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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야기

고려시대 왕실과 민중의 밀교신앙-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를 중심으로 -/이석환(청운대).이태승(위덕대)

I. 들어가는 글

II. 고려불교의 밀교적 특징

III. 불교신앙과 밀교

IV. 나오는 글

요 약 문

본 논문에서는 고려불교에서 밀교적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을 살펴보고 신앙적인 측면에서의 전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특히 고려시대 다라니신앙을 석당과 같은 석조물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새로운 자료인 <제천 송계리 대불

정주 범자비>를 중심으로 다라니신앙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고려불교의 밀교적 특징은 고려왕실과 밀교의 관계, 고려불교의 밀교종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고려왕실에서는 태조왕건이 훈요십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선의 비보사상을 중요시하였으며, 밀교의식을 왕의 즉위식에 활용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밀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밀교종파인 신인종은 문두루작법을 통한 국난타개, 총지종은 다라니수행을 통한 개인과 국가의 문제 해결에 중심을 두었고, 왕실의 비호아래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고려시대 불교신앙과 밀교와의 관계는 법회와 다라니 신앙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고려시대에는 다수의 법회가 실행되었으며, 그 가운데 밀교교학과 의례를 중심으로 한 법회와 도량을 시행하였다.

다라니신앙에서는 다양한 범자석조물을 통해 신앙적 측면에서 다라니신앙이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

었다.

특히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는 다른 다라니 석조물과는 달리 수능엄주와 대보루각다라니를 함께 자연석에 새겼다는 특징이 있다.

본 논문은 선학들의 연구를 기반으로 고려시대 밀교의 특징을 살펴본 한계가 있지만,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의 내용과 특징을 알아본 성과가있다.

또한 다양한 방향에서 불교연구를 진행하여야 하며, 불교가 민생과 사회 안녕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로 확장해야 함을 알 수있었다.

주제어(7개)

고려불교, 밀교, 왕실, 민중, 신앙, 다라니,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

I. 들어가는 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념은 불교사상이 중심이 된다.

이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알 수 있다.

기존의 고려시대 밀교에 관한 연구는 불교학계와 사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불교학계에서는 정태혁, 서윤길이 중심이 되어 고려밀교의 사상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고, 사학계는 홍윤식, 김영태, 최병헌, 조명제등의 연구자가 출토유물과 역사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1)하였다.

1) 이와 같은 선학들의 연구는 본문에서 다수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고려밀교에 관한 연구는 197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이어졌지만, 현재는 추가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밀교전공자들이 인도와 티베트, 일본밀교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한국 밀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현실에서 기존 연구를 답습하지않고 새로운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에서 학술적인 접근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고려불교의 밀교적 양상을 새롭게 살펴본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고려왕실과 불교의 사이에서 밀교적 특징이 드러나는 것과 신

앙적 측면에서 밀교가 어떠한 양상을 관계성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따라서 본 논문은 고려시대 밀교사상의 전개를 총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국가의 통치체제로서 불교가 받아들여진 고려에서 밀교적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을 살펴보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전개되

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특히 고려시대 다라니신앙을 석당과 같은 석조물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새로운 자료인 제천 송계리 대불

정주 범자비의 내용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II. 고려불교의 밀교적 특징

1. 고려왕실과 밀교

고려는 불교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고려의 태조

인 왕건에게서 볼 수 있는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918년 11월에 팔관회를 개최하며 “짐은 덕이 없는데도 대업(大業)을 이루어낼 수 있었으니, 어찌 부처의 가르침[佛敎]에 의지하여 나라를 편안케 하지 않겠는가?2)”라고 하여 불교를 기반으로 국가를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불교와 왕건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훈요십조(訓要十條)이다.

이는 태조가 서거하기 전 후대 왕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방침을 설명한 것으로서 태조 26년(943) 4월 박술희(朴述希)에게 10가지의 유훈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 가운데 3가지가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서 제1조, 제2조, 제6조 이다.

이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고려는 제불이 보호하고 지켜주는 힘으로 건국했으며 사원을 무분별하게 건축하지 말

것, 연등회와 팔관회의 시행3)이다.

이와 같은 고려의 건국이념은 왕건의 지속적인 불사4)를 통해 알 수있는데, 이를 통하여 고려 왕실은 초기부터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2) 高麗史節要, 태조 1년 11월조.

3) 高麗史, 태조 26년 4월조.

4) 자세한 사항은 불교문화연구원(1986)에서 편찬한 한국밀교사상연구의 225-227쪽 참고.

하지만 고려의 불교가 도선의 비보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음양설과 재래신앙과의 관계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삼국시대 도입된 불교에 기존의 재래신앙이 흡수되었기 때문에 왕건의 건국이념은 불교사상이 중심이 된다5)고 할 수 있다.

고려의 건국과 도선은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왕건의 훈요 십조의 제2조에, 여러 사원들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수(山水)의 순응하고 거스르는 〈기운을〉

점쳐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원을 지으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왕업(王業)이 영원히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짐이 생각건대, 후세의 국왕, 공후(公侯), 후비(后妃) 및 조정의 신료들이 각각 ‘원당(願堂)’이라고 부르면서 혹여 추가로 짓는다면 곧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신라(新羅) 말엽에 경쟁적으로 탑[浮屠]을세워서 지덕을 훼손시켰기 때문에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있겠는가.6)라고 도선의 택지에 따라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도선에게 의탁하여 함부로 사원과 탑을 세우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제4조에는 “내가 삼한(三韓) 산천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서 우리나라 지맥(地脈)의 뿌리가 되고 대업을 만대(萬代)에 전할 땅이다.7)”라고 하며 풍수도참사상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있다.

