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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포스트휴먼 시대, 이타성의 신학과 윤리학을 위한 서설/이상철.크리스챤아카데미

 1. 시작하며

 

이타성2)에 대한 학제간 연구가 활발하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3)가 진화생물학 차원에서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제공한 이래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 래된 질문이 근래에 다시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뇌과학과 인지과학 분야로까지 영역이 확장 되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연과학과 ‘신학/인문학’ 사이를 중재하고 대화하는 책 출판 과 연구과제가 요즘 성황이다.4)

 

   1) 본고는 필자의 두 원고, “포스트휴먼 시대, 이타성의 신학과 윤리학을 위한 서설”(「신학사상 198」, 2022, 9-41)과 “지금 여기서 종교와 과학을 논해야하는 신학적 이유와 윤리적 관전법”(2025년 한신 대 종교와과학 센터 콜로키움: ‘두 지혜의 전승: 과학과 종교’, 2025. 3. 11)을 수정 후 통합하여 본 학술대회에 맞춰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2) 이타성(alterity)은 누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열려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뇌과 학과 인지과학, 사회생물학에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의 법칙을 찾아가면서 오늘날 이타 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분야 이타성 논의는 인간의 본성을 둘러싼 논의, 즉 인간은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를 둘러싼 오래된 질문과 연관되는데 이는 윤리적 문제의식 으로 이어진다. 전통적 규범윤리학은 옳음(선)을 추구하는 의무론적 윤리학과 좋음(쾌)을 추구하는 목 적론적 윤리학으로 양분되는데, 이기성은 목적론적 윤리학, 이타성은 의무론적 윤리학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신학적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이타적 존재로 상정한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 로 창조된 존재로 기술되고, 하나님의 형상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서 구현되는데 예수 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이타성(alterity)을 윤리적, 인문학적 의제로 끌어 올린 저작으로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와 마크 테일러(Mark C. Taylor)의 작품을 추천한다. 레비나스의 Alteirity & Transcendence (1999)는 『타자성과 초월성』(김도형 외 옮김, 그 린비, 2020)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책에서 레비나스는 서구 역사에서 등장하는 전체성 (totality)의 역사를 거스르는 대안으로 이타성을 제안하고 있다. 테일러는 Alterity(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에서 서구 근현대 사상가들이 구사하는 이타성의 계보를 추적한다.

   3) 리처드 도킨스/홍영남·이상임 옮김, 『이기적 유전자』(서울: 을유문화사, 2018), 55-57. 도킨스는 <이 기적 유전자>에서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개체는 유전자의 보전과 전달, 증식을 위해 이타성을 띤다고 밝힌다. 개체의 이타적 행위의 이면에는 유전자의 이기적 동기가 숨어있는 셈이다. 하지만 도킨스의 이론은 혈연을 향한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는 데는 유효할지 몰라도 전적인 타자를 향한 이타적 행위 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4) 『이기적 유전자』 이후 인간의 이타성과 인간 본성에 대한 인문-과학서들이 잇따라 출판되고 있다. 에 드워드 윌슨/이한음 옮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서울:사이언스북스, 2011); 미트 리들리/신좌섭 옮 김, 『이타적 유전자』(서울: 사이언스북스, 2001)가 지난 세기에 이타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공했 다면, 근래에 같은 주제로 출판된 책으로 주목할 만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리처드 랭엄/이유 옮김, 『한없이 사악하고 더 없이 관대한: 인간 본성의 역설』(서울: 을유출판사, 2020); 뤼트허르 브레흐만/ 조현욱 옮김, 『휴먼카인드: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서울: 인플루엔셜, 2021); 김 학진, 『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고양: 갈매나무, 2017); 이경민 외, 『인간 너머의 인간: 포스트휴 먼 시대의 신, 인간, 자연』(고양: 사월의 책, 2021). 더불어 이타성 관련 인문/신학 분야 최근 논문은  다음을 참조하라. 전철, “이타주의에 대한 신학적 연구,” 『신학사상』 184 (2019/봄), 119-142; 박숭인, “신자유주의의 효율성과 효율적 이타주의,” 『신학논단』 95 (2019), 65-97; 차홍석, “이타성 에 대한 이기주의 해석 비판:홉스와 도킨스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5 (2018); 구효정, “종교 와 인간 행동의 상관성: 위험신호, 시간선호, 이타성을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연구』 19 (2018), 237-261.

