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이야기

[스크랩] 인간의 생명과 정신/김준연 (3)

5.이념화의 작용과 승화

인간의 정신이 세계 개방성과 자기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결국이념화의 작용이 있다는 것에 귀결된다. 어떤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념과 근원적 현상을 인식하는 것이 된다. 지각한다는 것도 역시 이념으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질을 지각하는 작용 다시 말해서 본질직관의 작용은 이념화의 작용인 것이다. "이념화는 우리가 하는 관찰의 도수(度數)에서 또 지능이 하는 귀납적인 추측에서 독립하여 세계의 본질적 성질과 본질적 구조 형식을 그것들이 해당하는 본질 영역의 각 한 실례에서 동시에 파악함을 의미한다."30) 이리하여 우리가 얻은 지식은 그것이 비록 한 실례에서 얻어졌더라도 귀속하는 모든 가능한 사물에 대해 무한히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쉘러는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인 차별을 확인하기 위해 인간에게 순수한 본질지(Wesenwissen)를 인식하는 능력, 즉 본질직관을 승인한다. 본질지에 대한 물음은 모든 현실성의 관계가 괄호 안에 넣어질 때 비로소 일어난다. 이렇게 본질직관에 대한 쉘러의 사상은 후설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본질직관은 형이상학적 인식에 고유한 존재에 대한 근본적 태도이고, 이러한 본질직관은 무엇보다도 필연적으로 하나의 수동적인, 인내하는 생명적 중심과 그 활동성을 잠시 중지하는 태도에 결부되어있다."31) 본질직관은 다시 말해서 형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화의 작용은 기술적인 지능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능의 귀납적 추측에서 독립하여 본질성질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특징을 가진 인간만이 사물을 Dasein으로부터가 아니라 Sosein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사물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본질과 Dasein을 분리하는 능력이 인간 정신의 근본 특징이요, 그 근본 특징이 그 외의 모든 특징의 기초가 된다."32) 인간 정신이 지식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이 선천적인 지식을 획득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화의 작용에 있어서 인간은 사물 즉 세계의 현실 성격을 지양해보는 기술을 수행하게 된다. 본질 파악의 이란 시도와 이런 기술에 있어서 눈에 띄는 구체적 사물계의 껍질이 벗겨져서 본질성의 이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은 이런 시도와 기술의 수행 없이 구체적인 것과 현실재 중에서만 살고 또한 '지금의 여기'에 밀착해 있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동물은 그림으로 그린 주사위와 진짜 주사위를 구별하자 못한다."33)


이렇게 동물은 우연적인 현실 존재에 밀착해 있으나 인간은 이념화 작용을 통해 자기 자신의 비현실화와 현실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다. 인간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요, 생명의 금욕자다. 이러한 정신적 활동으로서의 부정은 인간의 충동력을 정신적 활동에다 순화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순수 의지의 형태에 있어서의 정신만이 억제작용에 의하여 감정충박의 중심을 작용 못하게 할 수 있다.34) 정신의 이념화 작용은 부정의 작용이요, 생명충동의 무력화 작용이며 금욕적인 비현실화 작용이다.


이처럼 인간은 정신의 힘으로 그를 격렬하게 휩싸고 있는 그의 생명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금욕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 결과 생명의 충동적 자극을 억제하고 억압할 수 있다. 동물은 현실에 대해서 긍정만을 할 수 있지만 인간은 '부정할 수 있는 자', 모든 단순한 현실에 대하여 '영원한 반항자'일 수 있다.35) 인간은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이제·여기·이렇게 있음'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하며,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또한 자기 자신의 그때그때의 자기적 현실조차도, 초월할려고 노력하는 영원한 파우스트다.36) 이러한 정신의 부정의 작용은 감각충동의 작용을 억제하기 때문에 정신적 존재인 인간은 충동 억압자가 된다. 정신이 충동을 억압하기 의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은 충동적 에너지를 정신적 활동에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


"정신 자신은 그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원래 전혀 아무런 <노력>도 <힘>도 <활동성>도 없다. 조금이라도 힘과 활동성을 얻고자 한다면, 저 금욕, 저 충동억제, 그리고 이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순화가 부가되어야 한다."37) "정신은 비록 고유의 본질과 법칙을 갖고 있지만 결코 그 어떤 근원적인 자체의 에너지가 없으며, 비록 충동 억제적(이것이 이미 정신적이지만) 의지의 저 부정작용에 의해서 원래 무력한 그리고 다만 일군의 순수 <지향>에 있어서만 존립하는 정신의 활성화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정신이 비로소 <생겨 나오는 것>은 아니다."38) 인간에게는 생명과 정신의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가 조화되어 있다. 정신은 순수이념과 가치를 표상하는 반면 그 자체 아무런 힘도, 에너지도 없다.


