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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군사이야기

임진전쟁 초기 경상좌도 일본군의 동향과 영천성 전투/김경태.한국학중앙연구원

1. 서론

2. 일본군의 편성과 특징

3. 영천성 주둔 일본군의 실상

가. 영천성 주둔 일본군에 대한 재고찰

나. 영천성 주둔 일본군의 행동 방식

4. 결론

1. 서론

1592년 4월 14일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 상주, 충주 등 지에서 조선의 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했고 5월 초에는 한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 남부 전역을 지배하기 에는 충분한 병력을 투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상을 서둘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64 | 軍史 第95號(2015. 6) 따라서 한성 이남의 여러 지역에는 일본군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 거나 불안정한 지배를 하고 있는 지역이 많았다. 경상우도 지역에 서는 곽재우의 봉기를 시작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일본군의 진입이 수월하지 않았던 전라, 충청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임진전쟁1) 당시 경상우도와 전라도, 충청도에서 활동한 의병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축적되었다. 경상좌도 의병에 대해 서는 위의 지역에 비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의병 관련 사료의 발굴과 더불어 꾸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2)

1)한국학계에서는 이 전쟁의 명칭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다(김문자, 전쟁과 평화의 근세 한일 관계 -임진왜란과 통신사 , 기억의 전쟁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 과 한일관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2003;박수철, 15・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 와 도요토미 정권 -‘임진왜란’의 재검토 ,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2006;한명기, ‘난동’,‘정벌’,‘원조’를 넘어 -‘임진왜란’을 부르는 동아시아 공통의 용어를 위하여 , 역사비평 83,2008;하우봉, 동아시아 국제전쟁으로서의 임진 전쟁 , 韓日關係史硏究 39,2011;김기봉, 1592년 전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 문명사적 관점에서의 성찰-, 韓國史學史學報 26,2012)일본과 중국에서 일반적 으로 이 전쟁을 지칭하는 용어인 ‘文祿・慶長의 役’과 ‘抗倭援朝戰爭’은 각각 자국 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점과 대국주의적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용 어로서의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한국의 ‘임진왜란’은 국제전쟁으로서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고,전쟁의 규모와 조선이 입은 피해를 오히려 왜소화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다.위의 논의에서는 한․중․일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 중 하나로 ‘임진전쟁’이 제안된 바 있다.본 논문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임진전쟁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였다.(김경태,임진전쟁 강화교섭 전반기(1593.6~1594.12), 조선과 명의 갈등에 관한 연구 , 韓國史硏究 166,2014,57~58쪽).

2)文守弘,壬亂 중 慶尙左道地方의 義兵活動 , 素軒 南都泳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 太學社,1984;李謙周, 壬辰倭亂時의 嶺左義兵活動一斑 -蔚山地方 義兵의 例-, 울산대학교 연구논문집 15-2,1984;崔孝軾, 壬辰倭亂 중 慶州戰鬪 , 慶州史學 10,1991;崔孝軾, 壬辰倭亂 중 永川城 탈환전투의 고찰 , 大丘史學 47,1994; 崔孝軾,壬亂 중 慶州寺院의 抗戰활동 , 芝邨金甲周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芝邨 金甲周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刊行委員會,1994;崔孝軾,壬亂 初 慶州 義兵活動 硏 究 , 慶州史學 16,1997;崔孝軾, 경주의 蚊川會盟에 대하여 , 慶州文化 6, 2000;崔孝軾, 慶州府의 壬亂義兵기록에 관한 연구 , 新羅文化 19,2001;(이상 의 논문을 비롯한 최효식의 경상좌도 의병에 대한 연구는 최효식, 임진전쟁기 영 남의병연구 ,국학자료원,2003;최효식,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국학자료 원,2004등의 단행본에 수록되었다)정진영, 안동지역의 壬亂義兵 , 安東文化硏 究 4,1990;禹仁秀, 蔚山地域 壬亂義兵의 活動과 그 性格 , 歷史敎育論集 31, 2003;장준호, 임진왜란시 朴毅長의 경상좌도 방위활동 , 軍史 76,2010;김진수,

그러나 지역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연구에서 조선의 의병이 맞서 싸웠던 일본군의 편성체제와 행동양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군의 행동양상이 언급되었다고 할지라도 대개 그들의 북상 경로와 개별 전투만을 다루었을 뿐이다. 그들이 어떤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는지, 전투와 후퇴, 그리고 주둔의 방식 은 무엇이었는지 등과 같은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연구는 많지 않았다.3) 의병연구를 비롯한 전투사가 완결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전투 상대였던 일본군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일 것이다. 근래 일본학계에서는 임진전쟁에 참전한 일본 장수들의 동향을 고증하는 방식의 연구가 다수 배출되었으나,4) 조선이나 명 사료와 의 비교 고찰 없이 일본 사료만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일방 적으로 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근래 한국학계에서는 일본군의 행동방식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김만호, 임진전쟁기 일본군의 함경도 점령과 지역민의 동향 , 歷史學硏究 38, 2010;김경태, 임진전쟁 전반기,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동향 -전공(戰功)의 위기와 강화교섭(講和交涉)으로의 가능성 , 大東文化硏究 77,2012;김문자, 임 진전쟁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조선왕자의 送還문제를 중심으로-, 한일관계 사연구 42,2012;신윤호, 임진전쟁기 성주전투와 일본군의 동향 , 歷史學硏究 53,2014.

4)근래의 연구성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津野倫明, 長宗我部氏の硏究 ,吉川弘 文館,2012;井原今朝男, 上杉景勝の朝鮮出兵と熊川倭城 , 長野縣立歷史館 硏究 紀要 3,1997;中野等, 文祿の役における立花宗茂の動向 , 日本歷史 597,1998; 中野等, 豊臣政權の大陸侵攻と寺澤正成 :文祿の役における兵站輸送をめぐって , 交通史硏究 50,2002;津野倫明, 文祿・慶長の役における毛利吉成の動向 , 高 知大學人文學部人間文化學科 人文科學硏究 9,2002;津野倫明, 慶長の役における 黑田長政の動向 , 海南史學 42,2004;津野倫明,慶長の役における鍋島氏の動向 , 織豊期研究 8,2006;津野倫明. 朝鮮出兵における鍋島直茂の一時歸國について , 高知大學人文學部人間文化學科 人文科學硏究 13,2006;織田祐輔, 文祿の役にお ける「船手衆」の動向 -脇坂安治を中心に , 海南史學 47,2009;山内讓, 來島村 上氏と文祿・慶長の役 , 松山大學・松山大學論集 24卷 4-2號,2012;中野等, 唐 入り(文祿の役)における加藤淸正の動向 , 九州文化史硏究所紀要 56,2013등.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조선군의 대응양상에 대한 검토 -경상좌병사 박진(朴晉) 과 권응수(權應銖)의 활동을 중심으로-, 軍史 84,2012;이욱,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도 의병 활동과 성격 , 壬辰亂7周甲紀念 壬辰亂硏究叢書 2,壬辰亂精神文 化宣揚會,2013. 본 논문에서는 조선 의병이 거둔 큰 승리 중 하나인 영천성 전투 를 대상으로 하여 경상좌도 내륙지방에서 활동하던 일본군의 실체 에 접근하고자 한다. 영천성 전투에 대해서는 이형석,5) 문수홍,6) 최효식7)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다.8)

5)李烱錫, 壬辰戰亂史 ,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1967,422~429쪽 (李炯錫, 壬辰戰 亂史 上․中․下,新現實社,1974등으로 증보개정).

6)文守弘,壬亂 중 慶尙左道地方의 義兵活動 , 素軒 南都泳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 太學社,1984.

7)崔孝軾,壬辰倭亂 중 永川城 탈환전투의 고찰 , 大丘史學 47,1994(최효식, 임 진전쟁기 영남의병연구 ,국학자료원,2003;최효식,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 국학자료원,2004에 수정 후 재수록).

