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한국전쟁의 발발과 상륙작전 구상안의 출현
2.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 Hearts)의 계획과 준비
3. 블루하츠 작전에서 레드하츠 작전(Operation Red Hearts)으로
맺음말
머리말
현재까지 수많은 전쟁에 관한 논문과 저서가 발표되고 있지만, 특히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은 아직도 해명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중요한 전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초기 구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즉 전쟁이 발발한 직후 맥아더가 구상한 것으로 알려진 인천상륙작전(작전명 크로마이트) 이전에 초기 구상인 블루하츠(Operation Blue Hearts) 작전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50년 7~8월 전쟁이 지속되며 북한군의 기습 남침과 신속한 남진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이 계속해서 패배하고, 전선은 낙동강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북한군의 ‘전격적인 진격’과 ‘유엔군의 계획적인 지연전술’로 양측은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대치와 함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유엔군이 반격의 기회를 잡았으며, 상륙이 불가능한 지점에 대한 공격으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은 전쟁사에서 획기적인 작전이자 ‘세기의 작전’으로 평가받아왔다.1)
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3 한국전쟁전투사-인천상륙작전,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국방군사연구소, 1995 한국전쟁(上), 국방군사연구소; Robert D. Heinl, 1998 “The Inchon Landing: A Case Study in Amphibious Planning” Naval War College Review, Vol. 51. No. 2; 김현기, 1999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군사논단 17호, 한국군사학회; 권오선, 1999 「인천상륙작전의 의미와 서울수복」 통일로 133호, 안보문제연구원; 서주석, 2000 「인천상륙작전의 결정경위와 전개과정」 인천상륙작전 50주년 기념학술회의-한국전쟁과 인천: 평화와 협력을 위하여; 송인영, 2000 「인천상륙작전의 전쟁사적 평가 및 의의」 인천상륙작전 50주년 기념학술회의-한국전쟁과 인천: 평화와 협력을 위하여; Allan C. Bevilacqua, 2000 “Inchon, Korea, 1950-The Landing that couldn’t be done” Leatherneck, Vol. 83. Issue. 9; Jeffery A. Bradford, 2001 “MacArthur, Inchon and the Art of Battle Command,” Military Review Vol. 81. Issue. 2; Paschall, Rod, 2002 “Inchon,” Military history magazine & MHQ(ed), America’s Great Battles, 1775-2002, Primedia History Group; Cagle, Malcolm W.․Manson, Frank A.(저), 신형식(역), 2003 한국전쟁해전사, 21세기 군사연구소; 이선호, 2005 「9․15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평가」 군사논단 43호, 한국군사학회; 이선호, 2005 「맥아더 장군과 9․15인천상륙작전」 군사세계 123호, 21세기군사연구소; Jim, Dorschner, 2005 “Douglas MacArthur’s Last Triumph” Military History, Vol. 22. Issue. 6; 조성훈, 2006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정신문화연구 제29권 제3호 통권104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오선, 2010 「9.28 서울수복과 인천상륙작전」 통일로 265호, 안보문제연구원; 김광수, 2010 「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軍史硏究 제130집육군군사연구소; 이상호, 2012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이상호, 2015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백년동안; 김대성, 2018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요인에 대한 군사전략적 분석 : 기동전략과 소모전략을 중심으로」 軍史 제106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하지만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작전의 성격과 결과에 대해 다른 해석을 보여주었다.2)
대표적으로 박명림은 중국의 마오쩌둥이 인천상륙작전을 예견하였으며, 이를 북한에 알려주었다고 평가하였다.
북한 역시 김일성이 인천상륙작전에 대하여 정확히 예상하였으나 당시 경기도인민위원회의 이승엽 도당에 의해 적절한 방어계획을 수립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3)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일면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거나, 자신들 지도자들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되었다.4)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연구는 그 명성과는 다르게 그다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륙작전에 대한 배경보다는 그 과정과 결과가 주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야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세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5)
2) 박명림, 1997 「한국전쟁: 전세의 역전과 북한의 대응(1): 1950년 8월 28일부터 10 월 1일까지」 전략연구 10호,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박명림, 2002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출판; 박명림, 2004 「열전의 인천 1950년, 그리고 평화의 인천 2005년; 두 인천의 역사적 조망의 몇몇 비교범주들」 제4회 월미평화포럼: 황해, 전쟁의 바다에서 평화 교류의 바다로; 주지안롱 지음・서각수 옮김, 2005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역사넷; 김경일 지음・홍면기 옮김, 2005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 논형.
3) 강석희, 1993 조국해방전쟁사 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41~42쪽
4) 김광수, 1999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이 아니었는가」 전사 2호, 국방군사연구소; 이상호, 2006 「인천상륙작전과 북한의 대응 : 사전인지설과 전략적 후퇴에 대한 반론」 軍史 제59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조상근, 2009 「한국전쟁에서 중공 지도부의 인천상륙작전 예측과정」 軍史 제71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5) 이상호・박성진, 2013 「인천상륙작전과 팔미도 정보 작전」 정신문화연구 제36권 제3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호, 2019 「인천상륙의 크로마이트 작전 4가지 계획과 그 함의」 軍史 제110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중요한 문제가 있다.
이것이 바로 본 논문에서 다룰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 Hearts)’이다.
