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중국 공군 활동을 통한 항공독립운동 역량 함양
3. 광복군의 주도권 장악과 공군 창설의 노력
4. 맺음말
1. 머리말
일제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후, 한국의 많은 지사들은 주권 회복 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은 무력을 활용한 독립군의 활동부터 외교 분야에서의 노력, 교육 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 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독립운동의 내용은 학계 와 민간단체의 활발한 관심에 따라 상당수가 규명되었으며, 최근 독립기념관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관한 통사를 간 행하기도 하였다.1) 한편 민간 작가들의 저술을 통하여 독립운동에서 항공 분야를 활 용한 활동도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항공독립운동’2)이라는 용어로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이전에도 역사학계의 연구나 개개인의 회고 를 통하여 이러한 내용이 규명되었으나3) 대중화에 이르지는 못하 였으며, 후속 연구 역시 미미하였다.4)
1)독립기념관은 2007년부터 60권 규모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를 순차적으로 발간 하였다.
2)‘항공독립운동’은 무장독립운동에 있어서 항공력을 활용한 독립운동도 있었다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이는 독립운동에서 실질적으로 항공력의 구축이 이 루어진 사례는 거의 없으나,국권을 상실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군사 분야에서 중 요성이 부각된 항공력을 활용한 독립운동이 시도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여 그 의도에 방점을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 하겠다.따라서 이 용어는 실질적 인 항공력 운용 차원을 넘어서 그것의 구상까지도 대상으로 포함한다.다만 이것 은 식민지 한국인이 항공력을 활용해 對日戰에 나섰던 개념까지 포괄하지 않는 다.대일전 참전과 독립운동은 동일한 개념은 아니기 때문이다.현재 민간 작가들 의 서술은 이를 혼동하는 사례가 엿보이는데,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경계하 면서 ‘항공독립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3)역사학계의 성과로는 盧伯麟 연구에서 윌로우스(Willows)비행학교를 언급한 이 현희,홍선표 등의 서술과 중국 군관학교 활동을 분석하면서 중국 공군 출신의 활동을 언급한 한상도의 연구,여성사적 측면에서 權基玉을 주목한 김영주,윤선 자 등의 연구,그리고 이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던 홍윤정의 연구를 들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李炫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桂園 盧伯麟將 軍 硏究 ,신지서원,2000;홍선표,노백린과 윌로우스 한인 조종사 양성소 미 주한인 사회와 독립운동 1,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남가주기념사업회,2003;韓 相禱, 在中韓人軍官學校硏究 - 金元鳳.金九의 抗日運動基盤과 관련하여(1919∼ 1935)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2;洪允靜, 獨立運動과 飛行士 養成 , 國 史館論叢 107,2005;金永柱, 韓國最初의 女流飛行士 權基玉 , 역사와실학 32,2007;尹善子, 한국독립운동과 權基玉의 飛翔 , 한국근현대사연구 69,2014 참조.
4)최근 중국학계에서 중국 공군 소속 한국인 비행사를 주제로 한 연구가 발표되었 지만,관련 인물을 발굴,정리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崔凤春, 民 国时期中国空军航校韩籍飞行员考述 , 朝鲜·韩国历史研究 14,2013참조.
민간 작가들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好史的 입장에서 추가 사례의 발굴을 통하여 대중서를 출 간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언론 과 대중서를 통하여 미국의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부각되었고,5) 중 국 공군 소속으로 대일전선에서 활약하였던 한국계 조종사들 역시 주목받았다.6) 민간 작가들의 저술은 대중적 흥미 유발의 수준을 넘어서 ‘공군의 뿌리찾기’라는 명목으로 공군의 관심까지 유도하여 정책적 차원에 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는 새롭게 주목받은 일제시대 한국계 항 공인들의 행적을 부각시켜 육군이나 해군에 비하여 미흡한 역사적 유구성을 강조하려는 공군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최용덕(崔用德, 1898~1969)은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공군 창설과 발전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 고 있다.7) 중국 공군과 광복군, 그리고 대한민국 공군에서 고위급 인사로 활약하였던 최용덕은 이들의 연결고리가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민간 작가들 역시 최용덕이 차지하는 비중을 인식하여 최용덕의 생애와 활동을 주제로 한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하였다.8) 그러나 최 용덕이 전개한 제반 활동을 종합적으로 분석, 고찰하기보다는 항공 분야와 관련한 내용만 국한하여 서술하였으며, 발굴한 사료의 부족 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메웠다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9)
5)한우성·장태한, 1920,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21세기북스,2013
6)이윤식, 신화의 시간 ,비씨스쿨,2012
7)공군 창설에 있어서 최용덕이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언론에 보 도된 바 있다( 京鄕新聞 ,1958년 8월 28일).
8)이윤식, 창석 최용덕의 생애와 사상 ,공군본부,2007
9)또한 해당 도서는 최용덕 외에 다른 한국계 비행사들의 사례를 방만하게 수록하 여 최용덕 연구라는 초점도 선명하지 않다.
또한 발굴한 사료 역시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고려한 해석까지 이르지 못하여 사료의 오독이 발생한 부분도 많다.10) 학계 연구자들도 중국 군관 학교 출신이나 비행사 출신 독립운동가를 조망하는 차원에서 최용 덕을 언급하였지만,11) 단순 사례 제시 수준에 불과하다.
10)한자어나 인명조차도 잘못 쓴 부분이 상당한데,반복적인 오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단순 실수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윤식의 경우 怡 隆洋行을 태륭양행으로,何應欽을 하응음으로 잘못 표기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개정판을 내면서 용어의 오기 문제는 일부 정정을 하고 있지만,사 료 자체를 잘못 해석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을 하고 있지 않다.이러한 문제 중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하 서술에서 각주를 통하여 오류를 바로잡도록 하겠다.
11)한상도,앞의 논문,1992;崔凤春,앞의 논문,2013
무엇보다 기존 서술의 한계는 최용덕이 중국 공군에서 활약하였 던 내용과 임시정부의 광복군 소속으로 활동하였던 사실 사이의 연 계성을 선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활동은 단 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비행기 조종사 출신도 있다는 사실 규명 수준에서 그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최용덕에 관해 알려진 단편적 사실, 최용덕이 중국 공군의 고위 간부였으며, 광복군에서도 주요 보직을 역임하였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조망을 통하여 중국군에서 복무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 을 추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광복 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분석 역시 그를 통하여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최용덕이 중국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광복군에서부터 공 군 창설을 시도하였으며, 해방 후에도 대한민국 공군 창설을 주도 함으로써 공군 창설의 주역으로 비정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연구가 독립운동사 연구의 심화라는 학술적 차원을 넘어서 공군의 정책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공군사 정립이 라는 측면에서 최용덕의 활동에 관한 올바른 접근은 필수적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제시대 최용덕이 전개하였던 제반 활동을 종합적으 로 검토하여 그의 활동이 지닌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먼저 최용덕이 중국 공군 소속으로 활동하였던 사실을 밝힌 뒤, 이것이 이후 광복군 활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평가할 것이다. 이를 통 하여 기존의 서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군 소 속으로 활약하였던 한국인들의 활동이 독립운동에 어떻게 기여하였 는지를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단초를 제시하고자 한다. 애석하게도 현재 최용덕의 개인 기록의 상당수는 유실된 상황이 다.12) 또한 임시정부 자료나 중국 공군 자료 역시 중·일전쟁의 혼 란 속에서 상당수가 사라진 형편이다.13) 따라서 관련 사료가 파편 적으로 남아있어 최용덕의 생애를 복원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여 기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추적을 통하여 이러한 한계를 최대한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사료적 한계로 인해 일부 내용의 소략화가 불가피했음을 미리 밝힌다. 2. 중국 공군 활동을 통한 항공독립운동 역량 함양 가. 무장독립운동 가담과 항공력의 중요성 인식 최용덕은 1898년(광무 2) 9월 19일 한성부 성북동에서 태어났 다.14)
12)외손녀(반춘래)의 증언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최용덕의 가족이 피신할 때,관 련 자료를 챙기지 못하여 소실되었다고 한다.이와 관련해서는 이윤식,앞의 책, 2012,82~83쪽 참조.
