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숨밭 김경재(1940-2025) 선생께서 지난 5월 작고하셨다.
85년의 생 애 가운데 남긴 단독 저서는 24권이다.
생전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학, 철 학, 동양철학 등 연구의 폭이 넓었기에 저서들의 주제 역시도 폭이 넓은 데, 그 가운데 반복하여 나오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폴 틸리히이다.
틸 리히를 단독으로 연구한 저서는 3권이고, 틸리히 관련 공식 연구논문은 5편이다.
김경재가 일생 동안 단독으로 연구하여 여러 권의 책을 낸 인물 은 폴 틸리히가 유일하다.
그의 틸리히 첫 번째 연구서가 30대 후반에 출 간되었고 세 번째 연구서가 70대에 출간되었으니, 사실상 연구 인생에서 틸리히는 한 축을 지속적으로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1)
1) 고 김경재 교수의 연구 결과물들은 ‘숨밭 김경재의 신학아키브’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생전 이 사이트에 본인의 연구를 직접 업데이트하였다. http://soombat.org.
실제로 김경재는 본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로 폴 틸리히를 꼽았다.2)
김경재의 틸리히 연구서 첫 책은 『폴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1979)으 로, 제목이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그 자 체를 광의적으로 다룬다.
두 번째 책은 『폴 틸리히 신학 연구』(1987)로, 틸리히의 광범위한 신학을 저자가 설정한 주제 중심으로 심층적으로 다 룬다.
마지막 책은 『틸리히 신학 되새김』(2018)으로, 틸리히 신학의 정수 『조직신학』을 저자의 컨텍스트 안에서 주체적으로 풀어내는 형식을 취한 다.
김경재의 틸리히 연구서들은 틸리히 신학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내 용에 그치지 않는다.
소개서와도 같은 첫 번째 저작에서부터 저자의 적 극적인 해석의 시도가 돋보이는데, 두 번째 책부터는 보다 과감해진다.
두 번째 책 챕터들의 주제는 틸리히의 신학 범주가 아닌 김경재가 주체 적으로 설정한 주제들로 구성되었는데, 틸리히의 신학을 루돌프 오토나 화이트헤드와 비교 연구하기도 하고 ‘선(禪)과 믿음’이나 ‘연기(緣起)와 실 존’ 챕터와 같이 동양 사상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세 번째 책은 틸 리히 신학과 사상에 대한 김경재의 적극적인 응답과 해석이 책의 흐름을 이끈다.
틸리히의 『조직신학』 내용을 저자가 처한 맥락 곧 동아시아 한국 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체적으로 틸리히와 대화하듯 연구를 진행하였 다.3)
세 권의 연구서에는 틸리히 신학에 반응하는 김경재의 사상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김경재는 틸리히의 신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틸리히의 신론에 대하여 “틸리히의 신관은 철학적 신 학, 변증적 신학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이면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4)라고 하였다.
2) 김경재, 『내게 찾아온 은총』(고양: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33; 김경재, 『영과 진리 안에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137.
3) 『틸리히 신학 되새김』에 대하여 이정배는 “틸리히의 물음에 저자가 창조적으로 답한 것”이라 하였 고, 정경일은 “틸리히 사상의 주석서가 아니라 … 주체적 대화서”라 하였으며, 김주한은 저자가 틸 리히 신학에 내포된 긴장의 역설들을 “동아시아의 정신적 문화 토양 위에서 조명한다”고 하였다. 『틸리히 신학 되새김』(서울: (재)여해와함께, 2018), 추천사, 6-11.
4) Ibid., 122.
틸리히의 신론은 방법론적으로는 상관관계적이고 내용적으로는 존재론적이다.5)
형식적으로는 체계성을 갖추고 있고 진술의 방식은 철학 적이며 존재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이와 같은 특징은 틸리히의 용어 사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그 정점이 되는 용어는 ‘존재 자체’(be ing-itself)이다.
본 연구는 김경재가 폴 틸리히의 ‘신론’을 수용하고 주체적으로 해석 하는 내용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김경재의 해석의 틀은 크 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한국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이다.
전자가 보편적인 그리스도인이라 면 후자는 김경재의 삶과 실존이라는 특수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김 경재의 신 이해에서 후자 역시 중요한 이유는 그의 출신 배경 때문이다.
김경재는 전통이 깊은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유교적 세계관 을 흡수하며 자랐다.
그러다 성년에 가까웠을 때 유교의 ‘하나님론’이 애 매모호하여 갈증을 느꼈고 그즈음에 성경을 접하여 통독하면서 ‘은총의 종교’의 감격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라고 하였다.6)
5) 유장환, “폴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론의 의의,” 「한국조직신학논총」 35 (2013/6), 425.
6) 김경재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문에서 중 처음으로 기 독교인이 되어 한국신학대학교에 입학하였고,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신대학 교 교단에서 정년을 마무리하였다. 참조, 김경재, 『내게 찾아온 은총』, 『틸리히 신학 되새김』.
그러나 그의 ‘개종’이 유교를 포함한 그가 속한 땅의 전통을 깡 그리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서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한국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 민족을 붙드시고 계셨 던 하나님도 함께 긍정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하나님 이해는 성 경과 서양의 신학, 그리고 동양의 전통이 가진 종교성 사이의 대화적 측 면이 강하다.
이 부분으로 인해 김경재는 종교다원주의자라는 평을 받기 도 하지만, 그러나 그는 성서의 하나님과 동양의 종교 및 철학을 동일화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본문에서 충분히 해명할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김경재의 신앙과 삶의 맥락이라는 두 틀을 통하여, 김경재가 틸리히의 ‘존재 자체’를 어떻게 자신의 두 정체성 속에서 주체 적으로 해석하는지를 드러내보고자 한다.7)
김경재가 틸리히 신론을 성찰 하며 이룩한 신학적 작업은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서구의 신학과 동양의 전통 영향을 모두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김경재의 틸리히 신론 수용과 해석의 과정을 다음의 방법 을 통하여 살핀다.
첫째로 수용의 과정은 김경재의 틸리히 연구의 전반 기 두 책을 중심으로 살핀다.
첫 번째 책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과 두 번 째 책 『폴 틸리히의 신학 연구』는 각각 그의 나이 30대와 40대에 출간하 였다.
이 지점에서 김경재가 틸리히의 ‘존재 자체’ 개념을 성서의 하나님 과 어떻게 연결하였는지를 살핀다.8)
두 번째 해석의 과정은 김경재의 틸 리히 연구 후반기 책을 중심으로 살핀다.
