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Ⅱ. 편찬 배경과 불교계 동향
Ⅲ. 『염불보권문』의 구성과 내용
Ⅳ. 조선 후기 염불신앙의 확산
Ⅴ. 결론
Ⅰ. 서론
오늘날 한국불교의 신앙을 논하기 위해서는 조선 후기 정착해 현 대로 전해진 염불신앙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건 국되며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군자를 이상적 인간상으 로 삼아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 왕조의 사상적 토 대가 된 불교는 배척되고 사전을 몰수하거나 종파를 통합하는 등 지 속적으로 탄압한다.
그러나 조선에서 없애려 한 것은 불교의 사상과 교학이지 종교로서 신행의 전면 금지는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 1443년 한글 창제 이후 가장 먼저 『용비어천가』가 언 해본으로 번역되고, 1446년 소헌왕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최초의 한글 불경 『석보상절』이 왕실 주도로 제작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 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불교의 교학적 측면은 쇠퇴하였을지라도 종교 적 신앙은 유지되었고, 오히려 귀족 중심이던 불교가 신앙을 내세워 민간에 확산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 내적으로는 사 상의 변화가 일어나 조선 중기 이후 자리 잡은 삼문수행에도 영향을 미친다.
삼문이란 부처님 진리에 들어가는 세 가지 수행방법으로 선(禪) ‧ 교학(敎學) ‧염불(念佛)이다.
한국 불교사에서 삼문을 처음 제시한 사 람은 보조 지눌(普照智訥, 1158-1210)이다.
그러나 그의 비문에 쓰 인 삼문에 염불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후대 변화된 관점이다.
조선 초 기까지만 해도 염불은 선‧교보다 떨어지는 수행이거나 일심칭명(一 心稱名) 등 염불선 관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던 것이 조선 중기 이후 염불 자체를 독립된 수행으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고 삼문에 염 불이 포함되는가 하면, 선‧교와 함께 동등한 지위의 수행 방편에 올 라선다.
이 같은 인식의 변화 중심에는 조선 중기 이후 확대된 염불신앙이 존재한다.
왕족과 양반 중심이던 고려의 교학 불교와 달리 조선의 염 불신앙은 왕족과 양반, 서민을 막론하고 전 계층으로 확산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배척받던 조선 시대에 들어서서야 불교의 대중화가 이 루어진 것이다.
이 변화 초입에 제작된 것이 『염불보권문』(이하 『보권문』)이다.
서 책의 양식은 판본이며, 본문은 진서와 언해로 쓰여 있다.
진서 없이 언해로만 된 부분은 있어도 진서로만 쓰인 부분은 없는 것으로 보아 서책의 주 독자가 언문을 사용하는 이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1704년 용문사에서 초간본이 간행된 이래, 80년 동안 전국에서 6 번의 이본이 더 간행됐다.
제작 방법은 목판에 판각하여 인쇄했으니 대량 유포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유포의 주체가 누구든 간행 횟수 와 언문이라는 특징만 보아도 본 서책이 수요가 많았음을 알 수 있 으며, 다른 말로는 본서에 담긴 불교 사상이나 염불관이 민간에 널리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본문의 구성은 경론에서 약초한 염불 관련 부분을 1장에 두고, 2 장에서는 민가에 퍼져 있던 염불하여 왕생한 이야기나 살아서 면액(免 厄) 한 이야기를 실었다.
3장에는 염불 작법 순서가 실려 있으니, 한 권에서 염불에 대한 교학과 영험 사례, 의식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
한편 『보권문』 이전에도 염불 서적은 많이 간행되었으나, 본서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전과는 다른 염불관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전의 것은 주로 정토사상을 기반으로 한 유심 정토이거나 염불선 관점이 다.
그러나 『보권문』에는 극락을 실재하는 곳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염불의 공덕을 왕생 정토와 현재의 실제적 가피라는 두 가지 관점으 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염불관은 조선 후기 유행한 염불 자체에 영험과 가피가 있 다는 관점과 유사하다.
즉 본 서책이 조선 후기 염불관을 온전히 견인했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당시 변화하기 시작한 염불관을 적극적으로 홍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껏 발표된 염불 관련 연구 대다수는 염불선이나 정토 관점이고, 염불신앙과 염불서, 당시 사회현상을 연결해 변화 과정이 나 의미를 파악한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다.
『보권문』 관련한 연구도 불교사적 관점보다 국어국문학적 방언 연구와1) 언문 가사의 음운사 적 의미나 고찰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2)
서책을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로 김기종은 판본별 내용을 비교했고, 김도윤은 『삼문직지』와 비교해 구성과 행법과 내용을 분석했다.
한태 식(보광)은 서책에 인용된 내용의 출처를 밝히는데 중심을 두었다.3)
그러나 이상은 서책 자체를 중심으로 한 연구이고 당시 시대 상황과 염불신앙 확산의 유기적 관계를 연구한 사례는 드물다. 있더라도 「회 심가」나 「서왕가」와 같은 서책의 일부 내용에 한정한 것이 전부다.4)
1) 김영배 외 2인(1996); 이유기(2005), 213-248.
2) 장영길(1996), 81-112; 이옥희(2022), 505-537.
3) 김기종(2018), 149-181; 김도윤(가섭)(2023), 39-53; 한태식(보광)(2024), 121-159.
4) 김기종(2019), 1-29; 김기종(2020), 181-207.
이에 본 고에서는 『보권문』을 중심으로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 제 작 목적을 분석하고, 서책의 내용과 이후 확산한 염불신앙의 모습을 비교하여 변화 과정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현대 한국불 교 중심 신행으로 계승된 염불신앙의 의미를 파악하고 불교계에 남 겨진 과제와 발전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2장에서 제작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불교계 동향을 살피 고, 3장에서 『보권문』에 쓰인 구성과 내용을 살폈다. 4장에서 염불신 행의 확산이 가져온 조선 후기 불교계 변화의 모습을 네 가지 특징 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Ⅱ. 편찬 배경과 불교계 동향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숭유배불의 치국 방향을 설정하여 사전을 몰수하고 도첩제를 강화하여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환속시키는가 하 면 승과의 폐지와 시행을 반복한다.
태종 6년(1406) 불교계 공인된 종파가 11개였던 것이5) 이듬해 7개 종파로 축소되고,6) 세종 6년 (1424) 선‧ 교 양종으로 통합되었다.7)
이마저 조선 후기에는 종파의 구분마저 없어졌으니8) 조선의 불교는 교학과 사상의 구분도 잊은 채 통불교라는 무종파 시대 속에서 명맥만 이을 뿐이었다.