8)그 외에도 이광수, 영천지역의 壬亂 의병활동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2006; 이재수, 永川 邑城과 임진왜란 , 역사교육논집 52,2014등의 연구에서 영천성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대체로 의병에 참여했던 權應銖의 白雲齋實紀 권2에 실린 「永川復城記」 (鄭湛이 지음)를 주 자료로 삼고 宣祖實錄 亂中雜錄 寄齋史草 등을 참고하여 전투의 전말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대한 기술은 단편적이다. 영천성 전투는 일본군의 주요 이동경로였던 경상좌도 에서 획득한 최초의 탈환전이었음에도 의병이 맞서 싸운 상대에 대 한 정보는 한정적인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우선 조선 사료에 일본군에 대한 정보가 거의 드러나고 있지 않은 것에 있다. 조선의 기록에는 일본군의 정체, 병력 수, 이동경로가 모호하 게 서술되었으며, 기존의 영천성 전투 관련 연구에서도 이러한 사 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기에 일본군의 동향은 단순하게 묘사되었 던 것이다. 그러나 영천성 전투를 직접적으로 다룬 일본 사료 역시 찾기 어렵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임진전쟁 초기 일본군의 체제 와 전투 방식, 그리고 경상좌도에서 활동한 일본군의 양상을 알려 주는 사료를 통해 영천성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실상을 간접적으 로 파악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본 논문에서는 毛利家文書 , 鍋島家文書 淺野家文書 등의 문서집에 수록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하 일본군 장수들 의 書狀類와 타지리 아키타네(田尻鑑種)의 高麗日記 , 텐케이(天 荊)의 西征日記 , 시모세 요리나오(下瀨賴直)의 朝鮮渡海日記 , 요시노 진고자에몬(吉野甚五左衛門)의 吉野甚五左衛門覺書 , 제타 쿠(是琢)의 朝鮮日記 , 핫토리 덴에몬(服部傳右衛門)의 服部傳右 衛門覺書 와 같은 일기류, 오보에가키(覺書)류 등에서 경상좌도 지 방의 의병활동을 전하는 기록을 참고로 하여, 영천성 전투에 참여 한 일본군은 누구이며 어떠한 행동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 추 적해보겠다. 서장류의 경우 대부분 원본이 남아 있는 1차 사료이며, 일기류의 경우 이동 경로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비교적 생생하게 기 록되어 있다. 오보에가키류는 후대에 변형이 가해진 경우가 있지만 공식 문서에 드러나지 않는 사건 등을 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사료와 함께 조선의 사료를 상호 비교하여 작업 의 신뢰도를 높이도록 하겠다.

2. 일본군의 편성과 특징

다음은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기 약 1개월 전인 1592년 (음력) 3월 13일에 일본군 장수들에게 내려진 부대편성 명령서를 표로 재 구성한 것이다.9)

9) 毛利家文書 885.

<표 1> 1592년 3월 13일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부대편성 명령서

고려[조선을 지칭]로 도해할 병력에 관한 일

1번 5,000 7,000 3,000 2,000 1,000 700 소 요시토시(宗義智)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마츠라 시게노부(松浦鎭信)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 고토 스미하루(五島純玄) 합계 :18,700

2번 10,000 12,000 800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賴房) 합계 :22,800

3번 5,000 6,000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 합계 :11,000

4번 2,000 10,000 2,000 모리 요시나리(森吉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 아키츠키 타네나가(秋月種長) 이토 스케타카(伊東祐兵) 시마즈 토요히사(島津豊久) 합계 :14,000

5번 4,800 3,900 3,000 7,200 5,500 700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토다 카츠타카(戶田勝隆) 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이코마 치카마사(生駒親正) 구루시마(來島)형제 (미치유키(通之),미치후사(通總)) 합계 :25,000(개별 부대의 병력 수를 합하면 25,100명이나 원문에는 25,000으로 표기되어 있음)

6번 10,000 1,500 2,500 800 900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增) 치쿠시 히로카도(筑紫廣門) 합계 :15,700

7번 30,000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8번 10,000 (쓰시마(對馬)에 주둔):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9번 8,000 3,500 (이키(壹岐)에 주둔):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 (같은 곳)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합계 :11,500 도합 :158,700(명)

1.위의 병력은 문서에 지정된 대로 조속히 도해할 것.순풍이 불지 않으면 하루를 기다 리고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대기한 뒤에 섬과 섬10)을 이동할 것.만약 날씨가 좋지 않 은데도 도해하여 말 한 필,사람 하나라도 잃게 된다면 처벌할 것이다.또한 날씨가 좋 을 때 방심하여 도해하지 못한다면 처벌할 것이다.

1.말은 고려로 건너보낸다고 해도 진지 구축을 할 때는 필요가 없으므로 모든 병력이 건 너간 후에 보낼 것

1.위의 문서에 지정된 병력 외에는 모두 나고야(名護屋)에 주둔할 것.한 사람이라도 도 해한다면 처벌할 것이다. 1.이번 전쟁에서는 선박이 중요하므로 선박을 준비하는 만큼 전공으로 취급할 것이다. 제 병력은 부두에서 선박 담당자[奉行]에게 증명서를 받은 후 차례로 도해하고,고려에 도착하면 자신이 타고 온 선박을 자신의 책임 하에 선박 담당자에게 전달하고 쓰시마 로 돌아오게 하여 다음 병력이 이용하게 하라.

1.고려가 명 침략에 동의한다면 위에서 지정한 바와 같이 차례로 도해할 것.만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병력은 고려 근처의 섬으로 이동한 뒤 선박을 정렬하라.그리고 차례와 관계없이 모든 병력이 논의하여 고려 땅의 어떤 항구에라도 일제히 착진하여 진영을 확보한 후 축성공사에 착수할 것.이후 규슈(九州),시코쿠(四國),주고쿠(中國)의 병력은 물론,아와지(淡路)의 병력,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이하의 병력도 위의 병력 들과 같이 일제히 도해할 것

이 부대편성 명령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급한 것이다. 이 문서는 일본의 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의 연구에서도 자주 인용되었 다. 이 명령서와 함께 부대의 조선 도해 순서와 도해 전의 주둔지, 선박 담당자를 지정한 문서도 전달되었다.11) 이 두 가지 문서는 특 정한 전투에서 자신의 병력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배치‧운용하기 위 한 계획서라고 할 수 있다.12)

10)이키섬과 쓰시마섬을 뜻함.

11) 毛利家文書 886.

12)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에 앞서 부대를 편성을 지시한 진다테서(陣立書)의 성 격에 대해서는 三鬼淸一郞, 陣立書の成立をめぐって , 名古屋大學文學部硏究論 集 113(史學 38),1992를 참조.

이러한 종류의 명령서에는 발급자가 직접 서명하거나 인장을 찍었으며, 수신인으로 지정된 각 장수들에게 전해졌다.13) 일본군은 1591년 후반부터 출진기지인 규슈(九州) 히젠(肥前) 지 역의 나고야성에 집결하고 있었으며 1592년 3월 13일의 명령으로 나고야를 떠나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京都)를 출발하여 나고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 명령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각 장수들 사이에는 서열이 존 재하지 않았다. 부대의 순서는 도해 순서에 불과했다. 이들 부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정점으로 하였고, 장수들은 그 아래에 서로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즉, 히데요시가 직접 일본군 전체를 지휘하는 체제였다. 히데요시의 명령은 자신의 명령임을 나타내는 붉은 인장을 찍은 명령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朱印狀으로 통칭)의 형태로 각 군의 장수들에게 전달되었다. 전선의 장수들에게 전략적 결정권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전투 국면에 따라 우키타 히데이 에가 회의를 주재하거나 일본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으나, 그 외의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현지의 협의사항이 히데 요시의 명령에 의해 변경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지휘 형태 는 그의 도해가 연기를 거듭하면서 혼란을 겪었고 변형을 거치게 되나,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기본적인 형태는 유지되었다.14)

13)이 명령서와 동일한 문서는 小早川家文書 501, 鍋島家文書 29, 加藤清正家 蔵書 등에도 포함되어 있다;전쟁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 전달 방식 에 대해서는 国重顕子, 豊臣政權の情報伝達について , 九州史學 96,1989;佐 島顕子, 文祿・慶長役の秀吉朱印狀の送達について , 福岡女學院大學紀要 1, 1991;佐島顕子,秀吉と情報 , 消された秀吉の眞實 -德川史觀を越えて ,柏書房, 2011을 참고.

