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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발해(渤海)-거란(契丹) 전쟁의발생배경과 전개과정 /강성봉.성북문화원

Ⅰ. 머리말

Ⅱ. 8~9세기 발해-거란의 관계

Ⅲ. 10세기 초, 거란의 요동진출 과정과 발해의 대응

Ⅳ. 발해-거란의 전면전 전개과정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926년에 멸망하였다. 이는 9세기 후반부 터 10세기에 접어드는 동북아시아의 긴박한 국제정세의 흐름과 무관 하지 않았다.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 시기는 당(唐)이 쇠퇴하고 거란이 성장한 시기였으며,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으로 나누 어지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로 인해 기존의 연구성과는 220여 년 동 안 왕조를 유지해 온 발해가 왜 갑작스럽게 멸망하였는지에 대한 원 인을 규명하려는 데 집중되었다. 먼저 소수 고구려유민과 다수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사회구성의 문 제1), 발해통치체제의 와해2) 등과 같은 내분설이 있었다. 한편 당의 쇠퇴로 인한 책봉체제의 붕괴,3) 거란의 군사력 우위와 기습공격,4) 백두산 화산폭발5) 등의 외인설이 있었다.

1) 토착 수령(首領)들이 고구려 시기부터 유지해 온 지배권을 그대로 인정받는 형 태로 발해의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토착세력의 잔존이 발해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거란에게 쉽게 망하게 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河上洋, 1983, 「渤海の地方統治體制-一つの試論として-」 東洋史硏究 42-2).

2) 鳥山喜一, 1915, 渤海史考, 東京: 奉公會, 62쪽 ; 박시형, 1979, 발해사, 김일성 종합대학출판사(송기호 해제, 1995, 발해사, 이론과 실천, 97~110쪽) ; 송기호, 1987, 「발해 멸망기의 대외관계-거란・후삼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사론 17, 84~87쪽 ; 李龍範, 1988, 「渤海王國의 社會構成과 高句麗遺裔」 中世 滿洲・蒙 古史의 硏究, 同和出版公社, 51~52쪽 ; 나영남, 2011, 「10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契丹의 요동정책 -東丹의 설립과 그 통치정책-」 역사문화연구 39, 75~77쪽

3) 大隅晃弘, 1984, 「渤海の首領制-渤海國家と東アジア世界」 新潟史學 17 ; 王承 禮 저, 宋基豪 역, 1987, 발해의 역사, 翰林大學아시아文化硏究所, 205~207쪽 ; 방학봉, 1990, 「발해멸망의 원인에 대하여」 발해사연구 1, 연변대학출판사

4) 김은국, 1999, 「渤海滅亡의 原因」 高句麗硏究 6 ; 이효형, 2007, 발해 유민사 연구, 혜안, 60~62쪽 ; 김기섭, 2008, 「발해의 멸망과정과 원인」 韓國古代史 硏究 50, 103~129쪽

5) 水谷慶一, 1988, 「まぼろしいの渤海」(上,下) 東アジアの古代文化(上,下)(55春,56 夏), 大和書房

하지만 내분설과 외인설로 양분하여 발해의 멸망원인을 찾기 보다는 다양한 요인들을 복합적으 로 고려하여 발해 멸망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구체적인 역사적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거란의 공격과 발해의 대응이라는 관점 에서 발해-거란 전쟁의 발생배경과 그 전개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발해와 거란이 왜 전면전을 치르게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 발 생요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발해 건국과정에 있어서 거란과의 관 계는 밀접한 관계였다. 즉, 발해건국세력이 영주(營州)로부터 탈출 한 것은 바로 이진충(李盡忠)을 필두로 한 거란의 난으로 인해 발생 한 것이었고, 또 동주과정(東走過程)에서도 거란과 일정한 협력이 있었다. 발해 건국 이후에도 당과의 천문령(天門嶺)전투 및 마도산 (馬都山)전투에서 발해와 거란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 신당서(新唐書)발해전의 내용처럼 부여부 (扶餘府)에 항상 강한 군사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고 있었다. 이 후 천찬 4년(925) 12월 을해일에는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가 발해공격에 나서는 조서를 발표하고서, 군사를 일으켜 친히 발해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를 통해 8세기부터 10세기 초 사이에 발해와 거란은 어떠한 상황변화가 있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또한 거란이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내부 권력투쟁의 양상 및 발해 의 침공과정을 면밀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발해에서 거 란을 방비하기 위한 대응책을 어떻게 전개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발해-거란 전쟁6)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6) 본고에서는 ‘발해-거란 전쟁’의 시기 구분을 908년 거란이 鎭東海口에 진출하 면서부터 요동지역을 둘러싼 쟁탈전의 시기와 925년 12월 거란이 전면적인 공 격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발해 멸망에 이르는 시기까지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요사(遼史) 본기와 열전, 병위지, 영위지, 지리지, 속국 표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헌자료를 검토하고 이에 대한 사료의 재 구성을 실시하고자 한다. 아울러 발해를 공략했던 장수 「진만묘지 (陳萬墓誌)」를 적극 참고한다면 발해-거란전쟁의 추이를 보다 면밀 히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Ⅱ. 8~9세기 발해-거란의 관계

발해는 거란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 하지만 발해는 건국과정 에 있어서 거란과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였다. 영주로부터 탈출은 바 로 거란의 난으로 인한 틈에서 발생한 것이었고, 또 동주과정에서도 거란과 일정한 협력이 있었다. 당의 측천무후는 발해의 건국집단을 이진충의 ‘여당(餘黨)’이라 표현하면서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7)

7) 舊唐書 卷199下, 渤海靺鞨傳 “盡忠旣死 則天命右玉鈐衛大將軍李楷固率兵討其餘 黨 先破斬乞四比羽 又度天門嶺以迫祚榮”

이 는 발해 건국집단과 이진충을 비롯한 거란 집단 간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이 천문령전투에서 대조영을 비롯한 발해건국세력에게 대패를 당한 후 계속해서 추격하지 못했던 것도 돌궐(突厥)에 거란 및 해 (奚)가 투항하여 도로가 끊겼기 때문이었다.8)

8) 舊唐書 卷199下, 渤海靺鞨傳 “又度天門嶺以迫祚榮 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王師大 敗楷固脫身而還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絶 則天不能討” ; 新唐書 권219, 渤海傳 “楷 固窮躡 度天門嶺 祚榮因高麗靺鞨兵拒楷固 楷固敗還 於是契丹附突厥 王師道絶 不克討”

거란은 자립하지 못하 면서 돌궐에 의지하였지만, 발해는 건국 이후 돌궐과 통교를 하였다. 발해는 건국 후 대외교섭을 통하여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돌궐과 교 섭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은 개원(開元) 8년(720) 9월에 좌효위낭장 섭낭중(左驍衛郞將攝郞中) 장월(張越)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내, 해 와 거란이 은혜와 의리를 배반하였다고 하면서 토벌을 요청하였다.9)

9) 冊府元龜 卷986, 征討5 “唐玄宗開元八年九月 遣左驍衛郞將攝郞中張越使于靺鞨 以奚及契丹背恩義 討之也”

하지만 발해가 이를 따랐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는 발해가 건 국과정 속에서 거란과 함께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형세를 이루어 일종의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발해의 당 등주(登州) 공격과 관련해서도 발해와 거란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당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포섭하여 726년에 흑수 부(黑水府)를 설치하고 당의 관리를 파견하였다. 발해 무왕(武王)은 이를 놓고서 당과 흑수말갈이 연결된다면 발해는 위기에 처해질 것 으로 판단하여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게 된다. 하지만 명령 을 받은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이를 반대하고 당으로 망명한 사건 이 일어났다. 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동생 대문예의 죄상을 말하고 그를 죽여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당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한편 이 러한 상황 속에서 당에 사신으로 간 거란 사신 가돌우(可突于)가 푸 대접을 받고서, 730년 5월 이소고(李邵固)를 죽이고 해와 함께 돌궐 에 투항하여 당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거란은 다시 730년 6월 영주 를 침략하였고, 732년 2월에는 유주(幽州) 북쪽을 공격하였다. 이러 한 국제적 배경 속에서 발해는 당의 압박에 대해 대당강경노선을 선 택하였고, 개원 20년(732) 9월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를 선두로 등주자사 위준(韋俊)을 공격하고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10)

10) 발해는 흑수말갈과 대문예 문제를 당과의 통교를 통해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고 하였으나, 당은 오히려 흑수말갈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대문예 송환에 대해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어 무왕의 적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망하게 되고, 대문예가 당의 보호를 받게 되자 발해는 왕권이 위협당하는 상황에 처해져 당에 대한 대당강경노선을 택한 것으로 파악된다(김종복, 2009, 발해정치외교사, 일지사, 121~125쪽).