13)예를 들어 임시정부와 중국 등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외무부 자료 등이 유실된 바람에 현재 자료집에는 趙素昻이 개인적으로 소장한 기록만이 수록된 상황이다.
14) 하늘의 개척자 崔用德 將軍 ,공군본부,1956,67쪽 중국측 연구에서는 최용덕이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가 서울로 이사하였 다고 밝히고 있으며,당시 일본의 첩보자료에서는 함경도 출신으로 파악하고 있 다.일본 자료는 최용덕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던 元山 출신의 徐曰甫를 착각한 것으로 추정된다.손염홍 역시 최용덕을 함경도 출신으로 비정하였는데,일본측 자료를 토대로 한 듯하다.반면에 중국의 연구는 어떠한 근거로 그를 의주 출신 으로 규정했는지 불분명하여 추가적인 검토가 요청된다.각각에 관해서는 崔凤 春,앞의 논문,2013; 北京·天津附近在住 朝鮮人의 狀況 報告書 進達의 件 (1925년 3월 20일), 일본외무성기록 ;손염홍, 근대 북경의 한인사회와 민족운 동 ,역사공간,2010,65쪽 참조.
본관은 경주이며, 2등군의관을 역임하였던 최익환(崔益煥)과 태안이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15) 아호는 창석(滄石)이며, 중국에 서 활동하였을 당시 그는 아호를 중국식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최용덕의 아버지 최익환은 본격적으로 서양의학을 가르치기 시작 한 의학교(醫學校)를 1903년(광무 7) 2회 졸업생으로 이수하였 다.16) 이듬해인 1904년(광무 8) 군제(軍制) 개편에 따른 군의국(軍 醫局) 설치로 의학교 출신을 군의(軍醫)로 시취하자, 최익환은 여기 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관원이력서에는 최익환의 명단이 누락되어 있어 자세한 활동을 파악하기란 어렵다.17) 최용덕은 서구식 교육을 받은 뒤 대한제국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 었던 아버지 최익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8년(융희 2) 민간의 근대적 교육기관이었던 서울 미동(美洞)의 봉명학교(鳳鳴學校)가 개교하자 입교하여 수학하였다.18) 최용덕은 봉명학교에서 중학과정까지 이수하였는데, 봉명학교가 폐교된 시점 으로 추정되는 1913년에 졸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9)
15) 東亞日報 ,1927년 10월 2일
16) 官報 ,1903년 7월 15일
17)의학교 졸업생들의 활동에 관해서는 裵圭淑, 大韓帝國期 官立醫學校에 관한 硏 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1,53~68쪽 참조.
18)이윤식은 봉명학교가 1907년에 설립되었다고 보았으나(이윤식,앞의 책,2007,76 쪽),이는 1908년의 착오로 보인다.봉명학교는 1908년 4월 20일에 개교하였다 ( 大韓每日申報 ,1908년 4월 9일).
19)1914년 1월 17일 자 독립신문 에 봉명학교가 폐교한 지 오래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1913년 즈음에 폐교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신문 ,1914년 1월 17일).
최용덕은 15세가 되던 해에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유학하여 후이웬중학[匯文中學]을 중퇴한 뒤, 총시중학[崇實中學]을 고학으로 2년 만에 마쳤다.20) 최용덕이 중국으로 유학한 배경은 명확히 파 악하기 어렵다. 다만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는 과정 에서 보았을 아버지의 경험과 한국인이 세운 사립학교가 탄압받는 상황이 최용덕의 중국 유학에 영향을 끼쳤지 않나 싶다. 최용덕의 회고에도 중국 유학을 망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1914년 총시중학을 졸업한 최용덕은 곧바로 돤치루이[段祺瑞] 군 벌 휘하의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베이징 난위엔[南苑]에 자 리한 이 군관학교는 이후 돤치루이가 즈리파[直隷派]와 펑텐파[奉 天派]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참전군(參戰軍)을 창설 하면서 참전군군관학교로 불리기도 하였다.21) 1916년 우수한 성적 으로 졸업한 최용덕은 참전군 제2사단에서 복무하였다.22)
최용덕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군사적 경험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 돤치루이의 참전군에서 활동하였다. 후술하겠지만, 당시 최용덕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서왈보(徐曰甫)23)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의 안정적 정권 수립이 필요하며, 돤치루이가 여러 군벌 가운데 가장 군사적 권위가 높다고 밝혔던 바 있다.24)
20) 朝鮮日報 ,1924년 11월 17일 ; 東亞日報 ,1927년 10월 2일 ; 매일경제 ,1969년 8월 16일 조선일보 기사에는 최용덕이 총시중학도 마치지 못한 것으로 나오나 오보로 보인다. 매일경제 기사에는 최용덕이 유학한 시점을 13세로 언급하였는 데,만13세를 의미하는 듯하다.
21)돤치루이의 참전군 창설에 관해서는 朴埈洙, 臨時約法 體制와 段祺瑞軍閥政權 (1916-1920)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5,4장 참조.
22) 東亞日報 ,1927년 10월 2일 ;한상도,앞의 논문,1992,114쪽
23)생몰년도 1887년~1926년.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일본의 한국 병합 후 베이징 으로 망명하여 난위엔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공군으로 복무하면서 독립운동 을 전개하던 중 張家口 근처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영면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 서하였다.서왈보의 약력에 관해서는 독립운동자 공훈록 참조.
24) 東亞日報 ,1925년 1월 1일
따라서 돤치루이군에서의 활동은 독립운동을 위한 안정적 여건을 마련하는 차원까지 생각한 것이었다. 또한 최용덕은 1919년부터 상하이[上海]와 베이징, 펑텐, 안둥 [安東] 등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25) 이때의 활동은 안둥의 이 륭양행(怡隆洋行)을 통한 임시정부 교통국의 업무에 참여했던 듯하 다. 최용덕이 3 ․ 1운동 소식을 뒤늦게 듣고 기뻐하였다는 회고는26) 그가 돤치루이군에 가담하였던 시점에서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시 최용덕은 서왈보와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6월 서왈 보와 임기반(林基盤), 김사익(金思益) 등이 독립을 위한 군사행동 단체로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결성하였을 때, 최용 덕의 집을 본부로 삼을 정도로 이들 사이의 유대감은 끈끈하였 다.27)
권기옥(權基玉)의 회고에 따르면 1920년 최용덕이 바오딩항 공학교[保定航空學校]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서왈보의 도 움 덕분이었다.28)
25) 하늘의 개척자 崔用德 將軍 ,공군본부,1956,67쪽
26)위의 책,36~37쪽
27)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별책 2,국사편찬위원회,2009,41~42쪽 ;손염홍,앞 의 책,2010,43쪽 손염홍은 대한독립청년단(학생단)을 기본적으로 非무장독립운 동단체로 보고 있다.그러나 일본 사정기관에서는 대한독립청년단이 무장독립운 동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파악하였다.참고로 대한독립청년단은 단장으로 申采浩 를 추대하였다.그러나 신채호는 당시 상하이에 있었고,대한독립청년단이 해산 된 후에야 베이징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를 이끌었던 것 같지는 않다.