14)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39~40 쪽;이처럼 임진전쟁 중 조선 현지에서 전체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부재한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朱印狀)를 통해 전략이 지시,변경되던 일 본군의 특징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中野等, 秀吉の軍令と大陸侵略 ,吉川弘文館, 2006을 참조하길 바란다.

 

이처 럼 합의 체제를 가지지 않고 히데요시 이하에 각각의 장수들이 서로 분립된 상태로 히데요시와 직결-혹은 토리츠기(取次)와 같은 중개역을 통해 연결-되는 형태는 전쟁이라는 비상정국에서 일시적 으로 나타난 양상이 아니라 히데요시 정권의 구조적 특징 중 하나 였다.15) 또한 조선에 건너갈 각 장수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영지에 서 병력과 군량을 마련해야했고, 그것을 수송할 선박도 준비해야만 했다. 또한 전쟁 수행과정에서 필요한 군량은 조선 현지에서 조달 할 계획이었다.16) 병력과 군량, 선박 준비는 결코 원활하지 않았 다. 많은 장수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도해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투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은 물론 자신이 메워 야 했다. 따라서 끊임없이 자신의 영지에 병력과 물자 수송을 재촉 해야만 했다.17)

15)山本博文, 幕藩初期の大名統制機構と對外關係(第一章,第二章), 幕藩制の成立 と近世の國制 ,校倉書房,1990,참조.

16)中野等, 朝鮮侵略戰爭における豊臣政權の兵糧補給について , 九州文化史研究所 紀要 35,九州文化史研究所,1990;中野等, (第1編 第1章)第1次朝鮮侵略戰爭に おける豊臣秀吉の輸送 補給政策 , 豊臣正權の對外侵略と太閤檢地 ,校倉書房, 1996;中野等, 唐入り と兵站補給體制 , 日本の時代史13天下統一と朝鮮侵略 , 吉川弘文館,2003.

17)山本博文, 島津義弘の賭け ,讀賣新聞社,1997;北島万次, 加藤淸正 ,吉川弘文 館,2007;김경태, 임진전쟁 전반기,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동향 ― 戰功의 위기와 講和交涉으로의 가능성 , 大東文化硏究 77,2012;中野等, 唐入り(文祿 の役)における加藤淸正の動向 , 九州文化史硏究所紀要 56,2013등의 연구에서 는 가토 기요마사와 시마즈 요시히로가 병력과 군량,선박 조달의 문제에 고심하 던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였다.

이들은 나고야에 집결하여 출진을 준비하였고, 이후 이키, 쓰시 마를 거쳐 차례차례 조선으로 건너왔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 시토시 등으로 구성된 제1군은 3월 13일에 쓰시마에 도착하였다. 4월 13일 쓰시마에서 출발하여 14일에 부산에 상륙한 후 최초의 전투를 치렀다. 이후 동래-기장-양산-밀양-대구-인동-선산-상 주-문경-충주-여주를 거쳐 5월 2일 밤~5월 3일 새벽에 한성에 진입했다. 제 2군은 4월 18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4월 19일에는 양산에서 출발하여 언양을 공격했다. 이어서 21일에는 경주를 점령한 뒤 하 루를 머물렀다.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내일 (23일) 이곳을 떠나 다음 성인 영천을 공격할 것입니다. 반드시 소 문을 듣고 성을 버리고 후퇴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후 신녕-의흥-의성-안동-영주-죽령을 거쳐 4월 28일, 혹은 29일 에 충주에 도착했다. 이어 1군과 다른 길을 선택하여 5월 3일 한성 으로 들어갔다.18) 구로다 나가마사 이하의 3군과 4군의 모리 요시나리도 2군과 같 은 4월 18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미 일본군에 의해 점령 당한 부산이 아니라 김해를 공격한 후(4월 19일), 창원-창녕-현풍 -성주-금산-추풍역-황간-영동-옥천-청주-진천-죽산까지 전진 한 후 2군과 같은 경로를 통해 5월 7일~8일경 한성으로 들어갔다. 4군에 속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다른 부대보다 늦은 5월 3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5군의 상륙과 이동경로를 전해주는 사료는 많지 않다. 6월 중 조선에 도착하여 한성으로 향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 히로의 가신 니이로 타다마스(新納忠增)의 朝鮮渡海之記 와 鍋島 家文書 에 실린 문서에 나타난 부산~한성 주둔상황을 비교해서 살 펴보면 5군에 속한 장수들이 상주에서 한성에 이르는 경로의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9)

18)이하 일본군 각 부대의 전쟁 초기 이동 경로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의 第一 章 第一軍乃至第三軍の京城進擊 第二章 第四軍以下諸軍の動靜 , 文祿慶長の役 別編第一 ,東洋文庫,1936을 참고하였다.이 연구에서는 침략전쟁시기 일본 역사 학계의 분위기에 따른 표현상의 문제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그러나 일본의 사료 와 조선 사료를 광범위하게 이용하여 일본군의 이동경로와 전투상황을 고증한 최초의 연구라는 점은 분명하며,이 부분에 한정한다면 현재로서도 인용의 가치 가 있는 연구이다.

19)池內宏, 第二章 第四軍以下諸軍の動靜 , 文祿慶長の役 別編第一 , 東洋文庫, 1936,73~92쪽; 鍋島家文書 42((1592년)12월 10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 鍋島家文書 43((1592년)12월 10일 나즈카 마사이에(長束正家)의 副狀).

시모세 요리나오(下瀨賴直)의 朝鮮渡海日記 20)의 뒷부분에는 나고야에서 평안도 순안까 지(지명은 의주까지)의 일본군 주둔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5군 소속 장수들의 주둔지는 朝鮮渡海之記 , 鍋島家文書 에 기재된 것과 유사하다. (다음의 <표 2>와 <표 3>을 참조) 6군은 4월 18일~19일에 부산에 도착한 후 5월 중순에 한성을 지나 북진했다가 5월 25일에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 했다. 7군의 모리 데루모토는 6군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북상하 다가 성주에서 전진을 멈추었다. 6월 12일에는 주둔지를 개령으로 옮겼다. 쓰시마 주둔이 지정되어 있던 8군의 우키타 히데이에는 5월 6일~7일 경 한성에 입성했다.21) 9군의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6월 17일 경 조선에 도착했다. 도요토미 히데카츠는 5월 16일 이전 에는 조선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부산과 동래에 주둔했다. 일본군 주요 장수들이 한성에 입성하는 5월 6일~7일 경, 그들 사이에서 회의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22) 가토 기요마사가 6월 1일에 일본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조선)의 일은 지역을 분 할(國割)하여 각자 (그 지역을) 접수하였습니다. 저는 수도에서 북 쪽으로 韃靼지역 경계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 (황해도는) 구로다 나가마사가 접수하고, 이보다 더 나아가 大唐(명나라) 국경은 고니 시 유키나가가 접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23) 회의는 점령지역을 정하기 위한 것이었다.24)

20) 防長叢書 6,防長史談會,1934.

21) 吉野甚五左衛門覺書 1592년 5월 6일~7일.

22) 吉野甚五左衛門覺書 1592년 5월 6일~7일.

23)1592년 6월 1일 가토 기요마사의 보고서 (韓陣文書 ).

24)池內宏,第三章 入京諸軍の動靜及び平壤占領 , 文祿慶長の役 別編第一 ,東洋文 庫,1936,114~117쪽.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土佐國蠧簡集 에 보인다.

