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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방첩대(Counter Intelligence Corps)는 군 안전을 위협하는 활동을 미리

탐지․방지하고 적에 대한 정보․첩보를 수집하여 궁극적으로는 군의 안

전을 보장하는데 그 활동 목적이 있다. 방첩대가 남한에서 처음 활동하게

된 것은 해방 직후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면서부터였다. 미군 방첩대의 활

동 목표는 주한 미24군단의 안전을 보호 하는 데 있었고, 주한미군의 안

전이란 점령지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미 점령군의 안전

은 남한에 우호적이고 반공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군 방첩대 활동의 대상은 해방 직후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다양

한 정치세력, 특히 좌익 세력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미군 정보 기구는 갖

가지 정보를 소유했고, 수집된 정보를 기초로 적극적인 공작 활동을 전개

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지형을 창출했다. 미군 점령기부터 존재했던

방첩대의 기능과 역할, 효과는 군대 내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점령 시기에 이루어졌던 방첩대 활동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주한미군은 방첩대의 경험과 성과를 한국 정부에 이전

하려고 시도했고, 방첩대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 대

통령도 방첩대 경험의 전수에 적극적 이었다.

정부 수립 후에 만들어진 방첩대-특무대는 전국에 파견대를 조직하고,

이승만의 정치적 이해를 보호하는 정치적인 조직으로 되어갔다. 군 방첩대

-특무대는 1950년대 정치 과정의 굽이굽이마다 개입하여, 민간 사회에 큰 영

향을 끼쳤다. 이런 이유로 이 시기의 정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첩

대와 특무대 활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다음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미군 방첩대와 정부 수립 이후

의 육군 방첩대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1)

첫째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육군 방첩대 조직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육군 방첩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육군 방첩대 활동의 모델이 되었

던 미군정 시기의 방첩대 활동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미군 방첩대 경우에

는 조직 활동이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는 편이다.2) 이와는 달리 육군

방첩대의 경우에는 활동과 조직에 대한 문헌적 추적이 쉽지 않아 오해와

혼란이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조직적

변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에

서는 새롭게 발굴된 문헌을 활용하여 육군 방첩대의 조직 변화를 가능한

선에서 확인하고자 한다.

둘째로 살펴볼 것은 미군과 육군 방첩대의 관계와 그 유사성이다. 조직

과 임무 측면에서 두 조직은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미군의 활동

경험은 어떻게 육군에 전수되었는지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

고 국군 방첩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드러난 대한관찰부-대한정치공작대

등 이승만의 정보기구 설립 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로, 미군정 시기와 정부수립 직후의 방첩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를 살펴보고자 한다. 방첩대는 여러 가지 임무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방

첩대 활동의 전반적인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방대한 작업이며, 이 글

의 목적을 벗어난다. 이 글은 방첩대의 여러 활동 가운데에서도 미군 점령

시기의 민간인 정보 수집과 1950년대에 민간인 학살, 정치개입 등과 관련

된 공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원래 방첩대의 임무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

군 방첩대와 육군 방첩대의 활동 대부분은 군이 아니라, 민간인을 대상으

로 하고 있었다. 이는 남한 점령을 목적으로 진주한 미군의 성격에 기인하

는 것이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

다.

이 글에서는 기존에 공간된 자료집과 더불어 민간인학살 사건 관련기록

을 모아놓은 ‘노근리 파일(NoGunRi File)’과 직접 수집한 미 국립기록관

리청(NARA) 기록물 등을 주로 이용했다. ‘노근리 파일’이란 1999년에

AP통신이 ‘노근리 사건’을 보도한 이후, 미 국방부가 미 국립기록관리

청(NARA)에 의뢰해 조사한 관련 기록물을 말하는 것이다. 1년여에 걸

친 노근리문서 조사는 노근리 사건에 직접 관련된 자료뿐만 아니라 주변

정황과 기타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자료로 확장되었다. 노근리 파일에는

국무성, 국방성 등 다양한 종류의 문서가 망라되어 있는데, 이 문서를 모

으기 위해 조사단에는 육군, 공군, 국무성 등 각계 전문가가 참여했다. 작

업결과 일반 문서 상자의 3배 크기인 대형 상자(Federal Record Container)

에 육군(7개 상자)과 공군 문서(6개 상자)가 수집됐다.3)

노근리 파일이 중요한 이유는 ‘노근리 파일’에 담긴 기록이 노근리사건

관련 기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

건에 관련된 다양한 기록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아키비스트들

이 초기 작업부터 노근리 사건만이 아니라 이후 밝혀질 가능성이 있는 민

간인 학살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자료를 조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근리 파일에는 주한 미 대사관 기록을 포함한 국무성, 육군,

공군, 중앙정보부(CIA), 법무감 등 다양한 주체가 생산한 문서들이 포함되

었다. 일명 ‘노근리 파일’이라 불리는 문서 컬렉션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관련 기록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노근리 파일의

성격 때문에,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민간인 희생 연구에서 노근리 파일은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문서 컬렉션이다

*1) 이 글에서는 명칭에 대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미군 점령시기의 미 육군 방첩대를

‘미군 방첩대’로 표기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육군의 방

첩대를 ‘육군 방첩대’로 구별하여 표기하고자 한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 정보기관의

명칭은 몇 차례에 걸쳐 변경되었는데, 이 글에서는 여러 가지 명칭을 가진 육군 정

보기관을 통틀어 표기하고자 할 때 ‘방첩대’라고 표기한다.

2) 미군 정보기관은 미군정 기간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시기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

데,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 육군 방첩대뿐만 아니라, 공군, 해군 등 다양한 조직의

정보기구가 활동한 만큼 한국전쟁기에 활동했던 미군 정보기관을 살펴보는 것은 손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정용욱, 한국전쟁

시 미군 방첩대 조직 및 운용 ,

3) 2001년 제주4․3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군사편찬연구소는 육군문서들 중 3박스

를 수집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03년도에 나머지 육군문서와 공군문서를 수집

함으로써, ‘노근리 파일’ 전량이 국내에 입수되었다.

Ⅱ. 미 방첩대 활동과 그 영향

1. 미 방첩대의 조직과 활동4)

1945년 9월부터 3년에 걸친 미군 령기간 동안에 방첩대 활동은 미군 정 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한 중요한 토대였다. 한국에서 미군 방첩 임무는 군정과 밀접한 관연이 있었다.

미 제24군단장 하지(Hodge, John Reed)는 남한 정치상황을 분석하고 유효한 정보를 제공한 방첩대에 대해 “....시의 정보는 전투 국면뿐만 아니라 점령 국면에서도 제대로 된 결정을 하는데 중요하다. …… 방첩대가 이룩한 기여는 질서 있고 평화적인 남한 정부의 설립에 중요한 요소다. 주한미군 방첩대 각 원들에게 감사의 말을 한다“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5)

미 국무성이 내려 보내는 한국에 관한 지침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하지는 정책 결정의 중요한 부분을 방첩대가 수집한 정보에 의존했다. 방첩대는 명령을 성공으로 수행하는데 든 든한 의지(tower of strength)가 되었던 것이다.6)

당시 유일한 정보기관이었던 주한미군 방첩대는 각종 첩보를 수집하고 공작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남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고, 이를 통해 미군 정 통치와 남한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남한에 처음 들어온 방첩대는 미군 제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한 다음 날 인 1945년 9월 9일 인천항에 들어온 제224파견대(224th detachment) 요원 들이었다.7)

제224파견대 요원들은 서울에 주둔한 제24군단 사령부에 배속 되었다.

한편 제224방첩대의 행정 업무는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441방첩대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제224방첩의 상급부대가 연 합국최고사령부(SCAP/GHQ)에 소속된 제441방첩대 였기 때문이다.

1945년 하반기, 남한에는 224파견대뿐만 아니라, 전투부대파견대 (combat unit detachment), 도시부대(metropolitan unit), 지역부대(area unit) 등의 여러 부대가 방첩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이 일체화되어 움직이지도 못했고 활동의 집성도 담보하고 있지 못했다.8)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해 1946년 2월 5일, 제224파견대 업무를 관할 하는 상부 조직은 1946년 2월 12일부터 연합국최고사령부에서 주한 제24 군단으로 변경되었고,9) 1946년 2월 13일 한국에 있는 방첩대는 조직을 단 순하게 하기 해서 재편성되었다. 제224파견대는 계속 서울에 남아 모든 방 첩 작전을 지휘했다.10)

두 달이 지난 1946년 4월 1일, 제224파견대는 제971방첩 파견대로 교체되었고 1948년 말까지 남한의 모든 군 방첩 활동은 제971파견대의 지 휘 아래 이루어졌다.11)

남한 내의 방첩 조직이 제971방첩대로 정비되자, 1946년 중반 이후부터는 통일되고 본격인 활동이 가능해졌다.