5) 『太宗實錄』 卷11, 太宗 6年 3月 27日 참고.
6) 『太宗實錄』 卷14, 太宗 7年 12月 2日 참고.
7) 『世宗實錄』 卷24, 世宗 6年 4月 5日 참고.
8) 16세기 중반 허응당 보우가 ‘判禪宗事都大禪師’로 임명되고, 동시대 인물인 수진이 ‘判 敎宗事都大師’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선‧교의 구분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 청허 휴정이 ‘判大華嚴宗師兼判大曹溪宗師’에 임명된 것을 미 루어 이 시기에는 선교가 통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정치사상으로 내세웠던 유교는 지배세력의 정치철학 이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질서의 기준은 제시할지언정 일반 백성들 의 정서적 문제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기에는 부족했다.
또 한 기도와 같은 신행이 없었기에 신앙으로서의 불교는 건재할 수 있 었고, 오히려 고려의 귀족불교에서 내려와 신앙으로서 민중에 전파되 는 계기를 맞는다.
여기에 더해 조선 중기 이후 발생한 임진‧병자의 양란과 승군의 활약은 불교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변란으로 민심은 흉흉해졌 고,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고인의 왕생 정토를 발원하기 위 해 사찰을 찾았다.
전쟁과 수탈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사후 펼쳐지 는 안락하고 풍요로운 정토는 삶의 희망이 되고, 어머니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대승 보살은 잠시라도 고단한 현실을 외면하게 하였으니 이상적 이론보다 현실적 신앙으로 더욱 존재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는 사찰이 더욱 심각하였으니 승군의 활약으로 인해 왜군은 본거지인 사찰을 적극적으로 훼손하였다. 임란 이후 훼 손된 사찰의 재건이 전국적으로 이어지고, 재건 불사와 함께 불상과 불화가 조성되었다.
이때를 같이하여 다수의 불서가 간행되었는데, 이 중에는 정토와 염불 서적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조선 시대 불서 편찬을 살펴보면 전기에는 유‧불 또는 선‧교 관 련 책이 많았으나, 중기 이후 선이나 교학 중심의 서책과 함께 정토 관련 서책과 염불의례집이 많이 간행되었다.9)
조선 중‧후기 정토와 염불 서적의 활발한 간행 이면에는 혼란한 정세 속에서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10)
변 란으로 많은 사상자와 유족이 생겨난 당시 사회에서, 수륙재와 생전 예수재 등 대형 의례를 통해 고혼 천도뿐 아니라 민심을 수습하고 사후에 갈 수 있는 이상 세계를 설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반감 시키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염불의식집 간행을 살펴보면 15세기 11본이던 것이 16세 기에는 46본, 17세기에는 60본, 18세기 17본으로 16-17세기에 집 중된다.11)
또한 대형 의례에서 사용되는 괘불 대다수가 17세기 이후 제작되고,12) 수륙재 등 고혼을 천도하는 의례가 마을 단위로 이루어 지며 양반과 서민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9) 정헌열(2019), 307.
10) 남희숙(2004), 98.
11) 남희숙(2004), 120.
12) 정명희(2019), 120.
16-17세기에 수륙재 등 대형 의례에 사용되는 전문 의례집이 주 로 간행됐다면, 18세기에는 간소한 집전용 의식집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혼자서도 염불할 수 있는 염불권장서가 간행된다.
허응 보우(虛應普雨, 1515-1565)가 편찬한 『권념요록』(1637년)이 나,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의 『정토보서』(1686년), 명연(明 衍, 17세기-18세기)의 『보권문』(1704년), 진허 팔관(振虛捌關, 18세 기 후반)의 『삼문직지』(1696년) 등이 그것이다.
이 서책들의 특징은 풍요롭고 행복이 가득한 정토를 설하고 이곳에 왕생하는 수행방법으 로 염불을 권장하고 있다.
한편 염불서 편찬의 불교 내적 배경에는 조선 중기 이후 자리 잡 은 삼문수행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삼문의 수행방법 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고려의 보조 지눌이다.
그러나 그의 비명에 쓰인 삼문은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경절문’13)으로 염불문은 포함 되어 있지 않았다.
염불문은 오히려 저자 논쟁이 있는 『염불요문』(念佛要門)에 언급되 어 있는데 해당 서책의 저자가 지눌이라는 의견과 지눌이 아니라는 의견이 현재까지도 팽팽히 진행되고 있다.14)
즉 당시 염불문은 있었을지라도 삼문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 후대에 경절문, 원돈문, 염불문으로 부처님 진리에 들어가는 삼문의 수행방법으로 적립된 것이다.15)
13) 「曹溪山修禪社佛日普炤國師碑銘」, “其勸人誦持 常以金剛經 立法演義 則意必六祖壇經 伸 以華嚴李論 大慧語錄 常羽翼 開門有三種 曰惺寂等持門 曰圓頓信解門 曰徑截門 依而修行 信入者多焉.”
14) 지눌의 저술이라는 입장은 국내에선 이종익과 일본의 오노겐묘(小野玄妙)와 마나모토 히로유키(源弘之)가 있고, 지눌의 저술이 아니라는 입장은 고익진, 권기종 등이 있다. 권동우(2013), 154 재인용.
15) 지눌의 삼문과 조선 후기의 삼문은 삼문이라는 커다란 범주만 같을 뿐 실제 깨달음 에 이르는 방법 제시의 관점에서는 상당 부분 다르다. 이종수(2010), 44-59 참고.
조선 중기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의 저술인 『편양당집』 에는 ‘경절문‧원돈문‧염불문’이 언급되어 있고, 언기의 스승인 청허 휴정(ㅐ淸虛休靜, 1520-1604)도 『심법요초』에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으로 참선문과 염불문을 함께 설하고 있다.
또한 참선자들을 위한 서 책 『선가귀감』 에도 “염불자 재구왈송 재심왈념 도송실념 어도무익” (염불자가 입으로 할 때 ‘송’이라하고, 마음으로 할 때 ‘념’이라한다. 입으로만 외우고 생각을 잃어버리면 도에는 아무 이익이 없다.)라 하 여 염불하는 마음가짐을 설하고 있으니, 적어도 휴정 이전에는 염불 이 불교 수행의 주요 방편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교학적으로 불교 사상 변화를 뒷받침할 사건이 발생한다.
1681년 불서를 가득 싣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향하 던 배가 임자도에 난파되어 배 안의 불서가 해안으로 떠밀려 왔다.
