했다. 이를 통해 전장의 선택 측면에서 ‘1942년 당시의 미일 양국은 상대방은 어디에서 싸우고 싶을 것이며, 결국 양국은 어디에서 맞붙을 것인가?’라는 첫 번째 연구 질문과 병법의 다섯 단 계 차원에서 미일 양국이 각각 ‘어떤 용병술로 가용병력, 병력배치, 피아간 전투수행 과정 예상 비교를 통해 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 戰)을 달성해나갈 것인가’를 두 번째 연구 질문으로 선정했다. 그 결과 잠정 결론인 <표 4>의 하단에 명시한 바와 같으며, 세부적인 분석 결과는 제3장과 제4장에서 순차적으로 제시할 예정이다.
<표 4> 『손자병법』 군형(軍形)편을 통해 바라본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 대한 분석의 틀
문제제기 분석의 기준 연구질문 미국해군과 일본제국해군은 미드웨이·알류산 전역에서 승리의 군형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 ◎ 전장의 선택(地) ⇒ 상대방은 어디에서 싸우고 싶을 것이 며, 결국 피아는 어디에서 맞붙을 것 인가? ◎ 병법의 다섯 단계 (度量數稱勝) ⇒ 어떤 용병술로 가용병력, 병력배치, 피아간 전투 수행 과정 예상 비교를 통해 선승이후구전을 이뤄낼 것인가? ⟱ ※ 전장의 선택(地) ※ ① 일본제국: 내부적 요소로 인한 전장의 집중 달성 실패(미드웨이, 알류샨) ② 미국: 일본의 암호통신 해득, 역정보 작전을 통한 주전장 파악 성공(미드웨이) ※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勝) ※ ① 일본제국: 전장선택의 실패 → 전역 구상(度)과 전역별 투입 전력 규모(數) 실패, 형식적인 피아간 전투수행 과정 비교(稱)로 ‘선전이후구승(先戰以後求勝)’으로 귀결 ② 미국: 주전장 파악 성공 → 집중의 용병술(度, 數)을 통한 투입 양적(量) 열세 상쇄, ‘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의 가능성 증대
3. 전장의 선택(地): 왜 미드웨이섬과 알류샨 열도였나?
가. 일본제국해군의 전장 선택 과정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해군은 미국해군 태평양함대의 전진기 지인 진주만(Pearl Harbor, 珍珠灣)을 기습하는 것을 시작으로 태 평양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진주만 기습에서 예상치 못한 대성공을 거둔 일본제국해군은 이 기세를 몰아 불과 개전 5개월 만에 제국 육군과 함께 필리핀(Philippines), 말레이반도(Malay Peninsula),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Netherlands rule in East Indies, 현재의 인도네시아 일대)로의 원정작전을 거의 마무리하고, 프랑스령 인도 차이나(France rule in Indochina)와 버마(British rule in Burma, 현재의 미얀마)까지 진출하여 최초 목표한 제1단계 작전 목표를 달 성했다. 또한, 일본제국해군은 더 나아가 현재 오세아니아(Oceanaia) 일대의 비스마르크 제도(Bismarck Archipelago), 솔로몬 제도 (Solomon Islands), 뉴기니(New Guinea) 섬 북부 연안의 전략적 요충지도 점령했다. 이처럼 일본제국해군은 1941년 12월 7일 진주 만 기습 이후 광활한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 각지에 산개(散開)되어 있는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전력을 파죽지세(破竹 之勢)의 기세로 각개격파(各個擊破)했다.34)
34) 해군대학 편, 『세계해전사』(대전: 해군대학, 1998), 298쪽; 존 키건, 류한수 역, 『2차세계대전사』(서울: 청어람미디어, 2007), 385-402쪽.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제 국의 세력권 팽창을 도시(圖示)하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제국의 세력 팽창(1941년 12월 ~ 1942년 5월) :생략
* 출처 : Mark E. Stille, The Imperial Japanese Navy In the Pacific War (Oxford: Osprey Publishing, 2013), p. 30.
예상을 뛰어넘는 작전적 대성공으로 태평양전쟁의 압도적 주도권을 거머쥔 일본제국의 군부(軍部)는 이 주도권을 어떻게 활 용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본제국해군과 제국육 군의 수뇌부들은 1942년 1월부터 제1단계 작전의 성과를 바탕으 로 향후 제2단계 작전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에 대해 전략적 수준의 토의를 시작했다. 당시 일본제국해군과 제국육군의 고질적이고 뿌리 깊은 반목(反目)으로 인해 양측의 견해 차이가 매우 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해군 내부에서조차 의견의 분열이 매우 심했다. 당시 일본제국해군의 지휘부는 크게 군정 (軍政)과 군령(軍令)을 담당하는 두 기관의 장이 담당하고 있었 다. 제국해군의 군정을 담당하는 것은 해군성(海軍省)이었고, 이 조직의 대표는 해군대신(海軍大臣)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郎) 제독(提督)이었다. 제국해군의 작전지휘 등 군령(軍令)을 담당하 는 조직은 군령부(軍令部)였으며, 지휘관은 군령부총장(總長) 나 가노 오사미(永野修身) 제독이었다. 35) 상식적으로 해군 내에서 이견이 발생하게되면 해군의 양대 조직인 해군성과 군령부 간의 조율을 통해 일원화 된 결론을 도출하는 게 바람직한 과정이었 으나, 제국해군은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주 만 기습의 대성공 이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던 연합함 대 사령장관(聯合艦隊 司令長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제독의 존재 때문이었다. 36)
35) 대본영 해군부(Naval General Headquarters)는 1937년 설치되어 일본제국군 최고통수권자(日王)를 보좌하고 칙령을 받아 제국육군과 해군에 명령을 하달하는 대 본영에서 해군 관련 업무를 맡은 조직이며, 군령부(Naval General Staff)는 상설 조직으로 해군의 전시작전권(군령권)을 담당하는 조직이었다. 형식상 대본영 해군 부가 이 명령에 따라 작전을 입안하고 해상 지휘를 맡은 연함함대가 실제 작전을 수행하는 구조였으나, 사실상 군령부는 대본영 해군부와 동일한 조직이었다. 파셜 (2019), 674-675쪽.
36) 파셜 (2019), 65쪽.
이러한 일본제국해군 내부의 비상식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진 주만 기습 이전부터 만연했었다. 야마모토는 미국과의 전쟁은 ‘단기전(短期戰)’이 되어야 하며, 전쟁 초기 미국해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여 ‘속승(速勝)’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해군 과의 결전을 회피하고,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군하여 자원을 획득해봤자,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중심인 강력한 해군력이 태 평양에 버티고 있는 한 동남아에서의 승리는 무용지물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군령부총장 나가노를 비롯한 대본영 해군부의 지도부는 이러한 야마모토의 급진적 견해에 반대했다. 나가노와 군령부 참모진는 일본이 미국을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타국의 이익을 위해 곧바로 전쟁에 나서기란 매우 힘들 것이라 고 예상했다. 나가노는 미국의 정치지도부가 일본이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국과 네덜란드 등의 서구열강이 가진 식민지를 공격한 것을 ‘개전 사유(casus belli)’로 삼아 고립주의(isolationism)적 성향이 강했던 당시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 라고 본 것이다. 37)
37) 위의 글, 67쪽.