28)이영신,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사 서왈보 소전(小傳), 新東亞 544,2005년 1월 최용덕은 1951년에 연설한 중국에서 활약하던 우리 鳥人들 에서 서왈보와 함께 (중국)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회고하였다.서왈보가 난위엔항공학교[南苑 航空學校]을 1919년 10월에 졸업하였다는 언급을 감안한다면 최용덕 역시 1916년 에 난위엔의 육군군관학교를 이수하고 장교 복무를 한 뒤,난위엔항공학교 과정 에 응시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난위엔항공학교의 학생들은 군관 출신으로 구 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최용덕은 난위엔항공학교에서 중국식 가명 사용 문제로 퇴교되었다가 같은 계열인 바오딩항공학교로 복교하였던 듯하며,서왈보 가 그를 위해 힘써주었다는 권기옥의 회고는 복교 과정에서의 일로 해석된다.난 위엔항공학교의 개략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李珉, 北洋军阀时期的军事航空事业 , 纵横 ,2011년 11월 참조.
대한독립청년단은 일본의 압박으로 1920년 3월 해산되었지 만,29) 베이징 일대의 한인(韓人)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를 기반으로 하여 베이징 역시 독립운동 근거지로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독립운동의 노선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이승만(李 承晩)과 결별한 박용만(朴容萬)이 베이징에 온 뒤, 신채호(申采浩) 등과 결합하면서 베이징 일대의 독립운동은 무장독립운동의 노선으 로 급선회하였다.30) 1921년 4월 신채호 등이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성토하였을 때, 최용덕은 서왈보 등과 함께 지지 서명을 하였다.31) 이때의 성 토문은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론 ․ 준비론에 반발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천명하는 내용이었다. 즉, 최용덕은 무장독립운동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용덕은 서왈보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 입하여 활동하였다. 김원봉(金元鳳)의 주도로 결성된 의열단은 초 기 임시정부와 협력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론·준비론에 불 만을 품고 베이징의 무장독립운동 노선에 가담하였다.32) 이때 최용덕은 의열단의 무장독립운동 노선에 동의하여 가입하여 참모 진이 되었고,33)
국내로의 폭탄 수송 계획 수립과34) 김상옥(金相 玉)의 의거를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9)金正明, 朝鮮獨立運動 Ⅱ,原書房,412쪽
30)무장독립운동을 천명한 박용만은 외교적 노선을 견지한 이승만과 대립하고 있었다.
31) 이승만 반대격문 송부의 건 (1921년 4월 19일) 독립기념관 관리번호: 3-003861-223참고로 이 문서에는 베이징 거주자를 ‘○’으로 체크하였는데,최용 덕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이때 최용덕이 허베이성[河北省]의 바오딩항공학교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32)위의 성토문에는 김원봉 역시 서명하였다.
33)김영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과비평사,1997,82~83쪽
34) 韓國獨立運動史 32(義烈團 Ⅰ),국사편찬위원회,1996,114~124쪽
그러나 최용덕은 무장독립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의열단에 동조하 였을 뿐이었지, 의열단의 핵심인물인 김원봉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지는 않았다. 최용덕은 베이징 일대에서 사회주의계열의 성장이 미숙하였던 1920년대 초반의 상황35)에서 의열단으로 활동하였지 만, 정치적 대립이 발생하자 1923년 서왈보 등과 함께 신의단(申義 團, 伸義團, 信義團)을 조직하여 의열단에 대항하는 별도의 독립운 동 방안을 구상하였다.36) 또한 당시 그가 서왈보와 함께 조직하였 던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는 공산주의와 아나키스트 계열을 배제 하고 있었다.37) 이와 같이 최용덕은 베이징 일대의 한인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무 장독립운동의 성향을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그 는 김원봉 계열과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후술하겠지 만 최용덕은 김원봉 계열이 광복군에 합류하였을 때에도 그와 노선 을 달리 하면서 대립하였다.38) 최용덕은 바오딩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1924년 우페이푸[吳佩 孚] 군벌 소속으로 제2차 펑즈전쟁[奉直戰爭]에 참전하였다.39)
35)辛珠柏,1920,30年代 北京에서의 韓人 民族運動 , 한국근현대사연구 23,2002, 87~88쪽
36)조규태, 1920년대 중반 在北京 創造派의 民族唯一黨運動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7,2003,252쪽 이때의 정치적 대립은 김원봉이 최용덕 등이 속했던 창조파를 지원하지 않았던 데에서 기인하였는데,이 시점을 전후하여 베이징 일대 한인사 회의 사상적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좌·우 대립의 속성도 어느 정 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37)손염홍,앞의 책,2010,62~66쪽 38)이윤식은 최용덕이 통합 정신의 입장에서 김원봉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고 보면서 李草生의 공판기록을 근거로 들었다(이윤식,앞의 책,2007,179~183쪽). 그러나 이초생이 자술서에 쓴 朝鮮民族革命黨 조직도의 崔昌錫은 최용덕의 이명 이 아니다.이 최창석은 싱쯔군관학교[星子軍官學校]를 나온 뒤 김원봉과 활동하 다가 이후 옌안[延安]으로 이동하여 武亭과 합류하고 북한으로 갔던 崔昌益이 썼 던 異名이다.
38)이윤식은 최용덕이 통합 정신의 입장에서 김원봉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고 보면서 李草生의 공판기록을 근거로 들었다(이윤식,앞의 책,2007,179~183쪽). 그러나 이초생이 자술서에 쓴 朝鮮民族革命黨 조직도의 崔昌錫은 최용덕의 이명 이 아니다.이 최창석은 싱쯔군관학교[星子軍官學校]를 나온 뒤 김원봉과 활동하 다가 이후 옌안[延安]으로 이동하여 武亭과 합류하고 북한으로 갔던 崔昌益이 썼 던 異名이다
39) 東亞日報 ,1924년 11월 16일 ; 朝鮮日報 ,1924년 11월 17일 1927년 10월 2일의 東亞日報 기사에는 최용덕이 바오딩항공학교 재학 중에 펑 즈전쟁에 투입되었다고 쓰여 있다.이 기사는 최용덕의 졸업연도를 1924년으로 보고 있는데, 朝鮮日報 의 위 기사는 최용덕이 작년에 이미 졸업하였다고 보도 하였다.한편 최용덕의 자필이력서에는 1920년 졸업으로 기재되어 있어 기록마다 졸업연도가 다르게 나오고 있다(최용덕 자필이력서 ,공군박물관 소장).이 문제 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요청된다.
즈완전쟁[直皖戰爭] 후 즈리파가 안후이파로부터 공군을 인수하자 자연스럽게 최용덕도 우페이부 군벌 소속이 되었던 것이다. 제2차 펑즈전쟁은 중국 항공작전이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였다 고 평가될 만큼 전쟁의 양상이 치열하였고, 군사기술적 측면에서도 당시의 혁신이 그대로 반영되었다.40) 당시 국내에서는 최용덕의 사망 오보가 나오기도 할 정도로41) 그 역시 최전선에서 활동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목도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항공력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는 데 충분하였다. 최용덕의 언급은 아니지만, 그와 함께 했던 서왈보의 인터뷰를 통하여 항공력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던 이유를 추가적으로 엿 볼 수 있다. 서왈보는 중국 내전에 참전하면서 식민지 상황인 한국 에 항공력이 매우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서왈보는 인력과 비용 면에서 항공력이 효율적인 방략이라고 역설하였고, 이에 따라 비행 사 양성에 전력하여 최용덕을 비행사로 만들었다고 하였다.42)
40)이 전쟁은 중국에서 처음으로,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형태의 전투가 이루어졌다.보병과 기병,항공기와 전함이 모두 전투에 동원되었고,군사기술적 측면에서도 19세기 이래 유럽에서 시작된 기관총,항공기,철조망,지뢰 등의 혁 신이 총동원되었다.ArthurWaldron은 이러한 양상을 토대로 하여 제2차 펑즈전 쟁을 아시아에서 ‘현대전’의 기원으로서 평가하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Arthur Waldron,From WartoNationalism :China’sTurningPoint,1924-1925,(NY: CambridgeUniversityPress,1995),pp.3~5참조.