이 가운데 중국 청량 징관(淸凉澄觀, 738-839)의 『화엄경소초』(華嚴 經隨疏演義鈔)(이하 『화엄소초』)가 포함되었는데, 평림거사 섭기윤이 합본하여 가흥대장경에 수록한 화엄 논서이다.
『화엄소초』는 『화엄현 담』과 『화엄경연의초』(이하 『연의초』), 『화엄경소』를 합본한 것으로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이 모아 간행하고 화엄대법회를 열 었다.
징관의 소초는 『화엄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논서인 데, 조선 초기 『연의초』가 유실되어 당시에는 『화엄경소』만 전해지던 상황이다.16)
성총의 『화엄소초』 간행을 계기로 조선 후기 전국적인 화엄학의 중흥기가 시작된다.17)
주목할 점은 중흥의 계기를 만든 화엄 논서의 저자 징관의 사상이 다.
그는 일심을 화엄의 선과 연결하고, 화엄을 중심으로 유식과 천태 등의 제 교학과 유‧불‧도를 회통하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18)
그가 지 은 논서에는 이러한 사상이 담겨있으니, 숭유의 시대에 유교와 부딪히 지 않고 병립하려던 불교계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19)
16) 정하연(성엽)(2024), 357-358.
17) 조선 후기 성총이 간행한 징관의『화엄경소초』와 조선 후기 화엄학의 성행과 관련한 연구는 김용태(2012); 이종수(2015); 김자현(2023) 등에 의해 발표되었다.
18) 김자현(2023), 182.
19) 김용태(2012), 291.
일례로 징관은 법장의 42위이던 수행 계위에 신위(信位)를 더해 52위로 구분하여 ‘신(信)’을 강조한다.
「현수품」에 나오는 “믿음은 도의 근본이자 공덕의 어머니라, 온갖 선법을 길러내며 의심의 그물 끊 고 애착을 벗어나 위 없는 열반의 도 열어 보인다.20)”는 게송에 대해 징관은 “믿음으로 인해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정에서 벗어나 열반의 도를 열어 보인다”21)고 부연하였다.
즉 믿음을 강조하는 게송에 열반 이라는 구체적 결실을 덧붙인 것이다.
또한 혈육의 정을 끊고 출가하 는 불효의 죄로 여기는 관점에 대해, (불성을) 믿기 때문에 애정을 끊 고 출가하여 불도를 이룰 수 있는 효로 승화하여 해석했다.
이처럼 유교를 포섭한 징관의 사상이 효를 강조하는 조선에서 출가라는 큰 단점에 면책의 이론을 제시하니, 출가의 불효를 효로 해석해 낸 것이 다.
이외에도 “믿음은 만 가지 행의 우두머리가 되어 정진과 기억함과 삼매 등을 포괄한다”22)고 하여 믿음을 모든 수행의 으뜸에 두었다.
한편 ‘신(信)’에 대한 징관의 해석을 조선 중기에는 불성에 대한 믿 음보다는 ‘믿음’ 자체에 주목해서 염불하여 극락왕생한다는 믿음으로 해석하게 된다.
실제로 『보권문』 1장의 「유신유익 무신무익」(有信有 益無信無益, 믿음이 있으면 유익하고 믿음이 없으면 무익하다)’ 편에 서는 『화엄경』의 말을 인용하여 “신심으로 능히 불도를 이룰 수 있 다” 하며, “염불하는 사람은 귀신도 해치지 못하고 시왕도 감히 부르 지 못한다고 한 부처님 말을 믿으라”고 설한다.
즉 ‘신(信)’을 염불의 가피와 영험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한 것이다.23)
20) 『大方廣佛華嚴經』 14, 「賢首品」(T10, 72b), “信為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斷除疑網 出愛流 開示涅槃無上道.”
21) 『大方廣佛華嚴經疏鈔會本』 14(L130, 727a), “由信斷疑出愛成涅槃證.”
22)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77, (T36, 605c), “信為萬行之首 則該進念定等位 亦以信 為初.”
23) 정우영‧김종진 역(2012), 56.
한편 『화엄소초』를 간행하고 화엄대법회를 열었던 성총은 정토나 염불에 많은 의미를 두었던 인물이다.
그는 염불로서 정토왕생을 권 하는 『정토보서』를 간행하는가 하면, 『보권문』 해인사 본에 ‘전어질(前御秩)’로 명단을 올리고 있다.
성총의 관점과 징관의 화엄사상이 결합하였으니, 성총이 주최한 화엄대법회는 신앙이나 신심, 혹은 염 불 수행이 부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보권문』이 간행되던 조선 중기는 사회적 혼란과 함께 신 심을 강조한 불교 신앙의 퍼지며 상대적으로 실행이 편한 염불이 두 각되고, 불교 내적으로는 징관의 화엄논서를 계기로 유‧불‧선을 회 통하는 사상이 대두된다.
Ⅲ. 『염불보권문』의 구성과 내용
1. 본문의 구성
『보권문』은 1704년 청허 문중의 승려 명연이 경북 예천 용문사에 서 편찬하였다.24)
24) 「유전기」 등의 내용으로 보아 1696년 이전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는 자료는 1704년 용문사 개판 본이므로 대체로 이를 초판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태식 (보광)(2024), 132 참고.
원 서명은 『대미타참략초요람보권염불문』(大彌陀懺 畧抄要覽普勸念佛文)이다.
본문에서 한자 없이 언해로만 쓰인 부분은 있어도 진서로만 쓰인 부분이 없는 점으로 보아 주로 언문을 사용하 는 이들을 위해 간행한 대중 보급용으로 추정된다.
서문에는 ‘왕자성의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의 것이 좋으나 글이 광대하고 뜻이 깊어 말세 사람들이 염불의 큰 이익을 알지 못해 경론에서 가려 뽑아 염불문을 만들고 언문으로 해석하여 선남선녀가 쉽게 통달하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다.
가장 먼저 간행된 용문사 본의 표지에도 『미타참약초』(彌陀懺略抄)라 쓰여있으니 『예념 미타도량참법』에서 간추린 것임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 확히는 『예념미타도량참법』의 제4 「왕생전」 전기에 나오는 34명의 왕생사례 가운데 10명의 내용을 인용하고 명연 자신이 여러 경론에 서 약초한 내용을 담고 있다.25)
현재 한국불교전서에 수록된 『보권문』은 해인사본을 저본으로 삼 고 있다. 해인사본을 기준으로 본문의 구성을 살펴보면 1장에서는 여러 경‧논의 내용을 인용하여 염불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주로 염불하여 정토왕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현생 염불의 가피와 염 불을 권하는 공덕까지 함께 설하고 있다.
