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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명량해전 연구의 성과와 전망/신성재.해군사관학교

Ⅰ. 머리말 Ⅱ. 1980∼1990년대의 성과와 경향 Ⅲ. 2000년대의 성과와 주요 경향 Ⅳ. 2010년 이후의 성과와 그 추이 Ⅴ. 여전히 남은 과제와 발전적 전망 Ⅵ. 맺음말

Ⅰ. 머리말

1597년(선조 30) 9월 16일에 발발한 명량해전(鳴梁海戰)은 조선 (朝鮮)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승리하기까지 조선이 처한 현실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불과 2개월 전에 있었던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의 참패가 불러온 영향이 심각했기 때 문이었다.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하던 조선 수군의 위용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재임명된 이순신 (李舜臣)에게 남겨진 전력은 고작 10여 척에 불과한 전선뿐이었다. 명량해전은 이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승리한 해전으로 일본 수 군의 서해 진출을 억제함은 물론 조선 수군의 재건을 가능케 함으로 써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1)

1) 이민웅, 2004, 鳴梁海戰의 경과와 주요 쟁점 考察 󰡔軍史󰡕 47, 195∼196쪽 ; 이민웅, 2004,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34쪽

따라서 이 해전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걸맞게 당대는 물론 전란 이후 공식적인 관찬 사서나 개인 문집, 다양한 설화 등을 통하여 후대인들에게 널리 전승되어 왔다. 근대 시기에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선각자들의 계몽활동을 매 개로,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학술활동을 통 하여 꾸준한 관심과 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워낙 극적인 해전이었던 탓에 불합리하면서도 신비주의적인 해석 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전 이후 이순신 스스로 “이 (해 전)은 실로 천행이었다”2)며 안도의 심정을 표현한 것처럼 비록 극 적인 면이 있지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투혼 으로 사력을 다해 싸운 해전이었다.

2) 󰡔亂中日記󰡕, 丁酉 9월 16일 “此實天幸”

결코 비과학적인 전법이나 전술 을 구사하여 승리한 해전이 아니었다. 연구가 심화되지 못했던 초기 단계에서 이런 면이 부각되기도 했지만,3) 새로운 성과가 축적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인식적 태도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이다.

3) 대표적으로 수중철쇄설을 거론할 수 있다. 수중철쇄를 설치하여 승리하였음 을 전하는 기록은 李重煥, 󰡔擇里志󰡕 八道總論 全羅道 ; 全羅南道, 1990, 一 道擧義諸公事實 󰡔湖南地方壬辰倭亂史料集 4 - 湖南節義錄󰡕 ; 錦江祠, 1970, 󰡔顯武公實記󰡕, 靑友堂出版社 참조

이 글은 지금까지 학계에 집계된 명량해전에 관한 연구를 대상으로 그 성과를 측정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짚어보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 하였다. 명량해전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연구를 비롯하여 해 방 이후 한국의 연구자들이 해양사와 수군사, 전쟁사 및 해전사를 서 술한 단행본과 개설서 등을 통하여 그 개략적인 사실들을 소개하였 다.4)

4) 일본인 연구자로는 栢原昌三, 日本參謀本部, 佐藤和夫, 宇田川武久, 北島万次 등이 있다. 한국에서의 연구는 海軍本部 戰史編纂館室, 趙仁福, 崔錫男, 李烱 錫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에 의한 초창기 성과의 특징과 의미는 제장명, 2008, 정유재란기 명량해전의 주요쟁점과 승리요인 재검토 󰡔東方學志󰡕 144 ; 제 장명, 2015, 명량해전을 통해 본 이순신의 전술과 리더십 󰡔임진왜란 해전과 충무공 이순신󰡕(충무공 탄신 470주년 기념 국제학술 심포지엄),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연구회 참조

단편적이면서도 개설적인 서술에 기초하여 1980년대부터는 전론으로 다룬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양적으 로나 질적으로 주목할만한 성과들이 여러 편 발표되었다. 이러한 성 과들은 명량해전을 둘러싸고 제기되었던 쟁점들을 해소시키는 한편 으로 보다 합리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인식과 이해의 깊이를 심화시키 는 계기가 되었다. 베일에 쌓여 있던 의혹들이 하나 둘씩 해명되기에 이르렀고, 이제는 그동안에 걸쳐 선학들이 이룩해 놓은 성과들을 정 리하면서 향후의 과제에 대해 전망해 볼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논지 전개는 명량해전을 전론으로 다룬 성과를 대상으로 시기별로 구분하여 그 경향과 특징을 파악하고자 한다. 크게 1980∼1990년대의 연구와 2000년대 연구, 2010년대의 연구로 구분하여 정리할 것이다. 그런 다음 여전히 남아 있는 쟁점은 무엇이고, 쟁점별로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지 식별한 다음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대안 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가 명량해전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 를 증진시키는 가운데 한 단계 진일보한 성과가 탄생하게 되는 계기 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Ⅱ. 1980∼1990년대의 성과와 경향

1980년대 초반은 명량해전이 전론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최초의 시 기이다. 당시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조성도(趙成都)의 연구 는 그 선구적인 성과에 해당한다.5)

5) 趙成都, 1982, 鳴梁海戰 硏究 󰡔軍史󰡕 4. 조성도는 이 때 작성한 논문을 이후 󰡔歷史敎育論集󰡕 4-1(1983)과 󰡔鳴梁大捷의 再照明󰡕(해남문화원 해남군, 1987)에 재차 수록하였다.

조성도의 연구는 당대까지의 연구가 이순신이 이룩한 빛나는 공훈과 해전의 중요성, 그리고 그 의의 등에 대해서는 잘 기술되어 있지만, 해전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여 러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명량해전을 좀 더 명확하게 밝혀보기 위해 해 전 이전의 일반적인 정세와 조선 및 일본 수군의 병세, 조류의 실상, 양국의 전략과 전황 등을 두루 검토하였다. 특히 해전의 진행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 수군이 전투를 계획하는 단계부터 접적 단계, 접전 단 계, 종료 단계로 구분하고 해전과 조류의 상관성 등에 주목하였다. 조성도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성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전략적인 관점에서 명량해전의 발발 배경을 설명하였다. 칠천량해전에서 승리 한 일본군은 전라도를 침공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는 해륙병진(海陸竝進)으로 전라도 연안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 다.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억제하기 위한 전략에 집중하였다. 명량해전은 이처럼 양국 수군이 목표하던 전략 의 차이가 노정된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서해 진출을 기도하던 일본 수군을 좌절케 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는 점에 의 미가 있다.6)

6) 趙成都, 1983, 앞의 논문, 27 37 41쪽

 

해전에 참가한 조선과 일본의 전력 규모, 전술적 운용의 실상도 밝 혀졌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장계를 통해 중앙정부에 보고한 것처 럼 12척의 전선을 운용하였고, 일부의 전선은 거북선과 같은 모양으 로 단장하였다.7)

7) 趙成都, 1983, 앞의 논문, 33쪽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은 133척의 대선단으로 구성되 었고, 선종(船種)은 확인되지 않지만 척후 또는 연락의 임무를 맡은 소선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조선 수군은 소수의 함대였기 때문에 일 자진(一字陣)을 형성하여 천자(天字)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을 활용 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있던 선 박들을 위장선으로 활용하여 후방에서 성원토록 조치하였다.