제971파견대의 핵심 업무는 작 장교가 지휘하는 8개 과(section)가 담 당하고 있었다.

7개 과는 ① 간첩․파괴․기타과, ② 정치과, ③ 보안과, ④ 특수, ⑤ 정보과, ⑥ 보고분석과, ⑦ 연락과, ⑧ 작문서과로 이루어 져 있었다.12)

이 가운데 간첩․파괴․기타과는 소련과 적대하고 있는 주한미군정의 통치를 반하여 남한에 존재하는 좌익 정치세력을 사찰하고 제압하는데 활동의 주요한 초점이 놓여졌다.

남한 좌익의 활동은 적대적인 파괴 활동, 전복 활동으로 인식되었다.

방첩대는 특히 ‘세계혁명’과 남한 공산주의자 들의 연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방첩는 1946년 6월, 한국을 지배하 는 공산주의자들의 ‘매스터 플랜’을 발견했는데, 방첩는 이것을 전 점령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발견 의 하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3)

1947년 1 년 동안, 339명의 간첩 명단이 보고되었고 이중 149명이 체포되었다.14)

정보과는 북한 상황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 등을 갖고 있었는데, 남한 우익반공청년단체들과 연계하여 직접 공작원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 집했다.

정보과는 1947년 이후 개성, 옹진, 삼척 등지에 지부나 분소 설치 해 38선을 넘어오는 피난민을 심사했다. 피난민 심사는 이미 1946년부터 이루어졌는데, 심문을 통해 방첩는 북한 군사 상황(부배치, 무기), 정 치 경제 상황에 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15)

제971파견대의 규정에 따르면, 방첩대의 기본 임무는 군사 안전 유 지를 원조하는 것이지만, 남한에서 방첩 임무는 군정 점령의 성격을 반 하고 있었다. 제971파견대의 임무는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주한미군의 전반적 목표의 성공적 완수를 위해서 정치세력과 사회단체 조사와 관련된 적극적 첩보와 방첩분야의 특별 조사활동 및 인접지역(북한)에 관련된 첩 보 수집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16)

971방첩의 이러한 임무 확대 에 해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는 ‘점령이라는 미군의 임무가 새로운 방 첩작전 개념(new concepts of counter intelligence operations)을 탄생’하게 했다고 표현했다.17)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 점령’이라는 미군의 초기 점령 목표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과 적대하게 되면서 미국에 우호인 반공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변화되었고, 미군 방첩대는 이러한 목표를 용이하게 하기 해 좌익을 포함한 한국인 정당․사회단체에 한 정보 수집과 정치인들 에 한 감시를 수행했다.

한국인 민간 정치인을 사찰, 감시하고 전복활동 을 방지하는 임무는 방첩대 사령관의 자의인 판단이 아니라, 표준운용절 차(Standard Operating Procedures)에 규정된 조직의 임무다.

수집된 정보는 방첩대가 적극적인 정치공작을 통해 한국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방첩대는 좌익세력 탄압의 신호탄이었던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직접 조사했다.

이 사건은 공식으로 제1관구경찰청 소속 본정서가 담당했지만, 실제로 수사를 주도한 것은 두 차례에 걸 친 압수수색을 실시한 방첩대다.

방첩대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사 악한 본성이 나타난 최초의 주요한 지표라고 평가했다.

방첩대는 이 사건 이 공산주의자들의 전복활동을 한 자금원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고,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이 약화되었다고 평가했다.

방첩대는 정보를 수집하는 수동인 수집 업무만을 했던 것이 아니라, 남로당 간부들을 비 검속으로 체포하기도 했다.

1947년 8․15 제2주년 기념일을 맞아 방첩대는 각 지구와 분소에 편지를 보내 8월 12일 모든 좌익지도부를 습격하여 21명의 핵심 지 도자를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

군에 한정되지 않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정보수집과 공작 업무는 정판사 사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방첩대의 통상 업무다.

조직 측면에서 볼 때, 제 971파견는 제24군단 정보참모부(G-2) 휘하에서 활동했고 정보참모부에 책임을 졌으나,19)

일부 할권은 여전히 연합국사령부의 제 441방첩대가 갖고 있었다.

방첩 요원들은 24군단에서 배치한 것이 아니 라 일본의 제441지대에서 파견되었으며,20)

미국으로 보내는 제971지대의 모든 보고서는 제441지대를 통해 전달되었다.

남한 내 방첩대 조직은 시간이 흐르면서 확대되었다.

1946년 9월에 9개의 지부와 3개의 분소, 총 12개의 지․분소가 있었던 방첩대는 1947년 5 월에는 18개로 늘어났고, 1948년 12월에는 총19개소로 늘어났다. 1948년 말까지 방첩대 지부는 서울, 인천, 강릉, , 부산, 광주, 전주,대구, 개성, 옹진, 춘천, 청주, 제주도 등 13개 도시에서 운다.21)

미군방첩 지부의 증가는 방첩대 역할 의 확대와 관련이 있다.

주요 도시 의 경우에는 지부가 항상 운영되었고, 1948년에는 북한관련 정보를 탐지하는 개성, 옹진, 의정부, 삼척 등의 지부, 분소가 신설되었다.

방첩대는 지부와 분소를 전국으 로 확대하면서 광범한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이를 통해 방첩대는 남한 전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방 조직은 방첩대가 한국의 정치 지형을 파악하고 미군정의 의도에 맞게 정치 지형을 주조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미군 971방첩대는 “방첩대보다 한국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정보기관은 없다”고 스스로 평가했다.23)

방첩대 본부의 보고분석과는 지부 를 통해 남한 상황을 속속들이 보고 받았다.

모든 지부는 <일일정기보고/ 일일요약(Daily Periodic Report/Daily Summary)>를 통해 날마다 본부에 상황을 보고했고,24) 본부는 <주간정보통보(Weekly Information Bulletin)>를 각 지부로 보냈다.25)

<주간정보통 보>는 지부가 한국의 정당 활동과 정치 변화를 판단할 수 있는 기초 정보 를 제공했다. 그리고 서울 본부(Reports and Analysis Section)는 주한미군 정보참모부(G-2)에 매일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고했고, 제441파견대에는 반 월간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했다.

이들 보고서는 정치, 정보, 첩보․파괴 기타(E. S. & M), 보안, 특별 (Special Squad), 행정 등의 6개 섹션으로 나어져 있다.

가장 많은 분량 을 차지하는 것은 좌익활동과 정치 인물에 한 정보를 담은 전복활동 부분이다.26)

주한 미군의 방첩 임무는 본국 방첩대가 규정한 업무보다 훨씬 더 확대 되었다.

방첩대 업무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정보수집과 정치공작으로 변 화되었다.

수집된 각종 정보와 에서 위에서 언급한 여러 보고서들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각종의 리스트로 작성되어 카드 형태로 보관되었다.

남한 점령 기간 방첩대가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 문제다. 제 971지대에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요원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한국인 통역자와 번역자들에게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아닌 요원 중에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에이비슨(Gordon W. Avison) 하사와 태커(Donald P. Whitaker) 하사였다.

에이비슨은 선교사의 아들이었는데 생애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어에 능숙했다. 그는 박헌영을 담당하여 주기적으로 그를 면담 했다.

방첩대에는 한국인 2세 요원이 12명이 있었는데, 이들 부분은 하와이 출신이었다고 한다.

한국인 요원 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이순용(李淳鎔) 이다.

그는 ‘Y. Lee’ 라는 발음으로 ‘와일리(Wylie)’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제2차 세계 때 미군 OSS에서 활동하다가 224파견대와 함께 남한에 입국했다.

이순용은 이승만과 아주 가까운 인물로써, 그가 OSS에 들어가 게 된 연유도 이승만의 소개 때문이었다.

귀족 출신인 이순용은 많은 ‘폐쇄적인 집단’에 접근하여 유용한 정보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군 방첩대는 그를 특히 가치 있는 공작원으로 평가했다.28)

방첩대는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의 고위 정치 지도자들 부분을 사찰했 고, 다양한 정치단체에 촉수를 뻗고 있었다.

서울파견대에서 근무했던 맥 두걸은 1947년 미소공동원회가 정치 단체에 질의서를 보냈을 때, 503개 의 정당이 응답하도록 했던 것은 미군 방첩의 작전영역을 보여주는 것 이라며, 방첩대는 정치 사찰 능력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29)

방첩대는 남로당 같은 좌익 정당에 정보원을 심어놓고, 이들의 활동을 면밀히 감시했다. 방첩대는 남로당 전라도당 조직부장을 정보원으로 활용 하여 전북도당 활동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었고, 경찰 습격 계획 등을 미리 알아내어 이에 비하곤 했다.30)

서울 파견대는 매 주마다 이승만을 인터뷰했고,31) 박헌영 같은 좌익 지도자들도 주기으로 인터뷰했다.