공식 전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맥아더(Douglas MacArhur)가 도쿄에서 수원비행장으로 날아와 전선을 시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금의 영등포 공원인 한강 남안까지 가서 전선의 상황을 파악한 후 구상한 것이 바로 블루하츠 작전이다.
그러나 이 작전이 어떤 구상과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실제 상륙작전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이 초기의 상륙작전 계획이 북한군의 빠른 남진에 의하여 곧 취소되고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6)
본 논문에서는 블루하츠 작전이 크로마이트 작전의 초기 구상이자 일종의 예비적 작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요 사료로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이는 전쟁 초기부터 인천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이 구상되었다는 점과 서울 탈환의 의미가 갖는 전략적, 심리적 의의가 당시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가들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블루하츠 작전과 크로마이트 작전과의 연계성을 주장하는 내용은 있었지만 블루하츠 작전의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아 과연 그 연계성이 무엇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또한 인천지역에 대한 상륙작전 계획이었던 블루하츠 작전이 포항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인 ‘레드하츠(Red Hearts)’로 작전이 바뀌었다는 것도 이 논문에서 새롭게 밝히는 내용이다. . 6) Roy E. Appleman, 1961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United States Government Printing Office, p. 489; James Schnabel, F., 1972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pp. 141~142; Clay Blair, 1987 The Forgotten War - America in Korea, 1950-1953, Times Books, p. 87.
본 논문에서는 그동안 전쟁사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 블루하츠 작전의 개요와 목표, 그리고 작전 내용을 1차 자료를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설명을 위해서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과 맥아더기념관(MacArthur Memorial Archives)의 문서를 주요 사료로 활용하였다.
1. 한국전쟁의 발발과 상륙작전 구상안의 출현
전쟁이 발발한 후 4일이 지난 6월 29일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전선시찰을 감행하였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바탄호를 타고 서울 남쪽의 수원비행장으로 왔다.
이때 그는 구형 포드를 타고 전선으로 향하였다.7)
맥아더는 한강변에서 전선시찰을 하고 나서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미 지상군의 투입을 구상하였다.8)
7) 맥아더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지프 차를 타고 한강으로 향했다고 적고 있다. Douglas MacArthur, 1964 Reminiscence, Mcgraw-Hill Book Company, p. 332. 맥아더의 전선시찰에 대해 많은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맥아더의 조기 전선시찰이 갖는 의미와 후에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인 ‘크로마이트 작전’ 구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자세히 밝혀지겠지만, 당시 맥아더의 구상은 크로마이트 작전이 아닌 블루하츠 작전 구상이었다.
8) Douglas MacArthur, 1964 ibid., p. 333
한강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니 대한민국의 방위 능력은 이미 소멸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북한군들이 탱크 부대를 앞세워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개 안되는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것을 방치해 두면 한국 전체는 북한이 차지하게 된다.
우리가 해군과 공군으로 지원한다고 해도 한국군의 힘만으로 적의 진격을 방어하기란 불가능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즉각 우리의 지상군을 투입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전쟁 관련 저서에서는 이때 맥아더의 고민을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맥아더 본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를 인천상륙작전의 원형(the genesis of the Inchon operation)이라고 기술했기 때문이다.9)
일본에 주둔해 있는 적은 수의 미군부대를 뽑아서 한국에 투입하는 경우, 공산 국가가 일본을 탈취하려는 움직임을 사전에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의 현지 병력을 만들 수 있을까?
작전상 미군부대를 부산에 데려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수 있을 것인가?
또한 부대를 한국까지 수송할 수 있는 수송선과 전투에 필요한 군수 물자와 보급품, 일본의 방위대를 창설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패퇴한 한국군을 다시 집결시켜 재편성하고 사기를 되살릴 수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이 계획한대로 되고 가늘고 긴 적의 보급로가 위험할 정도로 연장되고 소수의 병력으로도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의 주력을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아군의 병력은 적보다 3대 1의 열세에 놓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패배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반격작전, 즉 인천상륙작전의 원형 구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맥아더가 기술한 ‘인천상륙작전의 원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가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이 바로 크로마이트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9일 전선시찰 후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맥아더는 당시 뉴욕헤럴드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의 기자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에게 “한국인들은 미군 정예부대의 투입을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한국군 장병들은 신체조건이 좋습니다. 솔선수범하는 지휘관이 있으면 전의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내게 2개 사단만 주어지면 한국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10)
9) Douglas MacArthur, 1964 Ibid., p. 334
10) 마거리트 히긴스 저・이현표 옮김, 2009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40쪽
이러한 언급은 미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맥아더의 건의에도 나타났다.
맥아더는 전선시찰 결과보고와 함께 “현 전선을 고수하고 최근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은 미 지상군의 한국전선 투입으로만 보장될 수 있을 것”임을 강조하면서, “1개 연대전투단을 즉각 투입하고, 그 뒤에 있을 조기 반격을 위해서는 주일 미군 중의 2개 사단으로 증원하겠다”라는 계획을 6 월 30일 건의하였다.11)
점령지 일본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예견한 맥아더는 1950년 봄에 극동미육군의 상륙전 교육을 위하여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주도록 미 해군 및 해병대에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1950 년 4월과 5월 사이에 미 해군・해병대로부터 3개 교관단이 일본에 도착하였다.
