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1. 서론
2. 도(道)ㆍ리(理)와 성인의 관계
3. 법과 정치의 중추가 되는 성인
4. 시대의 변화와 성인의 한계
5. 성인에 대한 모순적 서술의 원인과 그 의미
6. 결론
1. 서론
한비자는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제어 할 수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며, 법치와 권력을 운용하는 방법 등에 대해 전문적으로 기술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한비자는 제왕학의 고전으로 여겨졌 으며, 법(法)⋅세(勢)⋅술(術)로 요약되는 군주의 정치철학은 중국철학을 한층 더 다채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특히 역대 중국의 왕조 가운데 오랜 역 사와 번영을 누린 나라들이 한비자의 사상으로부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은 것 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한비자의 견해들은 정권의 확립과 유지에 기 초적인 토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후 한비자의 정치철학은 중국을 넘 어서서 동양 전체에 전파되었으며, 점차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정치철학의 측면에서 한비자의 두드러지는 지점은 성인을 중요한 요소로 등 장시킨다는 것이다.
한비자는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거나 이론을 정립할 때에 성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철학에서 성인은 모든 사람 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기에 어떠한 결점도 없는 존재 로 간주된다.
한비자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성인은 이렇게 묘사되며, 정치적인 영역에서 성인이 가지는 역할을 상당히 강조한다.
하지만 때때로 한비자는 성 인이 한계를 가진 존재라고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인의 능력에 제한이 있거 나 현실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당연히 한비자의 이와 같은 모순적인 태도는 독자들의 의문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성인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관점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 성과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해외 학술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한비자에 대한 연구는 주로 성인보다는 법가 철학의 다른 요소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다분 하다.
다행히도 국내 학계에서는 이러한 점에 주목한 연구자들이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논의를 긍정적-이상적, 긍정적-역설적, 부정적인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 뒤에 이 세 범주는 법가의 사상을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
1) 강정인·김태환, 「성인(聖人)에 관한 한비자(韓非子)의 중층적 언술 검토: 성인에 대한 모순된 평가를 중심으로」, 2017, 221-239쪽.
이러한 연구는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다양한 태도를 분류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일정한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태도가 모순적임 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발생하게 된 근원을 분석하지 않고, 법가라는 큰 틀에서 상충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태도는 성인의 역할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제한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논술을 선별하여 분석함으로써 한비자의 성인이 가지는 특징을 규명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이를 통해 성인에 대한 한비 자의 모순적인 입장을 확인하고,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한비자의 성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평가 는 최대한 자제하고, 객관적이면서도 정확한 근거를 제공하는 데에 중점을 둘 것 이다.
이러한 연구는 한비자의 성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할 뿐만 아 니라 중국철학에서 성인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번 고찰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 으로 예상된다.
2. 도(道)⋅리(理)와 성인의 관계
다른 제자백가들과 마찬가지로 한비자속에서 성인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 한다.
한비자는 성인을 자신의 이론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삼기도 하고, 성인 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기도 하며, 때로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인물들을 성인으로 상정하여 이들을 평가하거나 이와 연관된 여러 고사(故事)들 을 서술한다.
따라서 성인은 한비자의 최고 개념인 동시에 한비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는 심리와 행위의 측면에서 일반인과 성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면
“무릇 사람이란 외물로 움직여지 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예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일반 대중이 예를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힘을 쓰고 때로는 게을리한다. … 일반 대중은 비록 어긋난다 하더라도 성인은 공경을 행하고 수족 움직이는 예 를 다하여 게을리하지 않는다.”2)
2) 韓非子, 「解老」, “凡人之爲外物動也, 不知其爲身之禮也. 衆人之爲禮也, 以尊他人也, 故 時勸時衰. … 衆人雖貳, 聖人之復恭敬盡手足之禮也不衰.”
라고 하여 사소한 예를 실천할 때조차도 일반인 과 성인은 차이가 존재한다고 기술한다.
그렇지만 한비자는 성인이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표면적인 내용을 확인하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고, 성인의 존립 근거 에 대해 한층 더 깊이 분석한다.
일반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부산하다. 부산하면 낭비가 많다. 낭비가 많은 것 을 가리켜 사치라고 한다. 성인의 마음가짐은 조용하다. 조용하면 낭비가 적다. 낭비가 적은 것을 가리켜 아낀다고 한다. 아끼는 방법은 도리로부터 나온다. 대 저 아낄 수 있어야 그것이 도(道)에 따르며 리(理)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다. 일반 사람들은 우환에 걸리고 재난에 빠져들더라도 아직 물러설 줄 모르고 도리에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성인은 비록 우환이나 재난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 더라도 허무의 자세로 도리를 따르려 하므로 조복(早服)이라 일컫게 된다.3)
3) 韓非子, 「解老」, “衆人之用神也躁. 躁則多費, 多費之謂侈. 聖人之用神也靜. 靜則少費. 少 費之謂嗇. 嗇之謂術也, 生於道理. 夫能嗇也, 是從於道而服於理者也. 衆人離於患, 陷於禍, 猶未知退, 而不服從道理. 聖人雖未見禍患之形, 虛無服從於道理, 以稱蚤服.”
