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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조선후기 호락논쟁의 교육사적 의의 /정덕희(4)

Ⅳ. 도덕규범에 대한 접근방식의 대립

호락논쟁에서 인물성동이론과 더불어 가장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미발심체본선유선악(未發心體本善有善惡)이다. 이것은 “미발시 마음의 본체가 본래 순선(純善)한 것인가 아니면 선과 악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는 것인가?”라는 문제로 전개되지만, 거기에는 도덕규범에 대한 접근방식의 근본적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외암이 미발시 마음의 본체가 본래 순선하다는 입장으로부터 자율적 도덕규범을 지향한다고 하면, 남당은 미발시 마음에 미치는 기질의 영향을 근거로 객관적 도덕규범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미발시 마음의 본체에 작용(用事)하는 기의 여부를 바탕으로 외암과 남당의 도덕규범에 대한 접근방식의 대립을 이해하고자 한다.


1. 외암의 자율적 도덕규범의 가능성

외암은 미발한 심체에서 기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기불용사설’(氣不用事說)를 주장한다. 즉, 그는 리만을 ‘단지’(單指)함으로써 미발의 상태를 청탁수박(淸濁粹駁)한 기가 정의(情意)도 없고 조작(造作)도 없는 맑고 순일(純一)한 선의 상태로 보는 것이다. 이로부터, 외암은 미발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미발, 이른바 불편불의(不偏不倚)의 중(中), 이른바 천하의 대본(大本)은 이 마음의 담연허명(湛然虛明) 감공형평(鑑空衡平) 진체본연(眞體本然)에 나아가 말해야 그 말이 매우 순조로울 것이니, [이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반드시 부여받은 기에 구애된 바 또는 인욕에 막힌 바 또는 그 진체의 본연을 얻을 수 없는 것에 나아가 다만 사물에 응접하지 아니한 것에만 의거하여 그것을 미발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미발의 본지(本旨)로서 그 말이 과연 순조로울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보듯이, 외암은 미발을 기가 작용하지 않는 상태로서 ‘담연허명’ 그대로의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거울의 허공이나 저울의 평형과 같이 ‘불편불의’한 ‘진체의 본연’으로서 기품의 구애나 인욕의 막힌 바의 기가 전혀 작용하지 않는 ‘순선무악’의 상태를 미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떠한 이유로 미발의 상태에서 ‘기불용사설’을 주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미발한 심체에 기를 섞지 않음으로써 그것의 기에 대한 주재(主宰)의 권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미발한 심체에 선과 악의 가능성이 공재(共在)하는 잡박한 기를 섞게 된다면 그것은 ‘담연허명’의 의미를 상실하여 미발이라는 용어 자체를 발생시킨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천하의 대본으로서 권능을 가지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외암은 혈기(血氣) 백체(百體)를 주재한다는 권능적 의미로 천군(天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명덕본체(明德本體)는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혈기청탁(血氣淸濁)은 성인과 범인이 서로 다르게 가지고 있다. 명덕은 천군이고, 혈기는 기질이다. 천군이 주재하면 혈기가 백체에서 물러나 마음(方寸)이 텅 비어 밝게 되니, 이것이 대본의 소재이며 자사(子思)가 말하는 미발이다. 그러나 천군이 주재하지 못하면 혈기가 마음에 작용하여 청탁이 고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선과 악이 뒤섞인 것인데, 남당이 말하는 미발인 것이다.