이 문서집에는 「高麗八刕之石納覺之事」 제목의 문서가 있는데 여기에서 각 부대의 주둔지역은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25) 즉, 경상도는 모리 데루모토, 전라도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충청도는 5군의 시코쿠(四國) 부대, 강원도는 모리 요시나리, 경기도는 우키 타 히데이에, 황해도는 구로다 나가마사, 영안도(함경도)는 가토 기 요마사, 평안도는 고니시 유키나가이다. 그러나 표기된 바와 같이 각 지역에 1인의 장수만이 주둔한 것은 아니고 충청도의 경우와 같 이 함께 배치된 각 부대의 동료 장수들이 나누어 주둔했을 것이다. 3월 13일의 명령으로 조선에 도해한 각 군의 장수들은 자체적인 회 의를 거쳐 위와 같이 조선 8도를 분담하여 지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6월 3일 내려진 히데요시의 명령은 조선 현지 장수들의 의도와는 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주둔하던 장수들에 게 추가로 보내는 부대와 함께 명나라로 진격할 것을 명하였고, 이 미 지배하에 들어온 조선 영토는 代官을 보내어 지배한다는 뜻을 밝혔다.26) 장수들의 8도 분담 결정은 히데요시의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즉, 히데요시와 현지 장수들의 의사에는 차이가 있었다.27)

25) 高知縣史 古代中世史料編,高知縣,1977;池內宏, 第三章 入京諸軍の動靜及び 平壤占領 , 文祿慶長の役 別編第一 ,東洋文庫,1936,117~118쪽에 수록.

26)6월 3일의 명령서는 毛利家文書 903(한문서장),904등;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에 대한 명으로의 진격 명령과 대관 파견에 대한 내용은 等持院文 書 (1592년)6월 세이쇼 죠타이(西笑承兌)의 서장에 보인다.[北島万次, 朝鮮 日々記․高麗日記 ,そしえて,1982,87~88쪽;北島万次編, 壬辰倭乱-秀吉の朝 鮮侵略-関係史料稿本 ,2005;中野等, 秀吉の軍令と大陸侵略 ,吉川弘文館,2006, 102~103쪽에서 재인용];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월 3일에 발급한 여러 종류의 명 령서에 대해서는 中野等, 天正二十年六月三日附豊臣秀吉朱印狀をめぐって (三 鬼淸一郞編, 織豊期の政治構造 ,吉川弘文館,2000)를 참조.

27)池內宏, 明將祖承訓の敗走以後に於ける我が軍の態度 , 史學雜誌 29-7,1918; 北島万次, 朝鮮日々記․高麗日記 ,そしえて,1982,95쪽;中野等, 秀吉の軍令と 大陸侵略 ,吉川弘文館,2006,104~116쪽 참조;나카노 히토시는 도요토미 히데 요시가 이후 일본군 장수들의 한성회의 결과를 전해들은 이후에도 자신의 뜻(6월 3일의 명령)을 관철하기로 하였다고 보았다.

조선에 있던 제 장수는 히데요시가 파견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 成),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繼) 등 세 부교(奉行 :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 핵심 정무를 담당했던 이들에 게 주어진 직명)가 자신들에게 조선의 영토를 분배하러 온 사자라고 생각했다.28) 그런데 이 명령을 직접 전하기 위해 추가 부대와 함께 건너오던 세 부교가 한성에 도착하던 7월 중순, 전장에서는 커다란 변수가 발생했다.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한 평양 성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세 부교는 회의를 소집했고 이 회의에서 부교들이 가져왔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 국경으로의 진격 명령 은 보류되었다.29) 이러한 상황에서 영천성 전투가 발발하였다.

28) 西征日記 1592년 7월 16일.

29)池內宏,明將祖承訓の敗走以後に於ける我が軍の態度 , 史學雜誌 29-7,1918.

3. 영천성 주둔 일본군의 실상

가. 영천성 주둔 일본군에 대한 재고찰

영천성 전투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영천성에 주둔하던 적이 어떤 부대였는지, 병력의 규모는 어떠했는지, 그곳에 어떤 의도로 주둔하고 있었는지 추적할 필요가 있다. 영천성 전투를 다루고 있는 조선의 사료에는 일본군의 정체에 대 해 구체적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선 白雲齋實紀 의 「永 川復城記」를 살펴보겠다. 이 사료에 의하면 영천에 수 만 명의 일 본군이 있었다고 한다. 권응수 등이 이끄는 의병은 5월 초부터 활 동을 시작했다. 7월 14일에는 군위에서 오는 일본군을 박연에서 맞 아 승리했다. 7월 22일에도 거림의 적을 격파하여 군위로 가는 길 을 막았고, 하양으로 향하는 적도 막았다. 영천성을 수복하기 위해 모인 의병은 3,560여 명이었다. 의병은 24일부터 성에 접근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25일에 작은 접전이 있었고 26일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 차례 접전 후 적이 패주하여 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장수차림의 왜인이 성 아래로 투신하였는데 정대임이 참수 했다. 적의 명장 法化라는 자였다. 27일 화공으로 성을 불태웠다. 많은 적을 사살했다. 빠져나와 살아남은 자는 몇 명(數三人)에 불과 했다. 아군 전사자는 83명, 부상자는 238명, 노획한 적의 말은 200필, 총통과 장검이 900여 자루였다고 한다. 白雲齋實紀 에 수록된 「與孫參奉書」는 영천성 전투 직후의 편지 로 보인다. 영천성 전투에서 생포한 자는 몇 명(數三人) 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1593년 2월 말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장계는 다 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권응수 이하의 의병이 5월 초부터 영천 근방에서 소규모 전투를 계속했다. 7월 14일에 어사라고 칭호 한 적 100여 명이 군위에서 오는 것을 신녕, 거림원에서 접전하여 37명을 베었다. 22일에는 영천에서 오는 300여 명의 적을 추격하 여 30여 명을 사살했다. 그리고 영천성 전투에서는 300여 급을 베 었는데 불타죽은 적은 헤아릴 수 없으며 겨우 2명만이 살아남았다 는 것, 수급과 노획물은 박진의 처소에 보냈다는 것이다. 宣祖實錄 에 의하면, 일본군 1천여 명이 영천에 주둔하고 있었 는데, 권응수 등이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성을 포위한 다음 포로 공 격하고 불을 질러 승리했다고 하였다. 획득한 수급은 517 급이라고 하였다.30) 또 宣祖修正實錄 에 의하면, 일본군 1천여 명이 영천 성에 주둔하면서 안동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고 있었는데, 권응 수 등의 의병군이 성을 포위한 뒤 화공하여 수백 급을 베었다고 하였다. 탈출한 자는 수십 명에 불과하였으며 이후 안동 이하에 30) 宣祖實錄 권30선조25년(1592)9월 15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임진전쟁 초기 경상좌도 일본군의 동향과 영천성 전투 | 377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로 향했다고 기록하였다.31) 亂中雜錄 은 경상순영록 에 근거하여 영천성 전투를 다음과 같 이 서술하였다. 우선 영천성 전투 이전에 奉告御使라고 자칭하면서 영천에서 신녕으로 향하던 일본군을 권응수 등이 박연에서 맞아 싸 워 이겼다. 이후 영천성을 공격하였는데 수백여 급을 베었다. 또한 영천성 전투 이후 군위에 있던 일본군은 철수하여 개령으로 향했으 며, 의성․ 안동 ․ 예천의 적도 풍산 구담으로 물러났다가 상주로 모 였다고 하였다.32) 조선 사료를 살펴보자면 영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소속부대, 장수의 명칭, 병력 수 등이 모호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략 공통된 서술이라면 경상좌도 지방의 일본군들이 서 로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었으며, 영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약 1천여 명 정도였다는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영천성 전투에서 의병과 맞섰던 일본군에 대 해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먼저 壬辰戰亂史 에서는 5군 소속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였다고 보았다.33)

31) 宣祖修正實錄 권26선조25년(1592)8월 1일(무자).

32) 亂中雜錄 권2임진년 하,8월 1일,8월 3일.

33)李烱錫, 壬辰戰亂史 ,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1967,422~429쪽.