한비자가 보기에 일반인과 성인의 차이는 바로 낭비가 많고 적음에 있으며, 양측의 낭비가 다른 이유는 바로 한쪽은 내면이 경솔하고 다른 한쪽은 고요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노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평가받기에 성인에 대한 논술이 고요함을 중시하는 노자의 철학과도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을 발견 할 수 있다.4)
4) 한비자는 노자의 철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영향을 받았다. 첫째, 냉혹하고 무정한 이기주의. 둘째, 내정한 계산. 셋째, 공리의 추구. 리쩌허우 저, 정병석 옮김, 중국고대사상사론, 2005, 214-225쪽.
하지만 한비자는 성인을 논술할 때에 노자의 이해를 보다 구 체화하며,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개념들을 성인과 결부시킨다.
그것은 바로 도와 리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즉 성인이란 본질적으로 도와 리를 어기지 않기 때문에 그의 내면은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성인은 일반인들과 달리 눈앞에 재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순간에도 도와 리를 따라 생활할 뿐이다.5)
5) 宋洪兵, 「善如何可能? 聖人如何可能?: 韓非子的人性論及內聖外王思想」, 2019, 76쪽.
한비자는 성인이란 도⋅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도와 리에 어긋나지 않기에 성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비자의 성인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와 리에 대한 논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비자는 도와 리를 명확히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道)란 만물이 존재하는 근거이며 모든 리(理)가 모인 근원이다. 리란 사물 을 이루는 조리이며 도란 만물을 이루게 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 기를 “도는 다스리는 것이다.”라고 한다. 사물에는 각기 리가 있어 서로 침범할 수 없다. 사물에는 각기 리가 있어 서로 침범할 수 없으므로 리가 사물을 각기 결 정지으며 만물을 각각 리를 달리하고 있다. 만물은 각각 리를 달리하고 도가 만물 의 이를 모두 통괄하므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변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따라서 일정한 존재방식이 없다. 일정한 존재방식이 없는 까닭에 죽고 사는 기(氣)를 여 기서 받고 모든 지혜를 여기서 퍼내며 모든 일의 흥폐가 여기서 일게 된다.6)
6) 韓非子, 「解老」, “道者, 萬物之所然也, 萬理之所稽也. 理者, 成物之文也, 道者, 萬物之所 以成也. 故曰, 道, 理之者也. 物有理, 不可以相薄. 物有理不可以相薄, 故理之爲物之制. 萬 物各異理, 萬物各異理而道盡稽萬物之理, 故不得不化. 不得不化, 故無常操. 無常操, 是以死 生氣稟焉, 萬智斟酌焉, 萬事廢興焉.”
무릇 리란 모나고 둥근 것과 짧고 긴 것과 거칠고 가는 것과 단단하고 연한 것 이 구별되는 갈림을 말한다. 따라서 리가 일정해진 이후에 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정된 리에 존과 망이 있고 사와 생이 있으며 성과 쇠가 있는 것이다.7)
7) 韓非子, 「解老」, “凡理者, 方圓短長麤靡堅脆之分也. 故理定而後物可得道也. 故定理有存 亡, 有死生, 有盛衰.”
한비자는 도는 만물의 근거인 동시에 각각의 리를 총합한 것으로 지적한 다.8)
다시 말해 도는 우주의 보편적인 법칙을 가리키고, 리는 개별 사물의 구체 적인 법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개별 사물은 반드시 크기, 모양, 속 성, 생사와 흥망 등의 특성들을 가지는데, 한비자는 이것들이 모두 리라고 정 의한다. 또한 각각의 리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 이유는 리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도에 의해 각각의 리들이 제어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9)
8) 양순자, 「한비자(韓非子)의 법철학 - 도(道)와 법(法)의 관계를 중심으로」, 2010, 452쪽.
9) 한비자는 한편으로 리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도와 연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리가 결합된 도를 제기함으로써 도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른 이론을 전개하였다. 김영철, 「한비자통치 론의 철학적 근거」, 2019, 39쪽.
즉 도와 리는 일종의 표리 관계로서 우주와 개별 사물을 규정하고 주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비 자의 성인은 자연스레 사물 하나하나의 구체적 법칙과 이러한 사물의 법칙들이 모여 형성된 우주의 전체 법칙을 모두 체득하고 따르는 인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 다.