1장의 “신심은 능히 불도를 이룰 수 있다”거나 “염불하는 사람은 귀신도 해치지 못한다”26)는 내 용은 살아서의 염불가피를 말하는 부분이다.
25) 한태식(보광)(2024), 126.
26) 정우영‧김종진 역(2012), 56.
또한 짧은 생 동안 탐착하는 세간 일의 허망함과 염불하여 얻는 즐거움을 비교하니, 염불의 장소는 절과 마을 모두이며, 염불 대상은 벼슬아치, 선비, 장사꾼과 농부, 스님, 거사 등 모든 이가 해당한다.
가장 첫 장에 아미타불을 삼천불 가운데서도 제일 존귀한 존재로 소개하고, 다음에 바로 아미타불을 염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으니 뒤 에 나오는 내용의 실마리를 풀고 있다.
『대집경』‧『대비경』‧『십육관 경』‧ 『아미타경』‧『무량수경』‧『현호경』‧『법화경』‧『화엄경』‧『나선 경』 등 다양한 경전에 나온 염불 권장 법문을 인용하였다.
인용된 경 전은 정토계 경전과 교학 경전을 망라한다.
2장에는 염불 수행으로 정토에 왕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 다.
전체 10문 가운데 9문은 특정인이 염불을 수행하여 정토에 왕생 한 영험전이 실려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1376년 고려의 승려 혜 랑(慧朗, 고려시대) 등이 간행한 『예념미타도량참법』이나 조선 중기 (1637년) 구례 화엄사에서 간행한 『권념요록』(보우 찬)에도 실려 있 다.
마지막에 실린 「져리나 으리나 념불 권 후 바리라」는 글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염불하기를 권하는 내용이다.
본문에
“진서를 못하고 언문 하는 사람을 위해 깊은 경을 언문으로 써내어 모두 염불 할 줄을 알고 염불에 동참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나기를 권하나이 다”27)
고 되어 있으니 직접적인 제작 목적을 밝히고 있다.
27) 정우영‧김종진 역(2012), 58.
3장에서는 실제 염불 작법을 순서대로 서술하고 있다.
의식 순서 를 살펴보면 조선 중기 『보권문』과 함께 대표적 염불서로 꼽히는 『삼문직지』와 비슷한 순서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문직지』는 주 로 진서로 되어 있지만 『보권문』은 진서와 언해 두 언어로 되어 있 다.
두 서책에 나온 순서를 조계종 표준 현대 의식 순서와 비교하면 <표 1>과 같다.
<표 1> : 생략 (첨부논문파일 참조)
블록 설정되지 않은 부분은 세 본이 같거나 비슷한 순서를 보이는 부분이다.
‘참회게’까지는 세 곳이 거의 유사한 흐름을 보이며, 전체 의례에서는 『보권문』이 다른 두 편에 비해 많이 생략되어 있다. ‘여 래십대발원문’ 이후 『삼문직지』와 현대 작법에는 진언이나 칭불 등이 있어 작법이 계속되는 느낌이나 『보권문』은 이야기 형식의 향가가 주로 있다. 의식 순서를 보면 ‘참회게’까지는 『삼문직지』와 현대 의식 이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삼문직지』의 칭명예념선후절차에는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등의 도량엄정이나 건립의 행법이 있고, 후대 정립된 정토염불의 행법을 보여 전문 사찰이나 일정 장소(성역 등)에서 이루어지는 의례 구성을 보인다.
이에 비해 『보권문』은 의식이 간소한 점과 향가와 같은 노랫 말이 의식 뒤에 실려 있다. 무엇보다 칭명염불선후절차에 선행되는 도량엄정이 없는 점으로 보아 특정 장소를 한정한 염불의식이 아님 을 알 수 있다.
즉 의식의 구성과 진서로 보아 『삼문직지』는 작법을 전문으로 하는 승려나 절에서 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보권문』은 의식의 간소한 것과 언문 중심인 것을 미루어 일반 가 정에서 손쉽게 염불할 수 있는 보급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한편 의식의 시작인 ‘정구업진언’은 『대아미타경』 「예축의식」에 나 오나, 한반도에서는 『보권문』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 다.30)
30) 한태식(보광)(2024), 143.
의식 순서만 본다면 대중용으로 보급된 『보권문』이 이후 간행 된 작법용 『삼문직지』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염불의 발전 양 상은 현대 불교에까지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장에는 염불에 대한 가피와 공덕을 다룬 가사 글 11편이 실려 있 다.
주로 임종과 사후 세계를 직접 언급하며 염불로서 정토에 왕생하 기를 권한다.
「부모효양문」에는 염불을 권하는 것이 좋은 음식을 권 하는 세간의 효보다 더 뛰어난 출세간의 효라 말하니 유교에서 중요 시하는 효를 불교식의 효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네 번째 실린 「유마경」에서는 유마거사의 말을 빌려 다섯 가지 질악초를 설하는데, 이를 먹은 이들은 염불하여도 공덕이 없다고 설한다.
이외에도 『보권문』을 새기도록 유언한 「현씨발원문」이 나 지옥에 갈 왕랑이 지성으로 염불하여 다시 살아난 이야기 등이 실 려 있다.
전체 11문 가운데 2문은 임종 시 염불 방법을 말하고, 3문은 살아서의 염불 공덕, 4편은 극락의 구조와 왕생, 1편은 염불로도 구원 하지 못하는 경우와 마지막 시주질을 적은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서책의 전체 흐름은 ①경론의 인용 → ②염 불의 가피와 영험 사례 → ③염불 작법 순서 → ④염불 가피와 공덕 을 노래한 가사 순으로 편찬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선‧교에 비해 낮은 수행으로 여기던 염불 수행을 절상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경론을 인용해 불교학적 위상을 세우고 염불의 영험과 가피를 들어 증명한 다음에 실질적인 염불 순서를 알린다.
3장까지가 본론으로 보이며 4장은 부록 형식으로 「왕랑반혼전」이 나 「현씨발원문」 같은 불교 소설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 종정념결」과 같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정토로 제시하며 실천 적 방법으로 염불을 권한다.
설화와 가사 글이 많고 대승 경전을 인 용하더라도 염불 관련 부분만 축약하였다.