제1진은 미 태평양함대 상륙전교육사령부 산하의 부대훈련대(TTU, Troop Training Unit)로부터 파견된 포니(Edward H. Forney) 대령이 이끄는 미 해병대의 이동교육반(MTT, Mobile Training Team)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 해군・해병대 요원으로 구성된 항공함포연락반(ANGLICO, Air and Naval Gunfire Liaison Group)이었다.
마지막 한 그룹은 도일(James H. Doyle)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상륙전대(Amphibious Group Ⅰ)였다.12)
당시 일본의 점령부대로 미 극동군사령부는 미 제8군 산하에 4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13)
11) James F. Schnabel, 1972 op. cit., p. 78
12)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3 앞의 책, 10쪽; Lynn Montross, Nicholas A. Canzona, 1955 U. S. Marine Operations in Korea 1950~1953, Vol Ⅱ - The Inchon-Seoul Operations Headquarters U. S. Marine Corps, pp. 4~7
13) Douglas MacArthur, 1964 op. cit., p. 335
그 당시 일본에는 제8군 산하에 제7사단,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병사단 등 4개 사단이 주둔해 있었으며 이들 부대는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었다.
제8군은 워커(Walton H. Walker)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패튼(George S. Patton, Jr.) 장군 밑의 군단장으로 있던 노련한 장군이었다.
일본이 섬으로 구성된 지역이므로 향후 공산 세력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상륙작전이 필요하였다.14)
이러한 상륙작전 준비를 위해 극동군사령부는 미 제8군 예하의 4개 전투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씩을 선정, 이들을 대상으로 5월부터 3개 그룹의 상륙전 전문가들이 부문별로 교육을 실시하였다.15)
이러한 상륙작전 연습과 함께 이미 인천지역에 상륙작전을 예상한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16)
그런데 선행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인천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은 이미 1945년 대일 본토 작전 계획인 올림픽(OLYMPIC) 및 블랙리스트(BLACKLIST) 계획에서도 실행계획이 준비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17)
14) 미 극동군사령부는 사할린을 포함한 일본 열도 북쪽 지역에 대한 소련군의 남진을 예상할 수 있는 소련의 행동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이런 일이 현실화될 경우 일본주둔 미군을 동원하여 바다에서 거꾸로 상륙전을 감행, 소련군을 몰아내는 작전을 예비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다. 대소 전쟁계획으로 미국은 다양한 우발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상호, 2012 앞의 책, 289~290쪽. 각주 34참조.
15)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3 앞의 책, 11쪽
16) 한반도 작전 대비 군수 연구 LD-SL-17문서는 이미 다른 논문에서 검토하였다. 이 문서는 이미 한국전쟁 발발 이전인 6월 19일에 우발계획 SL-17문서를 7월에 수정한 것으로, 당시 군수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두고 커밍스와 박명림은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이미 이를 예상한 계획이 준비되었다고 평가했지만, 당시 문서의 분석결과 이는 근거가 매우 희박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논문을 참조. 이상호, 2019 앞의 논문, 363~365쪽
17) 이상호, 2019 위의 논문, 373쪽
즉 미국의 극동군사령부나 육군부에서는 제2차 대전 이후 미소간의 냉전이 치열해지고 특히 동아시아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것을 가정한 긴급 작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사학자인 웨인트롭(Stanley Weintraub)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전 미 육군부 작전참모부장인 볼테(Charles L. Bolte)가 북한의 남침을 가정한 우발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18)
이 작전계획은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동북아시아 지역 전쟁 계획의 일부로 간주하고, 미군의 준비태세를 다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50년 6월 19일 작성되어 미 국방부에 의해 승인된 SL-17은 북한의 남침 후 아군을 부산방어선으로 후퇴시킨 후에 인천 지역으로 상륙하는 계획이었다.
당시 작전 입안자였던 커티스(Donald McB. Curtis)에 의하면 맥아더사령부에서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은 후 바로 다음 날 SL-17문서의 사본 50부를 긴급히 요청하였다고 회상하였다.19)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 문서야말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게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20)
18) Stanley Weintraub, 2000 MacArthur’s War: Korean and the undoing of an American Hero, The Free Press, p. 106
19) Clay Blair, 1987 op. cit., p. 87 미 육군 공식 전사에 따르면 블루하츠 작전은 합동기획단(JSPOG)의 라이트(Edwin K. Wright)소장의 주도하에 작성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James Schnabel, 1972 op. cit., p. 139; Gordon L. Rottman, 2006 Inch’on 1950 - The last great amphibious assault, Osprey Publishing, p. 42
20) Bruce Cumings, 1990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Ⅱ-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614~615
하지만 그는 SL-17문서와 인천상륙작전의 연계성에 대해서 명확히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이후 SL-17문서를 보강하여 1950년 7월 25일에 완성된 LD-SL-17문서는 ‘차기작전을 위한 군수연구 프로그램(Mobilization Requirements Program of the Army Logistic Study for Projected Operations)’인데, 이는 작전일의 기준을 1951년 6월로 삼았고, 이는 전쟁 발발 12개월 내에 감행하는 것으로 일종의 도상계획이었다.21)
21) “Memorandum for Record: Mobilization Requirements Program of the Army Logistic Study for Projected Operations”(1950. 7. 29), RG 319, Records of the Army Staff, 1903-2009, General Decimal Files, 1950-1951(Top Secret) General Correspondence Relating to Training and Operations, 1950-52.