제971지대의 정치부에서 일했던 프랜시스 다나까(Francis F. Tanaka)가 이승만을 담당한 정보원이었다.32)

방첩대 는 이승만에게 오고 가는 모든 편지를 검열했으며,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는 이승만에게 전달하지 않은 채 폐기 처분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방첩 활동의 대상으로만 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방첩 내에 이순용과 같이 그와 가까운 인물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방첩 활동과 그들이 수집한 정보를 상당 부분 알고 있었 다.

1947년 8월 13일, 방첩대가 모든 공산당 본부를 습격했을 때도 이승만은 처음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33)

방첩대의 업무는 매우 방대했기 때문에 요원만으로는 임무를 수행하기 벅찼다.34)

방첩대는 각 지역에서 반공의식이 투철한 서북청년회 같은 우 익청년단 출신의 한국인 정보원을 고용하여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미군 방첩대는 북한 인민군의 상층부와 하층에도 정보원을 가동했다.

방첩대는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조직에 정보원을 심었던 것이다.35)

방첩대가 신뢰했던 조직은 서북청년회다. 미군 방첩대는 부분 서북 청년회와 가까운 사이다.

대전 파견대의 경우, 방첩대는 좌․우를 망라 한 모든 정치 조직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대전지역 좌익에 관한 접촉은 이 지역 서북청년회 2인자인 임일이 책임졌다.36)

방첩대 요원들은 “서북 청년회는 유용했지만 통제하기가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서북청년회원들은 항상 (특히 북한 간첩일 경우) 잡고 나면 공산주의자들을 죽이고, 경찰보다 더 폭력(terroristic)이었다거나 잔인한 무리(brutal bunch)라고 회고했다.37)

그럼에도 방첩대는 자신들의 임무 수행을 위해 다른 어느 조직보다 도 서북청년회와 가깝게 지냈다.

‘그들은 완전한 반공주의자고 공산주의 자들을 잘 가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38)

미군 방첩 활동의 초점은 군정 치안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 점령’ 지역 민간인에 한 통제에 있었고, 치안 확보는 좌익세력의 발흥을 차단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 미군정의 상황 인식이었다.

남한 내 공산 주의 세력의 발흥과 소련과의 냉전 과정에서 싹튼 공산주의자 척결의 필 요성은 좌익세력을 예의주시하게 했다.

이러한 때문에 미군 방첩대는 군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남한에 거주하는 민간인 그중에서도 좌 익 세력을 대상으로 한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을 수행했다.

방첩대원들은 한국의 상황과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방첩대는 이승만 활동을 주의 깊게 지켜봤고, 이승만은 나중에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어떤 요원은 이승만은 극단인 민족주의자다고 했고,39) 어떤 사람은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는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극도로 공산주의를 증오한 사람이라고 그를 기억했다.40)

이승만에 대한 요원들의 느낌은 다양했다. 어떤 이는 이승만이 정치적 반대자들에 한 그의 접근 이 ‘극단적’이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이승만을 ‘기회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다나까는 심지어 이승만을 ‘son of bitch’라고 표현했고, 맥두걸은 김구 암살에 해서는 당연히 이승만 세력을 어느 정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41)

전체인 의견을 종합해 볼 때, 이승만은 미국 기준으로 ‘말썽꾸러기(trouble-maker)’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점령기 방첩대가 이런 의견을 소개하면서,42) 이승만이 미국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사람이지만, 한국 기준으로는 ‘평범한 정치인’이었다고 하여, 오리엔탈리즘 시선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이다. 맥두걸은 미국 기준으로 보면 이승만은 ‘파시스트’라고 언급했다.43)

그러면서 그는 덧붙이기를 미군정이 좌우연합을 시도했지만, 처음부터 이승만 에게 귀를 기울여야 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파시스트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요원이었던 그리만 은 “한국에는 독재나 이와 유사한 정부 이외에 다른 정부, 즉 민주 정부는 혼란만 가져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기에 한국에서 일했던 미군 방첩대원들은 ‘한국인의 평균 정신연령은 7살 어린애 수준’이라거나,44) ‘국 군의 정신은 미국 10살 어린애의 그것과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45)

서양의 기준으로 점령지 한국을 평가하는 방첩 요원들의 시각은 미군 방첩대가 반공국가 수립이라는 자신이 수행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증오하고 폭력적이라고 비난했던 서북청년회와 손잡고 일한 것은 그들이 반공국가 수립과정에서 유용한 인적자원으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폭력인 양상을 보인다면, 그것은 3년간의 점령 통치를 수행하고 치안확보에 노력했던 미군에게도 책임이 없을 수 없다.46)

그러나 동양과 서양을 나누고, 한국인들은 원래 그렇다는 식의 오리엔탈리즘 시각으로 상황을 평가하는 순간 점령에 뒤따 르는 책임의 문제는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 회피방식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 한국 군․경에 의해 발생했을 때, 다시 한 번 모습을 보였다.

2. 이승만의 정보기구 설립 시도

육군 방첩 조직의 설립과정을 살펴보기 에 먼저, 이승만이 추진했던 민간 정보기구 설립이 좌절된 경험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육군 방첩대의 임무가 민간인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 요인의 하나는 이승 만이 정보기구를 바라보는 시각, 운용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보기구의 요성과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 기관이 수집한 각종 첩보를 정치활동에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1946년 6월, 제1차 미․소공위가 폐회되고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어 이승만의 정치 위상이 흔들릴 때,

사설 정보기관이 설립되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비공개 사설 정보조사기 인 KDRK를 조직했고, 그 지휘 하에 활동할 민족통일총본부 조사부를 공 개조직으로 만들었다.47)

KDRK란 ‘Keep Dr. Rhee Korea’의 약자인데, 이 름에서 나타나듯 이 조직은 이승만 개인을 해 조직되었다. KDRK는

중앙 부대뿐만 아니라 도 부대, 도 지구부대를 단계적으로 설치했다.

KDRK의 존재는 미군정도 알지 못했으며, 측근 비서들에게까지도 비밀 로 부쳤다.48)

KDRK는 이승만이 정치활동을 할 때 필요로 하는 정보자료 를 수집하고 여론을 조사하며 필요하면 상대방 진영을 교란시키고 민족진영 내의 ‘반동분자들’을 제압시키는데 활동의 목적을 두었다.

그런데 KDRK의 활동은 좌익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우익 내부에 존재하는 반이승만 세력을 제압하는데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특히 좌우합작에 반하는 우익진영은 반동세력으로 규정되었다.

KDRK 사례를 보면, 이승만이 정보기구 설치에 큰 관심과 욕구를 가지 고 있었으며 사설 정보조직이기는 하지만 정보기구 운용의 경험을 쌓아갔 다는 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연장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되기 직전 ‘대한관찰부(Korean Research Bureau)’라는 민간인으로 이루어 진 국가정보기관을 만들고자 하였다. 1948년 미 방첩대의 하반기 철수가 알려지자,49) 7월부터 이승만 대통령 과 제24군단 정보참모부 토마스 와톤(Thomas Wattington) 대령, 경찰 고문 에릭슨(H. F. Erickson) 중령은 여러 차례의 회의 끝에 미군 제971방첩지대를 본 뜬 남한의 정보 조직을 만들기로 하였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조직 구성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조직의 초기 계획에는 리처드 팍스가 관여했고, 로버츠는 대한관찰부의 설립에 관여했다.

미국은 대한관찰부를 ‘한국의 방첩(CIC)’로 간주했다.50)

이승만은 이 정보 조직이 군 기관이 아니라, 민간인이 근무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51)

이승만과 경찰 고문, 미 방첩 고문은 회의를 거쳐 정보기구 설립 에 관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했다.

① 이 조직의 명칭은 ‘대한관찰부’로 한다.

② 행정명령에 따라 1948 년~1949년 회계연도에 2억 3,000만원의 예산 사용을 승인한다.

③ 조직 표를 승인한다.

④ 제971방첩사령부의 서한을 통해 모든 지구대 지대장들에게 대한관찰부 요원들이 미군 방첩의 임무를 맡을 것이라고 통보 한다.

결정된 사항 특히 제4항은 대한관찰부가 미 방첩대의 후신이라는것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대한관찰부가 사용하기로 한 2억 3천만 원은 당시에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1948년도 세출예산 총괄표에 따르면, 당시 임 시 특별산을 제외한 정부 지출 경상산액은 93억 원이었다.