5장 보유편은 여동빈과 백낙천 등 실존 인물의 글을 인용해 유명 한 현자들도 결국에는 염불로 돌아갔음을 말한다.
또한 종본의 얘기 에서는 『불국왕생론』을 인용해 본인이 염불하는 것뿐만 아니라 염불 을 권하는 공덕의 뛰어남을 설하고 『십육관경』을 인용해서는 “‘나무 아미타불’ 한번 소리 내어 염하면 팔십 억겁 생사의 중죄를 소멸한 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신하 된 자는 진실로 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자식은 아 비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나니, 만약 듣지 않으면 어찌 충신 효자라 하리오”와 같은 유교의 충효사상을 돕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염불 은 일체 세속의 일에 방해되지 않는다”31)하여 관리, 선비, 장사꾼, 농 사꾼 등 모두 염불을 수행해 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한다.
31) 정우영‧김종진 역(2012), 57.
염불을 권하 면서도 당시 지배 사상이던 유교와 대립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2. 이본간의 비교
1704년 예천 용문사에서 초간본이 간행된 이래 1741년 팔공산 수도사(1741년), 동화사(1764년), 묘향산의 용문사(1765년), 흥률사 (1765년), 해인사(1776년), 선운사(1787년) 등에서 간행한 7종의 이 본이 존재한다.
각 이본은 초간본인 용문사 본을 저본으로 약간의 첨 삭을 하였기에 분량은 각기 다르다.
용문사 본은 총 43장인데 반해 수도사 본에는 「임종정념결」과 「부모효양문」이 추가되어 50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화사는 56장, 흥률사 본은 52장, 해인사 본은 53 장, 선운사 본은 5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간본 가운데 완질은 전 해지지 않고 용문사에 소장된 판본도 일부 만남아 있어, 현재 전해지 는 초간본은 후대에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용문사 본과 판목 에서 추출한 것을 보철해서 엮은 것이다.32)
32) 김영배 외 2인(1996), 93-94.
7종의 이본에 모두 실린 글은 25개 문으로 다음과 같다.
<표 2> : 생략 (첨부논문파일 참조)
<표 2>에 보이는 25문은 7종 이본에 모두 수록돼 있다.
1장 9문, 2 장 8문이 모든 저본에 있고, 3장 염불작법차서에는 ‘여래십대발원문’만 빠지고 7종 이본이 같은 순서로 실려 있다.
나머지 문은 판본마다 수 록 여부가 각기 다르니 산발적으로 수록된 문은 <표 3>과 같다.33)
33)『염불보권문』 「해제」에 수록된 정우영의 조사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정우영(2012), 11-12. 34)서강대 소장된 해인사본에는 「현씨행적」 대신 「현씨발원문」이 있다. 본고에서는 갑본 을 참고하였다.
<표 3> : 생략 (첨부논문파일 참조)
<표 2>와 <표 3>에서 보이듯 1장에서 모든 이본에 수록된 글은 주 로 정토나 염불을 직접 권하는 내용이다.
2장에도 제목에 ‘왕생’이 들 어간 글은 모두 수록되어 있고, ‘법문’이 들어간 것은 첨삭의 차이가 있어 법문보다 왕생에 중점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3장 작법은 모든 이본이 거의 비슷한 순서를 지니고 있으나 뒤에 실린 진언과 경전 등이 다르다.
수록 글만 비교해 본다면 이본 간 수록 차이가 거의 없 는 3장 염불 작법이 본서의 핵심인 것을 알 수 있다. 수록 글의 양상은 용문사 본(1704)과 수도사 본(1741)이 서로 비 슷하고 해인사 본(1776)과 선운사 본(1787)이 비슷하다.
「현씨행적」 과 「현씨발원문」은 흥률사 본(1765) 이후에서나 보이고 작법의식 중 「식당작법」과 ‘반야바라밀다심경」‧의십념」은 수도사 본(1741)과 용문사 본(1704)에만 실려 있어 후에는 잘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지 리적으로 보면 용문사를 비롯하여 대다수 사찰이 경상도 지역에 있 고 선운사(1787)만 전라도에 속한다.
정치세가가 몰려 있는 경기권 의 발행이 없고, 영호남에서 주로 간행되었으니 지리적 특징을 보면 지방을 중심으로 먼저 염불이 확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보권문』은 경론을 인용하여 염불의 공덕과 가피 가 실재함을 알리고, 설행의식을 정리하여 일상에서 언제든 실천할 수 있는 수행 방편으로서의 염불 확산을 목적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염불의 공덕을 기존 사후 정토왕생에서 확장해 사후와 현세 양측 을 포괄하고 있다.
정토사상을 기반으로 하면서 유심정토는 말하지 않고 실재하는 극락세계와 왕생을 말하니, 염불의 공덕을 추상적 가 피가 아닌 실제로 얻어지는 가피와 영험을 강조한다.
이러한 염불 관 은 조선 후기 유행하는 염불 양상과 흡사하니, 본 염불서와 변화 사 이에는 유기적인 상관관계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Ⅳ. 조선 후기 염불신앙의 확산
앞서 『보권문』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 염불신앙의 확산 배경과 당 시 통용되던 작법 순서를 살펴보았다.
변란 후 민심 수습을 위한 목 적, 억불의 시대 존립을 위해 변화를 받아들인 불교계 자구적인 노 력, 그리고 민중의 필요 때문에 염불이 확산하였고 이 과정에서 다수 의 염불서가 간행되었다.
특히 『보권문』은 민간에 염불 신행을 확산 시키며 조선 후기 염불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이전과 비교 해 변화된 염불신앙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전국적으로 퍼진 염불 결사와 염불 가사의 유행이다. 경 학이나 수선(修禪)과 달리 염불은 대체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던 수 행 방편이다. 이러던 것이 18세기 이후 염불회, 혹은 염불계 등 집단 신행 결사가 이루어진다.
염불계는 신라 시대부터 설행되었는데 신라 시대 신앙 결사의 의미로 이루어졌고, 고려 시대에는 친목 단체로써 활용되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상호부조의 역할을 하였다.35)
조선 후 기에는 수행의 한 모습으로 무리를 지어 설행되니, 문헌으로 확인되 는 조선 후기 염불회는 임란 이전이 3건, 임란 이후 19건으로 급격 히 확산하였다.36)
염불계의 명칭은 ‘만일회’가 가장 많은데,37) 19세기 금강산 건봉사에 는 1802년 만일염불회가 시작되어 1851년, 1881년 총 3번이 설행됐다.