조성도의 논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조류의 흐 름을 계산하여 해전의 위치 와 전개 과정을 설명한 점 이다. 그는 명량해전일의 조 석을 1965년 9월 16일(음 력)의 조석표를 기준하여 파악하였다. 이에 따르면 해 전 당일인 9월 16일 00시 30 분부터 01시 사이에 조류가 북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 하여 03시 10분경에 7.4노트 의 최강류를 형성하였고, 07 시에는 다시 남동 방향으로 흘러 10∼11시 사이에 9.2노트의 최강류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일본 수군은 이른 아침(早朝)8) 북서류를 이용하여 정조(停潮) 직전에 명 량 입구로 들어서게 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일본 수군의 진로를 저지하려고 우수영을 출범한 조선 수군과 명량 수도의 최협부 근처에 서 맞닥뜨리면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8) 척후병이 적선의 이동 보고를 한 시각으로 06시 30분부터 07시 사이로 설정하 였다. 전투는 이 시각대에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것으로 보았다(趙成都, 1983, 앞의 논문, 35∼38쪽).

조성도와 비슷한 시기에 김일상의 연구가 후속하였다. 김일상의 연구에서 주목해볼 특징은 조류가 전술적인 차원에서 어떤 작용을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9)

9) 金一相, 1985, 鳴梁海戰의 戰術的 考察 󰡔國防硏究󰡕 28(󰡔壬亂水軍活動硏究論 叢󰡕, 海軍軍史硏究室, 1993 재수록)

그는 명량해전이 발발한 1597년 9월 16일의 천문학적 요소가10) 1977년 9월 16일과 동일하다는 판단하에 󰡔메론법󰡕 의 계산 원리를 적용하여 분석하였다.

10) 김일상이 고려한 천문학적 요소는 박명 시간, 일출 및 일몰 시간, 조석이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해전 당일 01시 56분에 남동 방향으로 조류가 흐르기 시작하여 04시 34분에 5.7 노트의 최강류를 형성하였고, 07시 14분에는 북서류로 조류의 흐름 이 바뀌어 10시 13분에 8.862노트의 최강류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 후 14시 29분에 남동류로 다시금 흐름이 바뀌었고, 16시 57분에 최강 류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는 조성도가 제시한 조류의 흐름과 변화 되는 순서와는 정반대의 결과로 이후 대부분의 연구자들로부터 공감 을 얻게 되는 의미 있는 성과였다. 결론적으로 김일상은 새롭게 밝힌 조류의 흐름에 근거하여 북서류가 시작되는 07시 40분경에 전술적으 로 유리한 협수로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이순신 함대와 09시를 전 후하여 해전의 장소에 도착하였던 일본함대 사이에 전투가 발발한 것으로 이해하였다.11)

11) 참전한 전선 수와 해전 장소는 조성도와 동일하다(金一相, 1993, 앞의 논문, 206 210쪽).

한편 호남지방에 전래되어 오는 민속 무용의 하나인 강강수월래를 검토한 연구에서는 명량해전에서 수중철쇄를 이용한 전술이 구사되 었다는 독특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최두환의 연구가 그것이다.12)

12) 崔斗煥, 1991, 鳴梁海戰과 강강수월래 󰡔龜海 趙成都敎授 華甲紀念 忠武公 李舜臣 硏究論叢󰡕, 海軍士官學校 博物館. 철쇄설에 대해 사실로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긍정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견해가 이미 제기된 바 있다 (趙援來, 1987, 壬亂海戰의 勝因과 全羅沿海民의 抗戰 󰡔鳴梁大捷의 再照明󰡕, 해남문화원 해남군, 83∼84쪽).

 

최 두환은 강강수월래가 민속 무용의 하나로 발돋움하였던 것에 대해 명량해전 시 이순신이 물 속에 쇠줄을 걸어 왜적선을 쳐부수는데 기 여한 것을 기념한 것으로 이것이 훗날에 강강수월래라는 말로 발전 하였다고 한다. 그 방식은 명량수로의 최협부에 수중 철쇄를 설치한 다음 막개라고 하는 장치를 이용하여 걸리어 넘어지게 한 뒤 강한 유속에 따라 서로 충돌케함으로써 전복시켰다고 한다. 이 견해는 그 동안 설화적인 수준에서 회자되고 있던 수중철쇄설이 과학적인 검증 없이 하나의 학설로 부상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학 계에서는 수중철쇄설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다.13)

13) 해전의 장소에 대해서는 명량수로 최협부로 보았다. 조석의 흐름과 방향은 김 일상의 견해와 유사하지만 일본군이 명량수로에 도착한 시각에는 차이가 있 다. 최두환은 오전 10시 45분으로 산정하였다(崔斗煥, 1991, 앞의 논문, 574∼ 582쪽).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80년부터 1990년대까지 학계에 전론으 로 소개된 성과는 조성도, 김일상, 최두환의 연구가 주축을 이룬다. 이들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선 명량해전이 발 발하게 되는 전략적인 배경과 의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서해 진출을 기도하던 일본 수군의 전략에 맞서 조선 수군은 이들의 서진을 억제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결국 조선 수군의 전략은 일본 수군의 서진을 막고 정유재란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 를 만들었다. 해전에 참가한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력 규모에도 의견 이 모아졌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장계에 나오는 것처럼 12척의 전 선이 참전하였고, 일본 수군 중 명량 해협을 통과하여 해전에 참가한 척수는 130여척(혹은 133척)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일본 수군에 효 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조류를 활용하였음도 밝혀졌다. 비록 초창기 연구에서 조류의 흐름이 실제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설정되는 오류 가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이는 후속하는 연구를 통해 극복되었다. 하지만 무리한 억측이나 과학적인 근거가 부재한 견해도 주장됨으 로써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설화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던 수중 철쇄를 이용한 왜군 격파설이 그것으로 이는 명량해전의 승리에 대 한 신비주의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킴은 물론 이순신에 대한 성웅화를 촉진시켰다. 해전의 장소에 대해서는 연구자 모두 명량 해협 최협부 에서 발발하였다는 조성도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였는데, 잘 알려 진 것처럼 이곳은 유속이 느리거나 조류가 흐르지 않는 정조 시간대 가 아니고는 사실상 해전이 불가능한 공간이다. 해전이 실제 벌어진 시점에 대해서도 논자들마다 차이가 있다. 조성도가 대략 06시 30분 ∼07시로 설정하였음에 비해 김일상은 09시를 전후한 시기로, 최두환은 10시 45분으로 보았다. 조선 수군의 전력으로 거북선으로 단장 한 전선이 참전하였다는 조성도의 견해도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이 러한 상반된 견해와 과도한 해석에 의한 오류, 문제점 등은 이어지는 2000년대의 연구를 거치면서 점차 극복되어 갔다.