41) 東亞日報 ,1924년 11월 16일 ;12월 3일
42) 東亞日報 ,1925년 1월 1일
항 공력에 대한 서왈보의 인식은 최용덕에게도 마찬가지로 자리하였다 고 하겠다. 최용덕은 일제의 한국 병합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운 동에 가담하였고, 이러한 활동을 위해 중국 군벌에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김원봉의 노선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보였고, 중국 공군 소속으로서 군벌 간 전투에 참전하여 항공력의 위력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광복군에서 김원봉 계열을 견제하면서 공군 창설에 앞장서는 요인으로 작동하였다. 나. 중국 공군 복무를 통한 장제스 정권의 신임 획득 펑즈전쟁 당시 최용덕은 조윤식(趙潤植)43) 등과 함께 쑨촨팡[孫 傳芳]의 지휘 아래 전쟁에 참여하였다. 당시 우페이푸 군벌은 쑨촨 팡의 주도 아래 황하 이남의 펑텐파를 공략하고 있었다. 최용덕은 뤄양항공학교[洛陽航空學校] 소속으로 여기에 투입될 병력을 양성 하는 한편,44) 산시[陜西], 허난[河南], 텐진[天津] 등의 전투에도 직접 참여하였다.45) 1926년 최용덕은 북벌에 나선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양쯔강[楊 子江] 일대까지 진출하자 장제스 휘하로 들어갔다. 당시 국민혁명 군에는 김홍일(金弘壹)이 총지휘부 소령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 홍일은 허잉친[何應欽]의 요청에 따라 최용덕을 국민혁명군으로 합 류시키는 공작을 전개하였고, 이에 최용덕이 응하였던 것이다.46)
43)생몰연도 1894년~1950년.바오딩육군포병학교 제8기생으로 서왈보,최용덕 등과 함께 우페이푸 군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뤄양군사학교에 한국인들의 입교를 주 도하여 이들이 항일전선의 중견간부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44) 支那側의 鮮人에 대한 軍事敎育에 관한 件 (1924년 10월 18일), 일본외무성기록
45) 東亞日報 ,1927년 10월 2일
46)金弘壹, 大陸의 憤怒-老兵의 回想記 ,文潮社,1972,218~219쪽
최용덕은 이전부터 국민혁명군에 합류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체로 국민혁명 군의 이념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는 국민혁명군의 反제국주의 기치 에 대한 신뢰였다. 최용덕은 권력 쟁탈전의 속성만 강하였던 베이 양[北洋]군벌 내에서의 활동보다 국민혁명군에의 합류가 독립운동 을 위해서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때 상관이었던 펑위샹[馮玉祥]이 국민혁명군에 합류하였던 점도 영향을 끼쳤을 가 능성이 있다. 아무튼 당시 출격을 회피하고자 비행기 핵심부품을 일부러 제거한 뒤, 국민혁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보고47)는 애초 에 최용덕 등이 국민혁명군과 싸울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민혁명군에 합류한 최용덕은 1등비행사로 북벌에 참여하였 다.48) 1926년 당시 국민혁명군의 항공전력은 전투기 40대, 수송 기 12대, 정찰기 2대 수준이었으며,49) 그나마도 베이양군벌 소속 이었던 전력이 많았다. 제2차 펑즈전쟁에서 양측 모두 100여대 이 상의 비행기를 투입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50) 국민혁명군의 항 공전력은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등비행사였던 최용덕의 역할은 두드러졌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그는 베이징 진격 직전 수상비행대(水上飛行隊) 副대장에 임명되어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51) 1928년 국민혁명군의 베이징 무혈입성으로 북벌이 일단락된 이 후, 최용덕은 난징[南京]의 제4항공대 副대장, 수상비행대장, 난창 [南昌] 공군기지의 교관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52)
이때 최용덕은 동료와 훈련생들에게 많은 신망과 존경을 얻었으며,53) 덕분에 1928년 그는 중국인 동료 비행사의 처제(胡耀東, 후에 胡用國으로 개명)와 결혼도 할 수 있었다.54)
47)위의 주
48) 東亞日報 ,1927년 10월 2일
49)何布峰·谢安邦, 中国民国军事史 ,人民出版社,1994,63쪽
50)Waldron,op.cit.,1995,p.50
51)奚紀榮·武吉雲,抗戰前中國航空隊史略(上), 軍事歷史研究 ,2003
52)崔凤春,앞의 논문,2013,308쪽
53)羅英德, 中國에서의 韓國空軍-崔滄石의 活動을 中心으로 , (中國人士證言)韓國 獨立運動史資料集 ,博英社,1983,47쪽 54) 朝鮮日報 ,1928년 4월 17일
특히 이때 최용덕은 상관인 양관유[楊官宇] 등과 함께 광시성[廣 西省]에서 장파쿠이[張發奎]의 반란을 토벌하는 공적을 세우기도 하였다.55) 또한 그는 1930년 反장제스 운동이 중원대전(中原大戰) 으로 확대되자 역시 양관유 휘하의 副대장으로 참전하여 장제스의 승리에 기여하였다.56) 즉, 최용덕은 북벌 이후 장제스 정권의 보위 를 위한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1931년 광저우[廣州]에서 反장제스 정부인 광저우 국민정 부가 수립되면서 양상이 변화하였다. 당시 광저우 국민정부에는 장 후이장[張惠長]이나 양관유와 같은 핵심전력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때 최용덕은 임무 수행을 명분으로 아내 호용국을 잠시 떠났다고 한다. 이를 이청천의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결부시킬 수도 있 겠지만,57) 수년간 함께 한 직속상관들을 따랐다는 추정이 더 타당 하다. 한국독립군의 결성은 1931년 말에 가서야 이루어지며, 그나 마 초기 간부 명단에 최용덕은 빠져있기 때문이다.58)
55)張惠長의 보고, 在空軍殲擊下張發奎與桂系叛部已潰散分竄將候命肅淸唐生智叛逆 (1929년 12월 14일),臺灣國史館 문서번호:002-090101-00010-057
56)陈晋, 历史回眸:广东航空史略 , 廣州文史資料存稿選編(三) ,中国文史出版社, 1986;楊官宇의 전보, 楊官宇等電張惠長等今日派機四架共帶炸彈三十九枚赴蘭封 一帶偵炸 (1930년 5월 ○일),臺灣國史館 문서번호:116-010103-0057-022; 楊官 宇等電張惠長等今晨派楊國柱等赴曹州一帶轟炸傷敵軍二三十 (1930년 5월 ○일), 臺灣國史館 문서번호:116-010103-0057-054
57)이윤식,앞의 책,2007,164~168쪽 이윤식은 1931년 최용덕이 아내 호용국에게 작별을 고했던 사실을 이청천 산하 에 합류하기 위해서라 추정하고 있다.
58)張世胤,韓國獨立軍의 抗日武裝鬪爭 硏究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1989, 327~328쪽
무엇보다 양 측이 일촉즉발의 첨예한 대립을 보임에 따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핵심전력인 최용덕이 빠진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反장제스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정치적 노선 에서 양립이 불가능한 성격은 아니었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장제스 의 정권 독점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하였던 것이며, 민국혁명의 입 장에서 중국을 통일한다는 입장 자체는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었 던 것이다. 따라서 광저우 국민정부는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장제스와 힘을 합칠 수 있는 관용을 지니고 있었으며, 장 제스 역시 그러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자 양측이 평화적으로 재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다.59) 따라서 최용덕이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경력에 크게 해가 되지 않았다. 1935년 당시 장제스의 전용기 조종 사로 한국인인 손기종(孫基宗)60)이 활동하고 있었다.61) 최용덕은 손기종을 전용기 조종사 후보로 추천하였고, 장제스는 이를 적극 신임하여 부기장으로 임명하였다.62) 이처럼 최용덕은 중국 최고 수뇌부의 안전과 직결된 인선에도 관여할 정도로 장제스 정권의 신 임을 얻고 있었다. 최용덕은 만주사변 발발 후 광저우 국민정부와 장제스 정권 사이 의 갈등이 종식되고,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 의거에 힘입은 임 시정부와 중국 간 협조 모드 조성으로 이청천 중심의 한국독립군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자 한국독립군에도 합류하였던 듯하다.63) 1932년 1월까지만 하더라도 난징항공대에서 재직 중인 사실이 확 인되기 때문이다.64)
특히 중국의 협조 아래 뤄양군관학교를 중심 으로 한국인 군사교육이 시행되면서 이곳에서 교관생활을 했던 최 용덕 역시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다.65)
59)이하 서술에서 공산정권을 지칭하지 않는 한,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의 미한다.