<표 5> 일본제국해군 내 주요 의사결정자와 제2단계 구상에 대한 견해
( 군령부 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 미국 함대에 대한 직접 공격 반대, 미-호 간 해상교통로 차단을 위한
남태평양 방면(피지사모아)으로의 진격, 장기전 대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국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 일대로 진격 후 양국 항공모함 주력함대 간 함대결전으로 미국해군 격멸, 속승(速勝) 달성
그러나 미국해군의 주력에 대한 직접적이고 신속한 공격을 주 장한 야마모토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본인을 비롯 한 연합함대 주요 직위자와 참모진이 모두 ‘사임(辭任)’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나가노를 비롯한 군령부 참모진을 압박했다. 38) 심지어 야마모토는 일본제국군 최고통수권자(日王)의 면전에서 시마다 해군대신과 나가노 군령부총장에게 “너무 깊이 간섭하여 해군에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도록 해달라”라는, 도를 넘어선 발 언까지 이어갔다.39) 시마다와 나가노 모두 이러한 야마모토의 급진적이고 강경한 태도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진주만 기습 은 모두의 예상을 넘어선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제국해군의 비상식적인 의사결정과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드웨이와 알류산 전역 구상에서 그 한계점을 노 정(露呈)하고 만다. 진주만 기습의 성공과 그와 함께 병행했던 동남아시아, 오세 아니아 지역 전반에서의 원정작전 성공 이후 일본제국해군은 향 후 전략적 선택의 방향을 크게 세 가지로 검토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공세적 작전 수행에서 함대 및 항공전력 재정비 위주의 수세적 작전으로의 전환이었다. 이는 작전적 정지를 통해 일본 제국이 차지한 수많은 지역의 방어선 외곽을 강화하여 미국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제국 군부는 계속되는 성공에 취해 이러한 소극적인 전략이 수용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40)
38) Gordon W. Prange, Donald Goldstein, and Katherine Dillon, Miracle at Midway (New York: McGraw-Hill, 1982), p. 285; Matome Ugaki, translated by Masataka Chihaya, Donald Goldstein, and Katherine V. Dillon,, Fading Victory: The Diary of Admiral Matome Ugaki, 1941-45 (Annapolis: U.S. Naval Institute Press, 2008), p. 13; 파셜 (2019), 67쪽. 39) Ugaki (2008), p. 36.
40) Prange, (1982), p. 29; Hedley P. Willmott, Empires in the Balance: Japanese and Allied Pacific Strategies to April 1942 (Annapolis: U.S. Naval Institute Press, 1982), p. 39.
두 번째, 오스트레일리아(濠州) 본토를 직접 침공하거나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 해상교통로를 차단하는 남 태평양 방향으로의 진격이었다. 이는 군령부 제1부 부장 후쿠도 메시게루(福留繁)를 필두로 주로 군령부의 참모들이 지지한 작 전이었으나, 지상군 병력 지원에 제국육군이 난색(難色)을 표하 면서, 대안으로 남서태평양 방면의 ‘피지(Fiji)-사모아(Samoa) 작전(FS)’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41)
마지막 세 번째, 연 합함대의 작전중점은 미국해군의 본거지인 중부 태평양 방면으 로의 기습적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연합함대 예하 제5함대 사령장관 호소가야 보시로(細萱戊子郎)가 처음 제시했으 며,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주요 참모들의 적극적인 지 지를 받았다. 야마모토는 미국 함대의 주력인 항공모함이 여전 히 건재한 이상 그들의 모항(母港)이 있는 진주만 방면으로 진출 하여, 하와이를 점령하거나, 주력 함대를 궤멸시키는 것이 전쟁 승리의 핵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마모토는 미국 해군의 주력인 항공모함을 모두 유인해내어 ‘항공모함 함대결전’ 을 펼쳐 일거에 격멸할 수 있는 진주만 인근으로 공세의 방향을 정했으며, 그가 선택한 목표는 바로 하와이에서 서쪽으로 약 1,300해리(약 2,400km)에 위치한 미드웨이였다. 42)
41) 파셜 (2019), 71-72쪽; Willmott, Empires in the Balance (1982), p. 43; John Lundstrom, The First South Pacific Campaign: Pacific Fleet Statregy/ December 1941-June 1942 (Annapolis: U.S. Naval Institute Press, 1976), p. 41.
42) 파셜 (2019), 73쪽; 77-79쪽; Willmott (1982), p. 43; John Stephan, Hawaii under the Rising Sun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4), p. 82.
앞서 살펴봤듯이 당시 대본영 해군부(군령부)의 후쿠도메 제1 부장과 제1부 제1과장 도미오카 사다토시(富岡定俊) 대좌(大佐)는 남태평양 방면의 피지-사모아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실제 작전 현장에서 함대 전력을 지휘하는 연함함대의 야마모토와 그 참모진은 중부 태평양 방면의 전략적 선택지를 추구했고 이들의 의견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대본영 해군부와 연합함대 간 첨예한 대립 속에 양측은 1942년 4월 도쿄(東京) 해군 군령부 작 전실에서 양측 참모 간 회의가 열렸다. 대본영 해군부 측에서는 더 이상 연합함대에 전략적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작정하고 중부 태평양 진출 방안, 즉 미드웨이 공격계획을 논리 정연하게 강력히 비판(批判)했다.43) 대본영 해군부의 강경한 논 조에 연합함대 대표 와타나베 야스지(渡邊安次) 중좌는 연합함대 의 미드웨이 공격계획에 대한 당위성을 막무가내로 주장하였고, 양측은 더 이상의 논리적인 토론 진행이 불가한 상황까지 이르 렀다. 결국 와타나베는 연함함대 기함(旗艦) 야마토(大和)에 연락을 해 야마모토 사령장관의 도움을 요청한다. 44) 야마모토는 군령부 참모진의 비판에 대해서 “미국과 호주의 해상교통로를 차단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미국해군의 주력 인 항공모함을 격멸하는 것이며, 만약 미국이 미드웨이 공격이 라는 미끼를 물지 않아 항공모함을 투입하지 않는다면 손쉬운 승리를 통해 미드웨이를 점령해 중부 태평양 방면의 방어선을 미국의 모항인 진주만 측으로 더 가까이 확장할 수 있을 것이 다”라고 답변하며, 미드웨이 작전계획에 있어 군령부에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45)
43) 군령부 참모진 중 미요 다쓰키치(三代長吉) 중좌(中佐)가 발언을 했으며, 그가 미드웨이 공격에 대한 연함함대의 계획을 반박한 사유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① 미드웨이의 위치는 육상 발진 항공전력의 엄호와 지원을 받기 힘들다는 점, ② 만약 미드웨이를 점령하더라도 지속해서 점령부대에 대한 보급 유지가 불가능 한 점, ③ 연합함대의 예상대로 미드웨이 공격이 미국해군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파셜 (2019), 80-82쪽.
44) Stephan (1984), p. 111.
45) Willmott Empires in the Balance (1982), p. 72.
또한 야마모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과거 진주만 기습 전과 마찬가지로 자 신과 연합함대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사령장관 직위를 사 임하겠다고 엄포성 발언을 쏟아냈다. 46) 이러한 야마모토의 상습적인 행태는 분명히 항명(抗命)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러나 당시 나가노 군령부 총장과 후쿠도메 군령부 제1부장 모두 군령부 참 모진의 논리적 반박을 옹호하기보다는 진주만 기습의 대성공과 연이은 연합함대의 승전으로 이미 전 국민적인 영웅이 되어버렸 던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겁박(劫迫)에 굴복하고 말았 다. 나가노는 1942년 4월 5일 연합함대에서 상신한 중부 태평양 방면으로의 차기 작전 구상을 승인했으며, 결국 일본제국해군의 제2단계 작전의 가장 첫 번째 전장은 미드웨이로 정해졌다.47) 하지만 야마모토와 연합함대는 ‘국민적 영웅’이라는 명성과 권 위에 기대어 미드웨이 작전을 승인은 받았지만, 반대급부로 군 령부는 미드웨이 작전 승인을 조건부로 추가적인 작전 소요를 하달했다. 첫 번째는 6월 미드웨이 공격작전 시 알류샨 열도 공 격도 함께 포함하여 추진하라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6월 초 미드웨이 공략 이전에 미국과 호주의 해상교통로 차단과 연관된 남서태평양 방면의 공세를 제한적 범위 내에서 지원하라는 것이 었다. 한 역사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졸렬한 방법’으로 원하는 바를 얻어낸 야마모토로서는 이와 같은 대본영 해군부의 지시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48)
46) Fuchida (1955), p. 65; Hiroyuki Agawa, translated by John Bester, The Reluctant Admiral: Yamamoto and the Imperial Navy (Tokyo: Kodansha International, 2000), p. 297.
47) Stephan (1984), p. 112; Ugaki (2008), p. 109.
