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이야기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 윤리: 신유물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상철.크리스챤아카데미

 I.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은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 윤리라는 제목 아래 신유물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도모 한다.

인공지능과 신유물론이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지만, 양자는 공히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해체, 물질의 능동성에 대한 긍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친근성이 있다. 특별히 신유물론 은 인간과 기계를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기계와 환경의 ‘얽힘’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시대 존재론적 프레임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본고는 우선 신유물론의 전체 지형을 그려보고 그것이 지니는 함의를 따진다.

근대 이후 인 문학의 패러다임은 고·중세의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칸트로부터 비롯되는 ‘인식론적 전회’ 의 시간을 보내고 20세기 후반 ‘언어적 전회’의 단계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근대적 사유에서 탈근대적 사유로의 전환이라 명명된 이 시기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21세기 중반을 향해 가는 오늘날은 ‘물질적 전회’의 단계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근래 대두되는 ‘물질적 전회’는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맞물리면서,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 론, 객체지향존재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으로 세포분열하며 지성계를 평정하고 있다.

비 슷한 것 같지만 다른 강조점과 서로 차이가 존재하는 지형 속에서 각각의 주장들을 따라가는 것이 솔직히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지난 시 절 주목을 받지 못했던 물질, 객체, 사물, 비인간 존재들이 지닌 생기와 율동, 역량과 능동성 을 발견하고 그것에 맞게 인간의 인식과 행위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최근의 경향은 기존 규범윤리 차원에서는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 많다.

뭔가 다른 윤 리적 해법이 요청되는 상황이고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본론의 첫 장이라 할 수 있는 II장에서는 20세기 내내 학계에 영향력을 끼쳤던 ‘언어적 전회’에서 최근의 ‘물질적 전회’로 넘어오는 사상적 전이에 대해 다룬다.

특별히 코로나 19의 창궐과 포스트휴머니즘의 대두가 이 흐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필 것이다.

III장에서는 신유물론에 대한 개괄적 이해가 펼쳐진다.

구유물론과 다른 신유물의 특징과 신유물론의 지형 을 살피면서 사물, 객체, 비인간 존재들이 어떤 위상으로 거듭나는지를 추적한 후에 지젝의 비판을 덧붙일 것이다.

IV장은 인공지능 시대, 신학과 윤리라는 주제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 합하면서 신유물론과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물질적 전회의 시대에 맞는 신학적, 윤리적 대안 과 상상이 무엇인지를 논한다. 

 

II. ‘언어학적 전회(The Linguistic Turn)’에서 ‘물질적 전회(The Material Turn)’ 로

 

1. ‘언어학적 전회’

 

20세기 이후 현대서양철학은 많은 변화와 굴곡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고·중세를 지배했던 신적원리에서 벗어나 코기토를 외쳤던 데카르트의 주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서 문에서 말했던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1)만큼이나 획기적이다.

그중에서도 20세기 철 학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전회’를 횡단하는 ‘언어학적 전회’가 아 닐까 싶다.

인문학과 사상계에서 언어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된 것은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비 트겐슈타인의 공이 크다.

기념비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2)는 명언을 남겼다.

 

     1)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서울: 아카넷, 2006), 50;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중심 으로 우주가 돈다는 천동설을 대신해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던 것처럼, 칸 트도 대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사유에서 우리의 생각 안으로 포섭되는 대상임을 주장하였다. 진리란 이제 인간의 외부에서 현실의 우리를 초월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가 있어 내가 그것을 진 리라고 고백한다고 함은 진리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다. 구체적으로 칸트적 사유를 신학에 적 용하면 이렇다. 인간이 신을 고백하는 사건은 신의 실체를 전부를 알고 감동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 다. 물론 신은 전지전능한 분이겠으나 인간에게는 신의 무소부지를 재현할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각자 저마다의 꼴이 있다. 신과 합일을 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꼴에 담기는 그 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외부에 독야청청 존재하는 이가 아니라 내 안에 담기 는 그이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종교적 언어가 되는 셈이다.

      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논리-철학 논고』(서울: 책세상, 2006), 117. - 3 - 

 

이 구절은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 에 대한 전복을 선언한 도발적 외침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언어가 닿지 못하는 세 계를 상정하는 것 같아 종교적인 메시지로도 들린다.

‘언어학적 전회’는 19세기부터 등장했던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불신과 회의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니체로 상징되는 19세기의 천재적 사상가들은 이성과 진보 로 상징되는 근대성의 프로젝트와 근대적 주체가 지닌 아우라를 파괴하면서 유물론과 무의식 과 반이성을 논하였다.

이렇듯 비트겐슈타인 이전부터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이 강력하게 작동 되고 있었기에 그의 주장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시대의 사상가들과 비트겐슈타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언어를 둘러 싼 감각과 인식이 차이다.

전통적 사유에서 언어란 생각하고 있는 대상을 외화시키는 기능밖 에 하지 않았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언어란 인간의 사고가 구체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 내는 현장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언어는 이성의 육화 (Incarnation)였던 셈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 사유의 한계를 밝히기 위해선 언어의 한계를 밝 히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여기서 분명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과거 형이상학이 다루었던 의제 전반 에 대한 폐기를 선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심오한 차원에 위치하므로 언어 안에 갇히지 않는다.