이러한 도참사상에 대하여 박용운은 “도참이란 장차 닥쳐올 길흉 화복을 예언, 암시 혹은 약속하는 신비적, 미적 성격이 농후한 사상체계였는데, 이러한 관념이 풍수지리설과 결부되어 정치, 사회 및 일반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8)”

도선은 혜철(惠徹, 784-861)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9)고 한다.

5) 불교문화연구원 편(1986), 228.

6) 高麗史, 태조 26년 4월조.

7) 高麗史, 태조 26년 4월조.

8) 박용운(1985), 362-363.

9) 조선총독부 편(1976), 560.

혜철은 밀교를 중심으로 불교사상을 통일하고자 했던 사람10)으로서 도선은 혜철의 융합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선도 불교를 중심으로 도참과 음양오행을 융합시켜 밀교신앙을 중심으로 선을 토착화

시켰다.11)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왕건의 고려 건국의 이념과 왕도건설에도선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이다.

또한 도선의 사상적 연원이 혜철을 중심으로 한 밀교사상이 그 기틀이 된 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고려의 건

국이념도 밀교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고려의 왕실에서 받아들인 불교에서 밀교적 성격은 어떠한 부분에서 드러나는가?

이는 태조 왕건이 해적이 침입했을 때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이라는 고승을 초청하여 작법으로 해적을 물리쳤다12)는부분에서 알 수 있다.

서윤길은 이러한 밀교승려들의 인연을 통해 밀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신앙심도 깊어졌을 것13)이라고 한다.

왕건은 즉위 이후 다수의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이는 중생구제를 목표로 하는 밀교의 정신을 보여준 것14)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의 7대 왕인 목종은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来心秘密全身舍利寶箧印陀羅尼經)을 개판하여 인쇄하여 불탑에 공양하였고, 대몽항쟁시 대장경을 제작하여 국태민안을 도모하는 등 밀교와 관련된 부분이 많이 드러난다.

특히 충렬왕은 밀교대장경을 금사로 사경하여 간행하기도 한다.15)

10) 서윤길(2006), 359-360.

11) 서윤길(1975), 63-76.

12) 서윤길(1994), 157.

13) 서윤길(1994), 158.

14) 서윤길(1994), 150-161.

15) 서윤길(1994), 162-164.

이러한 측면은 고려 왕실에서 밀교경전을 출간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거나 밀교와 관련한 신앙생활을 했으

며, 실천적인 측면에서 밀교를 중요시 한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원종(元宗)과 충선왕(忠宣王)은 즉위식을 할 때 관정을 받기도 한다.

고려사의 원종 원년(1260) 4월 21일의 기사에서는 왕이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경녕전(慶寧殿)에서 관정(灌頂)의식을 행하고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며 강안전으로 행차하여 백관(百官)

의 하례를 받은 다음 황의(黃衣)를 입고 용상에 앉아 남면(南面)하였고, 속리대(束里大, 쉬리다이)와 파투(波透, 파투)는 강안전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았다.16)

라고 하여 즉위식을 거행할 때 관정의식을 한 후 보살계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충선왕 복위년(1308) 음력 8월 28일(양력 9월 13일) 기사에는 왕이 자포(紫袍)를 입고 강안전(康安殿)에서 관정도량(灌頂道場)을 열었으며,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왕위 계승을 아뢰었다.

이어 수레[輿]를 타고 수녕궁(壽寧宮)에 이르러 즉위하고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17)

라는 기록이 있다.

16) 高麗史, 원종 원년 4월조.

17) 高麗史, 충선왕 복위년 8월조.

이는 모두 관정의식을 행한 후 왕위에 오른 것으로서 밀교의 관정의식을 통해 세속적인 왕을 넘어 출세간적 법왕이 되고자하는 신앙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도 인종(仁宗) 5년(1127) 3월 상안전(常安殿)의 관정도량, 강종(康宗) 원년(1212) 음력 1월 선경전(宣慶殿)의 관정도량, 원종 10년(1269) 음력 12월 내원당(內願堂)의 관정도량, 충렬왕(忠烈王) 즉위년(1274) 음력 9월 본궐(本闕)의 관정도량 등 왕실이 중심이 되어 관정도량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미루어 본다면, 고려는 건국의 기본 사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그 중에서 도선을 위시로 한 밀교사상이 태조로부터 전해져 후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왕실과 불교의 관계에서 다른 종파의 교학도 기반이 되지만, 밀교경전의 호국적인 성격

과 밀교의례의 신이함을 바탕으로 고려조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기반으로서 밀교사상이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불교의 밀교종파

한국에 밀교를 가장 먼저 전래한 사람은 명랑(明朗)법사와 혜통(惠通)국사이다.

명랑은 당나라에서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 mūdra; 印契; 神印)을 전래하여 신인종(神印宗)을 개창하고, 혜통은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에게 수학한 후 총지종(摠持宗)을 개창하였다.

이러한 명랑과 혜통의 밀교전통은 고려로 이어졌다.