35) 한태식(보광)(1993), 24-33.
36) 이종수(2010), 170.
37) 이종수(2010), 172.
만일은 27년 5개월이니 건봉사에서는 거의 100년 동안 염불 소리가 끊 이지 않았으며, 건봉사를 시작으로 전국에 ‘만일염불회’가 이어졌다.
한편 염불의 확산은 조선 후기 정립된 불교 교육기관인 강원 등 대중 사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작성된 선사이자 강백인 조관(慥冠, 1700-1762)의 가사문 「파강시도」(罷講示徒)[간경을 그만 두고 문도들에게 보이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38)
38) 龍潭集(H9, 648c).
ⓐ- 强吐深懷報衆知 심회를 토해 대중에 알리려/
ⓑ- 講壇虛弄說玄奇 강단에서 헛되이 현기를 말하네/
ⓒ- 看經縱許年靑日 간경은 청년 시절에 할 수 있으나/
ⓓ- 念佛便宜髮白時 염불은 백발 시에 편의하네/
ⓔ- 生死若非憑聖力 생사에 성력을 힘입지 않으면/
ⓕ- 昇沈無計任渠持 승침에 계획 없이 어디에 맡겨 의지하랴/
ⓖ- 況復世間頗鬧鬧 하물며 세간이 시끄러우니/
ⓗ- 白雲幽谷有歸思 백운유곡에서 돌아갈 생각을 하네
가사에서 주목할 점은 간경과 염불의 위계이다.
ⓑ‘강단에서 헛되 이 현기를 말하네’와 같은 부분은 지은이의 자조적인 표현으로 실천 이나 수행 없이 그저 머리로 이해되는 교리의 헛됨을 표현하고 있다.
ⓒ와 ⓓ 문장에서는 간경과 염불을 동등한 수행 지위에 두고 있으며, ⓔ의 ‘성력’이란 불보살의 위신력을 칭하는 것으로 타력 구원 관을 드 러내고 있다.
이외에도 글의 지은이를 주목해야 하니 조관은 영조대의 선교를 겸했던 당대의 선지식으로 화엄사 등 스님들을 교육하는 강원에서 강학을 펼친 인물이다.
강원에서 경을 강의하던 이가 교학보다 오히 려 염불을 더 높은 수행 방편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교 학을 중심으로 하는 강원에까지 염불수행이 확산하였으며 염불이라 는 타력 구원 관이 스님들에게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발간된 다카하시 도루(高橋亭, 1877-1966)의 『이조불교』 에도 “대사찰에는 좌선당인 선방, 염불당인 만일회당, 교당인 강당이 존재한다”39)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일제 강점기 이전 염불은 기본적 수행 방편으로 민가뿐 아니라 선원과 강원 등 승려들의 일상에까지 널리 퍼졌음을 알게 한다.
‘염불당’이라는 명칭은 19세기 이전에는 찾을 수 없고, 1801년 건 봉사에서 만일회 결성 당시 염불을 위한 공간을 지으며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불과 100여 년 사이 염불의 확산과 함께 독립적 염불 실 행 공간이 빠르게 확산한 것이다. 두 번째는 토착 신을 모시는 전각이 경내로 들어온 것이다.
사찰 건립의 기본 구조는 의례를 위한 불전과 경학이나 참선을 위한 수행 공간, 요사채 등 스님들 생활공간으로 구분된다.
불전은 비로전이나 원통전 등 주불이 봉안되는 사찰의 핵심 영역으로, 해당 사찰의 종파 적 성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당이나 신당은 마을 한쪽에 지어진 건 축물로 사찰과는 별개의 영역에 존재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 신중 전각이 경내에 건 립되고,40) 각각의 신중을 청하는 의식이 불교의식에 포함된다.
우리 나라에서 『산왕경』은 1827년 운문사에서 간행한 『작법귀감』에 처음 보이고, 산신각에 설치되는 산신 탱화는 18세기 이전의 것은 찾기 어렵고 주로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41)
39) 高橋亨(1973), 904.
40) 김형우(2013), 297-332.
41) 김형우(2013), 316-317.
토착 신앙과 불교의식의 결합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고려 시대에는 도교와 습합 된 치성광여래를 주불로 한 소재도량법회가 설행됐다.
그러나 이들은 대형 의례에 정법 옹호 등을 위한 의식 일부로 칭명 될 뿐, 독자적으로 설행되거나 독립 전각이 사찰 내부에 건립되지 않 았다.
그러던 것이 경내에 신중 전각이 건립되고 사찰 밖에서 행해지 던 구복의식이 본격적으로 불교의식에 포함된 것이다.
신중 전각에는 산신각과 칠성각 등이 있는데, 이들 신앙의 특징은 기도 공덕으로 구병(救病)이나 자손 창성, 연수(延壽)와 같은 현세의 가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복신앙의 유입은 이전까지 주로 고혼 의 정토왕생을 위해 행해지던 염불이 본격적으로 살아 있는 이들의 구복과 가피를 위한 신이적 의식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신중 신앙이 확산한 교학적 배경 역시 조선 후기 유행한 화 엄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중흥기가 시작되 며 『화엄경』에 등장하는 정법을 옹호하는 화엄성중이 국토를 수호하 는 것을 넘어 개인의 액란을 구제하는 신앙과 습합 된 것이다.
즉 『화엄경』에 등장하는 ‘주산신’, ‘주해신’, ‘용왕’ 등 성중이 산신과 용 왕, 등 토착신앙이나 칠성신앙42)과 결합하고, 개인의 흉복을 주관하 던 역할을 부여받아 기복적 신중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세 번째 특징으로 영험과 가피를 앞세운 신앙으로써 염불 관이 두 드러진다.
기성 쾌선(箕城快船, 1693-1764)은 『청택법보은문』(請擇 法報恩文)에서
“우리 말법 세상에서 억만 중생들이 수행하여 도를 닦 아도 증득하는 이가 없지만, 정토의 한 문은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니, 염불로 중생을 구제한다면 만에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이 다”43)
고 하여 다른 무엇보다 염불을 권하고 있다.
그의 가사집인 『염불환향곡』에서도 염불의 목적을 극락왕생에 두 고, 극락왕생의 목적은 정법을 듣고 깨닫는 것이며, 깨달음의 목적은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라 노래한다.44)
42)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앙과 치성광여래의 결합은 고려 시대 시작되었으나, 본고에서 는 민간신앙화 된 도교의 칠성신앙과 불교의 치성광여래가 본격적으로 결합하고 전 각이 세워지던 시기를 기준 하였다. 김용태(2019), 80-97 참고.