여기 해당하는 마지막 책 『틸리 히 신학 되새김』은 그의 나이 70대 후반에 출간하였다.9)
7) 김경재는 『틸리히 신학 되새김』의 머리말에서 “폴 틸리히의 신학을 … 되새김하면서 나는 동아시 아 그리스도인으로서 틸리히와 대화하고, 한국인이라는 삶의 자리서 그의 신학이 말하는 의미를 … 적어보았다”라고 썼다. 그가 틸리히의 신학을 단순히 소개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 닌, 동아시아의 한국이라는 삶의 맥락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 가운데 치열하게 사유하 고 해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3.
8) 이 같은 틸리히 신론의 독특성은 모든 신학이 그러하듯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긍정성으로 말한다면 그의 신학 전체가 변증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근대의 무 신론 극복을 시도하고, 이신론과 범신론 사이의 대립 극복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반대로 부정적 측면은 철학적 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존재론적 진술로 인하여 성서의 하나님과의 연결성이 희석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격적 하나님 상이 약화된다는 비판을 받는다. 동시대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라인홀드 니버가 모두 틸리히의 신학 및 신론에 대한 염려를 표명한 바 있다.
9) 두 번째 책과 세 번째 책 사이의 기간이 30년이 되므로,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을 틸리히 연구의 전반기로, 마지막 책을 틸리히 연구의 후반기로 나누는 데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는 김경재가 틸리히의 신 개념을 동아시아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살핀다.
또한 본 논문은 김경재의 틸리히 신론 수용과 해석의 과정이 틸리히 의 신학적 방식과 같이 상호관계적으로 진행됨을 확인한다.
김경재는 존 재 자체와 성서의 하나님과의 관계, 존재 자체와 동양 사상의 관계, 존재자체와 자신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탐색하여 드러낸다.
Ⅱ. ‘존재 자체’를 성서의 하나님으로 수용
틸리히의 신론은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진술로 성서의 신관과 합치 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유발했고, 때로는 ‘기독교 신학이 아닌 종교철학이 다’ 혹은 ‘범신론적 색조를 띤 이단적 기독교 사상이다’라는 비판을 받았 다.10)
10) 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2009]), 7-8.
김경재는 이같은 비판을 유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수하여 정면 대결한다.
본 장은 김경재가 틸리히의 ‘존재 자체’를 성서의 하나님으로 수용하 는 지점을 밝힌다.(1절)
그리고 더 나아가 김경재가 ‘존재 자체’가 세계 및 인간과 상호 관계하는 지점을 성서 속 본문과 연결 짓는 획기적 시도를 한 부분을 밝힌다.
김경재는 에베소서 4장 6절과 누가복음서의 ‘탕자가 돌아온 아버지의 집’을 ‘존재 자체’와 연결 짓는다.(2절)
이 과정에서 존재 자체가 세계 및 인간과 상호 관계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1. 틸리히의 ‘존재 자체’, 그리고 떠오르는 물음
틸리히 신학 체계에서 신론은 『조직신학』 2부 “존재와 신”(Being and God)에서 체계적으로 진술되었다.
2부는 두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 장은 ‘존재와 신에 대한 물음’(Being and the Question of God)이고 둘째 장 은 ‘신의 실재성’(The Reality of God)이다.
이것은 틸리히 신학의 방법론인 상관관계의 방법의 구조에 상응하는데, 첫째 장은 ‘물음’에 해당하고 둘째 장은 ‘대답’에 해당된다.
틸리히 신학 구조에서 질문 없는 대답은 의 미를 가지지 못하고 더 나아가 질문이 대답을 포함하고 있기에,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곧 신에 대한 질문과 직결된다.
첫 장에서는 존재에 대한 분석을 진행한다. 존재는 ‘자아와 세계’라 는 기본구조로 되어 있고, 존재의 기본구조는 ‘개체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존재론적 기 본구조와 존재론적 요소들은 각각 대극 관계이다.
자아와 세계가 대극적 관계이고, 세 쌍의 요소들도 각각 대극적이다.
이 대극성에서 인간은 자 신 안의 긴장과 갈등을 발견한다. 존재의 구조와 요소들을 통해 존재를 알게 될수록 존재를 위협하는 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존재를 파고들수 록 비존재의 위협에 맞닥뜨리게 된다.
비존재의 위협을 파악한 인간은 자신 안의 존재론적 불안을 알게 된 다.
틸리히는 이 불안이 신에 대한 물음으로 이끈다고 본다. 유한성의 자 각은 무한에 대한 자각과 결부되어 있고, 무한에 대한 자각은 신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불안한 인간은 비존재의 위 협을 극복하기를 원하는데, 이 극복의 방안을 자기 자신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인간 자체가 존재와 비존재가 혼합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다.
이 지점에서 틸리히가 바로 그 ‘존재 자체’(being-itself) 개념을 제시 한다.
신은 존재나 비존재 위에 있는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아니라, 존 재와 비존재를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존재 자체이다.11)
11) 이 맥락에서 ‘존재 자체’가 틸리히의 의도를 온전히 반영하는 적합한 용어가 맞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을 가리키는 모든 언어는 그 자체일 수 없고 상징과 같이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신을 가리키는 말 중에 틈이 없는 어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은 모든 존재하 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the ground of being)이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있게 추동하는 ‘힘’(the power of being)이다.
이 존재 자 체 안에서는 앞서 언급되었던 대극적 요소들이 더 이상 갈등 관계가 아 니고 조화 상태이다.
불안은 존재 자체와 연합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신앙인들과 신학자들은 명백히 떠오르는 하나의 물음을 피할 수 없다.
곧 존재론적 논의의 장에서 존재론적 용어로 서술 되는 ‘존재 자체’가 성서의 하나님과 동일한가 라는 물음이다.12)
김경재 는 이와 같은 물음을 바탕으로 틸리히의 ‘존재 자체’의 하나님과 성서의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면 대결하여 탐구한다.13)
김경재는 틸리히의 ‘존재 자체’로서의 하나님과 성서의 하나님이 같 은 하나님인지 그의 연구서에서 반복하여 질문한다:
“틸리히의 … 존재 론적 지반으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산자의 하나님인 가”14),
“틸리히가 하나님을 ‘존재 자체’ …라고 표현하는 신학적 언표들이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체험한 ‘야훼 하나님’과 다른 것인가.”15)
김경재가 틸리히의 신론을 쉽고 가볍게 수용하지 않았 음을, 긴장과 고뇌의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경재는 틸리히의 존재론적 논의에서 가리키는 신이 성서의 신과 동일한 신임을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두 번째 틸리히 연구서 『폴 틸리히 신학사상』 첫 장은 틸리히의 다음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 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 십니다.16)
12) 특히 이 문제는 성서의 인격주의적 신관과 상충 되는 지점이 있다. 헬라의 형이상학적 종교들이 나 동아시아 고등 종교들이 신에 대한 신인동형론적 표현들을 유치하게 보는 것과 달리 성서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틸리히가 성서의 신에 대한 인격적 표현에 대하여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나, 틸리히의 신은 인격적 신을 넘어서 있는 ‘존재 자체’로서의 신이기에, 인격적 신에 한정되지 않은 개념이다.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23 124.