확실히, 외암이 말하는 미발한 심체는 ‘순선무악’한 ‘명덕본체’로서 청탁한 기질을 주재할 수 있는 가능태(可能態)로서의 권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를 섞지 않음으로써 천차만별한 선악미오(善惡美惡)의 가지런하지 못한 일체의 현상적 차별을 벗어나 오히려 그것들을 ‘주재’할 수 있는 ‘천군’의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점이 제기된다. 그것은 바로 미발한 심체에 기가 섞여 있지 않는 것이라면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는 ‘순선무악’하지 못한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외암의 미발한 심체는 본래 선하여 악의 씨앗이 없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기의 작용에 의한 인간의 악한 마음이 나타나는가의 문제가 근본적인 의문점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외암은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는 기질을 실체(實體)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양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리학사상 처음으로 ‘기질지심’(氣質之心)이라는 용어를 그 자신 스스로 창안하게 된다. 즉, 그는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예를 들어 인간의 마음이 혈육지기(血肉之氣)인 ‘기품’(氣稟)에 의하여 구속되는 ‘기질지심’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본체론적으로 ‘본연지심’(本然之心)과 다르게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가리키는 바에 따라 구분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학장구󰡕로서 그것을 말한다면, “허령불매(虛靈不昧)로서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본연지심이며, 또 “기품에 구속된 바의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기질지심이다. 그런데 마음이란 두 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기품에) 구속됨과 불구속됨의 두 가지의 있는 바를 가리킬 뿐이다. 이른바 대본지성이라는 것은 마땅히 그 본연지심에 나아가 단지한 것이요, 이른바 기질지성은 마땅히 그 기질지심에 나아가 겸지한 것이다. 비록 같은 마음(方寸)일지라도 (기품에) 구속됨과 불구속됨의 사이에 그 경계(界分)가 스스로 있는 것이니, 또 어찌 아무런 분별도 없이 단지와 겸지를 한 곳에서 섞어 말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보듯이, 외암은 ‘기품’의 구속과 불구속의 여부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기질’과 ‘본연’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마음 자체는 두 가지일 수 없다’(心非有二也)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기품의 구속에 따라 ‘눈 깜짝할 사이’(介然)에 잃어버리는 마음으로서 기질지심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의하여 인간에게 여전히 보존된 ‘순선무악’한 마음의 본체를 부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외암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뒤집은 (覆) 손(手)을 다시 뒤집으면 그것은 뒤집은 손이 아니다. 또 뒤엎은(飜) 손을 다시 뒤엎으면 그것은 뒤엎은 손이 아니다. 비록 뒤집거나 뒤엎는다는 기미(機微)가 있기는 하지만, 그 손들은 본래 서로 격절(隔絶)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전히 하나의 같은 손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손의 뒤집음과 뒤엎음의 예를 들어 인간의 마음이 ‘본연’과 ‘기질’의 두 가지 양태로 구분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의 본체가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부터, 외암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혼명미오’(昏明美惡)한 불선(不善)을 마음의 본체에 따르는 ‘존망’(存亡)으로 귀속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대저 마음의 본체를 논한다면, 하나는 허령통철(虛靈洞徹)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신명불측(神明不測)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본심(本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니 원래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 불선(不善)이라는 것도 역시 마음으로부터 나오지만 마음의 본체는 아니다. 대저 마음은 하나이다. 그 혼명미오는 비록 만 가지로 가지런하지 못하나, 그 나뉨 역시 마음의 존망(存亡)의 사이를 넘지 못한다.


이제 외암에게 있어서 ‘혼명미오’한 ‘불선’은 ‘자재지악’(自在之惡)으로 존재하는 별도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본체에 따르는 ‘존망’의 사이를 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고’(亡) ‘어지럽게 치달리는’(馳鶩) ‘혼명미오’의 ‘불선’일지라도 마음을 ‘보존하여’(存) 한 순간의 본심을 세우기만 한다면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미발한 심체의 본래적 ‘순선’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비록 천하의 지극히 못된 악의 기질일지라도 마침내 적연(寂然)한 미발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마음의 본체는 이미 ‘순선’하다”라고 못박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외암이 지향하고자 하는 도덕규범의 자율적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즉, 그의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가 작용하지 않는 ‘순선’한 것으로서 선악미오(善惡美惡)의 가지런하지 못한 일체의 현상적 차별을 벗어나 그것들을 ‘주재’하는 것이다. 또한 ‘혼명미오’한 ‘불선’도 마음의 본체에 존재하는 별도의 그 무엇이 아니라 본심에 따르는 ‘존망’으로 귀속되어진다. 이로부터, 외암의 ‘미발심체본선론’은 선한 마음의 본체를 보존하여 청탁한 기질을 ‘주재’하기만 하면 그 누구라도 선을 향한 도덕적 행위가 가능함을 나타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개체 밖에서 강제로 명령되는 것이 아닌 마음의 본체에서 발원하는 도덕규범의 자율적 가능성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2. 남당의 객관적 도덕규범의 필요성

호락논쟁에서 남당은 미발시 마음의 본체는 선(善)과 악(惡)의 가능성이 공재(共在)한다는 이른바 ‘미발심체유선악’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적어도 형식논리상 모순률(矛盾律)에 저촉된다고 할 수 있다. 미발시 마음의 본체라는 동일한 대상은 동일한 순간에 선과 악 가운데 어느 하나로 언명되어야 하지 서로 모순되는 성질로 동시에 언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남당은 미발을 지각(知覺)과 관련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미묘한 말을 하게 된다.