60)생몰연도 1911년~1991년.손기종은 해방 이후 북한에 합류하기는 하였지만, 1944년 국민당 고위층의 사위가 되는 등 당시 장제스의 휘하에서 활동하고 있었 다.그가 북한에 합류하게 된 이유는 이념적 지향보다는 중국에서 민항기 부기장 으로 활동하는 와중에 중국이 공산화됨에 따라 북한대사관으로 국적이 이관되었 기 때문으로 보인다.
61) 東亞日報 ,1935년 5월 1일
62)羅英德,앞의 회고,1983,51~52쪽
63)1933년 한국독립군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을 때,이동한 사람들 중 최용덕의 이 름이 확인된다(池憲模, 靑天將軍의 革命鬪爭史 ,東亞出版社,1949,163~164쪽).
64)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33,국사편찬위원회,2009,76쪽
65)한국인들의 뤄양군관학교 입교 경위와 교육운영에 대해서는 한상도,앞의 논문,
이 당시 중국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면 서도 여전히 한국인의 동태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공산당이나 일본군으로 투신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는 전력의 핵심인 공군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한국인들에 대해서도 마 찬가지였다. 1934년 난창기지사령관 저우즈러우[周至柔]는 최용덕 과 김은제(金恩濟), 장성칠(張聖七), 김진일(金震一) 등 한국인들이 매우 충실히 복무중이니 염려 말라는 보고를 올렸다.66) 최용덕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중국 정부의 신뢰를 획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최용덕은 중국 공군 신분으로 직 접 대일전선에 참전하였다. 1938년 당시 그는 난창기지 사령관으 로 항일전선을 지휘하고 있었고, 이후 난창기지가 점령당하자 중국 공군 대령으로 중국의 임시수도였던 한커우[漢口]에서 복무하였 다.67) 즉 그는 직접 전투에 나서기보다는 중국 공군의 지휘부서에 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 공군으로 오랫동안 복무하면서 고 급장교로까지 진급하여 핵심부서에서까지 활동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최용덕은 대체로 장제스 주도의 국민정부에서 중국의 민국혁명과 항일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장제스 정권의 신임은 장제스 전용기 부기장 인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따라서 한국인 출신으로 국민정부의 공군 발전을 위하여 활약하였던 1992,261~278쪽 참조. 66)周至柔의 전보,國民政府軍事委員長南昌行營機要課電報摘由箋 (1934년8월13일), 臺灣國史館 문서번호:002-080200-00174-014 67)이윤식의 책에서는 최용덕은 중국 공군의 장성급까지 올랐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최용덕은 국민정부에서 1935년 소령을 달았고,2년 뒤 중령으로 진급하였 다.대령 진급 시기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중·일전쟁 발발 후 공적을 인정받아 진 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944년 미국 정보당국이 安原生으로부터 입수한 첩보에 는 최용덕이 중국 공군 대령이자 광복군 소장으로 나와있는데( 대한민국임시정 부 자료집 12,국사편찬위원회,2009,61쪽),이를 감안하면 최용덕은 대령이 중 국군으로서의 최종 계급으로 보인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용덕(崔用德)의 항공독립운동과 광복군 내 역할 | 443 최용덕은 윤봉길 의거 이후 한․ 중의 공동 항일투쟁이 전개되자 양 측의 가교 역할로서 입지가 중요해질 수 있었다. 3. 광복군의 주도권 장악과 공군 창설의 노력 가. 광복군과 중국 사이의 가교 역할 수행 최용덕은 중국 공군 소속으로 충실히 복무하면서도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중·일전쟁 발발 이후 그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는 난창기지 인근의 항저우[杭州] 에서 민석린(閔石麟)이나 이범석(李範奭) 등과 꾸준히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68) 최용덕은 주로 이청천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고, 이후 광복군 창 설 후에도 이청천의 참모격으로 있었다. 최용덕이 언제부터 이청천 과 긴밀한 관계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최용덕이 1920 년대 베이징에서 서왈보 등과 활동하였을 당시부터 상호간의 연결 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용덕과 서왈보 등이 소속되었던 베이 징의 한교동지회는 창조파의 입장에서 이청천 등과 연대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69) 이청천 등이 중국 관내로 돌아온 이후 최용덕은 독립운동의 역량 결집을 위한 여러 세력의 민족혁명당 통합에 참여하였다. 민족혁명 당은 비록 김구(金九) 계열이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1935년 단계 에서는 김원봉과 조소앙(趙素昻), 이청천, 최동오(崔東旿), 김규식 68)羅英德,앞의 회고,1983,47~48쪽 69) 北京·天津附近在住 朝鮮人의 狀況 報告書 進達의 件 (1925년 3월 20일), 일본 외무성기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444 | 軍史 第95號(2015. 6) (金奎植) 등이 합류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최용덕은 김원봉과 노선을 달리하고 있었 고, 이는 이청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족혁명당은 이청천과 김원 봉 사이의 갈등으로 사실상 해체되었고,70) 1937년 이청천은 여기 서 이탈하여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구, 조소앙 계열과 통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약칭 光復陣線)를 구성하였다. 이에 대 응하여 김원봉은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약칭 民族戰 線)을 조직하였다.71) 광복진선을 구성하였던 김구와 조소앙, 그리고 이청천 계열은 이 후 임시정부의 여당격으로 자리한 194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을 창당하여 통합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광복군 창군이 당면 목표로 제시되었다.72) 독자적 군대를 양성하겠다는 한국독립당의 계획이 성립하기 위해 서는 중국의 지원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다. 이들이 중국 관내에 있는 상황인데다가 자금 역시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지원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은 광복군을 중국군사 위원회에 예속시켜 동맹군이 아닌 지원군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김원봉 계열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황푸군관학교[黃埔 軍官學校] 출신들이 중국군사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을 이용 하여 중국의 광복군 인준을 저지하고 있었다.73) 70)당시 김원봉 계열의 재정운용 독점과 중국 공산주의 세력과의 교섭 문제 등을 둘러싸고 김원봉과 이청천은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金喜坤, 중국관내 독립운동 정당의 활동 , 한국사 50,국사편찬위원회,282쪽). 71)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발발 때까지 독립운동세력의 통합 및 분기 과정에 관 해서는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 ,지식산업사,2004, 132~135쪽 참조. 72)1940년 5월 9일에 선언된 한국독립당의 黨綱과 黨策에 광복군 편성이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34,국사편찬위원회,2009,28쪽). 73)한시준,앞의 책,1993,76~83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용덕(崔用德)의 항공독립운동과 광복군 내 역할 | 445
1940년 9월 17일, 한국독립당은 독자적으로 광복군을 창설하여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장제스는 이를 축하하였지 만,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때, 광복군의 주요 간부 명단 에서 최용덕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최용덕은 10월에 들어서야 비서처 업무를 관장하여 총사령 이청천을 보좌하는 위치로 광복군 에 소속되었다.74) 최용덕의 합류가 늦었던 까닭은 당시 중국 육군 대학교에서 고급참모 과정을 이수 중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75) 중국이 광복군 승인을 보류하고 있는 상황에서 1941년 봄, 최창 익 등 조선의용대의 상당수가 이탈하여 공산당 계열에 합류하자76) 한국인의 무력 활동에 대한 중국의 의구심은 깊어졌다. 장제스는 광복군에게 중국군사위원회의 예속을 강요하였고,77)
74) 韓國獨立運動史 ,愛國同志授護會,1956,357쪽
75)최용덕의 자력기록표에는 1940년 중국 육군대학교 졸업이라 기재되어 있다(최 용덕 자력기록표 ,공군본부 자료번호:20637).