대한관찰부의 예산보다 더 많은 지출액을 가지고 있는 부처는 내무부, 국방부, 재무부, 교통부 등 9개 부처에 불과했고, 법원, 총무처, 외무부 등 나머 지 부처는 대한관찰부의 예산보다 적었다.52)

하지만, 대한관찰부에 배당된 예산은 이승만 정부의 자의적 집행에 따라 실제로 사용되었다.

이승만과 주한미군 고문과의 합의에 따라, 대한관찰부 요원 훈련과 조 직을 구성하는 작업이 미군 주도로 시작되었다.

민간인 방첩대원을 모집하고, 조직․훈련․배치하는 등 정보조직을 구성하는 역할은 미군 제971방첩대가 맡았다.

한국 경찰과 미 방첩대는 요원을 모집하여 서울의 경찰학교에 훈련소에서 6주 과정의 교육을 받게 했다.

미 고문관 2명은 통역 과 여러 정부 부처에서 파견된 인력을 활용해, 1948년 7월 순 교육생 60명을 대상으로 첫 교육을 실시하여 8월말에 졸업했다.

1948년 8월 하순, 1기생들이 졸업한 뒤 곧 바로 2기생 240명이 훈련에 들어갔다.

대한관찰부의 인원은 315명으로 책정되어 있었다.53)

미군 방첩대는 두 차례에 걸친 교육을 통해 대한관찰부 조직에 필요한 300여명을 이미 확보한 셈이었다.

훈련을 해서는 보다 큰 막사가 필요했는데, 경찰 학교 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경기중학교를 사용했다.

1948년 10월 하순에 대한관찰부 본부가 서울의 미군 971방첩대가 사용 하는 건물에 설치됐다.

이미 9월경에는 대한관찰부의 각 사무실과 책임자 현황까지 정해져 있었다.

이에 따르면 서울, 부산, 대구에는 1급 사무실을 두고, 인천․개성․춘천․청주․․광주․전주․제주․군산․목 포․포항․마산에는 2급 사무실을, 옹진․강릉․횡성․삼척에는 3급 사무 실을 둔다는 계획이었다.

1948년 10월에 졸업한 제2기생들은 미군 방첩대 지구대에 파견되었다.

경찰 고문관과 미 방첩대 고문관들은 민정식을 초대 대한관찰부장으로 선발했다.

미군 보고서에 대한관찰부의 책임자라고 언급된 장석윤은 일명 ‘몬타나 장(Montana Chang)’이라고 불린 미군 방첩 요원이었다.54)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하던 1940년에 이승만과 가까워졌던 장석윤은 이승만의 열 렬한 추종자이지만 동시에 이범석 국무총리, 윤치 내무부장과도 한 계다.

장석윤은 대한관찰부 활동과 련하여 횡령의로 1년 6개 월을 선고받았지만, 1950년 4월 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 다.55)

그는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9일, 치안국장에 임명되었다.

대한관찰부가 설립되고 요원이 실제로 배치되어 방첩활동을 하고 있었지 만, 대한관찰부는 아무런 법적인 근거가 없는 조직이었다.

수많은 예산과 인력을 사용하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관찰부 활동은 1949년 1월 16일 대한청년단 수원군 지부 단원을 납 치․감금․폭행한 이른바 ‘수원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드러났다. 대한관찰부원들은 대통령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청년단 단원과 여성들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성폭행을 자행했다.

언론은 이들을 ‘악당’이라 고 불고, 국회는 공공연히 인민을 학살하는 한찰부는 즉시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의원은 구자춘56) 영등포 방첩대원으로부터 입수한 대한관찰부의 허위 취조서를 내놓으며, 대통령이 수원에 온다는 사실은 1월 14일에 보도되었는데, 어떻게 1월 12일에 암살을 계획할 수 있는가라며 대한관찰부 주장의 모순을 폭로했고, 다른 의원은 ‘방첩대는 미국 정책 수행 을 위해 생긴 것인데, 대한민국이 탄생한 후도 존속시켜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지적했다.57)

정부 각료들은 대한관찰부가 이미 미군정시 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이승만 정부는 이를 이양(인계) 받은 것에 불과하다 고 설명했지만,58) 대한관찰부 조직 설립에는 방첩대를 이전시키려는 미군의 의지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욕구도 매우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대한관찰부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은 다음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국회에서 대한관찰부를 비난하자 기자회견에서 ‘(대한관찰부는) 대통령 직 속으로 사행어사격(私行御使格)으로 발동하는 기구이다.

비행을 정탐하여 감․정직․면을 시켜 법의 처단을 받게 할 수 있고, 이밖에 사정국이란 미 CIC와 같은 기관으로 대통령 직속 아래 모든 정치계․기타를 정탐하 는 곳이다’라고 말했다.59)

이승만에게는 정치 정보를 수집해 자신에게 직보 하는 정보기구, 자신의 특명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첩보 기구가 필요 했던 것이다.

수원사건 이후 국회는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한편 대한관찰부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했고, 정부에 경고하다.

이게 여론이 무척 악화된 상 황에서도 정보기구를 설치하려는 이승만 통령의 의지는 매우 강하였다.

이승만 통령은 수원사건이 알려진 후에 대한관찰부 설치를 승인해 것을 국회에 요청했다가, 이를 방호국(防護局)으로 변경했고 나중에는 사 정국(司正局)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러나 다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반대자를 색출할 목적으로 대한관찰부를 만들었고 방호국 이나 사정국도 이러한 연장선에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조 직 창설에 반대했다.60)

결국 국가 기구의 일환으로 구상된 정보기구를 창 설하려던 이승만의 대한관찰부 설립 계획은 실패했다.

사정국이 폐지될 무렵인 1949년 5월, 퇴직군인 신치호와 정혜천은 ‘ 이북 공작’을 한다는 명목으로 이승만과 상의하여 통일사를 설치했다.

이 조직은 10월경 해체되었지만, 정혜천은 다시 ‘통일사’의 영문 이니셜 세 자를 따서 TIS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통일사는 사정국의 후계 조직임을 주장하면서 협박과 강요, 탈취를 통해 자금을 모았고, 그 피해액이 2억여 원에 달했다.61)

1950년 4월에는 ‘대한정치공작’ 사건이 발생했다.62)

대한정치공작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TIS보다 더욱 커다란 조직이었다.

검찰에 검거된 김 령, 김낙 등은 1950년 3월 30일에 이 조직을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대원 약 100여 명에게는 치안국장과 헌병사령관 연명으로 ‘상기자는 사전승인 없이는 심문, 검거를 불허한다’는 신분증을 발행하여 소지하게 했다.63)

신분증 발행에서 보듯, 대한정치공작에는 내무부의 경찰, 국방부의 헌병 같은 국가 기관의 협조가 있었다.

하지만 대한정치공작 활동은 관련된 인물 이외에는 다른 정부조직도 완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검찰 도 대한정치공작 활동에 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이승만의 특명을 어긴 채 이 사건을 헤친 검찰은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 권승렬 법무부장 은 문책을 각오하고 있었다.64)

이 때문에 내무부와 경찰, 국방부와 헌병 사령부 등 대한정치공작와 련된 정부 기관들은 이 사건이 파급되는 것을 극력 막았으며, 이 사건이 일부 분자의 정치음모라거나 정치 희극으로 무마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결국 대한정치공작 사건은 수많은 의혹과 문제를 남긴 채 관련자 12명이 기소되고 사실상 수사가 종결되었다.65)

대 한정치공작는 국가 기관을 사칭하면서 공공연히 정치과정에 개입하려 하였다.

대한정치공작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던 야당(민주국민당)을 탄압하기 해 운용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 었다.66)

대한관찰부가 국회와 여론의 반대로 국가 기관으로 설립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후에도, ‘TIS’와 ‘대한정치공작’ 같은 정보 조직은 비밀리 에 작동하고 있었다.

‘대한관찰부-TIS-대한정치공작’로 이어지는 다양한 정보사찰 기구 설립 공작은 이승만이 정보기구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 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한관찰부 때부터 이들 정보기관은 무리하고 폭력적인 정보수집과 불법 공작 등으로 매번 사건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조 직 설립이 좌절되거나 관련자들이 검거되었다. 미군 방첩대는 대한관찰부 설치가 어려워지자 육군 방첩대를 조직하는 활동을 동시에 개시했다.67)

이는 미군이 운용했던 방첩대 조직을 신생 한 국 정부에 이전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Ⅲ. 육군방첩대의 활동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즈음하여 미군과 한국 정부는 미군 방첩(CIC)의 기능을 전달하고 이어받으려 시도 했다. 미군 정보 교들의 교육과 한국인 요원들의 실제 경험 그리고 미군 방첩 조 직과 운용 방식의 이전을 통해 미군 방첩 기능은 그로 육군 방첩로 이전되었다. 육군 방첩(특무)는 미군 제971분견대의 조직과 기능을 모방한 것이었다.