말로 규정할 수 없는 사물(사건, 현상)에 침묵하는 것이 지적으로 솔직하고 겸손한 것임을 그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종교와 윤리, 예술의 근본문제들이 이런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침묵 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어록은 신학과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화수분처럼 영감을 제공하 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언어를 달리보기 시작하는 경향이 생겨나기는 했으나 그것이 확실 하게 중요한 관점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부터이다.

리처드 로티가 1967년에 편집한 『언어학적 전회 The Linguistic Turn』3)는 책 제목자체로 시대의 사조를 대변하는 표제어가 되었다.

로티는 본인의 저서에서 영미철학의 동향, 즉 언어를 중심으로 모 색되는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였다.

하지만 ‘언어적 전회’는 영미권 철학에서만 국한시킬 수 있 는 특징은 아니었다.

프랑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독일의 비판철학, 그리고 프로이트-라깡 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영역까지 ‘언어적 전회’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소쉬르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일반언어학강의』를 필두로 푸코의 『말과 사 물』,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와 『글쓰기와 차이』로 이어지면서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흐르는 거대한 지적인 지형이 형성되었다.

독일에서도 ‘언어는 존재의 집’4)이라고 규정했던 하이데거의 지적 유산을 이어받은 가다머의 해석학,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언어와 사회의 관계와 역동에 대한 숙고를 바탕으로 한다.

 

     3) Richard M. Rorty, The Linguistic Turn (Chicago &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4) 마르틴 하이데거/ 이선일 옮김, 『이정표 2』(서울: 한길사, 2005), 124.

 

프로이트와 라깡으로 어어지는 정신분석학 의 흐름에서도 언어에 대한 성찰이 도드라진다.

인간의 사회화(상징세계로의 진입) 과정은 언 어화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기본명제가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했을 때 억압된 것은 달리 말하면 언어화 되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렇듯 20세기 사상계는 ‘언어학적 전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 도로 언어에 대한 사유는 이전과 이후 철학계를 분할하는 경계선이 되었다.

다음 절(節)에서는 ‘물질적 전회’가 도래하게 된 원인과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구체적으로 포스트휴 머니즘과 COVID-19가 어떻게 ‘물질적 전회’와 연관이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2. 어떻게 ‘물질적 전회’는 도래했는가?

 

21세기로 진입해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조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물질적 전회(The Material Turn)’5)가 그것이다.

 

     5) ‘물질적 전회’는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의 존재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 근래 사상계 를 강타하고 있는 흐름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각각의 차이들이 있겠으나 공통적으로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비인간존재, 사물, 객체들의 생기와 행위자성에 주목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고 III장에서 다룬 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역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언어학적 전회’를 이야기 할 때도 등장배경이 이성중심의 근대적 주체성, 즉 인간중심주의 극복이었다.

그렇다면 휴머니즘을 둘러싼 양자의 문제의식과 해법이 다르다는 말인데,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본고가 해결해야 될 과제 중 하나이다.

현대사상의 가장 큰 화두는 인간이라는 종의 재발견이 아닐까 싶다.

전 시대 ‘인식론적인 전회’와 ‘언어학적 전회’를 거치면서 등장한 관념적이고도 심오한 절대적 주체, 하지만 인간은 가늠이 불가능한 내면을 지닌, 그래서 상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물질적 전회’를 거치면서 출몰한 인간은 전 시대 주체를 규정할 때 간과하고 무시했던 물질적인 요소와 자연의 법칙, 그리고 그것들이 자아내는 생태학적인 네트워크 속에 귀속된 인간이다.

이러한 변화는 포스트휴머니즘의 등장과 COVID-19 이후 전개되고 있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무관치 않다.

기계와 인간의 공진화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휴먼의 등장 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물질적 전회’ 담론의 중요한 축이다.6)

로지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 담론을 선도하는 학자인데, 아래 발언은 물질 적 전회의 시대에 객체들과 맺는 새로운 관계 설정을 도모하는 이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포스트휴먼 연구 분야는 모든 유기체의 지성, 능력, 창조성의 각기 다른 정도를 인정하면 서, 비위계적인 방식으로 맺는 다양한 조에-인간 아닌 것의 생명-와의 긍정적인 관계에 기초한다.

이는 사유와 앎이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뜻한 다. 여기서 세계는 다양한 유기적 종들과 기술적 인공물들이 나란히 함께 가는 공존으로 정의된다.7)

 

    6) ‘포스트 휴머니즘’의 지형은 ‘포스트휴먼-이즘’(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비판적 포스트-휴 머니즘)’ 논의로 양분된다.전자는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간과 기술의 구분이 사라진 시대를 겨냥한 다.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로 인해 새로운 인간종이 출현할 것이고 그 결과 인간은 질병과 죽음에서 해방될 수도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이 논의의 저변에 깔려있다. 후자는 전자의 등장으로 인한 통찰의 결과라 말하고 싶다. 기술발전으로 인해 변화된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근대적 인간, 즉 투명하고 계몽 적이며 반성적 이성을 지닌 주체에 대한 제고를 선사하였다. 기계와 공진화를 도모하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이르러 사물과 구분되어진다고 믿었던 인간 본성의 아우라가 깨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가치와 서열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듯 포스트휴먼 담론은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휴머니즘을 넘어 서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다.- 강성영·이상철, “포스트휴먼시대, 이타성의 신학과 윤리학을 위한 서 설,” 『신학사상』 198 (2022/가을), 24-26 참조하라.