신인종의 전통은 앞서 태조가 해적을 물리침에 있어 광학과 대연의 작법의 힘을 빌린 것으로서, 명랑의 전통을 이어 받은 밀교승려가 중심이 된다.

이러한 도움으로 태조는 현성사(現聖寺)를 창건하여 신인종의 근본도량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종파의 한 사찰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종파를 개종한 것18)으로서 태조가 공인한 종파의 성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서윤길은 김영태의 의견에 동조하여 “고려시대 대부분의 종파들이 중국을 답습한 것에 반해, 신인종은 신라 명랑의 작법사상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고려적인 종파의 하나”19)라고 하여 한국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밀교종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8) 서윤길(2006), 640-641.

19) 서윤길(1994), 304.

이러한 신인종의 성립은 밀교의 신인작법(문두루작법; 무드라작법)을 통해 국난을 타개하고자 하는 사회적 요구에 대응한 것이다.

이러한 문두루도량은 국난이 일어났을 때 열린다.

문종(文宗) 28년(1074) 음력 7월 “동경(東京)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열어, 27일 동안 오랑캐의 침입이 없기를 빌었다.20)”와 숙종(肅宗) 6년(1101) 음력 4월 송충이의 피해가 병란이 일어날 것임을 예언한 태사(太史)가 이를 막기 위해 문두루도량과 관정도량을 열었던 일21), 예종(睿宗) 3년(1108) 음력 7월 여진의 격퇴를 빌기 위해 문두루도량과 사천왕도량을 열었던 일,22) 예종 4년(1109) 음력 4월 여진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빌기 위해 흥복사(興福寺)‧영명사(永明寺)‧장경사(長慶寺)‧금강사(金剛寺) 등의 사찰에서 문두루도량을 연 것,23)고종(高宗) 4년(1217) 음력 4월과 12월 거란과의 전쟁에서 문두루도량을 여는24) 등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문두루작법을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다.

20) 高麗史, 문종 28년 7월조.

21) 高麗史, 숙종 6년 4월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벌레가 소나무를 갉아 먹으니, 이는 병란

(兵亂)이 일어날 징조입니다. 마땅히 관정도량(灌頂道場),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보성도량(寶

星道場) 등의 도량과 노군(老君)의 부법(符法)을 실행하여 재앙을 물치치도록 기원[禳]해야 합니

다.”라고 하였다.”

22) 高麗史, 예종 3년 7월조. “동계(東界)에 사신을 보내 진정사(鎭靜寺)에서 문두루도량(文豆婁道

場)을, 비사문사(毗沙門寺)에서 사천왕도량(設四天王道場)을 열어 변방의 적을 물리쳐 달라고 빌

었다.”

23) 高麗史, 예종 4년 4월조.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허경(許慶)을 보내 평양(平壤) 목멱산(木

覓山)의 동명왕(東明王) 신사(神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흥복사(興福寺)‧영명사(永明寺)‧장경사(長

慶寺)‧금강사(金剛寺) 등의 절에서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열었다. 또 문하시중(門下侍中) 윤

관(尹瓘)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유인저(柳仁著)를 보내 창릉(昌陵)에서 제사를 지내 승전을

빌게 하였다.”

24) 高麗史, 고종 4년 4월조. “왕이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여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열었

다.”; 12월조 “왕이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여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열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시대에 신인종과 문두루작법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문두루도량이 전국의 사찰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신인종의 위세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현성사에서 재를 모시며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었던 것을 통해 왕이 신인종의 근본도량인 현성사와 왕실이 깊은 신앙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총지(摠持; 能持; 能遮)란 다라니(dhāranī; 陀羅尼)의 의역으로서 무량무변한 이치를 섭수하여 지녀 잃어버리지 않는 지혜를 말한다.

고려시대 총지종의 발전과 전개는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의 호국정책과 왕실의 비호를 통해 이루어진 도량과 법회에서 밀교의 입장에서 함께 홍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25)

이에 대하여 서윤길은 진언을 지송함으로써 개인적 치병을 목적으로 홍포되었으며 조유(祖猷)가 총지의 법력으로 대중의 병을 치유했기 때문이라고26) 한다.

하지만 총지종과 관련된 문헌이 없기 때문에 종파의 성립과 전개와 관련한 것은 알 수 없다.

단지 관계성을 중심으로 알아볼 수 밖에 없다.

총지종의 승려는 주력(呪力)을 기반으로 치병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비판을 받은 것 같다.

의종(毅宗) 11년 음력 8월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왕이 총지사(摠持寺)에 행차하여 주지(住持) 회정(懷正)을 불러 임정(林亭)을 유람하고는 기복시(祈福詩) 2수를 지어 재추(宰樞)와 시신(侍臣)에게 보여 주었다. 호종한 백관과 군졸은 숲 속 골짜기에서 노숙해야 하였으므로 자못한탄을 많이 하였다. 회정은 주술[呪噤]로 왕의 총애를 얻어 은총이 비할 바가 없었던지라 무릇 승도들로 벼슬이나 상을 받으려는 자들은 모두 그에게 아부하여 뇌물을 주었는데, 그 탐욕과 더러움이 염치가 없었다.27)

25) 불교문화연구원(1986), 288-289.

26) 서윤길(2004), 309.

27) 高麗史, 의종, 11년 8월조.

총지사의 주지였던 회정은 주술의 힘이 컸던 것 같다.