13) 틸리히 신론에 대한 김경재의 연구는 매우 주체적이다. 김경재는 “틸리히가 보여주는 신관의 핵 심에 정면 대결 해보기로 한다”고 언표하며 틸리히 신론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Ibid., 122.
14) 김경재, 『폴 틸리히의 신학 연구』, 11.
15)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22.
16) 폴 틸리히는 1951년 가을 버지니아 대학에서 열린 “제임스 리차드 강좌”(James W. Richard Lec tu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파스칼에 반대하여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 곱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며 또한 한 인격 으로서의 자신의 부정입니다.” 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 연구』, 7에서 재인용.
김경재는 ‘존재 자체’라는 용어가 틸리히의 신학적 의도를 온전히 전 달해주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러나 틸 리히의 하나님 이해가 “모세의 ‘야훼’ 하나님 이해 및 사도 바울의 아레오 바고 설교에서의 하나님 증언 고백과 같은 혈통에 서 있고자 한다는 것 을 느낀다”라고 밝힌다.17)
김경재는 틸리히의 존재 자체로서의 하나님을 성서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
2. ‘존재 자체’를 ‘성서’에서 발견하기
더 나아가 김경재는 틸리히의 존재론적 논의 가운데 존재론적으로 표현된 신을 과감하게 성경의 본문과 연결짓는 시도를 한다.
본 절에서 는 김경재가 틸리히의 ‘존재 자체’와 인간을 포함한 세계[만물] 전체와의 관계, 그리고 ‘존재 자체’와 실존[삶]의 관계를 성경 본문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해석하는 과정을 살필 것이다.
첫째로 ‘존재 자체’와 인간을 포함한 세계 만물과의 관계이다.
틸리 히 체계에서 신은 존재 자체이다.
이것은 신의 존재가 다른 존재자들의 곁이나 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존재자들을 있게 하는 존재 의 지반이자 능력임을 나타낸다.
이때 신은 ‘최상급’의 개념이 아니다.
다 른 존재자들보다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 존재들을 초월해있는 동시에 기 반이 되는 존재이다.18)
17)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29.
18) 틸리히는 그리스도교의 신 이해가 유일신관(monotheism)에서 일신관(henotheism)으로 변질되 어 하나님을 마치 만신전(萬神殿) 중의 최고신 격이 되는 것을 경계한 바 있다. Ibid., 123.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떠오른다.
존재자들의 ‘기반’이 되지만 ‘초월’ 하는 이 ‘존재 자체’는 현실 세계에서 세계 및 인간과 관계 맺음이 가능한 신인가?
틸리히의 체계에서 존재 자체는 피조물들과 절대적으로 구별되 면서도 존재들을 있게 하면서 동시에 근대 세계의 무신론, 이신론과 범 신론에 대응이 가능한,19) 안정적 체계 속의 신이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 한 세계는 형이상학적인 사유 안에서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 ‘구체 적’으로 존재한다.
존재 자체는 초월성과 더불어 한편으로 반드시 구체자 여야만 세계와 ‘상관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세계와 구 체적으로 관계하셨다.
세계를 직접적으로 창조하셨고 인간과 인격적으 로 관계하셨다.
김경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틸리히의 존재 자체 개념과 연결 짓는 다.
김경재는 틸리히의 존재 자체, 존재의 근거와 존재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을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에베소서 4장 6절이라고 말한다.20)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에베소서4:6)21)
통상적으로 주석서들은 하나님이 만물 ‘위’에 계심은 초월성을 지시 하고, 만물 ‘안’에 계심은 내재성을 지시하고, ‘통하여’ 계심[일하심]은 경 륜을 지시한다고 밝힌다.
틸리히 체계에서 신은 모든 존재를 있게 하는 궁극적인 근거로서 존재들을 초월하는 존재 자체이다.
곧 하나님은 존재 자들과 같이 있는 분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22)이며, 이 존재 자체는 존 재자들 안의 갈등을 넘어서 있다.
19) 참조, 유장환, “폴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론의 의의.”
20) 김경재, 『폴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264.
21) 김경재의 번역. 참조, 김경재, 『폴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264.
22) Ibid., 265.
이는 하나님의 ‘위’에 계심에 상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존재 자체는 존재의 힘(power of being)으로도 부연된다.
이는 곧 존재가 비존재의 위협에도 무(無)로 화하지 않고 생존할 수 있게 추동해주는 힘이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통하여’ 계심에 상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안’에 있는 하나님은 틸리히의 신론에서 더욱 부각된다. 틸 리히 신학의 중심적 방법론이 ‘상관관계’적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인 하나님은 모든 관계의 근거이면서 모든 관계를 포괄한다. 그러나 존재 자체는 자아나 세계에 환원되지는 않는다. 자아와 세계 모두 존재 자체 에 근거하며 존재 자체는 그것들을 있게 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환원 되지는 않지만 신 곧 존재 자체는 이미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틸리히는 이를 ‘나-너 관계’(ego-thou relation) 개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적인 너는 나를 포함하고 있고, 내가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나에 게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23)
이는 신의 ‘안’에 계심에 상응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존재 자체와 인간 실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존재 자체로 말해지는 신이 위에와 안에와 온 과정 가운데 계시지 만, 인간의 실존은 있음만으로 지속되고 있지 않다. 곧 실존은 비존재의 위협 가운데 있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본회퍼의 고백과 같이 ‘신 없이 신 앞에서’24)와 같은 실존적 상황에 맞닥뜨린다.
그러나 틸 리히 체계 안에서 존재 자체는 존재자들의 근거이자 있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신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데, 신의 부재를 경험하는 인간 실존 에서 ‘존재 자체’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김경재는 놀랍게도 신약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로 이 상황에 답한다.
김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적으로 말해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옴으로써 극복된다. 아버지의 집이란 틸리히의 신론에 있어서는 유한자의 자기 존재의 집, 자기 존재의 지반 곧 존재 자체이다.25)
23)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Ⅰ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1973]), 271.
24) 참조, 디트리히 본회퍼/손규태 · 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5) 틸리히, 『폴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259.
김경재는 ‘존재 자체’를 탕자가 다시 돌아온 ‘아버지의 집’에서 찾는 다.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미리 받아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허비하였고, 먹을 것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자 아버지의 집에 종으로라도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다른 모든 상황은 차치하고 김경재가 주목한 것은 탕자가 아버지 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의 존재의 집 곧 신께 다시 돌 아왔다.