1. 정뷰수립 직후의 방첩대 조직과 활동

‘CIC’로 불리는 방첩부대는 군사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한 정보를 수 집하는 한편, 적에 관한 첩보․공작활동을 주임무로 한다.

군사 지휘부의 정보참모조직이 아(我)와 (敵)에 한 정보를 수집하는데 머물러 있다면, 방첩대의 임무는 적에 대한 공세 정보수집․첩보활동과 공작활동을 그 특징으로 한다.

육군의 정보참모부는 ‘정보과-정보처-정보국(특별조사과, 특별정보, 방 첩)’ 순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 명칭이 변화되었는데, 한국의 방첩대는 총사령부 참모조직(G-2 즉 정보참모부)의 한 부분으로 시작하여 결국 이 조직으로부터 분리되어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조직으로 발되었다.

이 후에 살펴보겠지만, 특무대는 방첩대의 기능과 업무를 이어받고, 조직으 로는 정보참모부로부터 독립하여 육군본부의 직할 부대로 성립되었다.68)

여기서는 정보과 설립부터 특무 창설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육군 방첩부대가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69)

1945년 11월 13일, 미군정이 국방사령부 설치에 대한 법령을 공포했을 때, 국방사령부는 경찰까지 포함하는 조직이었고 군는 아직 만들어지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군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 었고, 육군부와 해군부를 관장하도록 되어 있는 국방사령부 군무국에 인사 장교, 정보 검열장교, 작전훈련 장교 등을 배치한 정도다.70)

정보조직이 맨 처음 만들었진 곳은 국방사령부가 아니라 조선국방경비 총사령부다. 조선국방경비는 1946년 1월 15일, 제1연대 제1대대 제1중대가 경기도 양주에서 입대식을 거행함으로써 본격으로 출발하게 되 었는데, 조선국방경비총사령부는 제1연대 본부에 설치되었다. 조선국방 경비총사령부에 언제 ‘정보과’가 설치되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 고 있다. 공식 전사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는 총사령부가 2월 7일에 설치되었다고 하면서도 정보과는 1월 14일에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총사령부가 설치된 이후에 정보과가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이는 오류로 보인다.71)

아마도 정보과는 2월 7일 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72)

육군 정보국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정보과의 설치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과장은 미 육군 카스 소령이 맡았다가 곧바로 최홍희(崔泓熙)로 바뀌었 다.73)

조선국방경비총사령부는 국방사령부 군무국의 참모기능을 흡수하 여 모병 인사업무를 담당했는데,74) 정보 업무도 이같은 흐름 속에 놓 여 있었다.

군 조직이 만들어짐에 따라, 관련 업무가 조선국방경비총 사령부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게 된 것이다.

1946년 미소공동원회가 열렸을 때 소련대표는 ‘국방’이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다.

소련은 남북을 미소가 잠정으로 분할 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미국이 독자 군를 창설하려는 의도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소련군 측의 항의가 있자 미군정 은 1946년 6월에 15일에 국방사령부를 국내경비부(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 한국인들은 이를 나중에 ‘통위부’라 부름)로 변경했고, 이에 따라 조선국방경비도 ‘국방’이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그 명칭을 조선경비대로 변경하다.75)

이러한 조직 변경에 발맞추어 국내경비부(통위부)에는 ‘정 보국’이 설치되었다.76)

한편 군를 직접 관할하고 명령권을 가진 조선경비사령부는 국내경 비부보다 더 확장된 정보조직을 필요로 했다.

1947년 6월 1일, 통위부 정보국과 조선경비총사령부 정보과가 조선경비총사령부 정보처로 통합 된 것77)은 이러한 상황을 반하는 조직 개편이라고 볼 수 있다.

처 장을 맡은 사람은 백선엽 이었다. 그 뒤 조선경비 조직이 점차 확대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앞에 다가오면서 정보 기구는 변화를 꾀하게 된다.

1948년 5월 27일, 조선 경비 정보처에 방첩 기능을 수행하는 특별조사과(Special Investigation Section)가 창설되었다.78) 이 조직은 미군 방첩(CIC)의 기능에 가장 가 깝게 근접하는 것이었는데, 특별조사과의 과장은 김안일이 맡았다. 특별조 사과는 남한의 부산, 진주 등 주요 도시에 파견대(detachment)를 조직했다.

이 부대의 임무는 정부 인물들에 한 뒷조사,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 감시, 남한을 겨냥한 간첩활동 조사, 북한에 대한 첩보 정보 수집, 그리고 이승만 통령이 지시한 특별 임무(special mission)를 수행하는 것 이었다.79)

특별조사과는 군와 관련된 일상인 정보 수집을 넘어 간첩, 정치 사찰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이 때문에 미군은 특별조사과를 미군 방첩대와 가장 유사한 조직이라고 파악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가까워지면서 정보처는 인원을 확충하고 파견대를 늘려갔다.

1948년 7월 1일부로 조선경비총사령부는 정보처로 김점곤 를 비롯한 총24명을 발령했고,80) 9월 27일부터 10월 30일까지 37명의 장교와 장교 후보생을 교육하여 각 지대로 파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9월 15일, 조선경비가 육군으로 명칭이 바뀐 다음, ‘국방부 직제’(통령령 제37호, 1948.12.7. 공포)81)에 의거하여 육군본부에 ‘정보국’(Military Intelligence Section)’이 만들어졌다.

82) 정보국 장은 백선엽이 맡았고, 정보국에는 미군 소령, , 상사 1명의 고문관이 파견되었다.

미군 장교들은 국군 장교와 사관후보생에게 심문, 방첩활동, 정보수집 등을 교육했다.83)

제1과는 행정과고, 제2과는 대공 첩보공작 을, 제3과 특별조사과는 좌익세력을 검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보국 제3 과는 ‘대륙공사’라는 위장 이름으로 활동했다.

1948년 11월 10일부터 1949 년 3월 1일까지 전남북, 부산, 진주에 파견대가 조직되었고, 1949년 1월까 지 전국에 총15개의 파견대가 설치되었다.84)

요원 확충도 이루어졌는데, 1948년 9월에 한국 육군과 해군 장교, 간부 후보생들이 1개월 동안(9.27~10.30)의 방첩대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다. 미 방첩 고문관들은 ‘특무과’ 과정을 신설하고, 서울 을지로(황금정)에 있는 신사 터에 교실을 만들었다.

교육생들에게는 교육과정이 끝나면 자신 들이 속한 지부로 돌아가 파견대를 조직하게 될 것이고, 조직의 세부 사항 은 그들의 책임 하에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 받았다.85)

육군본부 정보국은 ‘군사정보, 역정보 정첩에 한 사항’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86) 민간 사찰 기관 설립이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정보국의 역할과 임무는 계속 넓져 갔다.

육군 정보국이 활동 범위를 넓혀 간 이유는 제주사건, 여순사건이 발생 하면서 정치 상황이 혼란해지고 정부가 위기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남북 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좌익세력 정보 수집과 조직 파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군 정보기관의 역할은 여순사건 같은 군 내부 반 란사건이 터지면서 확대되었다.

제주 9연대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 여수 에 주둔한 14연대 전체가 봉기한 여순사건, 연이은 대구 6연대 군인들의 봉기는 군내 좌익세력을 확실히 척결하지 않고서는 정부가 존립할 수 없 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었고, 이에 따라 정부와 군 지휘부는 대대적인 숙 군을 결심하게 되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한 몇 일 뒤, 정보국은 특별정보를 조직했다. 1948년 11월 1일, 김안일 대위가 초대부대장이었던 정보국 특별조사과는 특별정 보대(SIS, Special Intelligence Service)로 개칭되었고, 권한도 커졌다.87)

특별정보대에는 수사 경력이 있는 43명의 육군과 7명의 해군을 1948년 12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 약2개월간 육사에서 교육해 배치했 다. 1948년 12월, 제971방첩 지대 요원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철수했지만 기간 요원들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미군 방첩대가 남한 거주민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경험과 정보는 그대로 육군으로 이어졌다. 육군 방첩대는 주한미군 방첩대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방첩활동에 필요 한 여러 가지 노하우를 수받았다.

미군은 한국 방첩대에 대한 역사를 서 술하면서 “미 CIC 장교들이 초기 한국군 CIC 조직과 훈련 담당”했고,88) “1948년 말 미국 방첩의 기능은 이전되었다.