48) Robert E. Barde, “The Battle of Midway: A Study in Command,” (Ph.D. Thesis, University of Maryland, 1971), p. 34. 알류샨 열도 공격은 일본 본토 북부의 홋카이도(北海道) 섬이나 혼슈(本州) 섬 북부 지방에 대해 미국이 알류산 열도를 기반으로 해·공군을 이용해 공격을 펼치는 것을 막으려는 대안으로 대본영 육군부나 해군부 일부 참모들이 주장했다. 미드웨이 섬과 알류산 열도를 동시에 공격한다는 방안은 4월 16일 ‘대해지(大海指) 85호’를 통해 시달되었다. 이로 부터 이틀 후인 4월 18일 미국이 둘리틀 공습(Doolittle Raid)을 통해 일본 주요 도시를 직접 공격하면서, 알류산 열도 공격의 중요성을 두고 논쟁을 벌이기 어려 운 국내 정치적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Japanese Monograph No. 88, “Aleutian Naval Operations, March 1942-February 1943,” (Washington, D.C.: Departmet of Army 1947), pp. 6-7. https://pacificwarar chive.wordpress.com/2019/01/27/japanese-monographs/ (접속날짜 2022년 6월 8일).
이와 같이 비상식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도출된 미드웨이·알류산 전역은 그 작전적 범위가 매우 넓었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전역의 작전구역은 그 면적이 거의 1,040만㎢에 달했으며, 중국이나 캐나다 전체 국토 면적과 맞먹는 크기였다. 49)
49) 파셜 (2019), 84쪽.
<그림 2> 미드웨이섬과 알류샨 열도 전역 수행을 위한 작전구역과 태평양전쟁의 전략적 상황 :생략
* 출처 : 파셜 (2019), 62-63쪽.
일본제국해군은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강력한 의지 아래 기습적인 중부 태평양 공격을 통해 미국해군의 주력 항공 모함 함대를 유인해내어 격멸하기 위한 미드웨이를 선택했으며, 이와 더불어 일본 본토 북부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공격을 예 방하기 위해 알류샨 열도 공격을 동시에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 했다. 제1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서구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결정을 두고 알류샨 작전이 미드웨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양동(陽動) 작전의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종전 후 일본제국해군 출신의 장교들이 미국 극동군 사령부 주도로 작성한 ‘전사(戰 史)연구’ 자료를 보면 미드웨이와 알류샨 작전이 서로를 지원하는 목적의 작전이 아니라 각기 별개의 목적을 갖고 전개된 작전 임을 알 수 있다. 미드웨이 작전이 미국해군의 주력 항공모함을 유인하여 궤멸하려는 궁극적 목적을 지닌 작전이라면, 알류샨 작전은 미국해군의 전력 공백을 틈타 본토 방어의 외연을 좀 더 확장하려는 별개의 목적을 지닌 작전이었다. 50)
50) 위의 글, 92-94쪽; Japanese Monograph No. 88 (1947), p. 7; Japanese Monograph No. 93, “Midway Operations, May-June 1942,” (Washington, D.C.: Departmet of Army 1947), p. 4. https://pacificwararchive.wordpress.com/2019/0 1/27/japanese-monographs/. (접속날짜 2022년 6월 8일).
이처럼 일본제국 해군의 방대한 전장 선택은 결정적 시점과 장소에 전력을 집중 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일본제국해군에게 있어 미드웨이 해전이 ‘선전이후구승(先戰以後求勝)’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나. 미국해군의 전장 간파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해군 연합함대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해군은 많은 전력 손실과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일본제국해군의 야마모토 연 합함대 사령장관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해군은 전의(戰意)를 상실 한 게 아니라 더욱 불태우고 있었다. 이러한 대다수 미국해군의 의지를 한 곳으로 모아줄 구심점이 필요했고, 프랭클린 D. 루스 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그 적임자가 바로 니미 츠(Chester W. Nimitz) 제독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참모총장(Chief of Naval Operations) 스타크 (Harold S. Stark) 제독과 미국함대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 of the United States Fleet) 킹(Ernest J. King) 제독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니미츠를 미국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 (Commander in chief of the United States Pacific Fleet) 에 임명했다. 51)
51) 브레이턴 해리스, 김홍래 역, 『니미츠: 별들을 이끈 최고의 리더』 (서울: 플래닛미 디어, 2012), 201쪽.
니미츠는 미국해군 장병들의 전의를 어떻게든 고취해야 했으므로 진주만 기습 직후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취 임 직후부터 공세적 함대 작전을 구상한다.
그의 지휘 아래 미국해군 태평양함대는 항공모함 탑재 함재기를 이용하여 1942년 2월에는 길버트 제도(Gilbert Islands), 한 달 후인 3월에는 마 셜 제도(Marshall Islands)의 일본제국군 기지를 공습했으며 뉴기니섬 주변을 지나는 일본제국군 수송선단(輸送船團)을 집중적 으로 공격했다.
이어서 1942년 4월 18일에는 미국육군 항공대 제임스 H. 둘리틀(James H. Doolittle) 대령이 이끄는 B-25 폭격기 16대를 항공모함 호넷함(USS Hornet, CV-8)에서 발진시켜 일본 본토의 주요 도시를 공습했다. 일명 ‘둘리틀 특공대’ 에 의한 미국육군과 해군의 합동 공격은 비록 일본에게 큰 물리 적 피해를 안기지는 못했지만, 일본 수뇌부에게 본토 역시 절대적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시켜줬으며, 미국 국민과 군인들의 마음속에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 신감을 심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52) 하지만 둘리틀 공습 이후 일본제국의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았 다. 니미츠는 취임 직후 가장 처음 태평양함대의 정보 기능 정 상화에 힘썼다. 니미츠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 속에 태평양함 대사령부 정보참모 레이튼(Edwin T. Layton)과 무선 감청(監 聽) 중심의 미국해군 전투정보반(Station Hypo) 책임자 로슈포 르(Joseph J. Rochefort)는 일본제국해군의 암호화된 통신 첩 보를 하나하나씩 해독해냈다. 그러던 도중 로슈포르의 전투정보 반은 일본제국해군의 정규항모 2척과 경항모 1척을 포함한 함대 와 수송선단이 뉴기니섬 동쪽의 산호해(Coral Sea)로 향하고 있 다는 것을 파악했으며, 니미츠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정규항모 요 크타운함(USS Yorktown, CV-5)과 렉싱턴함(USS Lexington, CV-2)을 주축으로 하는 함대를 산호해로 파견했다. 결과적으로 미국해군은 정규항모 렉싱턴함이 침몰했고, 요크타운함 역시 큰 손상을 입었고, 반면에 일본제국해군은 경항모 1척(쇼호함, 祥 鳳)만이 침몰했고, 정규항모 쇼카쿠함(翔鶴)이 중파(中破)되어 무 력화되다. 일본제국해군의 또 다른 정규항모 즈이카쿠함(瑞鶴)은 선체 자체에는 경미한 손상만 입었으나 함재기(艦載機) 피해가 커서 당분간 작전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전술적으로는 미국해군의 패배였지만, 차후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으로 이어지 는 흐름에서 보면 미국해군의 전략적 승리였던 것이다. 전투정 보반의 적시적인 정보지원이 효과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53)
52) 폴 콜리어, 알라스테어 핀란, 마크 J. 그로브, 필립 D. 그로브, 러셀 A. 하트, 스티 븐 A. 하트, 로빈 하버스, 데이비드 호너, 제프리 주크스, 강민수 역, 『제2차 세계 대전: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 (서울: 플래닛미디어, 2008), 482-483쪽.
53) 해리스 (2012), 221-223쪽; 파셜 (2019), 121쪽.
<그림 3> 산호해 해전의 경과 :생략
* 출처 : USACMH (1994), p. 48.