도와 리는 한비자의 성인이 한시라도 떼어놓지 않는 것으로 그가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한비자는 이러한 성인의 뛰어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사람들은 산 코끼리를 본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죽은 코끼리 뼈를 얻어 그 그림을 의지하여 살아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을 모두 가리켜 상(象)이라고 한다. 이제 비록 도를 실제로 보거나 들을 수 없다 해도 성인은 그 나타난 공의 자취를 집어 들어 그 형체를 소상히 생각해 내보인다.10)
10) 韓非子, 「解老」, “人希見生象也. 而得死象之骨, 案其圖以想其生也. 故諸人之所以意想者, 皆謂之象也. 今道雖不可得聞見, 聖人執其見功以處見其形.”
사람들은 코끼리를 직접 보고 만진 적은 없지만 뼈를 통해 코끼리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가늠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인은 감각적인 측면에서 도를 인식 할 수는 없지만 도의 기능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형체로 나타낼 수 있 다고 주장한다.
즉 도와 리가 아무리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성인은 이것 들을 체득하고 현실 속에서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11)
11) 宋洪兵, 「韓非子道論及其政治構想」, 2018, 55쪽.
한비자가 보기 에 성인은 도와 리를 체득한 인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것들의 범위를 벗어 나지 않는다.
3. 법과 정치의 중추가 되는 성인
한비자를 법가의 서적으로 분류하는 주된 이유는 법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를 확신하고, 이에 대해체계적으로 논술하기 때문이다.
“법술을 놓아두고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하면 요(堯)도 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수 없다. 규구(規 矩)를 버리고 아무렇게나 어림잡으면 해중(奚仲)도 수레바퀴 하나를 완성할 수 없다. 잣대 없이 길고 짧은 차를 가린다면 왕이(王爾)도 절반으로 자를 수 없다. 한편 보통 군주로 하여금 법술을 지키게 하고 서투른 공장이로 하여금 규구나 잣 대를 들게 한다면 만에 하나도 실패가 없을 것다.”12)
12) 韓非子, 「用人」, “釋法術而任心治, 堯不能正一國. 去規矩而妄意度, 奚仲不能成一輪. 廢 尺寸而差短長, 王爾不能半中. 使中主守法術, 拙匠執規矩尺寸, 則萬不失矣.”
와 같이 한비자는 여러 곳에 걸쳐 법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결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따라서 법은 한비자의 정체성을 뚜렷이 나타내는 단어일 뿐만 아니라 한비자의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법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 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하나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법이란 자연 상태로부터 저절로 출현하여 사회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에 의 해 인위적으로 제정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법의 기원을 밝 히기 위해 성인을 등장시킨다.
쇠망치라는 것은 울퉁불퉁한 것을 두들겨 평평하게 만드는 도구다. 도지개란 것은 곧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 도구다. 성인이 법을 정한 것은 울퉁불퉁한 상황 을 평평하게 하고 굽은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기 때문이다.13)
성왕이 법을 정할 때는 그 은상이 족히 선행을 권할 만하고 그 형벌의 위엄이 족히 포악을 누를 만하고 그 방비가 족히 완벽을 기할 만하다.14)
13) 韓非子, 「外儲說右下」, “椎鍛者, 所以平不夷也. 榜檠者, 所以矯不直也. 聖人之爲法也, 所 以平不夷矯不直也.”
14) 韓非子, 「守道」, “聖王之立法也, 其賞足以勸善, 其威足以勝暴, 其備足以必完.”
한비자에 따르면 평평하지 않거나 비틀어진 물건을 바로 잡는 데에 쇠망치 와 도지개를 사용하는 것처럼 성인이 법을 만든 것은 일정한 규격에서 벗어난 사 람들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성인은 때때로 왕의 지위를 겸하기도 하는 데, 성왕에 의해 제정된 법은 적절한 수준의 상을 베풀고 위엄을 내보임으로써 최선의 결과를 맞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성인 혹은 성왕이 법을 제정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법에 권위를 부여하고 법치의 정당성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앞에 서 언급한 것처럼 성인은 도와 리를 체득하였기에 그가 제정한 법은 필연적으로 오류가 존재할 수가 없다.15)
15) 법 이외에도 한비자, 「해로」 속에는 “성인이 도를 얻어 문장을 완성하였다.”(韓非子, 「解老」, “聖人得之以成文章.”)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말하는 문장이란 본래 아름다운 장식 이나 화려한 치장을 뜻하지만 그 의미가 확장되어 예악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張覺, 韓 非子校疏(上冊), 2010, 357쪽.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분명히 문명과 제도의 창조를 성인의 사명 으로 생각하는 유가의 성인관과 일정 부분 상통한다. 정병석·김영철, 「韓非子 「解老」의 “聖人得 之以成文章”에 숨은 儒⋅道의 法家的 融合」, 2019, 15-18쪽.
따라서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의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한비자는 성인의 역할을 법의 제정에만 제한하지는 않는 다.