당시 후쿠시마 마사노리 는 어디에 머물고 있었을까. 다음의 표를 통해 살펴보겠다. 이 표는 시모세 요리나오(下瀨賴直)의 朝鮮渡海日記 와 鍋島家文書 에 나 타난 일본군 장수들의 주둔 현황을 간략화한 것이다. 지명과 인명 오기는 수정하였다. 장수의 이름나 발음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문서에 나타난 그대로 표기하였다.

<표 2> 朝鮮渡海日記 수록 일본군 주둔 현황

주둔지 주둔 장수 주둔지 주둔 장수 조선 槇島 모리 데루모토 휘하 모리 모토키요(毛利元淸) 모리 모토마사(毛利元政) 충주 하치스카 이에마사 휘하 조선 石山 모리 데루모토 휘하 깃카와 히로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음죽 하치스카 이에마사 주둔 부산포 도요토미 히데카츠 죽산 후쿠시마 마사노리 주둔 동래 도요토미 히데카츠 휘하 新城 후쿠시마 마사노리 휘하 양산 타니 모리토모(谷衛友) 이시카와 사다미치(石川貞通) 이나바 노리미치(稻葉典通) 양지 나카가와 히데시게? 언양 벳쇼 요시하루(別所吉治) 新城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新城 新城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청도 고사쿠 사에몬타이후 (小作左衛門大夫) 과천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新城 新城 이시다 미츠나리 휘하 대구 이나바 사다미치(稻葉貞通) 니시무라 사베이(西村左兵衛) 아카시 노리자네(明石則實) 파주 新城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 新城 新城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 인동 기노시타 시게카타(木下重堅) 난조 모토키요(南条元淸) 개성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주둔 개령 모리 데루모토 본진 新城 모리 데루모토 휘하 선산 미야베 나가후사(宮部長房) 가키야 츠네후사(垣屋恒総) 평산 모리 데루모토 휘하 新城 토다 카츠타카 휘하 新城 모리 데루모토 휘하 상주 토다 카츠타카 주둔 봉산 오무라 스미요리(大村純賴) 오토모 요시무네 휘하 함창 초소카베 모토치카 휘하 황주 오토모 요시무네 주둔 문경 초소카베 모토치카 주둔 중화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모리 데루모토 휘하 新城 하치스카 이에마사 휘하 평양 고니시 유키나가 주둔 新城 하치스카 이에마사 휘하 순안 모리 데루모토 선봉 수비 숙천

<표 3> 鍋島家文書 수록 일본군 주둔 현황 (1592년 12월 10일자 명령)

주둔지주둔장수 부산포 도도 사부로 사에몬노죠(百 三郞左衛門尉) (도도 츠나이에(百 綱家)?) 미와 치카이에(三輪近家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가신) 동래 도요토미 히데카츠 부대 양산 도요토미 히데카츠 부대 밀양 벳쇼 요시하루(別所吉治) 도요토미 히데카츠 부대 대구 이나바 사다미치(稻葉貞通) 사이무라 마사히로(齊村政廣) 아카시 노리자네(明石則實) 기노시타 시게카타(木下重堅) 난조 모토키요(南条元淸) 선산 미야베 나가후사(宮部長房) 함창 초소카베 모토치카 문경 초소카베 모토치카 충주 하치스카 이에마사 이코마 치카마사 죽산 후쿠시마 마사노리 양지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 우키타 히데이에 한성 마시타 나가모리 이시마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츠구

위의 기록에 의하면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충청도 죽산에 주둔하 고 있었다. 지명으로 표기된 곳은 기존의 조선 읍성이나 옛 성을 이 용하여 진지를 마련한 곳이고 新城은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이다.34)

34)임진전쟁 시기 일본군의 축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를 참고하였다.유재 춘, 임진전쟁시 일본군의 조선 성곽 이용에 대하여 -철원 성산성 사례를 중심 으로 , 朝鮮時代史學報 24,2003;太田秀春, 文祿․慶長の役における日本軍の 築城觀の變遷について -朝鮮邑城の利用から倭城築城への過程を中心に , 朝鮮學 報 181,2001(太田秀春,第二章 朝鮮の役に於ける日本軍の築城觀の變遷 , 朝鮮 の役と日朝城郭史の硏究 ,淸文堂,2005에서 수정․증보).

일본군 장수들은 자신의 부하를 다른 진영, 부산에 파견하거나, 병력을 빌려주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소규모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영천이라는 원거리에 부대를 나누어 두었을 가능성은 낮다. 임진전란사 는 영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후쿠시마 마사노리 의 부대라는 판단에 대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1926년에 일본 참모본부에서 편찬된 日本戰史 朝鮮役 의 해당 부 분을 살펴보면 영천성 전투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한 뒤 ‘부대장은 미상. 일설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대라고 함’이라는 주를 달았 다. 이어서 경주성 전투에 대한 서술 아래에도 ‘수비를 맡은 장수는 미상이나 일설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장 다가와 나이키(多川 內記)라고 함’이라는 주가 붙어 있다.35)

35)(日本)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偕行社,1924,206쪽;崔孝軾, 壬辰倭亂 중 永川城 탈환전투의 고찰 , 大丘史學 47,1994,87쪽에서는 영천성 전투 당시 남천에 투신한 이는 ‘福島正則(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장인 법화였다고 한다’라 고 하였다.참고문헌으로는 임진전란사 와 영천시에서 편찬한 영천의 전통 , 그리고 日本戰史 朝鮮役 을 제시하였다.

임진전란사 의 서술은 일본전사 조선역 을 참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일본전사 조선역 의 체제는 각각의 서술마다 일일이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둔장수를 명시하지 않고 추측성의 주를 단 것은 그만큼 근거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전사 조선역 은 어디에 근거하여 후쿠시마 마사노 리의 부하가 영천성과 경주성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서술하였던 것 일까. 나베시마(鍋島)가문에서 2군의 장수였던 나베시마 나오시게 를 현창하기 위해 편찬한 直茂公譜考補 에는 서술의 근거로 추정 되는 사료가 게재되어 있다. 이 문서는 「高麗軍記」라는 자료에서 인용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먼저 “세 부교가 도해한 후 부산포에 서 한성까지의 경계와 제 군무의 통용을 위해 연계성(繫ノ城)을 구 축할 것. 경상도에서도 요해지를 건설하여 각자 수비할 것. 성을 수비할 장수는 다음과 같음”이라는 명령 뒤에 부산포성, 안골포성, 가덕성, 죽도성, 서생포성, 경주성, 충주성, 춘천성, 그 외의 연계 성(繫城)을 수비할 장수들의 명단과 병력 수가 표기되어 있다. 이 중 경주성을 수비할 장수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성주 대리(城代) 다가와 나이키(田川內記)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36) 直茂公譜考補 의 내용상 이 문서가 실린 지점은 조승훈이 이끄 는 명군이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패배한 다음 부분이다. 편찬자는 이 문서가 1592년 7월경의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제 이 문서의 신뢰도를 살펴볼 차례이다. 현재까지의 분석결과, 直茂公譜考補 (에 실린 「高麗軍記」) 외 의 자료에서는 이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문서의 신뢰도를 결 정적으로 떨어트리는 것은 부산포성을 수비할 장수로 치쿠젠 주나 곤 히데아키(筑前中納言秀秋), 즉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 秋)의 이름이 명기된 부분이다. 1582년 출생한 히데아키는 1593년 3월에 나고야까지 출진하기는 했으나 조선으로 건너가지 않고 8월 에 돌아갔다. 그가 조선에 파견되는 것은 정유재란이 발발한 이후 였다. 그리고 이름을 히데토시(秀俊)에서 히데아키로 바꾸는 것은 1597년 6월의 일이다.37)

36) 直茂公譜考補 권7加藤淸正於兀良哈擒王子 明兵援朝鮮( 佐賀縣近世史料 제1 편 제1권,佐賀縣立圖書館,2003,649~650).