733년 윤3월에는 거란이 유관도산(楡關都山)에서 당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은 마도산과 동일한 지역이다. 즉 발해는 거란을 지원하면서 마 도산에서 당과 격돌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사료 A를 살펴보자. A (契丹은) 서쪽으로는 匈奴와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渤海와 얽혀있 어, 남겨진 무리를 모아 합쳤다. 우리에게 항복한 奚를 엿보았다. …突厥이 용맹하여 달아났고, 발해가 두려워 감히 나올 수 없는 형세였다.11)

11) 全唐文 卷352, 樊衡, 「爲幽州長史薛楚玉破契丹露布」 “(契丹) 西連匈奴 東搆 渤海 收合餘燼 窺我降奚… 突厥銳而逃 渤海懾懼 勢未敢出”

사료 A는 장수규(張守珪)가 개원 22년(734) 4월말에 거란을 물리 쳤을 때의 ‘노포(露布)’이다. 이를 통해 거란이 서쪽으로는 흉노와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발해와 얽혀있으면서 남은 무리를 불러 모았 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발해와 거란은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 항하면서 함께 대응하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12)

12) 김종복, 2003, 「발해는 왜 당을 공격했는가」 내일을 여는 역사 12, 152~153쪽

한편, 거란을 물 리친 당 장수 중에서 발해 출신 인물이 있어 주목된다. 발해 부여부 대수령 출신인 낙사계(諾思計)가 ‘공봉장군(供奉將軍) 노정빈(盧庭 賓)’이란 이름으로 당 장수로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음을 「낙사계 묘지(諾思計墓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전공으로 인해 낙사계 는 출세의 길로 승승장구 하였다.13)

13) 낙사계는 당 황제로부터 ‘노정빈’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으나, 묘지명의 수제 (首題)에는 ‘故投降首領諾思計’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을 생존에도 유지하였음 알 수 있다. 한편 낙사계는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했 을 때 함께 동행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김영관, 2011, 「渤海人 諾思計 墓 誌銘에 대한 고찰」 목간과 문자 7, 159~162쪽).

이후 발해와 거란의 관계는 사료 B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B 근래 卿의 표문에 突厥이 사신을 보내 연합하기를 요구하였다고 하니, 兩蕃을 공격하려는 모양이다. 奚와 契丹이 지금 이미 內屬 하여 돌궐이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서 이들에게 복수하려는 것이 다. 경이 따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어찌하여 사신을 방해하는 가. 아마도 사신을 포박한 모양인데 의리상 그러면 안 되는 것이 다. 이것이 人情인데 하물며 임금된 도리로서 그래야만 하겠는가. 하지만 경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알겠으니, 행동할 때마다 반드시 아뢰도록 하여라.14)

14) 文苑英華 卷471, 勅渤海王大武藝書 “近得卿表云 突厥遣使求合 擬打兩蕃 奚及 契丹 今旣內屬 而突厥私恨 欲濉此蕃 卿但不從 何妨有使 擬行執縛 義所不然 此 是人情 况爲君道 然則知卿忠赤動必以聞”

사료 B는 당 현종(玄宗)이 개원 24년(736) 3월경에 발해 무왕에게 보낸 칙서로서, 장구령(張九齡)이 작성한 것이다. 이를 통해 돌궐이 해와 거란을 공격하려는데 발해가 함께 하기를 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발해는 이를 거절하고 사신을 억류하였으며 이 사실을 당에 알렸다. 발해는 건국 초기에 돌궐과 교섭을 이루었지만, 거란을 협공하자는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발해와 거란은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거란은 천보(天寶) 11년(752) 8월, 안록산(安祿山)의 15만 대군을 맞서 싸워 물리칠 정도로 그 세력이 강성해졌다.15)

15) 舊唐書 卷200上, 列傳150上, 安祿山傳 “十一載八月 祿山倂率河東等軍五六萬 號十五萬 以討契丹 去平盧千餘裏 至土護眞河 卽北黃河也 又倍程三百裏 奄至契 丹牙帳 屬久雨 弓箭皆漲濕 將士困極 奚又夾攻之 殺傷略盡祿山被射 折其玉簪 以麾下奚小兒二十餘人走上山 墜坑中 其男慶緖等扶持之 會夜 解走 投平盧城”

특히 평 로(平盧)・범양(范陽)・하동(河東)을 관장하는 안록산이 난을 일으켜 중원을 진격하게 되자, 거란은 당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어 주변지역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에도 발해와 거란은 어떠한 무력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안록산의 반란군과 당 조정은 서로 발 해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발해는 양측에 개입하지 않으 면서도 756년에 수도를 중경(中京)에서 상경(上京)으로 옮겼다. 당은 안사의 난이 진압되기 직전인 762년 발해 문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 에서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진봉하였다.16)

16) 발해 문왕이 당으로부터 발해국왕으로 진봉된 것은 안록산의 난에 개입하지 않 은 것에 대한 대가이거나, 혹은 발해와 반란군의 접근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 일 수 있다(김종복, 2007, 「발해사의 전개와 영역변천」 발해5경과 영역변천, 동북아역사재단, 89~92쪽).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발해의 외교적 전술을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안록산의 반란군과 당 조정 그리고 거란의 동향 등의 긴박한 정세를 파악하면서 실리외 교를 펼치며 상경 천도 및 제도정비를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안록산 의 난 여파로 발해와 거란 관계는 우호관계가 아닌 자국의 입장에 따 라 관계가 설정되는 형세로 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해와 거란의 관계는 9세기 이후 변화된 양상이 보이기 시작한 다. 아래의 사료들을 살펴보자.

C-1

(발해의) 지방은 5경15부62주이다. …扶餘의 옛 땅으로 扶餘府를 삼고, 항상 강한 군사를 주둔시켜 놓고 거란을 막았다. 扶・仙 2州 를 거느렸다. …龍原 동남쪽은 바다에 연해있어서 日本道, 南海는 新羅道, 鴨淥은 朝貢道, 長嶺은 營州道, 扶餘는 契丹道이다.17)

17) 新唐書 卷219, 渤海傳 “扶餘故地爲扶餘府 常屯勁兵捍契丹 領扶仙二州 …龍原 東南瀕海日本道也 南海新羅道也鴨綠朝貢道也 長嶺營州道也 扶餘契丹道也”

C-2

太和 6년(832) 12월 무진, 內養 王宗禹가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 가 돌아왔다. 발해가 左右神策軍과 左右三軍, 120司를 설치했다 고 말하고, 그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18)

18) 舊唐書 卷17下, 本紀 文宗下. 한편, 당에서는 左右衛・左右驍衛・左右武衛・左右 威衛・左右領軍衛・左右金吾衛・左右監門衛・左右千牛衛의 16위와, 左右羽林軍・左 右龍武軍・左右新武軍・左右神策軍의 8군이 있었다(唐六典 卷24, 諸衛 ; 新唐 書 卷49上, 志39上 百官4上).

C-3

故 투항한 수령 낙사계, 황제께서 盧씨 性(姓)을 내려 주었다. 이름은 庭賓으로 范陽郡의 명망이 있는 집안 출신이다. 扶餘府 의 大首領(출신)이다. …천보7년(748) 5월 일 京兆府 萬年縣 □ 康坊의 마을에서 생을 마쳤다.19)

19) 「낙사계묘지(諾思計墓誌)」 “故投降首領諾思計, 勅賜盧性名庭賓望范陽郡, 扶餘 府大首領. …天寶七載五月 日, 終於京兆府 萬年縣 □康坊之里”[董延壽・趙振華, 2007, 「洛陽, 魯山, 西安出土的唐代百濟人墓志探索」, 東北史地(2007-2), 東北 史地雜誌社, 7~8쪽 ; 김영관, 2011, 앞 논문, 159~162쪽]

사료 C-1은 신당서발해전 기사로 장건장(張建章)의 발해국기 (渤海國記)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이다. 장건장은 806년부터 866년 까지 60년간 생존하였던 인물로, 833년 당 유주부(幽州府)의 파견을 받고 발해국을 방문하였다가 835년에 유주로 돌아갔다.20)

20) 「장건장묘지(張建章墓誌)」에 따르면 유주절도사의 휘하에 있던 그는 태화 7년 (833) 발해에 사신으로 가서 태화 9년(835)에 귀국 후 발해국기를 저술하였다 고 한다(河上洋 저, 임상선 편역, 1991, 「발해의 지방통치체제」 발해사의 이해, 신서원, 236쪽 ; 강성봉, 2015, 앞 논문, 138쪽).

이 시기는 발해 11대왕 대이진(大彛震) 시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9세기 초중반 의 발해 상황이 사료에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발해의 지방행정구역이 5경15부62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교통로 를 소개하는 가운데, 부여부를 거란도로 부르고 있다. 부여부는 부여 의 옛 땅이었고, 이곳에 항상 강한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거란을 방비 하였다. 발해의 행정구역을 설명하면서 군사를 주둔시키며 방비하는 지역은 부여부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발해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부여부를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언 제부터 부여부에 강병을 주둔하였을까? 사료 C-2는 당의 사신으로 발해에 갔던 왕종우(王宗禹)가 832년 12월에 귀국한 뒤 발해의 군사조직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당 조정에 보고한 기사이다. 이를 통해서 발해에서도 좌우신책군과 좌우삼군, 120사 등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

21) 舊唐書 卷17下, 本紀17下 文宗下, 太和 6년 12月 戊辰

중요한 것은 발해에서도 당의 좌우신책군과 같은 금군이 새롭게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대이진이 11대 왕으로 즉위한 해가 831년임을 감안할 때 좌우신책군과 같은 군사조직은 10대 선왕(宣王)인 대인수(大仁秀) 시기에 성립되 었음을 유추할 수 있겠다.22)

22) 강성봉, 2015, 앞 논문, 139쪽

따라서 사료 C-1의 신당서발해전에 나오는 부여부에 강병을 두고 거란에 대비한 시점 또한 선왕대에 이 루어진 군사조직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발해의 대외 정복활동은 선왕 시기에 거의 마무리되었고, 5경 15부62주의 행정 구역이 이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23)

23) 발해 선왕대에는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말갈제부를 공략하여 군읍을 설치하였 다. 회원부와 안원부는 이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송기호, 1995, 발해정치 사연구, 일조각, 147~152쪽 ; 김종복, 2009, 앞 책, 200~205쪽).