즉 이 계획이 한국전쟁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되었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2. 블루하츠 작전(Operation Blue Hearts)의 계획과 준비
6월 29일 한강전선을 시찰한 맥아더는 도쿄로 돌아온 즉시 참모장인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상륙작전의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합동전략기획단(JSPOG, Joint Strategic Planning and Operations Group)이 책임을 맡아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한강선에서 북한군을 상당 기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인천을 상륙 대상지역으로 고려하였다.
최초의 상륙작전 기본 계획에서는 불완전하나마 상륙전 훈련을 받은 제1기병사단을 상륙부대로 내정하였다.22) 알몬드와 그의 참모진에 의해 구상된 블루하츠는 다음과 같다.23)
22)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3 앞의 책, 12쪽
23) Roy Appleman, 1961 op. cit., pp. 488~489
규슈에 주둔한 미 제24사단을 남한에 파병하여 전투에 투입한다.
즉 7월 2일 부산에 상륙시켜 즉시 수원으로 이동하여 서부지역으로 남하하는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동시에 그 지역의 한국군을 지원한다.
7월 20일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킨다.
미 제1기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는 동안 미 제24사단은 북쪽으로 공격하여 협공을 감행한다.
7월 2일 맥아더는 조이(Turner C. Joy) 제독의 조언을 받아 해병대 항공 부대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 1개 연대전투단의 극동 파견을 워싱턴에 건의하였으며, 7월 3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이를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기본 계획에 더하여 대체적인 작전 개념이 마련되었다.
현 전선 남쪽에서 미 제24 사단 및 제25사단으로 반격작전을 감행하고, 이와 병행하여 미 해병 1개 연대전투단 및 미 제1기병사단을 돌격 상륙부대로 삼아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는 블루하츠라는 작전명이 부여되었다.24)
앞에서 언급한 맥아더-히긴스 대화를 되새겨보면 블루하츠 작전의 구상은 6월 29 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작전은 현대적인 해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북한군25)에 대해 미 제1기병사단으로 인천지역을 기습적으로 상륙 공격함으로써 대응훈련을 하지 못한 북한군을 괴멸시킨다는 개념이었다.
블루하츠 작전의 성공은 곧 병력이 적은 맥아더로 하여금 단시일에 승리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군사학자인 블레어(Clay Blair)는 이 작전 자체를 매우 터무니없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 이유는 복잡한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훈련과 완벽한 장비, 그리고 경험 있는 사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 제8군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블레어는 맥아더의 참모장인 알몬드 역시 후에 이 작전은 단지 40%의 성공확률을 가지고 있다고 시인했음을 기술하였다.26)
24)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3 앞의 책, 15~16쪽 25) 6월 27일 미 극동공군 전투기들이 여러 대의 북한 공군 야크기와 일류신 전투기들을 격추하였다. 이후 북한공군은 미 극동공군 전투기와의 직접 대결을 회피하였다. 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 문관현, 손석주, 김택, 오충원 옮김, 극동공군사령관 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플래닛미디어, 2011), 80쪽. 26) Clay Blair, 1987 op. cit., pp. 87~88
무엇보다도 시급했던 문제는 북한군이 한반도 전역을 수중에 넣기 전에 전진 속도를 늦추는 일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규모라 하더라도 가급적 신속하게 지상 부대를 일선에 배치하여 미군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적의 사령관이 조심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나는 앞으로의 작전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부산에 부대를 집결시킬 계획이었다.27)
그렇다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이러한 작전을 맥아더는 왜 감행하려고 하였을까?
맥아더는 아시아에서 20년 이상이나 근무하면서 아시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군인으로 평가받았지만, 그는 북한이나 중국의 의도에 대해 자주 오판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자주 드러내곤 하였다.28)
이러한 인종주의적 저평가는 그대로 북한군에도 적용되었다.
맥아더는 미군의 공식적인 참전이 곧 북한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미군의 참전 자체가 북한군으로 하여금 그 공격 속도를 늦추게 할 것으로 예측하였다.29)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스미스특임대대(Task Force Smith)의 대패로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 이제 블루하츠 작전30)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31)
1950년 7월 3일 극동군사령부는 작전명령 3호를 발령하였다.32)
27) Douglas MacArthur, 1964 op. cit., pp. 335~336
28) 맥아더의 인종주의와 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다음을 참조. 이상호, 2012 위의 책, 57~65쪽.
29) 이상호, 2012 위의 책, 170~171쪽.
30) 블루하츠의 작전은 한 미국인 퇴역장교의 노력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는 바넷 소령(Lacy C. Barnett)으로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RG 319문서군에서 이를 확인 후 맥아더 아카이브에 제공하였다. 현재 블루하츠 관련 문서는 맥아더기념관(MacArthur Archive) RG 15문서군에 포함되어 있다.
31)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32) “Operation Instruction No. 3”(1950. 7. 6),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그 직전에 발령된 작전명령 1호는 남한에 주한미군사령부(USAFIK)를 설치하는 것이었고, 작전명령 2호는 부산에 부산기지사령부(Pusan Base Command)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극동 해군은 이 두 명령에 따라 한국 해안을 봉쇄하기 시작하였다.
작전명령 3호는 상륙작전 준비를 주 내용을 하고 있다.33)
이에 따라 미 제8군에게는 3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첫째, 임시 탱크 대대를 조직하고,
둘째, 제1기병사단을 상륙작전을 위해 준비시키며,
셋째, 제25사단(1개 연대 감소)을 7월 12일까지 부산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극동해군의 임무는 한국해안을 봉쇄하고 제1기병사단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초기 한반도 작전에는 주의 사항이 있었는데, 이는 방공망을 구축하고, 만주와 소련 접경지역에 대한 작전 한계선을 명확히 하며, 소련의 적대적 행동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였다.