이를 바탕으로 의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를 이용하여 출세를 하려는 승려들이 많이 모였다.

이러한 문제가 총지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발생하여 기록을 하지 않았거나 기록이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진각국사 혜심은 출가 이전에 주송을 지니고 있었다28)는 점과 아사리는 다라니 수행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한 점29)에서 고려시대에 총지종이 하나의 밀교종파로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8) 조선총독부 편(1976), 462.

29) 서윤길(1994), 311-312.

III. 불교신앙과 밀교

1. 법회와 밀교

불교의례는 크게 종교의 본래 목적을 선양하는 것, 호국을 목적으로한 것, 재앙을 없애거나[消災] 제사[祈禳]와 신중(神衆)을 위한 것, 국가와 왕실의 치병(治病)이나 재앙을 없애거나[禳災] 복을 기원하거나[祈福]장수를 바라는[祝壽] 것 등 다양한 목적으로 법회와 도량30)이 열린다.

 

30) 서윤길(1977)은 「불교의 호국법회와 도량」에서 법회는 내면의 방향으로서 반야를 선양하는 데

중점을 두고, 도량은 불교를 교설하거나 불도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밀교에서는 기도와 수행을

하는 장소를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도량은 궁궐 안에서 설행된 국가적 불교행사를

일컫는다고 한다. 106쪽 참조.

그러나 고려시대 국가에서 주도하여 설행한 불교행사는 사회문제의 해결이나 국난의 극복, 집단결속을 위한 정치‧사회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경향성을 바탕으로 불교의례는 점차 밀교의례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

고려시대의 법회는 팔관회, 화엄법회, 무차대회, 구명도량, 연등회, 백좌인왕도량, 인왕회, 축수도량, 장경도량, 휘진도량, 금강광경도량, 소재도량, 반야도량, 오백나한재, 낙성도량, 제석도량, 마리지천도량, 경성회,경찬도량, 문두루도량, 불정도량, 불정심도량, 능엄도량, 천태종예참법,용왕도량, 우란분재, 사천왕도량, 약사도량, 공작명왕도량, 관정도량, 보살계도량, 아타파구신도량, 무능승도량, 보성도량, 제야도량, 존승법회,법화회, 승법문도량, 연생경도량, 신중도량, 담론법석, 지풍도량, 공덕천도량. 운우도량, 기우도량, 천병화엄신중도량, 오교법석, 오성도량, 대일왕도량, 영보도량, 기은도량, 담선법회, 성변기양법회, 용화회, 석복도량,수륙회, 왜적기양법석, 진병도량, 화엄삼매참도량, 문수회, 북제천병호국도량, 백일재, 을해법석, 기상앙복도량, 전경회, 축성법회, 연성법회, 만

다라도량 등 69종이 있었음이 고려사에 나타나고 있다.31)

그 중에서 밀교와 관련된 법회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법회와 호법신중을 위한 법회, 밀교의례와 관련된 법회, 기복을 위한 법회 등이 있다.

이외에도 다수의 법회가 열렸는데, 이는 고려시대 법회를 비롯한 불교 국가적인 행사로 진행한 것을 알 수 있다.32)

고려시대의 법회는 태조의 건국 이래로 국가의 의례로서 지속적으로진행되었다.

태조 원년 11월조의 기사에 의하면,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임어(臨御)하여 관람하고서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이라고 이름 하였다.

이때부터 매년 이를 상례(常例)로 삼았다.33)”라고 하여 팔관회를 매년 개최했다고 한다.

또한 태조 원년 11월에는 팔관회를 개최34)하고, 태조 23년 12월에는 신흥사를 중수한 후 하루종일 무차대회를 열고 상례화한다.35)

이러한 법회는 정기적 행사인 팔관회, 연등회, 보살계도량36)과 비정기적인 행사로서 수시로 이루어졌다.

31) 서윤길(1977b), 90.

32) 법회의 시행일과 횟수는 서윤길(1977)의 「고려의 호국법회와 도량」의 91-102쪽 참조.

33) 高麗史節要, 태조 1년 11월조.

34) 高麗史, 태조 원년 11월조.

35) 高麗史, 태조 23년 12월조.

36) 서윤길은 연등회는 매년 2월 15일, 팔관회는 매년 11월 15일 전후 3일간,보살계도량은 매년 6월,

인왕백고좌도량은 3년 또는 2년 1회 10월에 개설되었다고 한다. 서윤길(1977b), 102-103 참조.

이와 같은 법회의 밀교적 성격은 호국법회의 성격을 갖고 있는 점과 밀교계 경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 기복의 성격이 있는 점을 들 수있다.

이 중에서도 호국법회의 성격을 갖고 국가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 또는 仁王法會)을 들 수 있다.

인왕백고좌도량은 불설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佛說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이하인왕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것으로서 인왕경 「호국품」의

국토가 어지러워지고 파괴되고 겁탈되고 불태워지며 도적이 와서 나라를 파괴하려 할 때에 백 개의 불상, 보살상, 나한상을 모시고 백 비구대중과 4부대중, 7대중과 함께 백 명의 법사에게 반야바라밀을 강설해 주기를 청하고 들으며 ...(중략)... 국토가 어지러울 때 먼저 귀신이 어지럽고, 귀신이 어지러운 까닭에 만민이 어지러우니 적이 와서 나라를 겁탈하고 백성이 죽고 상하며 ...(중략)... 적이 많이 일어나느니라. 대왕이여 만약 불의 난, 물의 난, 바람의 난과 일체 모든 난에 또한 이경을 강독해야만 한다. ...(중략)... 다만 나라를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복도 지킬 수 있으니 ...(중략)... 이 경을 강론하도록 하라.37)

라는 내용을 기반으로 호국의 의미로 봉행되었다.

