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호락논쟁의 발단과 쟁점
호락논쟁은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의 학파적 대립에서 비롯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들 학파의 연원(淵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은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1682~1751)과 함께 동문 수학하였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서신을 왕복하여 논변(論辨)하다가 마침내 대립하기에 이르러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외암을 받드는 자를 낙학이라 하고 남당을 받드는 자를 호학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조선왕조실록은 낙학과 호학의 연원이 역사적 실제로서 각각 외암과 남당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들 학파의 명칭은, 논쟁의 지역적 대립구도에 따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호락논쟁에서 외암을 지지한 사람들이 주로 낙하(洛下, 서울지역)의 학자들이어서 낙학이라고 하고, 남당을 지지한 사람들이 호중(湖中, 충청도 지역)에서 살았으므로 호학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1864~1921)은 낙학과 호학의 학파적 연원을 조선왕조실록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조선유교연원에서 “호학은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 1641~1721)에서 시작하여 남당이 계승하였고, 낙학은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에서 근원하여 이재(陶庵 李縡, 1680~1746)가 지켰다”라고 하여, 그들 학파의 연원이 각각 남당과 외암에게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장지연은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서 호학과 낙학의 학문적 분화의 시원(始原)이 남당과 외암에게 있음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그의 설명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도는 다름 아닌 남당과 외암보다 한 세대 이전에 이미 호학과 낙학의 학문적 정체성이 배태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러한 장지연의 의도와 관련하여 최근의 한 연구는 호락논쟁에 대한 통시적(通時的) 관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문석윤은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으로도 불리는 호락논쟁 이전에 낙학과 호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적 성향이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낙학이 농암 김창엽을 필두로 주리적 경향의 인물성상동(人物性相同)을 정립시키고 있었다면 호학은 수암 권상하를 중심으로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라는 주기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문석윤의 견해에 근거하는 경우 호락논쟁에서 차지하는 외암과 남당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수암의 제자로서 외암은 호학의 내적 분화에 따라 낙학의 학문적 성향에 우연히 근접하였을 뿐이고 낙학을 주도할만한 위치에 설 수 없으며, 남당 역시 자신의 스승인 수암의 학문적 주장을 계승하여 호학의 입장을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호락논쟁의 통시적 접근과 관련하여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의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호락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차지하는 남당과 외암의 역할이 주변부에 머무른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한산사(寒山寺)의 만남 이후 서로를 의식하면서 매우 치열한 논변을 거듭하게 되는 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호락논쟁의 이론적 쟁점들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에 부각된 쟁점들은 이후 호락논쟁의 전체적 전개양태를 규정한다고 하여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호락 양론은 남당과 외암 두 사람의 논변에 의하여 현저하게 세상에 드러났다”라고 기술하였던 것이다.
확실히, 남당과 외암은 호락논쟁에서 제기되는 이론적 쟁점의 중심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적전(嫡傳)인 수암 권상하의 제자들이다. 이에 따라, 이들은 모두 조선조 성리학의 계보상 율곡학파의 학통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율곡의 성리학설에 내재된 리(理)에 대한 주장에서 비롯된다. 율곡은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으로서 운동과 발현을 기(氣)의 몫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파악된 기의 발현은 외적 소여(所與)가 아닌 기의 자발적 작용에 따른 이른바 ‘기자이’(機自爾)를 뜻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율곡의 리는 기의 발현에 올라타는 것으로 그 발현을 사지자(使之者)시키는 존재가 아님이 ‘기자이’를 통해 분명히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의 다양한 운동과 발현에도 불구하고 율곡의 리는 무작위와 무형상의 소이(所以)로서만 남게 된다. 그러나 ‘기자이’에 따른 율곡의 리는 조선조 성리학의 전개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의 제기를 받게 된다.
율곡의 주장과 같이, 리가 반드시 기의 발현에 올라타야만 한다면 그러한 리는 최소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기에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를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강조되면 될수록 성리학의 사유체계에서 기를 제어하고 지배할 수 있는 리의 권능은 그만큼 무기력하게 된다. 물론 율곡이 기에 대한 리의 주재(主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조 성리학의 전개과정에서 리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퇴계와의 대척점(對蹠點)에서 리의 무작위를 상대적으로 강조하였음도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율곡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의 조리(條理)나 단서(端緖)처럼, 그의 리는 결국 기의 속성이나 내재적 법칙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우려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리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외암과 남당 사이에 치열한 논변을 촉발시키는 단서로 작용하게 된다.
외암은 율곡의 기본원칙들 가운데 하나인 리의 무작위를 부정하지 않는 범위에서 리의 권능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제로서, 그는 어떻게든지 기와 섞이지 않는 온전한 리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암의 의도는 ‘기중지리’(氣中之理)의 리에 대한 해석에서 남당의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성리학에서 ‘성’(性)이란 인간과 ‘물’(物)에 내재(稟受)된 리를 가리키지만, 인간과 ‘물’은 형해(形骸)로서 기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라, 인간과 ‘물’에 내재된 리는 ‘기중지리’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이 때의 리는 성리학의 대전제인 성즉리(性卽理)의 리와 어떻게 다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남당은 기에 타재(墮在)된 리로서의 ‘성’은 이미 순수한 리와 다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외암은 일원지리(一原之理)의 관점으로부터 ‘기중지리’의 리와 본연의 리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리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그 논리적 외연(外延)으로서 호락논쟁 최대의 이론적 쟁점인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미발심체본선유선악(未發心體本善有善惡)에 대한 논변으로 나아가게 된다.