     7) 로지 브라이도티/ 김재희·송은주 옮김, 『포스트휴먼 지식: 비판적 포스트인문학을 위하여』(파주: 아카 넷, 2022), 157.  

 

로지 브라이도티는 공존을 말하면서 실체론적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한다.

대신 관계론적 존재로서의 인간, 주체중심에서 벗어나 사물들과 접속하는 인간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포스트휴머니즘의 등장과 더불어 ‘물질적 전회’를 상기시켰던 사건이 팬데믹의 창궐이었 다.

COVID-19는 그동안 인간과 생태계 사이 맺어 왔던 관계 일반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 구하였다.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진 사물들의 세계 속에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또 한 인간은 다른 객체들과 동일한 질료로 구성된 피조물로 생태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류는 팬데믹이라는 큰 댓가를 치루면서 깨달았다.

이러한 격변을 거치면서 비인간 존재들과 의 조응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변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최근 담론의 경향, 즉 동물, 식물, 사물, 사이보그 등 비인간을 소환하여 진행하는 논의들은 결국 하나를 목표로 한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재고이다.

인간이라는 종을 유아독 존적인 개체로 떼어내어 피조세계의 청지기 역할을 부여하면서 과도한 책임을 부과했던 휴머 니즘에 대한 비판이 여기에는 있다.

이와 같은 구도는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특권을 부여하기 에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연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간과하게 만든다.

이어지는 III장에서 ‘물질적 전회’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끄는 ‘신유물론’에 대한 개론적 이해, 신유물 론의 지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윤리적 의제들을 검토할 것이다.

인간의 오래된 타 자였던 비인간은 오늘의 세계 속에서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인간중심주의라는 중 력 안으로 끌려왔던 수동적이기만 했던 사물들의 실상이 사실은 그 반대였음을 ‘신유물론’은 논한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관계가 역전, 혹은 평등해지면서 기존의 신학과 윤리는 낯선 풍경과 조우하게 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III.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

 

1. ‘구(舊)유물론’의 퇴조와 ‘신(新)유물론’의 등장

 

전통적으로 유물론(唯物論)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심론(唯心論), 혹은 관념론(觀念論)의 반대되 는 개념으로 정신적 의미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신뢰하고, 추상적 가치보다 실재적인 가치에 더 진정성 있다고 보는 태도이자 믿음이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구 하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 시절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시작된 존재(있음)와 생성(변화)에 대한 사유는 서구 철학사의 중요한 대립구도였다.8)

 

     8) 이상인,『진리와 논박』(서울: 도서출판 길, 2011) 중 “1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29-126)를 참조하라. 

 

양자 사이의 길항관계를 통 해 서구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는 발전해왔다.

근대로 진입하면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물질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인류의 삶의 패턴이 바뀌면서 물질과 사회, 물질과 역사 사이의 새로운 이해가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시작된 유물론에 대한 인식은 역사와 사회의 진보는 물적토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만방에 알렸다.

‘이 데올로기의 시대’라 불리는 지난 20세기는 이러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소련을 중심으로 뭉친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냉정히 돌아보면 지난 세기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계로 양분된 채 각자의 정치 체제와 경제방식을 구축해 체제경쟁을 벌인 것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숭고한 신념 때문 만은 아니다.

그것은 냉전체제를 지나 동구 공산권이 붕괴된 후 펼쳐진 파국의 자리에서 명백히 밝 혀졌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전 지구적 지배가 완성된 후 오직 자본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 세상이 되었다.

물질의 법칙을 신뢰하던 유물론자들이 패했음에도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 있 던 자들에 의해 물질(자본)의 승리가 선언되는 모순적 상황이 펼쳐졌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여행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구유물론이 초라한 유물(遺物)로 전락해갈 무렵 신유물론이 등장했다.

왜, 신(新)유물론(New Materialism)일까?

구(舊)유물론과는 다른 신유물론의 특이점은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선 구 유물론과 다르게 신유물론은 물적토대, 생산방식, 노동과 임금 등 정치와 경제, 사회적 역학에 관심했던 19-20세기 유물론과 거리를 둔다.

신유물론은 물질 자체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과거의 유물론자들은 물질이 일정시간과 공간을 점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로 인식하였다.

반면 신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은 스스로 생성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관계맺기, 혹은 ‘무엇-되기’를 하는 물질이다.

기존 의 유물론과는 다른 물질관을 지닌 신유물론에 대한 이해와 지형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절(節) 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신유물론 길라잡이

 

신유물론이 수미일관하게 일관된 계열로 정리가 되거나 그것의 지형이 아직까지는 명확히 구 획되어 다져진 것 같지는 않다.