한비자는 성인이란 법의 집행이라는 측면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인물 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성인의 정치는 법률과 금제를 분명히 한다.
법률과 금제를 분명하게 밝히면 관직이 바로잡힌다. 상벌을 엄격히 하여 상벌이 치우치지 않으면 백성이 힘써 일한다. 백성이 힘써 일하고 관직이 바로 잡히면 나라가 부해진다. 나라가 부해지 면 군대가 강해져서 패왕의 일이 성사될 것이다.16)
16) 韓非子, 「六反」, “聖人之治也, 審於法禁. 法禁明著, 則官治. 必於賞罰, 賞罰不阿, 則民 用. 民用官治則國富. 國富, 則兵强, 而霸王之業成矣.”
한비자는 성인이 법과 금령을 명확히 드러내면 관청의 일처리가 수월해지 고, 상과 벌을 공정히 사용하면 백성은 시키는 일에 복종한다고 서술한다.
이러 한 과정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패도를 이룰 수 있는 전제가 되기에 결코 소 홀히 다룰 수 없다.
즉 성인이 힘을 쏟아야 하는 지점은 도덕을 통한 교화가 아니 라 강력한 법치에 있다는 것이다.17)
17) 許建良, 先秦法家的道德世界, 2012, 386쪽.
따라서 한비자는 성인이 법을 엄격히 집 행한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법치를 수호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법을 제 정하거나 집행하는 행위 이외에도 한비자는 성인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핵심이 되는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가지는 정치적인 역량을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성왕이나 현명한 군주는 그렇지 않다. 안에서 든다 하여 친족을 피하지 않고 밖에서 든다 하여 원수를 피하지 않는다. 옳은 것이 여기에 있으면 따라서 그를 발탁하고 그른 것이 여기에 있으면 따라서 그를 처벌한다. 이런 까닭으로 현량한 사람이 나아가게 되고 간악한 자는 물리치게 된다.18)
18) 韓非子, 「說疑」, “聖王明君則不然. 內擧不避親, 外擧不避讎. 是在焉, 從而擧之, 非在焉, 從而罰之. 是以賢良遂進而姦邪幷退.”
한비자가 보기에 성인이 인재를 등용할 때에 언제나 공명정대한 기준을 적 용한다.
따라서 국정을 운영하는 데에 합당한 인물이라고 판단되는 인재를 발견 한다면 혈연이나 은원의 관계를 따지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어질고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간사한 인물들을 대신하게 되고, 나라는 안정의 기 틀을 다질 수 있게 된다.
한편 한비자는 성인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최선의 결 과를 낳는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아무리 막중한 역할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수행해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성인은 옳거나 그릇된 실제에 소상히 밝아 치란의 실정을 잘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릴 적에는 명확한 법을 설정하고 엄격한 형벌을 제시하여 장차 그것으로 모든 사람의 혼란을 구하고 천하의 재앙을 물리쳐야 한다. 그래야 강자가 약자를 침해하지 않고 다수가 소수를 학대하지 않고 노인이 수명을 다 누 리고 어린 고아가 성장하고 변경이 침략당하지 않고 군신이 서로 친밀해지고 부 자가 서로 감싸주고 다투다가 사망하거나 붙잡히는 염려가 없게 된다. 이것이 바 로 최상의 공적이라고 하는 것이다.19)
19) 韓非子, 「姦劫弑臣」, “聖人者, 審於是非之實, 察於治亂之情也. 故其治國也, 正明法, 陳嚴 刑, 將以救群生之亂, 去天下之禍. 使强不陵弱, 衆不暴寡, 耆老得遂, 幼孤得長, 邊境不侵, 君臣相親, 父子相保, 而無死亡係虜之患. 此亦功之至厚者也.”
한비자는 성인이란 근본적으로 일의 실정을 깊이 살핀 뒤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인의 감독 아래에서 시행된 법과 형벌은 언제나 적절할 수밖에 없으며, 강자와 약자⋅다수와 소수⋅노인과 고아⋅군주와 신하⋅아버지와 아들 등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정함을 누리게 된다고 확신 한다.
당연히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정함을 느끼게 되면 혼란은 사전에 억제되고, 정치의 안정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한비자는 정치의 안정을 구현해낼 수 있는 인물로 성인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4. 시대의 변화와 성인의 한계
한비자는 성인 그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우주론적 시각과 현실적 측 면에서 성인이 가지는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론을 관 철시키는 수단으로 성인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인에 대한 한비 자의 논술은 다른 여러 주장들의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주목할 만 한 점은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논술을 검토하다 보면 성인의 역량을 부정하는 표현 또한 자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인이라는 최고 개념을 부정적인 시 각에서 서술하는 것은 분명히 의아해 보일 수 있지만 한비자가운데는 성인을 폄하하는 몇몇 논술들이 출현한다.
