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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스크랩]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 왕양명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 왕양명


1. 말 못하는 아이

왕양명(王陽明:1472~1528)은 명(明)나라 헌종(憲宗) 8년, 절강성(浙江省) 여요(餘姚)에서 태어났다. 중국 전통에서 성현의 어린 시절은 흔히 아름답게 채색되기 마련이지만, 양명의 경우는 정반대다. 기록에 따르면 양명은 어린 시절 약간 덜떨어진 아이였던 듯싶다. 무려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말을 못했다고 하니 말이다. 뼈대있는 데다가 아버지는 장원급제로 관직에 나갈 정도의 가문에서 양명의 출현은 집안의 큰 스트레스거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양명은 지진아였을 뿐 저능아는 아니었다. 처음의 발달이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운(雲)이었는데, 이는 ‘신선이 구름 속에서 나타나 하늘의 선물이라며 양명을 건네주었다’는 할머니의 태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말이 너무 늦자 걱정이 된 할아버지는 한 떠돌이 중의 충고를 듣고 양명의 이름을 “사람다움을 지킨다”는 뜻의 ‘수인(守仁)’으로 바꾼다. 이 때부터 양명은 ‘신동(神童)’으로 탈바꿈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트이더니 어린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시(詩)적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사실인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름을 ‘수인(守仁)’으로 바꾸자마자 천재성이 드러났다는 이 이야기는 양명의 삶 전체를 요약해 보여주는 듯 하다. 그는 이름처럼 평생 세속적인 출세보다는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하고 고민했으니 말이다.


2. 나를 미치게 했던 다섯 가지 일

1481년, 열 살이 되던 해, 양명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관직길에 나서는 아버지를 경사(京師: 지금의 북경)로 이사 가게 된다. 신분의 구분이 확실했던 시절, 사대부(士大夫)들은 관직 진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관계로 나가는 가장 정당한 방법은 과거(科擧) 시험에 드는 것이었고, 과거 시험 과목은 주로 유학에 대한 이해와 시작(詩作) 능력이었다.

사대부 집안의 장남인 양명에게도 주어진 최대의 과제는 당연히 과거 합격일 것이었다. 그는 여느 사대부집 자제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공맹(孔孟)의 가르침과 한시(漢詩) 쓰는 법을 배웠다. 게다가 그는 시작(詩作)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집안 어른들로부터 아버지를 능가할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입시생’ 양명의 생활은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열한 살 때, 스승이 어느 날 ‘공부의 가장 큰 목적은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이라고 하자 양명은 ‘공부의 목적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고 맞받아 버린다. 어찌 보면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외치는 사춘기 소년의 투덜거림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양명은 어린 나이에 이미 ‘입시 교과’로 굳어져 버린 공맹 사상의 진정한 참 뜻이 ‘사람됨’에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공부만큼이나 병정놀이에도 열심이었다. 골목대장이 되어 아이들에게 깃발을 들게 하고 장군처럼 지휘하며 놀곤 했다. 아버지는 이 모습에 기겁을 하곤 했는데, 당대에 군인이란 ‘전쟁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관직으로 여겨져서 사대부들의 직업으로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양명은 공부만 열심히 했던 ‘범생’은 분명 아니었던 듯싶다. 15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오랑캐 땅을 둘러보며 국경 지방의 혼란을 잠재울 뜻을 품기도 했고, 말 타고 활 쏘는 시합을 해서 그를 얕잡아 보던 환관(宦官)과 장군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기도 했다.

양명이 죽은 후, 한 친구는 그가 평생 다섯 가지 일에 탐닉했었다(五溺)고 회고했다. 다섯 가지 일이란 ‘무사적 모험(任俠)’, ‘말 타고 활쏘기(騎射)’, ‘시 쓰기(詩章)’, ‘양생술(神仙)’, ‘불교의 가르침(佛氏)’를 말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정해진 길을 가지 않는다. 양명이 입시 공부와 출세 수단으로 화석처럼 굳어지던 유학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다양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3. 대나무에서 도를 찾다

1489년, 열여덟 살 양명은 학문적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결혼 하고 처가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당대 최고의 학자인 루일제(婁一齊:1422~1491)를 만난 것이다. 루일제를 통해 양명은 명(明)의 국가철학이다시피 한 주희(朱喜:1130~1200)의 사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특히, 자신과 세계의 참모습을 깨달아야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가르침은 젊은 양명의 가슴을 불태웠던 것이다.