43) 『請擇法報恩文』 (H9, 648c), “大集月藏經云 我末法中 億億衆生 起行修道 未有一得者 淨 土一門 可通入路 念佛求生 萬不漏一.”
44) 『箕城大師念佛還鄕曲』 (H9, 658c), “염불은 왜 하는가? 아미타불, 극락에 태어나기 위해 아미타불, 극락왕생은 왜 하려는가 아미타불, 저 아미타불을 뵙기 위해 … 성불 은 왜 하는가 아미타불, 널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아미타불, 중생제도는 왜 하는가 아미타불,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아미타불.”
이전의 염불 관이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력 구원 관이 었다면, 『염불환향곡』에 나타난 구원 관은 자력뿐 아니라 타력의 관 점이 함께 나타나 있다. 염불로서 불도를 이루고 이를 기반으로 중생 을 구제하니 ‘자타일시성불도’의 관점이다.
또한 이 관점에는 두 가지 타력이 존재하니, 염불하는 자신에게 내려지는 가피의(타력) 구원과 염불자가 깨달은 이후 중생을 제도하는 중생 입장에서의 타력이다.
이러한 순환적 구원 관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도 비슷하다.
보살의 가피로 내가 구원받고, 다시 내가 보살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보림 을 성불의 필수 조건으로 보는 사상이다.
이처럼 염불의 기능과 목적 을 대승불교사상으로 풀이하고 있다.
네 번째 변화는 재의식의 확산과 통합의식집의 출현이다.
조선 초 기 왕족이나 양반 중심이던 불교 의례가 조선 후기 민간으로 확대된 다.
문헌 자료에서 16세기 처음 발견되는 생전예수재는 임진왜란 이 후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설행된다.45)
1849년 홍석모가 편찬한 『동국세시기』에는 윤달에 봉은사에서 설행되는 생전예수재와 관련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경기도 광주 봉은사에서는 윤달이 되면 장안의 부녀자들이 몰려들 어 많은 돈을 불단에 놓고 불공을 드린다.
이 같은 행사는 달이 다 가도록 계속된다.
이렇게 하면 죽어서 극락에 간다고 믿어 사방의 노파들이 와서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다. 서울과 그 밖의 다른 지방의 절에서도 이런 풍속이 있다.46)
45) 이종수(2023), 69.
46) 『東國歲時記』, “廣州奉恩寺 每當閏月 都下女人 爭來供佛 置錢榻前 竟月絡續 謂如是則歸 極樂世界 四方婆媼 奔波競集 京外諸刹 多有此風.”
고려에서 귀족 중심이던 불교가 염불을 내세워 조선 후기 민가에 확산함과 동시에 귀족 중심이던 불교 의례까지 민간으로 확대된 것 이다.
한편 불교 의례의 급격한 확산 이면에는 정비되지 않은 염불서 의 무분별한 보급과 불교사상의 변화로 인한 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 후기 대표 선승 가운데 한 명이자 화엄학의 대종주로 추앙받 는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2-1852)은 『작법귀감』을 지어 의례의 정 비를 도모하였으니, 「서」(序)에는 당시의 무분별한 의식집 보급에 대 한 우려와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의지가 실려 있다. 작법(作法)의 절차(節次)에 관한 책들이 비록 많지만 서로 빠진 것 이 있어 전체 모습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의 차이도 가리지 못하고 절실한 배움에 있어 잘못 거론한 것이 허다하니 부 처님을 공양하는 경사스러운 일이 거꾸로 법을 비방하는 큰 허물이 됨을 누가 알겠는가?47)
그러나 교단도 뚜렷한 종파도 없던 당시, 염불서의 체계화, 혹은 의식의 통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9세기 이를 계승한 안진호에 의해 『석문의범』이 간행되었다.48)
이를 이어 20세기에 한국불교 대 표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이 출범하며 의식문 통일화를 위한 작업 으로 이어져 현재 가장 널리 통용된 염불 의식집으로 보급되었다.
조계종 표준 의식은 안진호가 편찬한 『석문의범』을 기준으로 정립 되었는데, 현재 진각종을 제외한 한국불교 대다수 종파나 사찰에서 이 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49)
47) 『作法龜鑑』, 「序文」(H10, 552b), “作法節次 卷帙雖多 互相闕如 未見全豹 且涇渭高低 都 不辨白 膚授之學 率多錯擧 誰知供佛之慶事 翻作謗法之大愆.”
48) 고영섭(2010), 434.
49) 김방룡(2009), 50. 34 •• 『한국불교학』 제115집(2025.8)
『석문의범』은 『보권문』의 체제를 따르니, 「천수경」의 저본은 경전과 설화에 근거를 두고 신심으로 염불하면 누구나 가피를 받을 수 있다는 신앙 관점이 현대 염불의식인 「천수경」의 중요한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50)
50) 문상련(정각)(1996), 134.
이상 조선 후기 염불신앙의 특징을 4가지로 요약하였다.
염불의 확산과 신이적 존재의 불교 내 유입, 그리고 의례의 확산이 결합하여 가피라는 타력 구원 관이 두드러지고, 수행 중심에서 신앙 중심으로 관점의 축이 이동하여 확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Ⅴ. 결론
조선 시대 염불신행은 임란 이후 고혼을 위로하는 목적과 민심 수 습, 그리고 당대 퍼진 삼문수행이 합쳐져 조금씩 변화한 염불 관이 이루어낸 신행 체계이다.
여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재건 불사와 함 께 간행된 염불서에 의해 염불신행이 전국으로 확산하고 민간의 일 상에까지 염불이 보급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는 숭유배불이라는 척 박한 환경 속에 피어난 스님들의 꺾이지 않은 의지이자 연약한 민중 의 가녀린 희망이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주제인 『염불보권문』은 염불의 가피와 신이적 체험이 단순한 낭설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경론을 인용하고 백낙천 등 당 대 유명한 이들의 체험담을 실어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다.
민중 보급 을 목적하여 언문 중심으로 간행된 이 초라한 서책은 희망과 절망의 시대에 간행되어 조선 후기 염불신앙의 확산을 이끌었다.