그렇다면 부여부는 과연 언제 설치된 것일까. 사료 C-3의 묘지명 에 의하면 낙사계는 발해 부여부 대수령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 해 무왕 대에 당에 투항하여 노씨(盧氏)성과 정빈(庭賓)이라는 이름 을 황제로부터 하사받아 귀족으로 대우를 받았다. 낙사계는 당에 망 명한 후 734년에 거란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천보7 년(748) 5월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여부의 존재가 무 왕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낙사계가 사망한 시점인 발해 문왕대의 행정구역을 기록하여 표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24) 문왕 대에 확보한 영역의 범위를 문왕은 부・주의 설치를 통해 영역화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25)

24) 발해 사료 중에서 부의 명칭이 가장 일찍 나타나는 것은 문왕 40년(777) 일본에 파견된 발해 사신이 출발하였던 남해부이다. 또한 주의 명칭도 일본에 파견된 사 신의 직함에서 739년의 若忽州 都督, 758년의 木底州 刺史, 759년의 玄菟州 刺史 가 나온다. 이를 통해 지방통치제도의 기틀은 문왕대에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25) 김종복, 2009, 앞 책, 149~153쪽

따라서 부여부를 비롯한 행정구역의 정비 는 문왕대 이루어진 영역확대의 제도정비로 귀결되는 과정을 보여준 다고 생각된다. 이어서 9세기 후반의 발해와 거란 관계는 다음의 사건을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D

(耶律)轄底, 字는 涅烈袞이다. …耶律釋魯와 함께 국정을 맡았다. 석로가 해를 입고 죽자, 할저는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두 아들인 迭里特과 朔刮을 데리고 발해로 달아나, 실명한 사람으 로 위장하였다. 이후 (발해에서) 격구와 말타기 대회를 틈타 두 아들과 함께 良馬를 빼앗아 도망치고 다시 거란으로 귀국하였다. 간악함이 더하였는데, 항상 교묘한 말로 위기를 넘겼다.26)

26) 遼史 卷112, 列傳42, 逆臣上, 耶律轄底

사료 D는 10세기 초에 발생한 야율할저(耶律轄底)의 발해 망명사 건을 살펴 볼 수 있는 사료이다. 즉 거란의 왕족인 야율할저가 발해 로 도망쳤다가 다시 탈출하여 귀국한 사실을 알려준다.

흔덕근가한 (痕德菫可汗)시기(901~906)에 야율할저는 야율아보기의 중부(仲 父)인 우월(于越)

야율석로(耶律釋魯)와 함께 국정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야율석로가 그 아들 야율활가(耶律滑哥)에게 죽게 되자, 야 율할저 자신도 해를 입을까 두려워 두 아들을 이끌고 발해로 도망쳤 으며, 그 뒤 발해의 말을 훔쳐서 거란으로 되돌아갔다. 이때는 야율 아보기가 즉위하기 이전으로서 901~906년 사이가 된다. 이 사건은 양국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야율할저가 신변에 위 협을 느껴 발해로 도망한 것으로 볼 때, 양국 관계가 우호관계에 있 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27)

27) 송기호, 1995, 앞 책, 212~213쪽

Ⅲ. 10세기 초, 거란의 요동진출 과정과 발해의 대응

천찬(天贊) 4년(925) 12월 을해일에 야율아보기는 발해공격에 나 서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이는 발해와의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전쟁 선포였다.

E-1

6월 을유일에 황후・황태자・대원수 및 두 재상・각 部의 우두머리 등을 불러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3년 뒤 병술년 초 가을에는 반드시 귀착할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내지 못한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어찌 나의 가까운 이들의 성심을 저 버릴 수 있겠는가. 세월이 많지 않으니 빨리 전쟁 준비를 하라.” 이 조서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그 뜻을 이해 하지 못했다. 이 날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吐渾・党項・阻卜 등의 部를 정벌하러 나섰다. 조서를 내려 “황태자는 국사를 감독하고 대원수 야율요골은 종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28)

28)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3년

E-2

12월 을해일에 조서를 내려 “이른바 두가지 일 중에서 한가지 일은 이미 마쳤으나, 오직 발해는 대대로 원수로서 아직 설욕을 못했으니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발해 대인선을 정벌하러 친히 출정하였다. 황후・황태 자・대원수 야율요골이 모두 따라 나섰다.29)

29)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년

먼저 사료 E-1을 살펴보자. 천찬 3년(924) 6월 “3년 뒤인 병술년 (926) 초가을에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지만, 아직 두 가지 일이 끝나 지 않았는데 어찌 親誠을 짊어 질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따라서 925년 9월에 서방 정벌을 끝마치고 돌아와30) 사료 E-2에서와 같이 925년 12월에 “이른바 두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 일은 이미 끝마쳤 으나, 발해와 대대로 내려온 원수관계를 갚지 못하였으니, 어찌 편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친히 발해 정벌에 나 서게 된다.31)

30)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년 “秋九月癸巳 至自西征”

31) 거란은 중원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배후의 안전 확보가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서쪽 의 당항 등과 동쪽의 발해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원정 때마다 배후 의 허점을 걱정하였고, 이를 위해 배후세력과 일시적으로 연대하거나, 군사를 보내 무력행동을 펼치는 등 양동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당시 거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발해였다. 거란은 서쪽변방에 대한 불안감으로 서방정벌을 마친 후에야 발해를 공격 하고자 했다. 경략경로는 요컨대 서방, 동방(발해), 중원의 정벌 순으로 계획적이고 치밀한 구상 속에 행해졌다(金渭顯, 1985, 遼金史硏究, 裕豊出版社, 219~220쪽).

발해는 거란의 전면공세가 시작된 925년 12월 16일부 터 얼마 안 있다가 멸망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발해 건국과정에서부터 거란과의 관계는 동지애를 느낄 정도의 협력자이자 생존의 파트너였기 때문이다. 어 째서 대대로의 원수가 되었을까? 발해와 거란의 관계는 10세기 이전 까지는 전투가 펼쳐지는 적대관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과연 무 슨 일이 있었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는 것이 본 장의 서술 목적이다. 즉 거란의 요동진출 과정과 발해의 대응을 살펴보면서 그 의문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야율아보기는 901년 10월 질랄부(迭剌部)의 이리근(夷離菫)이 된 후부터 본격적인 대외정벌을 수행하게 된다. 903년 봄에 여진을 정벌 하였으며,32) 906년 11월에 동북여진을 토벌하였다.33)

32) 遼史 卷1, 本紀1, 太祖上 “明年春 伐女直 下之 獲其戶三百”

33) 遼史 卷1, 本紀1, 太祖上 “十一月 遣偏師討奚・霫諸部及東北女直之未附者 悉破降之”

이는 거란이 동북방면으로 처음 진출한 것이다. 이때의 여진은 발해 부여부의 서 남쪽 창도(昌圖)・개원(開原) 방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거란 은 시라무렌을 따라 요하 상류로 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34)

34) 김종복, 2009, 앞 책, 281~283쪽

이 시 기는 당이 멸망하고 후량(後梁)이 907년 세워지는 혼란의 시기였다. 따라서 발해는 거란의 동북방면 진출과 관련하여 군사적 대응보다는 907년 5월 후량에 왕자 대소순(大昭順)을,35) 908년 정월에는 전중소 령(殿中少令) 최예광(崔禮光)을 사신으로 보내36) 외교적 노력을 시 행한 것으로 보인다.

35) 五代會要 卷30, 渤海 “梁 開平元年(907) 五月 其王大諲譔遣王子大昭順來貢方 物” ; 新五代史 卷74, 四夷附錄3, 渤海 ; 新五代史 卷2, 梁本紀2 ; 冊府元龜 卷972, 外臣部17, 朝貢5

36) 五代會要 卷30, 渤海 “至(開平)二年(908) 正月 又遣殿中少令崔禮光來朝” ; 新五代史 卷2, 梁本紀2 ; 冊府元龜 卷976, 外臣部21, 褒異3

아울러 앞서 살펴봤듯이 발해는 부여부에 경병 을 두어 거란을 방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란은 더 이상 동북방면으 로 진출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동북방면에서 동남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전략으로 바뀌는 것을 유추할 수 있겠다.37)

37) 김종복, 2009, 앞 책, 284~285쪽

먼저 거란은 908년 10월 진동(鎭東)에 성을 축조하여 발해와 중원지방과의 연결을 차단하였다.38) 909년 정월에는 야율아보기가 직접 요하를 건너 요동지방을 방문하였다.39) 이에 대한 발해의 대응은 보 이지 않으나, 909년 3월에 재상 대성악(大誠諤)을,40) 911년 8월에 사 신을,41) 912년 5월 왕자 대광찬(大光贊)을42) 후량으로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38) 遼史 卷1, 本紀1, 太祖上 “(908년)冬十月 己亥朔 建明王樓 築長城於鎭東海口”

39) 遼史 卷1, 本紀1, 太祖上 “三年(909) 春正月 幸遼東”

40) 五代會要 卷30, 渤海 “開平三年(909) 三月 遣其相大誠諤來朝 兼貢女口” ; 新 五代史 卷2, 梁本紀2 “開平三年(909) 三月 辛未 渤海國王大諲譔遣使者來” ; 冊 府元龜 卷972, 外臣部17, 朝貢5 “開平三年(909) 三月 渤海王大諲譔差其相大誠諤 朝貢 進兒女口及物 貂鼠皮・熊皮等”