그런데 애초부터 틸리히의 신론 체계에서 신은 인간보다 인간에 게 더 가까이 있는 존재인 존재 자체인데 어떻게 인간이 신을 떠나는 것 이 가능한가?
김경재는 이를 인간의 ‘불안’한 실존으로 설명한다.
틸리히 체계에서 인간은 존재와 비존재에 참여하고 있어 그 누구라 도 비존재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존재에 의하여 제한된 존 재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면서 불안 에 빠진다.26)
시공간의 유한성 안의 존재인 인간은 시간적으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죽음을 맞게 되고 이때 인간은 공간도 상실하게 된다.27)
인 간은 실존 전체에서 불안의 위협을 받는다. 그런데 인간은 이 불안을 극 복하기 위해 때때로 “비존재 위협으로부터의 도피”28)를 시도한다.
불안 한 인간의 도피와 관련하여, 틸리히는 그의 설교 「하나님으로부터의 도 피」29)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실존의 형편을 구구절절이 형용한 바 있다.
불안에 휩싸인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숨을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곳도 하나님께 파악된다는 것 이 틸리히의 설교 메시지다.
이 설교에서 틸리히는 “그[인간]가 피해서 달아날 수 없는 하나님은 그의 존재의 근거이다”30)라고 말한다.
26) Tillich, Systematic Theology Ⅰ, 186-190.
27) Ibid., 192-195.
28) 김경재, 『폴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 259.
29) 폴 틸리히/김광남 옮김, 『흔들리는 터전』(고양: 뉴라이프, 2008), 6장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 71-92. 30) Ibid., 86.
김경재는 피해서 달아날 수 없는 존재의 근거를 탕자가 다시 찾아온 아버지의 집이라는 탁월한 해석을 내놓는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났지만 그는 다시 돌아왔다.
설사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 다고 하여도 탕자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 지어 아버지는 탕자가 아직 먼 거리에서 오는 중인데도 아들인 것을 알 아보고 달려나가 아들을 안았다.
아들이 떠났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 을 향해 있었다.
탕자의 이야기에서는 탕자가 떠났을 때 아버지와 아들 의 사이에 집과 타국 정도의 물리적 거리가 있을지라도, 우리 실존에서 신과 우리의 거리는 아무리 멀어도 결국 우리 내면 안에서의 거리이다.
역설적이지만 ‘관계성 속에서의 단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신 을 떠나려는 시도를 해도 우리는 여전히 신 안에 있다.
유한성에 의한 실 존의 불안은 결국 탕자가 ‘존재 자체’로 돌아옴에 의하여, 곧 인간이 하나 님께 돌아옴에 의하여 극복된다.
다시 말해 무신성의 불안은 인간이 망 각하였던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인하여 극복된다.
사실 존재 자체는 언 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있다.
Ⅲ. ‘존재 자체’를 동아시아-한국 맥락에서 해석
이 장에서는 김경재가 틸리히의 ‘존재 자체’와 자신의 삶 사이의 상관 관계를 소명하고자 고군분투한 사유의 과정을 밝혀보고자 한다.
앞 장에 서 존재론적인 신 이해와 성서의 신 이해의 연관성의 해소를 다루었다 면, 이번 장에서는 존재론적인 신 이해와 실존과의 상관관계에 관한 것 이다. 다만 김경재가 주목한 실존은 일반적 실존이 아니고, 자신의 시공 간적 유한성이 구체적으로 처한 지점 곧 동아시아 한국인으로서의 그리 스도인이다. 이민애 | 김경재의 폴 틸리히 신론 해석 ‐ 동아시아 그리스도인의 맥락에서 83 김경재의 틸리히 세 번째 연구서 『틸리히 신학 되새김』은, 그 목차의 구성은 틸리히의 『조직신학』의 틀에 기반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절반 이 상이 김경재가 동아시아 한국인이라는 맥락에서 주체적으로 틸리히 신학 에 대하여 응답하고 되새김하는 곧 해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연구서와 두 번째 연구서에서도 틸리히 신론을 다루는 가운데 동양 사상 과의 접목 부분이 나타나긴 하지만 단속(斷續)적이다.31)
그러나 세 번째 책에서 동양 사상은 마치 틸리히의 사상과 대화하듯 긴 호흡으로 논술된 다. 김경재는 “동아시아의 정신적 문화 토양이라는 거대한 전통”과 “성서 안에서 들려오는 새롭고 낯선 복음”이라는 두 주제가 취사선택이 아닌 “함께 대화하고 서로를 재조명하여 ‘영과 진리 안에서’ 창조적 변화를 모 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32) 33)
31) 김경재는 폴 틸리히의 신론을 다루면서 첫 번째 책 『폴 틸리히의 생애와 사상』에서는 ‘무형의 지 기(至氣)’, 두 번째 책 『폴 틸리히의 신학 연구』에서는 ‘공’(空), ‘무화’(無化)와 같은 개념을 사용하 나, 동양 사상 자체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32)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4.
33) 이는 서구신학을 대하는 안병무의 입장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어 이를 살피는 것도 김경재의 해 석의 방식 이해에 도움이 된다. 안병무의 서구신학에 대한 관점을 연구한 전철은 안병무가 서구 신학에 대하여 일방적 동화가 아닌 비판적 수용의 입장이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의 신학과 민 족의 신학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였음을 밝혔다. 전철은 안병무가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인’ 에 뿌리 내렸다기보다는 ‘한국인’으로서 뿌리내렸”다고 했다. 한편 안병무는 “왜 내가 서구 사람 의 질문을 하고 서구 사람의 대답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 하였다. 전철, “초기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의 빛과 그림자,” 「신학사상」 152 (2011/3).
첫째 절에서는 ‘존재 자체’와 ‘도’(道)를 잇는 김경재의 해석의 시도를 살핀다.
아울러 ‘여호와’나 ‘야훼’와 같은 신명(神名)이 김경재의 한국인이 라는 정체성 안에서 어떻게 갈등되었고 해소되었는지를 같이 살핀다.
둘 째 절에서는 그리스도교와 동양 사상이 서로 공명하는 지점이 있어도 동 일화되거나 환원되지 않음을 명시한 김경재의 입장을 밝힌다.
보편성과 구체성의 문제에서, 그리고 무(無)의 문제에서이다.
1. ‘존재 자체’와 ‘도’(道)
‘존재 자체’가 모든 존재의 근거이자 바탕이자 힘이라면, 틸리히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이 고백한 신의 개념에 갇 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야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들어온 성서의 신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존재 자체로서 의 신은 모든 시대에서 모든 지역의 존재들에게 근거와 바탕과 힘이 되 었을 것이기에, 구약과 신약의 문화권이 아니었던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존재 자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존재 자체를 가 리키는 형이상학적 개념이 있었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형이상학을 다루는 학자들은 저마다의 ‘존재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고 여러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예컨대 ‘태초에 물질이 있었다’, ‘태초에 원기(元氣)가 있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태초에 무(無)가 있었다’ 등과 같은 선언들이 있다.