76)韓相禱,金元鳳의 生涯와 抗日歷程 , 國史館論叢 18,1990,203쪽
77)胡春惠,辛勝夏 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檀國大學校出版部,1978,147쪽
결국 광복군 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한국광복군행동 9개준승(이 하 9개준승)’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광복군의 9개준승 수용으로 광복군 총사령부는 참모처, 총무처, 정훈처의 3개 처로 편제가 구성되었고, 각 처의 요직에는 중국군 인사가 파견되었다. 1942년 현재 광복군 총사령부의 간부 구성은 다음 표와 같다. 부 서 처 장 편제 인원 실재 인원 한국인 중국인 참모처 元 喆 22 9 1 8 총무처 崔滄石 25 17 7 10 정훈처 黃紹美 15 13 - 13 기 타 15 6 4 2 광복군 총사령부 간부인원(1942)* *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6, 국사편찬위원회, 2005, 64~69쪽 김원봉은 의열단원들을 대거 이끌고 황푸군관학교 4기로 입교하였다.의열단의 황푸군관학교 입교에 관해서는 한상도,앞의 논문,1992,124~134쪽 참조. 광복군 총사령부의 3개 처장은 모두 중국군 소속의 인물이 임명 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총무처장으로는 중국군 소속이지만, 한 국인이었던 최용덕(최창석)이 임명되었다. 최용덕은 중국군의 지침 을 받으면서도 광복군의 실무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인물로 비견 되었기 때문이다. 최용덕은 이청천이 1937년 임시정부의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어 군사정책에 간여했을 당시부터78) 광복군 창설과 관련한 논의 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최용덕은 중국군 내에서 광복군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광복군 입장에서 그는 총사령인 이청천과 뜻을 같이 하는 아군이었다. 광복군 창설 초기 임시정부 와 중국 사이의 긴장이 해소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최용덕은 양측의 입장차를 조율할 수 있는 적임자였던 것이다. 광복군의 주요 인물로 자리한 최용덕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연소 광복군 소장이자 총무처장으로서 운영 실무에 관한 요직을 차지하 고 있었다. 물론 당시 중국군 대령 마치펑[馬起鵬] 등 중국군 인사 들이 총무처 경리과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최용덕 역시 중국 공군 대령이었고 선임자였기 때문에 관련 업무 파악 및 지시에 어려움은 없었을 듯하다.79)
78)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9,국사편찬위원회,2006,52~55쪽
79)광복군 총사령부의 각 보직별 보임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6, 국사편찬위원회,2005,64~69쪽 참조.
광복군의 9개준승 수용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원은 소극적이었 다. 따라서 임시정부 내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고 있었고, 급기야 9개준승 폐기 요구까지 제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중국군 사위원회는 광복군에 대한 대대적 검열로 대응하였다. 중국군사위 원회는 1943년 5월과 7월, 광복군의 전반 사항에 대한 일체 점검 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총무처장이었던 최용덕은 중국군사위원회의 점검에 관한 업무협조 전반을 책임지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특히 이때의 점 검은 광복군의 실제 예상 소요경비를 추산하는 목적도 지니고 있었 는데, 최용덕은 경리과의 총괄부서장이었기 때문에 원만한 점검을 유도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군사위원회의 점검 과정에서 최용덕의 공적이 상당하다는 사 실은 점검 이후 중국이 광복군의 공작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한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3년부터 임시정부는 광복군 운영에 별 도의 예산을 지출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해당 비용을 지원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80) 이처럼 최용덕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의구심 을 불식시키면서 적극적인 지원으로 선회하는 데 기여하였다. 최용덕의 임시정부와 중국 간 가교 역할 수행은 이후 광복군이 김원봉 계열을 포용한 뒤,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을 때에도 지 속되었다. 전황에 따라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고 있었던 임시정부는 각 지역의 문서 수송을 위하여 중국 공군의 지원을 받았고, 최용덕 은 비행교육 제자이기도 하였던 당시 중국 공군 운송책임자(羅英 德)와 긴밀한 협조 속에 문서 수송 업무를 수행하였다.81) 또한 1942년 광복군의 물자 수급과 대원들의 후생복지를 위한 광복군 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회사(官兵消費合作會社)가 창립되었 을 때, 최용덕은 이사 주석으로서 충칭[重慶]시 정부와 협력하여 원 활한 운영을 도모하였다. 관병소비합작회사는 임시정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중국 관내에서 등기 문제가 발생하였고, 최용덕은 중국군사 위원회와의 협력 속에서 충칭시 사회국으로부터 등기 허가와 물자 공급을 약속받았던 것이다.82)
80)중국군사위원회의 광복군 점검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한시준,앞의 책,1993, 121~124쪽 참조.
81)羅英德,앞의 회고,1983,47~48쪽
82)관병소비합작회사의 제반 문건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9,국사편 찬위원회,2006,189~207쪽 참조.최용덕은 이청천,조덕수와 함께 김원봉 다음 으로 많은 금액인 8000원을 투자하였다.다른 대원들이 보통 800원 수준에서 투 자하였던 것에 비하면 매우 많은 금액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광복군의 창설부터 운영에까지 최용덕은 중국과의 협조 속에서 제반 업무를 지원,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광복군의 실무를 총괄하는 참모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일단 총사령인 이청천 의 심복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하였지만, 무엇보다 중국 공군에서의 업적을 기반으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당국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곧 광복군에서 그의 입지가 강화될 수 있 는 배경이 되었다.
나. 광복군 내 좌파 계열 견제
9개준승에 따라 초기 광복군의 지휘권은 중국군사위원회에 있었 다. 그렇지만 임시정부 내에서 9개준승의 폐지에 대한 강경론이 대 두하고, 카이로 회담에 따라 중국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한 유화적 입장이 나타나면서 1944년 9월 광복군의 지휘권은 임시정부로 이 관되었다. 비록 임시정부로서는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새로운 관계 정립의 과제를 안은 것이기도 하였지만, 어찌되었건 광복군 운영에 있어서 독자성을 획득한 성과이기도 하였다. 광복군의 독자성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광복군을 구성하고 있었던 각 세력 사이의 문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최용덕은 중 국과의 가교 역할보다는 이청천의 참모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최용덕은 중국군사위원회의 점검이 끝난 후 1943년 7월 광복군 의 편제가 개편되면서 참모처의 고급참모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이 때의 인사이동은 채원개(蔡元凱)와 서로 보직을 맞바꾼 것이었는 데,83) 채원개 역시 중국군 소속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왔기 때문에 총무처장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83)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1,국사편찬위원회,2005,293쪽
한편으로 최용덕은 수뇌부에서 이청천을 보좌하는 역할을 다시 맡았던 셈이다. 최용덕의 보직 변경은 중국과의 원활한 협조가 이루어지자 그에 게 요구되는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942년 좌파인 김원봉 계 열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함에 따라 양대 무장독립운동세력 은 통합을 이루었지만, 이내 내부에서 주도권을 둘러싼 양측 사이 의 갈등도 나타났다. 특히 김원봉이 부사령의 신설을 요구하여 이 에 임명되었고,84) 임시정부 내에서 조직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 黨)이 합류 직후 치러진 10월의 임시의정원 선거에서 재적의원의 1/3에 육박하는 당선 성과를 내자 한국독립당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85) 원내에 진입한 이들은 곧바로 9개준승 등을 빌미로 한 국독립당이 주도하고 있는 광복군을 견제하였다. 또한 1943년 5월 김원봉 계열은 미얀마의 영국군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면서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하고 있었다.86) 따라서 이청천은 광복군 내에서 자신 들의 헤게모니를 고수하기 위하여 자신의 최측근이자 베이징에서의 활동부터 김원봉과 반대 노선을 보였던 최용덕을 지휘부의 고급참 모로 다시 임명하였던 것이다.87)
84)위의 자료집,261쪽
85)이현주,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의정원 참여와 노선투쟁 , 한국독립운동 사연구 33,2009,111~115쪽
86)한시준은 민족혁명당이 독자적으로 영국군과 협력하였던 사실의 배후에는 광복군 과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물론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개입하였을 소지는 충분하다.그러나 이 글에서는 민족혁명당이 단독으로 영국과 지원 협정을 체결하였다는 사실 자체도 당시 광복군 내부의 갈등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본다.한시준의 견해에 관해서는 한시준,앞의 책,1993,260~265쪽 참조.