생기적 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의 존재론, 행위자 네 트워크 등으로 분류들을 하지만 겹쳐 보이는 부분도 보이고 확연히 갈라지는 지점도 발견된 다.

그래도 이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인간중심적 혹은 인간관계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점”9)이 아닐까 싶다.

인간계의 자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거나 굳이 편 입될 필요가 없었던 사물들의 세계가 태초부터 있어왔고 그 사실을 인간만이 몰랐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신유물론 논의들 안에는 있다.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10)을 대표하는 그레이엄 하먼이 근대 철학의 쟁점 이었던 사유와 세계의 구분을 “개체와 관계의 구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11)고 주장한 바 있는 데, 하먼의 제안은 다양한 신유물론의 논의들을 비교적 한 눈에 들어오게 한다.

박준영은 이 를 받아서 신유물론을 조감하면서 관계를 강조하는 진영, 즉 들뢰즈로부터 출발하는 ‘생기적 유물론’ 측과 실체 자체를 중시하는 하이데거와 후설로부터 기원한 ‘사변적 실재론’을 구분한 다.12)

전자가 생기, 만남, 관계를 중요시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독립적인 세계의 현존을 긍 정”13)한다.

캐런 버라드가 말하는 ‘행위적 실재론’은 하먼의 ‘사변적 실재론’과는 대척점에 위치한다.

버라드는 하먼과 반대로

“물질과 의미는 때때로 교차하는 분리된 요소가 아니다. 이 둘은 떼 려야 뗄 수 없이 서로 융합되어 있다”14)고 말한다.

 

     9) 몸문화연구소, 『신유물론: 몸과 물질의 행위성』(서울: 필로소픽, 2022), 56.

    10)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했을 때, ‘사변적’이라는 것은 관념론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관념론적인 사유의 절대성과 대상의 표상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자체에 접근 할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를 테면 사변적 관념론에서 내 앞에 놓인 컵은 내 사유의 운동에 의해 파악 가능한 실재 이지만, 사변적 실재론에서 그 컵은 파악 가능한 실재의 모습이 늘 뒤로 물러나는 형상으로 드러난 다. ... 다음으로 사변적 실재론의 ‘실재론’은 단순히 소박한 실재론의 수순을 벗어난다. 소박한 실재 론은 말 그대로 우리 사유와 대상의 일치에 근거해서 사유에 반영되는 대상의 모습이 실재 자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사변적 ‘실재론’은 이런 단순한 접근방식을 거부한다. 사변적 실재론은 내 앞에 놓인 컵이 내가 접근하는 사유의 능력에 좌우되지 않는 실재의 초과분을 가진다.” - 박준영, “신유물 론의 이론적 지형”, 「문학과학」 107호 (2021), 87.

    11) 그레이엄 하먼/ 김효진 옮김, 『사변적 실재론 입문』(서울: 도서출판 갈무리, 2023), 245.

    12) “...철학자들을 잠정적으로 두 그룹으로 묶을 수 있는데, 먼저 신유물론(생기적 유물론)에 해당되는 철학자들은 마누엘 데란다, 캐런 버라드, 로지 브라이도티, 제인 버넷, 토머스 네일, 레비 브라이언트 등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 사변적 실재론에 더 가까운 철학자들은 그레이엄 하먼, 브뤼노 라투르, 캐서린 말라부 등이다. 그리고 이 두 그룹에 모두 영향을 끼친 철학자는 메이야수다. 물론 이러한 구 분은 잠정적이다.”- 박준영, “신유물론의 이론적 지형”, 「문학과학」 107호 (2021), 88-89.

    13) 그레이엄 하먼/ 김효진 옮김, 『사변적 실재론 입문』(서울: 도서출판 갈무리, 2023), 20.

   14) 카린 머리스, 비비안 보잘렉 엮음/ 전방욱 옮김, 『캐런 바라드와의 대화: 행위적 실재론 실천』(고양: 이상북스, 2024), 137. 

 

하먼으로 대변되는 사변적 실재론이 말하 는 객체란 만남과 관계맺기 이전에 먼저 선재하는 무엇이고, 무엇보다 객체는 독자적인 자율성, 독립성,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

객체는 관계들의 총합으로 환원되지도 않고 통분되지도 않 는 통약불가능성이다.

반면 버라드는 객체 자체 혹은 현상을 초월한 어딘가에 있다는 실재를 신뢰하지 않는다.

실재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존재하지 않고 현상 가운데서 행위를 통해 등 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인 버넷은 ‘생기적 유물론’자로 알려져 있고 굳이 줄을 세우라면 들뢰즈-캐런 버라드 라인에 서 있는 주자이다.

그럼에도 제인 버넷은 버라드와 하먼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면서 양 자의 공존을 도모한다.

제인 버넷은 ‘사물-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비인간 물질의 능동성 에 주목한다.15)

‘사물-권력’은 ‘생기적 유물론(Vital Materialism)’를 주창한 버넷의 사유를 대 변하는 용어로 ‘활력 없는 사물’과 ‘생동하는 생명’으로 갈라치기 하는 이원론에서 탈피하여 물질의 정치성을 드러낸다.