쉘러의 "낮은 것이 원래 강력하고 가장 높은 것이 원래 무력하다"39)는 말처럼, 모든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형식은 보다 저차원적인 것에 비할 때 비교적 무력하며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차원적인 것의 힘에 의해서 실현된다. 그런데 정신은 최고의 원리이므로 전혀 무력하다. 그와 반대로 생명은 매우 강력한 힘과 세력을 갖고 있으나 일체의 이념과 가치에 대해서는 맹목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과 생명의 두 대립된 원리가 서로 보완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정신은 생명을 이념화하지만 그러나 정신을 활동시키고 실현시키는 것은 오로지 생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승화과정은 정신에 의한 충동의 조종과 지도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종은 정신적 의지에 의한 충동의 억제와 억제의 해제를 뜻하는 것이며, 지도는 이념과 가치 자체를 충동의 눈 앞에 제시함으로 충동의 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으로 인해 충동이 이념과 가치를 얻게 되고 정신이 힘과 세력을 얻게 되는 승화과정은 사실은 정신에 의해 일으켜지는 것이다. "정신이야말로 그러한 충동 억제를 일으키는 자이다. 즉 이념과 가치에 의해 지도되는 정신적 의지가 이념과 가치에 어긋나는 충동생화의 동기에게 충동행위에 필요한 표상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는 한편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충동에게 이념과 가치에 대한 표상을, 말하자면 유혹 물처럼 눈 앞에 아른거리게 함으로써, 정신에 의해 조종된 의지의 기획을 수행하고 실천하는 일을 하게끔 충동들을 질서잡고 조직화하는 것이다."40) 승화과정을 통해 정신은 힘을 얻고, 생명충동은 정신의 법칙 속으로 즉 이념과 의미의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 승화는 충동 에너지를 정신적 활동에로 전화시키는 작용이다.


이처럼 승화는 결국 '충동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명화'를 의미한다.41) 생명과 정신의 두 대립 원리의 조화와 균형화가 인간화요 인간 형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최고의 승화라고 할 수 있다. 이상적 인간은 그의 모든 최고로 발전된 정신적 및 충동적 성질들과 활동들 간의 최대의 긴장을 최대한으로 조화시킨 인간이다. 즉 자연적 인간과 정신적 인간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도 조화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7.결론

근대 자연과학를 근거로 한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의 주체성을 침탈해가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성, 주체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쉘러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과 달리 정신의 존재이다. 정신은 승화과정을 통해 충동을 억제하고 조화와 균형의 인간으로 되어 간다. '충동의 정신화'와 '정신의 생명화'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승화과정, 즉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해답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주제와 마주칠 때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세계 내 존재이며 결핍의 존재이다. 인간은 남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채우며 창조한다. 정신의 존재이기에 인간은 충동의 힘을 순화하고 승화하며 헌신할 수 있다. 인간은 '사랑이 공동체' 속에서 자기를 회복할 수 있다. 사랑의 공동체는 "무한히 상승하는 하나의 과정"이다.42) 이는 "자아가 아니라 타자가 첫 번째 인간이다"43)라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세계 구성의 원천인 자아가 첫 번째 인간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부각될 때 사랑의 공동체는 가능하다.


후설은 사랑은 타자 속에서 자신을 느끼고 타자 속에서 자신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고양된 방식으로 사랑받는 사람 안에서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지 곁에 이웃하여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안에 살고 있다."44) 주체가 자신을 타자 속에 이전시켜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사랑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상대방의 고통과 기쁨 등을 자신의 아픔이나 기쁨과 같이 느끼는 것이다. 상호주관적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공동체이며 사랑은 서로간의 주체성 이전을 통하여 타자 안에 자신으로 살 수 있을 때 실현된다. 사랑이 주체성의 회복이며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준다. 인간은 식물처럼 생명체이며 동물처럼 본능도 있지만 정신이라는 본질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식물과 다르며 동물과도 구별된다. 그 구별되는 특징은 생명과 정신의 조화, 분열이 아닌 화해, 충동의 부정과 승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은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고양되며 윤리적인 인격체로 존재하게 된다.

출처 : 동양철학 나눔터 - 동인문화원 강의실
글쓴이 : 권경자 원글보기
메모 :