즉 인왕경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는 외호의 힘을 바탕으로 국가의 안녕을 구하기 위한 의

례였다.

또한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천왕품」(四天王品)에서 사천왕이 외적과 기근 역병 등의 재난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38)을 바탕으로 사천왕도량과 공덕천도량, 제석도량, 마리지천도량, 북제천병호국도량 등 하

늘과 관련된 도량을 연다.

37) 佛說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T8, 829a), “汝當受持般若波羅蜜. 當國土欲亂破壞劫燒賊來破國時.

當請百佛像百菩薩像百羅漢像. 百比丘衆. 四大衆七衆共聽請百法師講般若波羅蜜 ...(중략)... 國土亂

時先鬼神亂. 鬼神亂故萬民亂 賊來劫國百姓亡喪 ...(중략)... 多有賊起. 大王. 若火難水難風難一切諸

難。亦應講讀此經. ...(중략)... 不但護國亦有護福 ...(중략)... 亦講此經.”

38) 金光明經(T16, 341b), “汝等若能護念此經. 悉能消伏一切諸苦. 所謂怨賊饑饉疾疫. 若四部衆有能

受持讀誦此經. 汝等亦應勤心守護. 爲除衰惱施與安樂.”

이러한 제석신앙은 인도의 바라문교 사상을밀교가 받아들여 불교사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서 제석신앙이 한국에

들어와 한민족의 제천신앙과 어우러져 불교사상으로 국가의 안위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법회는 외적을 퇴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행된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거란, 여진, 몽고, 금, 왜적 등 국가의 경계에서 다수의 외적의 침략이 있었다.

그 중에는 국가의 대부분을 외적의 침략으로 빼앗겨 수도를 옮기기도 한다.

이러한 고려의 상황을 바탕으로 불교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고자 하는 법회와

도량이 설행된 것이다.

이외에도 국가적인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기우도량, 변재를 없애기 위한 도량, 기복을 위한 도량, 추복(追福)을 위한 법회 등 다양한 목적과 방식으로 법회가 개설되기도 한다.39)

39) 서윤길(2006), 529-535.

이러한 고려시대의 법회는 국가를 보호하고 안녕을 도모하기 위하여 정신적 통일의 방법론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분열된 시기의 국론을 통일하고 외적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부처와 경전의 힘으로 이겨내기 위하

여 국가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즉 외적인 재앙과 내적인 어려움을 극복 하기 위해 호국적 신앙으로서 불교행사를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밀교의

례화 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2. 고려시대의 다라니신앙

고려시대의 다라니신앙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이하 수능엄경) 제7권에 수록된 능엄신주(楞嚴神呪)40)를 기반으로 한다.

수능엄경은 신라시대 전해진 이후41) 위경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의천(義天)42)을 시작으로 유학자인 이자현(李資玄)을 거쳐 선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40) 수능엄주는 능엄신주(楞嚴神呪), 능엄주(楞嚴呪), 대불정주(大佛頂呪),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

尼)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수능엄주를 사용한다. 특히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범자

비를 지칭할 때에는 대불정주로 칭한다.

41) 수능엄경이 한국에 전해진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碑(智證大師寂

照之塔碑銘)에 수능엄경 4권의 내용이 보이고, 聞慶鳳巖寺靜眞大師塔에 ‘楞嚴’이라는 명칭이

보이는 것, 靜眞國師圓悟之塔碑銘幷序에 능엄을 지송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신라 선덕왕 시기

에 처음 도입된 것으로 추측한다. 자세한 사항은 염송운(2021)의 능엄경의 수행체계 연구즉의 제7장 제1절 258-259쪽 참고.

42) 의천은 敎觀兼修를 주장한 자신의 사상과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통불교적인 능엄경의 사상

이 유사했기 때문에 중국 유학 후부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자세한 사항은 염송운(2021)의

능엄경의 수행체계 연구 260쪽 참고.

특히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서 천태관련 주석서 11종을 포함하여 28종의 수능엄경 주석서를 정리43)하고 있는 점과 귀국 후 건덕전(乾德殿)에서 7일간 능엄도량44)을 개설한 것을 보면 의천이 수능엄경을 매우 중요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능엄경의 유통을 기반으로 고려에서는 수능엄주(首楞嚴呪)를 독송함으로써 신앙의 대상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경향을 김수연은 “고려시대 불교 의례 중 대불정독경(大佛頂讀經)과 별도로 수능엄 독경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불정독경은 수능엄경을 독송한 것이 아니라 능엄신주, 즉 백산개불정주(白傘蓋佛頂呪)만 독송했을 것이다.45)”

라고 하여 수능엄경 신앙과는 다른 수능엄주를 기반으로 한 다라니신앙이 의례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 신앙의 대상으로 수능엄주를 활용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능엄주는 범어 Śūraṅgama-samādhi-dhāraṇi의 의역으로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선정을 닦는데 도움이 되는 다라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밝은 지혜의 힘으로 호교(護敎)해주기를 바라는 진언46)이다.