산호해 해전을 거치면서 태평양함대의 정보 기능에 대한 니미 츠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므로 레이튼과 로슈포르, 그 리고 전투정보반은 한층 더 높아진 니미츠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산호해 이후 일본제국해군 연합함대의 주 작전목표가 어딘지 간파해내야만 했다. 사실 전투정보반은 1942년 3월 이후 미드웨이와 관련된 일본제국해군의 통신 첩보가 증가한 것을 토 대로 미드웨이가 다음 작전의 방향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 다. 그러나 이런 정황 증거만으로 니미츠를 넘어 워싱턴의 미국 해군 수뇌부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니미츠와 레이튼, 그 리고 로슈포르는 일본제국해군의 다음 작전 목표가 미드웨이라 는 것을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필요했다. 이때, 로슈포르와 전투정보반은 기발한 ‘역정보(逆情報)’ 작전 254 |軍史 第125號(2022. 12.) 을 구상한다. 1942년 5월 19일, 전투정보반은 미드웨이 주둔 통신대에 해저케이블을 이용한 유선 통신을 통해 ‘미드웨이의 해 수 담수화 시설이 고장났다’는 전문 내용을 평문 무선통신으로 진주만에 타전하라는 지시를 했다. 미드웨이 주둔 중인 통신대 는 이 지시를 그대로 이행했고, 하루가 지난 5월 20일 전투정보 반은 일본제국해군의 통신첩보를 감청한 결과 ‘미드웨이(AF) 공 격대에 급수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라는 내용을 해득(解得)해낸 다.54)
54) Edwin T. Layton, Roger Pineau, John Costello, And I Was There (New York: William Morrow, 1985), pp. 421-422.
니미츠와 미국해군 태평양함대는 이제 일본제국해군의 다 음번 주 작전목표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명확히 확증할 수 있었 다. 이로써 야마모토가 추구했던 중부 태평양으로의 기습적 공 격은 무위로 돌아갔으며, ‘기습’이 빠진 순수한 미일(美日)해군 양측의 항공모함 주력 함대 간 결전으로 전투의 성격이 전환된 것이다.
4.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勝): 선전이후구승과 선승이후구전
가. 도(度)와 양(量): 미드웨이·알류샨 전역 구상과 미일 양측의 총 가용전력
1942년 4월 16일 나가노 군령부총장의 일왕 알현 및 미드웨 이·알류샨 공격작전 기본계획 보고 이후 일본제국해군 대본영 해군부는 이제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그 참모진에게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의 세부적인 구상을 일임했다. 야마모토와 참모진은 ‘N일(도쿄 기준 1942년 6월 7일, 미드웨이 기준 6월 6일)’을 목표로 바로 이날 미드웨이섬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연 합함대의 실제적인 공격은 N-3일(도쿄 기준 6월 4일, 미드웨이 기준 6월 3일)에 개시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알류샨 열도의 미국해군 기지인 더치하버(Dutch Harbor)와 미드웨이에 대한 폭격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55) 이 전역의 두 작전 중 먼저 알류샨 작전에 대해서 살펴보면, 알류샨 작전의 목적은 미국 태평양함대의 전력 공백을 틈타 알 류샨 열도 서부의 전략적 중요거점을 점령 또는 무력화하여 이 일대에서 미국의 해상 및 공중 군사 활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일본제국해군은 더 나아가 점령한 알류샨 열도의 거점을 통해 항공, 해상초계 활동을 전개하여 바렌츠해(Barents Sea)를 통한 해상교통로와 베링해협(Bering Strait)을 봉쇄하여 북태평양에서 의 미국-소련 간 작전적 연대를 저지하려고 했다. 56) 이러한 작 전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알류샨 작전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 되었는데, 첫째, 당면한 상륙 목표 달성 시점까지 목표에 대한 초기 접근과 작전을 1942년 6월 8일까지 포괄적으로 수행하고, 둘째, 해당 지역 점유를 공고화(안정화)하는 작전과 관련된 국면 으로 적(미국군)의 반격 위협이 없어질 때까지 지속하여, 셋째, 점유 안정화 이후 1942년 6월 20일경 북방지역 방어를 위한 함 대를 재배치하는 것이 각 단계별 목표였다. 57)
55) 防衛廳防衛硏究所戰史室, 『戦史叢書 第43卷: ミッドウェー海戦』(東京: 朝雲新聞社, 1971), p. 117; 파셜 (2019), 93쪽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였음.
56) Japanese Monograph No. 88 (1947), p. 3; 9.
57) Ibid., p. 16; 32.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알류샨 작전 1단계는 1942년 6월 4일(도쿄 기준) 개시되어, 곧 바로 더치하버를 공격해 주둔 중인 미국육군과 해군전력을 무력화하고, 이후 6월 6일 에는 전략적 거점인 키스카섬(Kiska)과 에이댁섬(Adak)에 상륙 할 예정이었다. 이후 필요시 열도 최서단의 에투섬(Attu)에도 6월 12일 상륙할 예정이었다. 58) 미국의 군사력이 와해된 2단계 에 돌입하면 애투-에이댁, 키스카 공략부대를 해산하고 함정들 은 북방부대(北方部隊) 본대(제5함대) 호소가야 예하로 재배비(再 排比)할 예정이었다. 2단계 작전에서 어느정도 점령 거점의 안정 화가 이뤄지면 알류샨 작전은 점령한 거점을 장기방어하기 위한 3단계 작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59) 다음은 미드웨이 작전에 대한 연합함대의 작전 구상이다. 미 드웨이 작전은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서 연합함대가 최초부터 추구했던 궁극적 목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야마모토는 미국해군의 모항 인근에 있는 중부 태평양 방면의 미드웨이를 기습적으로 공격한다면 진주만 기습 이후 전력과 사 기 모두 약화된 미국해군은 반드시 연합함대가 던진 미끼(미드웨 이 공격)를 물어 진주만을 박차고 나오리라 예상했다. 60)
58) 파셜 (2019), 95쪽.
59) 위의 글, 96-97쪽.
60) 防衛廳防衛硏究所戰史室 (1971), p. 186; 파셜 (2019), 100쪽에서 인용한 것을 재 인용하였음.
이를 위해 야마모토와 연합함대 참모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이 예상치 못한 기습을 가하는 것이었다. 미국해군이 진주만 기습 이후 지난 6개월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매(愚昧)’한 미국해군 태평양함대는 ‘당연히’ 일본제국해군의 의도와 기습을 사전에 간파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정(假定)했고, 이를 변수(變數)가 아닌 상수(常數)로 보고 작전을 구상했다. 미드웨이 작전의 세부 작전계획은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N-3일(미드웨이 기준 6월 3일)에 주력인 항공함대가 전투함대의 호위 아래 미드웨이 북서쪽으로 접근, 당일 아침에 미드웨이 지상공격을 위한 공격대가 발진하여, 미드웨이 섬에 배치된 미군 방어 세력과 비행장, 항공기를 기습공격으로 일격에 완파한다.
둘째, N-2일(미드웨이 기준 6월 4일)에는 미 드웨이섬 상륙작전 지원을 위해 미군 해안방어시설 무력화에 초 점을 둔 추가 공습을 실시한다.
셋째, N-1일(미드웨이 기준 6월 5일)에는 사이판에서 출항한 상륙군 부대가 미드웨이 서방 60해 리(약 110㎞)에 있는 쿠레섬(Kure)에 상륙하고, 점령한 쿠레섬을 미드웨이 작전을 지원하는 전진기지로 활용한다.
넷째, N일(미 드웨이 기준 6월 6일) 당일 제국육군과 해군 합동부대가 미드웨 공격하여 육군이 이스턴섬(Eastern)에 해군 육전대(陸戰隊) 가 샌드섬(Sand)에 상륙하여 미드웨이를 완전히 점령한다.
다섯 째, 미드웨이 공격이 완료된 이후 미국해군의 항공모함 주력 함대가 미드웨이 근해에 나타날 것이며, 연합함대의 주력인 항공 함대와 본대는 미드웨이 서방에 재배치하여 이들을 맞아 궤멸한 다. 이때, 야마모토와 참모진은 일본제국해군의 기습에 놀란 미 국해군의 항공모함 주력 함대는 N-3일에서야 상황을 인지하고 진주만에서 출항하여 N일 미드웨이 상륙 및 점령이 끝날 때까지 미국해군의 항공모함이 미드웨이에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예측 했다.61)
61) 파셜 (2019), 98-102쪽.