41) 新五代史 卷2, 梁本紀2 “乾化 元年(911) 秋八月 戊辰…渤海遣使者來” ; 冊 府元龜 卷972, 外臣部17, 朝貢5

42) 五代會要 卷30, 渤海 “乾化二年(912) 五月 又遣王子大光贊來朝 貢方物 太祖 厚有錫賜” ; 舊五代史 卷7, 梁太祖7 ; 新五代史 卷2, 梁本紀2 ; 冊府元龜 卷972, 外臣部17, 朝貢5 ; 冊府元龜 卷976, 外臣部21, 褒異3

재상 및 왕자가 직접 조공을 행하였다면 거란에 대비하 려는 긴밀한 외교적 노력 또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거란 또한 내부적인 상황이 발생하여 요동진출의 속도가 느 려진 계기가 있었다. 이는 911년 5월부터 915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야율아보기 형제들의 모반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F-1

5년(911) 5월, 황제의 아우인 剌葛・迭剌・寅底石・安端이 모반하 였다. (야율)안단의 아내 粘睦姑가 이 사실을 알고 고변하여43) 실상을 알았다. 황제가 아우들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아우들과 같이 산에 올라가 짐승 한 마리를 잡아 하늘과 땅에 고하고, (다시는 모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그 죄를 용서해 주었 다. 랄갈은 질랄부 이리근으로 내보내고 점목고는 晉國夫人으로 봉하였다.44)

43) 야율안단이 다시 중용되는 이유는 아내인 점목고가 야율아보기에게 고변한 것 때문일 것이다.

44) 遼史 卷1, 本紀1, 太祖上, 5년 5월

 

F-2

6년(912) 겨울 10월 무인, 剌葛이 平州를 격파하고 돌아와 또 다 시 迭剌・寅底石・安端 등과 모반하였다. 갑신일에 후량에 사신을 보내 제사를 올렸다. 임진일에 돌아오는 길에 北阿魯山에 머물 고 있는데 여러 아우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길을 막고 있다는 소 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남쪽 十七濼으로 달려갔다. 이날 하늘 에 燔柴(祭)를 올렸다. 다음 날 七渡河에 머물고 있는데 여러 아우들이 각각 사람을 보내 사죄하였다. 황제가 불쌍하게 여겨 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45)

45) 遼史 卷1, 本紀1, 太祖上, 6년 겨울 10월

사료 F-1을 통해 911년에는 야율아보기 아우들 중에서 야율랄갈・ 야율질랄・야율인저석・야율안단 등이 공모하였으나 기밀이 새어 나 가 실패하였고, 모두 야율아보기의 용서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사 료 F-2를 통해서 912년에 또다시 야율랄갈・야율질랄・야율인저석・야 율안단 등이 모반을 꾀했다가 세가 불리하자 다시 사죄하였고, 야율 아보기는 용서하였음을 알 수 있다. 913년에 또다시 여러 아우들이 기병 1천여 기로 야율아보기를 속이고 접근하였다가 모반을 하였으 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자가 무려 6천3백여 명이나 되었 다.46)

46) 金渭顯, 1980, 契丹的東北政策, 臺北: 華世出版社, 14~15쪽

이는 3~4년간 황족과 귀족 내부의 모반사건으로, 실제상 정권 쟁탈전이었다. 모반자의 신분이 대부분 8부 대인 자격을 갖춘 인물 들이었다. 이 사건으로 국력의 손실은 컸지만, 반대로 야율아보기 중 심의 통치체제를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형제들의 모반을 진압한 야율아보기는 915년 10월 또다시 요동에 행차를 하였다. 압록강에서 낚시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기 때문이 다. 아울러 이 해에는 신라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고려47)가 거란으로 사신을 보내 방물과 보검을 보내기도 했다.48) 이 는 거란이 요동에 대한 진출이 본격화 될 때 발해를 견제하거나, 고 립시키려는 의도로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49)

47) 고려는 918년 6월 15일에 건국하였으므로(高麗史 卷1, 世家1, 太祖 天授 元年), 遼史 卷1, 本紀1, 太祖9년(915) 10월조에 나오는 고려는 泰封일 가능성이 높다 (金渭顯, 1985, 앞 책, 77~78쪽).

48) 遼史 卷1, 本紀1, 太祖上, 太祖9年(915) 10月 “戊申 鈎魚于鴨淥江 新羅遣使貢 方物 高麗遣使進寶劍 吳越王錢遣滕彥休來貢”

49) 요(遼)는 조공 관계를 맺은 국가들을 속국군으로 분류하였는데 여기에 포함된 국가는 59개이며, 신라와 고려의 국명이 전해진다(遼史, 卷36, 志6, 兵衛志下, 屬國軍). 신라가 927년에 멸망하였음에도 속국군에 포함되어 있고 철불득국은 없으므로, 遼史의 속국군은 정확하지 않다[동북아역사재단, 2014, 遼史・金 史・元史 外國傳 譯註(譯註 中國 正史 外國傳 14), 47쪽]. 하지만 거란(요)과 신라 및 고려와의 관계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915년에는 우호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거란이 본격적으로 요동진출의 모색을 펼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916년 봄 2월 병신일에 야율아보기는 대성대명천황제(大聖大明天 皇帝)로 등극하고, 연호를 신책(神冊)이라 하였다. 이후에는 삭주 (朔州)50), 신주(新州)51) 등 대북(代北)에서 하곡(河曲)에 이르는 지역, 음산(陰山)52)을 넘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였다. 918년에는 황 도(皇都:臨潢府)를 세웠다. 이와 같이 거란의 급속한 팽창에 따라 達旦國・晉・吳越・渤海・高麗53)・回鶻・阻蔔・黨項과 幽州・鎭州・定州・魏 州・潞州 등 거란 주변의 세력들이 사신을 보내왔다.54)

50) 지금의 山西省 朔縣을 말한다[金渭顯 外, 2012, (國譯 遼史(上), 檀國大學校 出版部, 46쪽].

51) 山西省 永興縣을 말한다(위 책, 46쪽).

52) 陝西省 楡林縣 서북 1,000여리에 뻗어 있다(위 책, 46쪽). 53) 고려 왕건이 918년 6월에 즉위하였으므로, 위 내용의 신책3년(918) 2월조에 나 오는 고려는 泰封國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4) 遼史 권1, 本紀 제1 太祖 神冊3년, 2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발해가 918년 2월 처음으로 거란에 사신 을 파견했다는 점이다. 이는 거란의 요동 진출을 외교적으로 해결하 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발해는 거란과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의 세력 확장 특히 요동 으로의 진출을 경계하면서도 야율아보기의 황제 등극을 축하하는 효 율적인 전략을 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발해의 예상과는 달 리 거란은 918년 12월 요양고성(遼陽故城)에 행차하였고55), 919년 2 월에는 그곳에 옛성을 수리하여 한민(漢民)과 발해호(渤海戶)를 이주시키며 동평군(東平郡:현재의 요양시)이라는 거란의 행정구역으 로 바꾸고 방어사(防禦使)56)를 두는 사건이 일어났다.57)

 

55) 遼史 卷1, 本紀1, 太祖 耶律阿保機 上, 神冊3년(918) 겨울 12月 “冬十二月庚子 朔 幸遼陽故城”

56) 방어사는 관할지역의 방비를 담당하는 군관이다. 요 시기에는 防禦州의 장관 으로 그 위치는 團練使 아래 刺史의 위에 있었다(전병우, 2019, 「遼의 군사제 도와 전술」, 군사 113, 187쪽).

57)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神策4年(919) 二月 “丙寅 修遼陽故城 以漢民・渤海 戶實之 改爲東平郡 置防禦使”. 태조가 발해를 정벌할 때에는 먼저 동평부를 격파하였으며, 그 백성들을 이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는 지리지의 기사가 나타 난다. 즉 요동지역을 먼저 확보한 후 발해침공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遼 史, 卷38, 志8, 地理志2, 東京道, 昌義縣 “太祖伐渤海 先破東平府 遷民實之”).

이어 거란은 921년 12월에 단주(檀州)와 순주(順州)의 주민을 동 평군과 심주(瀋州)로 옮기고, 923년 3월에는 해를 복속하였다. 이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자구책으로 신라 등 여러 나라와 결원협정을 맺기도 하였다.58)

58) 契丹國志 1, 太祖紀 “……先是,渤海國王大諲譔本與奚契丹脣齒國 太祖初興 倂呑八部 繼而用師倂呑奚國 大諲譔深憚之 隱與新羅諸國結援”

'결원(結援)'이란 국가간에 서로 도와주어 적국의 침입을 막기로 약속하는 것을 뜻하 는데, 결국 발해가 위험에 처하면 신라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도 움을 주는 약속을 받으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어 발해는 후 당에 924년 정월에 왕자 대우모(大禹謨)를 사신으로 보내며,59) 5월 에는 왕자(혹은 조카)인 대원양(大元讓)을 보내60) 위기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대외 외교책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61)

59) 五代會要 卷30, 渤海 “後唐 同光二年(924) 正月 遣王子大禹謨來朝” ; 舊五 代史 卷31, 唐書7, 莊宗紀5 ; 新五代史 卷5, 唐本紀5 ; 冊府元龜 卷972, 外 臣部17, 朝貢5

60) 五代會要 卷30, 渤海 “後唐 同光二年(924) 五月 又遣王子大元讓來朝 莊宗賜金 綵以遣之” ; 舊五代史 卷32, 唐書8, 莊宗紀6 ; 新五代史 卷5, 唐本紀5 ; 冊 府元龜 卷972, 外臣部17, 朝貢5 “同光二年(924) 五月 渤海國王大諲譔遣使姪元 讓貢方物” ; 冊府元龜 卷976, 外臣部21, 褒異3

61) 발해는 후량 및 후당에 아홉 번이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는 중원과의 친선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거란이 요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중원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 등과 결 원을 시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신라는 거란에 2회, 고려는 거란에 3회 사신을 파견하였고, 신라는 926년 발해를 공격할 때 참가하였던 점을 볼 때 발해의 외교적 노력은 실패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김종복, 2009, 앞 책, 290~ 291쪽).