87)1942년 11월 임시의정원에서의 9개준승 논의 당시 이청천은 조선의용대가 편입 된 이래 곤란한 점이 많았다는 언급을 하면서 김원봉 계열의 견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3,국사편찬위원회,2005,51~52쪽).
이듬해 3월 최용덕은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88) 그는 이전에 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의 입당은 광복군, 나아가 임시정부 내에서 이청천 계열의 입지를 보위하는 역할 수행에 목적이 있었다. 최용덕은 입당 후 이청천 주도하의 제3구에서 정기 적인 회합을 가지며 향후 방략을 모의하였다.89)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최용덕은 꾸준히 이 청천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면서 김원봉 계열과 대립하고 있었다. 해방 직전 양측의 대립은 사실상 분열 직전의 상황에까지 치달았 다. 김원봉 계열은 총사령인 이청천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을 정도 였으며, 이청천 역시 최용덕·조시원(趙時元) 등을 브레인으로 삼 아 그들을 사사건건 견제하고 있었다.90) 양측의 대립은 광복군 내 권력다툼이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는 이념적 지향이 다르다는 데에서 기인하였다. 이 대립은 전술한 것과 같이 베이징에서의 활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사상적 갈 등까지 심화되면서 상호간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졌다. 비록 김원봉 계열이 광복군에 합류한 이후 좌파적 성향이 다소 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최용덕은 여전히 이념적 차이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광복군을 지원하고 있었던 장제스는 반공의 성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장제스 휘하에서 활동하였던 최용덕 이 9개준승을 빌미로 소련에 대한 협조 요청91)까지 도출해냈던 김 원봉 계열을 좋게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88)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34,국사편찬위원회,2009,228쪽
89)위의 자료집,231쪽
90)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13,국사편찬위원회,2006,266쪽
91)이현주,앞의 논문,2009,122~123쪽 여기에는 이청천도 참여하였지만,9개준승이 지닌 문제점에 대한 우려에서였지 소련에 대한 연대감 때문은 아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최용덕은 김원봉 계 열에 대한 이념적 불신에서 광복군의 주도권을 고수하려는 책략을 펼쳤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광복군 내 이청천 계열의 주도권은 해방 때까지 이어 졌다. 그들의 영향력은 광복군에 파견되어 있었던 중국군 인사들이 진급을 위해 이청천과 최용덕에게 로비를 할 정도였다.92) 이에 반 해 김원봉 계열은 인도·미얀마 전선에 참여하면서 사실상 독자적 인 활동을 전개하는 실정이었다. 이들의 갈등은 미국 정보당국에서 도 인지할 정도로 치열하였고,93) 이후 최용덕의 활동은 이 점을 고 려하여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다. 광복군의 공군 창설 계획 주도 광복군 내에서 최용덕이 보여주었던 행보는 베이징 시절부터 견 지해왔던 입장과 상통하였다. 즉, 독립을 위해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하며, 공산주의나 아나키스트와는 거리를 두겠다는 그의 생각이 광복군에서도 표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광복 군 내에서도 항공력을 건설해야겠다는 의지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전술하였듯이 최용덕은 중국 공군의 최일선에서 활동해왔고, 이 를 통해 항공력의 힘에 대하여 실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독립 운동에서 공군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였고, 1940년 항공건설위원 회 주임을 역임하면서 광복군이 수립되기 이전부터 공군을 창설하 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94)
92)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11,국사편찬위원회,2006,110~112쪽
9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6,국사편찬위원회,2008,182~183쪽;188~189쪽; 193~201쪽
94)이윤식은 최용덕이 1937년부터 임시정부 군무부의 항공건설위원회(공군설계위원 회)의 주임을 역임하였다고 보았다(이윤식,앞의 책,2007,293쪽).그러나 현전하 는 군무부 관련 자료에서 해당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아마도 이윤식은 최용덕 이 7년간 항공건설위원회 주임을 역임하였다는 기록(최용덕 자필이력서 ,공군 박물관 소장)을 토대로 해방 시점인 1945년에서 역으로 계산하여 1937년부터라 고 본 것이 아닐까 추정되는데,이것은 해방 이후에도 임시정부가 존속하고 있었 다는 사실을 간과한 추정이다.관련 기록의 7년간은 1940년부터 임시정부 요인들 이 한국으로 귀환한 1946년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공군 정훈감실에서 간행한 최용덕 장군의 책자에서도 1940년부터로 명기하고 있다( 하늘의 개척자 崔用德 將軍 ,공군본부,1956,2쪽).
광복군 창설 이후에도 그는 1943년 8월 공군설계위원회가 조직 되자 부주임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공군 창설 계획을 주도하고 있었다. 공군설계위원회는 군무부장이 자동으로 주임을 겸직하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책임자는 부주임인 최용덕이었다.95) 최용덕의 공군 창설 노력은 단순히 항공력을 도입하는 수준을 넘 어서 광복군 내에서 좌파인 김원봉 계열을 견제하는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전술한 것과 같이 김원봉 계열은 광복군에 합류한 이후 이 청천 계열이 9개준승에 얽매여 있는 동안 영국군과 군사협정을 체 결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에 이청천 계열은 가시 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최용덕을 참모처장으로 전직시킨 뒤, 그를 활용하여 항공력을 도입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광복군은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에게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 은 중국의 패권 확대에 대한 우려와 임시정부 내 분열을 이유로 임 시정부와 그 산하의 광복군을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 에 대해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와 재미한족연 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등은 연합군과 함께 직접 참가하는 것이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의 즉각적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 이라 판단하였다.96) 물론 이때의 승인은 우파인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후에 최용덕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미국 방문까지 추진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97)
95)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1,국사편찬위원회,2006,297~298쪽
96)황묘희, 重慶 大韓民國臨時政府史 ,景仁文化社,2002,165~173쪽
97)최용덕 등의 미국 방문 추진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12,국사편 찬위원회,2006,58~62쪽;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26,국사편찬위원회,2008, 182~191쪽 참조.
그는 어디까지나 독립국가가 한국 독립당의 성향에 따라 건설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영국군과 함께 전선에 투입된 김원봉 계열의 활동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략으로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장 효율적이라 판단한 항공력 도입에 힘썼던 것이다. 항공력의 도입은 보유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연합군의 일원으 로 참전할 수 있는 한 방략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던 김구는 일찍부터 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하여 절감하고 있었다.98)
98)김구는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공군의 활동을 목도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항공력 구축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이에 관해서는 홍선표, 항공독립운 동을 통해 본 대한민국 공군의 기원 , 역사적 고찰을 통한 한미 연합공군력 발 전방향 (제1회 공군역사재단 국제학술회의 자료집),2014,9~13쪽 참조.