Ⅲ. 2000년대의 성과와 주요 경향

2000년대는 명량해전에 대해 의미 있는 성과들이 여럿 나온 시기 이다. 박혜일 최희동 배영덕 김명섭(이하 박혜일로 통칭함), 이민웅, 임원빈, 제장명의 성과가 그것이다. 먼저 박혜일은 사료 비판과 자료 의 재평가를 통해 해전 당일의 조석 시각을 추정하고 해전의 경과와 전황을 복원하였다.14)

14) 朴惠一 崔熙東 裵永德 金明燮, 2002, 李舜臣의 鳴梁海戰 󰡔정신문화연구󰡕 88

그는 메톤 주기(Metonic cycle)를 이용하는 방 법, 달과 태양의 위치 계산에 의한 방법, 달의 남중 시각 계산에 의한 방법 등을 이용하여 해전 당일에 북서류가 시작되는 시간을 06시 50 분으로, 북서류에서 남동류로의 전환되는 시간은 13시 02분으로, 다 시 북서류로 변화되는 시간을 19시 17분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전류 가 시작되는 시각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조류의 시작 순서와 방 향은 김일상과 최두환의 견해와 일치한다. 박혜일은 이 결과에 근거 하여 해전 당일 08시 30분경에 북서류를 타고 명량 해협을 통과하려 는 왜 함대와 이를 저지하려던 조선 수군간에 전투가 발발한 것으로 보았다.15)

15) 해전에는 조선 수군이 13척, 일본 수군 133척이 참가한 것으로 보았다.

수중철쇄설에 대해서는 철쇄가 너무 무거워 특별한 장치가 필수적 이고,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그러한 장치를 설치하기 어려웠던 점, 현재의 기술로도 철쇄를 이용하여 여러 척을 전복시키기 어렵다는 점 등을 근거로 구체적인 사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전설로 평가함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보였다.16)

16) 朴惠一 崔熙東 裵永德 金明燮, 2002, 앞의 논문, 142∼144쪽

그러면서 󰡔난중일기(亂中日 記)󰡕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근무 시 수영(水營)의 방어 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돌덩이와 쇠사슬을 설치한 기록에 주목 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도 제시하였다. 이순신의 일기에 나타나는 쇠 사슬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시설이며, 평상시에 적선이나 선박들이 진입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해상 또는 수중 장애물이 분명 한 것으로 명량에도 당연히 유사한 시설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17)

17) 朴惠一 崔熙東 裵永德 金明燮, 2002, 앞의 논문, 144쪽

눈여겨볼만한 견해라고 생각되며, 특히 조선 수군이 13척 참전한 사 실을 밝힌 점과 수중철쇄설이 안고 있던 문제점에 대한 합리적인 해 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성과였다. 박혜일과 같은 시기에 나온 이민웅의 성과는 연구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 논문은 기존 연구가 해전의 배경과 승리의 원인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못하고 이순신 개인의 능력만을 강조하였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명량해전의 전반적인 배경과 진 행 과정, 이후의 추이는 물론 주요 쟁점으로 남아 있던 수중철쇄설과 해전의 장소 문제, 거북선의 참전 여부 등을 두루 검토하였다.18)

18) 이민웅, 2004, 앞의 책, 220∼246쪽

그 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전반적인 해전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8월 3일 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은 해안을 따라 서남진하면서 수군 병력을 모집하고 군수물자를 준비하는 등 조선 수군의 전투력 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칠천량해전에서 승리한 일본 수 군은 8월초 남원성(南原城)과 전주성(全州城) 전투에 참가하여 혁 혁한 공을 세운다. 그 뒤 조선 수군의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서해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적인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명량해전은 이 과정 에서 발발하였다. 해전 발발 시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세력은 전선 13 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였고, 일본 수군은 133척이 해전에 참가하였 다. 해전은 명량 해협을 통과한 일본 수군이 우수영 앞 바다 쪽으로 방향을 틀고 에워싸면서 시작되었고, 그 시각은 대략 11시 전후였던 것으로 추정하였다.19)

19) 일본 參謀本部가 펴낸 󰡔日本戰史朝鮮役󰡕(1924)와 宇田天武久의 󰡔日本の海賊󰡕 (誠文堂新光社, 1983)에 근거하여 대형선인 安宅船은 해협 밖에 대기시키고, 중 소형의 關船만으로 협수로를 통과하여 대결한 것으로 이해하였다(이민웅, 2004, 앞의 책, 226쪽).

이민웅의 성과에서 주목되는 점은 명량해전의 승리 요인으로 지목 되어온 수중철쇄설을 부정하고, 해전의 장소를 기존과는 다른 곳으 로 논증한 점이다.20)

20) 이 외에 거북선 참전 여부에 대해서도 해전 이전까지 전선을 개조할 만한 시 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점을 근거로 명량해전 이후 수군을 본격적으로 재건하 는 시기에 개조 혹은 건조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이민웅, 2004, 앞의 책, 230 ∼231쪽).

이민웅이 수중철쇄설을 부정한 것은 철쇄 가설 을 입증할만한 문헌자료가 없고, 비록 전라좌수영에 철쇄를 가설한 기록은 있지만 우수영과는 무관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중환 (李重煥)의 󰡔택리지󰡕와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로 참전하였던 김억 추(金億秋)의 무용담을 기록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현무공 실기(顯武公實記)󰡕 등에 철쇄 가설에 관한 내용이 전하지만, 이는 후대에 꾸며진 설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철쇄 가설은 사 실로 보기 어렵고, 단지 후대에 조상의 전쟁 영웅담이 확대 재생산되 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를 역사적인 사실로 오해하였던 것이라 고 한다.21)

21) 이민웅, 2004, 앞의 책, 230∼232쪽

해전 장소에 대해서는 명량해전 최협부가 지형이 좁고 물살이 빠 르기 때문에 정조 시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투가 불가능하다 는 입장에서 우수영 근처 앞 바다로 추정하였다. 이는 아침 일찍 망 군(望軍)의 적선 접근 보고를 접한 뒤 바다로 나갔는데 적선이 곧바 로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고 하는 󰡔난중일기󰡕 기록에22) 근거한 해 석이다.