방첩 문서 부분은 이 조직으로 넘어갔다”고 밝히고 있다.89)

육군본부 정보국이 강화된 계기는 군내부의 좌익인물을 척결한 ‘숙군’ 이었다.

여순사건 뒤 군내 좌익세력을 적발한 정보국 특별정보대는 요원을 강화하여 숙군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러나 정부 수립 기만 하 더라도 군은 경찰로부터 숙군 대상자 명단을 통고받아 수사에 착수했을 정도로 정보기관의 정보력과 경험은 아직 경찰에 뒤져 있었다.

정부수립 직후에 군 정보기관은 조직으로 완비되지 못하고, 정보력에서도 뒤지 고 있었다.

그러나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본격으로 시작된 숙군은 군 정보기관을 경찰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관으로 변화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특별정보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군에 있는 친공산 주의자 척결(purge of pro-communist elements)이 되어 갔다.

여순사건 진 압 후, 숙군에 앞장선 특별정보대는 김종석, 최남근, 오일균 등을 검거하고 이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라 1948년 11월부터 다음 해 9월까지만 하더라 도 군인 570여 명과 민간인 85명을 검거했다.90)

여순사건 직후부터 시작된 숙군은 육군 정보국 제3과장 김안일의 지휘 아래 김창룡, 이세호 등이 가담한 특별조사반 주도로 이루어졌다.

정보국 은 숙군작업을 성공으로 수행하기 위해 1949년 1월 2일 정보국 산하 15 개 파견대를 군 주둔지역에 설치하여 기구를 확장했다. 숙군이 진행되면 서, 김창룡 중령뿐만 아니라 오제도 검사 등이 참가한 군․검․경 합동수 사대를 조직하여 색출에 나섰다.91)

숙군으로 김종석(제6,2연대장), 오일균(제2연 대장), 최남근(제15연대 장), 박정희9육사 중대장, 반란군토벌사령부 정보참모 보좌) 등의 고위급 장교들이 검거되었다.

숙군은 군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군에서 좌익을 제거하는 작업 은 남로당․북로당원 검거와 민간인들까지 확대되었다.

특별정보대는 1950 년 남한에 침투한 거물간첩 성시백을 검거하고, 간첩활동에 연루된 혐의로 민간인 135명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숙군은 구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좌익 혐의자, 동조자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검거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무차별 검거 와 고문, 자백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군 정보기관의 발전 역사에서 볼 때, 숙군은 군 정보기의 역량(정보수집, 색출, 검거 증거수집)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결정적 계기다.

왜냐 하면 ‘숙군’이란 어제까지 자신의 동료이던 사람을 좌익혐의자=적으로 간 주하고, 이들을 처벌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동료를 하루아침에 적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다루어 본 경험은 방첩대가 민간인 검거와 처벌에 거칠 것 없이 나설 수 있게 만든 중요한 토대다.

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적을 다루는 것은 ‘내부의 적 ’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1949년 10월, 정보국 특별정보대는 제2과 방첩대(Counter Intelligence Corps)로 개칭 변경되었다.

10월에는 숙군 작업을 효율으로 진행하기 위해 오제도가 참가하는 군경합동수사본부를 정보국 제2과(방첩대)에 설치하였다.92)

한국전쟁 초기에 활동한 부대는 방첩대이다.

2. 한국전쟁기의 방첩대 활동과 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발발하기 전 방첩 조직은 전국 주요 도시에 만들어져 있었 다.

1949년 상반기부터 중반기 동안 특별정보대(SIS)는 대부분의 지역마다 파견대를 조직했고, 이때 만들어진 지방 조직은 그로 방첩대로 이어졌 다.93)

전쟁이 발발하자, 방첩대는 일단 수원에 집결하여 무너진 조직을 추스르고 임시시체제를 마련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군 방첩대는 헌병이나 경찰 등의 다른 기관을 완전히 배제한 채, 간첩․이적․반란 등과 관련된 ‘사상범’ 척결을 자신의 영역으 로 간주하고 배타적으로 처리했다. 방첩대는 관계기관을 완전히 장악하여 다른 기관이 이런 업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군대가 사법과 행정권을 장악하는 계엄이 발포되면서 방첩대는 경찰을 지휘하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전황이 불리했던 전쟁 초기에 전국에 산재했던 방첩대 조직은 없어지거나 재조정되었는데, 이게 전황이 불리한 상황에서 요주의 인물에 대한 정치 학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방첩대는 이적․전복 행위의 ‘우려’가 있는 사상범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에서 좌익 전향자로 구성된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으로 약칭함)과 ‘정치범’으로 간주된 형무소 수용자들은 이적성이 가장 우려되는 집단이었다.

이 두 집 단에 한 처리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94)

충남서부지역 보도연맹원 학살, 괴산․청원지역 보도연맹원 학살, 경산 코발트산 집단학살 등 전국 곳곳의 보도연맹원 학살에는 거의 부분 방첩대가 개입했다.

방첩대가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는 후방에서 서울, , 부산, 마산, 대구, 진주의 형무소 재소자를 학살하였다. 보도연맹원들을 체포, 연행하고 학살을 집행할 때 방첩대원은 헌병이나 지역 경찰과 함께 행동했다.

방첩대는 타 기관에 대한 장악력을 바탕으로 보도연맹원 체포를 지시하거나 학살 명령을 내리는 핵심 주체다.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부역자들은 처벌의 근거가 되는 이적성이 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채 처벌되거나 학살되었다.

그들을 규정한 것은 방첩대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없애는 작업은 방첩대 조직에 의해 이루어 졌다. 한국쟁 초기에 후퇴를 거듭했던 특무 조직은 상황에 맞게 몇 번에 걸쳐 조정되고 확대되었다.

부산 지역의 경우를 보면, 원래 1949년 8월에 창설된 부산지구 방첩대95)는 1950년 8월 경남지구 방첩대로 개칭하였다.

경남지구 방첩대의 부대장은 김창룡 중령이 맡았다.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은 8월 29일 모든 조사 기관을 일원화하여 경남지구 방첩 본부에 종속시킬 것을 지시하여, 경남지구방첩는 부산 지역 뿐만 아니라 경남지역의 모든 방첩 업무를 통제하였다.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계엄사령부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방첩대는 서울 수복 후 ‘경인지구 방첩대’(부장 김창룡)를 발족시키고 적극적인 ‘부역 자’ 색출작전에 나섰다. 전쟁 직후 피난길과 후방에서 벌어졌던 보도연맹, 형무소 재소자 학살이 서울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로 다시 벌어졌던 것이 다.

수복 뒤에 대대적으로 진행된 부역자 처벌은 보도연맹원, 형무소재소자 학살의 연장선에 있었다.

이미 1949년 검찰․경찰 합동으로 숙군 작업 을 경험한 방첩대는 부역자 처벌을 주도했다.96)

‘부역자’ 처벌을 주도했던 것은 10월 7일 만들어진 군․검․경 합동수 사본부다.

경인지구 계엄사령부 명령에 의거 서울 국일관에 설치된 군․ 검․경 합동수사본부(1950.10.7. ~ 1951.5.25.)의 본부장은 김창룡이 맡았 다.

합동수사본부 지휘부에는 오제도, 안문경, 정희택 등의 검사들과 경찰 이 참가했지만, 이를 주도한 것은 김창룡 본부장과 정보장교들이었다.

군 정보 기 관인사들은 합동수사본부 활동을 통해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었 다.

합동수사본부는 곧 국회에서 “아무런 법 근거 없이 만들어졌으며 많 은 사건을 조작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규탄 받고 1951년 5월 해체되었지만, 김창룡은 부역자 처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특무부대장으로 영전 되었다. 여러 번의 학살을 경험한 주민들에게 국군 방첩대는 경찰과 함께 공포 의 대상이 되었다.97)

방첩대는 정보를 빼내기 해 많은 야만(brutal) 수 단을 사용했고,98) 몇몇 요원들은 민간인을 강탈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악하고 있던 미국 방첩대들 중에는 국군 방첩대의 잔인함 때문에 이들이 수집한 정보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99)

합동수사본부를 중심으로 한 부역자 색출․처벌의 선풍이 일어나고 있 던 1950년 10월 정보국 제2과(방첩과)를 정보국에서 분리하여 특무부대 본부가 설치되었다.

10월 21일, 국방부 일반명령 91호에 따라 특무부대 (Special Operation Unit)는 육군본부 직할부로 독립하게 되었다.100)

특무 부대는 일명 ‘1348부대’로 불렸고, 김형일이 부대장을 맡았다.