김구와 최용덕 등은 소수의 병력을 투입하더라도 가시적인 효과를 내어 미국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항공력 활용에 주목하였다. 더구나 당시 중국 공군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사실상 전투 능력을 상실하여 항공작전의 상당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광복군이 항공력을 일부나마 구축할 경우 미국과 함께 전투에 가담 한다는 의의도 있었다. 광복군의 공군 창설 계획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합작하여 진행하는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1944년에 수립된 공군 창설 및 작전 계획은 매우 구체적으로 구상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99)
99)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11,국사편찬위원회,2006,86~89쪽
광복군은 일단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였던 최용덕, 이영무(李英 茂), 정재변(鄭再變) 등 조종사 5명과 정비인원 6명을 소집한 뒤,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연락기를 조차하여 수송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이를 비행대 창설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양국 항공학교 에서 비행사를 양성한 뒤, 동맹군 비행대의 일원으로 주로 선전작 전에 참가시키며 양국으로부터 각종 비행기를 추가 조차하여 비행 대의 정식 창설을 꾀하고자 하였다. 한편 태평양 전구에는 미국 소재 비행사를 소집하여 광복군의 이름으로 전쟁에 투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결과적으로 비행기 조차가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행사 양성까지는 일부 시행되었다. 대표적으로 김구의 차남인 김신(金信)은 쿤밍[昆明]의 공군군관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 을 마친 뒤, 인도의 미군기지로 이동하여 비행훈련을 받고 있었 다.100) 그는 훈련 도중에 해방이 찾아와 임시정부 비행대 소속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에서 잔여 훈련을 이수한 뒤 한국 공군에서 복무하면서 참모총장까지 역임하였다.101) 비록 실질적인 결과물 도출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광복군의 공군 창설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타국에 자리한, 군사 재정의 상당수를 중국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열악 한 상황에서 광복군이 공군 창설까지 시도하였다는 것은 현실적으 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는 항공력에 대한 당시의 선망을 바탕으로 광복군 내 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한 최용덕의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 다. 최용덕은 스스로가 항공력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 구보다도 이의 효용성을 실감하여 공군 창설에 절실하였다. 전술한 것처럼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항공력의 가시적인 성과 가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최용덕의 귀국 기사에서 그를 항공총장으로 추켜세웠던 데102)에는 이러한 활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최용덕의 광복군 활동은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00)중국은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인하여 내륙으로 후퇴하자 영국령이었던 인도 라 호르(Lahore)에서 비행훈련을 이수하는 협정을 맺었다.이에 관해서는 我空軍 學校遷印訓練 (1943~1944년),臺灣國史館 문서번호:020-011903-0004참조.
101)이상은 김신, 조국의 하늘을 날다 ,돌베개,2013참조.
102) 東亞日報 ,1946년 7월 23일
따라서 그의 활동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경험에서 나온 신념을 바탕 으로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최용덕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기초군사훈련을 다시 받아 소위로 임관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공 군 창설을 위해 투신하였던 모습은 항공력에 대한 그의 신념을 잘 보여준다. 강군 육성을 위한 항공력 확보, 나아가 공군 창설은 그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4. 맺음말
일제시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 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국권을 상실한 현실과 중국의 내전, 그리고 일제의 중국 침략에서 태평양전쟁까지 이어지는 혼란 상황을 살아 가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인 최용덕의 생애는 그 혼 란기를 관통하고 있다. 최용덕은 청․ 장년기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의 청년기 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역량을 축적하는 시기였 다. 그는 17세에 돤치루이 군벌 휘하의 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간 것 을 시작으로 청년기를 중국군에서 보냈다. 그는 돤치루이와 우페이 부, 쑨촨팡, 그리고 장제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반 복했던 중국의 여러 군벌 지도자 휘하에서 비행기 조종사로 복무하 였다. 이러한 최용덕의 청년기 행적은 당시 중국의 정치적 혼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취의 변화 속에서도 독립이라는 그의 목표는 일 관되고 확고하였다. 돤치루이 군벌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었던 시 점에서부터 그는 서왈보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내전 상태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중국 군벌의 현역 신분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행동이 지닌 본연의 목적이 독립운동에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2가지는 독 립운동의 방법에 관한 문제인데,
첫째로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의지 다. 다음으로 이와 관련하여 항공력의 효용성에 대한 신념을 들 수 있다. 당시 중국 군벌은 항공력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고, 최용덕 은 그런 군벌 아래 비행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군벌 간 내전의 경험 은 항공력이 지닌 가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후 그는 광복군 창설 때까지 중국 공군에서 꾸준히 활동하면서 이러한 경험을 축적 해가고 있었다.
셋째는 김원봉 계열에 대한 대립적 입장이다. 초기에는 좌․ 우 대 립까지는 아니었던 듯하나 어느 시점부터 최용덕은 좌․ 우의 관점 에서 상호간의 대립에 대응하였던 듯하다. 그가 줄곧 우파 계열에 서 활동하였던 내력이 이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해방 직후 광복군 은 반공세력 구축을 명분으로 중국 관내에서 확군에 나서는데,103) 여기에 그가 베이징 일대의 책임자가 되었던 사실은 그동안의 경험 이 그를 우파적 성향이 강한 인물로 만들었음을 시사한다.
103)염인호, 해방 후 韓國獨立黨의 中國 關內地方에서의 光復軍 擴軍運動 , 역사 문제연구 창간호,1996,266~273쪽
일제시대 여러 세력과 영역에서 산견되는 최용덕의 행적은 결국 위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수렴된다. 그의 일관된 활동은 해방 이후 에도 이어졌다. 광복군 확군 실패와 미군정의 임시정부 미승인, 그 리고 해방 직후의 열악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한으로 건 너온 뒤, 공군 창설을 주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방 이전부터 축 적되어 온 그의 일관된 의지가 작동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항공력 까지 갖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우파 성향의 독립운동을 지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방 후 남한 공간에서 항공력 구축에 앞장섰던 것 이다. 본 연구는 독립운동과 항공 분야에서 각각 별도의 내용처럼 산견 되는 최용덕의 행적을 유기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 여 각각의 행적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광복군으로까지 이어 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속 연구에서 더욱 면밀 히 살펴봐야겠지만, 광복 후 최용덕이 공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 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건군과의 연계성 역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성과가 중국 등에서 해당 국가의 소속으로 활동한 한 국인들의 행적과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후 건국 과정을 연계할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주제어 :무장독립운동,최용덕(최창석),서왈보,이청천(지청천),김원봉, 항공독립운동,광복군,공군
Gen. Choi Yongdeok's Achievements in the Avi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and His Role in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Kim, Ki-doong
Gen. Choi Yongdeok is considered as the Father of the Korean Air Force. This research aims to trace Gen. Choi’s nationalism military activities before the Korean Independence and to reveal the background of his devotion to the creation of the Korean Air Force under the poor condition after the Independence. Gen. Choi had devoted himself to the armed independence movement after his exile to China follow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and showed a tendency towards anti-socialism. He joined the Chinese air forces under the influence of Seo Walbo to strengthen the capabilities to implement an independence movement and became aware of the importance of air power in military operations while he was acting as a pilot in the Chinese Civil War. The trust from the Chinese Nationalist(Kuomintang) Government, that he had obtained in the Chinese air forces, would be so instrumental to increase his role in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Gen. Choi joined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once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had established such an armed organization. He acted as a mediator between the Independence Army and the Chinese Army through the trust he had got from the Kuomintang Government. He tried continuously to create an air force as a means of obtaining an approval from the allied force of the Independence Army. Meanwhile, he did not lower his vigilance against Kim Wonbong’s socialist group in the Army in order to make sure of right-wing’s dominant position within the Army. In short, Gen. Choi sought the independence movement with a right-wing inclination and did his utmost to the creation of an air force in South Korea in the context as above.
Keywords:Armed Independence Movement ,,ChoiYongdeok(ChoiChangseok),SeoWalbo,
LeeCheongcheon(JiCheongcheon),Kim Wonbong,Aviational Independence Movement,Korean IndependenceArmy,AirForce
〔원고투고일: 2015.4.2, 심사수정일: 2015.5.19, 게재확정일: 201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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