 

본고는 포스트휴먼 상황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타성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학제 간 논의에 대한 필자의 짦은 회고담이라 할 수 있다. 신학 외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타성에 대한 비평을 도모하기 보다는 신학 내부, 특별히 에큐메니컬 역사에서 진행되어 왔던 타자해 석학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성찰하고, 그 논의 위에 포스트휴먼 시대 이타성 윤리를 조망하고 비평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2. 과학이 종교에 말을 건넬 때

 

종교와 과학 사이 학제간 대화는 어느 정도 상식이 되어가고 있지만 방식과 태도에 있어서 는 모호하고 정해진 바가 없다. 평소 만날 일이 거의 없는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특정 주제 를 놓고 본인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성과 논리를 통 해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과학과 초자연적인 전지전능한 존재를 믿으며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신앙의 도그마를 받아들이는 종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로 종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과학, 과학적 전제에 기반한 신학을 말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 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잡탕밥이 되기 쉽다. 이런 한계와 위험이 역설적으로 종교와 과학 사 이 대화를 요청하게 되는 이유이고, 양자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지혜를 빌려야 하는 까닭이 된다. 이 경우 대화의 전제는 상호개방과 신뢰이다.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기 보다는 양자의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고, 내게는 없는 상대방의 무엇이 내 안의 결핍을 보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대화의 기저에 깔려있어야 한다. 솔직히 필자의 경우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실질적으로 무슨 대 화가 가능할지 회의적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배움을 거듭하면서 양자간 공통의 대화 분모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을 주제로 한 논의들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최근 과학이 밝혀낸 생명의 신비에 대한 성과는 눈이 부시다. 종교 역시 수 천년 동안 생명에 대한 놀라운 성찰과 심오한 진리를 쌓아왔다. 돌이켜보면 과학과 종교는 따로 또 같이 생명의 비밀을 인류에게 풀어주었던 동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생명이라는 화두는 종교 와 과학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고, 근래 팬데믹과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그리고 포스트휴먼 시대를 통과하면서 다차원적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하는 과제로 떠올랐다. 특별히 물리학자로 서 우주의 신비에 접근하면서 생명일반의 원칙을 풀어내는 장회익과 최무영의 논의는 생명이 란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면서 생명의 이타성에 성찰을 자아낸다. 과학과 종교의 문제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묻는 질문과 겹친다. 범박하게 말하면 과학은 자연의 법칙과 연관되고, 종교는 문화와 관련이 있다. 문화에 방점을 두는 학자들은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므로 자연보다는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 는다고 믿는다. 반면 자연과학자들은 문화 또한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자연에 대한 반응과 적응이므로 인간은 결코 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장회익은 분리주의와 환원주의에 입각해 생명을 기계론과 생기론으로 나누는 전통적인 생물 학에 반기를 든다. 뿌리 깊은 동일자 중심의 서구적 사고가 유기체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과학 과 종교간 대화를 가로막고 있고, 그것이 생명과 우주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한다고 장교수는 비판하면서 ‘온생명’에 대한 주장을 피력한다. 생명이 하나하나의 생명체, 예컨대, 세포나 토끼 한 마리 또는 사람 한 사람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사실이다.

이러한 생명체들은 모두 ‘온생명’이라 불릴 더 큰 체계 안에서 그것의 유기적 일부로 작용할 때 에 생명으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지 그것 자체로서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5)

 

장회익은 하나하나의 생명체를 ‘낱생명’이라 부르면서 지금까지 인간은 생명을 다룰 때 개 체 중심의 ‘낱생명’에만 집중하고 그들끼리 관계에만 주목하는 우를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온 생명’은 보다 근원적인 관계의 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화엄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많 은 구슬들로 연결된 그물인 인드라망을 연상시킨다.