양명은 주희에 가르침을 따라 성인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1492년, 스물 한 살의 양명이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기 위해’ 7일간이나 대나무 앞에 정좌하며 탐구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는 대나무의 이치를 깨닫기는커녕 탈진하여 병만 얻었다.
양명은 자신에게는 성인이 될 자질이 없다고 느끼고 실의에 빠진다. 한편으로 이때부터 양명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주자의 이론에 의심을 품기 시작 한다.

지금도 심각하게 좌절한 사람들은 세속과 인연을 끊고 산 속에 파묻혀 버릴까 고민하게 되는데, 양명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가(道家)의 양생술에 깊이 빠져 들게 된 것은 이 무렵부터이니 말이다. 그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도가와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런 다양한 관심에 빠져 있는 동안 과거 공부는 점점 더 소홀해 졌다. 이미 스물한 살에 일찌감치 ‘예비고사’격인 향시(鄕試)에 합격했지만, ‘본고사’인 회시(會試)에 합격한 것은 스물여덟이 되고서였다. 그러나 주희가 과거 시험에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으로 합격하고서도 “관료 따위가 감히 나를 어찌 알랴”하고 대범하게 말했듯이 늦깎이로 관료가 된 양명도 성인군자 같은 말을 잊지 않는다.

"과거에 들지 못함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데도 (이를 다잡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4. 양명동에서의 은거

양명의 첫 관직 자리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무덤 조성 공사 감독 등을 했다고 하는데, ‘피를 토하는 병(아마도 결핵인 듯 싶다)’으로 3년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1502년, 양명은 양명동(陽明洞)에 은거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도인술(導引術:숨쉬는 법, 식사조절, 요가 같은 운동들)에 몰두한다. 아호(雅號)인 양명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평온한 마음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와 도가의 가르침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은둔자의 길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부모님과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랜 고뇌 끝에 부모와 가족에 대한 애정은 인간성의 일부분으로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런 인륜을 끊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불교와 도교의 수행은 양명에게 더 이상 인간적이지도 올바르지도 않았다. 양명은 다시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스승과 제자 등 모든 인간관계를 올바르게 함으로써 성인이 되라는 유가의 가르침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즉, 양명은 세상을 등지지 않고 오히려 적극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5. 나는 성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1504년, 양명은 관직에 복귀하지만 이 번에도 양명은 자리에 오래 붙어있지 못했다. 1506년, 어린 황제에게 환관의 횡포를 탄원하던 신하들이 감옥에 갇히자 양명은 이들을 구하고자 우두머리격인 유근(劉瑾)의 파면을 상소했다가 오히려 장형 40대를 맞고 좌천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북경에서 5,000Km나 떨어진 용장(龍場)이라는 곳에 역승(驛丞)이라는 하찮은 직위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당시 용장은 땅 속에 굴을 파고 짐승 같은 생활을 하던 야만족의 땅이었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 가시덤불을 끊어 울타리를 만들고 갈대로 움막을 지어 생활해야 했다.

문명세계에서 지녔던 명예와 직위, 재산 등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 양명은 자신의 내면으로 관심을 돌린다. 용강산(勇剛山) 자락에 굴을 파 놓고 밤낮으로 정좌하며 도를 닦았다. 어느 날 새벽, 양명은 큰 깨달음(大悟)에 도달한다. 젊은 시절 자신의 최대 고민거리였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참 뜻을 깨우쳐 안 것이다.

주희에게 있어 ‘격물치지’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세상의 이치를 밝게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먼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알아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양명은 성인이 되기 위해 세상에 대한 이치를 탐구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고 악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선한마음, ‘양지(良知)’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명은 이제 “나는 성인이 되기에 충분하다.”라고 선언한다.

충효와 우애 같은 삶의 이치는 외부 세계에 있지 않다. 짐승에게 도리를 알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덕적 가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있다. 때문에 양명은 ‘나의 마음이 곧 이치이다.(心卽理)’라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마음을 올바로 다잡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선한 성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사로운 욕심(私慾) 때문에 착한 본성대로 살고 있지 못할 뿐이다. ‘거울에 낀 때를 벗기듯’ 부단히 노력해서(誠意) 욕심을 없애면 우리는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격물’은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부단히 바로 잡는다는 의미이다.