위와 같이 거란의 요동진출 및 발해 공격의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거란이 초기에는 발해 서북지역의 여러 종족들을 공략해가며 부여부 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펼친 것으로 생각된다. 발해 부여부는 항상 정 예병을 주둔하여 거란에 방비하였으므로 쉽게 점령할 수는 없는 곳 이었다. 따라서 주변 지역을 점차 장악해 가면서 발해를 고립시키고, 부여부를 통한 발해의 공격을 차단하려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생 각된다. 이후 거란은 요하 하구에 장성을 쌓고 요양고성 일대를 장악 하면서, 장령부 및 압록부를 통해 발해군이 진군해 올 것을 대비한 것 으로 보여진다. 거란은 발해에 대한 대비태세를 갖추면서, 920년 초에 이르기까지는 주로 하북지역과 서쪽지역 장악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 다.62) 924년에는 두 가지 일 중의 하나인 서방 정벌을 마치고, 동방정 벌을 위해 925년 12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주목된다. 바로 「진만묘지」이다.63)

62) 권은주, 2016, 「발해와 거란 경계의 시론적 검토」 고구려발해연구 54, 146~ 150쪽

63) 진만묘지는 통화 27년(1009)에 遷葬이 행해지면서 제작되었다. 묘지는 해방 전 에 출토되었고, 출토지점은 자세하지 않지만, 지금의 령성 彰武縣 서쪽 경계 로 추정하고 있다. 지석은 석비형태로 만들어졌고, 세로 약 47cm, 가로 28cm, 두께 7.6cm이며, 아래 榫頭가 있다. 좌대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사면에 지문 이 각석되어 있고, 앞뒤 양면에는 매 면마다 12행으로 새겨져 있다. 우측면은 3행, 앞뒤좌면에는 모구 27행이 새겨져 있고, 行字의 수는 일정치 않다. 우측면 또한 3행으로 새겨져 있고, 묘주인 자손들을 위해 統和27년(성종, 1009년)에 補刻되었다(向南編, 1995, 遼代石刻文編, 石家莊: 河北敎育出版社, 15쪽).

 

G

司徒諱萬, 大燕景城縣人也.64) …… 年卅五, 莊宗皇帝除授涿州副使.

年卌, 奉大聖皇帝宣命▢▢從故國舅相公65)入國. 尋授聖旨, 除豪刺軍使, 年卌五(923), 從皇帝東▢渤海國, 當年收下. 年卌七(925), 又從嗣聖皇帝伐神歡二州, 當年又下.

64) 大燕은 五代 초 幽州의 劉守光이 칭했던 국호이며(舊五代史, 「唐莊宗紀」 “天 祐八年八月, ……劉守光 僭稱大燕皇帝”), 景城縣은 瀛州의 속현으로, 지금의 하 북 河間 동쪽지역을 말한다(앞 책, 17쪽)

65) 國舅相公은 蕭阿古只를 가리킨다. 아고지전에 의하면, 신책초년에 서남부족들 의 토벌에 공을 세우고, 山西의 여러 군현을 경략하여 또다시 일부 지역을 함락 시키며, 周德威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신책3년(918)에 세운 공으로 북부재상에 임명되고, 그 직위를 이어나갔다(遼史 卷73, 列傳3, 阿古只 “神冊初元, 討西南 夷有功 徇山西諸郡縣, 又下之, 敗周德威軍. 三年, 以功拜北府宰相, 世其職. 天贊 初, 與王郁略地燕・趙, 破磁窯鎭. 太祖西征, 悉諉以南面邊事”). 또 遼史 태조기 에 따르면, 신책2년(917) 3월 신해, 유주를 공격하니 절도사 주덕위가 유주, 병 주, 진주, 정주, 위주의 군사로 거용관 서쪽에서 맞서 싸웠는데, 신주 동쪽에서 접전하여 크게 격파시키고 3만여 급을 베고, 이사온의 아들 이무팔을 죽였다. 황후의 아우 소아골지를 통군으로 삼고, 소실로를 선봉으로 삼아 거용관 동쪽으 로 나와 연과 조의 옛 땅을 공략하였으나 적군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遼 史 本紀1, 太祖上, 神冊2년 “三月辛亥, 攻幽州, 節度使周德威以幽・幷・鎭・定・魏五 州之兵拒于居庸關之西, 合戰於新州東, 大破之, 斬首三萬餘級, 殺李嗣恩之子武八. 以后弟阿骨只爲統軍, 實魯爲先鋒, 東出關略燕・趙, 不遇敵而還”). 진만 40세 때는 신책3년(918)에 해당되고, 아고지가 燕, 趙의 땅을 경략하여 그 공으로써 북부재 상에 임명되었던 시기와 부합된다(向南編, 1995, 앞 책, 17쪽).

진만은 879년 출생하여 955년까지 향년 7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예(禮)에 밝고, 시 짓기에 능하였으며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위의 사료 G를 통해 35세(913)에, 장종황제(莊宗皇 帝)가 탁주부사(涿州副使)로 제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종황제는 923년 후당(後唐)을 건국했던 이존욱(李存勖)을 말한다. 천우(天 佑)8년(911) 장종은 주덕위(周德威) 등을 보내 유수광(劉守光)을 정 벌하였고, 이듬해인 천우9년(912)에는 주덕위가 탁주를 점령하고, 유 주를 공격하였다. 천우10년(913) 장종은 유주를 깨트리고 유수광을 사로잡았다. 따라서 진만이 35세에 탁주부사를 제수 받았던 시기에 는 탁주가 이미 후당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만은 장종 에게 제수를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66)

66) 위 책, 17쪽

하지만 40세(918)가 되어 대 성황제(大聖皇帝:요 태조)의 명을 받들어 아고지를 따라 요(遼)로 입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 황제의 뜻을 받아 호자군사(豪刺軍 使)에 제수되었다.67) 진만은 45세(923)에 황제를 따라 동쪽으로 발 해국을 ▢했고, 그 해에 (어느 지역을) 떨어트렸음을 알 수 있다. 여 기서 황제와 함께 종군하여 동쪽으로 발해국과 전투를 벌여 일정 지 역을 확보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진만이 45세 되던 해는 요 태조 천찬2 (923)에 해당된다. 이어 천찬3년(924) 5월에 거란은 계주(薊州)68) 백성들을 요주(遼 州)의 땅에 사민 시키자, 발해는 그 자사 장수실(張秀實)을 죽이고 그 백성을 노략해갔다.69) 이후 거란의 정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는 자치통감(資治通 鑑)에서 살필 수 있다.

67) 豪는 豪州를 가리킨다. 壕州는 국용재상(아고지)이 남정할 때 한민을 사로잡 아, 요동서안평현고지에 옮겼다. 지금의 현주 동북 220리이며, 서북으로는 상 경까지 720리에 이르고, 戶는 6천이다(遼史 卷37, 志7, 地理志1, 壕州). 호주 는 頭下州가 되며, 국용재상은 아고지와 같으며, 본 묘지에 따르면 호주는 아 고지가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68) 지금의 하북성 天津市 薊縣이다.

69)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3년, 夏五月…是月

H

同光2년(924) 가을 7월 경신, 거란이 그들의 강성함을 믿고 사신 을 파견하여 후당 황제에게 와서 유주를 요구하고서 盧文進70)을 두겠다고 하였다.

 

70) 盧文進이 거란에 항복한 일은 후량 균왕 정명 3년(917년) 2월이었고, 이 내용 은 資治通鑑 卷270에 실려 있다.

이 때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거란에 복 속되었으나 발해만이 아직 복속되지 않았다. 이에 거란왕이 남쪽 으로 중원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발해가 뒤에서 기습할까 두려 워하였다. 이리하여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을 공격하고, 장수 禿餒 및 盧文進을 보내어 營州(요령성 조양시), 平州(하북 성 노룡현) 등을 점거하여 燕의 땅을 어지럽게 하였다.71)

71) 資治通鑑 卷273, 後唐2, 莊宗, 同光 2년(924) 7월

사료 H를 통해서도 거란은 중원 진출을 시도하면서도 후방의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계속되는 요동 공략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틀 후인 7월 임술, 또다시 거란은 동쪽으로 발해를 공격하였다.72) 두 달 뒤인 동광 2 (924) 가을 9월에도 거란은 발해 를 공격하였으나 전과 없이 돌아왔다.73)

72) 舊五代史 卷32, 唐書8, 莊宗紀6, 同光2년 “壬戌…幽州奏, 契丹阿保機東攻渤海”

73) 資治通監 卷273 後唐2, 莊宗, 同光2년(924) 9월 “癸卯(7일)…契丹攻渤海, 無功而還”

위와 같이 923년과 925년 사 이의 924년은 거란이 요주에 계주민을 옮겨 살게 한 조치에 대한 발 해의 공격이 행해진 해이다. 즉 거란의 요동진출에 대응하는 발해의 기록이 유일하게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거란의 요양에 대한 군사력 강화태세는 그 이전부터 꾸준히 이루어졌고, 919년에는 방어사까지 설치하였는데, 왜 이 시기에 발해의 공격이 이뤄졌을까. 이는 거란이 주민을 이주하여 요동지역을 영역화하겠다는 적극적인 거란의 전략 을 발해가 위기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요동지역은 당 의 영역도 발해의 영역도 아닌, 완충지대였다.74)

74) 거란이 하북 지역민을 강제로 요동에 이주시켰다는 것은 요동지역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또한 신라가 대동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는 점에서 한반도 서북부 역시 공백상태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한반도 서북부에서 요동 지역까지가 완충지대였으므로 야율아보기는 압록강까지 나 아갈 수 있었고, 신라와 고려(=태봉)는 완충지대를 둘러싼 미묘한 변화를 파 악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김종복, 2009, 앞 책, 286쪽).