조직 형식으로 볼 때, 특무대는 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작전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무대가 정보국내의 1개 과의 지위에서 탈피하여 독립부대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정보국의 직접관 리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특무대의 힘이 커나갈수록, 특무대는 정보참모부와 거 의 협력하지 않았다.101)

실제로 정보참모부의 감독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 보참모부와의 연락은 특무 사령관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육군총참모장 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보고를 받았지만, 보고가 일상인 것은 아니 었다.

1951년 3월 당시 특무대 조직원 수는 장교, 요원, 행정 사병을 포함하 여 약400명 정도지만, 파견대들이 각각 지역의 필요에 따라 190명의 민 간 정보원을 고용하고 있어서 약 590명의 인원이 특무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102)

특무 장교들은 주로 여러 지부에서 자체적으로 충원되었고, 대부분의 요원들은 일본군에서 사병이나 장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요원들에 대한 훈련은 1주일간의 기본 수사 방법을 교육하는 것으로 끝났다.

초기 국군의 요원 교육 코스가 한 달 정도 되었던 것에 비해 비교하면 단기간의 교육만으로 요원을 배치했던 것이다.

중앙의 특무 조직은 방첩대는 모두 5개팀으로 구성되었다. 제1팀 특 수작전팀(이옥봉중령)103)은 군내부와 지역에 정보원들을 이용하여 특별감시임무를 수행했고, 정치경제팀(김용금 중령)은 문화․예술․음악․연 극․언론․라디오 분야의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정당 활동을 조사했다.

조 사․안보팀(이우종 소령)은 주요 인물의 배경을 조사하고 보안 관련 사항을 조사하고 신분증명 일과 사진, 지문을 보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외사(주조선 소령)은 외국인들과 외국인 조직을 담당했다.

이밖에도 제5팀으로 총무팀(조덕현대위 )이 있었다. 각팀 은 3~4명의 장교와 사병 그 리고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다.104) 특무대 하부 조직은 전국 9개 지역(경기도 안양, 충청북도 청주, 충청남도 대전 , 전라북도 전주, 전라남도 광주, 경상북도 대구, 경상북도 보조 포항, 경상남도 부산, 경상남도 보조 마산, 제주도의 제주, 충청북도의 영주팀)에 조직되었다.

지역 말고도 육군 3개 군단과 전방사령부에 각각 전술부대 파견대가 배치되었고, 각 군단․사단별로도 파견대가 조직되었다.

특무부대의 임무는

(1) 간첩․사보타지․전복을 목적으로 한국군에 침투 한 적과 적대분자의 활동을 저지․파괴,

(2) 반역․선동․복 활동에 한 증거 탐지, 한국군이 운영하는 시설에 고용되거나 속해 있는 민간인 들의 불만 탐지,

(3) 군인 한국군 할권 내에서 신뢰할 위치에 있는 민간인의 배경을 조사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105)

하지만 실제로 특무가 수행한 역할과 임무는 실제로 매우 광범했 고, 한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간첩․오열색출, 파괴자 적발, 정보 수집은 기본인 임무지만, 상부의 특정한 비명령을 수행하면서 정치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기도 했다.

육군 특무 활동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특무대가 군인(군)을 대상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사찰, 정보수집, 색 출활동을 광범하게 펼쳤다는 것이다.

미군은 평시와 전시에 육군 방첩대 의 수사 권한은 군인뿐 아니라 모든 민간인들에게까지도 확대되며, 그것은 각 기관들의 수사 관할권의 경계를 명확히 규정한 협약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법으로는 이미 관할권이 규정되어 있었다.

‘헌병과 국군정보기관의 수사한계에 관한 법률’(법률 제80호, 1949. 12. 19)에 따르면, 국군정보기관의 소속원과 방첩대원은 군인, 군속의 범죄만 을 수사할 수 있었으며 군사 는 군인에 관련한 일반인의 범죄에 해서 는 구속은 할 수 없고 검사의 지휘명령에 복종해야 했다.107)

이 법률이 제 정된 이유는 방첩대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수사하는 폐단을 막는데 있었지만, 한국쟁이 발발하자 방첩대의 민간인 수사․체포 권한 이 인정되었다.

국방부장관이 정보국장과 헌병사령관에게 지시한 업무 지시를 보면, 정 보국 소속 방첩대원에게는 사상범, 적 유격대원, 적포로 등에 대한 수사 를 주관하고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헌병, 경찰이 이들을 체포 했을 때에도 신병을 즉시 인도하도록 함으로써 방첩의 배타적 권한을 명시했던 것이다.108)

이로써 1년 전 제정된 법률은 완전히 무효가 되었고, 방첩대 권한은 다른 어떤 수사기관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방첩 활동이 좌익세력을 사찰하고 이들의 활동을 저지한 것은 이미 미군정 시기부터다.

숙군이 광범하게 진행되던 시기에도 좌익 민간인 에 대한 수사는 방대첩 활동의 주요한 대상이었다.

육군 방첩대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범을 처리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전쟁 직후부터 재빠르게 이루어진 보도연맹원, 재 소자 학살은 방첩대 임무 수행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미군은 전쟁 초기에 한국 방첩대는 남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세력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아닌 반대자들까지 아무런 재판 없이 수많은 처형을 저질렀다고 지적하면서 남한의 방첩대가 ‘비효율적’이 며 ‘비협조적’이고 ‘잔인’하다고 평가했다.109)

미군 방첩대원들은 ‘국군과 정부 관리들이 재판 없이 처형을 계속’했으 며 ‘처형된 사람들이 항상 전복적인 것은 아니었고, 이승만에 반했던 비 공산주의자들도 죽음을 당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참한 상황은 ‘자주 방첩 작전의 효율성을 손상’시키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여졌다.110)

한 요원은 ‘한국 방첩대의 활동은 매우 효율적이었고 무제한이었으며 심문에서 가장 심한 동양(oriental) 경찰국가의 방식을 사용하는데 주저 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효율적인 것’과 ‘폭력적이고 동양인 방식’이 묘하게 결합되었음을 보게 된다.111)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한 미군 방첩대원들에게 한국 민간인에 한 학살 은 인간적으로 동정하고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하기보다는 작전의 효율성 을 저하시키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방첩대원들의 인터뷰 기록을 보 면, 관료적이고 군사적인 문화와 규율에 익숙한 미군 방첩대원들이 업무의 효율성에 민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군 3사단 군사고문단원 에머리치(Rollings S. Emmerich)중령이 쓴 비망록은 한국정부가 형무소 재소자 학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려 뿐 만 아니라, 미군이 이러한 학살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문서에 따르면, 한국군 3사단 23연대장 김종원의 군사고문인 푸트만 (Gerald Putman)대위는 1950년 7월 1일 김종원이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3,500명을 학살하려는 징후를 포착했다.

푸트만 는 이 사 실을 사단 고문단에 보고했고, 군사고문단은 김종원의 시도를 제지했다.

그러나 군사고문단은 인민군이 부산 외곽에 이를 경우라는 단서를 달아 김종원의 요청을 사실상 승인했다.

1950년 7월 4일, 대구의 군사고문단원 리어리(Mario Paglieri)대위는 국군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혐의자 4,500명을 학살하려는 것을 알았다.112)

군사고문단이 대구로 급파되어 경북도지사, 시장, 도경국 장, 3사단장과 대량학살을 막기 해 논의했고 학살계획을 저지했지만, 부 산과 대구형무소에서는 그 후 재소자 학살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미군 방첩대와 육군 방첩대는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는데, 이 관계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는 육군 방첩대원을 미군 방첩대에 파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기적인 업무 연락망을 통해서 다. 육군 방첩대 요원들의 일부는 미군 방첩대 지대에 배속되었기 때문 에 이들은 서로 함께 일했다.113)

보통 육군 방첩대 요원들은 미군 방첩대 를 위해, 혹은 협력관계 속에서 조사, 정보원, 피난민 심사, 통역, 연락 요원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114)

또한 미군 방첩대는 전국 차원에서 육군 방첩대와 긴밀한 연락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군 방첩대 매일 임무 에는 상대격인 육군 방첩대, 경 찰, 정부 관리들 간의 연락이 포함되어 있었다.

115) 양자는 협조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 또는 미군 방첩대는 국군(방첩 대)의 민간인 학살 행위를 걱정했지만, 이를 공식으로 비난하거나 저지 시키지 않았다.

특무 활동이 눈에 띄게 성장하면서, 조직 위상도 높아갔다.

특무대 초기에는 육군 정보국장이 특무대장을 겸임했지만, 1951년 5월 김창룡이 특무대장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전임 부대장이 되었다.

김창룡이 특무대장 이 었던 시기에 특무대 활동은 군부 내 상관이 아니라 이승만 통령에게 직 보(直報)했다.116)

이런 상황 때문에 김창룡 특무대장은 참모총장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무대 조직은 후에 더욱 더 커져갔다.