상고(上古) 시대에는 사람은 적고 새나 짐승이 많았다. 사람들이 새⋅짐승⋅ 벌레⋅뱀을 이기지 못하였다. 어느 성인이 일어나 나무를 얽어 집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해악을 피하게 하였다. 그래서 백성이 좋아하여 천하의 왕으로 삼고 이 름을 유소씨(有巢氏)라고 불렀다. 백성은 나무열매⋅풀씨⋅조개를 먹었으나 비 린내 나고 더러운 냄새로 뱃속이 상하여 병을 많이 앓았다. 어느 성인이 일어나 부싯돌로 불을 일으켜서 비린내를 없앴다. 그래서 백성이 좋아하여 천하의 왕으 로 삼고 이름하여 수인씨(燧人氏)라고 불렀다. 중고(中古) 시대에는 천하에 큰 물이 나서 곤(鯀)과 우(禹)가 물을 텄다. 근고(近古) 시대에는 걸(桀)과 주(紂) 가 난폭하여 탕(湯)과 무왕(武王)이 정별하였다. 만약 하후씨(夏后氏)의 시대에 나무를 얽거나 부싯돌을 긋는 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곤과 우에게 비웃음을 당했을 것이다.은(殷)⋅주(周)의 시대에 물을 트는 자가 있었다면 반드시 탕과 무왕에 게 비웃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즈음 시대에 요⋅순⋅우⋅탕⋅문⋅무의 도를 찬미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새 성인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20)
20) 韓非子, 「五蠹」, “上古之世, 人民少而禽獸衆. 人民不勝禽獸蟲蛇. 有聖人作, 搆木爲巢以 避群害. 而民悅之, 使王天下, 號之曰有巢氏. 民食果蓏蚌蛤, 腥臊惡臭而傷害腹胃, 民多疾病. 有聖人作, 鑽燧取火以化腥臊. 而民說之, 使王天下, 號之曰燧人氏. 中古之世, 天下大水, 而 鯀禹決瀆. 近古之世, 桀紂暴亂, 而湯武征伐. 今有搆木鑽燧於夏後氏之世者, 必爲鯀禹笑矣. 有決瀆於殷⋅周之世者, 必爲湯武笑矣. 然則今有美堯舜禹湯文武之道於當今之世者, 必爲新 聖笑矣.”
한비자는 수인씨⋅곤과 우⋅탕과 무 등 역사 속에서 성인으로 지칭되는 인 물들은 각각 상고⋅중고⋅근고의 시기에 화식(火食)⋅치수(治水) 등의 측면에 서 인민을 위해 봉사한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한비자는 과거에 성인으 로 칭송받던 인물들이 그 시대에만 유의미한 존재일 뿐, 변화하는 시대에는 적응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상고 시기의 성인이 중고 시기에 상고 시기의 업적을 남긴다면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중고 시기의 성인이 근고 시기 에 중고 시기처럼 활약하는 것 또한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즉 한비자는 고대 성인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어 나아갈 수 없으며, 각자 가 처한 시대 속에서만 성인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뚜렷이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한비자는 과거에 실존했던 성인들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고 할지라도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기에 과거의 성인에게 과도하게 집 착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21)
21) 이러한 견해는 한비자가 변법(變法)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김예호, 「한비자법치론 연구: 법치론 수립의 이론체계 분석」, 1998, 43-45쪽 참조.