<표 6> 미드웨이·알류산 전역 당시 일본제국해군의 총 가용전력(量)
<미드웨이 작전>
항모 경항모 공격 폭격기 정찰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지원함 잠수함
1항공함대 4 0 248 14 2 3 12 8 0
연합함대 본대 0 1 8 0 3 1 10 5 0
경계부대(1함대) 0 0 0 0 4 2 11 2 0
공략부대(2함대) 0 1 24 0 2 5 9 5 0
공략지원대(7전대) 0 0 0 0 0 4 2 1 0
선단부대/호위대 0 0 0 0 0 1 10 24 0
항공대((11항공전대) 0 0 0 12 0 0 1 3 0
선견부대(제6함대) 0 0 0 0 0 1 0 2 18
태평양 도서기지항공대 0 0 168 26 0 0 0 0 0
소 계 4 2 448 52 11 17 55 50 18
< 알류샨 작전 >
항모 경항모 공격/ 폭격기 정찰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지원함 잠수함
제2기동부대(4항공전대) 1 1 63 0 0 2 3 1 0
북방부대 본대(제5함대) 0 0 0 0 0 1 2 5 0
애투-에이댁 공략부대 0 0 0 0 0 1 3 2 0
키스카 공략부대 0 0 0 0 0 4 3 3 0
잠수부대(제1잠수전대) 0 0 0 0 0 0 0 0 5
수상기부대 0 0 0 8 0 0 1 1 0
초계부대(22전대) 0 0 0 0 0 1 0 0 0
소 계 1 1 63 8 0 9 12 12 5
총 계 5 3 511 60 11 26 67 62 23
* 출처 : 해군대학 편 (1998), 301쪽; 파셜 (2019), 656-672쪽의 내용을 필자가 표로 정리함.
야마모토는 최초에 미드웨이를 전장으로 선택했을 때 이 작전 의 궁극적 목표는 미드웨이 공격이라는 ‘미끼’로 미국 항공모함 을 유인해내어 일거에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드웨이 작전은 마치 지난 6개월 간 일본제국해군이 수행해왔던 기습적 ‘선승이후구전’을 통한 미드웨이·알류샨 전역계획 재조명 | 259 인 공격과 같이 최초 구상되었고, 결국에는 상륙 점령이 작전 수행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버린 앞뒤가 맞지 않고, 경중(輕 重)이 고려되지 않은 비논리적인 작전계획이 되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해군의 대응을 너무나도 단편적인 경험에 따라 단정(斷定)해버린 것은 결정적인 패배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미 드웨이와 알류샨 양 작전이 포함된 전역을 구상하는 단계에서부 터 이미 일본제국해군은 ‘승리의 군형’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지고 만 것이다. <표 6>은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 투입되었던 일본제국해군 의 총 가용전력(量)이다.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는 일본제국해 군의 거의 모든
함정이 투입되었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전력은 야마모토 사령장관을 포함한 28명의 제독들의 지휘를 받고 있었 다. 이는 연합함대, 더 나아가 일본제국해군의 명운(命運)을 건 전역(戰役)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해군은 광활한 전장에서 두 가지의 연관성 낮은 작전을 전개 하고 말았다.
일본제국해군의 미드웨이·알류샨 전역 구상은 광 활한 작전구역의 크기만큼 알류샨과 미드웨이 작전 간의 연계성 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서구의 학자들과 신빙 성 높은 정보를 획득한 미국해군의 수뇌부는 알류샨과 미드웨이 작전을 동시에 구상한 일본제국해군의 수뇌부의 저의(底意)를 ‘알류샨 작전이 미드웨이 작전의 양동작전일 것이다’라고 추론했 지만, 전후 일본 학계의 분석에 비춰볼 땐 이는 결국 합당치 않 은 추론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연합함대의 지도부는 애초 부터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전장 선택에서 출발하여, 상대방 의 대응에 대한 가정을 상수(常數)로 여겨 결국 승리의 군형으로 이르는 전역 구상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전역 구 상의 실패는 총 가용전력의 우세를 극대화하지 못하는 용병술의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일본제국해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장의 선택(地)’과 ‘전역 및 작전 구상(度)’의 실패로 인 해 ‘총 가용전력(量)’에서의 상대적 우세를 조금씩 잠식(蠶食)당 하고 있었다. 야마모토와 연합함대 참모진이 성공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미드웨이·알류샨 전역 구상을 이어나갈 때 미국해군 태평양함 대 총사령관 니미츠는 일본제국해군의 다음 목표가 미드웨이인 것을 레이튼, 로슈포르 주도의 전투정보반을 통해 어느정도 짐 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다음 목표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미츠에게는 다른 고민이 있었 다. 워싱턴의 해군지휘부가 이러한 태평양함대의 정보 판단을 신뢰하지 않고, 일본제국이 남태평양 방면으로 진출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니미츠의 상관인 미국함대 총사령관 킹은 산호해 해전에서 정규항모 렉싱턴함이 침몰되고 요크 타운함이 크게 손상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태평양함대의 나머지 정규항모 2척(엔터프라이즈함, 호넷함)을 남태평양 방면의 작전 에 투입할 것을 주장했다.62
62) Lundstrom (1976), p. 150; 152; Layton (1985), p. 412.
그러나 니미츠는 킹 총사령관이나 워싱턴의 정보 기능보다 자신의 전투정보반을 더 신뢰했고, 태 평양함대의 주력인 항공모함을 일단 진주만으로 복귀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니미츠는 남태평양에서 작전 중인 16기동함대 사령 관 홀시(William F. Halsey Jr.) 제독에게 친전(親展) 전보를 보내 의도적으로 함대전력, 특히 항공모함의 존재를 일본제국해 군에게 노출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제국해군의 정찰기는 이를 놓 치지 않고 포착했고, 미국 태평양함대의 주력 항공모함이 남태 평양 일대에서 활동 중이라고 대본영과 연합함대에 보고했다. 니미츠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던 미 태평양함대 전투정보반은 이 타전을 어김없이 감청했고, 니미츠는 항공모함 함대의 위치 노출을 핑계로 16기동함대의 엔터프라이즈함과 호넷함을 진주만 으로 소환할 수 있었다. 63) 이후 니미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드웨이 물 부족 전 문’을 통해 일본제국해군의 다음 작전목표를 정확히 특정해낼 수 있었다. 로슈포르의 전투정보반은 더 나아가 일본제국해군의 연 합함대가 항공모함 4~5척을 2개 항공전대로 구분하여 미드웨이 를 공격할 것으로 매우 구체적인 정보 판단까지 내놓았다.64) 하 지만 니미츠에게 가장 문제는 어디로, 무엇이 다가올지 알고 있 음에도 이에 맞설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어 렵사리 엔터프라이즈함과 호넷함은 미드웨이 작전에 투입할 수 있었지만 이 두 척의 항공모함으로만 일본제국해군의 정규항모 4~5척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65)
63) Lundstrom (1976), p. 154-155; 당시 서남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Supreme Commander of Allied Forces in the Southwest Pacific Area)이었던 맥아 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계속해서 남태평양 산호해 인근에서 작전 중인 것처럼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해 해군 항공모함과의 합동작 전 시 사용하는 무선통신을 계속 송신했다. 일본의 통신감청 및 정보분석사들은 이러한 기만통신의 진의를 간파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연합함대 수뇌부에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이 남태평양에서 작전 중인 것으로 보고했다. 해리스 (2012), 235쪽.
64) Hedley P. Willmott, The Barrier and Javelin: Japanese and Allied Pcific Strategies, February to June 1942 (Annapolis: U.S. Naval Institute Press, 1982), pp. 302-305; Prange, (1982), p. 104; Layton (1985), p. 409-425.
65) Commander in Chief, U.S. Pacific Fleet, “Operation Plan No. 29-42,” (May 27, 1942). pp. 3-4. http://www.midway42.org/Features/op-plan29-42.pdf (접속날짜 2022년 6월 9일).