김경재는 이 진술들을 존재론적 입장의 선언으로 읽는다.
이 가운데 김경재는 ‘존재 자체’ 개념과 동양의 ‘도’(道, Tao) 사상을 잇는 해석을 시도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도(道)가 ‘유’(있음, 有)와 ‘무’(없 음, 無)의 대극성을 감싸안은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김경재 는 『틸리히 신학 되새김』 8장에서 노자의 『도덕경』을 직접 인용한다.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恒常)의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 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무(無)는 천지의 시작이며, 유(有)는 만물의 근원이다.(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그래서 항상 무에서 (도의) 오묘함을 관조하고, 항상 유에서 (도의) 드 러남을 본다.(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34)
34)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11-112.
여기서 무와 유는 있음과 없음으로 대칭적이고 대극적이나, 같은 곳 에서 나왔다.
김경재는 이를 도장(圖章)의 양(陽)과 음(陰)에 비유하여 설 명한다.
도장은 깎여 들어간 음 부분과 튀어나온 양 부분이 있는데, 이 음양이 표현되기 이전에 도장이라는 재료가 있다.
이와 같이 도장을 파 내는 행위나 파낸 부분을 무(無)라 하고 표현되거나 표현된 것을 유(有)라 고 할 때, 도장 재료가 있음으로 인하여 유와 무가 말해질 수 있다.
이 유 와 무의 존재론적 바탕과 능력이 되는 것이 틸리히의 존재 자체 개념이 다.35)
다음으로 동아시아 한국의 맥락에서 존재 자체 곧 궁극적 실재에 관 한 이해이다.
제1철학인 형이상학은 서양만의 독특한 철학이 아니라 사 유하는 모든 인간 문명 속에 있었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앞서 본 도(道) 사상도 이를 보여준다.
신에 대한 사유도 마찬가지이다.
한자문화권에서 는 상제(上帝), 천제(天帝), 무극(無極), 천명(天命) 등과 같이 인간과 세계 를 초월한 존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것을 이르는 이름이 있었다.36)
이 지점에서 김경재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18-19세기 성경이라는 경전에 담겨 한국 땅에 비로소 입국한 외국의 신’과 같은 모 형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초월적 신에 대한 인 식이 분명히 동양에도 있었지만 성서에 담겨온 하나님이 마치 기존에 동 양에서 알던 신보다 더 뛰어난 신, 말하자면 ‘만신전(萬神殿)에 좌정한 많 은 신 가운데 최고신’ 격으로 이해된 것이 아니냐는 염려이다.37)
35) Ibid., 112.
36) 김경재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God)을 가리키는 한자권의 말 중 신(神)이 정확하게 해당되는 언 어는 아니라는 생각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신(神)을 영어로 바꾸면 ‘신령한 존재들’(the divines) 혹은 ‘잡신들’(gods, spiritual beings) 등이 될 것이다. 오히려 상제(上帝), 천제(天帝), 무극(無極), 천명(天命) 등이 하나님(God)에 더 가까운 어휘이다. Ibid., 108. 37) 성서의 하나님이 이 같은 양식으로 이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틸리히의 존재들의 지반과 능력이 되는 ‘존재 자체’이신 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김경재는 역설한다.
김경재는 더 나아가 동양의 한자문화권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신명 곧 ‘야훼’로 부를 때 그것이 자신의 신앙에 걸림돌이 되 었었음을 고백한다.
나의 어리석은 신학 여정에서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 하나를 솔직히 말하자면, 기독교 예배 공동체에서 기도를 드릴 때나 「시편」을 교독 할 때 이스라엘의 신명(神名)을 따라 부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 여호와, 야훼 등의 신명을 자연스럽게 고백할 때 나는 반발심을 느꼈 다.38)
김경재는 보수적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성서의 ‘야훼’와 아시아 고 등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가 전혀 다른 신이라는 배타적 신관을 주장할 때 자신 안에 차올랐던 의심과 갈등에 대하여 솔직히 표명한다.
우리의 조상들도 문명의 변동에 따라 달라지긴 하였지만 종교적인 신명 이 있었고 형이상학적인 궁극 실재에 대한 호칭이 있었는데, 그 모든 어 휘들이 “‘가나안의 바알 신’ 수준으로 동질화되고 폄하되는” 것이 과연 정 당한가에 대한 ‘깊은 의심’이다.39)
김경재는 이와 같은 신학적 고민이 구약학자의 한 논문에서 학문적 으로 해결되었다고 밝힌다.
김이곤의 「고난 신학의 맥락에서 본 야훼 신 명 이해」40) 논문이다.
김이곤은 이 논문에서 야훼 신명의 의미와 그 신학 적 맥락을 탐구한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는 히브리어로 신의 이 름을 ‘에흐예 아셀 에흐예’(’ehyeh ‘aser ’shyeh)로 들었는데, 여기서 사용 된 동사 ‘에흐예’(’ehyej)가 한글 발음으로 야훼이다.
그리고 이 ‘에흐예’의 히브리어 어근은 ‘하야’(hyh)로 볼 수 있다.
신명의 뿌리가 되는 ‘하야’의 본래적 뜻은 “떨어지다”(fall), “생기다”(befall), “되다”(become), “생존하 다”(be, exist)이다.41)
38)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26.
39) Ibid., 126.
40) 김이곤, “고난신학의 맥락에서 본 야훼 신명 연구,” 「신학연구」 27 (1986/9).
41) Ibid., 179.
또한 야훼는 본질 개념보다는 현상개념(phenomenal)이나 기능개념(functional)이다.42)
이에 “나는 야훼이다”(‘ani YHWH) 의 의미는 “나는 …를 붙들어 주는 자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결 론적으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신 곧 야훼는 “영고성쇠하는 인류사에 끊임 없이 생명을 부여하며 그 생명을 붙으시는 분(Sustainer, Establisher)이 시”라고 김이곤은 정리한다.43)
42) Ibid., 180.
43) Ibid., 189.
김경재는 김이곤 논문을 근거로 하여 ‘야훼’는 특정 문명권의 배타적 신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속성과 기 능을 증언해주는 호칭으로 수용함을 밝힌다.
없는 자들에게 생명을 부여 하고 약한 존재들의 생명을 붙드시는 분으로서의 존재 자체는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만이 아니라 다른 시간과 공간의 존재들에도 있다. 존재 자 체는 모든 존재에 대하여 기반과 지반과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 은총에 예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사람들은 그들의 어 휘에서 존재케 하고 붙드시는 존재 자체로서의 신을 찾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의 물음에 맞닥뜨린다.