따라서 발해는 거란 의 요동진출을 더 이상 외교적으로만 해결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한편 거란은 발해의 군사적 대응에 적극 대응하지 않으면서 서 방을 먼저 공략하는 전략을 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시기까 지 발해와 거란의 경계는 거란이 동진하였지만 요양고성에서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924년 야율아보기가 서방정벌을 떠날 때에는 황태자인 야율배(耶 律倍)를 감국(監國)으로 삼았고, 황후를 남겨두고 갔다.75) 황태자와 황후는 계속해서 발해 방면을 향해 대비하고 경계한 것으로 보인 다.76)

75)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3년, 夏五月…是月

76) 資治通監 卷273 ; 冊府元龜 卷995 ; 舊五代史 권32 등의 기록에는 동광 2년7월조에 거란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공격하였지만, 9월조에는 아무런 공 이 없이 돌아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924년 6월부터 925년 9월까지 야율아보기가 서방정벌에 나섰으므로, 이때의 군사행동은 서방 공략을 감추기 위한 양동의 작 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송기호, 1995, 앞 책, 224쪽). 하지만 거란이 7월, 9월에 군사활동을 하였는지, 後唐 조정에 보고된 것이 이때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확 실치가 않다. 야율아보기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갔다고 한 점에서 볼 때 발해 의 방어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권은주, 2016, 앞 논문, 151쪽).

거란이 전면전으로 발해를 침공하였을 때에는 모든 군사가 야율아보기를 따라 부여부를 함락시키고 발해 수도인 상경성으로 침공 한 것처럼 요사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요양고성을 중심으로 거란 의 군사들이 장령부와 압록부의 주력부대를 묶어두는 형세를 취하였 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부여부로 향하는 주력부대와 요양고성을 통 한 거란의 부대가 양방면으로 진공을 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다시 진만묘지를 통해서 진만이 47세(925) 되던 해에 사성황제(嗣 聖皇帝:堯骨, 태종)를 따라 발해의 신주(神州), 환주(桓州)를 공격하 고 그 해에 함락시켰음을 알 수 있다.77)

77) 발해의 神, 桓 2州를 가리킨다. 歡은 桓字의 오기이며, 神州는 지금의 길림 臨 江이며, 환주는 지금 길림 집안이다. 진만 47세는 요 태조 천찬4년(925)에 해 당된다. 태조가 발해 전면전 조서를 발표하고 친정하면서 황후, 황태자, 대원 수 요골이 모두 따랐다는 기사(遼史 卷2, 本紀2, 天贊4년, 12月, 乙亥)와 관련 하여 진만 묘지를 살펴보면, 발해를 정벌할 때 진만은 대원수 堯骨(耶律德光) 의 휘하에 있었다(向南編, 1995, 앞 책, 18쪽).

이는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신주(임강)와 환주(집안)는 발해의 서경압록부에 해당되 는데, 서경압록부의 치소는 신주설이 유력하다. 서경압록부는 神・桓・ 풍(豊)・정(正) 4주를 속주(屬州)로 삼았다.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 면, 서경압록부는 발해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의 출발지로, 이 길은 조공도(朝貢道)라고 하였다. 야율요골은 924년 서방공략에 참전했다가 925년 2월 또는 4월에 회군하였다.78) 따라서 925년 12월 이전에 요동과 압록부 신주를 공 격할 여력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된다.79)

78) 遼史 권2, 太祖 下, 天贊 4年(925) “二月丙寅, 大元帥堯骨略党項.…辛卯 堯骨 獻党項俘. …夏四月 甲子…皇后 皇太子迎謁於札里河”. 야율요골은 925년 2월에 당항의 포로를 바쳤을 때, 혹은 야율아보기가 회군한 925년 4월에 함께 돌아왔 을 것으로 추정된다.

79) 기존 발해의 멸망 원인을 놓고서 내분론의 입장에서는 “야율아보기가 離心으로 싸우지 않고서도 이겼다.”(遼史 권75)의 내용과 고려사 에 나타난 멸망 직전 발해유민들의 고려 망명기사를 근거를 두고 있었다. 발해유민들의 고려 망명에 대한 원인을 진만의 묘지명에 나타난 925년 거란의 압록부 공격을 고려한다면, 이와 연관지어 이해할 수도 있겠다. 야율요골과 야율아보기의 서방원정 이후 10 월 및 11월에는 각각 고려국과 신라국의 來貢 기사가 보이는데, 이 또한 관련성 이 있어 보인다(遼史 本紀 제2, 太祖 下, 天贊 4年 10月 辛巳・11月 己酉條).

야율아보기가 친정하면서 전면전을 펼친 시기는 12월 말에 해당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요동공 략과 압록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발해의 전력을 요동지역으로 집중시키게 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요인으로 거란의 야율아보기를 비롯한 본대가 부여부를 함락시키고 빠른 시간 동안 수 도인 상경성을 함락시킨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80) 아울러 천찬4년 (925) 11월 기유일에 신라가 조공을 해온 기사가 나타난다.81) 이는 거란이 발해를 대대적으로 침공하기 바로 직전의 일로, 거란과 신라 의 어떠한 밀지가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발해의 상경성이 함락되 고 난 926년 2월에 거란은 신라 등 도움을 준 국가들에게 포상을 내 리기 때문이다.82) 즉 전쟁은 925년 12월 전면전 이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83)

.80) 김종복, 2009, 앞 책, 288쪽

81) 遼史 권2, 本紀제2, 太祖下, 天贊4년, 11月 “己酉 新羅國來貢”

82)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2月 “甲午 復幸忽汗城 閱府庫物 賜 從臣有差 以奚部長勃魯恩・王郁自回鶻・新羅・吐蕃・党項・室韋・沙陀・烏古等從征 有功 優加賞賚”

83) 권은주, 2016, 앞 논문, 151~153쪽

이렇듯 거란은 발해 전면전을 위한 요동공략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진행해 나갔다. 진만묘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압록부의 신주 등을 공격하면서 발해의 주력군을 압록부와 장령부에 묶어 둔 뒤 부여부를 통한 상경직공책으로 발해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인다.

Ⅳ. 발해-거란의 전면전 전개과정

천찬4년(925) 12월 을해일(16일),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에 대한 총공격에 나서며 조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친히 출정하면서 황 후(淳欽皇后 述律氏)・황태자(耶律倍-東丹國 人皇王)・대원수 야율요 골(태종)이 모두 따라 나섰다.84) 17일이 지난 윤12월 임진일(4일)에 거란 태조는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지내고,85) 다시 10일 뒤 임 인일(14일)에는 오산(烏山)에서 청우(靑牛)와 백마( 馬)로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86) 다시 7일 후 기유일(21)에는 살갈산(撒葛山)87)에 머물러 사귀전(射鬼箭)을 행하였다.88) 다시 8일 후 정사일(29)에는 상령(商岭)89)에 머물다가 밤에 부여부를 포위했다.90) 다시 2일 후인 춘정월 기미일에는 흰 기운이 태양을 꿰뚫는 상서가 나타났으며,91) 그 다음날 경신일(3일)에 드디어 부여성이 함락됐다.92)

84)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12月

85)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壬辰 祠木葉山”

86)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壬寅 以靑牛白馬祭天地于烏山”

87) 撒葛山은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通遼市 科爾沁左翼中旗와 길림성 公主嶺 사이 에 있는 산이다(유득공 저, 김종복 역주, 2018, 정본 발해고, 책과함께, 96쪽).

88)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己酉 次撒葛山 射鬼箭”

89) 지금의 길림성 四平 서쪽에 있는 산맥이다(유득공 저, 김종복 역주, 2018, 앞 책, 96쪽).