37)(일본)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編,,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1975.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1592년 7월 경에 ‘히데아키(秀秋)’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건너왔다는 것, 혹은 건너올 예정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실제 이 문서가 실제로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것이고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3명의 부교가 조선으로 건너와서 한성에 도 착하였을 때는 이미 이전과 상황이 달랐고, 조선에 있던 일본군 장 수들이 연계성 축성과 주둔을 위해 경상도 지방에 병력을 나누어 보낼 상황은 아니었다. 즉, 1592년 하반기에 영천성과 경주성에 주둔하던 병력이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의 소속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된다. 한편 최효식은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제2군의 병력이 주둔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38) 앞 장에서 언급하였듯이 가토 기요마사 가 영천을 경유한 것은 사실이다.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종군승려였 던 제타쿠(是琢)의 朝鮮日記 에는 자신이 속한 부대의 이동경로로 보이는 지명이 차례로 표시되어 있는데, 부산포-동래부-양산-수 영-언양-경주-영천-신녕-의흥-의성-군위-비안-용궁-예천-함 창-문경-충주 순이다.39) 제2군에 속한 부대는 모두 영천을 경유 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서 영천으로의 진격을 준비하던 중,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 시마 나오시게가 일본에 보낸 보고서에는 “입구 쪽(口々 : 경상좌도 지역) 성에도 군량이 많으므로 사람을 남겨놓고 (히데요시의) 출진 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40) ‘입구 쪽 성’이란 이동 경로로 볼 때 부산 등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 각된다. 또한 宣祖修正實錄 의 의병장 柳宗介에 관한 기사에는 “이 때 가토 기요마사가 안변에 있으면서 경주의 적과 상응하였다. 一枝의 군사가 영동의 고성, 강릉에서 평해에 이르기까지 마구 약 탈하였다”라는 부분이 눈에 띤다.41)

38)崔孝軾,壬辰倭亂 중 永川城 탈환전투의 고찰 , 大丘史學 47,1994.

39) 佐賀縣史料集成 5.

40)1592년 4월 21일(明曆 22일)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連署 보고서 (韓陣文書 (中野等, 豊臣正權の對外侵略と太閤檢地 ,校倉書房,1996,78쪽에서 재인용)).

41) 宣祖修正實錄 권26선조25년(1592)8월 1일 무자.

‘경주의 적’이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인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경주에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 일부가 주둔하였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명 침략을 목표로 두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다수의 병력을 후방에 남겨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경상좌도 여러 지역에 남겨둔 이들은 진격로와 부산-일본 현지의 연락을 원활히 하거나 조선으로 건너올 예정이었던 도요토 미 히데요시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병력을 남겨 두었다고 할지라도 이후 경상좌도에 진입한 모리 데루모토의 병력 에 의해 대체되었을 것이다. 영천성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주둔한 이가 누구였는지 파악한 다면 해답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표 2>와 <표 3>을 참 고하자면 경상도 중남부 지역에 주둔하는 것으로 기록된 장수들 중 3월 13일의 명령서(<표 1>)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들 이 영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아닐까. 조선으로의 도해 순서가 명시된 3월 13일의 명령서 이전에도 병력 배치에 관한 명령서가 발 급된 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1592년 1월 5일의 명령서이다.42) 그리고 이 명령서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 지 문서가 존재한다.43) 후자, 특히 세 번째 문서( 武家事紀 수록 문서)에 의하면 3월 13일 명령서에 명시된 장수들 이외에도 총 수 28만이라는 많은 장수들이 나고야에서 출진을 대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4)

42) 黑田家文書 176.

43) 淺野家文書 81과 山鹿素行, 武家事紀 卷31續集 古案 豊臣家下 道行之次第 ( 武家事紀 中卷,山鹿素行先生全集刊行會,1916,494~498쪽).

44)이케우치 히로시는 이 세 문서가 원래 하나의 완성된 명령서의 형태였으나 각각 의 문서집에 실리는 과정에서 형태를 달리하였다고 보았다.(池內宏, 文祿慶長の 役 正編 第1,南滿洲鐵道株式會社,1914,232~250쪽)

이 문서에는 <표 2>와 <표 3>에서 경상도 중남부에 주둔하는 것 으로 표기된 장수들의 이름과 병력 수가 확인된다. 난조 모토키요 (南条元淸), 미야베 나가후사(宮部長房), 기노시타 시게카타(木下重 堅), 사이무라 마사히로(齊村政廣), 아카시 노리자네(明石則實), 벳 쇼 요시하루(別所吉治), 이나바 사다미치(稻葉貞通) 등이다. 이들은 최소 500에서 최대 2,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도해하도록 지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3월 13일자의 명령서에 명시된 장수들이 조선으로 도해 한 이후에 차례로 건너와 경상좌도 중남부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장수들의 주둔지는 영천 근처였으며, 다른 지역 의 일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점령을 시도하 였을 것이다. 따라서 영천성 전투의 상대는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같은 소규모 장수 들의 활동을 기록한 사료는 많지 않기에 직접적인 사료를 통해 행 동을 재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경상도 점령을 지휘했 으며, 다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여러 차례 의병과의 전투를 치른 모 리 데루모토군의 동향을 통해 이들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파악해 보겠다. 나. 영천성 주둔 일본군의 행동 방식 영천성에 주둔하던 부대는 모리 데루모토나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부하일 가능성도 있다. 모리 데루모토는 3만이라는 많은 병력을 지 니고 있었으며, <표 2>와 <표 3>에서도 알 수 있듯이 휘하의 부대 를 분산하여 다른 지역에 파견하기도 했다. 부산과 동래에 부대를 주둔시켰던 히데카츠의 군사가 영천부근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비교적 많은 사료를 남기고 있는 모리 데루모토 휘하 장병들의 동향 을 통해 영천성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행동 방식을 재구성해보겠다. 조선에 상륙한 이후, 모리 데루모토는 그가 인솔한 대부분의 병 력과 함께 경상좌도에 머물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카츠도 부산과 동래에 주둔한 채 북상하지 않았다. 두 장수는 일본에서의 상륙과 북상을 위한 중요한 통로인 경상도를 나누어 통치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모리 데루모토에게는 경상도 지역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한 숙박소 건설을 하라는 임무가 주어졌 다.45) 그는 경상좌도 중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점령을 시도했다. 본진은 성주, 선산에 두었다가 6월 12일 개령으로 이동했다. 그의 부하들 은 경상좌도의 여러 지역으로 파견되어 점령과 약탈 활동을 이어갔 다. 이하에서는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인 요시미 모토요리(吉見元 賴)의 휘하에 있던 시모세 요리나오(下瀨賴直)의 朝鮮渡海日記 를 중심으로 모리 데루모토 부대의 활동 양상을 살펴보겠다. 시모세 요리나오는 요시미 모토요리와 함께 1592년 5월 4일 부 산에 도착했다. 휘하부대가 인솔 장수보다 늦게 도착하는 일은 드 문 일이 아니었다.46)

이들은 이동 경로에 진지를 건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조선인을 쫓아내기도 했다. ( 朝鮮渡海日記 5월 8일, 11일, 17일) 전쟁 발발 초기 일본군이 오기도 전에 도망 쳤던 조선인들은47) 시일이 지나면서 산성과 같은 험지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45)池內宏, 第二章 第四軍以下諸軍の動靜 , 文祿慶長の役 別編第一 ,東洋文庫, 1936,95~110쪽;모리 데루모토는 5월 중순 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해에 대 비하여 숙박소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전달받았으며,구로다 나가마사로부터 후방 지원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1592년)5월 26일 모리 데루모토가 시시도 다카이 에(宍戸隆家)에게 보낸 서장의 두 번째 항목 [ 卷子本嚴島文書 94(廣島縣編, 廣島縣史 古代中世資料編 3)]다른 부대와 함께 북상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임무가 생겨서 경상도에 머물게 되었는지,처음부터 후방 지원이라는 임무를 띠 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46)시마즈가의 니이로 타다마스(新納忠增)( 朝鮮渡海之記 ),나베시마가의 타지리 아 키타네(田尻鑑種)( 高麗日記 )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47) 服部傳右衛門覺書 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동래성 전투 이후 밀양,대구,인동,선 산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에 대적하지 않은 채 성을 비우고 도망쳤다고 한다.