 

당신이 좋든 싫든 당신과 뗄 수 없이 뒤얽혀 있는, 당신이 평생 연루되어야 할 다루기 어 려운 관계물과 함께하기에, 환경이 실제로 인간의 신체와 마음 내부에 있다는 것을, 그렇 기에 세심한 관용을 베풀며 일상생활 속에서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과학적으로 당신 안 에서 전진하고 있음을 인정하라. 비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려는 헛된 시도를 단념하 라. 그 대신 당신 역시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배치 내의 비인간들과 더 정중히, 전략적으 로, 세심하게 관여하도록 노력하라.16)

 

이를 근거로 베넷은 정치를 “정치생태학”으로, “공중(Public)”은 “인간-비인간 집합체”로 명명 할 것을 제안한다.17)

인간과 비인간 사이 존재하는 차이가 위계적 서열화로 작용하면서 인간 의 비인간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해왔던 시간들을 뒤늦게 반성하면서, 베넷은 “평평한 존재 론”18)을 말하고, 레비 브라이언트는 존재론적으로 평등하고 자율적인 “객체들의 민주주의”19) 를 언급한다.

 

    15) 제인 버넷/ 문성재 옮김, 『생동하는 물질』(서울: 현실문화, 2020), 36.

    16) Ibid., 282.

    17) Ibid., 29.

    18) Ibid., 53.

    19) 레비 R. 브라이언트/ 김효진 옮김, 『객체들의 민주주의』(서울: 갈무리, 2021). 

 

인간과 사물, 인간과 객체들 사이 관계를 평평하고 수평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이 이들이 말하는 정치생태학의 출발이다.

이렇듯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객체의 관계를 새롭게 정초하려는 신유물론의 시도는 인간 끼리의 관계로만 설정되었던 기존의 윤리학에 충격을 던졌다.

신유물론이 추구하는 사물에 대 한 새로운 인식은 ‘주체-타자’의 관계로 관성화 된 채 흘러왔던 지난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하였다. 하지만 신유물론에 바탕한 인공지능이 선사하는 인간론에 대한 의심섞인 시선을 보내 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슬라보예 지젝이다.

왜 지젝은 인공지능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일까.

 

3. ‘인공지능’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

 

지젝이 경계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염려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어떤 특이점이 등장할텐데, 그 과정에서 개인의 소멸, 사회적·역사적 맥락의 결여가 만연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세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이는 불가피하게 특 지점의 등장으로 이어질터이다. ...개인들을 집어삼켜서 그들의 독자적 자아를 빼앗고 우리를 하나의 장엄한 전체로 흡수하게 될 것이다.”20)

 

인공지능을 주도하는 물질주의자들은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여 비인간존재와 물질의 자율 성과 독립성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는 인간중심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들의 시도에는 인간과 세계를 둘러싼 역사적·사회적 조건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다.

새로운 물질주의자들은 물질을 고유한 실재로 이해하려 하지만, 이 러한 시도는 인간과 물질 사이의 구분을 흐리면서 오히려 인간 존재의 특수성을 약화시킬 위 험을 내포한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의미가 있지만, 그 결과가 인간 주체의 고유성을 지워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 지젝은 경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젝의 비판점을 살펴보면, 그는 물질의 자율성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객체지향의 존재론’에서는 물질이 인간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 다고 보지만, 지젝은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객체지향의 존재론은 인간이든 자연이 든 그 무엇이든 대상이 발생하는 관계의 특수성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상의 자율성만을 유지하고 방어하려 든다. ... 그러나 객체지향의 존재론에 주체를 위한 장소나 공간이 존재하 지 않는다.”21)

 

지젝은 주체란 “다른 여러 행위자들 가운데 그저 하나의 행위자가 아님”22)을 분명히 하면서, 물질을 자율적이고 고립된 실체로 이해하는 방식이 인간 역사 속에서 전개되 는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를 간과한 것이라 지적한다.

여전히 기존의 유물론에 대해 애 착이 있는 지젝은, 인간 주체와 비인간적 물질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핵심으로 삼았던 변증 법적 유물론과 달리 신유물론은 비인간 객체들을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취급 하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한다.

지젝은 근래 등장하는 ‘물질적 전회’에 대해 역사철학적으로도 비판을 가한다.

그는

“진정 한 역사는 부분의 점진적인 발전이 아니라 ‘전체’ 자체가 어떻게 구조화되는지가 드러나는 일 련의 변화다. 우리는 과거의 사시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상징적 맥락에 옮겨 놓고 그 의미를 바꿀 분이다.”23)

 

     20) 슬라보에 지젝/ 강우성 옮김, 『진보에 반대한다』 (서울: 우중몽, 2026), 44.

     21) 슬라보에 지젝 외 지음/ 최진석 옮김,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서울: 문학세계사, 2019), 251.

     22) Ibid., 252.

     23) 슬라보에 지젝/ 강우성 옮김, 『진보에 반대한다』 (서울: 우중몽, 2026), 61. 