90)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4年(925), 閏12月 “丁巳 次商嶺 夜圍扶餘府”

91)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己未 白氣貫日”

92)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庚申 拔扶餘城 誅其守將” 참고로 거란은 부여부 강사현과 부여현의 발해민들을 요 상경 서쪽과 부여현 에 천사시켰다(遼史, 卷37, 志7, 地理志1, 上京道, 定霸縣 및 扶餘縣).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정벌에 나서는 조서를 발표한지 42일 만에 부여성 을 함락시킨 것이다. 거란의 부여성 함락에 일등공신은 한인(漢人) 조사온(趙思溫)이었 다. 조사온은 거란이 연 지역을 경략할 때 항복한 자로, 태조는 발해 를 정벌할 때 조사온을 한군도단련사(漢軍都團練使)로 삼자, 힘을 다 해 싸워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자 태조가 친히 약을 조제하였다.93) 아울러 부여성 공략에 함께 참여 했던 장수는 소아고지가 있었음을 요사 열전을 통해 알 수 있다.94)

93) 遼史, 卷76, 列傳6, 趙思溫

94) 遼史, 卷73, 列傳3, 蕭阿古只 “字撒本 少卓越 自放不羈 長驍勇善射 臨敵敢前 每射甲楯輒洞貫……攻渤海 破扶餘城”

한편 거란은 살갈산에서 출전의식의 일환인 사귀전을 행한 후 8일 만에 부여성을 포위하였고, 3일이 지나서야 함락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여성에 발해의 상비군인 경병(勁兵)이 배치되어 거란 에 방비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특히 부여부 아래에는 앞에서 살펴보 았듯이 ‘강한 군대’라는 이름의 강사현(强師縣)이 있었다. 그 이름으 로만 보아도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인식한 거란 은 발해 침공로를 전통적인 거란도로 하지 않고 수도로 직공하는 방 법을 택하였다. 단, 보급로 차단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부 여부를 공격하여 확보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발해 수도 직공전략을 황태자인 야율배(동란국 인황 왕)가 제안했다는 점이다.

I

(태조를) 모시고 烏古와 党項을 정벌할 적에 先鋒都統이 되어 燕 지역까지 경략하였다. 태조는 서쪽 지역을 정벌하며 (耶律)倍를 남겨 수도를 지키게 하고 그 길로 발해를 취할 계책을 세웠다. 천 현 원년(926)에 태조의 발해 정벌에 모시고 따랐다. 부여성을 함 락시키고 태조가 호적과 인구 정리를 하려고 하자 (야율)배가 간 하기를, “지금 땅을 얻자마자 인구수를 조사하는 일을 벌이면 백 성들은 반드시 불안해 할 것입니다. 만일 파죽지세를 타고서 곧바 로 忽汗城으로 나간다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하니 태조는 그대 로 따랐다.95)

95) 遼史 卷72, 列傳2, 宗室, 義宗倍

사료 I를 통해 거란 태조가 서방정벌을 행하였을 때 야율배는 수 도를 지키며 발해공략을 위한 전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야 율배는 태조와 함께 발해공략에 참여하면서 홀한성 직공전략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즉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거란 태조는 호구를 단속하 려 들었으나, 이를 그만두도록 간언한 이가 야율배였다.96) 또한 그는 승세를 몰아 홀한성을 공략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97)

96) 인구수를 조사하는 호구단속은 직접적인 영역지배 방식의 일환이다. 앞서 924년 5월에 거란이 요주에 계주민을 옮겨 살게 하자, 발해의 군사적 공격이 곧바로 이루어졌다. 이를 근거로 홀한성 직공전략이 세워진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겠다.

97) 遼史, 卷64, 表2, 皇子表, 倍 ; 遼史, 卷72, 列傳2, 宗室, 義宗

거란이 발해의 부여성을 함락한 후 6일 뒤부터 상경성을 함락시키 는 과정은 다음의 사료들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발해 노상군 (老相軍) 3만의 부대와 전투를 벌인 내용을 살펴보자.

J-1

(926년 1월 9일) 병인, 척은 야율안단98)과 전 북부재상 蕭阿古 只 등에게 1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끔 명하였는데, 발해의 노상병을 만나 격파시켰다.99)

98) 신책6년(921)에 척은이 되어 태조를 따라 龍軍을 이끌고 조복과 당항 정벌에 공을 세 웠다. 천찬3년(924)에 남원 이리근이 되어 발해를 정벌하여 홀한성 공략에 포로와 수 급을 벤 것이 매우 많았다. 태조가 붕서하고 순흠황후가 칭제하며 대원수로 대통을 잇게 하려고 하자, 야율질리(태조의 아버지)가 동단왕을 황제로 세워야 한다고 건의 하였으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해 죽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가 억울한 죄로 죽 은 것을 한으로 여겼다. 태종이 죽자, 동단왕의 아들인 세종을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 웠다. 응력 3년(953)에 무고로 인해 감옥에 갇혀 죽었다(遼史 卷77, 列傳7, 耶律安端).

99)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丙寅

J-2

야율안단, 천현원년(926)에 발해를 정벌하여, 노상병 3만여 명을 격파하였다.100)

100) 遼史, 卷64, 表2, 皇子表, 安端

J-3

소아고지는 자는 살본이다. 어려서부터 탁월하여 마음대로 행동 하고 얽매이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사납고 날쌨으며 활을 잘 쏘아 적을 만나서는 용감히 앞서 진격하였고 쏠 적마다 갑옷이 며 방패를 번번이 관통시켰다. …발해를 공격하여 부여성을 격 파하였고, 홀로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노상의 군대 3만 명을 패배시켰다.101)

101) 遼史, 卷73, 列傳3, 蕭阿古只

사료 J-1, J-2, J-3을 통해서 발해 노상군 3만명을 물리친 거란의 장수들은 야율안단과 소아고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장수들 은 1만여 명의 선봉군을 이끌고 상경성을 직공하다가 발해의 노상군 과의 전투를 벌인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사료 J-3에서 소아고지가 홀로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노상군 3만을 물리쳤다는 내용은 선봉 군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병중심의 날렵함으로 발해의 본대를 물리 쳤다는 과장된 표현이라 하겠다. 소아고지는 조사온과 함께 앞서 부 여성 함락에도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한편 발해의 노상의 3만군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는 점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지는 않은 것으로 보 인다. 이는 노상이 후에 동란국(東丹國)의 우대상(右大相)으로 발탁 된 점을 감안한다면 거란에 항복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102)

102) 朴玉杰, 1996, 고려시대 귀화인 연구, 국학자료원, 93쪽 ; 김종복, 2009, 앞 책, 289쪽

K-1

皇太子・大元帥 堯骨・南府宰相 蘇103)・北院夷離菫104) 斜涅赤105)・ 南院夷離菫 迭里106)가 이날 밤 홀한성을 포위하였다.107)

103) 신책6년(921) 봄 정월 병오일에 황제의 아우 야율소를 남부재상으로, 야율질리 를 척은으로 삼았다. 남부재상의 자리는 여러 아우들이 반란을 꾸미면서부터 남부의 명족 대부분이 그 화에 걸려든 까닭에 그 자리가 오랫동안 빈자리로 남 겨두고, 鋤得部의 轄得里와 지리고가 섭행하였다. 남부에서 종실 사람 중에서 선택하여 맡길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황제가 오랜 제도를 바굴 수 없다 고 하다가, 요청이 끊이질 않자 종묘에 고유한 뒤에 제수하였다. 종실이 남부재 상을 맡은 것은 이때부터 시작하였다[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神冊6년(921), 春正月, 丙午 ; 遼史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9月, 壬戌].

104) 이리근은 군대와 말을 통솔하는 높은 벼슬이다(遼史 권116, 國語解 “夷離菫 統軍馬大官 會同初 改爲大王”).

105) 922년 겨울 10월 갑자일에 蕭霞的을 북부재상으로 삼았다. 질랄부를 나누어서 두 개의 院으로 만들고, 斜涅赤을 北院의 이리근으로, 綰思를 남원의 이리근으로 삼 았다. 조서를 내려 ‘北大濃兀을 나누어서 두 개의 部로 만들고, 두 절도사를 두어 통치하라.’고 하였다[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元年(922) 冬10月, 甲子]. 106) 924년 여름 5월 병오일에 척은 야율질리를 남원 이리근으로 삼은 기사가 보 인다[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贊3년(924), 夏5月 丙午].

107)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丙寅

K-2

耶律斜涅赤은 자는 撒剌이다. …발해를 토벌하여 부여성을 깨 트리고, 야율사날적은 태자・대원수를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밤 사이에 홀한성을 포위하였다.108)

108) 遼史, 卷73, 列傳3, 耶律斜涅赤

사료 K-1과 사료 K-2를 통해서는 황태자 야율배, 대원수 야율요 골, 북원이리근 야율사날적, 남원이리근 야율질리가 노상군을 격파 한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노상군과 전투를 벌인 지역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다만 홀한성과의 거리가 반나절 시간대의 장소인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것은 노상군을 격 파한 야율안단과 소아고지와는 구분되는 발해원정의 본대에 해당함 을 생각 할 수 있다. 한편 발해의 노상군 3만은 수도방어의 최종 중 심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궁성과 경성을 방어하는 발해의 수도 방위부대가 약 3만 명의 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109)

109) 강성봉, 2011, 앞 논문, 237~238쪽

거란의 군대와 발해 노상의 군대가 전투를 치른 후에 곧바로 상경성이 함락 된 것을 생각해보면, 발해의 전술은 조선시대 제승방략과 같이 수도 를 방어하는 주력부대가 성곽에서 나와 적군과의 일전을 벌이는 형 태로 방어전략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사료 K-2를 통하여 야율사날적이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태자 인 야율배와 대원수 야율요골과 함께 상경성으로 향한 사실이 주목된 다. 즉 노상군과의 전투를 치른 내용이 빠져있으며, 곧바로 상경성을 포위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야율안단, 소아고지의 부대 와 구분되어 상경성으로 직공하는 형태로 나뉘어져 행동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상경성으로 직공하는 본대 중에서도 선봉군에 섰 던 야율안단과 소아고지가 이끄는 부대가 발해 노상군을 격파하고 있 을 때 본대는 발해 상경성을 포위하였던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L-1