생각건대 미발 전의 기상(氣像)과 정의(情意)의 위치와 구분은 과연 어떠한가? 만약 어두워 지각함이 없는 것을 미발이라고 한다면, 어두워 지각함이 없는 것은 곧 어두운 기가 작용(用事)하여 그 허명의 본체를 잃어버린 것으로 미발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지각한 바가 있는 것을 미발이라고 한다면, 지각한 바에 있는 것에 간섭되자마자 곧 이미 이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니 저 지극히 고요한 본체도 또한 미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즉 반드시 지극히 비어있고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서 단지 능지능각(能知能覺)할 수 있는 존재만이 있고, 소지소각(所知所覺)하는 일이 없는 것을 비로소 미발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남당은 미발을 ‘능지능각’하는 것만이 있고 ‘소지소각’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지각하는 바의 일이 없이 지극히 허정(虛靜)한 가운데 다만 지각할 수 있는 능력만이 존재하는 잠세태(潛勢態)로 미발을 규정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러한 규정은 매우 미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질의 속성(Attribute)인 지각을 ‘잠세태’로 미발에 내재시키면서 동시에 미발이라는 용어 자체를 발생시킨 󰡔중용󰡕의 원래 맥락인 천하의 대본(大本)을 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남당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미발 전의 기는 비록 청탁수박의 부제(不齊)가 있지만 사물이 이르지 않아 사려(思慮)가 싹트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기가 작용하지 않아 담연허명(澹然虛明)할 뿐이다. 즉, 담연허명한 가운데 천명(天命)의 온전한 본체는 가리운바가 없고 치우치거나 기울어진 바도 없으며, 정정당당하게 우뚝 중(中)에 서 있으니 [그것을] 이른바 ‘중’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청탁수박한 기를 겸지(兼指)한다면 [그것은] 기질지성이 되어 ‘중’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중’은 성(性)의 본체이고 부중(不中)이란 ‘성’의 본체가 아니므로 비록 기를 겸하여 말함으로써 리기불리(理氣不離)의 묘(妙)함을 보지만, 또한 ‘성’의 본체를 단지(單指)하여 ‘중’이 되는 것에 방해되지 않는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당은 미발지중(未發之中)을 바깥 사물에 감응(感應)되지 않아 아직 사려가 싹트지 않은 ‘담연허명’한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때에 ‘미발지중’은 청탁수박한 기질을 겸지(兼指)한 기질지성이 아니라 ‘성’의 본체를 단지(單指)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미발지중’이란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로 나아가 천명(天命)의 본체를 직지(直指)하는 것으로 기를 섞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남당은 미발에 기를 섞지 않음으로써 󰡔중용󰡕의 원래 문맥에서 말하는 ‘천명’의 온전한 본체인 ‘미발지중’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를 섞지 않고 말한다는 ‘단지’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단지’란 리기혼윤무간(理氣混淪無間)에서 기를 겸(兼)하여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것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미발 전의 리는 기 속에 갖추어진 것(未發之前, 理具氣中)이기 때문에, 미발의 상태는 기불용사(氣不用事)로서 비록 작용하는 것은 않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기질이 ‘잠세태’로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당은 ‘머무른다’(寓)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미발에 존재하는 기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미발 전의 이른바 본연지성은 그 머무르는 곳이 없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머무르는 곳이 있다고 할 것인가? 머무르는 곳이 없으면서 홀로 존재한다고 그와 같은 괴상한 말은 경전에서 보지 못한 바이다. 머물러 있는 곳이 있어서 비로소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그 머물러 있는 기를 겸(兼)하여 기질지성이라고 이르는 것이 어찌 안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남당은 ‘잠세태’로서 미발에 머무르는 기질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어떠한 이유로 미발에 기질을 굳이 개입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사실, 성리학적 논의에서 미발에 기질을 섞는다는 것은 󰡔중용󰡕의 원래 문맥을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미발에 잡박(雜駁)한 기질이 섞이게 되면 아무래도 그것은 󰡔중용󰡕의 ‘미발지중’으로서 천하의 대본이 될 자격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당은 미발에 기질을 개입시키는 의도적 행위로서 미발기질변(未發氣質辨)이라는 용어를 호락논쟁 내내 계속하여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만한 발언을 하게 된다.


정(情)의 선과 악은 성(性)에서 발현된 것 아님이 없다. 다만, 기질에 청탁(淸濁)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 감응(感應)하는 바에 사(邪)와 정(正)이 있어 그 발현함에 선과 악이 있을 뿐이다. 만약 정(情)의 선한 것은 성(性)에서 발현되고 악한 것은 단지 외감(外感)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성’ 밖에 [어떤] 물(物)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당은 마음의 작용인 정(情)을 바탕으로 악이 외물(外物)이 아닌 기질지성으로서의 성(性)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미발에 기질을 섞으려는 그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즉, 남당은 기질지성이 머물러 있는 미발시 마음의 본체는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질의 청탁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의 ‘출입이 일정치 않아’(出入無時) ‘그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는’(莫知其鄕)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당은 기질이 섞인 마음을 선의 근본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이단(異端)의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미발로서] 마음의 허령(虛靈)한 질(質)을 순선(純善)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로 심즉불(心卽佛)의 견해이며, 정자(程子)가 꺼리는 바의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 배움인 것이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남당이 지향하고자 하는 객관적 도덕규범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즉, 그의 미발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청탁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서 결코 선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발시 마음의 본체일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질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악으로 드러날 가능성을 신명(神明)이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남당의 ‘미발심체유선악’은 탁박(濁駁)한 기질에 따른 망령된 행위를 규제할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에서 발원하는 주관적 도덕규범이 아닌 규구(規矩)와 같이 개체 밖에서 그 행위를 규율할 수 있는 객관적 도덕규범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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