 

지젝은 역사를 단선적인 직선이 아니라 반복과 차이 속에서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역사는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모순과 긴장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 내는 다층적이고 변증법적인 운동이다.

예컨대 혁명이나 사회적 혁신 이후에도 유사한 문제가 다시 등장하는 경우, 그것은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조건 속에서 재구성되며 더 심화된 이해나 해결로 나아가는 계기로 해석된다.

이런 이유로 지젝은 “우리는 부분으로 구성 된 하나의 전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젝은 새롭게 등장하는 유물론이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설 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리가 전개되는 인공지능 시스템에 회의적이다.

그는 인간 주체와 물질 세계의 관계가 고립된 실체들의 병렬이 아니라,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캐런 바라드는 양자역학의 ‘얽힘’ 개념을 통해 이러한 상호연 관성을 설명하려 했지만, 지젝은 여기에 더해 인간의 경험과 역사적 현실을 반드시 포함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물질과 존재에 대한 이해는 인간적·사회적 맥락을 배제한 채로는 충분 히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복수의 보편성”24)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4) Ibid., 62 

 

지젝에 의하면 객체들이 서로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실체로 존재한다는 관점은 물질이 얽혀 있 는 사회적 관계를 간과하게 만드는 위험을 지닌다.

물질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강조할 경우, 인간이 형성해온 사회적·정치적 관계망이 왜곡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는 현실의 실제 문제들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요약하면, 지젝의 비판은 두 가지 핵심으로 정리된다.

  첫째, 인공지능에 입각한 지식과 관 계는 인간 주체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을 약화시킨다.

이에 대해 지젝은 주체와 역사적 조건을 함께 고려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치를 소환한다.

  둘째, 신유물론은 객체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물질을 고립된 실체처럼 다룬다.

인공지능의 매커니즘 역시 그렇 다.

그러나 지젝은 객체란 언제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보며, 이러한 관계성을 무 시하는 인공지능이 그리는 미래에 대해 회의적이다.

 

IV. 인공지능 시대의 신학과 윤리학

 

1. 인공지능 시대 신학

 

불의 발견으로 대변되는 역사 이전 시대, 제1의 물결인 청동기 혁명과 농업혁명, 긴 암흑의 터널을 지난 후 전개되는 제2혁명인 산업혁명 시대, 제3의 물결인 정보화 시대로 이어지는 문 명의 발전 과정을 거쳐왔던 인류는 어쩌면 기술의 진보에 익숙한 족속이라 아닐까 싶다.

각각 의 문명의 전환시에 울려퍼졌던 질문이 바로 당대의 포스트휴먼을 향한 요청이었고 신학은 그 에 대한 응전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논의는 문명의 발전과 그것에 대응해 왔던 인간 현상을 바라보는 익숙하고도 관습적인 문법, 혹은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기에는 현재의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

무수한 인공지능을 둘러싼 소문들이 있는데 그 출처에 대해, 원인과 과정에 대해, 전망에 대해 그 누 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사태가 21세기 오늘 당면하는 위기의 본질이다.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과학에 대한 맹신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과학지 상주의 탓이다. 현대과학기술은 전문화, 독점화 된 까닭에 일반인과는 동떨어진 게토화 된 지 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기술의 진보는 생명의 진화처럼 선택이 불가능한 속성이 있 다, 라는 확고한 기술관이 우리로 하여금 섣부른 접근과 예측을 못하게 한다.

이것이 현재 인 공지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안의 요체가 아닐까 싶다.

기존의 신학이 신에 대한 담론이었다면, 인공지능 시대 신학은 신학을 말하는 인간에 대 해 우선 묻는다.

새로운 신학적 인간학이 요청되는 대목이고, 그리고 새로운 신학적 인간학은 비인간존재, 자연, 사물로까지 논의를 확대해 간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 신학은 기존의 하 느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범주를 넘어간다.

그렇다고 볼 때 앞으로의 신학은 다양하고 다 층적인 입장과 언어들을 수용하는 신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면 서 각각의 목소리들이 교차적으로 엮어지는 콜라보 작업을 기대한다.

그 과정에서 신학은 다 종의 인간(들)의 가치가 과하게 돌출되지도 그렇다고 왜곡되거나 축소되지 않도록 작동되어야 한다.

타자의 타자다움을 인정하고, 차이가 차별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예민한 신앙적 성찰도 필요할 것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2장 7절은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 고 있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살아있는 호흡을 불어넣으시 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이 말은 태초에 사람은 ‘땅의 흙’이라는 물질(material)과 ‘살아 있는 호흡’이라는 비물질(immaterial)이 융합되어 생명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땅의 흙’이 선 형적 논리 구조를 대변한다면, ‘살아있는 호흡’은 비선형적 블록 논리를 상징한다.