요크타운함은 다행스럽게도 선 체와 연료탱크 부분에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력항해가 가능했으며, 1942년 5월 27일 진주만에 복귀했다. 야마모토의 의중을 어느정도 간파한 니미츠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일본의 강력한 항공함대와 맞설 수 있는 항공모함이었다. 니미츠는 갖 은 고생 끝에 입항한 요크타운함이 최단시간 내 전투임무수행이 가능할 정도로 수리가 되기를 원했다. 당시 진주만의 해군 정비 인력 대다수(약 1,400명)가 요크타운함 정비에 투입되었고, 철 야(徹夜) 작업도 불사했다. 그로부터 48시간 이후 비록 요크타 운함은 산호해 해전 이전과 같은 완벽한 상태로 정비되지는 못 했지만, 미드웨이로 항해하여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전혀 문제 없었다. 요크타운함은 니미츠가 원하는대로 5월 30일 오전 9시 17기동함대의 주력으로 복귀하여 미드웨이로 향했다. 66) 이러한 니미츠와 미국 태평양함대의 전투 준비는 일본제국해군이 산호 해 해전 이후 손상을 입은 정규항모 2척(즈이카쿠, 쇼카쿠)의 부재에 대한 그 어떤 후속대책 없이 작전에 돌입한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67)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드웨이를 선점하고 있는 작전적 이점을 최대화하기 위해 미드웨이에 육군, 해군, 해병대의 육상기지 전개 항공전력을 강화하고, 대공포와 방공호 를 대폭 보강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준비했다. 68)
66) 파셜 (2019), 161쪽.
67) 당시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1/2항공전대 소속 항공모함에서는 “첩의 자식(즈이 카쿠와 쇼카쿠를 칭함)도 이겼는데 우리 본처(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를 칭함)의 손에 걸리면 문제도 아닐 것”이라는 말이 파다했다. 일본 항공함대 내에서 상대적 으로 전투력이 낮다고 여겨졌던 5항공전대도 미국의 정규항모 2척과의 해전에서 이겼기 때문에, 1/2항공전대 전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오만함이 배어나온 말이라 고 볼 수 있다. Walter Lord, Incredible Victory (New York: Harper Collins, 1967), p. 32.
68) 파셜 (2019), 163-165쪽. ‘
<표 7> 미드웨이·알류산 전역 당시 미국해군의 총 가용전력(量)
미드웨이 작전
항모 경항모 공격/ 폭격기 정찰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지원함 잠수함
17기동함대(TF 17) 1 0 79 0 0 2 6 0 0
16기동함대(TF 16) 2 0 153 0 0 6 9 0 0
함대 급유대 0 0 0 0 0 0 2 2 0
미드웨이 급유대 0 0 0 0 0 0 2 1 0
잠수함대(TF 7) 0 0 0 0 0 0 0 0 20
미드웨이 해군/해병항공대 0 0 74 32 0 0 0 0 0
미드웨이 육군항공대 0 0 26 1 0 0 0 0 0
연안방어전력 0 0 0 12 0 0 1 18 0
소 계 3 0 332 45 0 8 20 21 20
알류샨 작전
항모 경항모 공격/ 폭격기 정찰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지원함 잠수함
8기동함대(TF 8) 0 0 0 0 0 5 10 0 0
소 계 0 0 0 0 0 5 10 0 0
총 계 3 0 332 45 0 13 30 21 20
* 출처 : 마크 힐리, 김홍래 역, 『미드웨이 1942: 세계사의 균형추를 움직인 사상 최대의 해전』(서울: 플래닛미디어, 2008), 53-54쪽; 파셜 (2019), 646-655쪽의 내용을 필자가 표로 정리함.
<표 7>은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 투입되었던 미국해군의 총 가용전력(量)이다.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에는 미국해군 태 평양함대의 거의 모든 전력이 투입되었다. <표 6>의 일본제국 해군 총 가용전력과 비교를 했을 때 가장 다른 점은 거의 대다 수 전력을 미드웨이 작전에 투입했다는 것이다. 실제 니미츠를 비롯한 미국의 수뇌부는 알류샨 열도에 대한 공격징후 역시 사전에 인지했지만, 그 중요도에 있어 미드웨이 작전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일본제국해군이 미드웨이 작 전과 동시에 알류샨 작전을 시행하며 애투 섬과 키스카 섬이 일 본에 의해 함락되었음을 보고받은 미국 해군성 장관 녹스(W. Franklin Knox)는 “일본은 현대전을 이해할 능력이 없거나 치 를 자격이 없다”라고 혹평(酷評)과 동시에 안도했다. 69)
69) Donald Goldstein, Katherine Dillon, The Pearl Harbor Papers (Dulles: Brassey’s, 1993), p. 325.
미국해군 은 일본제국해군의 ‘주전장(地)’을 간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금 이라도 더 유리한 작전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작전을 구상(度)했 으며, 이를 위해 정규항모 요크타운함을 기적적으로 복구하여 미드웨이 작전에 투입하고, 미드웨이섬 선점의 이점을 극대화하 기 위한 육상 전개 항공전력 보강과 대공포 및 방공호 견고화를 통해 총 가용전력(量)의 불리함을 극복해나갔다. 미국해군은 일 본제국해군보다 선승이후구전을 위한 승리의 군형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이다.
나. 수(數)와 칭(稱): 각 작전별 투입 전력 규모와 피아간 전투수행 과정 예상
위험한 가정을 전제로 시작한 일본제국해군의 미드웨이·알 류산 전역 구상은 ‘지역별, 방어 및 공격 태세별, 단계별 투입 병력을 결정’하는 수(數)의 측면에서도 많은 부족함을 드러냈 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알류샨 전역에 정규항모 1척과 경항모 1 척을 파견한 것이다. 그 결과 당시 항공모함 함대의 주 전투력 인 함상공격기와 함상폭격기를 무력 63대나 알류샨 작전에 투 입하게 된다. 알류샨 열도에 배치된 미국육군이나 해군 주둔부265 대의 능력이나 미국해군 태평양함대 전력의 배비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물론 당시 일 본제국해군이 미국 함대의 배치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알류샨 열도를 통한 미국의 공세적 위협 징후가 뚜렷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해군의 항공모함 함대와의 결전 을 목적으로 한 미드웨이 작전에 가용한 모든 항공모함과 함상 공격/폭격기를 투입하지 않은 점은 일본제국해군이 작전별 투입 해야 할 전력 규모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70)
70) 이에 대해 파셜은 전력배분의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연합함대 내부에 팽배했던 지 배적 의견의 영향의 중요성도 제시한다. 이 지배적 의견이란 미국해군은 진주만 기습 이후 계속 패했고,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어 이들을 결전장으로 유인해 내기 만 한다면 반드시 전멸시킬 수 있다는 다소 오만한 착각이었다. 야마모토 사령장 관은 더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겁먹은 미국 함대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을 속 이고, 기만하는 기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파셜 (2019), 105쪽.
일본제국해군은 당시 함대결전의 주력이었던 항공모함의 집 중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견(先見)부대 역할을 담당 한 잠수함 부대(제6함대)의 운용에도 실패했다. 6함대 소속 제 5잠수전대에 속한 구형 잠수함들은 작전임무 수행을 위한 정 비가 완료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잠수함 부대의 작전 수행 을 위한 전투준비태세는 미비했다. 결국 5잠수전대 소속의 잠 수함 다수가 정비 완료 후 임무수행을 위한 전력화에 너무 많 은 시간이 소모되어 최초 계획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 다. 그 결과 거의 대부분의 잠수함들은 진주만과 미드웨이 사 이에 있는 선견부대 작전구역에 계획상 목표일이었던 6월 1일 까지 도착하지 못했고, 심지어 일부 잠수함들은 미드웨이 해전 의 승패가 이미 결정된 6월 6일까지도 작전구역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제국해군의 잠수함들은 미국해군 주력 함 대에 대한 선견(先見) 임무와 정찰 및 감시를 적시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71) 항공모함 전력의 집중 실패, 잠수함의 선견부대 임무 실패보 다 더 중요한 일본제국해군의 문제는 바로 지나치게 복잡하고, 작전적 유연성이 없는 작전의 세부계획이었다. 어느 학자의 표 현을 빌리면 이 ‘쓸데없이 교묘하고 복잡한 작전’은 2차대전 개 전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제국해군의 치밀함과 주도면밀함을 드 러내는 상징과도 같았다. 실제 미드웨이와 알류샨 전역계획을 면면히 살펴보면 수많은 부대들이 광활한 해역에서 각기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지만, 실제 적국 함대의 주력을 파괴할 수 있 는 핵심은 나구모가 지휘하는 1항공함대의 전력 20여 척이 전부 였다. 앞서 <표 1>과 <표 2>를 살펴보고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일본제국해군의 수적 우위를 스스로 무력화하는 어리석은 ‘수 (數)’의 배분이 된 것이다. 72)
71) 위의 글, 165-166쪽. 72) 위의 글, 104쪽.