김경재는 존재 자체와 동양의 도(道) 사상을 동일한 것으로 수용하였는가 하는 질문이다.
김경 재는 자신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김경재는 성 서의 신앙과 동양의 사상을 상호침투시키지 않았다.
2. 성서 신앙과 동양 사상의 상호 구분
김경재는 틸리히의 ‘존재 자체’ 개념을 탐구하면서 동양 사상에 잇대 어 해석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김경재는 성서의 신앙과 동양의 사 상 간의 경계를 긋는다. 양자 사이 공명하는 지점이 있으나 동일화되지 는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김경재는 그리스도교를 변증하는 입장에 섰다.
크게 두 부분으로 살필 수 있는데,
첫째는 보편성과 구체성의 문제에 서,
둘째는 무(無)의 문제에서이다.
첫째로 보편성과 구체성의 문제이다.
틸리히의 『조직신학 Ⅰ』(Sys tematic Theology Ⅰ)에서 신론을 다룬 2부 존재와 신(Being and God)은 두 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은 신에 대한 보편적인 물음으로서의 ‘존재’에 대 한 물음을 다루고 2장은 계시적인 대답으로서의 ‘신’을 다룬다.44)
여기서 전자의 물음은 보편성 그리고 후자의 계시는 구체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궁극적 실재는 특수한 구체성과 보편적 궁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1장에서 다루는 존재의 구조나 요소들에 대하여 존재 자체는 보편 적으로 지반과 바탕과 힘이 된다.
아울러 2장 신의 실재성에서 신은 구 체성을 가진다.
각 개체들을 창조하시고 각 개체들과의 관계 속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道)에는 구체성이 없음을 김경재는 밝힌다.
도(道)는 유와 무를 있게 하는 존재 자체를 가리킬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도장의 도에는 사랑이나 긍휼지심과 같은 속성이 없고, 또 도는 기도나 청원 혹은 감사와 찬양의 대상도 아니다.45)
김경재 는 다음의 두 구절로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 동양의 도 개념의 결정적 차이를 대비시킨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추구처럼 대한다. 성인도 인자하지 않 다. 뭇 백성을 추구처럼 대한다. - 『도덕경』 제5장, 천지불인편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 「마태복음」 10장 30-31절46)
44) 유장환, “폴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론의 의의,” 426.
45)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13.
46) Ibis., 113-114.
김경재는 동양 종교는 무심(無心)을 강조하고 서양 종교 특히 기독교 는 유심(有心)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기독교는 신에 대하여 신인동형론 적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다.
틸리히는 기독교의 신인동형론적 신 이해가 하나님을 존재자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는 가능성을 염려하나 그러나 그 언어가 ‘상징’적 언어일 때의 유효성을 긍정하였다.47)
성서는 하나님 을 ‘반석과 산성’(시 18:2, 31:3, 94:22), ‘목자’(시 23:1), 용사(출 15:3)로 묘 사하고, 또 하나님을 ‘들으시고 진노하’시는(민 11:1) 분으로, ‘선하시며 인 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시 106:1)으로 그 속성을 표현한다.
시편 139편에 서는 인간 실존과 지극히 가깝게 관계하고 더 나아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으로 표현된다.
성서의 인격적인 신의 면모와 동양 사상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 실재 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보는 지점에서 김경재가 틸리히의 ‘존재 자체’와 불교의 ‘공’(空) 사상을 비교한 내용을 살피는 것이 이해의 심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김경재는 2009년 발표한 논문에서 폴 틸리히의 신론과 불교 의 ‘공’(空) 사상을 비교연구하였다.48)
이 글에서 김경재는 불교의 공, 진 여(眞如)도 ‘궁극적 실재’를 가리킴에 주목한다.
김경재는 특히 일본의 선 불교 철학자 아베 마사오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아베의 궁극적 실재관인 ‘공’과 ‘진여’를 틸리히의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 다.
그러나 양측을 동일화하지 않았다.
김경재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기 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밝힌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로서의 신은 자유롭고 존재(Sein) 주체성을 잃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불교의 공 과 진여는 연기(緣起) 그 자체이기 때문에 여기서 존재의 주체성이란 허 망한 망상이 될 뿐이다.49)
47) 틸리히는 성서 안의 신인동형론의 대부분은 신의 살아계심에 대한 표현들이며 신에 대하여 종교 적으로 말할 때 적절하다고 하였다. 참조.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Ⅰ, 241-244.
48) 참조, 김경재,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과 불교,” 「불교평론」 40 (2009).
49) 종교학자 길희성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불교의 공(空, sunyata) 사상을 비교연구 하였다. 그에 따르면 공은 불교에서 존재와 삶을 떠받치고 있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이르는 말이며,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서 공과 하느님의 대비는 불가피하다. 다만 김경재가 존재 자체와 도(道)를 구별하듯 길희성도 그리스도교의 하나님과 동양 사상의 공을 구별한다. 공은 궁극적 실 재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지만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은 아니다.그리고 불교도 신격 들을 인정하여 인간보다 더 힘 있는 존재를 상정하지만 그러나 불교에서의 신들은 우주의 근원 이나 창조주가 아니며 인간을 해탈로 이끌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곧 그리스도교의 신과 대비되 는 공과 이에 기반한 신격은, 존재를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과 힘이 되는 분은 아니며 또한 인간 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대상도 아니다. 공은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리키는 진여(眞如) 그 자체에서 머물 뿐이다. 길희성, 『보살예수』(서울: 동연, 2004[2024]), “공(空)과 하느님,” 175-208.
결론적으로 도나 공은 인간과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둘째로 무(無)의 문제에서다. 김경재는 무에 대한 이해에서 동양 사 상의 무와 그리스도교에서의 무를 엄격히 구분한다
이를 헬라철학이 나 눈 무의 두 가지 개념 곧 ‘절대적 무’(ouk on)와 ‘상대적 무’(me on)의 개념 을 빌려 살필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던 「도덕경」에서의 무를 살피면 절 대적인 무가 아니다.50)
이 무는 유와 상관관계적으로 엮여 있다.
김경재 는 주렴계가 쓴 「태극도설」의 한 구절 “무극이 태극이다”를 인용한다.
무 극 곧 궁극적 근원과 태극 곧 운동의 원리가 같다는 것은 상대적 무(me on) 개념과 통한다.
형상으로 드러나거나 속성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예컨대 ‘무한한 가능태와 잠재태’로서의 무인 것이다.51)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의 무는 절대적 무다.