극동군사령부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소련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인 것은 이미 제2차 대전 후부터 준비된 대소전쟁계획의 일환이었다.
1946년 핀처(PINCHER) 계획, 1948년 브로일러(BROILER) 계획, 1949년 오프태클(OFFTACKLE) 계획 등 소련과의 전쟁 계획이 다양하게 준비되었다가 전쟁 직전 최종판인 NSC-68이 완성되었다.34)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 육군부가 보인 최초 반응이 바로 소련에 의해 전쟁이 시작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소련군사고문단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었다.35)
33) Ibid.
34) 이상호, 2012 위의 책, 153~155, 289~290쪽.
35) “DA to CINCFE”(1950. 6. 26), MA, RG 6, Box 9, General Order, January 1951, Folder 4, Korea No. 1 File: June - October 1950.
또한 대만과 펑후제도(Pescadore) 지역에 대한 보호 역시 극동군사령부가 신경 써야 할 대상 지역이었다.
당시 미 제1기병사단의 전쟁일지(War Diary)에 따르면 이 사단은 6월 29일부터 상륙작전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미 제1기병사단은 도쿄의 주요 기지에 산재해 있었다.
사단사령부는 캠프 드레이크(Camp Drake)에 주둔하고 있었고, 병력은 10,374명이었다.
병력 수가 20%정도 미달되어 신속한 충원이 계획되었다.36)
사단장은 게이(Hobart R. Gay) 소장이었다.37)
6월 29일 사단은 24시간 경계 및 일주일 지속 근무에 들어갔다.
특히 일본공산당과 조선인 총련 조직이 한국으로 가는 무기 및 탄약 적재를 반대하기 위해 노동자 선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의 CIC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따라서 제5기병연대의 1개 중대가 이케고 탄약창(Ikego Ammunition Depot)으로 배치되었다.38)
36) “1st Cavalry Division War Diary”,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37) 게이(Hobart Raymond Gay, 1894~1983). 일리노이 주 락포트(Rockport)에서 1894 년 5월 16일 출생하였다. 1917년 녹스(Knox)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정규군으로 기병 소위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직후에 멕시코와의 국경에 주둔한 제12기병연대와 제7기병연대에서 근무하였다. 1923~25년 캔사스 주 포트 릴리(Riley)의 기병학교를 다녔으며, 교관으로 1929년까지 그곳에서 근무하였다.
이 당시 폴로 경기에서 한쪽 시력을 상실하였다. 1939년 필라델피아의 병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1기갑군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해 11월 북아프리카에 제1기갑군단이 배치되었고, 1943년 6월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7월에는 제7군의 참모장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시실리에서 근무하였다. 1944년 2월 게이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제3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1945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게이는 1사단을 이끌고 1950년 7월 19일에 참전하였다. 1951년 2 월에 제1시병사단장에서 물러나 텍사스의 제4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4년 9월 중장으로 진급하고 일리노이주의 제5군 사령관이 되었다.
게이는 1955년 8월에 전역하였다. 그는 1983년 8월 19일 사망하여 텍사스 블리스(Bliss)기지에 묻혔다. Spencer C. Tucker ed. 2000 Encyclopedia of the Korean War –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Vol. Ⅰ, ABC-CLIO.
38) “1st Cavalry Division War Diary”,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7월 1일 사단의 상륙작전 훈련이 중지되었다.
육군부의 명령에 따라 제5기병연대의 인원이 미 제24사단으로 전출되었다.
이등병(E-2)부터 소대 선임하사관(E-7)까지 총 166명이었다.
제7기병연대에서도 168명의 주요 하사관들을 미 제24사단으로 보냈다.
7월 3일 2개의 계획이 마련되었다.
제1계획은 사단사령부의 전방제대와 제7기병연대를 항공편으로 한국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계획은 사단 주력을 규슈까지 철도로 이동하고, 여기서 해상으로 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7월 5일 미 제8군은 군수품 보안을 위해 현지인(일본인)의 추가적인 고용을 실시하였다.
7월 6일 상륙훈련센터(Amphibious Training Center)가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었다.
한반도 상륙작전을 위한 계획이 준비되었다.
이 상륙작전을 위해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로부터 인원이 차출되어 한 그룹이 만들어졌다.
세부적인 상륙작전 계획은 미 해병대의 포니 대령의 감독 하에 마련되었다.
이 작전 명칭은 ‘블루하츠’로 명명되었고, 공식 작전명은 Operation 7-50이었다.39)
7월 7일 작성된 블루하츠 계획에 따르면 첫 상륙단은 각각 2개의 사단 포병대를 갖춘 2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대한 해상 화력지원은 각각 4대의 구축함, 2대의 경순양함, 1대의 프리깃함, 2대의 항공모함으로 이루어졌다.40)
또한 상륙작전을 위한 상륙정은 총 103척으로 편성되었다.41)
블루하츠 작전에서 상륙정의 분류와 배정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42)
39) Ibid.