야마모토와 연합함대 참모진은 “승 리하는 군대는 적보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열세에 놓인 적을 상 대하는 것(勝兵, 若以鎰稱銖)”이야 말로 선승이후구전으로 가는 첩경(捷徑)이라는 손자의 금언(金言)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적보 다 열세인 병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상대(敗兵, 若以銖稱鎰)”하는 자충수(自充手)를 두고 만 것이다.
<그림 4> 미드웨이·알류산 전역 당시 일본제국해군과 미국해군의 작전 상황 :생략
* 출처 : Parshall (2022). https://www.usni.org/magazines/naval-history -magazine/2022/june/timeless-battle-evolving-interpretations (접속날짜 2022년 6월 7일).
수(數)의 단계에서 조차 승리의 군형에서 한 발 더 물러난 일 본제국해군은 피아간의 전투 양상을 미리 예상하는 ‘칭(稱)’의 단 계에서도 일본제국해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들의 도상연습(圖上練習, wargame)은 일반적으로 일본제국해군의 전 매특허인 정교한 작전계획 아래 계획대로 치밀하게 기동하는 일 본 함대가 비계획적이고 어설픈 미국 함대를 격파하는 전형적인 결말을 보여줬다.73)
73) David C. Evans, Mark R. Peattie,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1887-1941 (Annapolis: U.S. Naval Institute Press, 2012), pp. 273-298.
특히 미드웨이 작전에 앞서 시행된 도상연 습은 진주만 기습 직전의 철두철미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연합함대 참모진의 최선임 장교였던 우가키 참모장이 도상연습의 심판 역할을 하는 심판장을 맡은 것부터가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작전계획 자체가 졸속으로 작성되어 도 상연습 며칠 전에야 참가자들에게 배포되었고, 참가자들이 계획 을 충분히 숙지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1차 도상연습은 시작되었으나, 그 진행 과정에서도 우가키 참모 장의 대항군 운용 간섭 등의 공정하고 냉철한 도상연습을 방해 하는 사건들이 지속해서 발생했다. 결국 이 도상연습의 결과는 미드웨이·알류샨 전역 구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74) 미드웨이에서의 결전을 위한 출항 직전인 5월 25일에 마지막으 로 실시한 일본제국해군의 도상연습에서 역시 연합함대의 미드웨 이 작전계획의 근본적 결함이 드러났다. <그림 5>와 같이 대항군 이 미국의 항공모함이 진주만-미드웨이 축선 남쪽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고, 이로 인해 일본제국해군의 항공모함은 1척이 침몰하고 2척이 큰 손상을 입은 것이다.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 장관 역시 나구모를 비롯한 1항공함대 지휘관 및 참모들에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를 물어보았지만, “조종사들의 숙력 도가 낮은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함대가 예상치 못한 곳에도 나타 나더라도 충분히 대처 가능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 섞인 답변만 돌아왔다. 75)
74) 파셜 (2019), 117-118쪽.
75) 防衛廳防衛硏究所戰史室 (1971), pp. 117-118; 파셜 (2019), 126쪽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였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의 미드웨이 작전 계획은 그 어떤 수정·보완이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일본제국해 군은 ‘칭(稱)’에서도 승리의 군형으로 가기 위한 어떠한 계기도 마 련하지 못했다. <그림 5> 1942년 5월 25일 일본제국해군의 미드웨이 작전 마지막 도상연습도 * 출처: 防衛廳防衛硏究所戰史室 (1971), p. 117; 파셜 (2019), 127쪽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였음. 일본제국해군이 점차 ‘패배의 군형’으로 걸어들어가는 와중에 도 미국해군은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수한 정보 능력에 따라 미드웨이로 태평양함대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뿐만 아 니라 니미츠 사령관의 미드웨이 작전 수행을 위한 함대 배치는 매우 훌륭했다. 플레처(Frank J. Fletcher) 제독과 스프루언스 (Raymond A. Spruance) 제독이 지휘하는 제17기동함대와 제 16기동함대를 미드웨이 북동쪽으로 360해리(약 670㎞) 떨어진 구역에서 상봉하여, 일본제국해군의 주력 항공함대의 측면 기습 을 노리고 있었다. 또한, 미드웨이 근해로 접근하는 일본 연합함 대의 동태를 감시하고, 고가치 표적을 공격하기 위한 잠수함 12척이 미드웨이 주변 해역에 전개되어 초계 임무를 수행 중이 었다.76) 실제 초계 임무에 참가했던 미국해군의 잠수함 노틸러스함 (USS Nautilus, SS-168)은 일본제국해군 연합함대 제1항공함 대의 한복판에서 대잠수함 작전 수행을 강요했고, 항공함대의 기동을 방해했다. 당시 제1항공함대 호위대 소속 아라시함(嵐)은 노틸러스함을 함대 외곽으로 구축(驅逐)하기 위해 고속기동하 다량의 폭뢰공격을 실시했다. 1942년 6월 4일 오전 9시 40분, 노틸러스함을 1항공함대 외곽으로 구축하는 데 성공한 아라시함 은 함대로 복귀를 시작했고, 15분 후인 9시 55분경 미국해군 제 16기동부대 엔터프라이즈함에서 출격한 매클러스키(C. Wade McClusky, Jr.) 비행대가 아라시함의 항적을 쫓아 10시 2분경 제1항공함대의 정규항모를 발견을 함대로 보고한다. 77)
76) 해군대학 편 (1998), 305-306쪽; 파셜 (2019), 164쪽.
77) 파셜 (2019), 312; 323쪽.
이는 일 본제국해군 항공모함 3척이 거의 동시에 격침되는 ‘운명의 5분’ 으로 이어지는 도화선(導火線)이 된다. 이처럼 일본제국해군의 선견부대가 미드웨이 작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에 비 해 노틸러스함을 비롯한 미국해군의 잠수함 부대는 적시 적소에 배치되어 미드웨이 작전의 전승(戰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물리적,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미국해군 역시 체계적인 도상연습(稱)을 시행하지는 못했지만, 상대방의 전장을 정확히 간파(地)한 이후, 이에 부합하는 효율적인 작전 구상(度)과 총 가용병력(量) 보충을 위한 각고의 노력, 적시 적소에 전력을 집중적으로 배치(數)한 것들이 종합되어 결국 전력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의 군형’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제3장과 제4장을 통해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 보면 <표 8>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 8> 전장의 선택과 병법의 다섯 단계를 통해 바라본 미드웨이·알류샨 전역 구 분
일본제국해군 비교 미국해군 지 (地) 비상식적인 의사결정과정에 따른 지나치게 광활한 전장 선택 < 정확한 정보 판단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핵심목표 전장 파악 도 (度) 최초 작전목표와 불일치하는 복잡하고 방대한 작전계획 구상 < 미드웨이 중심의 집중적 작전계획 구상 양 (量) 총 가용전력의 우세, But 절대적 양적우세 유지 노력 미흡 ≧ 총 가용전력의 열세, But 양적 열세 상쇄 노력 지속 수 (數) 복잡하고 방대한 작전계획에 따른 ‘약이수칭일(若以銖稱鎰)’ 직면 < 집중적 작전계획 구상을 토대로 ‘약이일칭수(若以鎰稱銖)’ 달성 칭 (稱) 형식적인 도상연습 실시로 작전계획의 근본적 문제 해결 불가 = 물리적,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충분한 도상연습 실시 불가 결 론 패병, 선전이후구승 (敗兵, 先戰以後求勝) ≦ 승병, 선승이후구전 (勝兵, 先勝以後求戰)
5. 결 론
영국의 저명한 전쟁사학자 키건(John Keegan)은 인류의 역 사와 함께해 온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투에서 ‘전략적, 전술적, 물질적, 기술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 수행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유일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키건은 전쟁사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회적, 심리적’ 연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78) 이러한 키건의 주장은 물질적, 기술적 요소가 지배적인 요소 가 될 수밖에 없는 해전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 반적으로 해전의 역사를 다룰 때 가장 먼저 바라보는 것은 ‘어떤 우수한 플랫폼(platform)’을 가지고 싸웠냐에 초점을 맞춘다. 역 사상 최후의 전함 간 함대 결전을 떠올릴 때 우리는 영국과 독 일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웅장한 위용과 거대한 함포를 먼저 떠올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의 해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미국과 일본제국의 ‘항공모함, 함상전투기’가 그려지 며, ‘통상파괴전(commerce raiding)’ 중심의 대서양 전투는 그 무엇보다도 독일의 유보트(U-Boat, 잠수함)가 가장 먼저 뇌리 를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이는 해전이라는 전쟁 또는 전투의 양상 자체가 인간과 인간이 직접 맞붙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무 기체계를 탑재한 플랫폼들이 맞붙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전의 주역인 그 플랫폼 역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전략과 작전술, 전술을 통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해전사 연구도 다른 전쟁사 연구와 마찬가지로 플랫폼만을 논하기 보다는 ‘인간 의 영역’인 전략, 작전술, 전술을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79)
78) 존 키건, 정병선 역, 『전쟁의 얼굴』 (고양: 도서출판 지호, 2005), pp. 358-359.