하늘을 뒤덮은 촘촘한 그물의 가로줄과 세로줄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구슬이 달려있다.

그물은 우주를 상징하니까 수많은 구슬들이 천 체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바람이 불어 출렁이면 그물에 달려있는 구슬들이 각양각색의 소리 를 내면서 합주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즉 우주와 개인이 궁극적으로 같 다는 진리가 깔려있다.

이는 당연히 인간과 세계를 유기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장회익은 “자연과 인간은 대립되는 대립이 아니라 이들이 합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지는 온생명의 한 부분임”6)을 강조한다.

‘온생명’은 40억 년 전에 태양-지구계 를 바탕으로 태어나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해 온 ‘우주사적 사건’7)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19-20세기 인간의 역사가 이를 역행하면서 ‘온생명’의 질서를 거슬렀고 그로 인 해 지구 온난화와 생물의 멸종 같은 병리적 증상이 등장했다고 장회익은 비판한다.

최무영은 생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섯 가지 중요한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8)

최교수가 생명현상을 정보의 의미와 지평의 확장으로 이해한다는 점은 특별한 분석이다.

최교 수에 의하면 생명은 궁극적 실재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복잡계 속에 존재하며, 그것은 개 체들간의 협동현상에 의한 떠오름(emergence)의 결과다.

그는 진화를 억겁의 시간 속에서 환 경과 정보의 교류를 통해 (집단의) 변이와 선택이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한 후에 단일성에서 현재와 같은 다양성으로 발전하는 것이 놀라운 사실임을 강조한다.9)

필자는 장회익 교수와 최무영 교수의 생명현상에 대한 발언을 들으면서 다윈이 『종의 기원』 마지막 문단에서 남긴 말이 떠올랐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마지막 문장에서 생명현상의 핵 심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고 있다.10)

 

    5) 장회익, 『장회익의 자연철학강의』(서울: 청림출판, 2019), 381.

    6) Ibid., 423.

    7) Ibid., 425.

    8) ① 짜임새: 성충이 되는 과정을 보면 설계도처럼 짜임새가 있고 단계마다 특징적인 모습이 있어야한 다,

        ②대사: 생명체가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과정,

        ③ 번식: 세대 사이 에서 유전 전보 전달,

        ④ 환경변화에 응답: 환경과 생명체 사이 정보 교류, 반응,

        ⓹ 진화 - 최무영,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서울: 책갈피, 2009) 중 23강 “생명현상의 이해”(471-484)을 참조하라.

    9) “생명의 속성은 모두 정보의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물리학자 입장에서 보면 생물계는 ‘복잡계’라 할 수 있다. 복잡계는 많은 구성 요소(정보)들이 얽히고 서로 적절하게 상호작용을 하다가 마침내 전체 집단의 성질이 새로운 무엇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원칙이 생명현상 안에 깃들어 있고 그 과정에서 구성원 사이의 협동현상이 생명을 가능하게 한다.”-최무영, “지구 속의 인간: 과학 과 신학의 관점에서,” 「기독교사상」(통권 786호, 2024. 06), 154.

     10) 찰스 다윈/장대익 옮김, 『종의 기원』(서울: 사이언스 북스, 2019), 650.

 

아주 단순했던 최초의 생명에 여러 가지 정보가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투입되면서 생 명은 한계가 없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형태로 변해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다윈은 이런 생명의 진화를 장엄하다고 하면서 최종 결론짓는다.

나는 『종의 기원』 마지막에서 한 다윈의 최종진술이 그 어떤 신앙고백보다 숭고하고 경이롭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생명에 투입되는 여 러 가지 정보에는 유전자의 힘도 물론 포함되겠으나 그것만으로 설명 안 되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명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신학적, 인문적 논의의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결론적으로 생명이란 하나하나의 ‘낱생명’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게 묶여진 ‘온생명’으로 존재한다.