호락논쟁은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의 학파적 대립에서 비롯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들 학파의 연원(淵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1727)은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1682~1751)과 함께 동문 수학하였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서신을 왕복하여 논변(論辨)하다가 마침내 대립하기에 이르러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외암을 받드는 자를 낙학이라 하고 남당을 받드는 자를 호학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조선왕조실록은 낙학과 호학의 연원이 역사적 실제로서 각각 외암과 남당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들 학파의 명칭은, 논쟁의 지역적 대립구도에 따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호락논쟁에서 외암을 지지한 사람들이 주로 낙하(洛下, 서울지역)의 학자들이어서 낙학이라고 하고, 남당을 지지한 사람들이 호중(湖中, 충청도 지역)에서 살았으므로 호학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1864~1921)은 낙학과 호학의 학파적 연원을 조선왕조실록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조선유교연원에서 “호학은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 1641~1721)에서 시작하여 남당이 계승하였고, 낙학은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에서 근원하여 이재(陶庵 李縡, 1680~1746)가 지켰다”라고 하여, 그들 학파의 연원이 각각 남당과 외암에게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장지연은 같은 책의 다른 부분에서 호학과 낙학의 학문적 분화의 시원(始原)이 남당과 외암에게 있음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그의 설명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도는 다름 아닌 남당과 외암보다 한 세대 이전에 이미 호학과 낙학의 학문적 정체성이 배태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러한 장지연의 의도와 관련하여 최근의 한 연구는 호락논쟁에 대한 통시적(通時的) 관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문석윤은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으로도 불리는 호락논쟁 이전에 낙학과 호학이라는 독특한 학문적 성향이 자리잡아 가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낙학이 농암 김창엽을 필두로 주리적 경향의 인물성상동(人物性相同)을 정립시키고 있었다면 호학은 수암 권상하를 중심으로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라는 주기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문석윤의 견해에 근거하는 경우 호락논쟁에서 차지하는 외암과 남당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수암의 제자로서 외암은 호학의 내적 분화에 따라 낙학의 학문적 성향에 우연히 근접하였을 뿐이고 낙학을 주도할만한 위치에 설 수 없으며, 남당 역시 자신의 스승인 수암의 학문적 주장을 계승하여 호학의 입장을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호락논쟁의 통시적 접근과 관련하여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의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호락논쟁의 전개과정에서 차지하는 남당과 외암의 역할이 주변부에 머무른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한산사(寒山寺)의 만남 이후 서로를 의식하면서 매우 치열한 논변을 거듭하게 되는 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호락논쟁의 이론적 쟁점들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에 부각된 쟁점들은 이후 호락논쟁의 전체적 전개양태를 규정한다고 하여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윤은 조선유학사에서 “호락 양론은 남당과 외암 두 사람의 논변에 의하여 현저하게 세상에 드러났다”라고 기술하였던 것이다.
확실히, 남당과 외암은 호락논쟁에서 제기되는 이론적 쟁점의 중심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적전(嫡傳)인 수암 권상하의 제자들이다. 이에 따라, 이들은 모두 조선조 성리학의 계보상 율곡학파의 학통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율곡의 성리학설에 내재된 리(理)에 대한 주장에서 비롯된다. 율곡은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으로서 운동과 발현을 기(氣)의 몫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파악된 기의 발현은 외적 소여(所與)가 아닌 기의 자발적 작용에 따른 이른바 ‘기자이’(機自爾)를 뜻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율곡의 리는 기의 발현에 올라타는 것으로 그 발현을 사지자(使之者)시키는 존재가 아님이 ‘기자이’를 통해 분명히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의 다양한 운동과 발현에도 불구하고 율곡의 리는 무작위와 무형상의 소이(所以)로서만 남게 된다. 그러나 ‘기자이’에 따른 율곡의 리는 조선조 성리학의 전개과정에서 적지 않은 이의 제기를 받게 된다.
율곡의 주장과 같이, 리가 반드시 기의 발현에 올라타야만 한다면 그러한 리는 최소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기에 의존해야 한다는 의미를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강조되면 될수록 성리학의 사유체계에서 기를 제어하고 지배할 수 있는 리의 권능은 그만큼 무기력하게 된다. 물론 율곡이 기에 대한 리의 주재(主宰)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조 성리학의 전개과정에서 리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퇴계와의 대척점(對蹠點)에서 리의 무작위를 상대적으로 강조하였음도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율곡의 본래 의도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의 조리(條理)나 단서(端緖)처럼, 그의 리는 결국 기의 속성이나 내재적 법칙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우려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리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외암과 남당 사이에 치열한 논변을 촉발시키는 단서로 작용하게 된다.
외암은 율곡의 기본원칙들 가운데 하나인 리의 무작위를 부정하지 않는 범위에서 리의 권능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제로서, 그는 어떻게든지 기와 섞이지 않는 온전한 리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암의 의도는 ‘기중지리’(氣中之理)의 리에 대한 해석에서 남당의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성리학에서 ‘성’(性)이란 인간과 ‘물’(物)에 내재(稟受)된 리를 가리키지만, 인간과 ‘물’은 형해(形骸)로서 기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라, 인간과 ‘물’에 내재된 리는 ‘기중지리’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이 때의 리는 성리학의 대전제인 성즉리(性卽理)의 리와 어떻게 다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남당은 기에 타재(墮在)된 리로서의 ‘성’은 이미 순수한 리와 다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외암은 일원지리(一原之理)의 관점으로부터 ‘기중지리’의 리와 본연의 리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리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그 논리적 외연(外延)으로서 호락논쟁 최대의 이론적 쟁점인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미발심체본선유선악(未發心體本善有善惡)에 대한 논변으로 나아가게 된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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