 

43) 新編諸宗敎藏總錄(T55, 1169b-c), “玄贊二十卷(全寫經文隨科贊釋與六卷本大同), 玄贊六卷 (標

擧科節者略經文或三卷) 己上 惟慤述, 玄贊科三卷 非濁述, 顯贊鈔記十四卷 智圓述, 鈔十卷 亡名,

集要鈔三卷 亡名, 資中疏證眞鈔 六卷 洪敏述, 義疏注經二十卷 科二卷 單科一卷 己上 子璿述, 手鑑

五卷 道觀述, 搜玄鈔(或云搜微)十二卷 元約述, 釋要鈔六卷 懷遠述, 進退合明章一卷 道璘述, 疏十卷

谷響鈔五卷 科六卷 己上 智圓述, 單科一卷 曇永述, 注十卷 法朗述, 集解十卷 文句二卷 熏聞記五卷

說題一卷 說題科 一卷 已上 仁岳述, 說題通要二卷 慈梵述, 禮誦儀一卷 仁岳述, 道場修證儀一卷 淨

源述, 新解十卷 王氏述.”

44) 高麗史 권10, 宣宗 6年. 三月庚寅 設楞嚴道場于乾德殿七日.

45) 김수연(2004), 13.

46) 망월사본 진언집을 기반으로 하여 범자를 로마자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tadyathā oṁ

anale anale viśade viśade vera vajra dhare bandhani bandhani vajrapāņi phaṭ hūṁ

trūṁ phaṭ svāhā oṁ virude svāhā” 이를 번역하면, “주문으로 말하기를, 원하오니 광명(光明)이시여 광명이시여. 광취(光聚)이시여 광취이시여. 용감한 금강저로 저들을 주문으로 묶고,매달아 묶어 주옵소서. 용감한 금강수의 주문으로 깨뜨려 이기게 해주시옵소서. 훔 트룸! 깨뜨려 이김을 성취하게 해주시옵소서.”이다.

부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으로서 수능엄주의 염송이 신앙의례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러한 다라니신앙은 다라니집이나 다라니를 간행하거나 석조물(石造物)에 능엄신주를 각인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고려시대 능엄신주와 관련한 다라니신앙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 고려시대 능엄신주 다라니신앙의 형태47)

형태 연도 명칭 비고

다라니집 1365 일체여래대불정백산개총지

1375 일체여래대불정백산개총지

청석탑 범자 원주 보문사 청석탑 영월 무장리 청석탑

제주 수청사지 청석탑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석물 범자 1027이전 평안북도 용천군 성동리 불정사터

다라니석당 성동리 서문밖 다라니석당

해주 다라니석당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

목판첩장본 보물 제1129호

47) 옥나영(2018)의 「고려시대 대불정다라니 신앙과 석당 조성의 의미」의 106쪽 <표 1>을 재구성함.

위의 <표 1>을 살펴보면 다라니집이나 범자비 등을 통해 범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에 전해진 다라니가 한자음역과 함께 직접적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특히 탑과 비를 통해 능엄신주를 새김으로서 수능엄주가 다라니신앙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엄기표는 이러한 석탑의 탑신에 범어로 대불정주를 새긴 것을 통해 고려시대에 능엄신주가 널리 퍼져있다48)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다라니를 범어로 표시한 점이다.

이는 다라니를 독송하거나 사경을 할 때 원어를 그대로 발음하고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통은 당나라에서 이어진 것으로서 현장의 오종불번설(五種不飜說)의 첫 번째인 다라니와 같은 비밀스러운 것은 번역하지 않는다49)는 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원어 그대로 독송하려는 신앙형태는 이어지고 있는데,<표 1>에 마지막으로 제시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보물 제1129호 목판첩장본 대불정다라니이다.

장서각 소장본은 대불정다라니 계청문을 시작으로 수능엄주를 범자로 쓰고 범자 옆에 한자발음을 병기하는 형태로 간행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다라니를 새긴 석조물은 평안북도 용천군성동리 불정사터 다라니석당, 성동리 서문밖 다라니석당,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해주 다라니석당, 충북 제천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 평안남도청 소재 다라니석당(법수교 부재), 묘각사지 다라니석당(선죽교재), 광주광역시 십신사지 석비, 광평사지 광평사 석당으로 알려져 있다.50)

48) 엄기표(2011), 51-53.

49) 翻譯名義集(T54, 1055a), “唐奘法師論五種不翻. 一祕密故. 如陀羅尼.”

50) 자세한 현황은 옥나영(2018)의 113-114쪽 ‘<표 3> 현존 석당 일람표’ 참조

이 가운데 광주 십신사지 석비와 광평사 석당은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 나머지 6개는 수능엄주를 새긴 것이다.