개인들끼리의 갈등과 투쟁, 최종적인 승리를 향해 달리는 근대적 변증 법적 논리가 아니라 전체적인 상생과 울림과 조화가 궁극적인 생명의 원리이다.

생명을 이렇 게 이해하게 되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에 대한 태도를 요구받게 된다. ‘낱생명’인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생명’인 나와 대면한 후에 전체생명을 의식하는 이타성의 주체로 거듭나야 작금의 문명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 종교를 향해 던질 수 있는 물음이자 제안이다. 그렇다면 종교는 과학이 던지는 의견에 대해 어떤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까?

 

3. 과학과 대화하는 신학-에큐메니컬 신학의 관점에서

 

근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갈등적이지 않았다.

과학은 신의 존재양태를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제시하였고 종교는 이를 받아 자연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변증하였다. 르네상스를 거치고 근대가 시작되면서 지동설, 진화론 등 물리학과 생물학의 비 약적 발전은 자연신학의 폭과 깊이를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법도 한데 불행하게도 그때부 터 종교와 과학 사이 적과의 동침이 시작되었다.

근대 이후 펼쳐진 종교와 과학 사이 긴장과 갈등은 막스 베버가 정의했던 ‘가치영역의 분 화’ 혹은 ‘주술로부터 해방된 근대’ 라는 프레임으로 볼 때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래서 하버마 스는 근대성을 설명하면서 ‘학습과정의 불가역성’이라는 말을 썼다.

한번 고양된 의식의 지평 은 절대 뒤로 회귀하지 않는다 이성의 발전와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증강된 인간의 사고는 종 교와 과학을 더 이상 낭만적인 하나의 통일체로 놔두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근대성의 당연 한 귀결이었다. 근대의 발전으로 인해 벌어지기 시작한 종교와 과학의 간극은 최근에 이르러 과학계에서는 리처드 도킨스로 상징되는 ‘과학적 무신론’으로 정점을 찍은 듯하고, 종교계에서는 ‘창조과학’ 과 ‘지적설계론’이 신학의 영토를 고수면서 과학과 비타협하는 위치에 있다.

과학은 종교를 향 해 증명과 실험이 생략된 망상이라고 꼬집고, (당신들이 지니는) 종교적 확신이 역사의 발전과 정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과 학살을 자행했는지를 지적하면서 무신론으로 나간다.

반면, 종교 는 과학이 발전했음에도 여전히 해결 못하는 생명과 인간 인식의 문제, 사후생에 대한 과학의 무지를 비판하면서 나름의 (종교적)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돌이켜보면 과학과 종교 사이 갈등과 대화의 역사는 신학사의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것은 신앙과 이성, 초월과 내재, 계시와 신비로 대변되는 그리스도교 변증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그 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저런 시행착오들이 있으나 다행히 양자 사이의 분리와 대립보다는 대화 와 종합으로 신학적 지혜를 모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어 록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11)는 과학과 종교 사이 관 계를 고민하는 신학도들에게 많은 영감을 선사한다.

 

   11)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 Albert Einstein, Science, Philosophy and Religion: A Symposium (New York: Conference on Science Philosophy and Religion in Their Relation to the Democratic Way of Life, Inc., 1941), chapter 13.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신앙 없는 과학은 위험하고, 과학 없는 신앙은 맹목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접하고 에큐 메니컬 신학과 운동이 떠올랐다.

에큐메니컬(ecumenical)은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하였는데 ‘살 만한 땅’을 뜻한다.

오이쿠메네의 어근은 ‘오이코스(oikos, 집)’이다.

집은 삶의 필수조건이고 공동 체의 기본단위다.

‘오이쿠메네’ 안에는 어원상 ‘살림’이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오이쿠메네’는 ‘죽임의 문화에서 살림의 문화 로! ’ 라는 뜻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볼 때 에큐메니컬 신학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향하고, 그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컬 신학운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발생하는 인간 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종교와 과학 등 피조세계 전체를 포괄한다.