“...마음에 인욕(人慾:사사로운 욕구)이 없고 순전히 천리(天理:타고난 선한 마음)라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이 있으면 저절로 부모의 추위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곧 저절로 가서 따뜻하게 해드릴 도리를 강구하려고 할 것이며, 여름에 자연히 부모의 더위를 생각하고 곧 저절로 가서 시원하게 해드릴 도리를 강구하려고 할 것이다....”


6. 산 속의 적보다 마음 속 적이 더 이기기 어렵다

1509년, 그를 탄핵했던 유근이 병으로 죽자, 서른여덟 살 양명은 다시 중앙 관직에 복귀한다. 유학의 성인(聖人)이란 황야에서 홀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아니다. 성인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바람직한 삶을 모색하는 가운데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깨달음이 있은 직후 제자들에게 정좌(正坐:바르게 앉아서 묵상함)를 수행방법으로 강조했던 적이 있지만, 양명에게도 진정한 깨달음의 길은 혼자서 은둔하며 도를 닦는 것이 아니었다. 유학자에게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親民)’도 수양의 일부이다.

때는 명(明)의 국운이 약해지고 기강이 무너져가던 시기, 각지에서 반란과 폭동이 일어났다. 이 때부터 어린 시절부터 갈고 닦았던 양명의 군사적 지식은 빛을 발한다. 기습과 신속한 후퇴에 바탕한 ‘유격전’이 그의 특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전쟁광(狂)은 아니었다. 최고의 전과를 올렸을 때도 그는 “병(兵)은 흉기이니 꼭 필요한 곳에 써야 한다.”라고 담담히 말할 뿐이었다. 가급적이면 싸우지 않고 설득하여 이기는 방법을 택했고, 그 결과 많은 백성들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양명은 로마의 황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끊임없이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과 수양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는 “산 중에 적은 이기기 쉬우나, 마음의 적은 없애기 매우 어렵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마음공부를 통해 부단히 성인이 되기 위해 나아가는 것, 이 것이 양명이 평생 추구했던 화두였던 것이다.



7.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1528년, 묘(苗)족의 반란을 설득을 통해 ‘화살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진압한 양명은 귀경하던 도중 숨을 거둔다. 마지막 말은 “내 마음에 밝은 빛이 가득 차 있다. 이제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였다고 한다.

왕양명은 ‘유학의 대중화’를 이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에 있어 유학은 ‘지도자들의 철학’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바람직한 관계를 위한 마음가짐과 예의는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관리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기본 소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학이 공식적인 ‘국가철학’, 즉 관학(官學)으로 굳어지자 공맹의 가르침은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만의 철학’이 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즉, 공맹의 가르침을 공부하여 충효가 무엇인지, 우애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성인이어서 ‘우매한’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다는 식의 권력 정당화 이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양명은 인간은 모두 양지(良知)라는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착하고 올바르게 반성하는 자세로 행동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글월께나 공부한 사대부만이 아니라 농부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시대에 양명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심하게 탄압받았다. 농부도 성인이 될 수 있다면, 사대부들이 왜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양명의 진의가 어떻던지 간에 사회적인 파장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은 국가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위험한 혁명 사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시대에도 양명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양명의 사상은 고루하게 뻔한 도덕윤리나 내뱉는 것으로 여겨져서 생명력을 잃어가는 유학 사상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즉, 양명의 사상은 공맹의 가르침을 모든 이들을 위한 ‘생활 속의 수양 철학’으로 대중화 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인 것이다.

양명의 종지(宗志)인 치양지(致良知)는 “학식이나 권위에 기대어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반성하며 성의를 다하여 행동함으로써 본래의 선한 마음을 회복하여 올바른 삶을 살려는 자세”를 말한다. 양명은 수많은 세월 동안 관료들의 철학으로 화석화된 유학 본래의 ‘생활 개선 철학’적인 측면을 다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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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복(서강대 철학과 박사과정, 중동고 철학교사)가 작성한 이 글은 "고교독서평설(지학사)" 2003년 2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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