한비자가 성인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논술하는 태 도는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저 허유(許由)⋅속아(續牙)⋅진백양(晉伯陽)⋅진전힐(秦顚頡)⋅위교여 (衛僑如)⋅호불계(孤不稽)⋅중명(重明)⋅동불식(董不識)⋅변수(卞隨)⋅무 광(務光)⋅백이(伯夷)⋅숙제(叔齊) 같은 열두 사람은 모두 위로 이득을 보여도 좋아하지 않고 아래로 어려움에 이르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혹 천하를 준다고 하더라도 취하지 않으며 치욕스런 이름이 있으면 봉록의 이득도 좋아하지 않았 다. 도대체 이득을 보여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군주가 비록 후한 상을 주더라도 권할 수 없으며 어려움에 이르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군주가 비록 엄한 형 벌을 내려도 위협할 수 없다. 이것을 일러 명령에 따르게 할 수 없는 백성이라 한다. 이 열두 사람은 혹 동굴 속에 엎드려 죽고 혹 초목 사이에서 말라 죽고 혹 산골짜기에서 굶어죽고 혹 냇물이나 우물 속에 빠져 죽었다. 이와 같은 백성 이 있어 옛날의 성왕도 모두 신하로 할 수 없었다. 오늘날 장차 이들을 어찌 등용 하겠는가? 대저 관용봉(關龍逢)⋅왕자비간(王子比干)⋅수계량(隨季梁)⋅진설 야(陳泄冶)⋅초시서(楚申胥)⋅오자서(吳子胥) 같은 여섯 사람은 모두 심하게 다투고 강력히 간하여 그 군주를 이기려 하였다. 말이 받아들여지고 일이 행하여 지면 마치 스승과 제자 사이 같으나 한마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한 가지 일이 라도 행하여지지 않으면 말로써 그 군주를 억누르고 이어서 위협을 가하여 비록 몸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허리와 목이 붙지 못하며 손발이 따로 있게 되더라도 꺼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신하는 옛날의 선왕들도 모두 차마 견딜 수 없었다. 오늘날 장차 이들을 어찌 등용하겠는가?22)
22) 韓非子, 「說疑」, “若夫許由續牙晉伯陽秦顚頡衛僑如孤不稽重明董不識卞隨務光伯夷叔齊, 此十二人者, 皆上見利不喜, 下臨難不恐, 或與之天下而不取, 有萃辱之名, 則不樂食穀之利. 夫見利不喜, 上雖厚賞無以勸之, 臨難不恐, 上雖嚴刑, 無以威之. 此之謂不令之民也. 此十二 人者, 或伏死於窟穴, 或槁死於草木, 或飢餓於山谷, 或沈溺於水泉. 有民如此, 先古聖王皆不 能臣. 當今之世, 將安用之? 若夫關龍逢王子比干隨季梁陳泄冶楚申胥吳子胥, 此六人者, 皆疾 爭强諫以勝其君. 言聽事行, 則如師徒之勢, 一言而不聽, 一事而不行, 則陵其主以語, 從之以 威, 雖身死家破, 要領不屬, 手足異處, 不難爲也. 如此臣者, 先古聖王皆不能忍也. 當今之時, 將安用之?”
한비자는 역사 속에 등장했던 열두 명의 은자와 여섯 명의 고집 센 신하들을 근거로 제아무리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은자들을 등용할 수 없으며, 고집 센 신하 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다시 말해 성인이 은자들과 신하들을 회유했음 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언제나 이상적인 결과만을 도출해내 는 성인이 자신보다 뛰어나지도 않고 직급도 낮은 인물들을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는 것은 은자를 등용하고 신하를 설득하는 측면에서 성인도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의미한다.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간에 성인이 열두 명의 은자와 여섯 명의 고집 센 신하들을 제어하지 못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성인의 지도력과 용인술에 한계가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성인에 있어서도 덕이 요순(堯舜)과 같으며 행실이 백이(伯夷)와 같더라도 지위가 세상에 추대되지 않으면 공을 세우지 못하고 명성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 므로 옛날에 능히 공과 명성을 다 이룰 수 있었던 자는 많은 사람들이 힘으로 돕 고 측근이 정성으로 친분을 맺고 먼 자가 명성으로 칭찬하며 신분이 높은 자가 세를 가지고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므로 태산 같은 공을 국가에 길 이 세우고 일월 같은 명성을 오래도록 천지에 드러낼 수 있었다.23)
23) 韓非子, 「功名」, “聖人德若堯舜, 行若伯夷, 而位不載於世, 則功不立, 名不遂. 故古之能致 功名者, 衆人助之以力, 近者結之以成, 遠者譽之以名, 尊者載之以勢. 如此, 故太山之功長立 於國家, 而日月之名久著於天地.”
나아가 한비자는 성인 혼자서 완수할 수 있는 업적은 아무것도 없으며, 반 드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인이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임은 틀림이 없지만 사람들이 성인을 받들어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공적도 이 룰 수 없다는 것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할 때에만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고, 후세에 칭송받을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한비자의 관 점은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을 반증한다.
한비자의 논술은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성인과 상당한 거리감을 가진다.
성 인은 매순간 변화하는 시대와 부합하지 못하고, 지도력과 용인술에 한계를 가지 며,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이러한 견해는 성인이 갖춘 능력에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의미 한다.
한비자는 성인에 대한 몇몇 부정적인 서술을 통해 성인에 대해 다소 회 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성인에게 완벽이라는 특성을 부여하던 학문 체계의 이론들과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5. 성인에 대한 모순적 서술의 원인과 그 의미
앞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시각은 대립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한비자는 법의 제정과 집행, 나아가 정치의 핵심으로서 성인이 가지는 역학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능력적인 측면 에서도 한계를 가진다고 분명히 지적하기 때문이다.
즉 성인이라는 하나의 대상 을 둘러싸고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제기한 것이다.