이런 이유 에서 에큐메니컬 신학자 채수일은 ‘신학은 본질적으로 에큐메니컬 하든지 아니면 신학이 아니 다’12)라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

에큐메니컬 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대화’다. 중요한 것은 에큐메니컬 역사 에서 진행되어 왔던 대화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인데, 그것은 한마디로 대화의 결과보다 대화 자체의 중요성을 천명했다는 사실이다.

대화의 목적을 흔히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 리 만나 어떤 합의와 극적인 타결을 모색하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는데, 에큐메니컬 대화운동 은 그것에 방점이 있지 않다.

대화 차제가 에큐메니컬 신학 운동의 근거이자 수단이고, 대화 자체가 에큐메니컬 운동의 목적이다. 결론과 목적을 향해 나가는 대화가 아니라, 열린 결말과 물음과 과제를 안고 퇴장하는 대화,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대화, 봉합과 해결이 아닌 틈 과 균열을 일으키는 대화를 도모하는 것이 에큐메니컬 대화운동의 특징이었고, 그것은 종교와 과학을 놓고 진행되어 왔던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에도 고스란히 베어 있다.13)

 

     12) 채수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2), 10.

     13) 배현주, “지구 속의 인간: 과학과 신학의 관점에서,” 「기독교사상」 786 (2024) 중 157~164쪽에 에 큐메니컬 운동에서 진행되어 왔던 ‘과학과 종교’간 대화의 여정이 소개되어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대화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대화할 수 있는 모멘텀을 충실히 제공할 뿐 이다. 그 이후의 과제는 종교와 과학 대화에 참여했던 참가자들의 몫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종교와 과학을 둘러싼 에큐메니컬 대화모임에 참여해 얻은 성찰과 깨달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적용하고 그 결과를 다시 가지고 들어와 대화를 이어간 다.

이런 과정을 거듭하면서 종교와 과학 사이 간극과 오해는 조금씩 좁혀지고 해소될 것이 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지 식의 밋밋하고 납작한 내용의 대화가 에큐메니컬 운동의 정신이라는 곡해가 그것이다.

무 엇보다 중요한 에큐메니컬 대화의 기본은 각각의 입장과 언어, 본인의 역사와 서사를 가진 사 람들이 대화의 공간으로 모여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컬 운동의 실례로서 ‘종교와 과학’ 대화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다음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종교인들은 본인의 입장에서 신과 자연에 대한 언어와 사유, 마찬가지로 과학자는 자기들의 개념과 생각을 장착한 채 대화의 테이블로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컬 대화의 중요한 원칙은 각각의 충만한 서사들에 대한 경청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약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근본 사유를 존중하고 배려할 때, 우리의 신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다면, ‘창조과학’ 같이 종교를 위해 과학을 변증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과학적 무신론’이 종교를 비판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일이 얼마나 비극적 인 것인지, 그리고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를 신학적으로 정죄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 을 얼마나 협소하고 궁색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필자는 에큐메니컬 신 학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언급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종교와 과학을 바라보는 윤리적 입장, 특별히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하여 유념해야 할 기독교 윤리 적 관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4. 포스트휴먼 시대 기독교 윤리-이타성의 윤리 관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혹인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이 복잡하게 얽혀 전개되고 있다. 인간의 미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기획 아래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고, 인공지능, 게놈 프로젝트 등 SF 영화에 등장했던 소재들은 서서히 현실의 질서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 다.

포스트휴먼 세상이 유토피아가 될는지,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외되거나 도태되어 고통의 한복판으로 몰릴 것이고, 그 파장이 종전보다 광범위하고 상흔 또한 깊을 것이라는 파국의 전망은 그것의 진위여부를 떠나 이미 번져버린 포스트휴먼 묵시록이 되어버렸다.

포스트휴머니즘의 등장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피조물 인간이 뭐가 그 리 대단한 존재인지를 묻는 것이 이상한 질문이 아닌 것이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진시켰는데 구체적으로는 현실의 몸으로서 사이보그 등장이 그것이다.