그러니 사 람은 대극적인 논리를 본성으로 삼은 채 온전한 하나(whole being)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창세기 인간창조의 구절을 통해 인공지능시대 신학적 인간학의 가능성과 유의미함을 피력할 수 있는 신학적 단초를 발견한다. 인공지능에 양도할 수 없는 존엄과 본질, 그리고 고 유한 영적인 면모가 창조때부터 인간에게 부여되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인공지능 시대 신 학적 인간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이란 타자적인 것을 향한 관심과 배려, 나아가 이타적 행위를 전제로 함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은 타자 를 위한 신학이고 타자와의 관계를 모색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2. 인공지능 시대, 윤리적 질문들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피조물 인간이 뭐가 그리 대단한 존재인지를 묻는 것이 이상한 질문이 아닌 것이 되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진시켰는데 구체적으로는 인공지능을 장착한 현실의 몸으로서 사이보그 등장이 그것 이다.

사이보그는 기술의 도움으로 인간의 기능이 강화되고 도움을 받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 다.

전통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생물학적 토대가 비생물학적 요소를 만나 확장되고 초월하여 혼종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인간학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를 제기한 다.25)

 

     25) 사이보그 관련 담론들은 다음 책들을 참조하라. 앤티 클락/신상규 옮김, 『내츄럴-본 사이보그』 (파 주:아카넷, 2015); 도나 해러웨이/황희선 옮김, 『해러웨이 선언문: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 복적 사유』 (서울:책세상, 2019); 유발 하라리/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 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파주:김영사, 2015); 크리스 그레이/석기용 옮김, 『사이보그 시티 즌』 (파주:김영사, 2016), 

 

인공지능에 바탕한 사이보그의 등장, 넓게는 포스트휴먼의 도래를 대하는 입장은 엇갈린 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것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끌어당기고 추구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자 사이 어디선가 유보적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는 무리들도 있다.

현 재 유통되는 인공지능 관련 소문은 무성해 보이나 그렇다고 뚜렷한 진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가 갈리는 것은 그것을 견인하는 기술이 현재보다는 미래시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현재 맥락과 층위보다는 앞으로 그것으로 인해 펼쳐질 신기루에 대한 전망과 기대로 기울어진 인공지능의 담론지형은 우려가 된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사이보그는 누구를 위한 존재이고,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는 누구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가? 혹 그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 사업가, 정책입안 자들을 위한 프로젝트 아닌가.

인공지능을 장착한 사이보그에 관심을 갖고 그 개발에 대한 이슈를 계속 유지시키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말이다.

현재의 인공지능 논의는 기술 의 유토피아적 전망만을 근거로 움직이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나는 이것이 인공지능에 대한 정확한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 없다.

역사에서 현재시제가 아닌 미 래에 방점을 찍고 앞만 보고 그것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지녔던 공통점은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픔과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이 아니었던가. 이것은 푸코가 지녔던 문제의식과 겹친다.

푸코는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지식권력, 국가권력, 제도권력, 종교권력에서 도태되고 지워진 존재들에 주목하였다.26)

푸코는 권력에 의해 가 려지고 잊혀지고 제거된 자들을 ‘타자’라고 칭하면서 ‘타자의 윤리학’ 부상을 견인하였다.

윤 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여러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겠으나 현실에 존재하는 생명의 들 리지 않는 목소리와 지워진 흔적에 주목하는 것이 윤리의 자리라 말하고 싶다.

윤리의 태도가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 속 윤리는 요란한 기술담론 속에 가려진 목소리들과 사연으로 눈길을 돌려야 함은 마땅하다. 나는 오늘의 기독교윤리학이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해 야기되는 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 른 불안과 고통의 현상학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떠오르는 인공지능 시대의 디스토피 아적 전망은 로봇의 등장으로 현재의 노동(직업)방식이 막을 내릴 것이라는 불안이다.27)

인간 의 노동이 로봇으로 대체되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노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전통 적 인간상은 변형이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많은 등급으로 분절화된 노동 소외의 현 장으로 몰릴 것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논하기 이전에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롭게 대두 되는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보가 인공지능 논의에서 필요한 것은 아닐는지.

미래 기술이 제공하는 확실하지 않은 유토피아에 도취한 나머지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면 큰 잘못이다.

일부 특정 계급과 지위의 사람들이 기술발전에 투여되는 자본을 향유하겠으 나 대부분의 민중들은 그 논의에서 제외되거나 도태되어 고통의 한복판으로 몰릴 것이다.

인 공지능 시대에서 도태되는 인간실존의 파장이 종전보다 광범위하다는 것, 그리고 상흔 또한 깊을 것이라는 절망의 소문은 그것의 진위여부를 떠나 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 시대 기독교 윤리는 그 파국의 한복판에 위치한다.28)

 