이 가운데 성동리 다라니석당, 성동리 서문밖 다라니석당, 해주 다라니석당은 수능엄주를 범어로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중국의 다라니신앙51)을 고려에서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51) 중국의 요나라에서 금나라 시기 다수의 석당이 건립되었던 다라니신앙의 변화과정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수행을 중요시하는 수능엄경의 교학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수능엄주를 기반으로 다라니의 공덕에 대한 믿음

이 기반이 되어 다라니신앙이 강화되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이하‘대불정주 범자비’)’이다.52)

대불정주 범자비는 비의 첫 행에 대불정주(大佛頂呪)라고 쓰여 있어 수능엄주를 돋을새김 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불정주 범자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총 12행 가운데 7행에서 능엄주의 마지막 부분인 ‘옴 비루데 스바하’로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수능엄주는 끝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으며, 이후의 주문은 다른 다라니를 새겼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기존의 조사와 연구에서는 위와 같은 주문에 대한 불교학적인 세부적인 고찰이 없이 수능엄주의 연결선상에서 마무리하여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며, 범자비 주문에 대한 확인이나 해석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을 2020년에 필자가 비의 탁본과 원비를 조사하여 전문을 확인하고 판독하여 수능엄주만 적혀있지 않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대불정주 범자비의 전7행 이후의 제8행에서 제12행의 글자는 마모가 진행되어 판독이 어려웠다.

하지만 원본비와 탁본을 바탕으로 판독이 가능한 8-10행을 중심으로 자형을 확인한 결과 따타가따(tathāgatā)와

마니(maņi)의 반복된 부분과 제8행의 게송 시작부분의 글자가 ‘나마하사르바 따타가따남 옴’인 것을 알아내었다.

이를 바탕으로 실담집과 실담자기 및 기존의 진언관련 도록을 대조하여 문자의 유사성과 통일성을 기반으로 대보광박누각선주비밀다라니경(大寶廣博樓閣善住祕密陀羅尼經) 상권에 제시되어 있는 대보루각다라니(大寶樓閣陀羅尼)의 근본다라니(根本陀羅尼)53)가 각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54)

52) 옥나영(2018)은 대불정주 범자비를 정재규와 이갑봉의 연구를 바탕으로 장서각소장본과 대조

하여 능엄신주의 일부만 새겼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조각되어 있는 단락이 나누어져 있고,

행의 자수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는 올바르지 않은 추측이다.

53) 정식명칭은 ‘大寶廣博樓閣善住祕密根本陀羅尼’이다.

54) 제천시(2020), 13-15.

대보루각다라니는 현재 많이 지송되지는 않지만 밀교의식과 수행에는 활용되었다고 전해진다.55)

특히 경전에서 근본다라니56)는 무상보리를얻고 중생을 구제하며 모든 죄업에서 벗어날 수 있고, 청정한 몸을 얻을

수 있다57)고 한다.

이 다라니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다라니를 들으면 모든악취에서 벗어나고 일체제불에게 공양 받으며, 불퇴전의 무상정각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다라니의 위신력으로 무량한 선근을 기르고 무량한 복을 얻을 수 있다58)고 하기 때문에 왕실을 비롯한 일반대중에게이르기까지 신앙과 수행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5) 현재 전승되는 念佛作法에 대보루각다라니가 기재되어 있다.

56) 大寶廣博樓閣善住祕密陀羅尼經(T19, 624a), “曩莫薩嚩怛他蘖多南唵尾捕攞蘖陛麼抳鉢囉陛怛他

多儞捺捨寧麼抳麼抳蘇鉢囉陛尾麼黎娑蘖囉儼鼻㘑吽吽入嚩攞入嚩攞沒馱尾盧枳帝麌呬夜地瑟恥合

多蘖陛娑嚩訶.” 이를 로마자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Namaḥ sarva-tathāgatānāṁ, oṁ vipula-

garbhe maņi-prabhe tathāgata-nidarśane maņi maņi suprabhe vimale sagara-

gambhīre hūṁ hūṁ jvale jvale buddha-vilokite guhyādhiṣṭhita-garbhe svāhā.”(“일체

여래께 머리 숙여 귀의합니다. 광박장(廣藏博)에, 보주광(寶珠光)에, 여래의 교시(敎示)여. 보주

(寶珠)여 보주여 묘한 광명이여, 더러움이 없는 곳에 바다와 같이 깊은 미묘함에. 훔 훔! 방광

(放光)이여 방광이여 제불의 관조에. 비밀가지장에 상서롭기를. 스바하.”)

57) 大寶廣博樓閣善住祕密陀羅尼經(T19, 624a), “此陀羅尼能成就無上菩提. 若有受持能除一切罪業.

身得清淨.”

58) 大寶廣博樓閣善住祕密陀羅尼經(T19, 624b), “若纔聞此陀羅尼. 除滅一切惡趣. 纔憶念此陀羅尼

者。則爲以諸微妙香華塗香粖香. 供養十方一切諸佛。若能纔誦即得不退轉無上正覺. 乃至百劫千劫百千

劫. 一切如來不能讃歎盡其功能. 此陀羅尼有大威力. 一切諸魔終不能作其障礙. 一切冤家惡友鬼神藥

叉羅刹人非人等不得其便. 増長無量善根. 若纔念此陀羅尼者. 獲福無量.”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는 기존의 고려시대 범자 석조물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존의 석조물에는 수능엄주나 불정존승다라니가 각각 조각되어 있지만, 대불정주 범자비는 수능엄주와 대보루각다라니가 함께 있다는 점이다.