22) 󰡔亂中日記󰡕 丁酉, 9월 16일 “晴 早朝 望軍進告內 賊船無慮二百餘隻 鳴梁由入 直向結陣處云 招集諸將 申明約束 擧碇出海則 賊船一百三十三隻 回擁我船”

닻을 올리고 나가자마자 적들에게 에워싸인 곳은 명량 해협을 통과해 우측으로 구부러지 는 곳으로 폭이 넓고 유속이 다소 약해지기 때문에 해전이 가능한 장소로 본 것이다. 이민웅의 성과는 명량해전 의 전개 과정은 물론 해전 전 후 조선 및 일본 수군의 활동 과 동향 등에 대해서도 종합 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해전의 승리 요인으로 인식되어 왔던 수중 철쇄론의 허구성을 입증함으로써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23)

23) 해전의 승인으로는 정예장병을 모집하여 전투력을 증강한 점, 일본의 주력함 인 안택선이 참가하지 못한 점, 해로차단 전술과 명량의 조류를 이용한 이순 신의 뛰어난 전략전술, 피난선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전투 참여 등을 지목하였 다(이민웅, 2004, 앞의 책, 229쪽).

해전 장소에 대해서는 이후 또 다른 견해가 제기면서 쟁 점을 형성하게 되지만, 관련 기록과 전반적인 해전의 정황을 고려하 여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민웅에 이어 임원빈의 연구가 후속하였다. 임원빈은 명량해전의 승리 요인을 병법적 관점에서 규명하였다.24)

24) 임원빈, 2004, 병법(兵法)의 관점에서 본 명량해전 연구 󰡔海洋硏究論叢󰡕 33. 대략 비슷한 견해가 이후의 연구에도 반영되었다(2008, 명량해전 승리요인의 재조명 󰡔이순신연구논총󰡕 10).

기존 연구에서 명량해 전의 승리 요인으로 지목한 수중철쇄론을 비판하면서 조선 수군의 함선 성능과 무기체계가 일본 수군에 비해 질적으로 우수하였고,25)수적인 열세를 명량의 지형적 조건을 활용하여 극복한 점, 이순신의 탁월한 지휘통솔력에 힘입어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하였던 점 등을 주요 승리 요인으로 지목하였다.

25)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격군을 1,2층의 갑판에 분리시켜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한 점과 왜 수군을 압도한 총통의 우수성에 주목하였다(임원빈, 2004, 앞의 논문, 30∼31쪽).

동시에 지피(知彼)의 원리, 지리의 이용 원리, 주동권 확보의 원리, 화력 집중의 원리 등이 명량해전에 적용된 전쟁 승리의 원리였다고 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이성적인 설득법과 필사즉생법과 같은 지휘통솔법 역시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는 해전 의 승리 요인을 병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다 보니 실제 해전이 발발 한 장소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인식한 측면이 있다. 명량 해협 입구에 13척의 조선 수군을 포진시켜 기다리고 있다가 해협을 빠져나오는 적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는 표현으로 보아서는 해전의 장소로 해협 입구를 지목한 듯하다. 이 곳은 지리적으로 협소하기 때문에 일 본 함선의 선두 10척만이 전투에 참여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26) 병법의 운용 원리와 잘 부합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 민웅이 지적한 것처럼 이 곳은 유속이 빨라 해전을 수행하기에는 적 합하지 않은 장소이다.27)

26) 임원빈, 2004, 앞의 논문, 33∼35쪽

27) 비슷한 시기에 이종학의 연구도 있으나 기왕의 성과를 수용한 것이기에 별도 의 정리는 생략한다. 이종학, 2006, 명량해전의 군사사학적 연구 󰡔海洋戰略󰡕 132 참조

한편 이 시기에는 명량해전에 대한 주요 쟁점을 정리하면서 해전 의 승리 요인을 다양한 관점에서 충실하게 정리한 성과도 제시되어 눈길은 끈다. 제장명의 연구가 그것이다.28) 제장명의 연구에서 주목 되는 것은 기존의 견해와 달리 해전이 시작된 시기와 장소를 새롭게 비정하였다는 점이다.29)

28) 제장명, 2008, 앞의 논문 ; 2015, 앞의 논문 참조

29) 거북선이 해전에 참가하지 않은 점과 수중철쇄론에 대한 부정은 이민웅의 견 해와 같다

해전의 시기는 조류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명량 해협의 조류는 음력 9월 16일을 양력 10월 25 일로 환산하였을 때 06시 38분경에 잠시 멎는 정조가 형성된다. 이후 북서류가 시작되어 일본 함대가 해협을 통과해 우수영 앞바다로 진 격하기 용이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08시 48분에 9.7노트의 최강류 가 형성되고 12시 57분에 동남류로 전류된 후 15시 03분경에 8.4노트 의 최강류가 형성된 다음 19시 04분경에 북서류로 전류된다. 이순신 이 접전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류의 흐름과 망군이 이른 아침에 일본군이 출현했음을 보고한 사실에 근거해볼 때 대략 08시 전후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30)

30) 제장명, 2008, 앞의 논문, 225 226 231쪽

해전 장소에 대해서는 조성도의 최초 견해와 이민웅의 견해와도 다른 제3의 장소로 파악하였다. 제장명이 명량 해협 최협부를 부정한 것은 7노트 이상의 유속이 흐르던 곳에서 3노트의 속 도에 불과했던 조선 수군이 이동은 물론 진을 칠 수도 없었기 때문 이었다. 우수영 앞 바다를 부정한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 이었다. 먼저 난중일기의 기록 중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 이다. 기록을 보면 이순신이 전투 중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하였 다”31)는 내용이 나온다.