40) “Message from G-3, HQ 1st Cavalry Division to Col. Forney USMC”(1950. 7. 7),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41) “Planning Factors for Operation Blue Hearts - Annex 1"(1950. 7. 7),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42) “Planning Factors Annex 1 - Operation Blue Hearts, July 1950"(1950. 7. 7),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표 1> 블루하츠 작전에서 상륙정의 분류와 배정
함 정 LCVP LCM LCP(대) LCR(중) LSU 카발리에 18 4 2 2 마운트 맥킨리 2 1 2 유니온 15 7 1 티타니아 15 8 1 오글소프 15 8 1 LST611 2 트랙터 그룹 5 합 계 65 27 6 4 5
※ LCVP: 차량인원수송용 상륙주정, LCM: 기계화 상륙주정, LCP: 인원수송용 상륙주정, LSU: 다목적 상륙함, LST: 전차양륙정
한국으로의 사단 이동은 3개의 상륙단으로 구성되었다.
7월 9일 제5기병연대로 구성된 제대가 출항 준비를 위해 캠프 맥길(Camp McGill)로 이동하였다.
캠프 맥길에서 7월 10일 상륙작전을 위해 3일간의 특별과정을 이수한 제77야전포병대대가 요코하마로 이동하였다.
각각의 전차상륙함(LST, Landing Ship, Tank)에는 1만 파운드(약 4.5톤)의 탄약이 적재되었다.
단위 지원부대로는 화학부대, 공병대, 병기대, 병참부대순으로 출항준비가 이루어졌다.
미 제1기병사단의 각 연대별 상륙전 배정은 다음과 같다.43)
43) “Planning Factors Annex 1 - Operation Blue Hearts, July 1950"(1950. 7. 8),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7월 11일 제1기병사단은 한국으로의 이동을 시작하였다.
첫 번째 상륙제대의 모든 부대가 출항을 위해 집결하였다.
7월 12일 제1기병사단 주둔지의 경호와 점령 임무는 제7사단에 인계되었다.
상륙지역에 대한 정찰을 위해 일단의 장교들이 항공편으로 한국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정찰을 마치고 제1기병사단 지휘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표 2> 제1기병사단에 배정된 상륙정
LCVP LCM LCP(대) LSU 사단정찰중대 6 2 제5기병연대 32 11 3 제8기병연대 33 10 3 상륙선발대 3 합 계 65 27 6 5
하지만 이날 상륙지역에 대한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때까지 상륙지역은 인천지역이었지만 22일 상륙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결국 12일 오후 금강방면의 전선이 불안정해지자 상륙지역에 대한 변경이 이루어졌다.
블루하츠 작전의 취소였다.
다음날인 7월 13일 제8기병연대를 중심으로 한 제대가 요코하마 항구로부터 출항하며 최종 목적지가 변경되었다.
바로 포항으로의 변경이었다.44)
44) “Planning Factors for Second Lift, Operation Red Hearts”(1950. 7. 12),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이어 같은 날 제5기병연대의 인원과 장비가 적재를 시작하였다.
3. 블루하츠 작전에서 레드하츠 작전(Operation Red Hearts)으로
블루하츠 작전의 변경은 최초의 미 육군 병력 부대인 스미스특임대대의 패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초기 계획이 미 제24사단이 북한의 남진을 얼마나 막아내느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1일 일본의 이따즈케를 출발하여 당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한 부대는 바로 스미스특임대대였다. 스미스특임대대의 병사들은 대부분 20세 전후였으며 전투경험이 있는 경우는 6명 중에 1명 정도였다.
부대장인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은 오후 6시 대전에 도착하여 전선사령부 처치(John H. Churtch) 준장에게 신고한 후 전방의 지형정찰을 나갔다.
7월 5일 오전 3시 스미스 부대는 오산 북방 5km 지점의 죽미령에 포진하였다.
아침 8시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미군은 북한군에 패퇴하였다.
오산에서의 접전은 미군의 출현만으로는 한국에서 군사적 균형을 반전시킬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45)
죽미령에서 철수시 스미스부대는 적 공격에 병력이 분산되었고 모든 공용화기를 유기하는 등 많은 인원,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이 부대원들이 안성을 거쳐 천안에 집결했을 때 스미스 대대원의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하여 총 손실은 150여 명에 달하였다.46)
죽미령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로, 북한군으로서는 미 지상군의 참전이 확인된 전투였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미국의 지상군이 출동하여 적군이 전진을 지연시키자 즉각 효과를 발휘했다.
나는 더욱 확고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 지상군이 한국 전선에서 싸운 최초의 며칠 동안 나는 소수병력을 공수하여 저항 거점을 구축하고 그 주위에 후퇴하는 한국군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적으로 하여금 내가 실제보다 많은 병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10일이라는 시간을 벌 수 있었으며 적이 수원을 주축으로 하는 150마일 전선에 병력을 배치했을 무렵에는 제24사단의 잔여 병력을 데려올 수 있었다.
사단장이던 딘(William F. Dean) 소장은 내가 일본에서 제1기병사단과 제25사단을 수송해 올 때까지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47)
45) William W. Stueck Jr., 1995 The Korean War - An International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47~48
46) “Daily Summary of Developments in the Far East”(July 6, 1950), Department of State Policy Information Section Bureau of Far Eastern Affairs.