대보루각다라니가 언제 얼마나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수행이나 다라니신앙의 방법으로 신행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다라니의 성격을 바탕으로 호신(護身)과 기복(祈福)적인 측면에서 대중들이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불정주 범자비는 기존의 다른 석당과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것은 비의 외형에서 나타나는데, 자연석에 범자를 새긴 후 떼어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석당이나 비석처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보다는 지방의 유력자와 신도의 원력으로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수능엄주와 대보루각다라니를 새겨 넣은 이유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석재에 수능엄주와 대보루각다라니를 조각한 것은 당시 고려에서는 다라니의 힘에 의지하는 다라니신앙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불정주 범자비는 불교사상사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IV. 나오는 글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세워진 나라이다. 이는 태조대부터 이어진 것 으로서 국난이 많았던 고려에서는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위해 불교와 부처의 힘을 활용하여 사상적인 통일을 이루고자하였다.

본 논문은 이러한 고려의 불교에서 밀교적 요소를 찾아본 것이다.

특히 건국의 주체이자 통치자인 왕11)실을 중심으로 밀교와의 관계성을 살펴보고, 고려불교의 밀교종파의 특징을 알아보았다.

그 결과 고려왕실은 태조의 건국이념으로서 불교의 활용과 도선의 비보사상을 비롯하여 국난극복과 왕의 즉위식에 밀교의식을 활용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밀교의 의례와 사상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 밀교종파는 신인종과 총지종이 있는데, 수인을 중심으로 한 신인종의 문두루작법을 통한 국난타개, 진언을 중심으로 한 총지종의 다라니 수행을 통해 국가와 개인의 문제 해결에 중심을 두고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오랜 기간 각종파의 특징을 유지하였다.

이어서 고려시대 불교신앙과 밀교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먼저 고려시대에 설행된 법회를 중심으로 밀교와의 관계를 알아보고, 다라니신앙을 중심으로 신앙적인 측면에서 밀교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 지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법회를 설행함에 있어 밀교교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과 다양한 밀교도량과 재가 국가행사로서 자리 잡고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라니신앙에서는 다양한 범자 석조물이 만들어져 신앙생활로서 다라니신앙이 민중에게 널리 유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는 수능엄주와 함께 기존의 다라니 석당에서 보이지 않는 대보루각다라니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불교, 특히 고려시대 불교는 호국불교라고 한다.

고려시대 국가와 왕실이 중심이 되어 설행한 법회를 살펴보면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활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사상을 통일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불교연구도 필요하며, 불교가 민생과 사회 안녕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로 확장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측면은 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본 논문을 통해 고려시대 밀교의 역할에 대하여 살펴보았지만,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은 한계로 선학들의 연구결과를 재인용하여 고려시대 밀교의 특징을 살펴보았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제천 송계리 대불정주 범자비라는 자료에서 확인한 다라니를 통해 기존과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을 찾아내었다는 성과가 있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하나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방향에서 불교연구를 진행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 할 수 있다.

부록 :생략 (첨부 논문파일참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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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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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신수대장경텍스트 데이터베이스: https://21dzk.l.u-tokyo.ac.jp/SAT/index_en.html

<Abstract>

Esoteric Buddhism of the Royal family and the People in the Goryeo Dynasty

- Mainly Focused on the Sanskrit stele of Mahāpratyaṅgirā dhāraṇī in Jecheon Songgyeri -

Lee, Sukhwan (Lecturer Chungwoon University)

Lee, Taeseung(Professor Uiduk University)

In this paper, we looked at the part of where the Esoteric Buddhism

character appeared in Buddhism in Goryeo Dynasty, and investigated

how it was developed in the religious aspect. In particular, the

characteristics of the Dhāraņī religion during the Goryeo Dynasty were

investigated, especially focusing on the new material Sanskrit stele of

Mahāpratyaṅgirā dhāraṇī in Jecheon Songgyeri, focusing on stone

structur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oyal family of Goryeo Dynasty and

Esoteric Buddhism is associated to esotericism in various fields, such as

the use of esoteric rituals in a coronation and the Wang-Ken’s Ten

Royal Decree (訓要十條). The esoteric sects of Goryeo Buddhism was

maintained for a long time by the royal family’s patronage of Sininjong

(神印宗; Mudra sects) and Chongjijong (摠持宗; Dhāraņī sects) with the

power of Esoteric Buddhism to solve the national problem.

During the Goryeo Dynasty, Esoteric Buddhism and rituals were used

in various categories. The Dhāraņī faith is made by various Sanskrit

steles, and it can be seen that the Dhāraņī faith was widely

disseminated. In particular, the Sanskrit stele of Mahāpratyaṅgirā

dhāraṇī in Jecheon Songgyeri is carved with Mahāpratyaṅgirā dhāraṇī

and Daeburugak (大寶樓閣) dhāraṇī into natural stone.

Although this paper re-examined the Esoteric Buddhism in Goryeo

Dynasty based on the research of the previous scholars, it has achieved

the result of identifying the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Sanskrit

stele of Mahāpratyaṅgirā dhāraṇī in Jecheon Songgyeri. Furthermore, we

also realized that the related studies should be conducted from various

directions and should be expanded to include research on how

Buddhism has played a role in people’s lives and social well-being.

Keywords : Buddhism in Goryeo Dynasty, Esoteric Buddhism, Royal family, Popular, Faith, Dhāraņī,

Sanskrit stele of Mahāpratyaṅgirā dhāraṇī in Jecheon Songgyeri

논문투고일: 2023. 7. 15. 심사완료일: 2023. 11. 03. 게재확정일: 2023. 11. 12.

한국불교학제108집(2023.11)

DOI URL http://dx.doi.org/10.22255/JKABS.1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