耶律海里는 자는 涅剌昆이다.…… 천현 초년(926) 발해를 정벌 할 때 야율해리는 요련씨의 糺軍110)을 거느리고 홀한성을 격파 하였다. 회군 후에 죽었다.111)

110) 거란 건국 초에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힌 이민족 장정을 군적에 편입시켰는 데, 이들을 거란 8부에 편입시켜 전쟁에 종군 시켰다. 혹은 전 가족을 변방에 옮겨서 유목을 하면서 변방을 지키는 일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들이 변방 규 호이다. 후에 규군 54종을 설치하였다(戴逸, 1993, 二十六史大事典, 長春: 吉林出版社, 829쪽)

111) 遼史, 卷73, 列傳3, 耶律海里

L-2

야율안단……천찬 3년(924)에 남원이리근이 되어 발해를 정벌 하여 홀한성 공략에 포로와 수급을 벤 것이 매우 많았다.112)

112) 遼史, 卷77, 列傳7, 耶律安摶

L-3

(926년 1월 12일) 기사일에 대인선이 항복을 청하였다.113)

113)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己巳

L-4

(926년 1월 13일) 경오일에 홀한성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켰다.114)

114)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庚午

L-5

(926년 1월 14일) 신미일에 대인선이 흰 옷을 입고 새끼로 양을 끌 며 요속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성을 나와서 항복하였다. 황제가 예 우를 하여 석방하였다.115)

115)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辛未

L-6

(926년 1월 17일) 갑술일에 조서를 내려 발해의 군현에 (이 사실을) 알렸다.116)

116)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甲戌

L-7

(926년 1월 19일) 병자일에 近侍 康末怛 등 13명을 시켜 성에 들어 가 병기를 수색하게 했는데 발해의 邏卒들에게 해를 당하였다.117)

117)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丙子

L-8

대인선이 항복하였다가 이내 다시 배반하자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지역을 분할해 공격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야율사날적이 군사 들의 용기를 북돋도록 하여 요란하게 북을 치며 성을 타고 오르자 적 들이 놀라 떨며 감히 막아서지 못하여 마침내 격파하였다.118)

118) 遼史, 卷73, 列傳3, 耶律斜涅赤

L-9

(926년 1월 20일) 정축일에 대인선이 다시 반기를 들자 그 성을 공 격하여 격파시켰다. 어가로 성중에 행차하니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 ‘군사들에게 대인선과 그 가족들을 호 위하여 성을 나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제사를 올려 하늘과 땅에 고하고 다시 군중으로 돌아왔다.119)

.119) 遼史 卷2, 本紀2, 太祖下, 天顯元年(926), 春正月, 丁丑

사료 L-3을 통해서는 상경성 포위 후 3일 만에 발해왕 대인선이 항복을 청하였고, 사료 L-4를 통해서 다음날인 13일에 거란의 군대 가 상경성 남쪽에 주둔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발해왕 대인선 의 항복 의식을 진행하기 위한 행동이라 생각된다. 사료 L-5를 통해 서 다음날인 14일에 발해왕 대인선이 요속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성 을 나와 항복하였으나, 거란 태조는 예우를 표하며 곧바로 석방하였 음을 알 수 있다. 사료 L-6을 통해서 3일 뒤인 17일에 조서를 내려 발해의 군현에 이 사실을 알렸다. 주목되는 것은 사료 L-7, L-8, L-9 를 통하여 발해의 항복이후 5일이 지난 19일에야 상경성으로 거란의 근시 강말달 등 13명이 들어가 병기를 수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발해의 나졸들에게 해를 당하였고, 발해왕 대인선이 다 시 반기를 들자 상경성을 공격하여 격파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거란의 전공을 세운 인물이 사료 L-8에 나타난 야율사날적과 사료 L-1에 나타난 요련씨의 규군을 이끌었던 야율해리, 사료 L-2에 나타 난 남원이리근 야율안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을 통해 발해가 멸망하는 과정을 서사적인 전개의 흐름으로 살펴보았다.120)

120) 동란국이 세워지고, 발해 부흥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은 다음의 논고에 기술하 고자 함을 밝힌다.

결국,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발해를 공 략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한 이후, 한 달여 만에 발해의 상경성이 함락 되었다. 거란은 부여성을 함락시키면서 상경성으로 곧바로 직공하는 전략을 세웠으며, 노상군과 대적하는 부대와 상경성을 에워싸는 본 대로 나뉘어 진공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에 반해 발해는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거란과 지속적인 전투를 수행한 나머지 요동에 전력을 집 중하였고, 전략적 최전방 지역인 부여성을 방어하면서 수도인 상경 성을 방어하는 형태의 전략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Ⅴ. 맺음말

발해는 건국과정에 있어서 거란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당의 압박에 벗어나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정 정도의 협 력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건국 후에도 등주공격, 마도산 전투, 안록 산의 난이 일어났던 8세기에도 대대로 원수지간이라 불릴 정도의 대 적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9세기에 접어들면서 거란이 급속한 성장 을 이루었고, 발해는 부여부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거란에 대한 방 비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혜성처럼 등장한 거란의 야율아보기 는 각 부족들을 통일시키고, 형제들의 모반을 수습하며 916년 황제에 등극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중원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배후의 안전 확보가 필요했는데, 서방 및 발해공략을 위한 계획을 치밀히 전개하 였다. 이러한 전쟁 과정 속에서 부족내의 단합과 황제 중심의 일원적 인 통치체제를 지향하고자 노력했다. 거란은 발해와의 전면전에 앞서서 요동지역으로 진출하면서 발해 침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요동 방면에서는 요하 하구에 장성을 쌓 았고, 이후 요양고성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는 발해의 군대가 장령부 및 압록부를 통하여 침공해 올 수 있음을 대비한 것으로 보여 진다. 거란은 발해에 대한 방비를 갖추면서, 920년 초까지는 주로 하북지역 과 서쪽지역 장악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924년 이른바 두 가지 일 중에서 하나인 서방공략을 끝마치고서, 925년 12월 전면전을 감행하 여 926년 1월에 발해를 멸망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거란은 요동 공 략, 요양 지역의 방어사 설치 및 사민 등을 통하여 장령부 및 압록부 등의 요동지역에 발해의 주력군을 집중시키게 유도한 것으로 생각된 다.

이에 따라 기존 거란 방어의 중심이었던 부여부의 방어체계가 취 약해진 것을 틈타, 거란은 부여부를 통한 전면 침공을 실행하였고, 이로 인해 발해는 급속히 무너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진만묘지」 를 통해서 923년에 진만은 황제를 따라 발해국을 공격했고, 925년 야율요골(태종)을 따라 발해의 신주, 환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던 사 실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발해의 주력군을 압록부와 장령부 일대에 집중시키게 만든 뒤 부여성을 공략하고 곧바로 상경으로 향하여 발 해를 멸망시킨 것으로 보인다.

거란의 상경성 직공전략은 야율배(동 단왕)의 제안으로 이루어졌으며, 상경성으로 직공하는 본대 중에서 도 노상군과 대적했던 부대와 상경성을 포위했던 부대로 나뉘어 행 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발해와 거란은 각자의 세력 확장 속에서 요동을 둘러싼 대립이 일 어났고, 이로 인해 대대로의 원수지간 사이가 되었다. 거란은 치밀한 전략을 세워가며 발해와의 전면전을 준비・실행하였고, 발해는 이러 한 상황을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지 못하였다. 발해는 갑 자기 멸망한 것이 아니라 양국 간의 치열한 전략과 전투들이 실행되는 속에서 대내적 요인과 대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생긴 결과라 할 수 있다.

주제어 : 발해, 부여부, 요동, 거란, 야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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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uses of the Balhae-Khitan War and Its Process

Kang, Sung-Bong

At the time of the foundation, Balhae established friendly relations with Khitan, because these two peoples had a common goal that broke away from the pressure of the Tang Dynasty. In the 8th century, Balhae maintained no hostile relations with Khitan; but the situation was changed in the 9th century when Khitan extended its power. Balhae had the defense system against Khitan as stationing troops in Buyeo Province. Yelü Abaoji who accomplished the unification of groups in Khitan and put down the rebellion raised by his brothers became the emperor in 916. For him, it was a prerequisite to weaken the power of neighboring countries to achieve his aim to occupy Zhongyuan (中原) in China. Therefore, he made an elaborate plan to attack political groups in the western area and Balhae In order to establish a foothold to conquer Balhae, Khitan advanced into Liaoning Province. Khitan built a defensive wall along the estuary of the Liaoning River, and seized Yoyanggoseong Fortress to prepare for attack of Balhae troops from Jangryeong and Amrok Provinces.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defense system against Balhae, Khitan concentrated its efforts to occupy Hebei Province and the western area by the early 920s. In 924, Khitan completed the conquest of the western area, and then went to a total war with Balhae in December 925. It seems that Balhae was collapsed in January 926. The Khitan forces aimed to attract the main forces of Balhae in Liaodong Province.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defense system of Balhae that laid stress on Buyeo Province was weaken; and the Khitan forces attacked Buyeo Province. These resulted in the collapse of Balhae

Key Words: Balhae, Buyeo Province, Liaodong Province, Khitan, Yelü Abao

투고일 : 2021. 05. 10 심사완료일 : 2021. 05. 29 게재확정일 : 2021. 06. 01

발해(渤海)-거란(契丹) 전쟁의 발생배경과 전개과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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