47) Douglas MacArthur, 1964, Ibid., p. 336
결국 이 전투는 맥아더가 미군의 대폭적인 증강파병을 요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7월 7일 맥아더는 “현재 적의 강력한 공격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완전 편성 4개 사단 이상의 병력과 공수연대, 3개의 탱크 대대 및 지원부대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대 보충이 이루어지면 상륙작전을 통한 적의 후방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을 최초로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과 소련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원조가 이루어진다면 전쟁은 예상치 못할 새로운 상황으로 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8)
여기에 덧붙여 이러한 병력동원에 따른 일본 방어의 공백을 위해 일본의 경찰예비대를 경보병사단 4개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였다.49)
7월 6일의 평택전투와 7~8일의 천안전투로 인해 금강 지역으로 후퇴한 미군은 12~14일 공주전투를 수행하였다. 특히 공주전투는 금강에 방어선을 편성해 전차를 앞세우고 남진하는 북한군 제4사단에 대한 방어전투였다.
공주전투로 인한 금강선 방어선 붕괴의 징조가 보이자 미군은 블루하츠 계획을 포기하였다.
이날이 바로 12일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의 상륙지역이 블루하츠 작전의 인천에서 레드하츠 작전의 포항으로 변경된 것이다.
상륙기동함대의 첩보기본요소(EEI, Essential Elements of Information)에서 포항 해안 지역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였다.50)
48) “MacArthur to DA”(1950. 7. 7), MA, RG 6, Box 9, General Order, January 1951, Folder 4, Korea No. 1 File: June - October 1950.
49) “CINCFE to DA”(1950. 7. 14), MA, RG 6, Box 9, General Order, January 1951, Folder 4, Korea No. 1 File: June - October 1950.
50) “Operation Plan 7-50, Annex B”(1950. 7. 12), MA, RG 15, Documents Donated by the General Public, Box. 54, Folder 1.
이 첩보를 기반으로 상륙작전 지역이 구체적으로 영일만으로 정해졌고, 상륙작전의 코드네임도 레드하츠(Operation Red Hearts)로 변경되었다. 제1기병사단의 상륙지역이 포항으로 선정된 이유는 부산으로의 상륙은 다른 부대와 군수지원 관계로 상 륙소요가 많아 불가능하였고, 중부지역으로의 이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항구가 발달하고 대전지역으로의 접근이 유리해야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안전을 위해서는 적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지역으로의 상륙이 필요하였다.
포항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에서 제1기병사단 인사참모부에서 예측한 초기 3일간의 상륙작전 시 인원 손실은 장교 128명과 사병 2,892명으로 추산되었고, 이 인원수의 충원을 요구하였다.
7월 14일 사단사령부는 기함 맥킨리호를 타고 출항하였다.
사단의 선발대는 항공편으로 한국으로 이동하였다.
제1기병사단의 상륙제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제1제대 : 사단사령부(게이 소장), 제8공병대대(-1개 중대), 제15병참중대, 제15 의무대대, 제13통신중대, 제27병기수리 중대, 제545헌병중대 등. 제2제대 : 제5기병연대(리첸버그 대령), 제8공병대대 A중대, 제13통신중대분견대, 제61포병연락반 등. 제3제대 : 제8기병연대(파머 대령), 제8공병대대 C중대, 제13통신중대분견대, 제99포병대대연락반 등. 제4제대 : 제16 정찰중대. 제5제대 : 사단 포병대(파머 준장), 제61야전포병대대, 제77야전포병대대, 제99 야전포병대대, 제92방공대대, 제8062상륙트럭중대 등. 제6제대 : 사단 상륙단(깁본스 중령), 제8공병대대 B, D중대, 제8군 상륙훈련중대, 제13공병대대 D중대, 제43공병대대 A중대 등. 이외에도 제7기병연대의 2.5톤 차량의 적재를 위해 2척의 일본 선박이 동원되었다.
7월 18일 기함인 마운트맥킨리 호가 포항에 상륙하고 지휘소를 포항동 근처에 설립하였다.
7월 19일 미 제8군은 미 제1기병사단에 영동-김천 지역으로의 이동을 지시하였다.
초기 인천지역에 미군을 상륙시켜 병참선을 차단하고, 반격하여 북한군을 고립・괴멸시키는 구상은 바로 블루하츠 작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7 인천상륙작전 초기 구상과 좌절: 블루하츠 작전에서 레드하츠 작전으로 329 월 22일 예정되었던 블루하츠 작전이 7월 12일 취소됨과 동시에 13일 블루하츠 작전은 레드하츠 작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러한 작전명의 변경은 물론 작전명칭도 다르게 부르고 있다.
특히 미국과 한국의 공간사에서도 이 상륙작전을 단순히 포항상륙작전이라고 불렀다. 상륙작전 목표지역을 포항으로 선정한 것은 부산지역 방어를 위하여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7월 초에 도일 제독과 7명의 선정된 요원이 제1기병사단의 공격 상륙작전을 맥아더의 참모들과 협의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 이 회의에서 맥아더는 인천이나 군산에 상륙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7월 9일까지 이 계획을 추진하던 중 한국에서의 다급한 지원요청 때문에 계획을 변경해야만 헸다.