   26) 미셸 푸코/이정우 옮김, 『담론의 질서』 (서울: 새길, 1993), 11-54; 푸코는 특정 진리가 어떤 과정과 맥락을 거치면서 ‘진리’가 되었는지를 따지면서 실체중심의 진리관에 균열을 가한다. 진리가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권력에 의해 그것이 정의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리가 어 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진리로 구축되었는지를 따져가는 것이 푸코의 ‘계보학’이다. 푸코의 문제제 기는 포스트휴먼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하다. 온갖 첨단테크놀로지(지식권력)에 의해 정 당화 되고 있는 포스트휴먼 담론이 과연 정당한지 푸코식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27)21세기 산업구조 하에서 벌어지는 디스토피아적인 참상을 슬라보에 지젝은 애플 아이폰의 하청을 담당하는 대만 기업 폭스콘의 예를 들면서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것은 가히 포스트휴먼 사회 속에서 배제되는 인간노동에 대한 비관적 묵시록이라 할 만하다.폭스콘의 회장은 2011년 노동자들의 자살로 여론이 안좋게 돌아가자 불평과 자살 위험이 없는 로봇 생산 계획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 승 백만 마리를 관리하려니 머리가 아프다.” 그리고 실제로 2014년 실행에 옮겨 아이폰 조립을 위한 ‘폭스봇(Foxbot)’을 개발했다. -슬라보예 지젝/주성우 옮김, 『멈춰라, 생각하라』 (서울:와이즈베리, 2012), 211.

     28) 이경민 외, 『인간 너머의 인간』 중 이상철의 “포스트휴먼과 고통의 해석학”(고양: 사월의 책, 2021), 193-214. 

 

V. 나아가며: 인공지능 시대, ‘환대의 윤리학’을 향하여

 

결론적으로 인공지능 시대 기독교 윤리는 당대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고통에 주목해야 할 것이 다.

본회퍼는 예수를 “타자를 위한 존재”29)로 정의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인 “교회는 타자를 위해 현존할 때 교회가 된다”30)고 피력하였다.

본회퍼의 윤리학은 타자의 윤리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과 제도와 권력과 종교로부터 지워진 타자와 함께 그들의 곁을 지켰던 예수의 삶을 기억하면서 따르는 것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다. 본회퍼의 외침은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영감을 선사한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타자들은 존재하고 그들이 마주하는 고통의 양상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같다.

데리다의 ‘환대’는 본회퍼의 타자론을 현대적 감각으로 보강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라 생 각된다.

데리다는 초대와 관용(Tolerance) 대신 환대(Hospitality)를 거론하였다.

관용이 근대 적 주체가 지녀야 할 미덕이라면 환대는 주체 중심이 아니라 타자 중심이다.

관용의 주체는 자신들의 틀과 규범 안으로 들어온 자들을 향해서는 초대장을 발부하여 집으로 초청하지만, 경계 밖 사람들, 즉 타자들은 집 안으로 들이지 않을 뿐더러 혐오와 적대를 가해도 되는 대상 으로 대하는 주체다.

데리다는 관용 대신 그것을 넘어선 환대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환대는 평안함의 해체다. 해체는 타자들, 자기 보다는 타자들, 그 타자들의 타자들, 그 타자들의 타자 들이 경계 너머에 있는 이들에 대한 환대이다.”31)

 

    29) 디트리히 본회퍼/손규태. 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 (서울: 대한기독교서회,2010), 711. 

    30) Ibid., 713.

    31) Jacques Derrida, Acts of Relogion,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Gil Anidjar, (New York: Routledge, 2002), 364: “Hospitality is the deconstruction of the at-home; deconstruction is hospitality to the other, to the other than oneself, the other than ‘its other’, to an other who is beyond any its other.” 

 

데리다의 환대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의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타자이고, 그래서 결정불가능하고 환원불가능하며 비대칭적인 존 재 혹은 대상 일반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말은 환대의 윤리학은 총체성과 전체성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대상을 향한다는 의미이다.

체제와 법 바깥에 남겨진 잔여, 잉여, 타자, 차이에 환대의 윤리는 주목한다.

그들은 현재의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은폐되는 존재들이고, 구 체적으로 인간중심주의 영향으로 오랜 세월 지워지고 가려져 왔던 비인간 존재들, 사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으로 장착된 최첨단 무기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투입되어 많은 사상자들과 난민들을 발생시키고 있지만 인공지능은 거기에 아무런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단순 질문 프롬프트 1개당 전자렌지 1초 작동량의 에너지가 사용된다고 하고 추 론모델인 경우는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고 한다.

데이터센터를 돌리기 위한 막대한 물 과 탄소, 에너지 사용량이 실제로 문제가 되고 있고, 앞으로 전력증가분의 거의 절반을 데이 터센터 유지를 위해 사용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에너지 절감, 기후 위기, 생태적 전 환을 이야기 하고, 반려견과 반려묘를 위한다는 지식인들이 너무나 거대하고 위선적이며 반생 태적인 삶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격이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기술의 발전에서 소외되거나 도태되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고, 지구 촌은 근대와 탈근대를 지나 인공지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전근대, 혹은 전 통적 삶에 익숙하고 충실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로 진입하지 못한 이들은 일부 선진국의 인공지능 문명을 뒷받침하는 잉여적 존재, 타자적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는 인공지능을 향유하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여전히 휴먼, 아 니 휴먼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탄식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 눈물을 흘리고 인간들의 편에 서야하는 것이 인공지능 시대 역설적인 신학의 자리, 기독교 윤 리의 자리가 아닐까.

 

이상철_인공지능_시대의_기독교_윤리_신유물론에_대한_비판적_성찰.pdf
0.19MB

 

 

 

2026 CRS 종교와 과학 컨퍼런스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