31) 󰡔亂中日記󰡕 丁酉, 9월 16일

우수영 앞 바다에 진을 친 상태에서 뒤로 물 러난다는 것은 우수영이 있는 육지를 말하는 것이므로 불과 1킬로미 터 정도에 불과한 공간에서 1마장(400미터)이나 뒤로 물러난다는 것 과 우수사 김억추가 멀리 떨어져 묘연할 정도의 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수군이 우수영 쪽으로 진출하였다는 것에도 문 제점을 지적했다. 조선 수군이 우수영 앞 해상에 진을 치고 있다고 상정하더라도 명량수로의 최협부를 넘어온 일본 수군 전체가 오른쪽 으로 회전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32)

32) 제장명, 2008, 앞의 논문, 228∼229쪽

대략 이러한 점을 제시하면서 당시 조선과 일본이 추진했던 수군 전략을 고려하여 해전의 장소를 양도를 최전방으로 하여 포진한 형 태로 설정하였다. 조선 수군의 전략은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는 것이 전략적인 목표였 음에 비해 일본 수군 의 전략은 조선 수군 을 격멸시킨 후 서해 로 진출하여 전라도를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 이었으므로 해전의 장 소는 마땅히 서해로 진출하는 길목을 막는 위치로 설정될 수 밖 에 없다는 것이다.33)

33) 수군을 파하고 육전에 종사하라는 선조의 명에 대해 이순신이 수군의 전략적 인 가치를 언급하며 그 불가함을 올린 장계에 근거한 해석이다. 이에 대해서 는 󰡔李忠武公全書󰡕 卷9, 附錄 1 李芬 撰 行錄 참조 3

이순신은 이러한 장소에서 전선과 무기체계의 위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은 물론 전문적인 수군 인력의 확보와 전투의지의 고양, 지휘함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 조류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전의 전개, 의병들의 활약 등에 의지하여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으로 보았다.34)

34) 제장명, 2008, 앞의 논문, 233∼249쪽

이처럼 명량해전 연구는 2000년대 들어 괄목할만한 성과를 축적하 기에 이르렀다. 기왕에 논란이 되었던 수중철쇄설에 대한 비판적 성 과를 중심으로 해전의 배경과 과정, 실상 등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이 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해전의 승인에 대해서도 이순신의 전략과 전 술, 리더십, 병법적인 관점에서의 심도 깊은 성과가 도출되었다. 거 북선의 참전 여부에 대해서도 새롭게 밝혀졌다. 하지만 여전히 과제 도 남아 있다. 해전 장소로 지목되어온 명량 해협 최협부의 문제점을 과학적으로 극복한 것은 의미 있는 성과였지만, 우수영 앞 바다가 타 당한 것인지, 양도를 최전방으로 하는 위치가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 서는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해전이 벌어진 시각대에 대해서도 오전 08시 혹은 11시를 전후한 시기로 보는 등 견해가 일치하지 못하 고 있다.

Ⅳ. 2010년 이후의 성과와 그 추이

2010년 이후의 연구적 특징은 연구의 외연이 확대되고, 보다 다양 한 학문 분야에서 해전을 연구하였다는 점이다. 조성진, 노승석, 박 종평, 노기욱, 박희태의 연구가 그것이다. 먼저 조성진은 최근 군에 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M&S(Modeling and Simulation) 개념을 이 용하여 명량해전의 승패 요인을 지형, 조류, 장애물 요소에 대입하여 정량적으로 분석하였다.35)

35) 조성진, 2010,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역사적 전투사례의 승패요인 분석 : 임진 왜란시 명량해전 사례 연구 󰡔經營科學󰡕 27-1

그의 분석에 따르면 승패 요인은 크게 다 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지형은 명량 해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전투를 강요하게 만들었는데, 일본 수군은 이 해협에서 수적인 우위 를 살리지 못했다.

둘째, 조류는 일본 함선의 공격 가능시간을 제한 시키는 효과를 나타내었다. 처음에 일본 수군은 순조류를 타고 해협 에 진입했으나 약 2시간 뒤 조류의 방향이 바뀜으로써 더 이상 근접 전투를 수행하지 못했다.

셋째, 순조류를 타고 불과 10∼15분이면 통 과할 명량 해협을 조선 수군이 조류가 바뀔 때까지 버티어낸 것은 함선과 병사의 전투능력이 매우 우수했음을 입증한다.

넷째, 아무리 우세한 전투력이라고 하더라도 밀려드는 적의 공격에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손상된 적함들이 침몰하기까지 해상에서 장애물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적선의 접근은 제한되었다.

다섯째, 통제사 이순신이 야말로 지휘관의 판단과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한 가장 큰 승리 요인이었다.36)

36) 조성진, 2010, 앞의 논문, 71쪽

연구 방법론은 상이하지만, 대체로 역사학 관점에서 이해하는 승리 요인과 합치됨을 알 수 있다. 노승석은 명량해전에서 의병들의 역할이 중요하였다는 사실이 밝 혀지고 있는 현실에서 전북 고창 출신의 유학자로 의병활동을 전개 한 오익창(吳益昌)에 대한 조명을 시도하였다.37)

37) 노승석, 2012, 鳴梁海戰 중 吳益昌의 의병활동에 대한 고찰 - 󰡔沙湖集󰡕을 중 심으로 󰡔호남문화연구󰡕 52

오익창의 문집인 사호집(沙湖集)에 수록된 명량해전과 관련한 기록들을 중심으로 명 량대첩을 이루기까지의 활약상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오익창의 활 동이 명량해전 승리에 크게 공헌하였음이 밝혀졌다. 오익창이 수행 한 역할은 피난선 1,000여 척으로 조선 수군 13척의 배후를 지원한 점, 식량 의복 활 화살 등과 같은 군수품의 지원, 길에 버려진 동과 (冬瓜)를 모아 전투 시 수군의 갈증 해소에 지원한 점, 솜이불을 지 원하여 적의 총탄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한 점, 이순신의 거북선 제조 에 참여한 점 등이다.38)

38) 노승석, 2012, 앞의 논문, 88∼91쪽. 거북선 제조에 참여한 점은 정운희가 이순 신에게 명량대첩을 축하하면서 보낸 시에 나타나는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노 승석은 이에 대해 추후에 더 연구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하였다(노승석, 2012, 앞의 논문, 91∼92쪽).