육상 전투에서 계속 밀려 한반도의 마지막 보루인 부산마저 위급하게 되어 부산을 지키기 위하여 동해안의 다른 상륙지역을 찾아야 했다. 도일 제독은 포항이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을 제출하여 7월 10일 승인을 받았다.51)
작전명이 블루하츠에서 레드하츠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항지역의 상륙작전을 블루하츠로 부르는 오류도 공간사에서 다수 발견된다.52)
51) Malcolm W. Cagle, Frank A. Manson・신형식 역, 2003 앞의 책, 50~51쪽; 임성채, 2020 6・25전쟁과 한・미 해군작전, 해군본부, 273~281쪽
52) 임성채, 2020 위의 책, 275쪽
이러한 오류는 우선 1차 사료가 매우 제한되어 있고, 주요 사료에 대한 분석이 미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천지역으로의 상륙작전이 예정되어 있었던 미 제1기병사단은 대전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미 제24사단의 패배와 함께 작전이 변경되어 포항지역으로 상륙하였고, 이 사단은 충북 영동, 황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초기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은 미군 3개 사단으로 서울-금강 지역에서 전선의 축소와 반격을 구상하였지만, 북한군의 압도적인 병력 전개 상황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9월의 크로마이트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으로 변경되었다.
맺음말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미시적인 부분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진한 상태이다.
이 논문은 한국전쟁에서 중요한 전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초기 구상인 블루하츠(Operation Blue Hearts) 작전의 내용에 대해 1차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기존의 한국전쟁 관련 전사에 나타난 ‘블루하츠 작전’에 대한 내용은 매우 소략한 실정이다.
특히 이 작전이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알려진 인천상륙작전의 초기 원형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작전 내용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 논문은 ‘블루하츠 작전’에 대한 주요 사료를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인천지역에 대한 상륙작전 계획이었던 블루하츠 작전이 포항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인 ‘레드하츠(Red Hearts)’로 작전명이 바뀌었다는 것도 이 논문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블루하츠 작전이 크로마이트 작전의 초기 구상이자 일종의 예비적 작전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주요 사료로써 설명하였다.
본문에서 설명했지만 블루하츠 작전은 북한군의 남진을 막는 미 제24사단이 금강선에서 얼마나 지연작전을 전개해 주느냐에 그 실행과 성공여부가 달려 있었다.
즉 대전지역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잘 막아내고 이어 제1 기병사단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을 서울-금강선에 포위 섬멸하는 것이 작전의 큰 구상이었다.
그러나 7월 12일 공주전투에서 금강 방어선의 붕괴 조짐이 보이자 블루하츠 작전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상륙작전 지역이 포항으로 바뀌어 ‘레드하츠 작전’으로 변경되었다.
지만 대부분의 전사에서는 포항지역의 상륙작전을 ‘블루하츠 작전’으로 칭하기도 하고, 공식적인 작전명을 포항상륙작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오류는 블루하츠에 대한 자료적 접근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상륙작전을 통한 전세 변화 기회의 포착은 맥아더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섬 건너뛰기 작전(Island Hopping Operation)’ 의 전형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그 가운데 군수지원과 병력지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맥아더는 해상으로 지원되는 일본군의 군수 및 병력지원을 특유의 상륙작전으로 봉쇄하여 전쟁의 전반적인 형세를 변화시켰다.
바로 이러한 적의 병참선 차단 전략이 블루하츠 작전의 구상이었고, 전황상 바로 변경하였지만 이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기 인천상륙작전의 초기 구상인 블루하츠 작전을 분석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인식을 더 넓히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주 제 어 : 한국전쟁, 블루하츠 작전, 레드하츠 작전, 크로마이트 작전, 인천상륙작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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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arly concepts and setbacks of Inchon Landing Operation during the Korean War From Operation Blue Hearts to Operation Red Hearts
Lee Sang-ho
This paper examines the conception and evolution of Operation Blue Hearts, the initial plan for the Inchon landing, through primary sources, which is considered an important battlefield assessment of the Korean War. This paper unearthed and introduced primary sources on Operation Blue Hearts. For the first time, this thesis reveals details about the conception of Operation Blue Hearts, including the planning process of Operation Blue Hearts, and the fact that Operation Blue Hearts, which was planned as a landing in the Incheon area, was renamed Operation Red Hearts, a landing in Pohang. The execution and success of Operation Blue Hearts depended on the ability of the U.S. 24th Division to sustain a delaying action at the Kumgang Line to halt the North Korean Army’s southward advance. After the U.S. 24th and U.S. 25th Divisions halted the North Korean advance in the Daejon area, the plan was for the 1st Cavalry Division to land at Inchon and encircle the North Koreans at the Seoul-Kumgang Line. However, when the Kumgang Line showed signs of collapse at the Battle of Gongju on July 12, Operation Blue Hearts was canceled. Operation Blue Hearts was canceled and Operation Red Hearts was launched, shifting the landing area to Pohang. Pohang was chosen because it was accessible to the central region and had a developed port. Operation Red Hearts, which began on July 18, was successful, and the 1st Cavalry Division moved from Pohang to Yeongdong, on the central front. Operation Blue Hearts was called by MacArthur the prototype for the Chromite Operations. It was an application of MacArthur’s traditional tactic of island hopping to cut off enemy supply lines and thereby turn the tide of battle. By analyzing Operation Blue Hearts, the initial plan for the Inchon landings during the Korean War, I hope that this thesis will contribute to broadening the understanding of the war and popularizing the D-Day landings.
Key words : Korean War, Operation Blue Hearts, Operation Red Hearts, Chromite Operation, Inchon Landing
역사와 현실 129
투고일자 : 2023.08.02. 심사일자 : 2023.08.27. 게재확정일자 : 202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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