김창룡이 암살된 직후에 작성 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1956년에 특무대에는 특무과, 조사과, 내정과 등 모두 5개의 과가 있었다.

특무대 본부는 ‘1928부대’로 불렸다.117)

1956 년 3월 1일 현재, 특무대 인원은 4,083명이었고 전국의 전술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중요한 곳에 총27개의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

1951년 3월에 특무대원 수가 약 400명 정도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 10배 이상의 큰 조직 팽창이 이루진 것을 알 수 있다.

1956년 특무대의 예산은 1억 8,500만 환이었지만, 대통령 선거의 해를 맞아 선거활동을 해 4,200만원이 추가예산으로 지원되었다.118)

대규모 예산이 지원될 만큼 특무의 정치개입은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대한 간첩 파견과 정보․첩보 수집은 미군정시기 방첩대가 수행 하던 주요한 임무 의 하나이고, 이는 육군 방첩대(특무대)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북한 첩보 임무의 전문성이 필요해졌 고, 이에 따라 1951년 3월 25일 북파 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첩보부대 (HID,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가 정보국으로부터 분리되 어 창설되었다.

첩보부대는 육군본부 정보국의 지휘를 받는 조직으로서, 특 무대와는 별도의 조직이었다. 북파공작은 첩보부 창설을 통해 전문화 되 었지만, 대북 공작은 미군과 국군의 다양한 기관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일명 ‘4863부대’라 불린 첩보부대의 부대장은 이극성(李極星) 중령 이었고, 부부대장은 차호성(車虎城)이었다.

부대장은 1951년 7월 이후락(李 厚落) 대령으로, 9월에는 박경원 대령으로 교체되었다.

첩보부대는 산하 조직으로 행정과, 공작과, 의무, 첩보를 두었고, 각 지를 두어 활동 했다.

북파공작원 다수는 육군 첩보부대 출신이었는데, 육군첩보부대 (HID)를 창설 뒤 1994년까지 양성된 북파공작원 수는 약 1만 3,000여명에 달했다.

남한 방첩 활동에서 중요한 특징 의 하나는 방첩대의 정치 개입 이었다. 방첩대는 다른 어느 조직이나 정치세력이 할 수 없는 정치 공작을 손쉽게 하곤 했다.

정치 개입은 김창룡 특무대장시에절정에 달했다. 육군 방첩대는 고위급 정치인이 지시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 다.

이러한 임무는 정치 지도자와 반정부 조직을 뒷조사하거나 필요한 공 작을 수행하는 임무다.120)

특무대는 내무부 장관이나 대통령으로부터 부여된 특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 나갔던 것이다.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은 이같은 종류의 특무대 활동을 대표하는 인물이 라고 할 수 있다.

‘타공전선(打共戰線)의 제1인자’ 노릇을 했던 김창룡은 상관인 참모총장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교활하기가 그지없다 하여 ‘스네이크 김’, 냄새 잘 맡고 한번 물면 잘 놓질 않으며 주 인에게 충성스럽다하여 ‘진돗개’, 포악하기가 네로 황제와 비슷하다고 해 서 ‘폭군 네로’ 등의 별명이 붙었다.121)

그는 이승만 통령의 전폭신뢰를 받으며, 전국 정보망을 가진 육군 특무대를 ‘경무대의 비경찰’로 만들었다.

김창룡이 허태영에게 암살된 1956년 1월까지 일어났던 큼직큼직한 정치적 사건이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정치 개입은 이승만에게 적대인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공작에서 극대 화되었다.

이승만의 정치 경쟁자던 조암암을 두 번씩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지 못하도록 한 일이나,122) 1953년에 족청계를 제거하기 해 정국은을 간첩활동 혐의로 체포한 것은 특무대의 정치 공작을 보여주는 대표인 사례이다.

김창룡 특무대장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조직적으로 사건을 조작하거나 불온한 사건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극우정객과 연합하여 이승만 정부를 무뜨려 한다는 ‘혁명의용군 사건’,123) 1952년 발생한 부산정치동124)에서 계엄을 선포하기 해 대구형무소 죄수들을 공비로 위장시켜 소란을 일으킨 이른 바 ‘부산 금정산 공비위장사건’은 김창룡이 꾸민 공작이었다.125)

좌익세력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은 특무대 조직의 장이 불온한 ‘빨갱 이’, ‘공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들 사건은 실체로서의 적을 대상으로 한 방첩 행위라기보다는, 적을 만드는 ‘공작’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김창룡의 헌신 공작은 이승만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정권 수호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공로로, 1953년에 준장, 1955년에 소장으로 승진하는 순탄한 승진의 길을 걸었다.

아마도 김창룡은 군인 중에서 가 장 단기간에 진급한 경우일 것이다.

장교 생활기간 동안 그가 한 계급을 오르는 데에는 평균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126)

전국 정보망을 가진 방첩대를 가지고 경무대의 정치 이익에 봉사하 던 김창룡은 시일이 지나면서 그 자신이 권력을 꿈꾸게 되었다.

국방부장관 과 참모총장까지도 무시한 무소불위의 행동127)은 이승만의 총애는 이끌어냈으나 군부 내에 많은 적들을 만들게 했고, 이는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가 되었다.128)

1950년대 방첩 활동에서 김창룡이라는 인물의 활동상이 두드러져 보이긴 하지만, 방첩대가 자행한 전쟁 직후 민간인학살과 정치개입 활동은 방첩대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즉 그러한 업무를 수행한 요원과 정보원이 없고 재정 지원이 없었더라면 사실상 불가능한 규모의 국가 업무다.

제주도 예비검속사건의 유가족인 이도영이 김종필(당시 정보국 근무)을 만났을 때, 김종필은 형무소 등 정치범 처형 사건은 “‘CIC의 김창룡 장군이 했다’고 나중에 대구에 가서 들었다”고 증언했다.129)

민간인 학살 의 책임과 원한이 김창룡 개인에게 모두 돌아갔던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죽은 자’와 한 ‘개인’에게 모든 역사 책임을 묻는 것은 국가 책임을 회피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Ⅳ. 맺음말

미군 점령기에 활동했던 방첩대는 남한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정치세력 을 대상으로 첩보활동을 수행했다.

반공 국가 수립이라는 전략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미군은 다른 정치세력보다 좌익세력 활동에 민감했고, 이 때문에 좌익조직에 정보원을 심어 이들의 각종 활동을 파악하는데 활동의 역점을 두었다.

미군 방첩대의 조직 활동과 경험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에 그대로 이전되었다.

정보기관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은 정부 수립을 직 후로 대한관찰부-TIS-대한정치공작 등의 정보기관을 설립하고자 시도했 다.

이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군과 이승만은 군 방첩 조직을 결성 하는데 주력했고, 이러한 노력은 육군 정보국 특별조사과 창설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별조사과는 그 뒤 특별정보, 방첩, 특무로 이어지면서 첩보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특무대는 육군본부 직할 부대로 성립되어 조직 위상이 높아졌고, 이로 인해 김창룡이 주도한 특무대는 1950년대에 정 치 개입을 주요한 활동의 축으로 삼게 되었다.

특무대는 1960년 4․19가 일어난 뒤 이승만정권기의 오명을 씻어내고자 1960년에 육군방첩부로 개칭되었고, 그 뒤에도 몇 차례의 개칭을 거쳐 현재의 국군 기무사령부가 되었다.130)

그러나 방첩대 -이 이름보다 일 반인에게 더 익숙한 이름은 CIC이다- 가 존재한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 다. 정식으로 방첩대(CIC)라는 조직 이름이 사용된 것은 1949년 10월부터 1950년 10월까지 1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국군 정보부 를 ‘CIC’로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CIC가 한국전쟁기에 남긴 혈흔이 그만 큼 깊었으며, 피해자와 일반 국민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아로새겨졌기 때문 이다.

방첩대는 일정 시기에 활동했던 국군 정보부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 니라, 방첩 임무를 담당하는 부대전체를 포괄하여 일컫는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군 첩보기관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군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사회에 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이후락은 5․16쿠데 타를 일으킨 주도세력이었고, 군부 쿠데타가 성공함에 따라 군 정보기관에 근무한 경력자들은 이후 사회 요소요소에 진입했다.

첩보기관이 수행했던 임무가 사실상 사회를 대상으로 한 첩보수집과 공작이었기 때문에, 군 에서 사회로의 이전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국쟁 전후 시기에 육군 정보국에서 일했던 김종필은 쿠데타가 성공 하자 미국의 도움을 받아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이는 방첩대가 수행한 민간인 조사, 정보수집 역할을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정부 조직으로 제도화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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