의병장으로서의 이러한 역할은 명량해전 승 리의 한 요인이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는 이순신의 수군 재건에도 큰 힘이 되었다도 한다. 박종평은 명량해전시 철쇄설의 연원에 관한 성과를 내놓았다. 18 세기부터 철쇄설이 등장하여 설화냐 실제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되어 왔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통설임을 전제 하고 다양한 문헌과 연구자료를 통하여 그 연원을 추적하였다.39)

39) 박종평, 2012, 명량해전 철쇄설 연원에 관한 연구 󰡔이순신연구논총󰡕 18

그 결과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볼 때 명량해전 철쇄설은 부정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면서 명량 해전 철쇄 전술과 관계없이 조선시대에 철쇄를 활용한 해상방어전술 이 활용된 것만은 분명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아울러 앞으로는 철쇄를 활용했던 선조들의 해양방어 전략과 전술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하였다.40)

40) 박종평, 2012, 앞의 논문, 187∼188쪽

이는 조선시대 수영의 해 양방어체제 문제와 철쇄 운용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는 견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013년에는 노기욱의 성과가 나왔다.41)

41) 노기욱, 2013, 이순신의 수군 정비와 명량해전 󰡔지방사와 지방문화󰡕 16-2

이 연구는 명량해전 승전 요인으로 수 많은 연해민의 활동과 군량 및 군비 지원 등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음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전의 승인을 다음과 같이 정 리하였다. 첫째 잘 훈련된 함대로 적의 지휘 선박을 화포로 집중 공 격하여 완파한 점, 둘째 전라 연해민의 병참활동 후원과 수군 정비 및 향선이 참가하여 후미를 보전한 점, 셋째 명량 협수로의 자연지물 을 이용한 철쇄 설치로 대적 심리전과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킨 점 등이 그것이다.42)

42) 노기욱, 2013, 앞의 논문, 90∼91쪽

이러한 견해는 기왕의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수용한 것으로 새로운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수중철 쇄설은 이미 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학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최근에는 박희태의 연구도 이어졌다.43)

43) 박희태, 2014, 트리즈(TRIZ) 분석방법으로 본 명량해전 󰡔이순신연구논총󰡕 21

박희태는 구 소련의 과학자인 겐리히 알트슐러가 만든 트리즈(TRIZ) 원리에 기초하여 명량해전을 분석하였다. 트리즈 원리는 서로 상반되는 특성이 동시 에 존재하고(물리적 모순), 달성해야 되는 목적이 상충되는 모순 상 황(기술적 모순)에서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이 새로운 혁신과 성공으 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기초하여 좁으면서도 동시에 넓 어야 하는 해전의 공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해전 시간, 함선 척수와 크기와 같은 조건 등을 명량해전의 모순상황으로 설정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명량해전은 공간과 시간, 조건의 모순을 모두 해결하고 일본군을 격퇴한 해전이었음이 입증되었다.44)

44) 박희태, 2013, 앞의 논문, 336쪽

박희태의 연 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 간의 모순 상황을 극복하 기 위해 기존 장소와는 다 른 곳을 해전 장소로 비정 한 점이다. 그 가 비정한 장소는 대략 이 민웅과 제장명이 설정한 장소를 가로와 세로축으 로 연결 시에 만나는 곳이 다. 흥미 로운 해석이지만, 해전 당 대의 기록과 조선과 일본 수군의 전략 전술 등을 충분히 따져볼 필 요가 있다. 이상과 같이 2010년 이후에는 역사학 연구만이 아닌 공학 분야, 경영학 분야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명량해전의 승인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오익창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장들이 해전에 적극 참여한 사 실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조선시 대 수영의 방어체제와 철쇄의 운용에 대한 상관성도 살펴볼 필요성 이 제기되었다. 해전의 장소로 기존과는 차이가 있는 제 ④의 장소로 설정한 견해도 흥미롭다. 하지만 명량해전 승리의 요인으로 특별한 논증 없이 수중철쇄설이 거론된 점은 아쉬운 면이 아닐 수 없다. 여 전히 남아 있는 이러한 문제점과 쟁점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발 전적인 제언을 제시하고자 한다.

Ⅴ. 여전히 남은 과제와 발전적 전망

명량해전에 대한 연구는 초창기의 성과를 기반으로 내재된 문제점과 한계점을 극복해가면서 괄목한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무엇보다 영웅주의적 사관의 산물인 수중철쇄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이해 력을 높인 것은 매우 주목된다. 비판적이면서도 대안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 해전의 승리 요인도 과학적인 수준에서 다양한 내용으 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거북선의 참전 여부에 대해서도 정리되었 고, 조류 문제 역시 초창기 연구의 오류를 수정하여 바로잡게 되었 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자 국가의 지배공간이었던 지역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일어선 오익창을 비롯한 해상 의병들의 활동과 역할 또 한 새롭게 조명되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팽창한 이러한 성과는 분명 명량해전 연구의 수준을 심화시켰고, 과학적인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와 쟁점은 남아 있다. 명량해전이 발발했던 해역을 그린 최신의 해도45)를 참조하면서 여 전히 남은 과제에 대해 발전적인 제언과 전망을 하고자 한다.

우선 가장 큰 쟁점으로 남아 있는 해전의 장소에 대한 문제이다.

45) 󰡔명량수도(NO. 332)󰡕, 2011년 발행. 도면에 나오는 당 해역 수치는 다음과 같 다. ⓐ(200m), ⓑ(530m) ⓒ(2,050m), ⓓ(800m). 이민웅이 설정한 해전 장소의 해협 최소 폭은 530미터이고, 제장명이 설정한 장소의 최소 폭(육지∼양도)은 800미터이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이민웅과 제장명이 제시한 견해가 주목되는데, 이는 당대의 기록과 정황, 조선과 일본이 추진하던 수군전략, 이순신 이 적용하였음직한 병법과 전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일단 당대의 기록에 나오는 망군의 적정 상황보고와 조선 수군의 출정 과정, 급박하게 일본 수군으로부터 포위를 당한 사실 등을 고려 하면 우수영을 출항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맞딱 뜨린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해본다면 이민웅이 설정한 장소가 설득력이 높 아 보인다. 하지만 제장명이 제시한 바와 같이 조선 수군이 후방으로 물러나기 어려 울 정도로 우수영 앞 바 다의 공간이 제한적이었 던 점과 종적이 묘연했 던 김억추의 행방, 명량 해협을 통과한 일본 수 군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불가능하였다고 하는 실험적 근거46) 등은 이민웅이 설정 한 위치로는 설명이 제한된다.