‘무로부터의 창조’(cre atio ex nihilo) 교리의 초석을 놓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 이해가 이 이 해를 잘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무로부터 창조”하심을 선언 한다.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당신께서는 당신 에게서 나왔고 당신의 본체에서 태어난 태초가 되시고, 당신의 지혜가 되신 그분 안에서 ‘어떤 무엇’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52)
50) 한편 헬라 철학에서의 무도 잠재적 존재(meon)이다. 김경재는 헬라 철학의 신을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헬라 철학에서의 신은 ‘창조주’라기보다 ‘조성자’이며, ‘무’(nihilo)는 ‘절대무’(ouk on)가 아니라 존재의 상대적 부정, 곧 혼돈과 무질서 속에 있는 ‘잠재적 존재’(me on)를 의미한다. 태초 부터 창조의 질료로서 어떤 가능적 ‘무’가 신과 함께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 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 연구』, 67.
51) 한편 이 맥락에서 김경재는 힌두교와 불교를 발생시킨 인도인들은 의심과 불신의 감정으로 ‘존 재’ 문제에 접근하여 無와 空의 종교적 철학을 발전시켰다고 밝혔다.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 김』, 109, 115.
52) “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이여, 그러나 당신밖에는 이 하늘과 땅을 창조할 수 있는 어떠한 것(질 료)도 없었습니다.” 성어거스틴/선한용 옮김,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제12권 7장, 426.
김경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무는 “절대적 무를 의미했다”53)고 밝히면서 절대 적 무 개념은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적 종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 념이라고 밝힌다.
53)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15. 92
잠재적 질료나 형상을 갖추지 않은 가능태가 아닌 문 자 그대로의 ‘절대 무’는 사실상 인간이 온전하게 인식하기는 어렵다.
형 이상학적 개념도 인간은 반대급부를 지렛대 삼아 상상하여 생각할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 무 개념에는 신앙적 요소가 들어있다 고도 볼 수 있다.
김경재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무’ 개념이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고 보았다.
하나는 기독교 신관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 4:17), 절대적 주권과 능력과 초월성과 자유의지가 있으신 분, 피조물들과 절대적 질적 차이가 있는 분이시다.
다음으로는 창조된 것과 창조 행위 자체에 대한 대긍정이다.
기독교가 출현하였던 지중해 문화권은 당시 영지주의가 팽 배하였고 이 영향으로 물질세계를 악하게 보는 관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로부터의 창조는 창조 세계를 대긍정하여 “하늘과 땅으로 총괄되는 모 든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자 기 유한성 인식이다.
모든 존재자는 무(無)로부터 왔기에 스스로 자존성 을 지닌 영원한 존재가 아니고, 우연성과 유한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에 인간은 존재에로 부르시고 지탱하시고 이끌어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힘 입어 산다.
Ⅳ. 나가는 말
지금까지 본 논문은 숨밭 김경재가 폴 틸리히의 신관을 수용하고 해 석하는 과정과 내용을 살폈다.
틸리히의 신론은 그의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진술로 인하여 성서의 신관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있어 때로는 비판의 대상 이 되었다.
가장 큰 논쟁점은 성서의 인격주의적 신관에 대립된다는 것, 그리고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부분이다.
김경재는 이 지점을 회피하 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틸리히 신론을 탐구하였고, 결론적으로 틸 리히의 신론이 성경의 모세나 바울이 증언 및 고백과 같은 혈통에 서 있 고자 한다고 판단하였다.
김경재는 틸리히의 신론을 성서의 맥락에서 수 용하였다.
김경재는 아울러 틸리히의 ‘존재 자체’ 개념을 성서 본문과 잇는 시도 를 한다.
그는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존재 자체와 세계의 관계를,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서 존재 자체와 인간 실존 간의 관계를 읽어낸다. 그는 바울의 ‘그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 신다’는 선언을 모든 존재자들을 있게 하는 궁극적 근거로서의 존재 자체 와 연결한다.
또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에서 탕자가 돌아온 ‘아버지의 집’ 을 존재 자체로 읽으면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존재 자체로서의 신과 관계 하고 있는 존재임을 밝힌다.
김경재는 더 나아가 ‘존재 자체’와 동아시아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의 상관관계를 탐구했다.
그는 존재 자체와 동 양의 도(道) 사상을 잇는 해석을 시도하였고, 아울러 신명과 관련하여 ‘야 훼’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 하나님인지를 고민하였다.
그는 존재 자체로서 의 하나님이 18-19세기 성경이라는 경전에 담겨 비로소 한국에 입국한 ‘외래신’이 아님을 변증하고자 한 것이다. 틸리히 신론을 동양의 도(道), 공(空), 무(無) 사상과 연결지어 탐색한 그의 의도는 모두 이 맥락이다.
그러나 김경재는 성서의 진리와 동양 사상의 공명하는 지점을 찾으 면서도 동일화를 경계하였다.
그는 동양 사상이 성서의 진리와 다른 점 을 크게 두 지점으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보편성과 구체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무(無)에 대한 관점이다.
성서의 신은 인격적이고 구체적으 로 인간과 관계하는 반면 도는 구체성이 없고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 지 않는다.
또한 동양의 무는 헬라철학의 개념을 빌리자면 상대적 무 (me-on)이고 그리스도교의 무는 절대적 무(ouk-on)이다.
절대적 무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에서 구체적 이해를 확인할 수 있다.
틸리히 신론에 대한 김경재의 이와 같은 주체적인 수용과 해석의 과 정은 그의 배경과 그 배경에서 비롯된 자의식에서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경재는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유교의 세계관으로 어린 시절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성년에 가까워지면서 유교의 신 이해 가 ‘우주적 원리’같이 느껴져 갈증을 느꼈고, 그즈음 성경을 통독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허락되는 은총에 감격을 느끼며 기독교 로 ‘개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 대하여 “선택이면서 섭리였다”고 고 백한다.
그는 조상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유학자들이 사랑방에 모여 시문 을 논하는 가문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여 신학자가 되고 목사가 되었다.54)
54) 흥미롭게도 유교 가문 출신 목사 ‘이원영’과 김경재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성경 경전을 중 시한 것이다. 이는 유교의 경전 중시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도 해석된다. 다른 하나는 실 생활과의 밀착성을 중시한 것이다. 이원영은 단순한 지적 측면의 교리 수용을 넘어 “생활 개선” 을 강조했다. 이원영은 한국 유교의 아성 안동 출신이자 이퇴계 가문의 후손으로, 유교 경전에 박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재도 “생활신앙”이라는 모토를 여러 곳에서 강조한 바 있다. 김 경재의 생활신앙 강조는 장공 김재준으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김경재는 장공의 ‘생활신앙’이 마 치 유교의 실학과 같이 장공의 기독교적 실학 정신의 표출이라고 설명하였다. 황재범, “성경적이 며 실용주의적 개혁가 이원영 목사,” 「신학사상」 181 (2018/6); 김경재, 『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 기』(서울: 삼인, 2016), 4.