물론 이 한 권의 서책이 온전히 확산을 주도했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으나, 이전까지 선 수행의 한 방편으로 인식되던 염불선에서 벗어나 염불 자체가 수행이자 신앙으로 자리 잡던 초기의 대표적 염불서임을 고려하면 이후 벌어지는 염불신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보급된 염불신앙은 조선 후기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현대로 전해지며 한국불교 신행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라와 고려의 불교는 화려하고 깊었으나 일반 백성이 닿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배척받는 조선에 와서야 서민을 위해 문을 열었고 특유의 방대한 이론을 접어두고 서민의 눈높이를 맞춘 실참의 종교로 진화한 것이다.
유교는 제공하지 못했던 인간의 나약함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신적인 존재, 평민도 다다를 수 있는 정 토를 내세워 외적으로는 효와 충, 인을 강조하고 내적으로는 자신마 저 구제할 수 있는 타력과 자력의 종교로 거듭나고자 했던 자구적인 노력의 결실이 바로 염불신앙이다.
어쩌면 이는 1500여 년 전 저잣거리에서 원효가 꿈꾸던 민중불교 의 재현이라 말할 수 있다.
당대의 천재 원효가 수많은 경론을 포섭 하여 내린 한마디의 결론 ‘나무아미타불’로부터 뿌리내린 소박하고 따뜻한 신앙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철학과 학문의 탈을 벗고 신앙으 로서 열매 맺을 수 있었다.
이는 또한 기원 전후 지나치게 학문화된 이론에서 벗어나 붓다 깨달음의 목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대승불교 운동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후기 염불신앙 의 확산은 불교계에 일어난 변화가 아닌 진화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고단하고 연약한 중생심을 위로하며 발전한 간소하고 단순한 염불 신행이 탁월하고 광범위한 교학을 미처 다 담 지 못하여 교주인 부처가 신적 존재로 전락하고, 불교 본연의 목적인 깨달음이라는 자력구원관이 축소된 면이 없지 않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명아주가 있음에도 꺼내 보일 수 없는 현실과 콩잎 같음을 알 면서도 배고픈 이들을 위해 내놓을 수밖에 없는 사연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선대가 후대에 남긴 엄숙한 과제로 현대 불 교가 해결해야 할 부분이다.
불교의 방대한 교리와 수행은 출가자나 일부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염불신앙은 마치 아낙네의 가녀린 기복신 앙 정도로 치부되는 인식을 재정립해야 한다.
믿음과 교리가 별개가 아니요, 수행과 기도가 다르지 않은 불교 사상의 진화를 다시 이루어 야 한다.
이로써 오백 년 척박한 시절을 지나 우리에게 전해진 염불 신앙이라는 민중불교가 정법의 중심에서 화려하게 꽃 필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참고문헌
1. 약호 및 원전류
T L H 『東國歲時記』 대정신수대장경 건륭대장경 한국불교전서 『箕城大師念佛還鄕曲』(H9) 『大方廣佛華嚴經』(T10)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T36) 『大方廣佛華嚴經疏鈔會本』(L130) 『三門直指』(H10) 『世宗實錄』 『念佛普勸文』(H9) 『龍潭集』(H9) 『作法龜鑑』(H10) 「曹溪山修禪社佛日普炤國師碑銘」 『請擇法報恩文』(H9) 『太宗實錄』 2. 단행본 및 논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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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문
본 연구는 한국불교 대표 신행으로 자리 잡은 염불신앙의 종교적 의 미와 가치를 탐구하여 현대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오늘날 염불신앙은 조선 후기 염불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특히 18 세기 대표 염불서인 『염불보권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염불서의 간 행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정토사상이나 염불선 관점에 초점을 맞췄던 이전 염불서와 달리 『염불보권문』은 사후의 왕생과 현세 구복이라는 신이적 가피를 강조한다. 이러한 변화된 염불관은 『염불보권문』 제작 이후인 조선 후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염불관의 변화가 먼저인지 시 대적 요구와 필요를 반영해 서책이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선후 관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두 현상 간에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염불보권문』이 제작되던 전후, 시대 상황과 불 교계 동향을 파악하고, 책에 담긴 신행과 사상을 분석하여 조선 후기 염불신앙의 변화와 특징을 비교하였다. 연구결과 염불신앙은 임진왜란 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사회적 역할과 왕생 정토 및 중생구제라는 종교적 목적이 결합되어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 내부적으로는 삼문수행과 같은 사상의 변화를 통해 정착한 한국불교 신행의 진화임을 알 수 있다. 즉 본 연구는 억불이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발전한 염불신행의 변 화와 의미를 밝힘으로써 현대 한국불교 신행의 미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주제어 삼문수행, 『삼문직지』, 『염불보권문』, 염불신앙, 조선 후기
Abstract
The Spread and Significance of Korean Buddhist Yeombul Practice(念佛信仰) as Seen Through the 『Yeombul Bogwonmun』(念佛普勸文)
Jung, Hayoun (Ven. SungYup) (Ph.D. Candidate Joong-Ang Saṅgha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religious meaning and value of “Yeombul” (念佛) practice, which has become a representative faith in Korean Buddhism, and to suggest a direction for the future of modern Buddhism. Today, “Yeombul” practice inherits the tradition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Yeombul Bogwonmun (『念佛普勸文』), a key “Yeombul” text from the 18th century, is closely related to this tradition. While previous “Yeombul” texts focused on the Pure Land doctrines or the Seon-and-Pure Land perspectives, the Yeombul Bogwonmun emphasizes miraculous merits (神異的 加被) for rebirth in the Pure Land after death and for obtaining blessings in the present life. This changed view of “Yeombul” practice became widespread throughout the nation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following the publication of the text. Although the chronolog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shift in “Yeombul” perspective and the publication of the text remains unclear, it can be inferred that there was an organic connection between the two phenomena. Accordingly, this study analyzes the historical context and Buddhist trends of the period surrounding the publication of the Yeombul Bogwonmun and examines the faith and ideology con tained within the book to compare the changes and charac teristics of “Yeombul” practi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findings reveal that the spread of “Yeombul” practice was a result of a combination of social roles, such as pacifying the public’s anxieties following the Imjin and Byeongja Wars, and religious goals like rebirth in the Pure Land and the salvation of all beings. Furthermore, it is identified as an evolution of Korean Buddhist practice that was established through internal ideological changes, such as the Sam-mun (Three Gates) training. In conclusion, this study aims to shed light on the changes and significance of “Yeombul” practice that developed during a period of repression, thereby providing important implications for the future direction of modern Korean Buddhism.
Keywords Three-Gate, Practice, Yeombul Faith, Late Joseon Period
논문투고일: 2025. 7. 7.심사완료일: 2025. 8. 7.게재확정일: 2025. 8. 14.
한국불교학 제115집(2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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