사이보그는 기술의 도움으로 인간의 기능이 강화되고 도움을 받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전 통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생물학적 토대가 비생물학적 요소를 만나 확장되고 초월하여 혼종 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간학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14)

 

      14) 사이보그 관련 담론들은 다음 책들을 참조하라. 앤티 클락/신상규 옮김, 『내츄럴-본 사이보그』(파주: 아카넷, 2015); 도나 해러웨이/황희선 옮김,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 적 사유』(서울: 책세상, 2019); 유발 하라리/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파주:김영사, 2015); 크리스 그레이/석기용 옮김, 『사이보그 시티즌』 (파주: 김영사, 2016),

 

포스트휴먼의 도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것의 도래를 적극적으 로 끌어당기고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자 사이 어디선가 유보적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는 무리들도 있다.

현재 유통되는 포스트휴먼 관련 소문은 무성해 보이나 그렇다고 뚜렷한 진로 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가 갈리는 것은 그것을 견인하는 기술이 현재보다는 미래시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현재 맥락보다는 막연한 미래에 기술로 인 해 펼쳐질 신기루에 매달려 진행되는 포스트휴먼 담론은 윤리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대목이 이 다.

사이보그는 누구를 위한 존재이고, 포스트휴먼 논의는 누구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가?

혹 그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 사업가, 정책입안자들을 위한 포스트휴먼 아닌가.

사이보그에 관심을 갖고 그 개발에 대한 이슈를 계속 유지시키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말이다.

현재의 포스트 휴먼논의는 기술의 유토피아적 전망만을 근거로 움직이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나는 이 것이 포스트휴먼에 대한 정확한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역사 에서 현재시제가 아닌 미래에 방점을 찍고 앞만 보고 그것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지녔던 공통점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이 아니었던가.

이것은 푸코가 지녔던 문제의식과 겹친다.

푸코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지식권력, 국가권력, 제도권력, 종교권력에서 도태되고 지워진 존재들에 주목하였고,15) 권력에 의해 가려지고 잊혀 지고 제거된 자들을 ‘타자’라고 칭하면서 ‘타자의 윤리학’을 견인하였다.

윤리가 무엇인가, 라 는 질문에 여러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겠으나 현실에 존재하는 생명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지워진 흔적에 주목하는 것이 윤리의 첫 발자국이라 말한다면, 포스트휴먼 시대 속 윤리는 요 란한 포스트휴먼 담론과 기술담론 속에 가려진 목소리들과 사연으로 눈길을 돌려야 함은 마땅 하다.

기독교 윤리는 당대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고통에 주목한다.

본회퍼는 예수를 “타자를 위한 존재”16)로 정의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인 “교회는 타자를 위해 현존 할 때 교회가 된다”17)고 피력한 바 있다.

법과 제도와 권력과 종교로부터 지워진 타자와 함께 그들의 곁을 지켰던 예수의 삶을 기억하면서 따르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다.

본회퍼의 외침은 포스트휴먼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영감을 선사한다.

포스트 휴먼 시대에도 타자 들은 존재하고 그들이 마주하는 고통의 양상은 이전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풍경이라면 현재의 노동(직업)구조가 붕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리는 2012년 대만 홍하이정밀공업 회장의 발언, 즉 “100만 마리의 동물을 관리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공장에 로봇을 투입해야겠다”라는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18)

 

    15) 미셸 푸코/이정우 옮김, 『담론의 질서』 (서울: 새길, 1993), 11-54. 푸코는 특정 진리가 어떤 과정과 맥락을 거치면서 ‘진리’가 되었는지를 따지면서 실체중심의 진리관에 균열을 가한다. 진리가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권력에 의해 그것이 정의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리가 어 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진리로 구축되었는지를 따져가는 것이 푸코의 ‘계보학’이다. 푸코의 문제제 기는 포스트휴먼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하다. 온갖 첨단테크놀로지(지식권력)에 의해 정 당화 되고 있는 포스트휴먼 담론이 과연 정당한지 푸코식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16) 디트리히 본회퍼/손규태. 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711.