한편 요시미 모토요리 등이 창녕 부근에 만든 진지에는 70명을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5월 12일) 경로에 건설한 진지에 는 이처럼 약간 명의 병력을 주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모리 데루 모토의 서장에서도 이동 경로에 건축 중인 진지에 경비 부대를 남겨두었다고 하였다.48) 이는 일본군이 북상한 후 경상도에 남은 일본군이 1백여 명, 혹은 50~60명씩 모여 곳곳에 주둔하고 있으 며, 성주성에는 고작 40~50명만이 주둔하고 있다는 김성일의 보 고와도 맞아 떨어진다.49) 경상좌도의 일본군은 각 거점지역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조선 읍 성 등을 활용하여 성곽을 개축하거나, 기존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단기간에 비교적 간단한 방어시설(繫城, 付城 등)을 신축하 였으며,50) 여기에 소수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들은 주둔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에 나아가 식량을 약탈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을 살해하거나 생포하기도 했다. ( 朝鮮渡海日記 7월 26일 (明曆 27일), 7월 28일(明曆 29일), 8월 4일(明曆 5일) 등) 일본군 이 준비해 온 군량은 대략 6개월분 정도였다.51)

48)(1592년)5월 26일 모리 데루모토가 시시도 다카이에(宍戸隆家)에게 보낸 서장의 두 번째 항목 ( 卷子本嚴島文書 94).

49) 宣祖實錄 권27선조25년(1592)6월 28일 병진.

50)유재춘, 임진전쟁시 일본군의 조선 성곽 이용에 대하여 -철원 성산성 사례를 중심으로 , 朝鮮時代史學報 24,2003;太田秀春, 文祿․慶長の役における日本 軍の築城觀の變遷について -朝鮮邑城の利用から倭城築城への過程を中心に , 朝 鮮學報 181,2001(太田秀春, 第二章 朝鮮の役に於ける日本軍の築城觀の變遷 , 朝鮮の役と日朝城郭史の硏究 ,淸文堂,2005에서 수정․증보).

51)1592년 1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 加藤淸正家藏文書 37).

나머지는 조선 현 지에서 조달해야만 했다. 조선인이 순순히 식량을 내놓지 않는 이 상, 약탈을 통해서만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조선인의 공격( 朝鮮渡海日記 7월 2일(明曆 3일), 7월 27일(明曆 28일) 등)을 유발했다. 성주에 머물던 모리 데루모토는 5월 26일 영지에 보낸 서장에서 이미 위기감을 표출하 고 있었다. 즉, 조선인들이 일본군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고 있으며, 일본군이 적은 인원으로 다니면 半弓을 쏘아 상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을 지배하기에 일본군 병력이 너무 적다는 의견을 개진했다.52) 모리 데루모토 휘하의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는 5월 14일 에 부산을 출발하여 성주에서 모리 데루모토를 만난 후 다시 부산 으로 돌아온 후인 6월 8일, 일본에 서장을 보냈다. 여기서 그는 양 산과 현풍 사이에서 산에 올라가 농성하던 조선인을 공격하였다는 것, 일본인이 왕래할 때 조선인이 반궁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을 전 했다.53) 7월 16일(明曆 17일)에 한성에 도착한 세 부교 중 한 사람 인 마시타 나가모리도 조선인이 일본군에 협조하지 않으며 지속적 으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으나, 전술상으로도 수적으로도 대응하 기 힘든 상황임을 토로했다.54) 전쟁 초반부터 경상도 남부에서 중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조선인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기록에는 이처럼 산으로 도망친 조선인이 갑자기 ‘반궁’ 으로 공격하였다는 내용이 자주 발견된다.55)

52)(1592년)5월 26일 모리 데루모토가 시시도 다카이에(宍戸隆家)에게 보낸 서장의 두 번째,세 번째 항목( 卷子本嚴島文書 94 ).

53)(1592년)6월 8일 안코쿠지 에케이가 동료들에게 보낸 서장의 첫 번째,아홉 번 째 항목 ( 卷子本嚴島文書 95).

54)(1592년)8월 28일 마시타 나가모리가 이시다 마사즈미(石田正澄)에게 보낸 서장 [ (福井縣立圖書館)松平文庫所蔵文書 (三鬼清一郎,朝鮮役における國際条件につ いて , 名古屋大學文學部研究論集 62(史學21),1974,13~14쪽(180~181)에서 재 인용)].

55) 高麗日記 1592년 5월 10일,10월 중순,1593년 2월 22일의 기록;(1592년)5월 26일 모리 데루모토가 시시도 다카이에(宍戸隆家)에게 보낸 서장( 卷子本嚴島文 書 94);(1592년)6월 8일 안코쿠지 에케이가 동료들에게 보낸 서장( 卷子本嚴 島文書 95)등.

도망과 게릴라적 공 격은 일본군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행위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일본군의 기록에 나오는 빈도만큼 이나 그들을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일본군의 약탈과 조선인의 공격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격은 점차 거세졌다. 모리 데루모토가 6~7월에 안동, 8~9월에는 성주에 병력을 파견한 예와 같이 공격 의 규모가 클 경우 여러 지역의 병력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그러 나 현풍, 김천, 성산 등지에서도 의병이 발생하는 등 (9월 11일, 9월 13일, 9월 14일 : 각각 明曆 보다 1일 빠름) 경상도 지역 곳곳 에서 조선인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의 규모는 커졌고 빈도도 높아지 고 있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인의 공격에 대응하기 어 려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모리 데루모토군이 경상도에서 이와 같이 고전하고 있을 무렵,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이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주둔하던 평 양성을 공격하였다. (7월 17일)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물 론 히데요시가 파견한 부교들도 앞으로의 전쟁 양상에 대해 위기감 을 느꼈고, 전투 직후인 대책회의를 소집했다.56) 그리고 모리 데루모토에게는 세 부교로부터 평안도를 진압해달라 는 요청이 도착했다.57) ( 朝鮮渡海日記 7월 18일 : 明曆 19일) 이 기사에서는 이 요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한 것이라 고 하였다. 따라서 이는 명나라 진격을 명한 6월 3일의 명령서에 입각한 요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 부교는 북상 중에 이미 조선의 상황이 일본에서의 예상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러므 로 데루모토에 대한 평안도 진압 요청은 역시 달라진 전쟁 양상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보는 편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모리 데루모토는 병에 걸려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전선에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58)자신은 진지에 머문 상태에서 10월 말 경 자신의 병력만을 평안도로 보냈다.

56)회의는 8월 7일~13일 사이에 이루어졌다.이 회의의 전말에 대해서는 池內宏, 明將祖承訓の敗走以後に於ける我が軍の態度 , 史學雜誌 29-7,1918을 참조.

57)“(안동 지역을 진압하던 중)關白樣より大谷刑部少輔․增田右衛門尉․石田治部少 輔 彼三奉行衆 御朱印持參候て 安藝宰相殿江ハ京都より西目平安道と申國御しつめ (御鎮め)候へと被仰渡候由候て(後略)”;평안도의 평양 이남은 이미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따라서 ‘진압(御しつめ :御鎮め)’이라는 표현은 명군의 재공격에 대 비한 방비강화를 의미한 것으로 생각한다.)

58)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데루모토의 귀국을 명했다.(1592년)9월 24일 도요토 미 히데요시의 명령서 ( 毛利家文書 890).