79) 파셜 (2019), 132쪽.
이번 연구는 전쟁이론, 군사사상의 대표적 고전 『손자병법』 제4편 군형(軍形)에 제시된 선승이후구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역 사상 극적 반전을 이뤄낸 해전으로 손꼽히는 일본제국해군과 미국해군의 미드웨이·알류샨 전역을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특히 군형편의 ‘지생도(地生度), 도생량(度生量), 양생수(量生數), 수생 칭(數生稱), 칭생승(稱生勝)’ 구절에서 제시된 ‘전장의 선택(地)’과 ‘병법의 다섯 단계(度量數稱勝)’의 틀로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해 군과 일본제국해군 양측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향후 전장을 선택 및 추론해냈고, 이에 따라 양측이 어떠한 전 역(작전) 구상을 수립했으며, 총 가용병력과 전역의 각 요소별로 투입되는 병력을 어떻게 결정하고, 이를 통해 피아간 전투수행 과정을 예상해나가는가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 연구는 대다수의 전쟁사, 전투사 연구와는 다르게 전투의 국면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그대로 추적하기보다는 앞서 언급 한 선승이후구전에 이르는 5가지의 개념적 틀을 가지고 바라본 것이다. 이를 통해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 이후 태평양전쟁에 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제국해군이 승리의 기세와 전력의 양적 우 세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미국해군에게 패배하였는가를 선승 이후구전의 관점에서 살펴봤고, 그 결과 일본제국해군은 미드웨 이·알류샨 전역 수립 단계에서 상대적 유리함을 가졌음에도 불 구하고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이미 싸워보기도 전에 패 배의 군형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반면 에 미국해군은 1942년 5월까지 태평양 전 지역에서 불리한 전황 (戰況)을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일본제국해군이 가졌던 상대적 유리함을 상쇄해나가면서 궁극적으로 1942년 6월 4일에는 승리의 가능성이 높은 군형을 만들 수 있었으며, 다양 한 우연적 요소의 도움을 받으며 태평양전쟁의 전세(戰勢)를 급 격히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니미츠가 태평양함대의 지휘권을 잡은 이후 미국해군은 일본제국해군이 원하는 전장을 정확히 간 파하고, 집중의 원칙에 따른 효율적 작전계획 구상, 양적 열세만회를 위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진주만 기습 이후 처음으로 ‘먼 저 싸워놓고 이기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과거의 역사, 특히 전쟁사에 관한 연구는 늘 이미 결과를 알 고 있는 상황에서 진행되므로 그 유용성에 대한 의심을 받고는 한다. 또한, 혹자들은 전쟁이론의 고전인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론(On War)』과 손자의 『손자병법』에 관한 연구 역시 최첨단의 기술과 무기체계가 등장하는 현대전에는 더 이상 무용(無用)하다 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결국 그 최 첨단 기술과 무기체계를 사용하는 주체는 바로 인간이며, 인간 의 역사 속에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시대를 뛰어넘 는 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 더 심한 혹자는 전쟁사에 대한 연 구나 고전 군사사상에 대한 연구가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문제를 마 주치면 항상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본다. 우리의 지난 과거와 역 사 속에 그리고 선현(先賢)들의 지혜 속에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 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인 해결책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최첨단의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우리는 전쟁의 역사 와 고전의 진리를 탐구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 고, 그 시대를 초월하는 역사적 진리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이번 연구는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의 역량이 부족하여 조금 더 다양한 1차 사료를 활용하지 못한 점은 추후 지속해서 보완해야 될 사 항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시 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다 보니, 미드웨이 해전 전투 국면 하나하 나에 대한 세부적인 부분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역사학적 방법인 전투사 연구나 또는 이 연구의 방법과 유사하게 불후의 군사사상 고전에 나오는 개념적 틀을 토대로 미드웨이 해전을 보다 세밀히 들여다보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전쟁사 연구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전쟁, 그리고 전략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 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국군의 태평양전쟁 전략의 교훈 을 가지고 현대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의 반접근/지역거부(A2/AD) 개념을 바라본 연구는 매우 흥미로 웠다.80)
80) Patrick Naughton, “The Pacific Strategy in World War II: Lessons for China’s Antiaccess/Area Denial Perimeter,” Naval History Magazine, Vol. 36, No. 3 (June, 2022). https://www.usni.org/magazines/naval-history-magazine/2022/ june/pacific-strategy-world-war-ii-lessons-chinas (접속날짜 2022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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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illumination of Midway and Aleutian campaign plan through ‘A victorious army wins its victories before seeking battle(先勝以後求戰)’ - Focusing on ‘Mesurement of space(地)’ and ‘Five Stages of Military Strategy(度量數稱勝)’ in Sun Tzu’s The Art of War
Kim, Dong-eun
This paper started with the question of why the Imperial Japanese Navy, which had taken the lead in the Pacific War with superior momentum and overwhelming power aft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in December 1941, was defeated in the Battle of Midway in June 1942, just six months later. In order to solve these questions, this papaer raised the question, "How did the U.S. Navy and Imperial Japanese Navy try to create a victorious military sentence during the six-month period from the attack on Pearl Harbor to the Midway and Aleutian campaigns?" In order to analyze this research question, through the concept of 'a victorious army wins its victories before seeking battle(先勝以後求戰)' presented by Sun Tzu in ‘Disposition’ of The Art of War, a classic of military strategy, the United States and the Imperial Japanese naval forces established Midway and Aleutian aft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We will look at the whole process. In particular, using the 'mesurement of space and five stages of military strategy' as the basis of analysis to achieve the disposition of victory in that a victorious army wins its victories before seeking battle, it was closely examined how the U.S. and Imperial Japan went through the process of creating their respective military types. As a result of the analysis, it was possible to observe that the Imperial Japanese Navy, although it had a relative advantage in the Midway and Aleutian campaign establishment stages, failed to utilize it properly and entered the path of defeat before it even started fighting. On the other hand, although the U.S. Navy continued its unfavorable war situation in the entire Pacific theater until May 1942, little by little, it offset the relative advantage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ultimately leading to victory on June 4, 1942. U.S. Navy was able to create a disposition of victory with a high probability, and with the help of various contingent factors, they were able to win the Midway and Aleutian campaigns and sharply turn the tide of the Pacific War.
Keywords : Sun Tzu’s The Art of War, Disposition(軍形), A victorious army wins its victories before seeking battle(先勝以後求戰), An army destined to defeat fights in the hope of winning(先戰以後求勝), mesurement of space(地) and five stages of military strategy(度量數稱勝), Midway and Aleutian campaigns
원고투고일 : 2021. 6. 15, 심사수정일 : 2022. 10. 14, 게재확정일 : 202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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