그러나 그의 개종이 동아시아 한국이라는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로서의 정체성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아시아의 정신적 문화 토양이라는 거대한 전통”과 “성서 안에서 들려오는 새롭고 낯선 복음” 사이 에서 양자택일이 아닌 대화의 길을 택하였다.55)
김경재는 수많은 신학자 중 본인이 특별히 폴 틸리히의 신학 연구에 매진한 이유와 관련하여 틸 리히의 “‘경계선상에 서서 신학 하기’가 친근감과 편안함을 주었기 때 문”56)이라고 밝혔다.
김경재 그 자신도 동양과 서양의 경계선 어딘가에 서 있다고 여긴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물론 그 경계 지점이라 는 것이 성서와 동양 사상의 사이가 아니라, 서양의 ‘신학’(theology)과 동 양의 사상 사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둔다.
김경재의 치열한 고뇌는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한국 의 그리스도인은 한쪽으로는 서양 문화권에서 주로 형성된 신앙의 선언 들과 신학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또 다른 한쪽으로는 동양 사상과 전통이 기층에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학자는 한국의 전통적 종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다루면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개종의 양상은 새 종교가 옛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과 새것을 혼합하는 형태로 일어난 다고 밝힌 바 있다.57)
55) 김경재, 『틸리히 신학 되새김』, 10.
56) Ibid., 13.
57) 정수복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중 “한국의 전통종교와 기독교”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는다. “유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사제와 종교조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종 교와 쉽게 양립하고 혼합되었다,” “유교는 그 자체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타종교와 결합 된 방식으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형성에 작용하였다,” “한국의 종교사를 보면 새로 유입된 종 교가 옛 종교를 대체하는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새로 유입된 종교는 늘 기존 종교들과 공존하 며 혼합되는 양상을 보여왔다,” “한국인들에게 개종은 옛 신앙을 버리고 새 신앙을 취하는 것이 라기보다는 옛것과 새것을 혼합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유교적 전통 에서 비롯된 … 틀을 대부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정수복,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서울: 생 각의 나무, 2007), 336-339; 그러나 다음의 해석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박재순은 한국 의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종교들 위에 또 하나의 외래종교를 덧붙인 것이 아니라 한국종교의 지 층들을 개벽적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옴으로써 한국인들의 하나님 신앙이 힘있게 살아나고 민족의 종교정신문화와 생명 에너지가 끌어올려졌 다고 분석했다. 박재순, “한국정신문화와 기독교의 새로운 요소,” 「신학사상」 123 (2003/3).
우리는 이 같은 분석에 귀를 완전히 닫을 수 없다.
본 논문은 지금까지 숨밭 김경재가 틸리히의 신론을 주체적으로 수 용하고 해석하는 과정과 내용을 살폈다.
이 연구가 가지는 의의는 김경 재의 작업 탐색을 통하여 서구 신학과 동양 종교사상 간의 공명 지점을 포착하고 대화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 논의는 토착화신 학 작업과는 구별된다.
말하자면 ‘신론’의 범주에서 서구신학이 아닌 동 양의 종교사상이 운신하는 공간을 확인한 셈이다.
물론 본 논문에서 충 분히 밝힌 바와 같이 환원이나 혼합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 범주에서 동양의 종교사상이, 김경재의 표현을 빌리면 ‘바알 신’ 수준으 로 폄하되는 것을 막는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배척이 아닌 포월(包越)의 패러다임은 오늘날 ‘동아시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신학 작업 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
본 연구자는 이번 연구를 통하여 존재 자체로서 의 신 이해 연구의 확장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후속 연구의 기회가 있다 면 김경재와 같은 시도 곧 동양 종교 전통에서의 존재 자체에 대한 주체 적인 이해와 해석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이번과는 반대로 서양 신학자들의 논의 맥락에서 검토해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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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논문은 숨밭 김경재가 폴 틸리히의 신론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과 정과 내용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김경재는 틸리히 신론을 일방 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대화하고 응답하며 해석한다. 해석의 과정은 김경재 안의 두 정체성에 따라 수행된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서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한국의 전통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다. 틸리히의 신관은 그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인하 여 성서의 하나님과 합치가 되는가 라는 논쟁점을 가지고 있는데, 김경 재는 틸리히의 신관을 성서의 맥락에서 수용한다. 이에 그는 ‘존재 자체’ (being-itself)를 성서 본문과 연결짓는 시도를 한다. 한편으로 김경재는 동양의 한국인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양 사상 안에서 ‘존재 자체’에 상 응하는 개념 찾기를 시도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거이자 힘이 되 는 존재 자체와 그 개념이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 다. 특히 김경재는 동양의 도(道) 사상을 ‘존재 자체’와 잇기를 시도한다. 김경재는 틸리히 신론 해석의 작업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동양 사상 사이의 공명 지점을 예리한 통찰로 짚어내나, 환원시키거나 혼합하 지는 않는다. 그는 성서와 동양 사상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진술한 다.
주제어 김경재, 폴 틸리히, 신론, 존재 자체, 동양 사상
Abstract
Kim Kyoung Jae’s Interpretation of Paul Tillich’s Doctrine of God: In the Context of East Asian Christianity
Min-Ai Lee (Research Fellow, Philosophy of Religion Yonsei University)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elucidate the process and content of Soombat Kim Kyoung Jae’s reception and interpretation of Paul Tillich’s doctrine of God. Kim Kyoung Jae subjectively discusses Tillich’s doctrine of God, responds to it, and interprets it, instead of uncritically accepting it. This engagement progresses according to two identities held dear: one as a Christian and the other as a Christian rooted in the traditions of Korea in East Asia. Questions have been asked of Tillich’s doctrine of God, whether its philosophical and ontological approach aligns with the God of the Bible. However, Kim Kyoung Jae accepts Tillich’s doctrine of God within the Bible. Furthermore, Kim Kyoung Jae attempted to connect biblical passages identifyin God with ‘being-itself.’ Kim Kyoung Jae also comparatively explored the concept of ‘being-itself’ within Eastern thought as a Korean Christian because being-itself, the ground and power of all beings, also exists in non-Christian cultural regions. Kim Kyoung Jae attempted to connect Eastern Taoist thought with being-itself. As shown, Kim Kyoung Jae identifies points of resonance between Christian faith and Eastern thought with sharp insight, yet he neither reduces nor blends them. He clearly shows the differences between the Bible and Eastern thought.
Key Word :Kim Kyoung Jae, Paul Tillich, Doctrine of God, being-itself, Eastern Thought
논문접수일: 2025년 8월 31일 논문수정일: 2025년 9월 20일 논문게재확정일: 2025년 9월 20일
神學思想 210집 · 2025 가을
DOI: 10.35858/sinhak.2025..21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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