특히 우주의 전체 법칙을 체 득한 성인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진다는 한비자의 견해는 자연스레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비자가 어째서 동일한 성인을 두 고 확연히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비자속에서 성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이유는 아래의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역사적인 측면으로부터 보면 성인에게 요구하는 내용이 달라졌다는 것 이다. 성인이란 일종의 문화적 상징부호로 사람들의 염원과 희망이 반영된 존재 이다.24)
한비자가 출현하기 이전의 사람들은 소박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인에게 그다지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정치적인 이해가 첨예해지고, 이에 따라 성인에 대한 서술 또한 상당히 복잡해지 게 된다.
즉 성인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답습해서는 당시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 결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상고에는 도덕을 다투고, 중세에는 지모를 겨루었으나 오늘날에는 기력을 다툰다.”25)라고 언급하는 점은 한비자 의 시대가 복잡한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사회에 진입했다는 점을 의미한다.26)
그러므로 한비자의 일차적인 관심은 사회 질서의 회복과 안정을 통해 실질적 인 힘을 축적하는 데에 있고, 성인 역시 고상한 도덕보다는 법과 정치 질서를 옹호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27)
24) 정병석, 주역과 성인, 문화의 상징으로 읽다, 2018, 14-15쪽.
25) 韓非子, 「五蠹」, “上古競於道德, 中世逐於智謀, 當今爭於氣力.”
26) 강정인·김태환, 「성인(聖人)에 관한 한비자(韓非子)의 중층적 언술 검토: 성인에 대한 모순된 평가를 중심으로」, 2017, 232쪽. 한비자는 이러한 논술들을 통해 도덕이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승환, 「사회규범의 공공성에 관한 법가의 인식(1): 한비자 (韓非子)의 인⋅의(仁⋅義) 비판을 중심으로」, 2003, 310-326쪽에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27) 宋洪兵, 「“應時”與 “複古”之間: 共識視閾中的儒法曆史觀初探」, 2008, 51쪽.
한비자가 보기에 시대란 변하면 추 구하는 가치 또한 달라지는 것이기에 힘의 논리가 팽배하던 시대 속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성인은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한비자가 성인을 인정하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내용들은 대부분 이러한 배경에 서 비롯된다.
둘째, 학술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한비자는 유가⋅묵가⋅도가 등 제자백가의 영향을 받았다.28)
비록 한비자는 법가에 속하지만 법의 중요성만을 강조 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와 묵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노자와 도가 의 주장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한비자는 법가 사상 을 중심으로 하면서 제자백가를 재구성하여 자신의 이론으로 만든 것이다.
성인 에 대한 이중적 논의는 한비자가 제자백가와 학문적으로 교류하고 심층적으로 분석한 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한비자는 제자백가의 다양한 성인을 검 토하며, 현실적인 감각을 갖춘 성인을 내세우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성 인에 대한 토론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서로 다른 주장과 근거들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셋째, 문헌학의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한비자는 한비(韓非)라고 하는 개인 이 서적 전체를 집필한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한비자속에 편입시킨 흔적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 저명한 서적들이 편찬되는 과정을 살펴보 면 후대 사람들이 앞선 시대의 권위에 의존하는 일은 비일비재한 현상이었다.
이 것은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옛것을 존중하고 현재의 것을 천시한다. 그러므로 도를 실천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농이나 황제에 의탁한 이후에 말을 시 작한다.”29)⋅
“가령 성인의 책을 새로 만들어서 공자나 묵자의 이름을 붙여놓으 면,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 중 공손한 예를 표하면서 받을 자가 수없이 많을 것이 다.”30)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31)
이러한 맥락에서 성인에 대한 한비자의 일 관되지 않은 서술들은 후대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들이 편입된 결과라고 볼 수 있 다.
따라서 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현학(顯學)」⋅「오두(五蠹)」⋅「정법(正 法)」⋅「난세(難勢)」⋅「궤사(詭使)」⋅「육반(六反)」⋅「문변(問辯)」 이외의 편 은 한비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32)
28) 임계언 저, 김용수 옮김, 중국학술사상사, 2017, 105-109쪽.
29) 淮南子, 「脩務訓」, “世俗之人, 多尊古而賤今. 故爲道者, 必託之於神農黃帝而後能入說.”
30) 淮南子, 「脩務訓」, “今取新聖人書, 名之孔墨, 則弟子句指而受者必衆矣.”
31) 후대인들이 권위에 가탁하는 정황은 크게 몇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선조 혹은 조상. 둘째, 특정 지식과 기술을 발명한 인물. 셋째, 학파의 창시자 혹은 성현. 王博, 易傳通論, 2003, 35쪽.
32) 胡適, 中國哲學史大綱, 2015, 315쪽.
물론 성인에 대한 관점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둘러싸고 단순히 한비자 의 철학이 치밀하지 못한다거나 내부적인 분열이 일어난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 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한비자가 형성된 전체적인 과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한비자의 논술은 중국철학에서 보편적으로 다루어지는 성인의 개념을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하고 발전시킨 결과 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비자의 태도는 성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상이 아 니라 성인의 역할과 세계의 발전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하게 만들기 때문이 다.