46) 제장명, 2008, 앞의 논문, 229쪽 주 59

또한 일본 수군의 전략이 조선 수군을 격멸시킨 후 서해로 진출하는 것임에 비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는 것이었다고 보면 서해상으로 통하는 길목에 함대 를 배치하여 결사 항전하는 것이 최적의 대응이다. 제장명이 설정한 위치 역시 설득력을 갖는다. 양자의 견해 중 어느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더 논의가 필요하 다.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우선 명량 해협을 통과한 일본 수군이 우수영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 불 가능하다고 하는데, 실제 그러하였는지 조류의 시간대별 추이와 함 께 당대 전함의 조함적 특징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47)

47) 일본 수군이 5∼6열로 진을 형성하여 통과하였다는 근거에 기초하는데, 실제 일본 수군이 그와 같은 대열을 지어 이동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류의 시간대별 다양한 진형의 이동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요구된다. 일본 수군이 정조 시간대에 맞추어 통과하거나 정조를 전후하여 유속이 느린 시간대를 이 용하였을 경우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수영 앞 바다의 협소한 공간과 행방이 묘연했던 김억추의 행동에 대해서도 전투 상황을 염두해두면서 합리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이민웅이 설정한 위치로부터 후방으로 1마장(4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라고 하더라도 그 위치가 우수영으로부터 적어도 500미터 정도는 이격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한다면48) 전선의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49)

48) 해전도 ② 및 주 45 해도의 거리 ⓒ 참조

49) 현재 이 지역이 당대의 지형과 달리 상당 부분 매립된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김억추의 행방이 묘연하였다고 하는 기록 역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 압도적인 일본 수군의 위세에 눌려 후방에 물러나 있던 상황에서 인접한 우군 전함이나 양도(羊 島)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일본과 조선의 수군전략으로 해전의 장소를 설정한 점 역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전쟁을 수행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의 수군전략은 서해 진출이 궁극적인 목표이고, 조선 수군의 전 략적인 목표는 이를 저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양국 수군의 전략적인 목표의 구현은 명량해전이라는 단위 전투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전술적인 문제로 귀착된다. 일본 수군의 입장에서는 명량해전 에서 조선 수군을 완전히 격멸하기 위해 압도적인 전력을 효과적으 로 활용하는 것이다.50)

50) 제장명 역시 일본군의 입장이 조선 수군을 격멸시킨 후 전라도를 확실하게 확 보하고자 하였다고 서술하였다(제장명, 2008, 앞의 논문, 230쪽).

열세적인 상황에 있던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 는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세력을 보존하기 위해 최적의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중요하다.51)

51)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함대가 결전은 회피하고 세력을 보존하여 적국 함대 의 전투의지를 발동할 수 없게 한다는 현대의 ‘현존함대전략’과 유사하지만, 부합하지는 않는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과의 결전을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명량해전 시 현존함대전략이 적용되었음은 李敏雄 2005, 壬辰倭亂과 동 북아 삼국의 海洋戰略 󰡔島嶼文化󰡕 25, 116쪽 참조

따라서 전력 규모가 우세했던 일본 수군 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전의 장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선 수군을 완전히 격멸해야만 서해 진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해전의 장 소는 조선 수군이 어느 곳에서 진을 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는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명량해전에서 의 승리를 통한 세력 보존이 전술적으로 중요한 관건이었으므로 일본 수군의 포위를 최소화시키는 가운데 방어에 효과적이고, 공격의 집중도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위치를 전투 장소로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52)

52) 이론적으로 이에 적합한 장소는 명량 해협 최협부가 해당한다. 하지만 기왕의 연구를 통해 입증된 것처럼 이 곳은 유속이 빨라 해전이 불가하다.

병법에 밝았던 이순신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 었을 것이고, 구체적인 위치 역시 예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보 다 급박하게 일본 수군이 명량 해협을 통과해옴에 따라 계획하였던 위치와는 차이가 발생하던 곳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 아닌가 추정된다. 다음으로 수중철쇄설과 관련한 제언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왕의 연구에서 극복된 쟁점이다. 하지만 최근 뚜렷한 검증 없이 명량 협수 로를 이용한 철쇄 설치로 군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심리전을 벌 였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어 다시금 논쟁이 발생할 수 있다. 이와 관 련하여 조선시대 수영의 방어체제와 수중철쇄를 이용한 전술 등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기왕에도 철쇄를 활용하여 수영을 방어하는 전술을 활용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53) 만큼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활용 범위와 대상, 수영에서의 설치 위치 와 이용 공간, 전술적 효과 등을 입증한다면 철쇄설의 허구성을 재차 입증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성과들이 나오게 된다면 기왕의 철쇄설이 제기되고 확대된 내용 역 시 한층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 각한다.54)

53) 이에 대해서는 박혜일과 박종평의 연구가 참고된다(주14 30).

54) 이 점에서 전라 우수영 및 좌수영 앞 바다에 대한 발굴 작업과 수중 고고학적 검토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수영과 좌수영에 대한 수군진 조사는 다음 성 과를 참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1, 󰡔조선시대 수군진조사Ⅰ󰡕(전라우수영 편)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4, 󰡔조선시대 수군진조사Ⅱ󰡕(전라좌수영 편)

해전 시점에 대해서도 이견이 좁혀졌으면 한다. 이는 조류의 문제 와 연관성이 있다. 일단 연구자들 간 조류가 시작되고 바뀌는 순서와 방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전류의 시간 산정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망군의 적정 보고 시점에 대한 이해의 차이 등에 따라 제 각 각 다른 시각을 해전 발발 시점으로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제장명은 08시를 전후한 시기, 박혜일은 08시 30분경, 김일상은 09시를 전후한 시기, 최두환은 10시 45분경, 이민웅은 11시를 전후한 시기로 보는 등 다양하다. 관련 기록이 명확치 못해 이견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한계도 있겠지만, 남겨진 기록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정황 증거 등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으로 결론에 이르렀으면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류의 전술적인 영향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도 보완되었으면 한다. 순조와 역조를 이용하여 함대가 해전 장소에 진 입하거나 퇴각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전투 시 조선의 전선과 일본 전 선의 기동 및 전투력에 조류가 전술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해전에 참가한 일본 수군의 선종이 무엇이었는가에 대 해서도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일본 수군이 명량 해협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안택선을 해협 밖에 대기시키고, 중소형 군선인 관선만으로 협수로를 통과하게 하여 조 선 수군과 대결하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는 전투력이 높았던 안택선이 해전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선 중심의 전선만으로 는 조선의 수군보다 열세였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준다.55)

55) 이민웅, 2002, 앞의 논문, 189쪽. 일본의 전선이 작아 안위의 전함 한 척을 깨뜨 리지 못했다는 이항복의 견해가 있다(󰡔宣祖實錄󰡕 卷126, 宣祖 33년 6월 丙戌).