 

朝鮮渡海日記 와 <표 2>, <표 3>에서는 1차 평양성 전투 이후 모리 데루모토 병력이 한 성 이북으로 북상하는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 명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이 평양을 전선으로 삼아 방비를 강화하기로 하였다는 사실 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조선 남부지역의 방어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병 봉기가 빈발하고 있었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더 큰 적’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북 상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모리 데루모토 휘하의 군사가 영천성에 주둔하였다는 사료는 확 인되지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부하였다는 사료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천성과 가까운 지역에서 활동하던 모리 데루모토 휘하의 군사들이 이동 경로상에 소규모 주둔지를 건설하고 병력 주 둔시키는 과정, 그들의 조선인에 대한 약탈과 조선인에 의한 끊임 없는 저항 등의 상황을 전하는 자료를 통해 영천성 전투 당시 일본 군의 실상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경상좌도 지역의 사족과 일반 민중들은 일본군의 살해와 약탈 행 위에 분노하여 봉기했다. 일본군은 이에 힘겹게 대응했고 시간이 갈 수록 주둔지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평양에서의 대규모 전투를 예 상한 일본군은 모리 데루모토의 군사마저 동원해야 했고, 경상좌도 지역의 방어에는 공백이 발생했다. 조선 의병과의 전투를 견디기 어 려워진 일본군은 보다 큰 거점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러한 전쟁 양상의 변화를 활용하여 의병들은 경상좌도의 중요 거점 을 확보해 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퇴각한 이후에도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조선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4. 결론

임진전쟁 시기 의병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의병이 맞서 싸 웠던 일본군에 대한 파악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의병연 구에서는 의병의 상대였던 일본군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않은 근거에 토대하여 일본군에 대한 서술이 이루어진 경 우도 있었다. 전투는 상대방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과 ‘적’이 남긴 사 료 대한 분석 없이 조선의 사료만으로는 전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 어렵다. 전투를 다룬 사료는 시대가 지날수록 전공을 과장하는 경 우도 있다는 사실 역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소홀 히 한 연구는 일방적인 전공기록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한 국의 임진전쟁 의병연구가 임진전쟁이라는 국제전쟁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활용과 해석이라는 부분에서 보 다 균형을 갖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임진전쟁 당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대 배치 명령서 에서 지시된 편성체제 하에서 움직였다. 그들은 명 침략이라는 히 데요시의 큰 전략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각 부대는 각각의 장수와 그의 가신, 그리고 가신이 거느린 개인 부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스스로 병력과 군량을 준비해야만 했다. 군량을 약탈할 것인지, 영 지에서 운송할 것인지, 대여할 것인지는 부대를 이끄는 장수가 판 단해야했다. 전진 과정이나 주둔 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전투에서 어떤 전술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도 자신에게 있었다. 영천 성에서 의병과 싸운 일본군을 파악하기 힘든 이유는 이처럼 각 부 대가 독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영천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 부대가 누구의 부대인지, 전투에 참전한 이가 누구 였는지를 전하는 사료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급한 부대 배치 명령서와 그 외 전쟁 초기 주둔 현황을 전하는 사료를 활용하여 영천성 전투 에 참여한 일본군의 정체에 접근했다. 이를 통해 그들이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였다는 학설은 근거가 매우 미약하며, 영천을 경유 하여 북상한 가토 기요마사 등 2군 소속 부대일 가능성도 낮을 것 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9번 부대 이후에 조선에 들 어온 소규모 영주급의 장수가 이끄는 군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 론에 이르렀다. 개령에 본진을 두고 경상도 내륙 여러 지역에 부대 를 파견하고 있던 모리 데루모토 휘하의 군사였을 가능성도 있으 며, 9번 부대의 장수로 부산에 주둔하면서 부산‧ 동래‧ 양산‧ 밀양 방면에 휘하의 부대를 포진하고 있었던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부하 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모리 데루모토가 경상도 중북부 지 역에 머물면서 북상한 일본군을 지원하고, 도요토미 히데카츠가 부 산에서 모리 데루모토 진영까지의 병참을 총괄하고 있었을 가능성 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영천성 전투가 벌어진 시기 경상좌도 일본군의 행동 양상은 모리 데루모토 휘하 부대의 기록을 통해 접근하였다. 전쟁 초반부터 벌 어진 일본군의 약탈과 살해행위는 조선인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 켰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인의 저항에 끝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영천성 전투와 같은 규모의 전투에서도 패배를 겪었다. 이후 일본군은 주력부대는 명군이라는 새로운 적을 방비하기 위해 한성~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집결하였다. 경상좌도에 남은 일본군 은 곳곳에 설치한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방어가 수월한 거점으로 모 이게 되었다.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영천성 전투를 직접 언급한 일본 사료나 영천성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이 어떤 장수의 부대였는지 확정할 만한 사료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일본군의 편성 체제, 전쟁 이후의 행동 경로, 경상좌도 지역에서 벌어진 실제 전투와 작전을 참고하여 영천성 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노 력했다. 영천성에 입성한 일본군의 행동 방식 역시 간접적인 방법 을 통해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존 연구의 무비판적인 답습을 경계하고 개별 전투사의 재구성을 위한 대안적인 방법론을 제안하였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의 한계는 분명하다. 앞으로 소규모 영주급 장수들이 남 긴 사료 조사 등 보다 면밀한 작업을 통해 영천성 전투를 비롯한 개 별 전투의 실상을 밝혀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 또한 일본군 이 평양 전선을 강화한 이후, 조선 남부에 남아있던 일본군의 행동 양상과 조선 의병의 대응에 대해서는 추후의 연구를 통해 밝히도록 하겠다.

주제어 :임진전쟁,임진왜란,영천성 전투,의병,권응수,도요토미 히데요시, 모리 데루모토,도요토미 히데카츠

The Activities of Japanese Armed forces in Kyeongsang Province in the Early Period of Imjin War :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

Kim, Kyong-tae

To evaluate the activities of the righteous voluntary army during the Imjin War period, it is imperative to grasp those of their adversaries, the Japanese army. Researches up until now have not focused on the activities of the Japanese army and some of them even illustrated the circumstances based on inappropriate grounds. Every battle needs at least one army and its counterpart. Without analyzing the adversaries and the materials written by them, it is hard to fully reconstruct the circumstances of a battle only with the materials written by people of Joseon to reflect it's perspective. This is why we need to understand the activities of the Japanese army using Japanese historical records. During the war, the Japanese army moved on war footing directed by the order of deployment of Toyotomi Hideyoshi. They had to follow Hideyoshi’s grand strategy of invading Ming China. Yet each troop consisted of a general, his vassals, and the soldiers under their command and it had to procure its own rations and forces. How they procure the provisions was up to the judgement of the general: he had to make his own decision whether to pillage, to transport them from its domain, or to rent. He was also given mandate to decide what kind of tactics they would take for the battles during the army’s advancing or stationing. The independent nature which each troop assumed renders it hard to trace the Japanese troops; information on the Japanese army, such as to whom the troop belonged, who participated in the battle, is hard to find from historical records. And this is why it is hard to grasp the Japanese army who fought against the righteous voluntary army at Yeongcheon fortress. Using various orders of deployment issued by Toyotomi Hideyoshi, this article argues that the Japanese army who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Yeongcheon Fortress must have been small scale troops which entered Joseon after the 9th troops or troops under the Mori Terumoto and Toyotomi Hidekatsu. Meanwhile, from the records of the troops under Terumoto, this article traced the activities of the Japanese Army in Kyeongsang Province during the period of Yeongcheon fortress. From the early phase of war, pillage and violence by the Japanese army incurred strong resistance of Joseon people. Yet the Japanese army could not cope with situation and the righteous army staged a series of riots here and there. After the battle at Yeongcheon Fortress, the Japanese army suffered repeated defeats at subsequent battles of similar scale. After that, the main body of the Japanese army assembled along the line from Hanseong to Pyeongyang in order to defend the region from their new enemy, Ming army. The remnant troops left in Kyeongsang Province retreated from their various posts and gathered into positions where they could easily defend themselves. This made it possible for Joseon to recover the region which was exploited as main passage and posts of the Japanese army.

Key words:Imjin War,Imjin Waeran,Battle ofYeongcheon Fortress, righteous army, Kwon ung-su, ToyotomiHideyoshi, Mori Terumoto,ToyotomiHidekatsu

〔원고투고일: 2015.4.5, 심사수정일: 2015.5.21, 게재확정일: 2015.5.22〕

 

임진전쟁 초기 경상좌도 일본군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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