이러한 과정은 성인에 대한 견해를 풍부하게 만들고, 철학이 현실의 요구에 더욱 잘 부응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즉 성인에 대한 폭넓은 논의를 가능하게 함 으로써 철학적 담론이 더욱 성숙하고 포괄적으로 발전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6. 결론
본 논문에서는 한비자에서 성인에 대한 논술을 분석하고, 성인의 특징과 모 순적인 입장을 밝히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비자는 일반인과 성인이 분명히 다른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성인의 구체적인 특성에 대해 탐구한다. 한비자에 따르면 성인은 본질적으로 도와 리 에 어긋나지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이를 준수한다. 여기서 도와 리는 각각 우주 의 보편적 법칙과 개별 사물의 법칙을 지칭하는데, 성인의 존립 근원은 이 도와 리를 체득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성인은 일반인을 초월한 능력을 갖추고 세계의 법칙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법가를 대표하는 서적인 한비자는 법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를 논술한 다. 여기에서 법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이는 법이 인위적 으로 제정된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법을 제정한 주체로서 도와 리를 터득한 인물인 성인을 지목한다. 나아가 성인은 단순히 법을 제정하는 데에만 그 치지 않고, 법의 집행 과정에도 깊이 관여한다고 설명한다. 한편 한비자는 성 인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기에 인재를 등용하 거나 국정을 운영할 때에 성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한비자에서는 성인을 높이 평가하지 않거나 성인을 부정하는 서술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한비자는 과거의 성인이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다고 주장하며, 성인이라 할지라도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 는다고 설명한다. 또한 자신보다 부족한 인물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 176 철학·사상·문화 제47호 으로부터 지도력과 용인술의 측면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특정 조건과 환경 이 충족되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언급한다. 즉 한비자는 성인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비자는 성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 다. 첫 번째로 지적해야 할 점은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성인에게 기대하는 역할 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한비자의 시대는 힘의 논리가 우세했기에 현실과 부합 하지 않는 성인은 자연스레 비판이 대상이 되었다. 두 번째는 성인에 대한 모순 적 태도가 제자백가와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한 비자의 편찬 과정에서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편입하면서 성인에 대한 논의가 통일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한비자 의 성인은 성인의 역할과 세계의 발전 방향을 다시 고찰하도록 유도하고, 중국철 학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귀중한 자산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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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본 연구는 한비자에 나타난 성인의 주요 특성과 모순된 시각을 조명하고, 이러한 모순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탐색한다.
한비자는 성인을 일반인과 뚜렷이 구분하며, 성인의 존립 근거에 대해 고찰한다.
한비자에 따르면 성인은 도와 리를 체득한 존재로서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세계를 운영한다.
나아가 성인이 법의 제정과 집행을 주도하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는 핵심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나 한비자는 성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비판적 견해도 동시에 나타낸다.
성인은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우며, 때로는 부족한 지도력과 용인술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는 존재라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이와 같은 모순된 태도는 시대적 변화, 제자백가와의 상호작용, 후대 편찬 과정에서의 편입 등 복합적인 요인에서 기인한다.
이와 같은 한비자의 논의는 성인의 역할과 중국철학의 발전 방향을 재고찰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주제어】 한비자, 성인, 도와 리, 법과 정치, 성인에 대한 모순적 서술
Abstract
A Study on the Contradictory Attitudes toward Sages in the Han Feizi
Lee, Oh-Ryun( *Researcher, Confucian Philosophy and Cultural Contents Research Institute, Sungkyunkwan Univ.)
This study examines the primary characteristics of sages as depicted in the Han Feizi and explores the contradictory perspectives expressed toward them, along with the underlying causes of these contradictions. The Han Feizi clearly distinguishes sages from ordinary individuals and reflects on the foundational basis of their existence. According to the text, sages are those who have mastered Dao and Li, thereby possessing transcendent abilities to govern the world. Furthermore, sages are depicted as central figures who lead the establishment and enforcement of laws, playing a key role in securing political stability. However, alongside this positive portrayal, the Han Feizi also presents critical perspectives on sages, noting that they often struggle to adapt to changing times and face limitations due to a lack of effective leadership and talent management. This contradictory stance in the Han Feizi stems from a range of complex factors, including the changing times, interactions with other philosophical schools, and later interpolations during the editing process. Such discussions in the Han Feizi offer valuable insights for reconsidering the role of sages and the developmental trajectory of Chinese philosophy.
【Key words】 Hanfeizi, sages, Dao and Li, law and politics, contradictory depictions of sages
논문접수일: 2025.01.07. 논문심사기간: 2025.01.15.~01.26. 게재확정일: 2025.01.27.
철학·사상·문화 제47호 2025.01. 161-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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