하 지만 이러한 설명은 역설적으로 일본 수군이 전투력이 약한 전선만 으로 조선 수군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 었다는 당위적인 논리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일본측에서 연구된 성과 를 인용하고 있는데, 실제 관선만이 참가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133 척으로 함대를 구성하였다고 한다면 중소형 전선만이 아닌 안택선과 같은 대형 전선도 지휘를 위해 응당 포함되어졌을 것으로 보여지는 데,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증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 점은 조선 수군이 승리한 명량해전의 전사적 가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안이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덧붙여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설명되었지만 인적 차원에서의 전투력의 실상 에 대해서도 분석이 보완되면 좋을 것이다. 일례로 조선 수군의 전투 를 묘사한 기록을 보면 “군관들이 빽빽이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였 다”56)는 장면이 있다.

56) 󰡔亂中日記󰡕 丁酉, 9월 16일 “軍官等簇立船上 如雨亂射 賊徒不能抵當 乍近乍退

비록 13척의 적은 수의 전선이었지만 병력을 최대한 승선시켜 단위함의 전투 능력을 극대화하는 노력을 사전에 실시하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끝으로 전쟁사적인 차원에서 명량해전이 이후의 전황에 어떠한 영 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육전에 미친 영향과 이에 따라 변 화된 조선과 일본의 전략은 무엇이고, 이것이 정유재란 전체적인 국 면에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왕의 연구에서 큰 줄 거리는 정리되었지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세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고 하겠다. 그래야만 명량해전에 대한 본질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정유재란에서 이 해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 을 것으로 생각한다.

Ⅵ.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왕조를 회생시킨 명량해전에 대해서 는 1980년대부터 전론으로 다룬 연구에 힘입어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기에 이르렀다. 해전에 임하는 조선과 일본의 수군전략에 대한 이 해가 가능하게 되었고, 해전에 참가한 양국의 전력 규모에 대해서도 연구자들간 의견이 모아졌다. 명량 해협의 조류 흐름에 대해서도 오 류가 시정되면서 이것의 효과적인 활용이 해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 쳤음도 밝혀졌다. 아울러 조선후기 이래 논란거리가 되어 왔던 수중 철쇄설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과 대안 제시, 해전 장소에 대한 다양하 면서도 참신한 견해 등이 나오면서 연구의 수준이 한 차원 높아지는 계기가 됨은 물론 활성화 또한 진전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은 조선 수 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심화시켰다. 이순신 이 구사한 뛰어난 전략전술과 리더십, 효과적인 병법 운용, 조선 수 군의 우수한 무기체계, 오익창을 비롯한 해상의병들의 참여와 활약 등은 구체적으로 밝혀진 승리의 요인이다. 2010년 이후부터 공학 및 경영학 분야에서 새로운 방법론에 입각하여 시도된 연구 성과들 역 시 바로 이러한 과학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기왕의 성과에 기반한다. 하지만 진전된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 아 있다. 가장 큰 쟁점은 무엇보다도 해전 장소에 대한 이견이다. 현 재까지 ‘우수영 근처 앞 바다’와 ‘양도를 최전방으로 하여 포진한 형 태’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 전투의 준비와 진행 과정을 전하는 당 대의 기록과 조선 및 일본이 지향하던 수군전략, 이순신의 병법 운용 과 전술적 적용 등 다양한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수중철쇄설은 기왕의 연구를 통해 사실이 아니라는 것에 연구자들 간 의견이 일치한다. 하지만 최근 명확한 검증 없이 명량의 협수로에 서 이를 활용하였다는 견해가 다시금 나오면서 오해와 혼란을 불러일 으킬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기왕의 성과에서도 언급되었던 조 선시대 수영을 방어하던 해방체제 문제와 연계하여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 보는 것도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양한 해전의 시점에 대해서도 근접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특별히 조 류의 전술적인 효과와 영향에 대해 관심이 표명되었으면 한다. 아울 러 해전에 참가한 일본 수군의 선종에 대해서도 당대의 기록을 통한 보완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일반적으로 일본 수군은 중소형 전선만이 참가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이는 1차 사료에 입각한 것이 아닌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서술한 연구 성과에 근거한다. 끝으로 정유재란 전체를 조망하는 전쟁사적 차원에서 명량해전이 이후 전황의 흐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도 거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일궈낸 성과를 통해 서도 대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좀 더 큰 틀에서 명량해전이 조선과 일본이 추진하던 전쟁의 방향과 군사전략에 미친 영향은 무 엇이고, 이어지는 지상에서의 전투와 정유재란의 전체적인 국면에는 어떠한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켰는지 군사적인 관점에서의 연구가 필 요하다. 그래야만 명량해전에 대한 본질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고, 임 진 정유재란에서 이 해전이 차지하는 위상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주제어 : 명량해전, 이순신, 정유재란, 임진왜란, 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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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mplishments and Prospects of Studies on the Battle of Myeongryang

Shin, Seong-Jae

The main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rrange the previous scholarly accomplishments of the Battle of Myeongryang(鳴梁) and to provide some productive prospects. The studies on this famous battle began to gain momentum since the paper that dealt with this subject fully in the 1980s. Since then, many facts have been revealed such as substatial understanding of naval strategies of both Joseon and Japan, fighting strength of both sides engaged in sea battle, and the critical use of currents in Myeongryang. Also, reasonable alternative to underwater iron-chain theory and fresh perspectives on the actual battle spot have been suggested, so as to elevate the quality of related researches higher. Such movement has contributed to the sophisticated theories of victory factors by the Korean navy and also to revitalize studies based on various methodology. However, despite mentioned progresses, there are still some questions to be answered, the biggest of which is the conflicting opinions on the battle spot. Two theories are paralleling divided into ‘sea off the coast of Right Naval District(右水營)’ and ‘formation with Yangdo(羊島) island as the forefront’. Iron-chain theory has already been proven to be obsolete, but recently this theory is resurfacing without any concrete verificaton. An approach in relatons to Joseon-era Maritime Defense Systems of the naval districts could be one of the options in overcoming this dilemma. Also, certain complementation is needed in terms of battle point in time and kinds of Japanese warships participated through wide discussions. Meanwhile, macroscopic studies on how Myeongryang battle has affected the course of the war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of warfare are also essential. Previous researches have given the general understanding of the subject, but military point of view should be added in respect to generating bigger picture of how this battle has influenced military strategies of both sides and how it changed the situations of the entire Jungyoo War(丁酉再亂). Only by then could the comprehensive status of the Battle of Myeongryang in the Hideyoshi Invasion of Korea be ascertained.

Key words : Battle of Myeongryang, Yi Soon-shin, Jungyoo War, Imjin War, naval forces

투고일 : 2015. 7 30. 심사완료일: 2015. 9. 13. 게재확정일: 2015. 9. 14.

 

명량해전 연구의 성과와 전망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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