    17) Ibid., 713.

     18) 이택광 기획, 임민욱·홍세화 취재, 『임박한 파국: 슬라보예 지젝의 특별한 강의』(2012, 꾸리에) 2부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 중 “백만 마리 동물 관리”(58-60)

 

신자유주의를 추동하는 의식,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무서운 실용주의와 반휴머니즘이 얼마나 잔혹한지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30년 후 실현될 인간생명 연장을 논하기 이전에, 언 제 도래할지 모르는 유토피아를 꿈꾸기 이전에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포스트휴먼 논의에서 지금보다는 강하게 등장해야 할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측 가능한 종교와 윤리의 미래다.

죽음을 통제하고 관 리할 수 있게 된 시대에서 종교란?

인간의 내부를 부속품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된 기계인간에 게 필요한 윤리는 무엇인가?

과연 그날에도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 믿는 신을 향해 고백을 하고 기도를 할 수 있을지, 이것이 포스트 휴먼 시대를 맞이하는 종교적 윤 리적 위기의식이라 할 텐데 아직까지는 이 물음에 대해 뭐라 답하기에는 공부하고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5. 에필로그: 포스트휴먼 시대, 신학의 자리

 

기존의 신학이 신에 대한 담론이었다면, 포스트휴먼 시대 신학은 신학을 말하는 인간이 누 구인지에 대해 우선 묻는다.

그러면서 비인간존재, 자연, 사물로까지 논의를 확대해 나간다.

왜냐하면 종전의 정태적인 인간학으로는 현재의 복잡다단한 인간 현상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이런 이유로 포스트휴먼 시대 신학은 타자를 전제하고 이타성으로 나가는 운동으로 전 환된다.

그런데 곰곰이 회상해보면 신학의 역사는 늘 그래왔다.

일부 주류 상층부의 신학은 체제를 위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큰 틀의 역사와 지형에서 보면 경계와 범위, 권 력과 기득권, 도그마와 전통을 넘어서려 했던 신학운동은 꾸준히 이어져왔고, 그것은 항상 타 자적인 것을 지향하면서 이타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것이 종교일반의 원리가 아 닐까 싶다.

포스트휴먼시대의 신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을 포함한 다양하고 다층적인 입장과 언어들을 수용하는 신학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신학은 다종의 인간(들)의 가치가 과하게 돌출되지도 그렇다고 왜곡되거나 축소되지 않도록 작동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의 타자다움을 인정하고, 차이가 차별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예민한 신앙적 성찰이 필요하 다.

구약학자 김창주는 창세기 2장 7절에 대한 주석을 통해 포스트휴먼시대 신학적 인간학에 대한 단서를 남겼다.

그는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살아있는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는 구절에 주목하면서

“태초에 사람은 ‘땅의 흙’이라는 물질(material)과 ‘살아있는 호흡’이라는 비물질(immaterial)이 융합되어 생명체가 되었다. ‘땅의 흙’이 선형적 논리 구조를 대변한다면, ‘살아있는 호흡’은 비선형적 블록 논리를 상징한다. 그러니 사람은 대극적인 논리를 본성으로 삼은 채 온전한 하나(whole being)가 되 었다고 말할 수 있다.”19)

 

김교수는 지능형 기계나 인공지능에 양도할 수 없는 존엄과 본질, 그리고 고유한 영적인 면모가 창조시 인간에게 부여되었음을 말하고자 하였다.

이는 구약학자 로써 인공지능시대 신학적 인간학의 가능성과 유의미함을 피력하는 것으로 내게는 다가왔다.

결론적으로 포스트휴먼 시대에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이란 타자적인 것을 향한 관심과 배려, 나아가 이타적 행위를 전제로 함 은 물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은 타자를 위한 신학이고 타자와의 관계를 모색하는 신학 이다.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통해 타자성을 둘러싼 논의의 폭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한신대종교과학센터 학술대회 자료(25.4.8)

이상철_박사-포스트휴먼_시대_이타성의_신학과_윤리학을_위한_서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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